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삼국지를 읽는 여학생 (6/24)

2-1 삼국지를 읽는 여학생 

"뭣하고 있는거야?!" 

화가 난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퍼졌다. 몇몇 학생들이 

까르르 웃었다. 또 다른 몇 명은 `또 쟤냐?'라고 수근대면서 

걸린 쪽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그렇게 훔쳐보는 시선에는, 

어딘가 모르게 멸시와 지긋지긋함 같은 것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많은 시선들을 받으면서, 선생에게 몰래 읽던 책을 빼앗긴 

여학생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얌전하고 단정하게도 사과한다. 금방이라도 여학생의 

자리까지 쫓아가서 손바닥이라도 때릴 것 같던 선생의 태도가, 

여학생의 순종적인 말과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모습에 약간 

누그러졌다. 각진 얼굴에, 시꺼먼 뿔테 안경이 강한 느낌을 

주는 선생은 못 이기는 척 표정을 풀면서 자신이 빼앗은 

책을 그제야 살펴보았다. 

"삼국지(三國志)?" 

어이없다는 표정이 선생의 얼굴에 번져나갔다. 하지만 

그 표정 속에는 `역시나.....' 하는 느낌도 숨겨져 있었다. 

여선생은 얼굴을 찡그렸다. 

"나쁜 책은 아니다만......또 삼국지야? 넌 걸릴 때마다 

삼국지만 보고 있구나. 얌전하게 생긴 얘가......" 

그 말에 고개를 들고 있는 여학생은 정말로 모범생이고 

삼국지 같이 전투적인 책은 안 읽을 것 같이 생겼다. 

크고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에 윤이나는 검은 생머리, 

희고 도자기 같은 피부, 갸름하고 자그마한 얼굴형에 오똑한 

콧날. 청순하면서도 지적이게 보였다. 물론 외견상으로도 

엄청난 미인이지만 분위기도 얌전하고 주책 - 특히 이렇게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다가 걸리는 따위 - 은 안 떨게 

생겼다. 

선생은 한숨을 길게 내뱉고 책을 손에 든 채 교탁으로 

걸어갔다. 선생의 발길이 교탁 근처로 오자마자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학생들은 괴성에 

가까운 환호성을 질러댔다. 선생의 목소리가 그 환호성을 

가르고 여학생에게 날아왔다. 

"유화정(柳和貞), 교무실로 따라와." 

교무실로 따라와. 분명 잔소리를 하기 위해 하는 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유화정이라고 불린 여학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끄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자세나 담담하고 침착한 표정을 보면 어김없는 

"모범생+양가집규수"인데 수업시간에 걸리는 것을 보면 

어딘가 괴짜임에 틀림이 없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데다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었어도 

맵시가 나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곁에 앉아있던 

짝이 앞에 있는 친구와 수다를 떤다. 

"쟤, 또 걸렸어. 난 쟤가 걸릴 때마다 조마조마하다니까." 

"너도 수학선생에게 얼굴도장 찍히니까 그러는 거지?" 

"그래, 덕분에 문제풀이에 꽤 많이 지명됐었다구." 

"안 그럴 것 같은 얘가 왜 만날 저러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항상 삼국지만 읽고 있잖아?" 

두 사람의 수다에 유화정이란 여학생의 바로 앞에 

앉아있던 여학생까지 끼어들었다. 

"쟤 장난 아니잖아. 쟤네 아버지가 효진그룹 회장인건 

너네도 알지? 재벌집 딸이래서 그런지 별거 다해봤대. 

과외를 도대체 몇 개 하는지 모른다나." 

"그룹 총수의 외동딸인데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두둔해주는 사람은 정말로 단 한 명도 없다. 여학생의 

엄청난 집안배경이라던가, 수업시간에 만날 삼국지를 

읽다 걸리는 것에 대한 수다일 뿐이다. 그저 그녀가 

탤런트 제의를 받았다는 둥, 재벌 총수의 외동딸이라는 둥, 

삼국지만 읽다가 몇 번째 걸린 것인지 세다가 지쳐서 안 

센다는 둥, 그녀의 배경이나 상황에 대해서만 떠들 뿐 그 

아이가 어떤 성격의 아이인지, 어떤 특징을 지녔는지는 

수다에 등장하지 않았다. 노골적인 욕도 없었지만, 

친근한 말도 없다. 

******* 

선생은 책상 위에 삼국지를 올려놓았다.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조용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책상 옆에 다가온 여학생을 

보면서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화정아." 

선생의 부름에 여학생, 화정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답했다. 찬찬한 눈빛이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다 걸려온 

모습이 아니다. 자신은 전혀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왜 

불렀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일 정도로 담담한 

눈빛이다. 선생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인지, 

아니면 아이의 너무나 담담한 모습에 답답해서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은근히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덤덤하다. 막상 걸려서 왔을 때에는 

요령껏, 순종적이지만, 다음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또 

같은 죄목으로 걸려오는 아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니 

더욱 화가 났다.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한 선생은 또 

소용이 없어질 설교를 시작했다. 

"물론, 네가 너 자신의 할 일을 다 알아서 하는 타입인 

것은 안다. 하지만 수업시간마다 이러면 되겠니? 다른 

선생님들도 다들 네 얘기를 하시더구나. 늘 수업은 안 듣고 

책만 읽고 있다고 말야. 물론 삼국지는 좋은 책이고 

만화책을 보는 것보다는 낫겠다만...... 

그건 강도가 도둑더러 더 낫다고 칭찬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니. 수업을 들어야지! 특히, 네가 그렇게 수업에 

무관심하면 앞에서 수업하시는 선생님들은 기분 

나쁘다는 건 알겠지?" 

화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하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에 진심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만큼 

불만스럽다는 얘기다. 선생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결국 다음 시간이 

되면 또 걸려서 교무실로 올 것이다. 그것도 역시 삼국지를 

읽다가 말이다. 삼국지를 돌려주지 말아야겠다고 이전에는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돌려주지 않으면 또다시 다른 

권을 읽고 있거나, 사와서 읽고 있었다. 

무어가 그리 재미있는지, 매일 읽고 또 읽는 모양이다. 

고등학교 2년 내내 삼국지만 파고 있기로 유명했으니까. 다른 

책도 꽤 많이 읽는 편이지만 대부분 삼국지만 읽고 있는 것 

같이 보일 정도로, 그녀는 삼국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이 여학생은 `유화정' 이라는 이름보다도 `삼국지 읽는 

여학생' 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빼앗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주의해." 

"......네." 

화정은 얌전하게 대답했다. 선생은 책을 도로 내밀면서 

턱으로 교무실 문을 가리켰다. 

"가 봐." 

양손으로 공손하게 책을 받아들고, 예의바르게 인사한 

화정은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쁘고 우아하기도 한 

걸음으로 사뿐히 나가더니 소리도 없이 문을 닫았다. 문이 

얌전히 닫히자 여지껏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다른 처녀 

선생이 웃음섞인 말을 보내왔다. 

"또 저 아이군요. 효진그룹 총수 딸이라던......맞죠?" 

이미 선생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이다. 

아니, 선생들 뿐 아니라 나라에서도 꽤 유명한 아이니까. 

효진그룹은 전자, 화장품, 의류, 식품업, 자동차 등에 

이르기까지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는 대재벌이었다. 

나라에서 오남그룹과 양대의 거대 산맥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 대재벌의 총수의 딸, 그것도 외동딸로서 총수의 후계라고 

지목받는 아이다. 그러나 학교 내에서는 그 어마어마한 

지위나 명성보다 삼국지만 읽는 괴짜로 더 알려져있다. 씁쓸한 

기분으로 화정의 담당 선생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처녀선생이 

수다를 늘어놓았다. 

"아유, 생긴 것은 저렇게 예쁜데......모델 제의도 꽤 

들어왔었다면서요? PD가 캐스팅도 했었다고.....아무튼 

정말 예쁜 아이네요." 

예쁜 아이기는 하다. 처음 저 아이가 학교에 들어왔을 때, 

저 아이를 구경하기 위해 다른 반의 남자아이들이 번호표를 

작성해서 화정의 반을 매일같이 기웃거리던 웃기는 사태까지 

발생했으니까. 남자아이들이야 한창 호기심 많은 

사춘기인데다, 이성이니까 내쫓으면서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동성인 여자아이들까지 몰려와 연신 감탄을 쏟아 부었었다. 

그런 여자아이들을 내쫓으면서 `야, 이 녀석들아! 남자 

녀석들이야 그렇다쳐도 왜 같은 여자인 너희들까지 그래?!' 

하고 꾸짖자 여자아이들이 일제히 야유했었다. 

<선생님은! 저렇게 인형같은 얼굴이 어디 흔하나요! 저희도 

봐 두었다가 성형수술이나 본 떠서 하려 그런다구요!> 

익살스러운 그 아이들의 대답에 같이 웃고 말았었다. 하지만 

좀 의외인 것은 화정의 반응이었다. 그 정도 외견을 갖추었다면 

자만감을 지니고 뽐낼 만도 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즐길 만도 한데, 오히려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남이 

의식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아이였다. 한번은 화정의 

반에서 수업을 하던 선생 중 하나가 수업 도중에 화정에게 

너 너무 예쁘다 얘, 하면서 칭찬을 퍼부었는데, 얌전하게 

듣고만 있다가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들른 화정에게, 그 

선생이 계속해서 칭찬을 그치지 않고 왜 탤런트 제의를 

거절했니, TV에 출연 좀 해서 학교 인지도 좀 높여보지 그러니, 

등등의 말을 늘어놓았던 일이 있었다. 그때 화정은 그 

선생에게 이렇게 쏘아붙였었다. 

<전, 동물원의 동물이 아니에요.>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그 서슬에 도리어 교무실의 선생들이 

놀랐었다. 너무 뜻밖의 이야기에 그 선생의 곁에 앉아있던 

자신이 되물었었다. 

<......동물원의 동물이 아니라니?> 

아이답지 않게 참 차갑게도 잘라 대답했다. 

<사람들이 감상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싫어요.> 

그때, 교무실의 선생들은 건방지고 주제넘다면서 화를 

냈다. 하지만 그 선생들을 진정시킨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순간, 화정에 대한 시각이 바뀌는 것을 알았다. 

마냥, 귀하고 예쁘게만 커 온 재벌 2세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대해 오만해지고 

기고만장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이 감탄하며 바라보는 것에 대해 역정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소 비뚤어진 생각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으로 사는 철없는 공주님은 아닌 것 

같았다. 새삼 속으로 감탄했다. 

<대단한 집안일수록 더 엄격하고 졸부(猝富: 벼락부자) 

집일수록 오만하게 교육한다더니......예사 아이는 아니구나.> 

사실 냉정히 생각해서 빠질 것이 뭐 있는 아이인가. 외모면 

외모, 성적이면 성적, 머리면 머리 - 화정의 아이큐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선생들은 잘못된 결과인 줄 알고 또 한번 

검사를 시킨 우스운 사건도 일어났었다. 그만큼 그녀는, 

천재는 아니지만, 수재에 가까운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 , 

집안이면 집안, 빠질 것이 하나도 없다. 

단 한가지, 사교성이 너무 떨어지고 어둡다는 것이 흠이랄까.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아이답지 않게 

표정이 변화가 적었다. 아무튼 교육 하나는 엄격하게 받은 

모양이다. 그렇게 엄청난 아이인데 예의도 깍듯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거의 없다. 아예 어울리지 않을지언정 

적어도 건방지지는 않다. 

정말, 장차 엄청난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아이였다. 

하지만 사교성이 너무 떨어져서, 아이들과 어울리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것만은 하지 못했다. 결국 포기했다. 

"그만큼 속도 많이 썩히죠." 

그 동안의 고생에 대해 회상하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화정의 선생 말에 처녀선생은 까르르 웃는다. 

"하기는, 엄격하신 박 선생님께서 그렇게 좋게 꾸짖으시는 

아이는 화정이 뿐이잖아요. 만날 저렇게 수업시간에 책을 

읽다 걸려서 와도 전교 5등 밖으로는 나가본 적이 없는 

애니까......" 

"재벌집 딸이니 과외를 엄청나게 해서 유지하고 있겠죠." 

불만이 담긴 박 선생의 말에 처녀선생은 조금은 간사한 

눈웃음을 흘리면서 자신의 의자를 책상에 가깝게 끌어당긴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기록부에  무엇인가 쓰려다가 갑자기 

박 선생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참, 박 선생님, 이번에는 무슨 책을 읽다가 걸렸죠?" 

"모르시겠어요? 당연히 삼국지죠." 

"또요? 아유, 삼국지를 너무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삼국지 

같은 것은 안 보게 생겼는데." 

실컷 화정에 대해 감탄을 늘어놓던 처녀선생마저도 

진저리를 쳤다. 교사들 사이에서 화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나라 경제를 통째로 쥐고 흔드는 효진그룹 

총수의 외동딸이니 당연하지만, 그 세련되고 고고하게 생긴 

얼굴로 수업시간마다 삼국지를 읽다가 걸려 휴식시간마다 

교무실을 드나드는 통에 더 유명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성적은 전교 5위권 안에서 왔다갔다하는, 밉지않은 

괴짜라는 이유로, 교사들 중 대부분은 이미 그녀가 삼국지를 

보던 말던 상관도 안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현재 그녀가 

수업시간에 삼국지를 본다고 교무실로 불러내는 선생은 

박 선생밖에 없다. 처녀선생은 속으로 `박 선생님도 참 

끈질기셔.' 라고 감탄을 빙자한 빈정거림을 내뱉고는 

기록부로 눈을 돌렸다. 

******* 

"야, 쟤야, 쟤! 걸어 다니는 삼국지!" 

"이야, 끝내주게 예쁜데." 

"진짜 예쁘다. 쟤에 비하면 주변 여자애들은 다 돌멩이다, 

돌멩이." 

"암튼, 준혁이가 열을 올릴 만 하다니까." 

"그 자식, 아직도 쟤 쫓아다녀? 대부분 얘들은 쟤 괴짜인 거 

알고 다 포기했잖아?" 

"꼭 괴짜라서 그렇겠어? 효진그룹 사위가 아무나 될 수 있겠냐?" 

"준혁이는 자신의 집도 유화정네랑 맞짱뜰 만하니까 그렇지. 

그 자식도 갑부잖아?" 

"그런데 유화정은 두목한테 흥미가 전혀 없어 보이던데?" 

교문까지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화정을 지켜보는 너댓 명의 

남학생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교정에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물론,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준혁' 이라는 남학생은 이들의 

보스뻘이 되는 셈이었다. 교문에 대기하고 있던 검정색의 

번쩍거리는 세단 앞에서 제복을 차려입은 기사가 화정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차문을 열었다. 

"걸어갈께요." 

화정은 차갑게 잘라말했다. 근처에 숨어있던 네 명의 

남학생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아가씨......" 

"나도 다리는 있어요." 

당황하는 기사에게 화정은 차갑게 잘라 말하고 세단을 휙 

지나쳤다. 기사가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됐군, 하고 남학생들이 킬킬거리고 있는데 약간 굵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뒤통수를 급습했다. 

"다들 들었겠지? 그러니까 어서 뒤를 더 쫓아!" 

늘씬한 체격에, 단정한 외모를 지닌 남학생이 서 있었다. 

한 남학생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준혁, 너는 백날 우리한테 계집애 꽁무니만 쫓아다니게 

시키고 있을거야?!" 

준혁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가 어째?" 

그의 태도에 나머지 남학생들의 태도에 주눅이 들었다. 

남학생들은 투덜거리면서 화정이 사라진 골목을 향해 달려갔다. 

준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흠, 오늘은 차를 안 타고 가니까 더 쉽게 됐네. 꼭 설득을 

시켜야지." 

몇 달을 벼르고 별렀건만 검은 세단 덕에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오늘은 이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준혁은 자신이 

여자아이를 못 꼬신다는 것은 생애 최대의 불명예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나르시스트였다. 효진그룹과 함께 경제를 쥐고 흔드는 

오남그룹 총수의 아들이니 화정에게 꿀릴 것은 없었다. 특히, 

자신 정도면 외모도 괜찮은 편 아닌가. 자신이 아니면 화정을 

감히 꼬실 사람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돈과 외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매복병들이 있는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 

불량스럽게 교복을 입고 담배를 꼬나문 남학생 네 명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화정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훑어보자 남학생 하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우리가 쫓아오는 것을 알아채셨네? 예쁜 얼굴 망치기 

싫으면 잠깐 같이 가지?" 

화정은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은 채 그들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당황하거나 겁을 먹은 모습이 아니었다. 도리어, 

어이가 없다는 듯 덤덤하고 차가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동요하던 남학생들 중 한 명이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진 돌을 가지고 탁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호통을 쳤다. 

"뭐하는 거야?! 오빠들이 가자는데!" 

화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의외의 태도에 

기가 막혀진 남학생이 무어라 호통을 치려는데 다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봐, 너희들! 넷이서 여학생을 협박하다니, 너무한 것 아냐?!" 

이미 준비된 각본이었고 아니꼬웠지만, 얌전하게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놀란 척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폼을 잡은 준혁이 

여유있는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속으로 `이 

나쁜 놈!' 이라고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충실하게, 당황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이준혁 아니야?!" 

준혁은 화정을 의식하면서 피식 웃었다. 

"알고 있군. 그럼 썩 꺼지는 것이 어때?" 

미리 약속한 네 명은 속으로 `두고보자'를 남발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메스꺼움은 준혁이 약속한 보수와, 평상시 놀 때 드는 

돈을 준혁이 대부분 부담하는 것을 생각하면 참아야 한다. 

분한 척 하면서 천천히 사라졌다. 준혁은 화정의 `고마워.'란 

말을 기대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화정은 

발걸음을 이미 옮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아닌데? 어떻게 

말 한마디 않고 가버리지? 준혁은 당황하면서 성급히 화정을 

불렀다. 

"저기!" 

화정은 고개를 홱 돌리면서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가 예쁘게도 휘날렸다. 얼핏, 꽃향기가 

실려 온 것 같았다. 늘 생각하지만 정말 예쁘다, 하고 멍하니 

쳐다보는데 화정은 눈매를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준혁을 향해 

쏘아붙였다. 

"앞으로 이런 유치한 짓은 안 했으면 좋겠어." 

너무나 칼 같이 차가운 말투와 자르는 듯한 어조에 준혁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해졌다. 그러나 시치미를 뚝 떼야 

했다. 

"무슨 소리야?" 

화정이 팔짱을 낀 채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테지? 저 얘들, 다 네 친구들이잖아. 

내 기억력을 무시하지 말아주길 바래." 

차갑게 대꾸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버리는 화정을 향해서 

준혁은 이게 아닌데, 를 속으로 연발하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럴 리가 없잖아! 잠깐 내 얘기 좀 들어봐!" 

숨가쁘게 따라갔지만 화정은 대꾸조차 않고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준혁은 화정을 따라 붙이면서 옆에서 계속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진짜 내 친구들 아니야. 닮아서 착각한 것 아니야? 

난 그렇게 치졸하지 않다구!" 

이 정도 변명이면 태도를 바꾸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항상 네 옆에 붙어다니던 아이들인데 나더러 착각한 

거라고? 네 명이 모조리 너의 친구 넷을 닮았니?" 

"그게 아니라니까!" 

또 다른 핑계를 대면서 재잘거리는 준혁에게 신경도 안 

쓰던 화정은 세 번째 갈림길 앞에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서 있던 그녀는 준혁을 휙, 하고 

돌아보았다. 재잘대면서 따라오던 준혁은, 귀찮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멈추어선,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의아해하면서 

따라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준혁." 

덤덤하게 자신을 부르는 화정을 보면서 준혁은 긴장했다.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면서 화정을 바라보았다. 

"응?" 

화정은 고개를 잠깐 숙이더니 긴 생머리를 쓸어올렸다.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너한테 정말 꼭 하고 싶은 부탁이 있어." 

순간 준혁의 기분은 날아오르는 새 같아졌다. 드디어 

화정이 자신에게 부탁을 했다! 이후에 만나게 될 핑계가 

생기지 않을까? 부탁을 하면 이후에 다른 약속이 생길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탁을 들어주어야지. 이렇게 굳게 

결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들어줄 테니 말해봐." 

화정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 - 라기보다는 뭔가 의미심장한 

싸늘한 표정 - 를 머금었다. 

"정말 들어줄 수 있겠니?" 

준혁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한테 안 

넘어오는 여자는 없다니까. 

"그럼." 

화정은 휙 돌아섰다. 

"제발 나를 따라오지 말기를 바래. 내 앞에 안 

나타나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어." 

그러면서 매몰차게 발걸음을 옮기는 화정의 뒷모습을, 

준혁은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기분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준혁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분한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자신이 멍하게 있는 사이, 어느덧 사라진 

화정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 

못된 것 같으니, 당장 만나면 따귀를 한 대 올려붙여야지. 

******* 

자신이 누구던가. 사실 효진그룹보다 조금 뒤지는 점도 

있기는 하지만 거의 동등한 재벌의 외아들이다. 특히 

외모도 잘 생겨서 자신이 이 정도로 성의를 보이면 안 

넘어오는 여자아이가 없었다. 늘 아버지는 자신에게 

바보같다고 손찌검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성적도 그래도 전교 20등대는 유지해 주고 있고 얼굴도 

여자아이들이 웬만하면 잘 생겼다고 손뼉을 치는 수준이다. 

이런 자신이 계집아이에게 조소당하고 차였다. 이런 모욕은 

난생 처음이다. 손상당한 자존심 덕에 이제는 관심이 있고 

없고를 따지기도 싫다. 준혁은 눈가에 이글이글 타는 불씨만 

피워올리고 있었다. 

*******

화정은 뒤를 확인하면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 근처를 

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깊숙하게 들어온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준혁을 따돌리기 위해서 평상시 다니던,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조금 낯선 곳으로 

와버린 것 같았다. 화정은 약간은 불안하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되어있었다. 고등학생이니 수업이 

늦게 끝났는데, 귀찮은 준혁을 따돌리느라고 더 늦어져버린 

것이었다. 화정은 준혁에 대해 정말로 귀찮고 할 일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근처의 건물 문 앞에 있는 계단에 

앉았다. 벌써 달이 떠 있었다. 유난히 밝고 둥그런 보름달이었다. 

핸드폰으로 집에 연락을 하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자신이 

이렇게 늦게 들어간다면 애꿎은 운전기사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잔뜩 혼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핸드폰도 꺼놓은 

상태이니 자신의 늦은 귀가에 부모의 속이 더 타들어 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부모의 그런 지대한 

관심이 더더욱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집으로 들어간다면 

과외선생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앉아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당연히 겪어온 일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싫고 

답답해졌다. 가슴속에 뭔가 커다란 덩어리가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길고 깊게 콧바람을 뿜어 보았지만 답답하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기분이 우울해졌다. 답답한 심정을 못 

이긴 화정은 습관적으로, 가방 속에 있는 삼국지 책을 꺼냈다. 

책장을 넘겨보았다. 몇 개의 삽화와 빼곡하게 들어찬 글씨들, 

그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주군을 선택하여 모시는 많은 장수와 

모사들, 명분을 위해 노력하는 군주들의 이야기......이런 

것으로 가득찬 삼국지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리고 부러웠다...... 

"나도......이렇게 좀 자유롭고 호탕하게 살아보고 싶어." 

화정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밝은 달빛 때문인지 

책이 선명하게 보였다. 화정은 책장을 넘기려다가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희뿌연 달빛이 아름다운 보름달이 눈에 

다시 들어왔다. 어디서 그랬더라, 보름달은 정성으로 빌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이 있다고......그런 구절이 생각난 

화정은 달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보름달이 정말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나도 한번쯤은 삼국지의 세계를 겪게 해 

달라고 빌텐데." 

거기까지 중얼대던 화정은 입을 그만 다물었다. 동시에 

내가 무슨 헛소리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점령했다. 누가 

들어도 우습게 여길 헛소리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정말 아무리, 그냥 해본 소린데 뭘, 하고 

얼버무리더라도 엄청난 헛소리요 망상이다. 나도 참, 요즘 

어지간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화정은 자신의 헛소리를 

스스로 한심하게 여기면서 삼국지 책을 가방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작은 유리창에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추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표정하다. 즐거운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4년 동안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당연한 걸, 즐거운 일이 4년 동안 딱 

한번도 없었으니까. 화정은 불만스럽게 혼잣말을 하면서 

얼굴을 약간 찡그려보았다. 

4년. 그랬다. 엄마가 죽은 이후로 정말 싫증나고 화가 

나는 시간들이었다. 웃을 만큼 행복하거나 즐거운 일이 

없었다. 친구들은 자신이 효진그룹 총수의 외동딸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예 접근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괴짜라고 

생각했기에 더더욱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다. 구경거리로만 

삼았을 뿐이다. 

친구가 없으니 혼자 놀 수밖에 없고, 그렇게 혼자 놀게 

되니 책만 읽게 된다. 그러다보면 즐거운 일도 없어서 웃을 

기회도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가식적으로라도 잘 웃던데, 난 왜 그런 인위적인 웃음도 

나오지 않는 걸까? 그녀는 문득 차가운 계단 바닥을 

느끼고는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이렇게 멍하니 

망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집에 가면 할 일이 

태산같다. 

산더미같은 과외 숙제도 해 놓아야 하고 과외 선생들의 

긴 강의도 차례로 들어야 한다. 힘내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핸드폰을 켜려고 하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갔지?!" 

분이 가득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뜨끔하는 

심정으로, 화정은 재빨리 핸드폰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아직도 안 갔던 모양이다. 준혁임을 깨달았다. 끈질기다. 정말 

귀찮은 인간이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화정은 부딪히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다시 한번 스스로 상기했다. 재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꽤 쾅쾅거리면서 걸어가는 것이 제법 화가 난 듯 했다. 

화정은 한숨을 내쉬면서 준혁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계단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잠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졸음이 왔다. 하품이 나오려 했지만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잠이 들다니, 바보같은 짓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인데 

자다가 준혁보다 더한 놈들을 만나면 어쩌려고 한단 말인가.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겨우 발걸음소리가 사라진다 

싶어서 나가려 했다. 순간 줄이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길이 없어서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또다른 

발걸음 소리가 이어서 들려온다. 그리고 그 발걸음 소리가 

지나가면 또다시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그 다음도, 

그 다음에도......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다니는 거리였었나, 

하고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빠져있었다. 지루했고, 

피곤했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연이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지쳐버린 화정은 눈이 자꾸 감기는 것을 느꼈다. 안돼, 

이런 곳에서 잠이 들면......화정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이르면서 열심히 버텼지만 잠은 눈꺼풀에 잔인하게도 

쏟아져 내렸다. 오늘의 자신은 좀 이상하다. 쓸데없는 

망상을 하지 않나, 낯선 곳에서 이렇게 졸지를 않나...... 

내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화정은 

저도 모르게 깜박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당황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잠이 들어서 자버렸다. 

꽤 늦은 시간인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화정은 허둥지둥 

일어났다. 계단에 앉은 채 벽에 등을 대고 잤더니 몸이 

뻐근했다. 벽과 접촉한 등 부분과 머리 뒤통수가 차갑게 식었다. 

형편없는 콘크리트 벽은 참 차갑기도 했다. 왜 이렇게 

차갑담, 이렇게 차가우니까 몸이 더더욱 뻐근한 거야, 하고 

투덜거리던 화정은 멈칫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몸이 뻐근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학교에서는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혼나지만, 집에서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순히 따르는 착한 딸이었다. 지금의 

성적도 집에서는 얌전하게 부모님이 시키는 과외를 다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분명 과외 선생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화정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가방을 바닥에서 

들어올리고 먼지를 탁탁 털었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화정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가만, 여기 지하 아냐?' 

시야가 답답했다. 컴컴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눈을 찌푸린 채 더듬더듬 

손을 뻗어 걸음을 옮기던 화정은 거친 촉감을 느꼈다. 뭐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목을 앞으로 길게 뺐다. 손에 닿은 거친 

촉감의 물체가, 그제야 어둠에 약간 익숙해진, 눈으로 들어왔다. 

작은 나무문이었다. 투박한 질감을 다듬지도 않고 그대로 

박아 붙인 듯, 싸구려 티가 풍기는 나무문은 지하에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기는 이렇게 습하고 어두운 지하에 사는 

사람이라면 필시 경제적 사정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문짝을 달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어쨌든 누가 살고 있나보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화정의 호기심은, 그녀가 그렇게 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본래 호기심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더욱 궁금했다. 유난히 보름달이 밝아서 그런 것일까...... 

`대체 무엇을 하는 건물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이상한 느낌 같은 것이 머리를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화정을 문짝을 

열도록 자꾸만 밀치는 그런 느낌이, 봐야만 한다는 어떤 사명감 

비슷한 것과 함께 화정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 느낌과 

임의의 사명감을 뿌리치지 못하고, 망설이면서도, 문 쪽으로 

조심조심 걸어나갔다.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심호흡을 했다. 이러지 말자. 

다른 사람의 집에 이런 짓을 하다니, 뭐하는 거야? 마지막으로 

남은 그녀의 이성이 질책했지만 몸은 그녀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고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잡이를 비틀었다. 

끼이익. 

문이 공포영화에 항상 나오는 음산한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던 공간인지, 묵은 곰팡이 냄새와 습한 

공기가 엄습했다. 그 탁한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나? 이렇게 습하고 묵은 냄새가 나는 곳에서는 

사람이 살기 힘들텐데......그런데 약간 떨어진 곳은 조금 

밝았다. 

형광등이나 전등은 아니고 촛불 하나 정도를 켠 듯한 

미미한 밝기였다. 그 빛은 은은하게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빛이 있다니 역시, 사람이 살고있는 걸까? 사람이 산다는 것이 

확실해졌는데도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오늘따라 무슨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아, 하고 스스로에게 빈정거렸지만 그 

빈정거림도 그녀의 행동을 멈추는 힘이 되어주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환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쳤어? 불이 

켜져있다는 건 누가 살고 있다는 뜻인데 왜 이런 짓을 

하는거야?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자신의 몸은 환한 

불을 향해 스스럼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지하실은 좁았기 

때문에 약간의 걸음만 옮겼어도 금방 촛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었다. 

"응?" 

이상한 광경이었다. 전등이 환하게 켜져있는 방안은 공기가 

탁하고 습하긴 했어도, 의외로 깨끗하고 아늑했다. 속으로 

역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 정신이 

들었다. 실례를 했구나......서둘러 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작정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책상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익숙한 풍의, 그리고 너무 커다란 

그림이었다. 언뜻 지나치며 보기에도 눈에 익었다. 책에서 

흔히 본 삽화와 비슷한 풍이었기에 지나치기가 더 힘이 들었다. 

"......뭐지? 굉장히 큰 그림이네?" 

궁금해진 그녀는 참지 못하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화정은 그 

그림이 전쟁 기록화 같은 것임을 발견했다. 서양의 복식은 

아니다. 분명 동양풍의 갑옷과 복식들이었다. 책상을 가득 

메우고 있을 만치나 커다란, 그 그림에는 병사들이 전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있었다. 

죽이고 있는 병사, 죽어가는 병사, 도망치는 병사, 추격하는 

병사......말도 못타고 그저 죽어라고 두 다리로 쫓고, 

쫓기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가엾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반면에 장수들은 말을 거만하게 타고 그들이 사투(死鬪)를 

벌이는 것을 내려다보고만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자 

무의식적으로 장수들을 찾게 되었다. 그저 생각없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장수를 찾던 화정은, 한참을 찾다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장수는 안 그린 걸까?' 

그랬다. 단지 병사들만으로 종이가 메워진 그림이었다. 

지휘하고 있는 장수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병사들의 참혹함이 소재였다고 해도 지휘하는 장수를 

하나 정도는 그리려는 것이 사람의 심리가 아니던가. 화정은 

거듭되는 호기심에 장수를 찾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다시한번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그림을 샅샅이 보았어도 장수는 없었다. 

장시간 그림을 보느라 눈이 아파진 화정은 결국 포기하고 

그림에서 눈을 떼려고 했다. 그 순간...... 

"앗!" 

화정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분명 왼쪽의 아래 귀퉁이에 

조금 높은 언덕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화려한 갑주를 

걸친 장수 하나가 긴 장검을 지니고 말을 탄 채로 살육전을 

벌이고 있는 병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옆에는 삼국지(三國志)라는 글씨가 있었다. 화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림의 장수를 손으로 짚으면서 

중얼거렸다. 

"뭐? 아까는 분명히 이런 것이 없었는데? 삼국지라니, 그럼 

삼국지의 장면인가? 그렇다면 이 장수는 대체 누구지? 

혹시......유비(劉備)일까? 엇?!" 

그저 생각없이 검지를 뻗었던 화정은 그림의 장수를 

가리켰던 자신의 검지가 종이에 쑥 들어가 있음을 깨달았다. 

말도 안돼!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눈을 힘껏 

비볐다. 다시한번 응시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틀려지지 

않았다. 분명 화정의 검지는 늪에 잠기듯, 종이 속에 쑥 

들어가 있었다.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겁이 덜컥 

났다. 

손가락이 종이에 빨려들어 있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 

꿈이니 생시니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어서 손을 빼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검지를 얼른 잡아당겼지만, 되려 다른 

손가락까지 함께 그림에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커다란 

종이가 엄청나게 확대되어 눈 앞까지 다가왔다. 그림이 

스스로 움직였어! 스스로 일어나서 커져버렸어, 이런 말도 

안되는! 분명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아마도 난, 벌써 반 기절한 상태 아닐까? 어느덧, 자신의 눈 

바로 앞으로 다가오는 그림을 보면서 끔찍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림이 자신의 얼굴에 들러붙는 순간, 끈적한 촉감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다음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정신이 멍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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