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앗!
동굴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처럼 옅은 빛이 스며드는 그곳으로 셋은 쉬지 않고 전진해 나갔다. 동굴에서 벗어났을 때 아리스는 오히려 바깥이 동굴 안보다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진은 뒤따라오는 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멈춰 섰다.
“탄기엔, 여기서 헤어집시다.”
“오켈라니아 영지 내까지 모시겠습니다. 은신하기에 알맞은 곳이 있으니 그곳까지 같이 가게 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따라왔다가는 당신이 위험합니다. 산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관문 수비대가 따라붙을 것이고, 그 뒤로는 분명 현상금 사냥꾼들도 움직일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 밑까지 내려가는 길도 모르시잖습니까.”
탄기엔의 생각은 아직 30년 전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자식도 있는 아버지지만 태진이 보기에는 뭐랄까, 두목 자리를 물려받기엔 아직 상황 판단력이 모자란 듯 보였다.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어도 됩니다. 당신 자식을 생각하십시오. 수비대와 부딪히면 곤란한 건 당신입니다.”
냉정한 듯하지만 그 속뜻은 탄기엔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 만난 지 이틀 된 아리스도 느낄 수 있는 그 마음을 탄기엔이 모를 리 없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탄기엔은 그곳에서 두 사람을 배웅했다. 태진에게 간단하게 내려가는 길을 알려 준 그는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지고 몇 분이 지난 후에야 동굴에서 수비대가 튀어나왔다.
“어디로 갔지!?”
“근처를 뒤져라! 이번에도 놓치면 다시 붙잡긴 힘들다!”
수비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태진과 아리스의 흔적을 뒤졌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태진은 빠짐없이 지나간 길의 모든 자취를 지워 버렸기 때문에, 수비대는 결코 그들을 찾아낼 수 없었다.
다시 동굴 앞에 집결한 수비대가 한탄을 터뜨렸다. 그러나 놓친 것은 놓친 것. 산을 넘어 관문 수비대로 복귀하여 곧장 전서조를 통해 미켈파 남작에게 보고를 올렸다.
밤을 가르고 미켈파 남작성에 나타난 전서조가 날아들었다. 미켈파 남작의 기사대장은 전서조의 다리에 묶인 서신을 뜯어내 곧장 미켈파 남작에게 건넸고, 서신의 내용을 읽고서 미켈파 남작은 분노한 듯 책상을 내리쳤다.
“멍청한 것들! 관문 수비대라는 놈들이 고작 두 놈을 못 잡다니!”
서신을 찢어 버린 그의 표정은 충성스런 기사대장조차도 움찔할 정도였다.
“오켈라니아 남작성으로 가는 전서조가 남아 있는가?”
“저번에 보낸 전서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직접 가라. 오켈라니아 남작에게 전해. 영지 내로 숨어든 망할 녀석들이 있을 거라고. 한 놈은 현신의 전사를 사칭하고 있고, 한 년은 우리들의 거래를 알고 있는 년이라고. 그러니 반드시 잡으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충직한 기사는 곧장 남작성에서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는 정오쯤 되어 오켈라니아 남작성에 도착했다.
“거기 서라! 누구냐!”
“미켈파 남작성에서 왔다! 난 미켈파 남작의 기사대장 이젝트 파우스다! 오켈라니아 남작님을 만나 뵈러 왔다!”
신분을 확인하고서 성안으로 들어간 이젝트는 곧장 오켈라니아 남작에게로 안내되었다. 미켈파 남작과는 판이한 생김새를 가진 그는 집무실에서 정력적으로 서류에 사인을 해 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기사대장이 직접 관문을 넘어오다니.”
“영주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이젝트의 전언을 들은 오켈라니아 남작의 정력적인 얼굴에 분노의 기운이 떠올랐다.
“그 멍청한 배불뚝이 자식이! 그런 놈들을 성에서 놓쳤단 말이냐!”
벼락을 내릴 것 같은 정력적인 포효. 위엄 있는 그의 모습에 이젝트를 몸을 떨었다. 오켈라니아 남작은 한동안 화를 가라앉히는 듯 구시렁대며 심호흡을 했다.
“지난밤에 놓쳤다면 이미 우리 영지 안에 들어와 있겠군! 도보로 대로도 아닌 길을 이동한다면 지금은 영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전해라. 그리고 이 수고는 후에 그대로 보상받을 것이라고도.”
이젝트가 부복을 하고 떠나기 무섭게 오켈라니아 남작은 신하에게 현상금 사냥꾼들을 부르고 기사대에게 수색령을 지시했다. 그의 명을 받든 신하가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오켈라니아 남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이런 밝은 태양 아래를 활보하기에는 지나치게 색기어린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가 그녀를 맞았다.
“무슨 일이지? 당분간 그대가 나를 찾아올 용무는 없을 터인데.”
“우리 사이에 그런 차가운 말씀하시긴가요, 오켈라니아 남작님?”
“……공식적으로 우리는 모르는 사이일 텐데? 이렇게 환한 대낮에 찾아오는 것은 삼가 줬으면 하오만.”
“너무 그러지 마세요. 부하들에게는 입막음을 해 두었으니까 별탈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방금 전 그 사람, 미켈파 남작의 기사대장 아닌가요?”
“그렇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기사대장이 직접 찾아오는 걸 보면 중요한 사항일 것 같은데.”
“그대와는 관계없는…… 아니지, 관계없진 않겠군.”
오켈라니아 남작은 이 여성의 직업을 떠올리며 말을 바꿨다.
“키드카. 문제가 생겼소. 그대와 나와 미켈파 남작의 거래를 알아 버린 자가 지금 우리 영지 안에 있소.”
“그럼 사람은 내 부하들 중에도 많아요. 뭐가 문제인 거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이란 말이오. 게다가 함께 도망치고 있다는 남자는 현신의 전사라고 자칭한다고 하오. 게다가 그렇게 생각해도 될 만한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오.”
“……잠깐만요. 뭐라고요? 현신의 전사?”
“그렇소.”
키드카는 어이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미켈파 남작, 올해 나이가 몇이던가요?”
“예순 안팎일 거요. 그건 왜 묻소?”
“아뇨. 아무래도 기력이 쇠했나 보군요.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니.”
“미켈파 남작은 귀족이오. 그런 말은 삼가 주시오.”
“오켈라니아 남작님께서는 그 말을 믿으시나요?”
“전부를 믿는 건 아니오. 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나쁜 소식이라는 건 분명하지. 그래서 이미 영지 내의 수색령을 내리고 현상금 사냥꾼도 불렀다오.”
키드카는 그의 표정에서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두 남작을 비웃던 마음을 접으며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나도 방도를 세워야겠군요.”
“어쩔 생각이오?”
“거래를 들키면 나도 위험해요. 어쨌든 국법이 허락하지 않는 장사니까. 살아남으려면 힘을 보탤 수밖에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하죠. 어둠 속에서는 내가 더 힘이 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대와 연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좀 전에는 모르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좀 전에는 ‘공식적인’이라는 말도 붙였소. 어쩔 수 없지 않소? 나는 로츠왈드 왕국의 귀족이자 영주인 오켈라니아 남작이니까.”
“알고 있어요. 어쨌든 그럼 난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원래 계약건 때문에 상의드릴 게 있어서 온 거였는데 그런 태평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닌 것 같군요. 일이 생기면 연락할게요.”
키드카.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의 주인은 그렇게 오켈라니아 남작의 집무실에서 사라졌다.
***
그즈음. 태진과 아리스는 탄기엔이 알려 준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해가 떠오른 이후에는 낡은 폐가에서 나가지 않고 숨만 죽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은신처답게 식량은 구비되어 있어서 일주일 정도도 거뜬히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일주일이나 이곳에 있을 여유는 없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는 대로 다시 출발합시다. 그때까지 몸을 잘 추슬러 두십시오.”
“전 괜찮아요. 태진 님은 괜찮으신가요?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 쉬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이미 충분히 쉬었습니다. 제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도 아리스는 태진의 안색을 읽을 수 있었다. 표정은 냉철하기 그지없었지만, 딱히 좋은 낯빛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과연, 육체 노동에는 일반인 수준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진도 미연의 체력과 이능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30년 전 전쟁터에서였다.
그가 미연에게 보호를 받기만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때 그녀는 그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그럼 내가 작전 짤까?”
날아오는 열 발의 화살을 무리 없이 튕겨 내면서 상큼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저 잠깐의 부러움이었을 뿐. 그는 곧 그런 생각을 지웠고, 다시는 비슷한 생각도 떠올리지 않았다.
지금도 분명히 그랬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다. 지금도 체력적으로는 역부족이지만 정확하게 신체 상태를 고려하여 움직이고 있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게다가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쓰러지지 않을 정신력도 충분했다.
아리스의 걱정은 접게 하고 태진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교대하여 짤막한 수면을 취하며 충분히 휴식한 후, 저녁이 되자마자 폐가에서 빠져 나왔다.
“직진으로 북상할 겁니다. 영지를 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삼 주 안에 수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길이 험할 텐데 괜찮겠어요?”
“해내지 않으면 안 되잖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격려하며 길을 떠났다. 은신처에서 챙겨온 식량을 짊어지고 노숙을 하기도 하고, 남의 집 마구간에 들어가 몰래 자고 나오기도 하며. 그렇게 둘은 오켈라니아 영지를 가로질렀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사방을 경계하며 흐트러지지 않는 진로를 이어 나가는 태진에게 아리스는 깊게 감탄했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가 30년 전에 왜 그런 칭호를 받게 되었는지 아리스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지식이 아닌, 말 그대로 체험을 통해 얻은 산지식.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수많은 것을 그에게서 배웠다.
4일이 지났을 무렵에 아리스는 말 그대로 태진에게 빠져 있었다.
“저 별자리 보이십니까? 저 십자가 두 개가 서로 연결된 것 같이 생긴 저 별자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북서쪽입니다. 그러니까 좀 전에 가르쳐 드린 그 별자리와의 중간 지점, 그쪽이 북쪽입니다.”
“그렇군요…… 북극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렇게 길을 찾는 거군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굳이 하늘을 보지 않아도 대략적인 방위를 아는 건 앉은 자리에서도 가능합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태진에게서 아리스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인생에 있어서 이런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자체가 행운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도망의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아리스는 태진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태진은 귀찮아하지 않고 그 전부에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가 마치 걸어 다니는 왕립 대학교처럼 보일 정도였다. 왕립 대학교의 설립 계획을 세운 것 자체가 태진이었으니까 어쩌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리스는 30년 전의 역사 속에 실리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지루한 낮의 은신을 무마했다.
다시 밤. 넓은 농장의 밀 창고에서 나온 태진은 급히 아리스의 행동을 말렸다.
“왜 그러세요?”
“잠깐만 기다립시오. 몸을 숨겨야겠습니다.”
지난 4일 동안 늘 깨어 있던 그의 감각에 무엇인가가 걸려들었다. 인적이 드물게 보였던 근처로 어떤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무거운 마차의 소리도 들려왔다. 세 대의 10인승 마차. 그리고 앞뒤로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그것을 이끌고 있었다.
“……누구죠, 저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밤에 이런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좋은 이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야기 소리가 들려와 태진은 귀를 기울였다.
“……아직 못 찾았다지?”
“그렇다던데.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기사대고 수비대까지 출동했는데도 못 찾았다고 하더라고. 여기서 잠깐 쉬다 갈까?”
창고에서 멀지 않은 지점에 마차가 멈춰 섰다.
“안의 것들은 멀쩡히 살아 있나 모르겠군.”
“탄트라 향을 피워 뒀으니 최소한 도착할 때까지는 멀쩡할 거야. 수도로 보내질 것들이니 얌전하게 시장으로 모셔가야지. 그나저나 그것들 말야, 어떤 놈들이래?”
“도망자들? 나도 정확하게는 못 들었는데, 한 년은 순찰대장인가 뭔가 하는 년이고, 한 놈은 제가 현신의 전사라고 하고 다닌다나 봐.”
“또 미친놈 하나 납셨구만. 산짐승 가발이라도 뒤집어썼나 보지?”
“아니면 ‘변형의 레펠’이라도 찾은 마법사겠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겠지만. 우핫핫!”
자신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태진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누군가가 멀리서 듣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지껄여 대고 있었다. 태진은 그 속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저장시키며 더욱 이야기에 집중했다.
“덕분에 키드카 님도 골치깨나 썩고 있나 보더라. 전투조 놈들을 풀었는데도 아직 잡힐 기세가 안 보인다나 봐. 그거 아냐? 놈들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두 배로 뛰었다니까?”
“이야아, 내가 한번 잡아 볼까? 그 현상금 받으면 이십 년은 놀고먹을 수 있을 텐데!”
“네놈 씀씀이라면 한 달 안에 끝일걸. 일단 잡고나 얘기 하시지?”
“그건 그렇다만!”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두 사람. 한참을 낄낄대던 그들은 곧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이 멀리 떠나가는 것을 기다린 다음 태진은 아리스에게 방금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뭐라고요!? 노예 시장?”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은 예부터 유명했습니다. 한 차례 없어졌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라질 곳도 아닙니다. 다시 부활하여 지금은 예전처럼 성행하고 있는 것 같군요?”
“잠깐만요, 그럼 그 마차 안에는?”
“시장에 팔려간 노예들이 타고 있을 테죠.”
아리스도 순찰대장으로서 알고 있었다. 바운스의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로츠왈드 왕국이지만 골칫거리 또한 있었다. 그것이 바로 노예 시장의 문제.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은 아직 제대로 된 증거조차 찾아내지 못한 곳이었다.
“저들을 쫓아가요. 순찰대장으로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요!”
“쫓아가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당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니요, 저 혼자가 아니에요. 현신의 전사인 태진 님도 계시잖아요!”
“무리입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수도에 도착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사라진 마차의 행적을 쫓으면서 태진은 그렇게 잘라 말했다. 아리스는 필사적으로 부탁하는 눈길을 그에게 쏟아 부었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얼굴이 돌아본 것은 잠시 후. 그는 뭔가 고심하고 있었다.
“잠깐…… 분명, 도보보다 마차가 더 빠를 테죠?”
“그, 그건 그렇죠. 당연한 말이에요.”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수도까지 걸리는 시간을 일주일은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아리스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고, 그래서 그는 설명했다.
태진이 아리스에게 던진 말은 간단했다. 그 말을 듣고 아리스는 기겁했지만 태진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했다. 그녀를 이끌고 어두운 길을 걸으며 그는 똑바로 마차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그의 뒤를 따르며 아리스는 그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노예 시장으로 숨어들 겁니다.”
그렇게 운을 뗀 태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빠르게 발을 내뱉었다. 노예 시장으로 숨어든 다음 그들이 수도로 운송되는 노예들의 틈에 끼어 같이 수도로 향한다.
그렇게 되면 일주일 이상을 단축할 수 있다. 순식간에 태진이 내뱉은 설명을 축약하자면 그랬다. 그 처음부터가 도저히 얼토당토않다고 아리스는 생각했다.
노예 시장으로 숨어든다니. 대체 어떻게?
거기에 대해서 태진은 또 다시 대답했다.
“우리 앞을 지나친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뒤를 따르다 보면 분명히 노예 시장으로 향할 겁니다. 들키지 않고 쫓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너무나 간단한 말이라 순간 반박할 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곧장 입을 열려고 했을 때, 태진은 이미 아리스의 시야에 없었다. 주변의 기색을 살피고 농장 밖으로 나간 것이다. 아리스는 소리를 치려 한 자신의 입을 막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세 대의 마차는 열 명 안팎의 사내들에게 경호받고 있었다. 물론 경호라기보다 감시역이긴 하겠지만, 그들 전부가 튼실하게 단련되어 있는 듯 보였기에 완력면에서는 태진과 아리스가 확실히 밀렸다. 아리스는 그 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태진의 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물론 그가 하는 생각이 무언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아리스는 의심을 접었다. 이 남자는 현신의 전사다. 아리스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고 따르자. 아리스는 기어코 그렇게 결심했다.
그땐 이미 마차를 추격한 지 한참이 지난 시점이었다. 문득 태진이 둔덕 뒤에서 멈춰 섰다.
20여 m 밖의 마차가 정지해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듯 사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차를 포위한 채 휴식을 취했다. 그 틈을 타 두 사람도 쉴 수 있었다.
잠시 후 지루한 추격이 재개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세 대의 마차는 꾸준히 길을 달려 어느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집집마다 불이 피워진 그곳이 보이자 사내들이 낮게 환호성을 지르며 자축했다. 이곳이 그들의 본거지인 듯싶었다.
마을 입구에서 몇몇의 남자가 나타났다. 태진과 아리스는 몸을 숨겨 그들의 행태를 지켜보았다. 그들 사이에서 몇 마디 말을 오간 뒤, 마차는 순조로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경비병인가 보군요. 평범한 마을에 경비병이 있을 리는 없을 겁니다. 라스트 마을이라…… 혹시 아는 이름입니까?”
“글쎄요, 지방의 모든 마을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곳이 노예 시장의 중요한 장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네요. 이제 어떡하실 거죠?”
“오늘 밤에는 저들도 더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마차 안으로 숨어든다면 오늘 밤이 기회일 테죠.”
태진은 길에서 벗어나 마을을 빙 둘러 이동했다. 아리스도 함께 주변을 경계하며 끊임없이 발을 움직였다.
어둠으로 아리스의 시야가 극히 제한된 이곳에서도 태진의 시각은 밝았다. 200m 밖의 정황까지 읽어 내며 그들은 마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분위기를 살폈다.
이윽고 태진이 길을 찾아냈다.
낡은 집.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폐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태진은 인기척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폐가의 옆으로 이동하자 인기척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 그리고 곧 셋으로 늘어나더니 폐가에서 나와 길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다시 한 명이 남은 폐가를 훔쳐보며 태진은 주머니를 뒤졌다. 미켈파 남작의 연구실에서 만들어 온 약품들은 아직도 몇 개가 남아 있었다. 그는 한 가지를 꺼내들고 바람을 읽은 후 약품을 던져 깨뜨렸다.
“혹시 모르니 잠깐만 숨을 참으십시오.”
영문도 모르고 아리스가 호흡을 멈췄다. 태진과 시선을 같이 한 그녀는 문득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옴을 느꼈다.
잠시 후, 폐가 앞에 서 있던 그림자가 풀썩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태진은 손짓으로 아리스의 숨을 터뜨렸다.
“‘아키코올’이라는 약품입니다. 옅게 희석시켜 들이키면 수면제의 효과가 있지만 원액은 향만으로도 사람을 잠들게 해 버리는 독한 약품입니다. 필요할 것 같아서 미켈파 남작의 연구실에서 슬쩍 해 두었습니다.”
바람이 한참을 더 쓸고 지나간 후 그들은 폐가로 향했다.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 태진은 아리스의 칼로 잠든 남자의 옷가지를 찢어 냈다. 아리스가 궁금한 눈길로 쳐다봤지만 그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끼익 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나타났다. 한쪽 바닥에 척 봐도 문 같은 것이 있어서 태진과 아리스는 잠시 눈을 마주쳤다.
문 밑의 기척을 살피고, 태진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려갔다. 옅은 불빛이 비치는 계단 뒤로 나타난 통로를 통해 이동했다.
“마을과 이어진 비밀 통로인 듯싶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만들어 둔 것인가 보군요.”
목소리를 낮춘 채 설명한 태진은 발걸음으로 거리를 계산하며 신중하게 걸어 나갔다. 한참을 걸어간 통로 반대편 끝에는 계단과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문을 열기 전에 태진은 다시 이능으로 바깥을 살피고서 나섰다. 집안으로 보이는 그곳에는 느낀 대로 사람은 없다. 서둘러 집에서 빠져 나와 그들은 뒤편의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아직도 마을 외곽이었지만 충분했다.
횃불을 들고 마을을 걸어 다니는 사내들의 시선을 피해 이동하는 것은, 태진으로서는 식은 죽 마시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발각되었을 때를 대비한 작전도 세워 둔 상태였다.
감각을 넓혀 어떤 정보든 두뇌로 끌어들이며 그는 마차를 찾았다.
“저기 있습니다.”
마을 중앙에서 이윽고 마차를 찾아낸 태진과 아리스. 마차 안에 있던 노예들이 밖으로 끌려 나와 묶인 채로 나자빠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옷가지는 걸치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을 관찰하면서 태진은 빠짐없이 주변의 상황을 이해했다.
“어떡하실 거죠?”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아리스에게 태진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그는 폐가의 남자에게서 찢어온 옷가지를 두건처럼 머리에 두른 후, 아리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 후 태진은 나지막하게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마을 중앙으로 밀쳐 냈다.
“앗!”
당황한 아리스의 비명만이 사내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