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32)

여섯. 오랜만입니다

아리스는 황망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처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지, 내가 왜 흙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거지? 눈도 깜빡이지 못하며 태진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내려주지 않았다. 두건을 쓴 모습으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웬 놈이냐!”

갑작스런 여자의 등장. 오랜 도주 생활로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아리스의 복장은 더 이상 귀족의 품위를 나타내 주지 못했다. 거기다 주위까지 어두웠다.

순식간에 사방을 둘러싼 남자들의 반응에 아리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허리춤을 만졌지만 검이 없었다. 태진이 그녀를 넘어뜨리기 전 교묘하게 그녀의 검을 빼낸 것이다.

“뭐야? 여자? 어떻게 이곳에 들어와 있는 거지, 네년!”

“수상하다! 이 여자를 붙잡아라!”

“잠깐― 앗!”

아리스가 비명을 치려는 그 순간 어둠 속에 태진이 달려 나왔다.

“누나!”

아리스는 한 번 더 황망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아리스는 눈을 감은 채 어둠 밖으로 뛰어나오는 태진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누, 누나! 괜찮아!? 야, 야 이 자식들아! 우리 누나를 건드리지 마!”

맹렬히 달려 나오더니 그가 남자의 등에 쿵 하고 부딪힌다. 옆으로 넘어져 엉망으로 구르고, 어느새 아리스의 발 앞까지 닿는 태진. 다시 벌떡 일어선 태진이 아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소리쳤다.

“다친 데 없어 누나!? 왜 거기서 넘어지고 그래! 여기가 어딘지 몰라!? 조심했어야지!”

“……에? 에?”

“괜찮아, 누나! 내가 누나를 지켜 줄 거니까! 우린 그냥 마차만 얻어 타면 되는 거잖아! 내가 설득할게. 괜찮을 거야, 누나!”

도저히 이야기의 진행을 따라갈 수가 없다. 30년 분의 세월의 노도를 하루 만에 얻어맞은 듯한 얼굴의 아리스를 내버려 두고 태진은 남자들을 향해 돌아섰다.

딱히 누구에게 했다 할 것도 없는 시선으로.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저흰 그냥, 이곳 마차를 타면 수도까지 몰래 갈 수 있다기에! 그런 이야기만 듣고 온 것뿐이에요!”

“……뭐야, 이 자식. 장님인가?”

눈을 감은 태진의 얼굴을 보고서 남자들이 수군거렸다. 그중 하나, 이마에 기다란 상흔을 가진 남자가 일부러 큰 발걸음 소리로 걸어 나왔다.

“너희들. 그런 얘기는 누구에게서 들었지?”

“저, 저기 누, 누나 말로는 폐가 같은 곳에 있던 남자였어요. 저, 전 눈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듣고만 있어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남자 분이 이곳에 오면 수도로 가는 마차가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냥!”

“지금 비문 맡고 있는 놈이라면 빌리 자식이지? 그 개자식,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나중에 두목님한테 데리고 갈 테니까, 그 자식 불러와.”

눈을 돌린 남자는 다시 태진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네놈들이 우리 마차를 탈 거라고?”

“예! 제발 태워 주세요! 저흰 수도로 꼭 가야 해요!”

“왜 가야 하지?”

“어머니가 수도로 가셔서 돌아오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저흰 수도로 가야 해요!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요!”

“어머니가 왜 수도로 가셨지?”

거기서 태진의 얼굴이 굳었다. 뭔가 굉장히 주저하는 듯한 얼굴을 만들었다가 이내 힘겹게 대답을 토해 낸다.

“……팔려 가셨어요, 노예로.”

“뭐? 집에 돈이 없었나?”

“가난해요, 저희 집. 어느 날 돈을 벌러 다녀오신다고 나가시고서…… 다시 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어머니가 노예로 팔려서 수도로 갔다고…… 그 말만 들었어요.”

“호오, 과연. 그렇군. 그래서 수도로 가는 마차를 타고 싶다는 거지?”

“예, 제발 태워 주세요! 무슨 짓이든 할게요!”

“……흠. 너 임마. 한 가지만 말해 주지. 여기가 어딘 줄 아냐?”

“그, 글쎄요. 여기가 어디죠?”

“모르니까 여기로 왔을 테지. 이봐, 누나라는 계집. 넌 여기가 어딘지 아나?”

갑작스레 지명당한 아리스는 허겁지겁 고개를 흔들었다. 태진의 생각이 도저히 보이질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 남자는?

남자는 피식 웃더니 급기야 동료들과 같이 폭소를 터뜨렸다. 태진은 얼어붙은 채 아리스의 손을 붙잡았다. 불안해하는 동생의 모습. 딱 그런 모습이었기에 남자들은 여유를 잃지 않고서 이죽댔다.

“이곳이 너희 어머니를 팔아넘긴 노예 시장 본부다.”

“……네!? 설마요!”

“우리 두목께서는 이런 말을 즐기시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 지금이 딱 그 꼴 아니냐. 자기 어머니를 팔아넘긴 집단으로 찾아와서 수도까지 마차를 태워 달라고? 니들이 탄다는 마차가 어떤 마찬지는 아냐? 수도로 팔린 노예를 운송할 마차다. 그 마차에 태워 달라는 건 노예가 되고 싶다는 말이겠지?”

“아, 아니요. 그, 그건 아니에요!”

“……훗! 아니긴 개뿔이. 빌리 놈이 왜 이것들을 들여보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야, 이것들 붙잡아!”

남자들이 대번에 달려들어 아리스와 태진을 옭아맸다.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밧줄에 묶인 아리스, 그리고 몸을 흔들다 남자들에게 찍어 눌려 흙바닥과 볼을 맞대게 된 태진.

둘을 내려다보면서 남자들은 흉흉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완전히 잘못 찾아오셨어. 온정을 베풀어 너희 어머니가 팔려간 곳에 같이 팔아 주지. 애미 이름이 뭐냐?”

“크, 이, 이 나쁜 자식들!”

“입이 더럽구나.”

남자는 태진의 턱을 걷어찼다. 피가 튀고 태진의 목이 옆으로 픽 꺾인다.

“기절한 건가? 어이, 누나. 꽤 이쁘게 생겼네? 어머니 쪽도 제법 생겼을 것 같은데, 그런 꽤 좋은 창부로 팔려갔을지도 모른다. 너도 같은 집에 팔아 주마. 모녀가 훌륭한 창부가 될 것 같군. 너희 어머니의 이름이 뭐지?”

아리스는 떨리는 눈으로 태진을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현신의 전사님,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때 태진의 눈이 가늘게 떨리더니 열렸다. 남자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태진은 눈을 깜빡이며 아리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리스는 그 눈빛을 읽고 침을 삼켰다.

“캐롤라인…… 이에요.”

“캐롤라인이라. 흔한 이름이군, 찾는 데 좀 시간이 걸릴 테니 그때까지 너희들은 이 노예들과 같이 있어라.”

태진과 아리스는 그대로 노예들과 함께 마을 감옥에 갇혔다.

철창을 잠그고 보초를 두고 남자들이 사라지자 기절한 척 있던 태진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혀로 입안을 씻은 다음 옆으로 퉤 뱉어 내고 앉았다.

“괘, 괜찮아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리스야말로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갑작스럽게 일을 벌여서 죄송한 생각이 듭니다만.”

“……생각만 드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늦은 사과를 하는 태진. 주변의 노예들이 미묘하게 표정을 바꿨다. 남매 행색을 했던 방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 때문이었다. 누나와 엄마를 걱정하는 동생이자 아들의 모습을 충실하게 연기한 그때와 달리, 태진은 자세부터 달랐다. 팔이 묶였지만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보일 정도의 강렬한 눈빛.

“대체 왜 그런 연기를 하신 거죠? 조금이라도 귀띔을 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일단 이 노예들 사이에 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리 말하고 연기를 부탁했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쳤을지도 모릅니다. 아리스는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을 만한 경험이 아직 없죠? 부탁했다면 할 수 있었습니까?”

“……글쎄요.”

“그래서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낸 겁니다.”

아리스는 인정은 했지만 왠지 억울한 기분을 곱씹었다.

“일단 목적은 이루었네요. 우리도 똑같이 노예로 팔려가게 생겼으니까요. 흔한 이름을 댄 건 적절한 판단이었나요?”

“훌륭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캐롤라인이라는 이름의 노예를 찾아내기 위해서 명부를 뒤질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두목을 만나야 할 거고, 두목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전할 겁니다.”

“이 모든 연기는 그것을 위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놈들이 찾아올 겁니다.”

태진은 진득하게 앉은 채 그렇게 단언했다.

그때 흉터의 남자는 태진의 예상대로 명부를 찾기 위해 두목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을 깊숙한 곳, 산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두목의 집은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통과해, 곧바로 두목의 방을 노크했다.

“두목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게르인가요? 들어오도록 해요.”

게르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을 정리하고 있던 두목에게 인사를 하고서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전에 웬 놈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두목, 키드카는 서류를 책상에 집어넣으며 일어섰다. 게르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키드카가 굳은 얼굴로 게르에게로 똑바로 걸어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두, 두목님?”

“지금 당장 그 아이들을 내 앞으로 데리고 와요!”

“네, 네!”

뭣도 모르고 대답한 게르는 단숨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감옥으로 허겁지겁 뛰쳐 간 그는 보초와 함께 철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노예들 속에서 태진과 아리스를 발견한 그는 보초에게 말해 그들을 끌어냈다.

“두목이 너희들을 부르신다. 따라와라!”

보초 한 명을 대동한 채 게르는 태진과 아리스를 이끌고 다시 키드카의 집으로 향했다. 아리스는 태진의 예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남자들 쪽에서 둘을 데리러 왔다. 그렇다면 태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걸까?

그들은 곧 키드카의 집에 당도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순간 키드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반해 태진은 여유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키드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리스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게르, 나가 있어요.”

“두, 두목님?”

“빨리 나가요. 다시 부르죠.”

“아,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키드카의 기세에 밀려 게르는 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그의 인기척까지 모두 사라지자 키드카는 그제야 닫힌 숨통을 터뜨리듯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태진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키드카.”

“정말인가요? 도, 돌아오신 건가요?”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시 못 볼 거라고 말해 놓고 이렇게 만나는 걸 보니 인연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사뭇 드는군요.”

그것은 분명히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대화였다. 아리스는 급히 태진의 팔을 붙잡아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죠, 이건? 노예 시장의 두목을, 태진 님이 어떻게 아시는 거죠?”

“삼십 년 전에 만났었습니다. 바로 이 노예 시장에서, 미연이를 구출하기 위해 숨어들었을 때였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우리의 침입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일은, 분명히 현신의 전사와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키드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30년 전. 그녀는 열 살의 어린 꼬마였다. 평범하지 않았다면 노예 시장을 움직이는 아버지를 두고 자라 어려서부터 뒷세계를 알고 있다는 점일까.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태진이 나타났다. 미연을 구하겠다는 그 의지에 진 그녀는 그를 도와주었다. 속속들이 알고 있던 노예 감옥의 위치를 알려 주었고, 그 결과 그날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은 처음으로 외부의 침입을 허용했다.

그 후 태진은 현신의 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을 사멸시켰다. 그때 다시 태진을 만난 키드카는 그에게 감화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0년 후, 그녀는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약속, 지켜 주어서 감사합니다.”

“현신의 전사…… 강태진…….”

키드카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오켈라니아 남작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바로 태진과 아리스를 가리키는 일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라면 가능하다. 그 변태 남작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수비대를 모두 따돌리고 도망치는 것도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미켈파 남작에게 붙잡혔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난 이번에도 현신의 전사를 사칭하는 자라고…… 잡힌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부끄럽습니다, 그 일은. 다시 이 땅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하고 섣불리 행동하고 말아서, 그런 일을 당한 겁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삼십 년이 흘렀는데…… 당신은 그때 그대로로군요, 태진.”

자신만만한 태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게다가 그 자신감을 뒷받침해 주는 능력까지.

키드카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없는 아이나 가족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한다. 그 점을 알기에 태진은 그런 연기를 꾸며 낸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명부를 쥐고 있는 키드카에게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고 도움을 주려 할 것이다.

모든 것이 태진이 계획한 그대로였다.

“뭐,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키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알겠어요. 수도로 데리고 가 달라는 말이군요.”

“예나 지금이나 명석하셔서 다행입니다. 우린 급히 수도로 가야 합니다. 도보로는 위험하기에 당신의 마차를 빌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당연해요. 다른 누구도 아닌 현신의 전사, 당신의 부탁이라면 돕지 않을 수가 없군요.”

“고맙습니다.”

태진은 예의를 갖추어 머리를 숙였다. 깍듯한 동양식 인사. 그것은 30년 전 신의 전사에 의해 왕국에 퍼진 이후 로츠왈드식 예법으로 자리 잡았다.

키드카도 똑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인 후 마차의 이동 일정을 이야기했다.

“부하들에게는 미리 말해 두겠어요. 여러분들은 수도에서 그냥 내리시기만 하면 될 거예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문을 나서기 전 키드카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수도로 가시면 전 어떻게 해야 하죠?”

“기다려 주십시오. 도착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부탁한 일, 지금까지처럼 잘해 주시기 바랍니다.”

“맡겨 두세요. 그것은 이미 제 사명이니까요.”

키드카는 웃음을 지었다. 태진은 목례를 하고 그녀의 방을 빠져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게르와 감옥으로 돌아간 후, 태진과 아리스는 이튿날 동이 트자마자 노예들과 같이 마차에 올랐다. 그때 게르와 다른 동료들이 태진을 보는 눈빛은 분명히 어젯밤과는 달라져 있었다.

마차가 출발한 이후 아리스는 중요한 것을 질문했다.

“제 검은 어떻게 하셨죠?”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정말이지.”

어쩌면 상당히 엉뚱한 남자일지도. 아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둘을 태우고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의 마차는 수도로 향했다.

***

마차는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창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마차였다. 그 안에서 아리스가 알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흔들린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에 비해 감각을 넓히고 있던 태진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차가 떠난 지 5일째. 그동안 키드카의 언질이 있어서인지 그들은 일반 노예와 다른 대우를 받았다.

휴식 시간이면 마차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쐴 수도 있었고 식사도 꼬박꼬박 챙겨 주었다. 덕분에 아리스는 정보를 몰라 답답하기보다는 다른 노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휴식 시간이 찾아오고 마차 문이 열렸다. 태진과 아리스는 남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차 밖으로 나왔다.

“저 사람들한테 미안하네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요.”

“지금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십시오.”

굳게 잠기는 마차의 문을 뒤돌아보며, 아리스는 그 사이로 보인 어린아이의 눈동자를 가슴에 새겼다.

태진은 선두의 남자에게 다가가 진로를 물었다. 키드카의 직속 부하이며 이번 마차행의 리더이기도 한 게르는 그날 이후로 태진을 두목 대하듯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마차 안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두목의 명령도 있긴 하지만 마음이 불편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 질문도 벌써 스무 번째입니다. 이제 익숙해졌고 이쪽이 더 안전하니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미행하던 자들이 있던데, 처리하셨습니까?”

“알고 계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때문에 잠시 멈추기로 한 겁니다. 휴식을 가장한 퇴치랄까요. 조금 기다리면 부하들이 그놈들을 잡아올 겁니다.”

“어떤 놈들입니까?”

“현상금 사냥꾼인 듯합니다. 그들은 뒷세계의 정보에 정통하니까 눈치를 챈 걸지도 모릅니다.”

현상금 사냥꾼들은 이제야 어떤 정보를 입수하고 이 마차를 쫓는 걸로 보였다.

“이 마차행의 정체는 알고 있겠습니까?”

“글쎄요,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는 봐집니다만. 부하들이 데리고 오면 한번 심문해 보도록 하죠.”

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마차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리스가 남자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그가 오자 얼굴을 돌렸다.

“무슨 일 있나요?”

“별일 아닙니다. 현상금 사냥꾼들이 우리의 위치를 눈치 챈 것 같습니다. 그들을 붙잡기 위해 휴식으로 위장한 것 같습니다.”

“어쩐지 경계가 심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런지 묻고 있었거든요.”

그들이 이야기하던 도중 산길 저편에서 게르의 부하들이 달려왔다. 뒤로 다섯 명의 현상금 사냥꾼을 포박한 채였다.

“게르 님, 이놈들입니다!”

흙바닥을 뒹구는 남자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살핀 후 게르는 물었다.

“이틀 전부터 네놈들이 우리를 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현상금 사냥꾼들인 것 같은데 왜 우리를 미행하고 있는 거지?”

“흥! 왜긴 왜야! 그 이유는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모른다. 우리는 평범한 상단일 뿐, 네놈들한테 미행당할 이유 같은 건 없어.”

“평범한 상단은 개뿔! 요즘 상단은 사람도 사고파나 보지?”

뒤쪽에서 듣고 있던 태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지금 뭐라고 했냐?”

“네놈들이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 놈들인 건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현상금 사냥꾼이 아냐! 우리는 정보꾼들이다. 네놈들의 진로에 대한 정보를 사 줄 자들이 있거든!”

“뭐라?”

게르는 눈길을 돌렸다.

“이 자식들, 이게 전부였나?”

“그, 그게, 한 명을 놓쳤습니다.”

“멍청한 자식들!”

게르는 정보꾼들을 잡아 온 부하를 용서 없이 두들겨 팬 다음 곧바로 검을 뽑았다. 정보꾼들의 눈이 움찔한 것도 잠시, 게르의 검 아래 모두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리스가 숨을 삼켰을 때 게르는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아 내며 호령했다.

“출발한다. 진로를 바꾸겠다! 길은 세 번째!”

그는 태진에게도 설명했다.

“진로를 바꾸겠습니다. 좀 돌아가게 되겠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바로 출발할 테니 마차에 다시 올라주시겠습니까?”

태진은 아리스와 함께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출발했고 지금까지와 비교되게 속도를 올렸다. 노예들이 수군대는 사이에서 아리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정보꾼들이 정보를 판다는 곳이 어딜까요?”

태진은 말하지 않았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았기에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정보부에서는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의 정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습니까?”

“고작해야 위치와 규모 정도예요. 두목이 여성이라는 것도 알고 있긴 하지만 정확한 신분은 파악되지 않고 있지요. 그것은 왜 물으시죠?”

“계속 소재 파악은 당연히 하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있습니다.”

“가능성?”

“정보꾼들의 고객은 왕국 정보부일 겁니다.”

확률로 따지자면 70퍼센트 정도의 정답일 것이다. 태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 하지만 정보꾼들도 일단은 범죄자예요. 정보부가 범죄자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가요?”

“현 왕궁 정보부 장관이라면 가능합니다.”

아리스는 태진이 지목한 그 사람을 떠올렸다. 달리 다른 얼굴을 떠올릴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인 하이듀크 뤼스필드였으니까.

“……아버지가, 정보꾼들의 정보를 산단 말인가요?”

“물론 기밀로 행한 일일 겁니다. 한 나라의 정보부 장관이 범죄자의 도움을 빌린다는 게 알려지면 큰일이니까. 그렇지만 가능한 방법이라면 더럽든 말든 써 보는 것이 하이듀크의 성격입니다. 아닙니까?”

아리스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이듀크는 그런 사람입니다. 삼십 년 전과 지금이 변하지 않았다면…… 물론 변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 딸을 본다면.

태진은 그 말만큼은 속으로 삼킨 후 눈을 돌렸다. 마차의 벽에 가렸지만 그 눈길은 마차의 진로를 끊임없이 훑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정보꾼 한 명이 살아서 도망쳤다고 하니 며칠 안에 반응이 올 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제가 할 일일 겁니다.”

물론 그의 말을 적중했다.

이틀 뒤 돌연 게르는 마차를 멈췄다. 정지한 후 웅성대는 부하들에게 손을 뻗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평범한 산길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오솔길이 이어져 있고, 이 고개만 넘어가면 곧장 수도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나기에 게르는 이곳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달랐다. 평소의 분위기와 어딘가 모르게.

노예 시장에서의 오랜 생활이 가르쳐 준 본능이었다. 그는 동물적인 위험을 감지했다.

“모두, 전투 준비!”

그 말을 외치는 순간 그들의 사방을 둘러싼 나무들 사이에서 수십 명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조! 공격!”

사방에서 활이 날아들었다. 게르는 급히 화살 하나를 쳐낸 후 마차 뒤로 몸을 날렸다. 그가 타고 있던 말의 눈에 화살이 날카롭게 박히며 말이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말이 만들어 낸 흙먼지와 화살을 피해 게르는 철로 뒤덮인 마차 뒤로 숨었다.

“숨어라! 몸을 숨겨라!”

그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부하들은 필사적으로 화살을 피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워낙에 갑작스런 습격이었기에 벌써 몇 명이 화살에 죽어 나간 후였다.

시체가 되어 쓰러지는 부하들을 보며 게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에게 부하 하나가 기어서 다가왔다.

“게르님! 저 자식들인 것 같습니다! 그, 정보꾼들이 정보를 팔았다던……!”

“나도 알아, 이 개자식아! 정보부 기동대 놈들이다!”

“예에!?”

그 순간 화살의 비가 끊겼다. 게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을 뽑아 들며 마차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이 조! 돌격하라!”

궁병들이 뒤로 물러나고 곧바로 뒤쪽에서 돌격병들이 나타났다. 수풀을 해치고 나타난 기사들이 검을 빼들고 양옆에서 마차를 덮쳤다.

“응전하라! 싸워라!”

게르는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눈에 보이는 기사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마차 뒤에 숨어 있던 부하들도 곧바로 기동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 소란은 고스란히 태진과 아리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노예들이 본격적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때 태진과 아리스는 눈을 마주쳤다.

“이 소리는……!?”

“전투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정보부 기동대와 싸움이 벌어진 듯하군요.”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태진은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리스는 훨씬 감정적이었다.

“나, 나가야 해요!”

일어서려는 그녀의 손을 태진이 붙잡았다.

“어쩌려는 생각입니까?”

“싸워야죠!”

“어느 쪽하고?”

“예?”

“정보부와, 아니면 노예 시장? 어느 쪽과 싸우겠다는 겁니까?”

아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노예 시장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수도 가까이까지 이렇게 안전하게, 그리고 빠르게 오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녀는 노예 시장 측에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만약 마차대를 기습한 적이 정보부라면, 그녀는 정보부 소속이기에 노예 시장을 공격해야만 한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결론이었다.

아리스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태진이 대신 결론 내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정보부 기동대는 이 마차가 노예 시장의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니 직접 이 마차를 공격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전투가 끝나고 그들이 이 마차를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아리스는 그 순간 한기와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런 사태를 노리고 이용하기로 한 건가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계획을 세우기는 불가능합니다. 전 어디까지나 이 마차를 이용해서 수도까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는 계획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틀 전의 정보꾼의 등장으로 조금 수정된 것뿐입니다. 저들이 정보부 기동대라면 오히려 우리에게 잘된 일 아닙니까?”

“기동대가…… 이 싸움에 이긴다는 건가요?”

“그럼 당신은 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인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사들이 일개 범죄자 집단에 진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 사태는 우리에게 명백히 유리한 쪽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이 노예들도 구하고, 우리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태진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만이 가능한 넓은 감각으로 마차 밖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터인데도 그런 모습은 일절 비추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문득 무서워졌다. 기사와 범죄자를 떠나, 아리스는 노예 시장에 도움을 받았다. 며칠간 정이랄까, 그런 감정도 싹텄다.

그런 그들이 기동대의 습격으로 전멸할 처지에 놓여 있다.

아리스는 그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도 태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이 상황을 냉정하게 이성으로 판단하고 있을 뿐, 그곳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이것이 현신의 전사의 모습인가? 모든 전황을 꿰뚫는다는 신의 지식인가?

아리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투는 길게 이어졌다. 기동대의 기습에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응전한 결과, 덕분에 기동대는 총인원에서 4할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그렇지만 게르 들은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수적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확실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게르는 끝까지 분전했다. 어깨와 배에 한 발씩의 화살을 꽂은 채 사방으로 검을 휘두를 정도였다. 그런 그의 허벅지에 또 하나의 화살이 박혔다.

“크흑!”

입술을 깨물어 비명을 삼켰다. 그리고 결코 다가오지 않는 기사들을 향해 검을 뿌렸다. 검은 조금도 닿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게르만이 혼자서 미친 듯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기사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어코 체력이 떨어진 그가 검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나자빠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게르의 앞으로 한 기사가 다가왔다.

“발악은 끝났나?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최후치고는 열정적이었다.”

“크, 크으…… 이 개자식들……!”

피를 머금은 잇새로 기동대에게 저주를 퍼부었지만 기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너의 마지막 숨을 끊어줄 이 검의 이름은 ‘태각(太角)’이라고 한다. 그리고 난 왕궁 정보부 소속 기동대장 아서 슈펠이다. 죽은 후에도 그 이름을 기억해라.”

“엿이나…… 먹어라!”

아서의 검이 게르의 심장에 꽂혔다. 몇 번의 꿈틀거림 이후 게르는 결국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후 아서는 피를 털어 내고 검을 되돌렸다. 잠시 사방을 둘러본 그는 부하들에게 수습을 지시하고 자신은 직접 마차를 확인했다.

가장 가까운 마차를 열어 그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노예들을 발견했다.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쉰 그는 게르를 죽였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들은 왕궁 정보부 기동대입니다. 여러분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의 설명에도 노예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은 쉬이 떠나지 않았다. 아서는 부하에게 노예들의 신원을 파악할 것을 명한 후 다음 마차로 이동했다.

수많은 노예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아서는 마지막 남은 선두의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마차 안에 있던 태진은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문을 열려 하는군요.”

마치 직접 보고 있는 듯한 그 설명 후에 실제로 마차의 문이 열렸다.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온 빛에 아리스는 눈이 부셔 잠깐 앞을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아서는 노예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입을 열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저희는 정보부 기동대입니다. 여러분들을 구하러…….”

그의 시선이 아리스에게 못 박혔다.

“아리스……?”

“……아서 슈펠?”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아리스가 눈을 돌렸다. 회복된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잡혔다. 아리스의 얼굴에 깊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서!”

***

노예들을 모두 추스르고 시체들을 수습한 이후 기동대는 해가 지는 것에 맞춰 야영을 준비했다. 임시로 기동대 소속이 된 아리스는 아서에게 태진을 소개했다.

태진이 미리 말을 맞춰 두었기에 모닥불을 배경으로 나누는 소개 시간에서 태진의 중요 세부 사항은 쏘옥 빠졌다.

“이쪽은 미카일 영지에서 만난 강태진이라는 분이야. 억울하게 옥에 갇혀 계시다가 나와 같이 탈출했어.”

“소식은 들었다. 솔직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어. 네가 탈주자와 함께 미카일 남작을 습격했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누명이야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

“그럴 거 같았어. 미카일 남작은 예전부터 소문이 안 좋았던 자니까. 남작 직위도 돈으로 샀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무튼 진상은 수도로 돌아가면 풀어 보자. 이분이 그 탈주자시란 말이지?”

뒤쪽에 있던 태진에게 그는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왕궁 정보부 기동대장 아서 슈펠이라고 합니다. 아리스와는 대학 시절 동기면서 아버님끼리 친우이신지라 잘 아는 사이입니다.”

태진은 모르는 척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소개하며 그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태진이 로츠왈드 왕국의 기초를 세우면서 발언한 것이 정보부의 존재다.

정보부는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행정부의 역할도 하면서 일부 국방부의 기능도 수행한다. 그 부분에서 여러 가지로 부서가 나눠지고 그중 초대 순찰대장 역을 맡은 자가 아리스의 아버지인 하이듀크 뤼스필드.

그리고 독립 전쟁 당시 그와 무력으로 자웅을 겨뤘던 라스터 슈펠, 아서의 아버지가 기동대장 역을 맡게 되었다. 그 직위를 정해 준 자가 바로 태진이니 아서의 아버지를 모를 리가 없다.

“강태진입니다. 동쪽의 나라에서 와서 이렇게 이분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동쪽의 나라라니, 설마 그……?”

“이 나라에 30년 전 신의 전사라는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저와 같은 동쪽의 나라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분들의 활약상을 직접 읽고 싶군요.”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하며 아리스는 둘의 소개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왕국 도서관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 나라의 언어는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친절함에 감사드립니다.”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픈 것이 있습니다만. 미카일 영지에서 죄수로 잡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어떤 범법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영지의 조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아무튼 전 영주의 부름에 성에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눈 것밖에 없습니다만, 약을 먹고 나서 일어났더니 실험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이더군요. 그는 발견한 흔적의 일부만을 보고하고 나머지 일부를 자신의 연구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과의 연계도 아마 그쪽과 있을 거 같다고 여겨집니다.”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군요. 아리스, 맞아?”

아리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미 태진을 맹신하다시피 했다. 그녀의 자신에 찬 응답에 아서는 신뢰를 표시하고 일어섰다. 야영지에 따로 두 사람만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나서 그는 내일의 일정을 알려 주었다.

“아침 일찍 떠날 겁니다. 노예 시장에서 낌새를 차리고 따라붙을지도 모르니 서둘러 이동하려 합니다. 죄송하지만 맞춰 주십시오. 아리스, 너도 이제 다시 수행 기사의 신분이니까 확실히 해.”

“알았어.”

대학 동기지만 이미 기사인 아서를 보며 아리스는 굳게 대답했다. 그녀는 따로 마련된 둘의 자리에서 조심스레 말소리를 낮췄다.

“왜 신분을 숨기셨어요? 지금까지 신의 전사라는 걸 숨긴 적은 없잖아요.”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숨기려고 생각 중입니다. 정보부가 정보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제 스스로 밝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직 정보꾼들에 대한 대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입을 맞춰 주십시오.”

“예…… 알겠어요.”

알게 모르게 태진의 말에 설득당한 채 아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웠을 때 태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들에 싸여 좁게만 보이는 하늘이었지만 별과 별의 위치를 통해 그는 금방 이곳의 위치를 추측해냈다.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

드디어 수도로 입성하게 된다. 바운스에 다시 떨어진 지 약 한 달, 그는 수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떨린다면 떨리겠지만 지금 그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었다. 이성이 확실하게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감정은 모두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그는 별을 보며 위치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경로를 추측한 후에 잠에 빠져 들었다.

***

태진의 추측대로 하루 반나절이 지났을 때 태진은 저멀리 수도의 정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곳이 로츠왈드 왕국의 수도, ‘루위스’입니다. 태진 님은 처음 방문하는 곳이겠군요.”

첫 방문일 리는 없지만 태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듣던 대로 커다란 도시로군요. 신흥 강국으로 성장 중이라고 하더니 이름값을 합니다.”

멀리서 봤을 뿐이지만 그것은 태진이 꿈꾸고 있던 이상적인 왕국의 수도였다. 태진이 초안을 작성한 수도 건설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었을 리는 없지만 대부분은 이루어진 듯했다. 루위스로 다가가며 태진은 그 점을 잘 알 수 있었다.

검문소를 통과한 후 태진은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루위스의 모습에 흠뻑 빠졌다.

그 표정을 유일하게 눈치 챈 아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즐거우신가 보네요, 태진 님.”

“이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오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으니까요. 다시 바운스로 와서 좋은 점을 하나 꼽으라면, 이 도시를 제 눈으로 직접 봤다는 점일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아리스가 들어보지 못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감정 없이 오로지 이성적 판단만을 담은 어감과는 달랐다. 이것이 정말 게르 들의 죽음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자가 맞는 걸까? 그녀는 그런 의심마저 들었다.

활기찬 수도 주민들 사이를 기동대가 통과했다.

기동대에 둘러싸여 걷는 태진은 루위스의 지형을 파악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감각을 넓혀 모든 사물의 위치와 정보를 속속들이 두뇌로 흡수했다.

덕분에 루위스 중심에 위치한 왕궁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도의 거의 모든 정보가 태진의 머릿속에 있었다.

아서는 성문 앞에 멈춰서 말에서 내렸다. 그를 알아본 경비병이 검문 없이 그를 통과시키려 했지만 그는 호되게 경비병을 질책했다.

“그런 안이한 태도로 성문을 지키겠다는 건가! 내가 혹시라도 변장하여 왕국에 침입한 자라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그의 불같은 태도에 경비병은 쩔쩔매며 기동대를 면밀히 검문했다. 전투 중의 부상 경위를 묻고서 인원수를 추리던 중 본 적 없는 인원을 발견하여 경비병은 아서에게 질문했다.

“이 자는……?”

“순찰대장의 손님이다. 신분은 내가 보증하지. 그러니까 걱정 마라.”

아리스도 딱히 소개할 필요도 없이 많이 알려진 얼굴이었기에 경비병은 그것으로 검문을 끝냈다.

성문을 통과 후 아서는 기동대를 숙소로 돌려보낸 후 호위기사 두 명을 대동한 채 태진과 아리스를 안내했다. 그가 안내한 방향은 정보부 본부. 그곳에서 태진은 방 하나를 따로 받았다.

“일단 장관님께 보고를 드리고 오겠으니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아서와 함께 나가려는 아리스를 붙잡아 태진은 작게 일렀다.

“하이듀크에게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제가 왔다고.”

“예, 맡겨 주세요.”

아리스는 단단하게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태진은 준비된 의자에 앉아 묵묵히 두 사람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했다.

뒤를 돌아보는 아리스를 보며 아서는 웃음을 지었다.

“그가 걱정되나 보지?”

“걱정과는 좀 달라. 그는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잘 알아?”

“글쎄, 기껏해야 알게 된 건 한 달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예전부터 알던 사람이기도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아서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아리송한 아리스의 말에 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이 호위기사를 대동한 채 정보부 장관실에 도착한 것은 아서가 태진의 정체를 세 번째 물었을 때였다.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 아리스는 아서보다 먼저 방문을 노크했다.

“순찰대장 아리스 뤼스필드. 지금 도착했습니다.”

조금 후 방 안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나무향이 듬뿍 베어날 것 같은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있던 건장한 중년의 남자가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아직도 힘이 넘치는 갈색 섞인 금발의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채 그는 뚜벅뚜벅 걸어와 아리스 앞에 섰다.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직시함에도 아리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서는 묘한 웃음을 띤 채 남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 후 그가 말했다.

“네가 진정 하이듀크 뤼스필드의 딸, 아리스 뤼스필드란 말이냐?”

“예. 행색은 이렇지만. 맞습니다, 아버지.”

그 말 직후 하이듀크는 아서를 쳐다보았다.

아서는 손짓으로 두 사람의 호위기사를 집무실 밖으로 몰아냈다. 그들이 완전히 나가 문이 닫히는 것을 본 이후 하이듀크는 급작스럽게 아리스를 끌어안았다.

“아무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순찰부장.”

미소를 그리며 아서가 우선 기동대의 일을 보고했다.

“……그렇군. 역시 정보가 맞았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살아남은 정보꾼이 신변 보호를 요청해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해 줘라. 앞으로도 우리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테니. 다시 말하지만 이 일은 기밀이다. 알겠느냐, 기동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리스는 하이듀크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그녀는 순찰대장으로서 미카일 영지 순찰에서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보고하고 나서, 그 후의 도주 생활도 간단히 이야기했다.

“……힘들었겠군, 순찰대장. 미카일 남작의 처분은 철저히 진상을 규명한 이후 처벌하도록 하겠다. 이제 귀성했지만 며칠 동안 조사를 받아야 할 터이니 그에 대한 준비를 해 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부녀의 상봉, 그리고 정보부로서의 보고까지 끝마친 후 아리스와 아서는 장관실에서 나오려 했다.

“아서, 먼저 가 있어. 난 아버지께 따로 드릴 말이 있어.”

“그 남자 말이지?”

“응.”

“내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인가 보군. 알겠어, 먼저 태진 님한테 가서 상황을 알려 줄 테니 이야기하고 와.”

아서는 금방 장관실을 떠났다.

아리스는 낮은 목소리로 왠지 비밀스럽게 말했다.

“저와 같이 루위스까지 온 그 탈주자, 그는 현신의 전사예요.”

“……딸아, 그렇게 도피 생활이 힘들었던 게냐?”

“헛소리가 아니에요.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제 정신은 멀쩡해요, 아버지.”

“그렇다면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게냐?”

“믿어 주세요. 아니, 지금은 믿어 주시지 않아도 돼요. 그를 만난다면 아버지도 인정하시게 될 거예요.”

아리스는 그가 말했던, 하이듀크와의 일을 모두 말했다. 30년 전 독립 전쟁 당시 함께 싸웠던 그 이야기와 훤히 꿰뚫고 있는 성격까지.

아서와 함께 보고할 때는 숨겼던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하이듀크의 표정은 점점 변해 갔다.

“……정말로 사실이란 말이냐?”

“네. 그러니까 만나 주세요. 아버지에게만 비밀스럽게 말해 달라고 했어요. 현신의 전사가 왔다고.”

하이듀크는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아리스의 말에 믿음이 갔기에 밤늦게 그를 만나 보겠노라고 약속했다.

태진이 머물 곳을 일부러 관사 가까운 곳에 마련하고서 모든 업무가 끝난 밤늦은 시각에 하이듀크는 아리스와 함께 집을 나섰다.

관사의 별채에 있던 태진은 이미 하이듀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노크 소리가 났을 때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하이듀크였다.

“……이, 이럴 리가.”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이듀크가 대면한 그는 30년 전과 그 어느 곳도 바뀌지 않은 현신의 전사 그대로였다.

알 수 없는 복장과 인상적인 흑발, 흑안까지. 이 대륙에서 이 생김새를 따라할 수 있는 자는 쉽게 만날 수 없다.

“한 가지만 묻겠소. 당신은 설마, 코마 고원인이오?”

“그들의 변장술이 뛰어난 것은 알지만, 이미 고대에 멸족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판게리츠 산맥에 사는 민족은 미소 족밖에 없을 겁니다, 하이듀크.”

태진은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휘안(輝安)’의 기사.”

“……강태진! 정말 자네인 건가!”

덥석 태진을 끌어안는 하이듀크.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리스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인연의 끈에 탄복했다.

만나지 못한 시간이 30년이지만 그들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친구라고 하는 게 아닐까.

옛 친우와의 상봉을 즐기며 태진은 마음껏 그의 등을 두들겼다. 하이듀크도 그런 태진을 마음껏 반겼다.

그 여운을 즐긴 한참 후에야 태진은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부탁? 무슨 부탁이든 하게! 자네의 부탁이라면야 내 두 손 두 발을 다해 들어주도록 하지!”

“팰리슈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이듀크는 정색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보고를 할 테니 아예 내일 정식으로 폐하를 찾아 뵙는 게 어떠한가!”

“아니,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태진은 손을 내저었다.

“비밀스럽게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게 제 부탁입니다.”

(히어로즈 리턴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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