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18제후(諸侯), 그리고 마운록(馬雲綠)
늘 글로만 읽어오던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보게된다면 감정이
어떤가. 더욱이, 소설의 영화화라던가 만화화, 도 아니고 정말,
정말 진실로 그런 장면이 실행되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며
곁에서 볼 수 있다는 것. 그야말로 소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환상'이라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책에서만 읽던 18제후(諸侯) 집결의 장면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18제후. 동탁의 타락하고 무례하며 반인륜적인
행동을 저지하기 위한 군주들의 모임. 이것으로 18제후란 말을
모두 정의할 수가 있는 것인가? 참으로 애매한 문제다.
각자, 득실을 나름대로 열심히 따져서 오면서도, 한실(漢室)에
대한 아주 약간의 미련을 지니고 모였으니, 그게 문제다.
철저히 이기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철저히 의리 지향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아닌가, 이때만 해도 다들 황제에 대한
충성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화정은
속으로 되씹었다.
아니지, 어차피 난 관람하는 입장인데 현실세계로 돌아가면
이런 생각들이 무슨 소용이야?! 넓게 펼쳐진 들판을 배경으로,
주변에서는 말발굽으로 인한 먼지가 뽀얗게 일고 있었다. 옅은
기침이 연신 나왔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무겁고 불편해 보이며,
미련하게 보이는 거창한 갑옷들을 입고 진짜 칼 - 현실 세계에서
저런 장검 따위를 지니고 다녔다가는 당장에 끌려갔을 거다.
마초가 지니고 다니는 장창은 너무 당황해 있는 상태에서 본
지라 별 생각이 안 들었지만, 아무튼 진검을 보니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 을 쥐거나, 또는 차고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
소란이 낯설고 이상하기만 했다.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내가
여기서 무엇하고 있는 것이람, 하는 식의 생각은 꼭 그녀만이 아니라
이런 상황의 사람들이면 한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복잡한 생각을 머리에 담고는, 남장을 하고 하얀
두건으로 긴 머리칼을 숨긴 채 마냥 신기한 눈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화정의 뒤에서는 장비와 마초가 티격태격 중이었다. 이상하게
그 두 사람은 만날 부딪히고 싸워도 끈질기게 붙어다녔다.
관우조차도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처음에는 말리다가 이제는
웃음으로 일관하고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가장 성격이 맞으니까
저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실 그렇다. 본래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들끼리는 자주 다투지 않는다. 비슷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늘 충돌이 잦게 일어난다.
화를 잘 내는 사람과 온화한 사람이 있으면, 전자가 화를
내더라도 후자가 참음으로써 상황이 무마되겠지만 두 사람 모두
화를 잘 내면 이내 싸우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익히 알고있는
그녀였기에, 절대로 `마초와 장비는 사이가 매우 좋지않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도리어 `두 사람은 정말 친한 사이다.'
하는 명제에 표를 던지고 싶었다.
어쨌든 화정은, 뒤에서 늘 그랬듯 말도 안 되는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두 장수를 내버려두고, 깃발들을 살펴보았다. 바람을 타고
거세게 휘날리는 깃발에는 수많은 한문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지만, 가장 굵고 가장 크게 쓴 글씨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원소(袁紹)......그리고 곁의 깃발에는
원술(袁術)이라고 써 있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던 화정은 순간적으로
중요한 생각을 떠올렸다. 글자......글자를 자신이 읽고 있었다!
분명히 저건, 한글이 아니라 한문, 한문이었다.
`그렇구나! 워낙에 경황이 없다보니 생각을 못 하고있었어!
나는 중국어는 눈꼽만큼도 몰랐는데, 그런 내가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알아듣고 글씨를 읽고 있어!'
그제서야 깨달았다. 사실 자신은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도 나지 않았다. 그저 말하던 대로 한국어로
말을 하면 상대방이 알아듣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화정은 그 이야기 역시 한국인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쯤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아주 간단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마치 통역관이 사이에 끼어들어
그대로 옮겨주는 것처럼.......그리고 그녀가 중국어에 매우
능통했던 것 같이......그런 상황이 된 것이랄까. 못 알아듣는
것보다야 백 배 낫겠지만, 정말 황당했다.
`이런 세계에 떨어진 이유도 모르는데......어떻게 이런,
완벽에 가까운 언어능력이 생긴 거지?'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이상해진
채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민에 빠져있는 화정이었다.
생각을 할 때는 걷는 것이 좋지만, 너무나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할 때면 도로 멈추어 서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한 원리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앞서가던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거의 일렬로 뒤따라오고
있던 장비와 마초가 그녀의 등에 몸을 박았다.
"어이쿠!"
"왜 그래?!"
마초가 나지막하게 소리를 냈고 장비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 화정의 귀에 그 목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었다. 장비가 뒷통수를 긁으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해 댔고
마초는 갑자기 심각해진 화정을 그제서야 눈치채고 그녀에게
무엇인가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마초는 아무래도 화정에 대해
늘상 넘어가야만 하는 팔자인가보다.
화정의 말재변에 슬쩍 넘겨지는가 하면 이런 저런 일이 갑작스레
발생하여 대화나 상황을 끊어놓고는 했으니까. 야속하게도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야-호! 맹기 오라버니!"
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왔다. 멍하니 서있던
화정조차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장비가 그렇잖아도
험악한 곳이 있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 장비는 얼굴을 찌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천하의 맹장'이 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다 - 고개를 갸우뚱했다. 곧 빠른 걸음으로 달음질쳐
일행의 근처에 나타난 아이는 화정과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이었다.
머리는 푸른색의 두건으로 싸매고 흰 바탕의 바지에 아주
엷은 하늘색의 천과, 두건과 꼭 같은 푸른색의 띠가 둘러쳐진
차림이었다. 언뜻 보면 보통 옷 같으나 조금만 뜯어보면 꽤
좋은 옷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옷에 은은하게 돌고있는
광택도 그러했고, 당시의 염색 기술로 저 정도의 색깔을 내려면
꽤나 비싸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얼굴은 자세히 못 보았지만
빠르게도 나타난 그 소년이 날랜 몸짓으로 세 사람에게
다가섰다.
"오라버니! 역시 오라버니가 오실 줄 알았어요!"
"......우, 운록......네가 어떻게 여기를? 아버지께서
데려오실 리가......"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히는 그와 대조적으로, 마초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표정이 너무 굳어서, 얼굴이
바위처럼 굳었다는 표현이 어떤 뜻인지 되씹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물론 없죠! 몰래 숨어서 왔어요."
몰래 왔다는 말을 시원하게도 꺼내는 소년을 보면서
마초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알만 굴리고 있던 장비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뭔가? 말하는 투로 봐서는 낭자 같은데......"
화정 역시 궁금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소녀일 것이라는 결론은 쉽사리 내릴 수가 있었다. 사내아이가
형에게 `오라버니' 라고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이후에 내가 널 찾아갈 것이니 가서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려라. 일단 왔으니 알려드려야 할 것 아니냐."
"하지만 오라버니......"
"어서! 냉큼 가지 못하겠느냐!"
호통을 치는 마초는 장남다웠다. 말 그대로 백퍼센트의
변화라 할까. 순진하게 보이는 면도 지니고 있었던 마초가,
갑작스럽게 호통을 치면서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은, 다른
사람으로 생각될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화정은 속으로 이
마초가 여태껏 자신과 함께 다니던 그 마초와 동일인물일까,
하고 의문을 품어보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지웠다.
사람이면 이면성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녀는
순간적으로 풀이 팍 죽어서 돌아서는 마초의 여동생을
얼떨결에 흘낏 곁눈질했다.
`응?!'
뒷통수를 얻어맞았다는 소리는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생긴
말이었나? 순간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마초의 여동생,
그러니까 운록(雲綠)은 정말 놀랄만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희뿌연 피부는 마초와 닮았다고 하지만, 쌍꺼풀이 없으면서도
크고 둥근 눈은 다분히 느낌이 서구적이기도 했고......
게다가 더 놀랄만한 점은 눈동자가 분명 푸른 바다색이었다!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짙으면서 시원한 푸른색의 눈동자!
이 때의 중국에는 서양인들이 드나들지도 않았을 뿐더러, 혼혈이
생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화정은 속으로 경악하면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떻게......? 여기는 옛 중국인데 어떻게 저런
푸른색의 눈동자가 있는 거지? 물론 검은 동자에 약간
푸른빛이 도는 정도야 있었겠지만 저건......!'
화정이 무슨 반응을 보이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운록은
자신이 지니고 온 긴 창대를 질질 끌면서 힘 빠진 모습으로
투덜대며 사라졌다. 풀이 완전히 죽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보고있던 장비는 마초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쑤셨다.
"이봐, 자네 여동생이면 소개 좀 시켜줘도 나쁠 일은 없잖은가!
그런데 안 닮았는 걸?"
마초가 안도의 - 화정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눈썰미 없는 장비는 언뜻 보아서, 운록의
눈동자를 못 살펴본 듯했다. 하기는, 장비가 그렇게 세세한
위인이었다면 유비나 관우의 골칫거리가 하나도 아니고, 두,
세 개는 너끈하게 줄어들었을 거라도 믿어도 된다.
"안 닮았다는 소리는 많이 듣습니다......하지만 저 얘는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버지께
더 크게 꾸중을 들을 테니까요."
"그런데 맹기......"
화정은 용기를 내어서 질문할 것을 결심했다. 예감이
좋지는 않지만 궁금한 걸 어쩌라고. 마초가 예상대로 불안한
눈빛을 하면서 화정을 돌아보았다. 화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항상 그녀에게 친절했던 마초니까 의외로 이유를 순순히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는 달리 아직도 긴장이 그녀의
얼굴에 피어나고 있었다.
"이런 말, 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저 아이, 네 여동생
운록 맞지? 그런데 말이야, 분명히 눈동자가 푸른......"
"잘못 본 거야!"
한마디로 딱 잘라 부정했으나 마초의 눈썹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거짓말의 명백한 증거다. 쳇, 그래도 내게
친절했던 사람이라고 믿었었는데 뻔뻔하게 거짓말을!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 결과, 화정의 눈꼬리도 덩달아 치켜올라갔다.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내가 분명히 봤......"
"아니라면 아니라고 좀 믿어!"
"궁금하니까 그런 것일 뿐이야."
"네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막무가내로 부인하는 마초였다. 하지만 그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라고
씌어있었다. 화정은 속으로 `거짓말을 하려면 좀 태나지 않게
잘 하지, 저게 무어람. 날 바보취급하나?! - 나름대로 늘
똑똑하다 믿고 자랐던 화정에게는 가장 용납이 안되는
부분이다 - '하면서 혀를 찼다. 내심 마초에게 실망도 하고
있었다.
뒤에서 `내가 보기에는 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만 긁고
있는 장비를 두고, 화정과 마초는 절대로 이어지지 않는,
그러나 긴 말다툼을 했다. 두 사람은 결국 그날 날이 저물
때까지 입씨름을 하다가, 질려서 도망가버린 장비의 신고로
달려온 유비와 관우가 말리는 바람에 겨우 떨어졌다.
그러나 화정은 확신하고 있었다. 잘못 본 게 절대로 아니다.
분명 푸른 바다색의 눈동자였다. 서양인들의 눈동자 같은 깊은
바다색의 눈동자. 비록 쌍꺼풀이 없다지만 서구적인 눈매의
생김새. 마등에게 서역 - 그 당시에는 서양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같은 나라와 함께 유럽도 서역으로 불렀을 터이니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출신의 부인이 있다는 소리는
더더욱 들어본 적이 없다.
뭐, 마등은 생각보다 삼국지에서도 비중이 적었던 인물이니
가족사항에 대해서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화정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자신과 반대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마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좋고 밝던 마초답지 않았다.
속으로 자신이 조금 너무했나 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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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물론 전쟁터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화정에게는 아직까지 거추장스럽고 이상하게
보이는 갑주들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저것을 다 어떻게 입었던
걸까. 또 저것을 입고 어떻게 행동을 하고 다니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샘솟았다.
천천히 그 갑주들을 이 사람, 저 사람의 것으로 나누어 눈으로
구경하던 화정은 갑주들이 모두 가지각색으로 다양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도부의 막사이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지위가
좀 있다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장수들이 요란하고
화려한 것을 걸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화려하고 요란하기까지
한 것도 있고 반면에, 좀 수수한 갑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수수한 갑주도 유비가 걸치고 있는 것보다
초라한 것은 없었다. 수수하다 뿐이지 번쩍번쩍 광이 나고있는
그 금속들은 질은 좋아 보였지만, 유비의 것은 긁힌 자국이
유달리 많고 이음새도 허름하여 유비는 흘러내린 부분을 연신
손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속으로 약간은 안타까워졌다.
정말로, 친분이 있고 비록 잠깐이라지만 소위 `주공'으로써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 보기에 부아가 치민다.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를 돌리던 그녀는 지나치게 화려한 갑주에 붉은 비단 망토를
어깨에 두른 장수를 발견했다. 시선을 고정시켜서, 마치
동물원의 우리 안을 보듯 그 장수를 보면서 - 이만하면 충분히
얼굴 표정에 멸시가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 혀를 찼다.
`분명 저건 원술......일 것 같아. 거만하고 허세 많기로
18제후 중 제일 유명하지.......아무래도 옷이란 것은 사람의
취향이 고려되는 것이니까......한낱 몇 년 위세부리다 끝날
위인은 저렇게 잘난 체를 하고 있고 진정 이름이 남을 사람은
저리도 초라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어. '
열심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는 화정의 뒤에서, 생각없는
표정으로 따라다니던 장비는 뒤에서 머리만 벅벅 소리내어 긁고
있었다. 화정은 머리를 하나로 묶어올리고 옅은 황금빛 바탕에
연두색의 띠가 둘러진 상의를 입고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물론 남장한 것 치고 지나치게 예쁘장한 그녀였으나 모두들
당연하게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여자가 남장을 하고 다니는 시대는 절대 아니다.
여자들이 나서는 시대도 아닐뿐더러 여자들이 남장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무협지에서나 보았지 기록 같은 곳에는
별반 없다.
그저, 곱게 생긴 남자겠거니, 하고 넘어갈 것이다. 사람이란
자신의 상식을 뛰어넘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하며 하려고
하지도 않는 속성이 있으니까. 여하튼 이런 연유로, 이 시대에
여자들이 남장을 안 했다는 것은 화정에게 고마운 일이었다.
현대시대처럼 여자나 남자나 다 바지입고 머리도 커트칠 수
있는 시대였다면, 다들 알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뻗친
그때, 중간에 있는 사람이 헛기침을 한번 했다.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순식간에 질서정연한 열(列)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와, 역시 군대로구나. 하지만 현대시대보다 더 놀라운데?'
화정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눈치껏, 공손찬의 뒤에 있는 유비와
관우, 장비의 곁에 가 섰다. 누런 황포로 이루어진 옷에 붉은
띠를 두르고 붉은 망토를 둘러매었으며 머리에는 작고 수수한
관을 쓴 중년사내가 - 유일하게 화정과 더불어 갑주를 걸치지
않고 있는 사내였다.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으며 길게 째진 눈에,
턱이 유난히 뾰족하고 마른 사내의 인상은, 조금 약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꽤
지적인 곳이 있게 생긴 모습이었다.
"제군(諸君)들, 환영하오. 한의 대의를 지키고자 이 먼
곳까지, 그것도 하잘 것 없는 이 사람의 격문을 받아들고
오시었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이 자리를
빌어서 군웅(群雄)들의 단결을 위해, 또한 친목을 위해 일단
말씀을 조금 나눌까 하오. 이 사람은 조조(曹操), 자(字)는
맹덕(孟德)이라 하오."
`조조라니! 정말 감격이다, 저런 사람을 다 보고!'
화정은 신기한 느낌을 지니면서 그를 살폈다. 그는 화정이
여지껏 삼국지를 읽고 생각해오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날카롭고 마른 얼굴에 돌출된 광대뼈는
흔히들 조조에 대해 이야기되듯이 예민하고 약은 곳이 있으며
카리스마가 강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뜯어보면 생각 외로,
너그럽다는 느낌도 풍겨내고 있었다. 호탕한 느낌도 깃들어
있었다.
얼굴이 조금 길면서 턱선이 둥그렇고, 눈매가 부드러운 곳이
있는 온유(溫柔)한 유비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자가 헛기침을 두어번 하면서 입을 열었다.
"한(漢)의 후장군(後將軍), 남양태수(南陽太守)
원술(袁術)이오."
화정이 짐작했던 대로 엄청나게 요란하기까지 한 갑주를
걸치고 있던 자였다. 역시나, 그럼 그렇지, 나도 점집이나
한번 차려볼까? 남모르게 혀를 차면서 화정은 얼굴을 찌푸렸다.
비만한 몸매에 볼품없는 얼굴로, 무엇을 그렇게 주렁주렁
달았는지, 온 몸에서 광채가 날 정도다. 볼살에 파묻혀 눈은
보이지도 않았고 코는 콧구멍이 넓었으며 벌렁거리고 있다.
아직 겪지 않아도 경솔하고 오만한 마음이 가득찬 자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삼국지 읽은 사람치고 원술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조조는 흔히들 삼국지로 알고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 나관중(羅貫中)이 사적인
원한으로 워낙에 좋아하지 않았기에, 너무 간사하게 쓴 것
아니냐는 비평도 있으며 나름대로 매니아라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유비보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원술에 관해서는
과연 그럴까?
하기는, 나관중이라는 그 작자, 원술에 대해서는 비교적 얘기가
적었으니 어쩌면 그 작가가 가장 정확히 사심없이 서술한 사람이
원술일지도 모른다. 말이든 글이든 적게 할수록 개인적 사견이
덜 들어가니까. 여하튼 원술은 생긴 것부터가 기분나쁘다고
결론지어버린 화정의 귀에 걸걸한 음성이 울렸다.
"기주자사(冀州刺史) 한복(韓馥)이오."
짧게 소개를 마친 그는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로
고개짓을 했다.
"예주(豫州)자사 공주(孔 )라 하오. 이같은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외다."
빠른 어조로 숨이 안 넘어갈까 걱정이 되는 소개였다. 그의
빠른 템포에 자극을 받았는지, 공주의 뒤로 이어지는 점점
제후들의 소개가 빨라졌다.
"연주( 州)자사 유대(劉岱)라 하오."
"하내(河內)태수 왕광(王匡)이오. 재주는 부족하나
대의(大義)를 위해 노력하겠소."
"진류(陳留)태수 장막(張邈)이오. 역적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은 더 이상 용납않소."
"동군(東郡)태수 교모(喬瑁)라 하오."
"산양(山陽)태수 유유(劉遺)요."
"제북상(濟北相) 포신(鮑信)이오. 미력하나마 기의(起義)를
위해 투신(投身)하겠소."
끝없이 이어지는 소개에 화정은 적잖이 피곤한 느낌을
받았다.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입을 닫고 고개를
돌림으로써 겨우 넘겼다. 조금 부끄럽고 미안한 이야기겠지만
지금 소개를 한 태수들 중 한복과 원술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매일 삼국지를 파고 살았던 화정조차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미안하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어찌 사라지는지, 살아남았는지도 모를 인물들이 아닌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다 세면 몇 명인지도 모를
노릇인데. 굵직하고 좀 큰 사건을 겪은 인물들이나 기억날까.
그나마 꽤 파고 산 화정이니 한복정도는 알아듣는 거다.
삼국지를 한번 읽고 던져버린 또래 여자아이들은, 다들
삼국지하면 유비, 조조, 손권, 관우, 장비, 제갈
공명 - 제갈량이라기보다 제갈 공명이라고 더 잘 아는 경향이
있다. 관우는 관운장이라던가 유비가 유현덕이는 사실은 잘
모르면서 - 정도만 알고 있다. 게다가 나관중씨의 출중한
글솜씨로 인해 유비 = 착한 편, 조조 = 나쁜 편이라는
유치한 공식을 철석같이 믿고들 있기도 하다.
여하튼, 이렇게 유명한 인물정도를 알 뿐 삼국지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꼭 삼국지 뿐 아니라 다른 여타의 소설들도 뭔가 굵직한
사건을 겪은 인물만 기억하는 법 아닌가? 이렇게 기억 용량에
한계가 있는 듯 보이는데도 인간들이 그 많은 문명과 과학을
이룩한 것을 보면 신기하게 생각되기는 했다.
그건 이런 간단한 암기나 기억보다도 훨씬 고차원적인 것을
요하는 것인데도 잘도 이루어냈다. 그 이상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잡념의 가지를 치려던 화정은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머리를 꽁 쥐어박았다. 이 세계에 와서 정말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본다.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가지각색의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모든
현상을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익숙하게 넘겼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갑자기 바뀌어서, 조바심과 긴장감, 경계심 같은 것이
증폭되어서 잡념이 많아졌나? 여하튼, 바로 앞에 서있는 많은,
잘 모르는 군웅들을 훑어보면서 화정은 속으로 `이런 것을
쭉정이와 알갱이의 차이라고 중국문학에서 일컫던가......'라고
남모르게 중얼거렸다.
주인공이나 중심되는 인물은 시시콜콜한 사건까지 열거하면서
조연이나 주변 인물은 이름만 간단히 알고 넘기게 된다. 그건
소설의 당연한 서술법이 아니던가. 그녀 스스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조연까지 세세하게 이것저것 다 쓰려고 보면 미쳐버릴 것이
틀림없다. 그 방대한 용량을 어찌 쓴단 말인가.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하나하나 세밀히 묘사하고, 가격을 거래하는
상점주인에 대해서도 일일이 적어야 하는 건가? 미친 짓이다.
그나마, 삼국지는 장기간, 광범위한 속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니
그나마 조연급만 되면 기억은 어느정도 남는다. 딱 한 두 번만
나왔다가 금방 죽는 사람들은 앞에 서있는 사람들처럼,
제후였다고 해도 금방 잊혀지는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조운(趙雲)이나 허저(許楮), 황충(黃忠)
같은 사람은 앞의 제후들에 비하면 훨씬 낮은 지위들이지만
조연이라는 이유로 그나마 삼국지 매니아들의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기까지 하다.
참, 그러고 보면 나관중처럼 의도적이게 쓰기도 힘들다. 그리고
더 대단한 것은, 나관중의 생각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비를
주인공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 정사라 여기는 진수(陳壽)*의
삼국지가 조조를 중심으로 다루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기는, 나관중, 그 작가야 자신의 조상이 조조에게 형을
당했으니 당연히 조조를 싫어하고 유비를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여서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대로 쓴 것이겠지만,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읽을 때에는 그의 의도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아니, 나관중이 그런 의도까지 가지고 쓰지는 않았을까?
머리가 아파지자 화정은 미간을 좀 찌푸리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에잇, 내가 나관중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마음을 그렇게
먹고 방관하기로 하자, 순식간에 잡생각이 사라졌다. 그제야 다른
일행의 반응이 궁금해진 화정이 옆으로 슬며시 눈을 돌려보니
장비는 창을 쥐고 선 채로 졸고 있었다. 그 커다란 머리가 역시
거대한 어깨 위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예상했던 대로다. 저 사람은 참, 스트레스 안 받아서
좋겠다. 화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관우는 역시 근엄한 얼굴로 유비의 곁을 지키고 서서 다른
제후들의 인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기 드문 성실파다. 반대로,
저 사람은 스트레스가 정말 많겠다, 뭐, 이런 따위의 생각도 다 든다.
늘 지치는 기색도 없으며 침착하다. 그런 점들을 고려해보면 역시
사람들이 떠받들 만한 인물이기는 한 것 같았다.
유비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입을 잠깐씩 움직이는 것을 보니,
조용히 그들의 이름을 읊어가면서 얼굴과 이름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하였다. 생각보다 유비는 노력파이다. 저렇게
노력하니 그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는가. 아무리 제갈
공명이 신통 방통 현명 총명이라고 하더라도 유비의 저같은
노력과 성실함, 수하의 말을 신봉할 줄 아는 모습이 아니었다면
소용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유비가 딱 몇 년만 더 살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는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얼른 고개를 들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어느새
오른쪽 줄의 소개가 끝나고 왼쪽 줄의 소개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조조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두 줄인 형태였다.
"북해(北海)에서 온 공융(孔融)이오. 자(字)는 문거(文擧)를 쓰오."
딱딱한 어조였다. 공융 정도는 그녀도 기억하고 있다. 물론 이 자
역시 금방 결말이 날 사람이나, 적어도 어느정도는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딱하며 고지식하다는 느낌이 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화정이 상상하던 것보다는 젊고 당당한 분위기를 풍겼다.
화정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계속해서 제후들을 살폈다 - 그녀로서는
이 낯선 세계에 적응하고 험난한 물결을 해쳐나가기 위해서 모든
정보와 인간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광릉(廣陵)태수 장초(張超)요."
"이 늙은이는 서주(徐州)태수 도겸(陶謙)이라 하외다. 자(字)는
공조(恭祖)를 사용하고 있소. 부족한 잔재주로 영용(英勇)하신
제후들의 열(列)에 끼어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소."
눈이 부시도록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역시 하얀 눈썹을
지닌 노인이었다. 호탕하다거나 카리스마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정말 온화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정말 옛날 만화에
나오는 도사의 외견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흰 두건에 하얀
옷, 지팡이를 주면 도사가 될까. 조금 우스운 생각도 들지만
온화하고 기품있는 노인이다. 곧 이어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서량(西 )태수 마등(馬騰)이오. 대의(大義)를 일으키고
역적놈을 처벌하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오."
시원한 목소리에 어울리게 강한 어조를 사용하는 마등은
검게 그을린 얼굴과 높고 오똑한 코를 지니고 있었다. 광대뼈가
약간 돌출되어 있으며 각진 얼굴윤곽은 호탕하고 강인한
북방(北方)사람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화정은
마등의 늠름한 풍채에 감탄하면서 마등의 뒤에 시립(侍立)해
있는 마초를 발견하고 남모르게 표정을 풀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아버지의 뒤에 서 있는 마초는 화정이
알고있는 마초와 다르게 보였다. 빈틈이 없는 듯, 완고하고
앞뒤가 꽉 막힌, 융통성 없는 사람의 이미지가 바로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 화정이 만들어놓았던 마초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장남으로써 여기에 와서는, 굳은 표정으로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좀 순진하고 어벙하게도 느껴진다.
자동적으로 이후의 마초와 마등부자(夫子)의 결말과 이후의
일을 생각해보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공손찬의
차례가 되었다.
"공손찬(公孫瓚), 북평(北平)의 태수요."
짧게 말을 끝낸 공손찬을 보면서 뒤에서 관우가 무안한
표정을 했다. 섭해하기는 유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나
유비는 말없이 고개를 돌리면서 한숨을 아주 옅게 내쉬었을
뿐이었다. 관우는 큰 형을 보면서 공손찬에게, 그로서는 드물게
원망스런 눈길을 날렸다. 자존심 강하고 저런 표정은 없는
듯하던 관우가 저렇게 처량한 느낌이 다 드는 것을 보면, 그는
정말로 자신의 큰 형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꾸벅꾸벅 졸던 장비는 때에 잘도 맞추어 깼다. 차라리 졸고
있었다면 마음이나 편할 텐데.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장비여도
제후들이 모두 보고 있는 앞에서 소개가 자신들에게 왔을 때까지
졸만한 뻔뻔함은 없는 모양이다. 여하튼 장비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고 사모를 꽉 쥐며 눈시울을 붉혔지만 관우가
장비의 굵직하고 단단한 팔을 붙들었다.
관우의 눈짓에 장비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이다. 그들 일행을 등지고 선 공손찬에게는
그런 얼굴들이 보일 리가 없었다. 화정 역시 조금은 화가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나섰다가는 도리어 유비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다.
그래, 아직은 유비가 약자다. 약자에게는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훗날, 강자가 되는
날에는.....이 일을 겪은 유비 역시도 이렇게 변할 지 모른다.
사람이란 처지와 상황에 따라 변하니까.
그녀는 화를 꾹 눌러참으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직히
말하면, 자신도 지금 입장의 차이에 따라 상당히 틀린 태도를
취하고 틀린 태도를 겪는 것이 사실이다. 대기업 총수의 딸에서
평민 -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평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모른다 - 으로 말이다.
"상당(上黨)의 장양(張楊)이라 하오.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손견(孫堅). 자(字)는 문대(文臺). 장사(長沙)의 태수로 있소."
손견이란 말에 분한 생각으로 볼을 부풀리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화정은 고개를 들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고
고개를 들면 오만한 공손찬이 보이기에 별로 들고 싶지도
않았지만, 손견이란 거물은 아무래도 궁금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먼 곳에 서 있는 손견은 눈매가 서글서글하며 넓직한 턱
때문에 얼굴이 크게 보이는 사내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덩치가 상당히 늠름했다. 전형적인 무장의 모습이랄까. 얼굴은 잘
탄 구릿빛이었으며 목소리 역시 쩌렁쩌렁 한 곳이 있었다.
화정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책으로만 읽던 삼국지
인물들의 실제 모습을 감상하게 된 자신의 행운 아닌 행운에
대해 묘하게 생각했다. 손견에 이어 곁의 사내가 나섰다.
"원소(袁紹). 자(字)는 본초(本初)라 부르시오. 발해(渤海)의
태수로 있소. 미약하나마 최선을 다해 역적을 토벌하겠소."
약간 덩치가 있고 작달만한 키에, 턱수염을 조금 길렀다.
누르스름한 얼굴에 두툼한 턱과 작은 눈을 지닌 그는 언뜻
보기에도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에 재주가 있어 보였다. 말하는
투도 상당히 매끈했다. 어조 역시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으면서 위압감을 주는 느낌으로 다져져 있다.
물론 원소가 명문가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본 원소는 정말로 귀하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인물이 좋건 아니건
간에 귀한 사람 같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이
사람도 불행한 사람이지. 집안 싸움이 정말 큰 일은 큰
일이라니까......잘하면 이 원소라는 사람은 조조를 제지하고
역사를 뒤바꾸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무리 자잘하고 사소한 일이어도 역사를
바꿀 계기가 된다. 수신제가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 平天下).
정말 옳은 말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녀가 언뜻 보기에 원소는
정말 통솔력이 있고 보통 인물 이상인 사람이기는 하였다.
나름대로의 저력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매서운 판단력이 때로 결여된 덕에 자식들 싸움
속에 가업(家業)을 말아먹게 되는데, 다 무슨 소용인가. 유비
역시도 아들 덕에 그렇게 되기는 하겠지만. 여하튼 조조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제 서로에 대해 알았으니 본격적인 문제를 지적할까 하오.
이의가 있으시오?"
"조맹덕(曺孟德)의 의견을 귀기울여 듣겠소."
모두가 입을 모아 찬성했다. 조조는 헛기침을 한번하고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시오, 이같이 든든한 동지들이 와 주었으니 대한(大漢)의
위상이 다시 바로 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오. 군량은 넘쳐나고
병사들의 열(列)은 3백 리를 족히 덮고 있소이다. 그러나
머릿수만 만족되어서는 아니되오. 아직 좌우 연결이 되지 않으며
상하 질서가 없으니 마땅히 수뇌(首腦)를 뽑아 정연케 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되오만."
"맹덕의 말씀이 백 번 옳소이다."
역시 군웅들은 만장일치로 입을 모았다. 참 아부도 잘하네,
화정은 팔짱을 끼고 침을 삼키면서 새침하게 돌아섰다. 표정에
다 씌어있다. 조조에 대한 각기각종의 불신들이 모두 보인다.
통솔을 조금만 잘못하면 트집이라도 잡을 것 같다. 다들 공손한
척 하고있지만 화정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혹시 조조도 알고
있을까. 화정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조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조조의 깡마르고 긴 얼굴은, 늘상 그렇듯 덤덤하여서
의외로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에 매우
익숙한 인물같다.
"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저기 계시는 원본초(袁本初)가 어떠할까
싶소. 본초는 4세5공(四世五公)의 귀한 가문으로, 오랫동안 따르는
자가 많고 한에 충성을 다하여 온 재상의 후예이니, 우리의
수장(首長)으로 부족하지 않을 것이오."
조조의 말에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으로 서 있던 원소가 -
화정의 생각으로는 참 얄밉게도 -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거절하는 척 하는 것이 틀림없다. 원소의 자신만만한 표정은
분명 `나 이외에 누가 있겠는가?'하는 그것이었다. 저절로
콧방귀가 나오려했다.
"저는 아둔하여 그만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원소의 겸손에 주변의 제후들이 직접 권유하였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권유지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저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이......' 라던가 `내가 하는 것이 나을
텐데.' 하는 식의 아쉬움 또는 불만 같은 것이 남아있기는 하다.
그 한심하면서도 어떻게 생각하면 삼류영화같은 장면에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다들 동상이몽이 심하니 이 동맹은
처음부터 분열의 여지가 많았던 것이다. 서로 출진해 온 지방이
다르다거나 약간의 풍습차이도 문제겠지만, 그런 것보다
지도측이 저리 결합을 않는데 동맹이 얼마나 길게 가겠는가.
그렇게 속으로 나름대로 평가를 내리면서 옆을 돌아보았다.
유비는 아까의 서운한 표정을 이내 감추고 제후들의 다투는
양을 - 분명 권유하고 있겠지만 화정의 눈에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 같이만 보인다. 화정은 자신 스스로에게, 자신이 지나치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까지 해 보았다 -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감히 저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못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유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있던 장비는 아직도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있다. 철없이 보이고 앞뒤 계산이 없어도,
그리고 천방지축이어도 순진한 장비로서는 정말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아니나다를까, 불만에 찬 장비가 `내숭떨고
있네, 쳇!'하고 중얼거리다가 관우의 엄한 눈총을 받고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관우 역시도 표정이 경직되어 있다.
이곳에 와서 줄곧 저 삼형제가 가엾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런 구절이 갑작스럽게 왜 생각이
나는건지......다시 상황을 지켜보던 화정은 주변의 제후들이
거듭 권유하자 마지못해 허락하고 있는 원소를 보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살피기로는, 각자의 목적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원소나 조조, 모두 사(私)와 야심(野心)을
잊고 대의(大義) 세우기라는 큰 목적에 몰두해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것저것 크고작은 어긋남이 있고 두 사람의 사이도 매끈하지는
못하겠지만, 여하튼 황실의 위기나 동탁의 횡포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이 이후에는 어찌 그렇게 변하는 걸까......'
머릿속으로 작은 한탄이 지나갔다. 이번 동맹이 깨지고 나면
남는 자와 사라지는 자는 명백히 갈라진다. 단지, 그녀의 현재
주군이라 할 수 있는 유비만은 흔적도 없이 돌아가지만 이후에
대기만성하는 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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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진수(陳壽): 자字 승조承祚. 쓰촨성 바시巴西 출생. 진씨는
바시의 호족으로서, 그의 아버지와 그는 촉한蜀漢에서 벼슬하였다.
진晉나라의 학자 장화張華가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의 관직에까지 올랐다*두산세계대백과
"!"
이상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누군가 서 있었다.
희뿌연 달빛을 받고 있는 그는 푸른 띠가 둘러진 옷을 입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옷이다. 가녀린 체구가 남자라 보기는
힘들다. 눈을 살짝 찌푸린 화정은 그, 아니 그녀가 양갈래로
머리를 높게 묶어서, 늘어뜨린 머리를 중간쯤에 한번 더 묶은,
소녀임을 알아보았다.
화정의 시대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삐삐머리라고 할까?
삐삐머리는 그냥 늘어뜨렸지만 그녀의 머리는 중간에 한번씩을
더 묶은, 양갈래였다. 아무튼 기본적으로는 삐삐머리다.
머리카락의 색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옅은 색깔
같기도 했지만 화정은 그것이 그저 달빛 때문이려니 했다.
그녀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자 그녀의 모습을 좀더 잘 보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화정이 있는 곳은 그늘이 져 있어서
달빛이 비추고 있는 그곳보다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좀더 다가와서야 그녀의 모습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
화정은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 정말 시원한 느낌이 들 정도로 푸른 눈동자이다.
눈동자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다. 낮에 보았던 어떤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까 본 마초의 여동생이다. 분명 운록이라
불렀다. 운록은 화정이 놀라는 모습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물론, 화정이 놀랐다고는 해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저
눈이 약간 동그랗게 떠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정도였겠지만,
운록은 그것을 충분히 느낌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 운록은
거무스름해서 잘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을 낮에 썼던 두건을
뒤집어써서 가리며 화정을 향해 시선을 꽃았다. 단단한 바위가
널려있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운록은 팔짱을 꼈다.
"그렇군요.....여기는 장소가 좋지 않죠. 어둡기도 하고."
다소 건방진 곳이 있는 말투였다. 그러나 화정은 화내는 기색
없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 막사로 갑시다.....가까운 곳이 좋지 않겠어요?"
"그러죠, 그럼 가죠."
누가 앞장서라는 말도 없었지만 무언지 모를 무언의 동의
끝에 화정이 약간 앞서서 걸어갔다. 뭐, 화정 자신의 막사이니
뻔한 이야기였을 지도 모른다. 당연한 얘기지만 두 사람 모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까도 얼굴만 잠시 보고 넘어갔을
뿐 마초가 서로를 소개해 준 것도 아니다. 지금 처음 보는
것이라 해도 무관할 정도이고, 게다가 혼자 있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나 다짜고짜 다른 곳으로 가자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운록이, 화정의 입장에서는 명백하게 불청객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화정이야 운록의 눈동자 색깔 덕에 놀란데다 마초에게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운록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지만, 운록이 화정을 과연 알고는 있는 것일까.
마초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리 없다고 짐작하고 있는
화정으로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분명 화정에 대해 뭔가
듣거나 알았으니 찾아왔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알게
된 걸까.
두 사람이 아무 말도 않는 통에 풀벌레 우는 소리가
평상시보다도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곁에서 걸어가는 운록을
약간 곁눈질해 보았다. 화정보다 조금 작기는 했지만 그
시대의 여자치고는 꽤 큰 키다. 늘씬하고 큰 키가 마초와
닮았다. 하기는 남매이니 닮은 점은 당연히 있다.
언뜻 보았을 때, 하얀 피부와 얼굴의 윤곽 같은 것은 마초와
꽤 닮았었다고 기억을 되새겨보고 있었다. 번잡하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막사에 다다랐다. 혼자 쓰는
막사였다. 본래는 태수도 아닌, 공손찬의 객장(客將)에 불과한
유비의, 그것도 수하이기에, 유비들과 함께 같은 막사를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화정이 남장을 하고 다녔기에 다른 이들은
단순히 유비의 아래에 있는 소년으로 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유비들과 한 막사 안에서 지내야 할 뻔했다.
그러나 여성인 그녀가 유비나 관우, 장비와는 같은 막사를
쓸 수 없었기에, 유비는 공손찬에게 화정이 막사를 혼자
써야만 한다는 이유를 그럴 듯하게 둘러대어 홀로 쓸 수 있는
막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숙소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지만 일행과
조금 서먹한 곳이 있는지라 말도 못하고 있던 화정은, 정작
유비 자신은 막사를 홀로 쓰지도 않으면서 그녀를 위해 배려해
준 그 마음씨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일행에게 미안했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이곳입니다."
화정은 조용하게 말하면서 막사의 장막을 걷었다. 안에는
촛불을 환하게 밝혀놓았다. 운록은 불만이 담긴 푸른 눈동자를
굴리면서 내부를 살피다가 화정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유비의
수하에 불과한 화정이 홀로 막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화정은 자신의 기구한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모른 척하고 태연하게 의자 위에 앉으면서,
운록에게 맞은 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다소 건조한 어조가 나왔다. 여하튼 막사를 둘러보고 서있던
운록은 화정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화정을 다소 표정이
없는 얼굴로 바라보던 운록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
조금 당황스러웠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서 금방 생긋거리는
얼굴로 전환하는 운록의 태도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딘가 모르게 묘한 느낌이 들어있다. 비꼬는 느낌일까?
문득 운록이 화정의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유난히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군요?"
운록의 말에 뜻밖의 느낌을 받은 화정이 얼굴을 들었다.
"네?"
"눈도......다른 사람들과 틀려요. 크고......그래, 눈 위에
선이 하나 더 있어......"
`쌍꺼풀을 말하는 건가......?'
화정은 약간 의아해하면서 운록에게 질문을 하려고 했다. 순간
운록이 두건을 거칠게 잡아당겨서 벗었다.
"......?!"
할 말을 잃었다. 올려서 양갈래로 묶은 긴 생머리칼은.....
금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서양인들에게 있던, 금발보다는 훨씬
진하지만 금색이 나는 금갈색이었던 것이었다. 그냥 갈색이라면
가끔 있을 법 하지만 금갈색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푸른 눈동자도 의아했는데 말이다. 화정이 놀랐다기보다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운록을 바라보자 운록은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봉을 옆에 세워놓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스스럼없고 조심성도 적은 그 행동은 세력가의 딸 같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신경쓸 때가 아니다.
"놀라는 것을 보니 오라버니께 내 눈색깔이나 머리카락의
색깔이 이상하다고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역시."
"......"
`이상하다니, 저건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칼라렌즈와 염색이
유행할 정도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패션의 일종인데. 참나,
현대시대 가면 돈은 절로 건졌네. 나도 대학가면 꼭
염색해보려고 했는데.'
그런 말을 삼키면서 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록은
자신의 봉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겠죠......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도
말해주기엔 내가 부끄러웠을 거야."
좋아하는 사람, 이라는 다소 불순한 단어가 섞여있었음에도
불구, 화정은 그 단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는 뒷말에
대해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상하다니요. 저는 그런 눈 색깔과 머리색을 많이 보......"
순간 운록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실수를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화정의
시대에서 유행이었다고 해도 여기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고와
문화방식의 차이가 빚어내는 실수와 충돌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화정은 운록이 제발 그녀의 말을
흘려 들었기를 빌었지만, 운록은 이미 그녀의 말을 확실하게 인식한
모양이다. 운록은 의자를 밀치고 벌떡 일어서더니 화정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거칠게 붙들었다. 운록의 미간에는 짜증과 의심,
그런 것들이 잔뜩 깃들어있었다.
"뭐......라고요? 많이봤다고? 어디서요? 어디서, 언제 봤던
거여요?!"
"운록......?"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요! 거짓말이죠?! 아냐, 사실일
수도 있.......어! 내 눈엔 적어도 당신은 농담을 할 성격으로는
안 보이거든.......만약에......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역시 우리
어머니와 같은 세계.......꺄악!"
말을 끝맺기도 전에 운록의 어깨에서 새빨간 피가 솟았다.
운록은 비명을 지르면서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쥐었다.
반사적으로, 화정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록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봉을 잡고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겨누었다.
"뭐냐!"
운록의 외침에 낮게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
막사의 벽에서 무엇인가 불쑥 튀어나왔다. 소리도 없이, 마치
그 벽이 없는 것처럼 손쉽게 들어온다. 화정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온 몸의 피부가 녹아내리고 역한 냄새가 나는,
반투명한 사람 -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 이 헌 천조각을 몸에
걸치고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나타난 것이었다.
화정은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면서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쳤다.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저렇게 짜증이 나고
더러우며 징그러운 생물은 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영화에서도.
눈알마저 썩은 피부에 제대로 붙어있지 않고 흔들거리면서, 마치
떠 있는 것같이 달려있다. 정말 쳐다보기도 고통스럽다는 건 바로
이런 때 하는 말일 거다. 화정에게 고개를 돌릴 여유도 없이
운록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귀강시 아냐? 왜 당신 막사에 이런 것이 있지?
게다가 아귀강시가......이유도 없이 사람을 공격하다니......?"
화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만 떨었다. 흉측한 모습과
역한 냄새에 구역질이 다 났다. 먹었던 음식이 모두 넘어오는
역함을 느끼면서 화정이 뒤에서 욱욱거리고 있는데, 앞에서는
굳은 표정의 운록이 입술을 깨물면서 봉을 꼭 붙들었다.
"쳇!"
운록의 손에서 뿌연 빛이 퍼져나갔다. 쇠로 된 봉 전체에
희뿌연 빛이 감싸지고 있었다. 마치, 이전에 분수대나 무대 같은
곳에서 피워대던 수증기가 그 철봉을 둘러싸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참으로 예뻤다. 화정은 그 와중에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아무런 도구도 없이 저런 수증기를 다 낼 수 있다니. 운록이
봉을 아귀강시를 향해 휘둘렀다.
치이익......
"꾸왁!"
아귀강시가 끔찍한 소리를 내면서 봉에 맞은 자리를 움츠렸다.
운록의 봉에 맞은 자리에서 희뿌연 연기가 나면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였다. 아까 화정이 얼굴을 찌푸린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지독하다.
화정은 속으로 `차라리 쓰레기장의 냄새는 향수였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코를 옷소매로 가렸다. 그러나 운록이 솜씨 좋게
입힌 상처의 효과는 잠시였다. 아귀강시의 피부는 다시 복귀되고
있었다. 썩은 피부 그대로. 운록은 그 모습을 보면서 짜증을 냈다.
"젠장, 강시류는 죽이려면 은이 필요한데......!"
화정은 그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낮에 식사를 하기 위해 받았던 것을, 장비가
자신에게 준 은수저가 하나 있었다. 지도층은 지도층인지라
이런 전장에서도 은식기로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아
군량을 아끼기 위해 끓인 풀죽을 그릇째 들고 마시는
병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공손찬이 특별히 유비까지
불렀기에, 호위 인력이라는 핑계로 지도층의 호화찬란한
식사에 불려갔던 일행은, 눈치가 있어 - 특히 원술이라는 작자는
그 찢어진 눈꼬리로 연신 유비 일행을 흘겨보면서 떨거지라고
옆의 인물에게 종알거리고 있었기에 화정은 원술의 국그릇에
파리가 들어가 나오지 않았던 사실을,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묵인했다 - 나머지 지도층이 다 먹은 후에야 남은 음식을
집어먹어야 했다. 여하튼,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그 상황이
비참하고 어떻고를 떠나, 허겁지겁 먹고 일어나려는데 곁에
앉았던 장비가 혹시 모르니 여비를 하라면서 - 은으로 된
것이니 귀할 수밖에 - 슬쩍 화정의 소매 속에 집어넣어준
것이었다.
아마 사실은 유비 일행의 여비로 사용하자는 의도였을 테지만
장비는 갑옷 차림이라 넣기가 힘들고, 유비는 체면이 있을
테니 그나마 흠이 적은 화정의 소매에 집어넣은 듯하다. 그
정도 추측은 가볍게 할 수 있었다. 여하튼 화정은 하루아침에
대기업 총수의 외동딸에서, 훔친 은수저를 재빨리 감추어주는
비참한 수하로 변하게 된 셈이지만, 그렇게 힘들게 지녀온
은수저가 기껏 이런 용도로 쓰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운 것이라 해도 목숨이 먼저다. 화정은 은수저를
집어 침착하게도 아귀강시의 가슴팍을 겨누고는 힘껏 던졌다.
어느덧 두 사람에게로 날 듯이 다가온 - 날 듯이라고 썼지만
날았다고 하는 표현도 옮다 - 아귀강시는 운록에게 달려들어
팔을 물어뜯고 있었다. 얼굴 하나 찡그러뜨리지 않고 운록은
아귀강시의 심장으로 봉을 찔러넣고 있었다.
퍽!
파파팍!
운록의 봉이 아귀강시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함과 동시에
화정이 던진 은수저 역시 아귀강시의 심장에 꽃혔다.
치이이익......
뿌연 연기가 솟아오르면서 아귀강시가 운록의 팔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쳐들었다.
"케엑!"
아귀강시는 처절한 비명소리를 내면서 운록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운록이 빠른 몸짓으로 아귀강시에게서 몸을 뗐다.
아귀강시가 역한 냄새를 남기면서 그대로 녹아내렸다. 마치,
얼음이 녹아서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장면이었다. 썩은
물이 고인 것 같은 흔적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아귀강시라던
그 역하고 징그러운데다 다시는 보기도 싫은 생물은 소멸되었다.
뿌연 연기가 몇 줄기 올라가면서,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바닥에
썩은 물처럼 고여있던 그 흔적은 이내 사라졌다.
"우욱......"
아픈 내색을 않고있던 운록이 그제야 물어뜯긴 팔을
감싸쥐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꽤 아픈 듯 보였다. 저렇게
옷의 천이 떨어져 나간데다, 그 찢겨진 옷 사이로 드러난
운록의 하얀 팔에는 억센 이빨자국이 남아있었다. 일부의
자국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피. 보기 싫고 기분나쁜 것이지만 아귀강시에 비하면
차라리 아름답다. 자신의 팔 윗부분을 눌러 지혈을 시도하는
운록을 보면서 화정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여하튼 자신을 보러 왔다가 저렇게 다친 것을 보면 미안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도울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멍하니 서 있던
화정은 운록이 `천이 없잖아, 쳇......!' 하고 투덜대면서
자신의 옷자락을 찢으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제야 역할을
생각해냈다. 재빠르게, 화정은 자신의 곁에 놓여있던 깃발의
천을 뜯어냈다. 그리고는 운록의 팔을 감싸쥐려고 했다. 순간,
화정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다치고 나서는 병균이 들어가지 않게 소독을 해야지.>
다정하고 은은한 그 목소리에 대해, 추억하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다쳐있다. 그리 판단한 화정은 바닥에
떨어져있는 은수저를 집어들었다. 아귀강시는 은에
민감하다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아귀강시가 낸 상처 역시
은에 반응하지 않을까? 화정이 알기로 은은 사람의 몸에
유익한 금속이다. 가져다 댄다해도 해를 입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화정의 시대에는 남용되어서 `은 사우나' 라던가
`은탕' 같이 상업적인 곳에 이용되고 있지만, 여하튼 은은
나쁠 것이 없다. 그리 결론을 내린 화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운록에게 다가갔다. 운록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의심을 담고서
화정을 똑바로 보았다.
"뭐하는 거여요?"
명백하게 불만과 의심이 담겨있는 말투다. 경계심. 늘
사람들은 화정이 무엇인가 하려하면 경계심부터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에는 익숙해져있는 화정이었다. 화정은
태연하게 운록의 상처에 은수저의 볼록한 부분을 갖다댔다.
치익......
은수저는 운록의 상처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게 했다.
아팠는지 얼굴을 잠깐 찌푸렸던 운록은 상처가 조금 아물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동요하지 않고 화정은 깃발을
찢은 천으로 운록의 팔을 묶었다. 운록이 냉소에 가깝지만
감탄이 담긴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제법이네요, 은수저로 공격이 된다는 점을 알고
상처 소독에도 은을 쓰다니......"
처음으로 듣는 운록의 칭찬이었다. 이 아가씨, 자존심이
꽤 센 듯 보이지만 이런 단순한 일에도 감탄을 보내는 것을
보니 제법 귀여운 면이 있다. 저렇게 유순하고 귀여운데다
어리게 생긴 얼굴을 하고서, 고맙다, 하는 말은 절대 안한다.
자신이었다면 `고맙다' 고 짧게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잠시 생각을 달리했다. 혹시, 내게 그런 말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유감이 있는 걸까?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원망을 호감으로 바꿀 수도, 호감을 원망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화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까닭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된 화정은 조심성있게 행동할 필요를
느꼈다. 단순하면서 자존심이 센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 최고다.
그런 판단을 내린 그녀는 흔들림이 없는 태도로 고요하게
답했다.
"그저, 그렇지 않을까 싶었던 것일 뿐이에요....."
"그래요?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군요."
그제야 화정은 운록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운록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무시'와 `경계'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상대의 경계심을 일단 뚫자. 게다가, 궁금한
것도 알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조금의 빈틈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깝지만 무식한 티를 내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귀강시라니, 그게 대체 뭐지요?"
"뭐......라고요......?"
예상한 대로, 운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화정을
돌아보았다. 저런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아가씨에게는
이렇게 모르는 것을 묻기가 참 싫은 일이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또한 약간의 경계심을 허물어야 대화가 될 것
같기도 하니, 어쩔 수 없다. 운록은 이내 기가 막히다는 투로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이봐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요? 자신이 데리고
다녔으면서 뭐냐니, 그럼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하나요?"
그 웃기는 말에, 작전상이 아니라, 정말로 멍해졌다. 데리고
다녀? 내가 저 흉측한 생물들을? 웃기네......이번에는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히고 입이 막히고 눈이 안 보인다. 나한테
저런 능력이 있었다면 내가 여기 와서 이 고생은 안했지.......
하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그런 심정으로 반문하였다.
"데리고 다닌다니요?"
그 반문에 운록이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비웃음까지 섞인 태도였다. 기분이 나빠졌다.
"그 아귀강시는, 당신을 쫓아 여기까지 왔다고 떠들던데?
당신이 지니고 있는 그......무엇인가를 빼앗겠다고 말이야.
못 들었어요?"
"재미있네요. 저는 그런 소리 하나도 못 들었고, 저런
흉측한 것이 따라올 만큼 나쁜 짓을 한 기억도 없습니다."
화정은 단아하게 잘라 말했다. 사실이니까. 그런데 그 말이
그리 충격적이던가? 화정이 잘라 말하는 순간 운록이 여지껏
유지해온 태도와는 달리 갑자기 움찔하는 것이었다. 화정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운록?"
"에.......!"
운록은 화정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애써 표정을
고치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얼굴이 붉은 것은
감추지 못하고 있다. 화정은 속으로 `역시, 이렇게 고압적인
척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잘라 말하거나 강경하게 대하는
것에 약하구나. 동서고금의 법칙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심어준, 사람을 파악하고 사람을 대하는 법.
그 당시에는 배우기도 싫었다. 사람을, 다른 생물도 아닌 인간을
자신의 뜻대로 가지고 노는 것처럼도 느껴지는 그 대면술은,
너무나 싫었다. 더더군다나 심성이 착한 곳이 있었던 자신에게는
고역이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는 적어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잘만 다루면 운록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게다가 아까 얼핏 지나간 말은 다른 세계를
의미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런 계산을 성립되자 운록에 대한
태도를 조정하는 건 매우 쉬웠다. 화정이 음음, 하는 소리를
일부러 내자 운록은 화들짝 놀라면서 - 역시, 의외로 담이
약하다 - 자세를 바로 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여자인 것을 몰라도 나는 알아요."
운록은 차갑게 - 일부러 차갑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말하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속으로 `그렇지, 이제 좀 이야기를
털어놓는구나.' 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하튼
아귀강시에 대한 질문에서 핀트가 빗나간 것은 싫지만 이것으로
말문은 튼 셈이었다. 모른 척 하면서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저도 마소저(馬小姐)께서 아실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아무튼, 오빠가 당신을 좋아하고, 또 나를 여동생으로서
아끼니 당연하지요......이름이......"
`대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거지? 생각보다 많이 알잖아?'
마초의 고백이 생각난 화정은 속으로 뜨끔했고 어색했지만,
얼굴에 철판을 몇 판 깔고 태연하게 운록의 질문에 답했다.
"화정, 유화정(柳和貞)이라 합니다."
"좋아요, 화정 낭자께서는 왜 여기에, 그것도 남장까지
하고 오신거죠? 남장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인 것을 알고
계시죠?"
"......"
이쯤되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사실 자신도 모른다. 모험......
옳은 말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몇 천년전의 세계, 그것도 다른
나라에 떨어졌을 때,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떨어졌을 때
감행할 수 있는 것이 모험밖에 더 있겠는가? 정직히 이야기하면,
누가 자신에게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까?'하고 묻기라도 한다면
`네, 그렇습니다.'라고는 답하기 힘들다.
역사 속으로 떨어졌다는 건, 소위 소설에서만 나오던 이야기니까
절대 평범한 삶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도 없고 희망이라 할 수도
없는 기대 속에서, 친구들과 등진 삶에서 살았지만, 동무가
되어주는 것은 많은 책들과, 특히 삼국지뿐이었던 곳이었지만,
이렇게 낯선 상황 속에서는 익숙한 그곳을 그리게 된다. 어쩌면
여기로 떨어진 것도 자신의 잘못이다. 분명 자신은 반 농담이나마
삼국지의 세계를 겪어봤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으니까.
그러나.......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이 이상
어떻게 버텨가면 되는 걸까? 차라리 여자임을 밝히고 그저 평원에
남아있는 것이 편했을 텐데, 왜 자신은 굳이 남장을 해 가면서
유비들을 따라나서서 이런 모든 일을 겪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어이없고 이유없는 행동들이다. 늘 계산에 따라 움직일 줄 아는
대기업 장래 총수로서,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그리
행동하고 산다고 자부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운록을
자신의 계산대로 움직이는 것에 쾌감까지 느끼고 있던 자신이,
장기적으로 보면 이렇게 어이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회의까지 느껴졌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서 말이 없어진
화정에게, 운록도 재촉하지 않았다. 화정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조용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다시 들었다.
"나도......잘 모르겠습니다......왜 내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내겐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요.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에요."
우울한 얼굴의 화정에게 운록이 바짝 다가섰다. 새파란 푸른
눈동자가, 마치 깊은 바다처럼 다가온다. 빠질 것 같다.
"......당신, 여기 사람이 아니죠?"
갑자기 운록이 목소리를 낮추며 해온 질문은 화정으로서는
아귀강시가 나타났을 때 이상의 공포감을 주는 것이었다.
아니, 그때는 단지 놀라고, 보기가 싫으며 냄새가 맡기
괴로웠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 말은, 짐작하고 있었으되
들으니 무섭고 오한이 오는 말이다. 화정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으나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무슨 말이지요?"
"당신도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사람인가요?"
화정은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비록, 운록이 뭔가 다른 것을 알고 있을
거라고 으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확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 어쨌거나, 마음을 바로 잡고
침착하게 생각하자. 머리를 식혀야 한다.
세상에 사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인가. 그 많고 많은 인파
중에서 자신만을 예외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화정은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운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머리색깔과 눈 색깔이 이상하지 않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도 상당히 이세계적인 느낌의 사람이에요, 그
눈도 그렇고......여기 세계에서는 당신처럼 눈 위의 선을
진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대부분 속에 숨겨져
있다가 깜빡일 때 가끔 보이는 정도죠."
`속 쌍꺼풀은 좀 있어도 겉 쌍꺼풀은 거의 없다는 말일까?
아아, 이런 간단한 말을 길게도 하는 것 보면 쌍꺼풀이
희귀하기는 했나보지? 이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많이 망가졌구나, 유화정!'
한심한 생각을 하면서 이마에 손을 얹는데 운록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느낌 자체가 좀 틀려요. 사실 나도 이런 눈색깔과
머리카락을 가지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어......"
운록의 말에 화정은 묻고싶은 충동을 눌러참았다. 혹시,
운록도 다른 세계에서 건너왔거나, 아니면 혼혈이거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지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운록이
말을 끝내면 그때 질문을 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운록이 한숨을 내쉬었다. 운록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처럼 보인다. 혹시 착각일까?
"아귀강시는......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강시에요. 강시는 뭔지
알겠죠......시체라는 뜻이니까......내가 아는 사람도,
당신처럼 사람 아닌 생물의 말을 듣지 못했거든요. 이곳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아귀강시나 기타 사물(邪物)들과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물론, 짐승들 같이 너무 지능이 낮은 생물들은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지만......아까의 아귀강시는 당신을
따라오면서 적절한 기회를 노리고 다녔던 거여요. 아마,
운장과 익덕같은 분들이 곁에 계셨고 맹기 오라버니 때문에도
못 덤볐던 것이겠죠. 그들도 능력을 눈치챌 정도는 되니까.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오라버니는 무술에 대해서는 패배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었어요. 지금도 구할 스승이 없어서 혼자
익히겠다고 돌아다니고 있으니까......운장이나 익덕님은 제가
곁에 가 보았을 때 느꼈던 바로도 상당했고요. 저는 아직
미약하기에 아귀강시가 만만하게 생각하고 덤볐던 거죠."
친절하면서 쌀쌀맞은 말투의 설명 덕에 그제서야 약간의
상황이 파악되었다. 그렇다면 그 아귀강시는 화정을 노리고
따라붙다가, 홀로 있을 기회를 노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상한 점도 있다. 홀로 있을 기회는 사실 꽤 있었는데
어째서 운록이 나타난 지금에야 공격을 했던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운록은 화정이 운록의
눈동자와 머리칼을 보고도 약간 놀랄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많이 보았다'는 혼잣말을 하자 의심을 품었고,
아귀강시와 싸우고 나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의사소통도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어떤 확신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저러나......운록의 말대로라면 이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사물(邪物)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얘기일까?
현대로 오면서 그런 초자연적인 것들이 사라지고 동시에
사람들도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설을 어디서 읽었는데, 혹시
그것이 맞는 걸까?'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 빌어먹을 세계로
떨어졌던 순간부터 잡생각들 때문에 미칠 것만 같다. 하긴,
저쪽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집까지 데려다주고, 의식주는
기본이요,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너무 쉽게 들어오는지라
살기 위해 이것저것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단지, 미래에 기업을 잘 이끌기 위해 수많은 교육에 시달렸다는
것 정도이다. 쓸모없게 생각한 그, 대면법이나 사람을 파악하는
법, 등의 것들이 이런 곳에 와서, 그것도 기업을 경영한다는
화려한 모토도 아니고 단지 살아남고 평탄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하위적인 욕구 때문에 사용될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
그렇기에 이곳에 와서 더 잡념이 많아진 듯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화정이 운록에게 다른 소리를 기대하며 빤히 쳐다보는데,
운록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얼굴만 예뻤지 무뚝뚝하고 놀라는 것도 없는
이런 여자를 좋다고 하다니, 오라버니도 알만하네. 가겠어요."
정말 기분 나쁘다. 무뚝뚝하고 놀라는 것도 없단다. 자신은
충분히 많이 놀라고 충분히 많이 느끼는데 왜 사람들은 다들
자신더러 무뚝뚝하고 놀라는 것도 없다고 할까. 화정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게다가 운록은 덤으로, 더 이상 이야기도 안
해주고 그냥 가려 하고있다. 말리려했다.
"아, 저......"
그러나 화정이야 어떻든 운록은 사라져버렸다. 홀로 남게된
화정은 시선을 까맣게 변한 은수저로 보냈다.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얗고 예쁘던 은수저는 탄 것인양 시꺼멓게
그을러진데다 모양도 뭉그러져서 볼품없게 변했다. 여비로
사용하기에는 글러먹었다.
분명 아침이 되자마자 은수저를 찾을 장비의 모습이 생각났지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온통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어서 혼란스럽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운록의 방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는 다른 생물이
산다는 사실도, 이 세계 사람들은 그런 것들과 잘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점도, 그 모를 생물이 자신의 어떤 것을 노리고
따라붙었다는 것도,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 화정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모두 운록이라는 푸른
눈의 작은 소녀가 가르쳐주고 간 셈이다.
마운록(馬雲綠). 분명 화정이 읽은, 반삼국지(反三國志)에
등장하던 인물이다. 마초(馬超)의 여동생. 이후에 조운(趙雲)과
결혼한다는 여자다. 자신이 지내고 있는 이 세계가, 후한
말기인 것은 틀림없지만 삼국지가 모두 옳게만 씌여졌을
가능성은 70퍼센트에 불과하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사실이
70, 허구가 30이라는 소문은 유명하니까.
여기에, 반삼국지의 인물인 마운록도 등장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렇다면, 혹시 반삼국지의 저자인 주대황(周大荒)
역시 마운록이 있었다는 어떤 근거를 얻어내어 소설을 썼을까?
자신이 알기로 그 반삼국지란 것은 작가가 그저, 촉의 유비가
비극적 결말을 맞음이 싫어서 바꾸어 쓴 창작물에 불과하다.
마운록이 실존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다.
아귀강시도 모르는 화정을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운록이
떠올랐다. 상당히 한심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가엾게 여기는 듯한 마음과, 어떤 동조(同調)같은 것이 분명
담겨있었다. 아니면, 화정, 그녀가 운록을 잘못 읽은 것인가.
자질구레한 생각을 접고 방금 전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운록의 말대로라면 이 시대에는 소위 현대사람들이
`귀신(鬼神)'이니 괴물(怪物)'이니 하고 부르는 것들도 흔하게
돌아다닌다는 소리같다.
`젠장, 내가 읽던 삼국지 소설 중 이런 해괴망측한 것들이
다닌다는 이야기를 쓴 소설은 없었단 말야! 게다가 사람들이
이런 것들과 이야기까지 할 줄 안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고!
그럼, 혹시 도인(道人)이나 선인(仙人)들도 정말, 진실로
있었던 걸까?'
불만 끝에 의문이 또 달려나오자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이 세계가 무서워졌다. 이 정도를 지냈는데 이렇게
두려워 진다면 앞으로는 얼마나 많은 낯선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너무 힘이 들고 적응하기도 힘들다.
그럭저럭 버티는 척하고 있지만 교묘하게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실상의 그녀는 무너지고 있다. 이 이상, 남장까지 해서
버틸 자신은, 사실 없다. 단지, 오기로 버티고 있다. 화정
자신도 뚜렷하게 느낀다. 여기서 만약, 더 큰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자신에게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놀라지도 않는다고 한다.
조금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던 운록 역시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그렇게 평가했다. 어째서? 아버지의 말을 너무
충실하게 따랐을까? 몰래 책을 읽고 수업시간에 다른 생각과
독서로 시간을 때웠을망정, 시키는 대로 해왔다. 그렇다.
적어도 그녀는 아버지에게는 착한 딸이었다.
엄마, 그녀의 가장 소중하던 그 엄마가 그렇게 되었지만
말없이, 묵묵히 아버지의 말에 응해왔다. 아버지가 시키는
교육은 그대로 받았고, 새 어머니라는 여자들도 다들
어머니로 대했다. 아버지는, 대기업 총수의 딸로서, 그리고
후계자로서, 감정을 숨기고 냉철하게 살 것을 이야기했다.
공과 사는 가려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사람보는 눈으로
성공해온 그녀의 아버지는, 늘 사람을 보는 방법과 대하는
방법을 가장 열심히 가르쳤다. 그리고 화정은 그 말에 따랐다.
결국, 그녀는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사실 속으로는 충분히 놀라고,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슬퍼한다. 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마치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인형'취급을 당해온 걸까? 그렇다. 4년, 자그마치 4년이란
세월동안 자신은 눈물도, 웃음도 잊고 살았다.
어쩌면, 그와 함께 이 놀람이라는 감정마저 없어져가서, 그래서
이렇게 도도하고, 흔들림없는 인형같은 표정만 유지해왔다.
자신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화정에게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각해도 그녀의 표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똑같은
결론만 나온다.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모든 결론을 털어버리려고......그리고 애써 생각을
전환시켰다.
'......그런데 그 아귀강시는 왜 나를 따라왔지? 운록의
말로는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 있다고, 그것을 빼앗을
거라고 했다는데......'
순간 화정은 다시 머리카락이 곤두선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내가 그것을 계속 가지고 다닌다면......다른
아귀강시가 또다시 쫓아 올 거라는 소리 아닐까?'
비명이라도 빽 지르고 싶을 만큼 기분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귀강시를 한번 본 것만으로도 아직 속이 울렁거리는데
쫓아다니다니. 자신은 아무 죄도 지은 적이 없다. 아무리,
천주교 신자로서 미사에 안 나갔다지만 이렇게까지 당할
이유는 없다. 다른 세계에 떨어져서 우왕좌왕하는 것만도
억울한데 예쁜 요정이나 소원을 들어주는 친절한 천사도
아니고 저렇게 끔찍한 것이 약탈을 위해 쫓아다닌다니, 신도
참 무심하시다.
아니, 혹시 이렇게 재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가도, 그
재수가 모두 모여서 나중에 좋은 일이 왕창 생기는 것이라면,
자신은 이후에 현실로 돌아가서 미사를 주말마다 절대
빼먹지 않고 다닐 것이다. 여하튼 어떤 물건인지는 몰라도
혹시 그것 때문에 아귀강시라는 이상한 것들이 쫓아다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게된다면
당장 버려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생각보다 단순한 화정이라는 사실이 이럴 때 드러난다.
뭐 어쩌겠는가. 사람이란 사실 복잡하다가도 이면에는
단순한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이중적인 사람을 탓할 것도
없다. 사실 이중적인 면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이렇게 도피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화정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잇,
기분도 나쁜데 오락실이 있었으면 가서 스트리트 건달이나
1949 비행기 게임 같은 것이나 열나게 두들겼을 텐데.
여기는 스트레스 풀이할 것도 하나도 없다. 자신이 오기를
바란 적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참 안좋은 세계다.
*******
쾅쾅쾅!
어느새 자고있던 화정은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온몸이
뻣뻣했다. 침상이 안 좋은 탓이야, 하고 투덜대려던 그녀는
책을 읽다가 엎드려 잠이 들었던 것을 기억해내면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시끄럽게 오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들리는 함성 소리에 적잖이 당황한 화정이 가사를 끌어와 어깨에
걸치는데 누군가 장막을 젖혔다. 장비였다.
"화정, 예서 꼼짝말고 있게! 야습(夜襲)이야!"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무슨 소린가. 자신이 알기로 반동탁
연합군은 적어도 초반에는 야습한번 받지 않고 사수관까지
진격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적장 화웅(華雄)을 만나 고심하다가
관우가 그를 베야 하는 것이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그럴
리 없는데, 이 부분은 참 즐겁게 읽었던 곳이란 말야, 하고
속으로 중얼대면서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야습이라니, 누구의 야습......입니까?"
장비가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이런 한심한 사람을 봤나! 당연히 동탁의 야습이지, 뭐야!"
본래 말투가 험하기는 해도 적어도 화정에게 `한심한'이
대번에 나오지는 않던 장비였다. 어지간히 급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하기는 세세한 전투까지 다 기록이 안 된건가 보지, 뭐.
단순한 것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나도 많이
이상해졌지......'
스스로를 달래려는데 장비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재수없게 주술사를 데리고 있는 모양이야. 아귀강시들이
부대로 덮치다니......"
가사를 어깨에 제대로 걸려던 화정의 손이 정지했다.
"아귀강......시요......?"
"일반 병사는 없고 전부 아귀강시들이라 애를 먹고 있어!
동탁 놈 옆에 붙어있는 사현(邪賢)이란 놈의 소행이겠지."
화정은 단순히 투덜거리는 장비의 말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왜 하필 아귀강시들인 것일까. 그렇잖아도 아까
운록이 하고간 말 덕에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었다. 다시는
보기 싫은 아귀강시들이, 그것도 떼거지로 몰려온다는 것은
절대로 즐겁지 않았다.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분명 얼마전에 운록이 왔다가 갔을 때에도 아귀강시가 화정을
덮치러 왔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 아귀강시들의
부대습격이라니......애써 안심하려고 하면서 화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연한 겹침이었을 거야. 아귀강시를 부리는 주술사가
있다고 익덕님도 말씀하고 계시잖아......!'
"쳇, 그런데 이쪽은 아직 군내의 서열(序列)도 제대로 매기지
않았고 막 집결된 상태인데 그 망할 놈의 사현이 어떻게 벌써부터
사물들을 소환해서 보냈단 말이야!"
화정은 아까부터 낯선 이름이 나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사현......이라니요? 누군데요?"
"바보냐, 너?! 그 놈도 몰라? 왜 동탁 놈 곁에 붙어서 만날
주술나부랭이나 부리고 있는 놈 말야! 그 나쁜 놈은 열 살 먹은
어린 얘도 안다!"
열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안다는 표현은, 물론 아주 유명한
사실을 이야기 할 때 쓰이는 표현이다. 아무리 장비가 무식하고
문자를 모르기로서니, 저건 옳은 표현임에 틀림없다. 그러고보면
정말로, 아주 유명하다는 말인데, 사현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경험도 없거니와, 적어도 낯익은 것도 아니다.
`......이상하네......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라면 한번
정도는 책에 이름이 나와야 하잖아?'
"아무튼 상황이 안 좋아. 여기서 꼼짝말고 있는 것이 좋아.
나도 여기 좋아서 있는 게 아니란 말여. 운장 형님만
아니었어도......나가서 몸이나 푸는 건데!"
신나게 앞장서려는 장비를, 분명 관우가 화정에게 가보라면서
떠밀었던 모양이다. 장비의 불평에 화정은 한숨을 내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생각하던
삼국지와 너무 다른 걸까. 사람에 대한 것이야 다들 틀려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현이라는 인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렇게 유명하다면서 어떻게 언급조차 없었던 걸까. 여하튼
뒤에서 칫칫거리고 있는 장비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는데
또다른 손이 막사를 젖혔다.
"화정!"
익숙한 목소리다. 흰 투구에 흰 갑주를 걸치고 있는 마초가
뛰어들었다. 격전을 벌이다 온 것인지 온 몸이 지저분했다.
화정은 그의 투구와 갑주를 더럽히고 있는 것이, 아귀강시들의
몸에서 흘러내리던 진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귀강시들이 여기를 덮치고 있어. 여기
있으면 안전할 테니 조용히 있.......어, 익덕님......."
"여자 보기에 바빠서 나는 있는 줄도 몰랐겠지, 맹기?!"
장비의 짖궂지만 가시돋친 말투에 마초의 얼굴이 붉어졌다.
화정은 사실 착찹했다. 아버지 마등의 부대도 수습해야 할
마초가 여기까지 온 것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머리가 굳은
장비라도 그 점이 궁금했는지 다짜고짜 질문을 퍼붓는다.
"이봐, 말먹이! 자네는 마등님의 부대는 어쩌고 여기에
온건가?"
"아버지께서 현덕공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익덕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마초지, 말먹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뭐 그거나, 저거나."
"전혀 틀립니다!"
"내가 보기엔 차이 없다."
"뭐요! 그렇게 자꾸 시비를 붙이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오, 덤비려구? 심심한데 잘됐다. 덤벼봐, 덤벼봐!"
"으으.......내가 정말......현덕공만 아니었......."
"좋아하고 있네. 화정만 아니었다면 이겠지."
"아, 아닙니다!"
"네놈 얼굴에 써있어."
"어디욧?!"
"이마를 봐! `나는 여자 때문에 여기에 왔소.' 그렇게
써 있지."
"갈수록......!"
어느새 또 만나자마자 시비가 붙어서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화정은 막사의 장막 너머를 응시했다.
아귀강시들의 체액이 여기저기서 지저분하게 튀는 장면이
어릿하게 보였다. 잠시 망설였다. 보기 싫은 아귀강시들이다.
하지만.....이 세계에는 흔한 생물인 것처럼 운록은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보기 싫어도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한다는 뜻이 된다.
슬쩍 장비와 마초를 곁눈질했다. 아직도 침을 튀겨가면서 열심히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일부러 싸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코믹했다.
아마, 마초와 장비는 현대시대에 왔다면 최고의 코미디
싸움커플로 보였을 것 같다. 여하튼,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괜찮다. 위험해지면 곧장 여기로 달려오면 될 것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약간만 나가도 되겠지.
장비와 마초가 또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를 바람같이 지나쳐서
막사를 나갔다. 그녀가 장막을 떠나자마자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화정!"
"이봐, 유낭자!"
그 목소리를 등지고 화정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막사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와서야 상황을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한탄이 입 밖으로 절로 터져나왔다. 저도 모르게 화정은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세상에......!"
보기 싫다. 이전에 스크린에서 보았던 것만큼 충격적이다. 아니,
그건 스크린이고 가상이었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녀가 추하게 본 것은 그 아귀강시의 모습 자체가 절대로
아니었다. 아귀강시의 모습은 어느덧 익숙해졌다고 쳐도,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진, 아귀강시의 만행은 더더욱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병사의 목을 물어뜯고 있는 아귀강시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죽인 병사의 시체를 쩝쩝거리면서 먹고있는 놈도 있었다. 다
터져서 삐져나온 내장과 살점을 뜯어가며 맛있게 먹는 모습은
곱게 자란 화정으로서는 구역질을 하지 않고 못 배기는
광경이었다.
마치, 그 병사들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먹히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절로 몸이 떨렸다. 소위 말하는, 개그나
만화에서 코미디에 사용되던 장면이었다. 또한, 그녀 역시
이전에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웃거나 무시해버린 적이 허다했다.
그러나, 만약......그 장면을 창작해냈던 사람들은, 이렇게
직접 보고 나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저 장면을 보고도 그런
창작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 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을 것이다.
화정은 그 광경을 보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앞의 병사들.
분명 화정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 적 없다. 하지만 사람인데.......먹히고
있다. 무슨 음식이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 않게 먹히고 있다.
쩝쩝소리까지 내면서 아주 맛있게 먹히고 있다.
눈을 떼야 하는데, 너무나 두려워서, 혹은 불안하고 슬퍼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못 견딘 화정이 가까스로 돌아서려는
순간 뒤에서 반짝이는 은빛의 화살이 날아와 시체를 뜯어먹는
아귀강시의 심장을 거세게 뚫고 지나갔다.
"키이이익......!"
아귀강시가 처참한 소리를 내면서 허물어져 내렸다. 그러나
더 놀라고 당황스런 일은 다음이었다.
"꺄악!"
화정은 아귀강시가 뜯어먹고 있던 병사의 시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비명을 질러버렸다. 병사의 눈은 초점이
풀려있었다. 덜덜 떨면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는 화정의 귀에
마초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귀강시는 저런 식으로 늘어나게 되어있어. 그래서
은으로 단번에, 희생자를 내지 않고 죽여야해. 하지만 은은
귀하고 많지도 않아."
어느새 쫓아온 마초가 설명하는 소리가 귀에 대강 스쳐갔다.
귀하고 많지도 않다니......그럼, 은을 지니지 못하는 하급
병사들은? 이런 하급 병사들이 죽어가는데, 그 은을 소유한
사람들은 지금 다들 무엇하고 있는거지? 순간적인 회의가 들었다.
화정이 마초를 돌아보는데 마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응?!"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장비 역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화정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초와 장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방금 들으셨죠, 장비님?"
"자네도?!"
두 사람이 경악하면서 동시에 고개를 화정에게 돌렸다. 두
사람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화정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두
사람은 기겁을 하면서 화정을 향해 자신들의 창을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왜, 왜 이러세요!"
아, 이제 난 이런 곳에서 믿던 사람들 손에 죽기까지 하나,
하고 생각하던 화정은 놀라면서 엉겁결에 엎드렸다. 화정의
근처로 창 두 개가 나란히 뻗어갔다. 무엇인가 창날에 맞았다.
화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
"널 노리고 있잖아! 뭐해, 저 아귀강시들의 소리를
들었다면 어서 피해!"
날 듯이 몸을 움직여 화정의 근처로 다가온 마초가 창으로
또다른 놈을 쳐내면서 외쳤다. 장비 역시 그 거대한 팔로
사모(蛇矛)를 휘둘러 두 놈을 동시에 베어냈다. 그들의 창에는
운록의 희뿌옇던 기운과는 달리, 엄청나게 밝은 청백색의
안개같은 것이 맺혀있었다. 장비가 위로 사모를 들어올려
날아들던 아귀강시를 쳐냈다.
"방금 아귀강시들이 말했잖아! 화정, 너에게서 무......
뭐라더라? 암튼 빼앗아 가겠다고!"
말하자면 자신만이 아귀강시들의 말을 못 알아듣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안다. 아귀강시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것 역시. 어떤 물건.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물건을
빼앗기 위해. 어쨌든 특별히 은이 아니어도, 장비와 마초가
날에 맺어놓은 기운 때문인지 아귀강시들은 소멸되고 있었다.
화정은 장비와 마초를 바라보면서 손끝을 떨고 있었다.
상황파악이 조금은 되었다. 이 아귀강시들은, 그 사현이라는
주술사 때문이 아니라 화정, 자신 때문에 몰려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못 깨달았어요?"
뒤에서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두건을 쓰고있는
푸른 눈동자......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운록......."
"소수 힘으로 안될 것 같으니까 다수로 몰려든 것이에요.
덕분에 지금 이 부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어요."
질책하고 있는 것이리라. 화정은 앞에서 정신없이 창을
휘두르고 있는 장비와 마초를 보면서 가슴이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비명을 질러대면서 창칼을 버리고 도망하고 있는
많은 병사들도......저 병사들이, 혹시, 혹시 나 때문에 몰려온
아귀강시들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걸까? 나 때문에?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
그녀의 소중한.......나는 대체 왜 이모양일까? 아무런 의도도
없다. 단지, 그녀는 조용하게 지내고 싶을 뿐인데, 늘 그녀를
위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슬퍼할 여유도 없이 상황이 흘러간다.
그때도 그랬다. 그녀는, 단지 엄마의 말대로 도망쳤을
뿐이었다. 하지만.......홀로 멀쩡하게 남은 그녀를 보면서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화정은 그때의 일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난 단지........"
그렇게 조그맣게 중얼거리는데 휙하는 소리가 났다. 졸지에
놀라서 생각에서 깨어난 화정은 자신의 머리 위를 무언가
덮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어딜!"
운록의 봉이 아귀강시를 거칠게 쳐냈다. 화정은 물러선
아귀강시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아귀강시는 다른
놈들과는 약간 달랐다. 온 몸에 거무스름한 녹색을 띄고 있는
여타 아귀강시들과는 달리, 이 놈은 푸른색을 띄고 있었으며
몸집도 두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형체는 뚜렷하지 않았고
마치 빛의 집합체같이 뿌옇고 둥그스름했다.
[핫핫핫......예상했던 것보다 좋군!]
화정은 귓전에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는 당황하여 주변을
바라보았다. 마초와 장비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으며 운록만
그 푸른 아귀강시에게 눈을 보내고 있었다. 화정은 얼굴을
찌푸렸다.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마초나 장비는 아니다. 운록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앞의 빛덩어리가 말을 걸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방금 전 말한 것은......설마......."
[다른 아귀강시와 소통조차 안되는 여자아이라니, 실망인데.]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섰다. 빛덩이가
이야기하고 있어! 그렇게 속으로 외치는 화정의 뒤에서 운록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능력이 있었어도 화정, 당신이 이 아귀강시들을
부릴 수 있었을 텐데."
"뭐라고요?!"
뜻밖의 소리에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는데 빛덩어리의 목소리가
다시 귀를 때렸다.
[당황할 것 없다. 나는 저기서 저렇게 미련하게 놀고 있는
놈들과 달라. 지능을 가지고 있지. 그렇기에 의사소통 능력이
없는 너도 내 말을 들을 수 있는거다.]
`별의별 놈들이 다 있네, 정말......!'
화정은 소름이 돋친다고 생각하면서 빛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 빛덩어리는 다른 아귀강시들과는 달리, 역한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아귀강시는 아닌 걸까? 하지만 아귀강시들의 우두머리인
듯 싶으니, 동일한 아귀강시일 것이다.
"푸른 아귀강시......?"
빈정대는 소리가 가로막았다.
[저런, 저 하급 사물들과 똑같은 취급하면 곤란해. 나는
청광체(淸狂體)라고 불린다.]
"청광체......?"
[물론 저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은 나지만, 나는 강시의 일종은
아니지. 자,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주었으니 이제 내놓아라.]
설명해 준 것은 정말로 친절하다고 해 주겠다. 하지만,
다짜고짜로 뭘 달라는 말인가? 정말 뻔뻔한 놈 아냐, 이거?
어이가 없었다. 짤막하게 반문했다.
"내놓으라니?"
[무경미석(無競美石)말이다!]
"무경미석을 지니고 있었단 말야?!"
운록의 경악에 가까운 외침이 귀를 때렸다. 화정은 한마디로
기가막히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이름도 모르는 것을 가지고 나더러 가지고 있네, 내놓아야
하네, 하고 있는거야? 황당해하는 화정의 심정을 모르는지
청광체가 재촉했다.
[어서 내놓지 않으면 아귀강시들을 멈추게 하지 않아!]
나쁜 놈, 뭔지 몰라도 너같이 남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따위의 놈에게는 주고 싶다가도 줄 마음이 싹 사라진다는 걸
몰라? 이런 말 따위를 삼키면서 화정은 청광체를 노려보았다.
우스운 상황이지만, 대응은 해야 할 것 아닐까. 그런데 왜
운록도 저렇게 놀라는 거지?
"무경미석이 무언지 저는 모르겠군요.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낯설 뿐입니다."
청광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히려 운록이 화정에게
얼굴을 찡그려보였다.
"무경미석이라니......과연 아귀강시들이 따를 만
했군요......어쨌든 좋아요......"
운록이 청광체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화정이
궁금한 심정으로 목을 길게 빼는데 갑자기 청백의 기를 머금은
창이 날아와 청광체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욱, 이.......이런!]
청광체가 기다란 신음을 내뱉으면서 비틀했다. 화정과 운록의
시선이 동시에 창이 날아온 쪽으로 쏠렸다. 장비와 마초가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아?!"
주변이 소란스러운 덕에 마초의 외침이 작게 들려왔다.
화정은 청광체가 있던 곳으로 눈을 도로 돌렸다. 그러나
청광체는 푸른 빛덩이를 약간 남긴 채 사라지고 없었다.
운록은 청광체를 맞추었던 창을 마초에게, 받기 좋도록
수평으로, 약하게 던졌다. 정확한 겨냥이었다. 마초는 한쪽
팔을 들어 창을 받아냈다. 키가 훤칠하고 늘씬한 체격의 마초는,
그런 모습이 매우 보기 좋았다. 화정이 마초에게 시선을 잠깐
돌린 새에, 청광체는 소멸되지도 않았는지 여전히 떠들어댔다.
[......일단 물러나지. 그러나 네가 무경미석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 온다. 기억해 두어라.]
청광체는 울림만을 남기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이상한
괴물체가 등장했다는 보고를 전해들은 각 제후들이 호위병을
대동하고 몰려들고 있었다. 화정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사람이 몰려오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화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화정의 소박한
소망따위는 소용도 없이 이내 거대한 인파가 그들의 주변에
몰려왔고, 드디어는 유비가 관우와 함께 달려들었다.
"익덕, 이 무슨 소란인가! 그러게 내가 유소저를 못
나오시도록 잘 막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 탓이 아니우, 내가 한눈 판 사이에 화정이 나간 거유!"
"그러게 한눈은 왜 파느냔 말이다!"
유비의 나무람에 장비가 불만스럽게 대꾸하자 관우가 엄하게
꾸짖었다.
`이건 또 뭐야? 내가 완전히 말썽을 몰고 다니는 것 같이
들리잖아?'
기분이 나빠진 화정을 근처에 두고 장비가 고리눈을
희번뜩거리며 반박했다.
"맹기가 시비를 붙이잖소!"
"이보게, 익덕! 자네 나이가 몇인데 또 맹기와 시비인가?!"
관우의 매몰찬 꾸지람에 장비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곁에 서있던 마초가 무어라고 하려는데 그들 일행 여섯을 살피고
있던 원소가 헛기침을 했다. 아마 아랫사람들의 소란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리 했을 것이다. 유비가 고개를 숙이며
포권(包拳)해보였다.
"어리석은 소인들을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자네는 누군가."
"유비라는 분입니다. 자는 현덕을 쓰십니다."
공손찬이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했다. 쳇, 이제야 소개하는구먼,
하고 중얼거리는 장비의 목 뒤를 관우가 살짝 쳤다. 장비는 퉁퉁
부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원소는 눈을 찌푸리면서 유비를 살폈다.
"이자의 관직은 무엇인고?"
"평원(平原)의 현령(縣令)입니다."
공손찬의 대답에 원술이 나서면서 벌컥 화를 냈다.
"기껏 평원의 현령인 주제에 아랫것도 제대로 못 다스려 이런
소란을 피는가! 그것도 동탁의 야습이 한창 감행되는 중에!"
이 자는 아무래도 실력이 없어서 관직에 대한 미련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형이나 집안 빽으로 관직을 차지한 것이
틀림없다. 저렇게 머리가 텅 빈 위인이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이 시대가 난세(亂世)는 난세다. 화정이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원술의 말에 관우의 얼굴도 붉은 빛을
띠었다. 장비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아랫사람이라지만
연유도 모른 채 몰아붙이는 것은 그다지 합당한 것은 아니라고
화정은 생각했다. 유비는 무어라고 쏘아붙이려던 장비를
가로막으면서, 인내심 많게도 원소에게 고개를 다시 숙였다.
"현덕이 아둔하여 미처 다스리지 못하였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런 것을 보면 유비는 참으로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다.
아무리 원술의 성격이 더럽다고 해도 맞서면 손해나는 것은 유비
일행일 뿐이다. 늘 참고 인내하는 유비의 성격은, 어쩌면
우유부단이 아니라 처세술에 가깝다. 이곳에 와서 유비를
살펴보면서 더더욱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유비의 공손한
태도에 표정을 가라앉힌 원소가 원술을 돌아보는데......
"잠깐만......"
뒤에서 누군가 장병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급하게 다가온
사람은 아는 척을 해 준다.
"오, 이런, 유비님이 아니시오!"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유비가 기쁜 마음으로 보니 바로 조조였다.
조조는 유비의 양손을 잡아 일으켰다.
"황건의 난 때 뵌 적이 있었지요. 그때 공이 많았던 현덕을
어찌 잊겠소이까."
영천(穎川)부근을 지나면서 단 한번 보았지만 조조에게도
유비는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대한
적이 없었으며, 유비가 스물 대 여섯의 시골뜨기에서 서른
둘이라는 나이의 고을 수령으로 변하였으니 언뜻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본래, 사람이란 외양이 별반 변하지 않아도 환경에 따라
분위기나 느낌이 적잖이 변하는 법이다. 그 전에는 아직
시골뜨기에 세상을 잘 모르던 유비였으나, 그간 나이를 먹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유비는 많이 다듬어져가고 있었다.
그것이 화정이 추측하는, 조조가 유비를 이제야 알아보는
이유였다. 유비는 조조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에 대해 내심
감탄하면서 겸손하게 답했다.
"저같은 사람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이렇게 많은 군중 중에서, 그것도 연합의 중심격인 사람이
알아준다는 것은, 더욱이 이런 위기의 상황에 그렇게 해
준다는 것은 보통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원소가 뒤에서 나섰다.
"맹덕, 그를 아시오?"
"황건을 파할 때 한번 만난 것이 있소이다. 유현령,
그간 무양했소?"
"진작에 알아뵈었으나 하찮은 졸오(卒伍)인 관계로 감히
말씀을 못 여쭈었습니다."
조조가 유비를 아는 체를 하자 이때다 싶었던 공손찬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그는 주변의 제후들에게 유비를 소개하면서
황건적의 난 때에 유비가 세운 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웠다. 화정은 그렇게 있는 공손찬을 보면서 유비가
은근히 무서운 사람임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여태 모른 척하다가 이렇게 주목받는 순간이 되어서야
얌체같이 소개하는 공손찬은 밉다만, 여하튼 이 일로 인해
유비는 적잖은 명성을 얻게 될 지도 모른다. 분명 유비는
가만히 있었으나, 공손찬이 알아서 유비를 추켜세워주고 있는
것만은 명백하다.
화정이 지켜본 유비는 그렇다. 늘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서
다른 인물을 시켜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배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생각해보라. 자신의 칭찬을 스스로 한다면 `잘난척한다'는
인상으로 변하게 되겠지만 다른 사람이 그의 칭찬을 해 준다면
그것은 `인정받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여하튼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친하다는 것만으로
저렇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리게 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공손찬과 친우라지만, 공손찬은 이미
유비를 약간은 업신여기고 있었고 훨씬 우위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꼭 소개하고 칭찬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공손찬은 알아서 유비를 천거하고 치켜세운다. 이야말로
유비가 진정으로 `칭찬받을 만한 사람' 이라는 사실의
간접증명이다. 아무튼, 공손찬의 자랑과 소개가 한바탕
쓸고가자, 원소 역시 그제야 유비를 조금은 알아보는 듯 했다.
그러나 자존심 센 명문가 출신인 그로서는 지난날, 중랑장
노식이 황건적을 토벌할 시에 그런 시골뜨기와 자신을 나란히
세워놓고 인사를 나누게 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많은 제후들 가운데 도겸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유(劉)가이시라면......혹시.......?"
유비는 도겸을 향해 조심스럽게 답했다.
"부끄럽게도 못난 이 몸, 감히 중산정왕의 손(孫)된다
여기고 있습니다."
황제의 먼 친척뻘 된다는 것은, 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자랑할 거리가 된다. 하지만 유비는 경솔하게 떠벌리지 않다가
이런 순간이 와서야, 그리고 이런 순간에도 저렇게 겸손하고
다른 이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을만한 태도로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 말을 아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화정은 유비가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라, 우유부단을
가장한 전략가임을 새삼 다시 느꼈다. 역시, 크게 될 인물들은
아무리 수하가 좋고 운이 좋고 이런 저런 이유를 달더라도 뭔가
지니고는 있는 법인가보다. 저렇게 기다림과 온유함, 겸손의
미덕을 적절히 사용하는 사람이 어디 흔하느냔 말이다. 원소는
손을 뻗어 제후들이 선 자리 사이를 비우게 했다. 유비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어찌 감히 제후의 열(列)에 끼겠습니까."
"그대의 관직 때문이 아니오. 이들이 모인 연유가 한실의
중흥이니만큼, 제실의 종손을 존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오."
원소의 제법 엄격한 말에 유비는 더는 사양 못하고 제후들의
사이에 들었다. 장비는 자신들이 일으킨 물의가 의외로 유비를
알리는 효과가 되자 기분이 좋은지 눈을 껌뻑이면서 헤죽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관우는 한시름은 놓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조가 뒤에서 눈동자만 굴리고 서 있는 다섯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뒤에서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맹기! 무엇하고 있는게냐?! 어서 그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굵직하고 호탕하면서 쩌렁거리는 그 음성에 마초가 적잖이
당황했다. 군중들이 그 쪽을 바라보니 마등이 그 사나운 눈에
분노를 가득 담고 섰던 것이었다. 마초가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태수님."
아버지에게 태수님이라 하는 마초를 보면서 조금 놀랐지만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아버지에게 아버님도
아닌 태수님이라 하는 걸까. 그만큼 엄격하다는 뜻일 것이다.
여하튼 마초가 운록과 화정 곁을 지나치면서 조그맣게 말을
건넸다.
"가자, 운록."
화정은 순간 조금 의아한 장면을 보았다. 늘 뻔뻔하기까지
하던 운록의 표정이 잔뜩 겁을 먹고 찌푸려졌던 것이다. 마치,
마초의 그 말이 도살장에 끌고 간다는 말이라도 되는 양,
운록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머뭇거리면서 운록이
약간 뒷걸음질을 쳤다.
"오라버니, 하지만 저, 저는......!"
"이 이상 거역하면 너를 용서치 않겠다!"
마초의 눈에서 순간 강한 노기가 번뜩이는 것을 본 화정은
자신까지 움찔했다. 늘상 화정에게는 따뜻하던 마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이야말로 화정이 삼국지를 읽을 때 생각했던
강인하고, 어떤 면은 냉혹하다 싶은 마초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 난 사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삼국지 속의 마초 맹기는 싸움과 의무만이 아는 딱딱하고
무뚝뚝한 느낌의 무장이라고......하지만 내게 따뜻하기까지
했던 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네게는......역시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많은 생각을 하면서 화정은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감내하였다.
그래도 나를......무뚝뚝한 겉모습에 속아주지 않고 진심으로
돕고 아껴준 것은 너뿐이었는데.......아니, 이것은 순간적인
표정이었을 것이다. 다음에 본다면 마초는 다시 화정에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여하튼 정작 고민이 될 것
같은 당사자, 운록은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마초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의 시선을 받으면서
마초와 운록이 떠나자 마등이 제후들을 돌아보았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제 아들놈이 실수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현덕공(公), 철없는 아들놈이 그렇잖아도 여기 올 때까지
신세를 졌을 터인데 이번에도 실수한 것 같구려. 아직 나이가
차지 못해 저지른 일이니 너그러이 마음을 쓰시길 바라오."
서량의 호걸답게 시원하면서도 무례가 없는, 공손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시원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던 마초와 운록 남매의 모습이 상기된 화정은 가슴이
아파왔다. 마초는 자신이 걱정이 되어 온 것일 뿐이었다.
아마도, 마등이 너무 바쁜 나머지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틈을 타서, 그녀에게로 재빨리 다가온 것일 게다. 만약에
자신이 방금 전의 청광체와 대면하지만 않았어도 큰 말썽
없이 마등의 부대로 조용히 돌아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화정이 어떤 고민을 하든 간에 유비는 온화한 낯으로 마등의
너그러움을 대하고 있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마공자는 오히려 긴 여정길에 도움을
주었는데 어찌 해가 되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방금
전의 일도 제 수하를 돕다가 오해를 산 일이니 이 비(備)가
절을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대뜸 굽혀 땅에 이마를 맞대어 깊은
절을 하니 마등이 놀라 손을 저으면서 황급히 유비를 일으켰다.
"이 무슨 일입니까, 현덕공! 제실의 종손께 절을 받다니,
공께서는 이 마등을 불충한 이로 만들려 하심이구려! 어서
일어나시오!"
"아닙니다. 마땅히 이 비(備)의 죄를 빌어야 합니다!"
"어서 일어서시오!"
두 사람의 실랑이에 지친 조조가 중재에 나설 겸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소, 수성. 유비공도 그만 하시오. 우리
동맹군들의 친분이 돈독함을 확인하게 되어 기쁜 마음을 누를
길이 없구려.......그런데 유비님, 저쪽의 네 분들은 어떤
분들이오? 또한 수성공, 아까 맹기공자가 데리고 나간 사람은
또 뉘요?"
여하튼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솜씨는 역시 일류다. 화정은
능란한 조조의 말솜씨에 조조는 현대시대로 오면 MC나 아나운서,
또는 변호사를 했다면 엄청나게 성공을 거두었을 거라고
생각해보았다.
"그저 맹기가 데리고 온 우리집의 몸종이었을 뿐이오."
`몸......종......!? 이럴 수가......너무 하잖아!'
마등의 말에 화정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물론 보통사람과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운록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될 것이었다. 게다가 마등의 집안
같은 제후의 가문에서, 몸단장과 행실에 힘써야 할 규수가
이런 곳에서 남장을 하고 봉을 휘두르고 다님도 일종의
망신일 것이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태도라
생각했을 때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어찌 자식에게,
아무리 그렇다해도 몸종이라 한단 말인가! 먼 친척 정도로만
말했어도 나쁘지는 않았을 텐데. 운록의 양가집 규수로서는
어긋난 점들, 예를 들어 무술에 관심을 쏟고 남장으로 바깥을
돌아다닌다던가 - 이건 화정과 동일하다. 화정은 어느새
타락한 양가집 규수 타입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 그
지나칠 만치 경계심을 세운다던가 하는 것들에 대해, 이유를
추리해 낼 수 있었다.
억눌리고 늘 감시받는다. 바깥으로 나돌아다니지도 못하게
제약받으면서, 어느새 바깥으로 마음껏 돌아다니는 오라비들에
대해 부러움과 시기를 지닌다. 그 결과 몰래 꾀를 써서
오라비들의 흉내를 낸다. 그것은, 아무리 계집아이로서
사랑을 받고 몰래 관심을 받아도, 절대로 충족될 수 없던
운록의 허전함을 채우는 한가지 방편이었을 것이다.
화정 역시 억눌려 지내기는 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인정을 받고 안 받고의 차이인가. 사람이란,
사소한 요인으로도 이렇게 현저하게 달라져가나.......?
새삼 운록이 가엾어졌다. 얄밉게 보았던 운록이지만, 진심으로
가엾고 운록을 대신하여 화까지 나려 한다. 여지껏 본 마등의
호탕하고 시원한 이미지가 한순간 깨져갔다. 화정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유비가 조조에게 포권을 하면서 공손하게 답했다.
"이 쪽의 두 사람은 제 의형제들입니다. 이 쪽의 수염이 길고
청포를 걸친 사람은 제 바로 밑의 아우로 관우(關羽), 자는
운장(雲長)을 사용합니다. 여기의 청색 두건을 쓴 이는 막내
아우입니다. 장비(張飛) 익덕(翼德)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쪽의 수려한 서생은 뉘요?"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리고 있었지만 두건을 미처 쓰지
못했던 화정을 가리키면서 조조가 물었다. 남장을 하고 있는
덕에 서생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그 시대에는
여자가 남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었다. 앞서 화정이 생각한 것과 같이 여자가 남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규수로서는 물론 다른 평민들이라해도
잘 행하지 않는 괴이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만약, 여자가 군에서 종사한다하여도 여장 그대로
일한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도 언뜻 있었다. 물론 무예에
뛰어난 여자라면 당연히 갑옷차림이겠지만 그 정도의 여자가
어디 나오기 쉬운가. 남자와 여자는 물리적인 힘에서 차이가
난다고 아예 태어날 때부터 못박아놓던 시대다.
여군이 창설되고 여자 국회의원도 신나게 나오는 화정의
시대는 아니다. 왜 자신이 남자 취급을 받나, 하는 것을 그렇게
따지고 나니 왜 하필 서생이 될까, 하는 추리가 남았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니 화정의 가냘픈 몸으로는 무사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추리가 된다는 까닭이었던 것이다.
"아, 이쪽은......"
유비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서 화정은 고개를 숙이고
정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유현덕공의 고향사람인지라 모시게 되었습니다. 미천한
이름은 유하(柳河)라 하며, 자는 화정(和貞)이라 쓰나,
실제로는 자를 더 많이 씁니다. 뵙게되니 일생의 영광입니다."
아, 이제는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소개까지 해 낸다. `장하다,
유화정, 훌륭하다 유화정!' 속으로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표정은
고요하기 짝이없는 그녀에게 조조가 얼굴을 찌푸렸다.
"용모가 굉장히 아리땁군......절대로 남아(男兒)의 용모라
생각이 안 되네......자(字)도 상당히 여성스럽지 않은가.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좀 궁금하구먼. 영문이 있는가?"
화정은 속으로 뜨끔했다. 역시 조조다웠다. 하기는,
삼국지에서 조조는 본디 날카로운 통찰력과 예민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호색(好色)하기로도
매우 유명한 그답게 여자에 대해 잘도 알아본다.
하지만, 여태 속여왔는데 여기서 여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나 욕해주시오.' 하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알아서 잘 둘러대자 싶었던 그녀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제 위에 형님이 여섯 분이나 계십니다. 그런 영문으로, 제
부모는 이 사람이 딸이길 바라신지라 성명을 화정이라
지으셨다가 아들이기에 하(河)로 바꾸신 까닭입니다. 자는
그래서 그대로 화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미천한 것도
나름대로 불만이 많으나 어찌 감히 부모께서 지으신 것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잘한다, 유화정! 그녀도 되는대로 내뱉었지만 정말 타당성
있는 이유였다. 현대시대에서 성실하게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읽은 것에 대한 보상일 거라고 화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이 잘 만들어진 과거를 신나게 써먹을
생각이었다. 그런 야비한 화정에게, 역시 나관중의 묘사에서도
야비하기로 유명한 조조가 만족하는 표정을 지어주기까지
하고있다.
"하하하하, 자네는 말솜씨가 상당한 것으로 보아 분명
영민한 자렷다. 현덕공을 잘 보필하게."
호탕하게 웃으면서 치하하는 조조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면서 화정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원소는 아예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분명 또 `미천한 신분의 놈'
이라는 말을 속으로 씹고 있을 까닭이리라.
원소와 조조의 차이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신분으로 사람을
판가름하는 원소와, 조금 요주의 인물이라 싶으면 신분의
고저(高低)를 막론하고 말을 걸어보고 접촉해보는 조조. 그리고
몇 년 후면 두 사람은 그 차이의 결과를 가리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은 실력위주라는 기본 법칙을 몇 천년이나 일찍
터득한 신세대 사고인인 조조가 유리할 수밖에.
"오늘은 현덕공도 알게 되었으며 현덕공의 수하 사람들도 보게
되었소. 이 어찌 아니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소? 허나 야습을
간과할 수는 없소이다. 그러니 본론으로 들어가 방금 전의 야습을
어느 정도 진압했으며, 어느 정도의 피해가 있었는지를 알아봄이
마땅하다 생각되오."
조조의 말에 원소가 헛기침을 하면서 답했다.
"흠, 그러나 야습은 여기에서 발견되었다는 청색 물체가
사라진 후에 멈추었소. 여기의 이 서생과 유비공의 아우님
되는 이 분에게 묻는 것이 옳소."
말은 조금 돌렸지만 장비와 화정의 이름조차 말 않고
`서생'과 `유비공의 아우'로 돌려 말하는 점에서 원소의
성격을 약간 엿볼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은 이런 하찮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기억할 여유는 없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은 것이리라.
화정은 얼굴을 찌푸리려던 장비가 관우의 헛기침소리로 인해
눌러참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얄밉다. 속으로 혀를 차던
화정은 그러나 장비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자신이 말하는 편이
낫겠다싶어 선수를 쳤다.
"감히 제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방금 전의 물체는 아귀강시가
아닌 청광체였습니다."
"청광체라면......."
"아귀강시들과 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아귀강시들을 통솔할
줄 안다고 알려진 사물(邪物)말인가?"
말꼬리를 길게 끄는 원소의 말을 가로채면서 원술이
거만하게 물었다. 아예 공손찬의 객장(客將)밖에 안되는 유비,
더더구나 또 유비의 수하이기까지 한 사람 따위에게는 존대도
필요없다는 식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화정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을 뿐 아무런 답은 하지 않았다. 조조가
재촉했다.
"좀더 소상히 말해주시오."
"말씀 놓으시지요, 맹덕공."
화정은 차분하게 권유했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화정은 뒤에서 원술이 치를 떨고 있는 모습을 슬쩍 살펴보았다.
일부러 원술을 무시하고 조조에게 말을 놓을 것을 권유함으로써
조조의 공손함을 교묘하게 치하한 화정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화정은 도리어, 자신에게 이를 가는 듯 보이는 원술을
보면서 `내 의도를 꿰뚫어보다니, 생각보다 제법이군.'이라고
속으로 깔보고 있었다. 이런 순간들에는 늘,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아버지가 너무나 감사하다.
"그렇다면 말을 놓겠네.......아무튼 소상히 말을 좀 해주게나."
"청광체는 사현이란 자의 조종을 받는 듯 했습니다. 우리 군의
전력을 알아보려 하는 듯 했으나, 소생이 거절하였더니 소생을
공격했습니다. 맹기 공자께서 소생을 돕고자 청광체에게 창을
던졌던 것입니다. 청광체가 없어졌으니 아귀강시들도 사라진
것이겠지요."
"이것 참, 훌륭한 장남을 두시었소, 마수성,"
"서량은 더욱 더 번성하겠구려."
아무튼 고마운 마초였다. 그를 위해서 칭찬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않은 화정 덕에 누명을 벗은 마초에게 쏟아지는
찬사들이었다. 마등은 조금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다시 얼굴 표정을 굳혔다. 참으로 공사의 분간이 똑
부러지는 사람인 듯하다. 아무튼 조조는 걱정스럽게 원소를
돌아보았다.
"맹주(盟主), 동탁이 주술사까지 동원한 모양이오.
우리측에는 주술사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소이까?"
그 말에 작은 눈을 슬며시 뜨고 있는 원소도 걱정이 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어두워진 낯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는데 원술이
곁에서 잘난척 나섰다.
"나와 맹주의 군중에는 주술사가 있소, 게다가 여러 제후들이
거느리고 온 군사가 많으니 어찌 주술사가 하나 없겠소? 근심할
문제가 못 되오이다. 맹덕께서는 지나친 근심을 거두시오.
사현이라는 자가 비록 이름난 주술사이기는 하나, 그도 한번
패했으니 이후에는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오."
`너 잘났다! 그러면서 왜 마초가 청광체를 죽일 때까지
그렇게 열세였냐?!'
속으로 화정은 콧방귀를 뀌었다. 저도 모르게 빈정거림이
자동으로 나왔다. 이미 원술은 곱게 보이지 않는 화정이었다.
조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또다시 강시들이나 여타 사물들이 덮쳐온다면
속수무책이오. 그들은 은으로 된 무기를 써야 효과가 있으니,
일반 병사들이 어찌 그들을 당한다는 말이오. 게다가 은 없이도
타격을 줄 정도의 용사들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지 않소.
그렇다고 은으로 된 무기를 일일이 제작하여 분배하기에는
재정난이 너무 크오."
현실적인 조조의 명판단이었다. 그러나 원술은 콧방귀를 뀌었다.
"너무 근심이 과하오. 안 그렇소, 맹주."
콧방귀 뀌는 소리도 어쩜 저렇게 품위가 없냐. 원술이
너무나 싫었다. 삼국지에서도 싫었지만 실제로 겪는 저 사람은
정말 더 싫다. 아마 앞으로도 원술의 행동 하나하나에 모두
트집을 잡고싶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짜증나고 싫기는
오랜만이다. 이준혁이라고 해도 저것보다는 안 얄미웠다.
사촌이라는 핏줄을 이용해 원소의 동의를 끌어내려는 것이겠지,
화정의 부정적인 예상대로 원소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촌들끼리 죽이 척척 맞는다고 속으로 가만히 말해보았다.
"그렇군, 아무튼 지금은 손실이 너무 크니 일단은 뒤처리를
하는 것에 주력합시다. 곧 사수관으로 공격하여 들어가겠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군에게 불리하오. 그러니 신속하게
뒤처리부터 합시다. 이후의 문제는 더 있다가 논해도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오."
조금 거만하고 고지식하기는 해도 역시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에 능숙한 원소였다. 말 하나는 참
번지르르하게 포장도 잘한다. 조조는 불만에 찬 얼굴을 했으나
이내 그 표정을 거두고 동조했으며 나머지 제후들도 찬성했다.
"그럼 이만 막사로 돌아가도록 하세."
온화하게, 타이르듯 이야기하지만 세 사람을 유심히 살피는
유비의 시선에 장비가 움츠러들고 있었다. 유비의 시선은
한마디로 `두고보자.' 하는 그런 것이었다. 아마, 네 사람이
개인적으로 모이게 되면 그때 질책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화정도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는 화정의 영향도
적잖은 것이 엄밀한 사실이니까. 그녀로서도 죄책감이 없을
수가 없다. 관우는 헛기침을 하면서 유비의 뒤를 따랐다. 장비는
좀 떨어진 곳에서 운록과 함께 마등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는
듯한 마초를 눈으로 흘겨보면서 킬킬대다가 - 곧 자신도
꾸지람을 들을텐데 참 생각도 없다 - 발걸음을 옮겼다.
*******
천천히, 화정을 훑어보는 유비의 시선에는 그녀를 재관찰하는
듯한 의도가 묻어있었다. 화정은 그런 유비의 눈길이 어딘지
모르게 쑥스럽게 느껴져서 고개를 숙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한참 뒤에야 유비는 화정에게서 눈길을 떼고 대신 장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치 챌
것이다. 아직 서먹한 곳이 많은 화정보다 일부러 장비에게
질문을 돌린 것이다. 실상 질문을 하려던 대상은 화정이다.
유비의 차갑고도 고요한 음성이 묻은 그 질문에 장비의
고리눈이 가늘게 떠졌다.
"모르겠수.......사실 나는 아귀강시와 정신없이 싸운 것
밖에 없소, 큰 형님.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아귀강시들이
떠드는 소리가 하나같이......"
"익덕님, 사현이란 자의 아귀강시들이었습니다."
이크, 싶었던 화정이 재빠르게 장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신 때문에 아귀강시들이 몰려온 것이 사실인 지도 모른다.
여하튼 모두들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것은 미안하기에 앞서
큰일날 소리였다. 자칫 잘못하면 외부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는,
첩자로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솔직한 것이 탈인
장비야 죄가 없지만.
화정의 급작스런 말에 유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어라
하려 했다. 그러나 정말 반갑지 않게도, 관우가 - 화정에게
있어서 이 관우란 사람은 도무지 호감을 주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철저한 것이야 좋지만 무슨 의심이 저렇게도
많은지 화정이 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세세히 살피고 있는
눈치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관우는, 이번 사건이 터져서 유비가
화정과 장비를 데리고 이곳으로 올 때, `드디어 문책할
기회가 왔군.' 하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하튼 관우가
나선다는 것은 구렁이 담넘어가듯 넘기기가 곤란해진다는
신호다 - 나섰다.
"익덕, 소상히 아뢰게.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야!"
초조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를 물건 때문에
아귀강시들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사정이 그렇다보니, 화정의
입장에서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관우는 얼씨구나, 하고 화정을 내칠 궁리를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녀가 아는 장비는 너무나 솔직한 것이 탈이니,
분명 들은 대로 모두 이야기 할 거라 생각되었다. 화정은 관우가
장비에게 캐듯이 묻자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서러워졌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별 소리는 못 들었수. 단지 사현이란 놈이 보낸 것
같았지만 단순한 것은 아니었는데......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을 뿐이우."
의외로 장비는 화정의 손을 들어주었다. 들었던 대로 말하지
않고, 돌려 하는 말. 그 순간만은 장비가 `겨울동화'에 출연했던
연예인 원반에 필적하는, 정말 멋지고 잘생긴 미남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장비가 이런 짓을 할 줄 안다는 것 자체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여하튼 화정에게는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던 사람이
던져진 동아줄을 붙들고 구원받은 것에 필적하는, 그런 증언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화정은 장비의 말에 조금 놀라면서, 또는 반은 고마운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고, 일행은 관우의 굵은 눈썹이 찌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시, 저 사람 내가 뭔가 불리한 입장이 되기를 바랬던
것 아닌가? 괜히 저 관우란 사람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관운장. 삼국지 소설에서는 꽤 좋아했었는데 말이야. 역시
사람일이란 직접 겪고 판단할 일이다. 속으로 싱글벙글하면서도
겉으로는 씁쓸하고 조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관우는 한참
말이 없다가 낮지만 힘있는 음성으로 말뚝을 박았다.
"그런가? 나는......아귀강시들이 화정의 물건을 찾고 있다는
목소리만 잔뜩 들었다네."
꼭 둔탁한 쇠망치로 뒤통수를 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루 사이에 이런 기분을 참 적나라하게, 몇 번이나 맛보네, 정말.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화정은 자신의 재수없는 팔자를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장비가 그 말에 사모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었으며
화정 역시 할말을 잃고 조용히 앉아서 자신의 발만 바라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천운이 움직여 정직하기
짝이없는 장비 익덕님이 잡아떼주셨어도 저 무서운 천하의
관운장께서 친히 증언을 하셨는데 말이다. 아니나다를까 유비의
미간이 참 많이도 일그러졌다. 관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분명 그 아귀강시들은 화정을 찾고 있었지. 익덕, 자네도 못
들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 푸른색의 괴물체와는 대면해보지
않아서 구체적인 것은 모르겠지만 말일세."
관우의 말에 장비도 대꾸하지 않았다. 화정은 깍지끼고 있던
양손을 더 굳세게 붙잡았다. 화정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굳게
먹자.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화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참, 끔찍한 세상이다. 여태 이 일행을 잘 속여왔다. 그리고 이
일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잘 속여왔다. 하지만......이제 모두
다 잘못하면 끝장날 판이었다. 초조하고 겁나는 마음에 속으로
눈물짓고 있었다. 곁에서 장비가 넌지시 곁눈질하는데, 유비의
목소리가 낮지만 강한 강제성을 띠고 들려왔다.
"......익덕, 자네는 물론이고....... 화정낭자, 사실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비(備)가 미련없이 낭자를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또한 믿고 있으니 낭자께서도 응당 말씀을 하셔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드럽지만 명령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지닌 말이었다. 그렇다.
이게 바로 유비의 특징이다. 소리지르고,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섭다. 게다가, 자신이 화정을 신뢰하고 있음을 바탕으로
깔고있는 그 요구는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화정에게 죄책감까지도 부여하고 있다. 동지로서 받아들이고
믿고 있다.......그럴테지. 그러니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미덥잖은 구석을 찾아내면, 그 사람이
더욱 미워진다. 그게 바로 사람의 속성. 화정은 잠시 망설였다.
장비는 머뭇거리면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화정이야 어릴 적부터 속마음을 감추는 것을 배워온 지라
능수능란하다지만, 저 우락부락하면서 순진한 무장은 얼굴에
그대로, 자신이 무언가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두렵다. 사실,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너무나 두렵다. 여기서 이들의 신뢰마저 잃는다면, 쫓겨날 수도
있다. 아니, 차라리 쫓겨나는 것은 양호하다. 그저 모른 척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하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우가 그런 자신을 살려두겠는가. 살인도 마음대로
못하던 화정의 시대가 아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어보았자
크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면 별 화제거리도 되지 않는다. 관우는
그런 장비와 화정을 곁눈질하면서 연신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화정은 결단을 내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 이들은 최소한 동지들이고, 제갈량을 찾을
때까지는 곁에 있어야 해. 그리고 그다지 큰 문제도 아니었으니
말해주는 것이 좋을까? 사실, 내가 크게 잘못한 점은 없잖아......
그런데 그......무경미석이란 것이 대체 뭐지? 뭔지는 모르지만
이들이 의심을 품을지도 모르니 무경미석 이야기는 대충
얼버무려야겠다.'
너그러운 사람이다. 너그러운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화정이 판단한 바에 의해서도 역시 그런 사람이 바로 유비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정을 적당히 설명하고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도리어 자신을 이전보다 믿음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장비와 관우의 반응도 신경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여하튼, 도박이지만 해 보자. 그렇게 단단히 결심을 한 화정은
유비의 평온하지만 사실은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미안한 느낌도 들었다. 자신이 여자임을 알면서도
무시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기색 없이 잘 대해 주었다. 저런
사람을 속이기는 확실히 미안하고 양심에 걸린다. 하지만 사람이란
늘 모든 것을 보이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입니다.....단지 주공께서 놀라실 듯하여 말씀올리지
않으려 했을 뿐이니 큰 실례, 용서하여 주십시오."
곁에 서있던 관우의 눈빛이 `역시......'하는 뜻을 담고 매섭게
번뜩였지만 유비는 부드러운 웃음을 띠면서 포권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현덕은 천하를 위해 일어난 이상,
어떤 이야기라 하더라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서슴없이 말씀하시지요."
"잠깐, 형님......."
관우가 갑자기 유비를 가로막았다. 화정은 무서운 관우가 또
나서자 불안해졌다. 한마디로, 바짝 쫄았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상황을 응시했다. 여하튼 관우는 자신에게 까닭을
묻는 유비를 만류하고는 화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정, 양해해주게. 익덕도 존대를 버린 이상, 나나 큰
형님도 당연히 존대를 버려야 도리라고 생각되네만."
화정은 관우에게 포권하면서 답했다.
"말씀대로입니다. 편하게 대하시지요."
유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관우는 헛기침을 하면서
유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찬성해보였다.
"......그렇다면 말을 편하게 하도록 하겠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싶군."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겪은 상황을 아뢰도록
하겠습니다......사실 그 아귀강시들은......동탁의 주술사가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
"동탁의 주술사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래, 도박이란 이런거다!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도박과 거래의 실전을 배우겠어!'
빈말이 아니라, 애써 침착을 가장하고 있는 화정의 타는
속도 모르면서, 유비가 움찔했고 관우는 흥분한 나머지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장비는 말없이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섰을 따름이었다. 저렇게 조용한 장비가 오히려 믿음직하고
좋았다. 거듭 강조하지만 저럴 때의 장비는 원반보다도 몇
백배는 더 멋져보인다.
아, 관우도 저렇게 행동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되면 장비보다 인물이야 관우가 훨씬 좋으니 아마 원반이 아니라,
현대 한국 미남의 대명사라는 탤런트 장동간보다도 더 잘생기게
보일 것이 틀림없다. 에그머니, 내가 또 무슨 쓸데없는 잡담이야,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화정은 이 상황에서도 태평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있는 스스로에게 한바탕 욕을 했다.
"천하의 모든 군들이 동탁에 반하여 이 연합군에 속해있다!
그런데 동탁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면 내부 반란이라는 뜻이
되는건가?!"
"그만하게, 운장."
흥분한 관우가 무어라고 더 말하려고 하면서 화정에게
다가서려하자 유비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화정은 그 둘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
"화정!"
"무엇이?!"
유비의 눈이 옆으로 길게 흩어졌고 장비도 놀라면서 화정의
이름을 불렀다. 관우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화정의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게 누구란 말인가?!"
"바로 접니다."
처음에는 어안이벙벙해서 뻥한 표정을 지었던 관우와 유비,
장비의 얼굴에 곧이어 경악이 떴다. 그 세 사람의 표정은 말
그대로 `황당'과 `후회'라는 것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에,
뒤에서 유비가 낮게 탄식했다.
"우리가 동탁의 첩자를 받아들였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공. 저는 동탁의 첩자가 아닙니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이 느낀 화정이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지만......
"아니긴 무엇이 아니냐! 이제는 살길 찾아 빠져나가려 하다니!"
성질 급한 장비가 본성을 못 이기고 화정의 부인에 화를 벌컥
내면서 사모를 꼬나쥐고 덤벼들었다. 곁에서 관우가 그 매서운
눈을 흡뜨고는 자신의 언월도를 치켜들었다.
"말이 필요 없다. 나도 거들겠네, 익덕."
까딱 잘못하면 화정의 목이 그 자리에서 안녕, 하고 날아갈
판이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만류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만들 하게!"
관우마저 덤벼들 태세를 취하자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서 손수
두 사람을 막아섰다. 유비의 만류에 장비가 막사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이건 얘기가 끝난거유, 큰 형님!"
여지껏 모종의 이유가 있겠다 싶어 편을 들어주었던 장비도,
화정의 `자신이 아귀강시를 움직인 것이 옳다.'라는 말 한마디에
결국 급한 성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관우야 이전부터 화정을,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못마땅하게 보아왔으니 지금 이 상황을
기회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핀트가 맞다.
여하튼 화정은 하지만, 늘상 그렇듯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궁지에 몰린 사람의 침착한 태도는 다른
이에게 깊은 인상과 함께 `혹시......'하는 재판단의 필요성을
심어준다. 화정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관우와
장비의 행동이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냉랭하게
유지했으며, 그녀의 그 판단은 유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렇지 않다. 화정의 태도를 보아라."
그 말에 장비가 씩씩거리면서 화정 쪽을 바라보았고 관우 역시
아직도 성난 표정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
"저런 뻔뻔한! 계집들이란 하나같이 저렇다니까! 큰 형님,
왜 말리셨수?!"
역시 장비다. 화정이 계획한 `급박한 상황속의 침착이 주는
장점'같은 법칙에는 전혀 휘말리지 않는다. 어쩌면 저렇게 단순한
것이 오히려 계략같은 것에 휘말려들지 않는 요인일 지도 모른다.
여하튼,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태도로 똑바로 세 사람을
응시하고 있는 화정의 모습에 관우가 멈칫했다. 그러나 장비는
더 화가 나서 까만 얼굴에 벌개진 낯까지 띄우며 펄펄 뛰고 있었다.
잘못하면 장팔사모가 화정의 여린 몸을 꿰뚫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조금 무섭기는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관우가 손을 들어 장비의
팔을 붙들었다.
"익덕, 가만히 있게."
"이젠 운장형님까지 그러시는 거유?!"
"자네는 아직 서툴군! 아무나 저런 당당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네! 더더구나 아녀자가 그렇게 초연할 이유는 많지 않다!"
`현실에서는 여자들이 더 무서운데. 아무튼 다행이다.'
화정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관우의 뼈있는 말에 장비는
창을 내렸으나 아직도 여차하면 내려칠 태세였다. 유비는 아직도
못마땅한 구석이 남은 표정으로 화정을 응시했다.
"좀더 자세히 말을 해보시게."
화정은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차근히 설명해나가자. 그러면
뭐 어떻게 해결을 보겠지, 하고 나름대로 계책을 짜고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아귀강시들을 움직인 것은 접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님의 수하이지 동탁의 첩자는 아닙니다. 정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화정은 저 아귀강시들을 움직이게 하였지만
사실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모르고 있습니다."
"!"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유비의 미간이 찌푸러짐과 동시에 장비의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이해가 족히 간다. 아귀강시와 사람들의 의사소통이
아주 쉽다면, 이것은 정말 웃기는 소리다. 게다가, 화정이
한 말은, 시험 문제를 출제한 선생이 답을 하나도 모른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자신이 문제를 출제했다고 하고는,
그 답은 전혀 알 수가 없다면서 채점을 못하는 선생을, 어느
누가 믿겠는가.
두 가지 평가가 내려진다. 농담이거나, 어디 아픈 사람이라는.
여하튼 그렇게 어이없는 답을 하고는 스스로도 기가 막혀지는
화정의 앞에서, 관우는 또다시 나서려고 바둥거리는 장비의
팔을 아예 붙들어버렸다. 유비가 자신의 의제들을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좀더 소상히 말씀을 하시게."
"일단, 아귀강시들과 의사소통이 안됩니다, 저는......."
"기껏 아귀강시들과 의사소통이 안된다니, 좀 너무한 듯 싶군."
관우가 화정을 향해 중얼거렸다. 맥이 탁, 풀린 목소리다.
아까의 경우에 빗대어 말을 하자면, 관우는 `어디 아픈 사람이다.'
식의 판단을 내린 것 같다. 스스로도 신세가 처량해져서 속으로
한탄하고있는 화정에게, 유비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는가."
화정은 유비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
실제로 자신도 원인을 모르는 일이며, 이것은 모두 명백한
사실이다. 이럴 때는, 유비같은 사람에게는 어떤 확신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화정은 유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진심을 담은 것이었다. 미안하고, 자신도
당혹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적인 것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허나,
적어도 절대 주공을 반(反)하는 일만은 없을 것임을 제 목을
걸고 맹세드립니다."
"......."
그렇게나 사적이라는데 어느 누가 질책을 하겠는가. 게다가,
특히 유비나 관우같이 인덕이나 사람의 정,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말이다. 관우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반면에
유비는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화정에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곁에서 장비가 겨우 참는 얼굴을 하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화정은 얼른 더 설명했다.
"아귀강시들이 무엇인가 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그 청색의 괴물체는 자신이 청광체라고
이야기했으며 저와도 의사소통이 되었기에 약간의 힌트를
얻었던 것일 뿐입니다. 제게서 어떤 물건을 얻기를 원하며, 그
물건을 위해서 침범하였다 하였습니다."
"청광체! 그것이 청광체였단 말인가!"
관우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화정을 향해 외쳤다. 화정은 잠시
의아했다. 자신이 분명 아까 군중 앞에서 청광체라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관우나 그 일행은, 유비가 상관에게 걸리고
눈에 뜨이게 된 것이 너무나 신경쓰였던 나머지, 그다지
신경써서 못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기억을 못 하고 있었거나.
"그것이......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아무튼 그 청광체가 얻고 싶은 바가 있기에
아귀강시들을 몰아 저를 위협한 것이라 사례됩니다만."
"사실인가?"
되묻는 유비를 향해 화정이 허리를 공손하게 굽혀보였다.
"뉘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사실이라면 큰일이로군."
유비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탄식했다. 이 정도만 설명해
주었지만 고맙게도 유비 삼형제는 믿어주고 있는 눈치다. 만약
화정 자신이었다면 `혹시 거짓말 아냐? 이런 말도 안되는 경우가
어디있어?'하는 식의 의심을 계속 했을텐데 말이다. 하긴,
세상에는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는 법이다. 표정 몇 개와 말
몇마디에 믿어주는 것을 보면 화정의 연기실력도 꽤 괜찮은
모양이다. 장비는 상황이 어느정도 설명이 되고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창을 거두고는 끼어들었다.
"큰일이라니? 무엇 때문에 그리 생각하시오, 큰 형님?"
"아직 멀었구나, 익덕...... 현덕 형님께서는 앞으로도
화정이 있는 한 아귀강시가 계속 덤벼들 일을 헤아리고
계시는 것이다."
관우가 근엄하게 꾸짖자 장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깟 더러운 사물놈들 내 사모 한 자루면......."
"익덕, 자네 아닌 다른 사병들은 아귀강시에게 상처조차도
낼 수 없네."
관우의 비아냥이 섞인 말에 장비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물러났다. 역시 장비는 관우에 비하면 생각이 짧다는 것이 이런
상황들 속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관우는 유비를 응시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형님. 이대로라면 화정낭자는 큰 폐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화정은 화가 나는 것을 가까스로 눌러참았다. 정말 화딱지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정에 의한 피해가 확대되면 좋을 것이 없으니
화정을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거나 동행을 중지시키는 방안을
검토해보라는 뜻인 것이다. 사실, 유비나 관우의 입장에서는,
무예도 별다르게 뛰어나지 않으며 여지껏 큰 도움도 되지
못한데다 되려 폐를 끼치는 화정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하다. 하지만, 갑자기 사람을 저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리려 하다니, 화정으로서는 말 그대로 기분이 `더러워지는'
일이었다. 그것도 바로 면전에 대고 저런 소리를 한다. 왜 관우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미지가 한없이 깨지려고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소위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 아무리 능력이 없기로서니 저렇게
태도가 급작스럽게 바뀌는 것은 누가 봐도 좋은 일은 아닐텐데
말이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차라리 아귀강시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방도를 찾아보는 것이 옳다. 화정은 누가 무엇이라 하여도
우리 형제의 편에 서 준 사람인데 어찌 그 은혜를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역시 유비다. 유비는 정말, 정말, 진실로 후세까지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 구원이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유비의 행동같은
것을 만났을 때를 표현하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유비의 단호한
말에 화정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감격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위태한 입장인 그녀는 꾀를 써서,
짐짓 겸양을 한번 떨어보였다.
"아닙니다......폐가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떠나야겠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그건 절대로 안될 말이네! 유소저를 이런
식으로 떠나보낸다는 것은 절대로 이 현덕이 용서받을 수 없을
일이야!"
속으로 킥킥거리면서도 화정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관우는 곁에서 불만스럽게 끼어들려다가 유비의 눈총을 받고는
말없이 물러났다. 이럴 때의 유비는 평상시의 무서운 관우보다
더, 갑절로 무섭고 영향력 있다. 말 그대로 `큰형님'답다.
그들의 막내인 장비는 `첩자만 아니면 상관없잖수?'하고
중얼거리다가 관우의 헛기침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여담이지만,
화정은 사실,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었다. 관우와 장비의 달갑잖다는
태도와 비교했을 때 유비의 친절하면서 정성어린 태도는 화정을
충분히 감격하게 만들고도 남았던 것이다.
겉모습은 야무지고 차갑지만, 속마음은 여리기 짝이 없는 화정은
의외로 이런 면에서의 감격을 쉽게 하는 편이었다. 사람이란
그렇다. 각박한 상황에서의 너그러움 한 줄기는, 좋은 상황에서의
은총 몇 다발보다도 훨씬 사람을 감격시키는 것이다.
"아무튼, 다음에 청광체가 또 온다면 화정은 무슨 영문인지를
잘 알아두면 좋겠군. 그래야 방도를 찾을 것이니."
유비의 말에 화정은 예를 취했다. 관우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아직도 미간을 찌푸린 채 서있었고 아까는 사모를 들고
날뛰던 장비는 하품을 늘어져라 하면서 유비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유비는 곁에서 환하게 타고 있는 초를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어있었다. 그리 조용한 틈을 타서 장비가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화정, 한가지만 말해봐라. 정말로, 꼭 동탁이
아니더라도 우리 형님의 정보를 빼내는 첩자는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겠느냐?"
생각보다 장비도 쓸만한 소리를 할 때가 많다. 조금은 낯선,
장비의 총명한 말에 화정은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익덕께서 원하신다면 혈서(血書)라도 써 증명하겠습니다."
대번에 품을 뒤지면서 종이를 찾는 착실한(?) 장비의 앞을
관우가 가로막았다.
"그런 것은 아니네. 그러니 화정, 자네를 이제부터 정식으로
우리측의 동지로 대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당연히 상하는 생기는
법일세. 큰 형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나와 장비가 자네의 상전이
되는 셈이지. 여인의 몸이지만 자네라 부름은, 그 정도로
자네의 능력을 믿고 동지로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받아주게."
관우는 엄격하게 말하면서 뒤를 돌아보아 유비의 동의를
구했다. 관우의 시선을 받은 유비는 화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겠는가."
참 섬세한 사람이다. 이런 일을 겪는 와중에도 화정의 마음을
걱정하고 있다. 정말로, 정말로 아버지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화정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유비의
조심스러움이 담긴 물음에 화정은 다시한번 감격하면서 답했다.
"응당 있어야 할 일입니다. 마땅히 이 화정, 따를 것입니다."
화정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단순한 장비는 벌써 가라앉아있음이요,
관우는 아직도 덜 풀린 눈으로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유비는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로 화정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서 막사로
돌아가 쉬는 것이 좋겠다고 타이르고 있는 유비를 보면서 관우는
`형님께선 때로 답답하시군.......'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장비는 관우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도 별 말 없이 자신이
쥐고 덤볐던 사모를, 칼날을 아래로 하여 바닥에 놓았다.
참 단순하다. 칼을 쥐고 덤비던 때는 언제고 금세 무기를
내려놓고 마음편하게 쳐다보고 있다. 역시 스트레스가 없는 장비다.
유비는 자신의 아우들을 돌아보다가 화정을 보았다.
"......세 명이 있을 때는 마땅히 화정이라 부를 것이나 다른
이들은 화정을 여인이라 생각 않고 있으니 나가서는 자네가 으레
칭하듯이, 유하(柳河)라 불러야 옳겠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를 화정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자를
부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이들 앞에서도 화정이라
부르심이 옳다 여기고 있습니다."
참 능숙하다. 어느새 이 세계식 말투에도 너무 익숙해져 간다.
이러다 문득, 현실세계로 돌아가면 이런 말이 나오는 것 아닐까?
관우가 물었다.
"굳이 유하라는 이름을 쓰는 것에 연유가 있는지 물어도
괜찮은가?"
기분이 나쁘다. 어쩌면 저렇게 자신이 회피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가라앉아버린 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비는 화정이 그 대답을 묻어두고 싶어함을
눈치챘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관우와 장비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일로 서로들 피곤했으니 이만 물러가거라,
화정. 힘들겠구나."
유비의 따스한 말에 화정은 감격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막사를
나왔다. 그녀는 하루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벌써 밝아져온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관우의
마지막 질문이 생각났다. 유하라는 이름을 쓰는 이유......
유하......그 이름을 쓰는 이유......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그 이유......
`유하.......'
과거, 너무나 사랑했던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지유하.
화정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상처입게 만들었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씨성을 지닌 화정으로써는 그녀의 성은 잊고
이름만을 쓸 수 있었다. 엉겁결에,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알고보니 그것이었다. 기분이 울적해졌다. 이런 기분은 싫다.
얼른 이 기분을 지워야지. 화정은 그 생각을 떨구어내고는
어느덧 다다른 자신의 막사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지럽혀진 막사 내부를 본 화정은 흠짓했다.
`무경미석.......'
이런 단어가 다시 생각났다. 분명 청광체는 그것을 찾고
있었으며, 화정이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이 세계에 온 뒤로, 참 오랫동안 소지품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가방을 들고는 다녔지만, 뒤져보지는 않았다.
갑자기 흥미가 생긴 화정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향수도 기억해낼
겸, 혹시 쓸모가 있는 것이 있는지 자신의 소지품을 뒤져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핀 뒤에 자신의 책가방을
꺼냈다. 하나씩 물건을 꺼내보았다.
곱게 접혀있는 교복과 구두.
노트 몇 개.
불통이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꺼놓은 핸드폰.
그리고.......
`이건......'
화정은 조심스럽게 삼국지(三國志)책을 꺼내들었다. 네 권
정도가 있었다. 그녀는 생각없이 삼국지 책을 펼쳤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첫 권의 가장 첫 페이지였다.
`......18제후........'
생각없이 책장을 넘기려던 화정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책의 첫 부는 18제후 집결이다.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책의 가장 앞부분. 그 시간대에 떨어진 그녀의 신세.
분명 연관성이 있었다. 자신이 지닌 책의 가장 앞 권이었기에
혹시, 이 18제후의 집결시대로 오게 된 것이 아닐까? 에이, 너무
넘겨짚은 생각이다, 애써 이렇게 면박을 해 보았지만 역시
기분이 이상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천천히
책장을 넘겨보았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이 슬슬 넘겼는데, 눈에
들어온 구절 중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눈을 찌푸리고 읽어보니,
책에는 분명 이런 구절이 생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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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유비가 그녀를 슬몃 보니 대단한 미인이었다. 이 세상
여인같지 않으리만치 새하얗게 빛나는 백옥같은 피부는, 부드럽고
긴 검정 머리칼과 묘하게 잘 어울렸으며, 오똑하고 높은 콧날에
적당히 붉은 입술은 매우 조화로웠다. 수심을 가득 담고 있는,
하늘같이 맑고 빛나는 눈동자는 특이하게도 회색이었으며, 눈매가
매우 아름답고 또렷하였다.
가냘프고 마른 몸매는 특이하게도 남장을 하였으나 가히 천상의
자태라 할 만하였으며 목소리 또한 조용하고 침착하여 옥구슬이
구르는 듯하였다. 유비는 스스로 `이 여인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가현신녀(佳賢神女)이심에 틀림없다!'하며 감탄하였으니,
실로 놀랄 일이 틀림없다. 여인은 유화정(柳和貞)이라 하였으며
유비를 돕겠다 자청하였다. 유비는 그 말에 가슴이 뛰었으나
한번 거절해보았다. 그러나 굳이 그녀가 거듭 부탁하기에
황송함을 누르고 고개를 못 이기는 척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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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졌다. 자신의 등장이 소설에 생겼다. 자신이
삼국지를 몇 백 번을 읽어댔지만 이런 구절은 없었다. 2000년대
사람인 그녀가 어떻게 삼국지에 등장한다는 말인가. 또한 그녀가
아는 삼국지에는 분명 `유화정'이란 동명이인의 여인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가현신녀'라고 하는 것 자체가 조금
우스워졌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신녀? 유치하다. 어쨌든 유화정이란 것은
틀림없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런데 신녀라니.....화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천천히 책장을 더 넘겨보았다. 자신과
유비일행이 나누었던 대사가 몇 개는 그대로, 몇 개는 조금
변형되어서 적혀있었다. 문제는, 분명 이 부분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마초의 이야기도 씌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화정은
깨달았다.
`내가 이곳에 떨어진 이후로 삼국지가 다시 씌어지고 있다는
소리인가!'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로서는 한마디로 황당해졌다. 자신이
왜 하필 가현신녀가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사실 현재 상황은
신녀취급은 커녕. 오히려 사서 의심을 받았기에 유비 삼형제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실정인데, 신녀라니, 정말 이해가 안
가는 단어다. 그렇다면 신녀......란 다른 뜻의 단어로 쓰인
것이 아니고......하니, 한자를 살피면 신녀(信女)도 아니고
신녀(神女)였다. 신녀.......아무리 냉정히 생각해도, 중국소설에
나오던 서왕모(西王母)같은 신선(神仙)에게 붙는 명칭이다.
`신녀(神女)'라는 것은 정말로 숭배하고, 신비로운 여인에게
붙이는 최고의 존칭이 아니었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놀라버렸다.
`에, 내가 언제부터 이런 말투로 생각을 다 하게 되었지?'
분명 그렇다. 적어도, 그녀가 지내던 곳에서 그녀는 `내가
이곳에 떨어진 이후로 삼국지가 다시 씌어지고 있다는 소리인가!'
혹은 `신녀(神女)'라는 것은 정말로 숭배하고, 신비로운 여인에게
붙이는 최고의 존칭이 아니었나?' 따위의 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내가 이곳에 떨어진 이후로 삼국지가 다시 씌어지고
있다는 걸까?' 또는 `신녀(神女)라는 것은 정말로 숭배하고,
신비로운 여자에게 붙이는 최고의 존칭일텐데?'하는 투로 생각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갈수록 이곳의 사람들을 대하는 말투도
능숙해져간다.
말이야, 적응을 위한 필수요소이니 그렇다 쳐도, 내면으로 하는
말인 생각까지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미 그녀가 이
세계에 동화되어 간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어투가 어느덧
주변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투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침울해졌다.
만약, 얼마 후에 그녀가 있던 세상으로 - `현실'이라는 단어는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어곳에 떨어진 것도 또다른 현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 갔을 때, 이런 어조를 사용한다면
그녀는 주위로부터 코미디언 취급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으윽,
고쳐야해......불만을 품은 화정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삼국지 책을 더 넘겨보았으나.......
"세상에!"
놀란 나머지 책을 덮었다가 다시 열어보았다. 그녀 자신이
현재 겪고있는 18제후 집결 이후는 한 글자도 없다. 완전한
백지다. 다음 권을 펼쳐보았다. 다를 것 없이 모두다 백지였다!
어찌된 영문일까.
화정은 그렇게 의문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짐작하고 할 수
있었다. 삼국지는......다시 씌어지고 있었다! 그녀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씌어지고 있는 삼국지에 끼어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황당하고, 우스운데다 기가 막히기 짝이 없지만,
이런 추리가 가장 맞아떨어진다. 우연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녀의 등장부분의 도입, 게다가 뒷장이 모두 공백처리 된 것.
명백하다. 공주병이라 해도 좋고 환상, 공상이라고 해도 좋다.
여하튼 사실은 사실이다. 삼국지가 그녀 덕에 바뀌어간다. 화정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백지가 된 삼국지 책을 붙들고 있었다.
우습지만 사실이다. 그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책을
거칠게 `탁'소리를 내며 덮었다. 아니다. 바뀔 리가 없다. 그녀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고 해서 그 커다란 역사가 바뀔 수는 없다.
단지, 그녀가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사소하게 나타난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으며, 그렇게 믿기로 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놀라다니, 나도 참 담이
작아졌다.......화정은 투덜거리면서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가방
속에 책들을 밀어넣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