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아르바나단을 만나게 해 줘!
미노클 백작 앞에 앉아 있던 아리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현재 특사대 사무실에는 취조실이 따로 없다.
그렇기에 사무실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취조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취조 집행은 아리스, 그리고 참관인은 아서와 하이듀크였다.
“미노클 백작, 지금부터 드리는 질문에 정확하게 사실만을 말씀해 주세요.”
“……알겠네.”
한때는 스승이기도 했던 미노클 백작은 소환되었을 때부터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생기 하나 없는 그 얼굴을 보며 아리스는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임무를 잊지는 않았기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폭력단과 연관이 있으신가요?”
“…….”
대답하지 않는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냐는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오기 전에 이루어진 순찰대의 공식 수색에서 단 하나의 마약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젯밤의 그 놀라운 양을 보고 놀랐던 아리스의 반응이 우스울 정도로 전부 긁어 간 것이다. 남아 있는 단서는 마약을 보관해 주었던 미노클 백작의 거취뿐.
결국 폭력단이 미노클 백작을 버렸다는 이야기다.
아리스는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이미 특사대 쪽에서는 충분한 조사가 끝난 상태다.
미노클 백작이 구매한 노예와 마약 숨소리에 관한 처분, 둘 다 원래라면 이 자리에서 선고할 사항이었지만 마약의 행방이 불명확해진 지금, 남은 건 노예문제였다.
노예는 아직 미성년이었기에 왕립 시설에 맡겨질 예정이었다. 다행히 마약을 쓴 흔적은 없었기에 다른 치료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아리스는 그 설명들을 끝낸 후 감정 없이 물었다.
“그 외, 모든 직위에 따른 의무와 권리가 모두 박탈될 겁니다만 괜찮으신가요?”
“맘대로 하게나…… 이미 나에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으니.”
모든 것을 체념한 말투. 아리스는 슬픔을 내비치지 않으면서 취조를 계속 이어갔다.
“다시 묻겠습니다. 폭력단과 연관이 있으시죠?”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들의 마약을 내가 보관해 주었지.”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마약의 사용. 그리고…… 힘이었네.”
보관해 주는 대신 필요할 때 마약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폭력단의 힘을 필요할 때 빌려 쓸 수 있다. 그것이 폭력단과의 거래 내용이었다.
“마약을 사용한 이유는?”
“……꼭 대답해야 하나?”
“규칙이라서요.”
단호한 아리스의 대답에 미노클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부 장관이 훌륭한 딸을 두었군…… 즐기기 위해서였네. 나이가 나이다 보니 그것이 없으면 즐길 수가 없었거든.”
아리스는 얼굴을 붉힐 것 같았다. 하지만 위치상 그럴 수 없었기에 살짝 헛기침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좋아요. 그럼 마약 거래를 한 그 폭력단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말하면, 나에게 좋은 점이 있는가?”
“말하지 않았을 때의 나쁜 점을 말씀드릴까요?”
“아니, 됐네.”
미노클 백작은 손을 내저었다. 괜스레 던진 농담에 진담으로 답이 돌아온 듯한 반응이었다.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태진은 듣지 않는 척하면서 취조의 흐름을 조용히 읽고 있었다.
아리스가 순찰대장직을 맡았던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필요한 말만 던지고, 필요할 땐 위엄을 내세울 줄도 안다.
결국 아리스는 미노클 백작에게서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얻어냈다. 조사는 끝이 났다. 미노클 백작을 아서에게 인계하면서 아리스는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죄송해요. 미노클 백작…… 아니 교수님.”
미노클 백작은 잠깐 그녀를 돌아보며 웃음을 지었다.
“괘념치 말게나.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한 거야. 언제까지나 나의 제자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앞으로도 훌륭하게 일해 주게.”
그것이 스승으로서 남긴 최후의 말이었다. 닫힌 문 뒤로 멀어져가는 미노클 백작의 발자국 소리를 느끼듯 아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때는 태진도 별말 없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뒤돌아섰을 때는 본래의 특사대 부대장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았나요?”
“예, 그 정도면. 미노클 백작에게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폭력단과 귀족은 옛날부터 공생 관계이면서도 배척 관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위치나 규모, 그런 쪽을 모른다고 하여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조사가 힘들지 않을까요?”
“아뇨, 이름을 안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폭력단. 리자브 왕국에서 노큰 항을 통해 잉그리즈를 들여와 마약, 숨소리를 만들어 수도권에 유통시킨 그들의 이름은 ‘아르바나단’이었다.
“아르바나…… 고어로 ‘유지자’란 의미군요. 폭력단치고는 제법 유식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바운스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을 거예요.”
“아, ‘티락스 아르바나’ 말입니까?”
“네. 마법 시대의 끝을 냈다고 전해지는 ‘균형 유지자’들에 대한 전설은 바운스의 누구라도 알고 있으니까요.”
“균형 유지자라고 불리면서도 마법 시대를 끝내고 이 대륙에서 마법이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해서 조금 재미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전설은 진짜입니까?”
“글쎄요, 애초에 마법을 사라지게 만든 존재인 주제에 전설로 남는다는 것은 우스우니까요. 거짓말이라는 의견이 많아요. 하지만 또 모르죠. 누구나 전설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실제인 경우도 있으니까.”
아리스의 눈길을 태진을 향해 있었다. 태진은 살짝 눈을 뜬 채 싱긋 웃음을 지었다. 아리스는 문득 마주 웃으며 말했다.
“요새 웃음이 많아지셨네요. 처음 봤을 땐 거의 웃지 않으셨는데.”
“그렇습니까? 전 나름 웃음이 많은 편입니다만.”
절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던진 후 태진은 아무렇지 않게 얼굴에서 웃음을 걷어냈다. 그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노큰 쪽에 보내둔 전서조가 모레쯤에는 돌아올 겁니다. 그때라면 미노클 백작의 처분도 결정되고 일단 귀족층 조사는 잠시 동결할 생각입니다. 이 소란이 잠깐 잦아들어 우리가 곤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 시작하는 거군요.”
“본격적인 시작은 그때입니다.”
아리스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말 들었냐?”
“뭔 말?”
“그 뭐냐, 아르바나 놈들이 정보부한테 죽 쒔다는 거 말야.”
“아아, 그거? 뭐라더라, 귀족 하나 구워삶다가 된통 당할 뻔했는데 급히 물건 다 빼돌려서 겨우 살았다는 이야기?”
“그래, 그거. 덕분에 그 귀족만 덤터기 쓰고 직위 박탈당하고 감옥에 처박혔다지 아마?”
“불쌍한 놈일세. 그나저나 역시 아르바나랄까? 귀족을 그렇게 손쉽게 엿먹이다니, 대단한 놈들인데?”
“대단하면 뭐 해? 그 이후로 두문불출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잖아.”
“죽어 살아야지 어쩌겠어? 덕분에 정보부든 순찰대든, 요새는 수도가 전부 조용하잖아. 날뛰던 송사리 놈들이야 언제나 그렇듯 자기들 세상이지만.”
루위스의 뒷골목. 제국 시절부터 유서가 깊은 도시였고 수도가 되면서 급격히 발전한 루위스에도 여느 도시처럼 뒷골목이란 것이 있었다.
왕성의 눈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이곳은 저마다의 규칙으로 발전하였고, 지금도 그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 주로 사회의 어둠, 범죄의 싹은 이런 곳에서 활동하기 마련이다.
어느 술집. 허름한 테이블에서 마주 본 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남자는 문득 삐걱 열리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지더니 하늘이 꾸물꾸물 비를 내뱉었다. 가랑비 같더니 지금은 제법 퍼붓는 모양이었다. 홀딱 젖은 몰골을 한 인영은 허섭스레기 같은 옷을 질질 끌며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저건?”
“여자 아냐?”
“하아?”
이 시간에, 이런 뒷골목 술집에, 비를 맞고 들어서는 여자 따위가 있단 말이냐? 그런 눈길로 그들은 다시 한 번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질질 발을 끌고 들어와 바에 걸터앉았다. 수염을 덥수룩 기르고 손님에 대한 친절은 태어날 때 두고 나온 듯한 태도의 주인장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아예 관심을 끊은 듯했다.
“어이, 주문 안 받아?”
결국 여자가 짜증난 물음을 던졌다. 주인장은 힐끔 쳐다보더니 귀찮다는 듯 앞으로 다가와 턱을 괴었다.
“이봐, 한마디만 해 주지. 이딴 곳에서 술을 마실 만큼 배때기가 처 붓지 않았다면 그만 집으로 꺼지는 게 어때?”
“핫! 이 늙은이가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나 돈 있어. 돈 있으면 손님 아냐?”
“돈이라? 좋아, 그래. 어디 한번 처마시고 내일 아침도 자기 집에서 눈을 뜰 수 있는지 보자고.”
주인장도 굳이 나쁜 마음에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곳은 여자 혼자서 들락날락거릴 만한 술집이 아님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의 경고는 거기서 끝났다. 그는 그녀가 원한 대로 맥주를 한 잔 내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더는 상관하고 싶지 않은 듯이.
혼자 남은 여자는 우선 맥주를 한 잔 그득히 비웠다. 단숨에 들이마신 후 깨끗이 빈 잔을 부술 듯이 내려놓는다.
“한 잔 더.”
“좋을 대로.”
똑같은 양으로 따라주자 그녀는 다시 한 번 그것을 전부 마셔 버렸다. 역시 한 입에.
주인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서 여자는 바에 이마를 처박았다.
“후욱…… 후욱…….”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어날 생각도 없는지 그 자세에서 숨을 씩씩 몰아쉬어 댄다.
여자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던 두 남자가 서로를 슬쩍 쳐다보고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건들거리며 여자에게 다가가는 그들을 주인장은 보고서도 못 본 척했다.
“어이, 이봐. 혼자야?”
익숙한 멘트를 던지며 여자의 어깨를 툭 건드리자 여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두 남자는 먹이를 발견한 들개 같은 눈동자로 여자의 양옆에 앉았다.
“그러지 말고, 혼자 보단 같이 노는 게 재밌잖아? 이 시간에 이런 술집에 찾아오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외로웠나 본데.”
능글능글한 태도는 뒷골목 건달 그대로였다. 낄낄 터뜨리는 웃음을 전부 듣고서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왠지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좌우의 남자들을 돌아보더니 돌연 엉뚱한 말을 꺼냈다.
“너희들, 아르바나단이라고 알아?”
“뭐?”
“아르바나단. 수도의 폭력단 중에서 가장 크고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알아?”
뭔가 두 남자의 표정이 찜찜해졌다.
“뭐, 안다면 안다고 할 수도 있지. 이런 곳에서 술 마시는 주제에 모른다고 하는 게 웃긴 거야.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지?”
“만나게 해 줘.”
“뭐?”
이번엔 아예 얼이 빠졌다. 여자는 눈빛을 원래대로 되돌리면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을 만나야겠어.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 만나게 해줘.”
“아니, 잠깐.”
“만나게 해 달라고!”
“기다려! 정신 차려, 이 여자야! 만나게 해 달라고 해도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야!”
가능성 같은 것은 뒤로 제쳐 두고 남자들은 소리를 낮췄다.
“얼마 전에 정보부한테 된통 당해서 아르바나단은 숨을 죽이고 있다고. 이런 시기에 갑자기 누군가 만나자고 접촉을 한다면 그들이 기뻐하겠어? 안 그래?”
여자는 날카롭게 눈을 떴다.
“닥치고 가르쳐 줘! 그 자식들한테 복수를 해야 해!”
터져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는 눈앞의 빈 잔을 집어 들었다.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반대편 벽을 향해 던졌다.
쨍그랑!
격렬한 파괴음과 함께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 어, 이봐. 진정해…….”
씩씩 숨을 몰아쉬는 여자. 그녀는 한참이고 그렇게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불이 켜진 눈빛으로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말해.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지?”
“마, 만나서 어쩌려고?”
“알려 주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어.”
“아, 아니, 그렇게 말해도 말야…….”
이를 악무는 여자. 장난이 아니었다. 엄청난 진심. 그것이 처음 보는 그들에게도 전해져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을 쉽게 놔둘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남자들은 눈빛으로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서 입을 열었다.
“좋아, 알았어. 아르바나단에게 소개만 시켜 주면 되는 거지?”
“그, 그 뒤는 어떻게 돼도 우린 모른다?”
“닥치고 빨리 알려 주기나 해! 내가 괜히 이런 술집에 들어와서 술 마시고 자빠진 줄 알아?”
그들은 더듬더듬 아르바나단이 비밀리에 운영 중인 술집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의외로 그곳은 뒷골목이 아닌, 정식 허가를 받은 유흥 업소였다.
“대놓고 활동하고 계셨던 거군. 그래서 오히려 눈치 채이지 않았단 건가?”
“그, 그럴지도. 거기에 가서 지배인을 찾아. 그 뒤는 알아서 해야 할 거야.”
“좋아, 고마워. 답례로 너희들 술까지 내가 사지. 고맙게도 지금 더러운 돈이 제법 많거든.”
그녀는 바 위에 한 뭉텅이의 돈을 올려놓고 일어섰다. 서둘러 비가 오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는 그녀를 건달 하나가 불러 세웠다.
“이봐! 가기 전에 이름이나 좀 알려 줘!”
“이름? 뭣 하러?”
“만신창이가 되어서 또 이 술집에 오면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통성명해 두면 좋잖아?”
여자는 피식 미소를 띠었다.
“루이티다.”
그녀는 뒷골목을 걸어 나왔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 대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후드를 머리 위까지 덮어썼다. 쏟아지는 비를 상쾌히 무시하는 발걸음으로 진흙탕의 골목을 빠져 나왔다.
비가 오는 탓에 이미 거의 모든 가게는 일찍 문을 닫았다.
루이티는 불이 꺼진 길을 천천히 걸어 나가 왕성으로 뚫린 길의 중간에서 옆으로 빠졌다.
술집의 남자들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서둘지 않고 나아가자,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유흥가가 나왔다. 루위스 시에서 허가를 내린 정당한 업소들이 즐비한 곳에서, 그녀는 아르바나단의 업소를 찾아냈다.
카투라. 고어로 ‘물이 흐르는 곳’이라는 의미의 단어였다. 물장사를 하는 업소치곤 괜찮은 작명이었다.
루이티는 문 앞에서 적당히 물을 털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문 뒤는 바깥과는 완전 다른 세계였다.
문지기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루이티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배인 불러와.”
대뜸 말을 던지는 루이티. 문지기는 헛기침을 한번 터뜨렸다.
“손님, 무슨 일이시죠? 지배인님은 지금 바쁘셔서…… 대신 제가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웃기지 마. 너한테 할 얘기 따윈 없어. 지배인 불러와.”
문지기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카운터에 있던 후배에게 턱짓을 해 보이자 그가 서둘러 달려 나와 문을 열었다. 문지기는 힘으로 그녀를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그가 어깨를 잡는 순간, 그녀의 손이 망토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것이 문지기의 목에 와 닿았다.
“지랄했다간 이 목을 그어 버리겠어. 손 놔라.”
“너, 너, 넌 누구냐!”
“누군지는 알 거 없어. 난 단지 이곳의 지배인이 만나고 싶을 뿐이야. 어이, 거기! 이 자식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가서 지배인 불러와.”
슬쩍 눈을 돌려 문을 열고 있는 남자에게 명령했다. 그 남자는 한순간 루이티에게서 선배인 문지기에게 눈을 돌렸다. 문지기는 땀을 흘리는 얼굴로 눈짓했다. 남자는 서둘러 가게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잘했어. 이제 거기 의자에 앉아. 지배인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지.”
카운터 앞에 대기석으로 마련해 둔 의자에 문지기를 앉히고 루이티는 빈틈없는 눈으로 가게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시끌벅적했다. 모두 방으로 운영되는 가게인지 그 소음은 다닥다닥 붙은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끔 문을 열고 점원이 뛰어다니는 소리도 났지만 카운터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이래 봤자 너에게 좋을 게 없어. 여, 여기가 어딘지나 알아?”
“모르고 찾아와서 지배인을 찾을 거 같아? 그냥 닥치고 있어.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지배인이다.”
루이티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때 복도 쪽에서 몇 개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돌렸을 때, 정장 차림의 중년이 카운터에 나타났다.
“손님,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지배인은 친절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루이티는 아래위로 그를 훑은 다음 문지기의 목에서 단검을 뗐다.
“당신이 여기 지배인?”
“그렇습니다만, 저희 점원이 뭔가 실수라도 저질렀는지?”
“됐어. 그런 거 없어. 그것보다…… 당신과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저희 가게에선 여성 손님도 받고 있지만 전 지배인인 지라 호명을 받진 않습니다.”
“술 따라 달라는 말이 아냐.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다.”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띤 지배인은 보이지 않게 루이티를 훑어보았다. 꽤 강한 인상을 주는 외모에 망토로 가려져 있지만 체격도 괜찮아 보였다.
전체적인 이미지로 치자면 허튼 수작을 부릴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배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부르러 온 점원에게 지시했다.
“방 빈 거 있지? 준비해.”
“아, 알겠습니다.”
점원은 안쪽으로 사라졌다. 곧 지배인이 루이티를 방으로 안내했다. 테이블에 마실 것을 준비해 둔 점원이 없어지자 루이티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군. 당신 부하에게 폐를 끼쳤어. 아무래도 내가 맘이 급하다 보니까.”
“괜찮습니다. 저희 쪽에서 먼저 실수를 저질렀겠지요. 그것보다 제게 부탁할 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도 좀 바쁜 몸이라.”
루이티는 지체하지 않았다.
“아르바나단을 만나게 해 줘.”
지배인은 잠깐 뜸을 들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는 척하지 마. 아르바나단을 만나고 싶으면 당신을 만나라는 말을 듣고 왔으니까. 아르바나단을 만나고 싶어. 그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르바나단과 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이곳을 운영하는 곳이 아르바나단이라고 아는데? 이곳의 지배인인 당신이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헛소문이군요. 돌아가 주십시오. 더 이상 들을 얘기는 없어 보입니다.”
지배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의 등을 향해 루이티는 다급히 소리쳤다.
“내 이름은 루이티, 정보부에 관해 할 얘기가 있어!”
지배인이 걸음을 멈췄다. 한순간 그 등은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이티는 초조하게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윽고 지배인이 문에서 손을 뗐다. 몸을 돌린 그의 얼굴에선 이미 친절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걸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말 그대로야. 정보부에 대한 정보, 필요하지 않아?”
“루이티…… 라고 했습니까?”
지배인이 그녀의 맞은편에 다시 앉았다. 루이티는 조금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지배인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냉철했다.
“그런 말을 한다고 냉큼 믿지 않을 거라는 것,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행색으로 봐서는 당신의 말을 신용할 수 없습니다만, 어떻게 당신이 정보부를 알고 있습니까?”
“며, 몇 년 전, 뒷골목 소매치기 출신이 정식 기사가 되었다는 정도는 알 거야. 제법 크게 소문이 돌았으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술집만큼 소문에 민감한 곳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그 기사가 이번 작전의 책임을 물고 잘렸다는 것도 알아?”
지배인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무슨 말이죠?”
“그 기사의 이름은 로티아, 내 언니야. 물론 피를 나누진 않았어. 뒷골목에서 흔히 있는 의자매야.”
“분명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언니라고요?”
“어릴 때부터 자매처럼 함께 컸어. 그래서 언니가 기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언니의 소속은 정보부 기동대였어. 성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따로 떨어져 살았지만 언니가 얼마나 열심히, 명예를 가지고 기사로서 일했는지는 내 자신이 무척 잘 알아.”
“그런데 왜 잘렸습니까?”
“정보부의 비밀 임무에 불려갔다가 거기서 어떤 상관을 호위했어야 했대. 하지만 임무 중간에 들켜서 큰일이 날 뻔했어. 물론 아무 일 없었지. 하지만 호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명분을 들어서, 그 자식들이 언니를 잘라 버린 거야! 언니는 아무 죄도 없는데!”
여러 해 술집을 운영해 오면서 여러 사람을 봐 왔다. 그렇기에 사람을 보는 눈은 확실하다고 지배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안목으로 미루어 봤을 때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부술 것 같은 눈빛을 한 이 여자는,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지배인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 정보부의 정보를 아르바나단에게 알려 주겠다, 이 말입니까?”
“그래, 언니에게 지금 어떤 작전을 진행 중인지 들어서 알고 있어. 비밀이라는 걸 내가 엉겨서 들은 건데 이런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
흉흉하기까지 한 말투에 지배인은 잠깐 침을 삼켰다. 술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배인은 고민했다. 그 틈을 타 루이티가 다시 그에게 매달렸다.
“제발 아르바나단을 만나게 해 줘! 당신이라면 가능하지? 응?”
“……좋습니다.”
무겁게 지배인의 입이 떨어졌다.
“당신의 말, 한번 믿어 보겠습니다. 일단 당신을 우리의 본거지로 모시겠습니다. 본론은 그때 가서 듣도록 하지요.”
“그, 그럼?”
“내 이름은 클라드. 아르바나단의 간부입니다.”
간부임과 동시에 카투라의 지배인이기도 한 클라드의 허락이 떨어졌다.
루이티는 그 방에서 우선 두 손을 결박당했다. 그리고 이어서 눈까지 안대로 가려졌다. 루이티가 조금 저항하자 클라드가 진지한 투로 설득했다.
“아직 당신을 완전히 믿는 게 아닙니다. 불편할 테지만 참아 주십시오.”
예의랄까, 그런 투는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듯한 그의 말투였지만 루이티는 순순히 저항을 멈췄다.
눈이 가려지고 손까지 묶였으니 그 뒤는 어쩔 수가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그녀의 두 팔을 각각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클라드는 그녀에게 일어서서 걸으라고 이야기했다. 억압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녀는 자신의 두 발로 그들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카투라를 나왔다고 생각했더니 그 다음은 어딘가에 올라타졌다. 히히힝 하는 말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것이 마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흔들릴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양옆에 사람이 앉아 있는 감각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는 한참을 달그락거리며 달리더니 이윽고 어딘가에서 멈춰 섰다.
그 다음은 다시 바닥에 내려서서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는 듯하더니 한참을 걸어간 지점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앉혀져 안대를 풀었을 때, 루이티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둥그런 테이블에 처음 보는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총 세 명으로 어두운 계열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빨리 왔군.”
“비가 쏟아 부어서 그런지 순찰대가 없었어.”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클라드였다. 세 명에게 익숙하게 손 인사를 던지고 그도 의자에 앉았다.
“이 자가 우리들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말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데리고 왔다.”
“클라드, 지금 우리가 어떤 사정인지 알잖아. 마음대로 데리고 오면 곤란해.”
“알페, 클라드가 판단한 일이다.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루이티는 가만히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 네 명이 아르바나단의 간부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잠자코 머리를 굴렸다.
“이년……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루이티는 너무나 순순히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 버렸다. 말을 던진 자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예의 없이 생긴 남자였다.
“이봐,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지? 머리 써서 뭔가를 얻어 보려고 해 봤자 소용없어. 너 같은 거 없애는 건 식은 수프 먹기보다 간단하다고. 알았어?”
생긴 것처럼 하는 말도 흉흉했다. 루이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베르딘, 너무 겁 주지 마. 아가씨잖아.”
“아가씨는 개뿔.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냐? 애초에 이런 걸 데리고 온 클라드 자식이 문제지.”
“지금 우리 내에서 가장 높은 자가 너야. 넌 잠자코 있어. 이야기는 우리들이 한다.”
클라드, 알페, 베르딘. 그리고 아직 이름을 밝히지 않은 남자가 루이티를 돌아보았다.
“내 이름은 기즈. 우리 네 명이 현재는 아르바나단을 이끌고 있지. 그쪽도 이름을 밝혀 주실까?”
“루, 루이티. 루위스 제과점에서 일하고 있어.”
“아, 거기? 그 집 빵 맛있어서 자주 가는데. 다음에 가면 좀 싸게 줘?”
“그, 글쎄.”
여유롭게 이야기하고 있는 기즈와 달리 루이티는 제법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클라드가 짐짓 그녀의 태도를 살폈다.
“그렇게까지 당당하더니, 여기 와서는 태도가 다르군요. 긴장했습니까?”
“그래? 긴장할 거 없어. 우리 행동대장의 심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해코지는 안 할 테니까.”
친절하게 웃는 기즈가 왠지 더 기분이 나빴다. 루이티는 망설이듯 고개를 끄덕였고, 기즈는 분위기를 전환하듯 상체를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좋아, 그럼 무슨 사정이 있어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들어볼까?”
올 것이 왔다.
대답하려 할 때 클라드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정보부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언니가 정보부 소속 기사였고 얼마 전 작전의 실수로 잘렸대. 그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하는군.”
“얼마 전 작전?”
“미노클 백작과 연계된 마약건.”
눈치를 보며 루이티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 마약에 꼬리가 잡혔다고 했지? 그로 인해 지금 마약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말야. 언니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그 이야기는 이미 공공연하게 소문이 나 있어. 부끄럽지만 사실이 그렇지. 겨우 그런 말로 우리가 너를 믿어줄 거라고 생각진 마.”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당신들, 그 이후 정보부가 어떤지는 잘 모르잖아?”
그 말을 꺼내고 나서야 간부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담담히 듣고만 있던 알페가 턱짓했다.
“말해 봐.”
“정보부는 지금 마약이 사라진 탓에 곤란을 겪고 있어. 그들이 손에 넣은 마약과 원재료로는 고작해야 수입경로 정도밖에 알 수 없지? 언니가 나오기 전에 들었다는데 노큰 쪽에 순찰대를 파견했다고 해. 하지만, 당신들이 적절히 손을 썼다면 아마 아무런 증거도 건지지 못할 거야. 그렇지?”
루이티가 눈을 맞춘 기즈가 묵묵히 주억댔다.
“정보부로서는 지금 여러모로 길이 막힌 거야. 미노클 백작에게 긁어 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 하지만 마약도 완전히 사라졌고, 당신들의 본거지도 모르는 이 마당에 아무리 찾아봤자 알 수 있는 건 고작 아르바나단이라는 이름뿐일 거야.”
“그렇지. 제과점 직원치곤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언니가 얘기해 준 거야.”
루이티는 입술을 핥고서 다시 한 번 어조를 다졌다.
“언니는 이렇게 말했어. 아직 마약은 루위스 안 어딘가에 있을 거다. 만약 정보부가 단서를 전혀 찾지 못한다면 대대적으로 루위스 안을 수색할 거라고. 지금의 정보부라면 그런 무모한 작전도 벌일 거라고 말야.”
“호오…… 이건 또 특이한 사항이군.”
알페는 그녀의 말에 흥미가 동하는 듯했다.
“루위스 전체를 수색한다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만큼 쉽게 생각해 낼 만한 일도 아냐. 그런데도 너희 언니가 그만큼 단언한다는 건 정보부의 방침이 바뀌었다는 말인가?”
“정보부 상층에…… 누군가 새로 들어온 자라도 있는 건가?”
“쉽게 결론내릴 수 있는 사항이 아냐. 루이티, 그 사항에 대해선 알고 있습니까?”
클라드가 물어왔지만 루이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계속 얘기하십시오.”
“거기에 대해선 이야기를 못 들어서 말야. 미안해. 아무튼 언니의 말은 그래. 전체 수색의 가능성이 있다면 아르바나단에서 취해야 할 행동은 바로 하나야.”
“마약을 수도 밖으로 빼내는 거지.”
기즈가 루이티의 말을 거들었다. 아무도 이견을 보이진 않았다. 루이티는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그거. 역시 언니가 예상하는 대로였어. 당신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잠깐, 그건 아닙니다.”
클라드가 손을 들어 루이티의 이야기를 제지했다.
“마약을 수도 밖으로 빼내는 건 어디까지나 전체 수색이 있을 거라는 전제하의 이야기입니다. 그 정보가 틀리다면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클라드, 소용없지 않아. 우리에겐 충분히 이득이야.”
“무슨 말이냐 그게.”
듣고만 있던 베르딘도 입을 열었다. 기즈는 신중한 눈빛으로 설명했다.
“지금 마약은 우리에게 있어. 하지만 언제까지고 가지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베르딘, 두목이 오기 전에 이 일을 전부 끝낼 거라고 했었지? 그러기 위해서는 마약을 안전한 곳에 숨겨야만 돼. 최소한 정보부의 손이 닿기 어려운 루위스 밖의 창고로라도 말야.”
“수색이 있든 없든, 마약은 빼내야 한다 이 말이군.”
“그렇군. 동감이야.”
아르바나단의 간부들이 동시에 동의의 뜻을 표했다. 기즈의 의견이 옳다는 건 누가 봐도 명명백백했다. 행동대장으로서 베르딘은 곰곰이 고심하는 얼굴이 되었고, 기즈는 대신하여 루이티이게 물었다.
“당신의 언니도 그것을 예상했겠지?”
“그, 그래. 맞아. 그래서, 여기서부터가 드디어 본론인데, 그 작업을 위해서 내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거든.”
“무슨 정보지?”
“기동대의 순찰 경로.”
알페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순찰 경로? 매일 밤마다 움직이는 녀석들의 경로를 알고 있단 말야?”
“물론. 낮도 알고 있어. 게다가 그 경로는 일일 단위로 바뀌기 때문에 기동대 내에서도 일급 비밀에 속하지.”
“그걸 당신 언니가 가지고 나왔단 말야?”
“머릿속에 들어 있던 걸 빼앗아 갈 수는 없잖아?”
루이티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소리 내어 탁 올려놓고 도전적인 눈빛을 그들에게 던졌다.
“이 안에 모든 경로가 기록되어 있어. 이 정보, 어때?”
네 명이 눈을 마주쳤다. 짧은 순간에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두목을 필두로 지금까지 아르바나단을 이끌어온 그들이었기에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베르딘은 입이 말랐다. 구석에 있던 물통을 붙잡아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비어 버린 통을 집어던졌다.
“그 정보, 진짜냐?”
“뭣 하면 확인시켜 줄 수도 있어.”
기즈가 턱을 만지며 루이티를 쳐다보았다.
“먼저 그 정보의 진실성을 확인한 다음 이야기하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지?”
“오늘 순찰 경로를 알려 주지. 확인은 당신들이 해.”
기즈가 베르딘을 쳐다보았다. 승낙의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 베르딘은 알페와 클라드와 눈빛을 교환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리 내어 바깥의 부하를 부르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달려 들어왔다. 총 여섯 명을 불러온 다음 베르딘은 루이티에게 순찰 경로를 알려 달라고 말했다.
루이티는 두루마리를 조금 펴서 오늘의 순찰 경로를 그 자리에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지시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 순찰 경로를 탐색하고 와라. 기동대에게는 절대 들키면 안 된다. 알겠냐?”
“예!”
일제히 방밖으로 뛰어나가고 나서 루이티는 다시 두루마리를 묶었다. 그녀는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네 명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기다리는 동안 하나 물어도 될까? 이런 정보를 넘긴다고 하더라도 당신에게, 아니지, 당신의 언니에게 이득이 되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런데 왜 우리에게 정보를 주는 거지?”
알페의 물음은 루이티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일을 언니는 몰라. 이 두루마리도 훔쳐서 나온 거니까. 언니는 지금쯤 술에 뻗어 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을걸?”
“뭐…… 라고?”
“내 독단이야. 언니의 복수를 대신해 주고 싶거든. 정보부가 어떻게 되든 내가 알 게 뭐야? 언니를 잘라 버린 그런 녀석들, 무너지든 말든 상관없어.”
“이거 또 무서운 소리를 하네…… 결국, 어떤 이득도 바라지 않고 하는 일이다?”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기즈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뭐지?”
“나를 아르바나단에 넣어 주길 바라.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간부들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침묵에 빠졌다. 그 틈을 타 루이티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어릴 때 언니랑 약속했어. 언니가 나라의 높은 사람이 된다면 나는 그것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래서 언니가 기사가 되었을 때부터 이 아르바나단에 들어오고 싶었어. 비록 언니가 지금은 기사가 아니게 되었지만, 나는 지키지 못한 약속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야. 언니와의 약속을 지금이라도 지키고 싶어. 나를 아르바나단에 넣어 줘.”
루이티가 최종적으로 원하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오로지 진심을 담아 네 명의 눈빛을 받아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알페였다.
“클라드, 넌 대체 이런 여자를 어디서 주워 온 거냐.”
“…….”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걸린 거 같군.”
그들의 태도는 냉담했다. 그럴 만도 하다. 폭력단이 들어오고 싶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정보를 줬다고 하더라도 단원으로 받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기즈는 다른 간부들의 의견을 물어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흑! 멋진 자매애잖아!”
아차 싶었다. 기즈와 알페, 클라드까지 낭패라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베르딘이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흐느끼고 있었다.
“좋아, 좋아! 단원이 별거냐! 내가 다 받아 주마!”
“어, 어이, 베르딘! 정신 차려!”
“너희들은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놓고 아무렇지 않은 거냐!?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찾아온 이 아리따운 동생의 사연이 감동스럽지도 않냐 말이다!”
그랬다. 베르딘은 이런 이야기에 약했다. 뒷골목에서 자란 이들은 특유의 분위기 탓에 정이랄까 의리에 약하다. 개중에도 베르딘은 매우 약한 편에 속했다. 기즈를 비롯한 이들이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딘의 기세에 밀려 정말로 루이티를 단원으로 인정하자는 분위기가 나오기 전에 기즈가 단호한 어조로 끊었다.
“정신 차려! 단원을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냐. 최소한 아직은 안 돼. 알겠어? 정보 확인조차 안 했잖아?”
“아, 그, 그렇지.”
베르딘도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보 확인을 하고 나면 단원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우선은 확인이 먼저다.”
베르딘을 잠재워 놓고 기즈와 알페는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클라드는 고개를 슬그머니 젓고서 루이티에게 넌지시 말했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으, 응. 그, 그래.”
조금 이 네 명의 관계가 보인 것 같았다.
부하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경로를 모두 따라 확인하려면 기동대를 일일이 뒤따라 다녀야하기 때문이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속속 부하들이 본거지로 돌아왔다. 보냈던 여섯 명 모두가 루이티의 정보가 확실했다고 증명했다. 경로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동대가 나타났고, 루이티가 일러준 대로의 경로를 따라 순찰을 돌고 성안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루이티는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었다.
“이제 나를 믿을 수 있을까?”
“아니…… 아직 아냐.”
간부들 중에서도 가장 신중한 알페가 손을 들었다.
“우연일 수도 있어. 경로는 매일 바뀌니까 최소한 삼사 일은 더 확인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
“동감이다.”
클라드도 동의했기에 기즈는 아쉬운 얼굴의 베르딘을 돌아봤다.
“나도 같은 의견이야. 하루 가지고는 아직 위험해. 어떻게 할까?”
“으, 으음. 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수 없지. 당분간 이 여자를 여기 두고서 확인하도록 하는 게 어때.”
“방을 하나 마련해야겠군.”
기즈는 루이티에게 그 뜻을 전달했다.
“당분간 여기 머물러. 최소한 삼 일은 그 정보를 확인할 테니까. 우리의 신중함도 이해해 주길 바라. 정보에 자신이 있다면 받아들여 주겠지?”
“그, 그럼 그 후엔 단원이 될 수 있어?”
베르딘이 콧김을 내뿜었다. 말을 하지 않지만 그는 은근한 압박을 기즈의 뒤통수에 걸었다. 기즈는 결코 둔감하지 않았기에 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숨짓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대답했다.
“좋아. 그 후엔 당신도 정식 단원이 될 거야.”
그리고, 루이티는 낡은 방 하나에 안내됐다.
***
그녀가 3일 동안 건넨 순찰 경로는 틀림이 없었다. 루이티가 알려 준 경로에서 기동대는 단 한 번도 어긋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자 이제 간부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진짜인가 봐.”
“그러게 내가 뭐랬어! 단원으로 받자고 했지?”
루이티를 다시 부른 자리에서 베르딘은 히죽 웃으며 선언했다.
“루이티, 넌 오늘부터 정식 단원이다. 우리 옆에서 우리 일을 도와.”
“으, 응!”
“우린 너의 상관이야. 앞으로는 존대를 써.”
“네, 네! 알겠습니다!”
루이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날부터 루이티의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언니 로티아에게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그녀는 마약 운반을 도왔다.
원래라면 소량의 마약도 운반하기 어려울 텐데도 루이티의 완벽한 정보가 있었기에 마차 단위로 옮길 수가 있었다. 뒤를 잡히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운반을 해내 갔지만 그 빠르기는 솔직히 알페도 감탄할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가장 뿌듯한 것은 루이티를 단원으로 받아들인 베르딘이 아니라 클라드였다. 그녀를 아르바나단으로 데리고 온 것이 그였기에, 기쁨부터가 달랐다.
2주 남짓 흘렀을 무렵,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에서 두목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약을 운반하고 막 도착한 클라드가 알페에게서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가장 먼저 루이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클라드는 루이티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냈다. 뭣도 모르고 찾아간 그녀에게 그는 술을 한 잔 건네며 말했다.
“우리 일을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에, 아니에요. 나도 좋아서 하는 건데.”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채 클라드는 잔을 비웠다.
“얘기는 들었을 겁니다. 이 주 후에 두목이 돌아올 겁니다. 지금 진행대로라면 그때까지 절반 넘게 옮길 수 있겠지요. 당신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너, 너무 띄우지 마세요. 쑥스럽게.”
“그래서, 두목이 돌아오면 당신을 정식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예?”
그는 루이티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간부로서 당신을 추천할까 합니다. 지금 당신은 그 정도의 일을 우리에게 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네, 네? 자, 잠깐, 클라드 님! 그 말은!”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다른 녀석들과도 상의를 해서 결정하겠지만, 아마 무리 없이 간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루이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잔에 도로 채운 잔을 건배하면서 클라드는 짤막하게 일렀다.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도.”
그것은 아르바나단으로서의 동료 의식, 그 비슷한 감정을 내비치는 장면이었다.
2주 후, 아르바나단의 두목이 오켈라니아에서 귀환했다.
***
미노클 백작을 심문한 지도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 특사대에는 단 한 가지 일만 있었다. 바로 아무 일도 없는 것.
태진이 미리 말했던 대로 모든 조사는 동결된 상태였다.
아리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순찰대에서 들어온 순찰 결과와 노큰 항구에 파견한 순찰대의 보고서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 책상은 오늘도 여전히 비어 있었다.
멀뚱히 그쪽을 쳐다보다가 결국 포옥 한숨을 내쉰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야, 아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스는 책상에서 일어서 직접 문을 열었다. 기사 복장의 아서가 문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은 잘되어 가?”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이 없는걸…….”
아리스는 그를 들여보냈다. 아서가 원하는 대로 차를 끓여서 그의 앞에 둔 다음 그녀 또한 맞은편에 앉았다. 한 달 전 미노클 백작의 심문에 쓰였던 테이블은 그 이후로 이런 손님 대접 이외에는 쓰인 적이 없었다.
“이런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한가해 보이네?”
“알면 하지 마…….”
요새 아리스는 집으로 가서도 그런 말을 듣고 있다. 하이듀크가 겸연쩍게 그녀의 방에 들어와 미안한 듯 묻는다.
“요새 어때, 딸내미?”
아무리 친절하게 물어도 그녀는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이듀크도 다 알고 있다.
지금 특사대가 어떠한 활동도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특사대로서의 활동을 전혀 안 하고 있다. 태진은 자기 일을 하고 있고 아리스도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특사대로서 움직인 점은 지난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리스는 기회라는 생각에 아서에게 한탄을 늘어놓기로 했다.
“들어줘, 아서. 요새 태진 님은 특사대에 얼굴도 잘 안 비친다니까? 한 달 전까지 그렇게 열성적으로 일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야. 오늘도 아침에 잠깐 와서 인사한 것 말고는 아예 보이지도 않으셔.”
“어디 가셨는데? 마법사단에?”
“뻔하잖아…… 네이숩에서 시간의 레펠이 발견되었기 때문인지, 요새 늘 그곳에 있으셔.”
아리스는 시무룩하게 등받이에 푸욱 파묻혔다. 그녀가 끓여 준 달콤한 마트란 차를 음미하면서 그녀를 주시했다.
“아리스…… 너, 좀 외로워 보인다?”
“응?”
아리스가 눈을 번쩍 떴다.
“태진 님이 안 보이니까 왠지 좀 외로워 보인다구.”
“어, 어어? 그, 그럴 리가 있겠어? 다, 다만 일이 너무 없어서 이래도 되나 싶은 것뿐이야. 나 자신이 나태해지는 것 같달까.”
“그래?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의미심장한 말로 끊어놓고서 아서는 마트란 차를 홀짝였다. 아리스는 어딘가 뜨끔한 얼굴로 힐끔힐끔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대뜸 물었다.
“그, 그것보다 무슨 일이야? 용건이 있어서 온 거지?”
“아아, 물론. 네이숩에서 재차 보고가 올라왔어. 시간의 레펠을 가지고 돌아왔대. 조금 전에 전서조가 도착한 따끈따끈한 소식이야. 때마침 장관실에 있었거든. 나보고 전해 달라고 하셔서 와 봤어.”
아서는 텅 비어 있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댔다.
“아무래도 마법사단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지만.”
“아냐, 그렇지 않아도 보고할 일이 있어서 가야 됐으니까 내가 가서 전할게. 고마워, 일부러 와 줘서.”
“무슨 말씀을.”
아서는 싱긋 웃었다.
그를 보내고 나서 아리스는 서류를 챙겨서 사무실을 나섰다. 가는 길에 장관실에 들를까 잠깐 생각했지만 별달리 할 이야기도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한 달 전, 모든 수사를 동결시킨 태진은 곧바로 자신의 일로 되돌아갔다.
그 전환은 지금까지 태진을 봐 온 아리스도 놀랄 만큼 순식간이었다. 특사대의 일만 생각하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으로, 이번에는 자신의 일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랑퀘지 단장과 함께 하는 마력핵 운용 수행이었다.
마법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박식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마력을 다뤄 본 적이 없는 태진으로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동안 특사대의 일로 제대로 된 수행도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시간이 남는 틈을 타 한 번에 해 버리자고 여긴 모양이었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 도장만 찍으면 태진은 랑퀘지 단장에게 가서 그에게 마력핵 운용 수행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아리스가 그를 만나는 것은 이른 아침 이외에는 없었다. 그나마 오늘같이 보고할 일이 있어야지 만날 수 있을까 말까다.
마법사단 본부에 도착하여 안내를 받아 단장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기 전부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소.”
“그렇습니까. 전 아직 잘 감이 안 오는군요.”
아리스는 숨을 들이마신 뒤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이 아리스의 등장을 반겼다.
“아, 오셨습니까?”
아리스는 정중하게 랑퀘지 단장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 특사대장에게 보고할 일이 먼저였던 것이다. 태진도 그녀의 의도를 알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여기 서류에 서명 부탁드려요. 그리고 기동대장으로부터 전언이 있어요.”
“어떤 전언입니까?”
“네이숩에서 순찰대가 출발했대요. 시간의 레펠을 가지고.”
“그럼 곧 도착하겠군요. 랑퀘지 단장, 기쁜 소식 들었습니까?”
“오오, 당연하오! 드디어 시공의 레펠이 모두 모이는 것이구려!”
랑퀘지 단장이 나이를 잊고 소리 질렀다. 태진도 기쁨이 그득한 얼굴을 만들었다.
“재생의 레펠 해석도 얼마 전에 끝냈는데 시간의 레펠까지! 아무래도 올해 로츠왈드 왕국에는 수많은 마법적 발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다 현신의 전사, 그대 덕분이오!”
“별말씀을.”
겉모습을 따지자면 전혀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리스는 들리지 않게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요새 한숨이 늘어난 것 같아서 스스로도 걱정이었다.
“수행은 진전이 있으신가요?”
“예, 어느 정도는. 조금만 더 있으면 성공할 것 같다고 랑퀘지 단장님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리스는 잠깐 고개를 갸웃댔다.
“태진 님은 오감이 발달해 있으시잖아요. 그럼 마력핵 운용도 쉽게 깨우칠 수 있지 않나요?”
아리스는 검사 출신이기에 마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정식 기사도 되었지만 기사들이 마법에 대해서 배우는 거라곤 기본 속성 수준에서 그친다. 마법 기사에 자질을 보이지 않는 이상 마법을 정식으로 배우는 기사는 매우 드물다.
그녀의 의문에 대한 설명은 랑퀘지 단장이 해 주었다.
“그건 좀 다르다오. 물론 오감이 발달되어 있다면 좋겠지만 마법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따지자면 육감과 바로 두뇌라오. 태진 님의 경우엔 두뇌 쪽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육감은 일반인과 비슷한 게 문제지.”
“그 육감을 현재 다른 오감들로 보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보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또 신기한 거지만 말이오.”
요는 이런 말이다. 마력이라는 건 공기보다 희박한 개념으로 공기처럼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육감을 타고난 자가 훨씬 느끼기 쉬운 기운이었다. 예로 들자면 태진보다 미연이 마법사의 자질은 훨씬 더 타고 났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마력을 느낀다는 사실은 보통 사람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자질이다.
태진은 이능으로 오감과 두뇌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지만 육감은 여타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조금만 더 노력하면 마력을 느낄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었다.
이것은 굉장한 사실이었다.
“보통이라면 생각하기도 힘든, 아니 말도 안 되는 일에 가깝다오.”
“그런 일을 해내니까 현신의 전사겠지요. 역시…….”
“하하, 아직 성공도 못했는데 너무 띄우지 말아 주십시오. 손톱만 한 마력핵조차 생성하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세상에 흐르는 마력을 하나로 모아 응축시킬 필요가 있다. 응축시킨 마력은 동그란 형태를 띠게 되는데, 하나의 투명한 구가 되어 마법사의 몸 안에 저장된다.
이 구를 마력핵이라고 일컫는다.
마력핵의 크기와 저장할 수 있는 개수에 따라서 얼마나 실력 있는 마법사인지 판별가능하다. 태진은 아직 마력핵 운용은커녕 응축조차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마법까지 천재적이라면 정말 우리 마법사들이 슬퍼할 것이오.”
“슬퍼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감사하지. 어허허.”
늙은 마법사는 이제 시작하는 마법사를 향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분위기였다. 이 분위기를 깨기가 미안할 정도로. 아리스는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태진에게 말을 꺼냈다.
“태진 님, 드릴 말이 있어요.”
“네, 해 보십시오.”
그녀는 랑퀘지 단장의 눈치를 봤다. 랑퀘지 단장은 그들의 낌새를 읽고서 노련한 마법사답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연구실에 잠시 다녀올 일이 생각났소. 그동안 이야기 나누시구려.”
백발을 휘날리며 랑퀘지 단장은 성큼성큼 집무실을 나갔다. 두 사람만 남자 아리스는 좀 더 편한 마음이 되어 입을 열었다.
“아르바나단, 어떡하실 건가요?”
“어떡하다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관련 조사는 일단 모두 동결입니다. 이미 한 달 전에 이야기 끝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요. 좀 전에 드린 보고서에도 있지만 노큰 항구에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어요. 아르바나단에서 철저하게 흔적을 지웠어요. 게다가 그 이후로 약간의 낌새도 보이지 않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계속 조용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
태진은 물끄러미 아리스를 쳐다보았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그의 눈빛을 받자 아리스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입을 다문 그녀를 쳐다보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어서, 불안하게 만들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걱정 말라니요…… 걱정 안 될 리가 없잖아요?”
“지금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아르바나단이 언제까지고 물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들도 기회를 봐서 움직이려고 할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쪽에서 움직일 때를 만들어 주는 것뿐입니다.”
“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아리스. 그녀에게 태진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곧 움직일 때가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