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그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서른 명이 되지 않는 미연의 백두 기사대였으나 모두가 출중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건물 사이를 움직이며 제국군의 협공을 하나하나씩 끊어 나갔다.
그중에서 가장 확실한 성과를 내는 것은 물론 미연이었다.
“어딜!”
아리스를 뒤에서 습격하려던 제국군의 목을 쳐내고 몸통을 걷어찬 미연이 아리스의 곁을 질풍처럼 지나갔다.
“뒤를 조심해!”
“네!”
그녀의 뒤를 곧바로 아서가 나타나 막았다.
“뒤는 나에게 맡겨!”
두 사람이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제국군에 대항하여 길을 텄다.
미연이 혼자서 제국군을 돌파하고 지나가면 그 뒤를 미소라가 정리했다.
두 명이서 짝을 지어 점점이 제국군과 항쟁하고 있던 기사대들을 이으며 돌격하는 미연을 따라 선이 생겨났다.
그 선이 미처 뭉쳐지기도 전에 미연이 제국군의 움직임을 방해하며 다시 진로를 막았다.
“저, 저년을 막아라!”
“젠장? 잡을 수 없어!”
단 한 명이서 제국군의 진입을 막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나머지 기사대의 보조를 받으며 미연은 오로지 눈앞의 적을 베고 베고 또 베었다.
그것이 태진에게서 미연이 받은 지시. 그 기한은 반란군이 전선에 도착할 때까지였다.
“버텨!”
부하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미연은 응원했다.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움직임의 그녀는 제국군의 뒤통수를 치며 이곳저곳에서 속출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도 그런 움직임을 계속해서 해 나갈 수는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행동은 충분히 오버히트에 가까웠고, 그 부담은 점차 그녀를 압박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미연은 침을 삼켰다. 또 한 번 뿌린 칼끝에 제국군의 목이 꿰어 날아갔다. 그 자체로 칼을 비틀어 옆으로 그어 내렸다. 어깨 죽지에서 복부까지 처참하게 갈린 제국군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장면을 지켜볼 새도 없이 날아드는 검을 옆으로 쳐내며 뒤쪽으로 몸을 뺀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벽이었다.
“칫!”
느끼지 못했다. 한순간 전투 감각에 구멍이 생겨 뒤쪽의 벽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깨달은 그 즉시 미연의 움직임은 뒤쪽에서 앞으로 돌변했다. 벽을 차고 직선으로 몸을 달린 그녀는 제국군의 어깨를 밟고 뒤쪽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포위하고 있던 그 누구도 막지 못한 미연의 움직임에 놀란 사이 그녀는 지붕 뒤쪽으로 사라졌다.
“도, 도망이다! 쫓아라!”
골목 안으로 수십 명의 제국군이 밀려들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골목 끝에 서 있는 미연이었다.
칼을 똑바로 겨누고 그녀가 머리를 한 차례 흔들었다. 흑발이 불길한 저주가 되어 제국군의 뇌리에 내려앉았다.
세 명이 서기도 어려운 좁은 골목. 적은 한 명. 제국군은 수십 명.
“내가 달리는 것보다 모여 있는 쪽이 더 쉬워.”
유인당했다― 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제국군들의 눈앞에서 검은 풍뢰가 내달렸다.
미연이 골목에서 일대 학살전을 벌이고 있을 때 켈루그가 반란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기사단은 반란군의 원군에 힘입어 단숨에 제국군을 시니 노트니에서 몰아냈다.
그 격돌에 밀려난 제국군은 수도 밖에서 진지를 만들기 위해 급히 뭉쳤으나,
와아아아아―!
동쪽에서부터 들려오는 함성에 완전히 넋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동부와 북부 반란군이 합쳐진 엄청난 수의 반란군이 제국군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왕국군과 반란군, 두 개의 세력에 포위당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미연의 활약에 힘입어 제국군의 진입을 끊어 버린 왕국군,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반란군에 둘러 싸여 북부 주둔군은 시디 노트니의 근처에서 완전히 섬멸 당했다.
“동부 반란군이 도착한 건가.”
태진은 눈을 돌렸다. 하지만 건물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현재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청력뿐이었고, 그는 또 다른 제3의 굉음이 전장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도의 지형 숙지까지 끝낸 태진은 전투가 곧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동부 반란군까지 합세한다면 북부 주둔군과 병력 자체가 틀리다. 승리는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태진은 건물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 순간 태진은 공기가 미묘하게 비틀어짐을 감지했다.
눈을 돌리기가 무섭게 그는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서 있던 층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박살났다.
쿠앙!
“큭!”
비명을 삼키며 아래쪽으로 몸을 날린 그는 뻐근한 척추의 감각을 삼킬 새도 없이 건물 밖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초, 총사님!”
“―도망치십시오!”
시디 노트니의 허공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작렬하는 열의 덩어리는 태진과 기사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쿠웅!
폭발을 가까스로 피해 낸 태진은 골목 뒤로 달려 들어갔다. 기사들이 그를 호위하며 옆으로 따라붙었다.
“마, 마법?”
“총사님! 마법사입니다!”
저마다 떠들어 대는 기사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태진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이곳은 지금 황성과 매우 가까운 위치였다. 성벽 위에 올라 있던 군인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곳에 나타나 있는 것은 마법사들이었다.
중간에 서 있던 노인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공격! 놈들이 나올 때까지 공격하라!”
마법사들이 연이어 주문을 영창하고 불덩이가 시디 노트니를 폭격했다. 시민들의 건물이 박살과 박살을 거듭하며 무너져 내렸다.
쾅!
뻐엉―!
쿠구구구구―
태진이 조금 전까지 올라 있던 높은 건물이 서서히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계속 저 안에 있었다면 태진이라고 하더라도 단숨에 죽음에 이르렀을 광경이었다. 태진은 침을 삼켰다.
몇 개의 건물을 날려 황성 앞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뒤 마법사들의 공격이 멎었다.
“왕국군의 이름 모를 자여! 내 말이 들리는가!”
들으라는 듯 노인이 고함치기 시작했다.
“절대 황성은 넘겨 주지 못한다! 황성에는 황제 폐하가, 내가 이 손으로 만들어낸 황제 폐하께서 계신다! 난 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폐하를 지켜 낼 것이다!”
또다시 폭격이 시작되었다. 아마 저기 올라 있는 마법사들이 현재 황성에 남아 있는 전부일 것이다. 그들에게 아낌없이 마법을 사용할 기회를 주고 지금 이렇게 태진을 협박하고 있었다.
태진은 노인의 의도를 읽었다. 결코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저 결의를 꺾고 황성의 문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해서 치솟아 오르는 폭발이 기어코 태진이 숨어 있던 곳 가까이에서 터졌다. 집 전체가 흔들리며 벽돌이 그들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사가 스스로의 몸으로 태진을 감싸며 그를 지켜 내려 했다. 태진은 괜찮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총사님! 위험합니다!”
“괜찮습니다. 당신들은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으십시오. 절대 움직이면 안 됩니다.”
태진은 기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성벽 위에 서 있던 노인, 에스티른 단장은 황성으로 난 길목에 나타난 검은 머리의 사내를 보고 마법사들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북부 주둔군과 왕국군이 전투를 하는 동안 태진을 만나기 위해서 나타난 그는 태진이 오히려 너무 당당하게 나타나자 당황했다.
태진은 뚜벅뚜벅 황성 앞으로 걸어왔다.
“그만 불태우십시오. 당신들의 도시이지 않습니까?”
똑바로 에스티른 단장을 올려다보는 태진의 뒤로 몇 채의 건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태진을 내려다보는 에스티른 단장. 분명 위치적으로 차이가 났지만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자네가 현신의 전사인가? 이곳에서 자네를 죽이면 왕국군은 포기하고 물러가겠나?”
“무리입니다. 그들이라면 더욱 용맹하게 황성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를 생포하여 인질로 써야 하겠군.”
“무리입니다.”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항복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입니다.”
“지금 자네의 입장을 알고 하는 소리인가? 누구도 자네를 도와줄 수 없어. 그런데 자네는 혼자서 내 앞에 나타난 걸세. 우리 제국의 마법사들이 그렇게 무능하게 보이나?”
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왼쪽 손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그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창공에서 내리꽂는 별의 파편!”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태진이 갈고 닦아 온 마력핵이 태진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왔다. 그 마력핵의 움직임은 같은 마법사인 에스티른 단장에게도 확실히 보였다.
하늘 위로 치솟아 올라간 마력핵은 상공에서 파괴되었다. 마력이 휘몰아치며 일순 그 주위의 모든 법칙을 뒤엎었다.
검은 구멍이 뚫린다. 푸른 하늘에 나타난 새까만 암흑 속에서 거대한 돌덩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직선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마법사들이 불태워버린 건물들 사이로 직격했다.
콰아앙!
일대의 지대가 완전 반전당했다. 불타고 있던 건물 그 자체를 집어삼키며 거대한 붕괴가 일어났다. 지각 자체를 엎어 버리는 엄청난 충격에 성벽 위에 서 있던 마법사들은 다리가 흔들려 넘어졌다.
겨우 난간을 붙잡고 자세를 유지한 에스티른 단장이 다시 눈을 떴을 보인 광경은 차라리 불가사의에 가까웠다.
불길이 사라진 그 자리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등장했다. 일대의 건물이 몽땅 사라지고, 그 후폭풍으로 다른 곳에서 타오르던 불꽃도 전소했다.
에스티른 단장은 이빨을 서로 부딪쳤다.
“이, 이, 이이, 이것은 대체!”
“아시겠습니까?”
거대한 파괴를 일궈 낸 태진은 침착하게 에스티른 단장에게 제의했다.
“전 황성을 부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세우기 귀찮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평화적으로 항복을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복하십시오.”
협박에는 협박으로.
그것이 태진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저쪽이 마법사를 동원하여 무력을 선보인다면 이쪽도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있었다.
운석 소환 마법. 태진이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공간 마법이었다.
황성에 오면 반드시 사용될 일이 있다고 태진은 믿었다. 그렇기에 그동안의 전투에서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봐야 인간은 더욱 공포심을 가지는 법이다.
태진은 에스티른 단장을 직시했다. 둘의 거리는 존재치 않는 것처럼 명확하게 그 눈빛이 에스티른 단장의 뇌리에 각인됐다.
“항복하지 않겠습니까?”
에스티른 단장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태진은 조금 더 몰아붙이면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을 때,
타이밍이 좋지 않게도 왕국군이 귀환했다.
하이듀크와 라스터, 미연까지. 지휘자들이 모두 태진에게 일어난 사건을 눈치 채고 달려왔다.
“태진아!”
미연에게 잠시 눈을 돌린 그 틈을 타 에스티른 단장이 모습을 감췄다. 마법사들도 전부 황성 안으로 사라져 성벽 위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태진은 혀를 차며 그들에게로 돌아섰다.
“북부 주둔군은 어떻게 됐냐?”
“다 처리했어! 포로들은 지금 럭커가 정리하고 있는 중이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별거 아냐. 공격을 좀 받았어.”
불타오르고 있는 건물이 몇 채. 그리고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있는 시가지. 그들은 거대한 크레이터도 목격했다.
“마법을 사용했군, 태진.”
“네. 힘을 위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왕국군의 귀환이 좀 나빴다. 북부 주둔군이 정리된 것은 다행이지만 노년의 마법사에게서 좀 더 받아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태진은 아쉬움을 삼키며 지시했다.
“포로 정리가 끝나는 즉시 황성을 포위하십시오. 빈틈없이 둘러싼 뒤 공성전을 준비하고 대기하겠습니다.”
일단 낌새는 던져 놨기에 어떤 반응이든 돌아올 것이다. 태진은 그것을 침착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성벽에서 내려온 에스티른 단장은 한 시도 쉬지 않고 황궁으로 달려갔다. 황성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황궁, 그리고 그 황궁의 중심인 황제 집무실에서는 텔리오트가 이시브와 함께 있었다.
“폐, 폐하!”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고 텔리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전 소식이라면 이미 들었어. 북부 주둔군이 수도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전멸 당했다고 하던데.”
이시브가 이미 그 사실을 전한 모양이었다. 에스티른 단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것이 아니오라!”
“무슨 일입니까, 단장님.”
이시브가 되려 물어왔다. 그의 말투에도 초조함이 맺히고 있었다. 텔리오트에 버금갈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였기에 사태가 얼마나 급박한 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에스티른 단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 전에 태진이 선보였던 마법을 이야기했다. 시가지의 반이 초토화된 그 강력한 마법은 단 한 방으로도 황성을 쓸어버릴 수 있을지 몰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네, 이시브 대령.”
이시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텔리오트를 쳐다보았다. 텔리오트는 동요하지 않으며 되물었다.
“무슨 마법이지?”
“공간 마법…… 으로 추측됩니다.”
“확신할 수는 없다는 거로군.”
“네…… 공간 마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마법입니다. 게다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분명 상위 마법이기에 그것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티른 단장, 자네를 빼고는 말이지.”
텔리오트의 시선을 받으며 그는 침을 삼켰다. 잠깐 의자에 등을 묻은 텔리오트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이시브와 에스티른 단장은 숨소리조차 죽였다.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적어도 현신의 전사라는 자는 자네 정도의 마법 실력을 갖췄다는 이야기겠군. 그 마법을 또 사용할 거라고 생각해?”
“태도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할 거라 사료됩니다.”
태진의 마력핵 운용 시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에스티른 단장은 크게 미덥지 못하게 대답했다. 허나 그걸로도 충분했다.
“이시브. 지금 즉시 황성 내의 모든 병력을 모아 전시 체제에 돌입하도록.”
황성은 언제나 전시를 대비하여 수성에 필요한 최소 인원은 확보해 둔다. 이시브는 그 인원들을 뽑아 내기 위해 당장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에스티른 단장. 나와 함께 가지.”
텔리오트는 그를 끌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에스티른 단장은 초조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호위를 붙이겠다는 이시브의 말에도 텔리오트는 고개를 저으며 병력이 모이면 남문 앞으로 모으라고 일렀다.
이시브와 발츠 군단장이 최대한 빨리 병력을 모아 남문으로 집합시키는 사이 텔리오트는 에스티른 단장과 황성을 천천히 걸어 남문에 다다랐다.
계단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황제의 행차에 뻣뻣하게 굳어 경계를 붙였다. 그것을 친절하게 받아준 그는 마치 등산이라도 가는 듯한 태도로 계단을 올랐다.
20m는 충분히 도달하는 계단을 오른 그가 성벽 위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태진과 미연, 그들을 비롯하여 왕국군의 주요 인물들은 남문 밑에 모여 있었다. 불은 진압했으나 태진이 박살내 놓은 시가지는 여전했다.
그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선 그들은 성벽 위에서 나타난 가면의 황제를 보고 눈을 모았다.
“테리…….”
미연이 가만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태진은 그가 텔리오트 황제임을 알았다.
텔리오트는 황성을 포위하고 있는 왕국군과 반란군을 둘러보다 눈을 돌렸다. 그 시선이 조금 헤매지 않고 태진을 찾아냈다. 태진은 한발 앞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현신의 전사라고 불리며 우리 제국의 용맹한 군대를 쓰러뜨리며 신성한 수도 시디 노트니까지 도달한 자가, 바로 당신인가?”
“그렇습니다. 텔리오트 황제.”
둘의 목소리는 컸다. 다른 이들은 일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텔리오트는 조금 길게 태진을 관찰했다. 트레빌에서 만났을 때와 바뀐 것이라고는 머리 색깔. 그리고 뜨고 있는 눈뿐이었다.
“머리 색깔을 바꾸는 마법과 맹인의 눈을 뜨게 만드는 마법이 있을 줄은 몰랐군.”
“둘 다 변장이었습니다. 원래 검은색의 머리와 장님이 아니었습니다.”
“그 연극에 나는 물론이고 하미엘 대공도 속고 있었다는 말이군. 팰리슈 국왕은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태진은 깔끔하게 끊고서 말했다.
“아키레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에게 정식으로 권유하겠습니다. 항복하십시오.”
텔리오트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항복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전쟁은 시작하지도 않았어.”
그 말은 중후한 무게로 퍼져 나갔다. 큰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왕국군과 제국군, 모두가 그의 한마디를 들었다.
이시브와 발츠 군단장이 모아온 총 500명의 병력이 남문 아래 모여 있었다. 텔리오트는 그들에게도 들리도록 음성을 높였다.
“잘 들어라, 왕국군의 총사. 난 아키레마 제국의 황제이다. 역적과도 같은 로츠왈드 왕국을 처단하기 위하여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런 내가, 너희 로츠왈드에게 항복을 할 것 같은가?”
좀 더 격정적으로 변하는 어조.
“우리 위대한 제국군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그때까지 결코 너희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시브는 그제야 깨달았다. 왜 텔리오트가 병력을 모으라고 했는지. 직접 자신이 나서서 적국의 총사와 이야기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텔리오트의 웅변을 직접 전해 들은 500명의 병력은 순간 그의 언변에 감명을 받았다. 한 집단의 우두머리에 있는 자는 수하를 얼마나 잘 이끌 줄 아느냐에 따라서 능력이 갈리는 법이다.
텔리오트는 그 방법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의 신념을 받들어 제국군의 사기가 충만해졌다.
“그래! 황제 폐하를 위해서 이 한 몸 바치겠어!”
“왕국군 놈들! 내 검으로 전부 썰어 주마!”
“황제 폐하 만세! 아키레마 제국 만세!”
더 이상 그들에게 500명 대 수천이라는 수적 열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텔리오트는 뒤에서 들려오는 제국군의 열의를 등으로 받으며 태진을 내려다보았다. 물러섬 없는 눈빛이 가면으로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나왔다.
“저 녀석…… 저런 놈이었던가?”
태진의 옆에 있던 미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진은 미연을 힐끔 본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내일 이 시각, 그때까지 항복하지 않는다면, 그땐 전면 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
“지금 그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군인들과 함께 잘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십시오.”
텔리오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이야기했다.
“난, 아직 죽지 않았어.”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성벽 위에서 사라졌다. 잠깐 그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던 태진에게 미연이 귓속말을 전했다.
“건방진걸. 저 안에 갇힌 주제에.”
“황제잖냐. 저 정도는 버텨 줘야 라스트 보스지.”
게임 같은 감각으로 대답한 태진은 왕국군에도 지시를 내렸다. 오늘 하루는 체력을 보충하며 황성 안을 경계한다.
내일 있을지 모르는 전투에 대비하여 충분하게 휴식을 취해 두라는 그의 지시에 왕국군과 반란군은 즉각 야영을 준비했다.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군 사이를 태진과 미연은 직접 돌아다녔다. 그들을 도와주면서 일일이 사기를 북돋아 주자는 것이 태진의 의도였다.
“마지막 싸움입니다. 저 황성을 뚫으면 우리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태진의 인도로 벨린 협곡을 넘어 이곳 시디 노트니까지 온 자들이었다. 역사적인 밤을 맞이한 그들에게 태진과 미연의 격려는 하늘의 도움과도 같았다.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죽지는 마.”
미연이 악수를 해 준 기사는 평생 손을 씻지 않겠다고 호들갑도 떨었다.
그런 동료를 보고 다른 기사들도 폭소를 터뜨렸다. 덩달아 미연도 농담을 던지고, 그런 모습들을 보며 왕국군 전체가 사기를 얻었다.
황성 밖을 한 바퀴 돌고 반란군까지 모두 만나고 온 태진과 미연은 천막 안에서 몸을 뉘었다.
“이것도 꽤 힘든걸. 국회의원들의 고충을 알겠어.”
어깨를 두들기는 미연의 뒤로 태진은 그녀에게 안마를 해 주었다. “어어, 시원하다!” 따위의 아저씨 같은 대사를 내뱉던 미연이 말투를 바꾸며 말했다.
“테리가 마치 우리를 부르는 것 같았어.”
비교적 텔리오트와 같이 지낸 시간이 긴 미연이었다. 성벽 위에 올라와 일장 연설을 한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둘을 부르는 것 같이 느껴진 것이다.
태진도 마지막 그가 남긴 한마디를 떠올렸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죽이러 와라. 그런 의미인가?
“어쨌든 끝을 내기 위해선 내일 그가 있는 곳까지 가야해.”
“응. 황궁으로.”
이 전쟁의 끝에 아마도 기다리고 있을 단서를 찾아서 태진과 미연은 나아가기로 결의했다.
예상한 대로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 가는데 아무런 성명도 없었다. 황성은 침묵에 쌓여 있었고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태진은 정비를 끝마치고 모든 무장을 마친 왕국군과 반란군을 둘러보았다. 현재 그의 위치는 남문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로 황성의 남문과 동문이 측면에서 보이는, 시디 노트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예전에는 종탑으로 쓰였는지, 종은 없고 넓은 공간만 남은 그곳에서 기사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었다.
연락병을 대기하고 있는 와중에 태진은 늘 하던 대로 전황의 조절에 들어갔다.
시각이 다가오고, 기어코 그 시각이 되었다.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미리 밝힌 대로 공성전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마법사는 방어에 치중하고 마기사는 뒤에서 대기. 보병들과 중무장한 기갑기사들이 성문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문을 뚫어라아!”
“어느 쪽이 먼저 뚫는지 내기다!”
“이까짓 문 부숴 버려!”
사기 등등한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성문을 두들겼다. 그들이 가져온 공성추가 몇 번이고 문을 두들겼다.
쾅! 쾅!
부딪히고 부딪히지만 두터운 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공격은 지칠 줄 모르고 문에 처박혔다.
태진은 남문과 동문을 각각 맡고 있는 하이듀크와 라스터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좀 더 밀어붙일 것, 그러면서 위를 조심할 것. 그것은 연락병들에게 전해져 태진이 서 있는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서문과 북문 쪽에도 전달되었다.
서문은 현재 남부 반란군이, 북문은 동부 반란군이 전담하고 있었다. 넷 중에 가장 먼저 뚫리는 문으로 병력이 집중되게 된다.
다른 문의 움직임을 흐름으로 파악해 내려 태진이 잠시 눈을 돌린 사이 성벽으로 제국군들이 튀어 올라왔다. 중성추를 사용하고 있는 동문이 가장 위험했기에 그들이 나타난 곳도 동문 위였다.
그들이 제국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태진은 급히 아래쪽의 연락병에게 신호를 보냈다.
“마법입니다!”
동문의 라스터가 태진의 경고를 알아듣고 급히 반응했다. 물러나 있던 마법사들이 지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명의 마법사들의 손에서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그것을 바람이 쓸고 왕국군의 머리 위에서 날려 버렸다.
마법사들의 공격을 계속되었다. 거기에 뒤이어 십 수 명의 궁병들도 성벽 위에 나타났다. 쏟아지는 화살 공격을 막아 낸 것은 여느 때처럼 대기하고 있던 방패 기사들이었고 그들의 방어에 힘입어 공성추에는 더욱 강한 힘이 실렸다.
콰앙!
다시 한 번 공성추가 성문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 두터워 보이던 성문이 삐걱 소리를 냈다. 쩌저적― 기다란 균열이 성문의 중간을 내달렸다.
“부서진다!”
“조금만 더 밀어붙여라!”
수십 명이 달라붙은 공성추의 힘은 무시할 것이 못되었다.
기사들은 죽을힘을 다 모아 공성추에 쏟아 부었다.
“후랴아아앗!”
“부서져라아아아!”
쿠웅―! 또 한 번의 충돌. 쩌저적― 균열이 커지면서 성문이 요동쳤다. 삐걱거림이 더욱 심해지고 다음번에는 정말로 부서진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사들의 두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바로 그때 사태는 기사들의 예상을 초월했다.
벌컥!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문이 오히려 안쪽으로 열렸다. 활짝 열린 문으로 뛰어들던 공성추는 기사들을 이끌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안에서 제국의 마법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용암의 열기로 뒤덮는 불꽃!”
기체가 아닌 액체에 가까운 열기를 지닌 불덩이가 왕국군을 습격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에 마법사들조차 그 마법을 방어해 내지 못했다.
화르르륵!
“으, 으아아악!”
“크학! 뜨거, 뜨거워!”
“살려 줘!”
불은 순식간에 기사들에게 옮겨 붙었다. 정면에서 마법을 붙은 기사는 그 자리에서 전소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이, 이 자식들!”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동료들에게 불길을 끄도록 맡기고 성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전에 또다시 쏟아지는 마법이 그들을 휩쓸었다. 성벽에 있던 마법사들도 모조리 밑으로 달려 내려가 동문에 집중적으로 불꽃을 떨어뜨렸다.
“다, 단장님! 돌파가 불가능합니다!”
라스터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는 부단장. 라스터는 태진이 있는 탑을 한 차례 올려다보고 마법사들을 이동시켰다.
“전 마법사! 동문에 지원! 불꽃을 막아라!”
태진의 지시를 기다릴 것도 없이 떨어진 라스터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동문으로 몰렸다. 그들이 바람 마법을 사용하여 날아오는 불덩이를 오히려 안쪽으로 날려 버리자 그제야 왕국군의 기세도 되살아났다.
“동문이 뚫렸다!”
“동문으로 들어가라!”
기습적인 마법 공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왕국군은 아직 좌절하지 않았다. 수적 우세를 보이고 있었기에 오히려 부상당한 전우를 뒤쪽으로 운반하는 여유까지 보이며 동문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남문에 모여 있던 자들의 시선도 그쯤되자 동문으로 돌아갔다.
진척을 보이는 동문으로 들어가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하이듀크 또한 그 흐름에 편승하여 지시를 내리려 했다.
그때, 확인차 태진을 올려다보지 않았다면 분명히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태진의 손짓은 전혀 다른 의미를 전하고 있었다.
달려온 연락병의 지시에 하이듀크는 급히 말을 반전시켰다.
“남문이 열린다!”
모두의 시선이 동문으로 돌아간 바로 그 틈에 남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제국군들이 튀어나와 남문 앞에 모여 있던 왕국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상공에서 태진은 그 흐름을 미리 읽어 낸 것이다. 하이듀크가 지시를 이해하고 말을 돌렸을 때에는 성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하이듀크의 날카로운 시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막아라! 문이 닫히지 못하게 막아!”
가까운 곳에 붙어 있던 기사들이 몸을 날려 성문을 붙잡았다.
“제길! 빨리 문을 닫아!”
달려 나오려던 말을 급히 멈추고 소리치는 제국군의 모습이 바로 앞에 있었다. 왕국의 기사는 들고 있던 창을 문 틈 사이로 길게 쑤셔 넣었다.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틈으로 비틀고 들어간 다른 기사가 말의 목에 검을 박았다.
히이이잉!
비명을 지르면서 말이 발광을 부렸다. 그 위에 타고 있던 제국군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그 틈에, 남문의 틈을 공성추가 파고 들어왔다.
쿵!
문이 갈라지듯이 열렸다.
“남문이 뚫렸다!”
“마법사들은 방어에 주의하라!”
하이듀크의 돌입은 과감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동문에서 이미 마법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공성추로 뚫어 버린 이후, 오히려 뒤로 한 차례 물러날 정도였다.
그러나 잠깐 기다린 사이 제국군에게서는 마법이 사용되지 않았다.
“돌격!”
하이듀크의 명령과 함께 마창 기사와 보검 기사들이 한꺼번에 남문으로 밀고 들어갔다.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제국군이 남문 앞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제국군도 이제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이었기에 필사적으로 왕국군과 사투를 벌였다.
캉!
카강―!
검과 검이 부딪혀 불꽃을 만들어 냈다. 뒤편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왕국군의 가슴을 꿰뚫고, 왕국군의 마법이 제국군을 날려 보냈다.
성벽에 처박히는 동료 아래에서 뻗은 제국군의 힘찬 찌르기에 왕국군의 가슴이 꿰뚫렸다. 서로가 서로를 부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제국군의 결의는 대단했다. 두세 번 찔린 것으로는 아무도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왕국군의 어깨를 붙잡고, 검이 없으면 적의 팔을 물어뜯었다. 물린 왕국군의 고통 속에서도 어떤 경외감을 느끼며 적의 목을 베어 냈다.
밀려나면 끝이다.
분명히 왕국군의 숫자가 많았으나 기사들은 공통적인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미 동문도 뚫렸기에 남문을 막고 있던 제국군 병력은 분명 얼마 되지 않는다. 허나 그 의지만큼은 수천의 왕국군에 뒤지지 않았다.
“덤벼 봐라, 이 자식들!”
“제국의 긍지를 보여 주마!”
제국의 군인들이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기사들은 그 의지에 보답이라도 하듯 성심성의껏 응전했다.
결과 남문은 입구에서 굉장한 혈전이 벌어졌다. 제국군이 왕국군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 돌입이 더뎌지고 있었다.
“밀어붙여라! 뭣들 하고 있는 거냐! 적은 고작해야 수백이다!”
하이듀크는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전선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혀를 차며 그는 고삐를 움켜쥐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내가 나설 수밖에! 그렇게 작심하고 말을 달리려는 그를 막아서는 손이 있었다.
“비켜!”
뒤쪽에서 미연이 달려 나왔다. 쏜살처럼 하이듀크를 지나 왕국군 속으로 파고 든 그녀는 고삐를 놓고 말 위에 올라서더니 성문 안으로, 문자 그대로 뛰어 들어갔다.
허공을 한 바퀴 놀아 착지한 그곳은 제국군의 한중간. 북부 주둔군과 전투를 벌이전 그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안녕!”
상쾌한 태도로 손을 흔든 그녀가 칼을 뽑아 들었다. 왕국군과 제국군이 한 마음이 되어 고함쳤다.
“투신의 전사!”
미연이 파도처럼 제국군을 습격했다.
“길을 비켜라!”
피바람이 몰아쳤다. 더 이상 설명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미연은 순식간에 10여 명의 제국군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왕국군과 대등하게 겨루고 있던 제국군의 전선은 미연의 등장으로 인하여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의지 가지고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 세상에는 많다는 사실만 새삼 자각할 뿐이었다.
서걱!
촤아악!
허공에 날리는 피의 분수를 단 한 방울도 맞지 않는 투신의 전사. 제국군은 서서히 진형이 흐트러졌다. 그 틈을 하이듀크는 파고들었다.
“지금이다! 돌격하라!”
하이듀크가 말을 몰고 전선에 나타났다. 그도 신의 전사와 함께 건국공신으로 활약하던 자였다.
변함없는 검술 실력을 자랑하면서 순식간에 제국군들을 숙청했다.
단장의 활약을 목격한 기사들은 함성과 함께 제국군을 몰아붙였다. 제국군의 위세는 점차 점차 더더욱 깎여 나갔다.
“여긴 맡길게!”
하이듀크가 등장하자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고 느낀 미연은 도로 뒤쪽으로 물러났다. 성문에 버리고 온 말에 다시 올라 그녀는 황성 밖으로 말을 몰아 나갔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태진이 올라 있는 탑의 아래. 미연이 황성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던 태진은 곧장 탑을 내려와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꽉 잡아!”
미연의 허리를 꽉 붙드는 태진. 미연은 고삐를 강하게 내려치며 도로 황성으로 돌진했다.
남문 앞에 몰려 있던 왕국군, 제국군 가릴 것 없이 막무가내로 돌파한 그녀는 황성을 무작정 내달렸다. 길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황궁을 향해 일직선으로 주파하려 했다.
그러나 아직 황성에는 병력이 남아 있었다. 동문 쪽에서 마법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미연은 아주 뜻밖의 인물들을 발견하여 말을 멈췄다.
“어라, 너희들. 살아 있었어?”
태진과 미연이 가는 길을 막아선 그들은 전 백두 부대의 대원들이었다.
미연이 스스로 시험을 치러 뽑아 낸 레디오, 시엘, 미티스. 세 명이 그녀를 앞을 막아서 검을 겨누고 있었다.
미연은 말에서 내려왔다.
“태진이 너는 가만히 있어.”
그녀의 태도가 사뭇 진지해서 태진은 질문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말을 몰아 길 옆에 세운 그는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놀랐어. 당신이 왕국에 붙었다니 말야.”
“어라, 시엘. 경어는 안 쓰네?”
“적에게 지켜 줄 예의 같은 건 없어.”
시엘이 적의를 보였다. 미연은 가벼운 태도로 그것을 넘기며 레디오에게 말을 돌렸다.
“레디오는 조금 다친 것 같네. 괜찮아?”
“신경 쓸 것 없…… 습니다.”
고지식한 면이 있는 레디오는 아직 그녀에게 반말은 사용하지 못했다. 미연은 키득키득 웃으며 마지막 남은 자에게 눈을 돌렸다.
“그 자식은 어디 갔지?”
“누구? 미소라? 아마 저 뒤쪽에서 싸우고 있을 거야.”
“네년한테는 볼일 없어. 여기서 싸우다 뒈지든 맘대로 해라.”
“어머나, 그래도 전 상관인데 너무 차가운 거 아냐?”
미티스는 조소를 남겨 놓고 미연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미소라에게 단검술을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렇기에 이제 미연에게 가졌던 적의가 고스란히 미소라에게 옮겨 간 듯했다.
그가 사라진 뒤 이제 시엘과 레디오, 둘만이 남아 있었다. 시엘은 확연한 적대감으로 미연을 대하고 있었다. 미연은 은은하게 웃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실망했어?”
“당연하잖아? 우리 보고 이 황자 직속 부대로 들어오라고 한 자가 누구지? 그런 자가 카알트라즈에서 혼자 도망쳐서 왕국에 붙어? 장난쳐?”
분노하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그녀를 레디오가 손을 뻗어 막았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 왕국군에 간 겁니까.”
레디오는 비교적 침착한 어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잠재되어 있는 화는 시엘과 별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미연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미연은 굳이 말을 고르지 않았다.
“낭군님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정말 투신의 전사였습니까.”
레디오는 한숨을 삼키며 이야기했다.
“이시브 대령님께 당신이 로츠왈드 왕국을 세운 투신의 전사라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정체를 숨기고 제국에 협력 중이기에 가면과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처음 들었을 때는 물론 믿지 않았습니다만…….”
그의 눈길은 한쪽에 서 있던 태진에게 잠깐 옮겨 갔다. 태진은 굳이 눈을 피하진 않았다.
레디오는 기어코 길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땐 이미 그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당신을 이제…… 진짜 적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레디오가 검을 뽑았다. 그와 함께 시엘도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미연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칼을 빼들었다.
“그냥 물어보겠는데, 우릴 그냥 보내줄 수 없을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넌 적이야. 적은 베어야 해.”
“그럼 말해 두지. 진심으로 덤벼. 아니면 정말 둘 다 죽을 테니까.”
미연은 칼을 겨누며 소리 없이 웃었다.
“자, 스승님을 뛰어넘을 차례야!”
그녀의 도발에 두 검사는 간단히 응했다. 원래부터 미연을 막기 위해 나타난 것이기에 둘의 움직임에 더 이상 망설임도 없었다.
“당신을 막겠습니다!”
레디오가 선공을 날렸다. 보법을 밟으며 날아오는 검을 미연의 칼이 쳐낸다. 그 뒤에서 연속적으로 뻗어 오는 시엘의 검. 그것조차 쳐내며 옆으로 피하는 틈을 노리고 레디오의 두 번째 공격, 횡베기!
“호?”
미연은 몸을 휙 돌려 공격을 피해 내더니 뒤쪽으로 사사삭 물러났다.
“보법이 제법 좋아졌는걸?”
“놀리는 거냐!”
시엘이 미연의 감탄에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녀의 공격을 슬쩍 피해 내며 뒤로 물러선 미연은 웃음기 띄운 얼굴로 칼을 내밀었다.
우습게도 그 칼의 끝이 시엘의 면전에 가서 멈췄다.
그리고 시엘의 얼굴이 굳었다. 미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보법이 너무 굳었어. 좀 더 유연하게 밟아 봐.”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시엘이 소리치는 사이 레디오의 검날이 날아들었다. “어머나?” 놀라는 척하면서 옆으로 도망간 미연이 레디오의 공격을 하나하나 차단하면서 일렀다.
“허리에서 팔로 뻗어 가는 힘이 너무 단순해. 그랬다간 검을 잡는 순간 적이 다 읽어 버릴걸?”
“―칫!”
레디오와 시엘, 두 명이 동시에 미연을 공격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듯한 검격에 미연도 아주 조금 움직임을 빨리 하면서 받아 냈다.
챙챙!
캉!
쇠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레디오와 시엘의 얼굴이 점점 구겨져 갔다.
단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둘이서 한꺼번에 덤비면 승산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들이 예상한 실력을 훨씬 상회하는 존재였다.
시엘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 순간 미연의 칼이 그녀가 밟으려는 궤도를 차단하며 들어왔다.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찰나에 이미 본능적으로 검을 쳐올렸다.
챙!
검날이 충돌해 불꽃이 일어났다. 미연은 흐뭇하게 그 장면을 보며 뒤로 물러섰다.
“방금 건 잘 막았어. 보법도 좋았고 말이야. 그렇게 수련해 나가면 훌륭한 검사가 될 거야.”
“넌 아직도 우리를 가르칠 셈이냐!”
“당연하지. 해병대만 그런 줄 알아?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 아냐?”
당할 수가 없다. 실력에서부터 여러 모로 미연과 자신은 그릇이 다르다. 시엘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같은 여자이며 같은 검사. 다르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시엘이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자세를 낮췄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당학류 해검도의 검세에 미연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미연아. 시간 없어. 그만 놀아.”
“아, 미안 미안. 얘네들 하고 놀아주는 게 재밌어서 말야. 빨리 끝낼게.”
방관자를 고수하고 있던 태진이 한마디에 미연은 잊고 있던 목적을 떠올렸다. 목을 살짝 푼 다음 다시 칼을 움켜쥐는 미연의 눈빛은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없었어. 빨리 덤벼.”
시엘과 레디오. 두 사람과의 대결은 여흥에 불과하다. 미연은 그 점을 확실하게 깨닫게 만들었다.
“이대로…….”
“보낼 성싶은가!”
레디오와 시엘이 한순간에 튀어나갔다. 양측에서 날아드는 검날은 평범한 검사라면 분명 한 번에 절명할 정도로 예리했다. 하지만 미연은 웃음 지은 얼굴로 칼을 쥔 손목을 한 차례 돌리더니,
슥―
두 사람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시엘과 레디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전혀 없이, 칼에 베인 흔적조차 없이 정신을 잃은 것이다.
“호오― 어떻게 한 거야?”
“당학류 해검도 분파의 기술의 일종이야. 손잡이 뒤쪽으로 급소를 쳐서 일시에 기절시키는 거지. 얘네들, 죽이고 싶진 않거든.”
바운스에 와서 처음으로 얻은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둘은 죽일 수는 없었다. 그것이 스승의 마음.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말야, 태진아. 목에 그건 뭐야?”
“이거? 검인가 봐.”
태연하게 태진이 가리킨 물건은 말 그대로 검이었다. 검 끝이 태진의 목젖을 금방이라도 찢어발길 것처럼 다가와 있었다.
미연은 말 옆으로 눈을 돌렸다. 말에 타고 있던 태진, 그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것은 바로 이시브였다.
“이번엔 너야?”
미연이 칼을 움직이려 하자 이시브가 소리쳤다.
“멈춰라, 미연! 조금이라도 더 움직인다면 네가 보는 앞에서 너의 사랑하는 연인을 죽이겠다!”
미연은 칼을 내렸다. 하지만 전혀 긴장하는 투를 내비치지도 않고 생긋 웃었다.
“하나만 말해 줄게. 우리 낭군님은 말야, 내가 아는 이 세상에서 제일 죽이기 힘든 인간이야.”
얘기한 그 순간이었다. 태진의 손이 이시브의 검을 향해 있었다. 손바닥을 펼치는 것은 일순, 짧은 주문을 토해 내는 것은 찰나였다.
“일그러짐으로 끊어지는 단절.”
파칵―
마력핵이 빠져나오는 순간을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태진의 마법이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지는 태진밖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법에 문외한인 이시브와 미연도 충분히 이해했다.
이시브의 검이 잘라진 것이다. 예리한 칼날로 자른 듯이 아주 깔끔하게. 공간 단절 마법이었다. 공간 자체를 어긋나게 만드는 마법이었기에 제아무리 단단한 성질의 금속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시브의 시야 아래로 잘려 나간 검날이 추락했다. 바닥에 떨어지며 약간의 소음을 일으켰다.
그 허점은 미연이 두 걸음에 간격을 좁히고 이시브의 머리통을 후려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퍼억!
주먹을 쥔 채 힘껏 이시브를 날려 버린 미연의 가공할 힘에 그가 10m 뒤로 나뒹굴었다. 그 상태로 곧바로 기절해 버리는 이시브. 미연은 손을 탁탁 털면서 몸을 돌렸다.
“용서가 없구나.”
“저 녀석도 날 이용한 거니까 이 정도는 해 줘야 되지 않겠어?”
상큼하게 웃으면서 미연이 말 위로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태진이 고삐를 잡고 미연이 태진의 허리를 붙잡은 자세로 그들은 말을 달렸다.
중간에 의외의 사태로 시간이 늦어졌지만, 다행히도 황궁은 가까웠다. 점차 전쟁으로 인한 소란이 잦아드는 중에 미연과 태진은 황궁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태진도 본 적이 있는 노년의 마법사가 문을 막고 서 있었다. 말에서 내린 태진은 가장 먼저 미연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냐?”
“에스티른 마법사단 단장. 그것 말고는 기억 안나.”
태진은 그제야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의 앞에 가서 서자마자 미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문을 읊는 것보다 내가 더 빠를걸?”
에스티른 단장의 팔이 움칠했다. 그래도 내려가진 않았다. 명확하게 둘의 황궁 진입을 막겠다는 자세에 태진은 묵묵히 말했다.
“텔리오트 황제에게 해를 입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항복을 원한다는 것 아시잖습니까.”
“……그렇지만 항복하지 않는다면 해를 입힐 것이 아닌가!”
태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에스티른 단장은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제 겨우 황제가 되신 분이다. 숱한 방해를 받고 이제야 황제에 오르신 분이란 말이다! 폐하께 꼭 해를 입혀야 하겠나!”
그의 눈길이 미연에게로 향했다.
“그동안 이용한 것은 사과하지. 하지만 저분은 나의 위대한 꿈, 그 자체이신 분이야!”
“황제든 꿈이든 상관없습니다.”
태진은 어조를 바꿨다. 이 늙은 마법사를 설득하는 것은 이제 포기했다.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직시했다. 눈빛을 마주친 에스티른 단장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제게 소중한 것을 위협했습니다. 그만한 보답을 해 주려는 것뿐이고, 그전에 조금이나마 기회를 주려는 겁니다. 계속 저를 방해한다면 여기서 당신을 꺾고, 당신의 황제마저 꺾어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위하는 황제가 어떤 선택권도 얻지 못하길 원하십니까?”
쉬지 않고 말을 내뱉은 태진은 숨을 고르며 에스티른 단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팔을 벌린 채 얼어붙은 얼굴의 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태진은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뒤 그의 팔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태진은 미연을 데리고 그의 곁을 지나쳐 황궁으로 들어갔다. 결코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집무실로 태진을 데리고 가면서 미연이 그를 잠깐 쳐다보았다.
“넌 협박이 의외로 잘 맞는가 봐.”
“그런가 보다…….”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씁쓸함이 입안에 남는 기분이랄까.
황궁은 조용했다. 시종이고 뭐고 모두가 대피한 것인지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 같았다. 미연은 예전의 황궁을 떠올려 보다가 태진과 같은 씁쓸함을 느껴 생각을 지웠다.
두 사람이 잠깐 상념에 잠긴 사이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집무실 앞에서 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마주보았다.
“여기가 마지막이네.”
“그래.”
그들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텔리오트― 가면을 벗은 황제는 총을 들고 그들을 반겼다. 미연은 반사적으로 칼 손잡이를 붙잡았다. 태진이 손을 뻗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잠깐.”
태진은 텔리오트의 얼굴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미연이 알아채지 못한 그 얼굴. 분명히 미연과 함께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고, 태진의 머릿속에 한 순간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태진, 그조차도 쉽게 믿기 힘든 것이었다.
“……에스티른 단장, 그도 알고 있습니까?”
“물론.”
“알면서 자신의 소망을 당신에게 강요했다는 겁니까.”
“강요가 아냐.”
담담히 답하는 텔리오트의 총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태진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강요가 아니라면, 할리우드 배우인 당신이 왜 이곳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에?”
반응을 보인 것은 미연이었다. 태진과 텔리오트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왔다 갔다 하던 시선을 접은 다음 서산을 한 차례 쳐다보았다. 그 뒤 앞뒤로 서성이다 한 바퀴를 돈 다음 손가락을 들었다.
“아아앗! 생각났다! 조쉬 엘리엇!”
할리우드 배우 조쉬 엘리엇. 아카데미 주연상도 두어 번 수상한 적이 있는, 젊은 배우들 중에서도 이목에 집중되고 있는 배우였다.
태진과 미연은 지구로 돌아간 이후에 첫 데이트로 그가 나온 영화를 선택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는데 그의 연기는 매우 훌륭했기에 미연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건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미연. 혹시나…… 하고 생각했지만, 너희들은, 어디 출신이지?”
“한국입니다.”
텔리오트, 아니 조쉬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한국이라…… 부산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그곳이군. 한 번 참가해 본 적이 있었지.”
그 해가 태진과 미연이 본 영화가 수입된 해였다. 텔리오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총을 내렸다.
“그렇군…… 내가 건너올 때 너희들도 따라서 왔다는 건가.”
“당신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겁니까?”
태진의 물음에 텔리오트는 먼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대답했다.
“에스티른 단장. 그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
조쉬는 한창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을 소재로 한 판타지를 섞은 역사물로 캐릭터가 맘에 들어 출연을 결심했었다. 북부 유럽의 숲에서 감독과 스탭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한참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주변이 새까맣게 변했다. 의식으로 침범해 드는 어둠에 짓눌려 정신을 잃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눈앞에 한 노인이 있었다.
“……여긴 어디지?”
“이, 이럴 수가! 대륙 공용어를 할 줄 아는 거요?”
침대 같은 곳에서 몸을 일으킨 조쉬는 노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노인의 이름은 에스티른 단장. 우습게도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고 했다.
조쉬는 처음에는 제작진이 꾸며 낸 몰래카메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스티른 단장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었다.
분명히 자신이 발음하고 있는 말은 영어가 아니었고, 그때 처음으로 이곳이 다른 땅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에스티른 단장은 조쉬에게 모든 설명을 해 주었다.
“당신은 죽은 이 황자를 대신하여 내가 다른 세계에서 불러들였소. 얼마 전에 비밀리에 차원의 레펠을 찾아내거든. 그것을 연구하여 유일하게 차원 소환 마법을 해독해 내게 됐소. 이 황자가 죽었으면 이러지 않았어도 될 일을. 하지만 난 당신이 필요했소. 죽은 이 황자를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말이오.”
차원 소환 마법은 다른 세계, 차원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이쪽 세계로 옮겨 올 수 있는 극상위 마법이었다. 차원 소환 마법을 쓴 부작용으로 에스티른 단장은 한동안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부작용이 있음에도…… 나를 이리로 데리고 왔단 건가?”
“그렇소. 부디 내 말을 믿어 주시오.”
조쉬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오랜 병으로 죽어 버린 이 황자 텔리오트 지 아키레마의 연기를 하기로 한 것이다.
“잠깐……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이곳의 말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눈을 떴을 때부터 대륙 공용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는 겁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에스티른 단장이 설명해 주더군.”
차원 소환 마법에는 기이한 효과가 따라붙는다. 그것은 이세계에서 건너온 자의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특기가 더욱 특화되어 나타난다는 것. 가령 힘이 셌던 자는 이곳에서는 더더욱 힘이 세지고 머리가 좋았던 자는 이곳에서 더더욱 두뇌 활동이 활발해진다.
태진은 무심결에 납득했다.
“미연이와 나의 이능이 그런…….”
미연은 오랜 무도 수련으로 신체 능력이 좋았다. 바운스에서는 그 신체 능력이 더더욱 증폭된 것이었고, 태진은 원래부터 좋았던 두뇌가 더욱 완벽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뿐만이 아냐. 특화되어 버린 능력에 맞춰서 필요한 기능까지 발달하게 돼. 본래의 능력과 관계되는 또 하나의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의미지.”
태진의 초월적인 감각. 미연의 전투 감각. 모든 것이 그걸로 설명되었다. 태진은 침을 삼켰다.
“그럼 조쉬, 당신의 능력은 뭡니까?”
“난 할리우드 배우야. 배우의 특기는 뭐겠어?”
“역시…… 연기력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에스티른 단장은 날 선택한 거야. 연기를 잘하는 이를 데리고 오면 이 황자를 연기하는 데 필요한 부가적인 능력도 따라오게 되니까. 예를 들면, 언어라든가.”
태진은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후에 난 에스티른 단장에게서 이 황자를 연기하기 위한 모든 지식을 전수받았어. 그의 소원대로 황제가 되기 위해서 말야.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의 특징이나 신상을 빠르게 습득해 갔지. 연기에 필요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놀라운 이야기였다. 어떤 한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 연기력이 특기인 자를 데리고 오고 그에게 대타를 시킨다는 것부터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이 일을 꾸민 에스티른 단장이 왜 그렇게 조쉬에게 집착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잠깐. 이게 아냐. 태진은 무심코 감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흔들며 태진은 눈을 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강요가 아닌 에스티른 단장을 위해서 황제가 된 겁니까?”
“그것도 아냐.”
조쉬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도 했고,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듯도 했다.
“내가 누군지 잊지 마. 고작 딴 사람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서 이런 커다란 도박을 허락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럼 대체 뭐야?”
진행되지 않는 이야기에 미연이 가시 돋친 음성으로 물었다. 조쉬는 두 팔을 벌렸다. 마치 주변을 보라는 듯이.
“잘 생각해 봐. 이것은 일생일대의 연기 경험이야. 지구에서라도 몇 천억의 돈을 들여도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생활이라구. 황태자와 황제까지. 배우로 살면서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것이 조쉬의 이유였다. 할리우드 배우의, 너무나도 배우다운 이유에 태진과 미연은 한동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왜 이 땅에 다시 떨어졌는지는 짐작이 갔다. 차원 소환 마법 중에 어떤 실수가 있어 전에 바운스에 온 적이 있는 그들이 우연찮게 다시 걸려 버린 것이다. 결국 첫 번째도 어쩌다가였고, 두 번째도 어쩌다가인 셈이다.
그 후로 그들은 왕국과 제국으로 헤어져 고생을 했다. 다시는 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전쟁을 다시 겪어야 했다.
그 모든 원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미연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더라도…… 전쟁을 일으킨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백두 기사대가 들이닥친 것은 이때였다. 문 앞에 서 있던 그들 탓에 미소라를 비롯한 아리스, 아서까지 아무도 집무실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태진 님!”
“저, 저자가 황제……인 겁니까?”
태진은 돌아보지 않고 지시했다.
“기사대는 지금 곧바로 제국 마법사단으로 가십시오. 그곳을 철저하게 수색해서 차원의 레펠을 찾아야 합니다. 어쩌면 마법사단장이 먼저 갔을 수도 있으니 서두르십시오.”
“차, 차원의 레펠?”
“어서!”
태진의 일갈에 기사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아 있던 미소라도 미연의 말을 듣고 자리를 떴다. 집무실에는 또다시 세 명만이 남았다.
“보내도 되겠어?”
텔리오트는 다시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 들려 있던 총. 아마도 차원을 넘어올 때 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물품이었다.
“그 총은 진짜입니까?”
“물론. 소품 하나에도 신경 쓰는 감독이었으니까. 현실감을 살리려면 실제 물건을 사용해야 한다더군.”
조쉬는 태진의 머리에 똑바로 총구를 겨눴다.
“물어보지. 너희들의 목적은 뭐지? 왕국을 제국에게서 지켜 내는 것인가?”
태진은 대답했다.
“우리의 목적은 둘이서 지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달려왔다. 중간에 어떤 방해와 시련이 끼어들어도 서로의 존재를 믿고 서로의 위치에서 분발해 왔다.
같이 돌아가자.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이유를 위하여.
태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과 함께 조쉬에게 손을 뻗었다.
“제국은 이제 끝입니다. 우리와 같이 지구로 돌아갑시다. 이곳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그 말대로야. 제국은 끝이지. 내가 이렇게 만들었지만 더 이상 가망이 없어.”
태연하게 인정하는 조쉬의 얼굴에 뜻밖에도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태진과 미연은 동시에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행동하려 했다. 태진은 조쉬의 근육의 움직임을 읽었다. 미연은 오로지 감 하나만을 믿고 몸을 날렸다.
조쉬의 팔이 안으로 굽혀진다. 손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던 총이 점차 그의 얼굴로 당겨져 올라온다. 차가운 총구가 그의 관자놀이에 도착했을 때 태진은 소리치고 있었고, 미연은 그의 팔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고 있었다.
타앙!
조쉬의 옆머리에 터져 나갔다. 실탄의 파괴력은 그의 두개골을 부수고 뇌수를 뒤엎어 머리통을 날려 버릴 만큼 강력했다.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미연은 굳었다. 옆으로 무너져 내리는 조쉬의 몸을 받아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태진은 잠시 후에야 굳은 몸에서 풀려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한 발자국 후 다시 한 발자국, 그리고 다시 한 발자국. 열 발만에 미연이 있는 곳까지 와 그녀의 어깨의 손을 올렸다.
그것이 해빙의 주문이 된 듯 미연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았다.
빨갛게 바닥을 적시고 있는 조쉬의 피.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진 할리우드 배우의 시신.
제국의 이 황자 역을 연기하게 되었고, 급기야 황제가 되었지만, 나라를 망하게 만든 죄를 스스로에게 물어서 황제는 자살을 했다. 조쉬라는 이름의 할리우드 배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연기를 하다가 죽어 버린 것이었다.
“이걸로…… 전쟁은 끝난 거지?”
“응, 맞아.”
미연의 힘없는 물음에 태진도 힘없이 응답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미연은 다시 힘없게 중얼댔다.
“이제 끝났는데…… 왠지 전혀 기쁘지 않아.”
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로 이날, 그렇게 아키레마 제국은 바운스 대륙 지도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