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나. 왕국의 밤을 잘 부탁해
정보부 감옥에 신입이 두 명 들어왔다. 귀족 대상의 특별 감옥이기에 보통은 사람이 들어와 있을 리 없는 곳이지만 희한하게도 일주일 사이 두 명의 귀족이 감금되었다.
미켈파 남작과 오켈라니아 남작.
왕국 남부의 미카일 산을 중심으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영지의 주인이 지금은 지위를 박탈당한 채 특별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대체 무슨 꼴인가, 이게.”
“그러게 말이오.”
서로 마주 본 채 투옥된 두 사람은 철창 사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별 감옥이니 간수도 외부에 위치해 있어 사실상 커다란 감옥 내에는 단 둘뿐이었다.
“대체 어디서 꼬리가 밟힌 거라고 생각하오?”
“글쎄…… 나도 감이 제대로 안 잡히는군.”
“순찰대를 손댔을 때 뭔가 잘못된 거 아니오? 분명히 현상금 사냥꾼들에게도 아무 연락이 없었소. 그렇다는 건 결국 영지 안을 빠져나간 게 아니겠소?”
“……그놈들이? 하, 현상 수배를 내린 녀석들이오. 그렇게 쉽게 수도로 들어올 수는 없을 테지. 게다가 그놈들이 노예 시장과 우리들의 연계에 대한 증거를 쥐고 있다는 거요?”
“하지만…… 놈들이 사라진 이후 소환 명령이 내려졌소. 연관은 있지 않겠소?”
“미켈파 남작, 감옥에 있다 보니 망상이 점점 더 부풀려지는 것 같소만.”
“아무래도 여기서 벌써 사 일째다 보니 그런 감도 없지 않아 있소.”
잠시 이야기가 끊기고 동시에 한숨을 푸욱 내쉰다. 더 이상 이야깃거리도 없고 해서 그들은 간이침대에 드러누워 입을 다물어 버렸다.
특별 감옥이지만 일반 감옥과 비교하여 나은 점은 화장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순찰대 앞에서는 그 어떤 직위도 소용없다는 규칙이 그대로 적용된 사례다. 그렇지만 귀족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삐걱거리는 간이침대는 그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괜히 더 숨을 내뿜으며 벽에다 대고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그렇게 쳐도 쉽게 무너질 벽이 아닙니다. 그럴 바에야 그 커다란 뱃살로 치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특별 감옥 복도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노란 머리를 휘날리며 거침없이 걸어 들어온 그 뒤에는 정복을 입은 여기사도 뒤따르고 있었다. 그 얼굴들을 보는 순간 미켈파 남작은 허겁지겁 간이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네, 네놈들은!”
“오랜만입니다, 미켈파 남작. 그동안 턱살이 더 늘어나신 것 같습니다만,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뻔뻔한 말투와 함께 감고 있던 눈을 뜬 것은 물론 태진. 그리고 뒤쪽에서 그를 호위하듯 서 있는 여기사는 아리스였다.
“네, 네놈들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이냐!”
“흐음, 원래 전 루위스로 오려고 했습니다. 그중에 이러저러한 사건이 있어서 희한하게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왔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립니다.”
태진은 양쪽을 둘러보며 말했다.
“두 분께는 이런 형태로 다시 만나게 돼서 죄송한 마음을 아주 조금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어차피 지은 죄를 속죄할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속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이놈! 누굴 약 올리는 것이냐!”
“미켈파 남작, 이 건방진 자는 대체 누구요!”
오켈라니아 남작의 비명 같은 외침에 대답한 것은 태진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며칠 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일단 아리스의 말을 먼저 들어주시겠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아리스가 둘 사이에 섰다.
“미켈파 남작님, 오켈라니아 남작님. 두 분은 지금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과 연관된 혐의로 소환되셨습니다. 정식 재판은 사흘 후, 그때까지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지내 주셔야겠어요. 저택보다 지내기 힘들겠지만 이미 며칠 동안 충분히 익숙해지셨죠?”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이라니! 난 그런 이야기 금시초문이오! 그렇지 않소, 오켈라니아 남작?”
“다, 당연하지! 지금 누구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게요!”
“과연 누명일까요.”
태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그에 관한 증거를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유력한 증인도 확보하고 있는 중이니 사흘 후를 즐겁게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대범하게 돌아서서 특별 감옥을 나갔다.
아리스가 두 사람에게 재판에 대한 일정을 간단히 이야기해 주고 돌아서자 미켈파 남작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손을 뻗었다.
“이봐, 기사! 잠깐만 기다려 주게!”
“무슨 일이시죠?”
“나, 난 진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 노예시장이라니, 내가 노예를 사고팔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리스는 다시 돌아선 채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껏 보인 적 없었던 강한 눈빛에 미켈파 남작이 입을 다물었다.
“미켈파 남작님. 당신에게는 살해 혐의도 있습니다. 순찰대 부대장 류토를 비롯한 이하 기사들에 대한 집단 살해, 시체 유기, 증거 조작 등등. 며칠 동안 우리 정보부가 그냥 놀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지금도 전서조를 통해 수많은 증거들이 속속들이 날아들고 있어요.”
아리스는 힘껏 얼굴 근육을 움직여 조소를 만들었다.
“현신의 전사님의 말씀처럼, 사흘 후를 즐겁게 기다려주세요.”
결국 미켈파 남작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잘 말해 줬습니다.”
감옥 밖에서 태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스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전…… 아무래도 순찰대장직이 맞지 않나 봐요. 용의자를 앞에 두고서 이렇게 긴장하는 대장은…….”
“과연 그럴까요?”
아리스가 눈을 들었을 때 태진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두 쏟아냈습니다. 그것 자체는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긴장되고 떨리는 것은 아직 익숙지 않아서일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당신은 하이듀크의 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아리스의 마음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태진은 아버지의 친구이면서 지금은 그 딸인 아리스와도 연을 맺고 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 그 딸 또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남자. 아리송하고 이상한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태연히 그렇게 살고 있는 남자가 태진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아리스는 묘하게 안정을 되찾았다.
“사흘 후 재판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죄를 밝혀서 그들에게 처분을 내려야 합니다. 그 선두에 설 자가 바로 아리스 당신입니다. 힘내십시오.”
“……네, 감사해요. 힘낼게요.”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리스는 태진의 뒤를 따라 감옥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이 듬직하여 문득 그녀는 그 등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을 지우고 자신의 묘한 감정을 다잡듯 옷깃을 세운 채 정보부 본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정보부 장관 하이듀크의 호출로 그의 집무실에 불려갔다.
“특별 감옥에 간 일은 잘되었는가, 현신의 전사.”
“안 어울립니다, 하이듀크.”
“그렇지? 아무튼, 잘 됐어?”
“그럭저럭 선전포고는 하고 왔습니다. 어차피 우리 손에 떨어졌으니 충분히 가지고 놀아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투신의 전사가 없으면 성격이 너무 나빠져, 넌.”
“증거는 이미 모인 것 아닙니까? 오늘 그녀가 도착하면 이미 그것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습니다.”
“‘그녀’ 말이군…….”
태진의 옆으로 선 아리스가 대화에 끼어 들었다.
“정말 놀랐어요. 아는 사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삼십 년 전에 이런 사태까지 예상하신 건가요?”
“전 미래를 볼 줄은 모릅니다. 다만 제가 계획한 일에 필요한 사람이기에 준비해 둔 것뿐. 조금 등장할 기회가 빨라졌지만 어차피 나서게 될 일이니 상관은 없습니다.”
“오늘 저녁에 도착하는 건가요?”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부탁했으니 아마 오늘 안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태진의 말대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여인은 해가 진 후 만나 볼 수 있었다. 검문소에서 연락이 들어온 직후 태진과 하이듀크, 아리스, 그리고 아서까지 한 자리에 모여 그녀를 맞았다.
마차에서 내린 자는 매혹적인 선을 가진 여인. 태진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자이고 아리스도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불러줘서 고마워요, 태진.”
“별말씀을. 언젠가 부를 생각이었습니다, 키드카. 여행은 즐거웠습니까?”
“아뇨, 별로예요. 관광을 즐기진 못했거든요.”
고호하게 웃으며 키드카는 아리스에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하이듀크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악수. 허리를 굽히는 인사와 함께 2년 전까지 이 세계에 있었던 태진이 왕국에 퍼뜨린 문화였다.
악수를 한다는 것은 로츠왈드 왕국에 자취를 둔 자라는 이야기도 된다.
“하이듀크 뤼스필드 정보부 장관이시죠? 처음 뵈어요, 키드카라고 해요.”
“반…… 갑소.”
키드카는 미모가 뛰어나다.덕분에 그녀를 보는 순간 입을 헤 벌리고 정신을 못 차리는 하이듀크의 옆구리를 아리스가 팔꿈치로 푸욱 찔렀다. 그 눈빛이 ‘어머니에게 이를 거예요.’라고 말하고 있어서 하이듀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루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여행길을 괜찮았소?”
“기사 분들이 안내를 잘해 주신 덕에 불편하지 않았어요. 다만 속도가 좀 빨랐지만. 그리고 함께 온 사람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누구요?”
“게르.”
짤막한 키드카에 부름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게르였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의 부두목으로 있는 그는 몇 주 전 수도로 향하는 마차행 중에 기동대장 아서의 검에 베여 죽었었다. 그런 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그 인사를 아서를 향한 것이었다. 아리스는 아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놀라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죠, 이게?”
“장관님의 명령이셨어. 마차행의 대장은 절대 죽이지 마라. 죽이는 척하면서 살려둬라. 그래서 난 심장을 피해서 그를 공격하고 기절시켰지.”
“보고에는 분명히 심장을 찔렀다고……?”
“게르는 보기 드문 오른쪽 심장이에요. 왼쪽을 아무리 찔러 봤자 걸리는 건 늑골과 폐뿐이죠.”
웃음 짓는 키드카는 하이듀크에게 눈길을 돌렸다.
“편지로 보낸 내용, 지켜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제 부하가 살았네요.”
“다른 부하들은 죽지 않았소?”
“괜찮습니다. 그 녀석들은 모두 노예를 이용하여 약을 팔고 있던 몹쓸 놈들이어서 어차피 모두 처리하려고 생각 중이었으니까요.”
“우리가 계획한 마차행을 그런 식으로 이용했다는 말이오?”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해요. 그렇지만 그래서 협력 관계는 더욱 굳어지지 않았나요?”
자기들끼리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리스뿐이었다. 아리스는 결국 아버지와 키드카, 게르의 얼굴을 번갈아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태진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길에 담긴 도움 요청에 태진은 설명했다.
“이런 말입니다. 하이듀크와 키드카 사이에 비밀리에 그동안 전언이 오갔습니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질을 넣어 둔 것은 삼십 년 전의 저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비밀리에 선을 유지한 채 겉으로는 전혀 모르는 척 정보꾼의 정보를 사고, 노예 시장에서는 정보부를 견제하는 생활을 해 왔던 겁니다. 그러던 중 수도로 가는 마차행이 결정되고 정보꾼들이 그 정보를 정보부에 팔았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키드카는 기동대의 출동을 미리 듣고 게르를 제외한 인원을 모조리 몰래 약을 판 자들로 채워 넣은 겁니다. 아서는 게르를 죽이지 않고 나머지를 모두 처리한다. 그리고 정보부는 노예를 확보한다. 대충 이런 이야기 같은데, 맞습니까?”
키드카는 감탄했다.
“마치 우리의 편지를 모두 읽은 듯하군요. 대단해요.”
“편지를 주고받은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오 년쯤 되었을 거야. 그렇다고 해도 거의 몇 개월에 한 번씩 단편적인 정보를 주고받은 게 다였지만. 주소도 이름도 불명이었지만 말야.”
“이미 둘 사이에 정보가 오갔다면 저의 협력은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것과는 또 이야기가 다르지.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만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좌중을 둘러보고서 태진은 손을 벌렸다.
“지금 일단 우리에게는 눈앞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손님을 계속 성문 앞에서 세워 뒀군. 들어갑시다.”
하이듀크는 모두를 이끌고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정보부 본부로 이동해 하이듀크의 집무실에 모두 모이자 그곳으로 라스터까지 합류했다. 기사단장으로서 참가한 그까지 자리하자 모두 앞에서 태진이 입을 열었다.
“인사는 다 한 걸로 알겠습니다. 여기 있는 키드카는 삼십 년 전 저의 부탁으로 현재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을 일으켜 세워 운영 중입니다. 비밀리에 정보부와의 연계를 가지고서 활동 중에 있고, 게르는 그런 그녀를 뒷받침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들은 지금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과 오켈라니아 남작, 미켈파 남작의 연관을 증명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한마디만 하겠네, 태진. 애초에 노예 시장을 만들지 않았다면 오켈라니아 남작과 미켈파 남작도 연관된 일이 없지 않았겠나?”
“라스터의 말도 맞습니다만,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범죄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삼십 년 전, 로츠왈드 반란군 결성 직전에 우리들은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관련인들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겨났을 겁니다. 이것은 하이듀크도 인정한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로츠왈드 왕국은 아직 신흥 강국이며 아키레마 제국과는 정면으로 경쟁 중인 국가입니다. 조금이라도 내부적으로 흔들렸다가는 큰일입니다. 범죄 집단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왕궁에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합니다.”
“그래서 부탁한 거군요. 그렇게 노예 시장을 싫어하던 제게.”
“그렇습니다, 키드카. 언젠가 생겨날 범죄라면 이쪽에서 먼저 만들어 내면 됩니다. 그 편이 더욱 손쓰기 쉬울 겁니다.”
아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입이 뱉어 낼 말이 어떤 것인지 직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을 알고 있는 하이듀크와 키드카를 제외한 나머지가 태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설마……?”
“그렇습니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로츠왈드 왕국의 밤을 왕궁 아래에 두기로 계획했습니다. 그 시작이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이었던 겁니다.”
***
루위스에 키드카와 게르가 도착한 이후 3일. 아리스는 그 사이 순찰대장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머리 한 편에서 계속 그 날 밤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태진이 내뱉은 ‘왕국의 밤을 왕궁 아래에 둔다.’는 말.
그 말은 곧 범법의 세계를 왕궁에서 관리한다는 말이다.
말로 듣자면 별것 아닌 이야기 같지만 사실 말도 안 되기도 한다. 왕궁은 로츠왈드 왕국을 다스리는 입장에 놓여 있는데, 범법이라 함은 그런 왕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인 것이다. 그 행위를 왕궁에서 주도한다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해 태진은 간단히 답했다.
“주도하는 게 아닙니다. 그 행위와 정도를 조절하는 겁니다. 키드카의 노예 시장도 이용하기에 따라 많은 방법이 생겨납니다. 노예를 사고팔지만 개인으로는 생활이 힘든 자를 대상으로, 그리고 이름만 노예일 뿐 일반 시종과 같게 한다는 식으로요. 그런 식의 규제를 왕궁에서 알게 모르게 거는 겁니다. 사람을 사고파는 것은 분명히 범법이지만 그 범법에서도 왕국의 기틀을 무너뜨리지 않을 만큼 제한을 두겠다는 이야깁니다.”
범죄를 조절한다. 결국 처음 그 말 그대로였다.
책임자로서 빠져선 안 되는 결제 사항을 처리한 후 정보부 장관에게 올라갈 보고서를 따로 처리하고서 아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이 물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서 그녀는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문밖에서 아리스는 아서와 마주쳤다. 기동대의 훈련이 끝나고 간단한 목욕 후 집무실로 돌아오던 그는 아리스를 보며 반색했다.
“여어. 지금 가?”
“응. 태진 님과 만나기로 약속했어.”
“그래? 나도 같이 가자. 어차피 오후에는 재판 참석을 위해 전부 비워 뒀으니까.”
잠깐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정복을 차려입고 나온 아서와 같이 아리스는 정보부 장관실로 향했다.
가는 도중 아리스는 아서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태진 님의 계획 말이지? 글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이의를 걸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 아버지도, 그리고 너희 아버지도 동의한 일이잖아. 그리고 이미 십 년 동안 계획은 실행되어 오고 있어.”
키드카의 노예 시장은 10년 전 부활한 이후 왕국의 밤으로 꾸준히 스며들었다. 지금은 왕국 남부 쪽에는 거의 다 손이 미치는 실정이었다.
동쪽과 서쪽에도 웬만큼 입김이 닿지만 남부보다는 부족하다. 가장 허술한 곳은 북부.
그래서 키드카와 하이듀크는 태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예를 들어 지금의 노예 시장은 예전과 달라. 조사해 보고서야 알았지만 노예의 선택부터 판매 뒤의 처우까지 확실하게 계약한다고 해. 예전처럼 약값으로 던져 버리는 그런 곳이 아냐. 태진 님의 말처럼 범법을 조절된다고 해야 할까?”
“아예 전부 없앴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불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알아.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어쨌든 죄는 나타나니까. 그렇기에 태진 님은 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 자체를 제어하려는 거고.”
복잡한 얼굴의 아리스를 보며 아서는 빙긋이 웃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둘은 서로의 성격을 잘 알았다.
아서는 무심결에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다가 정지했다. 손을 내리고 헛기침을 한다.
“크흠. 어쨌든 태진 님이 계획한 일이니까 믿고 기다려 보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정보부 장관실에 도착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태진과 하이듀크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 오렴! 우리 딸내미!”
“네, 아버지. 태진 님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고서도 이미 결제됐고 이제 그들을 단죄하는 일만 남았어요.”
“힘내십시오.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실제 나이를 따지자면 아리스가 태진보다 3살이 많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태진이 연장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능력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러했다. 그녀는 잠깐 긴장한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태진. 너무 긴장시키지 마. 순찰대장 단 지 얼마 안 됐어. 재판도 처음이란 말야.”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리스.”
“아, 아니에요. 응원해 주신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감사해요.”
예의바르게 아리스가 허리를 숙여 인사할 때 시종이 문을 두들기며 들어왔다. 재판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그 자식들을 처단하러 가 볼까?”
우렁찬 하이듀크의 외침을 시작으로 모두가 재판실을 향했다.
대기실에 정보부 장관과 순찰대장의 직분인 두 사람을 밀어 넣고서 태진과 아서는 뒤쪽 방청석에 자리했다. 로츠왈드 왕국에는 판사나 검사 같은 직업이 없고 정보부 장관과 순찰대장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재판은 정시에 시작됐다. 그 전에 이미 국왕 내외와 라스터, 그리고 고위 귀족들이 전부 방청인으로 자리했다.
아리스가 입장한 후 뒤따라 손이 묶이고 재판복을 입은 미켈파 남작과 오켈라니아 남작이 들어왔다. 귀족에게 저런 옷을 입힌다는 건 다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오로지 현신의 전사가 토대를 만들어 둔 로츠왈드 왕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판의 진행은 먼저 순찰대장의 사건 개요 보고부터 시작한다. 시작부터 아리스는 보고되어 올라온 증거물을 두 남작 앞에 차근차근 내려놓았다. 분명히 키드카와 두 남작 사이에만 존재해야 할 비밀스런 문서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그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색됐다.
아리스는 침을 삼키며 마지막 노예 교환 협정 문서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이래도 당신들이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실 건가요?”
그러나 두 남작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이건 모함이다!”
“그, 그렇다! 모함이야, 이건! 전부 우리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조작된 문서야!”
“정보부라면 귀족들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게냐!”
“이런 조작품에 우리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팰리슈가 지인들만이 알 만한 불안감을 표출하고 있을 때 태진이 읊조렸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 겁니까.”
예상했다는 듯 태진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눈은 감은 채였지만 재판실 안의 공기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그였다. 증거인 출입구 뒤쪽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장관님. 증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허가합니다. 증인 나오시오.”
여기서 그녀가 등장했다. 문을 열고 걸어 나온 재판복의 여인. 그녀의 얼굴을 보고 안색이 퍼렇게 변한 것은 오켈라니아 남작이었다. 직접 그녀와 대면한 적이 있는 것은 오켈라니아 남작뿐이었다.
태진이 느긋하게 팔짱을 꼈을 때 아리스는 자신감을 얻은 듯 그녀 앞으로 나섰다.
“키드카. 자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너, 너― 넌!”
“안녕하신가요, 오켈라니아 남작님?”
재판복임에도 그녀의 고고한 분위기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태진 쪽을 힐끔 보고서 키드카는 아리스의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죄다 오켈라니아 남작과 노예 시장 간의 감춰 둬야 할 사항들이었다. 그녀는 노예 시장의 두목이었고 그 위치에서 문서로 계약을 한 상대는 오켈라니아 남작.
“그 이후 저의 노예 시장은 오켈라니아 영지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계약 요건은 어떻게 되죠?”
“간단히 말하자면 활동하는 대신 일정수의 노예와 수금량을 오켈라니아 남작 측에 양도한다는 내용이에요.”
아리스는 오켈라니아 남작을 돌아보았다.
“이래도 발뺌하실 건가요?”
“…….”
오켈라니아 남작은 완전 말을 잃었다. 그 틈을 타 미켈파 남작은 승부를 걸었다.
“잠깐! 나는 아니오! 난 저 여자와 만난 적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소!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란 말이오!”
“그래서 가져온 게 있어요. 장관님, 이 문서를.”
아리스는 다시 또 하나의 문서를 하이듀크에게 넘겼다. 이미 아는 문서지만 하이듀크는 진지하게 쳐다보는 척하며 물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오켈라니아 남작과 미켈파 남작의 성명이 공동 서명된 계약서입니다.”
“그, 그건!”
미켈파 남작의 말을 가로막으며 아리스는 키드카에게 계약서를 넘겼다.
“이 계약서는 어떻게 된 건가요? 당신은 오켈라니아 남작하고만 계약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랬어요. 이 계약서에 기재된 미켈파 남작의 성명은 사실상 무효에 가까워요. 이건 후에 오켈라니아 남작과 미켈파 남작이 저와의 상의 없이 멋대로 적어 넣은 부분이거든요.
“효력을 발휘한 계약서에다 이름을 기재했다는 건가요?”
“맞아요. 그래서 계약서상으론 전 두 귀족과 계약한 셈이 되는 거죠.”
“미켈파 남작, 사실인가요?”
미켈파 남작의 안색은 이미 새하얀 백지장이었다.
“거, 거짓말이오! 저년이 거짓말을 한 것이오! 내, 내가 뒤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니, 그런 증거가 어딨소!”
“일단 미켈파 남작의 자필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죠. 평소 그가 기록해 두었던 장부입니다. 장관님, 대조를 부탁드립니다.”
이미 필적 검증도 끝나 있었다. 똑같은 글씨. 특히 휘갈겨 쓰는 필체를 따라하기도 힘들 만큼 동일했다.
“누가 봐도 같은 글씨로군. 증거를 인정합니다.”
미켈파 남작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아리스는 미켈파 남작성에서 찾아낸 증거들을 앞에 들이대고 그를 몰아붙였다. 도저히 도망칠 구석이 없다고 방청인 모두가 생각했을 때 두 남작의 고개가 푹 꺾였다.
“크윽…… 이, 이렇게 끝나다니…….”
“나, 나의 연구가…….”
눈물을 글썽이며 절망으로 돌입하는 두 남작의 초라한 모습 앞에서 아리스는 신중하게 선언했다.
“이로써 오켈라니아 남작과 미켈파 남작의 유죄를 입증하였습니다.”
아리스의 첫 재판이 그렇게 끝이 났다. 곧바로 두 번째 재판이 이어졌다. 미켈파 남작의 살해 주동죄와 시체 유기죄 기타 등등. 순찰대를 전멸시키고 그 죄를 태진과 아리스에게 덮어씌운 것에 관련된 죄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미켈파 남작은 줄줄이 나타나는 증거들에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이미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한 시간 후. 미켈파 남작은 오켈라니아 남작의 몇 배는 되는 형기를 부여받고 재판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피고인 출입구를 통해 나가는 그들의 등을 보며 아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잘난 귀족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군요.”
“죄는 무서운 법입니다.”
어쩌면 대륙 제일의 범법을 저지를지도 모를 태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아서는 절로 웃음이 터졌다. 그렇지만 진지한 재판실의 분위기 탓에 어떻게든 입을 막고 웃음을 참아냈다.
모든 재판이 끝난 후 국왕 팰리슈가 근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손을 모으더니 천천히 박수를 쳤다. 재판실의 모든 인원이 하나가 되어 박수를 쳤고, 그 박수의 대상은 아리스였다.
“순찰대장 아리스 뤼스필드. 참으로 훌륭한 재판이었소. 정보부 장관의 어린 딸이 어느새 이렇게도 의젓하게 자랐군. 참으로 자랑스럽겠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하.”
어느새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하이듀크가 고개를 숙였다. 하하호호 웃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참으로 가식적이라도 생각하면서 아리스는 한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태진이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해요. 저, 괜찮았나요?”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훌륭한 재판이었습니다. 자신을 가지십시오.”
그 말. 아리스가 그 어느 누구의 말보다 기다려온 말이었다. 아버지의 칭찬도, 국왕의 칭찬도, 지금 그녀에겐 무엄하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태진의 축하. 그 말의 무게는 대단했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 맥박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아리스는 급기야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왜 피했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눈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기분을 지금껏 느낀 적이 있었던가?
약간의 혼란이 찾아왔지만 상황은 그 혼란을 그녀가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국왕 내외까지 참관한 이 재판은 뒤처리도 곤란했다.
어쨌든 두 남작은 영지를 맡아 관리하던 자들이었기에 인근 영지에 대리 관리를 맡기는 절차도 있었고 후임 영주 선발을 행정대에 맡기는 절차도 필요했다.
아무튼 이래저래 뒤따르는 모든 처리를 떠맡고 나자 가슴 속의 작은 혼란은 이미 잊어버린 뒤였다.
며칠 뒤 태진을 다시 만난 것은 정보부 장관실에 보고서를 올리러 갔을 때였다. 요새 진행 중인 공간의 레펠 분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하이듀크를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된 태진은 그날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각종 보고서를 안고 들어온 아리스와 눈을 마주치자 태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열심히 일하시는군요. 순찰대장직은 할 만하십니까?”
태진이 차를 든 채 속편하게 말하자 아리스는 조금 핀잔을 주고 싶었다. 말이 순찰대장이지 순찰이라도 나가지 않는 이상 항상 행정 서류에 밀리기 일쑤니까.
태진 님이 해 보세요 하고 말하고 싶어도 그라면 가뿐하게 해치울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그냥 속으로만 곱씹으며 보고서를 하이듀크의 책상 위에 올려 놓을 뿐.
“일은 항상 하던 거니까요. 태진 님은 잘되어 가시나요?”
“레펠 해석은 순조롭습니다. 제 해석을 기초로 일단 연구원들이 해설서를 제작 중에 있습니다. 랑퀘지 단장에게는 마법과 차원 방정식 이론을 가르치고 배우고 있습니다. 뭐, 어느 쪽도 기한을 둬야 하는 일이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현신의 전사께서 마법 때문에 허덕이시는 건가요?”
“허덕이는 건 아닙니다. 이론은 꿰고 있지만 아무래도 제 세계에는 없던 힘이다 보니 마력핵 구성이 어렵습니다. 지금도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해 보고 있지만 잘 안되는군요.”
“하. 현신의 전사가 어려워하는 것도 있네요.”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리스는 마법을 할 줄 아십니까?”
“아뇨, 전혀요. 전 오로지 검술만 수련했는걸요.”
“뭐, 어차피 우리 집안은 마법에 소질이 없어.”
하이듀크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진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두 부녀를 번갈아 보았다.
“괜찮습니다. 마법은 제가 깨우칠 테니 검술로도 충분합니다.”
“예?”
아리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기도 전에 태진은 하이듀크에게 시선을 넘겼다.
“하이듀크, 순찰대장직에 꼭 아리스가 필요합니까?”
“……뭐?”
“아리스 말고 순찰대장직을 맡아 줄 사람이 없냐는 말입니다.”
아리스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분명히 떨어뜨렸을 테니까.
“태, 태진 님, 그게 무슨 말이세요? 제, 제가 순찰대장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가요?”
“흥분하실 것 없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있냐는 겁니다.”
“태진, 왜 그러는지 그 이유부터 들려주지 않겠어?”
하이듀크의 눈빛은 조용했다. 이럴 때만은 정보부 장관으로서의 위엄이 나오는 자다. 태진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하이듀크, 당신과 약속한 특사대에 아리스를 넣고 싶습니다. 부대장으로 말입니다.”
그 말을 아리스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사대. 특수수사대의 줄임말로, 부서 창설 여부는 이미 30년 전에 기본 뼈대가 잡혀 있었다. 이는 태진이 계획한 일로 왕국의 밤을 조절한다는 목표로 만들어진 부서였다.
뼈대를 잡은 상태에서 태진은 그 모든 일은 하이듀크에게 일임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 이후 하이듀크는 태진이 짜 놓은 계획에 따라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이 커지고 키드카의 입김이 왕국의 밤에 침투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특사대의 창설을 준비했다.
그 일이 태진이 다시 나타남에 따라 가속된 것이다.
“그렇기에 특사대는 결코 겉으로 드러날 일은 없는 부서입니다. 만약 아리스가 특사대의 부대장이 된다면 기본적으로 정보부 장관 비서실에 배속될 겁니다. 물론 실제적인 담당은 특사대입니다만.”
“그곳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이죠?”
“말 그대로 특수한 수사를 맡는 곳입니다. 순찰대나 기동대와도 성격이 좀 다릅니다.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도 간혹 있을 거고, 대다수가 범죄의 수위를 조절하는 일을 맡게 될 겁니다. 말 그대로 계획을 직접 이행하는 부서입니다.”
정보부 밑에는 세 개의 부서가 있다. 행정대. 순찰대. 기동대. 행정대는 정보부 전체의 인사나 회계 등을 관리하는 부서이며 순찰대는 한국으로 치자면 경찰청 같은 성격을 띠는 곳이다. 범죄 관련 수사와 처벌을 행한다. 기동대는 순찰대의 수사 과정에서 필요한 무력 사용을 담당한다.
그 부서 중에 비밀리에 새로이 특사대가 생기는 것이다.
“대장은 저, 강태진. 그리고 부대장은 아리스 뤼스필드, 당신이 맡아 주었으면 합니다.”
아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이듀크에게 올린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저…… 꼭 제가 필요한가요?”
“무슨 뜻입니까?”
“태진 님은 혼자서도 모든 일을 충분히 해치우실 것 같은걸요. 지금도 레펠 연구와 더불어 오켈라니아 노예시장 건까지 맡아 주시고, 마법까지 배우고 계시잖아요. 혼자서도 충분하실 것 같은데…….”
“저를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보지 말아 주십시오.”
아뇨, 대단하잖아요!?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랐지만 태진은 그 말을 내뱉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뒷세계에 관한 기록은 순찰대 권한이기에 아직 저는 그쪽에 대해 배워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위해 제 옆에 아리스가 있어 줬으면 합니다.”
“이봐, 태진. 단어 선택을 좀 신중하게 해 주겠어? 잘못 들으면 아직 시집도 못한 우리 딸내미 혼삿길 막을 말이야, 그건.”
하이듀크가 눈을 부라렸다. 태진은 슬쩍 그를 보고서 말을 바꿨다.
“아리스의 힘이 필요합니다.”
“제 힘이요?”
“당신의 순찰대장으로서의 능력은 잘 봤습니다. 역시 하이듀크의 딸. 제게 힘을 빌려 주신다면 감사히 생각하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조, 조금만 생각할 기회를 주세요…….”
아리스는 주저하듯 말했다. 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인사를 한 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가면서도 책상 위 보고서의 존재를 잊지 않고 하이듀크에게 알렸다.
“책임감이 강하군요.”
“당연하지. 누구 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딸에 대한 애정이 그득한 얼굴의 하이듀크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색하고 묻는다.
“특사대는 분명히 말하지만 위험할 거야. 그런 곳에 내 딸을 끌어들이려는 건가?”
“더한 적합자가 눈에 띄지 않는군요. 순찰대장으로서의 경험도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내 딸은 기사 작위도 받지 않았어. 수행기사의 신분에는 순찰대장 자리도 높아. 그런데 이번엔 현신의 전사 직속 부하가 되라는 말인가?”
“그렇다는 건 충분히 유능하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순찰대장 인사에 정보부 장관의 입김이 들어간 겁니까?”
“그런 건 절대 아냐. 순찰대장 자리는 딸내미가 스스로 얻어낸 자리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부대장으로서 탐이 나는군요.”
하이듀크는 미심쩍게 태진을 쳐다보았다.
“이봐, 태진. 설마…… 우리 딸내미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탐난다는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너의 농담은 농담 같지 않아서 분간하지 힘드니 하지 마. 설마, 여자를 바라보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야.”
아버지로서 복잡한 마음의 하이듀크였다.
뭐랄까, 현신의 전사 자체를 본다면 사윗감으로 더할 나위 없는 자다. 신분 따위는 막론하고서라도 그에게는 측정할 수 없는 능력이 있다. 이런 사윗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주관적으로 따지면, 태진은 자신의 친우였다.
자신의 친구가 딸내미와 결혼한다는 생각을 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그 심리를 모두 꿰뚫고 있던 태진은 미묘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요, 어떨 것 같습니까?”
“이봐…….”
“걱정 마십시오. 삼십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제 인생의 여자는 단 한 명뿐입니다.”
“투신의 전사 말인가?”
“미연이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하이듀크는 끄응 하는 미묘한 소리를 내며 의자에 몸을 맡겼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또 복잡한 마음이다.
아무래도 이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내미의 속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경쟁자가 너무 강하군, 이건.”
“네?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특사대의 창설을 팰에게 정식으로 보고할 셈이지?”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행정부에서 오켈라니아, 미켈파 영지의 후임 영주 선발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간다고 하니 거기에 끼워서 은근슬쩍 올릴 참입니다만, 맡아 주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 삼십 년 동안이나 기다려온 순간이니까. 인사 예정은 잡았나?”
“아리스의 수락만 받아 주면 완성입니다.”
“하긴, 어차피 둘뿐일 텐데 완성이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네 명입니다.”
“어라? ……아, 그들 말이군? 허락한 건가?”
“기쁘게 받아들여 주더군요. 다행입니다.”
하이듀크는 잠시 일어나서 책상 위의 흩어진 서류 중 하나를 가지고 왔다. 빈 여백이 더 많은 그곳에는 특사대에 대한 윤곽이 나타나 있었다.
펜으로 하이듀크는 인사 쪽 여백에 두 이름을 적었다.
키드카. 게르.
“확정된 멤버는 이 셋이군. 강태진, 키드카, 게르. 키드카와 게르는 기밀 정보 요원일 테니 결국 두 명뿐인 건가?”
“충분합니다, 그 정도로도.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태진 너는 대단해. 왕국의 밤을 점령한다면서 단 둘이 행하려고 하다니.”
“정보부에서도 여러 모로 힘을 빌릴 겁니다. 두 명이라고 해도 두 명이 아닙니다.”
워낙 태연하게 말하고 있으니 진짜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여겨진다. 미묘한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하이듀크는 말했다.
“일단 보고는 올리지.”
“잘 부탁합니다.”
“오후 예정은 있어?”
“연구단으로 돌아가 레펠 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랑퀘지 단장님에게서 마법을 사사 받고 전 이론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바쁘군. 어제 겨우 노예 시장건을 정리했을 텐데.”
“외롭지 않으려면 일에 파고드는 게 최고라더군요.”
“맞는 말이야.”
태진은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한동안 테이블에 앉은 채 특사대의 구성을 살펴보던 하이듀크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어라, 그럼…… 태진이 지금 외로움을 느낀다는 말인가?”
***
특사대 창설이 통과된 것은 이튿날이었다.
팰은 마지막으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관련 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어제 저녁이었고, 갑자기 쳐들어온 하이듀크가 다짜고짜 내민 보고서를 훑어보다가 기겁한 기억도 선명했다.
에스타냐와 상의 결과 일단 서류를 통과시키기로 했는데, 지금은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기 전에 최종적으로 서류를 검토한 상태였다.
쾅.
힘 있게 도장을 찍은 후, 팰리슈는 기다리고 있던 에스타냐에게 즉시 그 서류를 넘겼다. 특사대 창설 심의 발언권 통과. 에스타냐는 곱게 서류를 받아들고서 집무실을 나갔다. 곧바로 비서실로 향한 그녀는 그것을 정식 보고서 형태로 묶어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동시에 팰리슈도 모든 결재를 마쳤다.
“하우…… 국왕이 이런 종잇장이나 쳐다보는 직업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안 했을 텐데.”
“시키지도 않았을걸? 로츠왈드 고왕국의 이름이 없었으면 누가 너한테 왕 자리를 넘겨 주겠어?”
“아무리 그래도 남편한테 그 말은 좀 심한 거 아냐……?”
“본인도 속으로는 납득하고 있으면서 뭘 그래?”
팰리슈는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히죽거렸다.
“뭐…… 아무튼 준비는?”
“다 마쳤어. 회의실에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국왕 전하의 행차를.”
“그래, 그럼 가 볼까?”
팰리슈는 국왕으로서의 위엄을 몸에 두르고 집무실을 힘차게 나섰다.
노란 머리에 감은 눈. 친분이 있는 사람들 외에는 장님 행세를 하고 있는 태진이 하이듀크와 함께 나타나자 정상 회의에 모인 자들 사이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일었다. 둘은 그 소리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정해진 자리에 착석했다.
하이듀크와 태진이 목소리를 낮춰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보며 멀리 앉아 있던 라스터에게 주변인들의 질문이 쇄도했다.
“라스터 기사단장. 정보부 장관 옆에 있는 저 자는 누구요?”
“소문으로 들리던, 그 자인가?”
“그렇소.”
라스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피놀 행정부 장관은 벗겨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로군. 순찰대장과 같이 도주했다던 그 여행자란 말이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인가?”
“비록 앞은 보지 못하지만 다른 감각들이 비상하게 발달되어 있으니 전혀 무리는 없다고 하오. 자세한 건 본인에게 물으시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자네는 국왕 전하와 함께 저 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하니 인사라도 시켜 주지 않겠나?”
테스피놀 행정부장관의 경우에는 태진의 존재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하찮은 여행자 주제에 정상 회의에 참가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런 말을 하는 자는 흑안 기사단과 함께 왕국 무력의 두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기사단, 신웅(神雄) 기사단의 단장인 뮈인터트 맥스일이었다.
제국 귀족이었지만 독립전쟁에서 왕국 측에서 싸운 그는 귀족이라는 신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라스터 기사단장. 듣자하니 저 여행자는 현신의 전사와 이름이 동일하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그렇소. 강태진이라고, 어릴 적 별세한 부모가 지어 주었다고 하더군.”
“하! 그 이름은 우리 귀족들조차 성스러워 차마 붙이지 않는 이름이란 말이오. 그런데 건방지게 그 이름을 쓴다는 것이오?”
라스터는 잠시 진실을 이들에게 알려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리가 자리였다.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뒤로 물린 후 입을 열었다.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이오. 타인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훗, 아무튼 난 저자가 맘에 안 드오. 저런 자가 어떻게 왕궁에 있는 것이며 게다가 국왕 전하의 마음에까지 들었는지 영문을 모르겠소.”
라스터는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이곳에 모여 있는 자들 중 절반은 뮈인터트 기사단장과 똑같은 생각일 것이다. 정상 회의란 말 그대로 왕국의 정상에 있는 자들의 회의이다.
각 부의 장관. 그리고 기사단의 단장. 필요할 땐 영지의 영주들까지 모여서 열리는, 왕국 최고의 회의인 것이다. 그곳에 직위도 신분도 없는 자가 나타나 앉아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게 뻔하다.
하지만 이들 중 진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지금 그들이 비웃고 있는 하찮은 여행자가 로츠왈드 왕국의 자랑스러운 건국 영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얼굴은 어떻게 변할까.
그 모습을 상상하다 라스터는 숨죽여 웃었다. 그런 그의 행동은 곁눈으로 주시하고 있던 하이듀크가 인상을 묘하게 찌푸리자, 라스터는 금방 정색하여 눈을 휙 돌렸다. 그리고 기분을 자제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미 모든 인원이 정상 회의를 위해 모여 있었다. 이제 도착해야 할 인물은 국왕 팰리슈였는데 도착하기 전에 국왕 비서실의 인원들이 신속하게 필요한 서류들을 그들 앞에 놓고 나갔다.
일단 아무 영문도 모르고 참석한 이들은 먼저 그 서류를 훑어보기 위해 집중했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것은……?”
“……대체 무슨 말이오?”
이미 계획을 알고 있는 셋은 제외하고, 모두 다 경악과 기겁을 감추지 못했다.
태진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팰리슈에 의해 모두 설명될 것이다. 지금 스스로 나설 필요는 없었다.
전원이 서류를 탐독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팰리슈는 나타났다. 에스타냐와 같이 회의실에 나타난 그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회의석 상석에 자리했다. 그 옆에 에스타냐가 서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자, 모두들 좋은 아침이오.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들 앞에 놓인 그 안건 때문이라오.”
“전하, 질문해도 되겠사옵니까?”
가장 먼저 발언을 요청한 것은 테스피놀 행정부장관이었다. 조금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팰리슈는 천천히 그쪽을 쳐다보았다.
“얘기하시오.”
“……이 계획이 사실이옵니까?”
“물론 사실이오. 알고 있는 자는 극히 소수. 지난 삼십 년간 현신의 전사가 세워 놓은 계획 아래 극비로 진행되고 있던 일이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정상 회의의 협조를 위해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이게 한 것이오.”
다시 모두가 수군거렸다. 팰리슈는 위치상 거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태진의 시선을 살피려 했지만 눈을 감고 있어 실패했다. 애초에 눈을 뜨고 있어도 속을 절대 내보이지 않는 친구이기에 그 심중을 읽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헛기침을 한 후 팰리슈는 다시 말했다.
“자료를 읽었겠지만 다시 설명 드리겠소. 오늘의 안건은 특사대 창설이오. 특사대란 현신의 전사가 삼십 년 전에 세운 ‘왕국 범죄 조절 계획’을 실제로 이해할 부서이며, 정보부 소속의 비밀 부서가 될 것이오. 그 존재를 아는 자는 여기 있는 정상 회의 참석자들만 될 것이고 정보 열람은 특사대장과 부대장, 그리고 정보부 장관과 국왕인 나에게만 허락되게 할 것이오. 이건 어디까지나 일급 기밀에 해당하는 계획이라, 여러분들의 이해를 구하오.”
“그건 잘 알겠습니다, 전하. 하지만 소인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뮈인터트 기사단장?”
“특사대를 이끌어갈 대장이라는 자가 저자입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눈을 감은 채 경청하는 척하는 태진이 있었다. 분위기는 느꼈다는 듯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고개를 돌리는 그를 보며 팰리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인사하시오. 강태진이라고 하오.”
태진은 유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보고 있는 눈동자들을 감각으로만 훑는다.
“처음 뵙겠습니다. 현신의 전사와 이름이 같은 강태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에게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감은 눈이었다. 맹인이라는 말은 이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국왕과 친분도 있다. 그 친분으로 특사대장의 자리를 꿰어 찬 거라고 뮈인터트 기사단장은 생각하고 있었다.
“직접 묻겠소. 본인이 특사대장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시오?”
“더 어울리는 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러운 공용어에서 배어 나오는 어투는 자신감도 뭣도 아닌, 정말로 담담한 그 자체였다.
뮈인터트의 얼굴이 약간 경직되었다.
“그 말은 무슨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소?”
“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해 주십시오. 저 이상으로 어울리는 자는 없습니다.”
그 말은 사실 그대로였다. 계획은 세운 자는 태진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계획을 이행하는 데 더없이 어울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는 자는 팰리슈를 포함한 일부였고, 회의실에는 그 일부를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당신이 현신의 전사와 동일한 이름이라는 건 알겠소. 그렇다고 해도 능력도 같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소? 특사대가 창설되면, 계획대로라면 왕국의 범죄와 정면으로 싸워 해치우는 곳이 될 것이오. 그 부서를 맡을 수 있겠냐는 말이오.”
“자료를 똑바로 읽어 주십시오, 뮈인터트 기사단장님. 특사대는 순찰대가 아닙니다.”
뮈인터트는 분명히 눈동자가 없는데도 강렬한 시선이 내리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사대는 범죄를 없애는 곳이 아닙니다. 필요악 수준에서 범죄를 조절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인간이 사는 한 범죄는 어느 곳에서든 어떻게든 발생되기 마련입니다. 달리 설명하지 않아도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을 터. 그렇기에 현신의 전사는 범죄를 없애기보다 그 정도를 조절하려고 한 겁니다. 지금 이 담론만을 보더라도 여러분 중 그 누구보다 제가 현신의 전사의 계획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회의실의 그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태진은 팰리슈의 위치를 어렵지 않게 찾아내 바라보는 자세를 취했다.
“국왕 전하, 전하께서는 제가 특사대장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울린다고 여겼기에 통과시킨 것이오. 여러분에게 말해 두겠소. 난 이 계획에 찬성하고 있소. 하지만 내 찬성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정상 회의에 안건으로 부친 것이오. 여러분들의 신중한 결정을 바라오.”
그 후로 여러 질문들이 오고 갔다. 팰리슈는 적당한 대답을 돌려주거나 태진이 직접 대답할 부분에 대해서는 발언권을 양보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시간이 지나나 사실상 정상 회의는 태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발 뒤로 물러선 곳에서 팰리슈는 슬쩍 에스타냐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삼십 년 전에도 이랬었지?”
“그땐 전쟁터였지만, 맞아.”
태진의 말에는 힘이 있다. 교묘하게 사람을 끌어 모아 집중하게 만드는 그런 힘이. 이런 회의가 되면 그 능력은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날 때까지 회의는 이어졌다. 열을 띤 회의의 중간에서 태진은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며, 상세한 설명까지 곁들이며 희외를 이끌었다. 그리고 두 시간여가 다되어 갔을 즈음,
“자…… 이제 마무리를 지어 보겠소.오늘의 안건, 특사대 창설에 찬성하는 인원은 손을 들어주시오.”
참석자들이 하나 둘 손을 올렸다. 태진은 여유 있게 앉은 채 그들의 손이 모두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팰리슈가 근엄하게 선언했다.
“좋소. 과반수를 넘은 찬성으로, 특사대장 강태진을 주축으로 하는 신부서, 특사대를 정식으로 창설하기로 하겠소.”
태진은 그렇게 정보부 소속 특사대의 대장 자리에 비밀리에 올랐다.
문을 나서는 귀족들을 모두 배웅한 후 태진은 남아 있던 팰리슈에게로 돌아섰다. 감각으로 주변을 더듬은 후 천천히 눈을 뜬다.
“감사합니다, 팰.”
“감사는 무슨. 이건 전부 태진의 능력 때문이지. 난 자리를 마련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하긴 그렇긴 해.”
옆에서 거드는 에스타냐의 한마디를 흘려들으며 팰리슈는 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의 의미, 태진은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붙잡았다.
“왕국의 밤을 잘 부탁해.”
“걱정은 불필요합니다.”
그들을 뒤로 하고 태진은 하이듀크와 함께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다시 눈을 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지는 두 사람을 뒤에서 보는 자가 있었으니,
“흥…… 맘에 안 드는 놈이로군. 강태진이라, 어떤 놈이지?”
뮈인터트 기사단장은 그 뒷모습을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이내 발길을 돌렸다. 빠르게 어딘가로 향하는 그도 곧 회의실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조차 태진은 모두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