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8화 (8/32)

히어로즈 리턴 2권

일곱. 칼은 그저 칼일 뿐이야

며칠 후, 미연과 미소라는 군단장의 호출을 받았다. 방을 나선 그들을 한 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둘은 군단장실로 향했다.

넓은 사령부의 길을 지나 본부로 향한 미연과 미소라는 중간 중간 수군덕거리는 병사들을 여러 차례 마주쳤다.

“쟤들, 우리가 신기한가 봐.”

“신기할 거다. 너나, 나나.”

“하긴, 검은 머리하고 은색 머리가 같이 다니면 눈에 띌 거야. 그치?”

미소라는 단지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반박해 주려 하다가 그만뒀다. 이 여자는 스스로 투신의 전사라고 밝히고 다니는 주제에 그 유명세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애초에 그렇게 유명한 존재로 보이는 행동거지를 하고 다니지도 않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만.

본부에 도착해서도 둘은 군단장 집무실 밖에서 지겹게 기다렸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갔을 땐 두 명의 장교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채로운 눈빛을 띠며 자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료에는 미연과 미소라의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었고, 질문과 그 둘이 설명해야 할 사항 또한 같이 기재되어 있었다.

“앉게.”

군단장이 두 사람을 장교들 맞은편에 앉혔다. 자신은 책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뭘까 하는 눈빛을 미연과 미소라가 나누고 있을 때 장교들이 입을 뗐다.

“며칠 전 있었던 사건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릴 겁니다. 그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거짓말도, 가감도 없이 솔직하게 답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질문해도 되나?”

“물론입니다. 여러분에 한해서 질문이 허용되어 있습니다. 먼저 질문 드리겠습니다.”

한 장교가 둘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물었다.

언제 식사를 하였고 사건을 언제 알아챘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서 어떤 반응과 대처를 하였는지. 미연은 그날의 기억이 불분명했지만 미소라는 비교적 세세한 부분까지 확연하게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들이 본모습을 보이며 덤벼오더군. 거기에 따라 우리도 실력행사를 했을 뿐이다.”

“시체를 검시해 보았습니다. 불필요한 힘이 전혀 실리지 않은, 상대에게 필살의 일격만을 선사한 단검술이었더군요. 훌륭한 실력이었습니다.”

“칭찬은 됐다. 이제 질문은 끝인가?”

미연은 혀를 내두르며 미소라를 쳐다보았다. 특정 기억, 예를 들어 태진과의 데이트 같은 경우의 기억 말고는 기억력에 관심이 없는 미연이니 일주일씩이나 지난 일을 기억해 내는 것은 힘들었다. 이 자리에 미소라가 있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소라는 미연이 알아야 할 부분까지 성실하게 물어주었다.

“우리를 노린 것들은 정체는 뭐지?”

“얼마 전 여러분이 격퇴한 리트미소 작전을 아실 겁니다. 그곳의 지휘관이었던 파제스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신미연 님, 그들은 파제스의 직속 부하들이었습니다.”

그건 알고 있는데. 미연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장교는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키고 설명했다.

“파제스라는 자는 그렇게 특출난 작전 능력을 보이는 자는 아니었습니다만 부하들은 제법 잘 관리하는 편이었습니다. 그가 이번 작전에서 지휘관으로 뽑혔다가 실패했다고 하자, 그 부하들이 본부의 공문을 뒤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그에 따라 복수를 하려는 생각인 것 같다. 장교는 그 말을 하진 않았지만, 미소라는 그런 뜻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과연. 고작 그런 이유로 우리를 죽이려 들었던 건가.”

“이 일에 관해서는 저희 쪽의 잘못이 큽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미연과 미소라의 증언은 그것으로 끝났다. 두 명의 장교는 용건이 끝나자 서류를 챙겨 잽싸게 집무실에서 떠났다.

“이게 뭐야?”

미연은 한 박자 늦게 물었다. 그녀의 맞은편으로 와 앉은 군단장이 묵묵히 대답했다.

“부지 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니 조사를 할 필요성이 있었네. 방금 그 질문들은 의례적인 것이니 맘에 두지 말게나.”

그리고 그는 어조를 가볍게 했다.

“미안하군. 이제야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어쨌든 북부 주둔군의 사령부라고 하는 곳인데 부하 관리를 잘못하여 손님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 점에 대해서 군단장은 높은 직위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그 태도에서 미소라는 뭐라고 추궁하는 것도 미안하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미연의 경우에는 애초에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됐다, 어차피 지난 일. 우리는 다치지 않았으니까 그만 하고, 앞으로 군 내부에나 신경 쓰도록.”

“그렇게 말해 준다면 정말 감사하군. 반란군 문제로 사령부 바깥 경계에만 신경 썼더니 안쪽으로는 눈이 미치지 못한 점은 나도 잘 알고 있었네. 앞으로 결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네.”

지난 며칠 동안 사건의 조사와 함께 관계자들의 처벌을 직접 담당했던 군단장으로서는 시간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당사자 증언이 필요한 지금에서야 그들에게 사과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사항도 함께 전하며 군단장은 마지막으로 사과의 말을 던졌다.

“대신 사령부에 머무는 동안 소장 계급 대우를 해 주도록 약속하겠네. 언제 어디를 가든 자네들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야. 이건 사령부 바깥도 똑같네. 아직 구경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내가 직접 안내해 줄 수도 있네만.”

“그런 건 됐다. 지금은 단지 쉬고 싶을 뿐이다.”

미소라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미연도 그에 동의했다. 군단장은 진정으로 아쉽다는 얼굴을 만든 채 그들을 배웅했다.

“거짓말투성이야.”

본부에서 나와 현재 머물고 있는 본부 대대 간부 숙소로 향하면서 미연은 문득 입을 열었다.

“뭐라고?”

“군단장이고 그놈들이고, 거짓말투성이라고 했어.”

미연의 눈빛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는 듯 바람 흘러가는 대로 있던 그녀와는 다른 태도였다. 미소라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래서 너의 의견은 뭔가.”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어쩌면 그것들이 한 말대로일 수도 있지. 하지만, 뭔가 아냐. 내 느낌이 그렇게 외치고 있어.”

“느낌인가.”

“그래, 느낌.”

그녀는 혼자 멋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미소라도 뒤따랐다.

이미 그때 일을 다 잊은 듯 굴고 있어도 그녀 또한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며칠간의 모든 일이 한편의 연극과 같다는 것을. 이론적이 아니라 오로지 감뿐이지만, 그녀의 의견은 그와 동일했다.

미소라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믿으라고 하는 게 웃긴 것이다. 적당한 증거는 떠올릴 수 없지만 뒤끝이 영 답답하다.

숙소로 돌아간 그들은 그날 하루는 그렇게 보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후 도시 구경을 하고 있던 중 그들의 앞에 익숙한 남자가 말을 탄 채 나타났다.

“미연 님! 여기에 계셨습니까!”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처음에 미연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그가 먼지를 털어내고 멀쩡한 얼굴로 돌아오자 그제야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이시브? 너 꼴이 그게 뭐야?”

“급히 수도에 다녀왔습니다. 지금 복귀하는 길인데 우연찮게도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너야말로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픈 몰골이잖아? 어서 들어가.”

“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시브는 급히 말을 몰며 사령부 쪽으로 사라졌다. 광장에 앉은 채 쿠키를 집어먹고 있던 미연은 그녀의 심부름으로 음료수를 사러 갔던 미소라가 돌아오자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말했다.

“수도에 이야기가 들어갔나 봐?”

“무슨 소리냐.”

“내가 제국에 나타났단 이야기 말야.”

“근거는?”

“없어. 단지 또 감이야.”

그녀에게 상세한 이론이나 증거는 없다.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

하지만 미소라는 생각이라는 막연함에서 벗어나 그녀의 말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냈다. 짜 맞추기가 무척이나 쉬웠다.

제국 측에서 미연이 정말 투신의 전사인지 확인해야 한다면,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곧 역사 속에서나 나올 법한 무위를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일부러 파제스의 부하들로 하여금 시비를 걸게 했다. 미흡한 테스트긴 하지만, 미연은 말끔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그들을 베어 넘겼다. 그 간단함이란 투신의 전사로서 더없이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미소라는 미연에게 자신이 만들어 낸 시나리오를 읊어 주었다.

“배후는 물론 군단장일 거다.”

그리고 예상외로 그녀는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시무시한 짓을 하네…… 내가 무슨 사람 죽이는 기계도 아닌데 말야.”

쿠키와 음료수를 한 입에 넣고 씹어 삼키며 미연이 투덜댄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면서 미소라는 생각했다. 이건 뭐…… 앞으로 어떤 여행길이 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

사령부로 뛰어 들어간 이시브는 옷차림새를 바로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군단장실 문을 두드렸다.

말을 타고도 편도 2주는 족히 걸릴 길을 왕복 2주 만에 돌파한 이시브의 수고를 치하하면서도, 군단장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래, 뭐라던가?”

“일단 보고는 올렸습니다. 그렇지만 그쪽에서 아직 확실히 믿지는 않고 있습니다.”

“의심한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투신의 전사는 삼십 년 전에 혼자서 백 명의 인원을 상대했다고도 합니다. 고작 그 정도로 투신의 전사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 같습니다.”

“삼십 년 전의 투신의 전사와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동쪽의 나라에서 온 자다. 더구나 비슷한 외양이니 투신의 전사라고 봐도 무방할 터인데.”

“일단 수도로 데리고 오라는 언질은 있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직접 자신에게 데리고 오라고, 그렇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뿐만은 아닐 테지?”

“물론입니다. 오면서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확실한 증거라…….”

군단장은 생각하는 얼굴이 되어 책상 위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시브는 꼿꼿이 선 자세로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이황자파는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한 명이라도 강한 힘이 필요한 시기에 그녀가 나타나 준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자칫 잘못하여 일이 틀어질 경우가 있어선 안 된다고, 그랬다가 황자 저하에게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직 일황자파에게 주도권이 있으니…… 아직은 신중할 때이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투신의 전사임이 확실하다면 대세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잘 부탁한다고 전해 왔습니다.”

군단장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보며 이시브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쩌려는 건가?”

그 물음에 이시브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후 군단장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위험하지 않겠는가?”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정말 투신의 전사라면 이루어 낼 것이고, 아니면 거기서 죽을 뿐. 저희에게 손해가 될 일은 없습니다.”

“알았다. 그럼 자네에게 맡길 테니 반드시 성공시키게.”

“알겠습니다!”

똑똑히 대답한 이시브는 군단장 앞에서 물러났다.

그가 나간 후, 당번병에게 차 한 잔을 가지고 오라고 명한 군단장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열었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그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 이황자파에게로 대세는 곧 기울 것이다…….”

문을 나선 이시브는 먼저 몸을 깨끗이 씻은 후 2주 동안 쉴 새 없이 말을 달린 피로를 풀기 위해서 이틀 동안 숙면을 취했다. 그는 정말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이틀 뒤 깔끔한 이미지 그대로 돌아온 그가 식당에서 미연과 미소라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여러분과 같이 수도로 가도 되겠습니까?”

“수도? 제국 수도 말이야?”

“물론 제국의 수도입니다. 여러분도 제국 마법사단에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단지 안내가 목적은 아닐 텐데. 무슨 꿍꿍이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 전에 있었던 일을 수도에 보고하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군의 높은 분께서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제국 마법사단까지 안내하는 대신, 그분을 만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걔가 누군데?”

“수도 주둔군의 군단장님이십니다.”

미소라는 의견을 묻듯 미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눈길을 읽을 수가 없었다. 뭐랄까, 생각을 내비치지 않는 그런 눈동자다. 그는 미연이라는 여자를 점점 알 수 없어져 머리가 복잡했지만 그런 속은 절대 드러내지 않고서 대답했다.

“좋아, 가 주겠다.”

“와하, 나도 찬성! 쉽게 갈 수 있다면 좋은 거지 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연. 미소라는 무뚝뚝한 태도로 그녀를 무시했다. 둘의 반응을 보며 이시브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곧 출발 준비를 하겠습니다.”

“응응, 기다리고 있을게!”

진심을 보이지 않은 채, 그들의 행로는 아키레마 제국의 수도 ‘시디 노트니’로 정해졌다.

그리고 길을 떠난 지 나흘이 경과됐다.

“몸은 괜찮아?”

“끄떡없습니다. 이 정도는 가뿐합니다.”

상쾌하게 웃는 이시브가 선두에 서 있다. 미연과 미소라는 크로이언 시에 도착할 때와는 달리 각각 한 필의 말을 타고 이시브 소령의 뒤를 따라서 길을 가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북부 대로.

크로이언 시에서부터 수도 시디 노트니까지 건설된 도로로, 이름에서 알다시피 이와 같은 도로가 세 개 더 있다.

“이 길만 따라가면 된다 이거지?”

“예, 그렇습니다. 중간에 좀 전처럼 몇 개의 도시를 거치다 보면 자연스레 시디 노트니까지 당도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미연의 표정은 밝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미소라는 미연의 머리를 읽을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미연의 행동 방식은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는 감이고,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논리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웃기게도, 그 행동들이 결코 틀리지 않는다. 좋은 방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생각을 잘하지 않는다는 건 위험하지만 감으로 움직이게 놔둬도 괜찮을 것 같은 여자. 미소라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생각은 필요하기에 장로는 미소라의 동행을 허락한 것이다.

사실 미소라가 미연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은 미묘하다. 처음에는 외부인으로서, 나무 훼손자로서 경계했다. 하지만 장로의 태도와 리트미소에서 보여 준 그녀의 꾸밈없는 모습, 그리고 마을을 위해서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가 준 모습에서 쇼크를 받았다. 그래서 일단 그녀의 여행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장로의 부탁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마음이 더 컸다. 그 마음이 틀리지 않았다. 그는 확신했다.

그리고 미연이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뭐냐.”

“아니, 아까부터 말을 걸어도 아무 대답이 없어서.”

“못 들었다.”

“그렇겠지. 마음으로 걸었거든.”

“……들을 리가 없지 않나, 외부인.”

“또또. 여기가 바로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외부라니까? 내부인 주제에.”

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미연과 미소라의 다툼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이시브는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크로이언 시를 떠나온 지 나흘. 이 속도라면 사흘 뒤에 ‘그곳’에 도착한다. 속도를 조절 중이기에 그곳에 도착하는 시각은 해가 떨어진 직후가 될 테고, 휴식을 핑계로 그곳에서 머무를 것이다. 과연 미연이 그곳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시브는 의문과 걱정을 적절히 배합한 얼굴을 숨긴 채 그들을 이끌었다.

정확히 이시브가 예견한 그 시각, 셋은 한 도시 앞에 도착했다.

그 도시의 이름은 아이마임 시.

그리고 그곳에는 별칭이 하나 있다. 아이마임 시라는 이름보다 어쩌면 널리 알려진 별칭, 들개의 땅.

“……아이마임 시? 뭔가 휑한 분위기다?”

“좀 그렇습니다. 예전에 큰 부대가 있었을 시에는 크게 융성한 지역인데 그 부대가 이전하고 다른 부대가 옮겨오면서 급속히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개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던데, 아직까진 조용한 상태입니다.”

“이런 곳에서 묵어야 하는 거야?”

“다음 도시로 가려면 한나절은 꼬박 가야 합니다. 날도 저물었는데 어쩌겠습니까. 이곳도 도시니까 지내기에 크게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이리로 오시죠.”

이시브는 자연스럽게 아이마임 시 안으로 진입했다. 그곳은 지금껏 지나온 그 어떤 도시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버려진 땅? 전쟁으로 얼룩진 중동의 어느 외딴 나라? 미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랬다.

구조만 겨우 서 있는 듯한 집 앞에 헐벗은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몰골이 초췌한 시민들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낸다. 집안으로 대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크로이언 시의 외곽부보다 더 심했다.

이시브는 그러한 광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서 도시 중앙으로 둘을 안내했다. 그리고 병사와 접촉했다.

“누구십니까?”

“이미 연락은 도착해 있을 것이다. 상부에서 지시를 받지 못했나?”

“지시 사항은 내려왔지만 우선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북부 주둔군 소속의 이시브다. 동행 두 명과 하룻밤 묶어 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길 바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모습에 미연은 뒤쪽에서 혀를 내둘렀다.

“군기가 제대론데?”

“이 정도가 보통입니다.”

그들의 수군거림을 듣지 못한 채 병사는 부대 안쪽에 연락병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경계 임무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미연은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잠시 후 연락병이 돌아왔다.

“통과되었습니다. 상황실로 가보십시오.”

듣던 대로 군기가 확실한 부대였다. 이시브는 고맙다는 표시를 하고서 느긋하게 지나쳤다. 어디까지나 완벽한 손님을 가장한 채.

늑대 부대가 있는 아이마임 시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제국군 내에서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항이라 모두가 쉬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떠나 모두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곳이기도 했다.

이런 곳으로 이시브 소령은 미연과 미소라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는 북부주둔군 군단장과 함께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연은 태평한 표정으로 미소라를 대동한 채 이시브 소령과 함께 상황실로 들어갔다.

상황실에서 만단 것은 늑대 부대의 대대장이었다. 거친 얼굴의 그는 세 사람을 희미한 미소로 맞아들였다.

“미리 연락은 받았소. 지금 숙소를 잡아 놓았으니 그곳에서 쉬면 될 것이오.”

“감사드립니다.”

병사의 안내를 받고 세 사람은 숙소로 이동했다. 방이 모자란 탓에 이시브와 미소라가 한 방을, 그리고 미연이 다른 한 방을 사용했다. 식사 시간을 알려 주고 병사가 떠난 뒤 셋은 일단 방에 모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여기가 왜 들개의 땅이야?”

“말씀드렸다시피 현재의 부대는 전에 있던 부대가 이전되고 나서 소속원 대다수가 바뀌었습니다. 바뀌기 이전의 늑대 부대는 원래 문제가 많은 병사들을 모아 놓고 관리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본부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죠. 전 늑대 부대는 아이마임 시의 주민들을 탄압하고 자신들이 왕인 양 행세를 했었습니다. 덕분에 그 당시 늑대 부대의 별명이 들개 부대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들개의 땅이 된 거구나? 근데 지금은 부대가 바뀌었다면서? 그럼 된 거 아냐?”

“그때의 기억 탓에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병사들을 배척합니다. 늑대 부대가 교체되고 온순해지자 심심찮게 주민들이 부대를 공격하는 일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주민들이 들개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들개가 바뀐 거군.”

미소라의 말에 이시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들개가 된 주민들과의 소통을 원활히 해 나가는 것이 현 늑대 부대의 가장 큰 숙제일 겁니다.”

말을 끝내고 이시브는 상황실에 용무가 있다며 방을 나갔다.

남겨진 미연과 미소라는 아무것도 없는 방을 둘러보는 것도 지겨워져서, 잠시 후 미연이 제안한 디비디비딥 게임을 시작했다.

하지만 둘 다 반응 속도가 일반인 이상인지라 아무도 서로를 때리거나 맞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 게임도 지겨워졌다.

이번엔 뭘 할까 궁리하다 제로를 하기로 마음먹은 무렵에 이시브가 방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었어?”

“별일 아닙니다. 대대장을 뵐 일이 있어서.”

이시브는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미연은 흐응 하고 넘어갔고 미소라도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로 지나갔다.

“식사 시간은 언제야?”

“삼십 분 정도 지나면 된답니다. 그때까지 조금 쉬고 있도록 하지요.”

미연은 이시브까지 제로 게임에 동참시켰다. 이시브만 일방적으로 신나게 맞는 분위기가 이어진 후, 곧 그들은 식당으로 이동했다.

“와아, 깔끔한데?”

미연은 그렇게 감평했다.

들개 부대였을 당시의 것들을 재활용하여 재구축한 모양이라고 이시브는 설명했다. 그땐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이 더 깨끗했다고 하는 그의 말에 미연이 싱긋 웃었다.

“이야, 이 부대에 대해서 잘 아네?”

“네? 아, 두 분을 모셔야 하니까 미리 조사 좀 했습니다.”

이시브는 어색하지 않게 웃어넘겼다.

식당에서 세 사람의 등장은 튀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모여 있던 병사들이 모두 그들을 돌아보며 저마다 수군대기 시작했다.

미연은 그쪽을 무시하고 이시브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안쪽에서 뭔가 구수한 냄새가 나자 그녀의 배는 즉각 반응했다.

“우왓…… 맛있는 냄새가 나. 배고파!”

이시브가 세 사람 몫의 음식을 주문하여 가지고 왔다. 배가 많이 고팠던지 미연은 나오기가 무섭게 모두 먹어치웠고, 그런 후에 세 사람은 상쾌한 걸음으로 식당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식당에서 사라질 때까지 병사들의 눈빛은 떨어지지 않았다.

“자, 그럼 좀 씻고 다시 모이자! 아까 제로 다 못 끝냈잖아?”

“……또 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이시브, 너도 맞은 거 복수해야 하지 않아?”

히죽 장난스럽게 웃어 놓고 미연은 자기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시브는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먼저 씻으시겠습니까?”

이시브가 예의바르게 미소라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하루 종일 입고 있던 군복을 벗으려고 하는 이시브를 뒤에서 지켜보며 미소라는 지그시 입을 열었다.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지?”

“네? 그거야 해가 지고 하룻밤 묵어 갈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공문을 미리 보내 뒀다고 한 것은 크로이언을 떠날 때부터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는 얘기 아닌가.”

“이곳을 지나치면 다음 도시까지 거리가 어중간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정을 짠 것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옷을 벗고 이시브는 돌아섰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미소라의 은안이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마음에 걸리시는 점이라도?”

“아니, 그런 건 없어. 부대 바깥 사정을 무시하자면 이곳도 머무르기 나쁜 곳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냥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아침 식사 후 다시 출발하면 되는 것이니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마디만 하지.”

미소라는 낮게 말했다. 폐 속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듯한 음성.

“난 감은 그렇게 좋지 않다. 그래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옆엔 감 하나는 누구보다 좋은 여자가 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네, 조심하겠습니다.”

이시브는 친절한 웃음을 싱긋 웃었다. 그리고 먼저 씻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면실로 사라졌다. 한참 그의 행적을 지켜보던 미소라는 곧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미연의 닦달에 온갖 게임을 시작하여 기어코 미소라를 한 대 때리고 만 미연이 만족함에 젖어 잠에 들 때까지,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미연이 깨어난 것은 깊은 밤중,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상체를 일으킨 자세로 그녀는 잠시 멍하니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멍하던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찾아오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왜 깨어났는지 의문을 가졌다.

해답은 뒤이어 나타났다.

……방 밖.

밖의 기척을 살피며 미연은 침대 옆에 세워 둔 검을 들었다. 문 쪽이 아닌 창문 쪽에 몸을 숨기고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흡’ 소리가 나게 숨을 쉬고 창문을 벌컥 열었다.

“……!”

소리로 나오지 않는 비명이었다.

숙소 바로 밑으로 다섯 명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방향으로 따지자면 식당 쪽. 전투 감각으로 미연은 그들의 방향을 금세 파악했다.

“이 야밤에 뭐 해?”

그림자들의 행동이 멎었다. 미연은 양쪽을 슥 둘러보고 다른 인기척이 없나 확인했다.

“순찰? 그렇게 단체로?”

긴장감이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달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에서 그들이 미연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위치를 가늠하기 힘든 위치일 텐데도 미연과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고개를 내렸다.

“아직 식당이 열 시간 아냐. 아침에 해 뜨면 다시 와.”

미연은 상냥한 어조로 말해 주었다. 그림자들은 자기들끼리 낮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서둘러 숙소 뒤쪽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지켜보고서 미연은 창문을 닫았다.

그 뒤 곧바로 곯아떨어진 그녀를 깨운 것은 미소라였다.

문을 두들기는 그의 손길에 미연은 또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좀 있으면 식사 시간이다. 빨리 나와라.”

잠시 후 다시 정신을 차린 미연이 밖으로 나와 하품을 쩌억 해 대자 이시브가 웃음을 지었다.

“피곤하셨던 모양이군요. 식사를 하고 곧 출발할 예정인데 괜찮겠습니까?”

“으응, 괜찮아. 피곤하다기보단 새벽에 한 번 잠을 깨서 그래.”

식당에는 당연하게도 병사들이 가득했다. 비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며 이시브가 다시 말을 꺼냈다.

“자리가 안 좋았습니까? 미연님이 잠을 깬다는 건 거의 없는 일 아닙니까.”

“응? 보통 잠들면 아침까지 절대 안 일어나는데, 어쩔 수 없잖아. 계속 시끄럽게 구니까.”

“누가 말입니까?”

“누군진 모르겠어. 자다가 뭔가 소리가 나고 기척이 느껴져서 일어났더니, 숙소 뒤쪽으로 웬 사람들이 지나가더라고. 해 뜨면 다시 오라고 그랬지 뭐.”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 투에 미소라와 미연을 제외한 식당의 전원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시브가 침을 삼켰다.

“참고로 몇 명 정도……?”

“다섯 명? 그 정도 되는 것 같던데.”

옆 테이블에서 한 병사가 달려왔다.

“방금 그 말, 무슨 말입니까?”

여성 손님이 포함된 일행이었기에 아닌 척 그들의 대화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병사들이 대다수였다. 이시브는 나지막이 일렀다.

“어젯밤 신원 미상의 다섯 명이 부대 내로 침투한 듯합니다. 보고하십시오.”

“화, 확실한 겁니까?”

“그런 감각에서 미연 님이 틀리기는 힘듭니다.”

이시브는 확신에 차 말했다. 병사는 곧장 식당을 뛰쳐나갔다. 나머지 병사들도 허겁지겁 남은 식사를 들이마시고 바람같이 떠났다.

“뭐래?”

“글쎄다.”

미연과 미소라가 담담히 식사를 이어 나가는 가운데 이시브가 설명했다.

“군부대에서 경계가 뚫렸다는 건 큰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부대는 종종 그런 보고가 들어오던 곳입니다. 다섯 명이나 들어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겁니다.”

그의 설명대로 잠시 후 본부 앞에 무장을 한 병사들이 집합했다. 대대장이 걸어 나와 그들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그들은 식당에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병사 한 명이 그들에게로 달려오더니 미연을 찾았다.

“대대장님이 와 달라고 하십니다!”

“에? 왜에? 나 아직 밥도 다 안 먹었다고.”

“같이 출동해서 어, 어제의 그 침입자들을 찾아달라고 하십니다!”

“귀찮아. 나 곧 떠날 거야.”

미연은 요지부동이었다. 미소라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시브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미연 님, 저도 같은 입장으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에, 왜? 귀찮단 말이야.”

“그냥 가서 찾아 주기만 하면 될 겁니다. 밥 먹고 소화 겸 산책이라고 생각하시고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미연은 이시브와 병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이 짰지? 그런 기분의 표정이었지만 이시브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부탁한다는 겸손한 태도였다.

“쳇! 알았어, 알았어.”

“……네?”

“싫어? 싫음 말구. 내가 필요 없다 이거지?”

병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식당을 달려 나갔다.

“근데 정말로 내가 가야 해?”

“어제 침입한 자들은 아마도 이곳의 주민일 겁니다. 그래도 무작정 수색하고 다닐 순 없을 테니 미연 님이 도와주시면 일이 훨씬 수월할 테지요.”

이시브의 설명을 듣는 사이 정말로 대대장이 그들 앞에 왔다. 대대장으로서 절도 있는 자세였지만 손님에 대한 예우 또한 잃지 않고 있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전 늑대 부대의 일로 군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이런 침입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네. 앞으로는 생각하면 어제의 침입자들을 색출해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방지해야 하네. 곧 길을 떠날 테니 출발에는 지장이 없도록 빠른 시일 내로 끝내겠네. 그러니 도와주지 않겠나?”

이시브의 말처럼 보통 일이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으으, 정말. 알았어, 같이 가 줄게.”

귀찮다는 투가 역력하면서도 일단 미연은 따라 일어섰다.

“나도 간다.”

“에? 미소라도?”

“너 혼자 보냈다가 무슨 일을 벌이면 어떡하나.”

절대 그녀를 믿지 않는 말투였으나 그녀는 그저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부탁하네.”

대대장의 마지막 인사를 남겨 놓고 미연과 미소라는 병사들과 함께 부대 밖으로 나갔다. 재빠른 걸음으로 일제히 출동하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이시브는 몸을 돌렸다.

이미 대대장은 본부 쪽으로 발걸음을 뗀 뒤였다.

“돌아올 때까지 잠시 부대를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

이시브는 간단히 경례를 붙였다. 그를 잠깐 지켜본 대대장은 상황실로 들어와 중위 한 명에게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이시브 소령을 미행해라. 혹시 그가 낌새를 챈 듯하면 기절시켜 끌고 와라.”

“알겠습니다.”

중위는 침착하게 상황실을 벗어났다.

이시브는 부대 내를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걸음걸이였고 그 눈도 별 다른 날카로움을 띠지 않았다. 병사들의 숙소도 한번 들러 아무도 없는 건물을 둘러보고 화장실과 창고 쪽도 슬쩍 구경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중위는 그 진의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대대장의 명령으로 그를 미행 중이긴 했지만 수상한 낌새는 없었다.

말 그대로 다른 부대를 구경 온 타 부대 사람의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일단 중위는 미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시브는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아니, 예상하고 있었다.

미연과 미소라가 자리에 없다.

시간도 적당했기에 그는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미행은 좀 더 신중히 하는 게 어떤가?”

이시브가 돌아섰다.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 중위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무 뒤에서 중위가 걸어 나왔다.

“알고 있었습니까?”

“짐작하고 있었지. 미행 정도는 붙을 거라고.”

“죄송합니다. 손님을 대하는 예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대장님의 명령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알고 있어, 중위. 아니지, 자네가 정말 중위일까?”

중위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훗. 대대장은 우리들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래서 그들과 나를 떨어뜨려 놓은 거야.”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 모르겠습니다만.”

“그래, 자네에게 얘기해 봤자 어차피 나올 건 없을 거야. 나를 상황실로 안내해.”

이시브는 중위에게 다가섰다. 중위는 곧바로 검을 뽑아 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호오, 그게 손님을 대하는 태도인가?”

이시브는 여전히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중위는 그게 기분이 나빴다.

“안내하겠습니다. 돌아서십시오.”

“그러지.”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이시브는 걷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중위가 검을 내리지 않고 그를 경계했다. 그 상태로 이시브는 상황실로 돌아와 대대장을 만났다.

부하를 모두 물린 채 대대장 집무실에서 이시브는 대대장과 대면했다.

“이 부대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니, 더 이상 존대를 할 필욘 없겠지. 주민의 침입에 전투 인원의 거의 전부가 몰려 나갈 이유는 없을 거고, 혹시 있을지 모를 다른 제국군을 찾으러 나간 건가?”

“부대의 경계망이 뚫렸다. 다섯 명이 들어왔는데 몰랐다는 것은 부대로서 큰일이야. 그것에 대한 조치를 취하겠다는데 뭐가 이상한 건가?”

“부대의 경계망이라? 우습군, 제국군에서 이곳의 정체를 모를 줄 알았나?”

이시브는 친절한 미소를 지웠다.

이미 그는 철저히 연기에 들어가 있었다.

“이곳은 반란군. 제국군 부대인 척하고 있지만 이미 원래의 늑대 부대는 옛날에 너희들의 공격으로 무너졌지. 그동안 상부에서는 공문의 미묘한 차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제국군으로서의 기입되어야 할 사항이 몇 번씩 누락되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곳 아이마임 시에서 흘러나오는 소문도 있고. 그간 명확한 물증은 잡을 수 없었지만…… 이젠 알겠어.”

그는 단언했다.

“반란군의 비밀을 알고 있는 곳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곳 주민에게 묻는 것이 빠르겠군. 혹시나 모를 기밀이 빠져나갈 테니까 그렇게 침입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아닌가?”

대대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순간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히고 간부들이 뛰어들었다. 이시브는 저항했지만 대번에 그들에게 진압 당했다.

바닥에 엎드린 채 포박당한 그를 내려다보며 대대장, 아니, 반란군의 두목은 낮게 고했다.

“당장 죽이진 않겠네. 자네의 동료들이 오면, 그때 같이 처형해 주겠어. 용서하게.”

“무턱대고 우리를 죽인다고 일이 해결될까? 오히려 더 나빠질 텐데?”

“그건 우리 사정이다. 그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제국군.”

두목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이 자를 감옥에 가두고 당장 그들을 붙잡아 와라. 주민들이 알기 전에 처리한다.”

“예!”

강제로 일으켜져 감옥을 향하는 가운데, 이시브는 누구도 모를 만큼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미연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미소라, 느껴져?”

“……느껴진다.”

미소라도 미소족의 숲지기답게 그녀가 감지한 바를 눈치 챘다. 둘은 서로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분위기가 이상하지?”

“그래, 우리를 경계하고 있어.”

“이 아저씨들, 갑자기 왜 이럴까?”

이시브일까. 미소라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단서가 부족하다.

갑작스런 늑대 부대의 분위기 변화?

미소라는 잠깐 기억을 되돌렸다. 시내를 수색하고 있던 그들에게 본부에서부터 연락병이 온 이후부터였다.

늑대 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해진 건.

“심상치 않군.”

가까이 있던 병사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물어 왔다.

“두 분, 왜 그러십니까?”

“별일 아니다.”

일단 둘은 이대로 흘러가 보자고 결정했다. 집으로 들어가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내고 있던 병사들이 수상한 자들을 데리고 나왔다. 미연은 그들을 슥 관찰하고 손을 저었다.

“아냐, 이 사람들. 척 봐도 삐쩍 곯았는데, 그렇게 재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잖아?”

아까부터 그런 작업의 반복이었다. 대대장과 이시브의 부탁으로 왔지만 미연으로서는 불만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이윽고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신경이 폭발했다.

“아아, 정말! 싫어! 이제 안 해! 지겨워! 나 갈래!”

“이, 이, 이봐!”

부대에서 좀 떨어진, 외곽에 도착했을 시점이었다. 미연의 돌발적인 행동에 병사들이 순간 당황했다. 미연은 그들을 해치고 부대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런 그녀를 병사들이 가로막았다.

“멈춰라, 어딜 가려는 거냐!”

“어디긴 어디야. 너희 부대에 가서 이시브 데리고 갈 거야. 언제까지 이 짓을 하라는 거야?”

짜증이 한껏 묻어나는 말투로 말을 던지며, 그녀는 막무가내로 병사들을 지나치려 했다.

미소라는 분위기의 전환을 느꼈다.

지금껏 눈치만 보고 있던 그들이 드디어 행동에 나선, 그런 기운이었다. 그리고,

미소라보다 이미 미연이 먼저 그것을 감지했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검, 뽑을 거야?”

미연에게 지목당한 병사는 검으로 손을 가져갈 참이었다.

“뽑는 건 좋아. 하지만 난 적이라고 판단했을 시엔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싱긋.

미소를 짓지만 그 미소가 전혀 따스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침을 삼켰다.

긴장이 흐르고, 병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미연과 미소라는 곧바로 병사들에게 포위당했다.

“너희들의 동료인 제국군은 이미 우리에게 잡혀 있다. 순순히 따라가 준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헛소리. 너에게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은 없다고 생각되는데?”

미소라도 양팔을 긴장시키며 미연의 옆에 섰다.

“순순히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힘을 쓰는 수밖에 없다.”

“한번 그래 봐.”

미연이 칼을 뽑았다. 동시에 미소라의 양손에도 단검이 출현했다.

“이시브를 구하러 가자.”

미소라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의견 일치. 개인적인 감상은 나중에 뱉기로 했다. 미소라는 미연의 옆에 서 단검을 한 차례 교차시켰다.

“몇 명인가.”

“지금 이곳엔 대략 스무 명. 아직 시내 곳곳에 있을 거야.”

미연은 칼을 한 바퀴 돌려 눈앞에 세웠다.

“뚫고 가자.”

“가능하겠나. 총인원은 팔십 명 정도 될 텐데?”

“이런 녀석들이 몇 명이든 투신의 전사를 막진 못해.”

미연이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낮췄다. 그 직후 ‘병사로 위장한 반란군’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죽이진 마라! 목숨은 살려 둬라!”

“덤벼!”

길은 제법 넓었다. 20명이 들어차 있었지만 결국 공격할 대상은 단 두 명. 일 대 다수의 대결에서는 필연적으로 공격을 기다리는 인원이 생겨난다. 앞에서 싸우고 있다면 뒤쪽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그런 논리에 의해서 한 명 쪽에서는 최대 여덟 명까지를 동시에 상대하기만 하면 된다.

말은 쉽다. 하지만 동시에 여덟 명을 상대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사방에서 짓쳐들어 오는 여덟 자루의 검을 피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자가 역사 속에 몇몇 있었고, 지금 이 자리에도 두 명이 있었다.

미연은 전방에서 날아 들어오는 검날을 옆으로 쳐냈다. 뒤이어 신속하게 찔러 들어오는 검날을 왼측으로 쳐내며 동시에 한 놈의 목을 날렸다.

튀어 오르는 피분수를 무시하고 대번에 두 명의 팔을 썰어 버린 후, 고통에 찬 비명이 뱉어지기도 전에 머리통을 절반으로 갈랐다.

휘익―!

날카로운 검명 이후에 남는 것은 오로지 피였다.

미소라의 검투는 미연에 비해서 깔끔했다. 미소족의 단검술은 급소를 노린 일격을 중시하기에 쓸데없는 피는 결코 보지 않는다.

누구처럼 목이 날아오르지도 않는다.

미소라는 단검술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개전과 함께 날아온 검날을, 미소라는 교차시킨 단검으로 받아 냈다. 그리고 곧장 앞쪽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미소라의 단검은 적의 손목을 날렸다. 검을 쥔 손목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적의 목젖에 단검을 쑤셨다.

푸욱!

미소라는 미연 쪽을 살폈다. 그가 걱정해 줄 의미도 없이 그녀의 주변에서 쓰러지는 반란군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이미 미연의 솜씨를 본 바가 있는 미소라로서도 할 말이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몇 명을 베어 넘긴 후 길이 뚫렸다.

“미소라, 먼저 갈게!”

미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렸다.

미소라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았다.

“마, 막아라!”

“동료들을 모두 모아라!”

“저 여자를 막아라!”

미연은 부리나케 길을 달려갔다.

부대가 있는 방향을 가늠하여 달리는 그녀 앞에 골목골목에서 뛰어나온 반란군들이 막아 섰다.

“서라!”

한 차례 발을 굴리며 뛰어든 미연의 주위로 다섯 명의 반란군이 감쌌다. 몸을 웅크린 그녀의 등으로 다섯 자루의 검이 꽂히려는 찰나, 중심을 낮춘 채 고개를 돌린 미연의 손끝에서 칼이 포효했다.

“싫어!”

단숨에 다섯 개의 팔과 목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너지는 시체 속에서 미연이 유유히 고개를 들었다. 압도적인 힘에 몸이 굳어 버린 반란군들이 그녀의 행동을 미처 뒤쫓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내달렸다.

미소라도 그런 그녀를 뒤쫓았다. 골목 안으로 뛰어들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지름길이라면 이쪽이다.

모두가 미연의 행보에 눈을 돌린 사이 미소라는 한 발 앞서 본부에 도착했다. 집 위를 날아다닌 그 속도는 미연이 반란군를 베어 넘기며 돌진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솔직한 말로 미소라는 이시브의 행동이 수상했기에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시브를 만나지 않는다면 사태의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하다. 그가 맘에는 안 들지만 구해 내긴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본부에 날아들었다.

“웬 놈―”

경계를 서고 있는 자를 가뿐히 처리한 다음 미소라는 본부 건물의 뒤쪽으로 잠입했다.

한편 미연은 좁은 골목길 한가운데에서 멈춰 있었다. 방금 전 다시 열 명을 베어 넘긴 직후였다.

“이, 이럴 수가…….”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미연이 베어 넘긴 동료의 숫자는 이미 세기가 힘들었다. 힘으로 찍어 눌러 제압하려 했던 그들의 작전은 깔끔하게 틀어진 상태였다.

미연은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남자들을 훑어보았다. 그 눈빛에는 조용히 잠들어 있던 불꽃이 깨어나 있었다.

“덤벼, 빨리. 안 덤빌 거면 이쪽에서 갈게. 죽기 싫다면 길을 터라.”

“네, 네년! 정체가 뭐냐!”

“너희 손님이잖아?”

“그, 그런 걸로 대답이 될 거 같으냐!”

“안 되도 상관없으니까 빨리 비켜.”

재빠르게 말을 마친 미연은 양손으로 손잡이를 돌려 잡았다. 수십 명을 쓰러뜨렸지만 아직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바운스에서의 그녀는 지구에서와는 확연하게 다른 검사였다. 그녀를 검으로 이길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미연은 다시 움직였다. 겁 없이 덤비던 반란군 한 명이 다시 목을 잃고 요절했다.

그녀는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인다면 이들도 포기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눈동자에 스며드는 것은 악과 근성이었다.

“안 물러설 거야?”

“물러서지 않아. 우린 더러운 제국군과는 다르다. 긍지 높은 북부 반란군이다! 제국군 따위에게 질 수는 없다!”

“그렇다!”

“물러서지 마라!”

반사적으로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올랐다. 그것은 하나로 합쳐져 마치 전장 한가운데에 미연이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며 미연은 혀를 찼다.

“죽이기 아까운 놈들인걸?”

가만히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는 칼을 들었다.

“하지만 내 앞을 막는다면 어쩔 수 없지.”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자 모든 이가 긴장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 준 위용은 장난이 아니었다. 잠시 방심했다간 가볍게 목이 날아간다. 그런 공포감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하나가 되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도 물러서는 사람 없이.

미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좋아, 그럼.”

그녀가 내뱉었다.

“난 이만!”

그녀는 가까운 지붕 위로 뛰어올라 번개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반란군이 허망하게 지붕 위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자, 잡아라!”

지붕이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미연도 멀리 가지 못했다.

미소라가 부대에 도착한 시점에서 그녀는 지붕 위에서 한 남자를 마주쳤다. 더 이상 제국군임을 가장하고 싶지 않은지 맨몸의 남자였다.

미연은 멈추지 않았다. 경고도 없이 칼을 휘둘러 그를 베고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캉!

그녀의 칼이 남자의 검에 막혀, 목 앞에서 정지했다.

“에?”

미연이 두 발 뒤로 물러섰다. 지붕 밑에서 남자를 발견한 반란군이 소리쳤다.

“부두목님!”

“말룩 님이시다!”

미연이 고개를 갸웃댔다.

“말룩? 내 칼을 막아 내다니, 대단한걸? 네가 얘네 대장이야?”

“두목은 따로 있다. 제국군치고 실력이 대단하군. 이름이 뭐지?”

“알 필요 없잖아? 그리고 난 제국군이 아냐.”

“거짓말하지 마. 이시브 소령인지 뭔지랑 동행하고 있지 않았던가?”

“동행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제국군이 되는 건 아니잖아. 너 머리 나쁘구나?”

미연에게 그 말을 들으면 ‘끝장’이라는 사실을, 말룩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흥미가 있는 것은 그녀의 실력이었다.

“너를 데려가기 위해선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겠군.”

“응, 잘 아네. 하지만 굳이 데려가지 않아도 지금 부대로 가는 중이야.”

“말장난은 하지 않겠다. 나의 미도(美刀)로 너를 쓰러뜨려주지.”

미연은 솔직하게 조소했다.

“칼에 이름을 붙이는 이상, 넌 날 이기지 못해.”

“재미난 말이군. 그렇다면 너의 검에는 이름이 없다는 건가?”

자신만만하게 말룩은 미도를 들어 미연을 향해 겨눴다. 미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없어. 칼은 그저 칼일 뿐이야.”

“검사는 자신의 검에 이름을 붙이며 그 애정을 표시한다. 예부터 이름을 가진 검은 가지지 못한 검보다 강하다고도 하지. 너는 그 말을 믿지 않는 거냐?”

“그런 말은 우리나라엔 없거든.”

미연은 피식 웃고서 자세를 잡았다.

“그따위 말 지껄일 시간 있으면 그 사이에 나를 이길 궁리나 하셔.”

“그건 착실히 하고 있다.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군.”

말룩도 미연에게 수많은 부하가 죽어 나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주변의 피바다를 보면 그런 인지는 간단히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검술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비트손 말룩. 아이마임 북부 반란군 중에서도 특출한 검술 실력을 가졌기에 두목 다음 가는 지위에 오른 자다. 제국군, 나아가 아키레마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군이기에 그 어느 것보다 실력이 우선시되는 체계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상대가 너무 나빴다.

말룩이 훗 하고 웃음을 터뜨린 순간 미연의 모습이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고, 본능은 허리를 굽히게 만들었다.

머리가 있던 자리로 칼날이 빠르게 베고 지나간다.

바닥을 구르며 일어난 그는 어느새 등 뒤로 돌아온 미연을 발견했다.

“……!?”

“반응이 좋은데? 확실히 부두목 할 정도는 되나 보구나, 너. 이름이 뭐라고?”

“날 쓰러뜨리고 들어라!”

이번엔 말룩 대위가 달려들었다. 짓쳐들어 오는 미도의 하얀 검날이 만든 궤적은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재빠른 그 공격은 눈 깜짝하기도 전에 미연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미 미연은 두 발자국 뒤로 도망친 후였고, 미도의 공격은 궤도를 바꿔 그녀에게 쇄도했다.

“하앗!”

허리를 비틀며 미도를 찔렀다. 직선으로 뻗어 나온 그 공격은 순간적으로 미도가 길어졌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지붕 밑에서 지켜보던 반란군들이 환성을 지르려던 찰나.

이미 미연은 궤도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말룩은 검을 거둔 후 진지하게 미연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대단한 실력이다. 내 모든 공격을 오로지 보법만으로 피하고 있는 거냐.”

“그걸 아는 걸 보니 너도 보통은 넘는 실력이야. 칭찬해 줄게.”

“너의 정체를 들어야겠다. 이름이 뭐지? 어디서 나타난 년이냐?”

“기본적인 역사 지식을 조금만 갖췄더라면 내 머리와 눈동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진작 알아챘을 텐데.”

그제야 그는 미연의 전신을 살폈다. 단지 예쁘게 생기고 몸매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그것이 뜻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뿐이다.

“동쪽의 나라……!”

“내 이름은 신미연. 잘 안 가르쳐 주지만 특별히 가르쳐 줄게. 오늘 널 이긴 자의 이름이니까 잘 기억하도록 해.”

말룩의 표정이 환희로 바뀌었다.

“그렇군……! 네가 동쪽의 나라 출신이라는 거냐! 30년 전에 우리 제국을 뒤흔든 투신의 전사와 같은 나라라고!?”

“알았으면 이제 내게 이길 거라는 생각은 포기해.”

“핫핫핫! 이거 즐겁게 됐군!”

하늘 높이 그는 대소를 터뜨렸다.

“나도 반란군 이전에 한 명의 검사! 역사 속에서나 볼 법한 전사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다시 미연을 쳐다보는 말룩은 눈은 한결 같이 올곧았다.

“나의 미도를 걸고, 오늘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떳떳하게 검을 붙잡은 채 죽어 가겠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나?”

“뭔데?”

“검에 이름을 붙이는 이상 너를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는 뭐지? 동쪽의 나라에서는 검을 가르칠 때 그런 어구도 덧붙이나?”

“아니, 이건 단지 우리 낭군님이 나한테 해 준 말이야. 검에 이름을 짓는 놈들은 절대 나한테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무슨 뜻이지?”

“이런 말이야. 넌 너의 팔에도 이름을 붙여?”

말룩은 조금 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간단하지만 그것이 검술의 진리일 수도 있겠군. 좋은 것을 가르쳐 줘서 고맙다. 이제 너의 그 이름 없는 검과 나의 미도의 승부를 가릴 때군.”

“그것도 틀렸어. 승부를 가리는 건 나와 너지.”

미연은 칼을 고쳐 잡았다. 그 순간 말룩이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직전 이미 미연은 궤도를 벗어나 있었고, 한 발자국을 더 디딘 그가 억지로 검을 끌어와 미연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것조차 이미 미연은 간파하고 있었다. 그녀의 예리해진 전투 감각은 단 한 차례의 실수도 없이 공격의 모든 정보를 그녀의 전신에 하달하고 있었다.

뒤로 이동하며 칼을 뻗어 검을 쳐낸다. 단순한 손목 스냅을 이용한 반격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미도가 대번에 꺾여 날아간다.

말룩으로서는 생각도 못한 힘이었고, 그 탓에 그의 몸에 빈틈이 생기고 말았다.

미연은 주저없이 옆구리를 향해 칼을 찔렀다.

날카로운 지르기는 갈비뼈를 꿰뚫고 허파를 헤집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말룩도 보통 실력이 아니었기에 그 공격을 가까스로, 하지만 결국 피해 낸 것이다. 치명상은 면했지만 칼끝에 피부가 한 움큼 베이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출혈이 시작된 옆구리를 움켜쥔 채 그는 서둘러 미연의 칼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미연의 칼은 집요했다.

어떻게든 가까스로 칼을 피하고 튕겨 내고 도망쳤지만 미연의 공격은 전혀 줄어들 줄 몰랐다. 말룩은 그 칼을 막아 내기에만 급급했고, 결국 열 발자국을 채 옮기지도 못한 채 다리의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목에 미연이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민다.

“넌 졌어.”

“……대단…… 하군. 대단해. 동쪽의 나라 사람은 모두 그 정도의 실력인가?”

“딱히 그런 건 아냐. 이곳에 와서 내가 좀 강해졌을 뿐이지. 하지만 거긴 나보다 강한 사람이 널리고 널렸어.”

“무서운…… 동네구만…….”

그는 기어코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한숨을 쉬듯 푸욱 숨을 내뱉고 나서 그는 손에서 미도를 놓았다.

“죽여라.”

“여기 온 이후로, 처음으로 재미난 싸움이었어.”

미연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죽이지 않을게. 대신 날 막지 마. 그땐 정말 전부 베어 버릴 거니까.”

그 말만을 남겨 놓고 미연은 총총히 지붕을 뛰어 떠나갔다.

부대 앞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그녀를 막는 자는 없었다. 휑한 부지 내를 걸어 건물로 들어서려고 했을 때 반란군 하나가 그녀를 발견했다.

“너, 넌!”

“아, 잘 만났다. 이시브 어디 있는지 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안쪽으로 도망쳤다. 그녀는 갸웃대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위층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와장창!

창문을 깨고 두 명의 남자가 추락했다. 미연은 직감하고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누구냐!”

2층에서 마주친 남자를 대번에 베어 넘기자 그 뒤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미소라!”

“왔군.”

미소라가 이시브의 부축을 하고 창고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밧줄도 모두 풀어 내자 이시브는 두 발로 충분히 설 수 있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 같이 여행을 하는 동룐데 당연하지.”

“여긴 대체 어디지?”

“……반란군입니다, 그동안 군부대인 척 속이고 있었던.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을 이런 곳으로 모시고 와서.”

“사과는 됐어. 이제 어쩔 거야?”

이시브는 건물 밖을 살폈다.

“곧 있으면 반란군들이 다시 쳐들어올 겁니다. 쓸데없는 피를 볼 이유는 없습니다. 말을 회수하여 도망치죠.”

미연과 미소라도 이시브의 의견에 찬성했다. 일단 상세한 사정은 나중에 설명듣기로 하고 셋은 건물에서 빠져 나왔다.

더 이상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순 없었다.

아이마임 시를 완전히 빠져 나온 시점에서 이시브가 소리쳤다.

“조금만 더 가면 시디 노트니입니다!”

셋은 동시에 말을 굴렀다.

제국의 수도, 시디 노트니까지 하루가 남았다. 예정상으로는 마지막일 밤을 맞이하며 셋은 야영지를 잡았다. 수도가 멀리 보이는 야산의 공터를 신중하게 골랐다.

추격은 더 이상 없어 보였기에 그들은 드디어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시브는 미연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설명했다.

아이마임 시의 늑대 부대는 북부 반란군에게 진압당해 모두 죽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로 북부 반란군이 늑대 부대인 척 활동했고, 제국군 측에서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이마임 시의 주민들도 모두 반란군의 통제를 받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같은 편일지도 모른다. 그런 설명이었다.

“어, 그럼 내가 어제 밤에 본 그 사람들은?”

“아마 여러분들을 꾀어내기 위해 일부러 들킨 거라고 생각됩니다.”

“치사하네, 그 녀석들.”

미연도 알고 있었다. 아키레마 제국은 군사 국가인 탓에 국민들의 반발이 심하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반란군의 활동도 많이 나타난다. 로츠왈드 왕국은 반란군의 성공적인 활약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됐어, 됐어. 이시브가 무슨 잘못이야. 이시브도 몰랐잖아? 아무 일 없었으니까 된 거고.”

미연은 상큼한 태도로 이시브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시브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사과를 거듭했다.

일이 일단락되자 우선 불을 피우기 위해 각자 땔감을 모으러 흩어졌다.

그때 미소라는 미연에게 몰래 말을 걸었다.

“이시브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 너를 제국의 수도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데는 필시 연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미소라는 오랜 생각을 거친 뒤 묻는 것이었으나 미연의 태도는 담백했다.

“이시브의 생각이 아냐. 좀 더 위에 있는 자의 생각이지.”

“근거는?”

“없어, 그냥 감. 하지만 너도 인정하잖아?”

미연은 어디까지나 태연한 어조였다.

“나를 시디 노트니로 데려가서 수도 주둔군 군단장을 만나 달라고 했어.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제국 마법사단과의 연결이지. 놈들의 생각이 어떻든 난 제국 마법사단과 만나기만 하면 돼. 배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서울만 가면 되는 거잖아?”

“배는 알겠지만 비행기는 뭔지 모르겠군. 서울은 동쪽의 나라의 도시 이름인가?”

“대충 알아들었으면 그렇게 이해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미연은 모아 놓은 땔감을 가슴에 앉았다. 미소라는 어조를 바꿨다.

“그럼 넌 앞으로 계속 저들에게 맞춰 줄 생각인가.”

“‘앞으로’라고 해도 이제 하루 남았어. 내일 오후쯤에는 수도에 닿는다고 했으니까 늦어도 모레까지는 내 용건은 전부 끝날 거야. 생각은 그때 가서 하지 뭐.”

“그때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야?”

“아이마임 시, 그것도 분명 이시브가 꾸민 짓이다. 이시브가 아닌 그 위의 군단장일 수도 있지. 혹시 더 위일 수도. 네가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반란군을 이용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 놈들이다. 수도에 닿았을 때는 또 놈들이 쳐놓은 덫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상관없어.”

미연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덫을 쳐놓으면 부수면 돼. 그물을 던지면 찢어 버리면 돼. 딱히 제국을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한다면 상대가 누구든 쓰러뜨리면 돼. 세상은 그런 거잖아?”

그녀 안에서 세상이란 복잡할 것이 없었다. 골 아프게 머리 쓰는 것은 모두 태진에게 미루는 그녀다.

그녀는 오로지 몸으로 움직이고 감각으로 반응한다. 상대가 강하면 더 강해지고 상대가 지독하면 더욱 지독해지는 것,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방해가 있다면 뚫고 나가면 그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소라에게 있어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렴풋이 그녀의 강함을 조금 이해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군. 넌 그런 여자였지.”

골치 아플 건 없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감에만 충실하게. 그녀는 전투도 생활 방식도 모두가 그랬다.

문득 미소라는 이런 여자가 사랑하고 이런 여자를 사랑하는 강태진이라는 남자가 어떤 자인지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미연을 뒤따르는 이 여행의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미소라는 마음속에서 조금 피어난 그 감정을 제대로 눈치 채지 못하고, 야영지로 돌아왔다.

이튿날, 해가 뜨자마자 셋은 야영지를 정리하고 출발했다.

“시디 노트니에는 언제쯤 도착해?”

“늦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충분히 도달합니다. 말의 상태가 좋은 듯하니 빠르면 정오가 좀 지났을 즈음에는 도착하겠군요. 너무 빨리 도착해도 재미없으니까 천천히 가시겠습니까?”

“땡― 그 의견은 기각. 난 어쨌든 수도로 가는 게 먼저니까.”

이시브 소령의 농담을 웃어넘기며 미연은 똑바로 수도를 쳐다보았다. 바운스에 다시 떨어진 지 한 달 만에 한때의 적이었던 아키레마 제국의 수도, 시디 노트니에 당도했다.

군사국가의 수도답게 성문에서부터 엄격한 검문을 받았다. 이시브가 신분을 밝혔지만 꽤 긴 검문 후에야 세 명은 검문소를 통과하여 수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커다란 도시, 드넓은 평지와 낮은 산들을 끼고 만들어진 대륙 최대 도시의 수도는 그 넓이부터가 엄청났다.

“우와! 제법 크네.”

미연은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고대 신성 제국의 수도를 그대로 계승했다고 일컬어지는 아키레마 제국의 시디 노트니는 일찍이 미연이 접하지 못한 거대한 느낌이었다.

그래 봤자 어차피 한국의 서울에서 살다 온 그녀로서는 금세 그 크기에 익숙해졌다.

“어떻습니까, 미연 님. 대륙 최고의 도시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응. 뭔가 볼 게 많아 보인다. 볼일 보고 나중에 관광 좀 해도 되지?”

완전히 외국 나온 관광객 자세인 미연이었다. 이시브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해 두었던 모자와 가면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수도 안에서는 이것을 착용해 주십시오. 그 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가려야 해?”

“비밀스럽게 데리고 오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이해해 주십시오.”

“흐응.”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미연은 일단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그래도 쉽게 쓰려고 하지 않는 그녀를 이시브는 어르고 달래 결국 모자와 가면을 착용시켰다.

가면은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이색적인 문양이어서 미소라는 오히려 의문스러웠다.

“이런 가면을 착용하는 편이 오히려 더 눈에 띄는 짓 아닌가?”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이시브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외곽 지역을 벗어나 점차 중심가가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미연은 알아챘다. 아이들, 젊은이들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미연의 가면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쓰는 자도 있었고 그저 목에 걸치고 있는 자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이 가면이 그렇게 특출할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뭐야, 이 가면이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거야?”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황자 님께서 얼마 전에 병을 터시고 일어나셨는데, 그 이후로 가면을 착용 중이십니다. 자세한 사항은 기밀이라 말해드릴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지금 수도에서는 이 가면이 유행 중입니다.”

“이 나라에도 유행이란 게 있구나. 제법 신기한걸?”

얼굴을 덮은 가면을 만져 보며 미연은 피식 웃었다.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사람이 사는 동네라 이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녀는 황성으로 가는 도중 계속해서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불편한가?”

“시야가 좁아지니까 조금. 그래도 생각만큼 나쁘진 않네. 통풍도 잘되는 것 같고. 어울려?”

“평소보다 낫군.”

“확 벗어 버린다?”

황성 앞에서 으르렁대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이시브는 검문을 받으며 병사에게 용건을 전했다.

“이 두 사람은 군단장님의 손님이다. 따로 지시가 있을 테니 통과시켜 주길 바란다.”

“미리 지시가 내려와 있습니다. 통과하십시오.”

수도 주둔군 군단장의 직통 지시가 있었기에 병사는 의심 없이 세 사람을 통과시켰다. 가면을 쓰고 있는 미연의 모습을 흘끔 쳐다본 그는 무표정하게 본래의 근무로 돌아갔다.

“수도 주둔군 사령부는 황성 내에 있습니다. 제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오십시오.”

이시브는 익숙한 걸음으로 앞서 걸어 나갔다. 북부 주둔군 군단장의 비서역을 맡고 있는 그이기에 황성의 지리에도 익숙했다.

넓은 황성 부지의 서쪽으로 난 길을 똑바로 나아간 후 그는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췄다.

“이곳이 수도 주둔군 사령부입니다.”

안으로 들어간 이시브는 일단 대기실에 미연과 미소라를 남겨 두고 혼자서 군단장실을 향했다. 비서관이 문 앞에서 그를 멈춰 세운 후 간단한 검문을 했다.

“군단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십시오.”

비서관이 열어 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이시브는 수도 주둔군의 군단장을 만났다.

새하얀 머리칼을 정돈하게 넘긴 노년의 군단장은 이시브의 노고를 치하한 후 본건에 들어갔다.

“그들은 도착해 있나?”

“지금 대기실에 있습니다.”

이시브는 아이마임 시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이상입니다. 감상은 어떠십니까?”

“만족하네. 이시브 소령, 자네의 눈이 정확했나 보군.”

군단장은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이시브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마임 반란군 전체를 혼자서 상대한 거나 다름없군. 개중에 그 유명한 말룩도 끼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도 이겼나?”

“단 한 번의 밀림도 없이 이겼다고 합니다. 저를 구하러 오는 도중에 부딪혔다고 하더군요.”

“그 실력을 정말 내 눈으로 보고 싶군…….”

“원하신다면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아니, 황성 내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지. 그 전에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이리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됐다, 내가 가도록 하지.”

이시브는 놀란 얼굴을 만들었다.

“네? 하지만 군단장님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아니, 앞으로 우리 이황자파에 힘을 실어줄지도 모를 존재다. 어느 정도 턱을 숙여 줄 필요는 충분히 있다.”

군단장은 바로 이시브 소령을 앞세워 대기실로 향했다.

군단장의 행차에 대기실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숨넘어갈 듯한 경례를 붙이는 것도 무시한 채 그는 대기실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관리병이 내다준 차를 마시고 있던 미연이 이시브를 반갑게 맞이했다.

“왔어? 그 할아버진 누구야?”

“……수도 주둔군 군단장님이십니다, 미연 님.”

“아, 우리를 불러 오라고 했던 사람? 북부 주둔군의 군단장보다 늙었네?”

아무렇지 않게 막말을 내뱉으며 미연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시브가 관리병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 것을 명한 후 문을 닫자 군단장 쪽에서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아키레마 제국 수도 주둔군 군장단인 발츠 온 레네스록이라고 하오.”

“응, 반가워. 신미연이야. 뭐라고 부르면 돼?”

“상당히 자유로운 말투를 가진 분이시군. 마음 가는 대로 부르시오. 앞으로 자주 볼 터인데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소.”

“그럼 발츠라고 부를게. 앞으로 자주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얘기는 들었소. 먼저 아이마임 반란군의 일은 사과하겠소. 우리 군의 문제로 당신의 심려를 끼치게 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투신의 전사.”

미연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어, 방금 투신의 전사라고 했어? 믿어 주는 거야?”

“가면과 모자를 벗어 주시겠소?”

군말 없이 미연은 가면과 모자를 제거했다. 본래의 흑발과 흑안이 선명하게 드러나 발츠 군단장은 순간 숨이 막혔다.

딱 한 번, 30년 전의 전쟁에서 이 흑발을 본 적이 있다. 먼 곳에서 적군을 지휘하던 투신의 전사. 그 전투에서 패배한 제국군은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그 도망의 와중에 본 것이 발츠로서는 최초이자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기억이 또다시 확연하게 떠올랐다.

“……안 믿을 수가 없군. 정말로, 투신의 전사란 말이오?”

“같은 동쪽의 나라 출신일 수도 있어. 삼십 년 전의 그 사람과는 다를지도 몰라.”

“아니, 상관없소. 같은 모습에 같은 검술 실력. 그것만 있다면 당신은 우리에게 충분히 힘이 되어 줄 것이오.”

“힘?”

미연이 되묻는다. 지켜보고 있던 미소라가 짐짓 자세를 바꿨을 때 발츠 군단장은 조용하지만 강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황자님을 만나 주시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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