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32)

스물다섯. 눈치 채지 못한 거대한 악의가

눈을 뜨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이 깔려 있다거나 무(無)라는 의미는 아니다. 말 그대로 시야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였다. 눈을 깜빡여도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은 눈이 가려져 있다는 뜻이었다.

얼굴의 촉감을 깨우자 무언가가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각도 귀마개로 방해받고 있다는 사실도 덤으로 확인했다. 거기다 입에는 재갈도 물려 있었다.

눈과 귀, 입. 얼굴에만 세 부분이 막혀 있다. 거기다 손발도 묶여져 있어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뭐냐, 이건.

볼에 차갑게 와 닿던 것이 바닥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손이 앞으로 묶여 있다는 것. 팔을 움직여 몸을 뒤집었다. 등이 바닥에 닿자 그나마 조금 안도가 되는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거지? 누운 채로 태진은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간밤…… 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어제 일인지 확신은 서지 않는다. 아무튼 어젯밤, 아서의 호출을 받고 태진은 녹산의 감옥으로 갔다.

하지만 일찍 도착한 것인지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감옥을 살피며 아서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누군가가 나타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리고 그대로 깔끔하게 기절.

눈을 뜨니 이 꼴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공격을 받았냐 하는 점이다. 누가 다가오는 낌새가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는 태진이었다. 그럼에도 뒤에서 공격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그 대답은 쉽게 떠올랐다.

발소리였다. 태진을 부른 것이 아서였기에 그가 늦게라도 올 거라고 태진은 예상했다. 그리고 들려온 것은 소리를 죽일 생각도 없어 보이는 걸음 소리였다.

조금 뛰는 듯한 그 느낌에 태진은 깊게 고민도 하지 않고 아서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습격당한 것이다.

실수라면 실수였고 자만이라면 자만이었다. 발소리 정도야 조작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재갈 때문에 그것도 제대로 안 됐다. 태진은 묶인 손을 꿈틀대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지금 자신의 상황을 토대로 삼아 내릴 수 있는 결론이 있었다.

최소한 태진을 습격한 자는 태진이 현신의 전사라는 것을 아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근거는 두 가지였다. 만약 어젯밤 태진이 들은 발소리가 조작된 것이라면, 태진이 발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말이다.

두 번째 근거는 귀마개였다. 납치든 유괴든 사람을 잡아 놨을 경우, 눈을 가리거나 입을 막는 것은 쉽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귀를 막는다는 것은 흔치 않다. 이는 태진의 예민한 감각을 봉인하려는 수작이었고, 결국 태진의 이능을 안다는 말과 동일했다.

둘 다 태진의 정체를 아는 자의 범행이라는 증거였다.

태진은 떠올렸다. 왕성에서 그가 현신의 전사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을. 리스트는 쉽게 나왔다.

그는 착잡했다. 그 리스트에 올라 있는 자는 모두 지금 그와 친한 자들이었다. 30년 전부터 친우와, 몇 개월 된 친우까지. 하나같이 의심하기 싫은 이들이었다.

그래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하여 추리해 내는 것밖에 없었다. 싫어도 그의 두뇌는 끝없이 움직였다.

가장 짐작하기 쉬운 결론은 아서였다. 태진을 감옥에 불러낸 것도 아서였고, 그는 태진의 정체도 알고 있다.

정말 아서인가…… 그렇게 하기 싫은 추리를 하다 문득 떠올랐다.

또 하나의 가능성. 뮈인터트였다.

뮈인터트의 앞에서 태진은 본모습을 보였다. 딱 한 번이었지만 그가 잊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뮈인터트가 탈옥을 했고, 자신의 납치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기에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

끝까지 고생시키는군. 혀를 차고 싶었지만 재갈 때문에 그 시도는 무산됐다. 거의 모든 움직임이 통제된다는 것은 정말로 괴로운 일이었다.

대충 범인 짐작을 끝낸 태진은 몸을 옆으로 굴렸다. 현재 살아 있는 감각은 촉각뿐이었고 그것만이라도 움직이려고 생각한 것이다.

데굴데굴 굴리자 몇 바퀴 가기도 전에 벽에 부딪쳤다. 거기서부터 반대쪽으로 굴러 벽에 도달했다. 짐작상 그렇게 큰 방은 아니었다.

그래도 동굴 같은 곳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바닥도 편편하고 퀴퀴하지도 않다. 습도도 적당한 것이 지하는 아니고 지상이었다.

어쩌면 아직 왕성 안일지도 모른다. 기회가 생겨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정보부든 왕궁으로 재빨리 달려가자고 태진은 마음먹었다.

그때 이능으로 깨운 감각 덕분에 겨우 일반적인 수준에 도달한 청각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하며 철문이 열렸다. 뭔가 담백한 냄새가 났기에 태진은 그 누군가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자는 매우 조심스런 걸음으로 걸어와 태진의 앞에 식기를 두었다. 그리고 태진의 머리 뒤로 손을 뻗어 재갈을 풀었다.

겨우 입이 자유로워진 태진은 관절을 풀며 말했다.

“점심밥입니까?”

그러나 눈앞의 그자는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숨을 쉬는 기색만 나는 것이 결코 말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밥을 먹는데 최소한 손 정도는 풀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태진은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질문은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무언이었다. 단지 가만히 시선을 보내며 태진을 압박할 뿐이었다.

그 시선에 태진은 일단 숨을 고르기로 하고 손을 뻗었다. 바닥을 더듬어 식기가 손에 닿자 앞으로 끌어왔다. 빵 같은 것을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모든 동작을 관찰하는 눈빛이 뜨겁게 느껴졌다.

식사를 하며 태진은 계속해서 그를 떠보려 했다. 날씨를 묻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다만 태진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식사가 끝날 때쯤에 얻은 거라곤 결코 만만찮은 상대라는 사실이었다.

태진이 우유를 모두 마시고 나자 그는 가지고 있던 재갈을 다시 태진에게 물렸다. 입이 아프도록 꽉 묶고 나서 그는 유유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다시 공간에 혼자 남게 된 태진은 벽에 등을 기대고 생각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도 어렵다.

혼자서 어떻게든 탈출할 수밖에 없다.

태진은 그렇게 결심했다.

태진이 사라졌다. 거기다 탈옥을 도운 혐의까지 씌워졌다. 탈옥수가 직접 증언한 이상 그보다 더한 증거는 없었다.

정보부장관 하이듀크의 이름으로 수배령이 떨어진 직후, 팰리슈는 깊은 우울함에 빠졌다. 국민들은 그가 매우 위엄 있고 근엄한 국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매우 소심한 성격이었다.

친우가 수배자라는 사실에 매우 충격을 먹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에스타냐는 상심한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그를 일터로 내몰았다.

그렇게 팰리슈가 도착한 곳은 귀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별 감옥. 뮈인터트의 탈옥으로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그곳에는, 제국으로부터 국경을 넘어온 미소 족이 있었다.

팰리슈가 호위대를 이끌고 행차하자 지키고 있던 간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똑바로 서 그를 안내했다. 딱딱한 그 행동에 팰리슈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완벽한 위엄을 가장했다.

“이, 이곳이옵니다, 전하!”

“고맙다.”

간수는 문을 열어 주고 부리나케 도주했다. 옆에 계속 있다가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호위대가 문을 열어 주었다. 태진은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간 뒤, 안에서 문을 닫았다. 당황한 호위대에게 그는 짤막하게 한마디만을 남겼다.

“너희들은 밖에서 지키고 있어라. 내게 위해를 가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눈을 돌린다.

“……그래 주겠지, 미소 족이여.”

침대 위에 미소 족이 앉아 있었다. 루위스에 도착한 직후 일단 상처의 치료를 끝내고 옷도 갈아입혀진 상태여서 겉모습은 멀쩡했다. 단련되어 있는지 피로한 기색도 이젠 많이 사라져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미소 족의 앞에 팰리슈가 섰다.

“그대의 가면을 본 적이 있소. 평화 회담에서였지. 왜 그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지만, 그 모습을 보니 이해가 가는군.”

팰리슈는 그렇게 운을 띄웠다.

“미소 족이 왜 제국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오?”

“…….”

“미소 족은 기나긴 세월 동안 결코 제국에 종속되지 않고 지금껏 투쟁해 왔다고 들었소. 고마 고원인이 사라진 후로도 계속. 그런데 왜 그 민족인 그대는 판게리츠 산맥을 나와 이 황자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오?”

“…….”

대답은 없다.

이 미소 족은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쭉 이 상태였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는 말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현신의 전사를 만나게 해 달라.”

반복하던 그 말은 미소 족은 다시 한 번 입에 담았다. 팰리슈는 질린다는 듯 보이지 않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냥 가 버릴까. 그래도 한 나라의 국왕인데 짜증난다고 가 버리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아니 그 전에 타냐가 무지 혼내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팰리슈는 끈질기게 입을 열었다.

“이건 취조가 아니오. 우리가 이곳까지 이송을 해 오긴 했지만 그대에게 특수한 혐의가 씌워진 것은 아니니 마음을 푸시오. 난 다만 궁금한 것을 알고 싶을 뿐이오.”

“현신의 전사를 만나러 왔다.”

이 인간이 정말! 반란군 시절의 성격이 나올 것 같아서 팰리슈는 꾹꾹 눌러 참았다.

“현신의 전사를 만난다는 건, 미연의 일 때문이오? 미연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바꾸자 미소 족의 눈빛이 팰리슈를 슬쩍 향했다. 오호, 이제 좀 관심을 가지는 건가. 팰리슈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나 또한 미연과 친구였소. 아니, 지금도 친구이오. 그녀가 위험하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라오. 그러니까 나에게 말해 보시오. 굳이 현신의 전사가 아니더라도 사정은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않소? 지금 이 황자의 호위 부대인 미연의 일을 제국에 알리지 못하기에 우리 왕국으로 온 것이 아니오. 미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미소 족이 팰리슈를 올려다보았다. 쉽게 볼 수 없는 은색의 눈동자에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흘러내리는 은발을 살짝 흔들며 미소 족은 입을 열었다.

“난, 제국이 아니라 미연에게 협력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가장 먼저 던졌던 질문의 답이라는 사실을 팰리슈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 그렇군. 그러니까 그 미연을 돕고 싶은 마음은 그대와 나도 같을 것이오. 말해 보시오, 미연에게 생긴 일을.”

“현신의 전사에게만 이야기하겠다.”

미소 족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했다.

그 이후, 팰리슈는 몇 번이고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급기야 팰리슈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어 그는 소리쳤다.

“난 두 신의 전사의 친우이오! 나에게 말을 해도 상관없지 않소?”

“……이상하군.”

반응이 있었다. 미소 족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까지 합쳐서 세 명이 다녀갔다. 난 모두에게 현신의 전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말을 했다. 이만하면 본인이 직접 오는 것이 당연할 터. 허나 당신의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그는 나를 만나러 올 생각이 없나 보군.”

그 은색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아니면, 올 수 없는 사정이 생긴 건가?”

움찔. 팰리슈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미소 족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술을 굳게 닫았다.

이제 더 이상 물어볼 기운도 생기지 않았기에 팰리슈는 그대로 감옥에서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 기운이 없어진 팰리슈의 태도를 걱정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간수에게 단단히 감시하라고 일러 둔 다음 팰리슈는 왕궁으로 복귀했다.

그의 집무실에는 하이듀크와 아리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태진의 수배령으로 보고를 하러 온 것이다.

에스타냐에게 얘기를 들었기에 팰리슈가 특별 감옥에 다녀온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표정을 봤을 때 하이듀크는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여 줬다.

“한 방 당했나 보군.”

팰리슈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미소 족은 다 그런 거야……?”

“무슨 말을 들은 거냐?”

“아무래도 눈치 챈 것 같아. 태진이가 만나러 오지 못하는 이유를.”

하이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미연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는 태진이니까. 의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이제 속이는 것도 한계…… 라는 뜻이군요.”

아리스의 말이 정답이었다. 하이듀크와 팰리슈는 동시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크게 한숨을 지은 팰리슈가 보고에 대해서 물었다.

“그래서, 사라진 그 장본인은 어떻게 됐어?”

“좀 기다려 봐. 아서가 온다고 했으니까.”

“아서가 수배 지휘를 하고 있는 거야?”

“순찰대장과 함께 움직이고 있어. 지금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태진을 쫓고 있는 건 아서지.”

팰리슈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우울해졌다.

“태진이 수배라니……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

30년 전, 로츠왈드 반란군으로 활동하고 있던 팰리슈 앞에 두 명의 전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놀라운 두뇌와 엄청난 힘으로 로츠왈드 왕국을 건국하는 데 힘을 실어 주었다.

그 와중에 전쟁을 이끌었던 이들 사이에는 끈끈한 우정이 생겨났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팰리슈는 그날의 우정을 진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 우정에, 팰리슈는 배신을 당한 것이다.

“나도 믿기진 않아. 그러나 아서의 말에도 틀린 점은 없어.”

하이듀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리스가 침통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하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어요…….”

하이듀크도 팰리슈와 같은 맘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태진이 배신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서의 논리를 반박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모든 정황이 태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쯤 되자 이제 아서의 주장이 사실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아무튼 우선은 태진을 찾아내는 게 먼저야. 도주든 실종이든, 그것은 그 후에 들으면 돼.”

하이듀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였다.

보고서를 팰리슈에게 제출한 아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 보름간의 수배 결과, 아무래도 강태진은 루위스 밖으로 도주한 것이 확실시됩니다.”

“……보고서를 읽을 것도 없겠군.”

서류를 펼치던 손길을 멈추고 팰리슈는 아서도 앉으라고 눈짓했다. 하이듀크와 아리스에게 눈인사를 던지고 아서는 맞은편에 앉았다.

“시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강태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루위스와 가까운 근교 마을까지 수소문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강태진은 이미 잠적한 듯합니다.”

“아서. 강태진이라니, 너무 막 부르는 거 아냐?”

아리스의 지적에 아서는 담담히 대꾸했다.

“그는 이미 대역죄인이야. 전처럼 경어를 사용할 순 없어.”

“태진 님이 죄, 죄인일 리가 없어!”

“아리스, 이해해. 하지만 정황이 그렇잖아. 그는 두 명을 탈옥시키고 도주해서는 여태껏 나타나지 않고 있어. 지금 이 상황이 무엇보다 큰 증거야.”

“다, 단지 실종되었을 수도 있잖아!”

“도주했을 수도 있지.”

아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에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리스가 억울한 듯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하이듀크가 그것을 말렸다. 지금 그녀는 감정적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딸을 시기적절하게 말린 것이었다.

팰리슈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태진의 실종을 알려야겠어.”

“누구에게?”

“그 미소 족에게 말이야. 지금 어떤 정보든 필요해. 이럴 때 제국에서 넘어왔다는 건 얕든 깊든 이번 일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것은 안 됩니다, 전하.”

아서가 팰리슈의 의견을 막아섰다.

“미소 족의 그자는 제국의 첩자입니다. 쉽게 우리의 정보를 줘선 안 됩니다.”

“뭐라고?”

“왜 그렇게 되는 거지?”

팰리슈와 하이듀크가 의문을 표했다. 아서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마법사단에 침입자가 있었던 것, 잊으셨습니까? 그 침입자가 쓰고 있던 가면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 가면은 제국의 이 황자가 쓰던 가면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소 족의 그자도 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서, 그자가 마법사단에 침입해서 레펠을 훔치려고 했다가 실패했고, 도망가다가 국경을 넘기 전에 잡혔다는, 그런 말이야?”

아서는 끄덕였다. 하이듀크가 깊게 신음했다.

“가면만으로 너무 성급히 결론 내리는 거 아냐?”

“그렇다면, 장관님께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상당히 도전적인 발언이었다. 하이듀크는 아서가 이런 성격이었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선 그도 다른 추리를 해낼 수 없었다.

아서는 팰리슈에게 눈을 돌렸다.

“전하, 결코 그에게 어떠한 정보를 줘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를 감시하고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다른 길이 없군. 알았어.”

팰리슈는 쉽게 함락 당했다. 일단 지금 그들에게 미소 족의 청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미연도 걱정이 되지만 당금의 최대 사태는 태진의 실종에 엮인 일련의 탈옥 사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에스타냐가 노크도 없이 바쁘게 집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팰! 큰일 났어!”

식은땀을 흘리는 얼굴로 나타난 그녀의 손에는 전서가 들려 있었다. 작은 두루마리 형태로, 새가 쉽게 잡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진 그것을 팰리슈에게 건넨다.

“무슨 일이야?”

“읽어 봐! 얼른!”

국왕에게로 가는 전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먼서 비서관이 읽게 된다. 에스타냐는 왕비지만 팰리슈의 비서관역도 수행 중이었다.

그렇기에 전서를 먼저 보고, 그 경악할 내용에 뛰어 들어온 것이다.

팰리슈는 의문스런 마음으로 전서를 펼쳤다.

그리고 에스타냐와 같이 경악했다.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팰리슈의 표정을 읽고 하이듀크가 전서를 빼앗았다. 국왕의 전서를 빼앗아 본다는 것은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지금은 그것을 지적할 정신도 사람도 없었다.

“……제국이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고?”

“예?”

아서와 아리스의 시선이 모였다. 그쯤 팰리슈의 경직이 풀렸다.

“이거, 잘못 보내온 거 아니지?”

“어느 바보가 국왕에게 전서를 잘못 보내겠어. 정말이야. 벨린 국경 수비대에서 방금 도착했어.”

“이건 달리 생각할 수 없군.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거야.”

하이듀크의 결론. 팰리슈는 깨닫기 싫었던 사실을 깨닫고 두 번째로 경악했다.

“평화 회담이 끝난 지 한 달도 안 됐어! 그런데 전쟁이란 말이야?”

“그럴 수가…….”

불행은 겹친다고 했다. 왕성 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더니 이젠 국외에서 터지다니. 믿기 싫은 현실에 아리스의 입에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 갑작스레 침체된 분위기를 깬 것은 아서였다.

“이거였어…… 이거였습니다!”

좌중이 아서에게 집중했다.

“선전 포고 전에 우리 측의 무력을 빼앗기 위해 그자를 보낸 겁니다!”

“전쟁을 대비해서 레펠을 훔쳐 오게 말이야?”

“그겁니다, 전하. 달리 생각하는 것이 더 어렵지 않습니까? 시기가 너무 맞아떨어집니다!”

레펠이 도난당할 뻔했고 제국은 전쟁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이보다 더할 수 없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팰리슈와 에스타냐, 하이듀크는 아주 당연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가. 그 얼굴들에 쓰인 글자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아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리스는 차마 내뱉지 못할 착상을 떠올리고 말았다. 레펠 도난 미수와 제국의 첩자, 거기다 태진의 실종, 제국의 전쟁 준비. 결코 이어져서는 안 될 소재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것은, 이어 나가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아리스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아아, 아아아!”

국왕의 집무실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아리스는 소리쳤다. 친구의 반응을 보며 아서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눈치 챘구나, 아리스. 그래, 그게 진실이야.”

그리고 모두가 눈치 챘다. 이들 중 머리가 나쁜 축에 속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 중에서는 둔하기로 평가받는 팰리슈도 그 소재들을 연계해 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아리스, 아직 못 믿겠어?”

몸을 떠는 아리스. 아서는 단언했다.

“강태진과 저 제국의 첩자는 같은 편이야.”

아리스는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했다. 예의를 갖추는 것도 잊어버리고 단숨에 집무실을 뛰쳐나간 그녀는 한달음에 미소 족이 갇혀 있는 특별 감옥까지 달려갔다.

날아갔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 만한 속도로 나타난 아리스에게 간수는 엉겁결에 열쇠를 쥐어 주고 말았다. 아리스는 문을 뜯어 버릴 듯이 열고 감옥 안으로 뛰어들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던 미소 족은 갑작스런 소란에 눈을 떴다. 그러고는 처음 보는 한 여자에게 멱살을 잡혔다.

아리스는 소리쳤다.

“태진 님을 어디로 데려간 거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소 족에게 던질 질문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서의 추측대로라면 미소 족이 태진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단지 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는 자신의 말실수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미소 족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리스는 다시 외쳤다.

“똑바로 말해요! 대체 태진 님을 어디로 데려간 거죠?”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듯 은안을 깜빡였다. 그러다 잠시 후 그 눈동자에 매서운 빛이 감돌았다.

“그 말은, 지금 현신의 전사가 왕성에 없다는 의미인가?”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태진 님을 대체 어디로 납치해 간 거죠!”

아리스는 아직도 믿고 있었다. 아마 이 상태까지 와서 아직도 태진을 믿고 있는 것은 단순한 맹신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는 믿고 있었다. 태진이 로츠왈드를 배신한다고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진 님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기 위해 제국에서 당신을 보낸 거죠! 그렇죠? 그렇다고 대답해요!”

“……이봐, 진정해라.”

포로가 된 입장인 미소 족이 오히려 아리스를 진정시켰다. 그의 멱살을 붙잡은 채 씩씩대던 아리스는 뒤늦게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황급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선다.

“미, 미안해요. 제가 무슨 짓을.”

죄수라고 하더라도 손을 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짓을 벌이다니. 태진의 부재가 그녀의 정신력을 궁지로 내몰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아리스는 자신을 진정시켰다. 냉정해야 한다. 어느 때고 냉정을 잃지 않았던 태진처럼.

이 자리에 없는 그를 떠올리자 어느 정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차분했던 원래의 그녀로 돌아온 후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제국의 간첩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아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 왕국에 있는 레펠을 훔치기 위해 숨어 들어온 거겠죠. 그렇지 않나요?”

“잠깐.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마라. 지금 뭐라고 했나. 전쟁이 시작된다고?”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제국의 국경 부근에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첩보를 방금 받았으니까.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망할. 이런 것이었나. 이럴 작정이었던가, 이 황자!”

씹어뱉듯 소리친 미소라가 눈을 들었다. 아리스는 새삼 그의 눈동자가 청아하게 은색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진이라는 건 현신의 전사의 이름이었지, 아마. 지금 그가 사라진 건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있긴 있었군. 실종이라도 된 건가?”

“끝까지 발뺌하는 거군요. 당신이 데려갔잖아요! 실종으로 조작해서 그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웃기지 마라. 난 현신의 전사를 만난 적도 없다. 보름 전까지 제국에 있었던 내가 그를 납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무죄를 주장했다. 당연하다. 정말로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아리스는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이미 간첩이라고 잠정적으로 결판이 내려진 상대를 신뢰할 리가 없다.

아리스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물론이다. 믿지 않을 테지만 나를 믿어라.”

그의 눈동자도 유동이 없었다. 아리스는 앉아 있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꺾이지 않는 두 눈빛이 허공에서 얽히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 공간을 부수고 들어온 것은 아서였다.

“속지 마, 아리스. 다 거짓말이야.”

아서의 목소리에 아리스는 눈을 돌렸다. 잠깐 흥분하여 감옥까지 날아와 버린 그녀를 쫓아 아서와 팰리슈, 하이듀크까지 와 있었다.

팰리슈의 무언의 허락을 받은 뒤 아서가 앞으로 나섰다.

“미소 족, 이름이 뭐지?”

미소 족의 청년은 잠시 망설인 뒤 답했다.

“……미소라다.”

“미소 족의 전통적인 이름이군. 미소라. 우린 네가 제국의 간첩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강태진과 짜고 이번 사건을 모두 획책했다는 사실도.”

크게 뜬 눈으로 아리스는 아서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시야에서 배재한 채 아서는 이야기했다.

“시작은 아마 평화 회담이었겠지. 아리스와 난, 너와 강태진이 성 뒤에서 만나 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어. 아리스, 그날 밤 네가 본 것은 투신의 전사가 아냐. 바로 이자였던 거야.”

“뭐…… 라고?”

“그때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런 것이었겠지. 제국측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니까 강태진, 그가 왕국에 잡혀 있는 제국의 간첩을 탈옥시키고, 그 사이 네가 왕국에 침입하여 레펠을 훔쳐 내야 했던 거지. 그렇게 약속을 한 후 강태진은 왕국으로 돌아왔고, 넌 제국으로 가는 척하며 왕국에 숨어든 거야.”

아서의 설명은 거침이 없었다. 마치 몇 번이나 연습한 듯 그 입에서는 망설임 없이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

“계획은 순조로웠어. 강태진은 약속대로 맥스일 백작과 녹산을 탈옥시켰지. 그리고 사건을 열심히 수사하는 척하다가 때를 봐서 왕성에서 자취를 감추었어. 바로 네가 마법사단에 침입한 그날 말이야. 레펠을 훔친 뒤 만나 국경을 넘으려는 수작이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날 너는 임무를 실패하고 말았어. 레펠은 건드려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거기다 도망치다 중간에 나랑 마주쳐 버린 거야. 그날 밤, 기억하지? 나와 싸우다 넌 가면을 흘리고 갔어. 그 가면을 우리는 증거품으로 가지고 있다.”

팰리슈와 하이듀크, 그리고 아리스까지. 모두가 아서의 설명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야기의 청자인 미소라뿐이었다.

“그렇게 도주한 넌 다시 잡힌 녹산은 버리고 강태진과 맥스일 백작과 함께 국경을 넘으려고 했어. 그러나 그러다 수비대에 발각되어 너만 잡힌 거지. 다른 두 명은 운 좋게 도망쳤을 테고 말이야. 어때,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 중에 하나라도 틀린 게 있어?”

“……놀랍군.”

미소라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굳었다. 설마? 동시에 하나의 글자를 떠올린 순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틀렸다. 놀랍다. 우리 미소 족의 이야기꾼들보다 훨씬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내는군.”

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놀리는 거냐, 이놈!”

“진실을 말해 주지. 난 그 현신의 전사랑은 회담에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내가 국경을 넘어서 왕국까지 온 이유는 미연이 왕국으로 가 태진을 만나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미연이 직접 오지 않고 나를 보낸 이유가 뭔지 아나?”

이때 고요하기만 했던 미소라의 말투가 처음으로 격해졌다.

“미연이 지금 카알트라즈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서! 그녀가 나를 이곳에 대신 보낸 거란 말이다!”

미연이 듣는다면, 미소라가 큰 소리 내는 거 처음 듣는다고 난리 피울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그 기세는 진심이었기에 왕국인들이 한순간 굳었다.

“지금 미연은 위험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신의 전사뿐이다. 나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서, 이곳까지 미친 듯이 달려온 거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제국의 간첩이라고? 왕국에는 뚫린 입이면 마음껏 떠들어도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건가!”

“……거짓말은 작작 해라!”

아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가 이 황자의 호위 부대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어! 카알트라즈라는 동부 반란군의 요충지. 토벌이라도 하러 갔나? 거기서 위험에 빠졌다면 왕국이 아니라 황성에 먼저 알리는 것이 순서 아닌가?”

“그럴 수 있었다면 당연히 했다. 허나 이 황자는 미연과 현신의 전사가 만났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래서 일부러 카알트라즈 토벌에 일부러 우리를 보낸 거다. 둘 중 어느 쪽이 파괴되든 자신에게는 이득이니까.”

“이 황자가…… 미연 님을 버렸다는 뜻인가요?”

미소라의 은안이 아리스에게로 넘어왔다.

“그렇다. 그 이유는 방금 들은 전쟁 때문이겠군. 미연이 황성에 있다면 전쟁 따위 찬성하지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든 말리려고 했겠지.”

태진이 있는 왕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 아주 당연한 말이었다. 미연이라면 그 목적으로 위해서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위험 분자가 될 테니 아예 처음부터 배제했다는 거군요…….”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가 날카롭게 아리스를 노려보았다.

“넘어가지 마. 지금 이자가 수를 쓰고 있는 거다.”

“그럼 이게 거짓말이라는 거야?”

“진실일 리가 없잖아? 제국의 첩자다. 그런 자의 말을 어떻게 믿지?”

“하지만…… 아, 아버지! 아버지도 믿지 않으시나요?”

아리스는 눈을 돌렸다. 지목당한 하이듀크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분명히…… 첩자라고 의심한다면 그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구나, 얘야.”

“전하! 전하께서는―”

“나도 동감이야, 아리스. 지금은 오히려, 아서의 주장 쪽이 훨씬 설득력 있어.”

아서는 단호한 얼굴로 아리스에게 돌아섰다.

“아리스, 현실을 인정해. 첩자의 말을 믿겠어, 아니면 너와 함께 지내 온 이 친구의 말을 믿겠어?”

아서는 24년 동안 함께 지내 온 친구이자 동료였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처음 본 미소 족이다 원래는 제국의 소속이었던 포로.

입장상으로 보자면 누구를 믿는지는 뻔할 뻔 자였다. 망설임 없이 아서를 선택해야 옳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러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 선택에는 단순히 범인을 골라내는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니까.

결정하는 대신 아리스는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고민하던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이 빛났다.

“차라리 내가 태진 님을 찾아오겠어! 찾아서 직접 물어볼 거야!”

그렇게 선언하고 그녀는 감옥을 뛰쳐나갔다.

***

정신을 차리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히 깨어 있었는데 어느새 다시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고 나서 불현듯 눈을 떴다.

벽면에 쓰러진 채 있는 자신의 모습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온몸이 찌뿌듯했다. 잠이 든 건지 말 그대로 기절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체 며칠이 지난 거지? 태진은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빵과 우유를 먹은 기억이 났다. 별다른 맛도 없는 밋밋한 빵과 적당히 시원한 우유. 그러고 나서 벽에 기댄 채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했다. 범인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상 범인이고 뭐고 잡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오감 중 세 가지가 봉인되고 손발도 묶인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심한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 후가 뚝 끊겼다.

어느 순간 다시 눈을 떴고, 그리고 지금이었다.

약인가. 빵이나 우유 안에 약이 들어가 있던 것이다. 향도 없고 맛도 없는, 수면제 같은 약이. 태진은 그것을 먹고 실신하듯 잠에 빠졌고, 며칠 지났는지도 모를 이 시간에 깬 것이다.

상황 파악은 이걸로 끝이 났다. 하지만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였다. 이렇게 묶인 채 여기를 빠져나가야 된다는 문제.

처음부터 생각해 보자. 여기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태진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오감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두 손과 다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만 해결되면 이런 방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다.

그에게는 지혜가 있다. 이용할 수 있는 두뇌도 있다.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 생각 중에,

태진은 깨달았다. 요새 워낙 사건이 폭풍처럼 몰아닥쳐서 잠깐 잊고 있었지만, 두뇌 말고도 그에게는 또 다른 힘이 있었다.

마법. 태진은 마법을 터득했다. 그것도 대륙 유일의 공간 마법사가 되었다.

머릿속으로 이론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론은 완벽했다. 좌표 구성부터 차원 방정식의 계산까지. 몇 초 만에 간단히 해낼 수 있었다.

몸 안에 내재된 마력핵도 여유가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는 세 개의 마력핵. 충분히 응축된 양으로, 원소 마법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마력을 소비하는 공간 마법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태진이 완벽하게 터득한 공간 마법은 하나였다. 가장 쓸 만하다고 여긴 공간 이동 마법. 지구에 돌아갔을 때 다른 건 몰라도 이 마법만은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간 이동에 필요한 것은 과학에서 말하는 블랙홀과 화이트홀, 쉽게 말하자면 입구와 출구였다.

차원 방정식에 의거해 각각의 좌표를 설정하여, 입구를 만든 다음 마력을 흘려보내 출구를 만든다. 높은 급수의 공간 마법사란 이 좌표 계산을 해내는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고 레펠에는 적혀 있었다.

태진 같은 경우 좌표 계산은 시작하는 순간 끝이 난다. 그렇기에 그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공간 이동 마법에 상당히 익숙해지지 않으면 공간을 통과하는 동안 일그러짐에 휩쓸릴 수 있다.

그랬다간 약한 인체 따위 발기발기 찢어져서 공간의 틈 안에서 분쇄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죽는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처음인 태진이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도 도전이었고, 거기다 직접 그 마법을 통과한다는 것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태진은 마음을 정했다. 하지 않으면 지금과 바뀌는 바가 없다. 도전을 해야 무엇을 이루든 말든 결과가 나타나는 법이다.

하지 않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 그래서 태진은 결정했다.

일어나기 힘드니 굴러서 공간을 통과해야 했다. 바닥에 누운 사태로 마력핵을 움직였다. 좌표를 모두 계산하고, 최소한 지금 갇혀 있는 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 적절하게 출구를 정했다. 이러다 벽 한중간에 걸리면, 그것도 골로 가는 거였지만 길게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 몸 위에서 마력핵을 꺼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을 열려는 그때, 태진은 완전히 간과하고 있던 한 사실을 깨달았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이는 곧 주문을 영창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주문이란 마력에게 말을 거는 행위였다. 이러이러한 현상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하는 문장이었다. 그것을 행하지 못한다면 마법은 무효가 된다. 마력핵은 파괴된 채 다시 세계로 스며든다.

주문을 말할 수 없다니. 결국 마법 사용은 애초부터 틀린 문제였다.

태진은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틀렸다. 이래서는 정말 가능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이렇게 묶인 채 누군가가 구해 주길 기다려야 하나?

끼익―

문소리가 들린 건 벽에 머리를 박으며 무력한 자신을 한탄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와 태진의 앞에 섰다.

태진은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그래서 신음이라도 내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자가 손을 뻗어 태진의 다리를 붙잡았다.

뭐지? 하는 순간 다리가 자유가 되었다. 묶여 있던 끈이 툭 끊긴 것이다. 발목을 옭아매던 압박감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누군가의 존재가 빠르게 사라졌다. 문밖으로 빠져나가는 발소리가 바쁘게 들려왔다. 문도 열린 그 상태였다. 누구지? 나를 구해 준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기 전에 우선 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다 문에 한 차례 부딪히고 나서야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픈 어깨를 문지를 새도 없이 달려 나간 문 밖. 지금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청각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귀마개로 인해 일반인 수준의 청력일 뿐이라 도움이 되기는 힘들었다. 그는 폼을 포기하고 조심스레 정면으로 걸었다. 곧 벽에 부딪혔고, 그 벽에 몸을 기댄 채 앞으로 나아갔다.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잠시 후 무언가가 허리춤에 부딪혔다. 쿵 하고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땅바닥을 뒹굴어 버렸다.

“흐으…….”

재갈 사이로 가늘게 새어나오는 신음이 스스로 듣기에도 처량했다. 그러나 다시 재갈을 악물고 일어섰다.

눈가리개를 넘어 시야에 흐릿한 빛이 느껴졌다. 우선은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환한 빛 아래로 나왔다. 계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쓰러질 뻔하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낮이었는지 바깥은 사정없이 밝았다. 태진은 이능을 시력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 뿌옇게 번져 시야를 구분해 내기에는 어려웠다.

할 수 없다. 이대로 그냥 가는 수밖에.

무언가에 부딪히든 말든 태진은 우선 무작정 앞으로 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바람이 불어와 흙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주변은 풀 냄새가 그득했다. 그는 흙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몇 번이고 넘어지고 담장에 부딪힌 후에 큰길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구원군이 등장했다.

“누구냐!”

굵직한 호통. 그리고 뛰어오는 발소리.

자신을 잡아 가둔 이는 아니었다. 구해 준 이도 아니었다. 태진은 아무튼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이자는 그 정보부의……?”

“잠깐, 수배자 강태진 아냐?”

두 명의 목소리 중 하나가 태진의 눈가리개를 확 풀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은 태진의 얼굴을 뜯어 보며, 기동대 소속의 기사는 확신했다.

“이자야. 수배지의 생김새하고 똑같아!”

그들로서는 정말 최고의 공이었다. 왕성을 발칵 뒤집은 사건들의 범인을 붙잡은 것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떡을 받아먹은 것과 같은 수준의 우연이었지만 그들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기뻐했다.

“어서 대장님께 알리자고! 어디 계시지?”

“특별 감옥 쪽으로 국왕 전하하고 같이 가셨다고 들었어. 거기로 가지!”

눈가리개는 풀렸지만 재갈은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팔도 묶인 그대로 태진은 이번에는 특별 감옥으로 연행됐다.

두 기사는 태진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격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었지만 재갈에 모두 먹히고 말아 통하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린 채 태진은 기어코 특별 감옥까지 끌려갔다.

아리스가 태진을 발견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특별 감옥을 뛰쳐나오던 그녀는 태진을 붙잡은 기사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태진 님!”

기사들보다 아리스는 뒤쪽의 태진을 먼저 발견했다. 그는 초췌한 몰골로 사지가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재갈과 밧줄을 풀어요! 어서!”

“아, 아리스 님! 허나 이자는 죄인입니다!”

“책임은 내가 집니다. 상급자의 명령을 무시하겠다는 건가요!”

아리스의 명령에 기사들은 결국 굴복했다. 서둘러 재갈과 밧줄을 풀어 태진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 후 아리스는 두 명의 기사를 내쫓듯 보내 버렸다. 공을 빼앗겼다는 기분에 그들은 툴툴거리며 감옥 앞을 떴다.

손목을 매만지며 태진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리스. 덕분에 아픔을 덜었습니다.”

“지금 그런 말할 때가 아니에요! 태진 님, 대체 그동안 어디 계셨던 거죠?! 왕성이 난리가 아니라고요!”

“저도 사라지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죄송합니다. 그동안 또 무슨 일이 터진 겁니까?”

“무슨 일이다마다요!”

아리스는 요점만 간추려 이야기를 전했다. 지금 태진이 모든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태진은 오히려 평범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과연, 그래서 수배령이 내려졌었군…….”

“그렇게 속 편한 일을 할 때가 아니에요! 거기다 지금, 미소라라는 자가 와 있다고요!”

“미소라?”

태진의 기억 속에 있었다. 판게리츠 산맥에서 미연을 만나, 그녀를 도와 백두 부대의 부대장까지 되어 준 미소 족의 청년.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온 것은 솔직히 의외였다.

“그자가 왜 왕국에?”

“미연 님이 카알트라즈에서 위험에 빠졌대요. 그래서 그 사람을 보내 태진 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시켰다고 해요.”

“카알트라즈? 제국의 동부 반란군 최대 요충지를 말하는 겁니까?”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운스에서 그런 지명을 가진 곳은 단 하나뿐이었다.

태진은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이내 진정했다. 위험이라곤 하지만 큰일은 아닐 것이다. 미연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인간은 이 대륙에 몇 되지 않는다.

마음을 진정시키며 태진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좋습니다. 그자를 만나 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하, 하지만 태진 님! 지금 태진 님은 누명을―”

“그것도 직접 만나서 풀어야 할 일입니다. 팰이나 다른 이들도 모두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녀가 대답도 하기 전에 태진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리스도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아리스는 미소라의 감옥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미소라의 방에서 나와 있던 이들과 한꺼번에 맞닥뜨리는 장면이 연출됐다.

“미소라는 어디 있습니까.”

굳어 버린 팰리슈에게 태진은 인사도 생략하고 다짜고짜 물었다. 엉겁결에 팰리슈가 손가락으로 방을 가리켰다. 태진은 그들을 지나쳐 미소라의 감옥 안으로 달리듯 들어갔다.

“당신이 미소라입니까?”

“……현신의 전사인가. 실종이라고 하더니 어떻게 된 거지?”

“그것보다 미연이가 카알트라즈에 잡혀 있다니 무슨 말입니까?”

보름 가까이 감금되어 있다가 나온 사람치고 태진의 태도는 지나치게 쌩쌩했다. 미연의 위기라는 말을 듣자마자 지난 시간 동안의 고생은 모두 인지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미소라는 되도록 자세히, 그렇지만 요점만 골라 처음부터 이야기했다. 카알트라즈 토벌이 시작되고 미연이 반란군들의 함정에 빠져 잡힌 뒤, 미소라만이 탈출하여 왕국으로 왔다는 이야기까지 끝내자, 태진의 전신은 말없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 황자의 계략이라는 겁니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의심은 있어. 미연이 눈엣가시가 된 것은 분명하다.”

“카알트라즈와 내통…… 하고 있을 가능성은 낮겠군요. 결국 미연이가 반란군에 잡힌 것은 황성과는 관련 없는 일. 반란군의 사정이기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미연이는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까?”

“아마도.”

태진은 호흡을 다듬었다. 이야기를 듣던 중 어느 순간 호흡이 격해져 있었다. 그것을 본래대로 되돌리고 태진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 이야기는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미소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리트미소의 존재를 걸고.”

미소 족의 첫 번째 마을인 리트미소. 미소 족에게 있어서 그곳은 성지와도 같았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감옥 밖으로 나서자 이제야 정신을 차린 팰리슈와 하이듀크가 태진에게 달려오려 했다.

그러나 아서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전하, 이자는 대역죄인이옵니다.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팰리슈를 보호하듯 돌아선 아서의 날카로운 눈이 태진을 향했다. 태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강태진, 당신은 첩자 혐의로 체포합니다.”

“……증거는?”

“줄줄이 있습니다. 여기서 가르쳐 드립니까? 문이 열린 흔적도 없는 감옥에서 죄수를 꺼낼 수 있는 건 공간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회담에서 만난 저 미소라라는 자와 역모하여 두 명의 첩자를 탈옥시키고 레펠을 훔쳐 달아나려 했습니다. 이미 그 죄는 사형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태진은 나지막이 말했다.

“훌륭한 추리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빈약합니다. 어떤 속임수를 써서 감옥 안에서 탈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 속임수가 뭡니까?”

“조사해 보면 알 겁니다.”

아서는 훗 하고 조소를 떠올렸다.

“내가 단지 그런 추측만으로 이럴 것 같습니까?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탈옥수 본인, 녹산! 녹산은 당신이 마법으로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 주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래도 발뺌할 생각입니까!”

태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가 체포한 자를 왜 내가 탈옥시킵니까!”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죠, 강태진. 자, 순순히 포기하십시오. 일련의 사건을 벌이고 저 미소 족과 같이 도망치려 하다 저자만 혼자 잡혀서, 다시 왕성으로 돌아온 것 아닙니까?”

“결코 아닙니다! 아서, 당신과 만나기로 한 그날, 난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기절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왕성 안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다가 탈출했습니다. 도망친 적은 절대 없습니다.”

“자신이 꾸민 것이겠죠. 도망에 실패를 했으니 어떻게든 의심을 벗고 돌아올 방법이 필요했을 테니까. 안 그렇습니까?”

아서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주장을 완벽하게 펼치고 있었다. 태진으로서는 곤혹스러웠다. 기동대장으로서 언제나 자신을 도와주던 자가 이젠 적으로 돌아서 있던 것이다.

태진은 눈을 돌렸다.

“팰.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미연이가 위험합니다. 하루 빨리 구출하러 가야 한단 말입니다.”

팰리슈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진은 답답한 듯 소리쳤다.

“구출대를 조직해 주십시오. 카알트라즈로 미연이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서가 팰리슈의 말을 막고 대답했다.

“전하, 제가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강태진이 나타나면 분명히 처음부터 제국으로 갈 거라고 주장한다고. 제가 드린 말씀 그대로지 않습니까?”

그는 태진을 직시했다.

“강태진, 그런 핑계로 미소라와 함께 제국으로 갈 생각인 모양인데, 이미 그 계획은 틀렸습니다.”

“핑계라니, 미연이가 위험하단 말입니다!”

“우리 왕국도 위험해, 태진.”

팰리슈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중간에 끼어 양쪽을 번갈아 보던 아리스도 팰리슈가 꺼낼 말을 짐작하고 불안한 얼굴을 만들었다.

“이 일은 제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냐. 지금 제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

“……전쟁?”

태진조차도 무심코 말을 내뱉고 말았다. 팰리슈는 흔히 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국경 지대에 부대를 배치하고 있어. 이것은 명백히 우리를 향한 도발 행위야.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병력은 집결하고 있을 테지.”

“…….”

“그러니까 지금 네가 국경을 넘겠다는 발언은, 제국의 간첩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일밖에 안 돼.”

태진은 납득했다. 그렇다. 어느 모로 보나 아서나 팰리슈의 말이 옳았다. 의심의 초점은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데 국경을 넘겠다니. 그것은 스스로 자백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진은 가야 했다.

“난 가야 합니다, 팰. 극소수라도 괜찮습니다. 제발 구출대 조직을!”

“……그러지 마. 네가 계속 구출대를 요청해 오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단은 하나밖에 없어, 태진. 내가, 그 결정을 내리게 하지 마, 태진.”

“팰……!”

아서와 아리스, 하이듀크가 지켜보고 있다. 태진의 눈은 난생 처음 보는 절실함을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만큼, 팰리슈는 뼈아프게 결행했다.

“아서, 태진을 체포해.”

“예!”

기다렸다는 듯 아서의 팔이 태진을 옭아맸다. 힘으로는 그를 당할 수 없는 태진이지만 그는 몸을 흔들며 격렬히 저항했다.

“팰!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미연이가! 차라리 나 혼자서라도 미연이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

팰리슈는 슬픈 얼굴로 돌아섰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아리스가 팰리슈를 붙잡았다.

“전하! 태진 님, 태진 님이 그럴 리 없어요! 재고해 주세요!”

“아리스, 그만하려무나.”

그녀를 말린 것은 하이듀크였다. 아리스는 아버지의 가슴팍을 부여잡고 울음 섞인 항의를 외쳤다. 딸을 부둥켜안은 채 하이듀크는 속삭였다.

“이 아버지도 슬프단다. 하지만 우선은 진실을 밝혀야 해. 그러기 위해서라도 태진이 제국으로 가 버리면 안 된단다. 이해해 주렴.”

상냥한 아버지의 말에 아리스는 기어코 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안은 채 하이듀크는 고개를 들었다.

소리조차 치지 못하는 태진. 생소하기 짝이 없는 감정적인 그가 아서에게 붙잡힌 채 감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미안해, 친우. 조금만 참아 줘.”

하이듀크는 이 사건의 이면을 반드시 찾아내리라고 결의했다.

“절대 눈을 떼지 말도록. 마법을 사용할 줄 아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기절이라도 시켜. 무력에는 약하다.”

결코 용서가 없는 언질을 남겨 놓고 아서는 특별 감옥을 나갔다. 간수는 잔뜩 긴장한 자세로 태진의 감옥 앞을 계속 왕복했다.

태진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절망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당했다. 완전히 당했다. 더 이상 다른 말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당했다. 회담이 끝났을 때부터 이 덫은 철저히 준비되어 온 것이었다. 그것도 태진 혼자만이 아닌 미연까지 범위에 넣은 거대한 덫이.

미연이 카알트라즈에 붙잡힌 것도 태진은 별개로 보지 않았다. 말 그대로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불리하도록 사건이 작용한 것처럼, 미연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을 확신하게 해 준 증거와 태진은 곧바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거, 이거, 반갑구먼.”

혼자 있는 감옥에 뭔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잠깐 둘러보던 태진은 벽면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근처로 갔을 때 음성이 다시 날아왔다.

“나를 꺼내 준 특사대장을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먼, 이거.”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 게다가 말의 내용으로 태진은 목소리의 주인을 간파해 냈다.

“녹산…… 아르바나 단의 두목입니까.”

“기억해 주시는구려. 난 또 날 꺼내 놓고 사라졌기에 까먹은 줄 알았지.”

벽 저편에서 녹산이 이죽댔다. 태진은 호흡을 깊게 삼켰다.

“왜 그런 누명을 씌우는 겁니까. 대체 무엇을 위해서 거짓 증언을 했습니까?”

“무엇? 무엇이라. 글쎄, 나도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단지 네놈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협력하고 있는 거거든.”

이번에는 말을 삼켰다. 명확한 적의가 벽 너머에서 넘실넘실 넘어왔다.

“얌전히 거기 처박혀 있는 게 좋을 거야. 애인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들었잖나. 네 애인은 지금 카알트라즈에 잡혀 있다고. 구출하려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알겠어?”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지금 이 사태는 태진과 미연, 둘 다에게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누군가가 제국과 연계하여 자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다.

태진은 기어코 자각했다. 눈치 채지 못한 거대한 악의가 점점 그의 주변을 뒤덮어, 급기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더욱 무서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태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침대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태진은 부서질 듯 어금니를 깨물었다.

“미연아……!”

(히어로즈 리턴 완결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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