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암시삼국지(暗示三國志)
(1)조운(趙雲)
아직도 낯설기만 했다. 폐허가 된 집터를 처분하고 얼마
안되는 금을 손에 쥐었을 때만해도 그는 당장 손에 쥐어진
얼마정도의 금덩어리에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황금을 재어본 이후, 그는 그 금이 달포를 조금 넘게 버틸
정도의 액수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망연자실해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열 다섯 해를 넘게 자라온 정든 집이
헐값에 넘어갔으며, 아버지와 동생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같은 것은 그에게 낯설기만 한 생각이었다. 그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소일거리로 이 마을, 저 마을의 도적을
소탕하면서 약간씩 물자나 금을 얻었고, 그 물자를 금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부질없이 지낼 수는 없다!'
그는 굳은 눈을 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해 보았다.
서글서글하고 찬 그의 눈매는 굳은 빛이 썩 잘 어울렸는지,
주변의 처녀 몇이 얼굴을 붉히고 소곤거리면서 조심스럽게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청년, 즉
조운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항인 것이었다.
그는 콩을 사라면서 목청 터지도록 외치고 있는 장사꾼과
어디서 가져왔는지 소재를 알아볼 수 없는 골동품을 파는
것에 전념하고 있는 장사꾼을 훑어보면서 턱에 손을 살짝
가져다댔다.
`평원은 생각보다 꽤 발달되어있군.......골동품 업자도
다 있다니......'
벌써 여러 달을 도적소탕 때문에 정처없이 떠도는 그는
이미 적지않은 현과 읍을 지나쳐왔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고,
황건적이 물러가자 동탁(董卓)이 무분별하고 멋대로인
치세를 시작하였다. 해서, 도적떼가 함부로 날뛰고 전란의
화가 끊이지 않아서인지 대부분의 도시들은 피폐하기만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치안이 엉망이면 자연히 도적떼들이 모인다.
그리고 자연히, 조운은 도적소탕을 목적으로 하고있었으니,
그가 거쳐왔던 도시들의 치안이 엉망이라는 역추론이 가능하게
된다. 여하튼 사정이 그러니만큼, 조운으로서는 상인이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현령이 누구인지 모르나 새로 부임했다고 들었는데 꽤
치세를 할 줄 아는 모양이군.'
조운은 상인들의 목청소리와 아이의 손을 잡은 아낙의
발걸음이 바쁜 소란스러운 거리를 유유히 걸어나오면서
속으로 짧은 평가를 내려보았다. 중심거리를 나왔지만
평화스럽기는 농가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곡괭이질
소리가 들려왔다. 농부들이 열심히 김을 매고 있는 모습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평원의 현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상태에 만족하기는커녕 조운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면서 의문을 가져보았다. 분명 평원에 출몰하는
소규모의 도적떼를 소탕해 달라는 청을 받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살피기로 이곳은 도적이 출몰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소박하게 일하고있는 농부들과, 잘
다듬어진 기름진 밭들, 안심하고 열심히 장사를 하기에
여념이 없는 상인들, 거리를 순찰하며 돌고있는 성실한
위병들......
조운은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중심거리 쪽으로 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장사를 하고있던
상인들은 조운을 힐끔거리면서 바라보았다. 그가 그들에게
인상에 남는 얼굴이었던 모양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다. 조운은
자신의 허리에서 움직인 칼자루를 손으로 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리에는 위병 이외에 검을 차고 다니는
이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무인(武人)에게 있어서
검이란 것은 분신이었다. 도적 소탕이라는 소일거리 - 아니
현재로서는 유일한 수입원이니 임무가 더 옳은
표현이겠다 - 가 아니었어도 뼛속까지 무인이었던
그의 아버지에 의해 생긴 버릇이었다.
이로 인해 어릴 적에는 불량배 노릇을 한다고 오인도
많이 당하여 얻어맞기도 참 자주 했었다. 그때마다
자신이 훌쩍거리면 아버지는 `못난 놈'이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광에 가두곤 했다. 광......참으로
그곳은.......
`그만두지, 옛 일은 무엇하러......'
그 한마디로 자신의 기억을 억누른 조운은 종이로 싼
둥그렇고 길쭉한 원통형의 등이 은은하게 추파(秋波)를
던지고 있는 붉은 건물을 마침내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벽과 나무로 만들어진 문, 기둥을 붉게 칠하고는
몇 가지 색깔로서 장식하고 있는 그 건물은 단연 눈에
띄었다. 문간에 서 있던 요염한 여인이 색기어린 미소를
띄우면서 조운에게 다가왔다.
"어머, 이런.......어린 도련님이 무슨 일이시오? 날도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드시지?"
팔을 뻗어 그를 붙드는 노골적인 여인을 말없이 바라보던
조운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안에 누가 있소? 좀 시끄럽군."
여인은 황급히 조운을 보는 시선을 교정한다. 여인의
교정된 시선은, 나이어린 애송이를 대하는 눈빛에서
조금은 노련한 손님을 대하는 시선으로 변화된 듯한
느낌을 대번에 안겼다. 여인은 급히 허리를 굽실댔다.
"아이구, 그럼요. 하지만 잘 모실 테니 오시지요.
네에?"
여인의 짙은 화장을 한 얼굴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손님의 명수에 따라서 내일 아침에 받을 금전의 수가
늘거나 줄어들 그네로서는 다급했을 지도 모른다. 조운은
그러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빛으로 언짢은 기색을
해보였다. 그의 반응에 여인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다시
허리를 굽실댔다. 덧붙이는 조건이 뒤이었다.
"식사 한끼 하신다면 술을 올려드리지요."
그제야 조운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여인의 안내에 따라
들어갔다. 시끄럽다고 말하며 안에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
확인하는 방법은 술집에 갈 때 조금의 이로운 거래가
성립되는 술수다. 사실 조운도 이 방법을 알아낸 지
오래되지 않았다. 단지, 이곳저곳을 떠돌다보니 몇몇
서생들이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찰하여 깨달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평원같이 크지 않은 주점으로서는 객(客)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실정일 것이라는 추측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면, 끌어들이기 위해
조금의 특혜가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조운은 일부러 남자 몇이 앉아있는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조운이 불쑥 들어가 스스로 자리를
잡고 앉자 난처한 표정을 하다가 - 하기는, 손님들 개개인은
따로따로 떨어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므로 자신들 일행의
근처에 낯선 사람이 자리잡고 앉는 것을 즐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 함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비밀 이야기이건 아니건 간에 이야기가
함부로 낯선 이에게 공개된다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은
분명 아니다 - 어쩔 수 없다는 듯 근처를 떠나갔다.
곧이어 작은 동자가 쪼르르 다가와 술을 그의 탁상 위에
공손히 얹었지만 그는 술잔에 성급하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다지 술을 즐겨마시는 편은 아닌 조운이 주점을 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주점이란 사람들이 좀더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느긋하게 식사를 기다리는
척 하면서 곁에 앉아있는 사내들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다를까, 조운이 앉을 때에는 조금 꺼리는 빛을
하면서 잠시 이야기를 중단했던 사내들은 이내 시끄럽게
담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참,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이곳 평원만큼 평화로운
곳이 드물더군. 다른 곳에는 도적놈들이 얼마나
설쳐대는지......쯧쯧......."
운이 좋다고 해야 할 것인가, 자신이 의도하던 화제가
초반부터 나와주었다. 여하튼 뒤이어 다른 사내가 정색을
하면서 답하고 나섰다.
"그러게 말일세. 글쎄 다른 곳에서는 관아에서 손수
군을 파견해서 도적토벌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지만 아직도
소란스럽지 않은가. 그런데도 평원은 항시 조용하지."
"자네들이 뭘 모르는 구만. 내가 관아에 물품을 조금
기증하고 있어서 알고 있네만, 새로 부임오신 현령께서
보통 분이 아니시네."
한 사내가 잘난 척을 하고 나섰다. 으흠, 하면서 목에
힘까지 주는 사내에게 다른 사내들의 시선이 자연히
집중되었다.
"그래, 나도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였네. 그런데 현령
나으리께서는 누구신가?"
그 말에 잔뜩 콧대를 높이던 사내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강한 눈빛을 보내고 또는 술을 권함으로써
재촉을 보내고 있는 술동무들에게 조심스럽게 답하였다.
"......나도 잘 모르네."
"뭐야?!"
"아니, 잘 아는 것처럼 떠들더니 뭔가, 대체?!"
나섰던 사내가 꼬리를 살짝 내리자, 나머지 두 사내가
조금 역정에 가까운 질타를 쏟아부었다. 움츠렸던 사내는
다짜고짜 질타를 퍼붓는 그들에게 반감이 생겼는지
이번에는 화를 냈다.
"에라, 이 사람들아, 나는 그저.......현령님의
의제(義弟: 의로 맺은 아우) 두 사람이 엄청나게 강한
무인이라는 사실만 말하려 했지......!"
`의제 두 사람? 무인?'
그 말에, 곁에서 조심스럽게 술잔을 기울이던 조운은
잠시 멈칫했다. 무인으로써 무인의 이야기에 반응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숙명(宿命)인 것이다.
"그렇군, 현령에게 의제가 둘 있다는 말은 들었네만."
"그 의제 둘이 그리 강하나?"
술동무들의 역정이 금세 사그라들자 움츠렸던 상인은 -
그는 허풍이나 과시욕이 짙은 사람이 아닐까? 조운은 이런
생각이 단편적으로 들었다 - 신이 났다.
"이런, 자네들은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라는 이름도 못
들었나? 그들이 이 거리에 순시(巡視)라도 돌러나온다는
소리만 나도 평원의 무뢰한 놈들이 전부 꼬리를 감춘다는데.
아, 그러면서도 자네들이 상인이야? 상인이야?!"
상인으로써 가장 모욕적인 말 중의 하나는 정보와
치안상태에 무지하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두 사내는
그런 말을 듣고도 화가 나는 기색 없이, 도리어 놀라고
감탄하면서 되물었다.
"무엇이? 관우님과 장비님이 현령의 의제였는가?"
"그러하다니, 허허, 거참......!"
`관우? 장비? 한낱 현령의 의제이면서도 저렇게 평상들이
잘 아는 듯이 떠들 정도라면, 흠, 도적이 사라진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군......'
보통 이런 작은 곳에서 이름을 떨치는 무인들 중, 진실된
실력자들이 있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앙 관청에서
큰 관을 쓰고있는 몇몇 무관보다, 오히려 더 뛰어난 자들은
이런 작은곳에 숨어있는 시대였다. 혼란한 시대인 만큼,
벼슬아치들은 자신보다 크게 뛰어난 인물은 시기하여
중용되지 못하도록 꾀를 쓸 뿐이니까. 희생자를 보아온,
그리고 자신 역시 그 희생자였던 조운은 그제야 자신이
퇴치하러 온 도적떼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소규모 상인들에 불과한 저들의 입에 저 정도로
오르내리는 그 관우와 장비라는 이들은 꽤 강한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여하튼 그렇다면 도적이 들끓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그들 두 명이 모두 현령의 의제라면, 도적
따위는 발을 붙이기 쉽지 않다. 결국 허탕만 친 셈이로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수저를 탁상 위에 얹었다. 아직
음식이 약간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남은 음식을 내려다보고 있는 조운에게는 그
음식을 다 먹을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는 고민
따위는 없었다. 그는 지금 들은 조금은 괴이하고 조금은
호감이 가는 삼형제에 관해 생각해보고 있었다. 큰 형은
어질고 정사에 밝은 현령이요 두 아우는 뛰어난 무인이라.
문무의 겸비가 이루어진 훌륭한 의형제관계로군......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조운은 결국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열심히 떠들던 세 상인들은 자신보다 늦게 자리잡고 일찍
떠나는 젊은 청년을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담화에 열중했다.
조운은 술값과 식사비를 탁상 위에 정확히 계산하여
올려놓고는 주점을 천천히 걸어나왔다. 어느덧 어둑어둑하던
하늘은 정말로 먹물이라도 쏟은 듯 까맣게 변해있었다. 심정이
뒤숭숭했다. 간만에 돈이 될만한 일을 찾아 평원에 왔다가
허탕을 치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다.
조운은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긴 채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나갔다. 이 검을 만져볼
때면 아직도 그때, 광 속에서 느꼈던 덥덥한 공기가 다시
느껴졌다. 숨이 다 막혀오던 그 공기 속에서 가끔씩, 아버지
몰래 홀로 뛰쳐나오곤 했던, 그때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할
때가 있기는 했다.
검을 만질 때마다 이렇게 답답한데도 검을 뗄 수는 없었다.
검에 얽힌 기억들은 분명 즐겁지 않았다. 도리어 갑갑했다.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 때문에 유달리 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가끔씩,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렇게......소일거리조차 없이 의지할 곳을 모른
채 걸을 때이다.......'
조운은 그렇게 뇌까리면서 한숨을 조금 옅게 내쉬었다.
그는 씁쓸한 느낌이 들어 자신의 검을 한번 더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러한 여유는 잠시 중단되었다.
"어, 이거봐라? 지금 보니까 아주 절색인데? 예쁜 얼굴에
흠나기 전에 우리를 얌전히 따라 오실까? 야, 붙잡아."
거칠고 음험한 어조의 목소리와 천박하고 상스런 투의
문장은 거리의 무뢰한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평원이
아무리 살기 좋다지만 이런 경우가 소수로 발생하는 것만은
완연히 막을 수 없는가, 하고 속으로 탄식을 해 본 그는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어둑어둑한
외딴길이었다.
어느 어리석은 아낙이 이런 시간이 이런 길을 택하여
들어온 것이란 말인가. 무슨 사정이 있었건간에 여인의
그러한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한
조운은 돌아서려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려 다가가고 말았다.
어리석더라도 도와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지나가는
입장으로서 돕는 것이 도리다. 만약 이런 기분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도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뒤숭숭하고 답답한 기분 때문에, 그는 어쩌면 자신의
무료함을 풀만한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발걸음이 절로 그 쪽을 향해 돌아섰으니까. 게다가, 이런
감상적인 느낌은 무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의 가슴속에서 누군가가 그 사건에 끼어들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뭔가, 뭔가가
부르는 듯한 느낌과, 미묘하게 사슬로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자꾸만 조운을 사로잡았다. 억지로 끌리는
느낌이기는 했지만 이상한 것은, 어떤 기대감 비슷한
감정도 이면에는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대번에 사로잡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그는
그런 기분을 억누르면서 조용히 불량배들을 향해 다가갔다.
불량배들은 머리가 긴 어떤 여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경황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불량배들에게 시선을 던지고만 있었다.
불량배 하나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그녀에게 팔을 뻗은 순간, 조운은 한 손날로, 나아간 불량배와
곁에 붙어서 함께 나서고있던 불량배의 뒤통수를 차례로
내리쳤다. 너무나 빠른 손놀림 덕에 두 불량배는 마치 동시에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하튼 이 불량배들은
조금 싸움에 숙달이 된 집단이었는 모양인지, 두 동료가
쓰러지자 곧장 조운을 향해 몸을 돌렸으나......
퍽!
또다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그 두 사내마저도 무력하게
쓰러졌다. 가장 덩치가 크고 대장인 듯이 보이는 사내 단
하나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조운을 보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쓰러져있는 자신들의 수하들을 챙길 생각도
않고는 의리없게 긴 비명을 남긴 채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우둔하다는 사실을 어김없이 증명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조운의 바로 곁으로 달려나갔던 것이었다.
오랜 무예에 숙달된 조운의 번개같은 반사신경이 그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끄윽!"
손날이 정확히 목 뒷덜미를 가격하자 두목은 저항한번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신경을 건드렸으니 분명 얼마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조운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
그대로 심장이 멎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묘한 느낌의
소녀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세계 사람같은, 이국적이고
신비한 느낌이 너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길고 윤기나는
검정의 생머리칼은, 하얗디 하애서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피부를 더욱 빛나게 보이도록 했다. 얼굴형은 갸름하고
작았는데, 눈매는 윗선은 둥글고 아래의 선은 수평인, 마치
반달을 뒤엎은 것 같고 크면서 길고 시원한 모양으로,
도도하고 아름다웠다.
눈동자는 그로서는 처음보는, 회색의 맑고 투명한
색이었는데 눈동자가 큰 눈에 못지않게 커서, 매우 반짝이는
듯이 보였다. 거기에 오똑하고 곧은 콧대는 그녀의 도도한
눈매와 어울려 귀족적이고 또렷한 모습이었으며, 입술은
선이 또렷하고 붉은 빛이 도는 핑크색이었다.
큰 눈과 오똑한 코, 적당한 크기의 입술은 그녀의 작은
얼굴에 가득하여 얼굴이 여백이 없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조금 지적이면서 기품이 있는, 고고한 느낌의 여자였지만,
하얀 목이 매우 긴 덕분에 청초하게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냘픈 몸매였다. 마치 옛 이야기에 나오는 신녀(神女)같은
느낌의 그녀는, 그러나 매우 요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회색
빛의 어깨까지만 덮이는 겉옷과 아래에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겉옷의 속에는 특이하게 생긴 흰옷을 받쳐입고,
이상하게 매듭지어 묶은, 붉고 너비가 넓은 끈을 것을 달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야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자. 물론 눈에 뜨일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운에게는 결코 즐겁지 않았다. 그녀를 본 순간,
조운은 아까의 자신이 어째서 그렇게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야한 옷차림도
달갑지 않지만 그녀의 모습은.....
`......닮았다.'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겨우 머릿속에서 지워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닮았다. 다시는 추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지는 못하는 그 모습이 떠올라 버렸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외견은 다르다. 분명 외견은 다른데 어딘가.....
어딘가......매우 닮았다. 느낌이 너무나......닮았다......
`분명 다른 사람인데!'
이렇게 스스로에게 지탄을 보낸 조운은 겨우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렇다. 느낌이 이상하게 닮았어도 다른 사람이다.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곳에 있을 리도 없고
외양도 다르다. 닮은 사람은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다. 냉정을
되찾은 조운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를 다시 응시했다.
그녀와 지나칠 만큼 닮은 그 모습이 아니더라도,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저런 이상한
차림으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경멸도 일부는
일었다. 반 감탄, 반은 어이가 없는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무슨 볼일이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도한 느낌과
다르게 올려보는 모습은 마치 흰 꽃처럼 곱고 청초하게 보였다.
맑은 회색의 눈동자가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라 하여도, 그녀가 아니라고 세뇌를 시작한 조운에게는
그저 일반의 다른 여자들같이 보일 뿐이었다.
"여기는 저런 놈들의 소굴이오. 아가씨가 올 만한 곳은 아니지.
돌아가는 편이 안전할 거요."
조운은 그녀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그런
태도에 대해 서운한 것이나 별반 언짢은 기색도 없는 듯했다.
"저어......"
아주 짧은 말이었지만 들을 수 있었다. 매우 곱고 얌전한
목소리였다. 약간의 수줍음이 남아있는 그 말을 남기고
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늘면서 묘할 만큼 선이 예쁜
다리가 드러났다. 조운은 이마를 약간 찌푸렸지만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자 치고는 키가 꽤 큰 편이었다.
그녀는 침착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힘이 들어가있는, 하지만
여전히 가녀리고 은방울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길을......잘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