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함께 제국군을 부숴 버립시다
벨린 요새를 탈환한 직후 태진은 동부 반란군에 전서를 띄웠다. 왕국군에 도착해 있던 전서조에 전서를 묶어 날려 보내 그들에게 벨린 요새 탈환전의 승리를 전했다. 중간에 제국군에게 방해만 받지 않는다면 전서는 빨리 넘어갈 것이다.
“제국의 반란군이 우리 편이니 든든하군.”
“텔리오트 황제의 전 시종장이었던 자가 두목이라고 했던가? 그쪽도 대단한 심장이야. 적진에 직접 침투해 있었다니.”
전서를 날려 보내는 태진의 뒤에서 하이듀크와 라스터가 각각 한마디 했다. 태진이 돌아보자 그들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쪽에도 강심장인 자가 셋이나 있군 그래.”
“무슨 말입니까?”
“전쟁터 한중간을 돌파해서 국경을 넘나드는 녀석이잖아, 넌.”
그리고 미연과 미소라도 포함된 말이었다. 태진은 기분 좋게 하하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직 칭찬하기에는 이릅니다.”
태진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지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은 요새의 회의실이었다. 비교적 바깥에 위치해 있었던 곳이라 창문만 열면 벨린 협곡의 전경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곧 알게 될 겁니다.”
속셈을 숨긴 듯한 표정으로 태진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그의 속내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 뒤였다.
요새 안에서 백두 기사대를 단련시키고 있던 미연은 북동쪽에서 전서조가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회의실로 달려갔다.
회의실에서는 전서를 받은 태진이 막 책상 위에 전서를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아, 미연아. 잘 왔어. 안 그래도 부를 참이었는데.”
태진이 가리키는 자리에 미연이 찰싹 앉았다. 하이듀크 등 좌중을 둘러보고서 태진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로필락을 칠 것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현재 로필락에는 제국군의 최대 규모가 모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벨린 협곡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들은 우리의 길목을 막고 공격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벨린 협곡을 빠져나가면 완충 지대가 있고, 그 완충 지대는 이미 제국군이 막아서고 있다. 왕국군은 벨린 협곡 전체를 점령했지만 그곳에서 나가는 길은 어차피 벨린 협곡이 주가 되기 때문에, 협곡의 정면이 제국군으로 막힌다면 병력 운용이 어렵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의 병력이 벨린 협곡을 빠져나갈 때가지 로필락과 싸워 줄 이들이 필요합니다.”
미연은 중간에 태진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걸 반란군에게 맡기는 거구나?”
“맞아. 어제 보냈던 전서로 남부 반란군 본부의 위치를 물어봤어. 오늘 대답이 돌아온 바로는 현재 이곳에 있는 것 같아.”
태진은 아키레마의 영토 한 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곳은 로필락에 지극히 가까운, 어떻게 보면 앞마당에 가까운 곳이었다. 제국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낮은 산지 중에서도 절묘하게 계곡을 가려져 있는 부분이었다.
하이듀크가 지도를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남부 반란군에게 그 역을 맡긴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동부 반란군은 아직 로필락 근처에도 당도하지 못했고,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남부 반란군뿐입니다. 그들이 기습전으로 병력을 끌어만 줘도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잠깐…… 그렇다고 해도 이 위치라면 전서조를 보낼 수도 없네. 애초에 우린 남부 반란군과 전서조를 나누지도 않았잖나?”
라스터가 걱정스레 말하자 하이듀크도 찬동했다.
“맞아. 남부 반란군에게 협조를 요청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미연이를 부른 겁니다.”
작전 회의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미연. 자신이 지목되자 미연이 눈을 크게 뜨며 태진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을 미연이 네가 맡아 줬으면 해.”
“내가?”
“완충 지대를 지나서 남부 반란군 본부에 전서를 전달해 줘. 그리고 그들에게 협조 요청을 받아오는 거야. 할 수 있겠어?”
태진의 말에 미연이 눈을 깜빡이더니 냉큼 큰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나한테 맡겨!”
너무나 자신감이 넘쳤기에 오히려 믿기 어려웠다.
“미연의 전투 실력은 알지만…… 설득할 수 있을까……?”
“나도 동감이네, 태진. 미연은 설득에는 안 맞아.”
“그렇습니까? 전 잘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맞아! 나도 그 정도는 할 줄 아는걸?”
미연은 치더라도 태진이 저렇게 말하니 믿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 단장의 표정은 쉬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못 믿어?”
불만스러운 듯 미연이 인상을 찡그리자 두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이 의견을 찬성하려 했다. 그때 회의실을 문을 열고 은발을 휘날리며 미소라가 들어왔다.
“그 임무. 내가 맡도록 하지.”
“어라, 미소라?”
미연을 잠깐 본 뒤 미소라는 태진에게 말했다.
“잠입이라면 미연만큼은 할 줄 안다. 그리고 그녀보다는 이성적이지. 어떤가.”
태진은 잠깐 그를 쳐다보고는 대꾸했다.
“처음에는 당신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미소 족이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주지는 않을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시도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괜찮겠습니까?”
“이 여자보다는 믿음직스럽지 않나.”
미소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여자는 뒤늦게 날뛰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대드는 그녀를 적당히 무시하고 미소라는 재차 말했다.
“내가 맡겠다.”
“……좋습니다. 맡기도록 하지요. 성공해 주십시오.”
태진이 주억댔다. 하이듀크와 라스터도 그제야 표정이 풀렸고, 입술을 삐죽이는 미연만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테이블을 탕탕 내리쳤다. 하지만 누구 하나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날 저녁. 해가 지자 미소라는 두건으로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린 채 요새를 떠났다. 그 복장은 숲지기 때와 같은 것이었기에 그는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잠깐 지어 보였다.
“잘 부탁합니다.”
“실패하면 죽을 줄 알아!”
태진의 격려와 미연의 으름장을 뒤로 하고 요새를 나간 미소라는 계곡을 타고 올라 단숨에 협곡을 지났다.
로필락까지는 그의 걸음으로는 아무리 늦어도 3일 이상은 걸리지 않는다. 거기다 크고 작은 산지가 이어지는 지형은 20년 넘게 산에서 생활해 온 미소라에게는 너무나 익숙했다.
미연을 구하러 갈 때보다 제국군이 밀집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낮에는 휴식을 취하며 나무 위를 달렸고, 밤에는 뛰거나 걷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그가 남부 반란군 본부에 도착했을 때는 요새를 출발한 지 정확히 2일이 경과했을 무렵이었다.
“남부 반란군 두목을 만나고 싶다.”
숲 깊숙한 곳의 본부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갑작스레 나타난 미소라의 모습에 기겁하는 것은 당연했다. 소리치려는 그의 입을 막고 미소라는 다시 한 번 밝혔다.
“로츠왈드 왕국군에서 왔다.”
전서를 꺼내 보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리나케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두세 명의 남자가 밖으로 나와 미소라를 본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동부 반란군과 다를 없는 구조의 본부에서 미소라는 그들의 두목을 만났다. 미소라가 건넨 전서를 찬찬히 읽은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서에 문장이 찍혀 있긴 하지만 당신이 로츠왈드 왕국군에서 온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 여기의 위치는 어떻게 알았나?”
“동부 반란군에게서 들었다.”
미소라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두건을 벗었다. 묶어 두었던 은발이 길게 풀리고 은빛의 눈동자가 한층 더 분명히 보였다.
두목과 함께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단 부하들이 한순간 입을 벌렸다.
“미소 족…… 로츠왈드에는 신의 전사와 미소 족이 있다고 들었을 때에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이었군!”
“그 전서를 작성한 자가 현신의 전사다.”
미소라는 다시 두건을 맸다. 두목은 숨을 고르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기 적혀 있는 것이 전부요?”
“그렇다.”
“럭커에게서 미리 연락이라도 받지 않았다면 정말 간이 떨어질 일이군…….”
천천히 전서를 한 번 더 확인한 두목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이 로츠왈드식의 인사를 사실을 미소라는 뒤늦게 깨닫고 손을 맞붙잡았다.
“함께 제국군을 부숴 버립시다.”
“음.”
설득은 예상보다 쉽게 성공했다. 미소라는 신기한 기분이 들어, 흔치 않게 두목에게 물었다.
“우리를 너무 쉽게 도와주는 것 아닌가? 현신의 전사는 당신들이 쉽게 협조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후후후. 현신의 전사가 우리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 비록 지역은 다르지만 우리도 반란군이오. 제국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이번 전쟁은 신황제의 독단으로 벌어진 것이라는 사실쯤은 우리도 알고 있소. 언제 일어날지 오히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두목은 조소를 띄웠다. 그것은 눈앞의 미소라가 아닌 제국의 황성을 향한 것이었다.
“그때 우리 앞에 희망이 나타난 것이오. 우리 반란군들은 이때까지 이렇게 하나로 묶인 적이 없었소. 그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럭커라오. 그 럭커가 전폭적으로 믿는 자들이라면 우리도 믿을 수 있겠지. 안 그렇소?”
미소라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남부 반란군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전서의 전달과 설득만이 아니라 남부 반란군에 남아 왕국군과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조절하는 것까지였다.
전서에는 작전 실행일과 예상 경로까지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미소라는 태진에게 미리 들은 정보를 토대로 두목과 기습전을 준비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반란군 동료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만 해도 시간은 제법 걸렸다. 이미 레키엔 부대의 남하를 방해하고 있는 반란군도 있었기에 나머지 인원은 모두 추려 로필락을 공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태진이 요구한 것은 기습전.
“게릴라전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여 그들의 신경을 옆으로 돌려 주십시오. 그렇지만 너무 깊숙이 들어가 그들에게 잡히는 실수는 하면 안 됩니다. 최초의 기습전이 시작되면 우리도 협곡에서 출발하겠습니다.”
태진의 말을 상기하며 미소라는 반란군 무리와 함께 완충 지대 가까이로 접근했다. 미소라가 안내하는 길은 반란군들이 다니던 길보다 훨씬 은밀했다.
산의 지형을 파악하는 데 도가 튼 미소라는 완충 지대 바깥에 자리 잡은 제국군들의 눈을 피해 반란군을 이끌었다.
“첫 번째는 저들이겠군.”
수풀에 몸을 숨긴 반란군의 두목이 가리킨 자들은 마법사가 포함된 부대였다. 다른 부대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피해 보고는 늦은 반면에 불을 피웠을 때 협곡에서는 발견하기 쉬운 위치였다.
이 부대를 처음으로 정한 것은 남부 반란군의 두목이었다. 그는 미소라가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손을 들었다.
“공격!”
짧게 끊으며 손을 앞으로 뻗자 숲 속에서 일제히 궁사들이 일어섰다.
화살을 재는 것과 동시에 불화살이 날아간다!
휘리리릭!
불을 머금은 화살이 적군의 진지에 쏟아졌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에서 숨어 있던 반란군이 북쪽과 서쪽에서 부대를 급습했다.
“하아아앗!”
“전부 죽여라!”
흉흉한 소리를 내뱉고 달려 나가는 반란군들의 공격을 제국군은 쉽게 막아 내지 못했다. 부대 일부가 괴멸당한 뒤에야 지휘관이 전세를 가다듬었다.
“동쪽 산이다! 마법사들 준비해!”
갑작스런 공격에 피신해 있던 마법사들이 명령을 받고 뛰어나왔다. 다섯 명이 모인 그들은 반란군이 숨어 있는 방향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두목이 한 번 더 외쳤다.
“활! 공격!”
주문보다 빠르게 수십 발의 화살이 허공으로 가르고 부대로 쏟아졌다. 미처 영창을 끝내지 못한 마법사들이 긴급히 대피하다 저마다 화살에 상처를 입었다. 그 사이 반란군들이 마법사들을 처치하고 부대 깊숙이 들어갔다.
“불화살 준비해라!”
부대 안까지 깊숙이 침투한 반란군이 기름을 뿌렸다. 이미 붙어 있던 천막들을 기름으로 더욱 불이 활활 타올랐고, 그곳에 두목은 한 차례 더 불화살을 쏟아 부었다.
“돌아간다!”
목적을 이루자 반란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철수했다. 불길을 피했던 제국군이 반란군들을 쫓아 들어오면서 몇 번 더 교전이 펼쳐졌다.
그것을 두목은 훌륭한 지휘로 이끌어 순식간에 제국군을 따돌렸다. 미소라가 일러준 경로를 타고 숲 안으로 숨은 반란군을 제국군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전소는 피했지만 제국군이 부대에 입힌 피해는 막강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연기를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 동안 벨린 협곡의 태진이 그것을 확인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협곡의 정상에서 몸을 숨기고 제국측을 살피고 있던 태진은 먼 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포착했다.
확장되었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태진은 협곡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시작됐습니다!”
협곡의 출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이듀크가 검을 치켜 올렸다.
“전군! 완충 지대를 뚫는다!”
“아자! 내가 먼저!”
돌격의 선봉에는 미연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말을 달려 나가는 그녀의 존재는 상징적으로도 전력적으로도, 왕국군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투신의 전사의 뒤를 따르는 왕국 기사들의 마음속엔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협곡에서 쏟아져 나오는 왕국군은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백두 기사대를 정점으로 창같이 길쭉한 형태로 제국군의 진형에 충돌했다.
그것은 제국군에 있어서 매우 의외의 전술이었다.
완충 지대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지휘관은 전투 시작을 알리는 부관의 보고에 경악했다.
“뭐라고? 녀석들이 중추를?”
그가 천막 밖으로 달려 나가서 두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는 더욱 기겁했다. 양쪽에서 포위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왕국군의 창은 제국군의 방패를 완전히 깨고 있었다.
넓게 퍼져서 공격했을 때에는 그 집중력이 강하지 않았다. 태진은 협곡을 넓게 방어하고 있는 제국군의 전술을 역이용하여, 아예 처음부터 한 점만을 노리기로 작정했다.
협곡 위에서 바라보고 있던 태진은 잇따라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 이 녀석들! 포위해라! 중간을 끊으란 말이다!”
“그, 그것이! 좀 전부터 반란군 녀석들이 곳곳에서 기습전을 벌이고 있어서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뭣이라!”
지휘관의 머릿속으로 벼락이 내려쳤다.
“이, 이 건방진 반란군 놈들이! 왕국군에 붙은 거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마치 부러뜨리듯 땅바닥에 집어 던진 그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부대 복구는 나중이다! 지금 곧바로 병력 전부를 투입해라! 놈들의 허리를 잘라서 포위한다!”
완충 지대가 뚫리면 로필락까지 금방이다. 지휘관은 왕국군을 반드시 이곳에서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지휘대로 전쟁은 이끌어지지 않았다.
완충 지대를 감싸고 있던 제국군의 부대들은 반란군들에 의하여 반수 가까이 파괴되고 있었다. 중추를 파고든 왕국군의 돌파와 함께 바깥에서부터 날아든 반란군의 기습전까지 맞받아쳐야 했다.
거기다 창의 끝. 미연 휘하 기사대의 돌격은 장난이 아니었다.
“비켜, 비켜!”
선두에 있던 미연은 귀찮은 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애초에 말 같은 건 필요하지 않는 그녀의 검술이었다. 전장 한가운데에 뛰어든 그녀를 양 사방에서 제국군의 검이 노렸다.
“비키라니까, 이 자식들아?!”
미연의 칼이 한 바퀴 돌았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제국군의 손목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자신들의 손목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는 그들의 가슴팍을 밟고 미연이 날아올랐다.
옆에 서 있던 말의 안장을 밟고 반대쪽으로 뛰어내린 그녀의 기세는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몸을 한 바퀴 돌면서 한 명의 목을 베어 넘기더니 그의 시체를 짓밟으며 앞으로 칼을 찔렀다. 심장을 꿰뚫린 군인의 비명을 뽑은 칼로 잘라 낸다.
그의 머리가 땅바닥에 닿기 전 시체를 걷어차 앞길을 뚫은 그녀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우왁!”
갑작스레 눈앞에서 나타난 미연의 칼을 막기에는 제국군의 실력이 부족했다. 검을 들기도 전에 어깨 위가 허전해지는 기분을 느꼈고, 뒤집힌 하늘이 시야로 뛰어 들어옴과 함께 수명을 다했다.
미연은 돌파는 멈추지 않았다. 협곡에서부터 완충 지대의 끝까지 다다른 미연의 눈이 재빠르게 사방을 확인했다.
전투 감각이 날카롭게 선 그녀의 감각은 태진의 수준과 비슷했다. 한순간에 제국군의 뒤쪽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남자를 발견해 낸다.
“아서, 뒤를 맡길게!”
뒤쪽에서 싸우고 있던 미소라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미연이 그 자리를 박찼다. 날아오르든 제국군의 어깨를 밟고 뛴 그녀의 모습에 적군 아군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눈을 모았다.
생기 어린 눈동자의 그녀가 아주 잠깐 허공에 떠 있다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녀가 발을 디디자마자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제국군이 낙엽처럼 쓰러져 내렸다.
“비켜라아!”
걸리는 모든 것을 베어 쓰러뜨리며 미연이 지휘관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지휘관이 그녀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명들이 가까워진다고 느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미연과 그의 간격이 10m도 채 되지 않았다.
“네놈이 여기 대장이냐?”
“뭐, 뭣!”
부관이 급히 검을 뽑으려 했다. 손잡이를 붙잡은 그의 손을 어느새 앞에 나타난 미연이 검집째로 걷어찬다!
뻑! 명확히 손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체내를 달리는 고통을 느끼며 부관이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어느새 몸과 분리된 입은 폐에서 공기를 끌어 올리지 못했다.
찰나에 죽음을 맞이한 부관의 목을 멍청히 내려다보는 지휘관의 목에 미연은 칼날을 들이댔다.
“딱히 미안한 감정은 없어. 알잖아? 세상사가 이렇다는 거.”
히죽 웃고 미연의 칼은 빛이 되었다.
지휘관은 고통도 느끼지 않고 그 자리에서 깔끔하게 절명했다.
그 모습은 태진은 협곡의 위에서 모두 지켜보고 몸을 돌렸다. 가파른 길을 지나 계곡을 내려온 그는 왕국군의 후미를 향해 뛰었다.
전투 중 눈을 돌린 하이듀크는 협곡 위에서 사라진 태진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것을 뜻하는 바를 그는 정확히 인지했다.
“투신의 전사가! 지휘관을 처리했다! 지휘관을 잃어버린 녀석들 따위, 별거 아니다! 뚫어라!”
하이듀크의 응원 섞인 명령에 왕국군의 사기는 더욱 더 올라갔다. 제국군의 마법 공격을 바람의 마법으로 막아 낸다. 제국군의 방패를 뚫은 창이 되어 기사들은 완충 지대를 벗어나 본격적인 제국의 영토로 들어섰다.
선두에 선 미연은 기사대와 다시 합류하여 그들을 이끌었다.
기어코 모든 병력이 완충 지대를 벗어나 제국 영토에 도달했을 때에는 제국군의 숫자는 절반 이하로 감소해 있었다. 창의 기세는 막지 못한 피해였다.
지휘관을 잃은 그들은 얼마 버티지도 않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태진은 그것을 가만두지 않았다.
“이대로 로필락으로 진군합니다!”
완충 지대를 벗어난 이상 이미 제국이었다. 태진의 속전속결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부상자를 추슬러 정도가 심한 자는 협곡의 수비대에게 인도한 뒤 왕국군은 쉬지 않고 북상했다.
3일 뒤 전군이 로필락을 눈앞에 두고 멈췄을 때에 그들은 놀라운 광경과 맞닥뜨렸다.
“반란군들이다…….”
남부 반란군이었다. 그들이 로필락의 서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왕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습전과 함께 이 정도까지 일이 진행되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한 태진에게 미소라가 남부 반란군의 두목을 데리고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었소. 당신이 소문의 현신의 전사이오?”
“그렇습니다. 완충 지대에서의 도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니오. 우리도 원해선 한 일. 오히려 이런 기회를 준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오.”
왕국군의 총사로서 두목을 맞이한 태진은 그들과 함께 로필락을 공격할 것을 약속했다.
3일 동안 행군을 해 온 기사들 앞에 서서 라스터는 소리 높여 외쳤다.
“적군이 저기 눈앞에 있다! 저곳을 점령하면 그동안의 피로를 풀고 편히 쉴 수 있다! 기사들이여! 휴식을 원하는가!”
“예―!”
“그럼! 저 로필락을 함락하라!”
우오오오!
잇따른 승전에 왕국군의 사기는 떨어질 줄 몰랐다. 거기다 라스터와 하이듀크가 교대로 하여 그들의 용기를 북돋고, 전투의 선봉에서 미연이 직접 이끌자 왕국군은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신의 전사들이 있다! 로필락을 향해 전군 돌격!”
로필락 시는 이미 만반의 수비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반란군의 진지가 구축되었고 왕국군이 완충 지대를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은 마당에 남부 주둔군 사령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주민들을 대피시킨 후 부대를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완벽 대비하고 있었다.
태진은 먼 곳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읽었다. 로필락 시를 점거하고 있는 제국군의 수는 4천. 반란군과 연합된 왕국군의 숫자에는 못 미친다. 그동안 왕국군과 반란군이 그들에게 입힌 소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수치였다.
전황을 떠올리고 있던 태진의 옆으로 미연이 다가왔다.
“내가 할 일 있어?”
“물론이지.”
태진은 그녀에게 백두 기사대와 흑안 기사단의 일부를 넘겼다. 수백의 인원이 된 그녀의 휘하 기사대로 미연은 로필락 시를 멀리 돌아 동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 사이 하이듀크와 라스터가 남쪽에서 정면으로 로필락 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쪽에서 왕국군이 쳐들어온다!”
“서, 서쪽에서는 반란군입니다!”
지휘관은 사령부에서 냉철하게 명령을 내렸다. 일부의 병력을 사령부 주변에 남겨 놓고 왕국군과 반란군을 막으러 보냈다.
그것이 태진이 원하는 바였고, 그 틈을 타 미연이 동쪽에서 로필락 시로 침투했다.
다른 곳에 비해 병력의 수가 적은 공간은 미연의 기사대가 파고들었다. 사령부를 향해 거침없이 말을 달리던 그 중간,
“걸려들었다!”
그들의 주위의 건물에 제국군이 나타났다. 기사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선 그들이 손을 뻗었다. 그 행동은 명확히 마법사의 것이었다.
로필락의 지휘관도 다른 방향에서 적이 들어올 것을 인지하고 마법사를 배치해 놓은 것이었다.
마법사 부대의 대장의 명령에 따라 마법사들의 손에서 일제히 불꽃의 마법이 터져 나왔다.
“대지를 녹이는 지옥의 업화!”
거대한 불꽃의 덩어리가 기사대를 노리고 쏟아졌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 대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때,
미연도 마찬가지로 웃음을 떠올렸다.
“마법이다!”
기사대 중 몇 명이 검을 버렸다. 그들이 제각각 손을 뻗어 주문을 영창했다.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오름!”
기사대를 감싸고 거대한 회오리가 치솟아 올랐다. 마법사들의 마력핵이 동시에 충돌하여 만들어 낸 거대한 마법은 쏟아지던 불꽃들을 하늘 높이 날려 버렸다.
“마, 마법사들이?”
“침투를 기사만 하란 법 없잖아!”
제국군이 당황하는 사이 미연이 말 위에서 뛰어올랐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지붕 위에 올라선 미연의 칼날에 마법사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달려!”
기사대는 미연의 명령을 받고 사령부를 향하여 직진했다. 반대쪽에서도 매복하고 있던 제국군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 미소라가 미연과 마찬가지로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미연과 미소라가 건물 위의 제국군을 처단하고, 아래에서는 아리스와 아서의 지휘 아래 제국군을 돌파하는 기사대.
그들은 순식간에 사령부 건물에 도달했다.
그 사이 왕국군과 반란군의 공격은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 제국군은 왜 마법이 먹히지 않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불은 바람을 이길 수 없다.
공격을 포기한 마법사들은 쏟아지는 불꽃을 방어하는 것에 집중했다. 되려 날아온 마법에 제국군의 병력만 소모되고 있었다.
마법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자의 짓이었다. 왕국군의 총사, 태진에 대한 공포가 제국군 사이에 퍼진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공포에 질린 제국군의 처단은 금방이었다. 공격의 의욕을 잃고 만 그들은 왕국군과 반란군의 협공에 밀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사령부의 점령이었다.
사령부에서 거대한 바람이 터져 올랐다. 회오리 같은 그것을 본 왕국군이 환희의 함성을 내질렀다.
“투신의 전사님이 사령부를 접수했다!”
“로필락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왕국군의 기세를 올렸고, 제국군의 사기를 꺾는 일이 되었다.
끝까지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제국군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지휘 체계를 잃으면 웬만한 군인들은 싸울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 틈을 왕국군과 반란군이 쇄도해 들어가 완전하게 로필락을 점령했다.
태진은 시내를 청소하는 기사들 사이를 달려 사령부로 들어갔다. 사령부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연이 아쉽다는 듯 땅바닥을 찼다.
“지휘관은 못 잡았어. 벌써 튀었던데 그 녀석.”
“부하를 버린 채 혼자서 도망가다니 비겁한 자로군요.”
아리스가 토를 달았다. 미소라와 아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태진도 아쉬움을 접고 돌아섰다. 아직 로필락의 제국군 잔당을 정리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는 기사대를 이끌고 하이듀크, 라스터와 합류했다.
로필락에서 도망친 지휘관은 부관과 일부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미연이 들이닥치기 전에 겨우 시를 빠져나온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도망치다, 나흘 후 대로에서 겨우 구세주를 만났다.
“레, 레키엔 대공 저하!”
남하 중이던 레키엔의 부대와 마주친 것이다. 직함도 잊은 채 그는 꼴사나운 자세로 레키엔의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부 주둔군 군단장이로군. 로필락을 버린 채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지?”
“그, 그것이―”
군단장은 말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레키엔이 사나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며 이죽댔다.
“그렇군. 패배하고 도망쳤다 이건가?”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레키엔의 말은 날카로웠다. 군단장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레키엔임에도 땅바닥에 박을 듯이 머리를 숙였다.
“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적이 너무나 간사하여 그만!”
“적이 너무나 간사하였다고? 네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고나 있는 게냐!”
레키엔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나의 아버지를 암살한 비겁한 놈들이다! 그들의 간계 정도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
“마, 망극하옵니다!”
“흥!”
레키엔은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움칠 놀라며 군단장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목도한 것은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차가운 검광이었다.
“저, 저하―!”
그 한 마디를 남겨 놓고 그의 목은 몸통에서 달아났다. 피를 뿌리는 몸을 보기 싫다는 듯 걷어차 쓰러뜨린 레키엔은 차갑게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적에게 패배하여 도주한 주제에 말이 많다! 이곳에서 들짐승의 먹이나 되어라!”
다시 말에 오른 레키엔은 그와 함께 도망쳐 온 다른 군인들도 모조리 죽이라고 명했다. 발악하던 이들이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된 뒤 버려졌다. 레키엔의 부대가 지나간 다음에 남은 것은 몇 구의 시체뿐이었다.
“놈들이 로필락까지 점령했다 이건가.”
레키엔은 남쪽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보기보단 꽤 하는구나. 허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이 몸께서 너희들을 직접 심판해 주겠다!”
사나운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그의 음성은 부하들마저 경기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레키엔의 흉흉한 기세와 함께 그의 부대는 로필락을 향하여 빠르게 진군했다.
로필락 점령 후 태진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은 피신했던 시민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근처 야산으로 도망쳐 언제 자신들에게도 피해가 올지 모른다고 공포에 떨고 있던 그들 앞에 태진이 직접 나타났다.
소문의 흑발을 눈으로 본 그들은 만나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쇼!”
태진은 아주 살짝 표정을 무너뜨렸다가 회복했다.
“일어나십시오. 여러분들을 해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부탁이 있어서 온 것입니다.”
그의 말에 시민들이 한 명씩 고개를 들었다. 태진이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을 저 멀리로 물린 후에야 그들은 몸을 일으켰다.
“부, 부탁……?”
“예, 그렇습니다. 저희가 먼 길을 왔던 터라 식량이나 물자가 조금 부족하게 되어서 그런데 여러분들의 몫을 좀 나눠 주시겠습니까?”
시민들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강탈이 아닙니다. 정당하게 값을 치르고 여러분께 사겠다는 의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태진의 말을 시민들이 이해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침략자나 다름없는 왕국군이 매우 예절 바른 상도덕을 내민 것이었다.
태진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을 설득하여 도로 로필락으로 데리고 왔다. 전쟁으로 인하여 파손된 건물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포로가 된 제국군에게 수리, 재건하라고 맡겨 놓고, 나머지 시민들은 왕국군을 상대로 물자 보충을 돕게 부탁했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왕국군이 어색한 듯 대화조차 하지 않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이젠 말 그대로 장사꾼과 손님 같은 관계가 되어 값을 흥정하는 수준이 되었다.
사령부에서 태진은 그 보고를 듣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들에게 왕국군이 악당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현재 그가 목적으로 하고 있는 전쟁의 끝은 제국 황성의 붕괴. 그러고 나면 분명 이 땅을 통히는 것은 로츠왈드 왕가가 된다. 그때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민심을 사로잡아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업은 결국 왕국군이 로필락에서 체류한 지 하루 만에 시민들이 그들을 크게 반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제국군 관리를 맡고 있던 남부 반란군의 두목은 전쟁 전보다 생기가 돌게 된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부하들에게 제국군 포로들의 작업을 감시하도록 지시한 뒤 그는 오전 중에 사령부를 들렀다.
정비를 하고 있는 기사들을 지나던 그는 미소라와 마주쳤다.
“현신의 전사는 어디 있지?”
“사령부 회의실에 있을 거다. 무슨 일인가.”
“그에게 할 말이 있다.”
미소라는 미연에게 자리를 비운다고 말만 던져 놓고 그를 안내했다. 이젠 왕국군의 임시 사령부가 된 건물 2층에 마련된 회의실에서는 태진과 하이듀크, 라스터가 모여 앞으로의 진로를 논의하고 있었다.
두목이 나타나자 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회의가 끝나면 만나 뵈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양 군의 우두머리 격인 두 사람이었지만 어제의 전쟁 이후 만난 적이 없었다. 미소라가 나간 후 두목은 준비되어 있던 의자에 앉았다.
“바쁜 것 같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겠소. 우리 남부 반란군을 왕국군에 편입시켜 주시오.”
두목은 어투는 진지했다.
“당신과 그 흑발의 여검사. 기사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소. 삼십 년 전 제국에게서 왕국을 독립시킨 건국 영웅이라고 하더군. 거기다 럭커에게서도 당신들의 정체는 지겹게 들었소. 사실 난 전설 같은 것은 믿지 않지만 신의 전사라면 제국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니 믿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소. 물론 그들과 당신들이 동일 인물임에 아직 확신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말을 끊은 그는 태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적어도 우리 반란군을 이끌 만한 인재라고는 여겼소. 그래서 부탁드리는 바이오. 우리 남부 반란군을 왕국군에 정식으로 편입해 주시오.”
“……괜찮겠습니까, 정말로?”
“이미 부하들과도 얘기한 결과이오. 단,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가 되겠지만.”
“물론입니다. 이 전쟁이 끝난다면 당신들은 이제 반란군이 아니게 될 테니까.”
지금은 반란군이지만 그들도 원래는 아키레마 제국의 선량한 시민들이었다. 제국이 멸망하면 이제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갈 것이다.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어떡하시겠소. 우리를 받아 주시겠소?”
태진은 하이듀크와 라스터에게 눈짓했다. 그들의 의견을 묻는 행동이었으나 그들은 수수방관하며 선택을 태진에게 맡겼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좋습니다. 기한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부 반란군을 정식으로 왕국군에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대신 반란군은 두목이 직접 이끌어 주십시오. 지시는 내리겠지만 그에 대한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래도 정규군인데, 괜찮겠소?”
“아무리 저를 받아들였다지만 지금껏 두목으로 있던 당신보다 제 존재가 강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최소 기사단장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부하들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태진은 목례를 하며 예를 갖췄다. 정규군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반란군을 이끌어 아키레마와 싸워 온 자에 대한 예의였다. 그 모습에 두목은 굳은 얼굴을 풀고 지그시 미소를 그렸다.
“내 눈이 아직 나빠지진 않았군.”
이로서 왕국군의 구성은 흑안 기사단, 신웅 기사단에 남부 반란군이 추가되었다. 두목은 정식으로 성명을 밝히고 회의에 참여했다.
“켈루그 두목, 부하들에게서 보고는 없었습니까?”
“오늘 아침에 연락이 왔었소. 로필락에서 도주했던 지휘관 이하 여섯 명이 레키엔 대공 부대와 접촉하여, 전원 처형당했다고 하더군.”
“듣던 바대로군.”
하이듀크의 말에 라스터가 덧붙였다.
“레키엔 대공은 포악한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네. 분명 우리를 두고 도망쳤다는 것에 분노하여 모두 죽였을 거야.”
“그 후에 부대를 이끌고 로필락을 향해 쭈욱 남하하고 있다고 하오. 이 속도라면 오 일 안에 로필락에 당도할 거라고 생각되오.”
“기습전은 아직 유효합니까?”
“그렇긴 하지만 현재 레키엔 대공 부대에 편입되는 부대들이 늘고 있는 실정이라 딱히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소.”
켈루그는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태진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시디 노트니에서 로필락까지 뻗어 있는 남부대로, 레키엔이 오고 있는 방향은 바로 이 길이었다.
로필락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본 태진은 간단히 결정했다.
“지금 즉시 연락해서 기습전을 중지하여 남하라고 하십시오. 오늘 밤 곧장 우리는 로필락을 출발합니다. 식량, 물자 보충을 해 질 때까지 끝내라고 해 주십시오.”
그는 지체 없는 지시에 하이듀크가 난색을 표했다.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안 그래도 지금 기사들은 많이 지쳐 있어.”
“우리의 출발이 늦은 만큼 레키엔 대공 부대는 로필락에 더욱 가까이 올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또다시 전쟁의 피해를 줄 순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을 끊는 태진에게 더 이상 항변할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그들은 서둘러 사령부 밖으로 빠져나가 기사들에게 태진의 지시를 전달했다.
어수선함도 잠시. 기사들은 누구보다 먼저 뛰어다니는 신의 전사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현신의 전사, 그리고 누구보다 앞서 움직이는 자는 투신의 전사였다.
그 점을 누군가 말한 것도 아님에도 기사들은 동시에 그 사실을 떠올렸다. 그 후부터 그들의 행동은 단장들이 바랐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태진의 지시대로 해 질 녘에는 준비가 끝나 있었다. 시민들에게 포로들의 처분을 맡기고 왕국군은 해가 떨어짐과 동시에 로필락을 출발했다.
왕국군은 필요 최소한의 휴식 시간을 제외한 전 시간을 행군에 할애했다. 대로를 타고 올라가는 와중에 제국군의 잔당들이 간간히 기습해 왔지만 태진의 명대로 사주 경계를 교대로 하고 있던 기사들에게는 큰 피해가 가지 않았다.
로필락에서 하루를 지난 대로의 중간에서 태진은 다시 행군을 출발시켰다. 그 직후 동쪽에서 전서조가 한 마리 날아 들어왔다.
그 전서조는 일단 켈루그의 손에 앉았다. 전서를 푼 그는 새를 부하에게 넘긴 뒤 말을 달려 대열의 선두에 있던 태진에게 다가갔다.
“럭커에게서 연락이오. 나보단 총사님이 보는 게 맞겠지.”
낯간지러운 호칭에 태진은 볼을 긁적이며 전서를 받았다.
“말을 내가 몰아 줄게.”
옆을 달리고 있던 미연이 고삐를 대신 잡았다. 태진은 달리는 말 위에서 전서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전서의 내용은 간단했지만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우선 동부 반란군이 본격적으로 수도로 진격했다는 내용이 있었고, 그와 함께 북부 주둔군이 본격적으로 그들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적혀 있었다.
우선적으로 그들과의 교전 때문에 진격이 늦어질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말고 시디 노트니를 향하라고 알리고 있었다.
태진은 고삐를 다시 받은 멀리 있던 하이듀크와 라스터를 불렀다. 전서의 내용을 전하자 라스터가 목소리를 낮춰서 두목에게 말했다.
“동부 반란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이오?”
“적어도 남부 반란군의 두 배 가까이는 될 것이오. 애초에 땅덩어리가 큰데다 거기는 카알트라즈라는 훌륭한 기지도 있었으니까. 뭐, 몇 년 전부터 위장이었지만.”
“카알트라즈가 위장?”
“그렇소. 실질적으로 그곳에서 반란군에 속해 있는 자는 얼마 안 될 것이오. 럭커가 산적이나 수적들을 끌어 모아 반란군처럼 꾸며 놓은 것이 아마 삼 년 전쯤일 텐데, 동부 반란군 본부는 그 이후에 내륙으로 옮긴 게요.”
카알트라즈 정벌 자체가 럭커의 함정이라는 소리였다. 그곳이 노려짐에 따라 오히려 다른 반란군들이 황성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쉬워졌고, 럭커는 그런 반란군들을 하나로 뭉쳤다.
“럭커란 자…… 만나진 못했지만 대단한 수완가로군.”
하이듀크도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북부 반란군에도 아마 선이 미칠 테니 그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도록 하지요.”
태진은 켈루그에게 부탁해 럭커에게 답장을 보내게 했다. 내용은 ‘해결되는 대로 수도로 향할 것.’ 전서조가 날아오른 뒤에도 왕국군의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하루가 다시 흐르고 반나절이 흘러간 시점에서 태진은 문득 전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눈치 챘다.
제국의 남부는 국경 부근을 제외하면 평원이 펼쳐져 있다.
그렇기에 일부 언덕이 방해하는 것만 제하면 시야는 뻥 뚫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지금은 그 언덕이 태진의 관찰을 방해하고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채 목을 뽑아 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그렇기에 태진은 전군을 그 자리에 정지시켰다.
“전군 정지!”
하이듀크의 구령하에 일사불란하게 기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태진은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부탁해 놓고 말에서 내렸다.
“태진아?”
미연이도 그가 하는 행동에 입을 벌렸다. 태진은 말에서 내리더니 몸을 완전 바닥에 붙여, 귀를 땅에 댔다.
눈을 감은 그는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들었다. 미연은 물론 주변의 모든 이가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그렇게 무언가를 하고 있던 태진이 곧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보도로 한나절 정도 앞에 사천 명 정도 규모의 부대가 있습니다. 상황으로 보아 레키엔 대공 부대가 확실시됩니다.”
말 위에 오르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태진 때문에 주변인들의 이해가 오히려 느렸다. ‘출발 안 하십니까?’ 라고 묻는 듯한 태진의 눈빛을 받으며 하이듀크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소리로 판별한 것이지만 아마 비슷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왕국군과 보폭의 진동이 비슷하니까. 거리상으로 계산해야 해서 정확한 계산은 힘들지만 아무튼 그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러니까 방금 그게…… 땅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는 거야?”
“예. 잘못됐습니까?”
백두 기사대는 미연과 함께 태진을 보호하듯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소라도 그의 말을 들었다.
“미소 족의 숲지기도 땅의 소리를 듣고 산짐승이나 침입자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한다. 허나 한나절 거리에 떨어진 부대의 소리를, 그것도 인원수를 파악해 낼 수 있다는 얘기는 처음이군.”
“뭐, 들리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태진은 웃으며 받아쳤다.
일단 왕국군은 재차 출발했다. 적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들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로지 북쪽을 보고 꾸준히 행군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태진이 말한 대로 한나절이 지난 새벽녘. 해가 진 후 휴식을 취한 왕국군은 새벽 별빛을 받으며 평원을 지나던 중 멀리서 비치는 횃불의 옅은 빛을 발견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역시 태진이었고, 그 다음이 미연이었다.
“불빛이다. 저거, 제국군이지?”
“맞아.”
미연의 손가락을 따라 지휘자들의 시선이 옮겨 갔다. 흐릿해서 눈에 힘을 주고 가늘게 떠야지만 보이는 위치에 불빛 몇 개가 떠다니고 있었다. 완전히 왕국군의 정면에서, 남쪽으로 천천히 진행하고 있었다.
태진은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에 진지를 만듭시다.”
하이듀크는 되물어보지 않고 왕국군을 정지시켰다. 즉각 진지 구축이 시작되었고 해가 뜰 즈음이 되어서는 이제 간이 천막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그 사이로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의 진지가 완성된 시점에서 태진은 다시 한 번 제국군 측을 살폈다. 그들도 왕국군의 존재를 알고 평원 위에 멈춰서 진지를 만들고 있었다.
양측이 서로가 훤히 보이는 위치였다. 태진은 주변을 둘러보고서 회의실용 천막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훤히 보이는 평원 위니 달리 전술을 짜기도 힘들겠군요.”
어느 쪽으로 병력을 움직이든 훤히 보이는 위치다. 그렇기에 태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한 가지 묘안이 있습니다만 들어 주시겠습니까?”
하이듀크와 라스터, 켈루그, 그리고 미연. 각 지휘자들은 총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태진은 잠깐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현재 전 하나의 마력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일정이 웬만큼 빡빡했기 때문에 그 이상은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두 개째를 운용 중이지만, 그리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당장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라도 제 마법을 바라신다면 지금 즉시 포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움칠한 것은 하이듀크였다. 라스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친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역시 생각하고 있었나 보군.”
“……라스터, 너도 사실은 생각했던 것 아니냐? 태진의 그 운석 소환 마법만 있다면 그동안의 전투는 무척이나 쉬웠을 거다. 제국군에 그 마법을 막을 힘은 없잖아.”
“그건 아닙니다. 저들도 막는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운석이 낙하하기 전 마법사들의 불꽃으로 운석을 부숴 버리면 되는 거니까.”
“그 짓을…… 할 재간이 될까?”
하이듀크의 말은 정곡이었다. 태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대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 모든 마법에는 장단점이 있고 공간 마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총사님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활용한다면 역시 백두 기사대의 돌파력을 사용해야 할 겁니다.”
태진은 미연에게 눈을 돌렸다.
“미연아. 너는 전투가 시작되면 기사대를 이끌고 중앙을 돌파하는 척하면서 측면으로 돌아 들어가. 중앙은 흑안 기사단이 맡고 양측을 신웅 기사단, 그리고 그 보조를 남부 반란군이 할 거야. 너는 그 사이 측면에서 레키엔 대공 부대의 진형을 공격하여 깬다. 네 역할은 그거야.”
그녀라면 무리 없이 이뤄 낼 수 없는 임무였기에 모두가 납득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고개를 젓는 자가 있었다.
“싫어.”
“……미연아?”
단호한 미연의 대답에 태진이 입을 벌렸다.
“내가 중앙을 맡을 거야. 아니, 그런 전술도 필요 없을걸? 레키엔 그 녀석은 분명히 스스로 정면에서 나올 거야. 자잘한 전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런 녀석을 받아 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확신에 찬 미연의 태도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회의에 끼어든 것은 처음이었다. 이 의외의 사태에 태진은 잠깐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미연을 다시 바라보았다.
“근거는?”
“느낌이야. ―이렇게 말하기에는 지금은 너무 무책임하겠지? 테리한테서 들은 그 녀석 성격이 그래.”
“테리?”
“텔리오트 말야. 지금 제국 황제.”
태진은 침을 삼켰다.
“그렇게 안 해 주면, 날 미워할 거지?”
“응.”
“그렇다면…… 중앙 선봉은 미연이 네가 맡아. 그 대신 하이듀크가 측면을 맡는다. 그럼 되겠지?”
“그럴 필요 없대도 그러네.”
“그렇다고 해도 승률을 늘리는 게 내 일이야.”
“내 감인데 말야―”
미연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와 레키엔 중 누가 이기냐에 따라서 정해지지 않을까?”
그것은 어떤 의미로 이번 전투를 꿰뚫는 한마디였다.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그녀가 그 말을 입에 담음으로 인해서 실제로 영향력을 가지게 된 한마디.
태진은 미연의 감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깨달았다.
일단 기본 병력 배치는 전과 같았다. 마법사들은 부대의 후미에서 마법 공격을 방어하고 라스터가 중앙에서 병력을 조절한다. 총체적인 조율은 태진이 뒤쪽에서 담당한다. 이번엔 평원이었기에 중간 중간 연락병을 심어 두는 것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진지에는 곧 전투가 시작될 거라는 긴장이 팽배했다. 딱히 설명해 주지 않아도 기사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난 후 태진은 미연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다 그녀를 발견한 곳은 진지의 바깥. 그녀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해?”
“레키엔한테 내 존재를 텔레파시로 날리고 있었어.”
“핫, 그럼 그 녀석이 받아 줘?”
“테리 말로는 나를 참 눈엣가시로 봤다고 하니까 내 호출을 받고 나와 주지 않을까?”
천연덕스런 그녀의 대꾸에 태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미연은 말했다.
“자, 레키엔. 나와라!”
같은 시각.
레키엔 대공 부대에서는 격렬한 토의가 오가고 있었다. 뻔뻔히 나타난 적군을 어떻게 때려 부술 것인가가 토의 쟁점이었지만 사실상 의견 조율은 전혀 없었다.
“다 필요 없어. 내가 선두에 선다. 저 자식들을 모조리 밟아 버릴 것이다.”
“대, 대공 저하. 그, 그것은 좀…….”
“뭐가 불만이지?”
“지휘관이신 대공 저하께서 선봉에 서신다면 병사들이 불안해하여 싸우지 못합니다. 호, 혹여 잘못된다고 하면…….”
“잘못?”
레키엔의 흉악한 눈빛이 항변을 하려던 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번 지껄여 봐라.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 ‘잘못’된다는 거지?”
“그, 그거, 그것이…….”
“닥쳐라. 닥치지 않으면 지금 즉시 그 목이 달아날 거다.”
그가 입을 다물자 레키엔은 테이블을 내리쳤다. 두툼한 손바닥이 부수는 듯한 굉음을 만들어 냈다.
“귓구멍 열고 잘 들어라, 멍청한 것들. 뻔히 다 보이는 평원 위에서 무슨 전술이고 전략이냐. 네놈들 눈에는 그런 간계가 통할 정도로 어리석게 보이나? 신의 전사라고 우습지도 않은 별명으로 불리는 놈들이다. 실제로 이곳까지, 건방지게 내 앞까지 온 놈들이란 말이다. 그런 놈들을 향해서, 뭐? 나는 후방에 남아 있고 병사들을 움직인다고? 그딴 말이 나오냔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키엔의 전신에서 숨 막힐 듯한 압력이 뻗어 나왔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이 전투의 선봉에는 내가 선다! 전 병력을 통틀어서 저 자식들을 눌러 버리는 거다! 알겠나!”
“예, 예!”
레키엔의 독단대로 전투의 방향은 전해졌다.
제국군은 평원에 무리를 지어 섰다. 대열을 맞추는 것으로도 적에게는 충분한 위압감을 줄 수 있다고 전술서에는 구술되어 있다. 총 4,200명의 병력이 만들어 낸 대열 맨 앞에 선 레키엔은 자신의 애검, 낭아(狼牙)를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늑대의 이빨처럼 끝이 깎여 올라간 독특한 형태의 검. 이것은 그는 반란군을 직접 때려 부수고 다녔었다.
“망할 놈들…… 네놈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처단해주겠다.”
왕국군 측에서도 태세는 정비되었다. 서로가 뻔히 보이는 거리에서 양측 군이 마주 섰다.
평원 위에는 잠시 긴장이 흘렀고,
“가자! 더러운 왕국 놈들을 쓸어 버려라!”
레키엔의 돌진과 함께 전투는 시작되었다.
***
드넓은 평원을 배경으로 수천 대 수천의 전투가 막을 올렸다.
먼저 뛰어나온 것은 제국편. 선두에 선 레키엔의 애마가 바람을 가르며 평원을 질주했다. 그 위에 탄 레키엔 폭풍처럼 돌진했다.
그러나 그것을 쉬이 보고 있을 라스터가 아니었다.
“미연의 말대로군. 궁병 준비!”
돌진하던 말들의 일부가 멈춰 섰다. 그들이 등 뒤에서 활을 꺼내 하늘을 향해 조준을 끝냈다.
“발사!”
일제히 수십 발의 화살이 치솟아 올랐다. 구름조차 꿰뚫어 버릴 기세로 상승한 화살은 정점에 꺾여 지상으로 낙하했다.
그 궤도 아래 제국군이 달리고 있었다.
“화살이다! 저하를 보호하라!”
몇몇의 제국군이 몸을 날렸다. 쏟아지는 화살을 검으로 쳐 내는 레키엔은 오히려 그들이 방해된다는 듯 몸으로 쳐냈다.
“비켜라, 이놈들! 이까짓 걸로 내가 상처라도 입을 것 같으냐!”
하지만 확실히 진로는 더뎌졌다. 화살의 비로 말들이 놀래 그 뜀박질을 멈춘 것이다.
그 사이 제국군이 레키엔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을 둘러쌌다.
왕국군이 제국군의 정면을 두들기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으랏차!”
예고한 대로 왕국군의 선봉에는 미연이 서 있었다. 보조를 맞추며 왕국군과 함께 달려온 그녀는 제국군과 부딪치자마자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투, 투신의 전사다!”
제국군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녀의 위용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흑발의 여자가 제국군 사이로 뛰어내리자마자 주변의 적들이 모조리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무턱대고 적진 한 중간에 뛰어내린 그녀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 덤벼!”
두려움 따위 내버린 듯이 미연이 도발한다. 십수 자루의 검이 동시에 미연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여전히 무모하군.”
갑작스레 시야에서 사라진 미연을 잠시 후 다시 찾은 미소라는 혀를 찼다.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영 성미에 안 맞는지 그녀는 제국군 사이에서 잠깐잠깐 머리카락이 보일 뿐이었다.
한 번 그녀의 몸이 흔들리다 싶으면 두세 명의 제국군이 나가떨어졌다. 그녀가 당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놔둘 순 없다.
“쳇!”
미소라도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창을 뻗어 오는 제국군의 어깨 밑으로 단검을 그어 올린 다음 그를 밟고 전방으로 단검을 집어 던졌다.
푹!
“으악! 내, 내 눈!”
눈이 꿰뚫린 제국군의 비명을 무시하고 줄을 당겨 단검을 도로 뽑아낸다. 절규하는 제국군의 가슴팍에서 검이 푹 솟아올랐다.
마무리를 한 것은 아서였다. 망설임이 없는 일검이었다.
왕국군에도 쓸 만한 놈이 많아. 속으로 중얼거린 뒤 미소라는 미연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눈앞의 제국군을 죽인 아서는 직후 등 뒤에서 살기를 느꼈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태각을 뿌리자 공격하려던 제국군의 양 손목이 날아갔다.
“크윽!”
그가 급히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러나 그 뒤로 또다시 다른 제국군이 나타나 아서에게 검을 뻗었다. 찔러 들어오는 검을 옆으로 쳐 내고 도로 그의 팔을 잘라 낸다!
제국군이 아서의 검을 막아 냈다. 뒤로 도망치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찌르기!
“하앗!”
똑같은 공격에 당하지 않는다― 검이 들어오는 궤도를 아래쪽으로 밀어내며 쇄도하는 아서의 좌측에서 적이 허점을 노리고 검을 뻗었다!
당했다!
눈이 질끔 감기는 그 순간 태각이 제국군의 가슴팍을 뚫는 감각이 뇌리를 달렸다. 그리고 시야에는 자신을 공격하던 제국군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아서! 괜찮아?!”
아리스였다. 뒤를 따라오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달려와 그를 구해 준 것이다. 아서는 피가 튄 얼굴을 닦으며 소리쳤다.
“고마워!”
서로 등을 대고 제국군을 향해 돌아선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양쪽으로 달려들었다.
“하아앗!”
그들이 제국군과 함께 다시 격돌했을 때, 태진은 진지의 천막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곳이 그나마 높은 위치로 전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가 이렇게 전장을 관찰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능으로 증폭시킨 시력을 끌어당겨 제국군이 후미를 주시한다. 진지에 남아 있던 제국군 간부가 손을 뻗었다. 청각이 따라오지 못해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손짓과 함께 진지에 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이 전장으로 손을 뻗었다.
“마법입니다! 왕국군 진형!”
태진의 외침을 연락병들이 신속하게 마법사들에게 전달한다. 왕국 마법사들은 왕국군 후미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태진의 지시가 들리자 그들 또한 마력핵을 꺼낼 준비를 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제국군의 마법사들이 주문을 영창했다. 마력핵이 파괴된 곳은 왕국군 진형의 공중이었다. 수십 명이 만들어 낸 불꽃의 비가 머리 바로 위에서 생성된다.
“불꽃은 총 열네 개! 좌측에서부터 두 명씩 바람 마법 방어!”
재빠른 계산과 지시. 태진의 명령에 마법사들도 허공의 불꽃들을 목격했다. 단지 마법이 생성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에 있어서 마력을 느끼는 것보다 태진의 시력이 더 빨랐다.
“상공을 흩날리는 광풍!”
두 명의 마력핵이 폭발하자 그 손에서 믿기 힘든 마법이 난사됐다.
태풍과도 비견될 듯한 바람은 일정한 흐름도 없이 공중으로 박차 올랐다. 제국군보다 적은 숫자의 마법사였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마법은 일순 왕국군의 상공에 세찬 상승 기류를 만들어 냈다.
슈우우욱!
지상으로 내리꽂히려고 하던 불꽃들이 상승 기류를 타고 구름 저편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마법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제국 마법사들이 눈에 띄게 우왕좌왕했다. 태진은 주먹을 쥐며 외쳤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다시 옵니다!”
제국 진형을 눈에 담으며 태진은 한편으로 하이듀크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가 움직이던 신웅 기사단의 일부가 서서히 좌측으로 빠질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제국군과 왕국군은 서로 뒤엉켜 하나도 뭉쳐지고 있었다. 그때를 노려 전장을 빙 돌아 전 진지를 공격한다. 그것이 하이듀크의 역할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있어야 했다.
태진은 아주 잠깐 시야를 당겼다. 줌 아웃되면서 전선 한 중간을 훑는 그의 눈은 이윽고 원하던 이를 발견해 냈다.
적의 한 중간에서 칼의 춤을 추고 있는 미연. 적의 어깨를 밟고 날아오른 그녀가 말을 탄 병사의 목을 잘라 내고 그곳에 올라서고 있었다.
“레키엔, 어디냐!”
제국군이 내지르는 창을 한 손으로 잘라 내고 미연은 재차 소리쳤다.
“난 여기 있다!”
주변의 소음을 잠재울 만큼 그녀의 외침은 무게감이 컸다. 제국군들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창을 내찔러 오자 미연은 말 위에서 뛰어내려 지상으로 돌아왔다.
세 개의 창을 칼로 베고 연속적으로 칼을 뿌려 두 명의 멱을 딴 그녀에게, 드디어 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네년! 여기 있었구나!”
제국군을 해치고 레키엔이 나타났다. 처음에 활 공격이 아니었다면 더욱 더 빨리 만났을 것을, 그것이 늦어져 레키엔은 솔직하게 짜증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제국군이 뒤로 물러났다.
“저년은 내 것이다! 손대는 놈들은 나의 낭아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미연의 등 뒤에도 제국군이 있었다. 하지만 레키엔의 호령에 아무도 다가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장 한복판에 매우 기묘한 공간이 생겼다. 이곳이 전투의 장이 될 것을 미연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었다.
“면상을 보고 싶었다. 네년이 투신의 전사냐?”
레키엔이 흉흉하게 물어오자 미연은 싱긋 웃었다.
“테리는 잘 있어?”
“테리? 누구를 말하는 거지?”
“텔리오트 말야. 비실비실한 이 황자 있잖아. 만날 병약하다고 놀리더니 동생 애칭도 몰라?”
레키엔의 인상이 또 다시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네년…… 설마, 백두 부대의 대장이었던 그년이냐?”
“그런 표정 짓지 마. 여린 소녀의 가슴이 무서워.”
뻔뻔한 얼굴로 가증스러운 대사를 내뱉는 미연. 레키엔은 한동안 인상을 펴지 않더니 킥킥 웃기 시작했다. 미연이 칼을 내렸다.
“뭐야, 전부터 의심은 했지만 그 나이에 벌써 미쳤어?”
“……크하하핫! 이거 유쾌하군! 어떤 년인가 궁금했었는데 설사 로츠왈드의 영웅이었을 줄이야! 네놈들이 수작을 부린 거구만! 나는 들켰다면 위험하니 텔리오트에게 간 거였냐?”
“무슨 헛소리야. 뭐라는 거야 너?”
“아니, 됐어. 네년이 처음부터 우릴 속이기 위해 제국에 왔든 안 왔든 그건 지금에 와선 알 바 아냐.”
레키엔은 혼자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다. 다시 미연을 쳐다보는 그 눈빛은 투쟁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네년의 꿍꿍이가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예전부터 네년과 한번 붙어 보고 싶었다! 내 적으로는 안성맞춤이군!”
“……그렇게 나왔어야지!”
레키엔의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돌진했다.
“낭아의 먹잇감이나 되어라!”
양군의 주축이 되는 검사들의 격돌했다. 그 장면을 태진은 후방에서 목격했다. 날아오는 불꽃들의 움직임을 지시하며 태진은 계속해서 그 싸움을 지켜보았다.
걱정이라면, 오히려 만나기 전이 더 걱정이었다. 어서 만나야 한다. 그래야 하이듀크가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양군이 뒤섞이면서 레키엔이 미연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었다. 그것은 미연이 훌륭하게 해결해 주었다.
미연의 성격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전투 전 태진은 미연에게 단단히 일렀다. 레키엔을 붙잡아 줘야지 우리가 좀 더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기사들을 살려 낼 수 있다.
미연은 태진의 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저렇게 레키엔을 붙잡아 제국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분명 전 제국군이 그 대결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이목은 끌고 있었다.
태진은 연락병에게 소리쳤다.
“단장들에게 연락! 미연이의 곁에는 절대 다가서지 말 것이며 그 대결을 방해하지 말도록!”
연락병이 대답과 함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태진은 전장의 우측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 시야를 더듬자 곧 하이듀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알게 모르게 제국군을 베며 우측으로 거의 완벽하게 빠져나가 있었다. 저곳에서 기회를 노렸다가 기사들을 이끌고 나갈 것이다.
작전은 완벽하다. 태진은 다시 시선을 되돌렸다. 미연과 레키엔의 세찬 검격이 오고 가고 있었다.
현재 전황은 막상막하. 어느 한쪽이 밀릴 것도 없겠지만 곧 이 균형은 무너질 것이다. 그 분수령이 되는 것은 미연과 레키엔의 승부.
“그렇군.”
태진은 미연이 회의 중에 꺼낸 말을 떠올렸다. 그 말대로였다. 이 전투는 저 둘 중 누가 이기느냐에 달려 있었다.
***
“흐아앗!”
날아오는 검격을 미연이 허리를 굽혀 막아 냈다. 몸을 한 바퀴 돌려 뒤쪽으로 빠짐과 동시에 리드미컬하게 칼을 뻗는다!
슈우욱!
보통 검사라면 결코 막지 못할 일격이었다. 허나 그 공격을 레키엔은 콧방귀와 함께 낭아를 휘둘러 쳐 냈다.
지잉―
약한 진동이 미연의 손목을 울렸다. 손을 털며 그 여파를 털어 낸 미연은 다시 한 번 칼을 뻗었다. 오른쪽으로 쳐내려는 낭아의 움직임을 먼저 읽고, 쭉 뻗은 상태에서 궤도를 바꿨다.
춤추는 듯 좌측 아래로 그어 내려지는 칼. 그곳에 있던 레키엔의 왼쪽 다리가 순식간에 뒤로 빠졌다.
“감히 어딜!”
다리를 빼는 반동을 받아 레키엔이 낭아를 휘둘렀다. 낭아의 검날이 칼을 우측으로 쳐냈다.
“음?”
아주 순간적으로 미연의 몸이 휘청댔다. 그 틈을 레키엔은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죽어라!”
우측 위에서 내려치는 검세! 늑대의 사나운 발톱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공격에 미연이 허리를 비틀었다.
단숨에 간격으로 돌아온 칼을 비스듬히 들어 올려 막는다!
까앙―!
불꽃이 일며 낭아의 검날이 칼에 밀려 측면으로 떨어졌다. 레키엔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그의 두 팔이 불끈거렸다.
옆으로 빠지는 낭아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다리 끝에서부터 힘을 모아 휘두른다!
위기를 느낀 미연이 칼을 옆으로 세워 옆구리를 방어했다. 그 칼 위에 온 힘으로 후려친 레키엔의 낭아가 충돌했다.
퍼억!
마치 몽둥이에라도 얻어맞은 듯한 소리가 났다. 검을 도로 회수한 레키엔은 회심의 미소는커녕 혀를 찼다.
“쳇! 재빠른 년이군.”
양팔로 레키엔의 공격을 막아 낸 미연은 낭아와 부딪히는 그 순간 몸을 뒤로 띄웠다. 레키엔의 힘을 이용하여 서너 발 뒤로 돌아간 그녀는 즉각 자세를 잡으며 레키엔에게 미소를 그렸다.
“너도 꽤 빠른걸? 황자라고 해서 솔직히 좀 무시했는데 제법 실력이 되잖아?”
“웃기지 마라. 그렇게 건방지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그런 말은 나를 쓰러뜨린 다음에 해.”
히죽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싫다는 듯 레키엔은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고 그의 전신에서 흉흉한 기운이 뻗어 올라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면 그의 옆에 간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장면이었다.
허나 미연은 여유로웠다.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자세였다.
“네년, 그 검술은 뭐지?”
“당학류 해검도. 분파긴 하지만 기초는 똑같아. 보법이라든지 발검술이라든지. 뭣하면 가르쳐 줄까?”
“흥! 어디서 굴러먹은지도 모른 검술 따위! 제국 검술에 당해 낼 것 같으냐!”
미연은 빙긋이 웃었다.
“어디, 겨뤄 볼까?”
그녀는 자세를 바꿨다. 앞뒤로 어깨 넓이보다 넓게 다리를 벌린다. 양손으로 칼은 잡고 얼굴께로 들어 올린다. 칼끝은 적을 향해 놓고 다리를 살짝 굽힌다.
그것이 당학류 해검도의 기본 공격 자세였다.
레키엔은 낭아를 겨눈 채 으르렁댔다. 그도 느낀 것이다. 자세의 변환으로 무언가 그녀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무슨 수작이냐, 네년.”
“아무것도 아냐. 단지 이것이 준비 자세일 뿐이야. 영광으로 생각하라구? 바운스에 온 뒤로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해검도를 진심으로 써 보는 것은 네가 두 번째야.”
“건방지군! 그 입에 낭아를 처박아 주마!”
레키엔이 낭아를 옆으로 뿌리며 달려들었다. 그 돌진은 일반인의 눈에는 아주 잠시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미연이었다.
“―!”
한순간 레키엔이 그녀의 동작을 쫓지 못했다. 왼편으로 돌아서며 낭아를 휘두른 것은 순전히 그동안의 수련이 불러일으킨 본능이었다.
깡!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그 앞에 미연이 나타났다.
“잘 막는데?”
그녀가 발을 굴렸다. 또다시 레키엔의 앞에서 그녀가 모습을 감췄다. 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뒤!
몸을 돌리는 즉시 낭아를 세워 막는다!
그 한 발자국 전 미연의 허리가 돌아갔다. 오른쪽 밑에서 왼쪽 위로 빗겨 올라가는 검격!
기암 가르기!
발에서부터 폭발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힘의 흐름은 지금껏 그녀가 뻗어 온 공격과는 위력 자체가 틀렸다.
그녀를 날린 레키엔의 두 팔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낭아의 밑부분으로 공격을 받아 낸 레키엔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가 힘에서 밀린 것이다.
“―흐앗!”
레키엔이 지지 않고 낭아를 휘둘렀다. 허나 그것은 위협용에 불과했기에 미연은 슬쩍 스탭을 밟는 것만으로 낭아의 간격에서 벗어났다.
5m가량의 거리를 둔 채 미연이 재차 자세를 잡았다.
“아직 이 정도가 아니라구?”
지금 그녀는 레키엔의 실력에 맞춰 자신의 힘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더 빨라질 수 있고 더 괴력을 낼 수 있었다.
레키엔이 이를 악물었다.
“네년…… 대체 정체가 뭐냐!”
“그 질문도 지겹다, 이제. 내 이름은 신미연. 당학류 해검도 분파 소속의 검사. 이 자리에서 그거 말고 무슨 필요가 있지?”
“넌 정말로 신의 전사인 거냐?”
“아니면 뭐 어때.”
미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제국군과 왕국군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이곳은 지금 그들만의 성지라도 되는 듯 결코 침범하려는 이들이 없었다.
넓은 전장의 일부, 오로지 두 명의 대결만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네년은 내 예상보다 뛰어난 검사인 듯하군.”
“뛰어나도 한참 뛰어날 거야, 아마.”
“이제부턴 방심하지 않겠다.”
레키엔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미연은 그것을 확연하게 느꼈다. 호오? 하는 얼굴로 잠깐 그를 쳐다본 미연은 자세를 바꿨다. 다리를 모으고 자연체로 서 칼을 몸 앞에 자연스럽게 들어 올린다. 이것이 기본 방어 자세.
“와봐.”
도발하듯 미연의 입술이 미소를 그린다. 레키엔의 낭아가 미칠 듯한 속도로 뻗어 왔다.
미연의 칼이 그것을 마치 읽은 듯 오른쪽으로 쳐 냈다. 궤도가 바뀐 낭아를 회수한 레키엔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왼쪽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베기!
물 흐르는 듯한 유연함과 파괴력도 실린 공격이었다.
허나 그것조차 미연은 살짝 뒤로 물러섬과 함께 칼을 비스듬히 빗겨 공격을 피해 냈다.
“이 자세의 장점은 어떤 공격이든 대처하기 쉽다는 거지.”
중얼대는 그녀에게 레키엔이 검으로서 대꾸했다. 찔러 들어오는 낭아의 끝을 칼로 비껴 내며 옆으로 이동하자, 궤도를 바꾼 낭아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엿차!”
늑대 송곳니의 궤도 안으로 파고든 미연의 눈빛이 한순간 달라졌다. 방어만 한다고 얘기한 적은 없다구?
눈 깜짝할 사이에 레키엔의 검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미연의 얼굴이 레키엔의 눈으로 뛰어들었다. 그 장난스런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짐과 동시에 미연의 칼이 낭아를 아래쪽에서부터 쳐올렸다!
―칵!
상쾌한 소리를 기대했던 미연의 표정이 무너졌다. 힘과 기술을 실은 미연의 공격이 가로막혀 있었다.
“또 당할 줄 알았더냐!”
온전히 힘으로 그녀의 베기를 막아 낸 레키엔이 발을 차올렸다.
미연이 급히 한 팔을 빼내 옆구리를 방어했다.
퍽! 소리와 함께 미연의 가벼운 몸이 일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레키엔이 어깨로 미연을 들이받았다.
쿠웅!
충격과 함께 그녀가 나가떨어졌다. 레키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쫓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몸을 구르고 벌떡 일어난 미연이 뿌린 칼의 위협에 레키엔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혀를 차면서도 레키엔은 매서운 웃음을 지었다.
“어떠냐. 한 방 먹었지?”
“헤에, 확실히 제대로 먹었네.”
바닥을 뒹군 탓에 목이 살짝 뻐근했다. 미연은 목을 잠깐 움직여 고통을 씻어 낸 후 말했다.
“내가 방심했었나 봐. 쌩유, 덕분에 맘을 새로이 할 수 있었어.”
“훗! 이제 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해 봤자 소용없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애원하는 건 너야, 레키엔 대공.”
미연이 한 발자국 내딛었다. 레키엔이 낭아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오든 쳐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의 전신에 넘쳐흘렀다.
언제든지 와라! 레키엔의 두 눈에 불꽃이 넘실댔다―는 다음 순간,
미연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칼을 옆으로 뿌린 채 빙그르 돌고 나서 칼에 묻은 피를 툭 쳐 낸다.
“게임 끝.”
레키엔의 전신에서 피가 솟구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레키엔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팔에서, 가슴에서,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몸에 저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털썩, 무릎을 꿇고 난 후에야 그는 사태를 파악했다.
“보, 보지도 못했어…….”
미연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칼로 훑어 내는 그 일련의 과정은 한 차례도 감지해 내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고통이 찾아왔다. 전신에 찾아드는 격통에 레키엔이 이를 악물고 절규를 참아 냈다.
그 앞에 미연이 총총히 걸어왔다.
“그러게 까불지 말라니까.”
“대, 대체 이건 뭐지……?”
“우리 분파의 기술. ‘도깨비 찌르기’라는 기술의 변형이랄까. 지금의 나라서 낼 수 있는 속도야. 그래도 이걸 당하고도 정신을 잃지 않다니 대단한데?”
주변의 제국군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틈에 미연은 빠르게 할 말을 남겼다.
“오랜만에 나를 신나게 해 줬으니까 죽이진 않겠어. 포로가 되든 말든 맘대로 해. 난 이대로 싸우러 갈 거야.”
“……아버지를 죽인 주제에 나를 살려 준다고?”
신음같이 내뱉는 레키엔의 말에 미연이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는 그녀를 레키엔의 맹수 같은 눈빛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린 죽이지 않았어.”
“웃기지 마라…… 그런 말, 믿을 성싶으냐!”
“봐. 너도 급소는 피해서 쓰러뜨려 줬잖아. 그런데 황제를 왜 죽이겠어?”
전혀 다른 논지를 펼치는 미연을 향해 레키엔은 짐승 같은 웃음을 지었다. 온몸에 흘러넘치는 피와 함께 그것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으나 미연은 담담하게 몸을 돌렸다.
“고맙다면 고맙다고 말하면 돼.”
“닥쳐라!”
레키엔이 잡고 있던 검을 목에 댄다. 미연이 변화를 눈치 채고 몸을 돌렸을 땐 이미 레키엔의 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을 때였다.
“훗.”
냉소를 남긴 채 낭아가 주인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동맥을 끊어 내고 피가 분수쳐 올랐다.
“…….”
쓰러지는 레키엔의 주검을 내려다보며 미연은 차마 표현할 수도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눈조차 감지 않은 레키엔의 시신은 하늘을 원망스런 눈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가만히 중얼거리고서 미연은 무릎을 꿇어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대, 대공 저하께서! 패배하셨다!”
“저, 저년이 대공 저하를!”
“잡아라! 죽여라!”
미연의 현재 위치는 제국군의 소굴 안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전세 속에서 대결을 벌이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미연은 일어서서 칼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고 내가 죽어 줄 순 없지.”
혼잣말하던 그녀는 짓쳐 드는 제국군의 공격 사이로 스스로 몸을 날렸다.
레키엔의 패배는 전투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제국군 사이에서 급격히 퍼져 들어갔다.
레키엔의 지휘를 믿고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제국군들은 그들의 지휘자가 사라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소식은 진지로도 들어갔다.
“뭐, 뭣이! 대공 저하께서 승하하셨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투, 투신의 전사와의 대결에서 패배하셨다고―”
“멍청한! 검술로는 제국의 누구보다 강하신 분이다! 그런 분이!”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었다. 부관인 그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제국군 전체로 퍼진 혼란을 막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는 직접 검을 들고 뒤에서 소리쳤다.
“흔들리지 마라! 아직 우리의 군세는 건재하다! 몰아붙여라!”
동시에 그는 레키엔의 시신을 수습해 오라고 부하를 다그쳤다. 그 순간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이랴앗!”
두두두두두두― 너무나 진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그가 눈을 돌렸다. 보인 것은 기마대로 구성된 하이듀크의 기사대였다.
“진지를 모두 쓸어라!”
마법사들이 뒤늦게 고개를 돌려 하이듀크의 공격을 막아 내려 했지만 늦었다. 그가 검을 휘두른 순간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마법사. 그 뒤를 따라 기사들이 진지 측면에서 뛰어들었다.
“마, 막아라아!”
부관의 명령과 함께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나타났으나 기마대는 그마저 쓸어 버렸다.
제국군의 후미에서 진지의 위기를 눈치 챈 병사들이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후미와 중간에 틈이 벌어졌다.
그 낌새는 태진은 놓치지 않았다.
“신웅 제이 기사대! 허리를 끊으십시오!”
연락병이 전장을 가로질러 라스터에게 전달한다. 중심에서 라스터가 소리 질러 기사대를 제국군의 중심에 투입했다.
신웅 제2기사대가 쓸고 간 그곳은 더욱더 거리가 벌어졌다. 함께 뭉쳐 있던 제국군이 잘려 나가자 그 안으로 연이어 신웅 기사단이 쇄도해 들어갔다.
“적을 포위하라!”
바둑으로 생각하자면 흑돌 하나를 백돌 여덟 개가 둘러싼 형세가 곳곳에서 연출되었다. 하이듀크의 기사대마저 제국 진지에서 후미 쪽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쯤이 되자 제국 마법사들의 마법 패턴도 흔들렸다. 왕국군을 노리던 그들이 더 이상 마법을 구현하지 못하자 태진은 왕국 마법사들의 목표를 진지로 지정했다.
“대지에서 솟구치는 용오름!”
두세 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쏟아 낸 마력핵이 제국 진지에 거대한 태풍을 만들어 냈다. 기사대가 빠져나간 그 공간을 바람 마법이 뒤흔들었다.
쿠오오오오!
마력을 담은 마법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크, 크흐윽!”
기사대의 검에 찔렸던 부관은 바로 옆에서 솟구친 회오리를 올려다보며 피 섞인 침을 삼켰다.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정면 돌파에서 레키엔과의 대결, 그리고 진지를 직접 공격하여 마법으로 마무리까지.
그 모든 술수에 제국군은 놀아난 것이었다.
“현신의 전사……!”
마지막 숨이 넘어가며 그가 절규처럼 내뱉는 말은 태진에게 닿지 않았다.
태진에게 닿은 것은 마지막으로 제국군의 진영을 대파하고 있는 왕국군이 울린 승전보였다.
“……이겼다!”
“이겼어! 대공 부대에 승리했다!”
왕국군도 피해를 입었으나 제국군에게서 대승을 거두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로 벌어진 세 번의 전투 중 최고의 승리였다.
태진은 기쁨을 즐기는 것도 잠시 전장을 정비할 것을 명하고 스스로 레키엔의 시체를 찾았다. 미연의 안내로 그가 시체를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다른 시체들 사이에서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기사들이 레키엔을 발굴하여 그의 앞에 눕힌 다음에야 그는 똑바로 레키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검사로서는 훌륭했나 보네. 미연이 네가 그렇게 힘을 쓴 걸 보면.”
“그럼 뭐 해, 자기가 이용당한 것도 모르는 바보인데.”
미연은 내뱉듯이 말했다.
“텔리오트가 레키엔을 이용한 거야. 이 전쟁, 그 자체가 모두 그 녀석이 꾸민 짓이야.”
“알고 있어 나도. 트레빌에서 보여 줬던 그 신사 같은 모습은 아마 꾸며 낸 연기였겠지.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글쎄.”
둘은 동시에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만나서 직접 물어보자.”
“응.”
시디 노트니를 이제 한 보 앞에 남겨 두고 태진과 미연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레키엔 대공 부대가 대파 당했다. 그 소식은 금방 황성으로 들어갔다.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은 이시브였다. 뒤늦게 달려온 발츠 군단장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대공 저하마저 깨부술 줄은…….”
자세한 전황은 전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간신히 전장에서 도망친 병사가 힘들게 보내온 것이었기에 상세한 사항을 바라기는 힘들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최고의 전력이었던 자가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반란군들이 떼로 들고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대공 부대가 패배했다는 것은 정말 큰 손해입니다.”
“알고 있어, 이시브.”
텔리오트는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서 가면을 두들겼다. 그 행동이 전에 없이 초조해 보였다.
“그들이 시디 노트니에 닿는 시간은?”
“약 삼 일…… 늦어도 사 일째 아침까지는 도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길어도 사 일이라는 건가. 시간이 없군.”
그는 자세를 바로해 앉았다.
“발츠 군단장, 지금 즉시 북부 주둔군을 수도로 불러들이도록.”
“예? 그들은 지금 동부 반란군과 교전 중이라…….”
“그보다 수도가 더 중요해. 잔말 말고 불러들여라. 최대한 빨리, 사 일 후 아침까지는 수도에 당도하게 만들어.”
“아, 알겠습니다!”
처음 보는 텔리오트의 날카로운 태도에 발츠 군단장은 어깨를 움츠리고 뛰어나갔다.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던 이시브는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바로 돌렸다.
“이시브, 너는 왕국군의 군세를 살피면서 황성 안에 병력을 배치시키도록. 그리고 에스티른 단장 보고 나에게 오라고 해.”
“옛!”
단단히 대답한 이시브는 나가자마자 에스티른 단장을 호출했다. 마법사단 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단장은 병사가 그를 데리러 오자,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으로 황궁에 나타났다.
이시브에게 얘기를 듣고서 에스티른 단장은 무거운 낯빛으로 황제 집무실을 노크했다.
“들어와.”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는 기겁하며 문을 빠르게 닫았다.
“화, 황제 폐하! 가면을!”
“갑갑해서. 벗었어.”
텔리오트는 가면을 벗은 맨얼굴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흉측한 얼굴이 아닌 수려하기까지 한 용모. 요 사이의 전쟁으로 수척해진 것을 뺀다면 미남자에 속하는 그 얼굴을 보고 에스티른 단장을 하얗게 질려 책상 앞으로 달려왔다.
“곤란합니다, 폐하! 이러다가 누가 봐 버리면!”
“그것도 괜찮지 않아? 어차피 이제 이 나라는 풍전등화니까 말야. 저들이 황제라고 믿었던 자가 사실은 황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텐데.”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엄연한 이 나라의 황제이십니다!”
“그래, 에스티른 단장. 그대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지.”
텔리오트의 얼굴을 고요했다. 격정적인 감정의 토씨 하나 나타나지 않는, 마치 처음 그를 만난 그날처럼.
에스티른 단장은 숨을 삼켰다. 왜 그가 가면을 벗고 자신을 불렀는지, 그 진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서른을 넘긴 황제와 노년을 지나는 마법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황제의 신하 이상의 유대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억겁 같은 순간이 흐른 뒤 에스티른 단장이 주름진 입술을 움직였다.
“황제 폐하, 신은 병약했던 황자께서 이렇게 황제가 되신 모습을 보았기에 더는 여한이 없습니다.”
“나도 고맙게 생각하오. 나를 이렇게 황제로 만들어 줘서.”
말투를 바꾼 텔리오트에게 에스티른 단장은 묵묵히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늙은 몸이 부서지는 그날까지 황제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텔리오트는 가면을 쓰지 않은 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렇게 노년의 마법사는 거짓 황제를 위하여 인생 최후의 전장에 설 결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