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32)

열. 그 제안, 받아들이지

취침 시각이 되어 시종들도 모두 퇴장 별궁의 불이 꺼졌다. 미연도 방의 불을 끄고 침대 위에 앉았다.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할수록 그냥 자 버리는 성격인 미연이었지만 오늘만큼 묘하게 의식이 또렷했다.

“칼을 잡고 있어서 그런가?”

놓을까 생각했지만 그만뒀다. 가면을 한번 쓰다듬고서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이곳은 서울과는 달리 달빛이 맑았다.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조명이 될 만큼. 2년 전에 이미 경험한, 자연 환경이 아니라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멋진 곳이었다.

달빛을 받으며 미연은 가만히 별궁 밖을 쳐다보았다.

문득 눈을 돌린 곳에 미처 잠들지 않은 시종들이 총총히 달려 본궁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가던 경계병이 얼른 돌아가라고 주의를 주고서 본궁 주위를 순찰한다.

이황자궁답게 경계는 철저했다.

“침입하려고 해도 힘들겠네.”

미연은 문득 2년 전을 떠올렸다. 로츠왈드 독립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수뇌부에서 한 가지 작전이 제안됐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황제 암살.

성공만 한다면 제국 전체를 함락할 수도 있을 구상이었다. 실행자는 단연 미연이었고, 미연과 태진의 연계라면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게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에 반대를 한 것은 팰리슈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공석에서의 단호한 어투로 작전 불가를 명령했다.

신의 전사를 그런 위험한 곳으로 내몰 수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로츠왈드의 독립이지 제국의 함락이 아니다. 이유는 그러했다.

결국 작전은 그 자리에서 철회되었다.

만약 그때 황궁에 침입했다면 정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미연은 작전이 발안되었을 때의 태진의 얼굴이 생각나 키득 웃었다. 현신의 전사가 유일하게 당황했던 때가 그때라고, 훗날 팰리슈를 비롯한 친우들이 회자했었다.

과거를 떠올리자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풀어졌다. 미연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적당히 잘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 되어 창턱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감각에 어떤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 그때였다.

조금 전 경계병이 지나간 루트로 한 병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바쁜 걸음걸이였지만 걸음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혼자서 순찰 루트를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병사는 달빛이 밝은 곳에서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재빨리 지나갔다. 그렇지만 전투 감각이 넓어진 상태인 미연의 시력에 그의 얼굴이 목격되었다.

“……무지 낯이 익은 얼굴인데?”

생각할 것도 없이 미연은 충동적으로 침실을 나왔다. 마음만 먹으면 잠입 정도야 식은 죽 먹기다.

미소라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그녀는 별궁을 빠져 나와 곧바로 경계병의 루트를 뒤따랐다. 궁을 돌아간 그는 뒤쪽 성벽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미연도 덩달아 정지하여 그의 이동을 기다렸다.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경계병들이 잠깐 몸을 돌린 사이 재빠르게 그 앞을 지나간다. 어둠 속에서 이동하는 그 행동은 역시나 보통 경계병이 아니었다.

미연은 흥미가 일어 똑같이 그 앞을 통과해 뒤를 밟았다.

경계병은 수풀 사이에 가려진 허술한 성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최단 루트로 외성벽까지 이동해 기어코 황성 탈출에 성공했다.

이 길이 매우 익숙한 듯 그는 지체라고는 할 줄 몰랐다.

황성 밖으로 나오자 그는 일단 전투복을 벗었다. 그 아래에선 평상복 차림이 갖추어져 있어, 전투복을 감추고 나자 이미 평범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아직 불길이 켜진 홍등가였다. 술집과 사창가가 모인 그곳에서는 웬 남자들이 그의 합류를 반겼다.

“이봐,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다, 이 자식! 오늘 술값은 네놈이 내는 거다!”

“미안, 미안해. 딸내미가 잠이 안 들어서 말야.”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친숙하게 남자들과 홍등가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미연은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저 녀석, 텔리오트잖아?”

미연은 계속해서 텔리오트를 추적했다. 가면에 가려져있던 얼굴은 둘째 치더라도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전투감각이 깨워진 상태인 그녀에게 목소리 구별은 누운 채로 TV 보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얼굴이 뭐 어떻게 됐다고 하지 않던가?”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희미하긴 하다. 당시에는 딱히 귀 기울여 듣지 않아서였다. 텔리오트는 병은 회복되었지만 그 부작용 탓인지 얼굴이 일그러져, 그것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 설정이 기억난 것은 한참 후였다.

어쨌든 텔리오트의 뒤를 밟으며 미연은 무성의한 움직임으로 홍등가의 지붕 위로 뛰어올라갔다.

길목에서 남자들과 어울려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궁 안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틀렸다.

“앗핫핫! 그러니까 말이지, 그놈의 여편네가!”

“여편네, 여편네 하지 마! 난 어젯밤에 결국 집밖으로 쫓겨났어!”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곳에 찾아오니까 그렇지, 이놈아!”

“네가 할 말이냐?”

“하긴, 그렇지!”

미연은 그들을 따라 지붕 위를 걸어가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궁 안에서의 모습은 전부 꾸며 낸 모습이라는 건가? 낮에는 진지한 황자역을 연기하고 밤에는 본색을 드러내 이런 곳으로 온단 말이지?

“이야…… 저 사람 재미나게 사는데? 하긴, 황자가 좀 재미없긴 하지.”

멋대로 이해하고 결론내린 후 미연은 즐겁게 텔리오트의 행적을 지켜보았다. 홍등가 깊숙한 곳까지 걸어 들어간 그 일행은 어떤 술집 앞에서 멈춰 섰다. 곧 술집 안에서 헐벗은 여자들이 뛰어나와 남자들을 반겼다.

“오빠들!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다고요!”

“들어와요, 들어와! 이미 방은 잡아 놨어!”

그녀들은 무척이나 반갑게 남자들을 술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단골인가 보네…… 태진이도 나중에 결혼하면 저러려나?”

……그럴 리가 없지!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미연은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홍등가는 아래쪽을 밝지만 위는 어둡다.

눈치를 살핀 후 지붕 뒤쪽으로 잠깐 물러선 후 단숨에 박차고 점프!

밤거리로 한 명의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곧바로 반대쪽 지붕에 착지하는 그녀의 발끝에서는 한 점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웅웅 울리는 지붕 위에서 미연은 찬찬히 돌아다니며 훔쳐볼 곳이 없을까 하고 살폈다. 그러나 얇은 틈을 발견하고 그곳에 답싹 엎드렸다.

“어이쿠! 여긴 19금이네?”

슬쩍 눈을 돌리고 일어난 미연은 ‘그러고 보니 21살이네?’ 라고 혼자서 납득하고 다시 눈을 들이댔다.

그러다 19금 장면이 비치는 그 방이 원래는 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일을 벌이고 있던 남녀가 옷을 챙기고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그 뒤를 따라 투덜대며 들어오는 것은 텔리오트와 합류한 남자 중 하나였다.

“아, 젠장! 여기서 술을 어떻게 먹으라고?”

“어머, 어머! 미안해요, 미안해요. 방이 빈 게 지금 이거 밖에 없어서. 환기 좀 시킬 테니까 참아줘요!”

“내가 정말, 누님만 아니라면 당장 때려 쳤을 거유!”

기분 좋게 하하호호 웃고 있는 와중에 뒤따라 텔리오트도 들어왔다. 자리가 잡히고 상 위에 술과 안주가 올라오고 아가씨들이 들어오고 하니 이제 깊은 밤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미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미연은 지루해졌다.

애초에 이런 걸 관찰하고 있어 봤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미연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하는 거니, 나…….”

이황자파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수상쩍은 인물이 보여서 따라 나왔다. 머리를 식히려는 의도였으니 일단 지금은 그 의도를 이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성과가 심해서 오히려 지루해졌다.

결국 지붕 위에 드러누운 미연은 밤하늘의 별을 세다 일어섰다.

“돌아가자. 이황자파고 뭐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로츠왈드 왕국으로 가고 말지.”

이황자가 야밤에 술을 마시러 홍등가로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제국 마법사단을 만나고 내 목적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냥 로츠왈드 왕국으로 가자.

그렇게 결정내리고 미연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시끄러운 소음 사이로 텔리오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미연의 예리한 청력이 그 음성을 잡아낸 것이다.

“……그래서, 요즘 서부에서도 반란군이 움직이고 있단 말이지?”

“뭐, 그렇다더만. 자네 부탁이라서 조금 알아보긴 했는데 말야. 서부 굴지의 반란군 있잖아? 판샤란 반란군이던가. 암튼 그것들이 요새 일황자파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요지를 이동하고 있다고 하더라구. 반란군의 중심이 이동하면 어떻게 되겠어? 서부 측의 판도가 다시 들끓고 만다는 거지.”

“과연, 요새 이황자파에 비해서 일황자파가 조용하다 싶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군?”

“이황자가 황위 계승권에 끼어들었으니까 정보를 조심해야 할 거 아냐?”

“그런 걸 잘도 알아챘군, 자네도.”

“훗, 내가 누구야?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지 어언 이십 년이라고. 로츠왈드 왕국도 내가 있었으면 독립하지 못했을걸?”

미연은 과연 그랬을까 하는 말을 속으로 내뱉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구멍 측면에서 보이는 텔리오트의 얼굴을 사뭇 진지했다. 단지 술판을 즐기던 모습과는 또 다른, 가면 뒤의 이황자의 모습이었다.

“어머나, 이 오빠들. 무슨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어?”

“아, 이 친구가 은근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거든. 내 직업이 또 정보업자 아니겠어? 그래서 조금 알아봐 줬지. 어때, 맘에 드나?”

“좋지, 좋아. 내일 우리 딸내미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또 하나 생겼군!”

“자네 딸도 참 신기해. 여섯 살이랬나? 어린 나이에 이런 정치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다니.”

“그러게나 말야. 내가 좀 재미나게 꼬아서 말하긴 하지만, 크면 정치나 시켜 볼까?”

“궁의 시종으로 취직시키려구?”

“그게 어딜 봐서 정치야, 이 사람아!”

“핫핫핫, 그렇지?”

또다시 분위기는 술판으로 되돌아간다. 미연은 거기까지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텔리오트의 목적이 읽히는 듯했다.

홍등가를 들락날락거리는 게 텔리오트의 본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궁 밖에서도 그는 이황자인 것이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며 미연은 중얼거렸다.

“저 녀석, 재미난 놈이잖아?

***

다음 날, 미연은 평소대로 일찍 눈을 떴다. 별궁 뒤쪽에서 아침 수련을 하던 중에 시종들과 같이 궁을 나오는 미소라를 발견했다.

“잘 잤어?”

“흐음…… 그럭저럭. 궁의 침대라는 건 꽤 불편하더군.”

“넌 딱딱한 나무 침대를 더 좋아하잖아.”

미소라도 옆에서 몸을 푸는 사이 시종들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궁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미소라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는 어디를 갔다 온 건가.”

“알고 있었어?”

“마침 명상 중이었다. 자고 있었다면 아마 몰랐을 테지.”

“나도 좀 더 분발해야겠네? 미소라에게 걸리다니. 조금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하고 왔어. 어차피 나중에 말할 테니까 그냥 그때 들어.”

휘두르던 칼을 도로 집어넣고 미연은 가면 속의 땀을 닦아냈다. 미소라가 묻는 듯한 눈길을 보냈지만 그 이후로 그녀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식사 이후 미연은 시종장을 통해 정식으로 요청했다. 텔리오트와 대면시켜 달라는 그녀의 요구를 잠시 숙고한 럭커 시종장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일단 저하께 보고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얼마 후 럭커 시종장은 도로 별궁으로 찾아와 요청이 수락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미연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이황자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좋은 아침이야. 잠자리는 편했나?”

“아마 그럴 거야. 원래 심기가 불편했는데 어젯밤에 재밌는 모습을 목격했거든. 그 이야기를 하러 왔어.”

“무슨 이야기지?”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던데 의외로 멀쩡하네? 이런 생활이 익숙한가 봐?”

집무실에는 미연과 텔리오트, 둘뿐이었다. 럭커 시종장도 퇴장한 상태였기에 텔리오트는 지긋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 주 정도 되었지. 사실 가면을 쓰는 것도 숙취에 쩐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야.”

“그 편이 훨씬 더 설득력 있네. 술에 쩐 이황자의 얼굴을 국민에게 보여선 안 되지.”

“중요한 시기니까 말야. 황제 주최 기념식까지는 어떻게든 입지를 보여야 하거든.”

“일황자와의 싸움이란 말이지?”

이해를 하는 듯 마는 듯 미연은 설렁설렁 이야기를 넘겼다. 텔리오트는 가면 속에서 웃음을 지었다.

“다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군?”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알고 있는 건 단 하나야. 넌 평범한 황자가 아니라는 것.”

“황자한테 너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처음이군.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이미 대놓고 반말이었던가?”

“내 말투는 신경 쓰지 마. 나름 기준에 맞춰서 살고 있으니까. 것보다 한 가지 정확하게 묻고 싶어.”

“물어봐.”

“왜 그런 술집에서 정보를 얻는 거지?”

텔리오트는 손가락으로 가면을 톡톡 두들겼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어. 일황자파는 현재 기밀 처리에 심혈을 다하고 있지.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단 소리다. 밖으로 나와 있는 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지. 아무리 럭커 시종장이 유능한 자라고 해도 쓸모 있는 정보는 흔히 있는 게 아니거든. 요컨대, 그 쓸모 있는 정보를 위해 난 뒷세계의 정보에 손을 뻗은 거야.”

“그래서 정보업자를 만나고 다닌다?”

“어젯밤의 그는 정보꾼들에게서 정기적으로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업자다. 시디 노트니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자지. 그와 친해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 어쨌든 난 병석을 턴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행동력이 대단한걸?”

“결단력과 행동력이 내 장점이지.”

“누구를 닮았네? 어쩌면 그 연기력까지 말야.”

“누구를 닮았지?”

“있어, 내 낭군님.”

미연의 뻔뻔한 얼굴에 텔리오트는 솔직히 웃음을 터뜨렸다.

“현신의 전사 말인가? 그러고 보니 네가 투신의 전사라면 왜 현신의 전사와 같이 있지 않은 거지?”

“심란해. 더 이상 말하지 마. 내가 제국 마법사단과 만나려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그래, 확실히 그런 교환 조건이었다더군. 하지만 제국 마법사단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어떤 특정 개인의 위치를 알기는 쉽지 않아. 오히려 정보꾼을 만나는 편이 빠를걸?”

“괜찮아. 내가 원하는 건 세계 진동이 일어난 장소니까.”

그러고 나서 미연은 설명했다. 미소 족의 장로가 알려 준 사실들을.

얘기를 들은 후 텔리오트의 목소리가 미묘해졌다.

“세계 진동? 그렇다면…… 넌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란 건가? 역사 속에서는 동쪽의 나라에서 온 자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 동쪽의 나라를 지어 낸 게 우리들인걸? 동쪽으로 가 봤자 아무것도 없는 판게리아밖에 안 나오잖아? 동쪽의 나라 같은 건, 없어.”

“다른 세계에서 왔다…… 는 건가.”

미연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못 믿는대도 상관없어. 난 세계 진동의 위치만 알면 되니까. 그래야 태진을 찾을 거 아냐. 넌 황자니까 제국 마법사단에 이야기해 줄 수 있지? 마법사들이 단체로 모여 있으니까 누군가는 세계 진동을 알 거 아냐? 아니면 그 위치를 찾아 준다고 해도 괜찮아. 아무튼 부탁해!”

막무가내로 부탁해 버리고 미연은 가면 쓴 얼굴을 들이댔다. 훅 하고 다가오는 그 행동에 텔리오트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다 의자 등받이에 부딪혔다.

잠시간의 적막. 가면을 쳐다보는 가면이라는 어색한 상황에서 텔리오트는 뭔가 결정을 내렸는지 손을 들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잠깐만, 잠깐만. 일방적으로 부탁한다고 해도 소용없어. 발츠 중장의 약속은 제국 마법사단과 만나게 해 준다, 그게 다였다고 했어. 그 이후로는 너의 능력일 뿐이야. 지금 그걸 나에게 해 달라는 건가?”

“응, 바로 그거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얻는 거지?”

“나를 줄게!”

“――뭐?”

텔리오트의 가면이 오묘한 각도로 비틀렸다. 미연은 허둥지둥 말을 고쳤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음. 그러니까,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줄게. 정체가 어찌됐든 네 힘이 되어 달라며?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잠깐…… 왜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거지?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난 사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어.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넌 투신의 전사잖아? 로츠왈드 왕국의 영웅이 아키레마 제국의 황자를 위해 일하겠다고?”

“말이 달라. 난 너를 위해 일하는 게 아냐. 내 목적을 위해서 일하는 거지.”

“제국 마법사단과의 거래를 위해서 말인가. 그 거래에 나를 이용하는 거고?”

“잘 아네? 과연 이황자야.”

“난 아무래도 난처한 여자를 만난 거 같군.”

가면을 톡톡 두들기며 텔리오트는 고민하는 듯했다. 미연은 골똘히 생각하는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사실 텔리오트는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결정은 벌써 내렸다. 단지 타이밍을 찾을 뿐이었다.

한참 후, 그는 말했다.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지.”

“화끈한데? 맘에 들었어, 너!”

“나도 은근히 네가 맘에 드는군. 투신의 전사가 아니라고 해도 꼭 내 옆에 두고 싶어.”

“미안하게도 내 옆에 있을 사람은 네가 아니야. 따로 있거든? 그 제안은 내가 거절할게.”

“이거, 단호하시군. 할 수 없지, 그럼 거래가 성립된 기념으로 둘 다 가면을 벗고 악수나 한 번 할까?”

둘은 나란히 가면으로 손을 뻗었다.

텔리오트는 늦게 가면을 벗었다. 모자까지 벗어 검은 머리를 길게 내린 미연과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 텔리오트.

“역시, 그 얼굴 멀쩡하네?”

“말했잖아. 숙취에 쩐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 쓰는 거라고.”

“황자 치고 재밌는 녀석이야, 너.”

“너도 투신의 전사치곤 재밌는 녀석이야.”

이황자와 투신의 전사는 털털하게 웃고서, 드디어 손을 맞잡았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시브였다.

“미연 님! 감사합니다!”

“아니, 뭐…… 이시브가 감사할 일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분께 힘이 되어 주신다면야 그것보다 기쁜 일이 더 있겠습니까!”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걸. 아니지, 애초에 이 정도로 감정 표현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을 쑥스러운 듯 웃어넘기는 이시브의 옆에 서 있던 발츠 역시 기쁨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발츠 군단장, 솔직하게 기뻐해도 돼.”

“허, 허허허. 사실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하. 지금 제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옵니까?”

“사실이야.”

텔리오트를 대신해서 미연이 대답했다.

“다시 말해 줄까? 난 오늘부로 이황자파에 가담하기로 했어. 이 녀석 옆에서 이 녀석의 힘이 되어 주기로 했단 말이야.”

“……크으.”

근엄하던 모습과는 별개로 지금 발츠는 기분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엄하신 황자를 녀석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미연의 행동조차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다.

미연을 지적한 것은 미소라였다. 물론 핀트가 조금 다른 일이었다.

“아침부터 숨기던 이야기가 이 말이었군.”

“응, 맞아. 미리 들으면 재미없잖아?”

“……다 좋다. 다 좋은데, 너는 투신의 전사다. 스스로 그렇다고 말했고 지금은 대다수가 인정하고 있어. 그런 자가 제국의 편에 서도 되는 건가?”

미연이 말하지 않아도 미소라는 그녀가 어떤 궁리를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분명히 이황자와 어떤 거래를 했을 것이다.

그 거래의 조건으로 미연은 이황자파에 가담하기로 했다. 그 거래는 물론 제국 마법사단에 관련된 것임에 분명하고, 거기다 현신의 전사에게 연결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투신의 전사, 로츠왈드 왕국의 독립 영웅이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분명히 대륙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

미연이니까 아마도 그런 훗날의 얘기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게 뻔하다. 어젯밤의 외출에서 뭔지 모를 일이 있어서 감정적으로 결정하고, 무턱대고 이야기를 밀어붙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미소라는 한숨을 숨겼다.

그런 그에게 미연은 히죽 웃었다.

“걱정 마.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다 아니까.”

진짜 알까? 그런 미소라의 의심을 무시하고 그녀는 태연했다.

“난 제국의 편이 되는 게 아니고 다만 테리를 도울 뿐이야. 따지자면 테리의 편인 거지. 테리가 제국 전체가 되는 건 아니잖아?”

미소라는 속으로 답했다. 제국 전체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다. 황제는 곧 제국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미연에게 테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고도 별 반응이 없는 텔리오트를 슬쩍 훔쳐본 미소라는 이내 눈을 돌렸다. 이미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미연의 결정은 모두 통과된 듯했다. 이황자파 쪽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이야기였으니 당연한 결관지도 모를 일이다.

“이황자, 미연은 언제까지 당신을 돕는 거지?”

미소 족은 아직 제국의 영토가 아니다. 그렇기에 미소라는 텔리오트에게 존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텔리오트도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 미연, 언제까지 나를 도와줄 생각인가?”

“흐음― 일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테리가 정식 황위 계승자가 될 때까지 아닌가?”

“그때가 좋겠군. 그렇다고 하는데, 미소라.”

“……결국 기약이 없다는 건가.”

“그 대신 미연이 힘을 빌려 준다면 최대한 그 기한을 일찍 당겨 주도록 하지. 미연이 원하는 바도 마찬가지고.”

가면 뒤에서도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 텔리오트였다. 그 목소리는 미소라가 처음으로 그에게 받은 인상과 동일했다.

현명하며 꾸밈이 없다. 보통 이 정도 자리에 올라 있으면 중상모략에 익숙해 꾸밈없음에도 거짓의 기운이 있게 마련인데, 이 자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오히려 더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믿는다고 치자. 미연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 흐름을 타 주지. 미소라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렇다면…… 난 더더욱 리트미소로 돌아갈 수 없겠군.”

“어라―? 미소라, 그게 무슨 말이야?”

“원래 난 너를 시디 노트니로 안내한 후 리트미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흐름이 이렇다면 돌아갈 수가 없겠군.”

“너, 나를 놔두고 돌아가려고 했었어!?”

미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파로 모자가 출렁이며 벗겨지려 하는 것을 미소라가 짐짓 손을 뻗어 막아 냈다.

그리고 손짓으로 그녀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그러니까 가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간다는 이유는 뭐고 안 간다는 이유는 뭔데?”

“원래 난 너를 수도까지 안내하는 안내자의 역할이었다. 장로님의 부탁이었지. 같이 여행을 하라고 했고 나도 그것을 원하긴 했지만 내 예정은 이곳에서 너와 헤어지는 것이었다. 시디 노트니에서 방법을 찾으면 그 뒤는 네가 할 일이라고 여긴 거다. 하지만 이곳에서 너는 방법을 찾았다기보다 방법을 찾을 방법만 찾은 듯하군.”

“……뭔 말이야, 그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안 간다고?”

“이런 너를 두고 내가 어떻게 돌아가나.”

진지하게 대꾸하는 미소라를 미연은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듯 눈동자를 굴렸다. 미소라의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의미지, 그 표정은?”

“너야말로 무슨 의민데, 그 말?”

“말 그대로다. 너는 뭐든지 감정적으로밖에 대할 줄 모른다. 지난 한 달간의 동행으로 충분히 그 사실을 깨달았지. 네가 아무리 감이 좋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그것만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삼십 년 전에는 현신의 전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번엔 너 혼자일 뿐이다. 앞으로 어쩌려는 거지?”

“……듣고 보니 묘하게 열 받는 말뿐인데?”

“들어라. 그런 너이기 때문에 현신의 전사를 대신하여 내가 있겠다는 말이다. 앞으로 내가 필요할 때가 몇 번이고 있을 것이다. 장로님의 부탁이 좀 더 길어졌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다.”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당사자들뿐이었다. 발츠와 이시브, 그리고 텔리오트는 눈빛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해석하자면―

‘……이거 사랑 고백?’

‘어조는 아니지만 가까운 듯합니다, 저하.’

‘단순히 친우를 걱정하는 태도로도 보입니다만…….’

졸지에 프러포즈 비슷한 행위의 목격자가 되어 버린 세 사람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라는 무뚝뚝하기만 했다.

“지금 너를 잡아 줄 인간은 나밖에 없다.”

“그건, 내가 이 사람들한테 휘둘릴지도 모른다는 말?”

“제법 이야기는 통하는군.”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으음―”

팔짱을 기고 미연은 고민 속으로 돌입했다. 고민의 이유는 이 태도가 걱정인가 무시인가 하는 것. 그러다 조금 후에 그녀는 중요한 건 그런 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잠깐. 그렇다는 건, 아무튼 안 돌아간다는 거지?”

“그렇다.”

“나랑 계속 놀아 준다고?”

“……너는 논다는 의미를 확대 응용하고 있다.”

“어쨌든!”

미연은 또다시 벌떡 일어났다.

“안 돌아간다는 건 대환영! 네가 없으면 재미가 없잖아!?”

“난 장난감이 아니다.”

“장난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다만 놀잇감이라고 여겼을 뿐이야!”

“……아무래도 돌아가야겠군.”

“앗! 치사하게, 남자가 말 바꾸는 거야?”

금세 다투기 시작하는 이 두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이시브였다. 그는 이황자 앞에서 말다툼이 심해지기 전에 급히 그들을 말렸다.

이젠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는 중재가 끝내고 다시 본래의 흐름으로 돌아온 후 텔리오트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무튼 좋게 이야기가 끝내서 다행이군. 미연, 미소라.”

“응. 그러게 말야.”

“……후우.”

왠지 뜻하는 바가 깊어 보이는 호흡을 하고서 미소라는 눈을 돌렸다.

“나도 있어도 되는 건가?”

“얼마든지. 미소 족의 숲지기가 이황자 쪽에 있다는 사실은, 물론 기밀로 관리하겠지만 설사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좋게 작용할 거야. 미소 족이 나를 돕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군.”

“약속하지. 절대 미소 족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 거야. 아니, 그렇게 하지 않겠어. 나의 약속을 이해해 주겠나, 발츠 군단장?”

발츠는 일황자 레키엔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서부 반란군을 억압적으로 색출해 뿌리 뽑으려는 그의 행로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직선적인 그는 이 일을 미소 족의 개입이라고 여기고 미소 족 자체를 해하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북부 주둔군 측은 이황자파에 더 깊이 연결되어 있지만 일황자파에도 선은 있었다.

아무쪼록 기밀 관리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맡겨 주십시오, 저하. 제 목을 걸고서 관리하겠습니다.”

“고마워.”

미소라는 자신도 가면과 모자를 착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게다가 그로 인해 떨어지는 전투력을 보충하기 위해 좀 더 수련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도.

“그렇다면…… 저하, 미연 님과 미소라 님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시브의 질문에 텔리오트는 버릇처럼 가면을 톡톡 두들겼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연과 이야기를 나눠 봤어. 내 옆에 두기 위해서는 일단 수도 주둔군 쪽에 자리를 하나 맡아야 할 것 같아. 그냥 일반 병사라면 관리가 쉽지 않으니 이왕이면 고위 관료가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했더니 미연은 반대하더군.”

“역시 싫어. 관료라는 건 책상에 붙어서 일해야 한다는 거 아냐? 난 칼 휘두르는 게 좋아.”

“……너답군.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텔리오트.”

“미소라, 너까지 미연과 같이 남겠다고 한다면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겠군.”

발츠 군단장을 보며 텔리오트는 웃음기 섞어 이야기했다.

“이황자 직속 부대가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아?”

미연이 눈을 돌렸다.

“어라? 그건 안 된다며?”

“너 혼자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미소라도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이시브 소령의 보고로 미소라의 능력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 너희 둘의 조합이라면 소규모 부대 정도는 지휘할 수 있을 거야.”

“나 해 봤다니까? 삼십 년 전엔 내 부대도 있었는걸?”

“그래그래,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미연의 반박에 가볍게 응수하며 텔리오트는 발츠 군단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을 만큼의 제안이십니다.”

“역시. 응해 줄 거라고 믿었어.”

텔리오트는 곧바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미연이 대장을, 그리고 미소라가 부대장을 맡아 줬으면 해. 일단 내 직속부대지만 굳이 호위부대로 할 것은 없지. 둘의 능력은 탁월하니까 내 호위가 아니라 다른 일도 해 줬으면 하니까. 어때?”

“이 두 분만으로는 조금 힘들 겁니다.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할 테니까 이시브 소령까지 부대원으로 해주시겠습니까, 저하?”

“이시브라면 더 믿음직하겠군. 본인의 의견은?”

“저야 발탁해 주시기만 한다면 저하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좋아, 맘에 드는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사이 소외된 미연과 미소라는 목소리를 낮춘 채 소곤댔다.

“……얘네들, 당사자는 완전 무시인데?”

“예상은 했지만 확실히 자신의 옆에 너를 잡아 둘 생각인 것 같다. 그래도 되겠나?”

“도와준다고 했으니 그 편이 더 편하긴 하겠지만. 음…… 그래도 끼어들 수가 없으니 기분 상하는걸.”

텔리오트와 발츠, 그리고 이시브까지 합세하여 이황자 직속 부대의 윤곽은 점점 더 명확해져 갔다. 잠시 후 그들의 의논 결과를 미연과 미소라에게 알렸다.

“이황자 직속 부대. 인원은 스무 명 안팎. 부대 목적은 일단 이황자의 호위지만 그 외의 임무도 하달될 거야. 게다가 부대의 관한 일체의 사항은 특급 기밀로 분류하여 나와 발츠 군단장만이 일람할 수 있어. 이 정도면 될까?”

“……어때, 미소라?”

“기본 골격은 그 정도로도 괜찮을 것 같군.”

“그럼 남은 건 너희들이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야. 하지만 선택 권한은 주지 않겠다. 이왕 나의 힘이 되어 준다고 했으니 내 의견을 따라 주지 않겠어?”

미소라는 미연을 쳐다보았다. 미소라는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이곳에 남는 건 그녀를 위한 것. 그러니까 모든 결정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의 눈빛을 읽고 미연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가면 속에서 그녀는 좌우로 검은 눈동자를 돌렸다. 물론 별 뜻은 없는 행동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텔리오트를 보는 미연.

“부대 명칭은?”

“……글쎄, 거기까지는 정하지 않았어.”

“그래? 그거 다행이네. 내가 결정할게. 부대 이름은―”

미연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 마치 큰일을 결정하듯 그녀는 단호했다.

“백두(白頭)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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