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32)

다섯. 투신의 전사가 나타났다

제국군의 기습이 있은 후 이틀이 지났다. 그 사이 마을은 이미 거의 복구가 된 상태였다. 워낙에 속전속결을 목표로 한 맹습이었기에 전투 시간이 짧은 덕분이었다.

피해 인원을 산출하고 그들의 장례를 지내는 것으로만 하루를 보내고 나머지 하루는 마을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기습 이후 3일째 아침. 리트미소는 거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있었다.

“제법 멀쩡해졌네, 이제?”

장로의 집 앞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미연은 끄덕였다.

“이틀 전에는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말이야.”

“제국군에서도 도와주었으니까요. 사과의 뜻이라고 했던가요.”

“그딴 사과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공격을 안 했으면 되는 거 아냐? 무슨 부시 같은 짓을 하고 앉은 거야.”

“부시는 누군가요? 미연 님의 나라 사람인가요?”

“우리나라 사람은 아냐. 적이랄까, 아군이랄까. 아무튼 미묘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지. 남의 나라 멋대로 공격해 놓고 나중에 재건 인원을 투입해 주는 이상한 아저씨가 있어.”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군요.”

전혀 다른 세계 출신의 두 사람이 같은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장로의 집으로 이어진 언덕을 뛰어올라온 미소라는 두 사람의 담화에 딱히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장로에게 보고했다.

“복구를 끝냈습니다. 제국군을 돌려보낼까요?”

“그러도록 하세요. 숲 밖까지 안내해 드리는 거 잊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깍듯한 태도를 보이며 미소라는 대답했다. 잠깐 미연을 힐끔 쳐다보던 그는 서둘러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제국군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미소라의 지시에 따라 리트미소 밖으로 나갔다. 마을의 남쪽 입구를 통해 숲 밖으로 빠져나가 완전히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미연과 장로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병사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마을은 평소의 아침으로 돌아갔다.

“그럼 난 내려가 볼게. 미소링의 엄마가 놀러오라고 했거든.”

“그런가요? 그럼 점심 때 뵙지요.”

“응! 난 버섯 수프가 맛있더라!”

이미 점심 메뉴까지 지정해 놓고 마을로 달려 내려가는 미연의 모습을 장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로는 그녀가 투신의 전사라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20세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의 그녀가 이틀 전에 제국군 병사를 수십 명이나 베고 다녔던 전사라는 사실에는 역시 괴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괴리감 자체가 투신의 전사를 가리키는 특징이니까. 어깨를 으쓱한 장로는 점심때 미연에게 먹일 버섯을 다듬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마을로 내려온 미연은 곧장 중앙을 가로질러 미소링의 집으로 갔다.

집 앞에는 여느 때처럼 미소링과 그 동생이 소꿉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미소링이 먼저 미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쪼르르 뛰어와 매달린다.

“누나! 어서 와!”

“그래그래. 잘 잤어?”

“응!”

해맑게 대답하는 미소링의 얼굴에는 며칠 전의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아이일수록 회복이 빠르단 말이 실감된다.

미연은 두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집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안녕~ 몸은 어때?”

“덕분에 괜찮아요. 미연 님은 괜찮으신가요? 어제 저녁 늦게까지 같이 일해 주셨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몸 하나는 튼튼하거든!”

늦은 밤까지 작업을 했음에도 쑤신 곳 하나 없을 만큼 바운스에서의 그녀는 ‘튼튼’ 그 자체다.

미소링의 어머니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이 거실 한쪽의 문이 열리며 미소링의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그는 전투에 직접 참가했기 때문에 머리와 오른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미연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이야, 욥! 몸은 어때?”

“아…… 미연 님, 오셨습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전혀 안 멀쩡해 보이는데…… 음, 그래도 피는 멎었네?”

“예. 미소라의 처치가 빨라서 증세도 꽤 호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그래, 얼른 나아야지. 그래야 이 꼬마들도 안심하고 뛰어놀 거 아냐.”

분명히 연하지만 묘하게 연상 같은 태도로 미연은 그런 말을 두 부부에게 일러주었다. 신기한 점은 두 부부가 그 사실에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부는 미연에게 대접하기 위해 구워 놓았던 과자를 꺼냈다. 식탁에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달콤한 차까지 곁들이자 미연도 절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고마워.”

“고맙단 말씀은 제 자식들을 구해 주신 미연 님에게 해야죠. 거듭 감사드립니다, 미연 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렇게 같이 앉아 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미소라에게도 감사 인사를 해야지. 부상당한 너를 구해 줬잖아?”

“그렇군요. 나중에 미소라에게도 확실히 인사를 하겠습니다.”

미소링의 아버지는 차를 한 잔 마신 후 진지한 태도로 미연을 바라보았다.

“미연 님과 미소라는 우리 가족의 영웅, 아니 리트미소의 영웅입니다. 무엇보다 미연 님께서 삼십 년 전의 그 투신의 전사라면…… 우리 가족은 더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겁니다.”

영웅이라. 미연은 히죽 웃으며 차를 마시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분명 30년 전에도 영웅이라고 불렸지만 어째 지금 떠올리면 간지러운 기억일 뿐이다. 그때와 지금, 막상 자신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은데.

과자를 하나 깨어 물며 미연은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다.

“뭐, 영웅이라고 불러준다면 거절은 안 하겠어. 익숙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내 앞에서는 부르지 마. 내가 가고 나면 불러줘, 알았지?”

“아, 리트미소를…… 떠나시나요?”

“응. 왜?”

“아, 아닙니다. 역시 제국군의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찻잔을 입술에 댄 자세로 미연이 눈을 들었다.

“소문?”

“네, 우연히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부 주둔군 상부에서 미연 님의 정체에 대해 알아챈 것 같다더군요.”

“……내 정체? 투신의 전사라는 거?”

“그, 미연 님에게 잡힌 지휘관 있었잖습니까? 그가 상부에 보고를 올린 모양입니다. 작전의 실패는 미연 님 때문이라고. 그래서 며칠 있으면 북부 주둔군에서 미연 님을 모시러 올 거라고 했었습니다.”

“엥?”

미연은 얼굴을 구겼다. 그 반응이 오히려 미소링의 아버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떠난다는 건 그 얘기가 아니었습니까?”

“난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데? 내가 떠난다는 건 그런 게 아냐. 어디까지나 이 마을에서 머물 수는 없으니까…… 에효, 난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 그 ‘괘씸한 놈’을 찾으러 떠난다는 말이었어. 근데 제국군을 따라간다니, 그런 소문이 있었단 말야?”

“소문이 아니라. 거의 확실시되는 지시였나 봅니다.”

미연은 얼굴을 찡그리고 차를 마셨다. 정말 싫은 말을 들은 표정이었기에 미소링의 부부도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해주진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다과회는 끝났다. 미연은 미소링 형제와 같이 즐겁게 떠들며 과자를 다 먹어치운 후에 일어났다.

“과자 고마워! 또 먹으러 올게?”

미소링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미연은 집을 떠났다.

일단 머물고 있는 집에 돌아가서 오늘치의 운동을 하고 있자니 점심때가 되어 미소라가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문밖에서 부르는 미소라의 목소리에 미연은 땀 흘리는 얼굴 그대로 나갔다.

“왜 이리 늦게 나오…… 뭐 하고 있었나?”

“뭐 하긴, 운동하고 있었지. 아침에 일하느라 못했거든.”

“아침에 그렇게 일했는데 또 운동을 했다는 건가?”

“운동과 작업이 같아?”

가볍게 대꾸하고서 수건에 땀을 닦은 채 미연이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장로님께서 찾으신다.”

“아직 점심 먹을 때는 아닌데?”

“소식이 왔다고 한다, 네가 장로님께 부탁했던 것에 대한.”

미연이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수건을 아무렇게나 집안에 던져 놓고 미소라를 지나쳐 곧바로 장로의 집으로 향했다. 미소라는 서둘러 그녀를 따라가며 물었다.

“그 부탁이 그렇게 중요한가?”

“당연하지. 내 인생을 찾는 것과 똑같을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녀에게 미소라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을을 곧바로 통과해 언덕을 단숨에 뛰어 올라간 미연이 장로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쾅――!

부수듯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일었다.

“도착했어!?”

“……빠르네요. 네, 방금 도착했어요.”

테이블에 앉은 장로의 앞에는 수많은 서신이 쌓여 있었다. 이미 그 모든 내용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장로는 손짓으로 미소라와 미연을 앉히고 나머지 서신을 읽어 내렸다.

잠시 후, 장로가 손을 모으고 미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유감이네요. 또 다른 세계 진동을 없었다고 해요.”

난처하다는, 그리고 한편으론 유감이라는 표정이었다.

“에…….”

잔뜩 기대하고 있던 미연의 표정이 곧바로 풀이 죽는다. 미소라는 침을 삼키며 대신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외부인이 찾고 있는 사람은 바운스로 오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이 서신은 판게리츠에서 온 것. 판게리츠 밖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죠.”

“그렇지만 만약 넘어왔다면 가까운 곳에 떨어질 것 아닙니까?”

“그것도 단언할 수는 없어요. 세계 진동이란 아직 명확히 연구된 바가 없는 미지의 현상이니까요. 바운스 어디에라도 떨어질 수 있겠지요. 설마 바다 위라도요.”

장로의 말에 미연의 얼굴은 울상으로 바뀌었다. 장로는 농담이라고 일러주며 어조를 바꿨다.

“괜찮아요, 아직 방법은 있어요. 제국 마법사단으로 가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국 마법사단?”

“네, 수도에 위치한 마법사들의 단체예요. 마법에 관해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덴지는 알아. 삼십 년 전에 그 녀석들과도 싸워 봤으니까. 근데 거기가 그렇게 마법에 관해서 잘 알아?”

“싸워봤다면 알 거 아닌가, 외부인.”

“어차피 난 그것들이 마법을 쏘기 전에 가서 베어 버렸거든. 게다가 적의 분석은 태진이가 맡아서 하고 있었고.”

옛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미연이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어쨌든 제국 마법사단을 찾아가 보면 된다는 거지?”

“네, 맞아요.”

“좋았어!”

미연은 벌떡 일어섰다. 주먹을 불끈 뒤고 선언하듯 소리친다.

“지금 당장 제국 수도로 가겠어! 마법사단에 처들어가면 어떻게든 된다 이거지!”

“처들어가면 어떡하나? 가서 부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미연은 이미 앞길을 정했다. 여기서 승산이 없는 이상 서둘러 다른 길을 찾는다. 그것은 태진과 미연의 공통된 사고방식이었다.

태진아! 너 반드시 찾아줄게!

마음속으로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장로의 집으로 숲지기가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미소라가 일어나 문을 열자 숲지기는 헐레벌떡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장로에게 보고했다.

“제, 제국군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네? 아침에 돌려보내지 않았나요?”

“그, 그게! 다른 녀석들입니다! 북부 주둔군 본부에서 왔다고 합니다!”

미소라는 날카롭게 집밖을 살폈다.

“인원은?”

“다섯 명입니다. 리트미소 주변에 다른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다섯 명뿐이라는 건가…….”

미소라는 지시를 요구하듯 장로를 돌아보았다. 장로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러 온 것은 아닌가 보군요. 모셔 오세요.”

장로의 명에 미소라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몇 분 후 그가 데리고 온 제국군 일행은 파제스와는 다른 태도로 장로를 대했다.

“제 부하가 폐를 끼쳤습니다. 보내드린 병사들은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렇게 말을 꺼낸 그는 이시브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겉보기에 젊어 보였는데 소령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미연은 솔직히 놀랐다.

“병사들을 보내 주셔서 고마워요, 이시브 소령님.”

“저희가 잘못한 일이니 보상을 해 드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나중이라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면 알려 주십시오.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아무리 미운 동네라도 한 명 정도는 괜찮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부시는 밉지만 미국 전체가 부시 같은 사람인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랄까. 미연은 의외의 점에서 제국군이 맘에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시브의 눈빛이 미연에게로 옮겨졌다.

“당신이 투신의 전사입니까?”

“응, 맞아.”

“부정하지 않으시는군요. 솔직히 보고가 올라왔을 때는 믿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투신의 전사라고 착각될 정도입니다.”

“착각이라? 진짠데.”

미연은 혀를 내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시브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관찰하더니 문득 장로에게로 눈을 돌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이 여성분을 저희 북부 주둔군으로 모시고 가도 되겠습니까?”

장로와 미연의 행동이 잠깐 멎었다. 장로는 미연을 쳐다봤고 미연도 그 눈길을 마주보았다. 그러고 나서 꺼낸 말은 불만이 잔뜩 섞여 있었다.

“그걸 왜 장로님한테 말하는 건데?”

미연에게 문제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

“기분이 어때?”

“그다지. 별 감흥 없다.”

“재미없기는. 판게리츠는 처음 벗어나보는 거라며? 그럼 이렇다 저렇다 감상 정도는 들 거 아냐?”

“외부인, 너의 재미를 위해서 내 기분을 바꿀 의무는 없다.”

“산맥을 벗어났는데도 아직도 외부인 타령이야? 그럼 앞으로 널 내부인이라고 부르겠어.”

“그렇게 불렀다간 가만두지 않겠다, 외부인.”

“너부터 그만둬, 내부인.”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하는 두 사람에게 이시브가 지그시 미소 지었다.

“사이가 좋군요, 두 분? 누가 보면 오랜 친구인 줄 알겠습니다.”

“헛소리 마라, 이런 녀석과 친해지고 싶진 않다.”

“난 친해지고 싶은데 얘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나 봐.”

판이하게 다른 두 반응을 보고 이시브는 또 웃음을 지었다.

리트미소를 떠나온 지 이틀. 지루할 것 같았던 여행은 미연과 미소라의 말다툼 덕분에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보고만을 두고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전사의 이미지였는데 말입니다.”

“나? 삼십 년 전에도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어. 전쟁터에서 뛰어다니면서 피를 뒤집어쓴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 피 냄새가 싫어서 피를 최대한 튀기지 않고 죽이는 법을 터득했을 정도니까.”

무서운 말을 웃는 얼굴로 하는 미연. 이시브는 알게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저 여자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고나 하는 걸까.

리트미소에서 출발한 여정은 일단 판게리츠 산맥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북부 주둔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크로이언 시까지 이어진 대로를 통해 꾸준히 전진하기만 하면 되었다.

사실 사령부에서 이시브에게 내린 명령은 투신의 전사로 짐작되는 여전사를 본부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설득의 준비를 했는데, 예상외로 미연이 간단하게 동행을 허락했다. 그 의외의 일에 채 놀라지도 못한 찰나, 은발의 미소 족 청년이 그에게 뜻밖의 부탁을 해 왔다.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산맥 밖을 보고 오겠다고 하는 청년, 미소라의 부탁에 장로는 그것을 허락하고 이시브에게 동의를 구했다. 미연마저 찬성하자 이시브로서는 그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미연이 같이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친해지고 싶다고 말한 건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예비 말은 하나뿐이어서, 덕분에 지금 그 말에 두 사람이 올라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미소라가 틱틱대는 것뿐이지만.

“나 때문에 따라온 거 다 알아. 친하게 지내자니까?”

“웃기지 마라. 누가 너 때문에 따라왔다는 거냐. 난 미소 족의 숲지기로서 산맥 바깥의 일도 알아 둬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그래, 산맥 바깥에서 내가 어떻게 지낼지 알아 둬야 한다는 거지?”

“넌 대체 정신을 머리 어느 구석에 처박아 두고 사는 건가? 이야기가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지?”

쉴 새 없이 다투어 대는 두 사람의 만담.

문득 미연이 손을 들며 물었다.

“그 크로이언 시까지는 얼마나 걸려?”

“말을 달려서 삼 일 정도 걸릴 겁니다. 중간 중간 북부 주둔군의 부대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여유롭게 가면 그 정도입니다.”

“더 빨리는 못 가?”

“바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 북부 주둔군이든 뭐든 갔다가 수도로 빨리 가고 싶거든. 제국 마법사단에 용건이 있어.”

이시브가 기묘하게 눈을 돌렸다.

“마법사단에 용건이 있으시다면……?”

“사람 좀 찾으려고. 그러니까 빨리 가자.”

미연의 재촉에 이시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의 나라에서 온 자가 사람을 찾는다면 그것은 같은 나라 출신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투신의 전사라고 자칭하는 자라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생각을 끊었다. 일단은 임무에 충실할 때였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구령했다.

여섯 필의 말이 크로이언 시를 향해 세차게 달려 나갔다. 미연의 요구에 따라 이시브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덕분에 3일은 족히 걸릴 길이 2일째 저녁쯤 되어 크로이언 시를 눈앞에 두게 만들었다.

“저곳이 크로이언 시입니다. 북부 주둔군의 사령부가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제국 북부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입니다.”

그 번상함은 미연의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미연의 뒤에 타고 있던 미소라도 무뚝뚝한 얼굴 위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짓고 있었다. 미연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신기하지? 저렇게 큰 도시는 처음 볼 거 아냐. 느낌이 어때?”

“지겹지도 않나. 느낌이 있다면 내가 먼저 말한다. 그 전에는 입을 다물어라.”

여전한 미연과 미소라의 말다툼을 양념삼아 그들은 크로이언 시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에 보이는 드높은 성벽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서 미연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의 일행을 보자 냉큼 집 뒤로 숨는 아이였다.

시 외곽에는 주로 빈곤층이 살고 있다. 이것은 어느 도시에 가나 마찬가지일 모습이며, 미연도 그 정도는 안다.

헐벗은 아이들이 어딘가 모르게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끔 가다 마주친 어른들도 눈을 피하며 집안으로 피해 버리기 일쑤였다.

“뭔가 이상해. 그치?”

“뭐가 말이냐.”

“사람들이 우릴 보고 다들 숨잖아. 왜 저러지?”

“내가 아나. 알다시피 난 바깥세상이 처음이다. 삼십 년 전에도 와 봤다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닌가?”

“제국으로 이렇게 들어온 건 나도 처음이란 말야.”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대화는 이시브에게 들리지 않았다. 물론 그는 주변의 광경에도 신경을 주지 않았다. 크로이언 시에서 살고 있는 그로서는 이 모습들은 딱히 신경 쓸 가치도 없는 흔한 풍경이었으니까.

그저 그는 앞만 보며 사령부로 향했다.

도시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사정은 나아졌다. 급격하게 주택이 좋아지고 거리의 행색도 나아진다. 깔끔한 길이 나타나는 듯하더니 좋은 옷을 입은 이들이 심심찮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높게 피워 올린 가로등 대용의 횃불들은 미연이 30년 전에 본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 왔습니다. 이곳이 북부 주둔군의 사령부입니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벽 안, 도시의 중심에 또 하나의 성이 서 있었다. 독립 전쟁에서 미연이 몇 번이나 정복한 바 있는 제국 남부의 성과 비슷한 모습의 성이었다. 지구의 물건과 비교하자면 스위스나 독일 등지에 남아 있는 고성과 비슷한 형태다. 태진이 인터넷에서 찾아 준 그 사진들을 떠올리며 미연은 미소라를 힐끔 돌아보았다.

“너, 저런 성도 처음 보지?”

“……일일이 시비 거는 것도 지겹지 않나?”

“전혀 안 지겨운걸.”

히죽대면서 미연은 이시브의 뒤를 따라 말을 움직였다.

성에 가까이 가자 병사들 몇 명이 뛰어나와 이시브를 멈춰 세웠다.

“이곳은 크로이언의 사령부입니다! 누구십니까?”

“사령부 소속 이시브 소령이다. 군단장님의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고 지금 복귀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깍듯이 예를 갖추고 한 병사가 성으로 다시 뛰어갔다. 곧이어 헐레벌떡 달려오는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통과하십시오!”

“수고해라.”

이시브는 미연과 미소라에게 보여 주었던 친근한 미소는 일체 배제한 채 성문을 통과했다.

“우와, 딱딱해…….”

“저 자도 제국군 중 한 명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두 사람은 성안에서 곧바로 말을 내렸다. 이시브도 말을 내려 미연과 미소라를 성 안쪽으로 안내했다.

3층까지의 길을 올라가며 미연은 수많은 병사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이시브에게 경례를 붙인다든지 살갑게 인사를 하고, 그 다음 미연과 미소라를 본 다음 잠깐 얼굴이 굳었다가, 지나간 뒤에 수근거린다.

태진이라면 감각을 넓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미연이 느끼는 것은 한 가지였다.

의심과 적대감.

북부 주둔군의 사령부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뻔했다.

“아무래도 너에 대한 소문이 다 퍼진 것 같군.”

“미소라, 너도 꽤 주목받고 있는걸.”

“너만큼은 아니다.”

두 사람은 확실히 튀었다. 온통 제복 투성이인 이곳에서 검은 머리와 은발 머리의 대조, 거기다 제국민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복장. 이시브를 앞세우고 걷고 있지 않았더라면 거수자로 붙잡혀 가도 할 말 없을 두 사람이었다.

이시브는 화려한 나무문 앞에서 멈춰 섰다.

당번병이 뛰어나와 이시브를 맞이하더니 안쪽으로 들어가 큰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이시브 소령이 복귀하였습니다!”

문이 열리고 이시브와 미연, 미소라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화려한 방이었다. 미연은 신기한 물품이라도 발견한 듯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는 백발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미연을 쳐다보았다.

“……과연.”

첫마디가 그랬다.

“듣던 대로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군. 그 옆의 청년은 미소 족인가?”

“리트미소의 장로의 부탁으로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이 이곳의 군단장인가? 장로님의 전언이 있다.”

미소라는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군단장은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뭔가, 미소 족의 청년이여.”

“앞으로 미소 족에게는 손대지 마라. 이상이다.”

군단장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 우리도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있다. 물론 작전 실패에 대한 반성은 아니다.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그 점만은 알아주길 바란다, 미소 족의 청년.”

“반성은 필요 없다. 우리에게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겠다, 그것에 대한 확고한 약속만을 해 주면 된다.”

“오랫동안 판게리츠 안에서만 틀어박혀 살더니 남과 교류하는 법을 잊었나 보군, 미소 족도. 이런 청년을 사자로 보낸 건가?”

군단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단련해 온 듯이 탄탄한 몸이어서 미연은 솔직하게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군단장이 잠깐 그녀를 쳐다보았다가 미소라에게 말했다.

“좋아, 약속하지. 이것은 북부 주둔군의 군단장으로서 미소 족 전체에게 하는 약속이다. 이제 됐겠지?”

“그 약속, 죽을 때까지 지키길 바란다.”

“국가 앞에서는 파리와도 같은 목숨이지만, 지키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군단장은 미소라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그것은 미소라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가볍게 한발 물러서는 걸로 그것을 대신했다. 이시브는 문 옆에 서서 군단장의 모든 행동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미인이군. 정말 자네가 투신의 전사인가?”

미연은 언제나처럼 순순히 대답했다.

“맞아. 맞다고 하더라도 믿어 주는 사람은 잘 없지만. 장로님 빼고.”

“삼십 년 전 로츠왈드 독립 전쟁 당시에도 난 이 북부 주둔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남부의 전쟁에 직접 참여할 기회는 없었지. 그렇지만 훗날 두 명의 신의 전사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알아주니 고맙네. 그럼 당신도 믿어 주는 거야?”

“그건 다른 문제지.”

군단장은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시브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믿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파제스가 작전의 실패를 무마하기 위하여 잘못된 보고를 올렸다고 여기는 편이 옳습니다.”

“그렇지. 저것이 현재 우리 크로이언의 입장이다. 이름이?”

“신미연.”

“이름도 동쪽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이름이군.”

“실제로 왔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미연은 조금 짜증이 떠오른 얼굴로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그래서 당신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 그렇다면 왜 나를 여기까지 부른 건데?”

“보고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단신으로 막아 낸 여전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별게 다 보고 싶대. 나 혼자서 막은 것도 아냐. 미소라가 없었으면 힘들었어.”

“힘들었을 뿐 무리는 아니었다는 이야긴가? 자신감 있는 태도가 맘에 드는군.”

“태진이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사실을 말하는 데 자신감 같은 건 필요 없어.”

군단장은 이시브에게 잠깐 눈짓을 던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다면 신미연 양. 자네를 시험해 보고 싶다.”

“시험? 무슨 시험?”

“자네가 정말 투신의 전사인지 아닌지 말이야.”

미연은 픽 비웃음을 던졌다.

“거절할래. 내가 왜 그딴 시험을 받아야 하는데? 너희들에게 투신의 전사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어.”

군단장은 단호한 미연의 태도에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검을 다루는 자로서 그 위용은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안 되겠나?”

“싫어. 귀찮아. 안 해.”

어린애가 투정하듯 미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슬쩍 거리를 벌리는 미소라의 팔을 붙잡아 강제로 끌어당기다가 둘이서 또 말다툼이 벌어진다.

군단장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군. 부하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며칠 이 도시에서 머무르면서 구경이라도 하고 가지 않겠나? 이 미소 족의 청년은 미소 족을 대표하여 바깥세상을 알기 위해 나온 것이라고 하던데, 분명 도움이 될걸세.”

미연은 미소를 쳐다보았다. 그녀로서도 그렇게 내키지 않는 제안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는 미소라의 눈빛을 보다가 그 속에서 같은 의견을 읽었다.

“좋아, 밥과 잠은 그쪽에서 해결해 주는 거지?”

“물론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시브가 준비하러 나갔다.”

군단장은 깔끔한 태도로 말했다.

“크로이언 시에 온 것을 환영한다. 투신의 전사, 미소 족의 청년.”

군이라는 곳은 어느 소설의 이율배반적인 성비를 갖춘 나라가 아니고서야 기본적으로 남성의 비율이 극히 높은 곳이다. 타고 난 전투 인원만을 만들어 내기 위해 건립되고 훈련하는 그곳에서 여성들이 살아남기란 지극히 힘들다. 그것은 여성 차별적 발언이 아닌, 결국 진실 그대로의 이야기다.

미연도 한국의 군대를 이야기로나마 간접 체험을 해 봤기에 알고 있고, 2년 전에는 직접적으로 지휘를 해 본 적도 있기에 실상을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이시브의 안내로 사령부를 나온 후 가까운 간부 숙소에 자리를 잡은 미연의 인기는 어느새 하늘을 찔렀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이시브의 방문으로 미연과 미소라는 식당까지 안내되었다.

미소라가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었다.

“기분 나쁘군. 왜 저렇게 우리는 쳐다보고 있는 건가?”

“신기한 겁니다. 미소 족은 흔히 볼 수 있는 민족이 아니니까요.”

“그것뿐만이 아닌 거 같군.”

미소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병사들 대부분의 시선은 미연을 향해 있었다. 눈에 띄는 흑발인데다 원래 미녀는 앉아 있기만 해도 눈 띄는 것이다.

물론 본인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이미 크로이언 시 전체에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최고 외곽에 위치한 부대에서도 눈으로 보고 싶다고 요청해 오고 있으니까요. 아마 오늘 중에 많은 이들이 사령부에 방문할 듯합니다.”

“한가하군?”

“삼십 년 전 이후로 이렇다 할 분쟁이 없으니까요. 간단히 반란군이 나타나는 것 외에는.”

친절하게 대답하며 이시브는 식사를 이어 나갔다. 미소라는 여전히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미연을 쳐다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밥이 잘도 넘어가는군.”

“밥이 넘어가야지 도로 올라오면 안 되잖아. 왜? 밥 안 먹어? 이 닭고기 수프 꽤 맛있는데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어치운다?”

대답도 듣기 전에 냉큼 미소라의 몫을 가져가 버리는 미연. 미소라는 질린다는 얼굴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많은 시선이 그들을 향해 있었다.

문득 이시브에게로 한 병사가 달려와 귀엣말을 전했다. 이시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군단장님이 부르시는군요. 식사하고 계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미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그는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미연의 식사도 끝이 났다. 배가 부른 듯 기분 좋은 얼굴이 되었다.

“맛있는걸. 간부 숙소라서 그런가?”

“나한테 물어도 난 그 차이를 알 수 없다. 너의 경험으로 봐서는 어떤가?”

“야전 취사보다는 훨씬 나아. 그래 봤자 태진이가 손수 만들어 준 음식에는 못 따라오지만.”

“하나 묻겠는데, 네가 있던 세계에서는 남자가 요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인가? 태진이라면 현신의 전사라고 알고 있는데, 그 정도 전사도 요리를 해야 하는 건가?”

“현신의 전사하고 요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 태진이가 요리를 하는 건 내가 안 하기 때문이야. 난 요리에는 소질이 없거든. 나중에 결혼하면 둘 중 하나는 밥을 해야 하니까 자기가 하겠다고 언젠가부터 시작하더라구. 꽤 잘해. 다음에 만나면 먹여 줄게.”

자기가 한 음식도 아니면서 선심 쓰듯 말하는 미연이었다. 미소라는 고개를 저었다. 현신의 전사를 직접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여자에게 꽉 잡혀서 아무런 말도 못할 것은 틀림없다.

현신의 전사 뭐다 하면서 남들이 떠받들어 주긴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남자일 뿐일 것이다.

그렇게 지레짐작하는 미소라와 열심히 태진의 칭찬을 늘어놓고 있는 팔불출 미연의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미연의 말이 끊겼다.

“누구야, 넌?”

“……초면에 대뜸 반말이라. 과연, 투신의 전사를 자칭할 만합니다. 대단합니다.”

“너나 초면에 친한 척 그런 말 던지지 마. 누구야, 너?”

딱히 적의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다가온 사내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전 이곳 크로이언 사령부 소속의 우퍼 대위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어제 사령부에 도착했다던 소문의 그분들이십니까?”

“무슨 소문?”

“리트미소 작전을 무용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두 분 말입니다. 두 명이서 백여 명의 군사를 막아 냈다고 하던데, 여건이 되신다면 그 무용담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미소라는 잠깐 눈을 돌렸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세 명의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낮은 목소리로 소곤대고 있었다.

바깥세상의 경험이 부족한 미소라지만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미연에게 넌지시 알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 그러지 뭐. 앉아, 앉아.”

의심 한꺼풀 없는 태도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는 미연이었다. 미소라는 속으로 한숨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여기보다는 밖으로 나가서, 정겨운 아침 햇살을 맞으며 이야기하는 건 어떻습니까? 식후 산책은 몸에 좋은 운동이 됩니다.”

“아, 그거 좋다. 산책로라도 있어?”

“나가면 금방입니다. 가시죠.”

우퍼는 마치 이시브를 따라하는 듯 웃으며 손을 들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뒤따라 일어나는 세 명의 병사. 미연이 경계심도 없이 총총히 따라가는 모습을 보며 미소라는 혀를 차며 걸어갔다.

우퍼 대위가 이끄는 길은 좋은 산책로였다. 그 길을 걸어가며 미연은 그날 밤의 전투를 말했다. 말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우퍼와 그 동료들은 매우 호의적인 태도로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듣고 있었다.

미소라의 예감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 불길함은 결국 맞아 떨어졌다.

“자아, 여기까지 왔으니.”

미연의 말을 자르며 우퍼가 멈춰 섰다. 미연과 미소라의 뒤쪽으로 세 명의 병사가 선다. 미소라는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별거 아닙니다. 다만 당신들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오고 싶었을 뿐. 실패한 작전 이야기 따위, 그런 의도 외에는 쓰일 데가 없지 않겠습니까?”

“목적은 뭐지?”

우퍼는 피식 비웃음을 떠올렸다.

“제 상관이 파제스 님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복수인가.”

“속인 거구나, 너희들.”

미연이 가만히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그 행동에는 역시나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다. 이곳까지 따라왔을 때와도 전혀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미소라는 낮게 물었다.

“알고 있었나?”

“느끼고 있었어. 이런 종류의 것들은 다가오는 느낌부터가 다르거든. 사람 많은 식당에서 피를 볼 순 없잖아?”

간단히 대꾸하면서 미연은 우퍼를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원하는 건 내 목숨?”

“너뿐만이 아니다, 흑발의 여자. 네년 옆의 미소 족 놈도 마찬가지다. 상관의 원수를 갚는 것이 부하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멍청한 상관에 멍청한 부하구나. 어울리네.”

“뭐라고! 죽고 싶은 거냐, 이년!”

“웬만큼 멍청하지 않고서야 군사 지역 안에서 살인을 하려는 생각은 안 해. 적당히 생각할 줄도 알아야지 정말. 말해 두지만 덤벼온다면 거절하지 않아. 말로 설득한다는 건 이미 삼십 년 전에 포기했어.”

“삼십 년 전이라…… 네년이 정말 투신의 전사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구나.”

“확인해 보시든가?”

아직 검도 뽑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미연은 마음껏 도발했다. 미소라는 근육을 긴장시키며 언제든지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앞뒤로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의 병사.

미소라는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장로의 말을 떠올렸다.

“미연 님을 옆에서 잘 보호해 주세요.”

……보호할 일이 빨리도 일어나는군. 그는 품속의 단검을 향해 손을 뻗을 준비를 마쳤다.

우퍼를 비롯한 병사 네 명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우퍼의 검이 가장 먼저 미연에게로 도달했다. 뒤쪽에 서 있던 미소라가 단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물러서라!”

미연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붙든 후, 미소라는 내려치는 검을 단검으로 방어했다. 그리고 곧장 밑으로 검날을 긁으며 파고들어 복부에 발을 차 넣는다!

“크윽!”

우퍼가 고통의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났지만 다시 공격해 왔다. 미소라는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고서 결코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휘둘러 들어오는 검격의 궤도 안쪽으로 쇄도, 손목에서부터 공격을 방어하고 목덜미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푸욱!

피가 분출되기 직전 단검을 뽑아 내며 미소라는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그는 아직 세 명이 남았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가 본 장면은,

털썩―

세 명의 병사가 동시에 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이었다. 미연이 오른쪽 위로 칼을 들어 올린 자세에서 팔을 내렸다.

“약해. 고작 이 정도로 덤벼 온 거야?”

미소라가 한 놈을 상대하는 중 세 명을 간단히 베어 버린 것이다. 미소라는 그제야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리고 속으로 장로의 말을 곱씹었다. 이런 여자를 굳이 보호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로님?

칼을 집어넣고서 미연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미소라에게 돌아섰다.

“식후 운동도 안 되겠다. 그치?”

“……그럴지도.”

아침부터 사람을 죽여 기분은 찜찜하지만 어쩔 수 없다. 미연과 미소라는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다시 뛰어가는 동안, 나무 뒤에서 그들의 싸움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나와 시체들을 하나씩 살폈다.

“대단하군…… 한 번의 발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세 명 다 급소를 꿰뚫렸어. 이쪽의 단검술도 무시할 수 없고.”

차근차근 시체를 확인하는 사나이. 그는 이시브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이미 미연과 미소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굳은 얼굴로 혀를 찼다.

그는 우퍼가 미연과 미소라에게 접근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자리를 비운 뒤 그들의 접근을 유도했다. 그래야만 미연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단장이 의도한 바와 똑같았다.

“군단장님께 보고드릴 일이 늘었군.”

이시브는 긴급히 군단장의 집무실로 향했고 안으로 들어가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조금 전에 우퍼와 신미연 간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손쓸 새도 없이 일회의 발검만으로 간단히 쓰러뜨렸습니다. 직접 지켜보았지만 검세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시브, 자네 정도의 검사가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사실이겠군. 그 여자가 투신의 전사라고 보나?”

“본인이 아니라면, 그에 상응하는 실력자라고 생각됩니다.”

군단장은 고심하는 얼굴로 테이블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잠시 후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이시브의 옆으로 와 낮게 말했다.

“이시브 소령. 자네는 지금 당장 수도로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라. 알겠나? 어느 누구도 만나면 안 된다. 곧바로 수도 주둔군 사령부로 가서 군단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보고 내용은?”

“투신의 전사가 나타났다.”

짤막한 군단장의 말에 이시브는 이마 깊숙이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는 수송대에서 가장 빠른 말을 빌려 단숨에 수도를 목표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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