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32)

열둘. 거짓말쟁이 같으니!

이황자궁에서 반대쪽. 황궁을 중심으로 정반대편에는 일황자 레키엔 휴 아키레마의 궁이 있었다. 해가 중천으로 떠올랐을 즈음에 시종관은 조심스레 레키엔의 방을 두드렸다.

“저하, 기침하셨사옵니까?”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으신 건가. 어젯밤 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셨으니 쉽게 일어날 리가 없다. 시종관은 끈질기게 기다리다 다시 한 번 재차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때 문 안에서 타다닥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었다.

레키엔의 방 정리를 맡고 있는 시녀 중 하나였다. 눈이 마주친 후 시종관은 그녀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흘러내리는 옷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가슴 부근에서 부여잡고 있다. 머리카락조차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한 가득 고여 있었다.

“시, 시종관님……!”

시종관은 모든 것을 눈치 챘다. 한숨을 짓기도 전에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냈다.

“옆방이 비었을 거다, 옷을 정리하고 가도록. 그리고 이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알겠느냐?”

“예, 예. 아, 알겠습니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시녀의 뒤를 훑은 다음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푹신한 쿠션에 기댄 채 도전적인 눈빛으로 시종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년한테 충분한 돈을 쥐어 줘. 어젯밤에는 꽤 즐거웠다.”

“저하, 황제 폐하께서 아신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옵니다. 제발, 소인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 주시옵소서.”

“흥! 난 아버님의 첩이 몇 명인지 스무 명이 넘어가면서 세는 걸 포기했다. 그게 십 년 전이야.”

거의 매일 아침 해 대는 언쟁이었다. 직위에서 이미 이길 수 없는 시종관은 설득을 포기하고 아뢰었다.

“황자 저하, 텐시언 비서관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놈이 기다리면 내가 일일이 가야 하나?”

시종관이 미처 대답을 못한 사이 황자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오후의 햇살이 비추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몸을 풀듯 팔을 움직이며 시종관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로 왔지?”

“이황자 저하에 대한 일이라고 하옵니다.”

“그 병약한 자식에 대해서 나한테 들려줄 일 같은 게 있을까?”

비웃음을 띄고 돌어섰다.

“일단은 들어보지. 옷을 가져와라, 비서관에게도 가서 알려. 곧 있으면 간다고.”

“예. 알겠습니다, 저하.”

일황자 레키엔의 하루는 대개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시종들이 옷을 입히고 세면을 하는 사이 손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의자에 늘어지듯 앉아서 시녀들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낄낄댄다든가, 가슴을 만지며 음탕한 말을 늘어 놓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짓거리를 하는 것이 레키엔이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시종관은 인내심 있게 기다린 후 시종들이 퇴장함과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가시지요, 저하.”

“흠…… 방금 그, 두 갈래로 머리 땋은 년은 누구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별일 아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물어본 것뿐. 가 보지.”

말끔해진 얼굴의 레키엔은 시종관의 뒤를 따라 비서관이 기다리고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벌써 몇 시간째 레키엔을 기다리고 있던 비서관이 초조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레키엔이 도착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군인 같은 경례를 붙인다.

“무슨 일이냐. 이런 아침부터. 난 좀 더 그 야들야들한 속살을 느끼고 싶었다고.”

“……죄송합니다, 저하. 하지만 알려 드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을 텐데. 나한테 꼬치꼬치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들어주십시오, 저하. 일황자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채 레키엔은 눈썹을 씰룩였다.

“워낙에 그쪽에서 신중하게 정보를 다루고 있는지라 아직 정확한 형태는 붙잡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힘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새로운 힘?”

“예. 이 며칠 사이에 이황자파의 상부에서 자신들만의 세력이 형성된 것 같다고, 정보원이 알려 왔습니다.”

“자신들만의 세력이라니. 정확하게 말해.”

“이황자에게 힘을 빌려 주는 자가 새로 나타났단 말입니다.”

레키엔은 이제 겨우 흥미가 돈다는 듯 몸을 세웠다.

“북부 주둔군에서 새로운 인사가 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네가 말하는 건 그 일을 말하는 거냐?”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있다고도 할 수 없다는 거냐? 텐시언, 나를 짜증나게 하지 마라. 네가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은 한 가지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저하. 그래서 저하께 조사 허락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심도 있는 정보를 캐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딴 거 일일이 허락받지 말고 알아서 좀 하면 안 되나? 귀찮아 죽겠단 말이다. 알아서 훌륭한 정보를 물어와.”

“그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밤까지 시간을 주도록 하지. 그 병약한 놈의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서관은 가지고 온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곧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그가 읊어 주는 텔리오트의 일정을 듣고 있던 레키엔이 문득 손가락을 들었다.

“잠깐, 방금 그곳이 어디지?”

“제국 마법사단입니다만?”

“그 자식, 거기서 병 나아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거길 간대?”

“마법사단 상부에는 이황자파에 소속된 자들이 꽤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가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들은 따로 호출하면 그만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히 나흘 정도 전에도 간 걸로 알고 있는데, 오늘 또 간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듣고 보니…….”

“수행인은 누구지?”

“얼마 전 수도 주둔군으로 전입한 이시브 소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부 주둔군에서 병약한 자식의 측근으로 만들려고 보냈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군. 자리를 잘 꿰어 찼어. 그 외에는?”

“정확한 인원은 미정입니다.”

“거기를 파.”

레키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텐시언 비서관과 시종관은 서로 잠깐 눈을 마주쳤다. 둘 다 이 순간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일황자는 황제와 굉장히 기질이 닮았다. 여자를 밝히고 음주가무를 좋아한다. 호색한에다 어찌 보면 황제의 젊은 시절 때보다 더욱 놀아나는, 한량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근본은 황자이며 황위 계승 다툼에서 우위에 서 있는 자라는 점이 이런 면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뭔가 있다. 그 병약한 자식이 무슨 꿍꿍이인지 제국 마법사단을 두들겨 패서 알아 와. 알겠나?”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비서관은 꼿꼿한 자세로 대답했다.

어느 곳을 가나 호위병들이 먼저 나서는 레키엔과 달리 텔리오트는 자신이 먼저 앞섰다. 그 뒤를 따라 새로이 측근이 된 이시브가 뒤따르고, 그 뒤에 텔리오트와 같은 가면을 나란히 쓴 두 명이 걸어 나갔다. 마지막에 적은 수의 호위병들이 후미를 지키고 있었다.

제국 마법사단에 오늘 이황자가 방문한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졌다.

황위 계승을 다투는 황자의 등장인 만큼 올 때마다 부산을 떠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지만 레키엔과 달리 텔리오트는 단출하다고까지 일컬어지는 형식을 고집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황자의 방문에도 마법사단 측도 더 이상 정도 이상의 난리를 부리진 않았다.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텔리오트는 곧바로 원하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는 제국 마법사단의 단장인 모네이 에스티른이었다.

에스티른 단장은 이황자파에 소속된 자로서 텔리오트가 병약한 시절부터 그를 고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자였다.

호위병을 모두 물린 후 이시브와 두 명의 가면만을 집무실에 들인 텔리오트는 먼저 안부 인사부터 꺼냈다.

“그동안 안녕했어, 에스티른 단장?”

“황자 저하의 심려 덕분에 언제나 건강합니다. 황자 저하께서도 안녕하셨사옵니까?”

“언제나 그대에겐 고마워하고 있어. 내 병을 낫게 해 준 것이 바로 그대니까. 내가 한번 자리를 마련한다는 게 늦어져서 미안해.”

“아닙니다, 황자 저하. 저는 황자 저하의 심복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심려치 말아 주시옵소서.”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 같은 태도의 에스티른 단장을 보며 두 개의 가면 중 하나가 감탄을 내뱉었다. 잠깐 그쪽을 쳐다보던 에스티른 단장이 말했다.

“저하, 이들은 누구이옵니까?”

“아. 안 그래도 인사시키려고 생각 중이었어. 이쪽은 이시브 소령. 북부 주둔군 군단장이 내게 보내온 자야. 아직 계급은 소령이지만 상당히 유능한 자지. 그리고 이 둘은, 흠…… 어떻게 말해야 하려나.”

“황자 저하께서 나흘 전에 말씀하신 것과 관련된 자들입니까?”

“맞아, 정확하게는 이들 중 한 명 때문이지.”

텔리오트는 둘을 돌아보았다.

“가면과 모자를 벗어.”

“어라, 테리. 그래도 돼?”

그 목소리에 에스티른 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황자에게 쓸 법한 말투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다 그런 여자의 목소리에 이어 들어온 남자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벗으라고 얘기한다면 그래도 된다는 의미일 거다.”

“뭐, 그건 그렇겠지. 알았어, 여긴 온 사방이 스멀스멀한 마력이라 답답했는데 잘됐다.”

태연하게 가면과 모자를 벗은 그 모습에 이번엔 에스티른 단장의 입이 벌어졌다.

“저, 저하?”

“놀라지 말고 들어줘. 이쪽 검은 머리 여성분은 신미연. 그리고 이쪽 은색 머리의 남성분은 미소라. 어디서 왔는지는 생김새만 봐도 알 수 있을 거야.”

물론 알 수 있었다. 대륙에서 흑발과 흑안의 전설을 모르는 자는 없다. 게다가 은발과 은안의 민족도. 둘 다 제국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쪽의 나라, 그리고 미소 족?”

“맞아. 다들 인사해, 이분은 제국 마법사단의 에스티른 단장. 내 병을 고쳐 주고, 그리고 미연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분이야.”

미연은 씩씩하게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 그리고, 잘 부탁해!”

뭐가 안녕이고 뭐가 잘 부탁하는 건지도 모르는 정신으로 에스티른 단장은 엉겁결에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서로 손을 붙잡는 이유도 모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손을 빼냈다.

설명을 요청하는 그의 눈길을 보며 텔리오트는 쓴웃음 비슷한 표정을 만들었다.

“내가 나흘 전에 말했지? 그대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다고. 이게 그 때문이야. 그대는 로츠왈드 독립 전쟁에서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지?”

“소상히…… 는 아닙니다. 분명 전투 부대 소속으로 출전은 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기에…… 신의 전사들의 모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역사가 기록한 모습은 알 거야. 신미연, 이 여성은 신의 전사들과 같은 동쪽의 나라에서 왔어.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해 싸워 주기로 했지.”

“시, 신의 전사가 말입니까!?”

“동일 인물은 아냐. 신의 전사의 출현은 삼십 년 전이었어. 이런 젊은 여성이 그 자와 똑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

“동일 인물이라니까?”

뒤에서 미연이 끼어들었지만 텔리오트는 웃는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마찬가지로 미연이 미소라에게 우는 소리를 해 대도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싸워 주는 대신 그녀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거든. 찾는 사람이 있다더군.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을 하러 왔어.”

“제게……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쩌면 이 바운스에서 내 병을 고쳐 준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야. 미연은 자신과 같이 이 세계로 왔을지도 모를 자를 찾고 있어.”

“왔을지도 모르는…… 이라 하시면?”

“진위는 정확하게 몰라. 오지 않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미연은 바운스에 같이 왔다고 하는군.”

“그렇지만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대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야.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어?”

에스티른 단장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이 흘러갔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텔리오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저하.”

“역시. 고마워, 내 부탁을 받아 주겠어?”

“황자 저하께서 하시는 부탁입니다.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직한 에스티른 단장의 대답에 텔리오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미연이 미소라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된 거야?”라고 낮게 물었다.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소라.

그 뒤로 미연이 뭐라고 낮게 주절대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텔리오트는 말했다.

“그대만 믿고 있겠어. 알겠지만 이 일은 절대 기밀이야. 오늘 내가 누구를 데리고 왔는지, 아니 오늘 내가 여길 방문했단 것도 없던 일이야. 알고 있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텔리오트는 그리 개운치는 않았지만 일단 에스티른 단장의 대답을 받아들였다. 현재 통합 사령군은 두 쪽으로 나뉜 상태였다.

상위 간부들이 제각각 일황자파, 이황자파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같은 본부 안이라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기묘한 대치가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일황자파의 세력이 크지만 이황자파의 약진도 거세 앞으로의 승부가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짐작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 마법사단의 단장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은 텔리오트에게 든든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고 신중한 처리가 우선되는 상황인 것이다.

텔리오트는 그 후 약간의 여담을 나눈 후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는 갈게. 잘 부탁해.”

“제가 배웅을 나가야 할 텐데 거절하시겠지요?”

“나오지 마. 그대도 바쁜 몸일 테니 그냥 일 봐.”

“그럼…… 살펴 가십시오, 저하.”

일단 배웅하기 위해 에스티른 단장은 문 앞까지 같이 나왔다. 방을 나오기 전 텔리오트는 이시브에게 눈짓을 줘 그가 초대장을 꺼내게 했다.

“이것은……?”

“사흘 뒤에 있을 기념식의 정식 초대장이야. 잊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언제 초대장이 올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황자 저하께서 직접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기뻐해 주니 다행이군. 꼭 참석하도록 해. 그날, 중요한 발표도 있을 예정이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만드는 에스티른 단장에게 작은 힌트도 주지 않고, 텔리오트는 웃으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에스티른 단장은 초대장과 기묘한 동행이 남긴 여운으로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

황제 주최 기념식.

그것이 무엇을 기념하는가 하면, 이황자의 쾌차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선천적인 중병을 앓았다.

그런 그가 한 달여, 아니 이젠 두 달 전에 급격하게 병을 떨쳤다.

레키엔에 대한 반발심으로 텔리오트를 따르고 있던 제국 마법사단 에스티른 단장이 그를 마법으로 치료해 보겠다며 데리고 갔었고, 일주일쯤 시간이 지난 후에 텔리오트가 중병을 떨쳐 내고 일어선 것이다.

병을 치료한 장본인인 에스티른 단장은 그저 마법이라고 할 뿐 치료법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나은 것은 나은 것.

황제는 30년 만에 되찾은 아들을 위하여 오늘 이렇게 거대한 기념식을 열었다. 텔리오트가 황위 계승에 뛰어든 지 한 달 보름만의 일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할아버지가 가족 사랑은 제법 지극하다는 건가?”

딱히 빈정거리는 투는 아니었지만 이시브는 미연에게 주의를 주었다.

“미연 님. 그러한 말은 좋지 않습니다.”

“됐어, 이시브 소령. 아버지가 제국 밖에서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미연이 하는 말은 일리 있어. 하지만 완벽한 진실은 아냐.”

마차의 흔들림을 즐기며 텔리오트는 말했다.

“아버지, 현 황제 디요네츠 핀 아키레마는 분명 철혈의 황제라고도 불리던 분이야. 삼십 년 전에는 판샤란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의 진출도 꾀하기도 했었고 로츠왈드 지역에서는 살아 있는 원수로 불리기도 했었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한 가장의 입장에서는 제법 모범적이라고도 할 수 있어.”

“삼십 년 동안 없는 아들로 쳤다면서? 네가 약해 빠진데다가 병으로 빌빌대서.”

“죽이진 않았잖아. 제국의 전통대로면 분명 나 같은 자식은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했을 거야. 그렇지만 아버진 회복의 여지를 남겨 뒀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거야.”

말투 자체는 감사라고 하기 모호했다. 워낙에 담담했으니까. 그래서 미연은 가면을 갸우뚱거리며 똑같은 가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가면 아래가 무슨 표정인지 심히 알고 싶은데?”

“무슨 꿍꿍이라도 피우는 것 같아?”

그가 웃음 짓는 사이 창밖을 무심히 보고 있던 미소라가 입을 열었다.

“황궁이다.”

황제가 기거하면서 아키레마 제국의 최중심부인 황궁. 황자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의 거대한 건물을 보며 미연은 아주 솔직하게 감탄했다.

“우와…… 멋지다…….”

“아마 이런 궁은 바운스를 모두 뒤져도 몇 개 못 찾아낼 거야.”

“태진이가 보면 정말 좋아하겠다.”

“현신의 전사가 이런 건물을 좋아하나?”

“독일의 고성을 좋아하거든. 신혼여행은 그쪽으로 가기로 했어.”

대뜸 던지는 그 단어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독일이나 신혼여행이나, 아무튼 이 바운스에는 없는 단어다.

그렇지만 미연은 설명해 줄 의향이 없는지 미소라를 밀어내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열심히 황궁을 구경하고 있었다. 화려한 황궁은 마차가 다가감에 따라 점점 가까워졌다.

백색으로 치장된 황궁 앞에는 근엄한 경비병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통과한 후 연회장 방향으로 곧바로 돌아 들어가자, 어느새 악단의 음악이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황자 저하 납시오!”

연회장 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다. 근위병의 외침에 그들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

텔리오트가 가장 먼저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 왼쪽으로 이시브가, 그리고 맨 뒤에서 둘을 호위하듯 미연과 미소라가 나타났다.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텔리오트는 그들의 환호성에 손을 들어 응답했다.

초대를 받고 온 귀족들 사이를 걸어 연회장의 끝까지 걸어간다. 입구의 반대편, 가장 높게 만들어진 자리가 있었다. 총 네 개. 황제 부부와 두 황자를 위한 자리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텔리오트는 좌측에 앉았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모양이군.”

“황자 저하께서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원래 연회의 주역은 정시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는 것이 관례이옵니다.”

“주인공은 늦게 나타난다는 거지?”

텔리오트의 뒤편에 선 미연이 끼어들었다. 텔리오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약속의 기본은 시간 아닌가?”

“그렇지만 황자 저하의 체통도 있으니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는 건가. 다음부터는 고려하도록 하지, 수행 비서.”

“황송하옵니다.“

이시브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텔리오트의 수행 비서가 되었다. 럭커 시종장에게서 비서관의 역할을 인계받은 것은 어제의 일로, 오늘이 사실상 비서로서의 첫 임무가 되는 셈이었다.

그도 나름 긴장한 듯 조금 굳은 얼굴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연회장의 상석에 올라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긴장하지 마, 이시브.”

뒤에서 미연이 툭 내뱉었다. 잠시 그 가면을 돌아본 이시브는 부드럽게 얼굴을 풀었다.

“감사합니다, 미연 님.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황제가 이황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자리니까. 이시브는 가볍게 맘을 다잡았다.

그때 다시 한 번 근위병의 외침이 연회장을 흔들었다.

“일황자 저하 납시오!”

이시브는 재차 긴장하고 말았다.

입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반으로 쫙 갈라졌다. 그곳에서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나타났다. 황자다운 당당한 걸음걸이와 태도에 이번에는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귀족들이 잠시 머뭇거린 후 박수를 친 것이다.

그 약간의 틈을 텔리오트는 놓치지 않았다.

“레키엔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것 같군.”

“일황자 저하는 분명 훌륭한 황제의 재목이십니다만, 그 기질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따르는 이들도 많지. 이중 반 이상이 일황자파일 테니까.”

“……황자 저하를 따르는 이들도 많습니다.”

텔리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상석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레키엔을 직시했다.

먼 곳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그가 상석에 올라서자 텔리오트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흥! 누가 누구에게 건강을 묻는 거냐. 너야말로 그 병이 재발하지는 않았나?”

“에스티른 단장의 처치가 훌륭해 아무래도 재발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언제까지 갈지 한번 지켜보겠다.”

“영광입니다.”

맨얼굴이었다면 분명히 빙긋 웃음을 띠었을 말투로 레키엔의 시비를 받아친다. 레키엔은 재수 없다는 뜻이 명백한 눈빛으로 텔리오트를 한껏 노려보고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잘하셨습니다, 황자 저하.”

“이 정도는 해 줘야 예의 아니겠어? 어차피 앞으로 싸워야 하는 자인데.”

미연은 미소라의 어깨를 툭 쳤다.

“같은 형젠데 왜 이래?”

“황위 계승을 두고 서로 겨루는 관계이다. 사이좋은 편이 더 이상하지 않나.”

“사이좋게 겨루는 건 안 되나?”

“꿈이 크군.”

미소라는 얘기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가면을 쓰나 안 쓰나 무뚝뚝한 태도였지만 미연은 딱히 개의치 않고서 혼자서 뭐라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것을 미소라는 무시하지 않고 일일이 받아친다. 퍽이나 긴장감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을 반대쪽 우측 좌석에서 살피고 있던 레키엔이 손가락을 까딱여 텐시언 비서관을 불렀다.

“저 자들인가?”

“맞는 것 같사옵니다, 저하. 가면과 모자로 모습을 가린 두 명의 검사. 정보대로입니다.”

“저것들이 병약한 자식이 손에 넣은 새로운 인원이란 말이지…….”

레키엔은 힐끔 그쪽을 보고 나서 미묘하게 입술을 꼬아 올렸다.

“시험을 해 봐야겠군. 어느 정도 실력인지.”

“예?”

“실력이 좀 되는 놈들을 골라서 보내. 어떤 자들인지 시험해 보겠다.”

“저, 저하. 허나 그것은…….”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 넌 지시하는 사항에 따르기만 하면 돼.”

텐시언 비서관은 압도적인 그 어조에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일처리를 위해 잠시 자리를 이탈하는 그를 살피지도 않고 레키엔은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어디…… 얼마나 재미있게 만들어 주나 기대해 보지.”

황제 부부의 도착은 그 직후였다. 앞서 도착한 황자들이 받은 갈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차라리 웅장하다고 표현해야 할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노쇠한 철혈의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젊은 시절의 강맹한 기운을 아직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 황제와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구의 왕비의 등장에 모든 귀족들이 소리 높여 그 이름을 찬송했다.

“디요네츠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그 모습을 보며 미연은 ‘북한 같아.’라고, 편견적인 감상을 곱씹고 있었다. 황제 부부가 상석으로 올라오자 황자들은 의자에서 일어나 기립했다가 황제 부부가 착석한 이후에 조심히 의자에 앉는다.

기념식은 곧바로 진행되었다. 시종들이 바쁘게 술잔을 나누어 준 후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짐에겐 두 아들이 있소. 하지만 한 달 전까지 내겐 하나의 아들뿐이었소. 다른 또 한 명의 아들은 내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소. 그렇지만 이젠 아니오. 존재하지 않았던 아들이 다시 본래의 아들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말이오.”

술잔을 들어 올리며 황제는 위엄 있게 소리쳤다.

“오늘은 기쁜 날이오. 내 둘째 아들, 텔리오트 지 아키레마가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온 날이오! 모두들, 오늘의 연회를 즐기시오!”

“건배―!”

연회장의 모든 인원이 잔을 들어 텔리오트의 귀환을 축하했다.

황제의 개회사 이후 기념식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상석에서 내려온 황자들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각종 질문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인원은 차이가 있어 텔리오트보다 레키엔 쪽의 인원이 훨씬 많았다.

“두 파의 차이를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네.”

“이황자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한 달을 넘었다. 그 사이에 이 정도라면 제법 괜찮은 것 아닌가.”

“뭐…… 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이시브는 어때?”

“저도 미소라 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그렇지만 메워야 할 차이가 크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군요. 바로 그 점이 지금부터 저희들이 해 나가야 할 일일 겁니다.”

“저 숫자 차이를 메우라고? 어떻게?”

“텔리오트 저하의 인지도를 높이는 겁니다. 저 숫자 차이는 황위 계승에서 누가 앞서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차기 황제의 가능성이 텔리오트 저하보다 레키엔 저하가 더 높다는 의미입니다. 숫자 차이란 그 가능성의 차이. 텔리오트 저하의 능력을 보여 준다면 가능성은 더욱 올라갈 것입니다.”

“그 능력이 곧 우리의 노력이라는 거지?”

이시브 소령의 이야기를 이해한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미연의 결론은 옳았다. 이시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텔리오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직도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기념식이 진행되고 분위기가 한껏 물올랐을 때 황제가 텔리오트의 옆으로 왔다. 텔리오트는 주변의 귀족들이 물러나는 것을 눈치 채고 뒤로 돌아섰다.

“몸은 괜찮으냐.”

“예, 폐하. 심려해 주신 덕분에 지금은 아무 이상도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짐은 이황자가 이렇게 회복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황제란 자리는 누구에게든 쉬이 마음을 내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이 말도 황제의 본심인지는 따지기 힘들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텔리오트는 그래서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오늘 이황자가 준비한 것이 있다고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예,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소개하고픈 이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제 옆에서 저를 도와줄 이들입니다.”

텔리오트는 손을 뻗었다. 그 끝에 서 있던 자들은 미연과 미소라. 텔리오트의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이시브가 벽 쪽에 세워 놓은 그들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잠시 연회장이 숨죽이듯 고요해졌다.

시선을 느끼고 그들은 텔리오트의 옆으로 걸어왔다. 이렇게 세 명이 모이면 모두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제법 수상한 모습이 되지만, 황제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미연과 미소라를 관찰했다.

이윽고 입을 연다.

“강인한 기운을 가진 검사들이군…….”

“그렇습니다, 폐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들이 저의 직속 부대, 백두 부대의 대장과 부대장입니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지나갔다.

“이황자의 호위 부대인가? 백두부대라는 건 무엇을 뜻하는 게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이름이야.”

대답한 것은 미연이었다. 조금 높은 소리로 그녀는 무례하기 그지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 주변으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황제는 천천히 그녀의 가면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름의 산은 들어본 적이 없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신미연. 낯이 익은 이름이지?”

황제의 눈이 크게 떠졌다. 텔리오트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등장 순서를 알아챘다.

“우연히 같은 이름의, 동쪽의 나라에서 온 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백두 부대 대장으로서 저의 힘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폐하.”

그의 설명이었지만 황제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빛으로, 결코 심중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로 텔리오트와 미연을 번갈아 살폈다. 그리고,

“이 자의 이름은?”

“미소라. 판게리츠 산맥에서 온 미소 족입니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은 황제의 등장으로 귀족들과의 거리가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밝힐 때는 낮은 목소리였기에 귀족들은 미연과 미소라의 이름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이윽고 황제가 말했다.

“좋다…… 백두부대의 대장과 부대장이라고 했나. 앞으로 이황자를 잘 보필하도록.”

“응.”

미연은 반말에 미소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기가 막힐 노릇의 태도에 귀족들 사이에서 다시 웅성거림이 나타났다. 분명히 황제를 만나면 경어를 사용해 달라고 미연에게 부탁한 이시브는 뜻대로 되지 않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귀족들을 수습하려면 얼마나 수고를 들여야 할까.

그런 이시브 소령의 걱정은 생각도 않고 미연은 태연했다.

“맡겨만 두라고. 내가 붙었으니까 이제 얘는 걱정 없어!”

후에 이 발언은 두고두고 역사 속에 흐르게 된다.

그 황당한 장면을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레키엔에게, 잠시 자리를 비웠던 텐시언 비서관이 되돌아왔다.

“준비는 되었나.”

“예, 기념식이 끝나면 곧바로.”

레키엔은 비열하기까지 한 미소를 술잔으로 겨우 가리고서 텔리오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가늘게 눈매가 찢어진다.

“어디 한번 실력을 보도록 할까?”

기념식은 밤이 가도록 이어졌다. 흔하지 않은 황제 주최 연회였기에 귀족들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텔리오트는 당연히 귀궁하지 못했고, 레키엔도 일단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귀족들과의 술잔을 나누던 황제가 가장 먼저 연회장을 떠나려고 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이며 최근 들어 기력이 많이 쇠약해진 황제에게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연회는 건강에 좋지 않았다.

황비는 그런 논리로 황제를 설득했고, 황제는 은근한 눈빛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병들이 기척을 눈치 채고 황제의 호위에 나섰다. 그들의 움직임에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고 있던 귀족들이 상석으로 눈을 돌렸다.

“모두가…… 즐거운 밤이 되었기를 바라오. 짐은 이제 돌아가겠소.”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입구까지 모두가 길을 비켜주었다. 박수로 황제의 귀궁을 환송하면서, 연회장 밖으로까지 모두가 나와 황제의 뒤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인파의 선두에는 레키엔과 텔리오트가 서있었다.

“많이 늙으셨군, 아버지도.”

“그러게 말입니다.”

대꾸하는 텔리오트를 레키엔은 솔직하게 비웃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네놈이…… 아버지의 늙지 않은 모습을 본 적이나 있던가? 아버지의 존안을 뵈었던 것도 기껏해야 한 달 전 아니더냐.”

“……분명히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뵌 적은 없지만 럭커 시종장에게 소식은 들었습니다.”

“럭커라…… 그 자식은 아직 시종장으로 있나?”

흥미 없다는 듯 눈을 흘기고 도로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레키엔. 그 뒤를 일황자파에 소속된 귀족들이 따라붙는다. 연회장 밖에 남은 텔리오트도 가면 안에서 잠깐 눈을 움직이다가 몸을 돌렸다.

그 뒤로 연회는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황제가 사라진 탓에 분위기는 완강한 하향 곡선을 그렸고, 자정을 넘기고 새벽으로 이어지는 틈 사이에서 연회는 종결되었다.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뒷정리를 하는 동안 연회장 앞으로 대기하고 있던 마차들이 속속 나타났다. 그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일황자 레키엔의 마차였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마차에 오르며 그는 마지막으로 텔리오트를 돌아봤다.

“언제 또 얼굴을 마주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한번 잘 살아봐라. 알겠느냐, 병약한 아우야.”

텔리오트는 가면에는 표정이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겼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끝까지 조소를 지우지 않고 마차에 오른 레키엔이 연회장을 떠났다. 마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텔리오트의 뒤로 미연이 나타났다.

“와우, 드디어 잘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먹었으면서 가자마자 자면 살찔걸.”

“괜찮아. 난 언제나 운동으로 단련되어 있어서 항상 칼로리 부족이거든.”

알 수 없는 이유를 대며 가면 속의 얼굴이 히죽거린다. 텔리오트는 눈동자만 돌려 미연과 미소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연회가 이어지면서 그들은 항상 텔리오트의 뒤에 있었다. 검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내에서 텔리오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조언을 준 것은 이시브일 것이고 미연과 미소라는 그 조언을 완벽하게 행하고 있었다.

“이시브는?”

“마차 가지러 갔어. 그거 비서관이 가져오는 거라며?”

“대기 중인 마차의 위치를 추적하고 확인, 움직이는 것까지 모두 비서관의 몫이니까. 지금 내 수행 비서인 이시브가 할 일이야.”

“비서관이란 게 의외로 쪼잔한 직업인가 보다?”

“쪼잔하다라…… 그렇게 표현하니 신선하군.”

텔리오트는 웃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조금 후 텔리오트의 마차도 연회장 앞에 도착했다. 텔리오트는 아쉬워하는 이황자파 소속 귀족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던진 후 마차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확인한 미소라가 탑승하자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했던 연회장을 떠나자 사방이 고요해진 듯했다. 밤의 침묵 속으로 빠져든 황성 내에서 들리는 거라곤 말발굽 소리뿐이었다.

“조용하네…….”

미연이 중얼거렸다. 미소라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이시브가 창밖을 슬쩍 내다보며 말했다.

“이 시간이면 보통 아무도 성내를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오늘 같은 연회도 특별한 경우이기에 이렇게 조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설명해 달라는 건 아니었지만…… 뭐, 고마워. 그나저나 이시브, 너는 오늘 연회에서 뭐 했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비서관이 아니기에 공식석상에서 황자 저하의 옆에 직접 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연회가 시작되니까 뒤로 물러났던 거구나. 수행비서는 언제 떼는데?”

“다음 달쯤이면 정식 비서로 승격할 예정이야.”

대답은 텔리오트가 해 주었다. 그 말에 이중 유일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던 이시브 소령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황자 저하, 그렇지만 비서가 되려면 제 계급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야. 다음 달에 중령으로 특진할 예정이야.”

“네!?”

이시브는 결국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너, 너무 빠릅니다! 제 나이에 중령이 된다면 다른 이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습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키레마 제국의 이황자 텔리오트야. 이시브는 나의 비서가 될 사람이라고. 비서는 중령 이상 계급이 맡을 수 있는 자리니까 중령으로 진급하는 게 당연하지.”

“하, 하지만 특진의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근거가 왜 없어. 눈앞에 있잖아.”

텔리오트는 손으로 미연과 미소라를 가리켰다. 이시브는 즉시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투신의 전사와 미소 족의 숲지기를 수도까지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이시브였다. 텔리오트가 판단하기로 굉장한 전력이 되어 줄 사람을 찾아준 자가 그인 것이다.

이 이상의 특진 근거가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이 텔리오트의 말이었다.

“이의를 제기할 자는 아무도 없어.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내 선에서 조절할 수 있는 일이니까 걱정 마. 이시브 중령.”

이시브는 그 황송한 말에 땀이 나듯 연신 이마를 훔쳤다.

“빠르지만 축하해, 이시브. 아무리 그래도 진짜 빠른데?”

“가, 감사합니다, 미연 님.”

미연의 말에 이시브는 대충 대답하며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황자 저하. 일황자 저하와의 대면에 대한 소감은 어떠하십니까?”

“이시브가 보기에는 어땠어?”

“훌륭한 대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황위 계승전의 시작입니다. 상대의 기세에 밀리지 않는 자세를 보여 줬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한 무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녀석, 끝까지 아니꼽게 쳐다보던데?”

“일황자 저하 쪽에서 보자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위 계승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자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황자 저하의 존재는 각인되었을 겁니다.”

이시브는 눈매를 날카롭게 바꾸었다.

“그래서 미연 님과 미소라 님에게 더욱 당부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제국의 황위 계승전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미소라를 쿡 찔렀다. 일절 입을 열지 않고 있던 미소라가 계속되는 미연의 재촉에 결국 대답했다.

“제국은 각각 동서남북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황위 계승전에서 황자들은 각각의 구역을 배당받고 얼마나 그 구역을 잘 관리했느냐에 따라서 황위 계승이 결정되지. 현재 황자는 둘이기에 일황자가 서부, 이황자가 동부를 관리한다. 그리고 그 사이 벌어지는 암투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무시한다.”

“암투?”

“그렇습니다, 황위 계승전은 그 이름처럼 일종의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략, 전술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입니다.”

“전략? 전술?”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미연이 고개를 양방향으로 마구 갸웃대고 있을 때 미소라가 문득 눈을 돌렸다.

창밖.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그곳을 유심히 노려본다.

“미연. 검을 잡아라.”

“응? 칼?”

뭔 소리냐는 듯 쳐다보다가 미연은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 즉시 눈빛이 달라진다.

“뭐야, 이거. 이시브, 마차 세워.”

“예? 무슨 일입니까?”

“암투다.”

미소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브가 마부에게 일러 마차를 멈추자 미소라가 창문 밖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폈다.

반대쪽을 경계하는 미연에게 텔리오트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지?”

“말 그대로 암투야. 이런 식으로 나와야 재밌어지는 거거든.”

묘하게 기쁜 듯한 투로 말한 뒤 미연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말릴 새도 없는 그 행동에 미소라도 혀를 차며 뒤따랐다.

“나도 나가겠어!”

“넌 그냥 있어라. 위험하다.”

미소라의 말에 텔리오트는 엉덩이를 떼려다가 도로 앉았다.

긴장감이 도는 마차 주변은 아무것도 없었다. 잘 정비된 길은 궁으로 뻗어 있지만 주요 건물과는 먼 이곳에 있는 것은 경관을 위한 나무들뿐. 가로등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으니 그야말로 적막한 장소였다.

“여기에서 진을 치고 있었나 본데?”

“습격하기에는 좋은 장소다.”

미연과 미소라는 가볍게 담소를 나누며 마차에서 조금 거리를 벌렸다. 아직 저쪽에서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예민한 감각에는 이미 적들의 정보가 걸려들었다.

“몇 명처럼 느껴지나.”

“대충 열 명 정도. 너무 우습게 보였나 봐.”

“아이마임 시에서 팔십 명을 상대로 싸웠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나 보군.”

“쉬쉬했겠지. 반란군이 부대인 척하고 있었던 일이니까 좋은 일도 아니잖아. 그나저나 이것들, 대체 언제 덤빌 생각이지?”

미연은 칼을 잡은 채 까딱까딱 발을 떨고 있다가 급기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야! 덤빌 테면 빨랑 덤벼!”

미소라는 차마 말리지도 못했다. 그만큼 미연은 급작스럽게 소리를 쳤다, 그러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명씩 두건을 쓴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흉흉한 기운을 굳이 숨기지 않는 그 자세에 미연은 만족스럽게 어깨를 움직였다.

“좋아, 좋아. 그래야지! 밥 먹은 후에는 운동을 해서 소화시켜야 하는 법!”

“전혀 모를 이론이로군. 그냥 자도 문제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태클 사절!”

적들이 덤벼들었다.

미연과 미소라는 동시에 양쪽으로 움직였다.

전방에서 달려드는 적의 검을 피하고서 미연의 칼이 옆으로 흘렀다. 한순간의 번뜩임. 그러나 그 순간 검을 날린 적의 목이 날아올랐다. 그 목이 떨어지기 전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서 뒤이은 공격이 날아들기도 전에 칼을 베어 올린다!

“……!”

아래쪽에서부터 머리 전체를 베인 적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혼절한다. 미연은 그 몸뚱이를 걷어차며 앞으로 쇄도했다.

“훗.”

“윽!?”

“뭐, 뭐지!?”

모자를 벗겨지는 것을 은연중에 걱정하며 미연은 무심하게 다시 한 번 칼을 횡으로 베었다.

“흐음.“

적당히 자신의 방향을 정리했다고 생각한 미연이 몸을 돌렸다. 칼을 툭툭 털어 피를 털어 내고 있자니 그제야 두 명의 시신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묻을까 봐 얼른 그 자리에서 달아난 미연의 앞으로 한 명의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엇?”

움찔 놀라는 척하며 뒤로 물러서 칼을 뻗으려는 순간, 그 그림자를 덮치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미소라였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미소라의 단검이 적의 목구멍을 긁고 지나갔다. 핏방울이 뿜어져 나오기 전에 미연은 이미 뒤쪽으로 도망쳤고, 미소라도 놈의 등을 발로 걷어차 땅바닥을 기게 만들었다.

“흠.”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서 미연은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각성됐던 감각이 사라진다.

“더 이상 없지?”

“없어. 깨끗하군.”

미소라도 옷 속으로 단검을 감추었다. 미연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시체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은 누가 치우지?”

“저쪽에서 올 거야.”

어느새 마차 밖으로 텔리오트가 나와 있었다. 이시브가 말렸지만 텔리오트는 여유롭게 그의 손을 떨치며 시체를 넘어 걸어왔다.

“어차피 누가 벌인 짓인지는 뻔하지. 우리가 가고 나면 정리를 하러 올 거야.”

“황위 계승전이라는 건, 이런 일이 태연하게 일어난단 말야?”

“현 황제 폐하도 이런 경쟁 후에 즉위했어. 이곳에선 당연한 일이야.”

차분하게 말하는 텔리오트의 어조에는 동요하는 기운이라고는 결코 없었다. 미연은 모호하게 “흐응~” 하고 소리를 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골치 아픈 싸움이네. 피곤하겠다, 너도.”

“이제부터 더 피곤해질 거야. 그래도 질 수는 없지.”

그가 가면 안에서 미소를 지은 것 같다고 미연은 생각했다.

“난 반드시 황제가 될 거야.”

***

미연 일행이 떠나고 난 후 그 자리에 나타난 이들이 있었다. 어두운 계열의 잠입복을 입은 그들은 일황자 직속의 호위 부대였다. 목이 떨어지고 급소가 뚫려 죽은 동료의 시체를 일제히 수거한 그들은 재빨리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한 구의 시체가 은밀하게 일황자궁으로 반입되었다.

처리되기 직전 별궁으로 들어간 시체는 비밀방으로 옮겨졌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각각 따로 운반된 목 위와 아래를 놓고 검시하던 그들은 잠시 후 일황자의 방문으로 잠시 작업을 중단했다.

“어때. 건질 게 있나?”

“놀라운 검술 솜씨입니다.”

검시 담당 중 가장 높은 직책의 노인이 레키엔에게 설명했다.

“절단면이 기묘할 정도로 깔끔합니다. 이 정도의 면을 나타냈다는 건 분명 평범한 솜씨를 가진 검사가 아니란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나?”

레키엔의 물음에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기다리던 레키엔은 얼굴에 짜증을 띄우고서 검시관들을 헤치고 시체에 가까이 갔다.

따로 잘린 목이 똑바로 선 채 레키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감기지 않아 검시관들도 포기한 눈동자를 무심히 내려다보고서 레키엔은 비릿하게 웃었다.

“건방지군. 제국의 황자를 보는 눈이 아닌데, 이건.”

그러더니 그 머리칼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들어 올린다. 뒤에서 보고 있던 검시관들이 숨을 멈췄다. 날카로운 눈으로 피가 모두 빠져나간 목덜미를 훑어보고, 원래 목이 붙어 있었던 어깨 위쪽도 관찰한다.

“오른쪽 측면에서 비스듬히 쳐 올렸군.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목뼈의 어긋남도 없이 뼈와 살을 한꺼번에 잘라 냈어. 이 정도면 나와 비슷한 수준이겠군.”

검시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선 레키엔이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을 때쯤에야 그는 서둘러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황자 저하, 아무래도 상당한 실력자인 듯합니다.”

“좋아. 상처는 전부 이랬나?”

“아닙니다. 단검인 듯한 무기로 급소만을 공격당해 죽은 병사도 있습니다.”

“단검술이로군. 그 시체는 어디 있지?”

“옆방에 한 구가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레키엔은 대답 없이 멋대로 옆방으로 이동했다.

검시관들이 우르르 몰려갔을 때 그는 무심한 얼굴로 횡경막 부근을 깊숙하게 찔려 사망한 병사의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대단한 실력인데? 왼쪽 밑에서 횡경막을 뚫어 심장을 관통했어. 왼손잡이인 걸까, 아니면 그만큼의 수련을 쌓은 걸까. 이봐,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나?”

“……후자 쪽이 아니겠습니까. 후송을 담당했던 병사들의 말로는 상처들이 모두 필요한 만큼의 깊이로 찔렸다고 합니다.”

“그 말은 양손 모두 일정한 수련을 쌓은 자라는 거군. 그것도 상당한.”

“예, 그렇습니다.”

레키엔은 한 번 더 시체를 쳐다보다가 방에서 나왔다.

“시체는 처리해라. 결과는 텐시언 비서관에게 보고하도록.”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서 그는 별궁에서 빠져 나왔다. 말이 별궁이지 그곳은 별궁 내에서도 비밀스런 입구를 지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 나온 레키엔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텐시언 비서관과 마주쳤다.

“뒤처리를 잘 했나?”

“예, 명령하신 대로 인사 기록을 고치고 사망 병사들의 시체 수습도 모두 끝냈습니다. 나머지 두 구만 처리하면 됩니다.”

“검시는 이미 끝난 듯하더군. 더 볼 것도 없어.”

본궁을 향하는 레키엔을 텐시언 비서관이 뒤따랐다. 걷던 중 레키엔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제국에서 단검술이 가장 뛰어난 곳이 어디지?”

“서부 주둔군에 단검술을 전문적으로 훈련하는 부대가 있긴 합니다만, 위치를 알려드립니까?”

“아니, 됐어. 거기가 우리나라 최고의 단검술 부대인가?”

“부대 중에는 그렇습니다만.”

“내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일 거 같은가, 텐시언. 단검술로만 따진다면?”

“……미소 족의 숲지기들이 아니겠습니까?”

텐시언 비서관의 대답을 들으며 레키엔은 빙긋이 미소지었다.

“정답이야.”

같은 시각. 황성 깊숙한 곳에 위치한 황궁.

달빛을 받고 있는 외관은 낮과는 또 다른 화려함을 보이고 있었다. 오늘 밤 당번을 맡은 시종들의 방을 빼고 빠짐없이 불이 꺼진 그 궁 어딘가에서 아직도 촛불이 흔들리는 방이 있었다.

“황제 폐하.”

잠옷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던 황제 디요네츠는 말소리에 눈을 돌렸다. 그의 비서관이 꼿꼿한 자세로 문 앞에 서있었다.

디요네츠는 적고 있던 종이로 시선을 되돌렸다.

“무슨 일인가.”

“일황자 저하가 움직이셨습니다.”

“그랬겠지. 그러기 위한 기념식이었으니까.”

디요네츠는 담담한 어투로 몸을 돌렸다. 이젠 30년 전의 위용도 온데간데없이 노쇠한 황제였으나 비서관은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아직도 예전의 무게 그대로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예…… 일황자 저하의 직속 부대 열 명이 전원 사망했습니다.”

“정황은?”

“이황자 저하가 궁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마차가 오기를 기다려 습격하였습니다만, 이황자 직속 부대원 두 명에게 반격당해 전원 사망했습니다.”

“두 명이라면 오늘 본 그 가면을 쓴 자들 말이군. 백두 부대의 대장과 부대장을 맡을 자라고 했던가?”

“예. 대장 신미연과 부대장 미소라. 둘 다 흔치 않은 출신의 검사들입니다.”

“동쪽의 나라와 판게리츠 산맥이라. 텔리오트에게 그런 인연이 잘도 모여들었군.”

딱히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디요네츠는 비서관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의 뜻을 읽을 수 있는 자는 오랜 시간 디요네츠의 곁을 보필해 온 비서관뿐이었다.

오고 가는 눈빛 속에 통한 대화 끝에 비서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텔리오트 쪽은 어떻게 하고 있지?”

“조금 전에 귀궁한 걸로 보고되었습니다. 명한다면 자세한 보고를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만.”

“됐네. 그 아이들도 지금부터 힘들게야. 오늘은 편히 쉬게 내버려 두게.”

디요네츠는 아련한 눈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뒤쪽에 비서관이 묵묵히 서자 디요네츠의 주름진 눈은 커튼 사이로 비추는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황제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저는 황제 폐하의 비서관이기에 중립입니다만.”

“중립의 입장에서 말해 보게. 어느 쪽을 편들라는 게 아니네. 자네의 판단을 말해보 라는 게지.”

“제 판단이라면……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국의 측에서 보자면 일황자 저하, 그리고 국민의 측에서 보자면 이황자 저하라고 여겨집니다.”

“판단의 근거는?”

“일황자 저하의 기질을 잘 아시잖습니까.”

“그렇다면 텔리오트는 어떻단 겐가? 그 아이가 황위 계승에 뛰어든 것이 이제 두 달이 되어 가네. 그동안 충분한 황제의 자질을 보여 준 겐가?”

“황제의 자질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보고로 올렸기에 알고 계실 겁니다, 이황자 저하께서 밤나들이를 다니신다는 사실을. 그 밤나들이는 민심의 정황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그래, 아직도 다니고 있는 거 같더군. 민심이라…….”

디요네츠는 잠깐 생각하는 눈빛이 되었다. 마치 과거를 더듬듯 아득해지던 눈길은 곧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둘 다 각각의 황제의 자질을 가지고 있을걸세. 선황 때도, 그리고 나도 그랬지만, 이번 황위 계승도 쉽지만은 않을 게야.”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초로의 비서관은 황제와 같은 눈빛으로 응답했다.

***

미연은 샤워를 끝마치고 홀가분한 자세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시종들이 들락날락거리던 것을 모두 쫓아낸 후 상황을 봐서 가면과 모자도 벗은 뒤라 정말로 시원했다. 갑갑하던 안면에 바람을 쐬어 주고자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시원한 밤바람이 방 안을 뒤적거렸다.

칼을 옆에 세운 채 의자를 질질 끌고 와 창문 앞에 앉았다. 턱을 괸 채 마음껏 월광욕을 즐기고 있자니 옆방에서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은 빠끔 고개를 내밀어 보다가 미소라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어라? 가면 벗으면 어떡해 너.”

“네가 할 말이 아니라고 본다만.”

“괜찮아, 괜찮아. 이 시간에 이쪽으로는 아무도 안 지나다녀. 가끔 경계병들 하나 둘 정도뿐이지.”

“나도 알고 있다.”

히죽이죽 웃으며 미연은 창틀 위에 털을 올렸다.

“내일부터 좀 바빠지려나?”

“그럴 테지. 아까 겪어서 알겠지만 일황자 쪽에서도 이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거다. 서부 진압도 가속화될 거고, 우리도 본격적인 흐름을 타겠지.”

“이야, 미소라. 잘 알고 있네?”

“……네가 신경을 안 쓰고 있으니까. 넌 이제부터 한 부대를 맡아야 할 대장이 되어야 한다. 조금은 신경을 쓰는 게 어때.”

“뭐, 미소라가 해 줄 거잖아? 그래서 남은 거 아냐?”

미소라는 순간 콱 돌아가 버릴까 하고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연은 상쾌하게 미소 지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땡큐, 미소라.”

“……땡큐?”

뭔 소린지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의 미소라는 내버려 두고 미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테리에게 물어볼 게 있었는데!”

그러더니 미연은 허둥지둥 창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가면과 모자를 착용한 자세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잠깐 갔다올게!”

미소라가 말릴 새도 없이 밑으로 뛰어내렸다. 미소라가 숨을 들이키는 순간 미연의 몸은 마치 깃털처럼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체중 조절. 그리고 본궁 쪽으로 부리나케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보다 미소라는 이윽고 숨을 내뱉었다.

“……정말, 못 말리겠군.”

저런 여자를 대장으로 모시고 부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말인가?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한편, 본궁으로 들어간 미연은 경계병들이 없는 틈을 타 손쉽게 텔리오트의 집무실 쪽으로 이동했다. 궁 안으로 순찰을 다니던 경계병들이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영창을 보내 달라고 본인이 요청했을 만큼 대범하게, 그렇지만 결코 발각되지 않을 움직임으로 단숨에 집무실에 도착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책상에 앉아 있던 텔리오트가 삐뚤어진 가면을 고쳐 썼다.

“이 야밤에 자지 않고 웬일이지?”

“너야말로 안 자고 이 시간까지 일이야? 잠을 많이 자야 피부가 고와진다고.”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어서 상관없어. 너야말로 여자면서 피부 걱정은 안 해?”

“내가 어떤 얼굴이든 상관없다는 남자가 이미 있으니까 필요 없어. 그러고 보니 둘 다 피부 걱정할 때가 아니구나.”

미연은 성큼성큼 그의 책상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더니 말했다.

“왜 황제가 되려고 그래?”

“황위 계승권이 있으니까. 갑작스럽게 왜 그래, 당연한 거잖아.”

“그딴 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텔리오트는 처리 중이던 서류를 손에서 놓았다.

“난 황제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되어야만 해. 그게 전부야. 더 무엇이 필요하지?”

“두 달 전까지 사경을 헤매던 녀석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고 있다면 어느 누가 믿겠어?”

“결국, 넌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거지?”

“네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

텔리오트는 무겁게 침묵했다. 미연은 그 침묵은 가볍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황위 계승전에 대비하여 서로 간의 각오를 다져 두는 과정.

텔리오트도 그 의도를 깨달은 듯 이윽고 눈을 들었다.

“병에서 깨어났을 때 맨 처음 보인 얼굴이 뭔지 알아? 마법사단 단장, 에스티른 단장이었어. 그 노인이 한참이나 정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더군. 그렇게 우는 노인을 봤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

“……노인네 우는 얼굴도 예쁘다?”

“생각이 특이하군. 아냐, 병에 걸렸을 때엔 느끼지 못했던 그런 진심을 느꼈어. 그가 말했지. ‘나의 황제시여. 깨어나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황제…… 그 어감이 참 좋더군.”

“그래서……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심한 것은 몸이 회복된 삼 일 후지만. 내가 황제가 되려는 이유는 에스티른 단장 때문이야. 그 뒤, 제국의 실정을 알게 되고 민심을 읽고 나서부터 더더욱 그 결심을 확고해졌어. 이 정도면 대답이 됐을까?”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보은이로군.”

“그럴지도. 은혜를 갚기 위해 황제가 된다는 건 옛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시시콜콜한 사정이지만 말야.”

진지한 그의 눈빛을 미연은 한동안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을, 그런 진실 된 눈이었다.

미연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이윽고 미소를 그려보였다.

“좋아, 그 정도로 봐주겠어. 제법 괜찮은 이유였으니까.”

“이 정도가 고작 ‘괜찮다’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뭐, 오늘은 늦었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로도 나름 납득이 가는 이유니까 오늘은 봐 줄게. 다음에 술이나 한잔 하면서 담소해 보자.”

“난 술에 약한데?”

“그거 잘됐네! 난 강하거든.”

웃음만 남겨 놓고 미연은 집무실에서 나왔다. 일찍 들어가라고 텔리오트에게 핀잔을 던진 그녀는 문을 닫은 후 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몸을 돌렸다.

어두운 복도를 조심스레 걸어가며, 문득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창문을 지나칠 때 그녀의 얼굴은 장난스럽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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