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32)

스물셋. 그대에게 카알트라즈 토벌을 명한다

아키레마 사절단이 시디 노트니로 진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디요네츠는 집무실에서 일어났다. 비서관을 대동하고 궁을 나오는 그의 앞으로 사절단의 긴 행렬이 멈춰 섰다.

가장 화려한 마차 안에서 가면을 쓴 황자가 걸어 나왔다. 텔리오트는 디요네츠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잘 다녀왔느냐, 아들아.”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디요네츠도 텔리오트를 맞이했다.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이들이 모두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뻣뻣하게 아무 짓도 안 하고 있던 미연과 미소라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고 대충 인사하는 척만 했다.

“주요 보고는 내일 올리도록 하여라. 오늘은 이만 가서 쉬어라.”

“예, 폐하. 그럼 내일 뵙겠사옵니다.”

황궁 앞에서 사절단은 해체되었다. 각자의 방향으로 사라지는 사절단의 행렬을 유심히 바라보고서, 그들이 모두 사라져서야 몸을 돌린 황제가 비서관에게 말했다.

“어떤 소식을 가지고 왔을지 흥미롭구먼. 그렇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비서관은 조용히 대답했다.

황궁에서 멀어진 텔리오트의 마차는 그의 궁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황성 안의 이들이 마차를 알아보고 지나갈 때마다 예를 올린다. 안에서 그것을 눈으로만 보고서 텔리오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궁 앞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린 텔리오트는 미연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부대를 적당히 쉬게 해 둬. 무리시키지 말고.”

“그쯤은 나도 알아. 걱정하지 마셔.”

샐쭉 웃는 투로 말하고서 미연은 미소라를 데리고 냉큼 훈련장 쪽으로 뛰어갔다. 이시브는 럭커에게 가 비서 임무를 인계해야 하기에 텔리오트와 함께 움직였다.

이 황자궁 앞에는 이미 럭커를 비롯하여 이 황자파의 중추들이 모여 있었다. 텔리오트가 나타나자 모두가 박수와 함께 그를 맞이했다.

“저하! 회담의 성공을 감축드리옵니다!”

“오랜만이군, 발츠 중장. 그 사이 더 정정해진 듯한데?”

“과찬이십니다, 저하!”

그의 옆에는 럭커 또한 서 있었다. 럭커는 눈물이라도 흘릴 듯한 얼굴로 텔리오트를 바라보았다.

“럭커, 곧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이군.”

“제 생애 이렇게 기쁜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하.”

“회담 하나 다녀왔을 뿐인데 너무 큰 소란이야.”

“아닙니다, 저하. 결코 큰 소란이 아닙니다.”

럭커는 텔리오트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주인이 없어도 그 집무실은 언제나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마치 어제까지 사용한 듯 그 모습 그대로인 집무실에 앉은 텔리오트는 럭커에게 물었다.

“설명해 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이번 회담으로 저하에 대한 인지도가 일 황자를 초월하였습니다.”

평화 회담 참가를 결정할 당시, 텔리오트는 1황자 레키엔보다 분명 인지도가 뒤쳐져 있었다. 그 차이를 메우기는 굉장히 힘들어 보였었다.

그러나 그때 기회로 찾아온 것이 평화 회담이었고, 텔리오트가 참가하기로 결정되자 황성 내에서는 제법 큰 논란이 일었다.

특히 1황자파에서 거세게 항의를 했지만 디요네츠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텔리오트는 모디어프로 떠났다.

그리고 평화 회담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큰 말썽 없이 마나 동맹과의 협약을 맺고 로츠왈드와도 무사히 회담을 마무리 지었다.

그 수완은 분명히 텔리오트의 성과로 평가되었다.

그 소식이 들리자 중립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속속 이 황자파로 들어왔고, 지금 현재 2황자파의 세력이 일 황자파를 앞질러 버린 것이다.

“분명 회담의 결과는 구설수에 오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만 몇 개월 만에 일 황자 파를 앞지른 것은 굉장한 성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과연…… 거기까지는 예상조차 못했는데. 잘된 일이군.”

황위 계승전에서 훨씬 유리한 자리를 선점한 것이 된다. 황위 계승전은 차기 황제의 즉위가 필요한 시점에서 끝이 난다. 그 경우는 현 황제가 황위를 물려줄 뜻을 밝히거나, 황제의 노환이나 병, 기타 등등의 사유로 목숨을 잃었거나 할 때이다.

결국 황위 계승전의 종료는 누구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어찌 됐든 높은 인지도를 쌓아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만약 지금 황위를 이을 자를 뽑는다면, 그것이 텔리오트일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이번 회담은 여러 모로 저하께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 저하?”

한참 신이 나 이야기하던 럭커는 생각만큼 텔리오트의 반응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면 탓에 표정을 읽을 순 없지만 풍겨 오는 분위기가 럭커의 이야기에 그다지 귀 기울이고 있지 않은 듯했다.

뒤쪽에 서 있던 이시브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그도 고개를 저었다. 럭커는 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황자 저하, 기쁘지 않으십니까?”

“응? 물론 기뻐. 왜 그런 걸 물어보지?”

“아니…… 제 예상보다 기뻐하지 않는 듯 보였을 뿐입니다.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아냐, 난 멀쩡해. 다만 오늘 도착해서 조금 피곤할 뿐이야.”

럭커는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 화들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만 돌아가셔서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군. 알겠어.”

텔리오트는 순순히 럭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럭커는 집무실에서 텔리오트의 방까지 그를 모셨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간 다음 이시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회담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게…… 제가 아는 바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미리 보내드린 전서대로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럼 왜 저러시는 거지. 럭커는 의문스런 눈으로 잠깐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문 안쪽이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이내 그는 시선을 접었다.

“가지. 자네에게 인계받을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

“알겠습니다.”

럭커와 이시브는 곧 텔리오트의 방 앞을 떠났다.

미연과 미소라가 훈련장에 도착했을 땐 대원들이 모두 자신의 짐을 마차에서 풀어 놓고 있었다. 지휘 중이던 레디오가 두 사람이 돌아오자 대원들의 작업을 모두 멈췄다.

“다들 짐 다 풀었어?”

“지금 하고 있는 중입니다. 황자 저하께서는 잘 돌아가셨습니까?”

“응, 잘 들어갔겠지 뭐. 계속해, 계속해. 내 짐은 어디 있지?”

미연의 짐은 마차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내리고 있었다. 미연은 자신의 짐을 받자마자 그대로 미소라에게 떠넘겼다.

“무슨 짓이냐, 이건.”

“내 방에 좀 갖다 놔 줘. 나 어디 좀 다녀올게.”

이 긴 여행길에서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는 미연은 쌩쌩하게 또다시 훈련장을 벗어났다. 생기발랄한 뒤태를 보고 있던 미소라는 지친다는 듯 한숨을 지고 레디오에게 지시했다.

“숙소로 복귀해서 오늘은 모두 휴식을 취하도록. 그리고 이 짐들 좀 부탁한다.”

부대장인 미소라의 명을 레디오가 거역할 리가 없다. 단단히 대답하는 그를 뒤로 하고 미소라는 미연이 걸어간 길을 뒤따랐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자 머지않아 미연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어라, 왜 왔어?”

미소라의 발소리를 들은 미연이 돌아보았다.

“너까지 오면 쟤네들은 어떡해?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애들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건 황성에서 너 하나뿐일 거다. 레디오에게 맡겨 두면 다 알아서 할 거다.”

대장과 부대장이라는 자리에 있는 건 미연과 미소라지만, 부하들에게 사실상의 지시를 하는 건 이시브 아니면 레디오다. 그래서 미소라는 레디오를 나름 신임하고 있었다.

미소라의 대답에 미연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가 바로 되돌렸다.

“뭐, 그건 그래. 그래도 왜 굳이 나를 따라오는 건데?”

“너 혼자 보내면 위험할 것 같아서.”

“내가 어디 가는 줄은 알아?”

“모른다. 몰라도 위험하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미소라의 묘하게 확신에 찬 말에 미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흔들며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연이 향한 곳은 마법사단이었다. 본부를 찾아가는 미연을 뒤따르며 미소라가 낮게 물었다.

“이곳에는 왜 온 거지?”

“태진이를 만났으니까.”

잠깐 말없이 생각하다가 미소라는 짐짓 입을 열었다.

“……세계 진동 때문인가? 지나치게 생략된 대답이다.”

“알아챘으니까 됐잖아. 맞아, 세계 진동. 태진이가 왕국에 있었다는 건 세계 진동이 그쪽에도 일어났다는 거야. 그럼, 약속대로라면, 마법사단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줬어야 했어.”

하지만 사실상 미연은 그동안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태진이 먼저 자신의 존재를 알려 오지 않았다면 아마 끝까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 진의를 알아보러 온 거야.”

“늘 생각하는 거지만…… 행동력은 강하군. 하지만 이렇게 오자마자 나서는 것, 좋지 않다.”

“말리기에는 늦었어. 이미 본부야.”

미연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본부에 도착해 있었다. 미연은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가 안내 담당에게 단장을 만나러 왔다고 알렸다.

“약속이 되어 있지 않으면 단장님을 뵙는 건 불가능합니다.”

“백두 부대 대장이라고 전해. 당신한테 부탁한 게 있어서 왔다고. 아, 참고로 안 알려 주면 쳐들어갈 거니까 그냥 순순히 전하는 게 좋아.”

미연의 진심을 듬뿍 담은 협박에 안내 담당은 서둘러 단장에게 달려갔다. 잠시 후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그의 대답에 미연과 미소라는 단장실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에스티른 단장은 약간 파리한 인상이었다. 문을 닫은 미연은 경쾌하게 인사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아, 안녕하시오. 소식은 들었소. 회담은 잘 다녀온 것이오?”

“응. 방금 도착했어. 여기 앉아도 되지?”

멋대로 의자로 달려가 폴싹 앉은 미연은 미소라에게 손짓했다. 소리 없이 걸어온 미소라마저 미연의 옆에 자리하는 모습을 본 에스티른 단장은 시종에게 차를 준비해 올 것을 명하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어, 어쩐 일이시오? 곧 나갈 참이었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만나지 못할 뻔했지 않소. 다음에는 미리 연락을 주고―”

“아, 미안. 다음엔 그럴게. 오늘은 워낙 바빠서 말이야.”

에스티른 단장의 말을 잘라먹고 미연이 끼어들었다.

“그것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보시오.”

“내가 부탁한 거, 어떻게 됐어?”

미연이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늘 미소라에게 장난칠 때와 같은 어조였고, 에스티른 단장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거기에 대한 결과가 나왔는데 말이오.”

“그래? 그럼 왜 진즉에 알려 주지 않은 거야?”

“그 결과가 나왔을 때에는 이미 사절단이 출발한 뒤였소. 알려 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던 거요.”

“그렇구나. 왜 그렇게 늦었어?”

에스티른 단장은 한 차례 헛기침을 터뜨렸다.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소. 제국 내는 물론이고 최소한 판샤란 산맥 동쪽 지역은 모두 조사해야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대도 만족할 것이 아니오. 그래서 모든 마법사를 총동원하여 로츠왈드 왕국까지 모든 마력을 조사했소.”

미연이 부탁한 것은 판게리츠 산맥 이외의 지역에서 나타난 세계 진동의 조사였다.

세계 진동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이 맞물리다가 구멍이 뚫려 일순간 두 세계가 이어진다는 현상이다. 그 현상이 발생되는 시점에는 필시 세계 진동과 함께 마력의 흐름도 불명확해진다.

한 번 불안해진 마력은 흔적을 남기기에, 감지할 수 있는 마법사만 모인다면 로츠왈드 남부까지의 조사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미연은 단순히 고개만 끄덕였다.

“응. 그래서? 결과는?”

에스티른 단장은 침을 삼켰다. 한참 망설이는 듯하더니 겨우 대답했다.

“찾아내지 못했소. 아무것도. 세계 진동은커녕 큰 마법을 사용한 흔적조차 없었소.”

“로츠왈드 남부까지 전부 훑었는데도? 없어?”

“혹시나 해서 판샤란 산맥까지 조사했지만, 아쉽게도 어떠한 현상도 발견하지 못했소. 세계 진동은 판게리츠 산맥에만 일어난 듯하오.”

“그 세계 진동이라는 거, 흔적이 오래 남아?”

“이론대로라면 두 세계가 연결되는 현상이라오. 그것은 세계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치기에 세계를 이루는 마력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오. 쉽게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오.”

단호한 에스티른 단장. 그의 어조에는 흔들림이란 없었다. 처음 그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당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또한 노련한 마법사들 중 하나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미소라는 느긋하게 미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고 한다. 안됐군. 힘내라.”

“전혀…… 위로가 안 되잖아.”

툭 쏘아붙이는 말투로 대꾸하고 미연은 다시 에스티른 단장에게 말했다.

“부탁할게. 그래도 좀 더 알아봐 줘. 어쩌면 당신 밑에 있는 마법사들이 제대로 일을 안 했을지도 모르잖아?”

“난 내 수하들을 믿고 있소. 하지만 황자 저하의 부탁이었으니 좀 더 알아보고 연락해 주겠소.”

“고마워! 복 받을 거야!”

솔직한 미연의 반응에 에스티른 단장은 허허 웃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됐소? 지금부터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말이오.”

“아, 응. 시간 잡아서 미안해. 가 봐.”

“그럼, 시종이 차를 가지고 오면 드시고 가시오.”

에스티른 단장이 방을 빠져나가고 마치 교대하듯 시종이 들어왔다. 시종이 찻잔을 두고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미연은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냉큼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야.”

“그렇군.”

김이 피어나는 잔을 손에 들고 미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말대로다. 로츠왈드 왕국까지 조사한 게 사실이라면 세계 진동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무엇보다 태진의 존재가 그 증거다. 미연은 뜨거운 차를 들이켜려 하다가 혀를 데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노친네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에스티른 단장만 알고 있느냐, 아니면 텔리오트도 알고 있는가.”

“테리…… 가 말이지.”

미연도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찻잔을 비운 미소라가 의심 그득한 어조로 결론지었다.

“이 황자가 그동안 너에게 숨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이것이 협정서입니다.”

텔리오트는 회담에서 체결한 평화 협정서를 내밀었다. 철저하게 봉인되어 있는 그 두루마리를 받은 디요네츠는 한번 훑어보기만 하고 그것을 비서관에게 넘겼다.

“이로써 마나 동맹과의 무역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

“예, 그렇습니다. 만찬에서 하미엘 대공과 그의 관한 이야기도 나눠 봤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정식 회담으로 이야기하자고 합의를 봤습니다.”

“잘했다.”

비서관이 평화 협정서를 상자에 넣어 잠그고 한 번 더 잠그는 동안 텔리오트는 남은 보고를 마저 올렸다. 회담에서 의결한 사항은 모두 네 가지.

가장 중요한 평화 협정부터 이야기했기에, 남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한 짤막한 설명 후 각각의 의결서도 디요네츠에게 건넸다.

“모디어프 보전 문제라…… 까다로운 국제 문제가 될 것 같구나.”

“그렇지만 잘 이어 나간다면 크나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판샤란 산맥 주변 국가와 좀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할 계기가 될 것입니다.”

텔리오트의 보고에는 거침이 없었다.

모든 보고를 마친 텔리오트는 디요네츠의 말을 기다렸다. 디요네츠는 텔리오트가 함께 올린 보고서를 끝까지 신중하게 읽어 내렸다. 주름진 눈 사이로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간편하게 기록된 보고서에 서명을 하고 디요네츠는 그것을 비서관에게 넘겼다.

“먼 길을 다녀오느라 수고했느니라. 다른 나라의 대표들을 만나니, 그래 어떤 기분이더냐?”

황제라기보다 아버지 같은 말투로 디요네츠는 넌지시 물었다.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제국 내로 민심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간의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이런 일을 맡겨 주신 폐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내게 감사할 것은 없다. 모두 너의 선택이었으니. 내가 한 것은 너의 선택을 존중해 준 것뿐이니라.”

텔리오트가 먼저 간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디요네츠가 텔리오트를 보낸 것이 되지만, 디요네츠는 텔리오트의 심중을 어느 정도 읽고 있었다. 보내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 텔리오트는 자신이 먼저 나섰을 것이다.

디요네츠는 그렇게 판단했다.

텔리오트는 변명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나로서도 네가 좋은 경험을 쌓길 바랐을 뿐이니라.”

그리고 아버지에 황제의 눈으로 돌아오는 디요네츠.

“이미 들어 알고 있다. 회담으로 너의 입지는 레키엔을 넘었다고 하더구나.”

“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과가 좋았습니다.”

“정말로 생각지 못했느냐?”

디요네츠의 물음에 텔리오트는 무언으로 답했다. 굳이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 디요네츠도 이야기를 돌렸다.

“내가 만약 지금 황위 계승을 명한다면, 다음 대 황제는 너다, 텔리오트. 물론 아직 그럴 마음은 없지만 모두가 나처럼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알겠느냐?”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텔리오트는 정중히 예를 갖춰 대답했다. 디요네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 나가 보라고 눈짓했다.

텔리오트가 나간 후 디요네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책상을 떠나 창문가로 가자 비서관이 책상 위의 서류를 한쪽으로 정리했다.

그때 디요네츠가 비서관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말이옵니까?”

“저 아이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이 형세를 유지한다면 일 황자 저하보다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옵니다.”

“그렇다면…… 저 아이가 좋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오랜 시간 디요네츠의 곁에서 그를 모시고 온 비서관이었다. 어감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비서관은 눈을 들었다.

햇살이 비치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디요네츠에게선 알 수 없는 우수가 느껴졌다.

“말씀의 저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사옵니다, 폐하.”

“방금 전의 보고, 무언가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나?”

비서관은 텔리오트의 보고 내용을 떠올렸다. 보고서를 읽은 것은 디요네츠였으나 텔리오트의 보고 내용은 비서관도 함께 듣고 있었다.

혹시나 하여 비서관은 디요네츠의 양해를 얻어 보고서를 펼쳤다.

그가 읽는 사이 디요네츠는 몸을 돌렸다.

“텔리오트의 심중이 무언가 알겠나?”

보고서를 빠르게 훑어 내린 비서관은 디요네츠의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그의 눈빛을 보고 디요네츠는 천천히 주억댔다.

“결국 로츠왈드와는 아무런 협의도 없었다는 걸세.”

마나 동맹도 물론 역사적으로 항상 아키레마 제국과 대립해 왔다. 판샤란 산맥이 중간에 없었다면 세 나라는 진즉에 어떤 한 나라로 통일되었을 거라고 역사가들이 말할 정도로.

그러나 최근의 역사에서 누구보다 제국과 대립되어 오던 나라는 바로 로츠왈드 왕국이었다. 제국에서 독립한 왕국과 한 자리에서 만났음에도, 그 나라에 대한 어떠한 협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거겠나?”

텔리오트조차 그 사항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았다.

황제와 비서관. 평생을 함께해 온 것이나 다름없는, 신분을 뛰어넘은 동료와도 같은 두 노인은 동시에 머릿속에서 같은 결론을 내렸다.

디요네츠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텔리오트가…… 그 아이가 황제가 될지도 모르네. 그렇지만 우리가 바라던 황제는 되지 않을지도 몰라.”

보고를 끝낸 텔리오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시브와 합류했다. 이 황자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텔리오트가 일 황자파의 상황을 물었다.

“회담에서 돌아왔는데 형님이 조용하군.”

“아무래도 판샤란 산맥 쪽에서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동안 텔리오트의 가면 위 표정을 읽어 내는 데 능숙해진 이시브는 그가 되묻기 전에 말을 이었다.

“서부 반란군이 판샤란 산맥에서 동맹을 맺었다는 첩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 황자 저하가 직접 움직인다는 소문입니다.”

“형님이 직접?”

“지금 입지가 뒤집어졌으니 초조해졌을 것입니다. 일 황자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겨 가던 경기를 역전 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원래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 황자파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큰 성과를 얻어야 했던 것이다.

서부 반란군 동맹이 맺어진다면, 그 동맹을 파괴하는 것으로 다시 입지를 쌓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레키엔이 직접 나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정보를 훌륭히 찾아냈군, 이시브. 회담 인수인계로도 바빴을 텐데.”

“제가 아닙니다. 사절단이 떠나 있는 동안 럭커 시종장이 알아 놓은 정보입니다. 일 황자파 쪽에서 이 황자님의 회담 성공으로 분주해진 만큼 정보 관리가 소홀해진 모양입니다.”

평정심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레키엔 한 명이라면 이런 실수도 없었을 테지만 일 황자파도 여러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입단속하기는 힘들어진다.

텔리오트는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판샤란 산맥이라…… 형님께 응원의 전언이라도 보내야겠군.”

“명안이십니다.”

이시브는 맞장구를 치며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국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저하.”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이 황자궁으로 돌아와 텔리오트가 집무실에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화, 황자 저하! 큰일이옵니다!”

에스티른 단장이었다. 이시브는 이미 백두 부대로 돌아간 뒤였다. 텔리오트는 당황해하고 있는 그를 일단 진정시켰다.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해 봐.”

“어, 어제 백두 부대장이 저를 찾아왔사옵니다.”

“미연이?”

텔리오트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부탁에 관해서 묻던가.”

“그렇습니다. 일단 아무것도 발견한 바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다시 찾아올 것 같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일단 대화 내용을 알려 줘.”

에스티른 단장은 더듬더듬 최대한 자세하게 어제의 대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텔리오트는 나지막이 그에게 일렀다.

“걱정 마. 다음에 찾아오면 계속 조사 중이라고 말해 둬. 아니, 그 전에 내가 조치하도록 하지.”

“아, 알겠습니다.”

그는 그제야 안심한 듯 밖으로 나갔다. 텔리오트는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손을 깍지 끼고 신중하게 고심하고 있던 그의 집무실로 럭커가 들어왔다.

“에스티른 단장을 만나 보셨습니까?”

“미연이 알아 버린 것 같아.”

럭커는 놀라워하지 않았다. 에스티른 단장이 찾아온 시점에 이미 럭커는 노련하게도 모든 것을 눈치 챘다.

세계 진동 조사는 이미 오래 전에 행해졌다. 물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회담 얘기가 나오기 훨씬 전에 끝나 있었다. 에스티른 단장은 텔리오트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그 선에서 텔리오트는 럭커와 함께 그 결과에 관해서 입을 닫기로 한 것이다.

로츠왈드 왕국 남부에서 세계 진동이 관측되었다.

결과는 물론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텔리오트는 그 사실을 미연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다. 미연이 그 사실을 안다면 제국보다 왕국을 선택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래서 난 미연에게 비밀로 할 것을 결정한 거였어.”

“알고 있습니다.”

미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후 그녀는 반란군 토벌에 집중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녀가 공을 세울수록 텔리오트의 입지는 더욱 올라갔다.

“백두 부대장에게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분명 우리가 이용한 것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알아. 그래서 지금도 그 결정에 후회하지는 않아.”

후회는 않는다. 후회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결정이 더럽혀지는 것이니까.

텔리오트는 착잡하게 말했다.

“후회하진 않아도 걱정은 하고 있었어. 로츠왈드 왕국에서 평화 회담 제의가 왔을 때부터, 어쩌면 하고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로츠왈드 왕국에는 어쩌면 미연의 동료, 과거 현신의 전사라고 불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회담을 받아들이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회담은 분명히 텔리오트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였기에, 사실로 증명되지도 않는 의심으로 그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텔리오트는 회담에 참가했다. 당연히 그의 호위로 미연도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미연과 현신의 전사가 만났어.”

럭커의 시선이 잠깐 멎었다. 텔리오트는 이어 말했다.

“회담이 끝난 밤에 어떤 자가 나를 찾아왔어. 그가 알려 주더군. 두 신의 전사가 만났다고. 짐작하고 있었고 각오도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진 않았지.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말이었어.”

“……어떤 말이었습니까?”

“그가 제안하더군. 미연을 처리해 달라고.”

“예?”

무심코 럭커는 되묻고 말았다. 텔리오트도 럭커의 그런 반응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이채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죄송합니다. 자세하게 들려주십시오.”

럭커의 부탁에 텔리오트는 그날 밤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럭커의 얼굴은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대답은 하셨습니까?”

“확답은 주지 않았어. 허나 이미 행동할 결심은 서 있던 것 같았어.”

럭커는 신음하듯 말했다.

“단순히 현신의 전사를 절망시키기 위해 이런 부탁을 하는 자라니…… 얼마나 그를 원망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조금 의심이 가긴 해. 과연 미연을 처리한다고 해서 현신의 전사를 묶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심.”

“역사는 두 신의 전사가 강인한 신뢰 관계로 묶여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뢰 관계를 넘어서 연인 관계였다면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럼 럭커, 어떻게 생각해?”

텔리오트는 럭커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황자의 보이지 않는 표정을 읽으려 했다. 보이는 것은 눈빛뿐. 럭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이미 결정하신 것 같습니다만.”

가면 아래에서 텔리오트는 미소를 지었다.

미연과 태진이 만났다. 미연은 이미 텔리오트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런 이상 어떻게 나올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 텔리오트의 곁에 머무르며 도움을 준다면 더할 것이 없다. 그러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두 신의 전사가 만난 이상, 이미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꼬였다. 회담을 경계로 상황은 엄청나게 꼬였다.

그렇기에 텔리오트는 결정을 내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마력핵 같은 존재라면 옆에 두지 않는 편이 가장 이롭다. 최대한 멀리, 될 수 있으면 아예 제거해 버리는 쪽이 옳은 선택이다.

회담 때부터 아침까지 그는 오래토록 고민했고 에스티른 단장의 방문으로 결심했다.

“난 미연을 버리겠어. 그래서 자네의 의견을 묻는 거야.”

“저하께서 결정하신 사항입니다. 제가 부연을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럭커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텔리오트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예리한 눈빛을 치켜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텔리오트가 다시 상체를 내밀었다. 럭커도 낮은 목소리로 제의했다.

“백두 부대를 카알트라즈에 보내십시오.”

럭커의 말은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단호했다.

카알트라즈.

그곳은 대륙과 거리가 있는 섬이기에 제국의 통치에도 어려움을 겪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반란군 초기 시절부터 요충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지금으로선 반란군의 최대 요충지라고도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카알트라즈가 무너지든 백두 부대장이 쓰러지든, 어느 쪽이든 황자 저하께는 이득이 되는 일이옵니다. 백두 부대장에게 카알트라즈 공격을 명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깊게 생각에 잠긴 텔리오트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

그 후, 미연은 아무런 이상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시브로서는 평소와 다를 게 없다고만 생각했다. 황성 내에서도 회담 전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미연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회담 전과 똑같이 백두 부대의 훈련에 전념한다. 그중 레디오와 시엘에게 당학류 해검도를 가르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가끔 땡땡이를 치고 있다가 이시브에게 한 소리 듣기도 하고, 멋대로 놀러 다니다 미소라에게 잡혀 오기도 했다.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이시브는 모르니 넘어간다. 그렇지만 미소라에게는 그 모습이 조금 불안해 보였다.

훈련이 끝나 쉬는 시간 동안 물을 마시고 있는 미연의 곁에 붙어 미소라가 넌지시 일렀다.

“너무 긴장을 풀지 마라.”

“어라, 그렇게 보여?”

“누가 봐도 그렇게 볼 거다.”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미소라에게 넘겨주며 미연은 가면을 고쳐 썼다.

“지금 내가 긴장해서 뭐 해. 뭔가 한다면 그쪽에서 하겠지. 난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 아냐. 이래 뵈도 꽤 긴장은 하고 있다고.”

“어느 쪽이냐.”

“그러게. 어느 쪽일까.”

킥킥대면서 미연은 바닥에서 일어났다. 미연이 넘긴 물을 마지막까지 마신 뒤 미소라가 말했다.

“이 황자가 무슨 일이든지 벌일 거다.”

살짝 돌아본 미연은 가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샐쭉 미소 지었다.

미소라의 예측은 정확했다.

며칠 후, 미연은 이 황자궁에 갔던 이시브가 달려서 돌아왔을 때 올 게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황자 저하께서 찾으십니다.”

“임무래?”

“정확한 용건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금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시브는 정말 모르는 얼굴로 대답했다. 레디오의 개인 대련 요청으로 그를 상대해 주고 있던 미연은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고 연습용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리하고 평소 훈련으로 돌아가.”

레디오가 경례했다. 미연은 곧장 돌아서서 궁으로 향했다. 그녀가 훈련장을 떠나기 전에 미소라가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

“같이 갈까.”

“아니, 됐어. 미소라가 간다고 얘기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인지 듣고 올게.”

미연은 평소처럼 총총히 텔리오트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텔리오트가 그녀의 방문에 겨우 책상 위에서 눈을 뗐다.

“불렀어?”

“잘 왔어, 미연. 앉아.”

책상 맞은편 의자를 권하는 그에게 미연을 손을 내저었다.

“됐어. 지금 땀 흘려서 앉으면 찝찝해. 서서 들을게.”

“네가 땀을 흘리는 건 왠지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인걸.”

“오늘은 좀 애들 열심히 가르치고 있거든. 좀 전까지 레디오하고 한판 하고 온 길이야. 점차 실력이 붙어 가는지 두 녀석을 상대하는 게 이젠 제법 긴장된다니까?”

레디오와 시엘. 두 사람은 특전대에서 최고로 치는 실력가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관해 이런 건방진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건 제국 내에서 몇 명 없을 것이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임무야?”

텔리오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용건을 꺼냈다.

“임무야. 그것도 이번엔 제법 어려운 일이 될 거야.”

“테리가 그런 말하니까 괜히 무서워지잖아. 어떤 임무인데?”

그녀의 물음에 그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서며 그는 다른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번 회담의 성공으로 내 입지는 형님을 넘어섰어. 지금 현재 이 황자파가 일 황자파보다 세력이 우세해.”

“응. 그 얘기는 이시브한테서 들었어.”

훈련 간간이 두 파의 현 구도에 대해서 이시브는 잠깐씩 이야기해 주었다. 미연과 미소라가 물론 관심이 있을 리는 없지만 호위 부대인 이상 어느 정도는 알아 두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는 지금 현재로, 라는 전제가 붙는다는 거야. 인지도라는 건 언제나 변하는 것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회담을 성공시켜 세력이 늘어난 거지만 형님이 또다시 성과를 올린다면 다시 이 우세는 무너지고 말 거야.”

“레키엔이 무슨 일을 벌인대?”

일 황자의 이름마저 마구 부르는 미연이지만 텔리오트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 손가락은 창문 밖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형님은 곧 판샤란 산맥으로 갈 거야.”

“중앙 산맥에는 뭣 하러 간대? 버섯이라도 따러 가?”

“군대가 몰려가서 버섯을 따 온다면 황성 전체가 먹을 수 있으니 좋을지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아냐. 럭커의 첩보에 의하면 서부 반란군들이 하나의 큰 동맹을 만들려 하고 있다더군. 그것을 막기 위해서 가는 거야.”

텔리오트는 회담에 참가하여 은연중에 국가의 대표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는, 지극히 정치적인 수를 사용했다. 그에 비해 레키엔은 자신과 어울리는, 반란군 토벌이라는 무척이나 정석적인 공격법을 선택한 것이다.

미연을 이용하여 동부 반란군을 징벌한 텔리오트다. 그 방법이 얼마나 인지도에 영향을 주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녀석이 그걸 성공하면 다시 인지도가 역전된다, 이거지?”

“바로 그 말이야. 그럼 당연히 곤란해. 지금은 이기고 있지만 곧바로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야.”

“음, 이해했어.”

미연이 단단히 주억댔고, 텔리오트는 설명을 이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 유지가 아냐. 회담 성공을 발판 삼아 이참에 확실하게 인지도를 올려 둬야 돼. 결정적인 계기가 있으면 나의 인지도는 한 번에 크게 오를 거야. 어쩌면 다시는 형님이 올라서지 못할 정도로.”

“그건 좋겠다. 응.”

“그래서 미연, 너에게 임무를 주겠어.”

텔리오트가 미연을 직시한다.

“백두 부대장, 신미연. 그대에게 카알트라즈 토벌을 명한다.”

미연은 눈을 깜빡였다. 서로 가면을 쓰고 있다 보니 제대로 눈이 보이진 않지만 텔리오트는 미연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뒤 미연이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 뭐라고?”

“카알트라즈 토벌. 말해 두지만 잘못 말한 것도 아니고 네가 잘못 들은 것도 아냐.”

“그럼 하나만 확인할게. 카알트라즈라는 게 그, 동쪽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섬을 말하는 거 맞지?”

“맞아.”

“반란군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어서 정확히 몇 명인지도 정확하게 추산할 수 없다는 그곳?”

텔리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을 것도 없다는 투였다. 미연은 다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도로 말했다.

“백두 부대로 거기를 없애라고? 너, 애들 다 죽이고 싶어?”

“불가능하다는 얘긴 안 하는군.”

“그렇다고 가능하지도 않아. 난 몰라도 다른 애들은 다 죽을지도 몰라. 아니, 미소라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으려나.”

미연은 단호했다.

“내가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는데 말이야. 스무 명 가지고는 절대 못 이겨. 차라리 거기 들어가서 뭔가를 훔쳐 나오라고 해. 그럼 해 줄게. 토벌이라니, 말을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줄 거 아냐. 모디어프의 모래 바람에 더위라도 먹었어?”

이시브가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을 발언이었다. 텔리오트는 소리 내어 킥킥 웃더니 가면을 벗었다. 매끈한 얼굴로 그는 설명했다.

“더위를 먹지도 않았고, 백두 부대만으로 토벌하라고 하지도 않았어. 불가능하다는 건 나도 잘 알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텔리오트는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한 가지 특권을 주겠어. 출발할 때 정식으로 서류를 써 주겠지만, 동부 주둔군에서 필요한 만큼의 병력을 자유롭게 지원받을 수 있는 권리를 너에게 주겠어.”

“내 맘대로 병사들을 차출해도 된다는 거야?”

“물론. 이 권리는 동부 주둔군 군단장에 버금가는 거야. 물론 무조건적인 건 아냐. 동부 주둔군의 의견도 충분히 듣고서 병력을 차출하도록 해.”

“몇천 명도 가능해?”

“작전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파격적일 정도의 특권이었다. 그 말인즉슨 카알트라즈를 쓰러뜨리기 위해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괜찮지 않아? 수천 명의 병사들을 네가 직접 지휘하는 거야. 30년 전에도 고작 백여 명이었다고 했지? 어때. 이제 조금 할 마음이 생겨?”

“할 마음이 생긴다고 할까…… 마구 흘러넘치는데?”

미연의 두 눈이 생기를 띄었다. 요 며칠 사이 잠들어 있던 전투 본능이 단숨에 눈뜨는 기분이었다. 뭔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는지 그녀가 가면을 벗었다.

“언제 출발하면 되지?”

“서류를 작성하고 준비가 되는 대로 떠나도록 해. 잘 알아 둬. 이번 임무의 성공 여부로 내가 황위를 이을지 잇지 못할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텔리오트가 미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반드시 성공시켜.”

“맡겨 둬!”

미연은 해맑게 소리쳤다.

궁에 다녀온 미연은 묘하게 흥분한 태도로 훈련 중이던 부대원을 모았다. 이제 곧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기에 훈련의 피로가 쌓인 얼굴로 모인 그들에게 미연은 지나치게 즐거운 어조로 선언했다.

“임무가 떨어졌어!”

“……예? 벌써 말입니까?”

단검을 던졌다가 받으며 불량하게 서 있던 미티스가 금방 불평의 소리를 터뜨렸다.

“대장님, 우리가 복귀한 지가 언젠데 벌써 또 임무입니까? 쉬는 시간도 안 줍니까?”

“충분히 쉬었잖아. 회담에서 복귀한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리야, 너.”

“그 후로도 매일이 훈련인데, 이게 어디가 쉰 겁니까?”

“테리가 명령을 내린 거란 말이야. 군인은 위에서 떨어진 명령에 군말 없이 따르는 거 몰라?”

미연의 말에 미티스는 “망할 이 황자 놈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미티스 빼고는 이제 다들 협조적으로 변한 대원들이기에 미연은 만족한 듯 함박웃음을 피우고 터뜨렸다.

“임무지는 카알트라즈다!”

“……예?”

“대, 대장님!”

대원들 사이에서 당황스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시브마저 경악하고야 말았다.

“대장님, 카알트라즈라니, 설마 카알트라즈 토벌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까!”

“응, 그거야. 이시브는 머리가 좋아서 참 좋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미연의 태도에 미소라는 두통이 일 것 같았다. 저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자신은 모든 것을 납득하고 있는 듯했다.

“그럴 수가…… 카알트라즈는 아직 그 어느 작전도 성공하지 못한, 요새와 같은 곳입니다. 그런 곳을 우리가 가는 것입니까?”

“레디오, 너무 놀라워하지 마. 우리만 가는 건 아냐. 테리가 동부 주둔군에서 필요한 인원을 차출할 수 있도록 해 준댔으니까.”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대장님.”

이시브가 레디오 대신 나섰다.

“카알트라즈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작전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섬 자체가 요새와 같은 지형을 지녔고 그곳의 반란군들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레디오 대위가 말한 바대로 지금껏 어떤 작전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결코 지금까지처럼 손쉬운 곳이 아닙니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다시 테리한테 가서 임무 무르고 올까? 너희가 안 간다고 떼쓰니까 다른 임무 달라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미연의 말에 모든 대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미연은 그들은 천천히 훑어보았다.

“임무를 하다 보면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는 거지 뭘 그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요는, 싸워서 이기면 되는 거니까. 알았지? 힘내!”

도저히 동의하고픈 맘이 안 생기는 격려. 대원들이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미연은 억지로 그들의 훈련을 종료시켰다.

“자! 정비하고, 출발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일단 여기서 끝! 가서 준비하도록 해!”

멋대로 이야기까지 끝내고 미연은 쌩하니 몸을 돌렸다. 들떠 있는 그녀의 등을 모두가 하염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의 훈련 정비까지 지켜본 다음 미소라도 숙소로 돌아왔다. 맞은편 방을 쓰는 미연을 만나기 위해 그녀의 방문을 두들기자 금방 응답이 돌아왔다.

“미소라? 들어와!”

막 씻은 듯 뽀송뽀송한 상태로 미연이 그를 반겼다. 가면도 쓰지 않고 무방비한 상태의 그녀를 보자 뭔가 바로 볼 수가 없어서 미소라는 몸을 돌린 채 말했다.

“위험하지 않겠나.”

“임무?”

미연은 피식 웃었다.

“위험하면 어쩔 거야. 깨부수면 그만이야, 그런 건.”

미소라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니다. 텔리오트가 카알트라즈 토벌을 명한 것은 뻔하다. 적과 적을 맞부딪히게 해서 어느 한쪽도 성하지 못하게 만들 작정인 거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지금 난 명령을 들을 입장인걸.”

미연은 나른하게 침대에 드러누웠다. 긴장감 따윈 모디어프에 두고 온 듯한 자세였다.

“내 목표는 이 임무를 무사히 뚫고 나오는 거야. 그런 곳에서 개죽음 당할 순 없지. 텔리오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 이상 거기에 맞춰 줄 생각은 없어.”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린다.

“날 믿어. 꼭 산 채로 돌아올 테니까.”

미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했을 뿐이다. 부대원이 모두 너 정도라면 좋을 텐데.

***

백두 부대의 출정일이 되었다. 훈련장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던 대원들 앞에 텔리오트가 직접 나타났다. 럭커를 대동한 그는 대원들 한 명 한 명에 격려의 말을 던져 주고 미소라의 앞에도 섰다.

“미연을 잘 부탁해.”

“걱정 마라.”

딱딱하기만 한 대화. 그리고 텔리오트는 미연에게로 말을 건넸다.

“백두 부대를 잘 부탁해. 임무의 성공을 빌고 있지.”

“너나 성안에서 잘하고 있어. 레키엔은 서쪽으로 떠났다며?”

“어제 판샤란 산맥으로 갔어. 동맹이 아무래도 진짜인가 봐. 정보꾼들 사이에서도 소란스럽더군.”

“너 또 술집 갔다 왔구나.”

목소리를 낮춰 미연은 텔리오트를 푸욱 찔렀다. 난처하게 웃는 소리를 내고서 텔리오트는 다시 대원들을 보고 위엄 있게 섰다.

“제군들의 무용을 빌며 기다리고 있겠다. 카알트라즈에서 승리하여 살아서 돌아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하는 백두 부대. 텔리오트는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말을 몰고 황성을 뛰쳐나가는 백두 부대에는 변화가 있었다.

이시브가 있어야 할 자리를 럭커가 대신하고 있다.

이는 바로 어제 텔리오트가 결정한 사항이었다. 카알트라즈 토벌은 시기상 매우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럭커가 임무에 대동하게 된 것이다. 제안한 것은 럭커였고, 텔리오트는 그것을 허가했다.

“우린 좀 빠를 테니까 뒤처지지 말고 따라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 안내는 맡겨 주십시오!”

대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지만 럭커는 정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백두 부대는 동쪽을 향해 내달렸다.

부대원들이 모두 떠나간 뒤, 럭커를 대신하여 비서 자격으로 텔리오트의 곁에 남은 이시브의 눈빛이 바뀌었다.

“떠났습니다, 저하.”

텔리오트는 흙먼지가 사라질 때까지 찬찬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시브에게 텔리오트는 명했다.

“중령, 시작하지.”

그날, 이 황자파의 모든 중추가 이 황자궁에 모였다. 바야흐로 황성이 오랜 정체를 끝으로 하고, 크게 뒤집히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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