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15화 (15/32)

히어로즈 리턴 3권

열넷. 어디 한번 놀아 볼까?

경비병이 아니었다. 좀 더 천박한 목소리를 가진 그 외침이 저택의 밤을 갈랐다. 로티아가 몸을 굳힌 사이 아리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뛰었다.

“침입자다! 이봐, 이 쓸모없는 경비병 자식들아! 이쪽이라구!”

남자의 외침에 경비병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어느새 저택 앞 정원은 수십 명의 경비병과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둘러쌌고, 아리스는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달렸다.

“쫓아라!”

“백작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야밤에 도주극이 벌어졌다. 정신을 차린 로티아가 아리스의 뒤편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반응하여 경비병들도 무기를 꼬나 쥐고 두 사람을 뒤쫓았다.

또 다른 방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여기도 있다! 두 놈이야!”

“여기도다!”

다른 곳에서도 아리스와 로티아의 기척을 눈치 챈 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리스는 큰소리로 외쳤다.

“도망치세요! 그곳에서 만납시다!”

로티아도 똑같은 말을 소리친다. 어렴풋이 긍정의 대답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목소리를 편히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결국 따라잡힌 두 사람은 나무 뒤편에서 나타난 경비병과 맞닥뜨렸다.

아리스는 결국 검을 뽑았다.

공격해 오는 남자의 검을 아래로 흘린 후 비어 있는 옆구리를 노린 찌르기가 펼쳐졌다! 곧장 옆으로 빠져나가자 뒤따르던 로티아가 그를 걷어차 길을 뚫었다.

“담장이다! 담을 넘을 생각이다!”

“막아라!”

사방에서 남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리스와 로티아는 그 중앙에서 분전했다.

로티아가 메고 있던 주머니를 수상하게 여긴 남자들이 손을 뻗어 그것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녀는 주머니를 필사적으로 지켜 냈다. 동시에 어떻게든 그들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저택을 둘러싼 담장 가까이에 도달해 있었다. 들어왔던 곳과는 다른 위치였지만 그것을 따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섬광 같이 달려간 로티아가 담장 밑에서 먼저 자세를 잡았다. 손 두 개를 깍지를 껴 아리스가 밟을 수 있게 만든다.

“뛰십시오!”

“부탁할게요!”

아리스는 달리는 속도 그대로 로티아를 밟고 뛰어올랐다. 담장에 간신히 손을 뻗어 붙잡은 후 재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로티아가 그 사이 정체불명의 남자 둘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리스는 들고 있던 검을 집어던졌다.

검은 로티아를 향해 달려들던 남자의 어깨에 정확하게 박혔다.

“로티아, 잡아요!”

아리스는 몸을 최대한 밑으로 내려 손을 뻗었다. 로티아가 반사적으로 달려와 몸을 날렸고 가까스로 아리스와 손을 맞부딪힌 순간!

아리스는 온몸에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완벽한 합동으로 그들은 드디어 담장 위에서 경비병과 정체불명 남자 집단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네, 네놈들! 대체 누구냐!”

“여기가 어딘지 알고는 있나!”

남자들의 외침에 둘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표는 이루었기에 둘은 담장 밖의 높이를 가늠해 보고 즉시 뛰어내렸다. 남자들이 보기에는 눈앞에서 놓친 격이나 다름없었다.

“크윽! 쫓아라, 이대로 놓쳐선 안 된다!”

“조를 나눠서 다른 놈들도 잡아라! 저택가를 벗어나기 전에 잡는 거다!”

경비병들의 끈질긴 추격도 재개됐다. 저택가의 정문을 통과한 그들은 각각 구역을 정해 밤길을 내달렸다. 수십 명이 인원이었기에 침입자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각 조의 조장들이 연락을 위해 저택 앞에 다시 모여들었다.

“찾았어?”

“아니…… 그것들, 어디로 갔는지 대체 보이질 않아.”

“이 야밤에 발자국을 찾을 수도 없고, 어디로 사라진 거지?”

“젠장! 수도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야 해! 설마 그 주머니에 그게 들어있기라도 한다면 백작님은 물론 우리도 끝장이다!”

“이봐, 경비병! 너희만인 줄 아냐? 우리 쪽도 그렇다고!”

“그러니까 찾으란 말이다! 놈들이 하늘로 솟았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은 이상 분명히 어딘가에 숨어 있다. 찾아!”

그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다행이군요, 우리도 움직이기로 하죠.”

아리스는 어둠 속을 앞장섰다. 그녀와 기동대원들은 지하 2층 위치에 있었다. 횃불을 밝힌 채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루위스의 지하로 흐르는 하수도였다.

상수와 하수의 운용은 수도 건설 초기부터 중요하게 다뤄 온 사항이고 30년이 지난 지금 매우 깔끔하게 완공되었다. 비록 냄새는 나지만 보통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이곳으로 그들은 도주를 감행했다.

“특사대장님이란 분, 대단하시군요. 하수도를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하수도가 어떻게 뻗어 있는지 모르면 절대 불가능한 작전입니다.”

기동대원들의 감탄사를 들으며 아리스는 괜히 자신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특사대장 강태진이 사실 건국 영웅인 현신의 전사임을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밝히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겉으로는 절대 표를 내지 않았다.

“저들도 우리의 행적을 눈치 챌지 몰라요. 그러니까 좀 더 속도를 올리도록 하죠.”

아리스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태진이 손수 그려 준 하수도의 연결 통로 위치를 가늠해 착실하게 하수도를 더듬어 나갔다.

반쯤 나아갔을 때 맨 후방에서 따라오던 기동대원이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귀를 기울이자 소리가 명확히 들려왔다. 발소리, 수십 명의 발소리였다.

“들켰어요!”

아리스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동시에 여섯 명은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나기 시작한 발소리에 상대 쪽에서도 그들의 위치를 알아챘다.

루위스의 하수도가 들썩였다. 수십 명의 반향은 대단했다. 발자국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기에 여섯 명의 도주는 어느 순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이제 어떻게 할까요?”

“지시를!”

아리스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정식 기사는 아니지만 그녀는 지금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정확한 판단으로 이 도주를 성공시켜야 했다.

발소리가 가장 깊게 중첩되는 방향을 판단, 지도를 보고 비교한 후 그녀는 갈 길을 정했다.

도착해야 할 장소는 정해져 있다.

“하수도를 반대편으로.”

아리스의 지시에 기동대원들이 지체 없이 하수의 물길을 건넜다. 허리까지 차오른 하수를 해치고 반대쪽 길로 도달해 뚫려 있는 통로로 곧바로 진입했다. 그 후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진선으로 달려, 아리스가 지시하는 오른쪽으로 도망쳤다.

“왼쪽이에요, 조금만 더!”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급기야 목소리까지 정확하게 날아왔다.

“이쪽이다! 가까워!”

수십 명이 그들의 등 뒤에 나타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지금껏 기동대원들과 달려온 길을 답습하듯 출현한 경비병 집단을 보고 아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태진 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그 소망은 절망적이었다. 뒤쪽만이 아니라 앞에서도 경비병들의 기척이 감지된 것이다.

몇 분 후, 앞뒤로 포위당한 형세가 되어서야 아리스와 기동대원들은 발을 멈추었다.

“……젠장.”

기동대원들도 당황한 듯 일단 검부터 뽑아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은 아니었다. 좌절 그 자체였다.

아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도 느껴졌지만 지지 않고 매서운 눈빛을 뿌렸다.

“훗…… 하수도로 도망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말이야. 덕분에 이제 더 도망칠 곳이 없군?”

“어디서 온 누구신지는 데리고 가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잡아라!”

사나운 음성의 남자가 명령했다. 사방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리스는 검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때 갑작스레 머리 위에서 빛이 열렸다. 새하얀 달빛. 그리고 아리스의 눈앞으로 투명한 무언가가 낙하했다.

순간 들려오는 음성!

“숨을 막으십시오!”

낙하한 물체는 청명한 파괴음과 함께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부서졌다.

―!

아리스는 이해 이전에 직감했다.

“모두 숨쉬지 마세요!”

그리고 가장 먼저 손으로 코와 입을 덮었다. 그녀의 행동에 남은 대원들도 모두 그 행동을 따라하고는 묻는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분명 지금은 앞뒤로 적에게 포위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태평하게 숨을 막다니, 그래도 되는 건가? 그것보다 위에선 누가 뭘 던진 거지?

아리스는 그 시선들을 뒤로 하고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상까지 이어진 동그란 통로 끝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키코올입니다! 숨은 쉬지 말고, 이것을 잡으십시오!”

병 속에 들어 있던 약품은 태진이 정제한 아키코올이었다. 순수한 아키코올은 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잠들어 버리는 극약이다. 숨을 막고 있던 아리스와 기동대원들을 제외한 전원이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그 와중에 통로에서 굵은 밧줄이 떨어져 내렸다. 아리스는 로티아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한 후, 대원들이 모두 지상으로 귀환한 뒤에야 하수도를 탈출했다.

태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네,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수색을 보내 놓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만큼 속이 편하진 못합니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택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지도를 더듬어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

“하, 하지만 그래도 저흰 하수도로 움직이고 있던 중이었는데…….”

“귀를 기울이면 못 찾을 것도 없습니다.”

태진의 감각은 상상을 초월한다. 평소에도 남들의 몇 배는 예민한 상태지만 다른 감각을 누그러뜨리고 한 가지 감각에 집중하면 더욱 엄청나지는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자각은 하지 못하고 있던 아리스는 순간 멍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태진은 눈을 감은 채 슬쩍 웃었다.

“이곳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일단 이동합시다.”

태진은 그 장소에서 모든 대원을 철수시켰다.

수색조는 물론 마중을 나온 기동대원들까지 신속하게 왕성으로 이동했다.

덕분에 얼마 후 그 장소에 도착한 미노클 백작의 경비병들은 어떤 흔적도 찾지 못하고 수색을 포기했다. 서둘러 저택으로 귀환한 그들은 미노클 백작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같은 시각, 모두 왕성으로 귀환한 태진과 아리스는 기동대원인 로티아를 특사대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쭈뼛쭈뼛 기사답지 않게 들어온 그녀는 딱딱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가 차를 내오며 부드럽게 말했다.

“편히 앉아요, 로티아.”

“아, 아닙니다. 기사로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처벌…… 요?”

“대장님의 지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리스 님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지켜보고 있던 태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다면 처벌을 내려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태진 님? 무슨 말씀이세요! 로티아는 저를 지키기 위해 경비병들과 맞섰다고요! 그런데 처벌이라니!”

“……괜찮습니다, 아리스 님.”

이미 포기한 듯 로티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태진은 눈을 뜨고 있었으면 지그시 바라본다고 했을 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기동대장에게 처벌 내용에 대한 전언을 주겠습니다. 내일 그에게 직접 들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일 얘기를 좀 해 보도록 하지요.”

아리스의 불만 많은 얼굴을 무시하고 태진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리스에게 들었습니다만 다시 묻겠습니다. 창고는 지도상 그 위치에서 찾았습니까?”

“예, 지도상에 미묘하게 면적이 부족했던 그 창고는 식료품 창고였습니다. 비밀 창고는 식료품 창고의 아래쪽에 있었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더니 나무 상자에 마약과 원재료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양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정제된 마약은 어림잡아도 수도 전체에 퍼뜨릴 수 있는 양이었고, 원재료까지 합하면 네이숩까지 통용될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네이숩은 로츠왈드 왕국 남동쪽의 큰 항구 도시다. 면적과 인구로 따지면 분명 왕국 내 두 번째 도시. 결국 가장 큰 수도와 두 번째로 큰 도시를 아우를 수 있는 엄청난 양이라는 말이었다.

태진은 다시 한 번 확인한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과거 기사가 되기 전 당신의 직업이 도둑이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눈으로 본, 경비병 이외에 남자들의 정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로티아는 말을 잃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한참 눈을 돌리던 그녀는 과거를 떠올리는 듯한 눈길로 다시 입을 뗐다.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포, 폭력단들이 아니겠습니까?”

“폭력단이라. 깡패들이 조직적으로 합세한 형태 말입니까?”

“예, 반란군 시절부터 작은 마을들은 그런 폭력단들이 관리하는 곳도 있어 왔습니다. 왕국이 생기고 난 후 정보부의 활동으로 많은 폭력단들이 사라졌지만 아직 수도에 남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참고가 되었습니다.”

태진의 정직한 인사에 로티아는 어색하게 마주 인사했다. 용건이 끝난 그녀를 돌려보내고 나자 아리스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그에게 들이댔다.

“눈 뜨세요.”

“보지 않아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만.”

“눈 뜨고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정말로 처벌을 내릴 생각이신가요?”

태진은 미묘한 미소를 지은 채 눈꺼풀을 올렸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뚫어져라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아리스. 로티아에 대한 걱정이 컸기에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난감한 경우인지 눈치 채지 못했다.

중심을 잘못 잡기라도 하면 입술과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

태진은 눈을 굴리며 한마디 할까 생각했다. 그 와중에 먼저 말한 것은 아리스였다.

“대체…… 언제쯤에나 태진 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까요?”

아리스의 얼굴이 멀어졌다.

태진은 숨을 가볍게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는 건 ‘정신’의 레펠이라도 없는 한 힘들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녀를 어떻게 할 생각이시죠?”

“들었던 대로 처벌을 내릴 겁니다.”

“진짜요?”

“물론 처벌 내용은 비밀입니다.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더 재미있을 겁니다.”

“처벌 내용이 재미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녀의 반박을 싸악 무시하고 태진은 대번에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이것을 봐 주십시오.”

태진은 아리스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오늘 수색에서 나온 증거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리스와 로티아가 찾아낸 마약의 이름은 ‘숨소리’. 가루를 코로 흡입하는 형태의 마약이었다. 그 원재료는 ‘잉크리즈’라는 이름의 식물로, 햇빛에서 2주 정도 바싹 말린 후 그것을 쪄서 건조시키면 하얀 가루가 나온다.

그 가루가 바로 숨소리다.

아리스는 물었다.

“잉크리즈요? 그건 리자브 왕국에서 재배되는 식물이잖아요?”

“그렇습니다. 자료에 나와 있더군요. 아리스를 기다리는 사이 몇 권의 마약 관련 책을 독파하다가 봤습니다만. 리자브 왕국과의 무역은 노큰 항구에서 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예…… 아무래도, 그렇죠. 카알트라즈가 동결된 이후에 네이숩 항구는 하락세를 걷고 있고, 노큰 항구 쪽은 크고 있고요. 아, 그렇다면 설마 밀수품……?”

“순찰대를 그쪽으로 파견할 생각입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런 말에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아…… 전 이미 순찰대장이 아니에요. 저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하지만 아직 순찰대 쪽에서는 당신을 대장직으로 모시고 있는 걸로 압니다. 현 대장에게 당신이 직접 알려 주십시오.”

“예, 그럴게요.”

아리스는 단단히 대답했다.

“아, 그렇다면 저희는 이제 어떡하죠? 미노클 백작의 주변을 더 살펴야 하나요?”

“괜찮습니다. 미노클 백작도 이제 완전 자포자기 상태가 될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내일 순찰대원을 파견해 미노클 백작을 소환할 겁니다. 하이듀크가 재판에 관한 일을 맡아 준다고 했으니 더 이상 그쪽은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일이죠?”

“노큰 항구의 순찰과 같이 하여 수도 내의 폭력단을 조사할 겁니다. 로티아에게 들었다시피 이 일에는 폭력단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내일 미노클 백작이 소환되면 폭력단과의 관계를 심문할 것입니다. 본격적인 조사는 그 이후로 하지요.”

아리스는 침을 삼켰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부터 시작된 사건은 마약을 지나 폭력단이라는 고리까지 왔다.

귀족과 폭력단의 연계.

이건 아무래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네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마약이란 건 그만큼의 마력을 가진 물건입니다. 한번 맛을 들이면 쉽게 돌이킬 수 없는 만큼 매력이 큰 것 아니겠습니까.”

태진은 조용히 말한 뒤 의자에 앉았다.

“내일부터 또 다른 일이 시작될 겁니다. 오늘은 푹 쉬십시오.”

“아, 예…….”

뭐라할 새도 없이 아리스는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시간상으로 따지면 새벽녘이었다. 그녀는 지나치던 시종의 인사를 손으로 받으며 정보부를 빠져 나왔다.

멀지 않은 정보부장관 저택까지 향하는 동안 아리스는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정리했다.

노예 시장을 이용하여 수도로 왔고, 그 와중에 노예 시장의 두목인 키드카와 알게 되었다. 그녀가 마약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고, 태진은 개인적인 이유로 마약을 ‘조절’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금세 미노클 백작과 수도 내 폭력단과의 연계를 밝힐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그 조사로 넘어간다.

뭐랄까, 이 며칠만큼 바쁘게 보낸 적은 또 없었다. 왠지 모르게 태진의 옆에 서면 수많은 일들이 계속해서 터져 오르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후우…….”

태진. 현신의 전사. 현재는 정보부 소속의 특사대장. 어느새 자신의 상관이 되어 있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녀는 문득 조금 전에 사무실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

이제야 깨닫는다.

너무나 가까웠던 얼굴과 얼굴 사이.

그리고 그 간격이 의미하는 것을.

아무리 남자를 모르는 아리스라고 하더라도 쉽게 알아챘다. 왜 그 당시에는 몰랐을까 하는 자책감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앗, 정말!”

그녀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대사는 바보 같은 자신에게 던지는 외마디의 비명이었다.

***

미노클 백작의 저택 경비를 맡았던 조가 귀환하는 순간 폭력단은 발칵 뒤집혔다.

“뭐라고! 약이 빠져나갔단 말이냐!”

“예, 예, 형님!”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말해 봐, 이 자식아!”

행동대장에게 이미 몇 번이나 얻어터진 얼굴로 말단 부하는 소리치듯 설명했다.

“그, 그것이 그 이후에 창고로 들어가서 확인을 해 봤는데 말입니다! 아, 아무리 세 봐도 숫자가 하나 모자라는 겁니다. 사, 상자도 뜯겨 나갔고…….”

“그건 완전히 당한 거잖아, 개자식아!”

행동대장은 다시 그를 두들겨 팼다. 한참이나 계속된 구타 후에는 흘릴 수 있는 피는 모두 흘려 버린 듯한 몰골의 부하만이 남았다.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낸 행동대장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꼿꼿이 얼어 있던 다른 부하들이 서둘러 남자를 데리고 바깥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간부 급 인물들로 하나 같이 골머리가 아프다는 모습이었다.

“젠장…… 이거 어떡해? 정보부에서 냄새 맡은 거 아냐!”

“미노클 백작한테 며칠 전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그 자식인 것 같은데, 누가 아는 거 없어?”

“그 찾아갔다는 곳이 왕립 대학교야. 귀족들이 득시글대는 거기서 뭔 일이 있는지 알 건 뭐고 또 어떻게 알아? 게다가 아주 총장 자치령 수준이라 손대기도 쉽지 않아.”

“그래도 정보원 몇 명은 심어 뒀잖아?”

“그럼 뭐 하냐. 강의 듣는 순간엔 정보고 뭐고 다 쫑인데. 젠장맞을! 더럽게 됐는데 이거?”

낡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그들은 다 함께 머리를 맞댔다.

“두목은 오켈라니아에 아직 도착 안 했겠지?”

“그럴걸? 노예 시장 두목 년을 직접 만난다고 간 게 일주일 전이니까 빨라도 오 일 뒤에나 도착하겠군.”

“그럼 대충 이 주 정도는 시간이 있다 이거군…….”

행동대장이 뭔가 생각하는 얼굴을 만들자 나머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이나 그렇게 눈을 감고 있던 행동대장이 눈을 번쩍 떴다.

“할 수 없다. 두목이 오기 전에 정리하자.”

“뭐?”

“어차피 미노클 백작은 보관소에 불과해. 오늘 밤 내로 약을 모조리 빼내. 그리고 미노클 백작에게 모두 뒤집어씌워. 우리에게 닿는 선을 모두 없애란 말야. 알겠어?”

“잠깐, 그랬다가 두목이 돌아왔을 때 뭐라고 하려고? 훌륭한 보관소가 사라진단 말야!”

“두목은 부재시 모든 지시권을 나에게 넘겼어. 내 명령은 곧 두목의 명령이란 말이다. 불만이냐?”

행동대장의 당당한 말에 다른 간부들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주도권을 잡은 그는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자, 알았으면 얼렁 움직여! 이 시간에도 그놈들이 우리를 쫓고 있을 거라고!”

후다닥 방을 뛰어나가는 그들의 움직임을 만족스럽게 지켜보고서 그는 여유 있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어디 한번 놀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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