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당신들을 이곳에서 체포하겠습니다!
아르바나단에서는 잔치가 벌어질 분위기였다. 그들의 두목이 근 한 달 만에 복귀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쯤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기 때문에 일도 뒤로 미루고 모든 단원들이 본거지에서 대기 중이었다.
간부실에 모인 네 명도 단 내의 분위기를 충분히 읽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원들처럼 대놓고 들떠 있지만은 않았다.
“잘됐을까?”
“이 자식들아, 두목이 하는 일이야. 안 되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오켈라니아 쪽에서도 위험한 상태라며? 노예 시장도 곧 죽는다는 소문이던데.”
“놀고 있네. 그렇게 큰 시장이 대번에 없어지겠냐.”
얘기를 듣고 있던 루이티가 클라드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무슨 이야기예요? 노예 시장?”
“아, 오켈라니아에 노예 시장이 있다는 건 아시죠? 거긴 오켈라니아 영주하고 비밀리에 계약을 체결하여 판을 벌렸었는데, 얼마 전 오켈라니아 남작과 근처의 미켈파 남작까지 한꺼번에 뭔가 죄를 짓고 영주 자리에서 물러났거든요. 정확하게 어떤 죄인지까지는 알아냈지 못했지만. 거기 여두목이 수완이 좋아서 파도는 피했는데…… 그 때문에 아직도 수면 밑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그럼 두목이 간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두목은 가서 만나 본다고 했거든.”
얘기를 듣고 있던 기즈가 부연 설명을 했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은 마약을 파는 데는 훌륭한 선이야. 거기가 무너지면 우리 장사도 위험해지니까 정보를 얻으러 두목이 직접 나섰다는 거지. 지금 돌아오는 걸 보면 얘기가 잘 끝난 모양이야.”
“마약 판매에는 이상이 없다……?”
“그러면 좋지. 루이티, 이런 일에 흥미 있어?”
“아. 그, 그게…….”
눈을 빛내며 기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루이티에게 알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언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나타나는 그의 버릇이라는 사실을 루이티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녀는 서둘러 뭐라고 변명하려 했다.
“거기에 대해서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그때, 클라드가 나섰다.
“두목이 돌아오면 루이티를 간부에 추천하려고 해.”
“뭐?”
알페와 기즈, 두 명만이 클라드의 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루이티는 침을 삼키며 이야기에서 조금 멀어졌다. 클라드가 미리 그녀에게 일러 두었기에 그녀는 지금은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지금 루이티의 위치는 준간부 급이잖아. 그녀가 도움이 된다는 건 분명해. 그래서 이 기회에 아예 두목에게 간부로 추천할까 하는데.”
“너 그거…… 현 간부의 세 명 이상 추천이 있어야 한다는 건 알고서 하는 말이냐?”
“물론. 이미 나 말고 다른 한 명은 동의했어.”
누구라고 물을 것도 없었다. 알페와 기즈는 동시에 그 인물을 돌아보았다. 베르딘이 예의 없는 얼굴로 히죽 웃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일단 두 명 확보했고 남은 한 표를 우리 중 한 명이 해결해 달라는 거냐?”
“너희들도 인정하잖아. 루이티는 분명히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어.”
“도움되는 것과 간부 추천은 좀 다르지. 그 녀석은 단에 들어온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됐어.”
알페와 기즈는 쉽게 클라드에게 동조해 주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클라드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우리 두 명으로 두목에게 말하겠어. 두목이라면 다르게 생각해 줄지도 몰라.”
클라드는 그런 희망을 가졌다. 알페와 기즈는 힘들 거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클라드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루이티를 가장 맘에 들어 했었으니까. 베르딘도 루이티 쪽인 마당에 자신들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그들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균형이 잘 잡힌 간부들이었다.
루이티건에 대한 소란이 그쯤에서 잠깐 그쳤을 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두목이 돌아왔습니다. 좀 전에 검문을 통과했다고 연락이―!”
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티도 한 발자국 늦게 그들을 뒤따라 방을 나갔다.
정문의 로비. 루이티도 정식 단원이 되고 나서야 알았지만 아르바나단의 본거지는 정말 루위스 한중간에 대놓고 서 있다.
겉모습은 누가 봐도 폭력단이라고 생각이 안 될 만큼 멀쩡하기 때문에, 게다가 서류상으로 완벽하게 꾸며져 있어서 누구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정보상으로 겉으로 드러난 곳도 클라드가 지배인으로 있는 술집 하나뿐.
이러니 정보부에서도 아르바나단의 존재를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로비에서 루이티는 간부들과 함께 두목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건물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말이 푸레질을 멈춘 뒤 마차 안에서 내려선 자는 의외로 깡마른 남자였다. 로비로 들어와 모든 단원들이 허리를 굽히며 깍듯하게 인사했을 때야 알아차렸다.
“두목, 잘 다녀오셨습니까!”
지금까지 본 기강과도 또 달랐다. 기사단보다 훨씬 강한, 그런 억압을 받은 이들처럼 단원들의 목소리에는 존경조차 서려 있었다. 루이티는 깜짝 놀랐다가 뒤늦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 모습이 두목의 눈에 딱 걸렸다.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냐.”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베르딘의 호기어린 목소리와도, 알페의 조금 차가운 음색과도 틀렸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루이티는 왠지 모르게 등으로 내달리는 한기를 느꼈다.
“루이티라고, 두목이 안 계시는 동안 들어온 애입니다. 인사해.”
“처, 처음 뵙겠습니다.”
클라드가 시키는 대로 루이티는 다시 인사했다. 그녀가 인사하는 모습을 냉랭한 눈으로 쳐다보던 두목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모여라. 할 말이 있다.”
“두, 두목. 저도 조금 드릴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듣지. 일단 모여라.”
일체의 반론을 허용치 않는 태도로 두목은 바람처럼 로비를 떠났다. 단원들이 급속도로 흩어지고 간부들은 모두 두목의 뒤를 따랐다.
클라드의 뒤를 따라 가면서 루이티는 두목의 등을 살폈다. 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름은 녹산. 어린 나이에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두목 자리에 올랐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아르바나단을 아버지대의 두 배 가까이 성장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보부에는 조금의 낌새도 주지 않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클라드는 설명했었다.
그냥 보면 조금 인상 나쁜 학문가처럼 보이는 외모 뒤에 차가운 폭력단 두목의 모습이 숨어 있는 것이다.
왠지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이 그들은 간부실 앞에 도착했다.
녹산과 간부들을 뒤따라 들어가려 했을 때 안쪽에서 차가운 말이 날아들었다.
“넌 왜 들어오지?”
녹산의 눈빛이 찌를 듯이 루이티를 보고 있었다. 클라드는 아차 하는 눈으로 그녀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잠시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금방 끝날 겁니다.”
문이 닫혔다. 루이티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주변을 살핀 뒤 문에 바싹 귀를 갖다 댔다. 약한 목소리가 문 안에서 들려왔다.
그렇지만 무슨 이야긴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루이티는 포기하지 않고 문에 들러붙었다.
간부실 안에서, 녹산은 깍지를 낀 손을 입가에 댔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가장 상석으로, 좀 전까지 베르딘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그년이 알아 버렸어. 자기 부하들이 우리랑 은연히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그럼 그 여두목을 끌어들이면 되지 않습니까?”
“나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여자, 보통이 아니더군. 절대 넘어오질 않아. 일부러 그 동네에서 이 주나 머물면서 설득했는데…… 마약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아. 나중엔 오히려 내가 당할 뻔했다.”
“당할 뻔하다니? 두목이 말입니까?”
“정보부에 불어 버리겠다고 하더군. 익명으로.”
기즈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공갈 협박입니다. 그 여자가 우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잖습니까.”
“이미 자기 수하들 중에서 우리와 관련된 녀석들은 모두 처벌했어. 그중에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뭔가 들었는지도 몰라. 너희들, 정보 관리는 잘 했겠지?”
“무, 물론입니다, 두목.”
녹산은 차가운 눈빛이 간부들을 훑었다. 저마다 눈빛을 피하면서 몸을 사렸지만 녹산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한동안 다른 경로만을 사용해야 할 거 같다. 지금 백작이 가지고 있는 양이 얼마나 되지?”
드디어 때가 왔다. 네 명은 한순간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 눈을 맞췄다. 짧은 순간 이뤄진 그 장면을 녹산은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냐.”
“저, 그게…… 두목, 그게 말입니다.”
이럴 경우 발언하는 자는 대략 정해져 있었다.
기즈. 그가 천천히 정보부의 조사와 함께 미노클 백작이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지난 한 달 동안 있었던 모든 사건을 설명했다. 그 사이 루이티의 이야기도 나왔고, 그녀가 지금 마약 운반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도 전부 토해 냈다.
이야기를 끝냈을 때, 녹산의 얼굴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참 입을 열지 않던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밖에 있나? 불러와, 그년.”
클라드가 즉각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문에 찰싹 붙어 있던 루이티가 비명과 함께 방 안으로 나뒹굴었다.
“우왓!”
뒤늦게 벌떡 일어난 그녀에게 녹산은 지극히 차갑게 내뱉었다.
“파문 기사의 동생? 그게 사실이냐.”
“그, 그렇습니다, 두목.”
존재감이 달랐다. 녹산에 비하면 화가 머리 끝가지 솟아오른 베르딘을 상대하는 게 더 쉬울 거라고 루이티는 생각했다. 다만 앉아 있을 뿐인데 머리가 꿰뚫리는 것 같은 감각이 다가왔다.
그녀는 긴장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여기 했다.
“정보부에 복수를 하고 싶어서 우리에게 붙었다고?”
“네, 마, 맞아요! 그래서 지금 순찰 경로도 이미 넘겨서 일을 돕고 이, 있습니다.”
녹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루이티를 찌를 듯이 쳐다보는 그 시선이 마치 물질화되어 그녀의 피부에 닿는 것 같았다.
녹산이 눈을 돌린 자는 알페였다.
“믿을 수 있나?”
“적어도 지금까지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큰 덕을 보고 있습니다.”
“현재 얼마나 남았지?”
“절반 정도…… 절반보다 좀 적게 남았습니다.”
녹산은 그 양을 가늠해 보았다. 한 달 동안 옮긴 것치고는 정말 빠른 속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이 여자가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말인가.
“이미 단원으로 들어와 있으니 내가 더 할 말은 없다. 벌어진 일에 책한다고 해도 할 수 없지. 모두 나가 봐라.”
“두, 두목?”
“이 여자를 남기고 모두 나가라. 이제 내가 처리하겠다.”
두목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기사단보다 폭력단이 그런 면에서는 더 엄격하다. 간부들은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겨진 루이티는 부담스러운 녹산의 시선을 루이티는 홀로 받아내야만 했다. 그것은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을 정도로 압박감이었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았다가는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녹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맹수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막혀 호흡 곤란이 오기 직전에야 녹산이 입을 뗐다.
“원하는 게 뭐지?”
“네, 네?”
“정보부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속셈을 가지고 우리 단에 들어온 거냐.”
“그, 그런 거 어, 없습니다!”
루이티는 최대한 단호하게 외쳤다.
“다, 단원으로 들어와서, 이, 이미 제가 원하는 것은 받았습니다! 크, 클라드는 간부에까지 추천해 준다고 했지만 저, 전 이미 단원에 마, 만족해요.”
“진심이냐.”
“네, 넷.”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이 한기는 어디서 들어오는 거지? 하지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답은 눈앞에 있었다. 이 남자, 도저히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과 눈빛을 하고 있어.
녹산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난 아직 너를 믿을 수 없다. 저 녀석들은 몰라도 날 속일 순 없어. 꿍꿍이가 있다면 조심해라. 조만간에 내가 알아챌 테니까.”
“그, 그러니까 꾸, 꿍꿍이 같은 건 없―”
“넌 앞으로 내 옆에 있어라.”
“에, 네?”
녹산은 끊어 말했다.
“감시하기 위해서도, 너를 이용하기 위해서도 내 옆이 가장 적절하다. 네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 정보가 쓸 만하다면 써 줘야겠지. 거절할 권리는 없다. 내 맘에 들면 간부로도 올려 주지. 그러니까 닥치고 일해라.”
반박할 여지는커녕 생각조차 주지 않는 말이었다. 루이티는 자기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튿날, 아르바나단 내에 빠르게 소문이 퍼져 나갔다.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된 신입이 두목의 측근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소문은 말린다고 말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틀이 지나자 모든 단원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물론 클라드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그는 루이티에게 찾아왔다.
“두목도 당신의 위치를 인정해 준 겁니다! 이제 간부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군요!”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그의 모습에 루이티는 멋쩍게 하하하 웃고 말았다. 녹산이 감시할 목적으로 옆에 두는 거라고는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루이티는 녹산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어떻게 보면 행동대장인 베르딘보다 가까운 자리였기에 그만큼 기회도 많았다.
루이티는 이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간부가 될 욕심까진 없었지만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만큼 더 이득도 많을 것이다. 그런 판단하에 녹산의 신임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어디를 가든 그를 따라다니며 일을 도우려 하는 그녀의 태도에 클라드와 베르딘은 감동했다.
“역시 우리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렇지, 클라드!?”
“동감이다. 두목도 인정해 주신 거야.”
그에 비해 알페와 기즈는 고개를 저었다.
“두목도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 두목이 이렇게 쉽게 인정하다니.”
그들의 두목은 명령과 지시만을 할 뿐 그 내막을 자세하게 얘기해 준 적이 없다. 이번에 베르딘이 멋대로 마약을 옮겨 버린 것도 결국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녹산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페는 루이티가 녹산의 옆을 떠난 틈을 타 그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왜 루이티를 옆에 두시는 겁니까?”
그때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닥치고 일이나 해라.”
그 후로 더 이상 물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녹산이 복귀하자 아르바나단의 작업이 가속을 붙여 나갔다. 녹산의 실행력은 베르딘의 그것과 비교할 것이 못되었다. 루이티는 그 옆에서 두목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까지 했다.
마약은 본거지 내의 지하 창고에 보관 중이었다. 이 양을 하룻밤에 옮기기 위해서 모든 인력이 투입됐었고, 지금은 그것을 루위스 밖으로 빼내기 위해 인력이 투입되는 중이었다. 녹산은 복귀 직후에 그 인력 배분부터 새로 짰다.
그전까지의 방식은 필요 없는 부분까지 인력이 배당되어 있어 진행이 느렸다. 녹산의 방식으로 바꾼 후 순찰 경로 탐색부터 시작하여 모든 부분이 활기를 띄었다.
그런 작업이 반복되면서 10일 동안 거의 대부분의 양이 수도 밖의 비밀 창고로 빠져나갔다.
그 사이 노큰 항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순찰대의 검문이 약화되어 리자브 왕국에서 잉그리즈를 재수입하겠다는 뜻을 밝혀 온 것이다. 녹산은 아르바나단 노큰 지부로 빠르게 전서를 써 보냈고 얼마 후 재차 잉그리즈 밀수입이 재개되었다.
그 즈음이었다.
마약 운반을 나갔다 돌아온 베르딘이 서둘러 녹산에게 찾아왔다.
“두목!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창고가 다 차 버려서 남은 마약을 넣을 데가 없습니다!”
“뭐?”
녹산이 잡고 있던 펜을 멈췄다. 그에게 찻잔을 나르고 있던 루이티도 덩달아 움직임을 정지했다.
“분명히 충분하다고, 지난번에 들었던 것 같은데.”
“그, 그게, 조사한 자식이 아무래도 실수를 했던 것 같습니다…….”
녹산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베르딘의 얼굴이 곧바로 굳었다. 녹산의 읽을 수 없는 머릿속에서 몇 차례 계산이 지나간 후에 그가 말했다.
“그 자식은 알아서 처벌해라. 방법은 맡긴다.”
“예, 옙! 그, 그럼 창고 문제는……?”
“다시 알려 주지. 나가 봐라.”
베르딘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나갔다. 다시 둘만 남겨진 루이티는 녹산의 눈치를 살피며 찻잔을 날랐다.
“루이티.”
“네, 네……?”
“어제 집에 다녀왔을 텐데. 정보부에 움직임에 대한, 다른 정보 없었나?”
“아. 그, 그게…….”
루이티는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지, 지금 말해도 되는 건가 해서…….”
“말해라. 안 좋은 소식은 한꺼번에 듣는 게 낫다.”
“정보부가 수도 내를 전체 수색할 거라고 해요……. 언제인지는 언니도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언니는 요즘 뭘 하지?”
“제, 제가 일했던 제과점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묻지 않던가.”
“그, 그냥 둘러댔어요. 아르바나단에 몸담고 있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
녹산은 찻잔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일어섰다. 루이티가 어떤 대답을 하든지 별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였다. 그럼 왜 물어본 거야? 루이티는 속으로 투덜댔다.
“전체 수색? 날짜는 모른다?”
“네, 네. 대대적인 인원을 동원한다고…….”
“믿을 수 있나.”
“미, 믿어 달라고 해도 두목님 맘이잖아요?”
“흥, 잘 아는군.”
차가운 태도로 그는 방을 나가 버렸다. 루이티는 또다시 흠뻑 젖어 버린 등짝의 기분을 느끼며 작게 혀를 찼다.
방을 나선 녹산은 루이티가 쫓아오기 전에 간부실로 들어갔다. 서류 처리를 하고 있던 알페가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두, 두목! 부르시면 제가 갈 텐데!”
“신경 쓸 거 없어. 그년이 없는 편이 나아.”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녹산은 알페에게 묻지 않고 책상 위의 아무 종이에다가 짤막하게 써 갈겼다. 그 종이를 접은 후 알페에게 건넸다.
“그 남자에게 전해라.”
“……지금, 말입니까?”
녹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페도 짧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곧바로 간부실을 달려 나갔다.
‘그 남자’에 대한 일은 아르바단에서도 녹산과 알페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같은 간부라고 하더라도 녹산은 그 임무를 철저하게 가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베르딘은 육체 노동, 알페는 두뇌 노동’과 같은 식이었다. 덧붙여 기즈는 단원 관리, 클라드는 정보 담당이었다.
알페가 돌아온 것은 한밤중이었다.
루이티를 내보내고 혼자 있던 녹산에게 알페가 신중히 문을 두들겼다. 녹산은 낮은 목소리로 응답했고, 방으로 들어온 알페가 전서를 그에게 넘겼다.
전서를 빠르게 읽어 내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페가 뒤를 따르려고 하자 그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나 혼자 간다.”
“하, 하지만, 이 밤에 위험합니다.”
“그런 말은 네 애인한테나 해라.”
녹산은 반론의 여지도 주지 않고 방을 나섰다.
본거지에는 일반 부하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 문이 있었다. 그곳을 통해 바깥으로 나간 녹산을 어두운 밤거리를 달렸다.
간간이 부딪히는 사람들을 피해 그림자에 숨어서 뒷골목을 도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그는 시 외곽까지 뛰어나갔다.
시 외곽에서는 여전히 검문이 있었지만 녹산은 길을 알고 있었다. 개구멍 같은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서 그는 그 남자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달빛을 등불삼기에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요 며칠 비가 와서 오히려 깨끗이 보이기까지 했다.
한참을 나아가던 도중, 루위스 인근 숲 근처에서 그는 발길을 멈췄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그것은 누군가 근처에 있다는 말이 된다. 녹산은 낮게 암호를 소리 냈다.
잠시 후 저쪽에서도 암호가 들려왔다. 그 후 수풀 뒤쪽에서 그 남자가 걸어 나왔다.
달이 만들어 낸 그늘은 태양의 그늘보다 더욱 어둡다. 녹산은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정체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렇게 급하게 연락해서 미안하오.”
“아니오, 내 쪽에서도 전서를 쓸 참이었소.”
인사도 생략하고 그들은 본론으로 직행했다.
“정보부에서 대대적인 수색을 준비 중이라고 하오. 어게 회의에서 정보부 장관이 말하더군. 그 때문에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 연락하려고 했었소.”
“정보가 사실이었군…… 좀 더 빨리 연락하지 그랬소?”
“이쪽도 여의치 않아. 귀찮은 녀석이 나타나서 말이오.”
“귀찮은 녀석?”
“됐소,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하면 되니까. 당신은 마약을 처리해 주기만 하면 되오.”
녹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하려 했다.
“그 때문에 할 말이 있소― 잠깐.”
말 중간에 그가 끊었다. 그 남자도 그 순간 녹산이 무엇을 감지했는지 알아챘다. 둘은 동시에 그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댔다. 바위 뒤였다. 거리상으로 가까운 것은 녹산이었고, 그는 질풍처럼 어둠을 날아 바위 뒤를 습격했다.
도망치려 하던 그림자가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나왔다. 달빛 아래로 나왔을 때 녹산은 그게 누군지 알아챘다.
“루이티!? 네년!”
“두, 두목님! 그…… 그게!”
“네년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루이티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녹산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그녀의 목에 겨누었다.
“바른 대로 말해라. 누구의 사주냐!”
“사, 사주라뇨! 저, 전 그냥! 이, 이 야밤에 두목님이 어디 나가시나 싶어서 뒤따라 온 것뿐이에요! 정말입니다!”
“죽고 싶나!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지, 진짜예요!”
검날이 조금 목을 베였다. 따끔한 고통 속에서 루이티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고, 녹산은 그녀를 내려다본 상태로 단검을 치우지 않았다.
한동안 그 사태가 이어졌다. 남자가 다가오려 했을 때 녹산이 단검을 치우고 그녀의 위에서 비켰다.
“일어나라.”
“흐, 흐아…… 살았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땀을 닦으며 루이티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녹산의 눈빛을 읽고 금방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훔쳐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그냥 누굴 만나시는 것 같아서, 누굴까 궁금해서…….”
“닥치고 잘 들어라. 난 너를 아직 믿지 않아. 살고 싶으면 의심받을 만한 짓은 하지 마라. 알겠나.”
“……네.”
녹산이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라. 그리고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루이티는 허리 깊숙이 인사를 하고서 재빨리 도망쳤다. 머지않아 달빛 아래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슬쩍 본 후에야 녹산은 말 속에 안도의 기운을 내비쳤다.
“미안하오. 설마 따라왔을 줄이야.”
“앞으로 주의하시오. 우리의 거래가 누구에게 발각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오.”
“알고 있소.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지.”
그 남자의 심중을 읽으면서 녹산은 다시 본론을 꺼냈다.
“일 얘기로 돌아가서, 전체 수색이 있다는 정보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소. 알고 있겠지만 그 전에 마약을 모두 빼내는 게 가장 안전할 거라고 생각되오. 우린 이미 상당량의 마약을 루위스 밖 비밀 창고로 빼냈소.”
“일처리가 빨라서 좋군.”
“하지만 문제가 좀 생겼소. 그래서 그쪽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요.”
“무슨 도움이 필요하오?”
“마차와 창고를 지원해 주시오.”
그 남자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녹산이 빠르게 설명했다.
“수색이 언제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양은 얼마 남지 않았소. 그래서 한꺼번에 남은 양을 다 빼내려고 생각 중이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쪽 창고가 가득 찬 상태라 급히 다른 창고가 필요하오.”
“마차는 왜 원하는 거요.”
“우리가 가진 것은 너무 작소. 그쪽이라면 빠른 시일 내에 마차를 공수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어떻소?”
녹산은 원하는 마차의 크기를 말했다. 그 남자의 대답은 늦지 않았다.
“가능하오.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보내도록 하지. 그때 창고의 위치도 함께 알려 주겠소.”
“고맙소.”
“반드시 성공시키시오. 기동대의 순찰은 잘 피해야 할 거요.”
“그 점은 걱정 마시오. 확실한 정보가 있으니.”
“그리고 방금 그 자. 아무래도 꺼림칙한데 살려 둬도 되겠소?”
그 남자가 의심이 그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녹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직 쓰임새가 남아 있으니 죽일 수는 없소. 게다가 실행 당일 날엔 그년 모르게 경로를 바꿀 거요. 우리 거래에는 결코 지장이 없을 것이오.”
녹산은 단언했다. 잠깐의 틈을 두고 그 남자도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좋소, 믿고 맡기겠소.”
***
이튿날, 약속대로 마차가 도착했다. 안내역으로 온 자가 단원에게 지도를 넘겨 주었고, 그 지도는 빠르게 녹산의 손에 돌아왔다.
“그게…… 뭔가요?”
“알 거 없다.”
루이티의 질문을 단번에 뭉갠 다음 녹산은 간부들을 모았다. 오랜만에 다시 모인 네 명의 간부들과 함께 회의를 시작하기 전 그는 루이티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두목, 무슨……?”
루이티가 없는 회의는 오랜만이었기에 클라드는 당연한 의문을 품었다. 녹산은 설명하지 않고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루위스 밖으로 뻗은 길이 그려진 지도를 보며 간부들이 의문스러운 눈동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남아 있는 마약을 전량 이 창고로 옮긴다.”
지도상에서 작은 개천을 지나 나타난 표시 지점을 가리키며 녹산이 말했다. 갑작스런 명령이었기에 간부들이 일제히 놀랐다.
“두목, 왜 이렇게 갑자기?”
“곧 있으면 전체 수색이 시작된다. 그래서 그 전에 마약을 안전하게 빼낼 것이다. 실행일은 바로 내일. 지금부터 모든 경로를 탐색하여 길을 정하고 마약을 마차에 실어라.”
“이, 이렇게 급하게 말입니까?”
“늦장 부릴 시간 따윈 없다.”
그 단호함이 평소보다 더했기에 간부들도 더 이상의 이견을 펼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말하자면 팀워크였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이 달려 나갈 때 녹산이 손을 들었다.
“알페, 너는 잠깐 남아라.”
“네, 두목.”
녹산은 알페에게만 들리도록 음성을 낮췄다.
“모든 경로는 두 가지 이상 알아봐라. 움직이는 마차 전부다.”
“네? 그, 그러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텐데 괜찮겠습니까?”
“너라면 할 수 있다. 이 일은 너와 나만 알고 있는 거다. 루이티에겐 절대 알리지 마라.”
알페는 그때 깨달았다. 녹산은 루이티를 옆에 두고 있지만 절대 믿고 있지 않다. 신뢰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는 녹산의 의도를 읽고 굳게 대답을 하고 나갔다.
잠시 후 들어온 루이티에게 녹산을 짤막하게 지시만을 내렸다.
“내일 밤 마약 운반이 있다. 언제나처럼 준비해.”
“네, 알겠어요.”
루이티는 평소와 같이 대답했다.
간부들이 뛰어다녀 마약을 모두 마차에 싣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루이티가 준 순찰 경로의 정보에 따라 알페가 마지막까지 머리를 써서 경로를 만들어 낸 것은 출발 직전. 달이 밤하늘에 정중앙 가르고 지나갈 때였다.
뒤늦게 달려온 알페가 모두에게 경로를 알렸다. 녹산과 네 명의 간부를 리더로 마차는 총 다섯. 출발하기 전에 녹산은 전원에게 똑똑히 일렀다.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한동안 편할 수 있다. 모두 방심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알겠나!”
“네! 두목!”
우렁찬 대답을 끝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루이티는 녹산의 마차에 동행하였고, 녹산이 출발 전의 마차 점검을 지시했다.
그래서 마차를 둘러보느라 그가 남은 간부들에게 다른 지시를 내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세 번째 경로로 간다.”
“예.”
이 네 명의 간부를 먼저 보내고 녹산은 가장 마지막에 출발했다. 본거지의 뒤쪽에서 사두마차는 달그락달그락 골목길로 벗어나왔다.
사두마차가 지나다니기에는 조금 좁았지만 그것도 녹산은 다 계산한 바였다. 조절을 잘한다면 좁은 골목도 부담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녹산이 말고삐를 잡고 그 옆에 루이티가 앉아 루위스의 지도를 점검했다.
어둡고 고요한 밤길에 마차 소리만이 이어졌다. 기동대의 순찰이 가는 길은 이미 루이티의 정보로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순찰이 가까워지는 시점에서는 잠깐 멈춰 서서 그들이 기다리기는 기다렸다가 출발하기도 했으며 조금 속도를 올려 지나치기도 하는 등, 그동안 이미 익숙해진 방식으로 녹산은 마차를 움직였다.
루이티가 본격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것은 마차가 외곽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앞서 들은 경로와 다르게 녹산이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두, 두목님? 그 길이 아니에요. 이쪽으로 가야―”
“닥쳐라.”
녹산의 냉정한 말이 떨어졌다.
“네년이 알고 있는 길로 가지는 않는다.”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부터 말했을 거다. 난 네년을 믿지 않는다고. 경로를 정할 때 알페에게 너의 정보를 넘겨 줬겠지. 그때 평소보다 많이 물어보지 않더냐? 전부 마차 하나당 두 가지 이상의 경로를 만들어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뭐, 뭐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신 거죠?”
루이티의 음성이 떨렸다. 녹산은 조소를 숨기지 않았다.
“핫! 뭐 때문에? 네년이 정보를 못 빼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냐. 당연한 일이지. 네년이 기동대든 순찰대든, 아무튼 정보부의 간첩일지 누가 안단 말이냐.”
“그, 그럼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건가요?”
“난 너를 믿지 않아. 아니,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믿는 것과 이용 가치가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지.”
루이티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녹산은 매우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지도를 빼앗아 들었을 때 마차는 외곽에 도착해 있었다. 조금 지체된 시간이라고 판단되어 그는 검문소가 보이자 조금 속도를 올렸다.
“저, 전 조금이라도 저를 믿고 계신 줄 알았는데…….”
“내가 믿어 주길 원한다면 계속 입조심하고 있어라. 알겠나. 네년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그 목을 그어 줄 테니까.”
당연하게도 그는 완벽하게 무장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루이티에겐 아르바나단에 들어올 때부터 가지고 있던 단검뿐이었다.
녹산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루이티는 여전히 낯빛을 잃은 채였고 녹산은 의기양양한 눈으로 검문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각 검문소는 신웅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야 함이 분명한데도,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충격을 받은 루이티도 그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미 검문소를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지, 지금 검문소에 아무도 없었―!”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수도 내를 순찰하는 것은 기동대만이 아니다. 뮈인터트 기사단장이 이끄는 신웅 기사단도 별도의 순찰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루이티가 쥐고 있는 정보는 기동대뿐. 남은 신웅 기사단의 순찰에는 대비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달이 넘는 지난 기간 동안 신웅 기사단과 마주쳤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바로.
“……신웅 기사단의 정보까지 가지고 있었던 건가요?”
경악에 가까운 질문.
“어, 어떻게?”
“대답해 줄 의무는 없지. 넌 닥치고 그냥 있기만 하면 된다. 쓸데없는 것에 흥미나 의문을 가지지 마라. 오래 살고 싶으면.”
설마. 그런 의문이 루이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다면, 어제 녹산이 만난 그 자는 설마?
의문을 풀기도 전에 마차는 루위스를 빠져 나와 지도에 쓰인 방향대로 이동했다. 어느 정도 루위스에서 멀어지자 녹산은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렸다.
그대로 두어 개의 야산과 개천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 개천을 따라 내려갔다. 달이 서쪽으로 대충 기울었을 즈음 도착한 계곡에서 목표로 한 작은 동굴이 보였다.
녹산은 동굴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그 뒤를 따라 속속들이 마차들이 도착했다. 루위스의 각 방향으로 빠져 나온 네 대의 마차가 다 모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차에서 간부들이 내려서 녹산에게 보고를 하려 할 때, 동굴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가 달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려고 할 때 녹산이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아직 나오지 마시오.”
녹산의 눈빛은 동굴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간부들과 단원들도 근처를 뒤졌지만 녹산이 염려하고 있던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목, 왜 그러시죠?”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단원들이 다시 모였다. 하나 같이 주변에 누가 있는 흔적은 없다고 했기에 녹산은 그제야 마음을 놓는 표정으로 루이티를 돌아보았다.
“역시 이번에는 연락을 못한 모양이군?”
“누, 누구한테 말이죠?”
“글쎄, 누굴까?”
이죽대는 녹산을 말린 것은 동굴 안의 남자였다. 그는 더 이상의 제지가 없자 달빛 밑으로 걸어 나왔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예민했던 모양이오.”
천천히 걸어 나옴에 따라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루이티가 문득 눈동자를 돌려 그를 보았다가, 그만 무심결에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뮈인터트 기사단장……!?”
그의 걸음이 멈췄다.
“내 이름을…… 안단 말이오?”
녹산과 간부들의 머릿속에 빠르게 생각들이 지나갔다. 루이티는 아르바나단의 신입. 그전에는 제과점에서 일하던 여자다. 그런 여자가 왕성 안에서 살아가는 기사단장의 얼굴을 알 리가 없다.
녹산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년, 역시……!”
그가 검을 뽑아든 그 순간, 루이티는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뛰어야 한다. 내버려 둘 리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위기를 감지했을 때 이미 그녀는 루이티가 아니었다.
루이티― 아니, 로티아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녹산이 당장에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잡아라!”
주변에 횃불이 피어올랐다. 동굴 근처가 아니었다. 동굴이 있는 계곡을 둘러싼 거대한 횃불의 원이 하나 둘 피어오른 것이다.
로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단원들의 검이 그녀를 향했다. 사방에서 짓쳐드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마차를 뛰어넘었다.
“거기 서라!”
“죽고 싶지 않으면 서라!”
단원들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로티아와의 거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등 뒤에서 뻗어 오는 손의 기운을 느낀 로티아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대장님―!”
로티아의 부름에 대답한 것은 어느 마법사의 주문이었다.
“대지에서 솟는 회오리!”
마력핵이 마법사의 몸 안에서 빠져 나왔다. 손끝에서 빠져 나온 마력핵은 시전자인 마법사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마법사의 인도에 따라 허공을 날아간 마력핵은 로티아를 지나쳐 그녀의 등 뒤쪽에서 ‘파괴됐다’.
슈우욱―!
마력핵이 파괴된 그 자리에서 마력이 요동쳤다. 대지를 치고 올라온 마력의 기운이 회오리가 되어, 공기와 함께 빨려 올라갔다.
단숨에 사람의 키의 두세 배를 넘기는 회오리기둥이 단원들을 가로막았다.
“마, 마법사다!”
“뭐야, 이거!?”
횃불들이 일제히 포위망을 형성했다. 로티아는 필사적으로 개천을 향해 뛰었다. 바위투성이의 길을 지날 때 그녀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티아! 뛰어!”
“대장님!”
기동대장 아서. 그리고 횃불로 비치는 그 주변에는 태진과 아리스의 모습도 서 있었다.
태진이 아르바나단을 향해 외쳤다.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아르바나단과 뮈인터트 기사단장! 당신들을 이곳에서 체포하겠습니다!”
***
아르바나단의 핵심 간부와 단원이 그 자리에서 모두 체포되었다. 아르바나단은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기동대와 흑안 기사단, 거기다 마법사까지 동원된 포위망에는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클라드는 로티아의 배신이 충격이었는지 처음부터 넋이 나가 있었다. 화가 난 베르딘은 좀 더 솔직하게 기사들을 때려눕혔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결국 둘 다 결박당한 채 로티아 앞으로 끌려왔다.
아서의 곁에 있던 로티아는 차마 클라드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루, 루이티…… 당신이 어떻게…….”
“……미안합니다. 임무여서 어쩔 수 없었어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아르바나단에 숨어든 것이 40일. 그 사이 가장 자신을 도와줬던 클라드에 대해서는, 아르바나단에서 지내는 내내 미안했다.
그래서 그들이 끌려간 후 로티아는 아서에게 부탁했다.
“대장님. 클라드라는 저 자만은…… 선처할 수 없겠습니까?”
“정하는 것은 태진 님이니까 나중에 말해 보도록 하지. 그새 정이 들었나?”
“옳지 못한 마음이란 것은 압니다. 하지만…… 맘이 조금 그렇군요…….”
아서는 안타까운 눈으로, 거짓 파면을 한 부하 기사를 쳐다보았다. 맨 처음 태진에게서 이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격렬하게 반대했었다.
실수의 책임을 물어 잘린 척하고, 그녀가 아르바나단에 직접 잠입하여 들어가 그 안에서 전체를 유인해 낸다는 계획.
로티아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작전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뒷골목 출신인 로티아 말고 적격인 자를 찾기 어려웠다. 그 점을 알기에 로티아도 스스로 작전에 뛰어들 것을 결심했다.
지금에야 모든 일이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까딱해서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발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래서 작전의 발안자를 원망스럽게 쳐다봐 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안타깝게도 그 눈길의 끝에 태진은 없었다. 태진과 아리스, 그리고 라스터는 뮈인터트의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뮈인터트 단장,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당신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흑안 기사단의 일부를 끌고 직접 지휘를 나선 라스터. 맨 처음 태진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믿지 못하여 이렇게 따라왔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혼란스러움이 그의 표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포박당하여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도 뮈인터트의 눈빛을 결코 죽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지 않겠소, 특사대장?”
“그것은 나중에. 심문을 하며 천천히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태진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아리스도 뭔가 죄송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뮈인터트는 결국 혀를 차며 눈을 감고 말았다.
뮈인터트를 비롯하여 녹산과 아르바나단의 간부들, 마약 운반을 맡은 단원들까지 모조리 일망타진하여 정보부로 연행되었다.
나름 한산한 편이었던 임시 감옥이 덕분에 순식간에 들어찼고 간수들은 늘어나는 일거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힘을 빌려 줘서 감사합니다, 라스터.”
“아냐…… 따라간다고 한 건 내가 먼저였으니.”
특사대에 일단 모인 이들을 향해 태진이 인사를 건넸다. 원래라면 라스터에게까지 조력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뮈인터트 기사단장이 엮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태진의 추측을 들은 그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고 하여 할 수 없이 같이 움직인 것이었다.
물론 대규모의 포위망을 만들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지만, 그 때문에 라스터는 제법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정말로 뮈인터트 단장이 아르바나단과 내통하여, 그것도 마약 운반까지 돕고 있었을 줄은…….”
“루위스의 검문은 신웅 기사단에서 맡고 있습니다. 노큰 항에서 오는 마약과 각지로 빠져나가는 마약까지, 그 이동이 발각되지 않으려면 그의 존재가 매우 컸을 겁니다. 그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느냐, 아니면 아르바나단에게 강제적으로 협력했느냐는 심문을 해 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뒤에서 거래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로티아가 아르바나단에서 있는 당시에도 태진은 정기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녀에게는 실제로 동생인 루이티가 있고, 실제로 제과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녀를 통해 전서가 오고 간 것이다.
애초에 태진은 기동대의 순찰 경로만으로는 완벽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아르바나단은 로티아를 받아들였고 그녀의 정보를 사용했다.
기동대를 제외하고서라도 신웅 기사단의 순찰 또한 완벽하게 피하며 마약을 옮겼다.
거기서부터 태진은 아르바나단과 연계되어 있는 자가 있음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자연적으로 신웅 기사단의 단장인 뮈인터트로 귀결되었고, 그를 유인해 내기 위해 전체 수색 공지를 알렸다.
아르바나단의 두목 녹산은 역시 누군가를 몰래 만났다. 결국 로티아는 그가 누군기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튿날 뮈인터트의 움직임에 주시하고 있던 태진은 그가 시종에게 비밀스런 심부름을 시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이 마차와 창고의 준비였고, 시종을 붙잡아 심문하여 창고의 위치를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실행일. 미리 기동대와 흑안 기사단의 인원들을 동굴 근처에 매복시켜 두고서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가장 먼저 뮈인터트가 나타나 동굴 안으로 숨었고, 그 뒤 예상대로 아르바나단도 동굴 앞에 집합하였다.
남은 것은 모두 체포하는 작업뿐이었다.
40일을 넘는 긴 작전의 마지막은 그렇게 장식되었던 것이다.
그 기간 중 가장 억울한 자라면 역시 아리스였다. 태진은 작전의 전모를 말미에 가서야 그녀에게 알려 줬던 것이다.
“왜, 왜 진작에 알려 주지 않으신 거죠!”
“처음부터 알렸더라면 아리스는 분명 반대했을 겁니다. 로티아를 파문하여 아르바나단에 잠입시킨다는 것.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그래서 지금 알려 드리는 겁니다. 이제 이해하셨죠? 그건 무슨 서류입니까?”
태연하게 보고서를 훑어보는 태진에게 아리스는 뭐라고 화도 못 내고, 며칠 동안 심통 난 얼굴로 마법사단 본부를 들락날락거렸다는 후일담이다.
어쨌든 지금에 와서 그녀는 로티아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에 매우 안심하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정말!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이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선택한 임무였는걸요. 끝까지 완수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정말 로티아 이외에는 없을 적격이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로티아.”
태진의 인사까지 받고서 로티아는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뜻을 온몸으로 표시했다.
“아서. 그녀에게 휴가를 주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럴 예정입니다. 장관님께도 이미 승인을 받아 둔 상태입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시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 아닙니다! 지금부터가 큰일일 텐데 저 혼자 쉴 수는 없습니다!”
“괜찮아요, 로티아. 한 달 넘게 고생했잖아요. 조금 쉬어도 아무도 책하지 않아요.”
아리스의 부드러운 말에 로티아는 결국 감동의 눈물을 글썽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아내던 그녀는 급기야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아리스가 그녀를 달래는 사이 그녀가 편하게 울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기로 했다.
로티아의 말 그대로 그날부터가 큰일이었다.
아르바나단이라는 큰 폭력단이 하나 궤멸되었다. 자잘한 단원들을 잡아들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고, 노큰 항구에서 섣불리 연락을 한 탓에 잡아낸 꼬리를 잡고 잡고 들어가 노큰 지부를 모두 검거하는 데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일에는 귀족인 뮈인터트 단장도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리도 만만치 않았다.
태진이 보고했을 때 충격으로 몸져누울 뻔한 팰리슈를 간병하는 것은 에스타냐에게 넘긴다고 치더라도, 자리가 비어 버린 단장 대리 선정과 기사들 중 그에게 협력하고 있던 자들을 색출해 내는 것도 보통 작업이 아니었다.
그 모든 뒷정리가 일단락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넘어간 상태였다.
그동안 태진을 비롯하여 아리스, 하이듀크, 라스터, 팰리슈까지. 중요 요직에 있는 자들은 문자 그대로 미친 듯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태진이 뮈인터트와 정식으로 마주한 날은 한 달이 지나고 일주일이 더해졌을 시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맥스일 백작.”
단장에서 물러난 지금 뮈인터트가 가진 것은 백작이라는 지위뿐이었다. 옥에 갇힌 신세로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그에게는 고명한 기사로서의 위세가 남아 있었다.
“…….”
대면실에서 만난 태진을 고요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태진은 눈을 감은 채 그의 눈빛에 응수하고 있었다. 눈싸움을 하면 지는 것은 당연히 뮈인터트 쪽이었다.
“내게 물을 것은 더 없는 것으로 아오만, 지금에 와서 심문이 무슨 소용이오?”
“확실히…… 아르바나단 건에 관해서는 이미 모든 정리를 끝냈습니다. 당신에게 얽혀 있던 끈도 모두 알았고, 그동안 당신이 다른 귀족들과 어떤 유착을 가져왔는지도 조사를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원한단 말이오? 어서 나를 감옥에 처넣으시오. 미켈파 남작도, 오켈라니아 남작도 그랬잖소.”
“재판을 하는 건 순찰대일이니 제가 알 바가 아닙니다. 그보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태진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명을 받아 아르바나단을 출입하던 시종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시종을 심문하던 도중에 알라낸 사실인데…… 당신의 저택에 그 시종 말고 몇 달에 한 번씩 출입하는 자가 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흥! 무슨 헛소리요, 그건 또?”
“게다가 그 자는 국경을 넘는 자라고, 시종이 증언했습니다만.”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소만.”
“모르시면 곤란합니다. 누구보다 당신이 신뢰하던 시종의 말입니다.”
태진은 능글맞기까지 한 태도를 고수했다. 하지만 뮈인터트도 오랜 연륜을 쌓아 온 자였다. 쉽게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매우 예의 없는 자로군. 그것이 귀족을 대하는 태도란 말이오?”
“특사대 앞에서 신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맘에 안 드는 자로고.”
“저도 딱히 당신이 맘에 들었던 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처음부터 당신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태진은 느긋하게 말했다.
“맥스일 가문은 원래 제국 출신의 귀족이더군요. 30년 전에 맥스일 가문이 로츠왈드 반란군 측에 붙어 독립 전쟁을 도운 것은 제국에게 가진 반감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나의 아버지, 맥스일 전 백작께선 황제의 폭정에 영지의 주민들이 휘둘리는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하여 로츠왈드 편에 서셨지. 지금도 건국의 숨은 공신이라고 불리는 게 우리 가문이오.”
“하지만 현신의 전사는 언제나 의심의 여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제국 출신의 귀족이니 만큼 완전하게 믿어선 안 된다고. 실제로 맥스일 가문에서 주도했던 전투 중 일부분 정보가 빠져나간 흔적이 있었다고 독립 전쟁사에 기술되어 있더군요.”
정확하게 맥스일 가문이라고 표시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립 전쟁사에 기술된 사실보다 더욱 믿을 수 있는 건, 전쟁을 직접 이끌었던 태진의 기억이다.
태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작전 정보가 사전에 빠져나가 임기응변으로 대처했던 전투들을.
그 선두에는 꼭 맥스일 가문이 있었다.
“우연이오. 맥스일 가문은 긍지 높은 기사의 가문이오. 하늘 아래 부끄러운 짓을 했을 리가 없지 않소!”
뮈인터트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진은 예상했다는 듯 어조를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현신의 전사가 의심했다는 것도 진실입니다. 그리고 저도 당신을 의심했고, 그 의심은 정확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떳떳했을지 몰라도 과연 당신은 떳떳할까요?”
“내가 아르바나단의 뒤를 봐주며 그들의 장사를 도왔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오. 내 저택에 국경을 넘은 자가 출입한다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태진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눈을 감고 있기에 이 표현은 다른 감각을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쉽게 밝히리라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한 가지 사실을 밝히겠습니다.”
“사실?”
표정을 부드럽게 푼 채, 태진은 눈을 떴다. 눈동자가 밝은 빛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되도록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를 만큼 뮈인터트는 멍청하지 않았다.
“……도, 동쪽의 나라……!”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보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할 말을 잃어버린다. 뮈인터트는 대부분의 사람에 들어갔다. 얼굴을 굳은 채 아무런 말도 못하는 그를 보며 태진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요새 늘 눈을 감고 생활했더니 눈 뜨는 쪽이 어색할 정도입니다.”
“이, 이게 어떻게…….”
뮈인터트의 말이 끊긴다.
“가, 강태진. 당신, 서, 설마 동쪽의 나라 사람인 거요! 그, 그동안 우리들을, 이 나라를 속여 왔던 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국왕을 비롯하여 정보부 장관, 흑안 기사단장. 일부는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만 나라 안팎으로, 특히 당신을 견제하여 제가 그 사실을 감추고 있던 것뿐입니다.”
“그, 그렇다면 그 머리는 어떻게 된 것이오? 동쪽의 나라 사람은 검은 머리라고 들었는데……!”
“쉽게 말하면 탈색입니다. 동쪽의 나라엔 머리카락의 색을 빼는 기술이 있습니다. 감추려면 완벽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진은 여유롭게 뮈인터트의 입을 막았다.
“제가 왜 눈을 떠서 정체를 드러냈는지, 알겠습니까?”
뮈인터트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진은 그것을 부정으로 받아들였다.
“지금부터 당신을 심문하기 위해서입니다.”
“어, 어쩔 속셈이오!”
“동쪽의 나라 사람, 예를 들어 30년 전의 현신의 전사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두뇌 말이오?”
“거기에 오감도 극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얘기하는 와중에도 당신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잔잔히 들릴 말큼 예민합니다.”
뮈인터트의 눈이 커졌다.
“저도 현신의 전사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진은 호흡을 주지 않고 말했다.
“지금부터 당신의 거짓말을 간판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오늘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온 것은 처음 해 보는 시도이기에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태진은 온 감각을 일깨웠다.
시각은 뮈인터트의 미세 근육의 움직임까지 읽어 냈다.
후각은 옅게 뿜어지는 향수와 체취까지 구분해 냈다.
청각은 침이 넘어가는 소리부터 호흡 숫자, 박동까지 잡아냈다.
미각을 제외한 마지막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진의 손이 자신의 얼굴로 뻗어 오자 뮈인터트는 본능적으로 내치려고 했다. 그러나 뒤늦게 손이 의자 뒤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뮈인터트의 얼굴을 뒤덮었다. 손가락 끝을 얼굴 피부에 댄 채 태진은 촉각을 일깨웠다. 신경을 타고, 손가락이 닿은 얼굴 각 부분의 미세한 온도 차이가 모조리 잡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너무 크게 소리치지 마십시오. 지금 청각이 예민해서 작은 소리로도 귀가 울립니다.”
미리 아리스를 상대로 잠깐 연습은 했었다. 이능을 깨운 지금의 예민도(度)가 가장 적절했다.
잠깐 심호흡을 한 뒤 태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질문은 제가 합니다. 모든 질문에 예, 아니오. 이 두 가지로만 대답해 주십시오.”
“자, 잠깐. 지금 심문하는 거요? 이런 심문은 들어본 적이 없소!”
“그럴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심문은 없습니다. 그리고 소리 좀 지르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쩡쩡 울리는 청각에 고막이 비틀대는 감각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각을 제외하고 모두 깨웠더니 저마다의 감각을 컨트롤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태진은 자세를 고쳤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당신은 첩자입니까?”
“무, 무슨 망발을! 귀족을 모욕하는 것이오, 지금!?”
“예, 아니오.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해 주십시오.”
“절대 아니오!”
직선적인 질문. 돌아온 대답에 태진의 감각이 판단했다. 체온이 미묘하게 상승했다. 대답하는 순간 심장 박동이 살짝 빨라졌다. 얼굴 근육이 약간 경직됐다.
그는 판단을 내렸다.
“거짓말이군요.”
태진은 지금 스스로를 거짓말 탐지기화시킨 것이다. 거짓말 탐지기는 사람이 어떤 대답을 했을 때 체온 변화와 심장 박동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여 진실인지를 판별한다.
그 감각적 정보를 지금 그는 이능으로 읽어낸 것이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했습니까?”
“아니오! 진실이오!”
“그것 또한 거짓말이군요. 당신의 신체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태진의 단호한 어조에도 뮈인터트는 인정하지 못했다.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손을 쳐내고 싶었지만 귀족이 고개를 보기 흉하게 흔드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결국 그 자세 그대로 흉흉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짓인지 모르겠지만…… 그걸로 내가 입을 열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아, 감사합니다. 스스로 실토해 주셨군요.”
“뭐, 뭐?”
태진의 기행에 열이 받아서 제대로 말을 고르지 못했다. 뮈인터트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태진은 웃는 낯으로 그에게 설명했다.
“당신은 지금 ‘입을 연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것은 무언가 숨기는 사실이 있을 때, 그 사실을 털어놓음을 의미합니다. 곧 당신에겐 ‘입을 열’ 사항이 있다는 뜻이겠죠.”
뮈인터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어, 억지요! 그런 마, 말도 안 되는!”
“아, 지금 체온이 떨어졌습니다. 진실을 들은 순간 땀이 배출되면서 일순간 체온이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당신도 그런 경험이 한두 번은 있을 겁니다.”
꼬리는 붙잡았다. 이미 태진은 시종의 증언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아리스가 맥스일 저택의 모든 인원과 출입 명부까지, 빠짐없이 조사해 올 것이다. 태진은 그 사이 뮈인터트와 만나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단서를 잡아내는 것이 임무였다.
대면실의 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태진은 문 앞에 누군가 도착한 순간 정체를 알아채고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아리스.”
예를 갖춰 들어온 것은 역시 아리스였다. 들어오자마자 보인 태진과 뮈인터트의 괴상한 구도를 보고 그녀는 대번에 이해했다.
“단서를 잡으셨어요?”
“조금 전에 백작이 스스로 실토한 참입니다. 증거는 나왔습니까?”
“그 첩자를 본 자가 또 있었어요.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밤중에 드나드는 자가 있다고 증언해 줬어요. 지금 특사대에서 대기 중입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굳이 백작에게 얘기를 들은 것도 없겠군요.”
태진은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감각을 평소 수준으로 되돌린 후 검은 눈동자로 흔들림 없이 뮈인터트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모두 끝입니다. 시종의 증언을 얻으면 조만간 저택의 수색도 가능할 겁니다. 국경에서 당신에게 협력하고 있는 기사들도 소환할 생각입니다. 실토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쪽에서 모든 것을 밝혀 낼 겁니다. 로츠왈드 왕국의 긍지 높은 귀족이었지만 결국에는 첩자 가문이라는 불명예를 쓰고 옥에 갇히십시오. 그것이 맥스일 백작, 당신의 운명입니다.”
용서라고는 한 치도 보이지 않는 말투였다. 듣고 있던 아리스가 착잡해지는 말인데, 뮈인터트 본인이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뮈인터트는 귀족이라는 신분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자였다. 태진은 이 심문 와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
방금 전의 대사는 태진이 마지막으로 띄운 승부수였던 것이다.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는 순간,
“……하나만 대답해 주시오.”
태진은 떠오르려는 미소를 지우고 돌아섰다.
“물어보십시오.”
“내가 만약 여기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면…… 난 어떻게 되는 것이오. 우리 가문은…… 어떻게 되는 거요.”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당신은 어쨌든 큰 죄를 저질렀고, 그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첩자…… 그 기록은 남지 않는다는 것이로군.”
태진은 미소를 지었다. 말로서 긍정하지 않았지만 뮈인터트는 그가 어떤 의도로 그 말을 꺼냈는지 눈치 챘다.
“현신의 전사가 당신 같았다면, 정말로 얄미웠을 거요. 당신과 만난 그때부터, 난 당신 손 위에서 놀고 있던 것 같군.”
자조적으로 중얼대는 뮈인터트. 태진은 다시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군. 그전에 약속해 주시오. 내가 첩자라는 기록은, 우리 가문에 남기지 말아 주시오.”
차라리 나 혼자서 폭력단과 유착한 부정단장으로서 사라지겠다. 그편이 가문에 해를 덜 입히는 일이라고 뮈인터트는 생각했다. 그것은 태진이 꾸민 결론이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뮈인터트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더 이상 없었다.
태진과 아리스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는 기세도 없이 이야기했다.
“난 첩자요. 맥스일 전 백작은 왕국 편에서 싸웠지만 난 그렇지 않았소. 제국으로 늘 돌아가고 싶었지. 그때 제국 쪽에서 제안을 해 왔소. 첩자로 활동해 달라고. 난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이곳에서 지내며 정기적으로 제국에 정보를 보내왔소.”
“아르바나단과의 유착은 제국의 지시입니까?”
“그렇소. 마약만큼 나라를 안에서 병들이기 쉬운 것도 없지. 제국은 지금도 왕국을 노리고 있소. 현 황제가 늙고 지금 황위 계승전이 시작되어 왕국에서 시선이 멀어졌지만, 일황자가 주도하고 있을 땐 분명히 전령도 훨씬 자주 움직였소.”
“황위 계승전?”
태진은 기억을 뒤져 그 단어의 뜻을 떠올렸다. 실력 중심의 제국은 왕자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자가 왕위를 잇는, 평범한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황위조차도 황자 간의 경쟁으로 실력을 겨뤄 받아내야 하는데, 그 경쟁을 황위 계승전이라고 부른다.
“잠깐…… 분명히 현 황제의 밑에는 황자가 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황자는 몸이 좋지 않아 황위 계승전에게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그게…… 이황자의 병이 깨끗이 완쾌되어 버린 거요. 제국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지. 황위는 당연히 일황자에게 물려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병이 나은 이황자가 황위 계승전에 뛰어들었다오. 그것도 단 두 달 만에 거의 대등한 인지도를 쌓아 올린 모양이오.”
태진은 솔직히 감탄했다.
“그 이황자라는 자, 굉장한 수완가인 모양입니다.”
“그게…… 기묘한 소문을 들었소.”
결심한 덕분인지 뮈인터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동안 너무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참아왔다는 듯,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이야기가 이어졌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소리쳤던 남자가 생각나 태진은 미소를 지을 뻔했다.
실제로는 매우 진지하게 그에게 물었다.
“어떤 소문입니까?”
“분명히 이황자파는 일황자파에 비하여 세력이 약하오. 하지만 무력이랄까, 이황자에게 힘을 빌려 주는 자가 있다고 하오.”
“힘을 빌려 주는 자?”
“가장 최근에 받은 정보로는 이황자 직속 호위 부대가 창설되었다고 하오.”
“호위 부대는…… 황자니까 당연히 있는 것 아닌가요?”
“그게 말이오…… 대장이 여자라는 거요.”
뮈인터트는 조소를 그렸다. 여자를 대장으로 한 호위 부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일황자파인 그는 이황자파 자체를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여자가 대장이라는 호위 부대라니 웃기지 않소? 그 여자가 이황자의 힘이 되고 있다는 이야긴데…… 솔직히 나는 믿지 않소. 이황자도 정신이 나간 거지, 어디서 나타난 지도 모르는 여자를 대장으로 삼다니 말이오.”
“그 여자의 정체를 모른다는 겁니까?”
“늘 가면과 모자를 착용하고 다닌다고 하오. 어디 출신인지도 이름조차도 모른다고 하오. 다만 검술 실력은 대단하다고 하던데, 흥미 있소?”
“혹시 그 호위 부대의 이름, 듣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소. 분명히―”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뮈인터트가 내뱉듯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리스는 몇 달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태진의 표정을 목격했다.
“백두 부대. 희한한 이름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태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연이야…… 미연이가 제국에!”
“태, 태진 님?”
“미연입니다! 백두 부대라는 부대명을 지을 수 있는 건 이 대륙에서 오직 그녀밖에 없습니다. 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태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환희와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