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즈 리턴 5권(완결)
스물여섯. 경계할 거 없어
“킬킬킬.”
옆방에서 계속해서 소음이 들려온다. 마치 들으라는 듯, 그렇다고 크게 웃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작게, 숨죽이며 웃는 소리가 전해져 온다. 태진은 벽을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것을 가까스로 눌러 참으며 그는 침대에 다시 앉았다.
두 손을 감싸 쥔 채 이마에 대고 눈을 감는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평정을 잃어선 안 된다. 미연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이 좁은 하늘 아래 분명 태진 하나뿐이었다. 미연이 국경을 넘어서까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 태진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아서가 태진을 감옥에 처박고, 옆방의 녹산이 흉흉한 말을 꺼낸 것은 바로 좀 전의 일이었다. 미연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그 뒤의 무언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방금 전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뭐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태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억누르며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냉정한 성격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미연이 위기라는 말만 들은 것으로 이렇게 평정을 잃는 자신이 어딜 봐서 냉정하다는 걸까. 가끔 미연도 태진에게 차갑다거나 냉정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하지만 그는 부정하고 싶었다.
난 아직 멀었어.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한동안 끊겼던 녹산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어이, 이봐. 현신의 전사 씨. 아까부터 대답이 없는데 말야. 듣고는 있는 거지? 들리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목소리는 이어졌다.
“흥, 그래. 내가 멋대로 떠들어 주지.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 뒤에도 네놈이 있던 거지? 그년의 행동이 이상했어. 루위스에 다녀갔다는 풍문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말야. 묘하게 우리 아르바나단에 관해 조사하려는 낌새를 보이더군. 우리의 정보는 거기에서 얻어 낸 거지? 그렇지?”
잘 알고 있군. 태진은 속으로만 대꾸했다. 그 말 그대로다. 잠입했던 로티아가 보내오는 정보 외에는 키드카가 출처였다.
그 정보를 토대로 아르바나단의 규모와 활동 범위 등등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녹산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좀 더 일찍 눈치 챘어야 하는데 말야. 돌아왔을 때 루이티라는 잡것이 들러붙어서 신경을 썼는데. 젠장, 생각하니 또 열불이 쳐 오르는군.”
그의 말투 속에 다시 악의가 감돌았다.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개자식. 그땐 나도 뒤따라 네놈을 쫓아가서, 네놈의 목을 이 손으로 직접 따 줄 테니까. 알아 처먹었냐.”
“그럼 그전에 미리 죽이지 그랬습니까.”
태진은 어느새 다시 일어서 있었다. 녹산의 방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하는 그의 어조는 매우 차분했다.
“기회는 많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 그렇다면 조금만 조작해서 당신이 나를 직접 처단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가 방해가 된다면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게 더 손쉬울 텐데도 이렇게 감옥에 가두는 걸로 끝을 냈습니다.”
어느새 그는 본래의 현신의 전사로 돌아가 있었다.
“대체 목적이 뭡니까?”
“……죽이고 싶었다. 누구는 죽이고 싶지 않겠냐.”
둘 다 무서운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는다.
“그렇지만 그가 죽일 수는 없다고 했다. 살아 있는 상태로 절망에 빠뜨리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참은 거다. 복수란 꼭 죽인다고 성사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거기다 지금 그 모습이 제법 네놈한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나?”
녹산은 마음 놓고 이죽거렸다.
“믿고 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여 그 좁은 감옥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 보기 좋군. 아주 좋아!”
태진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확실히 이 상황, 좋지 않다. 저런 조폭 나부랭이한테 비웃음 당할 만큼 제대로 당했단 말이니까.
그렇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지금 녹산은 아주 훌륭한 실수를 해 주었다. 그가 꺼낸 말 중에 좋은 힌트가 숨어 있었다. 이 사건을 꾸민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약하지만 중요한 힌트. 어차피 심증은 있었고, 나머지는 그것을 이 몸으로 증명해 내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다. 이 감옥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계속해서 조소해 대는 녹산의 음성이 최대한 지워지도록 감옥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침대를 끌어 올까 생각하다가 그냥 작은 나무 의자를 구석에 놓고 앉았다.
벽 자체는 허름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귀족용 감옥이기에 공간 자체는 제법 넓었다. 덕분에 녹산의 목소리는 이능을 깨우지 않는 한 제대로 내용을 알아듣질 못할 정도로 작아졌다.
“탈출.”
낮게 읊조리며 태진은 고심했다. 지금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 마력핵은 아직 두어 개 정도 남아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한정되어 있다.
벽을 뚫고 바깥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다. 철문을 뚫고 밖으로 나가도 간수를 쓰러뜨릴 방법이 없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별이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없다. 작은 쇠창살 사이로 내려오는 달빛만이 아주 조금 감옥을 비출 뿐이었다.
차라리 공간단절 마법으로 쇠창살을 끊어 내고, 죽든 살든 밑으로 뛰어내려 볼까? 여기가 몇 층이었지? 5층 높이던가?
그런 일관성 없는 대책들을 주르륵 머릿속으로 나열하고 있던 그때, 새로운 음성이 벽 너머에서 전해져 왔다.
“내 목소리, 들리나.”
녹산의 반대쪽 방. 역시나 태진의 옆방에 갇혀 있는 미소라였다.
태진은 잠시 그의 외형을 떠올려 보며 목소리를 조절했다.
“들립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독방이지만 이래선 전혀 독방이 아니군. 태진이 속으로 중얼대는 사이 미소라는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왜 미연을 왕국으로 데려가지 않았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이 돌아왔다. 태진은 잠깐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대답하기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미연이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리트미소에서 만난 이후 같이 여행을 한 사이다. 그리고 수도에서는 얼떨결에 그녀의 부하가 되었지.”
“그렇다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미연이와 함께 지내 오면서 그녀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좀 아시겠군요.”
“음.”
애매모호한 답변이었으나 태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왕국으로 데리고 오려고 했어도 그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태진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미연이는 그런 아이입니다. 자신이 제국에 있는 편이 지금 우리에게 더욱 이점이 있다고 여기기에, 그래서 내가 같이 가자고 말했어도 오지 않았을 아이입니다. 물론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결정했을 테지만.”
“넌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예. 그리고 내가 묻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미연이 또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 그것은 태진과 미연에게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었다. 얼마나 떨어져 있든 서로가 생각하는 것을 서로가 자연스럽게 알아차린다.
“우린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가 할 일이 있습니다. 무사히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그렇지만 제국에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이다. 위험할 텐데.”
“미연이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미소라라고 하는 실력 좋은, 그리고 믿을 수 있는 미소 족의 숲지기가 옆에 있다고 하더군요.”
“……미연이?”
“네. 미연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당신을 믿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다. 태진다운 결정이었다.
“냉정하군.”
“자주 듣습니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인 건지 미소라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태진은 서두르지 않고 뒷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정적이 깨졌다.
“그래도 구하러는 갈 테지.”
미소라의 한마디. 태진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럼 잠시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을 만들어라.”
태진은 무심코 벽을 뒤돌아보았다.
“너 정도의 머리라면 어떤 방식이든 생각해 낼 수 있을 거다. 잠깐의 틈이면 된다. 그럼 내가 이 감옥을 빠져나가서 너도 꺼내 주겠다.”
태진은 녹산에게까지는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확신했지만 좀 더 긴장 어리게 음성을 낮췄다.
“빠져나갈 수 있는 겁니까?”
“불가능하진 않다.”
“그럼 왜 그동안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손발이 묶여 있을 미소라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불안감도 담겨 있지 않은 어투로 당연스레 대답했다.
“너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미연이 그에게 부탁한 일은 태진을 만나 도움을 요청할 것. 그가 완수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한 채 궁지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의 논리는 그랬다.
태진은 묘하게 벽 너머의 남자가 맘에 들었다. 미연이 미소라의 얘기를 꺼낼 때 왜 그렇게 즐거운 얼굴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빠져나가진 못하지만 소란을 일으키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힘만 있다면 부수고 소음이 일어날 물건들이 감옥 안에는 제법 많으니까.
태진은 우선 앉아 있던 나무 의자를 한 손에 붙잡고 문으로 척척 다가섰다. 그 사이 옆방에서는 미소라가 이미 사지를 구속하고 있던 밧줄을 모두 풀어낸 상태였다.
작은 창으로 문밖을 살핀 뒤 호흡을 가다듬고 팔에 힘을 넣는다. 그러다 한 팔보다는 두 팔이 안정적이라는 생각에 두 손으로 의자를 붙잡았다.
“흡!”
숨을 들이마시며 철문을 향해 의자를 부닥치려는 그 순간.
“……태진 님!”
작은 창 밖에서 익숙한 얼굴이 쑤욱 올라왔다. 자세를 낮추고 있었던 듯 밑에서부터 솟아 올라온 그 얼굴에 태진의 행동이 한순간 정지했다.
“아리스?”
심야. 특별 감옥에 숨어든 인물은 다름 아닌 아리스였다.
태진이 감옥에 갇힌 후 팰리슈는 더 이상 감옥에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아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의 뒤를 따라 하이듀크와 아서마저 떠나 버리고 잠깐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던 아리스도 재빨리 감옥에서 뛰어나갔다.
계단 중간에서 팰리슈를 붙잡은 그녀가 소리쳤다.
“전하! 이건, 이건 뭔가 이상해요!”
앞을 막아선 아리스의 눈길을 팰리슈가 옆으로 피했다.
“태진 님이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니, 간첩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리스.”
고개를 돌린 채 팰리슈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도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상황이 이래. 어느 모로 보나 태진의 행동은 의심할 수밖에 없어.”
실제로 아키메라 제국은 전쟁을 준비 중이다. 그 직전에 첩자였던 뮈인터트는 탈옥했고 그 혐의는 태진에게 있다.
이젠 미연이 위기에 빠졌기에 구하러 제국으로 가겠다고 한다. 이 상태에서 어느 누가 태진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
망설임 없이 믿고 있는 이는 로츠왈드 왕국 내에서 현재 아리스 하나뿐일 것이다.
“하, 하지만! 그렇지만!”
“그만해라.”
하이듀크가 무겁게 말했다. 팰리슈의 앞을 막아선 딸의 눈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지금 네가 항의를 해도 태진에게 도움을 줄 순 없어. 이미 결정된 일이다. 잠자코 있어라.”
“아버지!”
하이듀크의 얼굴도 창백했다. 팰리슈의 낯빛과 별달리 다를 것도 없었다.
그 얼굴을 보자 아리스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주장이 너무나 덧없게 느껴져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 있어라.”
아리스가 계단 옆으로 비켰다. 팰리슈와 하이듀크가 위험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리스는 고개를 들지도 예를 갖추지도 않았다.
아서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집에 가서 쉬어. 쉬면서 생각해 보면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지나치려는 아서를 아리스가 붙잡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뭘?”
“우리를 이끌어 주던 분이잖아. 그런 분을, 어떻게 첩자라고 몰아세울 수 있어?”
“아리스, 오해하지 마.”
아서는 다시 돌아섰다. 인자하기까지 한 표정을 떠올리고 아서는 말했다.
“내가 몰아세울 것이 아냐. 지금 상황이 그런 거야. 어느 누가 봐도 명백하게 강태진에게 혐의가 집중되어 있어. 물론 기동대장인 나에게 누군가의 죄를 증명할 권리 같은 건 없겠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니 내가 할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아서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아리스에게 살짝 웃음을 띤 채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어깨를 톡 쳤다.
“장관님 말씀대로 집에 가서 좀 쉬어. 남은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아서는 친절한 한마디를 남겨 놓고 그녀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팰리슈를 쫓아간 뒤 아리스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후우…….”
결국, 잠깐 계단 위를 올려다보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저택으로 돌아가 자신의 방에서, 아리스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풀썩. 들썩이는 침대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그녀는 한껏 늘어졌다.
뭔가 아무것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력함. 그것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맨 처음 태진을 만난 것은 자신이었다. 그 이후 태진의 존재감에 매료되었고, 그에게 인정을 받아 특사부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바로 곁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부심만으로 태진을 감옥 안에서 꺼낼 수는 없는 일이다.
태진에게 인정받으면 뭐 하는가.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도저히 떠오르는 바가 없었고, 자부심은 점차 자괴감으로 번져 갔다.
“……정말, 왜 이럴까, 난…….”
순찰대장이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이듀크의 추천으로 순찰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름 그 직무에 충실하여 점차 주변에 인정을 받아 갔다. 그땐 법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여겼다.
그 신념이 무너지고 있다. 자신의 무기였던 법이, 태진을 옭아매고 있다.
그럼에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태진 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어!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아리스는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아서의 말이 절로 떠올랐다. 내가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 어느 모로 보나 혐의가 태진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아리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태진을 아직도 믿고 있는 것은, 그렇다, 좋아하니까.
이미 인정한 사실이었다. 아리스는 태진을 좋아한다. 상사라는 사실을 넘어 남자로서. 그의 흔들림 없는 언동에 매력을 느낀 것은 예전부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은 좀 전이었고, 그 마음을 인정하고 나서 일은 터졌다.
좋아하는 남자가 위기에 빠졌는데도 부대장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면서도 슬픈 일이었다. 그냥 확 울어 버릴까. 울고 나면 진정될까. 이럴 때 울지 않으면 언제 울란 말이야. 자신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리면서 아리스는 울 준비를 끝냈다.
그때 불현듯 떠올랐다. 아주 근본적인 의문점이.
아서는 말했다. 모든 혐의가 태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것은 아주 이상한 말이었다.
아리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태진 님이 그럴까, 과연?”
누구보다 머리가 좋은 태진이다. 만약 일을 벌인다면, 이렇게 쉽게 혐의가 붙잡힐 계획은 애초에 세우지도 않을 것이다.
항상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실행하는 사람이 태진이다. 지금의 이 상황은 태진이 세운 계획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구멍이 많았다.
“왜 이걸 몰랐지!”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섰다. 새로운 깨달음. 온몸에 힘이 저절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태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자신이 가장 근본적인 오류조차 깨닫지 못하다니.
실격이다. 부대장으로서 실격이다!
“역시 그랬어. 태진 님은 아무 죄도 없어!”
아리스는 확신했다. 그녀만이 가능한 확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행동은 빨랐다. 현대 왕성에서 태진을 믿는 사람은 그녀뿐. 고로 도와줄 수 있는 것도 그녀뿐이었다.
“이대로 태진 님을 내버려 둘 순 없어……!”
시종이 들어오는 것도 막고 아리스는 고심했다. 이미 전 순찰대장, 특사부대장이라는 위치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단지 태진을 좋아하는,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한 여성으로서 아리스는 방법을 고심했다.
그리고 심야.
시종 몇 명만이 당번으로 잠을 들지 않는 저택 내를 아리스는 몰래 빠져나왔다. 일생에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정원의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고, 경비병이 없는 틈에 담을 넘었다. 곧장 왕성의 어둠 속을 달려 특별 감옥으로 향한다.
길을 알고 있고 경비병의 행동반경도 숙지하고 있기에 숨어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리스는 잠겨 있는 문에 노크를 하고 숨어 있다가 간수가 목을 내미는 사이 그의 눈을 가리고 쓰러뜨렸다.
“미안해요.”
안쪽에서 문을 잠근 뒤 간수를 도로 자리에 앉히고서 아리스는 발걸음을 죽이고 태진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다가갔다.
감옥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잠든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태진의 문에 다가섰을 때, 작은 창 안에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반가움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태진 님!”
“아리스?”
그가 놀란 얼굴을 만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리스가 이 감옥에 숨어들 줄은 태진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문 하나를 중간에 두고 안과 밖에서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의자를 내리고 태진이 다시 물었다.
“여길 어떻게?”
“간수가 잠들었더라구요. 구해 드릴게요, 지금.”
뻔뻔하게 말하는 태도는 태진에게 배운 것이다. 태진은 아무 말하지 않고 아리스가 문을 열어 주길 기다렸다.
간수에게 빼앗은 열쇠로 문을 여는 데 큰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대로 태진은 바로 옆방으로 향했다. 이미 문 뒤에서 준비하고 있던 미소라가 은안을 빛내고 있었다.
“아리스, 이 방도.”
“네?”
되묻는 아리스에게 태진은 낮게 설명했다.
“그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나와 같이 탈출해야 합니다.”
미소라를 두고 갈 순 없다. 당연한 것이다. 그 의지가 전해진 듯 아리스는 지체하지 않고 미소라를 감옥에서 꺼냈다.
밧줄로 길게 늘어뜨린 은발을 묶어 올린 미소라. 셋은 말도 없이 눈빛만으로 합의하고 몸을 돌렸다.
“이 자식들!”
그런 그들을 붙잡은 것은 녹산의 외침이었다. 문에서 가장 먼 위치에 있었지만 이 일련의 작은 소동을 바로 옆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감옥을 빠져나가도 제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냐! 웃기지 마라! 왕성을 벗어나기도 전에 너희들은 도로 잡혀 올 것이다!”
미소라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뒤로 고개를 돌렸다. 녹산과 눈을 마주친 그는 찔끔한 녹산이 입을 다물자 태진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 태진은 은빛의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읽었다. 잠깐 한숨을 짓고 아리스에게 지시했다.
“열쇠를 그에게 주십시오.”
무슨 영문인지 모를 얼굴의 아리스. 태진은 그녀의 손에서 열쇠를 꺼내어 미소라에게 넘겼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섰다.
“늦지 않게 오십시오.”
그 말을 남겨 놓고 그는 아리스를 데리고 특별 감옥을 빠져나왔다.
기절해 있는 간수를 지나쳐 문을 열고 나와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아래쪽으로 향하는 태진과 아리스. 아리스는 미소라가 신경 쓰이는 듯 계속 뒤를 확인했다.
“태진 님, 저 남자는 무엇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 들키지 않게 집중하십시오.”
평소보다 더 무거운 어조로 말한 뒤 태진을 입을 다물었다. 아리스도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바로 아래층에서 경비병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도중 미소라가 다시 그들과 합류했다.
떠났을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기에 아리스는 그의 심중은 도저히 읽어 낼 수 없었다. 태진과는 다른 의미로 속을 모를 남자임은 분명했다.
모두의 눈을 속이고 밖으로 나와 어둠에 몸을 숨긴 뒤 태진은 아리스에게 일렀다.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내일 우리의 탈출이 발각되더라도, 알고 있겠지만, 절대 모르는 척해야 합니다.”
“가, 같이 가겠어요!”
아리스는 작게 외쳤다.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왜요? 저는 그러기 위해서 태진 님을 구하러 온 거예요. 이런 왕성에는 더 이상 제가 있을 이유가 없어요!”
“왜 없습니까. 이곳엔 당신의 가족이 있습니다.”
태진은 침착하게 설득했다.
“하이듀크를 생각하십시오. 나와 함께 당신이 사라지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괜찮아요. 아버지도 결국 태진 님을 배신했으니까.”
“배신이 아닙니다. 하이듀크도 팰도,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 것뿐이니까.”
똑바로 아리스의 눈을 바라본다.
“남아 있으십시오. 당신에겐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예. 이곳에 남아 해 줄 일이 있습니다.”
시키지도 않았지만 미소라가 주변을 빈틈없이 경계해 주고 있었다. 태진도 이능을 열어 둔 상태였기에 주변 부담 없이 부탁했다.
“우리가 미연이를 구해 오는 동안 이곳에서 아서를 감시해 주십시오.”
“아서를요?”
또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아리스에게 태진은 거듭 강조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일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탈옥해도 당신에게 혐의가 넘어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십시오. 그리고 최대한 아서의 옆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감시해 주십시오.”
“아서가…… 아서를 왜요?”
“돌아와서 말해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잠깐 말을 끊고 태진은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이 왕성에서 당신뿐입니다, 아리스.”
그 말이 결정타였다. 아리스는 눈앞의 남자가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사람 다루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남자다.
직시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에 아리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잘 부탁합니다.”
그녀가 받아들이자 태진은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지금입니다. 이쪽으로 가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한번 보고 아리스는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부디, 꼭 돌아오셔야 해요.”
“맡겨 주십시오.”
아리스가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발소리를 죽이고 뛰어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 태진은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던 은안이 그를 마주 보았다.
“잘 처리했습니까?”
“저 여자에게는 말하지 않았나 보군.”
“아직 여린 면이 많은 여성이기에.”
“결국 내일이면 알게 될 일이다. 녹산이 죽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은 몰라도 될 일입니다. 그보다 이제 우리 차례로군요.”
아리스가 떠난 후 경비병이 감옥 주변을 순찰을 나왔다. 그들의 눈을 피해 어둠 깊숙이 몸을 숨겼다가, 인기척이 없어지자 태진과 미소라는 출구를 향해 재빨리 달렸다.
얼마 후 그들은 왕성의 벽을 지나 수도 밖으로 탈출했다.
팰리슈가 둘의 탈옥 소식을 들은 것은 이튿날 아침. 집무실에 당도하자마자의 일이었다. 미리 나와 있던 에스타냐가 수심 그득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큰일 났어, 팰.”
의자에 앉으며 팰리슈가 얼굴을 굳혔다.
“제국이 선전 포고를 해 온 거야?”
“아니, 어떤 면으로는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야. 태진이 사라졌어. 그 미소라라는 미소 족과 함께.”
도망. 태진과 미소라가 감옥에서 탈옥했다는 이야기다.
팰리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서를 보내. 나도 지금 가겠어.”
“이미 아서는 현장에 도착해 있을 거야.”
팰리슈는 외투를 걸친 생각도 하지 않고 집무실을 달려 나왔다.
그 시각, 에스타냐의 말대로 아서는 이미 특별 감옥에 도착해 있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교대를 하러 왔던 후임 간수와 기절해 있던 선임 간수. 간밤의 여파로 아직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는 선임 간수 대신에 후임 간수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 그게, 제가 아침에 교대를 하러 나왔는데 이, 이 인간이 기절해 있는 겁니다. 무, 무슨 이, 일인지 물었더니 가, 간밤에 누군가가 자기를 습격해서 다음은 자, 잘 모르겠다고…….”
설명하는 동안 간수는 계속해서 벌벌 떨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서의 얼굴을 흉악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불꽃이라도 피울 것 같은 눈동자를 돌리자 휑하니 열려 있는 철문이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가 안을 확인한다.
태진과 미소라의 방. 둘 다 비어 있다. 태진의 방에는 무슨 일인지 문 가까이에 의자가 나부끼고 있었고, 미소라의 방에는 몸을 구속하고 있었을 밧줄이 침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밖으로 나와 아서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열쇠는?”
“가, 가지고 있습니다.”
간수가 대답을 하고 아서에게 열쇠를 넘겼다.
녹산의 문을 연 아서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묻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경악한 듯 눈을 부릅떴다.
“……!”
그곳에 있는 것은 잠든 듯 죽어 있는 녹산의 시체였다. 침대가 있는 벽에 기댄 채 목을 떨어뜨리고 사망해 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서는 시체에 다가갔다. 맥을 짚어 보고 고개를 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목에 새파란 멍이 들어 있다. 밧줄 같은 것으로 목을 졸라 죽인 듯했다. 사인은 교살. 그리고 누가 했는지는 뻔하다.
“미소 족……!”
태진에게 녹산을 목 졸라 죽일 만한 실력이 없다. 완력도 기술도 모자라기에, 남은 이는 미소라뿐이었다.
아서의 얼굴이 다시 뭉개졌다.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쥔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신음성을 흘리던 아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를 악문 채 그는 뒤따라 들어온 기동대원에게 현장을 보호하라는 명을 내려놓고 감옥을 뛰쳐나갔다.
그대로 왕성을 가로질러 아서가 도착한 곳은 뤼스필드 저택. 시종들이 갑자기 나타난 기동대장에게 서둘러 예를 갖추는 모습을 무시하고 그는 질풍 같은 기세로 아리스의 방문을 두들겼다.
“아리스, 아리스! 일어나 있지!”
쿵쿵쿵!
시종장이 서둘러 달려와 그를 말리려 할 때 문이 삐걱 열렸다. 이미 깨끗이 옷을 차려입은 아리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서? 무슨 일이야?”
아서는 아리스를 밀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왜, 왜 그래?”
“설마, 넌 아니겠지? 그렇지?”
“뭐가?”
“강태진과 미소 족이 탈옥했어. 누군가 그들을 감옥에서 꺼낸 거야. 설마 아리스, 네가 그런 건 아니지?”
그 얼굴은 흡사 울상 같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기도, 화낼 것 같기도 했다.
아서를 보며 아리스는 입술을 떨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태진 님이 탈옥했다고? 없어졌어?”
“……모르는 일이다 이거야?”
“물론이야. 어제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단 말이야.”
아리스는 술술 대답했다. 그리고 얼굴에는 걱정 반 당황 반을 뒤섞은 표정을 만들어 낸다. 그녀의 반응을 살핀 아서는 쳇 혀를 차고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알았어. 너도 빨리 나와. 지금부터 탈옥범을 쫓아야 하니까.”
“아서, 잠깐!”
문을 열고 나서려는 그를 붙잡는 아리스.
“아서는 왜 그렇게 태진 님을 의심하는 거야?”
그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같은 거 계속 물어보지 마.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그 음성은 흡사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친구의 어조에 아리스는 숨을 멈췄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애쓴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리스의 방을 나갔다. 문을 부수려는 듯 강렬히 닫고 나간 그의 발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아리스는 쓰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성공…….”
그녀에겐 일생일대의 연극이었다. 이런 일, 정말 나한테 맞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리스는 비척비척 다시 일어섰다. 앞으로 한동안 계속해서 이 연기를 이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아서의 곁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태진의 부탁.
아리스는 주먹을 꾹 쥐고 방을 나섰다.
아리스를 대동하고 아서가 팰리슈의 집무실에 들이닥친 것은 정오 무렵. 수색을 나갔던 정보부 소속 기사들이 모두 왕성으로 귀환한 뒤의 일이었다.
“찾았나?”
다급한 팰리슈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아리스였다.
“루위스 동측에서 이른 아침 외곽으로 빠지는 두 사람을 본 목격자가 다수 있었어요. 그들의 증언 결과, 인상착의가 두 사람과 일치해요.”
“흔적을 찾았지만 야산 지대에서 끊겨 추적을 실패했습니다.”
“태진, 미소라. 결국 빠져나간 거군…….”
아서는 이를 악문 채 팰리슈를 쳐다보았다.
“국경 수비대에 연락해 주십시오. 현재 가용한 인원을 투입하여 국경 부근의 경비를 강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서. 알고 있잖아. 지금 제국이 이쪽으로 검을 들이밀고 있어. 왕국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 같은 건 그들에겐 부족해.”
“알고 있습니다, 전하. 그러나 아시잖습니까. 지금 수도를 빠져나간 인물은, 인정하긴 싫지만 현 대륙에서 가장 추적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자칫 대처가 느리면 영원히 놓쳐 버립니다!”
아서의 어조는 강력했다. 그리고 그 어조만큼 내용도 강렬했다. 그의 주장이 보내오는 기세에 눌린 팰리슈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아니, 사실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첩자의 혐의가 있는 자가 국경을 넘을 위험이 있다면 국경 수비대의 검문 강화를 명하는 게 당연한 처사다.
“알았어. 지금 전서를 보내. 제국에 움직임을 들키지 않을 정도로 검문을 강화한다.”
“알겠습니다.”
아서가 당장에 뛰어나갔다. 팰리슈의 말을 에스타냐에게 전하면, 그녀가 전서를 작성, 각 국경 수비대에 통보해 줄 것이다.
문 밖으로 뛰어나가는 아서를 쫓아 아리스가 한발 늦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팰리슈가 불러 세웠다.
“네가 먼저 나서서 태진을 찾으려고 하다니, 의외야. 어제까지는 그렇게 태진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었어?”
팰리슈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아리스는 걸음을 멈춘 채로 잠깐 뒤돌아서 있었다. 곧 돌아본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무례한 말이지만, 전하께서도 방금 명령을 망설이셨지요.”
“……음.”
불편한 듯 대답을 회피한다. 아리스는 살짝 미소 지었다.
“같은 이유예요.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태진 님은 제 손으로 찾아내야 하니까요.”
“그것뿐이야?”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한동안 아리스와 팰리유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리스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팰리슈는 친우였고, 그 덕분에 자신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국왕의 본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친우들과 있을 시에는 한없이 풀어지고 널널한 성격을 자랑하는 그였으나 국왕의 임무는 빈틈없이 해내는 능력 있는 자이기도 하다.
그런 팰리슈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었다.
“꼭 찾아내도록.”
“맡겨 주세요.”
마치 태진처럼 단단히 대답하고서 아리스는 팰리슈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 바로 옆에는 에스타냐가 비서관으로 있는 국왕 비서실이 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아서가 모든 사항을 에스타냐에게 전한 뒤였다.
“아리스, 잘 왔어. 왕비님이 전서 작성하는 것을 도와 드려.”
“아서는?”
“추적대를 조직하러 가야 해.”
“추적대?”
“국경 수비대에만 맡겨 둘 순 없어. 국경을 넘기 전에 내 손으로 반드시 잡아 올 거야.”
집념 어린 대사를 남기고 아서는 곧장 비서실을 달려 나갔다. 그를 미처 붙잡지 못한 아리스가 황망한 눈길을 던지고 있으니, 에스타냐가 훗 하는 웃음을 지어 그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가 보렴. 전서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왕비의 말을 듣고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서 아리스는 아서를 쫓았다. 왕궁 밖으로 달려 나온 아서가 말을 타고 정보부로 돌아간 뒤 자신의 사무실에 뛰어들었다. 그보다 몇 걸음 뒤에 아리스가 나타났다.
“아서! 나도 가겠어!”
“뭐? 너까지 갈 필요는 없어, 아리스. 넌 여기 남아서 장관님을 도와.”
“아니,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아리스!”
아서가 책상을 내리쳤다. 움찔 놀라며 아리스가 뒤로 물러섰다. 그녀를 돌아보는 그의 눈빛은 표독스럽기까지 했다.
“잘 들어. 난 너를 믿고 있는 게 아냐! 네가 강태진을 두둔한다는 사실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내가 너를 추적대에 데리고 갈 것 같아?”
오늘 하루 동안 아리스는 태진의 수색에 아주 의욕적이었다. 협조적인 그녀의 태도에 분명 수색은 일사천리였으나,
그렇기에 아서는 아리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넌 여기 남아. 그리고 내가 그를 붙잡아 오기를 기다려!”
그것은 이미 최종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아리스가 무슨 말을 하건 그는 더 이상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 이후로 그는 추적대 조직에 집중했다. 아리스가 사무실에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고, 아리스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사무실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문을 닫고 그녀는 문에 기댔다. 등에 닿는 단단한 나무 느낌이 오늘따라 섬뜩할 정도로 불안했다.
아서를 감시해 주십시오. 태진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인즉슨, 태진을 함정에 빠뜨린 사람은 아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찬찬히 생각해 봐도 의심이 가는 것은 아서였다.
어떻게 뒷공작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주장대로 팰리슈와 하이듀크 등이 모두 넘어가 버렸으니까.
만약 태진에게 집중된 이 계획을 만들어 낸 자가 아서라면―
거기서 생각을 멈추고 아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한숨을 마치 무게를 가진 듯 그녀의 몸을 감쌌다.
문에서 등을 떼고 복도를 걷기 시작한 그녀의 발걸음을 매우 무거웠다.
***
“헉…… 헉…….”
늦은 밤. 울창한 나무숲을 헤치고 산등성을 오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한 명은 앞서서 길을 짚어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고, 뒷사람은 그의 페이스를 필사적으로 따라잡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두 사람의 움직임의 차이는 확연했다.
앞서 가고 있던 자가 잠깐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멈춘 그의 뒤로 뒷사람이 따라붙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 멈추는, 겁니까.”
숨으로 인해 말이 끊어진다. 누가 보더라도 한계에 다다른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미소라는 간단히 입을 열었다.
“이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곧 쉴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예상 시간은, 어느, 정도입니까.”
태진의 질문에 미소라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미소 족의 숲지기로서 밤하늘을 읽는 것은 당연히 익혀야 할 수양이었기에, 그가 산출해 내는 시간은 거의 정확했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알겠다. 잘 따라와라.”
미소라로서는 태진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혼자 빠져나가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국경 정도는 넘을 수 있으나, 그에겐 미연의 부탁이 있다. 그 부탁 때문에 국경을 넘었고 태진을 만났다. 여기서 어떻게 그를 버리고 가겠는가.
태진으로서도 미소라는 놓칠 수 없었다. 자신 혼자서도 국경을 넘을 자신은 있다. 허나 미연이 빠져 있는 상황으로서 봐서 한시라도 빨리 카알트라즈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미소라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두 사람은 그런 연유로 더뎌지는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 도주행이 시작된 지 이미 2주. 그들은 레무닉 구릉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로츠왈드 왕국 북동쪽 끝에는 국경 도시인 레무닉 시가 있다. 30년 전 아키레마 제국과의 선을 그은 국경 지대가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탓에, 국경 도시들도 왕국의 다른 도시보다 해발이 높다. 그중에서도 특히 레무닉은 로츠왈드 왕국에서 유명한 구릉지에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었다.
미소라가 붙잡힌 곳도 바로 이 레무닉 구릉지였다. 국경을 넘은 뒤 그는 일부러 레무닉 구릉지에 모습을 드러내 국경 수비대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 말을 했을 때 태진은 신중히 물었다.
“국경 쪽에서는 체포된 범죄자를 그대로 살해해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하던데, 설마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 뻔했습니까.”
미소라의 대답은 오히려 담담했다.
“너를 만나 달라고 미연이 부탁했다. 그런 내가 순순히 죽을 것 같은가.”
묘한 어조에 태진은 설득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뭐랄까, 그것은 같은 사람을 맘에 둔 남자들끼리 느끼는 미묘한 동조였다.
거기에 대해서 깊이 묻지 않은 채 태진은 미소라가 이끄는 대로 이 레무닉 구릉지로 온 것이다.
산등성이의 정상까지 올랐다. 달이 떴고 주변은 달빛 외에는 캄캄했다. 이런 곳에서는 들키기도 힘들겠지만 둘은 신중한 발걸음으로 산을 넘었다.
울창하던 나무들이 줄어든 곳에서 미소라가 발을 멈췄다.
“이곳이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 자신들이 정지한 위치보다 낮은 곳에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산지에 만들어진 해발 높은 평원. 살짝 구름에 가린 달빛이 내리쬐는 구릉지는 꽤 드넓었다.
지도로만 익히고 있던 지식을 눈으로 확인한 태진. 평소였다면 흥미롭게 살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힘들었다.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는 태진을 뒤돌아본 미소라가 넌지시 물었다.
“많이 힘든가.”
“별로……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습니다. 이젠 솔직히 쉬고 싶군요.”
태진은 완벽히 지쳐 있었다. 지난 21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지쳐 본 적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그럴 만도 하다. 루위스를 탈출한 지 이제 2주가 넘었다. 국경 부근 산지에 발을 디딘 것은 일주일이었고, 그보다 며칠 전에 추적대에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산지를 지나 이 레무닉 구릉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 이상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미소라는 단련이 되어 있었다. 체력으로 치자면 미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태진은 달랐다.
“체력이 좋지 않군.”
“한국에서는 이 정도면 평균입니다…….”
받아치는 태진을 슬쩍 보고서 미소라는 방향을 바꿨다. 지금까지가 직선이었다면 좌회전하여, 구릉지와 평행되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이라는 곳은 약한 남자들밖에 없나 보군. 조금만 참아라. 좀 더 가면 쉴 수 있는 곳이 나올 거다.”
“삼십 분 전에도 그 말을 한 듯합니다만…….”
“기분 탓이다.”
그렇게 대꾸하는 미소라의 뒷모습을 잠깐 보고 태진은 웃음을 흘렸다.
“왜 웃지?”
“아니…… 방금 그 농담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배운 것이다, 너의 연인에게.”
“그렇습니까. 내 제자의 제자라는 말이군요.”
그 농담을 가르쳐 준 것은 태진이다.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올라 태진은 지친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굽어져 있던 허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미소라를 똑바로 쳐다본다.
“갑시다.”
“음.”
미소라는 말없이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소라가 발견한 곳은 땅이 깊숙이 파인, 구렁텅이 같은 곳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 등을 기댈 정도의 크기는 되었다.
국경을 넘은 미소라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잡힐까 말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제법 아늑하다.”
“이 정도도 감지덕지입니다.”
태진은 군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완전히 몸을 숨길 수 있고 주변도 수풀로 둘러싸여 은폐도 훌륭했다.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정한 뒤 미소라는 태진에게 제의했다.
“눈 좀 붙여라. 얼굴이 말이 아니군.”
“……감사합니다.”
웬일로 태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눈을 감더니 몇 초 뒤에는 그대로 고개를 뒤로 떨어뜨렸다.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로 보아 초고속으로 숙면 상태로 돌입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소라는 솔직히 감탄했다.
태진은 이미 지쳐 있다, 그 사실은 진즉에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을 따라오는 그의 모습이 의아하면서도 신기했다.
그러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력이었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났지만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미연에게 도달해야 한다는 그 집념으로 지금껏 버틴 것이었다.
대단하다. 정직하게 미소라는 태진을 인정했다. 이 남자가 미연이 반한 남자라는 것인가.
“……못 당하겠군.”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미소라는 깨달았다.
레무닉 구릉지 직전의 어느 숲 속에서, 미소라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에 눈을 떴다. 그리고 곧 가슴 깊은 곳에 그것을 묻었다.
아차. 너무 깊이 잠들었다.
그런 자각이 들자마자 태진이 번쩍 눈을 떴다. 곧장 눈동자를 찌르고 들어오는 햇빛에 한참 얼굴을 찌푸렸다.
“정신이 들었나.”
가까운 곳에서 미소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예. 죄송합니다. 너무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미소라 씨와 교대를 했어야 하는데.”
“신경 쓸 것 없다. 주변을 확인한 후 조금 잠은 자 두었으니까. 이걸 먹어라.”
그가 던져 준 것은 사과같이 생긴 노란 열매였다. 겉을 적당히 닦아 한 입 깨물자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이걸 어떻게?”
“이 앞에 나무가 있더군. 피로 회복에 좋으니까 씨까지 전부 먹어 둬라.”
숲지기 출신 아니랄까 봐 숲에 대한 지식은 방대한 미소라였다. 태진은 그가 던져 준 두 개의 열매를 흔적도 없이 먹어 치웠다.
간단한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둘은 구렁텅이에 빠져나왔다. 흔적을 지우고 재빨리 숲을 가로질러 구릉지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이번에는 태진이 미소라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무슨 일이지. 아직 피로한가.”
“아닙니다. 국경 수비대입니다.”
아침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구릉지는 밤에 본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울퉁불퉁한 지역 전체에 나무보단 작은 풀들이 나 있었고 간간이 바위 같은 것들도 보였다. 그 땅을 작은 점 같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미소라의 눈에는 점이었으나 태진의 이능은 그것들을 두뇌로 빨아들였다.
“저 문양은 레무닉 국경 수비대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우리를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잘도 인원을 만들었군.”
“덕분에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예상보다는 기사들의 수가 많았다. 거기다 국경 수비대의 기사들은 여차하면 적군과 일차적으로 교전을 벌여야 하기에 그 실력도 수도의 기사 못지않았다.
“구릉지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한나절은 걸린다. 구릉지를 통과한다면 반나절 안에 완충 지대로 들어설 수 있다.”
“반나절이라…….”
구릉지를 거치면 반나절 만에 국경을 넘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선 은폐물도 제대로 없는 구릉지를 국경 수비대의 눈을 속여 지나야 한다. 그러기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설사 들키기라도 한다면 두 명이서 저 수를 돌파하는 것은 무리다.
지금 돌파해 봤자 국경에는 더 많은 수가 있을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저들을 따돌리는 것이 먼저였다.
“둘러 갑시다. 그 편이 낫겠군요.”
지금부터 한나절이 걸리든 밤이 되어 구릉지를 지나든 시간상으로는 비슷하다.
그렇게 결정하자 행동은 빨랐다. 둘 다 결정부터 행동까지 시간이 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미소라는 익숙한 길을 찾아가듯 숲을 빠르게 이동했다. 구릉지를 오른쪽에 두고 완충 지대로 통하는 길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미소라의 말대로 소요 시간은 한나절이었다. 오전에 시작된 길은 해가 떨어질 즈음에야 끝이 났다.
빨갛게 하늘을 물들인 석양을 배경으로 태진과 미소라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수비대원들이 서서히 구릉지의 언덕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지기에 수비대로 귀환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태진과 미소라는 바위 뒤에 찰싹 붙었다.
길은 하나였다. 산을 넘는 가파른 길을 올라가다 보면 수비대 건물이 있고, 그 건물까지가 로츠왈드 왕국의 영토였다. 공식적으로는 레무닉 시가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상세하게는 국경 수비대를 지나야 했다.
구릉지 위에 만들어진 작은 도시, 레무닉을 잠깐 내려다본 뒤 태진은 반대편 산지를 확인했다. 시력을 한껏 강화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이 안 보이는군.”
미소라도 마찬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루위스에서부터 자신들을 쫓아온 추적대, 그 인원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산은 넘었고 구릉지를 지나도 한참 지났어야 할 시간이었으나 그 인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현듯 과감하게 바위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주 한순간, 1초도 되지 않을 그 순간에 그의 두뇌와 시신경이 극렬하게 활성화되었다.
“당했습니다.”
태진이 내뱉었다. 그 찰나에 그는 시야에 담긴 모든 수비대원의 숫자를 셌다. 그리고 그것은 아침에 봤을 때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숫자가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 않나.”
“하지만 비약적으로 많아졌습니다. 지나오면서 발견한 수비대원 숫자보다 적어도 스무 명은 웃돕니다.”
구릉지 전체를 볼 수는 없었다. 개중에는 산으로 올라온 녀석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태진의 셈에 오차도 있겠지만, 제국의 군대가 산 너머에 계속해서 모이고 있는 이 시점에 이만한 전력을 구릉지 수색에 투입했을 리는 없다.
태진의 판단은 그러했고, 그것을 기초로 결정했다.
“지금 넘어가야 합니다. 저들이 올라오기 전에.”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도박이군.”
석양이 아직 남아 있으니 섣불리 움직였다간 들키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다. 미소라와 태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타이밍을 쟀다.
그리고 호흡이 동일해진 그 순간 길옆으로 우거진 숲 안쪽으로 뛰어든다!
거리상으로는 10m 이상이었다. 태진은 발이 느렸고, 미소라는 태진에 맞춰 뛰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모습은 국경 수비대에 발견되었다.
“저기다! 수상한 자가 산으로 들어갔다!”
수비대원 한 명이 소리쳤다. 그리고 태진의 예상대로 국경 수비대에 섞여 있던 추적대원이 아서에게 그 사실을 소리쳐 알렸다.
후위에 붙어 전체를 훑어보고 있었기에 세세한 태진의 움직임을 읽지 못하던 아서는 보고를 듣고 단번에 앞쪽으로 뛰어왔다.
“쫓아라! 추적대를 밑에서부터 쫓아간다! 수비대는 위로 연락해서 길을 막으라고 전하라!”
아서의 지시에 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산개했다. 연락 역의 대원은 죽을힘을 다해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갔다.
“어차피 방향은 하나다! 놓치지 마라!”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나타나는 것은 바위 계곡이었다. 그 길을 지나면 국경과 국경 사이에 완충 지대가 나타난다.
로츠왈드건 아키레마건, 허가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는 구역이었기에 아서는 필사적이 되었다.
“절대 길을 지나게 해선 안 된다!”
추적대가 길을 둘러싼 숲으로 뛰어들었다. 거리는 가까웠다.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간격에서 계속 놓쳤지만 이번에는 결코 놓치지 않겠다. 아서의 그런 집념이 다른 대원들에게 전해졌다.
그 추적의 끝에 태진과 미소라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있다!”
“탈주자다!”
먼저 발견한 대원의 외침에 잇따라 고함이 터졌다. 아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며 태각을 뽑았다.
“거기 서라, 강태진!”
“왔군.”
태진보다 앞서 달려가고 있던 미소라가 뒤를 곁눈질했다. 태진은 뒤는 신경 쓰지도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얼굴을 때리는 수풀들이 가는 생채기를 만들어 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태진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폭발할 것 같은 폐를 의지로 억누르며 두 다리를 처절하게 굴렀다.
“아직 앞은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국경 수비대는? 통로를 막아라!”
“아, 아직 연락이 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보 같은 자식들! 바위 계곡으로 들어가 버리면 손쓸 방법이 없단 말이다! 길을 막아라!”
아서의 비명 같은 지시가 떨어진 바로 그 순간 태진과 미소라가 숲을 빠져나왔다. 일순 드넓어지는 시야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굳건하게 서 있는 바위 계곡. 벨린 협곡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규모였지만 지금은 이것만이 태진이 나아갈 길이었다.
군자는 대로를 지나야 한다. 이게 누가 한 말이더라?
그런 시답잖은 말을 떠올리며 태진은 미소라의 뒤를 쫓아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저기다! 막아라!”
“계곡에 들어가도록 두지 마라!”
수비대의 외침. 아서의 외침. 그런 것들이 계곡 입구에서 뒤섞였다. 태진과 미소라의 도주가 계곡 안으로 달려드는 그 순간 뒤쪽에서 날카로운 감각이 날아들었다.
태진의 머릿속에 정보가 뛰어드는 그 순간 태진은 앞으로 고꾸라지듯 고개를 숙였다.
“위험―”
말을 내뱉는 도중, 달리는 자세 그대로 몸을 빙글 돈 미소라의 손바닥이 날아오는 화살을 옆으로 쳐 냈다.
“……!”
한 바퀴 몸을 구르고 일어난 태진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미소라가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 자리에 또 하나의 화살이 꽂혔다.
태진이 눈을 뒤로 돌렸다. 두 다리가 중심을 잡는 와중 살핀바, 방금 활 공격은 국경 수비대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멈추면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짧게 내뱉고 태진은 재차 날아오는 화살에 대비했다. 그리고 눈길을 계곡의 높은 곳을 올려다본다.
“화살을 막아 주십시오. 한두 개면 됩니다.”
“무슨 짓을 할 셈이지?”
“저들을 막을 겁니다.”
또 다른 화살이 활에 올라갔다. 그 뒤에서 숲을 헤치고 아서가 달려 나왔다. 미소라는 혀를 차며 태진의 앞으로 나섰다.
“많이는 힘들다.”
“잠깐입니다!”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향하는 곳은 허공. 빨갛게 물든 하늘을 향하여. 그리고 태진은 아직까지 몸 안에 내재되어 있던 두 개의 마력핵을 동시에 손바닥으로 토해 냈다.
나선 회전을 일으키며 마력핵들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그것은 아주 잠시였고, 목표한 위치에 도달하였을 때 태진을 주문을 소리쳤다.
“창공에서 내리꽂는 별의 파편!”
마력핵이 반응한다. 두 개의 마력핵이 동시에 파괴되며 그 여파는 한순간 그 일대의 마력을 모두 잡아먹었다. 격렬히 반응한 찰나, 그 공간에 검은 구멍이 출현했다.
“마, 마법?”
활을 매단 궁사가 공격조차 잊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약 50m 위 상공에 뚫린 검은 구멍에서, 모두의 시선이 모인 그때 불꽃을 머금은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피하십시오!”
태진이 미소라의 등덜미를 잡아 억지로 몸을 돌렸다. 마법은 성공했다.
그렇기에 태진은 미소라와 함께 다시 도주하기 시작했다.
낙하하는 물체에 시선을 잠시 빼앗겼던 아서가 곧장 고함질렀다.
“놈들이 도망간다!”
궁사가 아차 하며 다시 활을 겨눈다. 시위를 당기기 그 직전,
쿠앙―!
무식한 속도로 추락한 그것이 바위 계곡의 한쪽 면에 충돌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한순간 일대의 대지가 흔들렸다.
“뭣이!”
“뭐, 뭐지!”
“으아악!”
바위 계곡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태진의 마법으로 폭발한 계곡의 한 면이 조각조각 갈라진 채 땅으로 추락했다.
“피, 피해라!”
수비대의 대장이 명령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이가 그 자리에서 대피하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떨어지는 돌덩이를 보고 누구도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쿵!
쿠궁―!
고막이 따가울 만큼의 소란이 잠잠해진 것은 한참 시간이 흘러서였다.
흙먼지가 바람에 씻겨 날아가자 이제 완전히 해가 져 앞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수비대원 중 한 명이 준비해 온 홰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너울대며 흐릿하게나마 앞을 비추자 그나마 아서는 바위 계곡이 어떤 꼴인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바위 계곡의 한쪽 면이 완전 붕괴되어 있었다. 이 길을 지나가는 것은 이제 한참 동안 불가능하게 될 것이 뻔했다.
허망하게 계곡을 바라보던 아서에게 구출대원이 다가와 귓속말했다.
“이 정도면 그들도 깔려 죽지 않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어. 그들은 살아 있다. 이 정도도 예상하지 않고 마법을 썼다고 생각하나?”
“……대체 무슨 마법이었을까요, 이건. 이런 마법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나도 처음 봤다. 이건 분명 공간마법이야.”
대륙 유일의 공간마법사, 태진이 사용한 것이니 틀림없었다. 좀 전의 허공에 났던 구멍은 이제 사라졌다. 그 구멍에 튀어나온 그것이 저런 대파괴를 일으킨 것이다.
아서는 부하들에게 완충 지대 전까지 수색할 것을 명한 뒤 돌덩이 위로 올라갔다.
적당히 높은 곳을 찾아 오른 뒤 볼 수 있는 만큼 안력을 돋워 계곡 저편을 살폈다.
그렇다고 태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혀를 차고 중얼거렸다.
“이젠 이 황자에게 맡길 수밖에.”
그 시각, 아서의 예상대로 태진과 미소라는 거대한 낙석을 피해 바위 계곡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완충 지대로 당분간 양쪽 어느 나라와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계곡에서 거리가 멀어지자 미소라는 달리기를 멈췄다. 태진이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자, 자신도 호흡을 정비하고 물었다.
“방금 그건 마법인가.”
“운석 소환 마법입니다.”
“운석?”
땀을 닦으며 태진은 고개를 들었다.
“저 하늘 위의 별들. 그 별들의 파편 같은 것들이 하늘에는 많이 떠다닙니다. 그것을 지상에 낙하시켜 파괴하는 공간 마법입니다.”
“그래서 소환인 건가…… 엄청난 위력이군.”
“솔직히 운석이 정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세계, 바운스는…… 뭔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요.”
“비밀?”
미소라의 물음에 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천천히 내뱉으며 말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합니까?”
한 고비는 넘겼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이제부턴 제국군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미소라는 로츠왈드로 올 때의 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어둠 속을 눈으로 더듬었다. 이윽고,
“이쪽이다.”
한 방향을 정해 달리기 시작한다. 태진도 다시 뛰었고, 그들의 여정은 이제 제국군 돌파로 이어졌다.
***
“황제 폐하.”
아키레마 제국의 황성. 어떤 건물보다 화려한 황궁에서 이시브는 황제를 알현했다. 집무실에서 나오는 일이 없는 황제는 오늘도 여전히 집무실에서 숱한 보고서를 정력적인 자세로 처리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아무 반응이 없는 황제를 이시브는 다시 한 번 불렀다. 그제야 그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아, 보고서 때문에 정신이 없군. 언제 왔지?”
“방금 전에 왔습니다. 송구스럽지만 이것을.”
이시브는 한 발자국 나서 황제의 책상에 두툼한 서류를 올려놓았다. 황제는 보고 있던 보고서를 옆으로 옮기고 그 서류를 손에 들었다.
“일 처리가 빨라서 좋지만…… 단순히 기뻐하고 있긴 힘들군.”
그 목소리는 마치 통 안에 들어가서 말하는 듯 조금 울렸다. 그러나 이시브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에 무리 없이 황제의 말을 이해했다.
가면을 쓴 황제, 디요네츠 황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텔리오트 신황제는 우선 서류를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병력 배치는 순조로운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길어도 이번 주 안에는 작전 배치까지 완료될 예정입니다.”
“좋아. 맘에 드는군.”
무기질적인 텔리오트의 가면을 보며 이시브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텔리오트가 황제에 오른 것은 미연의 백두 부대가 럭커와 함께 카알트라즈 진압 임무를 떠난 직후였다.
백두 부대가 시디 노트니를 떠나고 3일 후.여느 때처럼 아침에 잠을 깬 디요네츠 황제는 비서관을 대동하고 늘 즐기던 식단으로 아침 식사를 끝마쳤다. 그 후 황궁 뒤편 정원을 거닐며 산책을 즐겼고, 집무실로 돌아와 비서관의 일정 보고를 모두 들었다.
일단 업무 때문에 집무실을 떠난 비서관은 서부 반란군 동맹을 진압하러 떠난 일 황자의 경로 보고서를 들고 다시금 디요네츠 황제를 찾아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쓰러진 채 죽어 있는 디요네츠 황제를 발견했다.
급히 어의를 불렀지만 디요네츠 황제의 소생은 불가능했다. 사인은 독살. 아침 식사 중에 음독하여 그 후로 일정 시간이 경과한 후, 독이 심장까지 퍼져 기능을 정지시켰다는 것이 어의의 분석이었다.
이 일은 당연히 텔리오트에게 들어갔다.
텔리오트는 업무를 모두 중단하고 황궁으로 달려왔다. 럭커가 임무로 없었기에 이시브를 대동하고 나타난 그는 어의에게 독의 종류를 물었다. 어의는 해부를 하지 않는 이상 어떤 독인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텔리오트는 반나절을 고민했다. 아침 식사 후 남은 음식은 모두 처리되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아침 식사를 만든 요리사와 시종들을 모조리 옥에 가둔 후 그는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의 배를 갈라라.”
“저, 저하?”
명령을 들은 어의는 기겁했다. 황제의 몸은 일반인의 몸과 다르다. 누구라도, 설사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에 상처를 내는 짓은 죽어 마땅한 짓이었다.
“화, 황제 폐하의 배, 배를 가르라니요! 그, 그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독의 종류를 알아야 범인을 발견해 낼 수 있지 않겠나.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배를 갈라라. 그리고 꼭 독의 종류를 알아내라.”
어의를 비롯하여 이 결정이 내려질 당시 회의실에 있던 모든 이가 텔리오트의 기세에 눌렸다. 지금껏 소문으로만 들어 오던 이 황자의 진면목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들 중 누구도 그의 명령에 반기를 들 순 없었다.
결국 그날 밤. 어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디요네츠 황제의 배를 갈랐다. 아직 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을 토대로 조사를 한 결과,
“……‘만스톡’이옵니다.”
“그게 무엇인가? 어떤 독이지?”
“‘스톡’ 이라는 꽃잎을 말린 다음 갈아서 만든 분말 형태의 독입니다. 무색무취에 어떤 맛도 없기 때문에 감별해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체내에 들어가면 중독되기 시작하여, 피중독자의 건강 상태에 따라 효과가 발휘되는 시간이 빨라지거나 느려집니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라면 얼마나 걸린다는 건가?”
“음독 후 약 2시간 정도 경과 후일 것입니다.”
그때라면 디요네츠 황제가 집무를 시작했을 시점이었다. 텔리오트는 가면을 톡톡 두들기며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가장 중요한 것을 질문했다.
“그 만스톡이라는 독이 제조되는 곳은?”
“독이야…… 어디서나 제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국 안에서의 제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지?”
“스톡이라는 꽃은 제국 내에서 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디에 피지?”
“……로츠왈드 왕국 남부 지방입니다.”
모두가 숨을 토해 냈다. 텔리오트도 흔치 않게 가면 밖으로 그 감정을 표출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가면에 입을 벌리고 있던 중신들은 죄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진정하십시오, 저하.”
이시브가 뒤에서 넌지시 이른 후에야 텔리오트는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선언하겠다. 나 텔리오트 지 아키레마는 나의 아버지 디요네츠 핀 아키레마의 뒤를 이어, 이 순간부터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
좌중을 압도하는 태도. 일순 1황자파의 중신들까지 그의 선언에 항의를 할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그때 텔리오트는 이어 소리쳤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독살한 저주받을 로츠왈드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하겠노라! 지금 이 순간부터 제국은 로츠왈드와의 전면전을 준비한다!”
그날부터 신속하게 2황자파가 황성을 점거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듯 주요 요직에 있던 일 황자파 중신들이 좌천을 당하고 그 자리에 2황자파의 신임 간부들이 올라섰다.
큰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신황제 즉위로부터 3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2황자파는 황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1황자파의 누군가가 너무나 빠른 2황자파의 행동에, 황제 암살은 이 황자파의 간계가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이튿날, 그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부대로 전출을 명받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몰래 뒤에서 입을 모았던 1황자파 간부들이 며칠도 되지 않아 급환이나 급사를 맞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1황자파는 더 이상 그 형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1황자파가 위에서부터 와해되자 밑을 차지하고 있던 인원들은 2황자파로 쉽게 돌아섰고, 결국 두 파가 신황제를 지지하는 하나의 여론으로 확산되었다.
그 사이 텔리오트는 이시브를 자신의 정식 비서관으로 등용하였고, 그에게 전쟁 준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지시했다. 그에 따라 이시브는 텔리오트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전쟁 준비를 개시했다.
남부 반란군은 다른 지역보다는 규모가 작아 비교적 조용했기에, 남부 주둔군의 주요 부대를 국경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명령이 있을 시 곧바로 전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거기에 남부 주둔군 소속의 마법사 부대까지 일선에 배치하여 더욱 전력을 강화하였고, 이 준비가 모두 끝나자 남부 주둔군 사령부에서 완료했다는 전언이 날아들었다.
이시브는 전력 배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리를 끝낸 오늘, 이렇게 텔리오트에게 보고를 하러 온 것이었다.
“작전 배치에 대한 것은 어디 있지?”
“가장 마지막 장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전체적인 예상전황이기 때문에 실제 전쟁으로 돌입하면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할 것입니다.”
“정확하진 않다는 거군. 참고하지.”
마지막 장으로 넘긴 텔리오트는 빠르게 그 속의 내용을 머릿속에 담았다. 예시 그림까지 첨부되어 있는 전황도에 운용 병력 계산까지 철두철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이 정도라면 내가 전장에 나가도 되겠군.”
“과찬이십니다, 폐하.”
“알다시피 난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발츠 중장과 함께 상의하여 부디 우리 제국에 승리를 가져다주도록, 이시브 대령.”
중령이었던 그의 위치는 황제의 정식 비서관이 되면서 대령이 되었다. 제국 역사 속에서도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의 빠른 진급이었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이견을 제시하진 않았다.
“……믿어 주십시오.”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면서도 이시브의 대답은 단단했다. 텔리오트의 신임. 이시브는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제…… 작전 배치가 끝나기를 기다려 선전 포고를 할 일만 남았군.”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신황제가 되어 자리에 오른 직후 첫 일이 전쟁이란 것은 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텔리오트는 서류를 내려놓고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꼭 선전 포고를 해야 되는 건가? 로츠왈드 왕국은 디요네츠 전 황제를 암살했다, 그렇게 되어 있는데 말야. 예의 차릴 거 없잖아?”
“하지만 폐하, 제국 같은 강대국이 로츠왈드 왕국이라는 소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면서 선전 포고를 하지 않으면, 승리한 다음에도 다른 나라들의 이목이 따가울 것입니다.”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야 정말.”
가면을 톡톡 두들기는 텔리오트의 어조는 전쟁을 앞둔 비장함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를 죽인 대상에 대한 복수심마저도 전혀 없다.
담담한 투로 텔리오트는 지시했다.
“작전 배치가 끝나는 대로 선전 포고를 하도록 해. 내 승인을 기다릴 것 없어.”
“알겠습니다―”
라고 이시브의 대답이 끝난 직후였다.
“황제 폐하!”
성큼성큼 집무실로 들이닥친 자는 발츠 중장이었다. 보통 이시브에게 보고를 맡기는 그가 직접 텔리오트를 찾아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지, 발츠 중장?”
“국경 지대에서 심상찮은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전서 형태의 보고는 남부 주둔군 사령부로부터였다. 발츠가 넘긴 전서를 읽은 텔리오트의 가면이 꿈틀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좋지 않은 텔리오트의 반응에 이시브가 물었다. 대답한 것은 발츠였다.
“로츠왈드 왕국으로부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침입자가 국경을 넘어 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인원은 두 명. 그들은 현재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제국의 부대를 따돌리거나 격파하면서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두 명이서 우리 부대를 말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시브가 중얼거렸다. 전서를 내려놓은 텔리오트의 눈빛이 가면 안에서 날카롭게 변모했다.
“이시브, 럭커 시종장으로부터의 연락은? 도착했나?”
“아니오…… 카알트라즈 진압에 참가했다는 연락 이후로는 전혀 없습니다.”
“럭커 시종장의 보고 없는 와중에 왕국에서 침입자라…….”
버릇처럼 텔리오트는 생각에 잠기며 가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이시브와 발츠를 비롯하여 세 명은 거의 동시에 하나의 결론을 떠올렸다.
완벽히 일치하진 않지만 중심적인 의견은 같았다. 그들의 계획이 틀어졌다, 바로 그것이었다.
“왕국에서 넘어온 두 명…… 그중 한 명은 분명 현신의 전사일 거야.”
“동감입니다, 폐하. 수치스럽지만 제국의 부대를 계속해서 격파하려면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일 것입니다.”
텔리오트는 다시 한 번 전서를 확인했다. 피해를 입은 부대의 숫자와 피해 병력 등, 간소하게 기록된 통계를 확인한 후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시브, 지금 당장 남쪽으로 가라.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모두 발츠 중장에게 인계하도록. 최단 시간으로 남부 주둔군으로 가서 피해 상황을 확인하고, 침입자들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 와. 가능하다면 생포하라.”
“알겠습니다.”
이시브는 끊듯이 대답하고, 지체하지 않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발츠도 예를 갖춘 뒤 그를 뒤따라 나가고 나자 집무실에는 텔리오트 한 명만이 남았다.
전서를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텔리오트는 답답한 듯 가면을 벗었다.
누가 보지 않도록 커튼 뒤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아주 약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아. 알고 있겠지? 미연.”
레모닉을 돌파하여 국경을 넘은 태진과 미소라는 완충 지대를 지나 제국의 국경으로 숨어들었다. 미소라가 왕국으로 올 때 사용했던 경로를 따라 움직였기에 생각만큼 어려운 여정은 아니었다.
허나 아무리 출중한 실력의 태진과 미소라라고 해도 모든 부대의 시선을 따돌리고 제국의 영토를 지나기란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제국은 현재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서 국경 지대에 부대가 집중되고 있다. 거기다 평소라면 배치되지 않을 산속 깊은 곳이라거나 계곡의 정상 같은 곳까지 부대가 퍼져 있어, 결과적으로 몇 번 제국군의 눈에 띄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태진의 두뇌와 미소라의 실력으로 숱한 포위망을 돌파했다.
남부 주둔군 사령부에는 그 보고들이 즉각 즉각 올라갔고, 텔리오트가 받게 된 전서에 포함된 일들은 모두 두 사람이 합작한 사태들이었다.
그렇지만 전서에도 나왔다시피 그들은 잡히지 않았다. 단 두 명이서 제국군의 부대를 뚫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 중인 것이다.
“제국군의 동향은 어떤가.”
미소라는 피로가 쌓인 어조로 말했다. 평균 체력을 훨씬 웃도는 미소 족의 숲지기도 이런데 태진은 어떠하겠는가.
미소라의 반도 안 되는 체력은 바닥이 나 있어 그냥 서 있는 정도로 태진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시야엔……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물음에 눈을 돌린 태진의 턱 밑으로 땀이 떨어졌다. 이미 몇 주일째 갈아입지 못한 옷에서는 땀내가 냄새의 수준을 초월해 있었다. 가끔 발견하는 시냇물이나 계곡에서 땀 정도 닦아 내는 생활이기에 그 더러움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말이 아닌 몰골이었다.
상황은 미소라도 비슷했다. 투명한 빛을 자랑했던 은발도 흙과 때에 더럽혀져 윤기를 잃었고 매끈하던 피부도 검었다.
잠시 휴식을 하던 틈을 타 태진의 농담을 던졌다.
“우리가 목욕을 하면…… 배수구가 막히겠군요.”
“부정하지 못하겠군…….”
아직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인 여유는 있다는 것이다.
태진은 스스로의 상태를 그렇게 진단하고 다시 한 번 이능을 깨웠다. 피로함으로 인해 감각이 예전처럼 선명하진 않았으나 최소한 주위 반경 20m 정도는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청각에도 걸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 계속 가지. 조금만 더 가면 내가 머물렀던 폐광이 나온다.”
숲을 헤치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미소라의 뒤를 따라 태진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한참 걷다가 태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폐광이란 곳…… 어떤 곳입니까?”
“말할 체력도 아껴야 한다더니 괜찮나.”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선 채로 잠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대단한 남자군. 미소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무엇을 캐던 곳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제법 오래전에 멈춘 폐광인 모양이더군. 깊이는 그리 깊지 않지만 가장 밑으로 내려가면 깨끗한 지하수가 고여 있어 목을 축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잠들지 마라. 노자마 강을 건너온 다음 고산 지대를 타고 오던 길에 작은 동굴을 하나 찾아냈다. 밤이 깊었기에 그곳에서 쉬기로 결정하고 들어갔더니 거기가 폐광이더군. 산 앞뒤로 두 개의 출입구가 있었기에 이튿날 반대편으로 나와 다시 움직였다.”
“산 하나를 쉽게 넘은 셈이군요…….”
“그렇지. ……괜찮나?”
점점 작아지는 태진의 목소리를 걱정하며 미소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비척대면서도 태진은 끈질기게 미소라를 따라오고 있었다.
미소라는 속도를 조금 늦출까 생각했으나, 그것을 읽어 낸 듯 태진이 고개를 저었다.
“버틸 만합니다. 그러니까 계속 가 주십시오. 지금 속도로 산을 넘어야 합니다.”
배려를 거절하는 태진의 태도는 확실히 본받을 만했다. 허나 미소라는 심려스런 기운을 감추지 못했다.
태진은 말없이 앞길을 재촉했고, 그제야 미소라는 도로 앞을 보았다.
두 사람은 침묵한 채 다시 숲을 지났다.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 두 개의 언덕을 넘을 때가 되자 서서히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큰일이군. 아직 더 멀었는데.”
미소라가 중얼거린 그때, 힘없이 꺾여 있던 태진이 머리를 쳐들었다.
“더…… 큰일입니다. 제국군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뭐?”
“걷다가 잠시 정신을 놓친 것 같습니다. 우리를 따라오고 있군요.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태진의 경고에 이어 미소라도 최대한 감각을 열었다. 태진 같은 이능은 없지만 수련의 성과로 예리한 전투 감각은 살아 있는 미소라였다.
“기척이 여럿이군.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
흐릿한 눈으로 태진이 주변을 훑었다. 시야가 뿌옇게 변색되어 있어서 힘겹게 이능을 일깨워야만 적들의 위치가 대략적으로 파악됐다.
숫자와 위치를 계산하며 돌아가지 않는 두뇌를 억지로 움직인다.
“……그 폐광, 들어갔을 때 냄새는 어땠습니까?”
“그건 왜…… 아니, 되묻지 않도록 하지. 냄새라. 매캐한 냄새였다.”
“정확히…… 말해 주십시오.”
“매캐하면서도…… 조금 단내…… 가 났다고 해야 하나.”
태진은 눈을 들었다. 동공이 반 정도 풀려 있던 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이대로 가다간 잡히든 지쳐 쓰러지든……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여기서 승부를 걸어 봅시다……!”
“어쩔 생각이지?”
“뛴다면 폐광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뛸 수 있겠나? 거기다 뛰면 저들이 눈치 채고 따라붙을 게 뻔하다.”
“그걸 노리는 겁니다. 폐광으로…… 유인해서 한 번에 쓸어 버릴 생각입니다. 이곳만 지나면 곧 노자마 강이 나옵니다. 폐광을 막아 버리면…… 추적의 진로도 조금은 막을 수 있겠죠.”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수를 생각해 내는 태진. 미소라는 솔직히 탄복했다.
“이런데도 머리가 잘도 돌아가는군.”
“자랑거리가…… 이거밖에 없습니다.”
레무닉에서 마지막 마력핵을 써 버린 뒤로 마력 운용을 할 시간도 없었다. 그렇기에 공간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태진이 믿을 것이라고는 자신의 머리뿐이었다.
“갑시다.”
미소라는 단단히 각오한 태진의 얼굴을 보고 두말하지 않았다.
“잘 따라와라.”
그 말만을 남기고 미소라가 나무 사이를 헤쳐 뛰었다. 그 뒤를 태진이 이를 악물고 달음질했다.
미소라의 예상대로 그들의 움직임은 제국군에도 읽혔다.
숲 저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세차게 터져 나왔다. 미소라와 태진은 그 소리를 동시에 감지하고 달리기에 속도를 올렸다.
분명히 그것은 힘든 일이었다.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오르막을 달려 올라간다. 그것도 숲 속의 길을. 태진이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 이미 초월했다.
태진이 완전 지쳐 졸도하기 직전에 폐광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저기다!”
시커먼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확실히 여러 해 사용되지 않은 듯 주변엔 수풀이 우거져 있었고 원래 사용했을 길은 이제 제대로 찾기도 어려웠다.
태진과 미소라는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따라 제국군이 발소리를 커다랗게 울리며 뛰어들었다.
“최대한 소란을 피워 주십시오.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먼지들을 공중에 띄우는 겁니다!”
미소라는 되묻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다. 발걸음을 크게 울리자 바닥에 쌓여 있던 폐광의 가루들이 허공으로 퍼져 올랐다.
태진도 숨을 크게 들이마셔 멈춘 뒤 발을 크게 울리며 동굴 안쪽으로 계속해서 뛰어 들어갔다.
“놈들이 저기 있다! 저기다!”
뒤이어서 달려오는 제국군들. 인원이 많다 보니 그들의 소리는 동굴을 흔들었다. 그와 함께 천장과 바닥에서 점차 먼지들이 떨어졌다.
“잡아라!”
“안쪽으로 몰아! 도망갈 길은 어차피 없다!”
소란과 함께 가루들이 더욱 공중으로 퍼진다. 숨을 터뜨리며 태진이 미소라에게 외쳤다.
“단검, 남아, 있습니까?”
“없다! 빼앗아 오지!”
어둠 속에서 미소라가 발을 돌렸다. 태진이 그를 스쳐 지나가 계속 안쪽으로 질주하는 동안, 그는 제국군 선두를 급습했다.
“컥?!”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운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공격에 그가 요란하게 넘어졌다. 미소라는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아 도로 도망쳤다.
넘어진 동료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완전히 뒤엉켜 넘어지는 제국군들. 그 때문에 추격의 속도가 느려진 틈을 타 미소라는 태진과 합류했다.
피로 골절이라도 할 듯한 다리로 동굴을 달려 내려왔다. 그들의 소란으로 먼지가 날려 이젠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나, 그들은 기어코 당도했다.
“여깁니까!”
은은한 빛을 머금은 지하수, 그 물이 고인 샘이 나타났다. 바닥까지 비쳐 보이는 장면은 한순간 넋을 잃을 만큼 고혹적이었지만 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쿠, 쿨럭! 수, 숨을 못 쉬겠잖아!”
“켁! 케헥! 제, 젠장!”
엉망진창으로 동굴을 달리는 제국군의 소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샘 앞에서 미소라는 초조하게 태진의 지시를 기다렸다.
“좀 더, 좀 더 기다렸다가 그 검을 벽에 집어 던지는 겁니다. 동시에 샘으로 뛰어드십시오.”
미소라는 자세를 잡았다. 태진이 지정한 벽은 그들의 왼쪽. 직접 손으로 만져 본 그는 입을 다문 채 제국군을 기다렸다.
쿠구궁―
제국군 무리가 다가올수록 위에서 부스스 가루가 떨어졌다. 샘 위로도 이제 공기가 점점 탁해져 숨을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어디지?!”
“젠장! 빨리 잡고 밖으로 나가야― 저기다!”
제국군이 태진과 미소라를 발견했다. 한순간으로는 숫자도 세기 힘든 그때,
“지금입니다!”
태진이 숨을 들이마시며 샘으로 뛰어들었다. 미소라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벽에 집어 던짐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풍덩!
둘의 몸이 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그 순간,
캉!
검이 벽에 부딪치며 작은 불꽃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허공에 떠 있던 폐광의 가루들에 연속적으로 반응하여―
쿠앙―!
산을 뿌리째 뒤흔드는 거대한 대폭발이 되었다.
“……공기 중에 미세한 가루들이 불꽃을 만나 연쇄적으로 반응하여 큰 폭발을 일으키는 현상을 분진 폭발이라고 합니다.
원래라면 밀폐된 공간에서 행해야 하지만 이 폐광이 ‘다운트광’이었기에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운트의 반응 속도는 광석 중 최고라고 덧붙이는 태진. 물속에 있었기에 분진 폭발의 여파를 받지 않고 살아난 미소라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태진이 일으킨 분진 폭발은 동굴에 들어왔던 제국군들을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다. 거기다 그들이 진입했던 동굴 한쪽이 무너져 막혀 버려, 이제 산 너머에서 제국군이 쫓아올 걱정은 당분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샘을 헤엄쳐 나와 수분을 보충하며 잠시 쉬던 미소라는 태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대단하군. 그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미소라 씨의 정보 덕분입니다.”
폭발의 여파는 아직 동굴에 퍼져 있었다. 숨 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흩날리는 먼지들이 가라앉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태진은 일어섰다.
“해가 뜨기 전에 산 아래까지 내려갑시다. 거기서 하루를 보내고 밤을 틈타 노자마 강을 넘는 게 어떻습니까.”
“이의 없다.”
태진을 뒤따라 미소라도 일어섰다.
동굴의 반대편 길은 조금 더 울퉁불퉁하여 힘들었다. 비명을 질러 대는 다리 근육을 억지로 잡아끌어 동굴을 벗어난 태진은 흐릿한 달빛이 반겨 주는 아래에서 아주 잠깐 졸도했다.
그러다 미소라가 억지로 그를 일으켜 세워서 걷기 시작했고, 일정한 속도로 산 아래까지 하산했다.
산 중턱쯤 다다랐을 때 태진은 비로소 자신의 발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은 미소라였다.
“……쉬기로 하지.”
“아뇨…… 더 가야 합니다. 아직 멀었잖습니까.”
“너의 모습을 보고 말해라.”
미소라가 가리키는 대로 태진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희한하게도 발이 아닌 무릎으로 바닥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어라?’라고 생각했고 2초 뒤에 ‘내가 쓰러진 거구나.’라고 이해했다.
“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일단 다시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희한하게도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리 아래쪽이 두뇌의 명령 체계를 벗어나 파업을 선언한 모양이었다.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기를 거부할 정도로 걷는 자는 처음이다. 어떻게 되어 먹은 정신력이냐.”
미소라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대고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다시 발로 딛고 서면서 태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 정도로 버틴 것도 대단하다. 내 어깨를 잡아라. 산 아래까지는 어떻게든 내려가야 할 테니까.”
자신도 힘들면서도 미소라는 태진에게 어깨를 빌려 주었다. 그의 부축을 받고 태진은 힘겹게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노마자 강을 넘을 생각인 건가.”
“조금 쉬면…… 나아질 겁니다…….”
미소라가 한숨을 쉬고서 그의 어깨를 고쳐 잡았다.
“당분간 몸을 숨기자. 걷지도 못할 정도라면 조금 쉬는 걸로 될 리가 없지.”
“아니…… 미연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이 상태로 가 봤자 구하긴커녕 같이 잡힐 것이다.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해 봐라.”
태진은 아무 말도 못했다. 미소라에게 몸을 맡긴 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라는 흥 하고 혀를 찬 후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밤을 보낼 곳을 찾아내야 한다― 고 생각한 그때였다.
사사삭.
수풀에서 세 남자가 뛰어나왔다. 태진은 정신을 잃지 일보 직전이고, 미소라도 태진의 상태에 집중하고 있어 그들의 접근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일순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세 남자 중 한 명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국에서 온 자들인가?”
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재차 말했다.
“대답해. 왕국에서 온 자들인가?”
“……웬 놈들이냐.”
제국군은 아닌 듯했다. 제국군이라면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들을 덮쳤을 테니까.
“우리가 먼저 물었을 텐데.”
“웬 놈들이냐고 물었다.”
태진이 천천히 목을 들었다. 흐릿한 눈을 바로 뜨고 상대를 확인했다. 군복이 아닌 허름한 옷을 입은 세 남자는 각각 무기도 소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에 적의를 던지고 있진 않았다.
탁한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린 왕국에서 왔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맞군. 너희들을 데리러 왔다.”
“우리들을?”
미소라가 낮게 경계심을 표했다. 가시가 돋친 말투에 세 남자가 묵묵히 입을 다물었을 때,
“경계할 거 없어, 미소라.”
수풀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나타났다. 여성의, 그것도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태진의 눈동자가 한순간 생기를 되찾았다.
“……미연!”
세 남자의 뒤에서 나타난 것은 가면도 모자도 벗은, 다름 아닌 바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