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22화 (22/32)

히어로즈 리턴 4권

스물하나. 그리고 다시, 같이 돌아가자

트레빌 성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어느 나라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 흔한 도적떼들도 시를 빠져나가면 나타나는 사막을 헤매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에서 뽑은 수비대가 있긴 하지만 심야에는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다. 지금 시간에 깨어 있는 자라고 한다면,

각 사절단에서 차출된 호위대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긴 참 안전해.”

태진은 미연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태진은 수풀 속에 느긋하게 다리를 뻗고 앉아 있고, 그 앞에 미연이 등을 돌려 자리하고 있었다.

미연은 태진의 가슴에 등을 기댄 상태로 자신의 허리춤을 감싼 태진의 손을 꼼지락꼼지락 만지고 있었다.

“으으, 간지러워.”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태진의 숨소리에 미연이 쿡쿡 웃어 댔다. 태진은 장난스럽게 미연의 머리를 턱으로 문질렀다. 미연이 낮게 꺅꺅댔다.

“하아…… 못 만나는 줄 알았어. 정말로.”

“나도, 나도. 눈을 뜨니까 웬 숲인 거야. 여기가 어딘지 한참을 헤맸다니까. 너는 어디로 떨어졌어?”

“우리가 전에 떨어졌던 곳. 거기 미켈파 영지로 바뀌었더라.”

“전엔 뭐였지? 기억이 안 나네.”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해 내려 애쓰는 미연. 태진은 딱히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대꾸를 기다렸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아, 몰라.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이렇게 만난 게 중요하지.”

몸을 돌려 얼굴을 마주 한다. 수풀로 가려진 달빛이 태진의 얼굴을 살짝 비췄다. 그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싼 미연은 히죽 미소를 짓고서 입을 맞췄다.

작은 새처럼 입술을 살짝 부딪친 뒤 얼굴을 떼자, 태진이 화사하게 웃었다.

“요 맛이 그리웠다고.”

“무슨 맛?”

“체리 주빌레 맛.”

“내 입술이 무슨 서른한 가지냐?”

키득대는 미연에 맞춰 태진도 웃음소리를 냈다. 그 웃음은 그동안 아리스나 다른 친우들에게 보여 준 미소와는 질이 다른 웃음이었다.

태진도 미연도, 서로가 아닌 이외의 인물들에게는 적당히 선을 긋고 있다. 전혀 타입이 다른 두 사람이 통한다고 할 수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시 몸을 돌린 미연이 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태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 제국에서 너 찾으며 놀고 있었지 뭐.”

“내가 제국에 있을 줄 알았어?”

“내가 떨어진 곳이 제국이었으니까. 게다가 떨어진 곳이 우연찮게도 판게리츠 산맥이었거든.”

“그럼 미소 족도 만났겠네?”

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판게리츠 산맥에 떨어져 미소 족의 장로를 만나 도움을 받다가 리트미소를 위기에서 구해 준 이야기. 그 전투로 제국군에 스카우트 되어 갖가지 인종을 만나다가 최종적으로 시디 노트니까지 가서 2황자의 호위 부대를 맡게 된 이야기까지.

얘기가 끝날 즈음에 태진은 어이없이 이마를 붙잡았다.

“정말 너답게 지냈구나…….”

맘에 들지 않으면 호쾌하게 베어 버린다.

방해되는 게 있으면 거칠게 베어 버린다.

가타부타, 이것저것 생각하고 고민하기 전에 상쾌하게 베어 버린다.

그것이 미연의 방식이다.

항상 생각하고 좀 더 유효한 방식을 떠올리는 태진과는 정반대. 그러나 그렇기에 태진은 미연을 언제나 믿고 있었다.

“태진이 넌? 왕국에서 뭐 했어?”

“나도 너 찾아 돌아다녔지.”

“킥, 거짓말.”

“아차, 들켰나.”

연극처럼 이마를 탁 두들기며 어깨를 으쓱인 뒤, 태진도 이야기를 꺼냈다.

줄줄이 읊고 있는 동안 미연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더니 이야기가 끝날 즈음엔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 태진이 바보! 어떻게 떨어지자마자 그런 녀석한테 걸리는 거야!”

2년 전에 넌 어땠더라. 그렇게 찔러 주고 싶었지만 태진은 멋쩍게 웃음으로 때웠다.

“면목 없다. 아무튼 잘 도망쳤으니까 된 거 아냐.”

“그래. 도망도 못 쳤으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그 다음엔 뭐? 아리스라는 여자를 꾀었다고?”

“너를 두고 내가 누굴 꾀어. 너야말로 미소라라는 미소 족 청년을 잘도 꾀어서 데리고 다녔다며.”

“어머나, 이 남자 좀 봐. 맞바람이라 이거니?”

가볍게 눈을 부라리는 두 사람. 으르렁거리는 것도, 노려보는 것도 다 사랑 싸움의 일환이다. 진지성을 결여되어 있는 말다툼이기에 다시 피식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오늘만 해도 이 말을 정말 몇 번이나 하는 건지 모른다. 애초에 셀 생각도 없는 두 사람이기에 오랜만에 느끼는 연인의 체온을 마음껏 비비적댔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심야를 넘어간 시점에서 이미 밤은 연인들의 시간이다. 마음껏 태진의 얼굴을 조몰락거리던 미연이 문득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제국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로츠왈드 귀족 중에 첩자가 있었어. 그것도 일 황자의 첩자가.”

태진은 뮈인터트의 이야기를 했다. 그가 1황자의 첩자로 활동하면서 왕국 내에 마약을 퍼뜨리려고 폭력단과 유착했음을, 그리고 로티아의 잠입 작전으로 전원 체포라는 성과를 올렸음을.

미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정말 태진이 넌 약았어.”

“이왕이면 좀 다른 말로 칭찬해 주라.”

“말 그대로잖아. 어떻게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그런 작전들을 생각해 내는지 궁금해. 지구로 돌아가면 두뇌 검사 받아 보는 게 어때? CT 촬영하면 보일까?”

“보일 리가 없잖아.”

지구에서처럼 태진은 미연의 농담을 받아친다.

“그 맥스일 백작이라는 아저씨가 나의 존재를 말해 준 거야?”

“정확하게 너라고 한 건 아냐. 이 황자의 호위 부대가 생겼는데 그 부대 이름이 백두 부대라고 하더라고. 바운스에서 백두라는 이름을 떠올릴 사람이 너 말고 더 있겠어? 거기다…….”

“거기다?”

“이상하게 불안했거든. 네가 제국에 있다고 확신은 했지만 불안했어.”

“그거 뭔가 모순된 말 아냐?”

태진은 슬쩍 눈을 깜빡였다.

“알아. 모순된다는 거. 하지만 말이야, 난 누구보다 너를 믿지만 너에 관련된 일이라면 내 생각이 불안해진단 말이야. 요는, 내가 평소처럼 태평하지 못하고 불안하다는 자체가 너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란 말이지.”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불안한 게 내가 있다는 증명이라니?”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너한테만 통용되는 나만의 논리지.”

애초에 이 감정을, 이 마음을 다른 이들이 이해할 리 없다. 그녀를 믿는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이 불안하다.

애초에 태진과 미연이라는 특이한 커플이 아니고서야 성립되지도 않는 논리다.

“뭐, 됐어. 어쨌든 덕분에 만나게도 됐고. 나중에 만나면 그 아저씨한테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다.”

“아마 평생 감옥에서 못 나올 텐데, 그럴 수가 있을까?”

“감옥으로 놀러 가면 되지 뭘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게 알아서 공문에 은근슬쩍 한글을 써 대는 짓을 한 거구나?”

“응. 다른 사람이 눈치 채면 안 되니까.”

“내가 못 보면 어떡할 뻔했니?”

“어차피 이 황자가 올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만날 순 있었을 거야. 중요한 건 만난 다음이지.”

“그건 그러네.”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미리 상의를 한 것도 아니지만 두 사람의 행동은 서로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태진은 미연을 발견하고서 아는 체하지 않았다.

미연 또한 태진을 확인한 뒤로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미연은 태진이 먼저 알려올 것이라고 믿었고, 태진은 미연이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고 믿은 결과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몇 달을 떨어져 있더라도 두 사람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우린 정말 천생연분인 것 같아.”

“잉꼬부부잖아.”

다시 킥킥대면서 두 사람은 볼을 비비적댔다.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가만히 붙어 있기를 몇 분. 태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여기 있는 동안은 아는 척하지 마.”

“어, 왜?”

돌아보는 미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진은 대답했다.

“지금 제국과 왕국이 얼마나 미묘한 상황인지는 너도 알고 있지? 왕국이 제국에게서 독립한 지 이제 삼십 년이야. 왕국으로서는 아직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할 실정이고 제국은 왕국을 향한 원한이 아직 풀리지 않았을 때인데, 만약 지금 두 사절단의 멤버가 아는 사이라면 어떻게 되겠어?”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귀찮은 일이 일어날 거 같아.”

“귀찮은 정도가 아냐. 난 괜찮아, 로츠왈드에는 너와 나를 아군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하지만 넌 아니잖아. 최소한, 이 황자는 네 정체를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투신의 전사라고 말은 해 놨지만, 글쎄, 과연 믿을까?”

“믿을 수도 있지만 의심하고 있을 게 분명해. 그 의심에 기름을 부을 이유는 없잖아? 그러니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모르는 척, 평화 회담 진행 위원장으로만 대해 줘. 알았지?”

“우우―”

미연이 불만스럽다는 뜻으로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 모습이 태진은 참을 수 없이 귀여워, 입 맞추기 좋은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쳇, 알았어. 알았다고.”

가볍게 설득당한 미연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절단에 관련된 일 말고는 가만히 있으란 말이지? 그럼 우린 언제 만나? 설마 오늘로 끝?”

“내일 밤에 봐.”

태진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모레는 정식 회담일이야. 그래서 내일은 관광 일정도 빨리 끝날 수 있게 조정해 놨어. 잠 좀 자두고 밤에 만나자.”

“응응, 알았어. 뭔가 엄마 몰래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라 신선한데?”

“우리가 어머님 몰래 만난 적이 있던가?”

“없어!”

기쁘게 웃고 있는 미연의 미소에 이끌려, 태진도 기분 좋게 웃음 짓고 말았다.

***

태진이 회담 진행자로 있으면서 가장 분명했던 점은, 일정에 거침이 없다는 것이었다. 원체 이쪽으로 경험도 많거니와 빈틈없는 성격이다 보니 일을 진행할 때 변수가 작용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변수를 모두 계산해서 행동하니까.

그래서 휴리조 1왕자가 몸 상태가 나쁘다고 했을 때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비상약을 모두 준비해 놓았습니다만, 어떻게 안 좋으십니까?”

“그게…… 머리가 좀 아프고 속이 좀…….”

휴리조 1왕자는 결코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극도로 단련된 사람이었기에 태진은 체력이 떨어졌다거나 하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물갈이군요.”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휴리조 1왕자에게 태진은 가볍게 대답해 줬다.

“다른 지역으로 온 것은 처음일 겁니다. 지역마다 음식 차이가 있고, 가장 쉽게 나타나는 것이 물의 차이입니다.”

“물…… 때문에 아프다는 겁니까?”

“물에도 종류가 있고, 일 왕자님의 체질에는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약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태진은 시종에게 지시하여 알맞은 약을 대령했다. 종류대로 준비해 놓은 약을 시종이 재빠르게 가져왔고, 휴리조 일 왕자가 먹을 때까지 태진은 옆에서 지켜보았다.

“관광 일정은 점심부터입니다. 그전까지 쉬고 계십시오. 일 왕자님의 몸 상태를 보고 참석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괘, 괜찮을 겁니다. 잠깐만 쉬면 됩니다.”

“저도 그러기를 빕니다. 트레빌 시에는 볼거리가 많습니다. 쉽게 오지 못하는 곳인 만큼 즐기고 가 주십시오.”

누가 보면 트레빌 홍보 위원인 줄 알겠다. 태진은 스스로에게 태클을 걸며 휴리조 1왕자의 방을 나섰다. 이미 안면을 튼 경비병들과 목례로 인사를 하고 다른 이들의 준비를 확인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그 아래층은 로츠왈드 사절단이 사용하고 있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정답게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먼저 안에서 문을 열고 팰리슈가 걸어 나왔다.

“아,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입니다. 잘 주무셨습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자리가 편해. 다른 이들은 이미 만났어?”

“예. 하미엘 대공은 이미 깨어 계시고, 휴리조 일 왕자는 용태가 좋지 않아 보여 처방을 해 드렸습니다. 점심나절쯤에는 괜찮아지리라 사료됩니다.”

“태진이 우리 왕국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니까. 역시, 위원장을 맡기길 잘했어.”

뭐라고 대꾸해야 할까 멋쩍게 고민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텔리오트. 아키레마 제국의 2황자였다. 태진과 팰리슈가 그에게 인사를 하고 텔리오트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보냈다.

“강태진이라는 이름이었지요? 우리 제국 측에서 보자면 그렇게 좋아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지만 그래도 부러운 인재인 것은 확실합니다. 언제 한번 제국에 들러 주지 않겠습니까?”

“국왕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방문해 보겠습니다.”

태진은 완곡하게 텔리오트의 요청을 거절했다. 어차피 큰 기대도 하지 않은 텔리오트였기에 가면을 톡톡 두들기며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거 안타깝군요. 이런 인재가 있어 준다면 더 훌륭한 나라로 발전할 수 있을 텐데. 국왕께서는 물론 양보해 줄 생각이 없으시지요?”

“당연하지 않소. 하하하!”

독립국의 왕과 가면의 황자는 태진을 중간에 두고 즐겁게 담소했다. 원래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기에,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낸 태진의 존재는 사절단들 안에서도 충분히 화제가 되고 있었다.

로츠왈드 왕국의 영웅과 같은 이름을 가진,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 모두가 탐을 낼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태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지 않도록 말을 받아 주며 눈동자를 굴렸다. 감은 눈이기에 시야가 확보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감각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데에 따른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텔리오트의 뒤쪽에 두 개의 기척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쪽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기척이었다.

텔리오트와 똑같은 가면 아래에서 미연도 태진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이때만큼은 가면이 참 고마웠다.

뭐라고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지난밤에 태진에게 언질 받은 바가 있었다. 덕분에 입이 근질거리면서도, 미연은 가만히 임무에만 충실한 척하고 있었다.

태진도 그런 분위기를 느낀 듯 살짝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 표정을 미연은 멋대로 해석하고, 슬그머니 어떤 꿍꿍이를 속으로 떠올렸다.

“오늘 일정은 트레빌 관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점심 식사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트레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드칸 강을 맛보라는 말이 있지요. 기대하고 있겠소.”

텔리오트도 팰리슈도 저마다 기대하는 바를 드러냈다. 책임자로서 태진은 심려 놓으라는 듯 단단히 대답해 두었다. 팰리슈가 말했다.

“그전에 휴리조 일 왕자의 몸이 좋아져야 할 텐데 말야.”

“저보다 훨씬 건강할 분일 테니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텔리오트 이 황자도 병상을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용태는 괜찮은 것이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심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0년 전의 전쟁을 기점으로 서로를 경계해 온 나라 간의 대화라고는 생각되기 힘들 만큼 좋은 분위기였다.

그 대표들이 각각의 방으로 돌아간 뒤 계단을 내려오며, 태진은 이 정도면 회담도 반쯤 성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내 목적은 아니지만.”

어차피 이 회담을 미연과의 만남을 위하여 이용한 태진이다. 각 국가들이 화목을 다지는 것은 그에게 있어 부가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을 잘 보내면 오늘 밤은 데이트다. 몇 달 만에 느긋하게, 미연과 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런 짓 저런 짓과 그런 짓도 할 수 있다.

아하하하, 이거 너무 유쾌한걸?

냉철하고 말끔한 겉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속마음을 태연하게 숨긴 채 계단을 내려서던 그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태진 님! 점심 식사 준비를 끝마쳤다는 연락이 왔어요.”

아리스였다. 회담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기에, 오늘은 잠시 태진을 도와주고 있었다. 태진은 뻔뻔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빨랐군요. 감사합니다.”

“각 위치에서 보고도 들어오고 있어요. 오늘 일정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네요.”

“그럼 좋겠습니다만.”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걱정은 무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불안한 것은 단 하나. 사고라도 생겨 미연과 만날 약속이 늦어지는 것뿐. 다른 것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아리스는 태평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적당히 구름에 가린 태양이 중천에 도달하기를 기다린 뒤, 태진은 다시 휴리조 1왕자의 방에 들렀다. 태진의 예상대로 그는 훨씬 좋아진 얼굴로 태진을 맞이했다.

“언제 출발합니까?”

“괜찮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곧 출발이니 준비해 주십시오.”

회담을 준비하는 인원 몇을 제외하고 모든 사절단이 시내 관광에 들어갔다.

고대, 흔히 마법 시대라고 불리던 시대는 아키레마 제국이 생기기 이전에 존재했다. 마법사가 검사만큼 흔한 존재였고 어느 때보다 마법이 융성했던 시기였기에 마법 시대라고 역사가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의 아키레마 제국이 있는 영토에는 고대에도 커다란 제국이 존재했었고, 마법의 중심지도 당연 그 제국이었다. 하지만 사실 고대에 어느 곳보다 마법 연구가 활발했던 곳은 다름 아닌 삼화국이었다.

삼화국의 수도였던 트레빌에는 트레빌 성과 함께 대표되는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이 바로 마법 연구의 중심지였던 트레빌 마법 연구소였다.

마법 시대를 끝냈다고 전해지는 티락스 아르바나―균형 유지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연구소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관광 일정의 시작은 연구소 유적이었다.

“……바로 이곳입니다만, 사실 지금은 건물의 형태만 겨우 남아 있는 정도입니다.”

누구보다 능숙하게 역사를 설명하면서 태진이 손으로 가리킨 연구소 유적은 말 그대로 형태뿐이었다.

트레빌 성은 지금도 회담 장소로 쓰이기도 할 만큼 훌륭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연구소는 달랐다.

대륙에서 마법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날 때까지,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마법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연구소의 존재는 자연스레 쇠퇴했다.

게다가 삼화국 멸망 뒤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모디어프였던 만큼, 유적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이 차라리 보기 좋을 만큼, 연구소 유적은 지금에 와서는 폐허 수준의 관광지였다.

“이건…… 슬픈 일이로군.”

팰리슈가 아련한 눈으로 유적을 올려다보았다.

“고대의 유적이라면 어떤 것이든 소중히 관리되고 보전되어야 할 텐데, 우리가 자유의 땅이라고 너무 방치해 두기만 한 것 같소.”

하미엘 대공과 휴리조 1왕자가 고개를 주억댔다. 팰리슈는 눈을 돌렸다.

“텔리오트 이 황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제국의 연구소 유적과 비교하여 말이오.”

“아시다시피 전 얼마 전까지 병을 앓고 있었기에 수도를 벗어나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적은 본 적은 없지만, 이건 처참하군요.”

가면을 한 차례 돌려쓰고 텔리오트가 다른 대표들을 돌아보았다.

“내일 회담에 한 가지 더 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디어프에 대한 관리와 보전에 관한 의결을. 다른 나라보다 훨씬 이 땅에 가까운 우리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동감하오.”

“저, 저도 동의합니다.”

팰리슈도 마저 동의하고 태진을 쳐다보았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회담 진행에 한 가지 사항을 추가했다.

낡아 버린 유적을 한 바퀴 둘러서 구경하는 와중에 휴리조 1왕자가 꾸물대며 태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 저, 약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사절단 여러분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제 일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감사 인사는 해야지 않겠습니까…… 다음에 우리나라에 한번 방문해 주세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어조는 다르지만 텔리오트의 스카우트 제의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이 왕자, 순진한 척하지만 역시 어느 정도 정치를 알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게 짐작하며 태진은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시간 나면 찾아뵙겠습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연구소에서는 어떤 것을 연구했지요?”

마법이라고 간단히 답하려 했지만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태진은 책에서 학습한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냈다.

트레빌 마법 연구소에서는 주로 마법 역사와 역사 속에 숨겨진 마법 도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마법 시대보다 이전, 초(超)고대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시대에 만들어진 마법 도구 중에는 마법이 담겨진 검이라거나 지팡이 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곳 연구소에서는 역사 속에 숨겨진 그 도구들의 존재와 위치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그 자료들은 마법 시대가 끝나면서 소실되었지만, 레펠처럼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학계에서는 아직 떠돌고 있다.

“마법 검…… 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 검이 있으면 마법 기사가 아니더라도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글쎄요.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판도가 엄청나게 바뀐다. 현 바운스에 마법 기사는 단 한 명도 없다. 2년 전 미연이 마법을 배웠다면 유일의 마법 기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마법의 ‘마’자도 배우기 싫어하니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런 연유로 보통은 검사와 마법사를 구분지어서 생각한다. 허나 마법 검이라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도구가 실존한다면, 단 하나로도 대륙의 판도가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쉽게 생각해서, 평범한 검사가 마법 검을 잡는 순간 미연과 박빙을 펼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태진은 짐작했다.

문득, 그렇다면 미연이 마법 검을 가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정복도 하겠는걸.”

“예? 무슨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연구를 했기 때문에 티락스 아르바나들이 여기서부터 마법 검을 찾는 행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휴리조 1왕자는 순진한 얼굴로 웃었다.

“알다시피 전 공부보단 검을 휘두르는 쪽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왠지 태진 님의 설명은 이해하기 쉽네요.”

“그렇습니까.”

그는 왕자지만 큰 선입견 없이 사람을 대해 주는 타입이었다. 이런 자가 왕이 된다면 마니크 왕국도 향후 50년은 무리 없을 거라고 태진은 판단했다.

잠깐 이야기가 끊어진 틈에 타이밍도 좋게 하미엘 대공이 휴리조 1왕자를 불렀다. 공동 사절단으로 트레빌에 왔지만, 하미엘 대공은 휴리조 1왕자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노련한 대공에게서 세상을 배우라고 마니크의 국왕이 휴리조 1왕자를 딸려 보낸 것이 분명했다. 휴리조 1왕자는 간단히 인사를 남겨 놓고 하미엘 대공에게도 갔다.

그와 교체하듯 다가온 자가 텔리오트였다.

“역사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대단합니다.”

“별말씀을. 관심 있는 분야이기에 오기 전부터 조금 공부한 정도입니다.”

“아니, 그 정도면 우리 제국의 역사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가져도 됩니다.”

태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척을 했다.

텔리오트의 뒤에는 여전히 미연과 미소라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할 순 없지만 시선은 계속 느껴지고 있었다.

“관광은 지루하지 않으십니까?”

“나도 그동안 여행이라고는 다녀 본 적이 없는 몸입니다. 이런 즐거운 관광에 지루할 틈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해 주신다면 감사합니다. 부디 즐겨 주시기를.”

“꼭 그러겠습니다.”

텔리오트는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태진을 지나쳤다.

그의 행로에 따라 그 앞을 미연이 슬쩍 지나쳤다. 태진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렸지만 미연이 의도적으로 그의 가슴을 어깨로 살짝 툭 치고 지나갔다.

“아, 실례.”

“아닙니다.”

정말 짤막하게 말을 주고받고 떨어진다. 태진은 멀쩡한 얼굴로 팰리슈를 향했다. 텔리오트의 뒤를 따라가면서 미연도 가면 안에서 히죽 웃었다.

아서와 함께 유적을 올려다보고 있던 팰리슈가 태진의 접근에 고개를 돌렸다.

“어때?”

“우려하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예상 외로 관계는 이상 없습니다.”

으르렁거려도 이상할 데가 없는 네 나라가 모인 자리다. 약간의 신경전이 펼쳐지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텐데도, 지금 현재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각자가 정도 이상의 관심을 쏟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무관심하지도 않다. 분위기로는 나쁘지 않았다.

“끝날 때까지 이만큼만 이어지면 좋겠군.”

“동감입니다.”

이 정도만 친밀하게.

그 의견은 하미엘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연구소 유적을 벗어나 트레빌 시민들이 직접 준비한 특산 요리로 만찬을 즐기는 사이 하미엘 대공은 옆 자리에 앉은 팰리슈에게 낮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적지 않은 마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나의 기우였나 보구려.”

현재 대표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그렇기에 가장 노련한 자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팰리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오. 나도 회담을 시작할 때 그런 걱정을 하였으니 말이오.”

“제국에서 훌륭한 대표를 선출한 것 같소.”

팰리슈와 하미엘 대공, 둘 다 걱정의 중심은 제국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텔리오트가 아닌 레키엔이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레키엔은 텔리오트와는 정반대인 성향으로 분명 회담을 파탄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그이 비하여 텔리오트는 미묘한 신경 관계에 있는 세 나라의 대표를 상대로 능숙하게 관계를 개선해 가고 있었다. 휴리조 1왕자의 경우, 이제 완전히 텔리오트가 맘에 든 듯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태진이라는 저 사람의 수가 정확했다고 생각되오.”

하미엘 대공은 테이블 끝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태진을 눈빛으로 가리켰다.

“회담이라고 한다면 보통 딱딱하게 시작해서 딱딱하게 끝나기 마련이오. 지금까지 내가 참여해 온 모든 회담이 그랬소. 그러나 이번은 다르오. 회담 전에 각국의 사절단이 이야기를 트고 지낼 수 있는 이런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오.”

팰리슈는 진중하게 말을 골랐다.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두 수는 앞서서 생각하는 사람이오.”

“이런 결과를 생각하고 짠 일정이라면…… 정말 대단하오. 저런 자를 곁에 둘 수 있다니, 국왕께서는 운이 좋으시구려.”

“하핫, 감사합니다.”

팰리슈는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팰리슈가 청하는 건배 요청을 하미엘 대공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술을 조금 삼키며 팰리슈는 눈을 돌려 태진 쪽을 살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자다.

정말 태진, 자네란 사람은 늘 나를 놀라게 하는군. 미소가 피어 나오려고 함을 팰리슈는 적당히 자제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태진은 지금 향후 일정에 관하여 어떠한 계산도 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러한 여유를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예요?”

관광을 나온 사절단이 테이블을 나눠 한꺼번에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표를 제외하고선 특별히 자리 배치를 따로 하지 않았더니, 어느새 태진의 옆에는 미연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부라키 조림입니다.”

노드칸 강에서 갓 잡아 올린 신선한 물고기를 트레빌 전통의 부라키 소스를 곁들여 조린 요리로, 트레빌에서는 중요한 손님이 오면 어느 집에서나 꼭 내놓는 요리 중 하나였다.

태진의 설명을 들으며 미연이 호호 하고 즐겁게 웃었다.

“맛있네요. 그죠?”

“그렇군요.”

모르는 척하고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미연은 무슨 생각인지 분명히 처음 보며 잘 모르는 설정일 태진에게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관광 중에도 몇 번이고 태진에게 다가와 질문하고 이야기를 걸고 해서, 태진은 아주 약간 곤혹스러웠다.

회담 진행자로서의 책임도 있으니 질문이 들어오면 설명을 해 주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도 제법 힘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연이었으니.

“한잔 할래요?”

포도주 비슷한 트레빌 특산주를 미연이 권했다. 태진은 쓴웃음 비슷한 표정으로 잔을 받아들었다.

얘는 정말 어쩌려는 거지…… 미연의 성격을 알고는 있지만, 태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미연의 어택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그녀의 옆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미소라를 비롯하여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태진은 어디까지고 평정을 가장했다.

선착장 주변을 돌고 트레빌 시민들을 만나는 일정이 이어지면서도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마음 놓고 한숨을 내쉰 것은 일정이 모두 끝난 뒤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녁은 푹 쉬시고, 내일 회담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안내자로서 모두를 방으로 돌려보낸 뒤 자신도 방으로 돌아온 태진은 침대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그 녀석은…….”

순순히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친근하게 구는 것도 문제다. 현재 사절단들의 관계는 굉장히 좋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황자의 호위가 로츠왈드의 인사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국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만나면 한 마디 더 해 놔야겠어.”

결심하면서도 태진은 과연 먹힐까 하는 의심을 떠올렸다.

정말로 곤란한 연인이었다.

그의 곤란한 연인은 가면 아래에서 아주 즐겁다는 미소를 연신 떠올리고 있었다. 가면이 얼굴과 바깥을 막고 있다는 것이 지금은 매우 행복했다.

텔리오트의 방까지 그를 호위하며 뒤따르면서도, 미연은 태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임무를 소홀히 한다고 충고를 한다고 해도 지금으로선 반박할 거리가 없다고 스스로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방에 들어서기 전 텔리오트가 물었다.

“그 남자한테 관심 있어?”

“엉? 누구?”

“로츠왈드의 그 남자. 오늘 하루 종일 그 남자 곁을 맴돌던데. 이름이 같아서 그래?”

텔리오트는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현신의 전사 말고 다른 남자는 안 보는 거 아니었어?”

“안 그래도 스스로 바람둥이구나 하는 자각을 하는 중이야.”

미연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텔리오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인사를 남겨 놓고 방 안으로 사라졌다.

이날 공식적인 사절단의 일정은 끝을 맺었다. 각 사절단은 이제 내일의 회담을 위하여 막바지 정리에 들어가고, 회담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휴식을 취하며 내일에 대비하는 정비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 태진과 미연은 그들만의 시간을 남겨 두고 있었다.

***

회담 준비를 끝낸 태진은 우선 시종을 불렀다. 방 밖을 지나던 시종에게 자정쯤 깨워 줄 것을 부탁하자 시종은 싹싹하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잘 부탁합니다. 다른 이들에겐 내가 부탁했다고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원래 트레빌 시민이었기에 몇 푼 쥐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종을 믿고 태진은 서류를 정리한 뒤 침대에 누웠다.

마음을 먹고 잠을 자려 하자 금방 숙면에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단숨에 몇 시간을 잠든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슬며시 눈을 떴다.

“일어나세요.”

깨워 줄 것을 부탁한 시종이 태진의 곁에 와있었다. 약속한 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성실하게 알려 주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시종이 나간 뒤 태진은 가볍게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깔끔한 모습이 되어 조심스럽게 성 뒤쪽으로 나갔다.

하루 만에 다시 온 성 위의 작은 정원. 여전히 고요가 가라앉은 그곳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자는 드물었다. 성 주위를 돌고 있는 경비병들의 기척을 피해 정원에 들어선 태진은 수풀 속에서 또 하나의 체온을 감지했다.

부스럭대며 수풀이 흔들렸다. 그 안에서 이미 가면과 모자를 벗은 미연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요! 안녕!”

“너 말이야…….”

태진은 이마를 감싸 쥐며 한탄했다.

“어쩌려고 나한테 그렇게 말을 걸어? 분명히 모르는 척하라고 했잖냐.”

“음음, 내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물론 그러진 않을 거라고 여겼지만, 그래도 말이야. 모르는 척하는 게 너나 나나 좋다니까.”

“헤, 그래서 모르는 척했잖아. 몰랐는데 관심이 생겼다는 설정이었다고.”

“세세한 설정 세울 시간에 이왕이면 인연 없게 생활해 줬음 했다…….”

이제 와서 투덜거려 봤자 이미 늦었다. 태진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의 이 불평은 말 그대로 한 번 지껄여 보는 것일 뿐이었다.

태진의 심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미연은 에헤헤 웃음지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비볐다.

“화났어? 응? 그래서 화났어?”

“……으이그.”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태진은 미연의 어깨를 안았다.

“우리 밖에 나가자.”

그의 품속에서 미연이 제안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내려다보면서 태진이 눈을 굴렸다.

“지금?”

“응. 여기보단 밖이 낫지 않을까? 외곽까지 나가면 사람도 없을 거고.”

타당한 의견이었다. 사절단이 머물고 있는 성에는 경비병들이 돌아다닌다. 그에 비해 시외로 가면 사람이 없다. 자유롭게 손을 잡고 다녀도 볼 눈이 없다는 것이다.

태진은 조금 생각해 본 다음 끄덕였다.

“알았어. 가자.”

결정하자 행동은 빨랐다. 숨을 죽여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태진이 앞장서고 미연이 뒤를 살폈다. 경비병이 보였을 땐 그늘에 몸을 숨겼다가 눈치를 봐서 재빨리 길목을 지나쳤다.

그들이 성을 빠져나오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와, 나왔다!”

성문을 빠져나와 탁 트인 대로 앞에서 미연은 낮게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주변을 확인하던 태진의 팔을 이끌고 미연이 달렸다.

“가자!”

그녀에게 팔을 잡힌 채 태진도 뒤따라 달렸다.

그렇게 성을 빠져나가 시외로 향한 태진은 아무도 자신들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성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목격한 자가 있었다.

아리스였다.

그녀가 태진의 방을 방문한 것은 태진이 미연을 만나기 위해 떠난 직후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아련하게 듣긴 들었지만 그것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고 조용히 자신의 방을 빠져나온 아리스는 태진의 방문 앞에 섰다.

“후우…….”

심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뒤 문을 살짝 두들겼다. 주변을 살피며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아리스는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아리스는 “실례합니다…….” 하고 조용히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있어야 할 태진이 방엔 없었다.

“어디 가셨지?”

아리스는 일단 방 안을 구석구석을 찾았다. 세면실까지 뒤졌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내일 회담에 쓸 자료들과 진행표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모든 일을 끝냈다는 것은 명확했다.

그를 돕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아리스는 아쉬워하며 창문 쪽으로 이동했다.

창문 아래를 무심코 내려다본 아리스는 누군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두 명의 그림자는 태진과 미연이었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직감한 아리스는 다음 순간 이미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문을 벌컥 열고 모두가 잠든 시간이 사실을 까먹은 채 계단을 뛰어 내려가려던 그녀 앞에 아서가 나타났다. 길을 막고서 그가 조용하게 물었다.

“어디가?”

“태, 태진 님이 밖에 있어!”

“알아. 아마도, 투신의 전사를 만나러 간 거겠지.”

아서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미 태진은 미연을 알아보았고, 두 사람은 모종의 신호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텔리오트 2황자의 호위가 태진에게 접근하는 것을 하루 종일 목격한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태진 님이 방에 없어서, 따라간다는 거야? 오랜만에 만난 연인들이야. 회포를 방해하면 안 되지 않을까?”

“…….”

아서의 말에 아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연인 관계. 몇 달 만에 겨우 만난 두 사람을 방해할 자격 같은 건 그녀에게 없었다.

하지만 그때 아리스의 표정은 무언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그 사실을 자각했을 때, 그것이 일종의 공황 상태로 만든 것이다.

아서는 그녀의 심리 변화를 조용히 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기에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리는 아리스를 보며,

아서는 표정을 굳힌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태진과 미연은 밤의 대로를 걸었다. 짐작대로 대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디어프는 트레빌 시 시민 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고, 시를 벗어나면 사막과 비슷한 자연만이 그들을 맞이한다. 그렇기에 도적이랄까 도둑 계열의 사람들이 살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환경이었다.

경비병은 있지만 형식만이고 보통은 활동하지 않기에 이런 야밤에 순찰을 돈다든가 하는, 지극히 도시적인 활동을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태진과 미연은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걷는 것도.”

대로를 걸어가는 미연의 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맞춰 태진도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머리 위로는 달과 별만이 보이고 들리는 것은 그들의 발소리 뿐. 미연이 조그맣게 웃었다.

“왠지 이 도시에 우리만 사는 것 같아.”

“오늘 밤을 위해 내가 대절했어.”

“도시 전체를? 능력 있는걸, 우리 낭군님.”

손을 끌어들여 팔짱을 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녀의 가슴 감촉에, 태진은 묘하게 감동했다.

“좋구나, 역시. 참 좋아.”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부모 공인이었기에 거의 부부나 다름없었다. 서로 같이 살지 않다 뿐이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 그들이 내뱉는 언행 하나하나는 어찌 보면 대담한 것이었으나, 둘에게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외곽까지 걸어 나갔다. 시간은 많았기에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달빛과 별빛을 하나씩 세어 가는 듯한 속도로 외곽까지 나아가 낡은 트레빌의 거리를 벗어났다.

모래 언덕처럼 마른 풀들이 나있는 언덕을 살짝 걸어 올라가자, 낮에 들렀던 마법 연구소 같은 유적지가 나왔다.

“여기도 중요한 유적이야?”

“그냥 예전에 집이 있던 흔적이야. 중요한 유적은 아냐.”

미연은 벽돌만 남은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낡은 거적때기가 뒹굴고 있어 냉큼 그것을 주워 와 먼지를 탁탁 털었다.

“켁켁. 모래 봐.”

지역적 특성으로 잔모래가 많은 땅이었다. 거적에 묻어있는 모래들을 대충 털어내고, 앙상히 남은 담벼락 밑에 거적을 깔았다.

그 위에 폴싹 주저앉은 미연이 자신의 옆을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앉아, 앉아.”

느슨하게 대답한 태진이 미연의 곁에 앉았다. 다리를 쭉 뻗은 미연이 만면에 미소를 걸치고 그의 어깨에 기대왔다.

“오늘 얼마나 얘기하고 싶었는지 알아? 모르는 척하라고 했지만 난 정말 근질거려서 죽을 뻔했다고.”

“나도 그랬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우리 둘 다 위치가 있으니까.”

“같이 이동했는데 왜 서로 다른 곳에 떨어졌을까?”

“글쎄…… 나도 알고 싶다, 정말. 차원 이동 자체를 잘 모르니까 왜 그런지도 짐작이 안 가.”

두 번이나 차원 이동을 경험했다.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차원 이동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경험한 만큼 더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미소 족의 장로가 이런 말을 하던데.”

미연이 리트미소에서 들은 말을 기억해 냈다. 그녀였기에 정확하게 모든 말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세계 진동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태진은 그녀가 들은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파악해 냈다.

“그래, 세계 진동. 결국 우리가 차원을 이동해서 바운스로 온 것은 그 세계 진동 때문이야. 이 년 전에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을 때도 세계 진동을 이용했었지. 이번에도 그럴 수 있어야 할 텐데.”

독립 전쟁이 끝난 직후 로츠왈디스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가보가 마법을 담고 있음을 태진은 알아냈다.

게다가 그 마법은 의도적으로 세계 진동을 일으켜 차원을 이동시켜 주는 것이었고, 일회성이라는 사실을 빼면 매우 유효한 물건이었다.

그들이 지구로 돌아간 것은 그 두루마리 덕분이었다.

“팰이 또 없대?”

“그때도 단 하나뿐이었잖아. 이번엔 정말 우리 힘으로 돌아가야 해.”

솔직히 그렇게 말하면 아득했다. 태진은 시공의 레펠을 모두 찾아냈기에 이제 차원의 레펠만 찾아내면 된다. 차원 마법을 알 수만 있다면 돌아갈 방법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또 얼마나 헤매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우리 더 버티자. 이 세계에서.”

“응. 힘내자.”

태진을 올려다보며 미연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것은 지구에 있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미소였다.

구름 뒤에 살짝 숨은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춰 내리고 있었다. 작은 바람조차 없는 언덕 위. 멀리 트레빌 시의 불빛이 아주 조금 보일 뿐인 그 공간에 태진과 미연, 단 둘만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얕게 들이마시는 호흡이 자연스레 하나로 합쳐졌을 때, 둘은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왠지 부끄러웠다. 은근히 쑥스러웠고,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이런 기분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마치 연애를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두근거림.

불타는 노예 시장 한중간에서 서로가 서로를 찾았다. 그때로부터, 시간상으로 4년여가 흘렀다.

사랑을 확인하고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까운 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단 한 번도 서로를 아끼지 않은 적이 없다고 여겼지만, 이제 와서야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연의 볼을 만지며 그녀의 입술을 느끼며 태진은 생각했다.

아, 난 아직도 이렇게나 미연이를 사랑하고 있구나.

태진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미연은 생각했다.

이렇게나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구나.

만나지 못한 지난 몇 달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가슴은 세차게 박동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던 거지?

태진은 미연을 안았다. 미연은 태진에게 안겼다. 손가락이 닿을수록 입술이 움직일수록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잊어 갔다. 자신의 안에 있는 상대를 잊고 상대의 안에 있는 나 자신을 잊었다.

고요만이 내려앉은 언덕에서 단 하나의 존재가, 뜨거운 열기가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밤은 자욱하게 끼어 한치 앞의 빛도 없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헤에…….”

들뜬 숨을 몰아쉬며 미연이 밤하늘을 보며 손바닥을 펼쳤다.

“언제더라. 고 이 때였나? 섬에 놀러 갔다가 배가 끊겨서 자고 왔을 때, 태진이 네가 그랬지? 노숙은 다신 안 한다고.”

“……그런 건 참 기억 잘하더라.”

“너에 관련된 일이라면 안 잊어, 난. 내일 시간표는 까먹어도.”

미연의 기억이란 태진을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 그저께 데이트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는 기억해도 오늘 점심 급식으로 무엇이 나왔는지는 기억의 파편도 없이 깨끗하게 잊는다. 미연은 그런 아이였다.

그리고 그건 태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밖에서 잔 일은 없었지. 무조건 방을 잡아서 놀거나 했으니까.”

그녀와 한 약속은 어떻게든 지킨다. 그것이 태진이었다.

미연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럼 오늘은 뭘까나? 노숙은 아니니까 괜찮은 거야?”

“음, 거기에 대해서는 너의 드넓은 마음을 믿을게.”

“이힛.”

기분 좋게 미소 짓는 미연의 어깨를 끌어안고서 그 이마에 입을 맞춘다. 아직도 미세한 열기가 남아 따스했다.

피부로 천천히 숨을 느끼고 있다가 태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왜 제국에 머물고 있는 거냐?”

미처 묻지 않고 있던 질문이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물었어야 할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연도 태진이 묻자 그제야 일을 떠올렸다. 본래라면 태진이 있을 확률이 높을 로츠왈드 왕국으로 갔어야 했고, 한 번은 정말 가자고 결심도 할 뻔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막아선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연은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텔리오트를 처음 만나 그에게 협력을 요청당해 고민하다, 밤중에 그를 미행했던 일을. 홍등가에서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과 그의 기행을 보며 제국에 남기를 결심했던 자신을.

“그 얼굴이 말이야, 왠지 낯이 익어.”

“얼굴이?”

“응.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야.”

태진은 텔리오트의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제국에서도 그렇지만 항상 가면을 쓰고 사는 그이기에, 제국 내에서도 본 얼굴을 본 사람은 미연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낯이 익다니,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잖아. 우리가 이 땅에 온 건 삼십 년 전이야. 이 황자라는 자, 올해로 서른 살이지 않던가?”

“그러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거야.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일 텐데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어.”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녀석 옆에 있으면 돌아갈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예감이 들어.”

굳이 머리 아프게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감 하나를 믿는 것이 미연의 장점이다. 그 감은 정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때가 많았고, 더구나 바운스에선 태진의 머리만큼이나 신뢰할 수 있다.

태진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믿을게.”

“응. 고마워.”

믿고 기다리자.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각자가 서로의 영역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진이 넌? 무슨 방법을 찾아냈어?”

“지금 시공의 레펠을 모두 발견했어. 이제 남은 건 차원의 레펠이야. 차원 마법을 알아내기만 하면 분명 어떤 방법이든 생길 거야.”

“차원 마법으로 지구로 돌아간다는 거지?”

“찾을 수 있다면.”

확률적으로만 따진다면 미연보단 태진 쪽이 훨씬 가능성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더 타당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태진은 미연의 감이 찾아낸 길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자가 바로 그였으니까.

어깨를 감싸 쥐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그녀를 끌어안는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태진의 손길에 따라 미연도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서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분명히 방법이 생길 거야. 멀리 있어도 흔들리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리고 다시, 같이 돌아가자.”

미연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태진은 그렇게 속삭였다.

회담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고대 삼화국의 각 왕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요한 의제를 토론할 수 있도록 건설된 회의실이 트레빌 성에는 남아 있었다.

성내에서도 그 어느 곳보다 확실히 관리되는 그곳에, 회담에 참석한 사절단의 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이 회담의 정식 명칭은 판샤란 산맥 평화 회담. 판샤란 산맥을 중심으로 모인 나라 간의 절대적인 평화 시대를 개척해 보자는 취지인 것이다.

진행자는 물론 태진이었다. 그는 개요대로 회담을 선도해 나갔다. 토론이라기보다는 서로가 가진 의견을 어렵지 않게 털어놓는 자리였기 때문에 회담은 훈훈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이상. 발언을 마치겠습니다만,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태진의 말에 각국의 대표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모디어프 지역에 관한 관리 및 보전에 관한 건은, 나파즈 공국을 시작으로 각국이 오 년씩 관리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결론짓겠습니다.”

태진이 신호하자 서기가 회담 내내 작성한 의결서를 가지고 왔다.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여 대표들 앞에 의결서를 놓자, 모두가 이견을 내지 않고 의결서를 국새를 찍었다.

이렇게 또 한 가지 조약이 체결된 셈이었다.

대표들의 인지가 끝나자 태진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의결서는 트레빌 성 보관소에 보관해 두겠습니다. 조약으로 맺어진 의무를 각국에서는 성실히 이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흠, 이제 하나가 남았군.”

팰리슈가 헛기침을 터뜨린다. 태진은 그쪽을 살짝 쳐다보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눈을 감고 있으니 물론 시각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텔리오트도 팰리슈가 뜻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남은 의제는 단 하나. 판샤란 산맥 주위의 삼국의 평화 협정이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로츠왈드 왕국은 말 그대로 삼자였다.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국제 문제이기 때문에 팰리슈는 전선에서 빠지듯 의자를 뒤로 물렸다.

로츠왈드 사절단에 포함된 이들도 각각의 정비를 끝마치고 관람객의 자세로 돌아섰다.

태진은 앞서서 진행한 개요를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시작 전에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각국 대표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시고 휴식을 취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종들이 사절단에게 음료를 나누어 주었다. 오랜 회담으로 목이 말라 있었기에 다들 조용히 갈증을 달랬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현재 세 가지를 의결했지만, 사실 모두가 이 마지막 의제를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의결을 완료할 때마다 이렇게 휴식 시간을 두었지만, 태진은 지금 현재는 전혀 휴식 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금 씁쓸한 음료를 들이키면서 태진은 주의 깊게 회의실을 관찰했다.

휴식이지만 각 사절단이 귓속말로 소곤대는 소리가 전부 들려왔다. 진행자의 입장이기에 어떠한 의견도 내놓지 못한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태진으로서는 그저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가 안 들리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피부에 와 닿는 시선의 방향은 아키레마 사절단 쪽. 마치 ‘네가 귀 기울이고 있는 거 아니까 들어.’라는 식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졸려…….”

태진은 잠깐 뒤로 돌아 쿡쿡댔다. 그럴 만도 하다. 어젯밤, 결국 잔 시간은 두어 시간 될까. 그 언덕 위에서 애정 물씬 풍기는 시간을 보내다 해가 뜨기 전에 성으로 돌아온 뒤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그러고 나서 태진은 회담 준비로 일찌감치 다시 출근해야 했고, 미연도 텔리오트의 호위 임무로 일찍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태진이야 보통 정신력이 아닌데다가 진행 임무도 있었기에 졸거나 하진 않았지만, 미연은 아니었다. 호위 임무로 텔리오트 뒤쪽에 앉아 있기는 해도, 원체 이런 자리에 이력이 나 있지 않은 그녀였다. 졸린 건 당연지사였다.

가면도 쓰고 있겠다, 자세만 흐트러지지 않으면 졸아도 아무도 모를 텐데. 태진은 그렇게 전해 줄까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무거운 자리다. 지금은 미연이 참아 주는 수밖에 없다.

휴식 시간이 끝이 났다. 짧은 시간 동안 마지막 입장 정리를 한 사절단들이 각각 자세를 바로잡았다.

진행석에 다시 선 태진이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네 번째 의제, 판샤란 평화 협정 건에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항은 아키레마, 마니크, 나파즈. 삼국의 역사와 관련된 민감한 사항이기에 과거사는 되도록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판샤란 평화 협정을 제의한 것은 로츠왈드 왕국 측이었지만, 주체가 되는 것은 아키레마 제국이었다.

지금의 디요네츠 황제 이전에도 제국은 숱하게 판샤란 산맥 너머를 도발해 왔다. 그렇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삼국의 평화였다. 평화를 논하기 위해선 과거사를 제쳐둘 필요가 있었다.

“역사가 알고 있다시피 판샤란 산맥을 넘은 것은 마나 동맹이 아닌 제국이었습니다. 평화 협정이 이뤄지기 위해선 먼저 제국이 도발을 멈추는 것이 선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텔리오트 이 황자께서는 이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마나 동맹. 마니크 왕국과 나파즈 공국 간에 맺어진 굳건한 동맹을 가리키는 용어로 국제 관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당연시되는 관계이기도 했다.

텔리오트는 신중하게 말했다.

“저도 잘 알고 있는 점입니다. 병상에 누워 있었다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제국이 여러분께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혔는지는 충분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평화 협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우리들의 확장 포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거칠 단계?”

회담에서 잠시 물러난 팰리슈가 하미엘 대공에게로 눈을 돌렸다. 텔리오트는 하미엘 대공의 되물음에 답하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비록 정식 황위 계승자도 아닌 이 황자의 서열이지만 제국의 대표로 와 있는 지금, 대표된 자격으로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마나 동맹을 향해 수백 년에 걸쳐 도발과 확장 시도를 해 온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화, 황자 저하!”

잠자코 앉아 있던 이시브가 당황하여 벌떡 일어섰다. 텔리오트의 이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분명히 텔리오트는 제국의 대표로, 제국은 지금 바운스의 어느 나라보다 강성한 국가다. 그 국가의 대표가 다른 나라의 대표를 향해 이렇게나 저자세로 사과를 요청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저하!”

“이시브, 됐어. 앉아.”

신중하게 호흡하며 텔리오트는 하미엘 대공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가면 밑에 숨어 있는 눈동자에서는 시종일관 똑바른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는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백 년의 과오가 이 인사 하나로 씻어질 거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만약 받아 주신다면 우리 제국도 큰 죄를 덜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미엘 대공은 솔직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할 말을 잃은 채 텔리오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자세로 굳어 버렸다.

휴리조 1왕자도 그와 다를 게 없었다. 정도를 따지자면 그가 훨씬 심했다.

회의실이 파도라도 휩쓸 듯 조용해졌다. 정적이 깨진 것은 돌 상태에서 깨어난 하미엘 대공이 실소를 터뜨렸을 때였다.

“……핫, 아무래도 철혈의 황제님은 굉장한 둘째 아드님을 두신 듯하오.”

그는 주름진 눈가를 매만지며 이야기했다.

“우리 공국은 이미 후계자를 정해 두었소. 아내가 일찍 죽었기에 후계자는 단 한 명, 나의 아들밖에 없으니 고민할 일도 없었소.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 녀석의 성질이 나의 아버지를 닮아 조금 오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오. 언젠가 공국의 대공이 되어야 할 녀석이기에 아비 된 자로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오.”

아련한 눈을 텔리오트에게 돌리는 하미엘 대공.

“내 아들이 텔리오트 이 황자, 그대만큼만 된다면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드는구려.”

텔리오트는 가볍게 목례를 보냈다. 뒤쪽에서 이시브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겨우겨우 참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하미엘 대공을 보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미엘 대공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휴리조 일 왕자. 어떻소? 저만 하면 훌륭한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오만.”

“도, 동감입니다, 대공.”

“그대도 텔리오트 이 황자에게 많이 배워야 할 것이오.”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최종적으로 대답했다.

“그 사과, 받아들이겠소. 감사하오.”

텔리오트의 표정은 가면으로 인해 전혀 읽을 수 없었지만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처음의 우려했던 날카로운 신경전은 전혀 없는 회담의 좋은 분위기에 태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 후로 회담은 일사천리였다.

“그럼, 삼국 대표들께서는 평화 협정서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서기가 필사적으로 작성한 협정서가 삼국 대표들 앞에 놓였다. 판샤란 산맥을 불가침 영역으로 정한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축약되어 있고, 마지막에 국새를 찍는 공간이 있다.

하미엘 대공과 텔리오트가 잠깐 눈을 마주쳤다. 태진은 보지 않는 듯 그 장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텔리오트가 먼저 국새를 들었다. 뒤이어 하미엘 대공이 천천히 협정서에 국새를 올렸고, 두 사람이 동시에 국새를 찍었다.

일정의 마지막은 만찬이었다. 으레 벌어지는 만찬이었지만 여느 국제 행사와는 다르게 오늘의 만찬은 무척이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너무나 껄끄러운 관계를 가진 네 나라가 모였음에도 치 오래도록 친분을 유지해 온 이웃집끼리 짧은 저녁 식사를 즐기듯, 무척이나 온화한 분위기가 만찬을 지배하고 있었다.

“수고했어.”

만찬 한편에서 조용히 과일을 씹고 있던 태진에게 팰리슈가 다가왔다. 친우의 어깨를 두들기며 팰리슈는 그의 옆에 섰다.

“회담을 네게 맡긴 건 정말 옳은 선택이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누가 이 정도로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겠어.”

“아직 마친 것은 아닙니다. 만찬이 남았으니까.”

“알아, 하지만 솔직한 말로, 이미 모든 일은 끝난 거잖아?”

태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팰리슈의 말을 긍정했다. 더 이상 이곳에서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조차 들지 않았다. 평화 회담은 성공했고, 이제 전 대륙에 이 소식이 퍼져 나갈 것이다.

가장 큰 것은 마나 동맹과 제국이 화해했다는 것일 테고, 암묵적으로 제국이 로츠왈드 왕국을 용서했다는 사실도 포함될 것이다.

거기에 따라 로츠왈드의 대외적 국력 상승도 기대해 볼 수 있고, 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 대륙으로 더 많은 발을 뻗을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워, 태진. 넌 정말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는구나.”

“별말씀을. 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입니다.”

“미연은? 만났어?”

태진은 대답하지 않고 턱짓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하미엘 대공은 텔리오트가 맘에 들었는지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뒤쪽에서 미연이 태진을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서 있었다.

호위다 보니 섣불리 텔리오트에게서 떨어질 수는 없기에 그녀의 가슴은 애달프고 있었다.

“누군지 뻔히 보이는군. 저 여검사였나? 어쩐지 바운스에서는 보기 힘든 모양의 검을 들고 있다고 했어.”

팰리슈도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태진은 웃음기가 묻어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모르는 척하라고 일러뒀더니 어제부터 저 상태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들러붙던 아이였으니까.”

팰리슈에게 있어서 태진과 미연이 한 자리에 있던 시절은 30년 전이었다. 아련한 추억인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팰리슈는 태진에게 건배를 청했다.

태진은 느긋하게 팰리슈의 잔에 잔을 부딪쳤다.

그때 하미엘 대공과 이야기를 끝낸 텔리오트가 눈을 돌렸다. 누군가를 찾는 듯하던 그가 발견한 것은 태진.

“이쪽으로 오는군. 난 그럼 가 볼게.”

천하의 국왕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태진은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텔리오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텔리오트의 등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는 미연의 시선을 모르는 체하는 태진에게 텔리오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로츠왈드 왕국에는 악수를 하는 풍습이 있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태진은 손을 맞잡았다.

“회담을 훌륭히 이끌어 줘서 고맙습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답하는 태진은 텔리오트는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생활에는 지장이 없습니까?”

“어릴 적부터 그렇기에 다른 감각이 충분히 발달해 있습니다. 전혀 지장은 없습니다.”

“대단하군요. 수행을 오래한 검사는 눈을 감아도 검의 궤적이 보인다고 하는데, 흡사 그런 경지 같습니다.”

“칭찬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화를 나누며 태진은 텔리오트를 관찰했다. 미연은 그의 얼굴을 봤다. 분명히 낯이 익는 얼굴이라고 했다. 그녀의 말을 의심할 순 없으니, 말 그대로 미연은 그의 얼굴을 어디선가 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30년 전 바운스가 아니라면, 지구밖에 없다.

지구에서 텔리오트와 같은 얼굴을 봤다고 가정해 보자. 텔리오트가 수상하다고 하는 미연의 감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진으로서도 가면 아래의 얼굴을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미연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면 그려 달라고 했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지금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체격과 목소리뿐이었다.

두 가지 증거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남성 치고 이 정도 체격을 보는 것은 쉬웠고, 목소리도 비슷한 사람이 많다.

가면을 벗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태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텔리오트의 말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황제가 되시면 왕국도 잘 부탁합니다.”

“아직 황제가 된 것도 아니지만…… 알겠습니다. 왕국에 돌아가서도, 우리 제국을 잘 부탁합니다.”

텔리오트는 곧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태진과 헤어졌다. 시종 눈길을 주던 미연이 태진의 잔에 살짝 건배를 하며 눈인사를 보냈다.

태진은 난처하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투신의 전사…… 님이시군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는 아리스였다. 원래라면 팰리슈를 수행할 예정이었으나 팰리슈가 귀찮다고 자유롭게 만찬을 즐기라고 명했기에, 지금 그녀는 만찬실을 돌아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정말 곤란합니다. 멋대로라서.”

투덜대는 척하며 태진은 술이 든 잔으로 바꿔들었다. 아리스는 그의 말 속에 녹아 있는 말투를 읽어 냈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곤란하다고 생각지는 않으시죠?”

“뭐, 그렇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던 이해하고, 게다가 예뻐 보이는 것이다.

아리스는 묘하게 아려오는 가슴 안쪽을 모른 척하며 물었다.

“어젯밤에…… 이야기는 많이 하셨어요?”

“보셨습니까? 시외에 갔다 왔습니다. 밤이라도 제법 볼거리가 많더군요.”

“헤에, 저도 데려가 주시지. 아, 데이트…… 니까 그건 안 됐을까요.”

“하하. 죄송합니다.”

태진이 가르쳐 준 지구의 말도 사용하면서 그를 떠보았지만, 태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과했다.

아리스는 불현듯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애써 참으며 눈을 들자, 태진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 시선 끝에는 미연이 있었다. 다른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텔리오트의 뒤에서 이쪽을 쳐다보며 포크를 흔들어 보인다.

태진과 미연. 현신의 전사와 투신의 전사는 몇 달 간이나 서로 다른 나라로 떨어져 있었지만, 전혀 멀어져 있지 않았다.

몸의 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그들의 마음 사이에는 한 발자국의 간격도 없었다.

정말로, 너무나 이상적인 연인 관계.

거기에는 파고 들어갈 허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느낀 순간, 아리스는 깨닫고 말았다.

지금껏 그녀가 태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단지 특사대의 상관이 아닌 한 남자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리스? 왜 그러십니까?”

아리스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여 태진이 시선을 내렸다. 아리스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 오, 옷에 음식이 묻었어요. 갈아입고 올게요.”

되도록 떨리지 않게 말한 뒤 그녀는 만찬실을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태진은 쳐다보다가, 다른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하미엘 대공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팰리슈. 그 뒤에 아서가 서 있었다. 갑자기 만찬실을 뛰어나간 아리스를 보던 시선을 그대로 움직여 태진을 먼 곳에서 보고 있었다.

태진이 눈을 뜨고 있었다면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을 테지만, 시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서는 눈을 돌렸고 자신의 임무에 전념했다. 태진도 곧 다른 이가 말을 걸어와 아리스의 일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만찬은 그 뒤로도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회담의 마지막 일정이었기에 모두가 쉽게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함께 분위기에 취했고, 회담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의 트레빌 성.

만찬에서 걸쭉하게 마신 이들이 방에서 뻗었고, 만찬을 정리하던 시종들의 움직임도 모두 사라져 아무도 성을 배회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시간.

텔리오트는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촛불을 피워 놓은 채 오늘 회담에서 이뤄 놓은 결과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태진의 입장에서도 성공적인 회담이었다면 텔리오트도 그러했다.

이 회담에 많은 것을 계산하고 참여한 것은 텔리오트도 마찬가지였고, 대부분의 결과를 획득한 지금이었다.

서류를 정리한 뒤 텔리오트는 피곤한 눈을 매만지며 일어섰다. 늦게까지 만찬에 어울렸더니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내일 오후쯤 제국으로 출발할 예정이니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지만 어쨌든 빨리 눕고 싶었다.

촛불을 끄고 침대로 향한 텔리오트의 발을 한 소리가 잡아끌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누구지?”

이 밤에 찾아올 사람은 없다. 보고를 끝낸 이시브도 자신의 방으로 갔고,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그의 방에 올 리는 없었다.

텔리오트는 문을 열지 않고 신중하게 바깥의 기척을 읽으려 했다.

“텔리오트 이 황자. 드릴 말이 있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무례하지 않았다. 텔리오트는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신분을 밝혀라. 그전에는 열어 주지 않겠다.”

잠시 간의 침묵 후 바깥에서 답이 돌아왔다. 텔리오트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당신이 왜 나를 만나려고 하는 거지?”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습니다만. 문을 열어 주지 않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물어 왔기에 텔리오트는 심사숙고 끝에 문을 열었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방 안에 들어온 그자는 바깥을 살피더니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텔리오트 앞에 섰다.

침대에 앉은 텔리오트는 촛불을 키지 않고 물었다.

“이 밤에 나를 찾아온 용건이 뭐지?”

“두 신의 전사가 만났습니다.”

대뜸 그자가 꺼낸 말에 텔리오트의 가면이 꿈틀댔다.

“현신의 전사와 투신의 전사를 말하는 건가? 그들이라면 삼십 년 전에 동쪽의 나라로 돌아갔을 텐데.”

“다시 돌아왔습니다. 현신의 전사는 지금 로츠왈드 왕국에, 그리고 투신의 전사는 바로 당신 옆에 있습니다.”

“……신미연, 말인가.”

전혀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짐작하고 있던 사항이 사실로 확인되었을 뿐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럼 현신의 전사는 강태진이라는 그자겠군.”

“그렇습니다. 그 둘이 어젯밤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습니다.”

“알고 있어.”

침대에 걸터앉은 텔리오트에게 그자는 재빨리 말했다.

“신미연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강태진과 만난 이상 그들이 어떤 일을 꾸밀지 알 수 없습니다.”

텔리오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아. 신의 전사는 로츠왈드의 영웅이지. 그들이 만났다면 분명 우리 제국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야.”

“잘 알고 계시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해 봐.”

가면 속에 가려진 텔리오트의 눈을 직시하는 그자.

“강태진을 무력화시켜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신미연을 처리해 주십시오.”

“뭐?”

그 말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텔리오트는 야밤에 자신에게 들이닥친 자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 의미입니다. 둘의 만남은 제국에게 좋을 게 없습니다.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그들을 봉쇄하는 것이 앞으로도 좋을 겁니다. 그렇기에, 제가 강태진을 묶어 드리겠습니다. 이 황자께서는 신미연을 처리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신미연은 지금 나의 호위 부대 대장이야. 그런 그녀를 처리하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 텐데?”

“그럼 그들이 먼저 움직인 다음에 후회하실 겁니까?”

“제법 도발적인 발언이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른다는 확신도 없잖아.”

“저지르지 않는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그자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지금 미연이 제국에 남아 있는 것은 태진을 찾기 위해서 텔리오트가 도움을 줄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태진을 찾아냈다.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다.

텔리오트는 가면을 톡톡 두들기며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 방문자는 강하게 주장했다.

“강태진에게 위기감을 주려면 신미연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 황자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리는군.”

“이 황자께 해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텔리오트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똑바로 그 자를 쳐다보며 진중하게 입을 뗐다.

“무엇이 목적이지? 분명히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 건 아냐. 하지만 그쪽에게도 이득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대체 이런 일을 제의하는 목적이 뭐지?”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까?”

방문자가 답할 때까지 텔리오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고요를 이기지 못하고 그자는 나지막이 말했다.

“강태진, 그 남자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알기 쉬운 이야기로군.”

텔리오트는 다시 침대로 가 앉았다. 방문자를 한 차례 바라보고 그가 꺼낸 이야기를 곱씹었다.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텔리오트답지 않게 이번만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방문자는 텔리오트가 망설이고 있음을 알아채고 물러섰다.

“대답,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자가 방에서 사라진 뒤에도 텔리오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

이튿날.

오후에 로츠왈드 사절단을 제외한 나머지 사절단이 귀국할 채비를 갖추고 대로에 모였다. 시민들이 나와 환송을 해 주었고, 그들의 박수와 환성 사이에서 각국 대표들이 며칠 간 나눈 정을 바탕으로 끈끈한 이별을 했다.

“잘 돌아가시오, 텔리오트 이 황자.”

“감사했습니다, 대공.”

인사를 나누는 하미엘 대공이 휴리조 1왕자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니크, 나파즈 공동사절단이 가장 먼저 출발한 후 텔리오트는 팰리슈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텔리오트가 마차에 오른 뒤 미연도 미소라와 함께 말에 올랐다. 로츠왈드 사절단 앞에 서있던 태진과 시선을 맞춘 미연은 손을 입술에 대고 쪽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태진은 보이지 않게 난처한 웃음으로 그녀를 배웅했다.

다시 만난 지 며칠 만에 다시 헤어지는 두 사람.

허나 전과는 달랐다. 서로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제 확실히 알고 있었으니까. 미연은 제국에서, 태진은 왕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것이 지금 그들이 해야 할 일이었고 진실이었다.

떠나가는 미연의 뒷모습을 보며 태진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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