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한번 해 볼까
궁에 도착한 후, 텔리오트가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했지만 미연은 그것을 거절했다. 대범하게 황자의 초대를 묵살한 그녀는 단숨에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아, 대장님! 돌아오셨습니까!”
이시브가 반갑게 인사해 왔지만 그것조차 무시한다.
“미소라는?”
“미티스를 데리고 단검술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만……?”
미연은 직접 눈을 돌렸다. 오전에 미연이 따로 훈련을 하던 곳에서 미소라의 모습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부리나케 그쪽으로 달려갔다.
“미소라!”
단검을 앞으로 쭉 뻗은 자세로 미소라가 고개만 돌렸다. 미연은 후다닥 달려가 뻗고 있던 그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뭐냐.”
“잔말 말고 따라와!”
미티스를 버려 놓고 미소라는 그대로 미연에게 끌려 사라졌다.
훈련장에서, 이황자궁에서도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미연이 미소라를 도로 세웠다. 미소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사방을 둘러보다가 미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난 그 녀석을 가르치던 중이었다. 무슨 짓이냐.”
“태진이를 발견했어!”
“……뭐?”
다짜고짜 미연이 터뜨린 이야기에 미소라의 가면이 스륵 미끄러졌다. 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가면을 살짝 들어 땀을 닦아 낸 미소라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찬찬히 설명해라. 태진이라면 현신의 전사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황성을 다녀왔는데 어째서 현신의 전사를 발견했다는 거냐.”
“그, 그게! 그게 말야!”
미연은 앞뒤 구분 없이 마구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소라는 몇 달을 같이 보내면서 그녀의 화법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하늘 깊이 감사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만찬실에서 로츠왈드 왕국에서 온 전서를 훔쳐봤다. 텔리오트가 보는데 뒤에서 보이더라. 그런데 알다시피 말은 할 줄 알아도 나는 글은 잘 모른다. 그래서 그냥 호기심에 한번 슬쩍 본 거였는데……
글쎄, 거기에 한글이 있더라.
“……한글?”
“우리나라의 글이야. 이 대륙에 그 글자를 아는 사람이 태진이 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게다가 그 글씨는 분명히 태진이의 글씨였단 말야!”
“목소리를 낮춰라. 정말이냐?”
“태진이 일이야. 내가 잘못 봤을 리 없어.”
그건 정말 굉장한 자신감이었다.
“태진이야. 틀림없어.”
어쩌면 태진이라는 현신의 전사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소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
“미연이야. 틀림없어.”
아무도 없는 방 안. 태진은 홀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느지막한 밤이라 루위스 전체에 고요가 깔려 있었다.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테고, 태진의 방에 그 말고 다른 이가 있을 리도 없지만 그는 누가 들을 새라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마력핵 운용을 연습 중이었다. 그렇기에 이 고요한 순간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아리스가 들으면 놀랄 만한 일이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잡념이 그득했다.
평소라면 믿어 의심치 않았을 테지만 몇 달 만에 드디어 미연을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다른 일은 몰라도 미연과 관계된 일이라면 태진도 한 명의 인간이었다.
과연 계획대로 잘 가 줄 것인가?
한 달 전 뮈인터트의 심문이 끝났던 직후, 태진은 팰리슈의 집무실에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때, 태진은 이렇게 외쳤었다.
“미연입니다!”
태진이 얼굴을 들이댔다. 검은 눈동자가 쳐다보다 팰리슈는 국왕의 체통도 잊고 몸을 움츠렸다. 에스타냐가 옆에서 한숨을 지으며 국왕의 등받이를 본래대로 되돌렸다.
“태진, 팰이 무서워해.”
“그, 그래. 태진, 좀 진정해 봐.”
뒤쪽에서 하이듀크는 그를 말렸다. 겨우 진정시킨 다음 그들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국왕 부부와 태진, 하이듀크, 라스터. 거기다 아리스와 아서까지 동석해 있던 자리였기에 이야기는 자유로웠다.
하이듀크가 땀을 닦으며 태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한 너답지 않게 무슨 일이야? 미연이라니, 정확하게 말해 봐.”
태진은 이야기했다. 뮈인터트에게 첩자의 혐의가 의심된다는 사실은 그곳에 있던 전원이 알고 있다. 그렇기에 거리낌 없이 그가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던 사실을 밝혔고, 제국에 대한 정보를 이들에게 전했다.
“가면을 쓴 여검사?”
“최근 창설된 이황자 직속 호위 부대의 대장이 가면과 모자를 쓴 여검사라고 합니다. 게다가 결정적인 건 그 부대의 이름이 백두 부대라는 사실입니다.”
“백두 부대?”
“우리나라엔 백두산이라는 유명한 산이 있습니다. 바운스에서 그런 이름을 떠올릴 사람은 오로지 미연이밖에 없습니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미연이 지금 제국에 있다는 말이야? 그것도 이황자의 호위 부대로?”
에스타냐가 이해가지 않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 대해선 모든 이가 동감하던 사항이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야기는 그렇게 되는군.”
“그럼 이상하지 않아? 설사 둘이서 각각 다른 곳에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미연이라면 로츠왈드 왕국으로 찾아왔을 거야. 바운스에서 그녀와 겨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더구나 삼십 년 전엔 제국과 싸웠잖아. 그런 그녀가 왜 제국의 편에 서 있겠어?”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미연이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접니다. 삼십 년 전에는 적이었다거나 그런 과거는 그 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겁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을 거란 얘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네. 제국에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건 알겠네. 하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편에 설 이유는 안 된단 말일세.”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았다거나.”
“뭐?”
“……물론 예를 들어 그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만, 미연이라면 왕국으로 오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다 시디 노트니에 들렀고, 거기서 뜻밖에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눈치 챘을지도 모릅니다.”
하이듀크가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왠지 납득이 가는군. 이론은 몰라도 감 하나는 누구보다 좋았던 녀석이니까.”
“돌아갈 방법을 찾아냈기에 지금 제국에 있다는 거야?”
팰리슈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잖아. 미연은 척 보기만 해도 바운스에서 튀는 외모야.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흑발과 흑안이 신의 전사의 특징이라는 것을 다 알아. 신의 전사라면 우리나라에선 영웅이지만 제국에게는 최악의 적이었어. 그런 애를 제국에 놔 뒀을까?”
“정말…… 미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에스타냐가 팰리슈의 말을 거들었다. 그는 신중한 얼굴로 태진을 쳐다보았다.
“어때, 그렇잖아?”
“아닙니다. 미연이가 분명합니다.”
태진은 확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면과 모자로 외모를 감추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어쩌면 지금 이황자가 오히려 그녀를 도와주고 있을지도, 아니면 서로 거래를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거래?”
“이황자는 현재 일황자보다 입지가 약하다고 하더군요. 미연이는 그 혼자로도 소규모 부대와 대등한 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황자에게 도움이 될 전력입니다. 그렇기에 아마 거래를 했을 겁니다.”
“미연의 힘을 빌리는 대신…… 미연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준다는?”
“그렇습니다, 에스타냐.”
의자에 앉은 채 태진은 미연이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을 거의 완벽하게 추리해 냈다.
“미연이는 수도에게 돌아갈 방법을, 혹은 그에 대한 단서라도 찾아냈을 겁니다. 이황자는 자신의 입지를 위하여 미연의 힘을 빌리기로 합니다. 둘에게는 서로의 목적이 있기에 도움을 주고받기로 거래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습니다.”
“확실히…… 그런 사정이라면 설명이 돼.”
가장 먼저 설득당했던 것은 에스타냐였다. 30년 전 로츠왈드 반란군에서 얼마 없는 여성이었기에 미연과 에스타냐는 서로 친했다.
타냐라는 애칭을 붙인 것도 미연이었고, 맨 처음 에스타냐가 팰리슈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도 그녀였다.
에스타냐로서는 미연의 존재를 믿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모두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태진은 이미 제국에 미연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의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든 그녀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그들의 이해를 받아야 했다. 태진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아무래도 믿을 수밖에 없어.”
가장 먼저 입을 였었던 것은 하이듀크였다.
“태진이 이렇게까지 말했는걸. 미연에 관해서는 태진이 가장 잘 알지. 난 믿겠어.”
“자네가 그렇다면…… 나도 믿네.”
친구이자 원수인 라스터도 동의했다. 이제 마지막은 팰리슈. 부인과 친우들을 둘러보던 그는 진득이 한숨을 내쉬더니 두 손을 들었다.
“하필이면 제국에 있을 건 뭐야…….”
“감사합니다, 팰. 그리고 모두들.”
태진은 진심으로 안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하이듀크가 머쓱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됐어, 이런 걸로 일일이 감사 인사를 받을 관계는 아니잖아.”
“그건 옳은 말이네. 태진, 자네들은 이 나라의 영웅이야. 자네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30년을 뛰어넘어 다시 만난 친우들의 가슴 훈훈한 광경이었다. 에스타냐도 흐뭇하게 미소를 지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팰리슈도 이 분위기에 끼어들기 전에 각설시켰다.
“그럼 이제 미연을 왕국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건 아닙니다.”
태진이 부정했다.
“일단 중요한 것은 제국에 미연이 있다는 사실의 확인입니다. 맥스일 백작의 증언 말고는 지금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섣불리 제국에게 미연을 내놓으라는 요청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그럼 어떻게 할 거야?”
태진은 물음을 던진 팰리슈를 보고 말했다.
“지금 제국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 정도는 알아. 디요네츠 황제가 노쇠해져서 현재 후계자 문제가 강력히 거론되고 있지. 그에 맞춰서 두 명의 황자가 황위 계승전을 시작했고 제국 내에서도 두 파로 나뉘어 경쟁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이 있습니다.”
“어떤?”
“평화 회담을 제안하는 겁니다.”
태진의 말에 일동이 묘한 얼굴을 만들었다.물었던 것은 에스타냐였다.
“평화 회담…… 이라니, 진심이야?”
“진심입니다.”
“태진, 우린 지금 삼십 년 전에 제국에서 독립을 한 왕국이야. 우리 쪽에서야 분명 독립이고 경사스런 일이지만 제국쪽에선 땅을 빼앗긴 수치스런 일일 뿐이야.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게 평화 회담을 제의하자는 건가?”
평화 회담이란 말 그대로 서로 싸우지 말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이야기 좀 해 보자는 것이다. 적어도 약자가 강자에 대하여 할 말이 아니다.
팰리슈의 논리는 그것이었다. 하이듀크과 라스터도 그에 동의했지만 태진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제국에게 평화 회담을 제의하는 게 아닙니다. 판샤란 산맥을 둘러싼 나라, 즉 나파즈 공국. 마니크 왕국. 아키레마 제국. 이 세 나라가 회담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이건 또 뜻밖의 말이었다. 팰리슈를 비롯하여 모든 이가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의 눈빛은 태진에게 쏟아졌고 그는 설명했다.
“이 평화 회담의 취지는 삼십 년 전의 있었던 제국과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털어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자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동안 은연중에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여 왔던, 판샤란 산맥을 국경으로 하는 세 나라에게 평화 회담의 주요 목적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쉽게 못 건드려서 그동안 세 나라에는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우리가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에스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다면 제국은 절대 평화 회담을 거절하지 못할 거야.”
“지금 황위 계승전 중이기에…… 전쟁의 불씨를 만들 수는 없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파즈와 마니크도 똑같습니다. 평화 회담을 거절한다는 것은 전쟁을 일으킬 마음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에, 국력이 요동치는 중인 제국도 그 제국을 견제하는 두 나라도 참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교묘한 수였다. 표면적으로는 제국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나파즈 공국과 마니크 왕국을 끌어들이면 판도가 완전히 바뀐다.
세 나라에 비하면 소국인 로츠왈드 왕국의 뜻대로 세 나라를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팰리슈는 또다시 태진에게 감탄했다. 뮈인터트의 심문을 마치고 왕궁으로 들이닥치는 그 짧은 시간 내에 이런 수를 생각해 내다니.
“역시…… 현신의 전사야. 당할 수가 없어.”
그 마음은 다른 이들도 똑같았다. 태진과 동행했던 아리스도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연을 발견했다는 사실 하나에 평소답지 않게 흥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철한 모습 그대로인 태진. 감탄하지 않고 베길 재간이 없었다.
그러다 라스터가 문득 내뱉었다.
“잠깐, 그렇다고 미연이 회담에 나타난다고는 할 수 없지 않나?”
뒤늦게 같은 사실을 깨달은 하이듀크가 동의했다.
“그러게? 태진, 미연이 회담에 오기 위해선 이황자가 참석해야 해. 호위 부대라면 이황자가 가는 한 따라가겠지. 하지만 애초에 이황자가 회담에 참석한다고 결정 난 건 아니잖아?”
“잊으셨습니까? 지금 제국은 황위 계승전 중입니다.”
태진은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디요네츠 황제는 늙었습니다. 먼 길을 움직일 체력이 부족합니다. 두 황자에게 평화 회담에 참석하는 일은 분명히 입지에 도움 되는 일입니다. 상대보다 높은 입지를 잡지 못하면 황위 계승전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일동이 조용히 태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입지상으로 밀리는 자는 이황자입니다. 이황자에게 이 회담은 기회일 겁니다. 회담에 국가의 대표로 참석하면 은연중 자신이 차기 황제라는 인상을 대중에게 각인시킬 수 있습니다. 미연의 힘까지 이용하려는 발상을 한 이황자라면 분명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근거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일황자는 왕국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맥스일 백작이 일황자파라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런 자가 왕국이 제안한 평화 회담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디요네츠 황제는 이황자를 회담에 보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결론이었다. 태진이 내린 결론 말고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듣고 있던 모든 자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목이 조금 타는 듯 헛기침을 한 태진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약간의 위험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반드시 미연이 나타나게 만들면 됩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라스터의 물음에 태진이 바라봤던 사람은 팰리슈였다.
“팰, 전서를 써 주십시오.”
“평화 회담 말이지?”
“예, 오늘 바로 각국에 전령을 보내는 겁니다. 내용은 좀 전에 알려드린 대로 쓰시면 될 것입니다.”
태진은 마지막 수도 잊지 않았다.
“제국에 보내는 전서는 제가 조금 손을 보겠습니다.”
“왜?”
“전서를 보는 자리에 미연이도 호위역으로 있을 겁니다. 그 애가 볼 수도 있으니 그 애만이 아는 글을 남기겠습니다.”
에스타냐는 곧바로 서기관을 불러왔다. 팰리슈는 그로 하여금 제국에 보낼 전서를 작성하게끔 했다.
서기관이 전서를 작성하여 나간 뒤에 태진이 그 내용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내용의 마지막에 몇 글자를 적어 넣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글자였기에 읽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슨 글자야?”
“무슨 무늬 같기도 하고…….”
태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한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고유의 글자입니다.”
“아― 과연! 이 글자라면 전서에 써넣어도 미연밖에 읽을 수 없겠어.”
“뭐라고 쓴 건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평범한 한마디였기에 말하기가 껄끄러워서였다. 실제로 모두 뭔가 대단한 내용을 썼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태진이 적은 말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한마디였을 뿐이었다.
거기 있냐?
그것이 태진이 미연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 후, 전령을 출발시키고, 답장이 돌아올 동안 태진은 아르바나단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아르바나단의 간부와 단원은 전원 체포되어 감옥행, 그리고 뮈인터트 또한 특별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특사대의 임무가 일단락되고 나서야 마법 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전령이 제국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밤낮을 불문하고 그는 마력핵 운용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 진도는 거의 나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전령을 보낸 뒤의 걱정 때문에, 예상대로 잘 나아가 줄까 하는 심려 때문이었다.
며칠째 진도가 전무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것은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민하고 있어 봤자 소용없겠지.”
하지만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나머지는 미연을 믿고, 자신의 두뇌를 믿고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겨우 머릿속이 진정되는 듯했다.
양반다리 자세에서 가만히 팔을 늘어뜨려 무릎 위에 올린다. 등을 곧게 펴서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그 상태로 잡념 없이 집중하여 온몸으로 마력을 느끼는 것이 마력핵 운용의 기본이었다.
만약 마력이 공기라면 태진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 마력을 훌륭히 감지해 낼 것이다. 달에 가서도 마력을 잡아 낼 수 있을 만큼 예민한 것이 지금의 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력은 공기와 비슷한 성질을 지녔으나 결코 같지 않았다.
현대의 과학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공기는 분자를 가지고 있다. 산소, 이산화탄소, 질소 등등.
공기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아무튼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는 개념들이었다.
그러나 마력은 달랐다. 공기처럼 유동적이고 세상 어디에나 퍼져 있지만 정작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 존재를 느끼는 자가 곧 마법사이고, 그래서 마법사의 수가 적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태진은 마력을 쉽게 느끼기 힘들었다. 이렇게 마력을 느낄 바에야 차라리 노벨상을 받는 게 더 쉽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진이 위대한 이유는 그럼에도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랑퀘지 단장은 그 점에서 매우 솔직하게 감탄했다.
“태진 님은 분명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소. 하지만 노력만큼은 내가 아는 어떤 마법사들보다 뛰어나구려. 만약 조금이라도 마력을 감지해 낼 수 있다면 분명히 굉장한 마법사가 될 것이오.”
태진은 순수히 감사를 표했다.
그런 랑퀘지 단장의 응원도 있었기에 태진은 포기라는 두 글자를 결코 떠올리지 않았다. 지금 포기할 수는 없다.
“포기했다가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중얼거린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다.
자세를 푼 태진은 눈을 떴다. 오늘 밤은 구름에 달이 가려 많이 어두웠다. 태진의 감각이라면 이 정도 어둠에도 500m 정도의 바깥은 가볍게 내다볼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가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500m 밖을 볼 수 있으면 뭐 해? 미연이는 적어도 400㎞ 바깥에 있는데.
미연이 못 본 지 어느새 넉 달이 휙 지났다.
2년 전에 그녀와 같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로 만나지 못한 가장 긴 기간은 2주였다.
그것도 입시로 조금 바빴던 고3 말, 바로 바운스로 돌아오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녀와 사귄 이후로 이렇게 오래토록 못 본 것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외로울 새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외로워하고만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전령을 보낸 이후 아르바나단 사건이 종결되자 시간이 남아 버렸다. 특사대의 다음 일도 생기지 않았다. 바빠야 할 날이 텅 비어 버린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마법이었다. 아직도 마력핵의 마 자도 만들지 못했다. 이대로 미연을 만날 순 없다.
다시 할 일이 정해지고 태진은 마력핵 운용에 몰두했다.
마법은 의외의 노력을 요구했다. 단순히 두뇌가 좋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마력을 느끼는 감각. 오감을 넘은 육감의 경지가 필요했다.
“하필이면 딱 오감만 민감해지는 걸까…….”
이왕이면 육감도 발달되면 좋을 텐데. 태진은 최초로 이능을 탓했다. 미연의 경우엔 육감이 비상식적으로 발달했는데 태진은 그 반대니까 말이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미연 정도의 육감이었다.
문득 미연을 생각하자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연이 하던 수련 중에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태진은 중얼거리며 도로 생각에 잠겼다.
***
2년 전 일이었다. 독립 전쟁이 끝난 직후, 루위스가 로츠왈드 왕국의 수도가 되어 건설 계획이 시작되었을 무렵.
바운스의 시간으로 치자면 30년 전. 그때 갓 국왕 자리에 오른 팰리슈를 도와 나라의 기반을 잡고 있던 태진에게 마법사단 소속의 마법사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미연 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모르십니까?”
당시의 단장이 미연을 굉장히 맘에 들어 했다. 그녀가 가진 비상식적인 육감을 마법사의 재능으로 보고,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마법사들이 그녀에게 어택해 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도망쳤다.
태진은 미연의 심정이 십분 이해 갔다. 학교 공부도 낙제점 이상 1점만 더 받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녀가 마법 같은 머리 아픈 공부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미연은 마법이 얼마나 골치 아픈 종목인지 알고 있었기에 결코 하려 들지 않았다.
만약 그때 그녀가 마법을 배웠더라면 로츠왈드 왕국 최초의 마법 기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태진은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저도 미연이 깨어나기 전에 나와서 그녀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일하시는 데 죄송합니다, 태진 님.”
“아닙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발견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마법사는 태진이 퍼뜨린 허리를 숙이는 인사를 어색하게 취하고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젊은 날의 팰리슈가 태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정말 어디 있는지 몰라?”
“정말 모릅니다.”
태진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해 댔다. 그런 그의 성격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던 팰리슈는 흥흥 하고 묘한 소리를 내더니 보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그렇다면 얼른 찾으러 가야겠군. 이 이야기를 전해 줘야 하니까.”
“아직 처리할 일이 많습니다만?”
“혼자서 할 수 있어. 점심이나 먹고 와.”
팰리슈의 배려를 태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이젠 국왕의 자리에 오른 친구에게 예를 표하고 집무실을 빠져 나온 태진은 곧장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별궁으로 향했다. 별궁에서 가장 먼저 만난 시종에게 태진은 도시락을 부탁했다.
“언제나 먹는 음식으로 싸면 된다고 전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시종은 별궁의 요리사에게 달려갔다. 그를 보내 놓고 태진은 우선 방으로 올라갔다.
미연의 기상은 빠른 편이다. 집안 대대로 무도를 하기에 아침 수련이 버릇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보통이면 둘은 비슷하게 잠에서 깨어 각자의 일과로 들어간다.
하지만 어젯밤처럼 ‘조금 무리한 날’이면 그녀의 기상은 조금 늦어졌다. 오늘 아침, 늘 일어나던 시각에 일어난 태진은 미연을 그대로 두고 혼자 출근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점심나절까지 자고 있을 미연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을 들른 그는 그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흐트러진 자세로 자고 있던 미연의 모습은 침대 위에 없었다. 시종들이 이부자리 정리도 끝내 놓아서 깔끔했다.
태진은 잠깐 얼굴을 씻은 다음 땀에 전 옷을 갈아입었다. 옷매무새를 갖추고 있을 때 시종이 도시락을 들고 방으로 찾아왔다.
“감사합니다. 혹시 미연이가 어디로 간다고 말 안했습니까?”
“망극하옵니다. 전 듣지 못했사옵니다.”
별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에게 있어서, 이미 신의 전사로 불리고 있던 태진과 미연은 국왕에 버금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투 자체가 너무나 극존칭이어서 태진은 부담스러웠다. 고치라고 부탁해도 듣질 않아 이제는 아예 포기했던 터였다.
시종의 대답을 듣고서 태진은 그녀가 어디 있는지 감이 잡혔다. 현재 흑안 기사단의 단장 대리를 맡고 있는 미연이기에 보통은 기사단으로 향한다. 그땐 시종에게 어디로 간다고 말을 하는데,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곳으로 가지 않았단 말이 된다.
별궁에서 나와 태진은 본궁과 반대편으로 향했다. 궁 뒤쪽에는 정보부 부지로 점 찍힌 작은 숲이 있었다. 그곳에 둘만이 아는 비밀 장소가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숲 안으로 들어간 태진은 익숙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들어가자 눈에 익은 작은 공터가 나타났고, 작은 짐승들이 눈앞에서 지나간 다음 태진은 그녀를 불렀다.
“밥 가지고 왔어.”
“와아! 밥이다!”
미연의 모습이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언제나처럼 나무 위에서 놀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떨어지면 어떡해? 위험해.”
“괜찮아, 괜찮아. 이 땅에선 고양이보다 재빠르니까.”
고양이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스스로 자세를 바꿔 안전하게 착지한다고 한다. 과연, 이 바운스라면 고양이보다 그녀 쪽이 더 믿음직할지도. 태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별궁의 요리사는 훌륭한 실력이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해 주기에 미연은 매우 좋아했다. 오늘의 도시락도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꾸며져 있어, 모두 먹어치운 그녀는 급기야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우우우, 배부르다!”
“그렇게 먹고 바로 누우면 살찐다?”
“괜찮아, 괜찮아. 난 너한테 시집 갈 거니까.”
“그럼 살은 찌지 말아 줘.”
“어라라, 살찌면 나 버릴 거야?”
“그건 아니지만 난 지금 네 몸이 좋아.”
벌떡 일어난 그녀가 그의 등을 두들겼다.
“야한 소리 하기는! 이 색마!”
“너도 밝히면서 나한테만 욕하지 마.”
도시락을 정리하고서 태진은 말했다.
“마법사단에서 또 찾아왔더라. 기사단에 갔는데 네가 안 보여서 나한테 왔나 봐. 물론 모른다고 해 뒀으니까 걱정 마.”
“그 녀석들 정말 끈질기다니까? 마법 공부는 무슨! 하기 싫다니까 왜 그렇게 들러붙는지 몰라.”
“마법 기사가 있으면 나라 안팎으로 자랑거리가 되잖아.”
“아아, 싫어! 귀찮아. 공부해야 하잖아. 머리 아파.”
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는 그에게 미연이 눈을 빛냈다.
“차라리 네가 배워 보는 건 어때? 이미 이론은 줄줄 꿰고 있잖아.”
“됐어, 난 마력 자체를 못 느끼니까. 그렇게 따지면 조금만 하면 마력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네가 해야지.”
“싫어. 안 해! 차라리 내가 마력 느끼는 법 가르쳐 줄 테니까 태진이 네가 배워.”
태진은 웃음을 지우고 그녀를 보았다.
“마력 느끼는 법, 알아?”
“전에 단장한테 들은 뒤로 줄곧 생각해 봤는데 말야. 당학류 해검도에서 검의 경지를 세 가지로 나눠. 그중 마지막에 만검(滿劍)이라는 경지가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마력을 느낀다는 건 그 만검의 경지와 닮은 거 같단 말야.”
태진은 무도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한국에 무도인 양성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가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래서 태진은 정말 처음으로 미연에게 강의를 받는 기분을 가지고 경청했다.
“마력을 느낀다는 건 주변에 흐르는 무형의 기운을 인지한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한국에도 그와 비슷한 개념이 있잖아. 무협지든 만화든 자주 나오는 기(氣)라는 거. 만검의 원리는 그 기의 흐름을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 자신을 중심으로 일정 간격에 포함되는 모든 사물의 기를 감지하여 반응하는 거야. 만검의 경지에 들면 손에 잡힐 듯 기의 흐름이 느껴져 반응하기 때문에, 오히려 검이 느려져. 마력을 느낀다는 건 만검에서 말하는 기를 느낀다는 것과 굉장히 유사해.”
“그럼 당학류 해검도에서는 기를 느끼는 수련도 해?”
“응. 이런 말하면 우습지만 상급 코스라서 아무나 수련하는 건 아냐. 적어도 예검 이상의 수행을 쌓아야 해.”
태진은 미연의 표정을 읽었다. 태진의 앞에서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녀다.
“넌 그 방법을 아는 거구나.”
“바로 그거지. 지금부터 그 방법을 가르쳐 줄게. 해 보고 마력을 느끼면 네가 마법 배우는 거다?”
그 방법의 명칭은 ‘기류도(氣流道)’라고 했다. 태진은 미연이 가르쳐 주는 방법에 따라 기류도를 시험해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날 태진은 마력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역시 육감이 큰 부분을 차지하기에 기류도라고 하더라고 소용이 없었다.
물론 미연은 성공했다. 기류도로 마력을 느끼자마자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 “절대 말하지 마!”라고 태진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 정도로 마법을 배우기가 싫었던 것이다.
문득 태진은 그때 미연의 얼굴이 떠올라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회상에 빠졌던 그를 되돌려 놓은 것은 자기 자신의 웃음소리였다.
뭔가 굉장히 아득하면서도 바로 어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추억. 너무나 푹 빠져 있었던지라 잠깐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태진은 심호흡을 하면서 눈꺼풀에 붙어있는 그녀의 얼굴을 떼어냈다.
기류도. 떠올린 것은 그것이었다.
“한번 해 볼까.”
마력핵을 만들어 보자. 미연을 만날 때 마력핵 정도는 만들어 보여야지 그녀가 훨씬 기뻐하지 않을까. 그것도 그녀가 가르쳐 준 기류도로 성공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태진은 자세를 잡았다. 의자에서 일어서서 자연체로 팔다리를 편하게 폈다. 턱은 조금 당기고 척추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바닥과 직각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기류도의 기본자세.
그 상태로 태진은 눈을 감았다.
호흡은 길고 낮게. 폐를 풍선이라고 생각하고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숨을 끌어마셨다가 완전히 쭈그러들 때가지 내뱉는다.
그것을 반복하며 찬찬히 주변 공기를 느낀다. 이능을 깨우지 않은 채 본래의 자세 그대로 느끼려고 노력한다.
태진은 그대로 기류도에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연이 가르쳐준 기류도의 하나하나만을 생각하면서 그는 마치 나무나 바위처럼 방에 홀로 자리했다.
아침.
아리스가 일찍부터 별궁에 찾아왔다.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하이듀크의 지시로 그를 만나러 온 그녀가 본 것은 태진의 방 앞에 모여 있는 시종들의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죠?”
“아, 아리스 님. 태진 님이 문을 두들겨도 아무 말이 없으세요!”
보통 시종이 깨우기 전에 태진이 일어난다는 건 아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시종들을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문을 두들겼다.
“태진 님? 저, 아리스예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여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녀는 시종에게 물었다.
“혹시 밤에 어디 나가시는 낌새는 없었나요?”
“없었어요. 어제 저녁에 돌아오신 이후로 줄곧 방에…….”
시종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아리스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속으로 사과하고서 문을 열었다.
태진은 방에 있었다. 다만 방 중간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등이 아리스를 향해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시종들에게 들어오지 말도록 일러두고서 그를 향해 다가갔다.
“태진 님?”
불러도 대답은 없다. 천천히 앞으로 돌아가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은 채 한쪽 손을 들고 있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한 그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하다고 생각하며 아리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태진 님! 정신 차리세요!”
“……아리스?”
태진이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가 명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리스가 다시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니에요?”
“아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머리가 굉장히 맑습니다.”
여전히 손을 올린 채 그가 물었다.
“들어주십시오, 아리스. 지금 제 손 위에 있는 이것. 보입니까?”
“예?”
아리스는 태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거라고 뭔가 둥근 것을 들고 있는 듯한 손의 형태뿐이었다.
“역시 나만 보이는 겁니까.”
그의 얼굴에 진한 웃음이 번졌다. 그의 얘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리스에게, 그는 기류도에 심취해 밤을 지새운 피로라고는 전혀 묻어나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마력핵 운용에 성공했습니다.”
태진의 손 위에는 탁구공만 한 마력핵이 두둥실 떠 있었다. 기류도에 빠진 어느 순간부터 그는 몸 주위를 돌고 있는 기운을 느꼈다.
당학류 해검도에서는 기라고 부르고, 바운스에서는 마력이라고 부르는 기운이라는 사실을, 그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기류도의 심층에는 미연의 망아와 비슷한 경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아리스가 있었고, 손 위에 마력핵이 떠 있었다.
그 순간 감이 왔다.
마력을 느낀다는 것.
그리고 마력핵을 운용한다는 것.
바로, 그 둘이 어떤 것인지.
아리스의 기쁨도 뒤늦게 찾아왔다.
“태, 태진 님! 서, 성공하신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되는 것을 왜 그동안 하지 못했던 걸까요.”
이때만큼은 태진도 냉철한 얼굴을 벗었다. 기쁘다. 미연에게 또 다시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생긴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좋은 일은 겹쳐서 생긴다고 하잖아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어요!”
아리스가 아침부터 태진을 찾아온 이유를 드디어 밝혔다.
“제국에서 전서가 돌아왔어요.이황자가 평화 회담에 참가한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