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2)

열다섯. 그러면 실전 훈련이 안 되잖아

황위 계승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기회와 인맥을 갈고 닦은 텔리오트는 그 시작을 직속 호위 부대의 창설로 삼았다. 이황자파 소속의 부대에게 공문을 넣어 각 부대에 실력이 좋은 이들을 모아 보내도록 했다.

며칠 후 이황자궁의 넓은 연병장에 모인 군인들 앞에 가면을 쓴 미연과 미소라가 나타났다.

“얘들이야?”

“네, 그렇습니다. 총인원은 125명. 이중에서 맘에 드시는 이들을 뽑아 주십시오.”

이시브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미연은 고개를 갸웃댔다. 군인들도 눈앞에 있는 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 자인지는 들어 알고 있기에 부동자세를 취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미연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 하는 투가 역력했다.

한번 그들을 쓰윽 훑어본 그녀가 이시브를 다시 돌아본다.

“얘들, 진짜 강해?”

“적어도 각 부대에서는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들입니다만.”

“미소라, 네가 보기엔 어때?”

“시험해 보기 전엔 확신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하나하나 시험해 봐야 하나.”

무뚝뚝하게 대답한 미소라의 말에 미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칼을 뽑아 군인들을 향해 겨누었다.

“지금부터 한 명씩 나한테 덤벼. 한 번이라도 내 공격을 피하거나 막는 녀석은 백두 부대에 넣어 주지.”

대담하기까지 한 시험 방법이었다. 이시브가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말렸다.

“아, 아니. 미연 님,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방법은 조금…….”

“내 공격을 피해 낼 수 있다면 동체 시력이 그 정도로 괜찮다는 거고 막아 낸다면 그 정도의 힘도 갖추고 있는 건데, 불만 있어?”

이시브는 알고 있다. 그녀의 실력은 장난이 아니다. 그것을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다.

지금 이 태도는 결코 자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는 데 자신감은 필요 없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며, 그것이 곧 그녀에겐 아주 당연한 사실일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방법으로.”

“좋아. 미소라, 넌 어떡할래?”

“너에게 차인 녀석들을 보도록 하지. 단검술로 쓸 만한 녀석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가면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군인들은 그제야 현실을 자각했다. 눈앞에 있는 이 두 사람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정렬해 있던 그들 사이로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그들에게 미연은 호기롭게 외쳤다.

“자, 지금부터 시작!”

가장 앞에 서 있던 군인이 기어코 검을 빼 들어 자신을 향해 공격해 들어올 때까지 미연은 용케도 참고 기다려 줬다.

그러나 참는 것도 거기까지.

몇 시간 후에 미연은 텔리오트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콰앙―!

난데없이 부서질 듯한 기세로 열린 문을 향해 텔리오트가 고개를 들었다. 서명하고 있던 펜을 내려놓기도 전에, 문을 걷어찬 기세 그대로 미연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얌마!”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려친다. 쿵! 한순간 원목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제대로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애들이 왜 다 저 따위야!”

“이봐, 진정해. 진정하고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말해.”

텔리오트가 침착하게 그녀를 달랬다. 뒤늦게 달려온 럭커 시종장을 도로 내보낸 그는 그제야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미연이 씩씩 숨을 고르더니 이내 도로 말을 토해 냈다.

“나한테 부대원을 선별하라면서? 그래서 실력 좋은 애들을 모아 준다면서? 그중에서 내 맘에 드는 애들을 뽑으라면서? 분명히 난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나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그래서 모아 줬잖아. 각 부대에서 첫째가는 실력을 다투는 자들일 텐데? 왜, 불만스러워?”

“첫째? 첫째는 무슨 개 풀 뜯어먹다 장염 걸리는 소리야!”

텔리오트의 가면이 휘청댔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만스럽다는 건 잘 알겠어. 왜?”

“왜긴 왜야! 하나같이 실력이 엉망진창이니까!”

미연에게 앞뒤 사정을 자세히 듣는다는 건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열이 받아 있는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미연은 씩씩대며 입을 닫아 버렸다.

그래서 텔리오트는 더더욱 곤란했다.

그 곤란함을 풀어 준 것은 그녀를 뒤따라 냉큼 달려온 이시브였다.

“화, 황자 저하! 죄송하옵니다.”

미소라를 동행하여 서둘러 쫓아온 이시브는 텔리오트에게 머리부터 조아렸다.

“아니, 사과는 됐어. 그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그것이…….”

이시브는 설명했다. 그 설명을 요약하자면, 100명이 넘는 인원 중 단 한 명도 미연의 검을 받아 낸 자가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단 한 명도.

“결국 미연의 기준을 아무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렇사옵니다. 그래서 화를 내시더니 말릴 틈도 없이 황자 저하께…… 죄송하옵니다.”

“소령이, 아니 이젠 중령이지. 중령이 죄송할 일이 아냐. 다 그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니.”

텔리오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다시 미연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심통난 자세로 고개를 돌린 채인 그녀를 보고 다시 미소라에게 눈을 돌렸다.

“미소라, 그대가 보기에도 그렇게 형편없는 실력이었어?”

“이 여자의 실력이 비상식인 것이다. 모두 나쁜 실력은 아니었다.”

실제로 미소라도 그들 모두의 실력을 알아봤다. 개중엔 갈고 닦으면 머지않아 미소라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이도 있었다.

이미 미소라는 다섯 명을 점찍어 두고 있었다. 결국 미연의 눈이 매우 높은 것이었다.

“확실히 우리 백두 부대장의 실력이 너무 높아서 문제로군.”

텔리오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하지만 맘에 안 든다면 할 수 없지. 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 또 다른 자들을 불러줄까?”

미연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오늘 온 녀석들, 정말로 각 부대에서 제일가는 실력자들이야?”

“장담할 순 없지만 모두 강자인 것만은 확실해.”

“그렇다는 건 오늘 모집에 오지 않는 놈들도 있다는 말이지?”

“그럴 거야. 되도록 그런 인원까지 모두 추스르라고 했지만 간부 급 이상은 관리하기 힘드니까. ……무슨 생각이지?”

미연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직접 찾아다니겠어. 숨어서 안 나오고 있는 놈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그것들을 두들겨 패서 끄집어내 주지!”

의욕적이 되어 누구도 말릴 틈도 없이 미연은 집무실을 달려 나갔다. 바람처럼 사라진 그녀의 행적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미소라였다.

“쫓아가겠다.”

미소라가 뛰어나가고 나서야 텔리오트와 이시브가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경례를 하고 나가는 이시브의 등에 텔리오트가 소리쳤다.

“잘해 봐! 이시브, 그대에게 맡기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급히 돌아온 대답에 텔리오트는 가면을 톡톡 두들겼다.

진득하게 한숨을 쉰 후 그는 다시 집무로 돌아갔다. 최근에 그에게로 들어오는 일은 동부 반란군들의 형세와 일황자파의 움직임 등등, 그 모든 정보와 대처 방안 결재, 기타 여러 가지 민원 사항들까지. 그 종류만도 다양했다. 그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 보면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텔리오트는 결코 피곤해하는 기색 없이 일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그렇게 병약했던 황자의 모습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최대 아군인 제국 마법사단 측에서도 전혀 다른 사람 같다는 평이 나올 만큼, 현재의 그는 황자역을 매우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그 훌륭한 황자께서는 오후 나절쯤이 되어 럭커 시종장이 마지막 서류를 들고 올 때까지 일을 멈추지 않았다.

“황자 저하, 조금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얼마 안 남았어. 원래 일이란 건 한 번에 처리하고 푹 쉬는 편이 낫지. 안 그래?”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닌지 걱정이옵니다.”

“말하는 것과 손에 든 서류는 전혀 사정이 다른가 본데. 시종장, 난 괜찮으니 걱정 마. 그거까지만 하면 끝나는 걸 테지?”

럭커 시종장은 할 수 없다는 듯 서류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까지 처리한 서류들을 그에게 넘겨 준 후 곧바로 새로운 서류를 든 텔리오트가 잠깐 시선을 멈췄다.

“피해 보고……? 특전대 말고, 오늘 훈련이 잡힌 곳이 또 있었던가?”

“그것이…… 아무래도 백두 부대장의 일인 듯하옵니다.”

“미연의?”

텔리오트는 서류를 들춰 보았다. 몇 번 훑고 나더니 가면 안에서 절로 실소가 흘러나온다.

“하하…… 거참, 어느새 이렇게나 휘젓고 다닌 건가?”

“지금도 속속 피해 보고가 올라오고 있사옵니다만……, 이황자파 밑의 각 부대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실력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부대장들에게서 들어오고 있는 항의를 어쩌시겠습니까?”

“항의라…… 그냥 참으라고 해.”

텔리오트는 선뜻 말했다.

“지금은 미연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놔둬. 신임을 얻기 전엔 아무것도 안 돼.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 때까진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풀어 놓도록.”

“알겠사옵니다.”

럭커 시종장은 깊이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그가 집무실을 나간 뒤 한 차례 더 피해 보고를 읽어 본 그는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정말 다루기 어려운 여자로군.”

며칠 동안 미연의 행보는 계속되었다. 시디 노트니의 부대는 물론 근교의 모든 부대를 돌아다니던 미연은 이시브에게서 특전대가 합동 훈련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드넓은 훈련장에서 각 조대로 훈련을 받고 있는 특전대원의 모습을 보고 미연은 신나라 기뻐하며 미소라를 끌고 그 중간으로 뛰어들었다.

뒤처리는 지난 며칠처럼 이시브가 맡게 되었다.

“그럼 잘 부탁해, 이시브!”

특전대장의 허락도 제대로 받지 않고서 돌풍처럼 없어진 미연은 며칠 전과 똑같은 시험을 시작했다.

훈련을 받고 있던 대원들을 습격하여 그들과 검을 겨눈다. 한 번이라도 자신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자는 백두 부대에 넣어 준다는 조건을 걸고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상대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시험이었기에 그녀가 공격하면 어쩔 수 없이 특전대원들은 반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반복되자 결국 특전대원 쪽에서 훈련을 중지하고 미연과 미소라를 수색해 공격해 오는 일이 벌어졌다. 미연으로서도 찾아가는 수고가 덜어 공격해 오는 족족 상대해 주기 시작했다.

미연은 무심하게 칼을 휘둘렀다. 두 개의 검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더니 빙그르르 돌아 땅바닥에 처박혔다.

두 명의 병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손을 빠져나간 검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그 사이 미연의 칼등이 그들의 뒷덜미를 후려쳤다.

퍼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아닌 둔탁한 무언가로 두들겨 패는 소리가 나고서 병사들은 수풀 사이로 널브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라가 담담히 숫자를 셈했다.

“삼십 명째, 탈락.”

“쳇! 뭐야, 이거. 특전대 맞아? 쓸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잖아!”

“실력을 조금 줄여 보는 게 어떤가. 이들은 일개 병사들이며 훈련 도중이라 체력도 많이 소진되었다.”

“그래서 지금 절반 정도만 내고 있잖아. 이쪽은 안 힘드냐고. 벌써 산을 두 개나 타 넘고 왔는데.”

태연히 미소라의 말에 반박하는 미연은 전혀 지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덤벼든 병사들의 숫자를 세며 단순히 따라다니고 길만 안내하고 있는 미소라는 원래 산행에 익숙해 있기에 상관없었다.

그러나 미연도 미연이었다.

애초에 체력의 개념이 다르다.

“뭐 이렇게 두들기고 다니다 보면 쓸 만한 것들이 보이겠지. 최소한 두세 명 정도는 찾아내도 좋을 텐데…… 계속 올라가 볼까?”

미연은 두리번거리다 방향을 정했다. 오솔길을 거슬러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이미 산 중턱을 지나고 있었다.

계곡 두 개 정도를 지내면서 분대 하나를 쓸었고, 이 산을 올라오며 또다시 분대 하나를 정리했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은 기절한 병사들의 쉼터가 되었다.

“지도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저쪽에서 찾아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먼저 찾기가 힘들잖아.”

“그럴 걱정은 없겠군. 또 온다.”

미소라가 근처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두 번의 점프로 키보다 높은 가지에 올라앉은 그를 힐끔 쳐다보고서 미연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뒤쪽에서 나타난 것은 의외로 대군단이었다.

“여기 있다!”

“수상한 자 두 명 발견! 분대는 모두 이쪽으로 집합하라!”

훈련 탓에 조로 나뉘어 있던 분대가 그 명령에 금세 한곳에 모여들었다. 미연은 감탄한 듯 여유롭게 그들 모두가 모이기를 기다렸다.

특전대원들이 그녀의 사방을 둘러싸고 포위했다. 진형을 짠 모습은 물샐 틈도 없이 완벽하게 미연의 도주로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절대 긴장할 리가 없는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좋아. 이쯤 되니 이제 좀 쓸 만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 같네. 기분이 조금 좋아지려고 해.”

“무슨 망언을 나불대는 거냐! 그러고 보니…… 네년이냐, 우리 동료들을 베고 다닌다는 습격자가?”

“눈앞에 두고서 굳이 확인해 볼 건 없지 않아? 이 말하기도 지겨우니까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미연은 내리고 있던 칼을 들어올렸다. 특전대원들이 움칠거리며 그녀에게 경계의 눈빛을 던졌다.

“난 이황자 직속 백두 부대의 대장. 내 공격을 한 번이라도 막아 낸다면 그 사람을 내 밑으로 들일 거야. 직속 부대의 대원이 되는 거지. 어때, 군침 돌지 않아?”

“호오?”

분대장 같이 보이는 자가 혀를 내둘렀다. 그 얼굴에 묘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황자 직속 백두 부대? 소식은 들었지, 그 허약한 왕자 저하께서 자신의 호위 부대를 만든다고 말야. 그 대장은 가면을 쓴 여자라더군. 소문대로, 제법 몸매는 좋은 것 같군?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우린 일황자파 소속이거든? 고로 지금 우리에겐 네년을 쓰러뜨린 후 그 몸만 있으면 된다 이 말이다! 전원, 공격!”

설명조차 필요 없었다. 특전대원들이 한순간에 그녀에게 짓쳐들었다.

사방에서 검이 쇄도했다.

미연은 그 순간 뒤쪽으로 발을 굴렀다. 두 개의 검날이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쑤시고 들어갔지만 그녀에게 닿진 못했다. 이미 그녀의 발을 땅을 박차고 뒤쪽의 거목에 올라 있었다.

“미소라! 비켜!”

거목에 칼을 박아 넣고 나무 기둥을 차고 뛰어오른다! 칼을 뽑는 동시에 이미 그녀의 몸은 미소라가 있던 가지에 올라 있었다.

미소라는 그 위의 가지에 매달린 채 혀를 찼다.

“움직임이 만만치 않군. 지금까지와는 다른 듯하다.”

“이래야 특전대라고 할 수 있지! 좋은 공격이었어!”

기습을 당했지만 미연은 기쁜 듯했다. 드디어 싹이 보이는 놈들을 만난 것이다. 가지 위에 똑바로 선 채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이 또 분대장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투척 준비!”

분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원들의 복장 아래에서 단검들이 튀어나왔다. 던지기에 용의하게 만들어진 그것의 목표는 뻔했다. 미연이 웃는 얼굴을 경직시켰다.

“투척!”

십여 개의 단검이 미연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한순간 근육을 이완시킨 뒤, 미연의 몸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나타난 곳은 세 발자국 위의 나무 기둥. 칼을 나무에 박아 넣은 채 거꾸로 매달린 그녀의 얼굴에서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너희들! 제법인걸?”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녀가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옆의 나뭇가지를 박차고 반대편 나무로 뛰어오른 그녀의 움직임을 쫓아 특전대원들이 다시 단검을 투척했다.

휙! 휘익!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단검은,

전혀 명중하지 못했다.

어느새 바닥에 내려앉은 그녀가 몸을 구르며 수풀 뒤로 사라졌다. 그 순간 주변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젠장! 재빠른 년 같으니!”

“분대장님! 나눠서 수색해 보겠습니다!”

“그만둬! 그년이 지금까지 몇 명을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는 거냐? 우습게 볼 년은 아니다. 주변을 경계하고 공격에 대비하도록! 이 정도 인원이니 쉽게 공격해 오지는 못할 것이다!”

분대장의 명령에 찔끔하면서도 대원들은 각자 방향을 맡았다. 아무래도 나무 위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미소라의 존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설사 눈치 챘다고 하더라도 미소라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이 시험에서 그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고, 그 이상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는 여자니까.

단지 그는 묵묵히 아래쪽 상황을 읽으며 분대장의 판단이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틀렸다는 쪽의 결과가 금세 드러났다.

진형의 오른쪽을 맡고 있던 병사가 잠시 수풀에서 시선을 돌린 사이 그곳에서 검집이 튀어나왔다.

“커헉!”

정확하게 명치를 찌른 그 공격에 대원의 눈이 홱 뒤집어졌다. 이변을 눈치 챈 다른 대원들이 반응했을 순간에 이미 미연의 간격 안에 전원이 들어와 있었다.

숨어든 수풀을 대담하게도 떠나지 않고 기척을 숨기고 있던 미연은 기회를 틈타 모습을 드러냈다.

명을 쓰러뜨리며 진형 안쪽으로 과감히 돌파, 세 발자국 만에 모든 이의 등을 바라보는 위치에 출현해 있었다.

“……!”

소리조차 내지 못한 대원들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미연의 칼이 한 바퀴 강하게 회전했다. 모든 이의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간 공격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의 두뇌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캉―

희미하게 미연만이 느낄 수 있는 충돌음. 비틀대며 최후의 졸도를 선보인 분대장을 힐끔 쳐다보고서 미연은 고개를 들었다.

“미소라. 내려와 봐.”

한 분대를 한 번의 공격으로 쓰러뜨린 미연의 옆으로 미소라가 가볍게 착지했다.

“열 명 추가로군. 이로써 사십 명. 시간을 허비했다.”

“아니, 아냐. 한 명 건졌어.”

미연은 기절한 분대장을 가리켰다.

“이 녀석, 내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렸어. 다른 놈들은 반응도 하지 못했는데 고개를 돌리기 전에 이미 검을 들어 방어에 들어갔기 때문이야. 반응 속도가 괜찮아, 싹수가 보여!”

“흐음. 마흔두 명만에 한 명 건졌군.”

“일반 병사는 포기할까 생각했는데, 다행이야.”

씨익 웃음을 짓는 미연을 보며 미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복이 아닌 탓에 관등성명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일단 얼굴을 기억해 둔 미연과 미소라는 그곳을 떠났다.

지금까지의 방향대로 두 사람은 계속해서 북쪽을 향했다. 하지만 북쪽으로 가면 갈수록 병사들과 마주치는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을 미연은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왜 이럴까? 사람이 없네.”

“여긴 훈련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구나. ……뭐?”

담담한 미소라의 말투에 미연이 반응한 것은 몇 초 뒤였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시끄럽다. 귀 옆에서 소리치지 마라. 동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북쪽을 지나쳐야 한다.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니 잔소리 마라.”

“어느새 그런 걸 다 알아봤대?”

“네가 쓰러뜨린 놈들 중에 지도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다. 아마 추적술 훈련 중이었겠지. 훈련장 지도가 상세하게 나와 있더군.”

미소라는 품속에서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미연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라, 여긴 뭐야? 개인 훈련장?”

“그렇게 적혀 있군. 말 그대로 개인이 훈련하는 곳이겠지. 이런 산속에 일반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훈련하러 올 리는 없을 테고…… 아마도 간부용일 거다.”

“간부라…… 그러고 보니 지금껏 죄다 일반 병사였잖아. 여기 가면 간부를 만날 수 있을까?”

간부라면 보통 병사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실력이 우선되는 제국의 군 체제 때문이다.

미연의 낙관을 미소라는 가볍게 부정했다.

“지금은 훈련 기간이다. 간부라면 병사들 관리로 모두 훈련장에 투입되어 있겠지.”

“쳇! 재미없잖아, 그럼. 나중에 차라리 통제실이라도 습격해 볼까?”

아까운 듯 쩝 입맛을 다시며 미연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숲을 해치고 들어가서 아슬아슬한 절벽을 깡충깡충 지나가기를 한참. 체감 시간으로 30분이 채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그 시점에서, 미소라는 앞서 한 말을 철회했다.

“이런 시기에 개인 훈련을 하는 자가 있다니…….”

그들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길이 나 있는 방향에는 당연하게도 개인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 한편에서 한 명의 간부가 목책을 향해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뭐야, 아무도 없을 거라며?”

“…….”

미소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연은 그 반응이 재미있는지 히죽 웃으면서 단숨에 개인 훈련장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즈음,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다가오는 낌새를 눈치 채고 그 간부가 돌아섰다.

눈길이 마주친 순간 미연도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였다. 짧게 자른 머리는 차라리 남자 쪽에 가까웠고 날카로운 인상이 그녀의 분위기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날이 잘 선 한 자루의 검. 미연이 받은 이미지는 그랬다.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면서 그녀는 날카롭게 미연을 노려보았다.

“누구냐, 넌?”

“아, 나? 누군가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기 이름부터 말하는 게 예의잖아?”

“개나 줘, 그런 예의. 누구냐, 여긴 간부들이 사용하는 개인 훈련장이다. 일반 병사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냐. 게다가 지금은 훈련 기간일 텐데? 빨리 해당 훈련장으로 돌아가라.”

“아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걸? 특전대에서 이런 가면 쓰고 있는 병사 본 적 있어?”

그제야 여간부의 눈길이 미묘하게 변한다. 미소라가 언덕을 내려와 훈련장 멀찍이 섰을 때 다시 미연이 입을 열었다.

“이황자 직속 백두 부대의 대장이야. 지금 부대원을 선별하기 위해 검을 겨루고 있는데, 상대 좀 해 줄 수 있을까?”

“……내가, 말인가?”

“응. 제법 검 좀 휘두를 것 같은데, 아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훈련장 뒤쪽으로 사라진 뒤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목검이 아닌 진검이 들려 있었다.

“내 이름은 키노 시엘. 직책은 중위다. 직접 부대원을 선별한다면 자격 조건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한 번이라도 내 공격을 막으면 돼. 아, 혹시 일황자파 소속인 건 아니지?”

“어느 쪽도 아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검의 실력일 뿐.”

시엘 중위의 눈길이 다시 매서워졌다.

“넌 강해 보이는군.”

“그렇게 봐 줘서 고마워. 하지만 아마 네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할 거야. 그러니까 진검보다는 목검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목숨을 잃을까 봐 두려운 거냐? 도전해 온 것은 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힘 조절을 해 줄게. 부디 내 공격을 한 번이라도 막아 줘?”

“걱정 마라. 나의 검, ‘예인(銳刃)’을 막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너다.”

자신감에 차 있는 시엘의 선언을 들으면서 미연은, 이 세계에 다시 떨어진 후 처음으로 두근거림을 느꼈다.

침을 삼키며 그녀는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검을 부딪치기 전에 이미 느낌이 전해져 왔다.

말룩이었든가, 말뚝이었든가? 그 녀석보다 눈앞의 이 여자가 훨씬 강하다.

“……오랜만에 즐거운 건지도?”

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직후 싸움은 시작되었다.

피해는 속출되었다. 각종 보고가 병사들을 통해 올라왔고, 훈련 통제실이었던 곳은 이미 상황 보고실로 둔갑하여 대대장의 이마에 땀이 맺히게 만들고 있었다.

“……서측 계곡에서 여섯 명이 당했습니다.”

“서북측 침입로에서 세 명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각종 보고가 오고 간다. 보고를 맡고 있는 병사들이 쉴 새도 없이 뛰어다니고, 그들의 모든 원한은 이시브가 홀로 받아내고 있었다.

초조하게 보고만을 기다리고 있던 간부들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레디오 대위는 어디 간 거지?”

“레디오 대위님이라면 분명 조금 전까지 계셨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안 보이는군요.”

“시엘 중위는?”

“그 녀석은 애초에 내려오지도 않았어. 개인 훈련장 어느 곳에 처박혀 있을걸.”

간부들의 대화에 대대장이 눈을 들었다.

“잠깐. 시엘 중위는 지금 휴가 중이지 않았나?”

“예, 그래서 현재 개인 훈련장에서 홀로 훈련을 하고 있는 걸로…… 아.”

대답을 하고 있던 간부가 말을 끊었다. 뭔가 알아차린 얼굴. 그리고 다른 간부들에게도 그런 표정이 신속히 확산되었다.

뭔가 이변을 눈치 챈 이시브에게 대대장이 지그시 물었다.

“가 보지 않아도 되겠나?”

“누구에게 말씀이십니까?”

“자네 부대 대장 말일세. 조금 있다가 만날지도 몰라.”

미묘하게 미소조차 지은 얼굴로 대대장은 말했다.

“현재 두 사람은 훈련장 서측에서 북측으로 향하고 있네. 북측에는 특전대의 개인 훈련장이 설치되어 있지.”

이시브는 정성껏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간부들과 대대장까지, 모두가 측은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좀 전에 여기에 있던 레디오 대위와 시엘 중위는 우리 특전대에서도 최상위의 실력을 가진 검사들이야. 레디오 대위는 분명히 그 두 사람을 쫓아갔을걸세. 그리고 북측 개인 훈련장에는 시엘 중위가 기다리고 있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나?”

이시브는 잠시 후 그저 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

흔적도 남기지 않고 미연과 미소라가 북쪽을 향해 재빨리 이동한 후 조금 뒤. 10명의 특전대원이 쓰러진 자리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침착하게 기절한 병사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지나오는 길에 숱한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했으며 이곳에서도 그 절차는 마찬가지였다. 10명이 쓰러진 위치와 다친 곳을 꼼꼼히 살핀 후 그는 주변을 관찰했다.

그리고 이윽고 미연이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수풀에 눈을 고정시켰다.

“한 차례 포위당했다가 수풀에 숨은 후 기회를 틈타 습격, 한 번에 전부 쓰러뜨린 건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의 눈이 미연과 미소라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폰바스크 레디오. 특전대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이며 누구보다 병사를 생각한다는 평을 받는 간부였다.

허리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지그시 붙잡으며 그는 더 늦기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미연과 미소라의 뒤를 추적해 오던 레디오는 한순간 발을 멈추고 신중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향하려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이미 만난 건가.”

그것은 일종의 느낌이었다. 이론적이지 않은, 말로 하자면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눈치 챘다. 시엘과의 싸움이 벌써 시작된 것이다.

그는 뛰기 시작했다. 시엘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중위의 계급이지만 실력은 이미 대위급, 혹은 이상일 수도 있다. 특전대 내에서 자신과 대등하게 경합할 수 있는 자는 그녀뿐이었다. 진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우선 그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솔길을 달려 올라가 언덕 위에 서자 개인 훈련장의 정경이 한눈에 잡혔다. 대련용으로 만들어진 훈련장에서, 예상대로 두 사람이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캉!

진검과 진검의 충돌. 거센 음이 레디오 대위의 고막을 두들겼다. 한 순간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킬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였다.

“……과연, 이번엔 진짜로군.”

레디오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무도 없었던 언덕 위에 홀연히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가면과 모자로 얼굴 전체를 가린 그의 등장에 레디오는 반사적으로 검을 붙잡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제지했다.

“싸우는 것은 내가 아니다, 저 여자지. 내게 검을 꺼내들 필요는 없다.”

담담하기까지 한 발언이었으나 레디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하십시오.”

“말 그대로. 난 싸우지 않는다. 위해를 가할 생각도 없고. 검을 뽑아 들 시간에 저 대련이나 지켜봐라.”

“……당신은 누구지?”

“백두 부대 부대장이다.”

미소라는 가만히 고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길은 이미 두 사람의 싸움에 고정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접근을 눈치 채고 잠시 몸을 숨기기도 했지만 다행히 많은 부분을 놓친 것은 아니었다.

미소라는 묵묵히 미연의 싸움을 두 눈에 담았다.

검에 둔 손을 떼지 않은 채 레디오도 눈을 돌렸다.

“저 여자는 누구입니까.”

“백두 부대 대장. 저 여간부는 누구지?”

“키노 시엘 중위입니다. 모르는 겁니까?”

“처음 본 자니까. 괜찮은 실력이군.”

레디오는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실력이라…… 그쪽 대장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긴장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방심은 금물.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 바운스에서 저 여자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어.”

“……허풍이 심한…….”

“허풍이라고 생각한다면 계속 봐라.”

미소라와 레디오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그리고 레디오는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다 급기야 새어 나오는 말을 막지 못했다.

“이럴 수가…….”

시엘의 검이 하늘 위로 날아오른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똑바로 뻗어오는 검날을 피해 미연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궤도를 바꿔서 날아오는 검날.

좋은 반사 신경이야. 속으로 되뇐 후 그녀가 왼쪽으로 스텝을 밟자 그 공격은 다시 허망하게 빗나갔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고 다시 쇄도해 들어온 시엘. 한 발 내딛은 동작과 동시에 회수된 예인의 이빨이 미연의 목덜미를 노렸다.

휘이익!

“―!”

하지만 먹혔다고 생각한 순간, 그 공격 대상이 사라졌다. 눈을 돌렸을 때 미연은 이미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싱긋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제법인데?”

미연은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예인의 아래쪽을 쳐 날렸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으나 놀랍게도 이번엔 미연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하?”

보고 있던 미소라도 놀랐으나 당사자인 미연이 가장 놀랐다. 바운스에 떨어진 이후 공격이 먹히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얼굴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핫!”

깔막한 기합. 그리고 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을 꺾으며 뒤쪽으로 회피했다. 연속으로 들어오는 검날의 공격을 모두 각각의 자세로 피해 내면서 미연은 똑바로 시엘을 쳐다보았다.

대단하다.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

막아 낸 것이 아니라 피했다는 말은 눈과 반사 신경, 둘 다 대단하다는 말이다. 미리 알아채지 않으면 막았다가 검을 떨어뜨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아무리 원래 실력의 절반 정도밖에 내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공격을 피하다니!

건졌다, 한 명!

“너! 멋지잖아?”

환호성을 터뜨리며 미연이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여유롭게 회피만 하던 자세를 바꾼 것이다. 시엘이 얼음 같은 얼굴로 미연의 동작을 읽으며 검을 뻗었다.

우측 상단에서 내려치는 공격을 미연은 자연스레 칼을 들어 막아 냈다.

그리고 상쇄!

예인은 튕겨 나가지도 않고 부드럽게 미연의 칼 위에 안착했다. 시엘의 냉철한 얼굴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감돌았다.

“내 힘을…… 흡수해?”

“당학류 해검도의 방어술의 일종이야. 상대방의 힘을 흡수하여 공격을 정확하게 멈춰 내는 기술이지. 신기하지?”

“건방진!”

시엘이 예인에 힘을 넣어 미연의 칼 자체를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미연의 칼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예인의 힘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든 근력으로 미연의 칼은 예인에 완전히 붙어 있었다.

“넌 대체 누구냐! 이런 기술은 본 적조차 없다!”

“말했잖아? 백두 부대 대장이라고. 더 자세한 것은 네가 내 밑으로 오면 이야기해 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나와 싸우는 것에만 집중해. 좀 더 네 실력을 보고 싶으니까.”

면전에서 미연이 이죽거렸다. 나름 매력적인 눈길이었지만 시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검술이 상대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 건방진 입을 다물게 해 주지!”

발을 움직여 뒤쪽으로 물러난다. 공간이 생긴 틈을 타 폭발적으로 앞으로 뻗어 나온 찌르기! 예인의 예광이 한 순간 미연의 눈을 아찔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여유가 묻어나는 얼굴로 그 공격로로 자신의 칼을 집어넣는다!

“이럴 수가…….”

언덕 위의 레디오가 그런 소리를 내뱉은 사이 예인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시엘의 손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을 유영하던 검은 이윽고 팽그르르 돌면서 떨어져 땅에 꽂혔다. 흙바닥 깊숙이 박힌 예인을 시엘은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서, 설마…….”

무방비가 된 목으로 미연의 칼이 슬쩍 다가온다.

“졌지?”

히죽. 상쾌하기까지 한 선언 이후 미연을 칼을 집으로 되돌렸다.

“아하하! 재밌었다! 미소라, 얘도 집어넣어!”

미소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레디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허풍이라고 생각하나.”

“…….”

“길게 말하진 않겠다. 들어서 알고는 있겠지만 나와 저 여자는 백두 부대의 대원을 뽑고 있다. 자격은 지금처럼 저 여자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막아 내는 자. 하지만 그 이상의 실력을 보였으니 시엘 중위는 우리 밑으로 들어올 것이다.”

“……저 대장과 검을 겨루면 되는 겁니까?”

“그것이 일종의 시험이다.”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문 레디오의 표정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모습에 미소라는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시엘을 내버려 두고 언덕을 다시 올라오려고 하는 미연을 향해, 레디오가 발을 내딛었다.

오솔길 중앙쯤에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쳤다.

“당신이 백두 부대의 대장입니까?”

“맞아. 넌 누구?”

“레디오 대위라고 합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시엘 중위를 백두 부대로 데려갈 생각입니까?”

“맘에 들었으니까 그럴 거야.”

“그럼 우리 특전대에서는 한 명의 인재가 빠져나가는 겁니다.”

“알 게 뭐야. 난 얼른 백두 부대를 편성해야 하는걸? 이건 테리의 명령이란 말야.”

테리가 텔리오트 이황자를 말하는 것임을 레디오는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황자 저하를 애칭으로 부르는 이 여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의심하면서도 레디오는 시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수상쩍으나 그 실력은 정말이었다. 적어도 시엘보다는 위다.

“이런 식으로 시험을 계속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마흔 명이 넘었나.”

미연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실력은 있어 보이네? 어차피 모든 사람을 시험해 봐야 하고…… 좋아, 요는 네가 내 밑에 들어올 만한 인재인가 하는 거야.”

“네?”

영문 모를 말을 내뱉은 후 미연의 팔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칼을 뽑았다. 허리춤에서 곧바로 발검! 간격을 찢어발긴 칼의 궤도상에서 레디오는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미연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디오의 몸이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검도 반쯤 뽑아냈다. 그렇지만 이미 미연의 칼을 그의 심장 부근에서 멈춰져 있었다.

죽이겠다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은, 위협에 가까운 공격이었으나 레디오는 그것을 훌륭하게 피해 냈다. 그가 피했기에 미연의 공격도 망설이지 않고 심장 쪽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반쯤 검을 꺼낸 상태에서 레디오는 소리쳤다. 그 말을 미연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미소라! 얘도 괜찮겠어.”

“……뭡니까, 대체?”

여전히 영문을 모르고 있는 레디오에게 미연은 경쾌하게 말해 주었다.

“시험이야. 내 밑에 올 수 있나, 없나. 그리고 합격!”

“잠깐…… 이런 식으로 끝내도 되는 겁니까?”

“뭐야, 싫어? 진짜 정식으로 뜰까? 아직도 두들겨 줘야 할 것들이 많아서 일일이 힘 빼기 싫어. 귀찮아, 네 실력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저기 쟤 끌고 내 밑으로 와.”

손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미연은 그를 지나쳤다. 미소라와 합류해서 곧바로 개인 훈련장으로 뜨려고 하는 그녀를 레디오가 달려가 붙잡았다.

“잠깐! 계속할 작정입니까?”

“응? 당연한 거 아냐? 아직 반도 못했는데?”

“저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히 훈련에 방해를 받고 있단 말입니다!”

“허허, 훈련은 실제 같아야지. 이런 훈련도 긴장감 있고 좋지 않아? 명확한 적이 있으면 효과도 두 배가 될 거야.”

죄책감 같은 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두고 나온 듯 산뜻한 태도였으나 레디오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고 떠나려는 그들 앞을 막아섰다.

“여기서 그만둬 주십시오. 제가 당신들을 따라온 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뭐?”

“어차피 일반 병사들은 저보다, 시엘 중위보다 약합니다. 당신들의 눈에 들 만한 녀석을 찾기가 더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쑤시고 다니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뭐, 그거야 그렇지만 말야. 일반 병사 중에 꽤 싹수가 보이는 놈도 있었다고.”

“압니다, 저도 봤습니다. 제 부하들이니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군인으로서도 검사로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녀석들입니다. 이 이상 그들의 훈련을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확고한 태도였다. 미연은 미소라와 눈을 마주쳤다. 어쩌라는 거냐는 듯 마주 보는 미소라의 눈빛에 머쓱하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문득 걸음 소리를 느껴 뒤를 돌아보자 시엘이 언덕을 올라와 있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나도 부탁하지. 이 이상 부하들을 괴롭히지 마라.”

개인 훈련장에 틀어박혀 있던 시엘도 레디오의 말에서 유추하여 사태를 파악했다. 어쨌든 지금 그들은 특전대의 간부고 병사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레디오가 직접 달려올 정도라면 눈앞의 두 명이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지는 뻔할 뻔 자였다.

두 사람의 진심을 담은 부탁. 아무리 제멋대로인 미연이라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근처의 돌을 발로 차 날렸다.

“에이, 재미없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만두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그만두면 될 거 아냐. 그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무엇입니까?”

“너희 둘, 무조건 내 밑으로 와. 알겠지? 약속하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들을 쓰러뜨리고 훈련장 전체를 엎어 버릴 거야.”

가면 속에서 도전적인 눈빛이 언뜻 비친 듯했다.

“어쩔래?”

레디오와 시엘, 두 사람에게 더 이상의 선택권이란 없었다. 달리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았어.”

특전대 합동 훈련을 뒤엎은 미연과 미소라의 행적은 이 자리에서 끝을 맺었다.

잠시 후 통제실. 소식을 알려온 병사가 대대장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을 사태는 기어코 진정을 보이는 듯했다.

“다행이군. 그만두었다니…….”

대대장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잠시 후 레디오와 시엘가 동시에 나타나 전출 신청을 요청했을 때는 결국 졸도할 뻔했다.

***

이시브의 보고서를 텔리오트는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지난 일주일간의 성과란 말이군.”

“네, 대원 편성도 대략적으로 해 놓았으니 검토해 주십시오.”

“알았어. 잘 읽어 보지.”

인사를 하고 이시브가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기를 기다린 다음 이시브의 보고서를 펼쳤다.

백두 부대 대원 편성표

지난 일주일간. 미연과 미소라, 이시브는 특전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부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병사, 간부를 가리지 않고 미연의 실력으로 시험을 치러서 자격에 맞는 이들을 골라냈다.

그 결과가 이 편성표에 올라 있는 17명. 셋을 합쳐 스무 명이 되는 이 인원이 오늘부터 백두 부대로서 활약할 것이다.

가면 아래에서 텔리오트는 진하게 웃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 웃음의 의미는 모호했지만 서명을 하며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매우 진지했다.

“한동안 잘 부탁해, 미연.”

같은 때, 미연은 먼저 대원들을 백두 부대 전용 훈련장에 모았다. 제각각 훈련을 받던 부대도 다르고 활동하던 영역도 달랐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미연에 대한 일종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을 느끼는 것은 미소라와 이시브만이라는 게 문제지만.

총 17명의 인원이 모인 자리에서 미연을 자신만만하게 인사했다.

“새로 인사하지. 내가 백두 부대의 대장 신미연. 그리고 이 녀석이 부대장 미소라. 그 옆이 분대장인 이시브. 이름이 뭐였더라? 뭐, 기억 안 나니까 그런 나중에 따로 묻도록 해. 난 딱히 궁금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 세 명과 너희들 열일곱 명이 오늘부터 이황자 직속 호위 부대, 백두 부대의 인원이야. 서로 통성명은 했어?”

그들의 진지한 눈빛 따위는 알 바 없다는 듯이 미연은 자기 할 말만 해 버리고 17명 사이를 누볐다. 각자 인사를 시키고 자신도 기억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름을 묻고 다니는 모습이 평범한 대장 같진 않았다.

“뭔가…… 저렇게 보고 있자니 대장으로서의 위엄은 전혀 없군요.”

“동감이다.”

이시브와 미소라가 저마다 한마디 내뱉는 사이 미연은 한 바퀴 돌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자,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밝은 그녀의 인사를 제대로 받아 주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너무나 썰렁한 반응이 미연으로선 기대 외였는지 미소라에게 슬쩍 수군댔다.

“얘네들, 어두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테지.”

미소라는 한숨을 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미연은 그걸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시브에게 오늘 훈련 내용을 물었다.

미연이 효과적인 훈련 계획을 짤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이시브가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곧 이시브가 알려 준 계획대로 훈련에 들어갔다. 미연이 목표로 한 것은 전 인원이 검술은 물론 웬만한 무기는 다 다룰 줄 아는 다목적 부대였다.

그것은 30년 전 그녀가 로츠왈드 왕국에서 이끌었던 부대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우선적으로 검술은 미연이, 단검술은 미소라, 그리고 궁술은 이시브가 맡게 되었다.

“다른 기술들도 한참 남았으니까 얘네들 쓸 만하게 만들려면 시간 엄청 들겠는걸.”

부대원들이 결코 나쁜 실력이 아니었다. 다만 미연의 눈이 너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든 계획에 따라 세 명은 부대원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미연이 연습용 검으로 두들기고 미소라가 체술로 쓰러뜨리고, 상대적으로 실력이 달리는 이시브는 이론적으로 훈련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고 해도 훈련이 쉬이 이어 나간 것은 아니었다.

“이봐! 한판 붙어.”

하루가 지났을 때 미소라에게 단검술을 훈련받고 있던 대원 하나가 미소라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원래는 일황자파였으나 특전대 훈련 중 미연에게 쓰러진 후 억지로 백두 부대에 들어오게 된 자였다.

“분명히 난 저년한테 지기는 했어도, 너한테 지진 않았어. 어떤 놈인지 몰라도 네놈이 나를 가르칠 정도가 된다는 거냐?”

미소라의 가면을 가리키며 도전적인 눈빛을 던지는 남자. 일순 훈련의 분위기가 사라졌다. 미연과 이시브도 그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엉? 뭐야, 무슨 일?”

“대원 하나가 부대장님에게 도전을 한 것 같습니다. 저 자는 분명 대장님이 데리고 온 그 자이군요.”

“아, 그 녀석? 이름이 뭐더라? 솔파미도?”

“솔파 미티스입니다.”

미티스. 그에게 주의를 준 것은 미연에게 검술 훈련을 받고 있던 레디오였다.

“그만해라. 부대장님께 무슨 짓이냐.”

“웃기지 마십쇼, 대위님. 대체 대위님이나 제가 이 녀석들 밑에서 뭐 때문에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실력이 우리들보다, 아니 대위님보다 좋습니까?”

그는 아직 인정을 못 하고 있었다. 최소한 특전대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레디오가 저 여자에게 져서 이 부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게다가 자신의 단검술이 눈앞의 가면 남자에게 밀린다는 사실도 말이다.

“납득이 안 가. 그러니까 한판 붙자! 내가 진다면 전부 다 포기하고 너희들 밑에서 기어 주지. 그 대신 내가 이기면, 여기서 나가겠다. 어때?”

미소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눈을 돌리지 않고 미티스를 쳐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미연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미연은 가면 속에서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소리쳤다.

“좋아, 모두 휴식! 쉬면서 저 녀석이 깨지는 모습을 지켜보자!”

레디오는 한숨을 쉬고 결국 미연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금세 대결 구도는 형성되었고 모두가 편하게 앉은 채로 미소라와 미티스, 두 사람의 대결에 시선을 모았다.

“죽이지 않을 정도로만 다뤄 주지.”

연습용 단검을 양손에 잡은 채 미티스가 자세를 잡았다. 그도 분명 뒤떨어지는 실력은 아니었기에 기본 자세에서도 어느 정도 무게감이 드러났다.

그에 비해 미소라는 묵묵히 단검을 들었을 뿐 별다른 포즈는 취하지 않았다. 미티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때 장외에서 이시브가 말을 던졌다.

“미티스, 원래 단검술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알고 있나?”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미소 족의 숲지기들 아닙니까. 장검을 휘두르기 어려운 숲에서의 전투에 최적화된 기술로서 발전된 것이 단검술이라는 걸, 군인 중에 모르는 이가 없을 겁니다.”

“잘 아는군. 그래, 그렇다면 잘 싸워 봐.”

저 인간은 왜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런 중요한 순간에.

속으로 내뱉은 미티스가 호기롭게 웃은 다음 순간, 그는 깨닫고 말았다. 이시브의 그 말이 경고라는 사실을.

눈을 돌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미소라의 가면이 사라졌다. 아래쪽이라는 것을 감지하여 두 번째 발에서 무게중심을 왼편으로 이동시킨 순간, 그곳에 있어야 할 기척이 사라졌다.

어디 간 거지! 들리지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단검을 가슴 앞에서 교차하여 뻗으려는 그 찰나, 팔과 가슴 사이에 날카로운 빛이 꿰뚫고 들어왔다.

최종적으로 세 걸음을 내딛기 전에 모든 상황은 끝이 났다. 미티스는 자신의 명치 앞에 고정된 단검을 내려다본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에이― 너무 쉽게 끝났잖아. 좀 더 재밌게 해 줘 봐.”

“너의 재미를 위해 싸운 게 아니다.”

미소라가 단검을 거두었다. 불만스럽게 흥흥대고 있는 미연을 무시하고 그가 미티스를 돌아보았다.

“제법 괜찮은 실력이었지만 자만하지 마라. 세상에 너보다 강한 자는 얼마든지 있다. 그 점을 잊지 말도록.”

미티스는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 그 자세로 굳어 있었다.

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난 후 미티스가 미소라에게 시비를 거는 일은 사라졌다. 당연히 미연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부대 전체의 기강이 점차 잡혀 간다는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훈련이 일주일 정도 지난 후 미연이 아침부터 이시브를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오늘 오전 훈련은 미소라하고 둘이서 좀 해.”

“어디 가십니까?”

“테리한테 가 볼 일이 생겨서 말야. 잘 부탁해!”

그 말만 남겨 놓고 미연은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을 거꾸로 떠나갔다. 궁금해 하면서도 이시브는 먼저 훈련장으로 간 미소라의 뒤를 따라 달렸다.

이시브와 헤어진 후 미연은 곧바로 텔리오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럭커 시종장을 만나 텔리오트가 있는지를 물은 다음 곧바로 들이닥쳤다.

“좋은 아침!”

“……아아, 괜찮은 아침이야.”

텔리오트는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미연을 반겼다. 문을 닫고 그의 반대편에 앉은 미연이 그의 가면을 훑어보았다.

“뭐야, 몸 상태가 꽤 안 좋아 보이는데?”

“어젯밤에 조금 무리했나 봐. 그 녀석들, 딸 생일인데 왜 나를 먹이는 건지 모르겠어.”

“아하, 과음하셨나 보구만?”

텔리오트의 야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황위 계승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만큼 예전처럼 자주는 못 나가지만 그만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요즘도 황성을 넘는 텔리오트의 모습을 미연은 심심찮게 창문 밖으로 목격하곤 했다.

“황자 짓도 참 할 게 못된단 말야. 좋은 정보는 얻었어?”

“일황자 쪽에서 서부의 큰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잡았다고 해. 판샤란 산맥에 숨어 있는 녀석들의 꼬리를 붙잡아서 조만간 작전에 들어간다고 하더군. 그것 말고는 별로 없었어. 일황자파도 정보전을 의식하고 있을 테니까.”

“흐응, 황제 자리 물려주기도 쉽지 않고 말야.”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자리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텔리오트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미연이 용건이 있어서 왔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연도 텔리오트의 자세가 바뀌자 덩달아 상체를 등받이에서 뗐다.

“일거리 좀 줘 봐.”

“일거리?”

“응. 실전만 한 훈련은 없는 법이야. 빨리 싸워 봐야 애들도 정신을 차리지.”

여전히 미연다운 방식이었다. 텔리오트는 헛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이내 포기했다.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은 여자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그냥 맞춰 주기로 했다.

“백두 부대원들이 불쌍하군. 너 같은 여자가 대장이라니.”

“이런 나를 대장으로 만든 사람이 누군데 그래? 잔말 말고 일거리 내놔.”

사채업자가 빚을 받으러 온 듯한 태도였다. 텔리오트는 킥킥 웃음소리를 내더니 의자 뒤쪽에 늘어져 있던 끈을 당겼다. 그 끈은 문밖으로 연결되어 시종실까지 이어진 것으로, 그 끝에는 종이 매달려 있어서 시종을 호출할 때 쓰인다.

얼마 안 돼 시종이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부르셨사옵니까, 저하.”

“럭커 시종장에게 동부 반란군에 관한 보고서를 들고 오라고 해. 백두 부대 대장이 찾는다고 말야.”

시종은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럭커가 보고서를 챙겨 들고 집무실로 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때마침 좋은 보고가 올라온 참입니다.”

럭커는 텔리오트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아직 정식 보고 형식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좀 전에 들어온 것이라 작성 중이었습니다. 적혀 있다시피 반란군들의 모임이 조만간 있을 거라고 합니다.”

“로미트랩 시라…… 가까운 도시로군.”

“로미, 뭐?”

서류를 대충 훑어본 텔리오트가 미연에게 설명했다.

“시디 노트니에서 걸어서 사 일 정도 걸리는 거리에 로미트랩이라는 중소 도시가 있어. 도시 크기상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없고 근처 다른 중소 도시와 함께 통합관리되는 지역인데, 그곳에 조만간 반란군들의 모임이 있을 거라는 정보가 들어온 모양이야. 보고상으로는 일주일 안일 거라고 하는군.”

“흐음―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해?”

“첫 임무가 될 테니까 간단해. 그곳으로 가서 반란군이 모이는지 조사해 줘. 혹시 모인다면 어떤 일인지 알아내도록.”

“응? 내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다르잖아.”

“부수고 싸우는 일만이 임무인 건 아냐. 앞으로 백두 부대는 이런 일들도 해 줘야 해. 우연찮게 알맞은 임무가 들어왔다고 생각해 줘. 뭐, 어쩌다가 일이 잘못되면 알아서 해결해도 괜찮아.”

“그 말은…… 싸워도 된다는 말?”

“그럴 상황이 생긴다면.”

텔리오트는 그 자리에 지령서를 써 갈겼다. 향해야 하는 방향과 임무에 관한 간단한 하달. 그 종이를 받아든 미연은 읽어 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녀올게!”

“무운을 빌지.”

손을 흔들며 집무실을 나서는 미연을 쳐다보며 럭커가 지그시 입을 열었다.

“잘해 내겠습니까?”

“잘할 거야. 그래야 투신의 전사 소리는 들을 수 있지 않겠어?”

둘의 대화는 지극히 의미심장하기만 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말든 미연은 지령서를 팔랑팔랑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훈련장에 도착했다. 미소라와 이시브가 각각 대원들을 맡아 훈련에 한창이었는데,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미연은 페이스가 조금 늘어질 즈음 훈련장으로 내려갔다.

“자자, 모두 알릴 사항이 있으니까 잠시 휴식!”

미연의 도착에 모두가 동작을 멈추었다. 미연은 총총히 다가가 이시브에게 지령서를 넘겼다. 땀을 닦은 후 지령서를 읽어 내린 이시브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이게 첫 임무입니까?”

“응.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일찍 실전을 경험해 보는 편이 나을 테니까 말야. 일거리 달라고 닦달했더니 주더라고. 이 정도면 괜찮지?”

“네. 뭐,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만.”

이시브는 지령서의 내용을 대원들에게 알려 주었다. 갑작스럽게 내려온 임무였지만 모두의 수군거림도 금방 잦아들었다. 제법 잘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연은 히죽 웃은 후 대원들 앞에 섰다.

“되도록 빨리 도착해야 하지만 훈련도 있으니까 행군으로 갈 거야. 점심을 먹고 곧바로 출발할 테니까 모두 준비하고 다시 훈련 장소로 집합하도록. 알았지?”

“저기― 잠깐, 대장님. 전부 다 데리고 가실 생각입니까?”

“어. 그럼 안 돼?”

이시브는 약하게 한숨을 지었다.

“백두 부대는 일단 직속 호위 부대입니다. 이런 임무를 받더라도 모든 인원이 황자 저하의 곁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그럼 어떡해. 얘들 전부 훈련이 필요한걸?”

“임무는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겁니다. 대장조만으로 임무를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대장조는 그 다음에 하고?”

이치로는 그 편이 맞다. 호위 부대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는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되니까. 미연은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같은 가면을 쳐다보았다.

“미소라, 안 따라가도 돼?”

“난 상관없지만 남아야 된다면 남겠다.”

“할 수 없지 뭐. 이번에는 대장조만 데리고 가고, 나머지 애들은 다음 임무를 기다릴 수밖에.”

미연은 결정을 내렸다. 대장조는 미연과 이시브, 그리고 나머지 여덟 명의 대원들로 구성된다.

대원들에게 점심을 먹은 후 행궁 준비를 하고서 모이도록 명하고서 미연은 한 번 더 텔리오트의 집무실에 들렀다. 그곳에서 임무 출발을 알리고 돌아오자 이미 대장조가 모두 모여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나 없는 동안 훈련 빼먹으면 안 된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냐.”

가볍게 대꾸하는 미소라의 부대장조를 남겨 놓고, 미연을 필두로 대장조가 첫 번째 임무 수행에 나섰다.

***

로미트랩 시는 지령서 그대로 걸어서 4일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미연은 그대로 4일 걸려서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방향을 잡고 루위스를 나서자마자 그녀는 이렇게 선언했다.

“최소한 삼 일이야. 그 정도는 걸을 수 있지?”

특전대 출신의 레디오는 가볍게 주억댔다. 하지만 나머지 이들은 아니었다.

3일이라는 건 잠잘 시간도 아껴 가며 걷는다는 말이었다. 눈치를 보며 차마 할 말을 못하고 있는 대원들을 보며 미연은 씨익 웃더니 무턱대고 출발해 버렸다. 결국 군말 없이 대원들이 그녀를 뒤따랐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진짜 전쟁이라도 나면 이 일 주파도 해야 할 일이 있을걸?”

전쟁이 날 리는 없지만.

미연은 히죽 웃고서 이시브를 앞세웠다. 지도를 보며 시브가 대장조를 이끌고 로미트랩 시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실제로 3일째 밤이 되었을 때, 대장조는 로미트랩 시 근처 야산에서 뻗어 버렸다.

“후우…… 이거 제법 힘들군요.”

대원들의 군기를 잡는 이시브의 얼굴에도 피로함이 그득했다. 같은 짐을 메고 왔음에도 가장 멀쩡한 것은 미연이었다. 애초에 체력의 근본부터 다른 그녀는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대원들을 살폈다.

“고작 삼 일 행군한 거 가지고 이러면 안 되지. 우리나라에서는 지도 하나 가지고 한 달 동안 행군하는 부대도 있는데 말야.”

“동쪽의 나라는 대단한 나라로군요.”

“레디오, 특전대에서도 그런 훈련은 있지 않아?”

“있긴 합니다만 한 달까지는 아닙니다.”

특전대 출신인 레디오도 3일 동안 쉬지 않고 걸어온 탓에 꽤 지쳐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훨씬 멀쩡했기에 미연은 그와 이시브에게 대장조를 맡겼다.

두 사람의 지휘로 대원들은 피로를 참고서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로미트랩 시가 멀지 않은 곳이라 반란군에게 낌새를 들키지 않으려면 야영지 선정부터가 중요했다. 그리고 이시브는 아주 탁월하게도,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로미트랩 시 쪽을 수월하게 지켜볼 수 있을 만한 장소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야영지를 만든다. 실시!”

이시브와 레디오의 지시를 따라 대장조가 신속하게 야영지를 형성했다. 경계지를 잡고 잘 자리를 선정하고, 그런 작업들을 두 사람은 척척 해냈다.

한쪽에서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미연은 별 할 일도 없었다.

야영지를 만들어지자 미연은 지체하지 않고 대장조에게 휴식을 지시했다. 미연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녀가 잠이 들었다고 판단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소리 내지 않고 모두 취침에 들어갔다.

잠시 후. 야영지에 정적이 찾아들어 풀벌레 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을 때, 미연이 조심스레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를 굴려 불침번마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확인한 미연은 조용히 야영지를 빠져 나왔다. 물론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작은 돌을 던져 졸음에 허우적대는 불침번을 깨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은 오솔실로 빠져 나온 미연은 한 차례 로미트랩 시를 내려다보았다. 간간히 불빛이 보이긴 하지만 도시 전체가 고요했다.

“역시 지붕 위가 잘 보이겠지?”

가장 높은 곳을 찾아보다가 그녀는 도시 중앙에 삐죽 서 있는 탑을 하나 발견했다. 종탑인지 뭔지는 어두워서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저기 위에 올라가면 도시가 한눈에 보이겠다고 미연은 태평하게 생각했다.

목적지를 정한 그녀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야산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중소 도시다 보니 검문소의 경비는 도시 청년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기본적인 군사 훈련밖에 받지 않은 탓에 이 시간쯤 되자 죄다 졸고 있었다. 들키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깃털 같은 발걸음으로 도시 외곽을 걸어 들어간 미연은 주변을 살펴보고 가장 멀쩡하게 생긴 건물 위로 뛰어올라갔다.

골목으로 들어가 벽돌로 된 옆벽을 두어 번 걷어찬 뒤 무리 없이 지붕 위에 안착한다. 누군가 봤으면 우선 감탄하고 볼 몸놀림이었다.

“흐음. 정말 조용하네.”

시디 노트니는 아무리 이 시간이라도 시끌벅적한 곳이 있다. 텔리오트가 다니는 그 홍등가만 하더라도 지금이 제일 장사가 잘될 시간이니까. 뭐, 수도하고 비교하면 안 되려나? 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붕을 총총히 뛰어 탑에 가까이 갔다.

일단 순찰처럼 돌아다니는 이들은 있었지만 그렇게 열의는 없어 보였다. 평화로운 모습이라 미연은 별 시비 걸지 않고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다녔다. 예상대로 가까이에서 본 탑은 머리 부분에 종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이시브한테 저 종이 뭔지 물어봐야지.”

수도에 온 이후로 백과사전 대용으로 쓰고 있는 이시브에게 물어볼 질문을 머릿속에 담아 둔 채, 미연은 바닥에 뛰어내렸다.

탑을 한 바퀴 돌았지만 입구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충 눈으로 짐작해서 4층 높이 정도 되어 보이는데 저기 위로 어떻게 올라가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도로 지붕 위로 올라가서 미연은 칼을 뽑아 들었다. 달빛에 반사되는 빛에 유념하면서 탑과의 거리를 쟀다.

이미 전투 감각이 깨어난 상태. 순찰이 없는 틈을 타 미연의 다리가 유령처럼 지붕을 박찼다.

순간, 그녀가 허공을 높게 날아올랐다.

최대한의 움직임으로 2층 높이 가까이까지 뛰어오른 그녀가 탑 옆면에 칼을 박아 넣었다.

푸욱!

돌진한 힘까지 더해져 단숨에 탑의 벽을 뚫고 들어간 칼! 미연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칼을 밟고 올라섰다.

달빛에 비친 탑의 벽돌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가락이 들어갈 틈은 있었고, 미연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칼에 앉은 채 몸을 구부렸다가 점프, 동시에 손을 뻗어 벽돌을 손가락 끝으로 붙잡았다.

이어서 칼을 도로 집으로 돌려놓고 양손으로 탑벽에 붙은 채 숨을 짧게 끊었다. 다음 순간, 벽에 붙어 있던 미연의 몸이 달빛의 공중을 날아올라 종이 있는 탑 꼭대기로 날아 들어갔다.

탑 아래쪽에서 순찰을 돌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제법 재밌는걸, 이거?”

한국에 있을 때도 암벽 등반은 해 본 적 없지만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나중에 돌아가면 태진이하고 한번 해 봐야지. 반드시. 그런 결심을 하면서 미연은 고개를 탑 바깥으로 내밀었다.

과연 도시의 모든 정경이 보였다. 심야라서 이런 곳에 사람이 올라올 일도 없으니 미연은 대놓고 바깥을 둘러보고 시작했다.

도시의 바깥에서 안까지, 빠짐없이 찾아보던 그녀의 눈에 이윽고 무언가가 붙잡혔다.

도시의 중간쯤. 외곽 지역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온 곳이었다. 순찰이 지나간 지역에 몇몇 그림자가 움직였다. 처음엔 못 보고 지나칠 뻔한 미연도 뭔가 낌새를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렸다가 그 모습을 목격했다.

그림자들은 조심스레 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미연은 놓치지 않고 그들을 쫓아 탑을 벗어났다.

탑벽을 타고 뛰어내려 놓고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못하는 움직임으로, 미연은 재빨리 그들을 추적했다. 그들의 그림자가 보인 방향을 향해 지붕 위를 달리는 것이다.

머지않아 그림자들을 따라잡았다. 그들은 로미트랩 시를 벗어나 이동 중이었다. 미연도 그들이 지나간 길을 뒤따라 검문의 눈을 피해 도시 밖으로 나왔다. 방향으로 치자면 야영지가 있는 야산과 반대쪽이었다.

그림자는 다섯 명 정도였다. 달빛 아래에서 평원을 속보 중인 그들의 방향은 도시를 둘러싼 또 다른 야산으로 향해 있었다.

야산으로 향한 그들은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라 미연도 먼 곳에서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한참 뒤 수풀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 다른 한 남자가 다섯 명을 아는 체하더니 이윽고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미연은 수풀에 가까이 다가가서 위치를 확인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달빛이 닿지 않는 숲이라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다.

미연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돌아섰다.

“졸려.”

그녀는 그 길로 로미트랩 시를 빙 둘러서 야영지로 돌아왔다.

야영지에 도착하여 펴놨던 자리에 도로 기어 들어가려 했을 때 인기척을 느낀 이시브가 졸고 있던 불침번을 혼내고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응, 그냥.”

미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시브는 껄끄러운 얼굴로 잠에 빠진 그녀를 내려다보다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대고 도로 자리에 누웠다.

미연이 눈을 뜬 것은 점심나절이었다. 취사 담당 대원이 점심을 만들고 있고 이시브의 지휘로 야영지 근처의 순찰을 돌던 대원들이 돌아온 시점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으응― 오랜만에 밖에서 잤더니 영 찌뿌둥해.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아.”

“그런 것치고는 매우 잘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어디서든 잘 자는 게 내 장점이야.”

앞뒤 안 맞는 말을 해 대면서 미연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적당히 몸을 풀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놈들을 발견했어.”

대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시브가 눈을 크게 뜨고 미연을 돌아보았다.

“누구를 말입니까?”

“어젯밤에 로미트랩에 다녀왔거든. 거기서 웬 녀석들이 몰래 시외로 빠져나가는 걸 봤어. 저쪽 반대편 숲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 같던데? 증거는 없지만 그 녀석들일 것 같은데.”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됩니다.”

“레디오는?”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미연은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 저녁에 가 보자. 해가 지면 곧장 그쪽으로 이동해서 숨어 있다가 녀석들의 뒤를 밟는 거야. 사실 어젯밤에 따라갈까 하다가 갑자기 잠이 와서 그냥 도로 왔거든. 어쩌면 오늘도 모일지 모르니까 가 보자. 다들 알았지?”

임무 수행이라기보다는 가볍게 나들이라도 나온 듯한 분위기였다. 이런 상관은 모셔 본 적이 없기에 대원들의 반응은 조금 느렸다. 한 차례 더 미연이 묻고 나서야 모두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점심 식사를 한 대장조는 야영지를 정리하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석양이 사라지고 어슴푸레한 별빛만이 남았을 때 야산을 벗어나 미연의 지휘 아래 반대쪽 야산으로 옮겼다.

“여깁니까?”

“응, 아마 맞을 거야. 수풀 냄새가 적절한 곳이었어.”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장소를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시브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미연이 지정한 장소를 둘러쌀 수 있는 대열로 대원들을 숨게 만들었다. 만약 놈들이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자정이 지나고 나서일 것이다. 이시브는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며 대원들을 독려했다.

수풀 안에서 간이로 저녁 식사까지 하며 모두가 기다림에 지쳐갈 즈음, 선두에 있던 미연이 문득 눈을 돌렸다.

“온다.”

지도를 펼치던 이시브의 행동이 멎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다섯 명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원들이 긴장을 하며 좀 더 깊이 몸을 숨겼다.

“저 자들입니까?”

“맞을 거야. 걸음걸이가 비슷해.”

어둠으로 외모를 알 수는 없다. 대신 그녀가 기억한 것은 그들의 걸음이었다. 대장조가 숨어 있는 앞을 지나 그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풀 앞에서 잠시 이동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수풀 속에서 한 남자가 나와 그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가자.”

미연의 명령이 떨어지고 이시브가 대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출발 전 미연이 한 말이 있었다. 이것을 추척술 훈련이라고 생각하라. 대원들은 그 지시를 똑같이 떠올리며 앞서는 미연의 뒤를 따랐다.

남자들은 숲 깊숙이 들어갔다. 어두운 숲을 익숙하게 헤치고 간 그들이 다다른 곳은, 이런 숲 속에 있을 거라고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산채였다.

산채가 보이는 지점에서 미연은 손을 들어 대장조의 이동을 멈췄다. 이시브와 레디오가 그녀의 주변으로 모였고 나머지 대원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자리했다.

“이런 곳에 있었군요.”

“밖에서 봐서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장소입니다. 비밀 모임에는 적절한 곳입니다.”

“역시, 냄새가 났다니까?”

남자들은 산채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 밖으로 불빛이 비췄다. 거리가 있기에 인원이 몇 명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산채의 크기상 20명 안팎일 거라고 그들은 의견을 나눴다.

대뜸 미연이 내뱉었다.

“가서 엿듣고 올게.”

무작정 가려는 미연의 팔을 이시브가 붙들었다.

“안 됩니다! 혼자 가실 생각입니까?”

“나 혼자만 갔다 오면 되잖아. 설마 다 몰려갈 생각이야? 혼자서 갔다 오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해. 걱정 마.”

“아무리 그래도 대장님이 직접, 그것도 혼자서 가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얘네들은 다 훈련 중이라구. 여기서 위험에 빠뜨리게 하고 싶진 않아.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녀석들과 싸우지 않아도 돼. 정체가 뭔지만 일단 파악하면 되니까 나 혼자 갔다 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미연도 30년 전 로츠왈드 왕국에서 한 부대를 이끌던 자다. 부하에 대한 생각도 충분히 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점에서 보이는 것이다. 그 완고한 태도에 이시브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고, 미연은 두 사람에게 대장조를 맡긴 채 홀로 산채로 향했다.

산채는 높은 나무에 둘러싸여 일반적이라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미연에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눈으로 대충 산채 주변의 나무를 가늠해 보더니 가까운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라갔다.

그 움직임을 본 대원들이 무심결에 우와―! 하고 소리를 냈다가 이시브에게 주의를 받았다.

그 사이 미연은 나뭇가지 사이를 원숭이보다 빠르게 이동하여 산채로 접근했다. 자칫 잘못하면 나무 밑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나뭇가지를 밟고 휙휙 옮겨 다니더니 어느새 산채 가까이에 도착하여 그 지붕 위로 뛰어내렸다.

산채 밖에는 경계를 서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산채 주변을 돌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위를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미연은 그들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며 지붕 위에서 내려왔다. 2층으로 지어진 산채였기에 2층 난간에서는 비교적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몇 개의 창문을 두들겨 열린 곳을 찾은 다음 재빠르게 산채 안으로 침입했다. 들어간 직후에 잠시 바깥 상황을 살피며 숨을 죽였지만 아무도 눈치 챈 자는 없었다.

망설이지 않고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가까이 갔을 때, 미연은 그곳에서 몸을 엎드렸다.

아래쪽의 이야기가 조금씩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는 청력을 쏟았다.

“……황성 쪽이 심상치 않다는 건 다들 알 거야. 그동안 일황자 때문에 서부 동지들이 힘들었던 건 알고 있지?”

“서부만이겠어? 우리도 대충 들어 알고 있어. 이황자가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던데, 이황자라면 동부잖아?”

“젠장, 그 늙은이가 손 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두 번째 황자 놈이야?”

“자자, 조용히 해.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어쩔 수 없잖아? 힘을 모아야 해.”

적어도 다섯 명 이상. 직접 발언하는 자는 몇 명 없었지만 느껴지는 기척으로 보아 최소한 열 명 이상은 모여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연은 호흡을 조절하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들의 대화로 짐작건대 이곳은 근처 소규모 반란군들의 총채인 모양이었다. 중소 도시가 모여 있는 곳이라 특성상 반란군도 큰 규모로 모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그들의 동맹 비슷한 것을 만든 것이다.

이 산채가 바로 기점이 되는 총채였고, 이들은 각 반란군들의 대표였다.

미연은 금방 감을 잡았다. 이들은 새롭게 황위 계승전에 뛰어든 이황자의 일로 모인 것이었다. 동부를 맡게 된 그의 행보에 따라 그들 반란군의 대처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가는 의견은 많았지만 결국 그들의 결론은 이황자의 행동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귀결되려 했다.

이야기가 끝나가려 할 즈음, 미연은 분위기를 읽으며 일어섰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은 듯했다.

그러니까 이젠―

다음 순간, 미연이 2층에서 1층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당―!

2층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1층으로, 반란군이 잔뜩 모인 한 가운데에 떨어진 것이다.

“아차차차!”

먼지가 가라앉은 다음 기침을 콜록대며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남자들의 흉흉한 얼굴이었다. 가만히 그들을 둘러보고 나서 미연은 히죽 웃는다. 가면 탓에 당연히 남자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누구냐?”

남자 중 하나가 말했다.

“2층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건가? ……잡아!”

그들의 행동은 빨랐다. 사방에서 동시에 미연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녀가 남자들의 팔을 뿌리치고 뛰어올랐다. 한 남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그 등을 밟고 반대편에 보이는 문을 향해 뛰었다.

“잡아라!”

문을 박차고 달려 나왔을 때 정면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반응하기 전에 미연이 발이 그의 면상에 처박혔다.

뻐억!

“쿠엑!?”

“미안해, 아저씨!”

경쾌하게 소리친 미연이 산채를 벗어나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숨어 있던 대원들에게도 모두 보였다. 이시브와 레디오가 미처 의견을 나눌 새도 없이 성질 급한 대원 하나가 수풀에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대장님!”

“여어! 들켰어, 도망쳐!”

태평하게 미연이 손을 흔드는 그 순간, 산채 주변의 수풀이 일제히 기지개를 펴듯 일어났다.

이 사태는 이시브도 예상하지 못했다. 수풀이 일어났다고 느끼고 그들이 전부 숨어 있던 반란군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미연은 반란군에 포위당한 채로 뜀박질을 멈췄다.

숨어 있던 자들은 40여 명. 아무래도 두목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사이 만약을 위하여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이시브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돌격! 대장님을 구출하라!”

이 순간 그는 뜻밖의 사태에 미연의 정체를 잠시 망각하고 만 것이다. 대원들은 이시브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달려 내려갔다.

“대장님!”

“피하십시오!”

반란군들 또한 두목들의 명령을 받아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제국군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붙잡아라!”

“죽여 버려, 전부!”

“죽이진 마라, 생포해야 한다!”

두목마다 명령이 다 달랐으나 어쨌든 반란군과 대장조의 전투가 시작됐다. 미연은 아직 칼을 뽑지 않은 채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그런 그녀를 쫓아 대장조가 일제히 반란군과 부딪혔다.

“대장님!”

“야, 빨리 와! 나 죽을 거 같아!”

미연이 헛소리를 외치며 반란군 사이로 사라졌다. 이시브가 혀를 차며 반란군과 검을 겨눴다.

“레디오, 대장님을 부탁한다! 대원들은 나에게 맡겨라!”

“하지만…… 중령님!”

“어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구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대장조에서 미연 다음 가는 실력자는 레디오였다. 그는 이시브의 명령에 고개를 짧게 끄덕이더니 앞서서 달려 나갔다.

전방에서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떨치고 한 명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대장님! 어디 계십니까!”

“아우~ 나 여기야~”

긴장감이 결여된 비명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레디오는 위치를 가늠하려 했지만 반란군의 함성에 도저히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수적으로 밀리는 이상, 최대한 빨리 이곳을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인데도 이 대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죽어라!”

레디오는 그 순간, 검을 휘둘러 들어오는 남자의 검을 쳐냈다. 동시에 비어 버린 옆구리에 검을 찍어 넣고, 돌아서며 등을 베어 내렸다.

피가 확 튀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잠시 살펴본 대원들이 모두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레디오는 이를 악물었다.

이시브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란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보이는 대로 반란군을 베어 넘겼다. 두 사람을 베고 다시 검을 부딪쳐 온 한 남자가 힘으로 그를 찍어 내렸다.

거대한 검이었다. 양손 대검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었기에 레디오는 그의 배를 걷어차서 거리를 벌렸다.

검을 들어 올린 남자가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레디오의 허리를 날리려 했다. 가까스로 뒤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지만 옷가지가 찢겨 나갔다. 그 틈을 타 사방에서 반란군들의 검이 쑥 뻗어 왔다.

“쳇!”

한 차례 더 땅을 뒹굴고 일어나 수풀과 함께 검을 뿌렸다. 한 남자의 검을 옆으로 쳐내어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드디어 발견했다.

“대장님!”

반대편, 양손 장검을 든 남자의 뒤쪽에서 미연이 양손을 든 채 발랄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머, 레디오! 여기 있었어?”

“여기 있었, 윽! 가 아닙니다! 빨리 저희들과 합류하십시오!”

말하는 도중에 레디오가 한 공격을 받아치고 소리쳤다. 미연은 도망을 멈추고 대장조가 분전하는 쪽을 쳐다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드디어 그녀의 칼을 뽑아 들었다.

양손 장검의 남자가 미연을 발견하고 돌아섰다. 그 무거운 파괴력의 검날이 미연을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이미 그땐 그녀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진 후였다.

쿠웅―!

검이 무겁게 나무에 틀어박혔다. 두껍게 자란 줄기를 뚫고 들어간 검날을 남자가 뽑으려 할 때, 그 위로 미연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아니!?”

무게도 느껴지기 전, 그녀가 검날을 박찼다. 날카로운 칼이 남자의 목을 꿰뚫고 목뼈를 부러뜨리는 동시에 어깨와 머리를 분리시킨 것은 순간이었다.

피가 뿌려지기 전에 미연은 이미 레디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은 무리인 모양이야, 이 숫자는.”

“네?”

“그래도 제법 분전하는 것 같으니까 도와주도록 할게.”

가면이 없었다면 상쾌한 미소를 보였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말을 마친 동시에 미연이 오른쪽으로 칼을 뿌렸다.

또 한 명의 목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레디오가 보기도 전, 이미 미연은 대장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른 쫓아와. 안 그럼 두고 간다?”

바람처럼 사라진 그녀가 남긴 흔적은 쓰러지는 반란군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돌풍과도 같은 기세였다.

위험함을 알면서도 레디오는 한동안 그녀의 행로에 눈을 박고 말았다. 검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현실을 깨닫고 빠져 나왔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한참이고 그의 눈에 밟혔다.

대책 없는 상관이지만 묘하게 끌리는 구석 또한 있다. 다 실력이 받쳐 주기 때문이겠지만 그 존재감 하나는 천성임이 분명하다.

레디오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며 그녀를 뒤따랐다.

“잘 싸우고 있어!?”

미연은 직선으로 내달렸다. 걸리는 이들은 모두 쓰러뜨렸다. 그 끝에 둥그렇게 포진한 채로 반란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대원들이 있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어어, 당연하지! 늦어서 미안해!”

눈 깜짝할 사이에 또다시 세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 이시브는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대체 왜 도망가신 겁니까! 혼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으시면서!”

“내가 힘을 써 버리면 얘네들 훈련이 안 되잖아?”

레디오와 함께 대장조에 합류한 미연이 호탕하게 칼을 휘둘렀다.

“어디까지나 이번 임무는 훈련의 일환이야. 잊지 마!”

미연이 다시 복귀하여 선봉에 섰다. 그녀는 재빠르게 감각을 넓혀 남아 있는 숫자를 셌다.

50여 명이었던 반란군의 숫자가 그녀가 뛰어들자마자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었다. 공격 한 번에 두세 명을 쓰러뜨렸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대원들은 깨닫고 있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상관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진 검사인가를. 동시에 미연도 대원들의 실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개개인 떨어지는 실력은 아니지만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결론? 그것만 보완한다면 훌륭한 부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결론은 칼을 휘두름과 동시에 직감적으로 파악해 내는 것이, 대장으로서의 미연이 가진 대단한 점이었다.

30년 전, 그 점만큼은 태진도 감탄했었다. 전투 하나만은 굉장히 특성화된 그녀의 능력. 거기에 대해 태진은 솔직하게 칭찬해 주었었다.

두 명을 쓰러뜨려 최종적으로 포위망 자체를 무너뜨리며 미연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자, 지금부터 도망친다. 레디오는 후방을 맡아! 이시브가 대원들을 챙겨! 모두 뛰어!”

미연은 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벌어진 전투였지만 대원들을 더 이상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목표는 이미 이루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미연은 대원들을 이끌고 반란군들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앞길을 막지 않으면 죽진 않아! 비켜!”

그렇다고 반란군들이 그들을 안 막을 리가 없다. 미연은 달려드는 모든 이들을 칼로 쳐냈다.

팔을 자르고, 목을 따고,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며 걷어찼다.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연의 기세에 동참하여 끊임없이 달려드는 반란군들에 대항하여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윽고 숲의 끝에 도달했을 때에는 반란군 측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내고 말았다. 지휘를 하던 두목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소리를 질렀다.

“모두 정지! 공격을 멈춰라!”

“두목, 곧 녀석들을 잡을 수 있어요!”

“그만둬! 우리 쪽 피해도 만만찮다! 우린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두목들의 명령이 일제히 떨어졌다. 결국 대장조를 추격하던 마지막 손길마저도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에서 사나운 살기가 사라짐을 느끼고 미연은 속도를 올려 완전히 야산을 벗어났다.

대장조는 원래 머물렀던 야영지가 있는 곳까지 온 다음에야 마음을 놓고 쉴 수 있었다.

한밤에 벌어진 전투와 추격 탓에 대원들은 틈이 나자 쓰러지고 말았다. 레디오가 그들을 챙기는 사이 이시브가 목소리를 낮춰 미연에게 말했다.

“사상자는 없습니다만 다섯 명이 경상을 입었습니다. 행군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네. 치료하고, 내일 해가 뜨면 출발할 거야.”

“알겠습니다.”

이시브가 명령을 하달하러 간 틈을 타 미연은 한 번 더 주변을 경계했다. 낯선 이가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다만 줄곧 느끼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있던 시선은 간간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가면을 벗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미연은 애써 그것을 참아낸 뒤, 가면 안에서 피식 웃고서 몸을 돌렸다. 야영지로 돌아왔을 땐 대원들이 치료를 마치고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까 모두 자. 내일 해가 뜨면 시디 노트니로 출발한다.”

이시브가 역시 말렸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그녀만을 남겨 놓고 대원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

황성에 복귀하자마자 미연은 텔리오트 앞에 나타났다.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기에 텔리오트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대단하군. 피로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걸.”

“이 정도로 피곤해서 어디 쓰나.”

미연은 임무 수행 중에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말했다. 그 산채에서 반란군이 했었던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은 미연으로서는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줄여서 축약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텔리오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제 나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거군. 경계가 심해지겠는걸, 앞으로.”

“뭐, 그렇겠지.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건드려 놨으니 한동안은 안 나타나지 않을까?”

“왜 들켰지? 들키지 않았다면 앞으로 좀 더 쉬웠을 텐데.”

“실수였어, 실수. 바닥이 그렇게 약했는지 내가 알았나, 뭐.”

텔리오트는 키득 실소를 터뜨렸다.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미연. 네가 그런 약한 바닥 위에 섰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든데? 바른 대로 말하지 그래. 왜 들켰지? 너라면 들키지 않고 이야기만 엿듣고 충분히 빠져 나올 수 있었을 텐데.”

미연은 겸연쩍게 가면 위로 볼을 긁더니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러면 실전 훈련이 안 되잖아.”

“그래서 일부러 들켜서 전투를 벌였다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못 말리겠군!”

“히히힛.”

장난스럽게 히죽 웃어 대는 그녀를 보며 텔리오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이시브 중령에게 나중에 정식으로 보고서 올리라고 해. 안 그런 척해도 피곤할 테니까 가서 쉬어.”

“다음 임무는?”

“보고서가 올라오면 검토해 보고 알려 주지. 아마…… 조만간 또 생길 거야.”

“오케이―!”

손을 까딱까딱 흔들면서 미연은 집무실을 나섰다. 아니, 나서기 전에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멈춘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다음엔 날파리가 꼬이지 않았으면 좋겠네.”

텔리오트가 그녀의 말에 의문이 들어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그녀는 집무실을 나선 뒤였다.

하루 전, 일황자궁.

밤낮도 없이 말을 달려서 로미트랩 시에서 달려온 병사를 앞에 두고 레키엔은 날카롭게 눈을 떴다.

“임무를 망칠 뻔했다고?”

“그렇습니다, 저하. 혼자서 산채에 들어가더니 두목들에게 들켜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후로도 전투를 피해 도망만 다니다가 나중에야 동료들을 만나서 함께 그곳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각각의 피해는?”

“백두 부대는 몇 명이 부상을 입었고, 반란군 측에는 삼십명 가까운 사상자를 났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백두 부대가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 병사는 레키엔의 명을 받고 백두 부대의 첫 임무를 뒤따라갔다가 지금 막 돌아온 것이었다. 백두 부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특히 그 대장을 중점적으로 파악해 오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 들었던 레키엔의 우려와는 달리 백두 부대 대장은 그렇게 특출 나는 실력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대장 혼자서 산채에 잠입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되옵니다.”

같이 듣고 있던 텐시언 비서관도 그렇게 한마디 했다. 레키엔의 눈빛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병사를 돌려보낸 다음 레키엔은 한참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사색을 방해할 수 없었던 텐시언 비서관은 인사를 하고 그의 방에서 물러났다.

방에 혼자 남은 채 레키엔은 중얼거렸다.

“내가 그 여자를 잘못 생각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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