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남자와 여자 (9/24)

3-1 남자와 여자 

"내가 얼마나 바보가 된 줄은 너도 알고 있지? 놀라다 못해 

황당했어! 결국 마음에도 없는 유비군에 가담까지 하게 

되었......" 

"너더러 따라오라는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 

화를 내고 있는 마초로서는 맥이 빠지게, 화정은 차갑게 

대꾸했다. 

"화정!" 

"물론, 걱정해주는 것은 너무 고마워. 감사하지 않다고는 

못하겠지, 적어도......하지만, 왜 이렇게 해서까지 나를 따라 

온 거야? 나도 이제는 충분히 처신할 수 있어." 

딱딱해진 그녀의 태도에 마초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화정의 

맞은 편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음음,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한 마초는 계속해서 자신의 짐을 챙기는 화정을 보면서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도 네가 걱정이 돼......지금 네가 하는 일을 

보면 위험한 일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여자의 몸으로,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이 나이가 되기까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거야?"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 알길래?" 

화정의 말에 마초는 말문이 막혔다.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고, 이렇게까지 걱정해주는 마초가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하는 것이 죄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이상하다는 느낌도 차지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분명히, 관우님은 나를 의심하던 눈치였어.' 

기분이 나쁘지만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가 혼자, 그것도 남장을 하고서 나타나 

느닷없이 수하로 삼아달라고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시대는 여자의 활동을 

인정하는 시대도 아니었다. 또한 처음 보는 사람을 견제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해, 당연한 것이라고 화정은 깨닫고 있었다. 

자신을 의심하는 것같이 보이던 관우와, 약간이나마 거리를 

두던 유비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태도들은, 

약간의 이야기만 나누고는 음식과 의복, 여관비까지 모두 

내 주었던 마초.......조금의 의심도 없어보이던 마초의 

태도와는 확실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맹기는......어쩌면 내게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것이었는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불안해졌다. 마초는 정말로 

자신을 진심으로 도와주었던 것일까, 하는 의심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복잡한 화정의 심정을 모르는 마초는 갑자기 돌변한 

화정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화정은 고개를 들고 마초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꽂았다. 

"맹기." 

마초는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화정을 

보면서 긴장하는 듯했다. 

"......왜 그래?" 

"너에게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마초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처신에 

익숙하지 않았는지, 그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이득을 주기는커녕 네 경비도 낭비시키고 

힘들게만 하는 나를 이렇게까지 따라왔던 건데?" 

마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마초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뿐. 바깥을 지나는 

말발굽 소리와 장비가 준비를 재촉하는 고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한밤중에 갑작스런 난리를 피는 장비에게 

욕을 퍼부으면서 지나가는 병사들의 빈정거림도 섞여 

들어왔지만 두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 느낌이랄까. 심난함과 잠깐의 의심, 

그리고 유감이 그들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얼굴은 굳어져갔다. 화정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절대로 맹목적이 될 수 없어. 내게 바라는 

것이 있었던 거지? 안타까운 느낌이 전해져왔는지, 마초는 

구석에 세워둔 자신의 창만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화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잔뜩 굳어있는 마초를 바라보는 화정의 마음도 편할 

리가 없다. 잘 대해준 사람인데. 짧은 시간이나마 그의 진심과 

솔직함에 기뻤었는데. 그런데 이런 의심을 해 보아야 한다니, 

이럴 때마다 그녀 자신이 싫어졌다. 내게 철저히 심어진, 

타인에 대한 경계. 그리고 의심. 이런 감정들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사실은 눈물이 흐를 것 같이 슬프다는 

사실을,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위장이고 그녀에게 어떤 

쓸모가 있어서 잘 해주었을망정 마초의 행동들은 그녀로서는, 

최근의 삶에 있어 가장 즐겁고 즐거웠던 일이었음을, 이 사람은 

알고 있는 걸까? 

그 짧은 기간이나마, 그녀는 마초가 그녀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아주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생각해보면 

역시 의심스러웠던 일이다. 울음이 목에 맺혀올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진지한 목소리가 마초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지켜주고 싶어서......" 

"뭐......" 

뜻밖의 말에 할 말을 잃은 화정을 향해 마초가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더듬수를 놓는 것으로보아 마초로서는 

꽤 힘들게 하는 소리일 지도 모른다. 

"다른 뜻이 아니고......너를 보니까 내 여동생이 자꾸 

생각나서......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아니, 그, 

그게......너무 세상물정을 모르는 듯이 보여서 걱정이...... 

됐어. 물론 방금 전 유비님 일행을 대하는 것을 봐도 화정은 

어리숙한 사람이 절대 아니야. 하지만 나는......오히려 

그렇게 영리하고 처세술이 능한 네가......자꾸만 걱정이 

돼......내 여동생이 생각나서......그래서......" 

한 말을 하고 또 하고, 반복하면서 지겨운 더듬수를 놓는 

마초를 보면서 화정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정 반대로, 

마초가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대기업 따님으로써 

많은 협박을 당해왔고 아픈 기억도 다수 지니고 있는 

그녀로서는 다른 세계에 떨어져 정신이 없던 상황에 속아 

마초에게 잠시나마 호감을 가진 자신이 불안해져서 그랬던 

것이지만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마초의 태도에는 거짓이 

없었다.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맑았다. 너무 적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여타의 사람들처럼 눈치를 보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말들을 받아들여 주었으니까. 

마초는 아직도 붉은 기가 남은 얼굴을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것 뿐이야......넌 운록(雲綠)을 많이 닮았거든...... 

운록은 내 여동생인데......그 아이도 속사정이 많아서 

영악하고 처세술에 능해.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법이 

서툴러서 항상 말썽이 많거든......" 

마초의 목소리가 울 것만 같았다. 키도 크고 어깨도 

단단하다. 위로 올라간 눈매는 차갑고 날카롭게는 보인다. 

하지만......그런 사람이 마치 어린아이인 양, 그녀의 앞에서 

더듬거리고 있었다. 난 이런 뜻으로 마초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냐,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화정은 미안한 심정에 

사과하려 했다. 미안해, 그러나 마초가 더 빨랐다. 

"......귀찮고 불편했다면 미안해. 그 아이와 네가 왠지 

닮은 것 같아서......그래서 더......." 

"야아, 역시 여기 있었구만!" 

시원한 목소리에 무안해진 마초와 화정은 `윽' 하면서 얼른 

옆을 돌아보았다. 장비의 거대한 체구가 문을 비집고 - 화정이 

보기에는 그런 표현이 어울렸다 - 들어오고 있었다. 장비는 

화정과 마초를 돌아보다가 마초의 붉은 얼굴을 보면서 짖궂게 

떠들었다. 

"어, 이런. 무슨 고백이라도 했나? 왜 얼굴이 그 모양이야? 

그보다 화정 낭자,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왔......" 

"말씀 놓으십시오. 저는 익덕공보다 훨씬 아래니까요." 

화정이 침착하게 대꾸하자 장비는 머리를 벅벅 긁어대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이 인사는 거대한 체구에 안 어울리게 

아담하고 순박한 면이 있다. 

"안그래도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지, 뭐야......아무튼 큰 

형님 말씀이, 백규님께서 내일 당도하신다고 전갈을 

보내왔다더군. 그러니까 자네들도 채비를 하라는 거야." 

화정은 고개를 숙였다. 

"잘 알았으니 심려 마시라고 현덕님께 전해주십시오." 

"응, 그래. 역시 미인은 태도도 곱다니까, 망나니같은 

자식이 호위병으로 붙어 있는 것만 빼면. 하긴 안목이야 

키우면 되니까 상심 말라고, 화정......" 

장비의 말에 장비 못지 않게 성질이 급한 마초가 대번에 

발끈하면서 자신의 창을 붙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익덕공!" 

"어이쿠, 화가 난 모양이군.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수, 

낭자. 편히 쉬시우." 

약을 올리고는 발소리도 신나게 쿵쿵거리면서 나가는 

장비는 능청스럽게까지 보였다. 제비처럼.......은 너무 

아담한 표현이고, 표범처럼 빠르게 빠져나간 익살대왕 

장비를 향해 마초가 아직도 씩씩거리는데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 가봐. 오해해서 미안해. 사실 네가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조금 이상했을 뿐이야. 낯선데다 그런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도 다 보았던 네가, 나를 아무런 

의심이나 경계없이 너무 잘 대해주니까 뭔가 속셈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느꼈거든......" 

마초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식 웃어보였다. 

"그럼 오해는 풀린거야?" 

"대충......아마도 그럴 거야." 

"으음, 그럼 됐지, 뭐. 된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화정을 보면서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참으로 순수한 사람이다. 삼국지의 마초가 이런 사람이었나? 

모르겠다. 마초에 대해서는 어떤 성격일 거라고 판단을 해 

본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에 금세 

마음을 푸는 마초는 정말로 스스럼이 없어서.......어쩌면 

뛰어난 무예보다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안 사는 이런 

성격으로 혼란한 세상을 뚫고 가는지도 모르지....... 

그녀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나도, 사람들이 편하고 밉지않게 여겨주었으면 좋겠는데. 

학교에서도 늘상, 친구들은 그녀를 멀게 대했다. 

하지만......그녀는 `도시락 좀 같이 먹자.' 라던가 `같이 

갈래?' 같은 간단한 말을 못해서, 그래서 친구들과의 사이를 

수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래서 나는 그렇게 

책에 집착했을까........? 

지금도 그렇다. 마초에게, 좀더 따뜻하게 `지난 일인데 뭘 

그래. 내가 미안하니까 화 풀어. 응?' 따위의 간단한 말을 

못해서 그의 감정만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스스로가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마초는 그녀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자신의 창을 도로 손에 쥐었다. 

아무리 성격이 좋은 마초도 적잖이 타격을 입은 듯하다. 창대를 

들고 그대로 나가려던 마초와, 말해야 하는데, 하고 망설이던 

화정의 사이로, 바깥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마초는 

다시 화정을 돌아보았다. 서먹하게 말했다. 

"......송별 기념으로 마시고 있나본데, 안 갈래?" 

"마초는 가는 것이 좋을 거야. 난 그냥......쉴래." 

아, 이런 말이 아닌데. 아까 생각한 말을 해야 하는데. 후회가 

되었지만 화정은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화정은 사실 정신적으로 꽤 

지쳐있었다. 마초는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그냥 

거스르기가 싫었던 것인지 몰라도 손만 흔들어 보이고는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나서 조금의 시간이 지났을 때, 

화정은 창을 통해 마초가 긴 창을 들고서 병사들과 유비, 관우, 

장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달빛을 

받은 사람들의 투구가 빛나고 있었다. 왜 저렇게 달빛이 하얗게 

보이는 걸까. 달빛을 받은 마초는 웃고 있지만 아직도 표정이 

쓸쓸하다. 

정말로 이렇게 행동하고 싶지 않은데. 항상 그렇다. 그녀는 

사실 여린 사람인데, 사람들은 그녀를 경계한다. 조금 차가운 

곳이 있는 외모 때문일까?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외모를, 그녀는 그다지 좋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또한 신중하고 조용하다는 그녀의 성격을, 그녀는 싫어했다. 

너무 신중해서 할 말도 다 못하는 것이냔 말이다. 분명, 

그녀의 성격은, 신중하다기보다 상당히 소심한 거라고 늘상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어도, 쉽게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해도 짜증나는 성격이다. 

마초의 말이 생각났다. 여동생과 닮았다...... 

"......네 여동생이 너한테 대체 어떤 의미이길래? 어떤 

의미이길래 조금만 닮은 행동을 하는 나를 그렇게까지 

지켜주고 싶어한다는 거야?.......적어도 나처럼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이런 느낌을 가져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일부러 장비를 

피해 관우와 유비의 곁에 앉아 즐겁게 떠들고 있는 마초를 

바라보는 화정의 가슴이 조금 설레어왔다. 아니야.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마초는.......나를 다르게 보아줄 

지도 몰라. 그는......적어도 이때까지의 나를 차가운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니까. 

이런 내게, 따뜻한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기대감이 가슴에 차 올랐다. 화정은 그런 자신의 가슴을 

한숨으로 달랜 후에 턱을 괴고 계속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의문을 품어보았다. 아니, 저절로 의문이 생겼다는 것이 

옳은 소리일 것이다......내가, 너의 여동생이라는 그 사람을 

안 닮았다고 해도 너는 나에게 그렇게 잘 해주었을까? 

*******

"현덕공, 간만이오." 

"자주 찾아뵙고 인사 올리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무슨 말인가! 부디 아우는 고개를 들게." 

유비와 양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람. 

화려한 말과 많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초라한 

유비와는 대조적이었다. 중년이 조금 지난 얼굴에 검게 탄 

피부와 각진 얼굴을 지닌 그는, 가늘게 늘어진 턱수염을 

흔들며 유비에게 자세를 편안히 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하는 태도가 실로 거만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하얀 두건을 쓰고 남장을 한 채 그를 살피던 화정은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저 사람이......공손찬인가? 삼국지에서는 유비를 굉장히 

친하게 대한다고 나왔는데 지금 보니 조금 건방진 

느낌인걸......?' 

오랫동안 아버지의 일을 거들면서 - 겨우 17살짜리가 

대기업 아버지를 왜 거들고 있느냐, 하는 질문도 나올 수 

있겠지만......화정의 아버지는 곁에서 자신이 일하는 

소리라도 들으면 익숙해진다는 것을 신조로 삼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늘상 자신이 일하는 곁에 화정을 세워두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 사람들을 지겹게 보아온 화정은 여러 

가지 유형별로 그들을 구분할 줄 알고있었다. 

이 공손찬이란 작자는 본성은 오만하지 않다. 하지만 권력에 

의해 생성된 환경을 얻어내면 그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고, 

자아도취에 취해 오만에 천천히 젖어드는 유형이었다. 그녀가 

열심히 읽어둔 삼국지에도 공손찬이 그렇게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직접 본 공손찬은 화정으로 하여금 더더욱 그런 

생각이 굳어지게 하고있었다. 

게다가 연신 굽신대는 유비의 모습은 먼발치에서 보기에도 

부아가 치밀게 했다. 정말,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느낌이구나. 

소설에서는 늘상 이 부분을 공손찬의 유비에 대한 후덕한 정과 

친우로서의 관계로 강조하고 있었지만 - 아마도 공손찬에 대해 

평가가 오만과 어리석음으로 변하는 것은 후반이었을 

것이다 - 벌써부터 그런 걸, 뭐. 현실로 돌아가면 삼국지를 

꼭 새로 써서 `나름대로의 삼국지' 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는 화정이었다. 

여하튼 그리 생각하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는 화정의 옆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이 쓰인 나머지 고개를 돌린 

화정과 관우는 또 시비가 붙은 장비와 마초를 발견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너같이 시퍼런 놈이 뭘 알아! 백규공(公)은 그런 사람이 

아냐!" 

"하지만 저 태도는 마음에 안......!" 

"맹기!" 

공손찬의 시선이 날아오는 것을 알아챈 화정이 급히 

마초를 불렀다. 마초는 화정의 목소리까지 들려오자, 

그녀에게도 불만을 토로하려던 눈치였으나 공손찬까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마, 마초도 

화정과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성질이 급하고 

앞뒤를 잘 안가리는 단점도 있지만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을 쉽게 싫어하지 못하는 마초로서는 유비가 연신 굽신대고 

있는 것이 답답했던 것 같다. 

마초가 입을 다물자 자신의 승리로 멋대로 판정지은 장비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관우는 역시 상황파악에 

둔한 장비를 눈으로 살짝 흘기며 한숨을 내쉬었고 화정과 

마초는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화정은 되뇌였다. 

이것이 혹시 약자의 서러움인가? 한번도 약자의 입장이 

되어본 적 없던 그녀로서는 너무나 낮선 느낌이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아버지는 필요할 때는 

고개를 숙이라고 가르쳐왔다. 당시의 화정은 이해해지 못했다. 

왜? 모든 사람들이 다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던데 왜 

내가 빌어야하지? 나이가 들어서, 그 사실에 대해 머리로 

`이해' 를 했으면서도 뚜렷하게 `느껴보지는' 못했던 그녀는, 

이 앞의 상황에 대하고야 `느껴볼 수' 있었다. 착찹한 심정의 

세 사람과, 사람을 너무 믿어 탈인 순진무구형 장비 - 거듭 

생각되지만,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바보같을 

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 마초와 닮았으면서도......그나마 

마초는 의심라도 해보고 있으니 조금 낫다 - 가 있는 곳으로, 

공손찬임에 분명한 중년남자가 또박또박 걸어왔다. 화정의 

곁에 서있던 마초를 향해 그는 손을 내밀었다. 

"곁에 서 계신 분은 운장(雲長)님과 익덕(翼德)공이신 것을 

아네만......자네는 처음보는 청년이군. 이름이 어찌 되나?" 

"제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서량태수 마등(馬騰)님의 

장자(長子) 마초라 합니다." 

유비가 반갑게 소개했고 공손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마초였단 말인가. 자네 아버지 수성공은 충직하고 

강인한 성품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 내 격문을 받고 

달려가는 길이니 당연히 자네의 부친도 오시겠군."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초가 그렇잖아도 눈꼬리가 올라간 눈을 더 치켜뜨면서 말은 

공손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화정은 마초의 살기등등한 눈을 

느끼고는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마초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단순하다. 감정이 적나라할 정도로 그대로 얼굴에 나타난다. 

하지만 공손찬은 그런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지, 그저 만족한 

표정을 지었을 분이었다. 공손찬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공(馬公)은 기쁘겠군. 이같이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 

자식을 잘 두는 만큼 큰복이 없다네." 

말은 온유하지만 어딘가 불쾌한 인상을 주는 투였다. 화정은 

그제야 공손찬이 마초의 살기등등하고 불만에 찬 눈빛을 

읽었음을 알아채고는 고민이 되었다. 그 화는 당연히 

유비에게 갈 것이다. 마초야 물론, 마등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으니 공손찬도 가능하면 건드리지 않겠지만. 

공손찬의 불쾌한 어조를 받은 마초는 이맛살이 찌푸러지는 

것을 애써 막으면서 양손을 마주잡아 정중하게 답례했다. 

"새겨듣겠습니다." 

"허허허, 별 이야기도 아니니 신경쓰지 말게......그런데......" 

마초의 태도를 모르는 척하며 태연히 고개를 돌리던 공손찬의 

눈이 화정에게 와서 멎었다. 화정은 순간적으로 뜨끔해졌다. 

역시 신분을 숨기고, 그것도 여자가 남자 노릇을 하자니 누가 

저렇게 관찰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면 찔리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녀는 고개를 슬쩍 들어 눈치를 살펴보았다. 공손찬의 

눈이 의심을 담고 빛나고 있었다. 윽, 하는 소리를 속으로 내면서 

화정은 얼른 고개를 정중하게 숙였다. 공손찬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곁에서 뒤따르는 유비를 돌아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서생이군! 내 일찍이 용모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봉선(呂奉先: 여포)도 보았으나 이리도 출중한 용모는 

처음보네! 수려하군, 나조차도 나눠갖고 싶을 만치나!" 

공손찬의 감탄을 들으면서 유비가 곁에서 맞장구를 쳤다. 

"저도 처음에는 워낙에 아리따운지라 여인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뻔뻔스럽게 변명을 하는 것을 

보면, 유비는 역시 약은 인물이었다. 다행히, 그것이 화정을 

위해 쓰이는 것이라 안도되지만.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화정에게, 공손찬이 악수를 권했다. 

"이름자가 어찌되며 어디 출신이던가?" 

화정은 방금 유비의 맞장구가 자신이 여인임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유비의 마음씀씀이라는 것을 이미 간파해내고 있었기에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여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수하로서 함께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화정은 반갑게 

공손찬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 악수를 하자니 근처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안 좋게 느낄 것이며, 그렇다고 악수를 거절하면 

공손찬의 기분을 망치게 될 것 같았다. 이런 때에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화정은 판단했다 - 답했다. 

"미천한 것이 어찌 감히 공의 수(手)를 받겠습니까. 유비 

현덕공과 같은 고향사람으로 이름은 유하(柳河)요, 자는 

화정(和貞)을 쓰니 편한대로 부르소서." 

곁에서 장비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적나라하게 `쯧쯧' 하는 소리를 내며 `어쩜 저리 낯짝이 두껍누' 

라고 조용히 빈정거리다가 관우의 눈총을 맞고 있었다. 능숙하게 

둘러대는 화정을 보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비단 

장비 뿐은 아니었다. 마초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이 어찌하리. 함께 시치미를 떼주어 그 `거짓' 에 

동참할 따름이었다. 가엾게도 혼자 속아넘어가고 있는 공손찬 - 

하지만 이렇게 대하자니 은근한 고소함도 있지 않은가 - 은 

화정에게 연이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군. 나이가 몇이오?" 

"올해로 열 일곱입니다." 

"열 일곱이라......" 

공손찬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야기가 더 

길어지면 어딘가 들킬 것이라 생각했는지 유비가 공손찬을 급히 

불렀다. 

"그런데 언제 출정하실 예정이온지?" 

"곧 출정할 거요. 그런데 아우는 아니 갈 것인가?" 

유비는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마음은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워낙에 병마(兵馬)가 하잘 

것 없는지라......" 

끝말을 흐리는 유비를 보면서 공손찬이 다그쳤다. 

"아우, 그게 웬 말인가! 자네같은 인재를 묻힌다는 것은 

한(漢)의 손실일세! 내 마땅히 자네를 제후들에게 설명하겠네! 

동행하세!" 

사실 유비는 날 듯이 기뻤다. 자신의 군사로는 독자적인 

세력이 되기 힘들었기에 공손찬의 객장(客將)노릇을 해서라도 

가야 할 입장이었다. 허나, 함부로 공손찬에게 부탁하여 

출정했다간 여타의 사람들에게 수하장수로 비칠 것이 틀림없었다. 

그 때문에 고민하던 유비로서는 지금의 이같은 말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공손찬이 제 입으로 참가해달라고 하고 있으니 어찌 

아니 좋은 기회리. 유비는 망설임과 황공함을 담은 얼굴을 

하면서 - 그 속마음을 능히 짐작하고 있는 화정은 이때 유비가 

지모(智謀)있는 인물임을 느끼고 있었다. 우유부단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평가를 내린거야? `은근간사' 가 옳겠다, 하고 그녀는 

곰씹었다 - 고개를 숙였다. 

"보잘 것 없는 힘,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바쳐야 

할 것입니다. 아우는 형님을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네." 

뒤에서 전망을 지켜보던 관우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관우는 

옆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앉아있는 장비를 돌아보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어찌 빈손으로 맞을 수가 있겠는가! 익덕은 가서 서리에게 

약간의 다과라도 봐 오도록 당부하시게." 

"내가 간식 당번이우?!" 

질그릇 깨지는 목소리로 빈정대던 장비는 관우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쳇'하는 콧방귀와 함께 사라졌다. 화정은 그런 

장비와 관우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초는 공손찬과 정답게 

이야기 중인 유비를 훑어보면서 중얼거렸다. 

"......공손찬......저 사람이 북방(北方)의 공손찬이었군. 

실망인데. 소문과 몹시 틀려서......" 

"어차피 몇 년 새에 끝날 영광인데 무슨 당대의 호걸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화정을 마초가 돌아보았다. 

"응......? 방금 전 뭐....." 

"별 말 아니니까 신경 쓰지마. 그보다도 마초는 이렇게 

현덕님과 동행해서 가게되면 수성님께 혼나는 것 아니야?" 

그녀의 억양에 평소와는 다른 따뜻함이 깃들었던 모양이다. 

마초는 화정을 장난스럽게 보면서 키득거렸다. 

"걱정해 주는거야, 화정? 그런 거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해도 될텐데." 

"정신차려." 

전혀 머뭇거리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받아치는 

화정에게서 눈을 떼고 하늘로 시선을 옮기는 마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조금전만해도 어줍잖은 농담으로 낄낄대더니 

금세 조용해지는 마초를 보면서 화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마초에게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손찬과 유비에게 다시 시선을 꽂으려는데, 한숨과 함께 

마초가 중얼거렸다. 

"너와 나......열 일곱이지......내년이면 정식 성인이고, 3년 

뒤면 완전 성인이 되는거고......음, 저기, 화정.....?" 

제법 심각한 어조와 마초답지않게 조심스러운 부름에 화정은 

시선을 옮겼다. 마초는 그런 화정을 오랫동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늘.......다른 사람들은 내 겉모습을 보면서 내가 오만하고 

차가운 줄 알고 있었다던데........문득 생각났다. 마초는, 처음 

보았을 때의 마초는 그녀를 첩자로 오인했던 순간을 제외하고는 

그저 그녀를 유화정으로 보아주었다. 분명히 그랬다. 옷을 

구해주고 음식점에 데려가고 여동생의 이야기를 해 주고, 

걱정이 된다면서 여기까지 동행해준 마초. 그녀를 차갑고 

거만하게 보았다면, 방금전 공손찬을 멸시했듯 그렇게 외면했을 

것이다. 가차없이 발걸음을 돌릴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초의 매섭지만 어딘가 

순한 곳이 있는 눈매를 마주 대했을 때, 화정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화정의 가을 하늘같이 맑고 차가운 눈동자를 계속해서 

보고있던 마초는 고개를 이내 돌렸다. 그제야 멍하니 마초를 

바라보던 자신이 스스로 거북스러워진 화정은 유비와 공손찬이 

앉은자리를 보면서 괜히 화를 냈다. 

"왜 그러는 거야,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 

이게 아닌데.......고맙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또 차가운 

음성이 튀어나왔지? 속으로 당황하는 화정에게 뜻밖의 질문이 

날아왔다. 

"저, 너......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응?" 

화정은 뻥한 표정이 되었다. 타인의 입장에서 관찰했을 때, 

그녀의 그것은 생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초는 그만 웃고 

말았다. 아마도 그녀의 무감각함에 그런 웃음을 보냈을 

것이었다. 화정이 멍한 얼굴로 질문했다. 

"왜 그래? 그게 나쁜 소리야?!" 

"......아냐, 화정의 태도가 재미있어서......그냥 화정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구......" 

일부러 이런 태도를 취했음을, 그는 알고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법에 능숙한 화정은, 위기의 순간 멍한 척 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멍한 느낌을 

주었으니 화제를 수그러뜨려야 하지 않을까? 화정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를 싸고 있는 흰 두건의 

매듭부분이 마초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런 것은 사적인 것이잖아. 나도 몰라." 

`있는 건가?' 

마초는 화제를 누르기 위해 노력하는, 어색해진 화정의 

태도에 의심을 품으며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굴을 비록 

돌리고 있지만 화정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마초도 알고 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는 두 사람 곁으로 관우가 다가왔다. 

관우는 다과가 차려진 상을 그들 쪽으로 끌면서 곁에 앉았다. 

술이며 예쁘게 생긴 과자, 그리고 향기로운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눈앞의 상을 노려보듯 보고있던 화정은 말없이 차를 조심스럽게 

들이켰고 마초도 과자를 집었다. 무안한 분위기 속에서 

홀짝홀짝하는 차 마시는 소리와 우걱우걱 신경질적으로 과자를 

씹어먹는 소리가 묘한 느낌을 주면서 흘러갔다. 어안이벙벙해진 

듯, 관우가 분위기를 바꾸어야겠다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유난히 친해 보이는군......성이 같은 마(馬)가 

아닌 것을 보면, 처음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오누이간은 

아닌 것 같더군. 그런가?" 

"운장(雲長)의 판단이 옳으십니다." 

마초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다소 퉁명스럽기까지한 그 

대답에도 관우는 허허거리면서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요란한 

문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들어와 관우의 근처에 앉은 장비가 

킥킥거리면서 끼어들었는데, 그 말은 화정과 마초를 또다시 

무안하게했다. 

"그렇다면 정인(情人)인가 보우. 형님은 뻔한 것을 가지고 

그러시우? 젊은 남녀가 함께 다니고 있다면 당연한 거 아니유?" 

"그, 그런게 아닙니다!" 

화정이 새하얀 얼굴에 복사꽃같은 붉음을 띄우면서 반박했다. 

워낙 뛰어난 미모 덕에 붉어진 얼굴이 도리어 화사해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장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아니던가?" 

"익덕, 그만하시게." 

관우가 장비를 만류했다. 남달리 이런 일에 관심이 지대한 

장비를 잘 아는 관우였다. 마초는 말없이 술만 들이켰고 화정 

역시 묵묵히 자신의 앞에 놓인 아름다운 찻잔을 쥐고만 있었다. 

어색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흘러가는데 먼 곳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유비와 공손찬이 일어났다. 일행 네 명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비가 그들을 손짓해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우가 맏이답게 유비와 공손찬의 곁에 가장 먼저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살펴가시지요, 공손찬님. 이제 출정 일만 잡으면 되는 것입니까?" 

공손찬은 관우의 공손한 태도에 미소까지 지으면서 관우의 

보기좋게 탄 검은 손을 꼭 붙들고 탄식했다. 

"자네를 다시 보게 되었군, 그래. 내 조금만 더 빨랐어도 

자네를 내 수중에 넣었으련만......운장은 분명 내 수하는 

아니지만, 한의 중흥을 위해 이번 출정에서 힘써주게," 

관우는 공손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를 표했다. 

만족스런 얼굴이 되어 멀어져가는 공손찬을, 관우와 장비, 

마초는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가 순서대로 

지나가고 있었다. 

`분명 유비님은 별다른 소득 없이 허탕만 치고 

돌아오시겠지......하지만 아직은 심각한 것은 아닐거야. 

어차피 유비님은 대기만성형인걸......그렇게 치면 너무 

늦은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 화정을 마초가 돌아보았다. 그녀를 

살피는 마초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정이 떠올라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장비가 낄낄거리다가 관우의 눈총을 맞고는 

입을 다물었다. 

*******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조용히 정자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운치를 느끼기에 적당한 밤이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고있던 마초는 바로 앞의 

작은 정자에 누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옷을 입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화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는지 마초의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접근하지 말라고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게 보였다. 

청초한 얼굴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다가가기가 

힘들었으니까.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혀있었다. 뭔가를 깊게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희뿌연 달빛 덕에 온 몸에 은빛의 가루를 받고있는 화정은 

유난히 희게 보였다. 달밤에 내려온 신녀(神女)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얗고 투명하며 빛나게까지 보여서.....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게 보였다. 늘 느끼는 사실이지만 화정은, 

그렇다. 저렇게 아름다운 자태와 가냘픈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당당하고 빠지는 점이 없게 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단단함 이면에는 가끔씩 안타까울 정도의 

절망이 느껴지는 때도 있다. 그래서 더욱 신비한 느낌을 주는 

걸지도 모른다. 항상 생각했다. 차갑지만 어찌보면 청초한 

난초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그녀의 이면에는 약한 

모습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이란 그렇다. 살아오면서 그 사람의 성품을 통해 그의 

외모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형을 

끊임없이, 꾸준히 지향한다면 이상형의 분위기를 갖추는 때도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따라서도 외모는 변한다. 학자는 

학자대로 어떤, 이지적인 느낌을, 그리고 기녀는 기녀대로 점점 

요염한 느낌을, 장수는 장수대로 그 우직함과 강인한 느낌을 

몸에 배어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화정은.......어떤 사람이었을까? 저렇게 당당하고 어여쁜 

모습이지만......가끔은 청초하게 보이는 이유는......그녀가 

혹시, 누군가에 의해 지배하는 입장이어서, 그래서 굳은 

분위기를 배웠지만 본래 그녀의 본성은 어딘가 부드러운 곳이 

있어서가 아닐까? 곁에서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물끄러미 화정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던 마초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밤바람이 차가운지 팔에 걸치고 있는 가사를 어깨로 올려 

몸을 감싸는 그녀는 쓸쓸하면서 우수에 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달. 그렇다. 분명히 그 환한 달을 올려다보며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민이 있는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무엇인가 

그리워하는 눈이었다. 자신이 있는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말을 

걸기 힘든 분위기였기에, 마초는 옆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섰을 따름이었다. 어떻게 저 분위기에 생각없이 

끼어들어 방해하겠는가. 잘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라면, 혹시 그런 것이라면 

난......생각의 끝을 흐리면서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는데...... 

"흐익......!" 

"사내가 그렇게 한숨만 쉬면서 훔쳐보면 쓰나! 가서 화끈하게 

밀어붙여야지!" 

갑자기 태산처럼 앞을 막아서서 히죽대는 장비의 우렁찬 

목소리에 마초는 저도 모르게 그만 기겁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바람에 앉아있던 화정도 깜짝 놀라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마초의 얼굴이 벌개졌다. 다시 

표정이 덤덤하게 돌아간 화정의 눈이 의아함을 담았다. 그러나 

미간에 주름이 또다시 살짝 잡힌 것을 마초는 놓치지 않았다. 

"......맹기......? 장비님......" 

"아, 하하하......화정, 나는 그저 지나가다가......너 

보고있던 것이 아니었......" 

당황한 나머지 스스로 실토해버린 마초를 보면서 장비는 

호랑이 수염을 쓰다듬고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화정은 입을 다물었다.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탓하고 있는 마초의 눈물나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봐, 마맹기! 아무리 자네가 미워도 조금 불쌍해서 

가르쳐주는 건데만......여자들은 적극적이고 화끈한 남아를 

좋아하게 되어있다구. 내일부터 출정이니, 이 후에 고백할 

기회는 없어지는 거야. 오늘로 끝이네. 훗핫핫......" 

거친 목소리로 킥킥대며 낮게 소근대는 장비의 말에 마초의 

얼굴이 귀밑까지 벌개졌다. 급해지고 감정이 가누기 힘들어지면 

곧잘 앞뒤를 재지 못하는 마초는 대번에 실언을 해 버리고 

말았으니...... 

"고, 고백이라뇨!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이십니까!" 

마초의 파격적인 외침에...... 

"아, 이런." 

장비가 탄식을 장난스럽게 내뱉았고 마초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화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고백?" 

"아, 아니야, 화정......! 유비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었는데...... 

말하기가 좀 어려워서......" 

진땀을 빼면서 열심히 말을 돌리는 마초를 보고도 화정은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고 있을 따름이다. 장비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여전히 실실거리고 있었다. 장비는 한참동안 

침묵만 흐르자 고개를 흔들면서 한마디만 던지고 떠났다. 

"쯧쯧, 그러게 사내들이란 소심하면 안된다니까." 

마초가 그 뒷모습을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았다. 화정은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태도로 다시 정자 위에 앉았다. 아까, 그 

고백이란 말의 뜻을 과연 모르는 걸까? 자신이 판단하기로, 

화정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이전에 유비에게 대처할 때도 

비교적 매끄럽지 않았던가. 마초는 화정이, 그와 장비의 

말다툼에 숨겨진 뜻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았다. 

그녀처럼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는 그저 얼버무리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테니까. 하지만......그 마음을 잘 

알면서도 그냥 얼버무리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뜻일까? 마초는 망설이다가 화정의 곁에 슬쩍 앉아보았다.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대로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속에 작은 희망이 부풀어올랐다. 여하튼 

화정은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겨있느라, 마초는 그런 화정을 

보면서 무안한 심정을 지니고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다시 무거운 분위기만 흘렀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유난히 큰 것처럼, 풀벌레의 우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주변은 적막했다. 

언제까지나 조용히 있을 수는 없다. 장비가 한 말이 옳기는 

했다. 것참, 그 사람, 미련하게 생겨서 의외의 분야에 밝단 

말이야.......그리 생각하면서 마음을 굳게 먹은 마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곁에 앉아있는 화정을 힐끗 바라보았다. 입이 

어렵게 열렸다. 

"......저, 화정......?" 

화정이 고개를 들었다. 마초는 또다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으음......화정은......나......랑 이렇게 곁에 앉아있는 

것이 안 이상해?" 

화정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돌았다. 그녀는 고개만 저어보였다. 

그녀의 부정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 마초는 벌개진 얼굴로 

곁의 나무기둥만 손톱으로 긁었다. 

"그......뭐랄까......정인도 아닌 사이에......이, 이렇게 

나란히 같이 앉아있는 것은 안된다고......내 여동생도 

배우는 것을 보았거든.......그런데......에, 엣헴!" 

어색한 기침소리를 들으며 화정은 그제서야 마초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아마도 옛 중국에서는 여자와 

남자간의 사이가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늘상 남녀짝을 지어 앉고 함께 놀러다니기도 하는 그녀의 

시대에서는 남녀를 같이 앉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혹시 마초는.......? 아까도 애써 모른 척을 하고 

넘어간 그녀였다. 마초와 장비의 옥신각신이 뭔지 정말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실수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있는 화정이 답이 

없자 마초가 하는 말만이 너른 정원을 헤메고 있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신경쓰지 않는 것을 보면 화정과 

내가......많이 친해지기는 한 모양이야, 하하하......." 

"그러게 말야." 

어색하게 웃는 마초의 속마음도 모르고 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친해졌다는 것은 사실 별로 나쁜 일은 아니잖아? 

사실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그녀와 마초의 사고방식 

사이에서 얼마나 큰 차이를 야기하는 소리였는지 잠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지내온 세계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친근감이었겠지만 여기서는 그야말로 다른, 정말로 마음이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던 것이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지?" 

얼굴이 더 새빨갛게 변하면서 기뻐하는 마초가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화정은 그제야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후회하고 말았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그래. 그런데......." 

"사실 무서웠어! 화정이 아니라고 말할 것 같아서......." 

더듬거리는 화정의 말을 자르며 자신의 양손을 덥석 붙드는 

것을 보면 오해가 생겨도 크게 생긴 모양이었다. 화정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떨결에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사실 별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색하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동으로 나온 

행동이었으나......아아, 그러나 이 역시 얼마나 크게 오해를 

증폭시킬 행동이었던가! 마초의 다음 행동은 그녀를 꼭 

끌어안는 것이었던 것이다. 

"!" 

"......맹세할게, 내가 스물이 넘고 기반이 조금 더 

생긴다면......너와 혼례를 치를 거라고 말이야." 

"매, 맹기......?" 

"아직......삼 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할게." 

아아, 하느님! 성당에는 자주 가지도 않던 천주교 신자로서, 

뻔뻔하게도 하느님이 찾아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매정한 

현실이었다. 속으로 한탄했다. 그러나 남에게 모질게 못하는 

그녀이기에 마초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겉모습과 행동과 

다르게 사실은 속마음은 매우 여린 화정이었다. 

본래 그녀는,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절대 야박하게 

대하지 못하는 천성의 사람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인간이란 동물이 알고보면, 모두 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사는 동물이라고 해명해야 하나.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다짜고짜로 화를 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만약 화정이, 성품이 좀더 강한 곳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내 마초를 밀치며 오해를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정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사실은 

너무나 착하고 유순하여 아버지가 늘 걱정을 했던 천성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마초를 밀치며 거부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자신도 역시 마초가 싫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마초가 

여동생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 자신이 했던 수많은 생각들. 

단지 자신과 여동생의 행동이 닮아서 친절하게 대해준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마초에게만은 배신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으로 미리 했었던 성급한 의심들.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마초에 대한 감정들을 암시하는 것들이 

될 것이었다. 분명 자신도 마음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애매하기 짝이 없지만 여하튼.......그녀 역시 마초를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도 맹기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으니까....... 

좋아하는 걸까.......?' 

그렇게 믿게 되었다. 실제로 화정 스스로 느끼기에도 

마초에게 마음이 기울어가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태어나서 자신에게 이렇게 잘 대해준 사람은 

어머니 이래로 처음이었다. 그만큼 마초라는 사람의 의미는 

깊었다. 마초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수많은 호의와 관심, 

그리고 걱정......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늘 그녀가 대기업 총수의 따님이어서, 그리고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이어서......그래서 자신에게 잘 해준 

사람들만을 겪고 지냈다. 

차가운 모습 때문에 다가오지도 않던 그녀의 주변인들과 

다른, 마초의 솔직한 모습이 좋았다. 그녀를 여느 사람 대하듯 

따뜻하게 대해주고, 이것저것 도와주면서도 싫은 기색 한번 

내비치지 않았던 마초가 싫을 리 없다. 오히려 자신은 유비를 

혼자서, 마초 몰래 찾아가는 그 순간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마초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초가 찾아오기를, 그래서 

마초와 함께 유비를 오래도록 따를 수 있게 되기를...... 

무의식적으로 빌었는지도 몰랐다. 

`아니아니, 무슨 생각을!' 

어느새 마초에게로 기울어가는 생각을 애써 부정하려고 했다. 

어쩌면 자신은 혹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될대로 되란 식으로 

이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들이 보기에는 

똑떨어지게 보이지만, 사실 일이란 것이 벌어지고 나면 

시끄러운 쪽으로 수습하기를 귀찮아하는 것 또한 그녀의 성품이다. 

그래서, 반 친구들과 다투었을 때도 화해는 생각도 않고 그들이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도록 내버려두었고, 선생들이 수업시간에 

책을 읽다 걸린 것을 보고 책을 빼앗아 갈 때, 그리고 교무실로 

데리고 가서 설교하고 `읽지 마라?' 할 때도 얌전히 긍정하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얼마든지 무감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그 이면에는, 타인과의 충돌이 싫어서......그것도 

타인과 충돌하면 그냥 울어버릴 것 같아서......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귀찮은 척, 안 부딪히려는 척, 그러는 그녀의 

내면이 깔렸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을까? 

문득, 이준혁이라는 남자아이가 생각났다. 그렇다. 지금 

마초의 고백은 그의 고백과 어딘가 틀리다. 어딘가, 핑크빛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가슴떨림과 아주 적지만 황홀한 느낌을 

맛보고 있는 지금은, 그때의 무덤덤하고 귀찮기만 하였던 고백과 

어딘가 틀리다. 그녀는 이전에 준혁이 자신에게 고백을 할 

때와는 다른, 진솔함을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었다. 마초의 눈이 

진심이라는 것을 보이며 빛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참 이상해......그렇게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보던 

준혁에게서는 절대 이런 진실함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겨우 이틀을 

함께 지냈던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진심이라는 것을 받으며 

또한 믿고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일 것이다. 또한 

남녀간의 감정이란 더 그럴 지도 모른다. 어느 한순간, 깨닫는다. 

그 전까지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사실은......이런 서두로 

시작되는 생각에 의해. 환한 달 아래에서, 화정은 마초에게만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눌러참았다. 

진심으로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참 좋은 

일 같았다. 자신이 살아온 열 여덟 해 동안에 이런 사람을 단 한 

사람, 자신의 친어머니밖에 느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때의......자신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나마 남아있는 그 

청년......그리고 마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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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외롭다 탄식하는 것은 참을성이 없음이다. 때가 오면 

믿을 사람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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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었던 문구였다. 이른바 만남의 기적이라고 했다. 

이전에는 그런 것을 절대로 믿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낯선 

세계(世界)에서의 생활 이틀, 어느새 화정도 그 기적을 믿고 

있었다. 당신과의 기적을 믿고 있어요, 하는 어절이 기억났다. 

아아, 그래. 어쩌면 이것이 바로 기적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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