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그 남자는 대체 누굽니까?
팰리슈 반 로츠왈디스. 로츠왈드 왕국 현 국왕. 일명 팰. 그렇지만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지금 현재 손에 꼽는다. 왕비인 에스타냐 힐리움, 로츠왈드 반란군 시절부터 친우였던 라스터 슈펠과 하이듀크 뤼스필드.
굳이 꼽자면 이 세 명만이 사석에서 그를 그렇게 부를 뿐이다. 공석에서는 아무도 그를 애칭으로 부르지 못한다.
30년 전 아키레마 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해 낸 뒤 제국 남부의 반란군을 통합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운 그는 대륙 역사에서 이미 큰 획을 차지하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편하게 애칭으로 막 대할 수 있는 사람 따위, 많을 리가 없다.
그러나 태진은 달랐다.
“오랜만입니다, 팰.”
“…….”
외부에서는 지엄하신 국왕 폐하로 불리는 팰리슈는 말없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 옆에는 30년 전의 땟국 가득했던 얼굴을 완전히 지워 버린 왕비, 에스타냐 힐리움이 서 있었다.
태진은 그녀에게도 인사했다. 그렇지만 그녀 또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다. 국왕 내외를 모시고 온 라스터 슈펠, 흑안(黑眼) 기사단장 또한 태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었으니까.
태진은 웃음을 머금었다.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다시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30년 만이겠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팰리슈는 반응을 보였다.
“……잠깐, 타냐. 내 말을 들어줘.”
“말해 봐, 팰.”
“우리가 아침에 뭘 먹었지?”
“향료를 곁들린 석스 요리. 옛날부터 당신이 좋아하던 요리였어. 그래서 내가 아침부터 주방으로 가서 만들어 왔잖아.”
“맞아. 그러고 나서 서류를 정리하고 당신은 귀부인들과 오후 다도를 준비했지. 그러다 하이듀크의 연락을 받고 이곳으로 왔어.”
“데리고 온 건 라스터였고.”
“그래, 맞아. 그런데…… 왜 태진이 우리 앞에 서 있는 걸까?”
“……그러게?”
두 사람의 눈길이 태진을 지나 하이듀크에게 쏠린다. 아버지와 같이 이 회의실로 온 아리스는 자신이 눈길을 받은 듯이 몸을 떨었다.
하이듀크는 인자한 표정으로 수염을 꼬았다.
“맞네, 팰. 자네의 시력은 아직 한창 때야.”
“거짓말하지 마, 하이듀크. 아무리 내가 잘 속는다지만 이건 좀 너무하잖아? 그새 변형의 레펠이라도 찾은 건가?”
“현실 도피는 그만두십시오.”
태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잘랐다. 뚜벅뚜벅 팰리슈 앞으로 걸어간 그가 눈을 맞추고 대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함께 30년 전 제국 남부를 뒤흔들었던 현신의 전사, 강태진이 맞습니다.”
그 압박에 눌려 팰리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뒷걸음치는 그의 어깨를 잡은 것은 라스터. 그 또한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지만 똑바로 태진을 쳐다보았다.
“정말, 강태진이란 말인가?”
“그 질문도 이제 슬슬 지겨워지는군요, 패도(佩刀)의 기사. 휘안의 기사와는 여전히 티격태격하고 있습니까?”
“그건 저놈이 항상 시비를 거니까 그런 거지.”
“어이, 라스터. 누가 누구한테 시비를 걸었다는 거지?”
아리스와 아서가 두 아버지의 행각에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 두 사람은 친우라고는 하지만 만나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다투기 일쑤다.
거기에서 끼어 가장 고생한 것은 누가 뭐래도 국왕인 팰리슈. 이 인연이 이미 50년을 바라본다는 것을 아는 태진이기에 가만히 두 사람을 옆으로 밀어두고 다시 팰리슈에게 말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그, 글쎄, 진정이 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심약하시군요. 일주일 정도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 현실을 인정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인정 안 한다고 해도 이 용서 없는 성격을 보고 있자니 강제로 인정해 버릴 것 같기도…….”
“하여튼 들어주십시오, 팰.”
두 사람의 현실 인정은 뒤로 싹 제쳐두고 태진은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주십시오.”
“에?”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제 본의로 바운스에 온 것이 아닙니다.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돌아갈 생각이신가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리스였다. 희한하게도 그녀는 그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다투고 있던 하이듀크와 라스터도 목소리를 접고 태진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모인 가운데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기서 제가 할 일은 없습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문제될 게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 잠깐! 태진, 당신이 내가 아는 현신의 전사가 맞다면 잠깐만 기다려 줘. 삼십 년 만에 만났다고. 그런데, 벌써 돌아간다고?”
“제 말을 잘 이해해 보세요. 전 돌아갈 방법을 찾아 달라고 했습니다. 모르십니까? 삼십 년 전에 제가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우연찮게도 ‘차원 간섭을 일으키는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한 번 사용 후 무너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그랬지. 아니, 무너졌어.”
“그렇다면 다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차원의 레펠이라도 찾지 않는 한 분명히 힘들 겁니다. 당장에 돌아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탁을 하겠습니다만.”
좌중을 둘러보고 태진은 팰리슈를 보며 히죽 웃었다.
“숙소를 하나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며칠 후 아리스는 태진의 부탁을 받고 그를 찾아갔다. 순찰대장직에 복귀하여 미켈파 남작과 오켈라니아 남작에게 정식으로 소환 명령을 내리는 사이 어느새 며칠이 흘러간 것이다.
국왕과의 대면 이후 태진을 보는 것이 처음이기에 조금 두근거리며 그의 저택을 찾아간 그녀가 본 것은,
“――!”
노란 머리였다. 그뿐 아니라 태진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눈썹까지 노랬다.
“아, 오셨습니까.”
“그, 그, 그 머리는……!”
“탈색을 좀 해 봤습니다. ……노란 머리는 처음인데, 어울립니까?”
“타, 탈색요?”
“예. 말 그대로 머리카락의 색을 빼는 겁니다.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검은 머리는 아무래도 감추기 힘들잖습니까. 전 대외적으로 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삼십 년 동안 발전해 온 로츠왈드 왕국에 현신의 전사가 다시 나타났다면 분명 국가 내외로 경계 태세가 나타날 테니까요. 그래서 특히 제국 쪽에는 더욱 비밀스럽게 움직이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 그럼…… 누, 눈도 설마?”
“설마요. 눈은 아닙니다.”
그는 씩 웃으면서 눈을 떴다.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본래의 검은색이었다. 아리스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어 숨을 몰아쉬었다.
태진은 동쪽의 나라 의복이라고 알려져 있던 옷을 세탁 후 정리해 두고 로츠왈드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30년 전에도 입었던 옷이기에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옷을 다 입은 후, 태진은 기다리고 있던 아리스와 같이 저택을 빠져 나왔다.
“왕궁 마법사단으로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에……? 제가요?”
“그래도 지금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 당신이기에 하이듀크에게 부탁했습니다. 신임 부대장이 일처리를 대신 해 줄 것이니 일에 관해서는 걱정 없을 겁니다.”
“그, 그렇지만 지금 미켈파 남작의 일도 있고…….”
“그쪽은 하이듀크가 직접 나섰으니 걱정 없습니다. 팰리슈의 전언이 도착해 있을 테지만 저 혼자 찾아가면 의심받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아리스는 잠시 생각한 후 결국 승낙했다.
아리스는 왕성을 나선 후 마법사단의 본부로 그를 안내했다. 태진은 루위스의 지리를 머릿속에 넣으며 그녀를 뒤따랐다.
“여기예요.”
왕국 마법사단의 본부는 왕성 외부에 위치해 있었다. 왕궁과는 별도로 독립된 기관이라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안내원이 본부로 들어간 그들을 반겼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전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 아리스 뤼스필드라고 합니다. 국왕 폐하로부터 전언이 도착했을 거예요.”
“예?”
안내원은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국왕을 들먹이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아리스와 태진이 눈을 마주치는 사이 안내원 오른쪽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급하게 달려 나왔다.
“호, 혹시 왕궁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네, 제가 아리스 뤼스필드. 이쪽이 강태진이라는 이름을 쓰시는 분입니다.”
힐끔 쳐다보는 남자는 노란 머리에 눈을 감은 태진을 발견했다. 묘한 표정으로 그는 안내원에게 입단속을 시키고 본부 안쪽으로 둘을 데리고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거닌 후 어느 원목 문 앞에 멈춰선 그는 헛기침과 함께 문을 열었다. 아리스는 이곳이 단장실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았다.
“단장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알겠네. 나가 보게.”
남자가 문을 나간 후 서류가 쌓인 책상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노년의 마법사였다. 바닥에 끌리는 마법사 전용 복장을 한 그는 여유롭게 의자를 권한 후 반대편에 자리했다.
“얼마 전에 순찰대장에 오르신 뤼스필드 가의 따님이시군. 임관식에서 한번 본 적이 있소. 반갑구려.”
“예. 저도 멀리서만 뵈었어요, 랑퀘지 단장님. 반갑습니다.”
“폐하께서 보내신 전언은 이미 읽었소. 그 탓에 아침부터 조금 놀랐지 뭐요. 누군가가 찾아올 테니 정중히 모시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누군가라는 분이 이분이시오?”
랑퀘지 단장의 눈은 태진을 향했다. 눈을 감은 채 감각으로서 모든 사물을 인식하고 있는 태진이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태진은 그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뜨고 있었다면 시선이 얽혔을 위치였다.
노년의 마법사가 예리하게 눈빛을 바꿨다.
“흐음…… 심상찮은 기운을 가지신 분이구려. 누구신가?”
“강태진이라고 합니다.”
“음……? 지금 뭐라고 하셨소?”
“강태진이라고 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부모님께서 현신의 전사처럼 되라는 뜻에서 지어 주신 이름이니 동쪽의 나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군…… 조금 놀랐소. 그러고 보니 그런 이름을 짓는 일도 있긴 했지.”
“그런 경우입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태진에게 아리스는 속으로만 혀를 내둘렀다. 정말 표정 하나 바꾸지 않네…… 거짓말도 이 정도면 이미 진실이야.
태진은 말했다.
“여행 중에 우연찮게 아리스를 만나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제가 여행하는 동안 손에 넣은 물건이 있는데 좀 봐 주시겠습니까?”
“무엇이오? 폐하의 기밀 전언까지 올 정도라면 평범한 물건은 아닐 터인데. 마법이라도 담긴 물건이오?”
“그 정도가 아닐 겁니다.”
태진은 지난 도주행 동안 고이 간직하고 있던 물건을 꺼냈다. 공간의 레펠, 미카일 산의 흔적에서 그가 찾아낸 레펠이었다.
레펠을 건넸을 때 노년의 마법사의 반응은 가히 격정적이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금방이라도 떠질 것 같이 눈을 치켜뜬다.
“이, 이것은……!”
“공간의 레펠입니다.”
“고, 공간! 네 번째 레펠이란 말이오? 이것을 어디서 찾은 것이오!?”
“아리스와 저에게 현상 수배가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으실 겁니다. 그때 저흰 미켈파 영지에서 도망치기 위해 미카일 산을 넘었습니다. 그 넘는 과정에서 우연히 흔적을 발견하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이 레펠을 발견했습니다.”
“미, 미카일 산이라면 한 달쯤 전에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던 그곳 아니오?”
“미켈파 영지에서 정보부로 보고가 올라갔을 겁니다. 그 흔적은 재생의 레펠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재생의 레펠! 정보부에서는 그 흔적의 조사를―”
“이미 들어간 상태예요. 내일 본격적인 조사단이 파견될 겁니다. 동시에 미켈파 남작이 소환될 테지요.”
“과연…… 역시 뤼스필드 가문이오. 빈틈없는 신속한 일처리군요.”
참고로 이런 신속한 일처리에는 하이듀크의 딸 사랑이 한몫했다. 미켈파 남작이 아리스에게 누명을 씌었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가 다른 일은 제쳐두고 거기에만 매달려 사건을 규명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각지에 연락은 물론 소환장의 작성까지. 아리스가 순찰대장직에 복귀했을 땐 이미 그녀가 할 일이 다 사라진 상태였다.
겨우 흥분을 멈추고 자리한 랑퀘지 단장은 숨을 몰아쉬며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의 호흡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 태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공간의 레펠의 연구를 해 주십시오. 제가 부탁 드리고 싶은 일은 그것입니다.”
“당연하오. 레펠의 발견은 우리 왕국의 마법을 또다시 발전시켜 줄 것이오.”
“그리고 그 연구에 저도 참가시켜 주시겠습니까?”
“…폐하의 전언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있었소. 그가 하는 부탁은 모두 들어주라고. 이 부탁을 염두해 두고 하신 말씀인가 보구려. 헌데 고대어는?”
“할 줄 압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있소?”
“마법사에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겠소. 마법에 관한 것은 차차 알아 나가면 되니 큰 걱정은 하지 마시오. 오늘 당장 연구를 시작할 터이니 그렇게 알고 계시오.”
결정이 되자 랑퀘지 단장의 행동은 빨랐다. 노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정열적인 태도로 그는 연구단을 소집하기 위해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덩달아 일어선 태진은 아리스에게 부탁했다.
“전 잠깐 레펠의 연구에 참가하겠습니다. 그동안 미켈파 남작건을 잘 마무리해 주십시오.”
“예, 맡겨 주세요.”
태진은 살짝 눈을 뜨고는 아리스에게 미소를 지었다.
로츠왈드의 국왕 팰리슈 반 로츠왈디스는 집무실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서류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종이 그의 앞에 찻잔 하나를 놓고 나간 후에도 그 얼굴은 한참 동안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중 잠깐 햇살이 비치는 창을 힐끔 쳐다보고, 방금 시종이 나간 문을 살핀 후 팰리슈는 마음껏 의자에 늘어졌다.
“……으아아아, 일하기 싫어.”
국왕으로서의 체통은 어딘가로 팔아넘기고, 정보꾼들이 안다면 희희낙락 제국에 팔아넘겼을 만한 자세로 그는 책상 위에 발을 올렸다.
“그래……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 가끔씩은 이렇게 쉬어 줘야 일의 능률도 올라가는 법이거든. 응. 맞아. 태진처럼 하루 종일 긴장만 하고는 살아갈 수가 없어.”
누구에게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로 그런 핑계를 늘어놓는 팰리슈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다. 주변 친우들의 평가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왕은 못해 먹을 놈이라는 자가 지금 로츠왈드의 국왕 자리에 앉아 있다. 국민들이 안다면 단체로 반란군을 조직할 만한 남자다.
그런 그를 적당히 잡아 주는 것은 언제나 왕비, 에스타냐의 몫이었다.
“……팰.”
“흐이익!”
후다닥 발을 내리다 책상 아래로 나자빠져 뒹구는 팰리슈의 모습을 에스타냐는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러고 있을 줄 알았어, 정말.”
“드, 들어올 때 소리 좀 내!”
“이러고 있을 거 같았어. 정말이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 현신의 전사도 돌아왔는데 이런 모습만 보여 줄 거야?”
“그, 그 녀석도 아, 알고 있을걸?”
“옛 친구의 변함없는 모습에 참도 좋아하겠다.”
왕비된 자로서 마음껏 남편의 행태를 비꼬아 주고서 그를 일으켰다. 의자에 앉는 그의 앞에 서류더미를 척 갖다 올린다.
에스타냐는 왕비면서도 팰리슈의 비서관역을 맡고 있다. 반란군 시절부터의 오랜 직책이었다. 유능하다면 오히려 이쪽이 더 유능하다.
“마법사단에서 보고가 올라왔어. 태진이 발견한 레펠에 대한 중간 연구 결과야.”
“며칠이나 지났다고? 아직 일주일도 안 됐잖아?”
“아무래도 말야, 우리가 납득해야 할 것 같아.”
에스타냐는 팰리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봐주었다. 그 시선에 눌린 듯 팰리슈는 서류더미를 휘리릭 넘겼다. 대충 보는 것 같아도 주요한 사항은 모두 읽고 있었다. 폼으로 국왕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게 뭐야…… 레펠의 해석이 이미 절반쯤 진행되었단 말야?”
“게다가 그 대부분의 고대어 해석을 해낸 자가 바로 그 강태진이야.”
“……진짜?”
“이쯤 되면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어안이 벙벙해진 팰리슈를 보며 에스타냐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친우인 하이듀크와 라스터는 이미 태진의 존재를 인정했고 오히려 환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왕 내외는 아직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참 닮은 두 사람이었다.
“난 인정할 거니까 천천히 생각해. 아 참, 좀 있다가 같은 이유 때문에 놀란 사람이 찾아올 테니까 같이 고민해 보든가.”
“어? 누구?”
그 말이 끝나자마자 팰리슈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폐하아!”
“라, 랑퀘지 단장님! 갑자기 들어가시면!”
시종이 잡아끄는 것을 무시한 채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뛰어 들어온 것은 마법사단의 랑퀘지 단장이었다.
에스타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분.”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폐하!”
“라, 랑퀘지 단장?”
에스타냐가 퇴장하고 집무실에는 두 명만이 남았다. 숨을 씩씩대는 그를 진정시키며 팰리슈는 제 몫의 차를 양보했다.
“일단 한 잔 마시고 호흡을 진정시키시오, 단장.”
“가, 감사하옵니다, 폐하.”
뜨거운 차를 한 방에 들이킨 후 랑퀘지 단장은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다.
“그 남자 대체 누굽니까! 자기 말로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이리저리 떠도는 여행자라고 했지만 지식이 결코 보통 여행자의 수준이 아닙니다! 세상 어느 여행자가 고대어를 공용어 수준으로 읽을 수 있답니까! 실제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저희 연구원들은 발끝에도 따라갈 수 없는 속도입니다! 대체 저런 사람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 아니, 저런 사람이 폐하를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으, 옛 인연이라고 하면 안 되겠소?”
“옛 인연이라고 하심은!?”
“한…… 삼십 년?”
“그 남자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이십 대 후반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젊어 보인다는 이야깁니까!”
“아니, 본인 말로는 스물하나라고 하오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너무 많은 것을 묻지 말아 주오. 나도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소.”
실제로 그렇긴 하다. 30년 전에 갑자기 나타났던 그는 자신을 도와 로츠왈드를 되찾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라곤 동쪽의 나라라고 얼버무렸지만 애초에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 그 외에 아는 것은 그가 바운스에서 보여 준 기적 같은 위업뿐이다.
“너무 괴상합니다. 그 나이에 그 지식수준이라니…… 이건 차라리 두뇌 능력 자체가 일반인과 다르다고 여기는 게 빠를 거란 말입니다. 폐하! 제가 직접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기에 감히 폐하께 여쭙습니다만.”
“무엇이오?”
“그 자는 현신의 전사와 관련이 있는 자이옵니까? 아니라면 그 능력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와중에 팰리슈는 직감했다. 그 존재를 납득한다. 현신의 전사가 다시 왕국에 돌아왔음을 인정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소. 그것은 그 스스로가 밝혀야 할 문제이오.”
랑퀘지 단장은 국왕의 어조에서 왠지 모르게 그 남자에게 한수 접어주고 있음을 직감했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그 강태진은 대체 어떤 자란 말인가.
팰리슈는 일단 랑퀘지 단장에게 물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소?”
“조금 있으면 저희 연구단에 올 것입니다. 연구에 참가 중이기에 거의 저희 본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 나도 그곳으로 가겠소. 그를 만나서 할 말이 있소.”
“폐, 폐하께서 직접 말이십니까? 그를 이리로 부르시는 편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내가 가겠소. 그가 연구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하고.”
팰리슈는 먼저 일어섰다. 그 뒤를 따라 랑퀘지 단장도 허겁지접 일어나 앞서 그를 안내했다.
갑작스런 국왕의 움직임에 왕궁이 잠시 웅성댔다. 보통 국왕이 이동을 한다면 호위대가 따라붙고 준비 과정이 복잡하기에 늦어도 하루나 이틀 전에는 각 부서에 통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로츠왈드 왕국에는 그러한 절차가 전혀 없다. 단지 국왕이 움직인다면 대기 중이던 호위대가 움직일 뿐이다. 왕궁의 웅성거림은 그들의 도착 때문이었다.
호위대의 선두에서 팰리슈를 맞이한 것은 라스터였다. 하이듀크의 뒤를 이어 현 로츠왈드 왕국 제일 기사로서 호위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그는 팰리슈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간다. 국왕의 경호가 대폭 줄어들 수 있었던 것도 이 패도의 기사 때문이었다.
“폐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나올 걸 알고 있었소?”
“현명하신 왕비 전하의 선처 덕분입니다.”
에스타냐는 랑퀘지 단장의 방문건에서부터 이미 팰리슈의 반응을 예측했다.
팰리슈는 아내 하나는 잘 들였다는 뿌듯한 생각을 하며, 호위대의 호위를 받아 왕궁 마법사단으로 향했다. 왕성을 나서 마법사단의 본부에 들렀는데 이미 국왕 방문 준비는 모두 끝나 있었다.
부단장이 발 벗고 뛰어나와 국왕을 반겼다. 그 후에도 줄줄이 인사들이 달려 나왔지만 팰리슈는 그 모든 인사를 짤막하게 끊고 용건을 밝혔다.
“공간의 레펠 연구단은 어디에 있소?”
“3층 연구실에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폐하.”
랑퀘지 단장은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그 뒤를 근엄하게 뒤따르며 팰리슈는 철저하게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늠름한 국왕의 모습을 보며 마법사들이 환호성을 입 안으로만 질러 댔다. 에스타냐가 보면 기가 찼을 광경이지만 어쨌든 팰리슈는 연구실에 도착할 때까지 국왕의 체통을 확실히 지켰다.
그것을 깬 것은 당연히 태진이었다.
“왔습니까, 팰.”
다른 연구원들은 모두 기립했음에도 태진은 까딱 고개만 끄덕였을 뿐 다른 반응은 내비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눈앞의 레펠에 쏟아져 있었다. 한쪽 손으로는 레펠을 읽어 내리고, 머리로는 고대어를 대륙 공용어로 동시 번역하며, 다른 손으로는 그것을 써내려 가고 있다.
그 일련의 작업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어 보든 이들은 진짜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다른 이들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 태진의 행동에 30년 만의 감회를 느낀 팰리슈는 가볍게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잠깐만 봐주지 않겠어?”
“바쁩니다. 용건이 있다면 나중에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만 들어주면 돼. 어차피 자네가 연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온 거니까 지켜보기만 할 거야.”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의자를 돌린 그가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팰리슈는 노란 머리의 그를 기이하다는 듯 관찰하고서 말했다.
“눈을 감은 채로 글이 보이나?”
“손으로 글씨를 감지하고 있습니다. 읽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정말 대단한 감각이야…… 예전부터 그랬지만. 그래, 해독은 어느 정도 되어 가고 있지?”
“고대어는 암호가 아니기에 단지 해석할 뿐이라고 예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오늘 아침에 보고한 분량보다 조금 더 나갔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은가?”
“일주일 정도? 빠르면 오 일. 그 정도입니다.”
이 부분에서 또 연구원들이 기겁했다. 보통 레펠의 해석은 전반보다 후반이 더 어렵다. 전반의 내용을 기초로 후반의 내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충분한 이해가 있다고 해도 보통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태진은 당연하단 투로 전반부 해석 작업과 똑같은 시간, 혹은 그보다 더 빠른 시간을 예고했다. 랑퀘지 단장은 머리 한구석에 무언가가 끊어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어디서 뭘 하던 자인가!”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그저 여행자이며, 여행하는 와중에 이런저런 지식을 주워 익혔을 뿐입니다.”
“그, 그런 걸로 설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하지만 그 또한 상관없다는 눈치다. 팰리슈는 랑퀘지 단장의 호흡을 다시 진정시키고 태진에게 돌아섰다.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연구단을 만들게 한 거지?”
“그 편이 조금이라도 빨리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
“제가 원하는 건 공간의 마법이 아닙니다.”
태진은 연구원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모든 레펠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공간의 레펠을 해석하면 아마 차원의 레펠에 대한 단서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차원의 레펠?”
연구원들이 다시 한 번 놀랐다. 레펠이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삼십 년 전 현신의 전사가 증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공간의 레펠을 해석한다고 해서 차원의 레펠을 찾을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찾아낸 레펠은 불, 땅, 바람, 벼락, 물. 오 대 기본 원소 마법은 전부 밝혀진 상태입니다. 거기다 벼락의 레펠에서 해석한 재생의 레펠은 미켈파 남작이 발견해 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소위 상위 마법으로 불리는 세 가지뿐일 겁니다.”
자연계의 기본 원소를 다루는 하위마법과 비교하여, 상위마법은 방식이 다르다. 좀 더 고차원적이고 세밀하기 때문에 그런 분류를 적용하는 것이다.
“바람의 레펠이 가리킨 것은 공간의 레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공간의 레펠은 남은 두 레펠 중 하나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차원의 레펠에 대한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거군…….”
고개를 끄덕이는 태진에게 팰리슈는 재차 진지하게 물었다.
“차원의 레펠을 찾을 생각이야?”
“그게 제가 원하는 목적입니다. 그래야만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태진의 목표는 오로지 한국으로의 귀환. 그것뿐이었다. 30년 전처럼 로츠왈드의 독립이라는 명분도 이젠 없다. 그 당시 도와주었던 친우는 이미 어엿한 왕이 되어 있고, 이곳에서 그가 할 일은 없다.
팰리슈는 조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이제…… 자네의 존재를 인정하게 됐는데. 돌아간다는 소리를 들으니 약간 충격이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니 이해해 주십시오.”
복잡한 표정으로 팰리슈는 돌아섰다. 태진은 한번 정한 것은 바꾸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든 이루고 마는 자다. 팰리슈는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임을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알았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렇지만 있는 동안에는 자주 보자고. 오랜만에 만났잖아?”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자네를 위해 만찬을 준비할 예정이야. 에스타냐가 오랜만에 실력 발휘한다고 하니까 내 저택으로 와.”
“감사합니다. 오늘치 연구가 끝나는 대로 가겠습니다.”
태진의 약속을 받아내고 팰리슈는 돌아갔다. 그리고 연구원들은 국왕의 방문 탓에 더더욱 태진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혼란스러워 하는 연구원들을 내버려 두고 랑퀘지 단장이 팰리슈를 뒤따라 달려나갔다.
“폐하!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대체 저 자는 누굽니까!”
“랑퀘지 단장, 삼십 년 전의 전쟁을 기억하시오?”
“물론 기억합니다. 직접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후방에서 지원을 담당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오늘 만찬에 단장도 초대하겠소. 직접 오셔서 들으시오.”
“……?”
단지 그 말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팰리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마법사단 본부를 떠나갔다.
랑퀘지 단장의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
“태진은? 온대?”
“아마 올 거야. 연구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약속을 어기는 녀석은 아니니까 시간 맞춰서 오겠지.”
“몇 시라고는 말했어?”
“……아차.”
에스타냐의 지적에 팰리슈가 해시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해가 졌으니 시각을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응접실 한쪽에 분수처럼 놓인 물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서 뜨끔한 얼굴을 했다.
에스타냐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라면 알아서 잘 찾아올 테니 걱정 마.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연락해 뒀지?”
“응. 아까 다 했어.”
팰리슈가 직접 연락한 오늘의 손님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뤼스필드 가의 사람들이었다. 하이듀크가 아리스와 같이 마차로 국왕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국왕 내외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땐 별장처럼 따로 마련된 저택을 사용하곤 했다.
저택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팰리슈가 그들을 맞이했다.
“폐하. 오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까지 초대해 주신 선처에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아냐, 아냐! 친구, 우리가 어떤 사이인가! 삼십 년 전에는 함께 전쟁을 치러냈고 그 후엔 함께 이 나라를 세워 온 사이 아닌가! 오늘 만찬에는 절대 빠질 수 없지! 아리스 양도 부담 없이 오늘 자리를 즐겨 주시오.”
며칠 전 이미 국왕의 본모습을 보고 만 아리스이기에 그의 소시민적인 자세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감사를 표하고 응접실에 자리했다.
그 뒤를 따라 라스터 슈펠과 아서 슈펠. 그리고 랑퀘지 단장까지 속속 도착했다. 각각 인사를 나누고서 다함께 옹기종기 응접실에 모였을 때 랑퀘지 단장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저어, 폐하. 재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남자는 언제……?”
“랑퀘지 단장,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오?”
“아…… 부, 불편하다기 보다는, 그, 뭐랄까…… 예, 그렇습니다.”
할 수 없이 인정하는 랑퀘지 단장의 대답에 팰리슈는 근엄한 표정을 만들었다. 국왕의 본 모습을 아는 주변인들이 다들 고개를 돌리며 저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은 결코 모른 채 팰리슈는 랑퀘지 단장을 대했다.
“그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제시간에 도착할 것이오. 저녁 만찬 시간까지는 아직 남았으니 여유롭게 기다리시오.”
“하, 하지만 폐하. 전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 자는 대체―”
랑퀘지 단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종이 마지막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국왕 내외도 그의 방문에 의자에서 일어섬을 알아채고 랑퀘지 단장은 입을 다물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온 자는 다름 아닌 태진이었다.
“제가 늦었습니까? 평소 만찬 시각에 맞춰서 왔습니다만.”
“아니, 전혀 늦지 않았어.”
팰리슈가 기쁘게 그를 맞이하여 달려가더니 친근하게 포옹했다. 그 포옹을 받아들인 후 태진은 다른 이들과 눈으로만 인사했다. 그리고 랑퀘지 단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장님도 초대받으셨습니까?”
“그, 그렇다네. 폐하께서 만찬에 오라고 하시더군.”
“그렇습니까.”
태진은 의도를 묻는 듯 팰리슈를 쳐다보았다. 팰리슈는 도움을 청하듯 에스타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스타냐는 무시하듯 만찬 준비를 도와달라며 아리스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팰리슈는 울상이 되려는 얼굴을 조절하며 근엄하게 고개를 돌렸다.
“랑퀘지 단장이 자네의 정체를 너무 궁금해 해서, 직접 와서 들으라고 했어. 안 될까?”
“전 분명히 비밀스럽게 이 나라에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만.”
“아, 아니…… 그게, 앞으로 연구를 위해서도 단장 정도는 알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는 건국 전부터 로츠왈드를 위해 일해 왔던 마법사야. 신뢰라면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야.”
태진은 잠깐 랑퀘지 단장을 평가했다.
2년 전 후방 지원조에 포함되었던 랑퀘지 단장의 이름은 이미 기억하고 있었다. 독립 전쟁부터 연을 이어 오고 있는 자라면, 팰리슈의 말대로 확실히 나라에 대한 충성은 수준급일 것이다.
“좋습니다. 이야기는 만찬을 나누며 하도록 하지요.”
그들은 모두 자리를 옮겼다.
저택에 마련된 만찬실에는 이미 에스타냐와 아리스가 모든 준비를 끝마쳐 있었다. 시종들이 테이블을 정리한 뒤 나가고 각자 자리에 앉아 만찬을 시작했다.
만찬이라고 해도 원체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국왕 내외인지라 훈훈한 담소가 오고 가는 즐거운 자리였다.
분위기에 휩쓸릴 뻔한 랑퀘지 단장이 정신을 차린 것은 맛있게 익은 석스의 날개를 뜯고 있을 때였다.
“……잠깐! 이게 아닙니다!”
팰리슈를 향해 그는 분개하며 소리쳤다.
“언제 이 남자의 정체를 알려 주실 겁니까!”
“아, 까먹고 있었소. 미안하오, 랑퀘지 단장.”
“까, 까먹지…… 말아 주십시오!”
“그 이야기는 제가 하겠습니다.”
태진이 포크를 내리고 랑퀘지 단장을 쳐다보았다. 잠시간의 틈도 없이 그는 말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전 현신의 전사입니다. 이상입니다.”
식사로 되돌아가는 그의 행동에 멍해진 것은 비단 랑퀘지 단장뿐만이 아니었다. 에스타냐마저 황당해져 서둘러 말을 이었다.
“잠깐만. 태진, 더없이 명확한 해답이지만 그 말로는 설명이 안 돼.”
“물론 장난입니다. 랑퀘지 단장님, 로츠왈드 독립 전쟁 시절 두 영웅을 기억하십니까?”
“무, 물론이오. 현신의 전사, 투신의 전사. 강태진과 신미연. 두 이름을 모르는 자는 우리 로츠왈드 왕국에는 없을 것이오.”
“제가 그중 한 명인 현신의 전사, 강태진입니다. 단장님께는 같은 이름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삼십 년 전, 전 이 나라를 세운 후 제가 원래 살던 세계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이 세계로 왔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마법사단에 찾아간 것입니다. 여기 있는 이들은 삼십 년 전에 모두 제 친구였습니다.”
랑퀘지 단장은 평생을 마법 연구에 몸바쳐 온 학식과 연륜, 그리고 나이에 맞는 지혜로움까지 겸비한 자였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태진의 눈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그, 그 눈은?”
“예, 검은 눈동자입니다. 이 머리도 원래는 검은 색이었지만 정체를 숨기기 위해 탈색한 것입니다. 눈동자 색은 바꿀 수 없어서 그동안 장님 행세를 좀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랑퀘지 단장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마법사라면 그 누구나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인 현신의 전사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한 가지 질문이 있소. 그렇다면 대체 그 외모는 무엇이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이십 대 후반을 넘기지 못하오. 내 아들놈보다 젊어 보이는데, 국왕 폐하와 친구란 말이오?”
“……제가 살던 세계와 이곳의 시간 흐름이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는 아직 밝혀 내지 못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동쪽의 나라에서 2년이 흐르는 사이 이곳에서는 30년이 흘렀단 겁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일 뿐, 시간이 지나더라도 친구는 친구이지 않습니까?”
마지막 물음은 모두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며 랑퀘지 단장은 두 번째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여기서 태진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인 것이다.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상황을 정리한 후 랑퀘지 단장은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렇군. 알겠소, 당신이 현신의 전사라 이 말이구려.”
“믿어 주신다면 다행입니다.”
“믿는다고는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강태진, 당신이 공간의 레펠 해석을 끝내는 그때까지 시간을 주시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내 자신을 납득시켜보겠소.”
팰리슈는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엔 그랬소. 그러니 단장도 곧 납득하게 될 것이오.”
그는 랑퀘지 단장에게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태진은 감명 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해 주시겠습니까?”
“음? 지금 뭐라고 하시었소?”
“그 결론을 지금 내려 달라고 했습니다. 공간의 레펠 해석이라면 조금 전에 끝내고 왔습니다.”
“……뭐!?”
이번에는 일동이 전부 놀라고 말았다. 거기서 가장 놀란 것은 랑퀘지 단장과 팰리슈. 눈앞에 현신의 전사가 아니라 현신 자체가 강림한 듯한 눈길로 태진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태진은 가져온 서류를 식탁 위에 올렸다. 두툼한 그 용지들은 오늘까지 그가 해낸 레펠의 해석본이었다.
“공간의 레펠의 해석은 끝났습니다. 다만 이 레펠의 마법을 실제로 이용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로츠왈드 왕국의 수학은 어느 정도로 발전되었습니까?”
아리스를 향한 질문에 그녀가 침을 삼켰다.
“태진 님이 기초를 잡은 대수학도 아직…… 마법사들 사이에서 연구 중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차원 방정식 이상의 해답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고로, 공간의 레펠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나라에서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차원 방정식?”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삼차원에서 각 공간의 좌표 설정을 도와주는 공식입니다. 공간의 레펠 안에는 각종 방정식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깐, 그렇다면 지금껏 마법사들이 다루어 왔던 마력핵 운용 공식과는 또 다른 방식이란 말이오?”
“그 말대로입니다, 랑퀘지 단장님.”
가벼웠던 만찬이 무거운 학술회로 바뀌었다.
“공간의 마법 사용자를 키워 내려면 지금 대학교 수학과정을 통째로 뒤바꿔야 할 겁니다. 팰, 정책 입안을 하겠습니까?”
“……그건 여기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 듯하군. 가까운 시일 내에 각료를 소집해야 하겠어.”
“그렇다면 부탁드립니다.”
태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말했다시피 차원의 레펠입니다. 그렇지만 해석을 끝낸 지금, 공간의 레펠과 연계된 것은 시간의 레펠이었습니다. 둘을 합쳐 ‘시공’의 레펠이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이 두 레펠을 해석해야만 차원의 레펠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해석해 온 결과는 여기까지입니다.”
“시공의 레펠? 그렇다면 시간의 레펠은 어디 있다는 거지?”
하이듀크의 물음에 태진은 기억을 더듬었다.
“네이숩 근처인 듯합니다.”
“남부 항구 도시로군. 그곳에 순찰대를 파견하도록 하지. 아리스…… 는 지금 미켈파 남작건을 맡고 있으니 부대장을 보내야겠군. 내일부터 또 바빠지겠어.”
“감사합니다. 위치에 대한 자료는 나중에 정보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잠깐만요. 지금 뭔가 근본적인 걸 건너뛰고 있지 않아?”
에스타냐가 두 사람의 대화를 잘랐다. 일동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을 때 그녀가 심각하게 말했다.
“레펠의 해석이란 게 그렇게 간단한 거였어?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레펠의 반이 남았다고 했잖아?”
“아, 후반부는 전반의 내용을 기초로 합니다. 그러니 해석이 더 빠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태진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말을 그렇게 태연히 내뱉고 있었다. 한쪽에서 아리스만이 두통이 밀려오는 듯한 얼굴로 이마를 만지작 댔다.
다음 날 아침, 랑퀘지 단장은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일단 간단한 보고서들부터 결재하고 국왕에게 보고해야 할 서류들은 다른 쪽으로 치운 다음, 책상 왼편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보고서에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다.
보고서들은 어젯밤 태진이 제출해 놓고 간 것들이었다. 공간의 레펠 해석과 해설이 잔뜩 실린 이것은 100장이 훌쩍 넘어가는 분량이었다.
전부 요점만 간추린 것들이기에 원본은 대체 몇 장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레펠 한 권을 해석해 내는 그 자는 정말 국왕의 말대로, 그리고 본인의 말대로 현신의 전사인 걸까.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중얼거리며 그는 보고서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그는 보고서 정독을 마칠 수 있었고, 그때의 감상은 기다한 한숨으로 마무리됐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군…….”
태진은 이 엄청난 분량을 깔끔하게 정리까지 끝내고 제출한 후 어제의 만찬에 참석했다. 그때의 보고에 따르자면 모든 내용을 이미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뜻이다.
대체 이 내용을 하루 만에 이해할 수 있기나 한 건가?
전반부는 일주일 가까이 걸렸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후반부는 그 두 배, 2주 정도가 소요된다. 태진은 본인 입으로 빨라도 5일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도 하루 만에 그 짓을 자행해 냈다.
이미 랑퀘지 단장 안에서 그 사실은 ‘그 짓’이 되었다.
두 시간의 정독 끝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레펠 해석에 랑퀘지 단장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로 들어온 것은 노란 머리의 태진이었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태진이 책상으로 다가왔다.
“보고서는 보셨습니까?”
“보긴 봤소…… 이해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공간 마법은 기본적으로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원리를 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개념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도 그 블랙홀인가 뭔가 하는 게 적혀 있긴 하오만…… 이해를 못하겠소. 어떤 것이오, 이건?”
“상식적 수준에서 쉽게 말하자면 입구와 출구, 어떤 물질이 들어가고 나오는 구멍입니다.”
“……동쪽의 나라 상식은 우리나라에선 통용되지 못할 듯하구려.”
“천천히 보십시오. 지금 연구원들이 원 해석본을 토대로 새로 보고서를 작성 중이니 그쪽을 참고하셔도 될 겁니다.”
“이미 공간의 레펠은 뒷전에 있군…… 어차피 오늘 왕궁 보관소에 들어갈 예정이니 상관없겠지. 보고서 때문에 찾아오셨소?”
“예, 이해하실까 걱정이 되어서.”
“솔직히 말해서 조금 기분이 상하긴 하오. 나도 일흔 가까운 생애 동안 마법 하나만을 파고 온 마법사지만, 작은 공식 하나 이해하지 못하다니.”
그렇게 말하던 랑퀘지 단장이 일순 진지한 분위기를 풍겼다.
“태진, 여기 있는 동안, 내 스승이 되어 주지 않겠소?”
“……예? 전 마법을 모릅니다만.”
“현 왕국에서 당신만큼 마법을 잘 아는 이는 없을 거요. 그러니까 거절치 말아 주시오. 내 생애 현신의 전사에게 사사 받을 기회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있겠소?”
“……전 정말 마법이라곤 이론밖에 모릅니다. 마력핵 구성도 실제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제 해 보면 되지 않겠소?”
“예?”
“당신은 내게 공간 마법 이론을 가르쳐 주시오. 난 당신에게 마력핵 구성을 가르쳐 주겠소. 이미 이론은 완벽할 터이니 마력핵 구성만 성공하면 당신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오!”
태진은 잠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전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이 세계의 마력 구성이 가능하겠습니까?”
“당신의 이론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만 경험이라면 내가 더 위일 것이오. 내 인생을 걸고 말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마력핵을 구성할 수 없다는 증명은 지금껏 나온 적이 없소.”
그건 그렇다.
다른 세계에서 온 자가 그렇게 흔할 리가 없으니까.
태진은 그 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좋습니다, 첫 도전이라는 건가요? 흥미가 당기는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소. 그럼 거래는 성립한 것이오? 연구를 진행하는 중에 내게 이론을 가르쳐 주시오. 그럼 난 당신에게 마력핵 구성법을 가르쳐 드리겠소.”
“감사합니다.”
둘은 굳은 악수로 거래를 끝냈다.
하지만 태진의 마법 수행은 그날로 바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둘의 훈훈한 관계가 끝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단장의 비서관이 들어와서 태진에게 소식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왕궁 정보부 장관께서 찾으십니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하이듀크가 찾는군요.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연구실에게 기다리고 있겠소.”
새롭게 돋아나기 시작한 랑퀘지 단장의 지식욕을 잠깐 뒤로 미루고 태진은 마법사단을 나섰다. 왕성의 정문에서는 아무런 검문도 받지 않았다. 그는 일 초의 지체도 없이 정보부에 당도했다.
정보 부장관의 집무실에서는 하이듀크와 아리스, 그리고 라스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는 즐거웠습니다. 집에는 잘 돌아가셨습니까?”
“뭐, 늦었다고 안사람한테 혼나긴 했지만.”
철없이 대답하는 아버지의 등을 툭 치며 아리스가 웃었다.
“미켈파 남작이 이틀 뒤면 도착한다고 해요. 그의 소환에 관해서 상의드릴 게 있어서 오시게 했어요.”
“그리고 시간의 레펠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네.”
자리에 앉는 태진을 보며 라스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정보부 순찰대와 흑안 기사단의 정예 대원이 출발했네. 네이숩까지는 편도로 한 달 반 정도가 소요될걸세. 최대한 빨리 도착하라고 연락해 뒀지만 전서조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 달은 넘어야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네.”
“그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그 사이 공간 마법 상용화를 돕고 있어야 할 것 같군요. 뭐, 현 왕국에 여러 흥미도 있으니 천천히 기다리죠.”
“거기에 대해서 좀 할 말이 있는데…….”
하이듀크가 좀 찜찜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천히 기다려도 되겠나?”
“무슨 말씀입니까?”
“투신의 전사 말이에요.”
아리스의 말에 태진은 무겁게 입을 닫았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이미 다른 이들은 눈치 채고 있던 것이다.
“차원의 레펠을 찾는 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일 거예요. 그곳에 투신의 전사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맞죠……? 그 천천히 기다린다, 가능한가요?”
“배려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태진은 고개를 들었다.
“전 지금 미연이 이 세계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와 같이 돌아가는 방법을 먼저 찾으려는 것입니다.”
“아리스에게 듣자니 넌 처음부터 혼자였다던데?”
“물론 혼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감각을 최대한 집중하면, 바운스 어딘가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느껴집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태진을 알기에 모두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잠깐 눈을 감더니 말했다.
“그녀는 저와 같이 이 바운스로 왔습니다. 이번에는 따로 떨어진 것이고요. 이 바운스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상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와 같이 지구로 돌아갈 방법입니다. 방법을 찾고 그녀도 찾을 겁니다.”
“……투신의 전사를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게 아니었군.”
“당연합니다. 미연이 없는 제 인생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태진의 그 말에 아리스는 잠깐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왜 쓰라린지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럼 순찰대를 따라가시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공간 마법도 중요하기에 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레펠을 손에 넣는 동안 공간의 레펠을 좀 더 깊이 연구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차원 단위로 대입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블랙홀…… 인가 뭔가 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의 레펠에도 길은 있다, 이 말인가?”
“그럴 희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확실한 것은 차원의 레펠이기에 시공의 레펠이 필요한 겁니다.”
앞뒤를 생각하고 있다. 가능성은 염두해 두고 하나의 길도 버리지 않으려고 계산을 한다. 그 모습은 옛 친우들로서도, 아리스로서도 잘 알고 있는 태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머릿속에 어떤 계획이 들어있는지 아리스는 알고 싶었다.
“그럼 시간의 레펠을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공간의 레펠 분석이 최우선이겠군요. 다음은 마력핵 구성법을 배우는 것이고, 흐음, 왕국의 현 상황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할 겁니다.”
“그 말은…… 다시 현신의 전사로 왕국에 있겠다는 말인가?”
“친우의 나라입니다. 도움이 되고 싶군요.”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 하겠어.”
히이듀크의 말은 단도직입적이었다.
“미켈파 남작의 수사를 도와주게. 다른 할 일도 많겠지만 너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 아냐?”
“수사를…… 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냐. 미켈파 남작과 연계되어 있는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까지. 그곳을 거쳐 온 너라면 분명히 우리에게 도움을 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아.”
“그렇지만 삼십 년 전에 이미 전 당신에게 모든 일을 맡겼습니다, 하이듀크. 당신이라면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었습니까?”
“너의 말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어찌된 게, 그때의 예상보다 지금 왕국의 밤은 좀 더 복잡해져 있거든. 도움이 필요해.”
태진은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30년 전 하이듀크에게 부탁한 것과, 오켈라니아에서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 둘의 연계가 아직은 희박한 모양이었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은 생각대로 충분히 커졌을 텐데도.
“……일은 벌린 것은 따지고 보면 접니다.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야.”
아리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음, 그런 게 있단다. 삼십 년 전에 태진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 내게 지시한 사항이 있어.”
“그 일을 다시 제게 부탁하는 겁니다.”
그 퉁명스런 대답에 이미 하이듀크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라스터가 부연 설명을 한다. 하지만 아리스만은 그 이야기에 낄 수 없었다.
“하이듀크는 정보력을 풀어 투신의 전사의 위치를 찾는다. 그만큼의 몫을 태진, 자네가 맡아 달라는 이야기네.”
태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먼저 이틀 후에 도착할 미켈파 남작 건부터 처리해 볼까요?”
순찰대장 아리스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로츠왈드 독립 전쟁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예정보다는 다소 늦은 나흘 후, 루위스에 미켈파 남작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