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비(張飛)
"아니, 장비님, 아무리 기분이 안 좋으셔도 이렇게 마셔대시면
어쩌십니까요? 이렇게 취하셔서 들어가시다간 또 장비님의 작은
형님께 혼나십니다!"
"더 안 가져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실내를 울리게 했다. 호랑이같이 빳빳한
수염을 세우고 고리눈을 부릅뜬 장비에게 누가 감히 또 반문을
하겠는가. 함께 어울려 나왔던 주변의 사내들은 결국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 자신들끼리 얼굴만 마주보았을 뿐이었다. 장비는
또다시 술을 동이 째 퍼마시면서 입가에 흥건하게 묻은 술을,
근육이 비대하여 보기에도 두려운 팔뚝으로 스윽 닦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거만한 얼굴로 장비의 거구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 망할 시녀는
오만하게도 콧대를 쪽 세우고 휙 돌아서면서 한마디 던졌었다.
<현령 나으리께서는 저희 주인 나으리와 아가씨와 함께
계십니다. 방해하지 말라는 영이 계셨어요.>
감히 그까짓 계집이 현령의 의제로서 뭇 병사들도 함부로 못
대하는 내 앞에서 그딴 행동을 해? 마음 같아서는 그 골통을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극도의 인내를 발휘해서 참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솟았다. 장비는 현재 정말로, 의형제를 맺은
이후 최초로 큰 형인 유비(劉備)에 대해 의절을 고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온갖 대망을 다 품은 듯 떠들더니 결국 계집의
치마폭에 싸여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런 나쁜 놈은 피가 나도록 때리고 시궁창에 던져놓아도
속이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장비는 그저 그런 속을 술로만
다스리고 있는 것이었다. 작은 형 되는 관우는 전혀 눈치조차
못 채고 있는 듯이 보였다. 분명 그 근엄하고 엄숙한 작은
형님께서는 오늘도 큰 형님의 야망을 위해 열심히 군사들을
조련하는 것에 여념이 없으실 것이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이런 망할 놈의 세상같은 것, 그냥 확 등지고 또 고기나
팔면서 멋대로 살까 생각중이다.
"장비님!"
곁에서 또 누군가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장비는
붉어진 눈시울로 술을 입안에 털어넣었을 뿐 답하지 않았다.
분했다. 너무나 분했다. 그리고 큰 형이라는 사람이 밉고
미웠다. 아까 생각했듯, 반복하지만 시궁창에 던져넣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만 하염없이 나오는 것이다.
장비는 유순하면서 조용한 얼굴을 지니고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던 여자를 생각해보았다.
<미천한 곳을 찾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그때만 해도 참으로 괜찮은 곳이 있는 여자라 생각했었다.
눈에 띄는 미모도, 사내를 단번에 이끄는 요염함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여인이었다. 유비에게 유독 그녀를
들이미는 감가장 놈의 호의도 아둔한 자신으로서는 그저
입벌어지게 즐거웠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훈련장에 유비의 발길이 매일에서 이틀 중 한번으로,
그리고 사나흘에 한번으로 멀어질수록 장비의 생각은 변하였다.
그녀의 유순함은 내숭을 간직한 간사로, 차분함은 계교로,
조용함은 멸시로 변했다. 장비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자신에게 묻는다면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큰형님!'
그렇게 속으로 외치다가 얼굴을 이내 찌푸렸다. 망할! 무슨
큰 형님? 귀 큰 촌놈이지! 그렇게 욕을 해 보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장비는 또다시 동이 째 술을 입안에 털어 넣으면서
콧바람을 내뿜었다.
`아니다, 아니야......나는 아직 큰 형님께는 그렇게 모질지
못해......암, 그렇구말구! 그 감가장 딸년이 나쁜 요물이지!
그렇구말구! 그럼, 그럼.'
단순한 장비로서는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못했다. 분명 그의
작은 형 관우라면 좀더 사려깊은 생각을 했을 터이나 장비는
관우가 아니었다. 장비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안다면
관우로서는 또다시 장비의 그 단순함에 통곡하면서 무어라
면박을 주었을 테지만 장비는 나름대로 멋진 결론이라고
스스로 만족하면서 술에 의해 붉어진 코를 비비면서 일어났다.
주변의 사내들이 얼른 다가왔다. 아직도 저자거리를
놀러다니면서 잡배들과 어울려다니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
장비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민들에게 존경받는 현령의
의제이자, 주먹으로는 이길 자가 없는 장비는 당연한
우두머리였다. 그들은 장비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자마자
주인에게 `계산은 다음으로 달아두게.' 하고 제법 익숙한
대사를 제공하고는 장비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물론, 장비를 다들 알고 있으니 불만을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그 술값을 대신 지불해야 할 관우가 불같이
화를 내며 장비를 훈계할 일만이 남을 뿐. 현령의 의제로서
상인의 당연한 요구를 묵살할 수 없는 관우는 체면 덕에
선선히 금을 치를 터이나, 그 이후에 장비가 어떤 일을
당할 지는 잡배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 단단하고 굳은 손이 부르틀 정도로 창대를 수리하는
공적이고 도움이 되는 일로부터, 시시하게는 하루 분의
식사를 굶고 방안에서 장비가 가장 싫어하는, 책의 문장
몇 개를 외우게 하는 - 아예 책을 읽혔으면 좋겠으나 장비는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 사소하고 개인적인 벌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잡배들이 생각하기에 그런 다양한 벌을
생각해 낼 줄 아는 관우는 확실히 장비보다 품격이 높고
지적인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장비는 곁의 문 하나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조금 당황한 잡배들은 장비를 붙들었다.
방안에서는 젊은 남녀가 식사를 하다가 놀란 듯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남자의 앞에는 아무런 음식이 없고 대부분의
요리가 여자의 앞에 밀려져 있는 것을 보아 꽤나 다정한 듯
보였는데, 아마 연인사이인 모양이다. 술에 쩔어있던
장비는 비틀, 하면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냐? 난 분명 큰형님과 감소저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는데?"
여하튼 그들 중 남자가 재빠르게 여자의 앞을 막아섰다. 흰
얼굴에 조금 작고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을 지닌 청년은
예쁘장한 느낌이 들면서도 조금은 차가운 느낌을 동반하고
있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청년은 한 손으로 여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당돌한 어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장비는 게슴츠레하게 뜬눈으로 한마디하려고 했다. 세상이
불안하니 사내들이 모두 망가진 것이 보이는군. 저놈도
계집애한테 매어있어. 비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잘 나와주지 않았다. 장비의 근처에 있던 건달이 답했다.
"익덕(翼德)공께서 과하게 취하시어 방을 잘못 찾으신 것
같다. 그러니 마음쓰지 마시게."
장비를 쫓아다니다 관우에게 하도 함께 빌다보니 꽤 능숙한
언어능력(?)을 배우게 된 놈이었다. 여하튼 놈의 말에 청년은
조금 마음을 놓았는지 고개를 숙여보였다. 장비는 그것이
매우 못마땅했다. 여자란 요물에 휘둘려 사는 못난 사내놈들
같으니! 당장 자신을 가로막고 선 능숙한 언어구사를 배운
이 건달 놈 - 그제야 놈을 부르는 호칭이 꽤 길었다는 것을
깨달은 장비였다 - 을 밀치면서, 아니 해치우면서 - 놈은
분명 몇 주간을 병상에 누워서 자신의 없는 운을 한탄할
것이다 - 떠들었다.
"뭐냐, 넌? 역시 사내들은 여자 앞에서 사족을 못 쓴다니까.
여자란 것들은 다 없어져야해. 큰 형님도 정신 못차리고
계집아이 치마폭에서 휘둘리고 계시잖아!"
장비의 말에 주변이 갑자기 썰렁해졌다. 장비가 현령의
의제라는 것은 그곳의 사람들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있었다. 큰
형님이라면 응당 현령을, 그들의 훌륭하신 현령을 지칭함을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관우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눈을 부릅뜨며 날아와 장비의
목에 언월도를 대며 대략 며칠 정도는 근신하고 식음을 폐할
것과 앞으로 달포간은 금주할 것을 - 이것은 장비가 가장
무서워하는 벌인 동시에 우상인 장비와 어울릴 수 없는
건달들에게도 무서운 벌이기도 하였다 - 명하고, 장비와
건달들은 통곡을 하며 눈물로 저 근처에 흐르는
하수(河水)*가 저리가라 할만한 커다란 강을 만들며 관우의
근엄한 얼굴 아래서 시뻘겋게 되도록 눈주변을 비벼댔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관우란 엄격한 형님은 안 계셨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장비의 난폭함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매끈하게 대꾸를 했다.
"현덕(玄德=유비劉備)공의 의제(義第) 장익덕 공이셨군요.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년의 흰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을 보아 그도 꽤나
다혈질인 듯, 겨우 그 난리를 참아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더 이상 말썽이 일면 관우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싶어진 한 건달이 비틀거리면서 겨우 서있는
장비의 한 팔을 붙들었다.
"이만 가시죠, 익덕님."
그러나 장비는 아직도 시뻘겋고 풀린 눈으로 건달을
노려보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놈이!"
장비가 먼지 털어내듯 흔든 팔에 건달이 그대로 떨어져
나간......것이 아니라, 던져졌다. 건달은 여자의 근처 식탁을
보기좋게 끌어안고 말았다. 약간의 흥분과 분노로 붉던 청년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청년은 화가 난 투로 쏘아붙였다.
"그럼, 저희들이 먼저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금만
비켜주시죠."
그 말에 건달 몇이 혀를 차면서 비켜섰다. 보통 때 같으면
붙들고 어르신들을 대하는 예절에 관해 약간의 교육을
시켰겠지만 지금 일으킨 난리만으로도 잘못하면 관우의 귀에
들어갈 판이니 자제가 필요했다. 이렇게 상황 계산까지 하다니
자신들은 정말로 자랑스럽고 고결한데다 똑똑한 장비의
후예들임에 틀림없었다. 청년은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르게
하고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붉어진 장비의 눈에, 따라나가는 여자가 들어왔다. 정신이
조금 혼미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엄청 예쁜 여자 같았다.
흰색과 옅은 색으로 장식된 옷을 입은 그녀는 청년보다도 훨씬,
훨씬 더, 그리고 유난히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깊고 맑은 회색의 눈동자와......청순하게 보이는 지적인
눈매를 가졌던가.......? 무슨 상관이야. 여자들이란 나쁜
것들이지, 아암,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자가 돌아보았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장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무어라고 말로 할 수는 없는 느낌이었지만 어쨌건,
몸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어떤 막연하면서도 친근한 느낌
비슷한 것이 감지되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주,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여자는 눈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다시 보러 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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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하수(河水): 현재의 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