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재림한 영웅 전설
“……우아아앙!”
업무를 보고 있던 태진은 갑자기 달려 들어온 미연이 울음을 터뜨리자 당황했다.
“뭐, 뭐냐, 왜?”
“아서가 괴롭혀!”
태진에게 매달린 미연이 절규하는 그때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태진 님, 실례합니다! 미연 님, 도망가시면 어떡합니까?!”
“꺄악! 또 나타났다, 저 귀신! 도깨비! 구미호!”
“구미호는 또 뭡니까?”
달려드는 아서의 손을 피해 미연이 태진의 뒤에 숨었다.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미연과 흥분하여 씩씩대는 아서. 중간에 끼인 태진은 한숨을 살짝 내쉬고 아서를 말렸다.
“잠깐 진정 좀 하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얘가 나한테 계속 검술 가르쳐 달라잖아!”
“저도 미연 님처럼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르쳐 달라는 건데 가르쳐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가르쳐 줬잖아!”
“겨우 반나절 정도지 않습니까!”
미연은 태진의 의자 뒤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좀 놀자구! 태진이하고 얼굴 보는 게 아침 밥 먹을 때랑 저녁에 잠들 때밖에 없어!”
“거 조금 못 본다고 닳습니까?”
“봐야지 닳을 거 아냐! 안 보는데 뭐가 닳아!”
“그럼 더 좋은 거 아닙니까!”
태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연이 피하는 이유는 충분히 알겠다. 왕국군이 시디 노트니에 머물게 된 날, 아서는 미연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미연도 흔쾌히 그것을 수락했고 그 이후로 아서는 미연을 따라다니다시피 하고 있었다.
미연도 누군가에게 검을 가르쳐 주는 것은 좋아한다. 한국에서도 사범을 맡았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가르쳐주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였던 것이다.
그는 웃음 띤 얼굴로 둘의 말다툼을 중재했다.
“자자,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진정하십시오. 미연이 너도 진정해.”
그제야 겨우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태진은 헛기침을 하고 둘을 나란히 세웠다.
“그러니까 요는 검술을 배우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미연이 넌 어떻게 생각 하냐?”
“충분해! 아침 먹고 바로 시작해서 점심시간 빼고 이 시간까지였다구!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란 말야!”
태진은 잠깐 시간을 가늠했다. 해시계를 보지 않아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8시간은 수련했다는 말이 된다.
미연이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생각하면 이건 분명히 오버트레이닝에 가까웠다.
“아서. 너무 심하게 수련하면 오히려 몸에 좋지 않습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렇게 서두른다고 해서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더 할 수 있습니다.”
“괜찮지 않아. 왼쪽 다리, 근육통 있지?”
미연이 날카롭게 찔렀다. 아서는 윽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긴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쩐지 보법 밞을 때 왼발이 이상하다고 했어. 아직 보법 단계인데 벌써 그 정도야. 아직 배울 게 산더미인에 벌써 몸 망치고 싶어?”
“……하, 하지만!”
뭐라고 항변하려는 그의 말은 태진이 가로막았다.
“아서. 무엇을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모르시는 겁니까? 제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를!”
“왜입니까?”
태진은 진정으로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꺾어보였다. 옆에서 미연도 갸웃댔다. 아서는 둘의 행동을 보다가 들으라는 듯 아주 크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태진과 미연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겨우 쉴 수 있게 됐다. 응.”
“아서가 많이 괴롭게 했나 보구만.”
“그렇다니까. 내일부터 좀 더 시간을 줄여야겠어. 체력이 제법 좋아서 곧잘 따라온다니까?”
그녀의 수련을 하루 8시간씩이나 버티고 있다는 것은 대단했다. 태진은 탄복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슬쩍 돌아 들어간 미연이 그의 목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뭐야. 마눌님이 왔는데 일이 먼저라 이거야?”
“좀 있으면 럭커 단장이 올 거야. 그 전에 이 서류 결제해 놔야 돼.”
“그런 건 팰이 오면 시키면 되잖아.”
“오려면 아직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해. 이 일을 모두 밀려 놨다가는 팰이 나를 죽이려들걸?
국왕이 없는 현재 태진은 팰리슈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제국 흡수에 관한 모든 건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지금은 전쟁 후 정비가 우선적으로 행해지고 있었기에 국왕이 없어도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우에…… 놀아 주지도 않구.”
“바쁜 거 알잖아. 나중에 방에 가서 놀아 줄 테니까 지금은 좀 참아.”
미연이 태진의 얼굴에 볼을 비비적대다가 손을 풀었다.
“쳇, 미소라하고 바람이나 필 테다.”
“그쪽에서 받아들여 줄까. 의견부터 물어봐.”
“흥! 태진이 바보! 미소라는 그래도 날 좋아한다구!”
“자신 있으신걸?”
태진은 미연에게만 보여주는 미소로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미소라 씨는 어떻게 한대? 판게리츠로 돌아가야 할 텐데.”
“글쎄, 아직 아무 말도 없네.”
미소라는 미연이 안전해질 때까지 그녀의 곁에 있겠다고 했다. 지금은 아키레마 제국이 몰락하여 그녀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는 없어진 상황. 미소라가 말했던 조건에 충분히 해당했다.
그렇지만 미소라는 아직 돌아간다는 말도 없이 황성에서 지나고 있었다. 태진이나 미연의 일을 도와준다든가 기사들의 수련을 돕는다든가, 그렇게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
“어쩌려는 걸까. 한번 말해 볼까?”
“아니, 됐어. 그건 자신이 판단할 테니까 가서 그냥 같이 놀아.”
“어라, 뭐야. 바람 핀다고 해도 긴장 안 해?”
“내가 아리스하고 바람 핀다면 믿을래? 그거 하고 똑같아.”
미연이 묘하게 패배감을 느끼며 혀를 내밀었다. 태진도 짓궂은 표정을 지어 주고, 마지막에는 서로 웃어 주며 헤어졌다.
그녀가 집무실을 나서자 태진은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 아직 왕국군에 반란군들이 임시로 편성되어 있어서 그 문제에 대한 서류 결재가 조금 오래 걸리고 있었다. 사실 이것 때문에 태진은 럭커를 호출한 것이었다.
럭커는 반란군 연합측에서도 총두목으로 대접받고 있었기에 반란군에 대한 용건은 그에게 상의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태진이 서류의 마지막 장을 보고 있을 때 럭커가 집무실을 노크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반란군도 총연합이 한 자리에 모인 것도 처음이고 수도 재건에 여념이 없었다. 시민들과 함께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고 삶의 터를 바로 잡는 중이었기에 제법 바빴다.
태진은 간단히 인사했다.
“인사를 잊고 있었습니다만, 반란군의 도움 감사드립니다. 각지에서 반란군이 제국군을 막아 주었기 때문에 수도 함락이 쉬웠습니다.”
“우리도 원했던 일이오. 인사를 필요 없소.”
제국군의 병력은 원래라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왕국군이 전선을 일직선으로 돌파하는 동안 반란군들이 각지의 제국군과 맞서 싸워 주었기에 여타 무익한 전투를 벌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불렀다고 들었소. 무슨 일이오?”
“아, 다름이 아니오라 이 서류 때문입니다.”
태진은 보고 있던 서류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럭커는 대충 그것을 훑어보았다.
“우리 쪽에서 올린 것이군. 뭔가 틀린 점이라도 있었소?”
“그게 아닙니다. 총인원과 구도 등,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어서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었습니다. 다만 진심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이 땅을 받아 달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태진은 무겁게 끄덕였다. 럭커는 서류를 돌려주며 이야기했다.
“시디 노트니를 점령하였고 황제를 꺾은 것은 그대들, 왕국군이고. 그러니까 그대들이 이 땅을 가지는 것이 맞지 않겠소?”
“그것은 주객전도의 상황입니다. 승리한 것은 저희들만의 힘이 아닙니다. 예전부터 여러분 반란군들이 끊임없이 봉기하였고 도움을 주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을 따지자면 여러분들이 가지셔야 할 땅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넓은 땅은 필요 없소.”
럭커의 대꾸는 단호했다.
“그 서류를 보냈을 때 이미 우리는 모든 결정을 내린 상태였소. 나나 켈루그 같은 두목들이 부하들의 의견을 물었고, 그 의견들을 우리가 모여 조율한 결과가 그것이오. 마지막은 읽으셨소?”
“아뇨. 이제 막 읽을 참이었습니다.”
“그럼 내가 직접 말하지. 이 주인 없는 땅을 받아 새로운 제국을 만들어 주시오. 그 대신 우리들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길 바라오.”
럭커는 설명했다. 각 반란군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전처럼 황성의 일방적인 통치를 받을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전 황성이 그어 놓은 구역에 따라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달라.
“부하들 중에는 우리가 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도 많이 있었소. 그들도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야했기에 이런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오. 받아주실 수 있겠소?”
그것들을 들으며 태진은 서류의 마지막 장을 읽었다. 좀 전에 럭커가 말했던 사항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부분이었다. 럭커가 잠시 기다리는 동안 태진은 그 사항들을 이해하고 기억했다.
“그렇군요…… 이대로라면 황성에서 관여하는 부분이 최소화되겠습니다.”
“그렇소. 물론 여지는 남겨 두는 것이오. 우리도 통치체계라는 것은 지킬 테니까.”
태진은 서류를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서 훌륭한 결론이었다.
아직 바운스라는 이 땅에는 자치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만약 로츠왈디스 왕가가 왕국보다 훨씬 넓은 이 제국 영토를 다스리려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할 체계이기도 했다.
비교하자면 미국의 주자치제와 비슷한 개념들이 럭커나 반란군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조금 시간을 끌며 고심한 후 태진은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이것은 국왕 폐하가 도착한다면 상의해 보겠습니다.”
“꼭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소.”
“걱정 마십시오.”
태진은 그가 심려하지 않도록 단단히 대답했다. 서류에 결제를 한 그는 그것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그때 럭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방금 두목들과 이야기하다 정해진 사항이오. 우리는 이번주 내에 각지로 떠날 예정이오.”
“예?”
“물론 수도 복구를 위한 인원은 남겨 두고 갈 것이오. 우리도 우리가 살던 땅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하지 않겠소.”
그것도 그랬다. 반란군들은 이 전쟁을 위하여 모든 인원을 이끌고 시디 노트니로 온 것이다. 그들의 전투 흔적은 아직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태진은 뒤로 미뤄두었던 결정을 수면으로 끄집어냈다.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돌아가시는 게 옳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만 있으면 국왕 폐하가 도착하십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전해야 할 뜻은 모두 전했소.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부하들도 많아서 말이지. 늦어도 삼 일 안에는 출발할 것 같으니 이해해 주시오.”
반란군들에게는 이미 결정된 사항인 모양이었다. 럭커의 고집스런 얼굴을 보고 태진은 주장을 접었다. 태진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럭커는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나갔다.
“이래저래…… 제멋대로인 사람 천지군.”
가볍게 투덜대고서 그는 업무로 돌아갔다.
저녁에 하이듀크가 찾아와 같이 식사를 하자고 그에게 말했다. 황궁의 요리사는 전쟁에도 도망가지 않고 황궁에 남아 있었다.
처음엔 반항적이던 그도 황성을 점령한 왕국군의 신사적인 태도에 결국 마음을 열었다. 그가 요리한 음식들은 모두 훌륭해서 태진을 비롯한 왕국인들이 모두 만족했다.
그 식사 자리에는 미연을 비롯하여 모두가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태진은 반란군의 뜻을 전했다. 모두가 선선히 그 의견을 받아들여 주었고, 마지막에는 한 가지를 약속했다.
그 약속이 지켜진 것은 일주일 후 팰리슈가 시디 노트니에 당도했을 때였다.
“진짜 제국을 멸망시킬 줄은 생각도 못했어.”
황궁을 올려다본 팰리슈가 멍하니 그렇게 말했다. 옆에서 하이듀크가 키득대는 웃음을 참아내며 핀잔했다.
“넌 그렇게 지내고도 태진의 능력을 모르는 거냐?”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입을 다물지 못하던 팰리슈는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다. 그리고 황궁에 들어가 처음으로 황제 집무실에 앉았을 때는 아예 턱이 빠질 듯이 입을 벌렸다.
“뭐, 뭐, 뭐라고!”
옆에 있던 에스타냐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체통을 지켜, 팰.”
“그, 그렇지만 타냐! 지금 이 녀석들이 하는 말 들었잖아!”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잖아. 당연한 거지.”
에스타냐는 침착하게 팰리슈를 진정시켰다. 왕비의 노력에 팰리슈는 점차 벌어졌던 입을 다물고, 대신 꽉 이를 악물었다.
“농담 아냐?”
“아닙니다, 팰.”
“농담이라고 해 줘! 나보고 황제가 되란 거야?”
“바로 그 말입니다.”
몇 초를 못 참고 소리치는 그를 태진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미연 등등 일동은 슬그머니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럭커 두목을 비롯한 반란군의 의견입니다. 그들은 팰을 믿고 이미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되기 싫다고 억지 부려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맞아.”
“동감이네.”
“팰, 파이팅!”
태진에게 약속했듯 각자 한 마디씩 던지는 하이듀크, 라스터, 미연. 아서와 아리스는 차마 국왕이기에 아무 말도 못했고 미소라는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팰리슈는 울상이 된 얼굴로 에스타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팰의 팔을 살포시 붙잡았다.
“이젠 황제가 되는 거네?”
“타, 타냐! 너까지!”
“대단해, 팰. 역시 나의 남편이야.”
팰리슈는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는 듯 입을 다물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그에게 태진은 살며시 미소 지은 얼굴로 최후통첩을 날렸다.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이, 이건 사기야……!”
아내고 친우고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전 아키레마 제국 남부 로츠왈디스 지방에서 태어난 평범한 검사 지망생 소년은 국왕을 거쳐 신 로츠왈드 제국의 초대 황제로 취임하게 되었다.
로츠왈드 제국이 개국되고 한 달. 전 대륙에서 축하 서신이 날아왔다. 몇몇 나라의 방문도 결정되었고, 로츠왈드 제국의 황성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태진은 늘상 팰리슈의 옆에 붙어서 그의 업무를 도왔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통치 체계의 확립이었다.
태진은 반란군이 제의한 자치권을 좀 더 확장시키고 구체화시켰다. 각 반란군의 두목이었던 자들을 대영주로 임명하여 자치 체제를 인정했다.
대신 그만큼 황권을 강화하는 법을 다수 만들어 대영주들을 황제가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까지만 하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바쁜 그를 볼 수 없다고 미연은 투덜댔지만 그녀도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듀크와 라스터가 제국군을 새로이 편성하면서 새로이 기사들이 등용되었고, 그들의 훈련은 미연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예 기사들에게 통째로 당학류 해검도를 가르쳤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돕던 아서와 아리스도 자연스레 당학류 해검도의 고수가 되어 갔다. 추후에는 그녀의 검술이 제국 공식의 검술이 되어 바운스에 널리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또 한 가지의 희소식이 들려왔다.
소식의 근원지는 마법사단. 랑퀘지 단장이 태진에게 직접 연락을 넣은 것이다.
“차원마법 공식화 완료?”
그 소식을 듣고 태진은 곧바로 마법사단으로 달려갔다. 혼자 일을 떠안게 된 팰리슈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를 막을 순 없었다.
랑퀘지 단장은 태진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정말 대단하오 당신은! 어떻게 이것을 그렇게 빠른 시간에 해독한 것이오!”
유일하게 차원 마법이 가능했던 에스티른 단장은 조쉬가 죽은 후 금방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남은 것은 연구에 참여한 몇 명의 마법사와 해독이 덜된 레펠 뿐이었다.
태진은 그것을 기반으로 나랏일을 하는 틈틈이 해독을 완료했다. 남은 것은 랑퀘지 단장이 생존 마법사들을 들들 볶아 그들과 함께 차원 마법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오늘 드디어 완료된 것이다.
“랑퀘지 단장님도 대단합니다. 이렇게 빨리 공식화를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헛헛! 나도 괜히 단장인 게 아니오! 한다면 한다는 게지!”
물론 태진이 있었다면 더 빨리 끝냈을 것이다. 그것은 랑퀘지 단장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팰리슈를 도와야하는 태진이 연구를 도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의 아쉬움을 덜기 위해 랑퀘지 단장은 더욱 연구에 매달렸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이었다.
“보시겠소?”
랑퀘지 단장은 두툼한 서류를 태진에게 내밀었다. 태진은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단장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태진은 빠른 속도로 읽어 넘겼다. 그 속도로도 조금 시간이 걸릴 만큼 양이 많았다. 그 사이 랑퀘지 단장은 서두르지 않고 그의 완독을 기다렸다.
이윽고 태진이 고개를 들었다.
“대단합니다. 이 정도면 무리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 멀었소. 그 공식들은 전부 공간 마법의 차원 방정식을 기초로 더욱 심화된 형식이라 분명 사용할 수 있으려면 더욱 시간이 걸릴 것이오. 죽은 에스티른인가 하는 마법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정말 뼈아프게 깨달았소. 지금은 그저 공식화가 완성되었다는 것에 축배를―”
말하는 도중에 랑퀘지 단장은 태진의 얼굴에 뜬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말을 끊고 가만히 태진을 쳐다보던 그가 번개라도 맞은 듯 경악한 낯빛으로 바뀌었다.
“서, 설마!”
“―예,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공식을 읽는 동안 이미 태진의 머릿속에는 모든 계산이 끝났다. 태진은 늠름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서류를 랑퀘지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자, 자신만만하군. 언제나 그랬지만.”
“사실을 말하는 데 자신감은 필요 없습니다. 단, 제가 필요한 차원 소환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부피와 밀도의 마력핵이 필요한 듯하니 그렇게 쉽게는 쓰지 못할 듯합니다.”
준비 과정, 마력핵 운용에 제법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랑퀘지 단장은 잠깐 말을 잃었다가 급히 대꾸했다.
“그렇지만 이제 원하는 것은 이뤘다는 것 아니오?”
“그렇습니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미연과 함께 떠난 지 1년이 되어 가는 고향으로.
그리운 기분이 된 태진은 간단한 인사를 남겨 놓고 마법사단을 나왔다. 그가 곧장 달려간 곳은 미연이 있는 훈련장이었고, 그곳에서 소식을 들은 미연은 기사들이 보든 말든 그에게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차원 소환 마법이 가능해졌다. 그것은 분명 희소식이긴 했으나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장소, 황제 집무실에서 태진과 미연을 빼놓고 모였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어?”
팰리슈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어찌하다니…… 돌아간다면 어쩔 수 없잖아?”
“동감이네…… 하지만 팰이 무엇을 우려하고 슬퍼하고 있는지에도 동감이야.”
하이듀크와 라스터가 저마나 말을 꺼낸다. 한편에 앉아 있던 아서와 아리스도 잠깐 눈을 마주쳤다가 입을 뗐다.
“돌아가신다고 한다면……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를 위하여 숱한 일을 해 주신 분들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도 아쉬움은 묻어났다. 그럴 만도 했다. 둘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진정으로 아쉬워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역시 보내 줘야 하겠지.”
에스타냐 또한 그녀답지 않게 경직된 말투였다. 팰리슈는 왕비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모두가 한탄처럼 숨을 내뱉었다.
태진과 미연은 돌아가야 한다. 30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이번에는 자유롭게 돌아갈 수도 있게 되었다. 보내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제국이 발전되게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보다 친우와 또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슬펐다.
그 두 개의 상반된 마음 때문에 그들은 고민하고 있었다.
“차원 마법 연구에 들어갔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하이듀크의 중얼거림.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그들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팰리슈가 근엄하게 고개를 들었다.
“보내주자. 그것이 옳아.”
라스터가 눈빛을 바꿨다.
“괜찮겠나?”
“어쩔 수 없잖아. 그들이 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보내줘야 해. 그것이 옳은 일이야. 제국은 우리 손으로 꾸려나가자. 더 이상 그들에게 폐를 끼칠 순 없어.”
심약하다면 이중에서 가장 심약한 팰리슈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30년 전부터 함께 해 온 친우와 부인은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했다. 그리고 공감했다.
마음이 결정된 계기는 그것이었다.
“그래…… 알았어.”
“국왕 폐하의 명은 따라야 하는 법이네.”
에스타냐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함을 밝혔다. 그래도 그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예기치 못한 소리에 일동이 흠칫 몸을 떨었다.
“누, 누구지?”
“접니다. 미연이와 함께 왔습니다.”
태진이었다. 팰리슈는 즉시 식은땀을 흘리며 친우를 쳐다보았다. 허나 그들도 똑같은 눈빛이었다. 제국과의 전투에서 선봉을 이끌었던 기사들도 이 상황에서는 조금도 쓸모가 없었다.
“들어와.”
결국 응답한 것은 에스타냐였다. 태진과 미연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표정은 묘하게 격앙되어 있었기에, 모여 있던 이들은 그 순간 동시에 생각했다. 올 것이 왔구나!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태진과 미연도 둘이서 상의를 했다. 당사자들이기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했다. 의외로 결정은 간단히 내려졌기에 이제 그 결정을 알리러온 것이었다.
“소식은 들어서 전부 알 겁니다. 차원 소환 마법이 가능해졌습니다. 원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태진 님!”
모두가 침을 삼킨 그 순간 아리스가 벌떡 일어났다. 말이 잘린 태진이 “예?” 하고 되묻는다. 그녀는 한 발 성큼 다가가 태진의 얼굴을 바짝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남아서 로츠왈드 제국을 좀 더 도와주세요!”
저질렀다. 그냥 질러 버렸다. 아리스는 경직된 채 필사적으로 외쳤다.
“가시지 마세요! 저흰 아직 신의 전사들이 필요해요! 이렇게 가시지 마세요! 좀 더, 좀 더 저희 곁에 남아 주세요!”
그것은 모두의 진심이었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들 모두의 진심. 아리스는 모두를 대신하여 그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꾸미는 말도 없이 직설적인 아리스의 외침이 태진에게 닿은 것인지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허점을 공격당한 검사 같이 잠시 굳어 버린 그의 상태가 풀린 것은, 바로 옆에서 미연이 실소를 터뜨렸을 때였다.
“……풉! 어떻게 이렇게 생각대로일까?”
“그러게나 말야…….”
태진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소리까지 내 가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 장면을 경악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 앞에서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살짝 웃는 정도 밖에 보이지 않던 태진이 웃음소리를 내다니.
당황해 하는 그들을 태진은 다시 쳐다보았다.
“가지 않습니다.”
태진의 최초의 한마디를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 안 가. 좀 더 있다 갈 거야.”
“……저, 정말이야?”
팰리슈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태진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습니다. 돌아가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좀 더 남아서 이 나라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팰, 당신은 아직 좀 더 제 지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마, 맞아! 필요해! 태진, 네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해!”
“그건 너무 자기 비하다 너.”
미연이 히죽거린다. 아리스가 만면에 웃음을 피운다. 하이듀크와 라스터, 에스타냐가 서로를 바라본다. 아리스가 뒤따라 일어선다.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그들을 향해 태진은 정중히 인사했다.
그들이 남기로 결정한 3일 뒤. 미소라가 황성을 떠난다는 뜻을 전해 왔다. 미연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이상 자신이 그녀의 곁에 남아 있을 이유가 더 이상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황성 북문 앞에서 태진과 미연이 미소라를 마중했다. 미소라는 로츠왈드 제국의 국새가 찍힌 두루마리를 들어 보이며 태진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판게리츠 산맥 일대의 자치권 인정, 감사한다. 장로님께 반드시 전하도록 하지.”
“조심하십시오. 아직 아키레마군의 일당이 남아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걱정 마라.”
태진도 특별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미소라 정도의 실력이라면 누가 넘겨도 쉽게 당해 내지 못할 테니까.
인사를 끝내고 돌아서는 미소라의 등에 미연이 외쳤다.
“나 있을 동안에 한 번은 놀러와! 알았지?”
미소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돌아선 채 잠깐 손을 들어보였다. 그것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태진은 알 수 없었지만 미연은 그것으로 만족한 듯, 마주 손을 흔들었다. 미소라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판게리츠 산맥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시디 노트니에 나타나지 않았다.
***
태진과 미연은 그 후로 3년 동안 로츠왈드 제국에 머물렀다. 시디 노트니였던 수도의 이름이 에스타냐의 성을 딴 힐리움 시디로 바뀌고도 2년 반은 더 있었다. 그 사이 태진은 나라 안팎으로 활약하여 로츠왈드 제국을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미연은 기사들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은 곳까지 끌어올렸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정책이나 각종 문화들은 로츠왈드 제국이 자랑하는 것들이 되었고, 그들이 돌아간 이후에도 사람들은 위기에 닥친 친우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또 다시 바운스로 찾아온 신의 전사들을 길이길이 전한다.
‘재림한 영웅 전설’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