셋. 많이 늙었네요
성문 밖으로 뛰어나간 아리스는 마을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어두운 밤길에 인적이라고는 없었다. 달빛만을 의지한 채 달려 나간 그녀는 마을을 통과하다가 한 남자를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이런 곳에 서 있으면 위험해요!”
돌아선 남자, 그는 슈발트였다.
슈발트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아리스의 신분을 눈치 채고 급히 몸을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길을 막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조금 전에 아는 이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와서 나와 있었을 뿐입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아리스는 어떻게 보면 과장된 듯한 그 모습에 작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화가 나거나 위해를 가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시간에 아는 이를 작별했다?”
거기까지 말하던 아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현신의 전사…… 인가요?”
“아, 아십니까?”
“그를 쫓고 있어요. 그는 어디로 갔지요?”
“영지의 관문을 넘을 거라고 해, 했습니다.”
“미카일 산이군요. 고마워요.”
아리스는 다시 말을 달리려 했다. 슈발트를 지나칠 때 그가 소리쳐 그녀를 멈춰 세웠다.
“자, 잠시만요! 기사님!”
“……아직 정식 기사는 아니에요. 왜 그러시지요?”
“그, 그 남자는 정말로 현신의 전사입니까?”
“확신할 순 없군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죠?”
“현신의 전사……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감옥에서 단독으로 탈출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글쎄요…… 세상에는 실력자들이 많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아리스는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탈주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저도, 그가 현신의 전사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를 붙잡은 다음 명확한 정체를 캐어 보죠.”
이랴!
말을 격려하며 아리스는 슈발트에게서 떠나갔다. 그런 그녀의 뒤를 슈발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아마 오늘 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을을 빠져 나온 아리스는 곧장 방향을 가늠하며 탈주자의 뒤를 쫓았다. 일단 아리스에게는 탈주자를 붙잡을 임무가 있었다.
영주를 붙잡은 이상, 대리 영주를 찾기 전까지는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추격은 밤을 지나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자정 넘어서부터 시작된 추격은 곧 해가 떠오를 즈음에야 겨우 끝이 보이고 있었다. 미카일 산까지는 한 나절이 걸린다고 했던 미켈파 남작의 말이 정답인 듯했다.
저 멀리 말 하나가 시야에 잡혔고, 그 위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자도 확실히 보였다.
아리스는 서둘러 말을 접근했다.
“거기 서세요!”
힘껏 목소리를 높여 명령했으나 탈주자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리스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상대가 현신의 전사든 승마술로 뒤진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탈주자를 따라 잡았다.
“서지 않으면 완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 서세요!”
곧바로 탈주자의 옆으로 따라붙은 그녀는 검을 뽑아 들려 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로 한 병의 유리병이 날아들었다. 아리스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병을 쳐냈다.
화르륵!
허공에서 깨져 나간 약품이 반응을 일으켜 불꽃을 일으켰다.
“와앗!”
예상치 못한 반격에 아리스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틈을 타 탈주자의 말이 속도를 올렸다. 금세 본래의 자세를 되찾은 아리스 역시 다시 그를 뒤쫓았다.
한동안 추격이 이어졌다.
아리스가 악에 받힌 목소리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거기 서! 도망가 봤자 관문 수비대가 버티고 있을 뿐, 당신은 잡힐 수밖에 없어!”
탈주자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여명 전의 어둠 탓에 분간도 되지 않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빛을 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아리스는 검을 뽑아 들었다.
“여기서 멈추면 정상 참작을 해 줄 수도 있어요!”
“전 십여 명을 죽이고 성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정상 참작한다고 하더라도 국법에 따르면 사형 아닙니까?”
“당신이 국법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는 거죠, 탈주자!”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 법의 기초를 세운 것이 바로 접니다!”
대담하게 소리치는 그의 앞으로 높은 산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 가려 흐릿한 선으로만 비치던 미카일 산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오켈라니아 영지와 미켈파 영지의 경계를 이룬 저 산을 넘는 것이 이 탈주자의 목적일 것이다.
“웃기지 말아요! 로츠왈드의 국법은 위대한 건국 영웅이신 현신의 전사가 만든 것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현신의 전사란 소린가요!”
“어차피 믿지 않을 테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탈주자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리스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탈주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붙잡아야 한다. 혼자서 성을 탈주한 실력을 보아할 때 뒤쫓는 상황에서 혼자서 붙잡는 것은 무리다.
아리스는 미카일 산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헛소리, 당신을 절대 놓치지 않겠어요!”
탈주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로지 말을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여 그녀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아리스는 그는 결코 놓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를 마카일 산으로 몰아붙였다.
조금 후 아리스가 바라던 것이 미카일 산에서 발견되었다.
관문 수비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히 미켈파 남작성에서 연락을 받은 것이다. 30년 전의 독립 전쟁에서 현신의 전사가 사용했다는 전서조는, 지금에 와서 단거리의 귀중한 연락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필시 류토가 수비대에 전서조로 연락을 한 것이 틀림없다.
대여섯 개의 불빛이 산을 빠르게 내려와 대로로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비대의 모습이 달빛 속에서 출현했다.
적어도 스무 명은 넘을 것 같은 인원이었다. 그들을 먼저 발견한 것은 탈주자 쪽이었다. 아리스는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검을 뽑은 채 소리쳤다.
“난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 아리스 뤼스필드라고 합니다! 성에서 탈주한 이 자를 붙잡으세요!”
수비대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제히 검을 뽑아 든 것이다. 탈주자가 고개를 쳐들었다. 아리스는 회심의 미소를 목구멍 뒤로 넘기며 수비대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쪽이었다.
“저놈들을 잡아라!”
아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저놈이 아니라 저놈‘들’?
분명한 복수형에 아리스는 목청을 올렸다.
“잠깐! 저 자를 잡아요!”
“네년이구나! 죄수와 짜고 영주님을 음해하려 하다가 순찰대를 모두 죽이고 도망갔다는 순찰대장이!”
정면에서 달려오는 수비대의 외침에 아리스는 눈을 뜬 상태로 굳어 버렸다. 그녀가 굳었든 말든 말은 달렸다. 눈앞에 탈주자의 등이 다가옴을 보고서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내가…… 미켈파 남작을 음해? 순찰대를 모두 죽였다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미처 그녀가 반응하지 못한 사이, 탈주자의 말이 급격히 방향을 꺾었다. 수비대의 돌격과 아리스의 추격 사이에 끼어 있던 형상에서 곧장 대로를 벗어난 것이다.
닦여 있지 않은 평원을 내달려 도망치는 탈주자.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수비대였다.
“일단 저년을 먼저 잡아라! 같은 편이니 저년을 잡으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편이라니! 아리스는 기겁하면서도 판단해야 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여기서 고스란히 잡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그녀가 택할 수 있는 방향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랴!
아리스의 말이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곧장 먼저 사라진 탈주자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쫓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수비대가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대로에서 벗어난 추격은 계속됐다.
평원은 대로를 제외하고는 전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곳곳에 나무와 수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탈주자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내달렸다.
아리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는 이 평원의 길을 모두 꿰뚫고 있는 듯해 보였다.
미카일 산의 아래쪽까지 닿았을 때 이미 둘은 수비대와 충분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관문 수비대라고 해도 언제나 미카일 산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수비해 왔을 뿐 미카일 산 주변 지리에 빠삭한 것은 아니었다.
한참이나 추격이 이어져 동쪽에서 태양이 어슴푸레 떠오를 무렵, 수비대는 산 밑에서 말을 멈췄다.
“젠장! 이것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여기서 흔적이 끊어졌습니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멀리는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앞에는 미카일 산이다! 미카일 산을 지나는 길은 우리밖에 몰라!”
수비대는 저마다 떠들며 일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카일 산을 지나는 대로를 처음 생각해낸 것이 누구인지.
해가 완전히 떠오른 다음에도 그들은 끝끝내 탈주자와 아리스의 발자국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
아리스는 눈앞의 남자를 필사적으로 쫓고 있었다. 이미 해가 떠올라 있었고, 산 밑에 말을 버리고 온 이후로 줄곧 두 다리로 걷고 있었다. 기사수행을 한 덕분에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은 탈주자 쪽이었다.
“괜찮아요?”
땀이 고인 이마를 훔치는 탈주자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걱정해 주는 겁니까? 좀 전까지도 전 당신이 체포하려고 하던 탈주자였습니다. 죄인을 걱정해 주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그, 그렇지만…….”
아리스는 말을 맺지 못했다. 이 남자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어떤 처지에 있는 건지.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산을 오르고만 있는 것이다.
“지쳐 보여서요.”
“지치긴 했습니다. 공부밖에 하지 않아서 등산을 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미연이라면 이 산을 뛰어서라도 올랐을 테지만 전 아닙니다.”
딱딱하게 대꾸하고서 그가 수풀 한중간에서 발을 멈췄다.
“좀 쉬겠습니다.”
그 상태로 나무를 등지고 바닥에 앉는다. 아리스도 잠깐 그를 관찰하다가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내가 당신을 협박하면 어떻게 할 거죠?”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알고 있으리라 사료됩니다만. 당신은 이미 저와 같이 쫓기는 몸입니다. 지금에 와서 저를 붙잡아 관문 수비대에 데리고 간다고 한들 당신의 의심을 풀리지 않으리란 것쯤은 이미 생각하셨을 테죠. 틀렸습니까?”
땀 그득한 얼굴에서도 냉철한 눈빛을 꺼지지 않고 있었다. 아리스는 탈주자의 검은 눈동자를 진중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당신, 누구죠?”
“미켈파 남작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도망친 자입니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님을 잘 알 텐데요. 미켈파 남작성을 도망친 자의 정체를 묻고 있는 거예요.”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제 이름은 강태진. 삼십 년 전 이 나라에서 현신의 전사라고 불렸던 사람입니다.”
……역시. 아리스는 숨을 얕게 골랐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믿지 않아도 딱히 상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제 자신이 다른 무언가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그 태도에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태도로 봐서는 이미 현신의 전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좋아요. 강태진…… 이라는 이름에 그 외모. 일단 동쪽의 나라에서 왔다고 생각은 해 드리지요. 그렇다면 현신의 전사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이죠?”
“당신이 뤼스필드가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와 똑같습니다.”
“뭐라고요?”
“삼십 년이 지났으니 이미 쉰을 넘은 나이일 거라고 생각되는데…… 하이듀크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아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태진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당신이 누군들 간에,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 로츠왈드 왕국의 제일 기사이며 삼십 년 전 독립 전쟁에서 기사단을 이끌고 숱한 공적을 세운 지휘관이기도 합니다. 왕국이 건국된 이후에는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역을 맡아 왕국의 기초를 세웠으리라고 짐작합니다만, 그 전에 이 나라를 떠났기 때문에 짐작 이상의 결과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태진은 검이 목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어디까지나 냉철하게 아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현 순찰대장이라면 분명히 하이듀크의 후계자이며 뤼스필드가의 자식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라고 부르셨지요?”
아리스는 검을 내리지 않고 말했다.
“당신…… 정말 정체가 뭐죠?”
“당신의 아버지에게 그 숱한 작전을 지시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당시 독립군의 총사인 현신의 전사겠지요.”
“이미 답을 알고 있군요. 인정하기 싫을 뿐인 거겠죠. 아리스, 당신은.”
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올라오는 검을 흘끔 쳐다볼 뿐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은 채 무심히 몸을 돌렸다.
“뭐,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뭐죠?”
“곧 수비대의 수색이 강화될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 혼자서 이 산을 살아서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난 이대로 관문을 넘어 수도로 향할 것이고, 당신도 누명을 풀기 위해서는 수도로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겁니다.”
“……따라오라는 건가요? 당신이라면 이 산을 무사히 넘을 수 있다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자신 있는 태도군요.”
“사실을 말하는 데 자신감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태진은 고개를 돌려 아리스를 직시했다.
“따라오겠습니까?”
“……왜 나를 도와주려는 거죠?”
아리스는 검을 겨눈 채 숨을 골랐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왠지 모르게 짐작이 갔다. 태진은 그 짐작 그대로의 답을 그녀에게 되돌려 주었다.
“당신은 제 친구의 자식입니다.”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치고는 기묘했지만, 아리스는 결국 검을 내렸다.
“어디로 갈 거죠?”
태진은 예상했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산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미카일 산의 주인에게로.”
***
“정말…… 괜찮아요?”
“뭐가 말입니까?”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에요, 당신.”
앞서 가던 태진은 아리스를 슬쩍 쳐다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다시 앞을 돌아보고 낮게 대꾸한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괜히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아리스는 고개를 돌려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걱정대로 사실 태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태진은 건강한 편이긴 하지만,
성을 뒤집어 놓고.
반나절 가까이 말을 달리고.
또 쉬지도 않고 이런 산을 길도 없이 오르고 있다면, 일반인 누구라도 체력적인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잠깐만 쉬겠습니다.”
멈춰 서서 적당한 곳에 앉는 태진을 뒤따라 아리스도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쉬었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리다가 왜 그가 이곳에서 멈춰 섰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신, 혹시 이 산의 지리를 다 알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일단 기억에 남은 증거들을 가지고 길을 찾을 뿐입니다.”
“대단하네요. 몇 번이나 쉬었던 장소가 이렇게 훌륭히 엄폐된 공간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이 남자의 통찰력은 대단했다. 과연 현신의 전사인지는 제쳐 두고서 믿음이 가는 남자였다.
어느새 다시 해가 지고 있었다. 산이란 더욱 해가 빨리 떨어지기 마련이다.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한기가 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태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시간만 지나면 해가 떨어질 것이다.
그전까지 어떻게든 미카일 산의 주인을 찾아내야 하는데.
아리스를 대놓고 관찰한다. 그 눈빛에 그녀가 움칠거렸지만 태진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리스, 당신의 검술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름을 함부로 부르시는군요.”
“친구의 딸이면 제 딸도 됩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것치곤 말투는 전혀 딸로 대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제 버릇입니다. 검술 실력은 어떻습니까?”
태진의 끈질긴 취조에 아리스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아버지의 발끝에도 따르지 못해요. 아버지는 왕국의 제일 기사시니까요.”
“그렇겠지요. 한 번에 몇 명의 정식 기사를 상대하실 수 있으십니까?”
“……실전은 잘 모르겠네요. 대련이라면 다섯 명까지 상대해 봤습니다.”
“그렇군요.”
태진이 묵묵히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왜 물어보는 거죠?”
“해가 떨어질 때까지 그들을 찾지 못하면 산을 헤매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비대와의 전투도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전력을 파악해 두려는 겁니다.”
“왠지 자신 있는 말투네요. 그러는 그쪽은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죠?”
“저는 검술 따위 할 줄 모릅니다.”
아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어떻게 성에서 탈출한 거죠?”
“검술을 하지 못해도 탈출은 충분합니다.”
태진은 메고 있던 가방을 살짝 보여 줬다. 아리스는 대로에서의 추격 중 그가 자신에게 던졌던 병들이 들어 있는 가방을 보고 이해했다. 과연 그가 현신의 전사라고 한다면 그 정도 탈출은 충분할 것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태진은 다시 일어섰다. 아리스도 다시 그를 뒤따라 움직였다.
태진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끔은 멈춰 서서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망설임과는 관계가 없는 행동이었다. 진로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의 생김새와 수풀의 흐트러짐. 바람의 궤도. 그런 세세한 것에서 모든 정보를 파악해 나가면서 그는 아리스를 이끌었다.
그녀는 태진의 등만을 보며 걷고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죄인에게 이끌려서는?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당당한 태도를 보면 저절로 이끌리고 만다.
강태진이라는 남자는 기묘한 존재감이 있었다.
그가 잠깐 멈춰 섰다. 수풀이 우거진 위치였다. 항상 하듯이 나무를 쓰다듬으며 생김새를 파악하고 발밑을 살피기도 한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당신은 지금 어떻게 길을 찾고 있는 거죠?”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기억?”
“삼십 년 전, 전 이 산을 넘은 적이 있습니다. 그땐 저 혼자가 아니라 팰리슈와 함께 그들을 찾아 헤맸었습니다.”
“그들?”
“미타일 산의 원주인. 산적들입니다.”
미카일의 산적. 아리스는 정보부에서 보았던 자료에서 그 이름을 떠올렸다.
30년 전, 건국왕을 도운 공적을 인정하여 국왕은 미카일의 산적들에게 산 일대의 자치령을 약속했다. 그 이후로 30년. 미켈파 남작이 미카일 산의 원주인임을 주장하고 나서 지금은 좀 관계가 복잡해졌지만, 어쨌든 지금도 국법상으로 미카일의 주인은 그 산적들이었다.
그런 설명들을 떠올리다 아리스는 불현듯 깨달았다.
“잠깐만요…… 팰리슈라고 함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국왕 노릇을 하고 있을 제 친구입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대답 때문에 아리스는 낯빛이 파래졌다.
“다, 당신!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그것보다 목소리 좀 낮춰 주시겠습니까? 수비대에게 들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체력이 많이 쇠퇴된 지금이라면 도망치는 것도 힘들다. 태진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만 있었다.
아리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아버지를 친구라고 하는 것은, 네, 확인하면 되니까 넘어간다고 쳐요. 하지만 국왕 폐하를 친구라고 하다니……!”
“바운스에는 삼십 년 동안 못 보면 친구가 아니게 되는 풍습이라도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 풍습은!”
“그럼 친구입니다. 팰리슈와 전.”
반박의 여지도 없이 단언하는 태진의 태도에 아리스는 드디어 기가 막혔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무뢰한 자가 있을 수 있는 걸까.
정보부 소속인 자신도 올려다보기 힘든 분이 곧 국왕이다. 그런 폐하를 아무렇지 않게 친구라고 하다니. 국왕이 인정한 친구는 현신의 전사와 아리스의 아버지 하이듀크 뤼스필드밖에 없다.
아리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진짜, 정말 현신의 전사라고……?
그녀의 고민을 깨끗이 무시한 태진은 발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다. 이틀 정도 지난 발자국이 이쪽 방향으로 나 있는 걸 보니 제대로 찾아온 듯싶습니다.”
“……발자국?”
“예. 이런 깊은 산중에 수비대가 등산 삼아 올 리도 없고, 미카일의 산적들은 자신들만이 아는 길로만 움직입니다. 이 발자국은 산적들의 것입니다.”
태진은 자신이 가리킨 방향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아리스는 뒤따라가며 태진이 가리킨 곳에서 발자국을 발견하려 애썼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수풀이 우거지고 낙엽이고 풀들이 가득 자라난 곳에서 이틀 지난 발자국을 발견할 수가 있는 걸까? 설마, 이 남자. 나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은 미카일 산적들과 한패로 순찰대장인 나를 인질로 잡아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독립 전쟁 이후 자치령을 인정받은 산적들은 산 깊숙한 곳에서 아무런 사건도 일으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에 와서 왕국에 누를 끼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 남자가 이끄는 길이 옳은 길이라는 걸까?
아리스는 곧 그에게 묻지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의 말을 믿는다고 쳐요. 그렇다면 삼십 년 전에 국왕 폐하와 당신은 산적들을 만난 적이 있다는 건가요?”
“아리스. 당신이 기사로서 충분히 역사 교육을 받았다면 알고 있을 겁니다. 처음 만난 현신의 전사와 국왕이 어떤 일을 했는지.”
“……당시 성행되고 있던 노예 시장에 끌려간 투신의 전사를 산적들과 합세하여 구출했었죠. 그 공적으로 자치령을 인정받았고요.”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냉철하게 대꾸하고서 태진은 앞을 향했다. 아리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둘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산을 헤맸다. 아니, 태진이 정확한 진로를 이끌고 있었기에 헤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길을 모르는 아리스로서는 그저 숲을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 느낌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거의 떨어져 어둠이 사방을 물들여 있었다.
“어둡군요.”
“어쩔 수 없습니다. 산채에 도착하려면 아직 더 멀었습니다.”
태진은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나뭇가지를 모아 달라고 했다. 아리스와 같이 나뭇가지로 횃불을 만들어 비스트시곤을 이용하여 불을 붙이자, 해는 이윽고 서산 너머로 떨어졌다. 다시 밤이 찾아온 것이다.
횃불에 의지하여 두 사람은 다시 숲을 나아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 해가 떨어진 후 태진의 시간 감각으로 30분쯤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태진이 멈춰 섰다. 아리스를 제지하는 손짓, 아리스도 그 분위기를 알아채고 검에 손을 올렸다.
“수비대인가요?”
“아니, 수비대치고는 움직임에 소음이 적습니다.”
태진은 감각을 확장했다. 청각에 집중된 여러 정보들이 물밀듯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것들을 걸러낸 후 최종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판단해 낸다.
“산적들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그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예? 그,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거리는 약 이십 미터 안팎. 신중하게 이쪽의 반응을 살피고 있습니다. 섣불리 검을 꺼내지 말아 주십시오.”
아리스의 행동을 미리 막고서 태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거칠어져 있던 호흡을 본래대로 되돌리고 횃불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아리스가 기묘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태진은 계속해서 횃불을 움직였다. 아래위로, 때로는 원을 그리고, 갑자기 옆으로 흔들기도 한다.
뭐하는 거지? 아리스가 그런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문득 발견했다. 태진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 그곳에서 하나의 불꽃이 나타나 있었다.
아리스는 신중하게 그 불꽃을 주시한다. 그 불꽃도 태진처럼 불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에야 아리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 챘다.
“암호…… 인가요?”
“그렇습니다. 예부터 미카일의 산적들이 사용했던 횃불 암호입니다. 사방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때 평범한 횃불을 가장한 채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아리스에게 설명하면서도 태진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횃불이 멎었다. 태진은 팔이 뻐근하다는 듯 횃불을 조금 낮게 들었다. 숨을 몰아쉬며 어느 정도 긴장을 풀었을 때 주변의 수풀이 부스스 흔들렸다. 아리스는 다시 긴장하며 검을 붙잡았다.
그 손을 태진이 제지했을 때 수풀 뒤에서 그들이 나타났다.
미카일의 산적들.
네 명의 산적들 중 얼굴 중앙으로 커다란 상처가 나 있는 남자가 태진과 아리스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태진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네놈인가? 우리의 암호를 알고 있는 자가.”
“그렇습니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쓰이고 있어서 다행이군요.”
“네놈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으르렁대는 음성으로 물어오는 산적. 태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은 나중에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전에, 당신들의 두목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뭐?”
“아니면 그 대를 이었을 아들도 상관없습니다. 둘 중 누구에게라도 동쪽의 나라에서 강태진이 만나러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산적들이 모두 흉악한 얼굴로 변했다. 아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강태진이라는 이 남자는, 주변 상황을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사의 본능으로 산적들의 반응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일단 산적들은 직접 공격해 오지 않았다. 한 번 더 입을 연다.
“네놈이 말하는 그 두목은 탄게 님을 말하는 거냐?”
“아니면 탄기엔이 그 대를 잇고 있을 거라고 사료됩니다만, 틀립니까?”
이번에는 기묘하게 표정이 변한다. 화가 난 듯 어이가 없는 듯, 자신들도 혼란스러워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한 명의 남자가 네 명의 산적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리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정체가 뭐든 배짱만큼은 왕국의 기사들을 상회하고 있었다.
한참 후 산적들은 수군거림을 끝내고 태진과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따라와라. 안내해 주겠다.”
“이런 산속에 마을이 있다니…… 놀랍군요. 관문을 넘을 때에도 보지 못한 곳이에요.”
“관문은 미카일 산의 동쪽, 그리고 이곳은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비대조차 이곳의 위치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산 하나에 두 집단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미카일 산이 대책 없이 넓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산적들이 안내한 그들의 산채는 아리스는 짐작도 못한 깊은 산중에 있었다. 아마 산적들이라면 모를 계곡 안쪽에 평지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곳에서 산적들은 밭을 꾸리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유일한 통로인 계곡에서 엄중한 경계를 받은 후 통과한 다음 산적들은 곧장 태진과 아리스를 그들의 두목에게로 안내했다.
산채에서 가장 큰 집 앞에서 산적들이 멈춰 섰다. 불이 켜진 집안으로 들어간 산적 하나가 곧 태진과 아리스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안에는 술잔을 기울이던 초로의 남자가 있었다. 나이로 따지면 60대는 됐을 법하지만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존재감이나 생기는 아직 40대에도 필적할 만한 기력이었다.
태진은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탄게.”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술잔만을 기울이고 있던 남자가 번쩍 눈을 들었다.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이 걸린 얼굴을 보며 태진은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저에게는 이 년, 당신에게는 삼십 년만이군요. 많이 늙었네요, 탄게.”
“……강태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탄게. 태진은 여유롭게 웃으며 아리스를 옆자리에 앉혔다.
“인사하십시오. 이 남자가 미카일 산적의 두목인 탄게입니다. 성은 없으니 그냥 탄게라고 부르면 될 겁니다. 혹시 제가 이곳에 없던 동안 성이 생겼습니까?”
다시 질문 당한 탄게는 술잔을 깨부술 듯이 움켜쥐고 소리쳤다.
“어떻게 이 산에 나타난 게냐! 너, 넌! 삼십 년 전에 너의 나라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본의 아니게 이렇게 다시 왔습니다. 그나저나 당신의 부하가 불안해하고 있는데 돌려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탄게는 그제야 태진과 아리스를 데려온 부하에게 눈을 돌렸다. 손짓으로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한 후 그도 의자에 도로 앉는다.
“돌아왔다니…… 다시 무슨 전쟁을 벌이려는 게냐?”
“제가 독립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팰로슈는 과거의 로츠왈드 왕국을 되살리려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전 친구로서 그것을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나…….”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술을 연거푸 세 잔을 들이킨 다음 탄게는 태진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것은 정말 눈앞의 남자가 30년 전의 ‘그’와 동일인물인지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맞습니다. 삼십 년 전, 당신의 힘을 빌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을 습격했던 사람.”
“후에 현신의 전사라고 불리며 로츠왈드 독립 전쟁을 지배했었지.”
“그런 말을 과거를 아는 사람에게서 면전에서 들으니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군요.”
태진의 옆에 앉아 있던 아리스는 태진의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자신에게 던지던 말보다 조금 더 친근함이 느껴졌다. 정말 이 산적 두목이라는 자와 친분이 있다는 걸까?
“……술기운의 환각이 아니라면,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건가.”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옛 친구조차 믿어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갈 길이 너무나 험난할 겁니다.”
“앞으로 갈 길? 수도로 갈 생각인 건가, 태진.”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이미 아실 거라 생각하지만 저와 아리스는 관문 수비대에 쫓기고 있습니다. 관문을 정당하게 통과할 수 없으니 당신에게 힘을 빌려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성은 누군가?”
갑자기 지목당한 아리스는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리스 뤼스필드라고 합니다.”
“뤼스필드 가문이셨군. 반갑네, 내 이름은 들었다시피 탄게. 순찰대장에게 알려 드릴 성이 없으니 그냥 이름으로만 불러주시게나.”
“저를 아세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찰대장직에 올랐다고 명성이 대단하더군. 이런 산속에 처박혀 있지만 미켈파 영지과 적당한 교류는 유지하고 있으니 그 정도 소식은 들을 수 있다오. 축하드리지.”
“축하는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은 쫓기는 몸이니…….”
“그러고 보니 쫓기다니?”
태진은 그 점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후 탄게의 표정은 대번에 심각해졌다.
“상황이 안 좋군. 그러게 왜 그렇게 당당히 자신의 정체를 밝힌 건가?”
“믿든 말든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미켈파 남작의 본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 잘못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하긴…… 예전의 현신의 전사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긴 하지. 삼십 년의 공백이 있어서 그런 겐가?”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기준으로는 2년이지만. 속으로만 덧붙이고 태진은 본론을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온 겁니다, 탄게. 우리는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도와달라?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나?”
“미카일 산을 넘어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관문이 아니더라도 산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죠.”
“지금 당장 말인가?”
“물론입니다.”
탄게는 다시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거절하겠네.”
“……왜입니까? 이유는 알고 싶습니다.”
“내가 거절하겠다는 건 그게 아냐.”
“……예?”
아리스도 탄게를 다시 쳐다보았다. 두목의 정석 같은 그 얼굴에서 그녀는 미소를 찾아냈다.
“태진, 넌 이미 많이 지쳐 있다. 분명히 이틀 가까이 한숨도 못자고 이곳에 도달했을 테지. 그 몸으로 이 산을 지난다는 건 무리다.”
“……?”
“방을 마련해 주지. 쉬어라, 수비대도 이곳을 쉽게 찾아내지는 못한다. 밖에서는 나의 부하들이 그들을 교란하고 있으니. 푹 쉰 다음 그리고 나서 출발하도록 해.”
그는 웃음을 띤 채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왔다. 같이 술이라도 마실 기회는 내게 줘야 될 것 아닌가?”
태진도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합니다, 탄게.”
술자리는 태진의 몸 상태를 고려하여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달이 완전히 하늘 위로 떠오르고 산채의 불도 모두 꺼졌을 때쯤 마지막 잔을 비우고 셋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집을 비워 주지. 오늘 밤 난 원래 다른 집에서 선약이 있어서 그곳에서 잘 거네. 이 집의 물건은 마음대로 써도 좋아.”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됐어. 이곳의 자치령은 태진, 너 때문에 받아낸 것과 다름없다. 보은이라고 생각해.”
아리스는 미카일 산적의 자치권이 어떻게 획득되었는지를 떠올렸다. 과연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친밀도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겉모습으로는 40살의 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친구였다.
탄게가 집을 떠난 후 아리스는 태진을 마주 보았다. 조금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아직도 태진의 눈빛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멀리서 봐도 그 강렬한 눈빛이 뇌리에서 지지 않을 만큼.
“당신…… 정말 현신의 전사였군요.”
“이제 믿으시는 겁니까.”
“미카일 산적의 두목이라는 자가 이 정도로 대해 주는 걸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네요. 왜 자신이 현신의 전사라고 아무렇지 않게 밝히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알겠군요.”
“말했다시피 믿든 안 믿든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믿음과는 별개로 전 과거 현신의 전사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굳이 숨길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당당하다. 만약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현신의 전사라면 이랬을 거 같다고 아리스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깨달았다. 현신의 전사를 동경하여 왕립 대학교를 다닐 당시 숱하게 그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자신을.
“나, 한 가지 약속할게요.”
“무슨 약속 말입니까?”
“당신과 반드시 수도로 돌아가겠어요. 그리고 현신의 전사가 왕국에 돌아왔다고, 모든 나라에 알리겠어요.”
태진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갸웃했다.
“저한테 반한 겁니까? 곤란합니다. 당신은 제 친구의 딸입니다. 제가 나중에 친구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잖습니까?”
“……농담이에요? 반했다곤 한마디도 안 했어요!”
“물론 농담입니다.”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앉았으니 아리스는 덜컥 가슴이 뛰었다. 역사에 실려 있던 현신의 전사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것조차 지금의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눈앞에 현신의 전사가 있다.
어디까지고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태진은 농담기를 지우고 대답했다.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현신의 전사.”
새롭게 일행이 된 후 두 사람은 일단 방을 나눴다. 탄게의 방을 태진이, 그리고 손님용 방을 아리스가 차지해 피로를 풀며 푹 쉬었다.
태진의 피로는 생각보다 깊은 듯 날이 새고 나서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 앉은 채 깨우러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아리스에게 말끔한 얼굴의 탄게가 돌아왔다.
“태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겐가? 피로가 많이 쌓였나 보군. 예전에도 체력은 그렇게 대단치 않았으니까 그럴 만도 해.”
“깨워야 할까요……?”
“아니, 그냥 냅둬. 저 녀석은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옆에 있지 않으면 결코 쉽게 잠들지 않아. 어차피 출발은 밤에 할 테니까 쉴 수 있을 만큼 쉬게 내버려 두게.”
태진은 잠자는 중에도 감각을 깨워 둔다. 정보가 무한으로 흘러 들어오는 이능 탓에 언제 어느 때고 완벽한 경계 태세가 가능하지만, 그렇다는 건 사실 어느 때고 완전한 휴식을 취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가 된다. 그가 저렇게 곯아떨어진다는 건 미연 정도가 곁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피곤했다는 뜻도 되고, 그만큼 이곳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
“현신의 전사에게서 신뢰받고 있는 거군요, 이 산채는.”
“그렇지. 이곳은 저 녀석 덕분에 만들어진 곳이야. 배신할 수는 없지 않겠소?”
돈 때문이라면 가볍게 배신해 버리는 세상에 비교하자면 이곳은 산적들의 산채지만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 순찰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짧지만 세상의 여러 면을 알게 된 아리스로서는 현신의 전사가 부러웠다. 어떻게든 앞으로 그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 그녀는 지금은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태진이 깨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침대에서 마치 잠깐 눈을 감았다는 듯 눈을 번쩍 떴다.
12시 전후. 일어나자마자 감각을 깨워 시간을 파악해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랜 숙면으로 근육이 풀어져 있었지만 피로의 기색은 없었다. 어제 탄게가 권한 술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볍게 몸을 풀며 태진은 방을 나섰다. 거실에서 아리스가 점심 식사를 할 요량인 듯 탄게와 같이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오, 일어났군. 잠은 잘 잤나?”
“덕분에. 좋은 술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그 술이 피로 회복에는 좋거든. 세상모르게 잠을 자는 사이에 신진대사를 활성화시켜 주지. 네가 발견한 그 약초를 달여서 만든 술이다. 어때?”
“수도로 가면 특산품으로 지정하라고, 팰리슈에게 말하겠습니다. 지금 점심 식사를 하시는 겁니까?”
“한 자리 더 마련해야겠네요.”
아리스는 그릇을 하나 더 가져왔다. 세 명이 식탁에 앉아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그 간소한 자리에서도 태진은 본 목적을 잊지 않았다.
“언제 출발합니까?”
“여전히 이야기가 빠르군. 오늘 밤, 해가 진 후 수비대의 반응을 봐서 산을 넘을 거야.”
“빠른 조치 감사합니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맙지.”
“수도에 도착하면 미켈파 영지와의 분쟁도 팰리슈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어차피 미켈파 남작은 죄인으로 붙잡혀서 지위를 박탈당할 겁니다.”
“그거 희소식이군.”
훗훗, 웃음을 터뜨리고서 탄게는 단숨에 식사를 마쳤다. 아리스와 태진도 그의 페이스에 맞춰 식사를 하다가 결국 속이 거북하다는 얼굴로 식탁에서 일어섰다.
남은 시간 동안 태진은 탄게, 아리스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간 듣지 못한 30년 동안의 정보를 머릿속에 넣었다.
탄게는 시민의 의견을, 아리스는 귀족의 상황을 알려 주었기에 태진은 손쉽게 현재 로츠왈드 왕국의 사정을 모두 파악했다. 펠리슈는 30년 전 전해 주었던 왕국 건립 계획을 잘 진행해 나가고 있는 듯했다.
저녁은 빨리 찾아왔다. 해가 지고 나서 탄게는 둘을 남겨 두고 밖으로 나갔다. 정찰을 보낸 부하들이 돌아온 것이다. 부하들과 같이 머리를 맞대며 가장 좋은 길을 찾아낸 후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할걸세.”
“몇 명이 이동하는 겁니까?”
“적으면 적을수록 좋겠지. 몇 명을 원하나? 수비대를 마주칠 수도 있으니 경호 인원은 있어야 할 텐데.”
“한 명이면 됩니다. 그 한 명도 제게 길만 알려 준다면 곧바로 돌려보낼 겁니다.”
“한 명? 관문 수비대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탄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넌 그런 남자였지. 삼십 년 동안 변한 것이 없군. 알았네. 그럼 탄기엔을 딸려 보내주지. 이 산의 길이라면 나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녀석이다. 같이 가면서 내 후계로 적당한 놈인지, 네놈에게 시험받을 좋은 기회로군.”
“탄기엔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네가 본 건 고작 열 살 때 아닌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훗,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군.”
그렇게 싫진 않다는 얼굴로 탄게는 아리스에게 눈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친 아리스가 잠깐 표정을 굳힌다. 그녀를 향해 탄게는 진중하게 말했다.
“수도까지 현신의 전사를 잘 부탁하오. 제일 기사의 딸이여.”
“맡겨 주세요. 목숨을 다해서 반드시 보호하겠습니다.”
옆에서 태진이 “제 몸은 제가 사릴 수 있는데.”라고 끼어드는 것을 무시하고 탄게와 아리스는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유대를 다졌다.
한 시간 후 정확하게 태진과 아리스는 산채를 나섰다. 계곡과는 반대 방향으로 짙게 우거진 숲 앞에서, 안내자가 된 탄기엔에게 태진은 물었다.
“어떤 길을 통합니까?”
탄게의 아들답게 믿음직한 장년으로 성장한 탄기엔은 숲 위로 솟아 있는 봉우리를 가리켰다.
“저 봉우리 아래에 산 반대편으로 통하는 길이 있습니다.”
“동굴입니까?”
“그 정도가 아닙니다. ‘흔적’입니다.”
고대의 유적. 탄게가 찾아낸 길은 그곳이었다.
숲을 헤매고 다닌 것이 2년 전. 바운스의 시간으로 30년 전의 그 일을, 원한다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으니까.
태진은 감각을 연 상태로 탄기엔의 뒤를 따라 걸었다. 탄기엔은 산채에서 빠져 나온 후 길도 없을 것 같은 수풀을 쭉쭉 해쳐나갔다. 걸어가며 가끔 옛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 전 열 살도 안 됐었죠……. 벌써 삼십 년이나 흘렀는데 현신의 전사, 당신은 그대로군요.”
“그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삼십 년이 금방이라는 건가요? 동쪽의 나라는 대단한 곳이군요. 언제 한번 가 봐도 될까요?”
“초대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오실 수 있다면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실현 가능성 없는 이야기였다.
실없는 대꾸를 하다 태진은 문득 미묘하게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느끼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예상대로 수풀 뒤로 커다란 동굴이 입을 벌리고 나타났다.
“이곳입니다.”
먼저 나선 것은 아리스였다. 그녀는 순찰대장의 임무로 흔적을 조사하러 왔었다. 어떤 임무인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흔적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눈치 챘다.
“미카일 산적이 발견했다는 흔적이 이곳인가요?”
“예. 미켈파 남작의 말로는 ‘재생의 레펠’이 있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레펠. 고대의 마법 시대가 남긴, 이른바 마법서. 각각의 범위의 마법이 기록되어 대륙 이곳저곳의 흔적에 봉인되어 있다. 이곳의 흔적도 그중 하나였다.
“재생의 레펠? 보고에서는 그런 말 듣지도 못했는데요.”
“숨긴 것일 테지요. 저희들도 기사대장과의 대화를 엿듣다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
동굴 앞에서 태진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불빛 한 점 없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횃불 하나만 있어도 일단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다.
수비대의 거점과 흔적 사이의 거리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그는 탄기엔을 돌아보았다.
“이곳입니까? 이 흔적을 통하면 미카일 산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현신의 전사?”
“아닙니다. 의심하는 바가 당신이 아니라 이 흔적입니다. 분명히 이곳 말고도 다른 흔적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셨군요.”
“이 산에 흔적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 것은 접니다. 탄게에게 듣지 못하셨습니까?”
“전 단지 아버지가 찾아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아리스는 놀랐다. 현신의 전사는 미카일 산의 흔적이 있을 거라고 예견했다는 말인가?
“그게 정말입니까, 태진 님?”
“그 호칭, 그만둬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입니다, 레펠에는 다른 레펠이 숨겨진 장소가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고대어의 복잡한 암호 구조로 숨겨져 있지만, 삼십 년 전 바람의 레펠에서 암호를 해독해 냈었죠. 그 장소가 이곳 미카일 산이었습니다.”
“그럼 이곳 말고도 다른 흔적이 있다는 건……?”
“그 말대로입니다.”
탄기엔은 두 사람을 다른 쪽으로 안내했다. 다시 수풀을 해치고 옮겨간 곳은 좀 전의 흔적보다 더욱 봉우리에 가까운 고산 지대였다. 그곳에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동굴이 있었다.
“시험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조금 의심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현신의 전사인지. 아버지가 분명하다고 단언했지만 다음 두목을 이을 저로서도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미켈파 남작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 흔적의 존재 또한 알고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현신의 전사입니다.”
“됐습니다, 지금이라도 믿어 준다면 상관없습니다.”
태진은 두 번째 흔적을 살폈다. 조금 전보다 더 짙은 어둠이 깔린 동굴 안에서 스산한 공기가 스며 나왔다. 이 가까운 곳에 수비대의 훈련장이 있을 터. 산적들이 탐색에 긴 시간을 소비한 것도 이해가 간다.
태진은 앞장 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으로 아리스가 들어가고 탄기엔이 맨 마지막에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후방을 살피고서 수비대의 낌새는 없음을 확인하고 안심하려는 찰나.
태진의 예민한 감각에 발소리가 걸려들었다. 동굴 밖, 숲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그 바람결에 들린 소리는 수십 명의 발소리였다.
수비대임에 분명했다.
“수비대가 나타났습니다. 서두릅시다.”
준비해 둔 횃불을 켜고 가파른 흔적의 비탈길을 달려 내려간다. 감각을 총동원해 바닥의 요철을 파악하며 재빠른 속도를 내는 태진의 뒤로 기사 아리스와 산적 탄기엔이 무리 없이 뒤따랐다.
그들이 멈춘 곳은 비탈길이 끝난 지점. 그곳에서 태진이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수비대가 들어왔습니다. 바람 소리가 달라졌군요. 탄기엔, 길은 압니까?”
“물론입니다.”
횃불을 건네받은 탄기엔이 앞장섰다. 그때부터 수비대의 본격적인 발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오고 있어요!”
“삼십오 명이군요. 모두 중무장을 하고 동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안 것 같습니다.”
불빛도 없는 곳의 상황까지 정확하게 파악해 내며 태진은 냉철하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나가야 합니다. 탄기엔, 출구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립니다.”
“버티기 힘들겠지만 버팁시다. 최대한 무력 충돌을 없어야 합니다. 따라잡히면 우리가 불리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리스가 검을 붙잡았다.
“걱정 마세요. 태진 님은 제가 지키겠어요. 기필코 수도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거예요. 제 검, 현월(賢月)의 이름을 걸고서.”
탄기엔의 뒤를 철저하게 따라붙으면서 태진은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굳건하게 검을 뽑아 든 그녀에게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현신의 전사라고 믿기 시작한 때부터 호칭까지 바꾸고 자세를 달리하는 그녀를 보며, 태진은 한 여자를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 옆에 있었다면 더없이 의지할 수 있을 그녀, 미연을.
“그 검의 이름이 현월입니까?”
“예, 현신의 전사 태진 님의 별명을 따서 지은 이름이에요.”
“어울리는군요. 저를 닮고 싶어 한다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혹시 투신의 전사를 닮고 싶지는 않습니까?”
“전 기사가 될 거예요. 왕국의 모든 기사가 우러러보는 투신의 전사를 소망하지 않을 리 없지요.”
“그렇다면 검의 이름부터 버리십시오.”
“예?”
다급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태진의 말에 아리스는 의아해했다. 그러나 곧 그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전해 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에 이름을 짓지 말라는 겁니다. 미연이의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숱한 전투를 겪으면서 미연이는 한 가지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검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검명(劍名)이란 주인이 그만큼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미연…… 투신의 전사는 자신의 검에 애착이 없었다는 건가요?”
“애착이 없을 리가 없잖습니까. 바쁘니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스, 당신은 당신의 팔에 이름을 붙입니까?”
“예?”
그때 탄기엔이 문득 발을 멈췄다.
“두 분. 진지한 이야기 중에 죄송합니다만, 큰일 났습니다.”
뒤따라 걸음을 멈춘 태진이 잠깐 대화를 하면서 감각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탄했다.
“여긴 막다른 길이잖아요?”
“분명히 이 길이었는데…… 좀만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서 다음에는 왼쪽…….”
기억을 더듬던 탄기엔의 행동을 무시하고 태진은 앞으로 나섰다.
횃불이 비치는 앞과 옆으로 전부 울퉁불퉁한 벽들이 막혀 있었다. 갈 길이라고는 뒤쪽뿐.
하지만 그곳에는 수비대의 고함과 거친 발소리만이 가득했다.
나아갈 길은 오로지 앞.
“분명히 이 길이 맞습니까? 기억이 정확하다면 틀린 건 이 길일 겁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흔적이잖아요? 천 년을 넘게 내려온 고대의 유적지의 길이 바뀔 수 있을까요?”
“그런 흔적도 있을 겁니다.”
태진은 벽에 붙어 감각을 총동원했다. 시력과 촉각, 청각까지. 벽을 눈으로 더듬고 손으로 만진다. 청각으로 흔들리는 바람 소리 하나까지 완벽하게 잡아낸다.
수비대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태진은 기어코 길을 찾아냈다. 오른쪽 아래의 벽을 더듬던 그는 아리스를 불렀다.
“이 부근에 칼을 박아 넣어 보십시오.”
“네?”
“어서! 시간이 없습니다.”
수비대의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이젠 더 이상 도망칠 길도 없게 코앞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아리스는 재빨리 태진이 가리킨 바닥에 검을 깊게 박아 넣었다. 마치 그곳만 돌이 아닌 듯 쑤욱 들어가는 검날.
아리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탄기엔과 눈을 마주쳤을 때 주변의 풍경이 급변했다.
퍼엉…….
소리로 표현하자면 그런 소리랄까.
그 소리가 퍼지고, 지금껏 눈앞을 막고 있던 거대한 벽이 사라지고 그곳에 길이 나타났다. 아리스는 그제야 대학 시절 때 공부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군요. 이곳은 흔적이에요. 어쩌면 이곳이……!”
“아리스, 당신은 지식은 많지만 아직 그것을 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하지 못할 뿐입니다. 자신을 잃지 마십시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길을 나서며 그는 말했다.
“이곳에 ‘공간의 레펠’이 있을 겁니다.”
레펠의 중요도는 매우 높다. 각 나라가 흔적을 찾아 헤매는 것은 레펠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레펠을 하나 발견할 때마다 국력이 고속으로 상승한다. 그 본보기가 제국이다.
아키레마 제국의 경우, 그들은 현존하는 레펠 중 두 개를 소유하고 있다. 불의 레펠과 땅의 레펠. 그 마법력을 기반으로 그들은 지금의 거대한 제국을 이룩해 냈다.
로츠왈드 왕국이 그 제국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이유도 레펠 때문이었다. 30년 전, 독립 전쟁 당시 태진과 미연이 바람의 레펠을 발견했다. 마법력을 증강시킨 군대는 태진의 전략과 미연의 용맹에 보답하듯 승승장구했고 그렇게 그들은 독립을 쟁취해 냈다.
거기에 바람의 레펠, 재생의 레펠에 이어 공간의 레펠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로츠왈드 왕국의 국력은 더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태진은 현신의 전사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다시 돌아온 이후 이 나라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옛 친우의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망설일 건 없지 않겠는가. 수비대보다 먼저 레펠을 찾아 이 흔적을 탈출하면 되는 일이다.
흔적에 걸려 있던 공간 마법은 이미 풀어냈다. 바람이 빠져나가는 작은 틈새를 알아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레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태진은 새로 나타난 길을 달렸다. 탄기엔이 알고 있는 길은 이미 소용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태진의 판단력과 감각만으로 길을 찾았다. 가야 할 길을 능히 알 수 있는 이능이라도 있다면 행운이겠지만 지금 그에게 그런 이능은 없었다.
“저기 있다!”
한 치의 지체도 없이 달리는 세 사람의 뒤로 드디어 수비대가 따라붙었다.
우르르!
동굴을 울리며 쇄도해 오는 수비대가 따라붙는 건 시간 문제였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태진의 탓이었다. 신체적으로 그는 훌륭한 운동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뜀박질은 일반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몇 분 되지 않아 후미의 아리스가 수비대에 따라잡혔다.
“잡히지 않을 거면 여기서 죽어라!”
“조심하십시오!”
“알고 있어요!”
아리스는 검을 휘둘렀다. 달리면서도 그녀의 검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제일 기사의 자식이라 어릴 때부터 검을 다뤄 온 그녀에게 검은 결코 낯설지 않은 도구였다.
내리치는 수비대의 검을 받아치며 회전을 실어 벤다! 가까스로 검격을 피해 낸 수비대원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그 뒤로 십여 명의 대원이 한꺼번에 동굴 바닥을 나뒹굴었다. 자세를 잡은 아리스가 소리쳤다.
“현신의 전사는 이 아리스 뤼스필드가 지킵니다!”
태진은 감사하다고 마음속으로 응답하며 앞을 달려 나갔다. 그는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만약 흔적을 만들어 공간의 레펠을 봉인해 두었다면 출구가 뻔히 뚫려 있는 방향에 만들었을 리가 없다. 훗날 흔적의 비밀을 헤친 누군가가 발견해 주길 바랐다면 그것이 옳다.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 같아 탄기엔이 외쳤다.
“태, 태진 님! 어쩌시려는 겁니까요!?”
대꾸하지 않고 그는 감각을 최대한 펼쳤다. 촉각이 아닌 청각.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는 수비대의 거대한 발소리의 공명을 읽어 냈다.
동굴 벽을 두들기며 안쪽까지 파고 드는 그 소리가 어느 부분에서 끊어진다.
찾았다!
태진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무작정 뛰었다. 아리스에게 조금만 더 버텨 줄 것을 소원하며 달려간 그곳에 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에 허리만 한 높이의 단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놓인 것은 세월을 무시하고 먼지 한 조각조차 묻어 있지 않은 책 한 권.
태진은 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태진 님!”
“현신의 전사!”
수비대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던 아리스가 그의 등에 부딪혔다. 같이 검을 뽑아 응전하던 탄기엔도 밀려 나가 태진의 어깨에 충돌했다. 수비대의 검날이 매섭게 두 사람의 목을 향해 돌진했다.
“목 위만 남기면 된다! 잡아라아!”
수비대의 어떤 자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 직후 세 사람의 면전에서 그 모든 장면이 사라졌다. 마치, 완전히 삭제된 듯이.
검을 든 채 아리스는 얼굴을 굳혔다.
“이, 이게 무슨 일이죠……?”
아무것도 없는 동굴. 좀 전의 그 격전이 꿈이었다는 듯한 그 장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태진뿐이었다.
“공간의 레펠을 잡는 순간 반대쪽 길로 전이되는 마법이 발휘되게끔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범위 안에 두 사람도 포함된 것입니다. 맨 앞장에 그렇게 적혀 있군요.”
아리스가 봐도 눈이 아픈 고대어를 술술 해석해 낸 후 태진은 책을 덮었다. 원하는 물품을 손에 넣었다. 그는 이제 바람이 통하는 길로 방향을 잡고 두 사람을 이끌며 동굴 안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