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적응기(的應期)
"......대체 뭐야......응?!"
눈을 뜬 화정은 어안이벙벙해졌다. 자신은 웬 길가에
주저앉아있었다. 쓰러진 것도 아니고 주저앉아있다니,
그것도 길가 한 가운데에, 하고 민망해 하고 싶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주변의 풍경이었다. 주변에서는 정통 중국식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거리를 누비고 있었으며 나무로
만들어진 허술한 마차들이 짐을 싣고 시끄럽게 오가고 있다.
주변건물들은 시멘트와 벽돌로 지어진 고층이 아닌, 기와와
목재로 만들어진 단층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주, 아주 간간히
이층짜리도 보이기는 했지만. 멍해졌다. 화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아는
건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사람들조차도 낯선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도리어
자신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작은 집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괜히 부끄러워졌다. 화정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면서 작은 집 옆에 있는 샛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낯설고 이상해서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떠드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일부러 인기척이 거의 없는 거리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화정은 약간 안도하면서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걸어가던 그녀는 핸드폰을 기억해냈다. 문득, 어떤
생각이 화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 전화를 해서 여기 근처에 영화 세트장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다. 이건 아마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 세트장일 것이다.
그래서 분장도 안하고 교복을 입은 채 돌아다니는 자신을 보면서
사람들은 견학생이 왜 여기까지 함부로 들어온 건지 궁금하다는
말을 하고있던 것 같다. 그렇게 수긍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켰으나......
"불통지역!"
실망한 화정은 저도 모르게 화가 난 말투로 소리치고
말았다.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걸었건만 불통지역이다.
세트장에서 불통일 리는 없을 텐데......그렇게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분한 마음으로 집어넣는데, 바로 앞에서 킥킥거리는
소리와 함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화정은 그만 앞에 서 있던 무엇인가에 부딪혀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너다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분명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약간의 일그러진 표정들과 얼굴의 흉터,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비록 알지못할 중국의상일 망정 소매를
아예 찢어서 민소매로 만든 불량한 복장 등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화정이 눈썹만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있는 것을 보고는
건달들이 또다시 시비를 걸었다.
"어, 이거봐라? 아주 절색인데? 예쁜 얼굴에 흠나기 전에
얌전히 따라 오실까? 붙잡아."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정의 옆으로
두 남자가 다가왔다. 화정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순간......
퍽!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화정에게 접근하던 두 남자가 쓰러졌다.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 했다. 나머지 두 명이 재빠르게 몸을
돌렸으나 이미 과격한 소리가 나면서 그 두 명도 쓰러졌다.
우두머리는 자신의 수하들이 무력하게 쓰러진 것을 보면서
뒷걸음질치더니 화정을 노려보고는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또다시 퍽하는 소리가 나면서 우두머리도 쓰러졌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동작이 어떠하고 누가 어떻게
한 일인지도 판단하지 못했다. 그만큼 순식간에 벌어지고
마무리지어진 일이었다. 얼떨떨해진 화정은 우두머리가 쓰러진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
화정은 조용히 소리가 마지막으로 끊긴 곳을 응시했다.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조금 거리가 있어서 그런지 얼굴은 자세히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키가 매우 훤칠하고 체격이 보기좋게
균형이 잡힌 남자였다. 검정색 도복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찬
수수한 차림에 긴 검정 머리칼은 하나로 올려묶고 있었다.
청년이 다가왔다.
"여기서 무슨 볼일이오?"
청년이 딱딱하지만 듣기좋은 목소리를 냈다. 어조는 조금
형식적이지만 맑고 약간 저음의 톤에 울려퍼지는 목소리였다.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화정은 청년의
얼굴이 매우 준수한 것에 대해 조금 놀랐다. 싸움질을 잘
하는 사람이니 우락부락하고 조금 거친 인상일 거라고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잘 생긴 사람이었다.
서글서글하고 시원하면서 이지적인 눈매에 오똑한 콧날,
날카로운 턱선을 지녔다. 조금 차가운 이미지이기는 했어도
아직 어린 인상이 약간은 얼굴에 남아있었다. 대략 스물쯤 되어
보였다. 와, 역시 여기는 영화 세트장인건가? 세트장인데
불량배들도 간혹 나타나나보다. 이 사람은
탤런트인가봐......하는 갖가지 추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화정이 미처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청년은 팔짱을
끼면서 다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저런 놈들의 소굴이오. 아가씨가 올 만한 곳은
아니지. 돌아가는 편이 안전할 거요."
뭐야, 여기는 영화 세트장이 아닐까? 경비도 없나? `저런
놈들의 소굴' 이라는 구절에 의해 추리가 조금씩 깨져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화정은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저어......"
화정은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에게는 인상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인상은,
정말 개인의 판단과 느낌에 의지해서 보게 되는 것인데,
화정이 느낀 바로, 이 남자는 절대로 불량배나 사기꾼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 차갑고 냉정하며 지적인 느낌이
강했다랄까......차림새나 체격을 보면 중국 무협에 매일
나오던 무사(武士)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혹시 중국 무협이라도
찍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또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아까의 `저런 놈들의 소굴' 이란
구절을 생각하면 그 생각은 지워버려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화정의 옷차림을 보고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뭔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평범한 교복인데도 언짢게
생각하는 듯한 그 표정과, 아까 거리에 서있던 사람들의
옷차림과 수군거림 등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화정의 교복이
뭔가 기분좋지 않은 차림이란 것 정도는 금방 추리해 낼 수
있었다.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화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무언가 물어보아야 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떤 곳인지.....그녀는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말을 건네보았다.
"길을......잘 몰라요."
어라, 왜 이런 말이 다 나오는 거지? 의도와는 다른
소리가 나왔다. 화정이 당황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나가시면 저런 놈들도 안 만나고 마을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고개를 저으면서 무어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년은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그럼 무사히 나가시길."
금방 등을 돌리고 사라져버렸다. 훤칠한 키 덕에 수풀
사이로 그의 뒤통수가 보였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붙들지도
못했다. 화정은 청년이 순식간에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멍해졌다. 쳇, 정말 융통성 없고 딱딱하다, 라며 불만을
내뱉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보복하러 오거나 기절해 있는
건달들이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청년이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청년의 목소리와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화정은
걸음을 옮기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모습,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 남는다. 자꾸만 맴돌고 있었다. 드물게
잘생긴 외모와, 멋진 체격, 차갑고 단정한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느낌이 묘할 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사람 같았다.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이랄까......화정은 그를 아련한 기억으로
남기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잘은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고마움과 동경심이외의 다른......어떤 것이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렇게 막연한 느낌은 처음인 것
같았다.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그런......
*******
"아무튼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던지 뭔가 해야겠어."
그렇게 결심했다. 그 청년이 가르쳐준 길로 간 덕분에
무뢰한을 만나지 않고 평탄하게 마을로 잘 돌아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주목은 여전해서,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다리까지 치렁치렁하게 가리고 있을 뿐이지
자신처럼 짧은 스커트는 없었다. 화정은 점차 의심스러워졌다.
정말로 영화세트장이 아니라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차차
들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다. 보름달을 보고 말도
안되는 소원을 빌지 않나, 지하실에서 발견한 종이가 자신을
먹어버리는 꿈을 꾸지를 않나, 웬 무협영화 주연배우를 다
만나지를 않나.....무조건 자신의 머리가 좀 이상해졌나보다,
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불량배들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꿈이거나 뭔가 잘못 된
것이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그 냉혈한 -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과 마주치고 나서 생각해보니 무조건 꿈이라고 하기
어색해졌다. 어쩌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쩌면
자신은......달에 대고 빌었던 것처럼 다른 세계에 빠져버린
걸까? 꼭 삼국지의 세계는 아니더라도 어떤......다른 세계?
그럴 지도 몰라.....생각을 전환하고 나니까 조금씩 현실이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미쳐서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지금 여기가 어디고 어느 시대인지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현실을
파악하고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자신이 짧은 치마차림인 만큼, 여자를 잡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팁도 아울러 생각해냈다. 화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지나가는 여자들 중 심성이 고와보이는 여자 하나를
눈여겨 보아두었다. 천천히 다가가서 폭이 넓은 소매자락을
붙들었다.
"저어......말씀 좀 여쭙......"
"꺄아아악! 주술사가 저를 죽이려해요!"
말을 걸자마자 여자는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화정이
붙잡은 소맷자락이 터진 것도 모른 채 필사적으로 도망가버렸다.
어안이벙벙해졌다. 겨우 적응 좀 했더니 또 이상한 단어가 들렸기
때문이다. 주술사?'
"주......술사......? 그거 오락이나 만화에 나오는 것 아니야?
진짜 있을 리가 없잖아?"
어이없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또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화정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속으로 당황하면서 옷을 어떻게든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옷이 필요하기는 했다. 하지만 옷생각보다도 어딘가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따뜻한 방에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은 이차적이었고,
서늘한 바람을 피하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부잣집 외동딸이던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딘가 들어가서 바람을
피하고, 눈에 안 뜨일 만한 옷을 구해서 입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화정은 조금 허름한 집들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마구간이나 창고 같은 곳에서는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쉴 수 있을거야."
그렇게 판단을 내린 화정은 상황은 잘 모르지만 따로 떨어져
있고 조금 허름하며 크기가 작은 건물을 찾아서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눈으로 약간 둘러보니 구석에 그런 건물이 두 개
가량 보였다. 화정은 `제발 마구간이나 창고이기를.'하고
기원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이게
주의하면서 살금살금 다가갔다. 바깥에서 벽을 두들겨보았다.
"누구얏?!"
허름한 차림새에 인상도 초췌하고 삶에 찌들어 보이는 아낙
하나가 신경질을 버럭 내면서 문을 박차고 나오는 통에, 놀란
화정은 서둘러 몸을 숨겼다. 아낙은 역정을 내면서 문을 닫았다.
사람이 사는 집이었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화정은 옆 건물로
다가갔다. 문을 두들기고는 빠른 몸짓으로 숨었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응? 이번엔 제대로 골랐나?"
반가운 심정으로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이히히힝-!"
말 한 마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날뛰었다. 시끄럽다고
생각하고 나가려고 했으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지? 참자, 참아......"
갈 곳이 없음을 상기한 화정은 다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마구간이 말이 있는 곳 아니던가. 쉴 곳이
생긴 것만 해도 감사해야겠지......하는 심정으로, 구석에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지푸라기뭉치로 갔다. 몸을 쭉 뻗고
누워보았다. 지푸라기가 어느 때보다도 더 따뜻하고
푹신하게 - 화정이 현실에서 사용하던 침대와 시트보다도 -
느껴졌다. 화정은 바람이 안 들어와서 그런지 아늑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밤은 일단 여기서
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의복을 어떻게 구하지? 의복만 구하면 어디서
일이라도 하면서 먹을 것도 구할 수 있을 텐데.'
걱정이 되었다. 먹고살 걱정은 조금도 한 적이 없었던
화정이었지만 여기는 달랐다. 화정은 이곳이 분명히 다른
세계임을 차차 확신하고 있었다. 서럽고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곳에 이런 가련한 처지로
떨어지게 된 거람? 피곤하고 스트레스 받아서 자고 싶기도
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자고 일어나면 다 돌아올 꿈 아닐까?
여기가 꿈속일 지도 모르잖아......하아, 이딴 생각이나
하게 되다니, 어쨌든 쓸쓸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화정은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쓸쓸하고
외롭다......새삼 느낄 필요가 없을 텐데. 자신은 늘 외롭고
혼자였다. 아무도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으며 아버지조차도
교육만 시킬 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재벌 총수의 딸이라는
조건 덕에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다. 약간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서 바깥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창문으로 다가갔는데......
"히히힝, 이히히힝!"
매어있던 말이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화정은 말을 달래보려고 했다. 그러나 말은 더 요란하게
울어댔다.
"히힝, 히히히힝, 이히히힝,이히힝!"
화정은 당황했다. 이렇게 시끄럽다면 누가 올 지도 모른다.
어찌해야 할 줄 모르고 화정은 멍하니 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곁에서 애써 떨어지려는데......
쾅!
화정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은빛 창날을 보았다. 열린 문으로 희미한 달빛이 들어와 창날을
더 서늘하게 식혔다. 화정은 창날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창을 겨눈 사람을 응시했다.
"누구냐? 동탁(董卓)의 첩자인가?!"
"......동탁......?"
의외의 단어에 화정이 주춤하자 그는 창날을 더 바짝
화정의 목에 들이댔다. 쇠의 차가운 감촉이 제법 으쓸했다.
몸이 다 떨려왔다. 청년이 윽박질렀다.
"사실대로 밝혀! 왜 내 말을 죽이려 했지?"
어이가 없어진 화정은 변명을 하기위해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건 절대 아니에요!"
그녀는 그제서야 약간의 냉정을 되찾고 자신에게 창을 겨눈
청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스물이 못 찬 얼굴 같았다.
남자이지만 꽤 하얀 피부에 위로 올라간 눈꼬리가 조금은
매서웠고, 오똑한 콧날을 가진 그는 아직도 소년의 얼굴이
약간 남아있었다. 하얀 도복을 입고 머리는 틀어올린 후
천으로 감싸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전형적 차림이었다.
큰 키에 약간 마른 체구를 가진 청년은 깨끗하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옷차림도 좋아보이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약간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입을 열었다.
"오......오해에요, 저는 바람을 피하려고 여기 들어왔어요!"
"거짓말하지마! 이렇게 내 말과 가까이 있는데?!"
"바깥 창문으로 조금 내다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청년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태도가 누그러져
있었다. 기회다 싶었다. 좀더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의 목은 언제 날아갈지 모르니까 말이다.
"날 죽이러 온 첩자 아닌가?!"
화정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면서 조금 처연한 얼굴을 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해보니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그런 표정이 나온 것 같은데, 갑자기 청년은 주춤하더니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화정의 목에 창을 정말로 바짝 들이댔다.
"미인계 따위에는 넘어가지 않아!"
미인계래, 세상에! 화정은 기가막힌 나머지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미인계를 쓴다고 그래요? 단지 추워서 인적이 드문
곳을 찾다가 여기를 발견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잠을 자려다가
잠이 안 와서 바깥을 내다보려는데 당신 말이 울어대는 통에
들킨 것이고요."
"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지?"
"당연한 것 아니에요? 내 차림을 봐요!"
화정의 호통에 그는 눈으로 그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청년은
혀를 찼다.
"차림이 정말로 단정치 못하군. 아무리 주술사라지만 옷차림이
너무 야한 것 아닌가?"
화정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화를 참았다. 여기는 기분나쁜
사람들만 있나보다.
"관습의 차이일 뿐이에요. 아무튼 이 차림은 눈에 너무
띄어서 인적이 드문 곳을 찾고 있었어요. 주술은 쓸 줄
모른다구요."
청년은 이제야 의심이 가신 모양이었다. 창을 내렸다.
청년은 한숨을 내쉬면서 창을 옆으로 치웠다. 화정은 이미, 이
청년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청년은 지푸라기
위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화정을 바라보았다.
"대체 뭣하는 사람이오, 낭자는?"
낭자라니, 화정은 속으로 약간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청년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그냥, 사정이 있어서......아무튼 이곳 사람은
아니에요."
다른 세계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우습게 생각할 것 같았다.
화정은 그냥 여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통성명부터 합시다. 나는 마초(馬超)라고 하오. 나이는
열 일곱이오. 낭자는?"
`마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마초라고? 그거 삼국지에
나오는 사람 아니야? 삼국지 본 사람 치고 마초 모르면
바보잖아? 화정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 청년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란 것이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답했다.
"유화정(柳和貞)이라고 부르세요. 저는 열 여덟 살이에요."
대답을 하다보니 문득 궁금해진 점이 있었다. 혹시 여기는
나이 기준이 다른가?
"그런데......마초, 여기선 나이를 어떻게 세요?"
"무슨 소린지......?"
"그러니까......태어나자마자 1살로 세는지, 아니면 0살로
세는지......"
다시 말하면 만으로 세는지 아니면 이전의 세계와 똑같게
세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이 자신보다
나이가 적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큰 키
때문일까? 마초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것 아니오? 태어날 때는 나이를 먹게 세지 않잖소."
와, 고대중국에서도 만으로 나이를 세다니! 이것 참, 만약
현실로 돌아가서 발표한다면 돈을 엄청나게 벌 지도 몰라,
따위의 생각을 머릿속에 담으면서 화정은 얼른 정정했다.
"저도 일 일곱이에요."
마초가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열 여덟이라고 했......"
"갑자기 생각났어요! 잘못 알았거든요."
화정이 재빠르게 둘러대자 마초는 뻥한 얼굴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빈정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임기응변에 상당히 능하군......"
"뭐라고요?!"
얼굴을 잔뜩 찡그린 화정이 신경질적으로 반문하자
무안해졌는지 마초는 표정을 고쳤다. 그 정도로 저렇게 당황하고
미안해하다니 - 미안해 하고있는 것이 분명했다 - 생각보다
순진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마초가 삼국지에 나오는
`그' 마초라면 좀 놀랄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까지 더듬거렸다.
"아니, 그보다.....본래 낭자는 말투가 그렇소?"
화정은 마초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말투가 약간
다른 것 같았다. 화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가 피식 웃었다.
"......이상한 사람이로군......"
화정은 자신도 말투를 고쳐먹기로 마음먹었다. 소설책에 나오던
말투를 사용하면 어느정도 아귀는 맞을 것 같다고 판단내린
그녀는 마초에게 가장 급한 문제부터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나저나 나는 옷이 없는데......눈에 띄지 않을 옷이
필요한데 좀 어떻게 안 되겠어요?"
마초는 화정을 보면서 검지와 엄지를 턱에 가져갔다.
"......그렇군, 옷차림을 해결해야 할 것 같소. 그런데......
갈 곳이 없어서 옷도 못 구하고 있는 것이오?"
"네."
"그 뒤에 행장 안에 없소?"
"이건 다른 짐이에요."
"대체......여지껏 어떻게 살아온 것이오?"
당황스런 질문은 피하자! 화정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저......동갑인데 존대하기가 조금 걸리네요. 그냥 말을
놓으면 안될까요?"
화정의 제안에 마초는 잠깐 망설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어느 분의 따님이오? 보아하니 꽤나 높은 신분일 것
같은데 실례될 것 같아 두렵소."
"이 옷차림을 봐요! 그리고 꽤나 높은 신분이 이렇게 옷도
없어서 쩔쩔맬 리가 없잖아요."
마초가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띄웠다.
"......그것도 그렇군......그럼 말을 놓아도 될 것 같소."
화정은 이 사람도 참으로 익숙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숲에서 만난 그 사람은 친근감보다도 묘하게 기억에
남는 느낌을 주었지만 마초는 편안했다. 여지껏 만난 두
사람이 모두 왠지 모르게 뇌리에 새겨지고 오래 만난 사람들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화정의 취향으로 볼 때는
그때 자신을 돕고 사라진 청년이 훨씬 미남이고 잘생겼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말이다. 아무렴, 외모야 어때, 상관없잖아.
그때 그 사람은 얼굴은 정말 잘생겼지만 성격이 안 좋았단 말야.
화정은 그리 생각하면서 마초를 향해 둘러댔다.
"부담 갖지 마. 그냥 떠돌이니까."
마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잠깐 나가서 여자 의복을 구해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단박에 실행에 옮기기 위해 나가는 마초를 보면서 화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마지못해 나가는 듯이 보이는 마초는
뒷모습에는 어눌하고 순진한 곳이 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이 알던 삼국지의 마초와 지금의 마초를 평가해 보았다.
"삼국지의 마초는 성질이 급하고 과격한 면이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진짜 성질이 급한 면이 있기는 해. 하지만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거부감이 느껴지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 오히려
편한데......음, 아니면 저 사람 이름이 그냥 마초인가?
동명 이인일 수도 있잖아? 혹시 나, 진짜 삼국지로 떨어진 걸까?
말도 안되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아귀가 맞아. 동탁, 마초......
중국풍의 건물들과 복식, 사람들......"
정말 한바탕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 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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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이' 마초가 ~ 하지만:마초는 삼국지에서 보면 급하고 과격한
면에, 좀 오만하고 건방진 곳이 있는 성격으로 나온다. 본작에서도
초반에는 마초의 성품이 순진하고 발랄하게 나오지만, 중,
후반에는 성격이 변하는 것으로 설정된다*작가주
마초는 환호성을 질렀다. 휘이익, 맑은 휘파람까지 불어보인다.
"놀라운데! 하긴, 화정은 얼굴이 받쳐주니까 그런 걸꺼야."
화정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옷이 너무 치렁치렁해......그리고 머리의 장식도
너무 화려하고......"
"내가 일부러 평민 아가씨들의 옷을 사온 거야. 그런데 뭐가
화려해?"
마초가 재빨리 대꾸했다.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협영화에서나 보던 하늘하늘하고 예쁜 옷이었다. 폭이 넓고
긴소매와 약간 파여있는 목주변, 어깨까지 덮는 겹옷의
가장자리와 허리띠에는 옅은 핑크 색깔의 띠가 둘러져 있었으며
하얀 옷이었다. 발끝까지 가리고 있는 이 옷은 좀 얇은 천으로
되어있었다. 머리는 반만 틀어올려 연꽃관으로 고정시켰고
귀에는 어깨까지 닿는 긴 금귀걸이를 했다. `평민 아가씨의
복장' 을 사온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마초는 자신의 기준에서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마초는 마등(馬騰)이라는 세력가의 도련님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정말, 삼국지에 나오는 마초가 틀림없는 모양이다.
화정은 `내가 정말 삼국지의 세계로 떨어질 줄이야!' 하고
확신이 동반된 한탄을 해 보았다. 여하튼, 비싸게 보이는 이
장신구들도 선뜻 사온 것을 보면 재정상으로 곤란을 겪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뭐, 자신이야 곤란할 건 없다. 첫
동행이 빈곤한 것보다야 풍족한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속으로 `첫 후원자만큼은 잘 골랐네.' 하면서 안도했다. 다행히
마초는 자신이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매몰찬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현실로 돌아가면 삼국지를 다시 써야지. 그러면 난 히트할
지도 몰라.'
"자, 이제 밖으로 나가도 되겠지? 어서 나가자."
재촉하는 마초를 향해 화정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마초......"
"참, 이거 걸쳐."
마초가 건네준 것은 얇고 안이 비치는 감으로 만든,
하늘하늘하고 허리띠와 꼭 같은 옅은 장미색의 천이었다. 이거
영포(英布)*아냐! 경악했다. 절로 잔소리가 나왔다.
"이봐, 지금 이건 완전한 귀족 아가씨의 복장인 것 알고 있어?"
다른 세계에서 온 자신이 이곳 세계 사람인 마초에게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우습지만 한심해진 화정이 이렇게
물었다. 순진무구하게도 이 차림이 평범하다고 믿는 것이
틀림없는, 마초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내 여동생도 그런 복장을 하고 다닌다고, 분명히!"
화정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바보야, 그럼 당연히 완전한 귀족의 복장이 되는거지......
마등님의 따님인데 어련하겠어?"
순간적으로 마초의 눈이 둥그래졌다.
"뭐?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알지?......아, 아니, 어떻게 내가
마등의 아들이란 것을 알았어?"
화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조금 생각해본 끝에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아까 마초가 자신을 보고 동탁의
첩자냐고 물은 것으로 보아 동탁이 아직 살아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시절의 마초는 아직 이름을 떨치기 전의
소년에 불과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차 싶었다.
급하게 얼버무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이전에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어. 서량태수 마등님의 맏아들이 마초라고......
예전에 서량에 간 적이 있었거든......"
마초는 그제서야 `아아.'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정은
잘 속아넘어가 주는 마초의 단순함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해졌다. 일부러 화제를 얼른 돌렸다.
"그런데......귀족집 아가씨 차림을 하고서 걸어다니기에는
조금 그렇네. 어떻게 하지?"
"걱정하지마. 화정이 말에 타고, 나는 옆에서 아가씨를
수행하는 호위무사인 것처럼 하고 다니면 되니까. 무사를
수행하고 다니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화정은 그제서야 안도했다.
"그렇구나......하지만 맹기(孟起)의 말인데 내가 타도되겠어?"
마초가 눈살을 찌푸렸다.
"맹기? 내 자를 어떻게 알고있지?"
`어이쿠!'
화정은 순간적으로 또다시 자신의 실수를 원망했다. 하지만
억울한 기분도 없지는 않았다. 현대사람들은 삼국지를 조금
안다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데......이럴 때는 몰아붙이는
것이 차라리 낫다. 비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화정은 괜스레
마초를 향해 화를 냈다.
"네가 아까 말했었잖아, 이름은 마초고 자는 맹기라고 말이야!"
마초가 매서운 눈매에 어울리지 않게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내가......말했던가?"
"당연하지!"
화정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마초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난 분명히 자는 안 가르쳐주는 것이 버릇이
되어있고 여기서도 당연히 말하지 않......"
"자아, 자아, 어서 나가자."
나가버리는 화정을 보면서 마초는 아직도 속은 기분이
남아있었으나 이내 떨쳐버리고 자신의 말고삐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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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영포를 우아하게 두르고, 앞으로는 긴
애교머리를 연꽃으로 장식해서 늘어뜨리고, 연꽃모양의 보석관을
쓰고, 길고 윤기나는 검정 생머리를 아름답게 늘어뜨린 화정은
아까와는 다른 시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당연했다.
주변 사람들에 비해 훨씬 흰 피부에 반짝거리면서 쌍꺼풀진 크고
빛나는 화정의 눈매는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사실 그쪽 세계에서도
부러움을 샀지만 이곳 세계에서는 정말 대조되는 얼굴을 지닌,
주변 사람들로 인해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얼굴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마초는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넋을 놓고 가는 모양을
보면서 피식 웃어보였다.
"화정은 역시 미인인가봐. 사람들이 다 쳐다보네?"
난 그런 말 즐겁지 않단 말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화정은
표정없는 얼굴로 받아쳤다.
"마초가 잘생겨서 쳐다보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엔."
마초는 `겸손은......' 하고 중얼거리며 씨익 웃는다.
"어디로 갈 생각이야?"
"이 곳 평원(平原)은 정보가 꽤나 모이는 곳이거든. 그래서
술집에 한번 가보려고 했었는데 화정 때문에 안되겠어. 그런
차림을 했는데 술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잖아. 양가집 규수
체면에 먹칠을 하는 거니까 말이야."
"차라리 남장으로 구해오면 좋았을 걸......도움받은 처지에
꾸중하기는 미안하지만......"
마초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상관없어. 난, 네가 여자니까 남자 옷을 주면 기분나빠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튼 내 생각이 짧은 탓이니까 나도 할말은
없어."
참 성격이 좋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껏 사주니까 잘못
구해왔다고까지 하냐?!' 라고 윽박부터 질렀을 것이다. 좀
순진한 면이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깊다. 화정은 자꾸만
책에서 읽었던 마초와는 다른 면을 보이는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삼국지를 읽을 때 마초란 인물은 성격이 과격하고
거만해서 좋아하지 않았는데, 실제의 마초는 전혀 다르다.
뭐, 진짜 삼국지의 마초인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화정의 생각에는 달랐다. 어쩌면 역사책은 대부분 거짓일 지도
몰라. 하기는, 역사책을 쓴 사람도 사람이니까 나름대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쓰다보니 조금 빗나간 것일 수도 있지......
화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말고삐를 꽉 쥐었다. 마초가
화정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럼 내가 남장을 구해오도록 할까? 아무래도 여자의 몸으로
다니기보다는 남장을 하고 다니는 것이 낫겠지?"
"......"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순간적으로, 왜 그런지 모르지만
속에서 눈물이 솟을 정도로 감격했다.
"화정?"
의아하게 반문하는 마초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화정은 돌아가신 친어머니 이외에
자신에게 이렇게나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만났다.
대부분 형식적이거나 의무적으로 자신을 대해주었을 뿐 정말로
이렇게 고마운 느낌이 가슴까지 깊게 어리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곁에서 일을 해주던 가정부와 놀이상대들은 의무적이었을
뿐이었다. 돈을 받고 일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잘
대해주는 사람들.....
하지만 마초는 다르다. 그저 지나치다가 말도둑으로 오인한
소녀따위는 버려두고 갔으면 됐을 텐데, 그리고 화정에게 잘
대해주어봤자 나가는 것은 마초 자신의 돈이요, 이득될 것은
없는데, 더더구나, 가족인 것도 아닌데 그 의무적인 사람들보다
더 진심으로 대해주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진심으로 대해준다는 것이, 이렇게 마음속까지 깊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억지로 누르고 있는 화정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마초는 조심스럽게
화정을 불렀다.
"왜 그래?"
화정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마초의 얼굴에 근심이 떠 있었다. 틀림없이
근심이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말에 처음 타서 어지러운 것 아니야?"
도리어 처음 말에 타는 것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바보,
이렇게까지 신경써 줄 이유도 없으면서 왜......화정은 급기야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진심으로 감동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걸까? 화정이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자 마초는
말을 서게 하고는 화정을 바라보았다. 잠시, 마초도 말이 없었다.
겨우 눈물을 짓누른 화정이 마초에게 말을 걸려고 했는데,
마초가 서운한 듯이 입을 열었다.
"화정은......내가 보기에는 귀족집 아가씨같아."
마초의 얼굴에서는 어떤 서운함이 느껴졌다. 그 서운함이
왠지 모르게 안타까워서, 화정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애써 부정했지만 마초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발로 땅을
천천히 긁으면서 마초는 덤덤한 말투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래? 하지만 난......뭐랄까......화정이 상당히 도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귀족집 아가씨같이 단정하고......
사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잘 안하잖아? 외모도 곱고......아,
그래......고생이라고는 안 해본 것 같은 얼굴이야."
이런! 자신이 너무 딱딱하게 구니까 실망한 모양이었다.
하기는 이렇게 잘 대해주는데도 자신이 거리를 뒀으니 서운할
만도 하다. 어떻게 해야하지? 사과하는 법......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얼른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태도가 너무 딱딱하고 버릇없었다면 사과할께, 하지만......"
"아냐, 그런 뜻이 아니야. 다만 조금 편하게 지내자는 거지."
미안한 건 자신인데 도리어 마초가 당황하면서 해명한다. 정말,
눈으로 언뜻 보기에도 마초는 화정을 무안하게 하려던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화정이 너무 딱딱하니까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바보같다. 왜 도리어 자신이 당황하는 걸까. 마초에 대해 속으로
그런 원망을 하면서 화정은 고개를 서둘러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초가 가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초는 피식 웃으면서 말고삐를 다시 잡았다.
"자, 그럼 가볼까? 배 고프지? 어제 밤 내내 아무것도 못 먹고
지금은 아침이잖아. 음식점에나 갈까?"
"응......"
일부러 기운차게 말하는 마초에게 또 미안해졌다. 화정은
마초에 대해서 약간 태도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릴
적에는 심성이 너무 여리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던 화정이었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에게 모질게는 하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는 다들 도도하고 깐깐하다는 소리를 했다.
아예 담을 쌓고 지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그들과
더 친할 수가 없었고, 말이 점점 없어지고 자연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 도도하게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초는 틀렸다.
자신의 배경도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딱딱하게 굴어도 변함없이 저렇게
친절하게 대해준다.
`이 사람은......내가 대기업 총수의 따님이라는 것을
모르니까......그런 건가봐......'
이유가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여하튼, 마초가
이득을 따져서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화정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초를 바라보았다. 망설이다가 일부러 가벼운 부탁을 해 보았다.
"저기......우리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그런 것은 좀더 신나게 말해도 되는거야, 왜 그렇게 얌전하게
말하냐구. 자, 가자!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어!"
기운차게 대답하는 마초를 향해 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더
두고보아야 어떤 사람인지 알게되겠지만......마음으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가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다르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저,
마초 한 사람이 신경쓰여서 그런 것 같았다. 마초 역시 인물이
잘 생긴 편이어서......사람들의 시선을 똑같이 받고는 있지만
화정과 다르게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왠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이야......하고 마음속의
화정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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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영포(英布): 여자들이 어깨나 팔에 걸치는, 장식용의 길고
가늘은 천이다. 형태는 서양의 숄과 비슷하다*작가주
"맛있어?"
화정은 열심히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원산지의
오리지널판 음식을 먹는다는 즐거움도 있지만 근 이틀을 굶어서
그런지 더더욱 음식이 맛있게 느껴졌다. 열심히 먹고있는데 마초는
자신의 앞에 있는 접시를 화정에게로 밀었다.
"자, 많이 먹어. 배가 고팠나봐."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그 고마움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할 새도
없이 배가 고팠다. 마초는 신나게 먹고있는 화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마디했다.
"그러고 보니까 화정은 한번도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어."
화정의 손이 정지했다. 마초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덧붙였다.
"으음, 아마도......표정이 없어서 더 그렇게 보였나봐."
마음이 철근처럼 무거워지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화정은 수저를 탁자에 놓았다. 탁, 하는 가벼운 소리가
화정의 무심하고 조용한 표정을 더 차갑게 보이게 했던 듯하다.
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화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은 울고 싶을 정도로 울적했다. 망설여졌다. 어떻게 해야하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자신은, 다른 사람이
아닌 마초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울적해진 건지도 몰랐다. 그런 화정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마초는 깜짝 놀라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진짜 미안해. 그냥......내 여동생이 생각나서......"
"......"
"내 여동생은 잘 웃고 잘 떠드는 편이거든. 그래서......"
화정은 마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이 벌개지면서
열심히 화정을 달래려고 드는 마초는 정말 당황한 것 같았다.
목까지 올라오는 울음을 겨우 참았다. 알 수 있었다. 마초는
미안해하고 있었다. 바보, 미안해해야 할 건 난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너의 그 바보같은 모습이 날 더 미안하게
하는건데......울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나 원래 사람 대하는 법을 잘 몰라......절대로
맹기가 싫다거나 한 적 없어. 오히려......나한테 정말 잘 해준
세 번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걸......"
"세 번째?"
의문이 일었나보다. 마초의 눈썹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화정은 묵묵히 자신의 접시에 남은 것을 먹었다. 속으로 화가
났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인데도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말하고
있는 자신이 싫어졌다.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마초는 마초대로
조용했고 화정은 화정대로 음식만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동안 썰렁하고 침체된 분위기가 유지되자 앞에 앉아있는
마초에게 더더욱 미안해졌다. 하지만 더 미안했던 건, 마초의
표정이 `이런, 나 때문에.....정말 미안해.' 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는 점이다.
넌 바보야. 내게 차라리 화를 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분위기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낀 화정은 `궁금해서
그러는데, 지금 어떤 상황이야?' 라고 물어보려다가 이런 사무적인
것을 묻는다면 분위기가 더 굳겠다 싶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한창 적막한데 곁의 자리에서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급 식당인지라 방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볼 수는 없었지만 굉장히 소란스러운 것이
꽤 여러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침묵을 깨고,
마초가 어깨를 으쓱했다.
"싸움이 난 모양인데."
"......싸움?"
"응, 여기는 술도 같이 팔고 있거든. 충분히 싸움이 날 수도
있지, 뭐."
대수롭잖게 말하는 마초와는 다르게 화정은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심상찮으면 어쩌리.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끼었다가 도리어 마초가 곤란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이곳 세계에 적응도 못한 자신이 함부로 취한 사람들에게
끼어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화정이
얌전하게 있어도 자동적으로 일어났다. 우당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마치 거인이 걷는듯한,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마초와 화정이 있는 방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덩치가 엄청나게 큰 사내가 비틀거리면서 들어왔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듯 사내의 눈은 게슴츠레했고 시꺼먼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타난 사내의 덩치에
놀란 화정은 `거인이닷!' 하고 외칠 뻔했다.
사내는 키도 어마어마하게 컸지만, 덩치도 커서, 방안을 가득
채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사내가 방안에 들어선지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화정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사내의
인상을 판단할 수 있었다. 호랑이 수염같이 빳빳하고 텁수룩한
수염은 술냄새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넙죽하고 우락부락한
얼굴과 보통 사람의 두 배는 족히 넘어설 것 같은 덩치는
보기만 해도 오싹했다. 덩치가 주는 위압감도 이유였지만,
다른 이유때문에 화정은 더더욱 당황했다.
`......저 사람, 인물 묘사대로라면 혹시......'
빳빳한 수염과 어마어마한 덩치, 넙죽한 얼굴......많이 본
듯한 묘사가 아닌가? 화정이 놀라는데 맞은 편에서 마초가 벌떡
일어섰다. 화정의 앞을 막아서면서 사내의 뒤를 따라 우루루
몰려온 몇몇 건달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신지요."
역시 우락부락한 생김새가 보기에 절대로 곱지는 않은, 건달
하나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익덕(翼德)공께서 과하게 취하시어 방을 잘못 찾으신 것 같다.
그러니 마음쓰지 마시게."
`역시......'
화정은 그 사람이 장비(張飛)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아, 나도 이런 일을 다 겪는구나. 이게
지금 꿈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생생한데? 사람일이란 모르는
일이다. 조금 전까지 자신은 분명 계단에 앉아서 `삼국지의
세계로 가보고 싶어.' 따위의 소망을 토로(吐露)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유명한 장비와 마초가 근처에 나타났으니 말이었다.
어쨌든 화정이야 어찌 생각하건 간에 장비가 작고 옆으로 째진
고리 눈을 부릅떴다.
"뭐냐, 넌? 역시 사내들은 여자 앞에서 사족을 못 쓴다니까.
여자란 것들은 다 없어져야해. 큰 형님도 정신 못차리고
계집아이 치마폭에서 휘둘리고 계시잖아!"
`큰 형님이라면 혹시 유비?'
화정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썹을 치켜올리는데 마초는
매끈하게 대꾸했다.
"현덕(玄德=유비劉備)공의 의제(義第) 장익덕 공이셨군요.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이만 가시죠, 익덕님."
건달 하나가 장비를 부축하기 위해 팔을 붙들었으나......
"이 놈이!"
장비는 팔을 휘둘러 건달을 그대로 던지고 말았다. 건달은
화정의 옆에 있는 식탁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식탁이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엎어졌다. 건달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냈다.
보기에도, 아팠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신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니 꽤나 맷집이
단련된 건달인 듯했다.
하기는, 장비같이 거친 성격의 소유자 곁에 있으려면 저 정도의
맷집은 되야 할 지도 모른다. 장비가 조금 거칠고 사나운
성정을 지니고 있음은,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면 다들 알
테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그 힘과 함께 두려움까지 더해지는
것이었다. 화정은 무서운 힘에 흠칫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마초는 화정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막아서면서 건달들을 향해
화가난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럼, 저희들이 먼저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금만
비켜주시죠."
건달 몇이 옆으로 비켜섰다. 마초는 화정에게 눈짓을 하고는
앞장섰다. 두 사람이 마악 문을 나간 순간......
"훈련이 다 뭐냐! 젠장, 이러다 돗자리나 나르고 부잣집
청지기나 될 팔자에 훈련?! 으하하하!"
질그릇이 깨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건달이 장비를
달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번더 뒤를 돌아보는 화정을
마초가 재촉했다. 화정은 셈을 서둘러 치르고 자신을 부르는
마초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훈련.......돗자리? 유비가 돗자리
장수였으니까.......아까 한 말로 미루어 보아 유비에게 불만이
있는 듯했는데.......어? 가만있자, 혹시 지금이........
그.......유비가 감부인한테 빠져 있을 때일까? 계집이
어쩌고저쩌고 했던......아하, 그렇구나!'
그제야 대략의 상황이 파악된 화정이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곁에서 마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화정?"
"?"
생각에 잠겨있던 화정은 흠칫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마초가
술집을 흘깃 보면서 자신의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언짢게 생각 말아. 늘상 있는 일이니까."
생각지도 못한 위로. 갑작스러운 일을 겪고 자신이 상심해
있을까 던져주는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화정은 마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좋은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는, 웃어주고 싶은데, 밝은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번 해 주고 싶은데 또 잔뜩 굳은 얼굴만이 된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밝은 표정을 좀더 익혀둘걸. 후회가 된다.
이렇게 마초와 함께 지내다 보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내게
잘 해주었던 사람. 다른 목적 없이 이렇게나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사람.
`마초.......'
화정은 가슴에 손을 얹고는, 말안장을 털고있는 마초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따뜻한 사람이다.
저렇게 좋은 사람, 그리고 저렇게 나를 스스럼없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오랫만이다.
*******
"구해왔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그렇게 급하게 구해달라니?"
"보자......음, 맞구나......"
마초가 구해온 남장 복장을 보면서 화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초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화정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왜 남장이 급하게 필요하다는 거지?"
"아, 그건......"
화정은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성질이 급한 곳이
있는 마초가 알면 초를 칠 것 같았다.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바깥 구경 할 때 편안하게 하려고......그런데 맹기,
이렇게 돈을 많이 써도 괜찮아? 방까지 따로 잡아주고......"
그랬다. 마초는 일부러 자신을 위해서 방을 두개나 잡았다.
마초는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야. 어차피 나는 밖에서 마구간같은 곳을 찾아
자던 몸이지만 너는 조금 더 편하게 자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너 혼자 여관에 두면 조금 불안하잖아."
`맹기는......참 오빠같아......'
화정은 그 말을 목구멍까지 올렸다가 그냥 삼켰다. 너무
고마웠다. 사실 자신이 지금 딴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장비를 보고 온 화정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비를 찾아간다면 유비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유비를 찾는다면
제갈량이나 혹은 서서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추리가 그 동안에
떠올랐던 것이었다.
`그들은 당대의 재사라고 나오니까......아마 주술사일지도
몰라. 내가 저쪽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거야.'
분명 유비가 감부인에게 빠져서 장비가 낮과 같은 행동을
일삼는 현실이라는, 화정의 추측이 옳았다면 제갈량(諸葛亮)이나
서서(徐庶), 또는 방통(龐統) 등의 인물들이 아직 유비 밑에
오려면 멀었다. 하지만 유비의 행방을 따른다면 자연히 그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화정의 속마음을 모르는
마초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면 내일은 다른 곳도 좀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겠다. 진작 남장을 구해올 것을......"
"......그런데......부탁이 있어."
"?"
"지금......상황이 어떤 상황이야?"
마초는 화정의 질문에 어안이벙벙해졌는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화정은 조금 뜨끔한 것을 느꼈다. 하기는, 자신이 만약 이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었어도 정말 바보같은 질문임에는 틀림이 없으니까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마초가 - 마초는 생각보다 재빠른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어벙한 곳이 있다고 한다면 옳은
말일까? - 되물었다.
"상황이......어떤 상황이냐니?"
"저어......말하기가 조금 뭣해서 얘기 안 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나 여지껏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부분
기억 못해......기억 상실증에 걸렸거든......"
아, 쑥스럽다. 정말 말하기가 다 민망했다. 우물쭈물하면서
마초를 슬쩍 바라보았다. 혹시,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관아에 넘기거나 하면 난 어쩌지? 마초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짜증스럽게 화정을 향해 외치는 것이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지금에야 얘기해?!"
"......"
약간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뭐? 그럼 넌 역시 수상한
사람?!' 이라던가 `가자, 관아로.' 하는 등의 소리를 안하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초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이윽고 입을 무겁게 열었다.
"......정말 몰라? 아무것도?"
화정은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일그러지면서도 약간은
측은함을 담은 눈을 하고있는 마초는 속으로 화정이 가엾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람을 살피는 것을 어릴 적부터 그룹
총수의 딸로서 훈련받은 화정은, 표정을 보고 사람의 심리를 읽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한참 망설이던 마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 들어......내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일부는 기억이
날지도 모르니까......혹시 동탁(董卓)을 알고 있니?"
화정은 이 세계에 있었던 것처럼 당연하게 - 그녀는 자신이
생각해도 뻔뻔한 사람이었다. 얼굴가죽이 얼마나 두꺼운 걸까.
마초를 꼬셔서(어감이 이상하지만 사실상 꼬셨다는 표현이 말짱
틀린 것은 아니다. 물론, 거기에는 어리숙한 곳이 있어서 쉽게
사람을 믿고있는 마초의 성격도 한 몫을 했겠지만 말이다)
후원도 받고 이렇게 본래 이 세계의 사람인 것처럼 시치미를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장사꾼의 딸이라 그런 걸까 - 대꾸했다.
"동탁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어."
마초는 그녀의 시원한 반응에 기뻐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 설명의 반 이상은 끝난 거야. 한(漢)은
지금 쓰러져가고 있어. 선제(先帝)인 영제는 십상시에게
둘러싸여서 지내다가 병사하고 새로 즉위한 황제가 다스리고
있지. 그런데 금상(今上: 현재 왕위에 있는 임금)은 아직 젊거든.
동탁이 실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멋대로 휘두르고 있지. 그리고
그 동탁을 저지하기 위해서 각 제후들에게 조조(曹操)가 격문을
보내고 있어."
"아하......"
그제야 화정은 대략의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말하자면 지금이
바로 `18제후 격문'이 나가는 시기인 것이다. 워낙에 삼국지만
파고 살았던 화정인지라 이 정도만 들어도 훤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는 평원......이라는 거지......?"
마초는 고개만 끄덕였다.
"고마워, 이제 충분해."
마초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의심스런 표정은?
꼭 자신의 세계에서 그녀가 삼국지를 읽다 걸렸을 때 선생들이
짓던 표정같아서 화정은 입을 약간 삐죽하게 내밀었다.
"정말? 그 나머지는 다 알고 있는거야?"
"조금은."
화정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일부러 침상에 앉았다.
"너무 피곤해. 일찍 자고 싶어."
마초는 그런 화정을 보면서 웃어보이면서 자신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 피곤할 때는 자는 것이 최고지. 아무튼 푹 쉬고 내일 보자."
화정은 문을 닫고 나가는 마초의 뒷모습을 향해 `맹기, 미안해.'
라고 되뇌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보석관을
벗고, 애교머리를 살짝 묶은 연꽃을 풀었다. 일종의 밤외출에 몰래
돌입하기 위해 마초가 가져다 준 남장 복장을 집어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