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2)

아홉. 한번 해 보도록 할까?

“저하, 기침하셨사옵니까?”

럭커 시종장은 아직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방문 안의 주인이 기침할 시에 필히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혼자서는 상체조차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는 이황자. 그의 모든 생활에는 럭커가 따라다녔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못했던 이황자는 제국 마법사단의 특별 치료를 받은 후 완벽하게 용태가 회복되었다.

그 이후로 시종장은 이황자의 생활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게 되었다.

“저하, 기침하셨사옵니까?”

한 차례 더 묻자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깼다. 잠시만 기다려.”

성대를 긁던 탁한 음성도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호전적이며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하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음성.

곧 이어 문이 열렸다. 가운을 걸친 이황자가 가면을 쓴 채 서 있었다. 시종장은 예를 갖춘 후 이황자의 침실로 들어섰다.

뒤따르는 시종들이 침대를 정리하는 사이 그는 이황자를 대면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나보다 시종장, 자네한테 물어야 하겠는데? 눈이 충혈 되었군. 숙면을 취하지 못했는가?”

“처리할 서류들이 있어서 조금 취침 시각이 늦었을 뿐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몸을 챙기게. 자네도 젊은 나이는 아니니.”

“……황송하옵니다, 저하.”

한 달 전만 해도 투병 중이던 이황자에게서 건강에 대한 걱정을 받으니 신선했다. 럭커 시종장은 헛기침을 한 후 들고 있던 보고서를 브리핑했다. 오늘 하루 동안 정해진 이황자의 스케줄을 읊은 후 다시 보고서를 덮는다.

“이상입니다, 모든 예정이 끝나면 저녁 만찬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발츠 중장이 대면을 요청했습니다.”

“발츠가? 무슨 일이지?”

“용건은 그곳에서 직접 밝힌다고 하였습니다만, 요청에 응하시겠습니까?”

“장소는?”

“별관입니다.”

“비밀스러운 이야긴가 보군. 하긴, 발츠 정도 되는 자가 신청하는 대면이니 그렇겠지.”

이황자는 병을 이겨 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잘 이해하고 있다. 현재 자신을 따르는 이황자파의 결성된 것은 겨우 한 달.

그 가장 확고한 위치에 있는 자가 바로 발츠다. 수도 주둔군의 군단장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직분을 가진 그가 신청하는 대면인 만큼 이황자는 고민하지 않았다.

“만나 보도록 하지. 무슨 이야기를 가지고 왔을지 흥미롭군.”

“허락하셨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럼 곧 아침 식사를 들이겠으니 세면을 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알고 있을 테지만 시종은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저하.”

시종들이 따뜻한 물을 대령한 후 속히 물러갔다. 마지막까지 지켜본 럭커 시종장도 이황자가 가면을 벗으려고 하는 손짓까지를 확인하고서 침실을 나갔다.

일황자는 아침 기상부터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 손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세면부터 착의까지, 모든 것을 시종의 도움으로 해결한다.

그에 비해 이황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하려고 한다. 한 달 전 병을 이겨 내고서부터였다. 그 사실에 대해서 그는 럭커 시종장에게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그동안 이 몸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나를 도와줬지. 그러니 이젠 나 스스로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

럭커 시종장은 그 말을 인정했다. 그 이후로 이황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냈다. 처음에는 서투르던 착의도 자연스러워지고 생활 전반에 걸쳐서 익숙해져 갔다.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일황자에 비견해도 손색없는 황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였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럭커 시종장이 다시 움직인 것은 조금 뒤였다. 세면과 착의까지 끝낸 이황자가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수도의 유행이 된 가면에 가린 눈빛을 훑으며, 럭커 시종장은 한 번 더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하.”

“그렇군. 좋은 아침이야, 시종장.”

텔리오트 지 아키레마는 이황자로서의 하루를 또다시 시작했다.

텔리오트의 하루는 바빴다. 투병으로 황위계승에서 밀려나 있던 시절과는 달리 지금 그는 황위 계승을 위해 일선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현 제국 황위 계승은 두 파로 나뉘어져 있다. 그중 하나가 이황자인 텔리오트이며, 또 하나는 일황자인 레키엔 휴 아키레마다.

둘 다 황제 디요네츠 핀 아키레마가 늘그막에 첩을 통해 얻은 자식으로, 노환이 짙어 운명이 가까워진 황제의 뒤를 이어 둘 중 누군가가 황위를 이어받게 된다.

현재로선 일황자 레키엔이 텔리오트보다 앞서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텔리오트가 황위 계승에 끼어든 것은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그를 지지해 주는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다.

그 세력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텔리오트의 하루는 짧았다.

럭커 시종장의 관리로 짜여진 일정에는 빈틈이 없었다. 텔리오트는 집무실에서 각종 서류를 처리하며, 시간마다 방문하는 귀족들과 의논을 펼쳤다.

일황자파의 움직임과 앞으로 이황자파의 움직임.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를 읽어 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으나, 럭커 시종장은 순순히 놀라고 있었다.

텔리오트는 병석을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일들을 모두 처리해 내고 있었다.

“……후우, 동부 반란군의 형세가 조금씩 변하고 있군. 이대로 진행된다면 곧 얼마 남지 않는 남부까지 통합되는 것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하. 그렇지만 일단 ‘카알트라즈’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정보꾼들과 교섭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보꾼들이라. 위법 활동자들이잖아? 쓸 만한 정보를 주긴 해?”

“저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정보꾼들은 금전만큼의 정보를 지불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금전이 가는 이상 돌아오는 정보는 진실입니다.”

“한번 직접 만나 보고 싶어지는군, 케이튼 부군단장.”

“원하신다면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만.”

“시종장에게 알려 줘. 그가 조정할 테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럭커 시종장은 충실하게 텔리오트의 말을 기록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케이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인 후 시간을 확인하는 행동을 해 보인다. 용건을 끝마친 케이튼은 예를 갖춘 후 집무실에서 떠났다.

텔리오트는 마지막까지 케이튼의 서류를 확인한 후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는 이미 붉은 하늘이 보였다. 뻐근하듯 그는 목을 주물렀다.

“이로써 오늘 예정은 끝난 건가?”

“저녁 만찬 때 발츠 군단장의 대면을 마치셔야만 끝이 납니다, 저하.”

“그러고 보니 그 약속이 있었군.”

짐짓 럭커 시종장의 말을 되새기듯 반복하여 말한 텔리오트는 서명을 하며 보고서 처리를 완료했다.

잠시 휴식하듯 의자에 등을 눕히고서 그는 럭커 시종장을 올려다보았다.

“밖에서 나를 두고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별명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가면의 황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어. 풍문으로 들리던 이야기가 요즘 보고서에도 심심찮게 보이는군. 누가 그런 말을 퍼뜨렸을까?”

“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저하의 지명도가 올라갈 수 있는 방도이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텔리오트는 가면 속에서 웃음소리를 냈다.

“럭커 시종장, 나이가 들면서 느는 건 연기력인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 별명을 퍼뜨린 것은 바로 자네잖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 자네가 맞아. 내 가면을 보는 이는 의외로 많이 없어. 이 한 달 동안 난 이 집무실에 거의 틀어박혀 있다시피 했으니까. 황제 폐하 주체의 기념식은 아직 멀었으니 다른 귀족들도 내 가면을 잘 알지는 못해. 그렇다고 나를 만난 나의 지지자들이 나의 가면을 우스갯소리 삼아 흘리고 다녔을 리도 없지. 그렇다면 결론은 자네밖에 없어.”

“입이 가벼운 시종들이 흘리고 다녔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내 생각엔 자네가 시종들의 입단속 정도도 못하는, 그런 무능력한 시종장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지금도 내 비서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잖아?”

레키엔의 경우 시종장과 비서관이 따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럭커 시종장은 혼자서 두 임무를 해치우고 있었다. 시종장과 비서관은 말하자면 황자궁의 내무와 외부를 각각 담당하는 직책으로, 업무량으로 치자면 황성 내에서도 순위권을 다투는 자리다.

그 두 임무를 한 명이 담당하는 경우는 시종장과 비서관 역사에서도 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럭커 시종장은 매우 유능한 자였다.

“그런 유능한 자가 재미삼아 내 가면 이야기를 흘렸을 리는 없지. 그렇다는 것은 결국 자네가 내 지명도를 위해 꾸며 낸 작전이라는 말이야. 내 짐작이 틀렸어?”

럭커 시종장은 할 말이 없었다. 그 말대로였다.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저하.”

텔리오트는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리고 일어섰다. 긴 투병의 여파로 조금 야윈 듯한 몸이었지만 황자로서의 위엄이 흘러나오는 자세로 그는 말했다.

“자네같이 유능한 자가 있어서 난 매우 힘이 돼. 앞으로도 나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 줘. 그럴 수 있지?”

친근한 말투. 럭커 시종장은 머리를 조아렸다.

“맡겨만 주십시오.”

이황자와 시종장 간의 푸근한 대화가 오간 후 럭커 시종장은 시종을 들여보내 집무실을 정리했다.

그 사이 만찬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고 그는 텔리오트를 안내하여 만찬실로 향했다.

만찬실에는 이황자파에 속해 있는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제국군 소속의 고위관료들이었으며 그들의 가족들도 동행해 있어 이미 수십 명이 텔리오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장식과 눈이 돌아갈 만큼 쌓인 산해진미 속을 천천히 걸어가며 그들의 시선을 느낀 텔리오트는 만찬실의 중앙에서 정지했다. 시종이 건네는 잔을 높이 들고 그는 소리 높여 외쳤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던지오! 오늘은 부디 모두 즐겨 주길 바라오!”

오늘 자리는 텔리오트가 이황자파에 공식적으로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황자파의 귀족들은 힘껏 박수를 치며 가면의 황자를 반겼다. 일황자파와 싸워 황제의 자리에 설 그를 아낌없이 맞이해 주는 것이다.

잔을 높이 들어 그들은 모두 건배를 외쳤다.

만찬이 무르익어 가면서 텔리오트는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수도 주둔군은 물론 통합 사령부의 관료들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그는 종일 업무를 처리한 피로도 숨긴 채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국내의 정세는 물론 로츠왈드 왕국과의 교류, 혹은 판사랸 산맥 너머의 타국들의 이야기까지. 텔리오트는 한 달 동안 흡수한 정보들을 유감없이 이 자리에서 발휘했다.

만찬이 한참 절정에 달했을 때 이황자파의 소속원들은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저 자라면 황제에 올라설 만하다.

병석을 털고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그는 이미 일황자와 동일한 위치에 섰다. 그것은 텔리오트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시종장의 안내로 수많은 사람을 만난 후 더 이상 만날 사람도 없다고 여겨졌을 때쯤, 시종장이 만찬실의 한 구석으로 텔리오트를 안내했다.

“이쪽은 별관이로군.”

“발츠 중장, 아니 발츠 군단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만나나 기다리고 있었어. 빨리 안내하게.”

만찬실을 조심스럽게 나와 별관으로 이어진 복도를 지났다. 이쪽은 시종들조차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비밀스런 공간이었기에 별관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별관 앞에서 대기 중인 호위 병사가 텔리오트의 도착에 황급히 긴장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꼿꼿한 인사에 텔리오트는 손짓으로 응답했다.

“황자 저하 납십니다!”

병사의 외침과 함께 별관의 문이 열렸다. 육중한 나무문이 열린 그곳에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의자에 네 명의 인물들이 자리해 있었다.

텔리오트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중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은 두 명은 멀뚱히 텔리오트의 가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텔리오트는 일어나지 않는 두 명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다.

한 명은 모자와 가면을 쓰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은발에 은안을 가지고 있었다.

보고서로만 보던 미소 족이었다.

“저하. 대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발츠 군단장의 요청이라면 거절하는 것이 이상하겠지. 인사는 됐으니 앉아. 만찬실을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프군.”

그들은 모두 테이블에 자리했다. 럭커 시종장만이 문을 닫고 뒤쪽에서 대기했다.

“처음 보는 자들이군. 발츠 군단장, 소개해 주겠어?”

“이쪽은 북부 주둔군 소속에서 며칠 전 수도 주둔군으로 전속된 이시브 소령입니다.”

“그렇군. 기억나, 내가 허가를 내렸었지. 반가워, 이시브 소령. 앞으로 발츠 군단장의 힘이 되어 줘.”

“맡겨 주십시오, 저하.”

이시브의 전에 없던 딱딱한 대답에 반응을 보인 것은 가면을 쓴 자였다.

“와아, 이시브!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군인 같다?”

그 목소리에 이번에는 텔리오트가 반응했다.

“여자인가?”

“응, 여자야. 몰랐어? 이런 몸매를 한 남자는 보통 없잖아?”

가볍고 활발한 음성이었다. 텔리오트는 자신과 똑같은 가면을 향해 눈을 돌렸다. 발츠와 이시브는 뭔가 할 말은 많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표정을 만들었다.

텔리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이들 때문인가? 한 명은 가면을 쓴 채 외모를 숨기고 있고, 한 명은 판게리츠 산맥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미소 족 청년이군. 이런 자가 우리 군에 있다는 보고는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저하. 저희 이황자파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귀담아듣도록 하지, 발츠 군단장.”

헛기침을 하는 발츠는 묘하게 긴장해 있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가면을 쓴 이 자는 삼십 년 전 로츠왈드 독립 전쟁에서 투신의 전사라고 불리던 자와 같은 나라 출신입니다. 이름은 신미연. 한 달 전 판게리츠 산맥에서 북부 주둔군과 충돌한 이후 수도로 데리고 왔습니다.”

미연이 불만스레 투덜댔다.

“같은 나라 출신이 아니야. 그 투신의 전사가 나라고.”

“조용히 있어라, 미연.”

“그치만 미소라, 이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말해 놓고 끝까지 안 믿잖아?”

“너라면 믿겠나? 네 외모는 아무리 봐도 삼십 년 묵은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동안이라면?”

“……말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이황자가 있든 말든 만담을 시작하는 두 사람을 이시브가 손짓으로 제지시켰다. 그들이 입을 다물자 발츠가 다시 말했다.

“일단 저희들이 자체적으로 확인한 결과 투신의 전사 급의 전투 실력을 가진 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황자 저하께 소개시키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잠깐만. 내 기억을 맞다면 투신의 전사는 삼십 년 전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다고 했잖아?”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일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우리와 다른 수명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본인을 놔두고 동일 인물 어쩌고 하지 마, 좀!”

“미연 님. 잠시만 조용히…….”

“내가 왜 조용히 해야 하는데? 내 이야기하는 거잖아?”

멋대로 입을 여는 미연 덕분에 이시브가 곤란해졌다. 텔리오트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오히려 텔리오트의 가면을 살피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텔리오트의 말소리는 가벼웠다.

“일단 가면과 모자를 벗어 주겠어?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본 다음 판단하도록 하지.”

“와아! 고마워, 고마워. 황자인지 환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가면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거든.”

미연은 좋아라, 가면과 모자를 벗어젖혔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검은 흑발. 그리고 드러나는 검은 눈동자.

텔리오트는 잠깐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발츠와 이시브가 텔리오트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깐이었지만 몇 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났을 때 비로소 텔리오트는 입을 열었다.

“미인이로군. 앞으로 가면을 쓰고 다녀.”

“우에, 왜?”

“레키엔이 본다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발츠는 그 어조에서 직감했다.

“황자 저하!”

가면 속에서 비치는 텔리오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과연. 흥미롭군, 발츠 군단장의 말처럼 한번 해 보도록 할까?”

***

텔리오트와의 만남에 대해, 미연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만나는 건 좋아. 그럼 나도 부탁이 있어. 제국 마법사단과 만나고 싶어. 그들에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 뭘 물어보고 싶냐고 물어도 대답 안 해 줄 거야. 묻지 마.”

“좋소, 투신의 전사. 내 자리를 걸고 제국 마법사단과 만나게 해 드리겠소. 용건은 굳이 내가 알 필요도 없겠지.”

“그럼 하나만 물어도 될까? 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지?”

“그대가 그분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오. 지금 이황자는 일황자에게 황위 계승 순위에서 밀리고 있소. 제국의 황위 계승법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오?”

미연을 기억을 더듬으려고 했다가 그만뒀다. 그녀가 황위 관련으로 아는 지식이라고는 황제인 디요네츠의 이름뿐이었다.

“몰라.”

“아키레마 제국의 황위는 무조건 실력자 위주로 돌아가오. 서열로는 두 번째라고 해도 실력이 있다면 황위 계승에게 우위에 설 수 있소. 그렇지만 이황자는 아직 근본적인 힘 자체가 일황자보다 부족하다고 할 수 있소.”

“전력이로군.”

“그렇소, 미소라. 전력이오. 현재 일황자파에는 통합 사령부 군단장이 포함되어 있소. 전력 운용면에서 많이 뒤쳐지는 게 사실이오. 그렇기에 우리 이황자파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전력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오.”

“나보고 그 전력이 되어 달라는 말?”

미연은 코웃음을 쳤다.

“조금 생각이 모자란 거 아냐? 난 로츠왈드 독립전쟁으로 제국의 공적 비스무리하게 된 사람이야. 제국의 땅을 도로 빼앗은 사람이라고. 그런 나를 이황자파의 일원으로 집어넣겠다? 이황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이 프로 부족해 보이는걸?”

“……지금은 납득해 주지 않으셔도 되오. 그러니까 부디 한 번만 이황자를 만나 주시오. 판단은 그 이후에 해도 되지 않겠소?”

미연은 조금 고집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고심하는 척하더니 미소라에게 의견을 묻는 듯 눈길을 보낸다.

미소라는 짐짓 그 시선을 피했다. 알아서 결정하라는 식이었다.

숨을 쉬고 미연은 말했다.

“약속해. 반드시 제국 마법사단과 연결해 준다고.”

그렇게 미연은 텔리오트와 만나게 되었다.

그 기억을 멀뚱히 떠올리던 미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답답하다.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녀는 현재 이황자궁에 머물고 있었다. 전담 시종들이 딸린 별궁을 마련해 준 텔리오트는 마지막으로 당부를 했었다.

“별궁 안에서도 부디 가면과 모자에 신경 써 줘.”

덕분에 자신의 방이 된 곳에서도 그녀는 가면과 모자를 착용 중이었다. 답답할 따름이었지만 칼을 잡고 있으면 감각이 넓어져 그나마 나았다.

지금도 그녀는 침대에 앉아 칼 손잡이를 꾹 움켜잡고 있었다.

더러워진 옷은 세탁한 덕분에 한국에서 같이 온 물건이라고는 이 칼밖에 없었다.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미연은 천천히 감각을 전투적으로 바꾸었다.

별궁 전체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옆방의 미소라. 복도에서 움직이는 시종들. 희미하게 본궁 쪽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 읽힌다. 익숙해지긴 했지만 이능이란 놀라운 것이다.

동시에 수십 명의 행동을 감각적으로 잡아내는 것도 이능을 통하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능은 감각에 국한되어 있었고 이성은 한국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 이성으로 그녀는 아직 고민 중이었다.

이황자파에 가담하느냐, 마느냐.

단적으로 말해 제국에 악감정은 없었다. 그녀의 감정은 순간적이기에 오래 가지 않는다. 한 가지 오래 가는 감정이 있다면 태진에 대한 사랑 정도일까.

2년 전에는 분명 제국과 전쟁을 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도 제국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있던 2년 동안 그 감정은 많이 희석되어 현재는 다시 새로운 눈으로 제국을 보고 있었다.

적이었던 나라에 직접 몸을 담고 있으니 많은 것이 보이는 것이다. 이 나라도 따지고 보면 어느 나라랑 다를 바가 없다.

지배자가 있고 피지배자가 있다.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 요는 위에 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현 황제 디요네츠는 따지자면 나쁜 사람이었다. 국민들을 향해 폭정에 가까운 지배를 행했기에 국민들 사이에서 반발감이 많이 일었다.

그 반발의 극을 보여 준 것이 로츠왈드 반란군이었고, 그들은 독립에 성공했다. 이후 디요네츠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고,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두 아들의 황위 계승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일황자 레키엔은 디요네츠의 뒤를 이은 압제자가 될 것이라고 예견되는 자였다. 그 성질이 황제와 판에 박은 듯 닮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황자 텔리오트는 겉보기에는 조금 유약하지만 심지가 곧고 사람을 현명히 다룰 줄 아는 자였다. 둘 중 어느 쪽이 황제가 되는 것이 국민, 그리고 전 대륙적으로 희망적인 일인가 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황자파가 결성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난 어쩌지?”

고민하고 있던 그녀의 방으로 미소라가 방문했다. 시종들이 취침 준비를 하는 와중에 들른 것이었다.

“이 야밤에 칼을 잡고 뭘 하고 있지.”

“가면을 쓰고 있자니 시야 확보가 제대로 안 되잖아.”

“칼을 잡으면 조금 나아진다는 건가. 넌 선천적으로 검사 체질인가 보군.”

“그럴지도 모르겠어. 한국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세계로 오면 이런 감각이 생긴다니까.”

“전에 말한 이능이라는 힘인가?”

“응. 그거야, 그거.”

칼을 바닥에 세워 그 끝에 턱을 얹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쩌면 좋을까?”

“뭘 말인가?”

“이황자파 말이야. 미소라는 그 텔리오트인지 헬리콥터인지를 어떻게 생각해?”

“헬리콥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황자를 말하는 거라면, 그렇군. 개인적인 평가를 말해도 되겠나?”

“얼마든지.”

“그동안 난 황자라고 하면 거만하고 재수 없는 인간일 줄 알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일황자가 딱 바로 그런 자였지. 하지만 이황자는 조금 다른 것 같아 보인다. 너는 그렇게 생각지 않나?”

“마찬가지야, 나도. 그래서 조금 고민이 되네.”

한숨을 포옥 쉬는 미연.

“애초에 난 이황자고 뭐고 만나기만 하고 집어치울 생각이었는데 만나고 보니까 생각이 좀 바뀌네. 조금, 도와줘도 상관없을까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

미연은 깊은 생각을 즐기지 않는다.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움직이고 지금도 그러했다. 감성적으로 텔리오트에게선 아무런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친근함이 들었던 것이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그의 태도에서는 그 어떤 숨김도 없었다. 만찬이 끝날 때까지 별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미연은 텔리오트에게서 그런 이미지를 받았다.

꾸밈없다. 솔직하면서도 현명하다.

묘하게 태진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 점이 미연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미연을 지켜보던 미소라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어차피 이황자는 시간을 정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고민할 만큼 고민해 보고 결론을 내리라는 거겠지. 그는 이미 우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니 남은 것은 너의 결단뿐이다. 어느 쪽이 너에게 이득이 되는지를 잘 생각해 보면 되지 않겠나.”

“하아…… 머리 쓰는 거, 난 싫어하는데.”

“머리 쓰는 게 싫으면 너의 특기가 있지 않은가.”

“감― 말야?”

끄덕거리는 미소라를 보며 미연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가면 안쪽이라 미소라에게는 미소가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미연의 표정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한 달 간 같이 여행을 한 성과였다.

“그럼, 잘 자라.”

시종이 미연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미소라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시종들이 방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미연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는 선천적으로 고민에 맞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빠져들수록 정신은 미궁 속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것들, 그것이 태진과 칼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만히 신경을 집중하여 태진의 존재를 찾는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미연은 태진의 존재가 바운스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태진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확신할 수 있는, 태진과 미연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문제는 그를 찾는 방법이었다. 닥치는 대로 들쑤시고 다니면 분명 태진에게 연락이 닿을 것이다. 그라면 바운스 어디에 있어도 살아남아 높은 곳까지 도달할 테니까. 미연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멀리 있지만 태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태진이 이 세계에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고 용기가 생겼다.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30년 전 바운스에 왔을 때부터,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 된 태진. 얼굴을 본 지 오래 되었다고 그의 얼굴을 잊어먹을 리는 없다.

눈을 떴을 때 태진의 얼굴이 그대로 잔상으로 남아 눈앞에 보였다.

외로움도 찾아왔지만 그보다 더한 확신이 미연의 가슴을 두들겼다. 머지 않아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노력한다면, 곧 그와 재회할 것 같아.

“그렇지…… 태진아?”

미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게 만든 후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달이 그곳에 있었다.

“응?”

문득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 없지만 태진은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팰리슈가 그를 위해 마련해 준 방이었다. 이런 곳에서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바람결에 미연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깐 달을 올려다보다가 태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 그 마음을 숨기긴 힘들었다.

하지만 내일부터 왕궁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태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우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외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야. 너를 못 본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갔으니까.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오히려 담담하게 혼잣말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뇌어 봤자 넌 옆에 없잖아. 그러니까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해 나갈 거야.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너를 다시 만났을 때 아무 것도 해 놓지 않으면 분명히 넌 내게 화를 낼 테니까. 오랜만에 만나는데 화난 모습을 볼 수는 없잖아? 너도 어디선가 너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우리―”

태진은 창문을 닫았다.

“꼭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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