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수관 전투.
"으으음......화웅(華雄)의 목을 베어올 사람이 없단
말인가.......!"
원소의 한탄을 들으면서도 제후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제북상(濟北相) 포신(鮑信)의 동생 포충이
화웅에게 목이 날아갔으며, 손견(孫堅)마저도 화웅에게
참패를 - 원술의 좁아터진 소견머리에 의해 불리한 상황이
되는 바람에 이렇게 몰렸다고 해야 옳겠지만 아무튼 - 당하고
쫓겨왔는지라* 군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병사의 머릿수가 적지 않다고 해도, 적장이 용맹하여
아군의 장수 머리를 마치 무자르듯 싹둑싹둑 잘라내는데, 그
광경을 보고 겁에 질린 병사들은 도망치거나 창을 던지고
항복하기에 바쁠 수밖에 없다.
그 화웅이란 적장 덕에 아군은 이렇다 할 만한 뾰족한 수
없이 모여서 한탄만 하고있을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응당 필요한 것이, 화웅의 목을 단칼에 베어줄 호걸이다.
그러나 현재의 제후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바쁠 뿐이었다.
원소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탄식했다.
"정녕 없단 말이오......?"
역시 조용한가 싶었는데, 마치 어둔 밤하늘에 갑자기
달이라도 솟듯, 원술의 뒤에 있던 장수가 시원스럽게도
나섰다.
"소장(小將) 유섭(兪涉)이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그의 씩씩한 말이 원소는 여간 기껍지 않은 듯하다. 껄껄
웃으며 격려하였다.
"장하구려. 가서 화웅의 목을 가져오시게."
많은 제후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한 몸에 받은 유섭은,
당당하게 말을 달려 적진을 향해 떠났다. 그 믿음직한 풍채에
일행은 희망을 지니고 낭보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금 후 날아든
보고는 여지없이 일행의 그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 것이었다.
"유장군께서 화웅의 3합에 목을 잃으셨습니다!"
유난히 병사가 외치는 목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듯했다. 괜스레
병사가 미워진 원소는 사나운 눈빛으로 손짓을 해 보고병을
쫓아보냈지만, 이미 제후들의 사기는 저하될대로 저하되어있는
상태였다. 원소와 일행은 눈앞이 아득하여졌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듯, 원소는 다시 진중을 둘러보았다.
그는 진중을 찬찬히 둘러보던 중 공손찬의 뒤에 서있는 네
사람에게로 시선을 주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억이 잘 안나서
눈살을 찌푸렸으나, 가만히 기억을 새겨보니, 이전에 아귀강시의
소동 때 알게 되었던 유비란 자와 그 일행들이었다. 여하튼,
거만하고 그들에게는 신경도 안 쓰던 원소가 그들을 눈여겨보게
된 까닭은 관우와 장비의 크고 늠름한 체격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참으로 듬직한 풍채다. 물론, 분위기야 많이
다르지만, 꽤나 좋은 체격을 지닌 무장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무리 진을 둘러보아도 저만큼 눈길을 끄는 무장이 없는 듯했다.
원소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히 그들이 이름있는
장수였는가 궁금해졌으나, 이내 그 생각을 거두었다. 이름있는
장수였다면 자신이 그 소개받던 상황에서 기억해내지 못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눈길이 자꾸만 간다.
쟁쟁한 무장들도 모두 목없는 귀신이 되어오는 마당에 저런
무명의 인물이 나가보았자 무엇하겠는가. 또 군의 사기만
잔뜩 떨어뜨릴 뿐이다. 이렇게 판단한 원소의 시선이
그들에게서 멀어지려는 순간, 조용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려퍼졌다.
"보잘 것 없는 실력이오나......이 운장이 나가보면
안되겠습니까."
그만 원소의 시선이 다시 날아갔다. 물론 좌중 역시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유비의 뒤에 서 있던 긴 수염을 지닌 자가
포권한 채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정중하면서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무명인물이지만 풍채가 아깝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원소는 속으로 혀를 끌끌찼다. 부러 모르는 척,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이전에 말씀들었소. 유비 현덕공의 아우님이라고
하셨던가......그래, 자네는 현재 직책이 어찌 되시는가?"
직책이라는 말에 무장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의 잘 익은
대추처럼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가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근처에서 관람하고 있던 공손찬이 대신 답했다.
"유비 현덕공을 따르고 있으면서 현재는 평원현의 마궁수로
있습니다."
그 말에 원소가 불같이 화를 냈다.
"군중에 그리 인물이 없는 줄 알고있는가! 방자한 행동을
삼가게!"
모른 척, 곁에서 듣고있던 조조가 원소를 재빨리 돌아보았다.
"본인이 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잃는 것은 본인의 목.
게다가 군중에는 나서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허락하시는 것이......"
"저런 얼뜨기를 내보낸다는 것은 우리 연합군의 체면을 깎는
일이오!"
그 말에 관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으며 유비 역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뒤에 있던 장비는 아예 뿌드득 소리까지 내면서
이를 갈고 있었다. 주변의 제후들은 원소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순간 그들 곁에 섰던 서생이 앞으로 나섰다.
"믿고 보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마치 여인같이 여리고 듣기 좋았다.
뿐만 아니라 또렷한 눈매와 서늘하면서 깨끗한 눈동자, 희고
갸름한데다 오똑한 콧날이 있는 얼굴이, 절대 사내같지 않은
가인(佳人)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원소의 의도를 짐작했는지,
서생은 고개를 공손하게 숙이며 자신을 다시한번 소개했다.
"유하(柳河) 화정(和貞)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 그런가......"
역시 별 것 아닌 인물이다, 싶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겨우
서생의 낯을 대하고 있었다. 그런 원소의 태도는 그렇잖아도
서먹했던 군중의 분위기를 또다시 딱딱하게 만들어버렸다.
원소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한소리 하려는데, 조조가 원소를
가로막으며 화정을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
청광체가 출현한 사건 이후로, 조조는 그 서생과 유비
일행을 눈여겨보았음에 틀림없다. 조조의 사나운 인상에 떠오른
표정은 참으로 선선하고 부드러웠다. 서생은 자신에게 호의를
지니고 바라보는 것이 틀림없는 조조의 낯을 읽었는지 자신있게
제안하였다.
"관우님을 출전시켜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아까운 장수
하나를 더 잃게 될 것이오."
화정의 말에 주변이 물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조용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제후들조차 원소가 화를 내는 것에 주눅이
들어 아무 소리 못하고 있는데 일개 서생이 당당하게, 다소
건방지고 확신에 찬 투로 말하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예상대로
원소는 불같이 화를 냈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 방자한 입을 함부로 놀리는가!"
그러자 화정이 고개를 들어 원소를 똑바로 응시했다. 일행은
순간, 원소의 표정이 얼어버리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군중에서, 최고 우두머리란 자가, 그것도 원소처럼 명문가의
자제라는 자존심 높은 자가 한낮 서생의 눈초리에,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표정이 금방 얼어버렸다. 이쯤 되었으면 `이런
괘씸한!'하고 소리치며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원소는 그리 행동하지 않았으며, 화정의 아름다운 눈은
여전히 원소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저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속마음을 읽히는 것인지, 아니면 원소의 약점을
뚫어보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분명 그
눈은 원소에게 무언의 협박을 넣고 있다.
저 이름없는 무장을 내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런 모욕도 없다. 게다가 많은 제후들의 보고 있는 가운데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황했다. 식은땀이 등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원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나를......꿰뚫어보고 있는가?!'
온 몸의 힘이 순간적으로 쭉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리적 압박감 뿐 아니라 몸의 힘도 빠져나가고
머리가 아파오는 듯하였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권유한 대로
따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원소의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본 뜻과 다르게 원소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면 저 장수를......"
"형님! 무슨 일이시오?!"
곁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퍼뜩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사촌동생 원술이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는 시뻘겋게
낯을 데우고 눈썹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원술의 모습을 보자,
머리가 맑아진 원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이런......내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기 짝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제후들은 예상을 했겠지만 원술은 원소에게 장황하게 반대의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형님, 우리 군의 위신을 깎을 수는 없소! 저런 촌구석의
마궁수를 어찌 내보낸단 말이오!"
화정의 시야에서 벗어나 제정신을 차린 원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이런 변화가 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괴이한 일이다. 주술사도 아닌,일개 서생에게 말이다.
분명 공손찬과 유비는 자신들의 아래에 주술사는 없다고 잘라
말하지 않았던가. 거짓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모멸감이 고개를 들었다. 화를 내려는데, 곁에서
장수 하나가 자신있게 앞으로 나섰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반봉(潘鳳)을 내보내
주십시오!"
태수 한복의 등뒤에 서있던 자였다. 시퍼렇게 날이 선 큰
도끼를 들고 있는 그의 풍채는 과연 늠름했다. 그의 듬직한
풍채에 만족한 원소는 그만 유비와 공손찬에 대한 화는 금방
잊고 말았다. 의외로, 예민하지 못한 구석이 있는 원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런 저런 일은 생각보다 빨리 잊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도 저런 촌뜨기들에 대한 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여하튼, 원소는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선 조조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원소라는 인간, 저럴 때만은
답답하기 짝이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심하게 쳐다보는데,
조조의 귓속에 아까의 화정이란 서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저 사람 역시 화웅에게 목을 잃을 것을.......또
아까운 인명이 죽는구나......."
조조는 서생을 돌아보았다. 서생은 말없이 유비의 곁에 서
있을 뿐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광체 소동 이후,
이상하게 자꾸만 눈이 간다. 별로 무예를 잘할 체구도 아니며,
달리 두각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는지라 모른 척 하려했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 극히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으며, 몸의 선이 가늘어 여인같다. 이름 또한 여인같았다.
허나, 본인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부모의 부질없는
기대였다고 말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또한, 여인이 무슨
이유로 주변의 눈을 힘들게 속여가면서 남장까지 하겠는가.
웃기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여하튼
어딘가 범상찮다. 반봉의 뒷모습을 보면서 환호하고 있는
제후들과 달리, 조조는 화정을 눈여겨 보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원소 앞에서 내뱉았던 아까의 말과, 지금의
중얼거림이 마음에 걸렸다.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군.......'
분명 조조도 보고 있었다. 원소가 서생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의 태도. 그때의 원소는 반쯤 넋이 나간 듯 보였다. 그리고
원소는, 원술이 아니었다면 관우의 출전을 허락했을 것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원소는
그녀의 말에 압도되고 있었다. 다른 제후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있었지만 조조는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여하튼 조조야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인물에게 신경을
쓰고있던, 커다란 도끼를 번뜩이면서 나간 반봉에게 제후들은
적잖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지나 들어온
보고는 제후들의 고개를 늘어뜨리게 할만한 것이었다.
"반장군께서도 화웅에게 당하셨습니다!"
제후들은 더욱 겁을 먹은 얼굴들을 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아무도 화웅의 목을 베어오겠노라 나서는 자가 없었다.
군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질 것이었다. 원소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내 상장(上將) 안량(顔良)이나 문추(文醜) 중 하나만
있었어도 화웅 따위에게 이렇게 방해받지 않을 것을!"
조조는 혀를 찼다. 동맹군이라 해서 달려왔다면 적어도
그 두 장수 중 하나는 끌고 와야 했던 것이 아닌가. 모른
척 하고 그 막강한 군사와 강한 인재들을 대부분 기주땅에
두고 와서는 뻔뻔스럽게 한탄을 하고 있다. 게다가 아까
그 장수를 내보내 보기나 할 것이지, 괜하게 명성만
주절주절 따지다가 아까운 인명만 날리게 되지 않았던가.
화정의 중얼거림이 생각났다. 생긴 것도 야무지게 생겼지만,
정말로 날카로운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지니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사람이란 한번 어떤 사람이 예감을 이야기했을 때 그 일이
이루어지면 신뢰가 두터워지는 법이다. 조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유하라는 자의 예감을 한번 믿어보기로 하였다.
조조는 한탄하고 있는 원소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달랬다.
"진정하시오......이왕 이렇게 된 것, 아까 관우란 자를
믿어봅시다."
"어렵지 않게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조조의 추천을 받자마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관우는 종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조조의 설득과 관우의 쩌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곁에 서있는 화정의 입가에 차가운
냉소가 머금어져 있는 것을 본 원소는 약이 올랐다. 마치
`그것보시오, 내 말을 믿지 그러셨소.'하면서 약을 올리는
듯한 모습이다. 원소는 관우를 향해 호통쳤다.
"어디 병졸 주제에 감히 나서는가!"
이번에는 더욱 감정을 담고 거세게 외쳐지는 목소리였다.
아예 `어디, 한번만 더 그딴 소리만 해 보아라!
가만 안 둔다!'하는 식이다. 흥분하면서 탁상을 내리치는
원소의 서슬퍼런 기세에 제후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쯤되면
원소를 달랠 사람은 역시 말재주꾼 조조밖에 없게된다.
"본초, 이러지 마시오. 어차피 잃는 것은 저 장수의 목
뿐일테니 한번 내보내 봅시다!"
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을
머금은 조조가 원소를 설득했다. 그 모양을 보고있던 화정은
헛기침을 하면서 모르는 척을 하였다. 그녀의 헛기침 소리에
신경이 쓰였는지 유비가 화정을 돌아보았다. 화정은 고개를
숙여보였다.
"근심 거두십시오, 주공. 원본초께서는 이번에야말로 운장을
보내주실 것이옵니다."
그 말에 더욱 화가나는 원소였다. 자신이 더더욱 무시당한
기분이다. 게다가 저 계집아이 마냥 예쁘기만 한 저런
서생에게 조롱까지 듣고 있다. 목을 벨 구실을 찾고 싶으나
체면이란 것이 있어 참아낸 원소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목청을
돋우었다.
"나설 자가 아무도 없단 말이오?!"
신경질적인 원소의 반문도 소용없었다. 이미 화웅의 솜씨를
아는 군중은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조가 곁에서 다시
설득하였다.
"이 사람의 풍채가 속되지는 않소. 그러니 내보낸다면
마궁수인지 상장인지 어찌 알겠소. 한번 내보내 봅시다."
분명히 드러나는 차이점이다. 능력 위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는 조조와 신분 중시의 사상을 고수하는 원소의 차이점이었다.
아무래도 귀한 가문에서 성장한 원소는, 아직도 사람의 출신과
신분에 크나큰 미련을 지니고 있었지만, 조조는 실력만 된다면
부모를 죽인 자이든, 백정이었던 자이든 등용하자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는 비슷비슷한 세력이었던 두 사람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러한 차이들은, 정말 뚜렷하다. 어쩌면 훗날
원소와 조조의 결말은 이런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기지 못한다면 이 사람의 목을 쳐도 원망 않겠습니다."
모독을 이기지 못한 관우가 마침내 자신의 목을 걸었다.
관우가 목숨까지 걸자 원소도 그 이상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없다. 결국 원소가 이번에는 아무런
반박을 않고 잠시 주저하는데, 유비가 관우의 양손을 쓸어잡았다.
"운장, 괜찮겠는가......."
유비가 근심하는 것을 본 원소의 마음이 또다시 흔들렸다.
저 무장을 잘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 의형조차도 근심을
한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괜하게
군의 사기나 떨어뜨리면 안될 터인데. 그리 생각하는데 화정이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절대로 어렵지 않을 것이니 주공께서는 근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다시 약이 올랐다. 저 확신에 찬, 심지어는 원소 자신을
멸시한다는 기분까지 들게하는 저 말투도 왠지 모르게 신경을
적잖이 자극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아까, 원소에게 특이한
짓을 하여 정신까지 혼란시켰다.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 일을 잊지는 못하였다. 다행히, 대부분의
제후들은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기에 모두 잊은
눈치였건만, 원소로서는 자신이 조롱을 당한 듯하여 마음이
심히 불편하였다.
이런 심리가 번진 나머지 원소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든 것 같이 느꼈다. 누군가 반대를 해 주기를 바라면서,
섭한 마음과 분한 마음이 한데 일어 좌중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무언의 승낙이 되어버린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조조가 앞으로 나서서 관우에게로
다가가 술을 한잔 내밀었다.
"이 술을 들고 가시게."
막 데웠는지 김이 나고 있었다. 관우는 온화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냥 두십시오. 얼른 다녀와서 마시겠습니다."
마치, 아주 쉬운 일을 앞두고 편안하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는 듯한 태도다. 확신에 찬 그 목소리를 듣고,
조조와 좌중은 그 기상에 혀를 내둘렀다. 장막을 나선 관우는
자신의 청룡언월도를 가볍게 쥐고는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길고 아름다운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며 말을 능숙하게 내닫는
관우의 모습은 하늘에서 신장(神將)이 내려온 듯, 못에서
신룡(神龍)이 솟은 듯 늠름하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만은
관우를 못마땅하게 보았던 원소와 원술도 입을 벌리고 있었음을,
조조는 멸시에 찬 눈초리로 기억 속에 새겨두었다.
여하튼 늠름하게 말 옆구리를 박차며 내닫는 관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던 조조는 자신이 권했던 술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술이 김을 내뿜는 모양을 미소지으며 보았다. 그것도
잠깐, 무료해졌던 그는 시선을 돌려 좌중을 둘러보다가 유비
일행에게 눈을 멈추었다.
일행들이 다들 관심없는 표정이나 이번에도 별 차이 없을
것이다,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 반해, 화정과 장비의
표정은 자신만만한 것이 아닌가. 조조는 화정의 말을 떠올리면서
그를 유심히 살피었다. 이번에도, 원소가 관우를 보내줄 것을
유비에게 확신하던 서생이다. 조조의 시선이 머무르는 것도
모르는지 화정이 마침 현덕을 달래고 있는 참이었다.
"주공께서는 너무 근심이 많으십니다. 이제 곧 운장께서
오실 것이니 마음 놓으십시오."
"운장의 실력은 나도 믿네만......"
"그렇다면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
조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곧 올 것이라.......이번에도
저자의 말이 옳다면 분명 그는 비범한 인물이 아님에
틀림없다.......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북소리가 울리면서
환호성이 퍼지는 것이 아닌가. 궁금해진 일행이 소식을 듣기
위해 장막을 나서려 하는데 관우가 위풍당당하게 들어와서는
목을 바닥에 던졌다.
"화웅의 목이 여기 있소이다."
자신감과 당당함이 관우를 더욱 풍채있게 보이고 있었다.
마치, 푸른 빛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였다.
관우는 조조가 따라놓았던 술을 그제야 마셨다. 아직도
술에서는 더운 김이 올라가고 있음을, 조조는 반은 흐뭇,
반은 씁쓸한 심정으로 살폈다. 술을 목으로 벌컥벌컥하고
넘기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주변은 조용했다.
제후들과 원소, 원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조까지
조금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침묵을 지켰는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유비가 기뻐하는 소리가 그 적막을 깼다.
"운장, 자네가 화웅의 목을 얻으니, 이 사람의 기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리 기뻐하는 유비를 보면서 한 손을 올려 수염을 쓰다듬던
조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것은 유비 뿐은 아니었다.
천하에 저런 영웅이 또 하나 더 있었구나, 하며 기쁜 얼굴을
한 조조는 한 팔을 들어 관우를 치하하였다.
"관운장, 그대의 뛰어난 무용은 이 자리의 누구도 잊지
못할 것이오!"
중심축인 조조가 그리 치하하자마자 주변에서도 덩달아
감탄이 터져나왔다. 제후들까지도 관우의 무용, 그리고
아름다운 수염까지 치켜세우느라 분주해졌다. 다만 원술과
원소는 씁쓸한 얼굴로 서있었다. 한창 그렇게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장비가 외쳤다.
"우리 형님께서 공을 세우셨으니 이 여세를 몰아 관을
깨뜨려야 하는데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딴에는 관우가 공을 세웠으니 자신 역시 선봉으로 나서서
공을 다투어보고 싶다는 소리였다. 장비의 말에 제후들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뒤이어 터진 원술의 꾸짖음이 장비를
무안하게 하였다.
"대신과 제후들도 서로 낮추는 터에 작은 공을 세웠다하여
졸개가 자신을 나타낸단 말이냐?! 저 자를 장막 밖으로
끌어내어라!"
원술의 치졸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조조가
원술을 말렸다.
"화웅의 목을 베었으니 그 공이 적지 않소.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하오."
"한낱 현령의 일행 따위를 무겁게 여기신단 말이오!"
원술의 고집에 조조도 혀를 차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
좁아터진 소견머리는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조조의
바로 곁에 있던 화정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낮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를 냈다.
".......그래보았자 후세사람들은 원술공보다도 현덕공을
무겁게 여길 것이오!"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의 영향력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소란스러운 사이에서도 제후들이
그 소리를 모두 들었을 만큼, 그것은 위력적이었다. 다시
주변이 적막하여졌다. 조조 및 원소, 원술의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하였다.
당황한 제후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초조한 빛을 얼굴에서 감추지 못하면서 조조는 눈길을
화정에게로 돌렸다. 저 서생, 하는 말이 늘 이상하다,
이렇게 여긴 조조가 화정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데, 곁에서
당황한 듯한 유비가 화정을 황급히 꾸짖었다.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어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
화정 역시 표정이 별로 편치 못한 것으로 보아, 홧김에
나온 말인 듯 하였다. 그의 속마음이 어찌하건간에 그가
후회하며 고개를 숙여 보이는데, 눈치빠른 조조가 사태를
서둘러 수습하였다.
"그만들 하시오! 지금 사소한 논쟁을 할 때가 아니외다."
"현령의 졸개들이 저리 방자하오! 공(公)들이 저 무리를
이토록 무겁게 여기시니 나는 이만 돌아가려하오!"
원술의 분함마저 담긴 외침에 조조가 당황하였다. 맹주인
원소 역시 썩 좋은 표정을 하고있지는 않았다. 조조는
재빠르게 원술의 불쾌함을 알아들었다. 원술을 건드린다면
사촌되는 원소 역시도 좋은 감정을 지닐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원술을 달랬다.
"이 조조가 말이 지나쳤소. 용서하시오."
그리고는 얼른 고개를 돌려 공손찬을 향해 물러가라는
신호를 내보였다. 조조 딴에는 더이상 분란이 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공손찬은 벌레씹은 듯한 얼굴을
하고 유비에게 눈짓을 했다.
공손찬과 유비일행이 빠져나가자 기분이 이상해진 나머지
제후들도 그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면목이 없어진지라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원술은 조조의 결사적인 설득에 뜻을
굽히기는 하였으나 불만을 품은 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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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원술의 좁아터진 소견머리~쫓겨왔는지라: 본래 선봉으로
나섰던 것은 손견이었다. 그러나 손견이 승리를 거듭하며
순조롭게 진군하자 그 공이 커질 것이 두려웠던 원술은
속좁게도 손견에게 마초馬草와 군량軍糧을 대던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결국 손견은 엄청난 참패와 함께 분노하며
돌아왔고 현재 거의 따로 행동하고 있는 상태다.
"이게 뭐요!"
잔뜩 차려진 술과 고기를 보면서,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장비가 웬일로 화를 내고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가장 먼저
고기를 뜯었겠지만, 장비는 그 음식을 걷어차려고 하였다.
발길질을 하려는 장비에게, 유비가 고기를 집어 내밀면서
열심히 말렸다.
"맹덕공께서 이만큼 신경을 써 주고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여러 소리말고 즐기세."
장비는 그답지 않게 유비가 권한 고기를 한 손으로 밀치면서
거세게 항의했다.
"하지만 운장 형님께서 화웅을 베지 않으셨다면 승리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란 말이오! 아무리 귀한 놈들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니우?!"
불만스러운 장비의 말에도, 본인인 관우는 술만 들이켰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관우도 썩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위로차 달려온 공손찬 역시 밝은 얼굴은 못되었다. 위로 겸
축하 겸 와있던 마초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알을 굴리면서
그들의 분위기만 살폈다. 어색하고 한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유비가 낮게 탄식했다.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내가 못나서 운장과
익덕을 이렇게 만드는구나.......!"
자신의 직위가 낮음을 스스로 탓하고 있는 것이리라. 못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좀 잘못 타고 난거지......그렇고
생각하면서 화정은 새침한 얼굴로 과자만 집어 신경질적으로
씹었다. 꼭 유비가 좋은 사람이고 정이 조금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이유로 화가 났다. 참, 시대만 잘
타고났다면 누구보다 훌륭한 관리, 또는 나아가 통치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기는, 그녀가 살던 시대에도
윗사람이라고 다 훌륭하지는 않았다. 그건 어느 때를 막론하고
생기는 인간 사회의 병폐(病弊)인 것이다.
물론, 장비가 그 광경을 보고도 항의를 계속 할 리가 없었다.
커다란 덩치를 지녀서 우악스러워 보이지만 보기보다 순한
면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눈물도 많고 익살과 정도 많은
장비가 어찌 계속해서 유비가 한탄할 말을 하리. 유비의
한탄에 마음 약한 장비는 또다시 대뜸 눈물을 머금고 말았다.
"형님, 이 못난 아우가 잘못했수.......그러니 그런 생각
마시우........"
훌쩍거리면서 두텁고 억센 손바닥을 싹싹 비비고 무릎을
꿇고 앉은 장비는 좀 우습기까지 하다. 단순무식한 장비를
보면서, 분명 삼국지를 읽던 때에는 키득거리면서 웃었던
경험도 있기는 하지만 그 장면을 실제로 지켜보게 된 화정
역시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만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참, 미래를 다 안다는 것도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다 알지만 이렇게 방도가
없으니 속이 끓기만 한다. 여하튼 그녀는 한숨섞인 말을
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참고 지내면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 참는만큼
이후에 좋은 일이 올 것이니 이만 눈물들 거두십시오."
"너나 참아라, 임마!"
장비가 버럭 지르는 소리에 화정이 약간 움찔하였다.
화정에게 소리를 지르고 다시 징징거리는데, 그런 장비를
바라보는 마초의 짙은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아니 위로해 주고 있는건데 왜 화는 내고 그러십니까?!"
마초의 가시돋힌 투의 말에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전처럼 장난스런 분위기는 아니다. 늘 그렇듯 또다시
다툴 것같이 보였다. 이 사람들아, 지금 이 상황에서 또
분위기를 험악하게 할 것이냔 말이다, 하고 혀를 차던
화정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한마디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런 수고를 덜게 되었다.
"그만두게, 익덕! 자네가 그렇게 한다고 꼬인 일이 잘
되지는 않아!"
운장이 점잖게 장비를 만류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관우도
아직까지도 침울해 보였다. 가엾기 짝이 없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던 공손찬이 동조하였다.
"그래도 맹덕께서 이렇게 많은 음식과 술을 내려주셨으니
이만 마음들 푸시게.......그나마 공을 알아주는 이들이
계시는 것만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거의 유비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다, 꽤 은혜를
입다보니 친해진 공손찬이다. 그런 공손찬이 달래는데,
이쯤되면 장비가 안 넘어올 리가 없다. 속편하지 못한
달램에 역시 빠르게 넘어간, 순진하고 단순한 장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기는 하네유......."
화정은 눈을 살짝 내리깔면서 차를 약간 마셨다. 약간
새침한 눈매이지만 청순한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가려져,
그녀의 모습은 매우 고혹적으로 보였다. 그런 화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공손찬이 갑자기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말일세, 화정.......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네만......."
이 사람이 질문을 하면 어딘가 속이 편하지 않다. 공손찬이
특별히 두렵다거나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 차라리
늘 온화한 유비가 더 무섭다고 판단을 내리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화정은 담이 꽤 큰 편인지도 모른다 - 공손찬은
어딘가 껄끄럽고 편치 못한 구석이 있다.
옛날의 친우를 잘 돕는 착한 제후에서, 알고보니 유비를 다소
무시하는 분위기가 들려져 있는지라, 괴리감이 있어서 이렇게
느끼는 걸까. 여하튼 화정은 긴장하면서도 차분한 태도로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굳이 따로이 행동하는 것에 이유가 있는가."
공손찬의 말에 화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쯤되면 화정의
감정을 `뜨끔'이라 표현할 수 있다. 들킨 기분이었다. 만약
여자라는 것만 안다면 `당연히 홀로 행동하지요. 그러면
현덕공이나 운장, 익덕님과 함께 행동하오이까?'하는 식으로
능청을 떨겠지만, 지금은 반대 조건이다. 에구, 이럴 때는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잘 모르는 척이 제일이다.
그녀는 속으로 뜨끔했던 감정을 재빨리 지우면서 반문했다.
"백규(伯珪)공,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미천한 사람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화정의 능청에 곁에서 장비가 술을 단지째 들고 퍼마셨다.
속상한 상황도 상황대로 화가 나지만 화정의 뻔뻔스러움에
순진한 장비는 벌써 질렸는지도 모른다. 늘 암묵적으로
찬성하는 것에 진저리가 나 있음에 틀림없다. 관우나
유비야 참는 것에 능숙하다지만 보기보다 솔직하고
단순한데다 인내심이 부족한 장비는 저런 것을 술로
과격하게 다스리고 있는 듯하다. 장비야 속에서 불이 나던
술을 단지째 입에 털어넣던 간에 공손찬은, 화정에게 태연하게
답을 요구하였다.
"일전에 현덕공이 부탁을 하여서 내가 자네의 막사를 따로이
마련하였네, 그런데 그렇게 굳이 홀로 막사를 써야 하는 것에는
연유가 있느냐, 이 말일세."
"......."
이렇게 설명까지 친절하게 해 준다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다. 난처해진 화정이 입을 다물었다.
훤하게, 상황이 짐작되었다. 아무래도 공손찬은 대충 눈치를
챈 듯하였다. 곁에서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우는 모를
리가 없건만, 모른 척하면서 장비를 달래고 있다. 유비는
긴장하면서 화정을 바라보았다. 맞은 편에 앉은 마초는
술잔을 기울이는 척하면서도 걱정스럽게 그녀를 살폈다.
화정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살다살다 이런 곤란한
지경에 이른 것은 이 세계에 와서만 여러 번이다. 이젠 어떤
일이 벌어져도 거짓말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
진짜, 소설에서 늘 거듭해서 나오던 단어, 난세(亂世)란
단어는 폼으로 나오던 것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난세니까
이렇게 화정이 열 여덟 해를 살면서도 겪은 적 없는 일들이 딱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봇물터지듯 나타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천 년대로 돌아간다면, 화정은 어느 누구보다 심장이 튼튼한
경영주가 되어서 기업을 휘어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로
이 세계는 생각보다 난해하고 힘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아무리 남자인 척을 하고 있다해도 언젠가는 알려질 사실인
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화정은 마음을 다잡았다. 제대로
적응도 못 했고, 자신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갈피조차
못 잡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여자라는 사실을 밝혀보았자
손해가 나면 났지 이득은 되지 않을 것이다. 결단을 내린
화정이 심호흡을 하고 시치미를 떼려는데 곁에서 다른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아닙니다, 백규형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유비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마음이 놓였다. 한없이
너그럽고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지만 단호하고 정확한
유비다. 유비가 나서주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믿음이
가고 마음이 놓인다. 언제부터인가, 유비에 대해 이러한
정의가 하나 더 늘었다. 유비는 공손찬에게 정중하게 두
손을 맞잡아 보이면서 포권을 해보이고는 온화하지만
확신에 찬 냄새가 묻어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화정은 저의 수하입니다. 그가 저를 비롯한 관우나
장비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가
아직까지 사정을 밝히지 않았으나, 일행을 속이고 있지는
않다고 이 비(備)는 항상 확신하고 있습니다."
유비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뜨끔하다는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겨우 위기를 임기응변으로 넘겼지만
뒤끝이 걱정될 때,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지니는 심정이
지금의 화정의 속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일에 발벗고 나서서 확신을 해 준 유비가 정말
고맙기는하다. 흠이 있다면, 유비의 태도가 감사하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그저 유비에게 고마움의 눈물을 머금을지
모르지만, 영리하고, 이미 이 삼국지라는 세계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고 있는 화정은 만족으로 멈출 수가 없었다.
겸양과 성실. 유비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수식어이다.
그러나 이럴 때의 유비는 천연덕스러울 만큼 거짓에 능숙하다.
또한, 방금 전의 말은 암묵적으로 화정에게 압박을 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자신에게 두고보자며 이를 가는 사람은
아무리 속이고 배반하여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저렇게, `믿고있다'고 못을 박아놓으면 무의식적으로,
쉽게 배반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햇볕이 바람과 옷
벗기기 내기에서 이겼다는 말은 바로 유비를 두고 하는
소리다.
죄책감을 덕분에 잔뜩 짊어지게 된 화정은 속으로 `책
밖의 현실을 또 한번 깨닫는구나.'하고 감탄해보았다.
보면 볼수록 영리한 사람이 유비이다. 유비가 그렇게까지
화정을 두둔하자, 생각에 잠겨있던 공손찬이 얼마 후에
침묵을 깨뜨렸다.
"현덕 아우......자네의 말은......자네도 아직까지
화정이 여인이 아닌 것이라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백규 형님. 이 어리석은 아우도 그리 알고
있으니 이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지간에 신뢰조차
없다면 어찌 험난한 길을 함께 헤쳐나가겠습니까."
신뢰를 바탕으로 험난한 길을 헤쳐나간다......이미
유비의 말속에는 화정에 대한 두둔과 동시에 압박이 잔뜩
담겨있다. 화정은 `고맙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이후에
난 어떻게 유비의 곁을 떠나나......필요하다면 조조
밑에 가야할 지도 모를 일인데......'하고 생각하다가,
스스로 질책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미, 저 유비의 `무서운 온화'에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부담이 양어깨를 짓눌렀다. 공손하면서 확신에 찬 유비의
말에 공손찬은 말없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관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고 장비는 이제
술을 다 마셨는지, 벌겋게 변한 얼굴로 -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물게 단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껏
`저 장비가 웬일로 고기를 밀치네?'하는 생각을 하게 한
지가 언젠데 또 저렇게 언제나 했던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 고기를 뜯느라 정신이 없었다.
화정은 새삼스럽게 죄책감이 들었다. 주술사들을
만나려면......어쩌면, 강대한 조조편에 있는 것이 더
편할 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차라리 조조에게......
순간적으로 든 그 어마어마한 생각에 놀라면서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뿐이야. 이 제후들의 동맹은 조금 있으면 깨질
거야. 그러니 그 이후로는 그냥 자연스레 행동하자.......
유비님이 어떻게 말하던간에 난, 내 본래의 있을 곳으로
돌아가면 될 뿐이야. 그러면 다 끝나는 거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곁에서 공손찬이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자네들이 적게나마 마음을 풀었노라고 내
맹덕 공께 알리겠네. 이만 푹 쉬시게. 화정, 괜한 생각을
하게 하여 미안하군."
공손찬의 얼굴에는 아직도 어두운 그늘이 잔뜩 져있다.
틀림없이, 미심쩍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짐작은 했지만 무어라 따질 수도 없다. 그저 모른척,
보내주면 된다. 화정은 차분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백규께서 오해를 푸셨으니 소생이 더더욱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공손찬이 나가자, 유비가 배웅 차 공손찬을 따라나갔다.
두 사람이 빠져나간 장막 내의 분위기가 조용했다. 홀짝홀짝
술 마시는 소리와 쩝쩝거리면서 고기를 열심히, 신경질적으로
씹고있는 장비의 소리만이 났을 뿐이었다. 가만히 보니,
장비도 약간은 철이 있는 모양이다.
아까는 그저, 고기를 신나게 먹느라 정신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보니 잔뜩 찌푸린 얼굴로, 습관적으로
씹는다. 전혀 즐거운 낯이 아니었다. 조용히 술을 한잔 들이키던
마초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그저 마초의 습관이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했는데, 마초가 술을 마시는 자세 그대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만 엿듣고 이만 나와,
운록."
"......"
`뭐야? 혹시 숨어있던 거야?'
간담이 서늘해졌다. 화정은 전혀 기척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놀란 것은 화정일 뿐 관우나 장비도
동요없이 조용했다. 다들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던 듯 했다.
`이건 뭐람, 꼭 짜고 나를 놀리는 것 같잖아!'
슬쩍 약이 오름과 동시에 기분이 나빠졌다. 삼국지의 세계로
떨어진 이후, 그녀는 자신이 무능력자라는 사실만이 철저하게
각인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이천 년대에서 화정은
능력자였다.
외모도 그만하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학업 또한
남들보다 뛰어났다. 아버지의 각종 어려운 교육에도 쉽게, 빨리
적응하였고 선생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런 자신이,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 하는 것을 질문할 때 예를 들어 설명을 한다면,
아귀 강시와 의사소통조차 못하는 것과, 이렇게 사람의 기척을
알아채는 것에 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저쪽 세계에서는 꽤 민감한 편이었다구! 이곳
세계의 사람들이 너무 민감하거나 마초, 장비님, 관우님의
감각이 너무 예민한거야!'
이렇게 속으로 외친 화정은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특히, 저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인가. 삼국지의 수많은 군웅들
사이에서도 정말 유명한 인물들이다. 여하튼 잡생각만
파다하게 늘어놓고 있는 화정은 마초의 음성이 울리는 통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서 나오지 못해? 괘씸한.......!"
"너무 그러지는 말게. 자, 이만 나오시게, 숨어있는 분."
노기를 띤 마초의 말을 막으면서 관우가 자애롭게 권했다.
늘 세밀하고 철저한 관우가 저렇게 부드럽게 부르는 것을
보면, 적으로 생각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런 관우를
본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느낌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별해 낸다는 추측이 성립된다.
정말로 저들은 적대되는 기운과 그렇지 않은 기운도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일까? 화정이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아무튼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장막 옆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쭈삣거리면서 걸어나왔다.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간단한 바지차림을 하고 있는 운록은, 그저 체구가
작을 뿐인 소년인 것처럼 보였다.
머뭇대던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마초의 앞에 다가가 섰다.
화정 앞에서의 단단하고 다소 건방지게까지 느껴지던 그
태도와는 정 반대다. 분명 자신의 오라비를 두려워하고
있는 듯하였다. 풀이 잔뜩 죽어서 서있는 운록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마초는 술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내려놓았다.
"내가 다시 한번 더 이런 일이 있다면 용서 않겠다고 했을
터인데?"
탕 소리가 나면서 상위에 있던 수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긴, 수저가 바닥에 떨어진 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다.
상이 부서질 줄 알았다. 마초의 성난 음성이 쩌렁하고 울렸다.
"오라비의 말이 그리도 가볍더냐?! 그렇게 업신여기기가
쉬웠단 말인가!"
서슬 퍼런 마초의 질책에 운록은 쭈삣거리면서 답했다.
"......아닙니다, 오라버니......"
기가 팍 죽은 운록에게, 마초는 그 이상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더 무섭다는 것은 보고있는 화정도 적잖이
깨닫고 있는 사실이다. 운록은 오라비가 그 이상 말이 없자
불안한 표정으로 마초를 힐끗 곁눈질했다. 그런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 소녀이다. 조금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초는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한 팔을 들어 자신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중얼거렸다.
"네가 나의 누이라는 사실이 한심스럽구나.......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정갈하지 못한 짓이라니......."
정갈하지 못한......곁에서 도리어 화정이 뜨끔하면서
손을 가슴에 얹는데, 운록이 그 말에 성이 난 듯 얼굴을
붉히며 발끈했다.
"아니어요, 오라버니! 정갈이라니, 새삼스럽게 그 무슨
말씀이십......."
쾅!
"꺄악!"
마초의 굳센 주먹이 급기야는 탁상을 절반으로 갈라버리고
말았고, 그 바람에 술잔이 허공으로 튀어 운록의 이마를
정확하게 명중시켰다. 그 바람에 운록은 비명을 지르면서
벌겋게 자국이 난 이마에 손을 댔다. 마초의 얼굴에는
노한 기색이 만연했다. 안 그래도 치켜올라간 눈매를 흡뜨니,
그런 그의 모습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지금 오라비에게 감히 대어드는 게냐?!"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네 행동은 정말로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아비가 제후라면, 그 여식(女息)으로써 자신의 행실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 아닌가?!"
마초의 서늘하면서 딱 부러지는 말투는 무서웠다. 집안에서
엄격히 자란 덕에 꾸지람은 꽤 심하게 듣고 자라왔던
화정으로서도, 겁이 날 정도였다. 운록은 벌벌 떨면서 마초의
앞에 조용히 엎드렸다. 그녀는 울먹거림이 섞인 목소리로
잘못을 빌었다.
"제가......제가 잘못했습니다, 오라버니!"
`뭐가? 자신이 궁금하면 알아내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쁜......아차, 여기는.......!'
그야말로 `현대적'인 생각을 하던 화정은 스스로에게 혀를
차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운록이 딱하고 안되었다. 그렇다 해도
그녀가 도와줄 수도 없다. 이 시대 여자들의 행실 기준이며,
오빠되는 마초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진보적
사고'를 지닌 화정이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나는 네가 이곳에 따라온 사실도, 아버지께 둘러 말하느라
애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너를 가만히
두신 것은 내가 아버지께 네가 조용히 있도록 책임지겠다고
했던 이유였느니!"
"......"
`하긴, 그런 입장이라면 곤란하기도 하겠네.'
마초의 서릿발같은 훈계에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다무는
운록을 보면서, 화정은 마초의 입장 또한 이해가 갔다. 사실,
저런 것은 화정의 세계에서도 정말 당연한 것이다. 동생이
말썽을 일으켜 형 또는 오빠되는 사람이 감싸고 그 행동을
막겠다고 말하여 화를 넘겨주었는데, 또다시 말썽을 일으킨다면,
화가 안 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마초의 질책에 말이 없어진
운록의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화정은 운록이
또다시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정은 천천히, 마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맹기......?"
"......응? 아, 화정......?"
참 묘하다. 그렇게 성난 표정을 하고있던 마초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마초는 평상시의 약간 멍한 곳이 있는,
부드럽기까지한 낯으로 화정을 돌아보았다. 화정은 속으로
`뭐야, 이러면 오히려 말하기가 힘든데......!'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그대로 돌아섰다면 덜 어색했을 텐데.
화정은 헛기침을 하면서 운록을 바라보았다.
"저어, 운록이 많이 아픈가봐.......그냥 이만 가게 해주면
안될까?"
화정의 말이었지만, 마초의 얼굴이 살짝 찌푸러졌다. 뒤에서
장비가 `웃기네. 말 한마디에 얼굴이 풀리는구먼.'하고
빈정대다가 마초의 눈총을 받았다. 운록은 살았다, 싶었는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슬쩍 걸음을 옮기려다가, 날아온 마초의
칼같은 시선에 몸을 다시 멈추었다. 마초는 잠시 망설였다.
그 혼란스럽고 이상한 분위기의 전환을 깨어준 것은 관우였다.
여지껏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을 뿐 한마디도 없던 관우가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그는 아름다운 수염을 쓰다듬었다.
"......호오, 사내아이가 아니었단 말인가."
갑자기 들려온 관우의 음성에 마초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운장. 이 아이는 부끄럽게도 이 초(超)의
누이입니다만......행실이 정갈하지 못하여 이런......"
"됐네."
관우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답게 침착한 태도로 손을
들어 마초의 말을 저지했다. 그는 울상이 되어서 서있는
운록을 향해 눈을 돌렸다.
"성함이 어찌 되시는가."
"......운록. 마운록이라 합니다."
"호오, 그런가. 분명 누이라 했는데......맹기, 소저에게서
무(武)의 기운이 꽤 느껴짐은 무슨 까닭인가."
마초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또다시 망설이는 모양이다.
멍하니 답하지 않고 운록을 바라보고 있는 마초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은 역시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으며 조심할 것도
없으신 장비 익덕이셨다. 그런 상황을 다 보아가면서도
열심히 먹어대고 있던 장비가 곁에서 고기 뼛조각을 접시
위에 던지면서 아무렇지 않게 떠들었던 것이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숨길 것까지는 없잖아, 맹기."
마초의 주먹이 약간 떨렸다. 그 주먹이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한 화정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저렇게나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을 보니, 이 시대에 여자가 무술을 익히는 것이
그리 환대받는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한 듯하다. 아무튼 꽤
곤란한 말이었을까.......
괜스레 자신이 끼어드는 바람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화정은 미안한 마음으로 그들
남매를 바라보았다. 관우의 계속해서 날아가는 시선을 의식한
마초는 심호흡을 하고 침착하게 답했다.
"부끄러우나 저의 누이.......운록은 봉술을 약간 흉내낼
수 있습니다."
"저런! 마씨 집안의 귀한 규수께서 봉술을 하신단 말인가?"
`어머, 웬일이람?'
화정은 속으로 놀라다못해 이상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한 관우는, 운록이 무예를 한다는
사실을 듣고는 무엇인가의 핀잔을 주면서 한바탕 무안을 줄
사람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화정이 느낀 관우의 이미지는
크게 좋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화정이 읽은 관우는, 자신의
의형제들 외의 사람들에게는 피곤하리만큼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까다로운 타입의 사람이, 운록에게 `비꼬는' 투가 아닌,
정말로 감탄을 담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어쩐 까닭일까. 놀란
것은 화정만은 아닌 모양이다. 마초는 물론, 장비마저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관우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평상시 일행이 알고 있는 보수적인 관우에게서 의외로 감탄이
나오자, 다들 몸이 굳어 있었다. 의외의 원군출현에
어안이벙벙해져 표정이 굳은 운록에게 관우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소. 단지......내가 알던 어떤 사람과 좀 느낌이
닮았기에 질문한 것 뿐, 다른 뜻은 없소. 기회가 되면
마 소저의 봉술을 견식할 수 있겠소?"
"관우님......!"
저도 모르게 관우를 나지막하게 부른 마초의 표정을 무시한
채 관우는 운록을 응시했다.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운록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막사에 숨어든 자신의
행위를 탓하기는커녕, 그리고 명문집안의 규수로서 봉술을
익힌 자신에게 창피를 주기는커녕, 관우는 그녀의 솜씨를
살펴보기를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심이다.
저것은 분명, 멸시나 힐난이 아니다. 누구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알 수 있었다. 화정은 예상외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관우에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속이라더니, 관우, 의외로 너그러운 모양이다.
저럴 때에는 의형인 유비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것들
때문에 연의에서도 꽤 자상하고 인품이 멋진 이로 나오는 걸까.
여하튼 망설이던 운록은 드디어 상황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경계를 풀게 된 그녀는 이내 그 귀여운 얼굴에 웃음꽃을 환하게
피우면서 관우에게 양손을 마주잡아 보였다.
"운장님! 정녕 그러하시다면 운록은 거절하지 않겠습......"
"운록."
잔뜩 내리깔린 마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운록의 태도가
또다시 파랗게 굳었다. 마초는 팔짱을 끼고, 운록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혀있었다. 그런
마초의 저지에 운록의 팔이 힘없이 처졌다. 기가 죽은 운록을
향한 관우의 목소리가 다시 장막 속에서 울려퍼졌다.
"괜찮네, 맹기. 내 소란스럽지 않게 넘길 걸세. 좀 궁금한
점이 있어서 그럴 뿐이네. 자네 누이를 만천하에 드러낼 일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그렇게 답하고 앞에 놓인 술을 시원하게 들이킨 관우는
마초에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자네 누이동생의 눈동자와 머리칼 색깔이 어떻든 간에
내게는 상관이 없네."
마초의 눈이 커졌다. 마초는 놀란 나머지 고개를 휙 돌리고
뒤로 한발짝 물러서면서 관우를 올려다보았다.
"그,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장비가 귀뜸을 하더군. 자네와 동생의 사이가 매우 좋노라고."
아마도 이미, 장비는 자신의 둘째 의형에게 마초의 여동생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었음이 틀림없다. 전혀, 운록의 외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척 하던 저 장비가 말이다. 적잖이 배신감을
느꼈는지, 후회한 마초가 장비를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장비는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마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헛기침을 하고는 관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두려운 사실을 알고 계시니 이 이상 어떻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의 아버지께 절대 운록을 들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유의하겠네."
관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을 타서, 잠시 마초의
경계에서 풀려난 운록이 화정에게 다가왔다. 또 무슨 꿍꿍이람,
하고 별반 반갑잖은 기색으로 운록을 응시하던 화정은 눈을 크게
떴다. 운록의 목소리가 마이크라도 대고있는 양 엄청나게 크고
쩌렁하게 울려서 화정의 귓가에 들어오고 있었는데, 이것은
속삭이거나 그냥 떠든 말도 아니었다. 직접, 똑바로 화정의
귀를 울리고 있었다.
[가르쳐줘요. 어떻게 심리조정술을 알고 있었지요?]
`이게 뭐야! 내가 환청까지 겪는 건가?'
화정은 화들짝 놀라면서 운록을 돌아보았다.
"심리조정......"
얼떨결에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온 화정에게, 또다시 운록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쩌렁, 하고 울려왔다.
[내 쪽을 보지 말아요. 소리도 내지 말아요.]
뒤이어 들려온 운록의 목소리에 화정은 입을 다물었다.
환청이 아니다. 몰래 말하기 위해서 직접, 말을 전달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게, 머릿속으로 음성을 전달하여서 대화를
한다.......이전에 중국 무협지 같은 곳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뭐라더라......그렇다. 전음술(轉音術)이라고 했었다. 삼국지를
좋아하게 된 것을 계기로, 중국 문학이나 중국 무협 같은 것도
적잖이 즐겨읽었던 덕에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기사, 아귀강시니
청광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전음을
못하리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아귀강시와도 의사소통이
된다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밀담이 없을 리가 있으랴.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전음술인 모양이었다. 대충 상황파악이
된 화정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는 척하였다. 아무튼,
거기까지는 하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는 없다. 화정은
`이곳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 망할 전음술인가 무엇인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화정이 대답도 없이 딴청을
피자, 화정이 말을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챈 듯, 귓가에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전음도 할 줄 모르면서 어떻게 심리조정술을 한거죠?
좋아요, 이후에 기회를 봐서 대답을 듣죠.]
심리 조정술이라니, 심리를 조정하는 기술이냐? 그런 것을
한 적이 없는데 참 잘도 찍어 붙인다, 하고 불만을 속으로
토로했다. 아무리 눈 씻고봐도 없는 무경미석이 있다고 하지를
않나, 뭔지도 몰랐던 아귀강시가 자신을 쫓아왔다지 않나,
심리조정술을 자신더러 행했다고 하지를 않나......
운록은 여하튼 평범한 취미를 지닌 여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마초에게 꾸중을 들으며 잔뜩 기가 죽어있던 모습에, 잠시 일었던
동정이 싹 사라졌다. 가엾은 것은 그녀 자신임을 깨달은 화정은
한숨을 내쉬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조차 모르겠군요......."
내겐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전부다 낯설고 어려워요......화정은
그 말을 삼켰다. 그런 화정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록은
아무렇지 않게 관우와 장비의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여동생을 보면서 걱정스럽게 한숨을 내쉬는 마초도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부아가 치밀었다.
나름대로 꽤 슬프고 심각한데, 사람들은 또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분명, 화정의 표정은 또 `난 어려운 것 없어.'하는 만능의 표정이
되어있을 것이다. 이젠, 오래 되어서 모두 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든 표정은 늘 비슷비슷하다. 나름대로 자신이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을, 가끔은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응석을 부리는 성격은 절대 아니지만, 이렇게 막막하고 힘이 들
때는 누군가 자신의 심정을 위로해주기를 적잖이 바라게 된다.
내가 잘못하는 것은 아니야, 나도 사람이란 말이야. 그것도 아직
십대에 불과한.......답답하고 `이곳도 역시나 나에 대해 신경을
써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야.' 하고 불만을 뿜은
화정은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장막을 슬쩍 빠져나왔다. 어쩌면
마초가 알아주기를 은근히 바랬는지도 모른다.
*******
"휴우......"
찬 공기가 기분을 조금은 맑게 해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보던 것 보다 더더욱 까만 하늘에는, 화정이 본 어느
때보다 많은 별들이 박혀있었다. 멀게만 느껴진다. 별들은 저렇게
또렷하게 빛나고 있지만, 화정과는 멀기만 하다. 두고 온 나라,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다른 모든 사람들. 모두모두
멀게만 느껴진다.
"심리조정술, 아귀강시, 무경미석......모두 다 모르는 것
투성이야......"
멍하니 앉아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니겠거니, 하고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사사삭.
".......!"
하지만 미끄러지는 듯한 발걸음을 들은 화정은 순간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실감했다. 참으로 기분이 나쁜
소리였다. 마치, 얼음판 위를 그냥 미끄러져 오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덤으로, 소름 끼치는 느낌까지 그녀를 덮쳤다.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분명, 사람의 낌새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 화정이지만 뭔가 심상찮다는 것을 적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떨려왔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바람을
찢고 날아오는 듯한 파공음(破空音)이 들려오자, 그녀는 급한
심정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면서 벌떡 일어났다.
휙하는 소리와 함께 화정이 있던 자리에 작은 갈고리가 달린,
질긴 줄 하나가 박혔다.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 짜증나는
갈고리가 몸의 어디에 박혔을지 모를 일이다. 절로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면서 줄을 쥐고있는 상대에게로, 사실
시선도 던지기 두려웠지만, 눈길을 돌렸다.
"큭큭큭......생각보다 감각이 예민한걸."
듣기싫은 목소리였다. 걸걸하고 어딘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전에 보았던 공포영화에 출연한 악당의
목소리보다도 더 속이 뒤집힌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구역질나게 한다니, 여하튼 자신도 운이 지지리 없다고
생각하였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용기를
내야한다. 가능한 말을 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막사에서
크게 떨어진 곳이 아니니 머잖아 일행 중 하나가 도우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뭣하는 놈이냐!"
괴한의 어조가 낮고 느려졌다.
"뭣하는 놈이라? 그렇군, 곧 죽을테니 알려주지. 내 이름은
사현(邪賢). 그 이상 알 것 없다."
"사현......!"
화정은 그의 이름을 되뇌여 보았다.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동탁의 술사(術師). 유명한 인물이지만 역사책 속에는 언급된
적이 없어 이상하다 여겼던 사람이다. 장비가 `열살 먹은
어린애도 안다'고 표현한 바로 그 인물이다. 꽤 능력이
있다는 소리겠지. 애써 표정을 굳혔지만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발걸음이 절로 뒤로갔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교육은, 빌어먹게도 - 여지껏 도움이 되는
고마운 교육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빌어먹을'이다 - 소리를
지르는 것은 `절대로 안되며 체면을 손상시키고 상대에게
우월감을 줌으로써 나 자신에게는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 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런 관계로, 화정은 소리를 지르는 것에
절대로 베테랑일 수가 없었다.
으으, 이런 혼란스러운 전란(戰亂)의 시대에는 소리를 잘
지르면 도울 사람이 몰려온다는 것도 아버지는 가르쳐주셔야
했다. 여하튼 겁에 질렸지만 얼굴은 흔들림이 분명 없을, 화정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쪽이 호수인 것을 발견하고 멈추었다.
에구, 소설이나 만화같은 곳에서 보면 여자가 도망가다가 항상
벽이나 호수를 뒤에 두고, 뒷걸음질이 멈추던데 꼭 그 꼴이다.
`늘 이런 장면만 보면 욕해댔는데 내가 이 상황이 되니
동정이 다 간다.......'
사람이란 이렇게 위기에 와야 너그러워지는 모양이다. 속으로
눈물짓고 있는데, 호수의 수면에 반사된 약간의 달빛 덕에
그제야 사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 옷으로 머리까지
감싸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천을 감았을까, 하고 궁금해
할만큼 온 몸을 칭칭 감았다. 키가 작고 깡마른 체구였다.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얼굴은 눈 아래까지 복건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나마 노출되어
있는 눈 부분은 동양인답지 않게 움푹 들어가 있어서 시꺼멓게
그늘이 져 있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희뿌연 달빛을 온 몸에
받고 서 있는 그 시꺼먼 모습부터가 뭔지 모를 두려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암살자......!'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어였다. 그렇다. 무협지건 흔하게 읽었던
판타지 소설이건 간에, 늘 등장하던 직업인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그, 암살자, 또는 닌자라는 단어을 시각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다.
참, 그러고보면 소설 쓰는 사람들, 대단하다. 자신들이 직접
만나거나 겪은 일도 아닐텐데 그렇게 딱 맞게 묘사를 해 놓았다.
지금 화정이 보는 사현이란 자의 모습이 바로 그 묘사에
들어맞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하튼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
사현이란 자는 화정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물론, 생명의
위협을 안 느끼고 사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늘상 유괴와
살해 등의 위험 속에서 각별한 주의를 받고 지내온 화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타협의 여지도 없는 상황에서의 생존 위협은
처음이다. 결국 말조차 나오지 않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화정은
손으로 침착하게 주변을 더듬었다. 하얗고 고운 손이 흙을
마구 휘저으면서 소량의 먼지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 돌멩이 하나가 잡혔을 뿐이었다.
긴장하고 있는 화정에게, 사현이 냉기를 퍼트리면서 다가왔다.
냉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특별히,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몸이 추워졌다. 또한,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안된다. 이대로는 안된다.
이렇게 영문 모를 일들만 잔뜩 겪고는 죽을 수 없었다. 이건,
늘상 나오는 만화의 대사가 아니라, 화정이 진실로 위기에
직면하여 지르는 소리였다. 소리를 질러야 했다. 이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었다. 화정은 높게 소리쳐서 다른 사람을
부르려고 했다. 순간, 사현의 손이 이상한 도형을 그리면서
움직였다.
"어........!"
화정은 목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것이 그녀의 목을 꽉 메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열심히 목에 힘을 주어보았지만, `어'나 `아' 같은
작은 단음만 새어나왔다. 나쁜 자식! 화가 난다. 눈물보다도
분노가 앞섰다. 화정이 긴박함이 깃든 눈으로 사현을
올려다보자, 사현의 입가에 냉소가 띄워졌다.
"네깟 것이 무슨 특별한 존재라고......그 분께서 대체
무엇 때문에 너를 요주의 인물로 보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가엾게 되었구나. 핫핫핫......!"
`그 분......?'
이렇게 곧 죽을 상황에서 궁금한 생각이 먼저 앞서는 것을
보면 확실히 화정은 보통 여자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스스로가 우스워진 화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분이
누구든 알게 뭐람, 곧 죽을 지도 모르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주인공들은 늘 이럴 때는 누가 와서 구해주던데
자신은 왜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느냔 말이다. 이렇게 불평을
했다.
바로 앞에 서있는 사현의 손에서 날카로운 바늘 모양의
검이 뻗쳐나오고 있었다. 차가운 냉기마저 머금은 그 검은
사현의 손에서 마치 빨려들어갔던 것이 토해지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너무나 뾰족한 그 검날은 얼음으로
된 것같이 투명했다. 끝은 날카로워서, 정말 닿기만 해도
살이 그대로 잘려나갈 것 같이 보였다. 겁이 났다. 그리고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더욱이, 저 검이 노리고 있는 것은
화정 자신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그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스스로를
지켜야겠다는 단단한 결심이 섰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라. 하물며, 사람인 내가 발악도 안 해봐서는
안된다, 결론을 내린 화정은 애써, 풀린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녀의 재주가,
이렇게 황당무계하고 이상한 일도 많은 세계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이 순간만은 절실하게 옳게
느껴진다. 무섭지만, 돕는 사람도 없으니 해야한다.
어차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결과는 마찬가지라면,
조금이나마 발악을 해서 아주 약간의 살길이라도 몰색해야
한다. 화정은 똑바로 사현의 검을 응시했다. 다음 순간,
사현의 검이 눈부신 빛을 발하면서 휘둘러졌다.
민첩한 휘두름이었지만 역시, 주술사라 그런지 몰라도
검의 움직임이 조금 둔했다.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화정은
몸을 옆으로 비틀어 그 검을 피하면서 사현의 몸 가까이에
자신의 몸을 접근시켰다. 사현은 의외로 재빠른 화정의
움직임에 놀란 모양이었다. 이 정도 움직임이야 기본인걸,
하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화정은 사현이 멈칫하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양손을 깍지끼워 오른쪽 팔꿈치로 사현의
등을 세차게 내려쳤다.
"컥!"
강한 타격에 사현이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몸을 비틀했다.
에, 이런 정도로 피를 토하다니, 의외로 약골이잖아? 접근
전에서는 연타가 최고라고 생각한 화정은 한쪽 주먹으로
사현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동시에 한쪽 무릎으로 사현의
배를 강타했다.
"크악! 이, 이 계집이!"
`분명, 주술사나 마법사 같은 사람들에게는 빨리 타격을
주어 쓰러뜨려야 한다고 했어!'
사현이 몸을 재빠르게 날렸으나 화정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화정은 다른 한 손날로 사현의 목 뒤를 쳤다. 위기를
느꼈는지 사현이 무엇인가를 품속에서 꺼내 던졌다.
퍼엉!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푸른 안개가 일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완벽히 피하지 못했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간질이고 목을 따갑게 했다. 화정은 콜록거리면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사현의 목소리가 울려퍼져왔다.
"두고보자, 무예를 아는 계집애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마!"
화정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사현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멍하게 서 있던 화정은 양손으로 주먹을 쥐면서
힘차게 팔을 흔들었다.
"역시! 아무리 이상한 곳이어도 태권도는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어!"
대기업 외동따님으로써, 유괴와 각종 협박에 대비하기
위해서 무술 계열도 배웠었다. 그 결과 화정은 가녀한
체구와 예쁜 생김새에 대조되는, 태권도 3단에 합기도 2단,
검도 2단이라는 엄청난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도는 상대를 붙들고 내어 던지는 등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완력이 부족한 화정으로서는 힘이 들었다.
배우다 관뒀었다. 그때의 그 일 이후, 화정의 아버지는 그녀를
못살게 굴다시피 하여 무술 계열도 배우도록 했었다.
물론, 경호원들이 늘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화정이
경호원들을 귀찮아하고 꾀를 써서 따돌리고 다닌다는 보고를
듣고, 홧김에 배우라 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도
태권도가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늘 대련 한번
제대로 않고 서서 주먹질하고 춤추듯 품새를 외워댔던 것에
불과했기에, 실전에서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던 것이었다.
사실, 말이 3단이지 대기업 공주님이라 그녀가 다칠까봐
사범들이 대련 상대들이나 판정관들에게 손을 써 놓았던 것을
모르는 화정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자신이 3단이고
검도도 몇단이고 어쩌고 하여도 스스로 못 믿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만날 품새를 외우고 주먹질을 해댔던 성과가 그나마
나온 것이었다. 스스로도 신기했다.
"엉터리 3단이었지만 태권도를 배운 것이 도움이 되......
어? 목소리가 나오네?"
화정은 놀라서 음음하는 소리를 내 보았다. 아까의 목을 콱
틀어막고 있던 느낌은 소멸되고 없었다. 다행이다, 하면서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몸을 지킨다.......도와줄
것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그녀를, 뭔가 모를
것들이 노리고 있다. 암살자와 아귀강시, 청광체......
이렇게 암살자와 이상한 생물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찌 살고 있는 걸까. 마악 이곳에 떨어져 아무것도
모르는 화정에게조차 이렇게 위기가 많다면 다른 사람들도
늘 쫓기고 사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무엇인가 평탄치 않다는
느낌이 엄습해왔다.
노리고 있다......섬뜩한 기분으로 사현이 사라진 자리를
다시한번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맥이 풀린 화정은
다시 막사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사현의 말을 골똘히
생각했다.
`그분이라니, 대체 누굴까? 사현에게 나를 죽이도록 시킨
사람이 있고.......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누군지, 그리고
다른 세계에서 떨어졌다는 사실도......혹시 알고 있다는 소린가?'
비약적인 생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금 분하기는 했다. 아까의 관우, 장비와 마초가 운록의
인기척을 눈치챘는데 홀로 모르는 것도 그렇고, 전혀 모르는
인물이 자신을 노리고,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지도
모른다는, 이런 저런 사실들은 전부 화정을 열등감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역시 이 세계에 관해 좀더 적응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판단을
내렸지만 아직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분한 생각에 잠긴 채
막사로 돌아갔더니 여기저기서 높고 낮은, 하지만 화가 난 것
같다는 공통점을 지닌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앗, 화정!"
"임마아! 너 어디 갔다왔냐!"
"걱정했잖아! 여기는 전쟁중의 군대라고! 마음대로 다니면 안돼!"
"너 때문에 이 장비님이 하루종일 다리품을 팔아야 했어, 엉?!"
마초와 장비가 어디 갔다왔냐면서 수선을 떨어댔다. 관우가
그런 마초와 장비를 가로막았지만 역시 노기가 적잖이 치솟은
표정으로 무겁게 훈시하였다.
"앞으로 어디를 가려거든 동행을 붙이던지, 말을 하고 가던지
해주게.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는 것은 도리가 아닐세!"
엄중하게, 앞으로 어디를 갈 것이면 동행을 붙이던지,
아니면 말을 하고 가라면서 못을 박는 관우가 다른 때와
달리 밉지 않게 보였다. 오히려 고마웠다. 그나마, 걱정은 해
주었다는 소리로 해석하고 싶었다.
잔뜩 표정을 찌푸린 채 화를 내고 있지만 그건, 장비와 마초
역시 화정에게 관심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일 것이다. 전혀
관심이 없으면 나갔다 들어오던 말던 신경도 안 쓸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아까 내가 있던 곳으로 오지 않은걸까?
이곳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 떨어져있었는데. 곁에서 운록이
`화정님께서 사라지신 사이에 맹기 오라버니와 익덕 장군님께서
군내를 통째로 뒤집고 다니셨어요.'라고 퉁명스럽게 알려주었다.
그런 그녀의 뺨은 심술로 퉁퉁 부어있었다. 자신의 오라비가
화정을 찾아다녀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 역시 화정을 찾아
다리품을 팔았어야 해서 심술이 났는지 모르지만 미안했다.
사과는 해야 했다. 화정은 그들에게 한참동안 공손하게 사과를
하고서, 자신이 사현에게 습격받았던 사실은 숨긴 채 슬쩍넘겼다.
그런 말까지 한다면 그 다음에는 아예 기둥에 오랏줄로 꽁꽁
묶어놓을 것 같아서였다. 서슬 퍼렇게 서 있던 관우는 금방
냉정을 되찾았지만 장비와 마초는 꽤 오랫동안 화가 나서
펄펄 뛰어대다가, 관우가 달래자 결국은 다시 조용해졌다.
운록 역시 의심을 못 버린 채 차가운 눈으로 화정을 흘겨보다가
화정이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를 듣는 사이 마음을 풀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풀린 마초와 장비는 화정에게 이것저것
경고와 걱정을 한바탕 늘어놓았지만 관우는 늘상 그렇듯 팔짱을
끼고 앉아 그들을 살펴보다가 마지막에 화정에게 충고를 몇 마디
하는 선에서 끝냈을 따름이었다.
`힘들다......'
화정은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지친다. 이렇게 지쳐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운록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을
속이고, 모른 척하고,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만 하는 현실이
점점 싫어진다. 삼국지를 즐겁고 재미있게 읽을 때에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충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적어도, 아직 어린 화정은 저쪽 세계에서는 가족 관계가 마음에
걸리고 친구 관계가 소원했을 뿐 이렇게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짜내어서 변명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어느덧 장비와 마초, 운록을 재촉해서 내보낸 관우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말이 없다. 하지만 저 매서운 눈매는 늘 질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관우의 매서운 눈매가, 평소와는 다르게 깊은 동정
같은 것을 품고 있는 것도, 지쳐있는 화정에게는 보일 수 없었다.
늘 내 편을 들어주지 않던 관우. 장비보다도 유비보다도 더
서먹하다. 물론 마초와는 비교도 될 수 없고 말이다.
`내가......생각했던 관우와는 조금 틀린 사람이구나......
너그럽고 마음이 넓은 사람인데다......내가 유비의 편이라면
당연히 저 사람도 날 믿고 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화정은 관우가 무슨 잔소리를 또 한바탕 하려고 하는 걸까,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관우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조용히 막사의 장막을 걷어젖히고
나갔을 뿐이었다. 물론 관우가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화정이 일행의 속을 뒤집어 놓고도 관우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은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갑자기 웬 일일까? 화정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관우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해보았다.
'뭐, 피곤한가 보지. 사람이란 때에 따라 다른 모습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구! 나도 잠이나 자자!'
*******
"전갈입니다!"
"오호, 그래, 무슨 소식이 왔더냐?"
전령이 날듯이 돌아오자, 조조는 기대감과 근심이 반씩 들어찬
표정으로 맞았다. 전령은 그런 조조를 보면서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한 전령의 태도에 조조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조조는 헛기침을 하면서 단정하게 못을 박았다.
"솔직하게 고하라."
전령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자라목을 했다.
"도, 동탁은......원외(袁 )공께서......내통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각(李 )과 곽사(郭 )에게 그분의 가솔들을 모조리
처형하게 시켰다합니다......또한......"
"무에야?!"
전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령의 목이 더욱 자라목이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처형당한
태부(太傅) 원외는 원소의 숙부되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것이다. 금세 얼굴이 붉어지면서 온 몸을
부르르 떨고있는 원소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조조는 전령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무슨 소식이 있는가?"
방금전 원소의 칼 같은 태도에 당황했는지, 전령은 원소의
눈치를 살피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동탁은 20만의 병사를 일으켜 두 길로 나누었습니다. 이각과
곽사가 5만을 이끌고 사수관( 水關)으로 오고있고 동탁 자신은
15만의 병력에 이유와 여포(呂布) 등을 동반하여
호로관(虎 關)으로 향했습니다."
"이런.....저, 저 죽일 놈을! 내 당장 숙부님의 원수를 갚고야
말 것이오!"
말이 끝나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고 잔뜩 흥분한 얼굴을 한
채 원소가 분개하며 외쳤고 주변의 여러 제후들이 원소를
달랬다. 그래도 사촌에 대한 의리는 상당히 돈독한 모양이다.
원소가 의외로 혈육에 대해서는 조금 약해 보이는 것 같다고
말을 할 지도 모르지만......원소의 태도는 어색하다.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이 안 느껴진다. 뭔가......그렇다.
영화에서 연기를 정말 못하는 배우와 동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원소가 진짜로 화가 난 것이라고 치면.......원술 같은
사람은 사촌이라고 편을 들어주어서는 안된다구.
화정은 한숨을 내쉬면서 팔짱을 끼었다. 아직도 원술에
대해서는 도무지 정이 안간다. 여하튼 아무리 생각을 돌려도
원소의 태도는 조금 서운하다는 감정에 불과한 것처럼 비춰진다.
아, 나도 여기에 와서 쓸데없이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만
지대해졌어! 잔뜩 이상해진 기분으로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있는데, 그녀의 곁에서 장비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째 내 눈에는 저 원소란 놈이 화가 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느냔 말이오."
그 말에 관우가 엄한 눈빛을 하며 장비를 노려보았고 장비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돌려
관우의 눈빛을 외면했다. 저럴 때는 장비, 은근히 담이 크다.
하긴, 장비라는 인물은 앞뒤를 안 가리고 덤비는, 한마디로
너무 담이 커서 `문제'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장비의 태도가 좀 어린 아이같기는 하지만 솔직하다고 보고
있었다. 화정은 속으로 `나도 사실은 익덕님과 동감인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관심이 전혀 없는 듯한 화정과 장비의 눈총
속에서 어쨌든, 조조는 겨우 원소를 진정시키고 방책을 마련할
것을 고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원소는 못이기는 척 그제서야
분노를 가라앉히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탁은 우리의 중앙을 가르려고 호로관에 군사들을 주둔시킨
듯하오. 마땅히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막아야 할 것이오."
어쨌든 원소는, 많은 결점을 지녔지만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금방 감정 수습을 하고 -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화정의 눈에는 절대로 진실되게 분노한 것은 아닌 듯했지만 -
딴에는 깊이 헤아려 재빨리 의견을 제시하니 말이었다. 그것이
거짓으로 분노한 척을 한 것이라고 하여도, 이 행동은 분명
다른 제후들의 동정을 사고 원소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여 줄
만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 화정이라고 하여도, 친구 중 하나가 화가 나거나
슬퍼하는 척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은 기분을 맞추어 주기
위해 그의 뜻에 따랐을 테니까. 원소는 원술이란 놈과는
틀린 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쁘게만 보이다니.......원체
삼국지를 읽을 때도 나쁘게 보았던 원술인지라, 그리고
잔뜩 무시당한 경력이 있는지라 절대로 곱게 안 보인다.
제후들은 금방 다른 의견없이 원소의 말에 따랐다.
원소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8로(路)의 제후들 정도는 따로 호로관으로 향하며,
나머지 9로(路) 제후들은 사수관을 계속 공격하도록 합시다.
또한 조공(曹公: 조조)의 군사들은 양쪽을 왕래하며 구원에
응하는 것이 좋겠소."
"묘안이외다! 이 보잘 것 없는 몸이 호로관으로 응하겠소!"
모두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바로 북해(北海)태수
공융이었다. 말 그대로 `나는 대쪽이요.'하고 이야기하는
듯한 사람이다. 늘 곧은 모습과 흔들림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공융의 곧은 모습에 만족한 원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공융을 선두로, 곧이어 호로관으로
가기를 자청하는 제후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이 공조(恭祖: 도겸)도 실력은 없으나 성심껏 응하겠소!"
"동군(東郡)태수 교모를 잊지 말아주시오!"
"미천한 실력이오만 미력하나마 힘이 되고싶소!"
"기꺼이 호로관으로 출진하리다!"
"한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무엇이오!"
공융의 뒤를 이어 도겸, 교모, 왕광, 유유, 장양이 나서자
공손찬은 유비를 돌아보았다.
"어떤가, 현덕 아우? 자네의 생각은?"
"형님의 뜻이 정해지셨다면 미천한 아우, 마땅히 따를 것입니다."
`쳇, 형님은 너무 공손도 하셔.'라고 중얼거리면서 콧바람만
잔뜩 내고있는 장비를 모른척하고 화정은 자신을 돌아보는
유비를 향해 `그렇게 하십시오.'하는 표정을 보였다. 관우
역시 별다른 말이 없었다. 늘 생각하지만 공손찬은 유비의
꼭두각시같은 느낌도 가끔 든다.
물론, 공손찬 자신이 움직이는 김에 옛 친우인 유비까지
챙겨주는 것일 테지만, 결국은 모두 유비에게 이득이 될
일이니까 말이다. 유비의 힘인지, 공손찬의 자비인지,
조금은 헷갈리기도 한다.
"이 백규도 호로관으로 참전토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맹주!"
원소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좋소, 나도 공손백규가 나서준다면 든든하겠구려."
원소의 대접에 공손찬은 자못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비교적 낮은 신분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과 같은 세력가가
된 공손찬에게는,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자부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원소같이 몇대에 걸쳐 귀했던 이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대접해 준다는 것에 대해 우월감마저
느꼈던 것이리라.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신분제가 극히 개방적인
오늘날, 즉 화정이 있던 곳에서도 힘든 일이다. 웬만한 실력과,
또 운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힘들다.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있는 자는 있는 것을 바탕으로 더욱
상승하고, 없는 자는 없기에 더 가난하여 진다는 것.
인간의 영원한 논리다. 극복하기 힘들다. 더욱이, 공손찬같은
밑바닥에서 저 정도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 처지에 오른
사람이라면, 자부심이 전혀 황당한 것만은 아니지만......저
자부심이 후일에 지나친 `오만' 으로 변하니 그게 문제다.
그런 공손찬을 유비가 서운한 표정으로 보는 것을 화정은
놓치지 않았다. 분명 서운해하고 있다. 안타까움만은 아닐
것이다. 친우는 저 정도로 올라갔지만 자신은 여전히
식객(食客)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품었던 뜻은 크되, 현재의 위치는 보잘 것 없다.
씁쓸하고 후회가 잔뜩 담긴 얼굴로 서 있는 유비는 왠지
작아보였다. 화정은 속으로 유비에게 말해주었다.
`당장은 보잘 것 없지만......훗날 사람들은 현덕공을
훨씬 높일 것이니 근심하실 필요가 없으시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느새 그녀는 유비 일행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비의 온화와 그녀에게 보여준
침착함은, 가장이든 진심이든간에, 단 기간에 유비에 대해
격려와 안타까움을 품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정말,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었다. 훗날에는 훨씬 떠받들려지고,
훨씬 깊게 이름이 남을 유비에게. 화정은 그러나 그 욕구를
눌러참으면서 원소가 계속해서 지시를 내리는 것을 멀거니
보고 서 있었다. 이 전투의 결말을 잘 알고있는 그녀로서는
시시콜콜한 면까지 자세하게 설명하는 원소의 연설이 지겨웠다.
다 쓸데없지만, 여기서 나설만한 힘은 화정에게 없다. 여하튼,
길고 길던 회의가 끝나자마자 관우는 화정과 장비를 불러세웠다.
"내일 새벽 일찍부터 출발할 것이니 행장을 미리 꼼꼼하게
꾸려놓도록 하시게. 유낭자......아니, 화정이야 잘
알아듣겠지만 장 아우, 아시겠는가?!"
다소 질책을 하는 투가 섞인 것을 보니 관우는 이전에도
장비의 덜렁대는 성격 덕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 듯했다.
화정은 속으로 `이해할만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냉랭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고 장비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하품을 연거푸해대면서 관우의 속을 또 타게 만들었다. 관우가
안 그래도 길게 찢어진 눈을 흡뜨자 장비는 그런 관우를
곁눈질하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알았수, 알았수! 이 장 아무개를 못 믿으신단 말이오,
운장 형님?! 철썩같이 약속할 테니까 그만 좀 해두시구려!"
태평스럽게 졸린 눈을 하고 떠나는 장비의 넓찍한 직사각형의
등판을 화정이 보면서 속으로 조용히 킬킬거렸다. 겉으로는
웃음이 안나오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참 저렇게만 세상 산다면 아무리 복잡해도 살맛이 날지도 모른다.
저 자세를 배우고 싶을 때도 많았다. 단지 그녀는 장비의 저런
태평한 천성을 닮지 못했기에 이렇게 많은 고민과 많은 망설임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관우의 시선이 화정을 향해 잠시 쏠리는 것을,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우의 시선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관우는 부담스럽다. 자신이 왜 저 사람에게는 아직까지
호감을 못 사는지, 영리한 그녀로서도 모를 일이었다. 화정은
움찔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얼른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으나......
".....잠시 같이 걷겠느냐?"
굵직한 관우의 목소리는 뜻밖의 대사를 실었다. 그 말에
화정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관우를 향해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를 바라본 화정은 더더욱 의뭉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관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우는 아직까지, 부드러운 표정보다 의심에 찬 표정이,
부드러운 목소리와 대사보다는 딱딱하고 경계하는 투의
대사와 목소리가 더 익숙한 그녀였기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화정이 반사적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고고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관우는 그녀에게 약간 몸을 기울였다.
"아무 뜻도 아니다. 단지 조금 걷고 싶을 뿐이오, 그대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 정도다."
"예? 아, 예......"
`저 사람 어디 아픈가? 아님 나 또 욕먹을 일을 한 거야?'
겉으로는 고고한 표정이지만 속으로는 겁이 나는 화정에게
관우는 등을 돌렸다.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시원한 곳이 있다."
관우는 그렇게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앞장섰다.
화정은 뒤에서 얼굴을 찌푸린 채 관우의 돌변한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다가 답을 못 찾은 상태 그대로,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관우의 뒤를 쫓았다.
*******
관우가 데리고 온 곳은 유감스럽게도 화정으로서는 그다지
좋게 회상할 수 없는, 이전에 사현을 만났던 못 근처였다.
한참동안 눈치를 보며 `대체 무슨 소리를 할까?'하고
조마조마해했지만 관우는 그저 거닐며 긴 수염만 쓰다듬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화정은 그런 관우의 행동을
곁에서 조심스레 살피다가 헛기침을 가볍게 한번 했다. 그제야
관우는 화정을 힐끔 보더니 발걸음을 약간 늦추었다.
"......그러고보니, 아직까지 화정에 관해 아는 것이 별반
없다. 어디 출신인가?"
그 말에 화정은 목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대답하라는
말이야!
`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러니까 여기 시대로 치면
고구려나 백제의 통합국가.......이런 곳에서 왔고요, 거기는
폭탄 한 방 떨어지면 몇 백만은 아주 쉽게 죽이고 이 중국은
딱 몇 시간만에 왕복할 수 있는, 하늘을 나는 쇳덩이가
있거든요.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평범한......이 아니라 대기업
총수의 딸.......음, 쉽게 말해서 거상(巨商)의 딸인거죠.'
이렇게 떠들 수도 없다. 완전히 어디 아픈 사람 취급할
것이다. 안 그래도 아귀강시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것들과도
대화를 못한다고 했었고, 그때도 충분히 나쁜 이미지를
남겼는데, 더더구나 자신을 가시돋힌 눈으로 계속 주시하는
관우인데 위의 사항을 있는 그대로 말하자는 것은,
`저 여기서 쫓겨나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에 필적하는 소리다.
아니, 이 정도면 괜찮다. 관우같이 지나칠 정도로 곧은
사람은 곧장 `큰 형님의 앞길에 해가 될 아이일 지도 모른다.'
하고 판단을 내리고, 한번에 저 큰칼로 화정의 목을 `샥!' 하고
날려버릴 수도 있다. 여지껏 해왔듯이 거짓말을 해야 한다.
여기 와서 거짓말하는 솜씨만 잔뜩 늘었다. 저쪽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이제부터 주일 미사를 빼놓지 않고 다녀야 한다. 그리고
신부님께 진실된 고백성사를 받고 거짓말에 대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신이
기껏 미사에 몇 번 빠졌다고 이런 세계로 뚝 떨어뜨려서
생존(?)을 위해 이렇게 거짓말을 다발로 하도록 상황을 만든,
하느님이다. 자신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
"어찌하여 대답이 없는가?"
아차, 여기 와서 거짓말 외에 또 한가지 는 것이 있다. 바로
남이 무슨 말을 하는 중간에 잡생각을 하는 것이다. 관우의
엄격한 목소리에 화정은 고개를 얼른 들었다. 죄책감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야 한다. 벌써부터 머릿속에서는 각본이 돌아가고
있다.
다시 저쪽으로 돌아간다면 극작가도 생각해봐야겠다. 어쨌거나
소설에 나와있던 지식을 믿기로 결심하고 이왕이면 유비와 같은
고향에서 지내왔던 것처럼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현덕공과 같은 고향 출신입니다......이전에 그리 이야기 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관우는 화정의 애매한 답에 얼굴을 찡그렸다.
"백규공 앞에서 그리 말한 적이 있었지만......대강
둘러대려던 것이 아니었던가?"
아, 역시 관우는 철저한 사람이다. 대충 넘길 수 없다. 관우
앞에서 지금 시나리오를 지어내고 나서, 절대 이 시나리오를
바꾸면 안 되겠다. 그래야 이후에 `왜 내게 이야기한 것과
다르나?'하며 따져들지 않을 테니까. 속으로는 이를 갈았지만
화정은 겉으로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태어나서 어릴 때까지 누상촌에서......
자랐습니다."
관우의 굵은 눈썹이 움찔했다.
"형님께서는 자네를 모르고 지내셨던 것이 분명하네.
심지어는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으시다고......"
아, 이 시대에는 작은 마을 내에서는 모든 일가를 알고
살았다는 말이 옳기는 했다보다. 그렇다면 외딴 곳에서
고립되어 자랐다고 하자.
"조금 떨어진 산간지대에서 자랐습니다. 마을에는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에만 나갔습니다."
아직도 의심을 풀지 못하는 표정의 관우가 고개를 약간
끄덕거렸다. 끄덕거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못미덥다는 눈치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물고 다음 질문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관우는 앞으로도 계속 함께 다닐 사람이었다.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아버지는 과거에서 떨어져 산나물을 캐던
서생이셨습니다.......저는 외동딸로서, 아버지께서
선비이셨기에 저에게 학문을 취하게 하시어 그나마 미련하고
얕은 소양을 조금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 완벽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존경스럽기만 하다.
평민이라고 유비에게 답했던 적이 있었으니, 이 정도면 `왜
평민이라면서 글을 다 알게 되었나?' 하는 따위의 질문은 미리
봉쇄해 둔 셈이다. 화정의 영리한, 이유가 아닌, 핑계에 관우는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래서 글을 알고 있었군.......허나, 이전에 전술을 좀
안다고 들은 적이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 전술을 안다는 어떤 노인에게 귓동냥 수준으로
들은 정도밖에 없습니다. 흥미를 느껴서 조금 공부를 했을
뿐입니다, 송구하게도......그다지 뛰어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단지 현덕공의 수하에 있고 싶어서 그런 수준임을 밝히지
못했으니, 단지 죄책감뿐입니다......"
화정이 말끝을 흐리자 관우는 말없이 못으로 시선을 던졌다.
맑은 수면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며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전시(戰時)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분좋은 밤이었다. 하지만, 초조하다.
전술......그렇다. 분명 당시의 그녀는 자신이 삼국지를
열심히 읽었으니, 그렇게 미래를 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전술을
쓰는 척 할 생각으로 그리 말했었다. 달빛을 받고있는 관우의
지엄한 옆모습을 보면서 살짝 속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최소한 삼국지를 열심히 읽어보기는 했으니 전투에서 어떻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약간 예측은 할 수 있어. 그 예측을 뒤집어서
행동하기만 하면 되거든......'
영악한 화정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지식이
발달한 현대의 학문도 어느정도 활용하면 된다는 것도. 예를
든다면, 제갈량의 동풍에 관련된 것은, 현대시대의 과학에서는
쉽게 발견되는 사실로서, 관찰에 의해 시간이 맞아떨어진 것 뿐,
절대로 주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계속 평원에서 지내다가 형님을 찾아온 것인가?"
"11살 이후 이곳저곳 정신없이 이주하기는 했지만......평원
안이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은 엄두도 못내면서 지냈죠."
"외견이 상당히 이국적이구만......조상 중에서 혹시
이민족의 혈통이 섞인 분이 있었던가?"
세심한 관찰력이다. 화정을 별 것을 다 물어본다고
생각하면서 제법 날카로운 관우의 질문에 이제까지 그러했듯이
역시나 임기응변식으로 대강 답했다. - 역시, 무슨 일이든
하면 할수록 늘어간다. 임기응변도 이제는 거의 프로 수준이
되어간다.
"알 수 없습니다. 미천한 집안이 무슨 족보가 있겠습니까......
산지에 숨어 지낸 촌계집에 불과합니다."
"부친이 서생이시라 하지 않았던가? 보통 어느 정도의 학식을
갖춘 서생라면 으레 족보 정도는 있으며, 또한 집안 내력도
숨기지 않는 법. 게다가 딸을 교육시킬 정도로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않은가."
이크, 서생이라고 아까 말하기는 했구나. 아직 임기응변이
프로의 수준은 못 되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집요한 것을 보니
오늘의 관우가 뭔가 단단히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은
것임에 틀림없다. 피곤하다. 이럴 때는 소설을 쓰는 능력이
필요하다. 속으로는 한탄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연장했다.
"유감입니다, 운장......미천한 여식에게는 알려주지 않으신
것으로 보아, 아버지는 평민에 불과한 사람으로, 단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과거의 꿈을 이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기대를
하셨던 듯합니다."
그제야 관우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그런 사람들은 매우
흔한 유형이었기에 의심쩍은 화정의 말이라 할지라도 납득이
갔던 것이리라. 그렇다. 보통, 부모들은 자신이 못 이룬 과거의
꿈을 자식이 이루어주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그 꿈을
자식에게 강요하느냐 강요않느냐에 따라 그 자식의 삶에 차이가
올 뿐이다.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녀의 아버지는......그렇다. 사람을 잘
골라보는 눈 하나로 대기업을 이루어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있기에 화정에게 사람을 보는 법과 사람을 대하는 법을
열심히 교육시켰다. 그녀에게 처음 `삼국지'를 읽혔던 사람도
바로 아버지다. 아버지는 말했다.
<......전술적인 면은 조금 떨어졌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위임했다가 어려움에 처했던 적도 있다. 물론, 지금의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조금씩 전술제안을 위임시킴으로써
위험부담을 경감시키고 있지만, 미래의 너는 그리 되어서는
안된다.>
삼국지. 수많은 인물들의 삶과 권모술수. 그래서 예전부터
아주 유명하게 내려오는 말이 있다. `삼국지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 삼국지를 읽은 이는 너무도 지략에
능하여 판판이 지게 될테니 괜히 상대하여 이기지 말라는
뜻이다. 다행히 아버지의 뜻대로 화정은 삼국지에 항상 머리를
박고 살게 되었다.
다만, 전술이나 지혜 등을 배워보라는 아버지의 의도와는
빗나가게, 그녀는 스스로 주군을 택하는, 인물들의 자유분방함을
동경하여 읽었지만 말이다. 그렇다. 그녀는 삼국지의
주연들보다도, 그 주연들을 모시면서 삼국지의 한 가닥 한 가닥을
이루어가는 무장이나 참모들을 더 좋아하고 동경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대기업을 경영하기보다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택하여 그 아래에서 그를 높게, 아주 높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그런 이유로 삼국지를 좋아했고, 삼국지의 세계를
동경했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그 생각을
바꾸어 주려고 늘 노력했다. 야단도 치셨다. 하지만 관심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흔들림없이 고수해왔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장점을 물려주면서도, 자신이 장사의 전략이나 경영
전술에 약했던 것을 콤플렉스와 위기로 느껴서, 그녀에게 삼국지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즉 부모의 못 이룬 꿈을 종용시키려고
읽힌 책. 그녀에게 있어서 삼국지는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적과 다른 이유 때문에 삼국지를 좋아했다. 한순간
다른 생각에 휩싸인 화정을 깨운 것은 관우의 질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남아에게 종용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아인 자네에게 그리 하셨나?"
문득 깨달았다. 관우의 지금 질문은, 절대 진실된 `유화정'과
무관한 질문이 아니다. 처음으로 진짜 답변을 하게되었다.
거짓이 아닌 진실된 답.......
".......집안에 남자아이가 없이 저 혼자였습니다."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분노했다고 했다. 여자아이는 필요
없다고 했다고 했다. 덩달아 아버지의 형제들은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아들에게 후계자의 지위가 돌아올 수도 있다고 여기고
즐거이 웃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친척도 없으셨기에, 그저 여자아이였어도 제게
기대를 거셨답니다."
고해성사에서 할 말이 한마디 줄었다. 아버지는, 그 이상
자식이 태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고, 그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결국, 그녀는 2살 때 글을 깨우칠 것을
강요받았고, 다른 아이들과는 차원이 틀린 교육 속에서 자랐다.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7살까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
순간도, `내가 왜 다른 아이들과 달리 놀지도 못하고 자라나?'하는
따위의 생각을 한 순간도 않고 자랐다. 그녀를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던 어머니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학교에 들어가서야 다른 아이들은 오락실도 가고, 모여서 논다는
것을 알았다. 더불어, 아이들이 왜 그녀와 놀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깨달았다. 그래서 몰래 놀러 갔다가 걸려서 정말 혼났다. 화정은
쓰게 그 생각을 닫으면서 눈을 감았다. 이런 과거 따위, 이젠
회상하고 싶지 않은데. 현실에나 충실해야했다. 침착한 어조로,
이번에는 그녀가, 관우에게 미리 선수를 쳤다.
"그외에, 또 궁금하신 것이 있으신지?"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에, 관우도
미안해졌던 모양이다. 딱딱하고 다소 의심이 깃들어있던 표정을
조금 겸연쩍어하는 빛으로 바꾸면서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붉디붉은 얼굴을 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허, 허허......아닐세......다만, 같은 동지로서 거리가
먼 느낌이 많이 들어서......"
기가 차다. 당연히 멀 것이다. 관우의 생각은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해보면 장비와 유비가 더 이상하다. 낯선 존재인 그녀를
경계하는 것은 관우뿐이었다. 장비, 유비, 마초.......모두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었다. 운록은 약간 꺼리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관우는 상당히 느낌이
민감한 모양이다. 여지껏 괜히 관우가 미워보였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관우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따위의 생각이 떠오르자, 화정은 관우에 관한 얄미운
감정을 끄기로 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관우가
유독, 그녀를 경계하는 정말 이유를 말이다. 좀 말하기 힘들지만,
관우의 저 벽을 허물어야만 그녀가 앞으로 편하다.
"무엇때문입니까? 저는 운장께서 저를 꺼려하고 계신 줄로
알았다고 말씀드린다면, 큰 실례입니까? 의심하셨습니까?"
그녀의 또박또박한 말에 관우가 조금은 죄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럴 때는 의외로 장비만큼이나 솔직한 면이 있다.
"......눈치채고 있었군. 이 사람은 그대가 무엇인가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고, 동탁이나 다른 이들의 첩자가
아닐지 의심스러웠네.......양해를 구하지. 여지껏 큰형님과
장 아우 이외에는, 큰형님을 따르는 동지가 없었기에 내 조금
경계했네."
`사실은 관우가 유독 질투심이 강한 타입이라서 그럴 거라고
말하려 했는데......차마 이 말은 못 하겠네.......'
삼국지를 열심히 읽은 사람이라면, 깨달을 수 있다.
신격화(神格化)되어있는 관우. 오히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유비나 조조보다 더 떠받들려질 만큼,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오만과 질투, 독선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화정은, 관우가 그녀를 유독 경계하는 이유를 천천히 판단해 나가던
중, `관우와 제갈량(諸葛亮)의 사이에 관한 진실'이라는 논쟁이
생각났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관우는 제갈공명에게 복종하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이 경쟁관계에 있었음이 명백하다고,
삼국지 연구가들은 입모아 말한다.
이유인즉, 제갈량이 유비의 군사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쌓기
위해서는 관우라는, 기존의 유비의 참모를 눌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유독 자존심이 높고 질투심이 강한
관우로서는 제갈량을 용납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 설(說)들을 생각해 내면서, 그녀는 한가지를 깨달았다.
관우는, 유비를 따르는 제 1의 동지가 된 화정을 내심 경계했다는
것. 혹시나 첩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겠지만, 혹시 그녀가
생각보다 능력이 뛰어나 자신을 제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투심도 지니고 있었다. 분명했다. 크게 어려운 생각도 아니거니와,
있음직한 일이었다.
다만, 화정이 유비에게 그다지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도 못했으며
인정도 못 받는 것을 보고 조금씩 마음을 풀어갔던 것이다.
사람들이 신격화 시켜보는 관우의 이런 면은, 관우를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면서도 화정으로서는 당황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런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화정은
관우의 갑작스럽게 온화해진 태도가 마음에 걸려왔다. 그녀가
생각해온 이유가 옳든 말든 완고한데다 그녀에게 담을 쌓고 있던 관우다.
그러던 사람이, 갑작스레 벽을 허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전까지만 해도 찡그린 얼굴로 화정의 과거에 대해 열심히
캐물으려고 했는데 말이다. 정말로, 어떤 질투나 조바심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가, 화정이 인정은커녕 의심만 잔뜩 받고있는 것을
보고 안심 비슷한 감정을 느껴서 그런 것일까? 관우는 화정의
복잡한 심정을 눈치챈 듯 - 질투심이라던가 조바심 같은 것을
이유로 생각할 거라고는 눈치 못 챘을 것이다 - 얼른 덧붙였다.
"방금 이실직고(以實直告)하지 않았던가. 장 아우 이외에 다른
사람, 그러니까 큰형님과 협조하는 백규공이라던가 연합군의
사람에게 속한 동지 이외에는 직접 큰 형님의 수하가 되겠다는
사람이 없었기에 의심을 했던 것이라고......
큰 형님은 내가 보기에도 사람들이 스스로 의탁해 올만한 세력이
못되는데.......혹시 첩자가 아닐까 생각했네. 그러나 내,
생각해보니 잘못한 점이 많았네. 이런 식으로라면, 앞으로 큰
뜻을 품고계신 형님께서 형님의 자신의 사람을 만드실 때마다
오류가 생기겠지......"
그제야 관우의 갑작스레 돌변한 태도를 납득할 수 있었다.
관우는 화정에 대해서 나름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유비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설득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지도 몰랐다.
깨달았다기보다는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실천에 잘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옳겠지만, 여하튼 관우로서는 화정에
대해 태도를 풀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오늘같이 불러 온 것이리라.
화정은 속으로 냉소했다. 아직은 신중하고 의심이 많은 관우였다.
물론, 훗날에 -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 다소 거만한 면이 있는
사람으로 변하고, 그 덕분에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결론을 맞는다는
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이 신중성을 끝까지 지켜나가게
도와준다면, 혹시 삼국지의 역사도 바뀔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화정이 생각을 잘못 한 것같았다. 질투심이나 조바심은
조금 지나친 짐작일 지도 모른다. 관우는 단지, 유비같이 미약한
세력을 지닌 사람에게 스스로 의탁할 것을 말할 리가 없다는,
다소의 객관적 판단 덕에 그녀를 의심한 것 뿐이다.
아직까지는 관우가 훗날처럼 그렇게 오만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역시 사람이란 명성을 얻고 어느정도의 강한 기반을 얻게 되면
다소의 거만과 방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화정은 생각하면서 관우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운장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이 사람, 절대로 운장이나
현덕공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현덕공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끝까지 뜻을 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심려놓으십시오."
그 말은 관우의 근엄한 얼굴에 미소를 띄우게 했다.
"미안하네. 자네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는
있었네만......사실 나는, 오늘 자네가 혹여 적의 첩자라
하더라도 내가 설득하여 필히 형님의 사람으로 남도록 마음을
돌리게 하려던 참이었네......."
"괜찮습니다."
관우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분명히 저 영악하고 비밀이
많아보이는 소저는 관우의 뜻을 미리 알아채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 듯했다. 관우는 낮의
화정의 태도들을 정리해보았다. 알 수 없는 말들, 그리고 그
말들은 정확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형님의 사람으로 확실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그렇다면
필시 도움이 크게 될 것이다!'
관우는 조금 미안한 감정을 담고 화정을 응시했다. 그러고보니
웃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상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여하튼 미인이고, 어딘가 아직까지 여려보인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가녀려보이는 저 아이를 전쟁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은,
관우에게 조금의 심리적 부담을 지워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관우는 늘상 묘사되듯 의리만을 찾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런 관우의 앞에서 화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그렇지......어쩐지 관우님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
수상하다 싶었는데......내가 적의 첩자라는 전제 하에서 설득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군......'
이런 상황을 보고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화정과 관우는, 아직까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모조리 털어놓지 않았지만 좋은 표정으로 헤어졌다.
*******
".......네?"
운록의 표정이 어이없음을 담았다. 당연하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이런 사적인 물음을, 별로 친하지도 않고 오히려 경계하고
있는 사이인 사람이 던진다면, 그것은 정말 기분이 나쁜 일이다.
지극히 비밀이 많고 숨기는 것도 많은 성격의 소유자로서, 가장
잘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조금은 죄책감을 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운록을 응시했다.
"마초 오라버니께 그렇게 혼나면서도 기분이 안 나쁘냐고요?
참나......!"
정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아니나다를까, 운록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표정이다. 화정은 속으로 씁쓸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 아니요. 단지......맹기가 운록에게 조금 과다하다 싶어서요.
그런데도 운록은 전혀 화도 내지 않고 잘 따르더구......."
"이봐요? 당신도, 꽤나 반질거리게 생긴 것이, 어디 명문가
규수 뻘 되는 것 같은데, 생각 좀 해보시죠?! 누이동생이 오라비의
명을 거역하기가 쉬운 일인가요? 게다가, 그것도 가장 큰
오라버니이신데요!"
꽤 화난 어조다. 역시, 대답하기 싫어하고 상대하기 싫어하는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하지만 운록은 지금의 화정에게 있어서
필요한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이다. 싫어도 가까워져야 한다.
운록의 한마디 한마디는, 화정에게 있어서 수업시간에 듣는
선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보다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서 어지간한 것은 알아두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어려운 점을 감내할 줄 아는 것이 바로 화정 자신의
특징이다.
"저는 그다지 좋은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어서 잘
모르는데다......그래요, 더 결정적인 것은, 마 낭자께서 그렇게
고분고분한 분은 아니시라고 생각했어요. 분명 처음 볼 때는
맹기의 앞에서 꽤 드센 모습이었으니까요."
기억한다. 처음에, 마초에게 반갑게 달려온 운록은 자신이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따라온 사실도 서슴없이 밝혔고,
돌아가라는 마초에게 퉁퉁부은 얼굴까지 보였다. 그때의 운록과,
다른 일행들이 있었을 때 마초 앞에서 쩔쩔매던 운록은 분명
달라보였다. 그것은, 꼭 화정 뿐이 아니라,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문스럽게 여길 점이기도 하다. 화정의 지적에
운록의 얼굴 한 구석이 움찔하였다.
"쓰, 쓸데없는 것은 신경쓰지 말아요!"
얼굴이 확 붉어지면서 소리를 빽 질렀지만, 그 표정은 오히려
화정으로 하여금 `역시......'라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죄책감이 없고 별로 자신에게 해당하는 추리가
아니었다면 그저 비웃는 표정으로 일관하였을 테니까.
물론 바로 앞의 구절은 운록같이 쉽게 흥분하고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적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화정이라면 눈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넘겼을 테니까. 화정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투덜대면서 그녀를 등지려던 운록은 긴
눈싸움 끝에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시인했다고
봐야한다.
어색해하고 말하기 거북스러워하는 운록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운록을 어떻게든 그녀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아,
결국 이런 말까지 그대로 해야하나. 밑도 끝도 없는 말 같지만
어차피 방도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기왕이면 운록과 기분좋게
연관되고 싶지만 어렵다. 찬밥 더운밥 가릴 사정이 아니었다.
목청을 가다듬었다.
"운록, 잘 들어요.......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여기와는 조금
다른 곳에서 왔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주는 것은......
운록 뿐입니다."
"......뭐라고요?!"
"내게는 운록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만큼, 나는 운록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고, 운록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
뿐이에요."
뻔뻔스럽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은 이곳에 와서 거짓말을
너무 많이했다. 그것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태연한 얼굴로.
그리고 지금 자신의 이 거짓말에 운록은 황당해하고 있었다.
물론 운록에 대해 궁금하고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호감은 조금 거짓말에 가깝다. 일단 운록 자신이 화정을 경계하고
있는데 호감이 갈 리가 있겠는가. 그건 사람이면 당연한 것이다.
상대가 호감을 가져주면 호감이 쉽게 가고, 안 좋은 감정을
품는다면 자신도 경계하게 된다. 멍한 표정으로 화정을 보던
운록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나에 관해서 많이 알고 싶다, 마초 오라버니에 대해 묻는
거다? 이런 뜻인가요?"
운록의 질문에 화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운록이 알아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운록은
화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란 바다같은 눈동자가 참 시원하다.
흰 피부는 정말 마초와 많이 닮은 그녀는, 저런 어이없는 표정도
마초와 많이 닮았다. 언뜻 보기에는 닮지 않은 것 같지만, 저렇게
뜯어보면 많이 닮았다.
"사실대로 말해요.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당신은 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오라버니가 신경쓰이고 궁금한 거여요. 그렇죠?"
눈앞이 갑자기 깜깜했다. 화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면서 그만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뭐?!
"오라버니가 소저를 좋아하니까, 신경쓰이죠? 당신 주변 사람들
중 마초 오라버니를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누이동생인 나니까,
나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것이고요."
커다란 돌이 뒤통수를 내리 찍은 것 같았다. 정말 놀랐다.
그저 제멋대로이고 철이 덜 든 어린 여자아이로만 알고 있었다.
이렇게 눈치가 빠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놀랄 것도 없다. 그러나, 은연중에 운록을 `철없고
제멋대로인 계집아이'라고 깔보고 있기까지 했던 화정은,
운록이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읽었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잘 읽지 못하던 자신의 속마음을, 철없고
제멋대로인 여자아이가 읽어냈다. 우습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사실 운록에 대한 호기심은, 마초와 피붙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꾸만 자라나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건, 화정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맞을 지도 모른다. 운록이 그 사실에 대해
말할 때, 저도 모르게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는 것을 느꼈고,
손에 힘이 풀렸었다.
다른 세계로 돌아가자. 다른 세계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운록이라면, 접근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질문은 끝난다. 그런데, 왜? 어째서 화정 자신은 다른 것도 아닌,
마초와 마운록 남매의 사이에 관해서 심각하게 묻고있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화정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입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저, 가슴속에서 샘솟던 의문이었다.
그녀는 운록에게, 마등의 엄격하고 조금 너무하다싶은 대우에
대해서는 묵인했으면서, 마초의 당연한 구석이 있는 꾸지람에
대해서 캐묻다시피하고 있었다.
왜? 대체, 내가 왜 운록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거지? 오라버니에게
혼나면서 기분이 나쁘지 않느냐고? 다시 생각해보니 유치한
질문이었다. 정말 유치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 질문을, 생각도
없이 했었다니. 생각도 없이 이런 질문을......! 순간적인 놀람과
함께 운록의 말은, 그렇게 화정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정확히 맞지는 않아도, 최소한 틀리지는
않았을 거에요."
운록은 잘라말했다. 화정은 멍하니 운록을 응시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들키는 심정이란 이렇다는 것을, 참으로
오랜만에 깨달았다.
`내가 자랑으로 여겨온 것이 이렇게 잔인한 것이었다니!'
자신의 입장이 되어봐야만 깨닫는 것이 사람이라는 말, 그
말이 이렇게 옳은 소리였다니. 늘 자신이 타인에 대해서 눈치가
빠른 것을, 그리고 그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최고의 재주로 여기고 최고로 필요한 것으로 알아왔던 화정은
치가 떨려왔다. 스스로에게 치가 떨려왔다. 그리고 무서워졌다.
그녀를 이렇게 키운 사람, 아직도 그녀에 비해 월등하게 상위에
서있는 아득한 사람, 그녀의......두려웠다. 난, 내 스스로에게
이렇게 두려운 점이 있다고 생각한 때가 없었는데. 오히려 이를
자랑으로 여기고 지냈는데...... 그녀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운록의 새침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왜 그러고 있어요? 늘 그렇게 차가운 표정만 하고 있어도,
난 알 수 있어요."
멸시하는 목소리다. 차가운 표정만 하고 있어도 알다니. 운록은
지금 이 순간, 화정이 얼마나 낙심하고, 후회로 뒤덮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다. 눈치 빠른 운록도 그건
모르는 것 같았다. 정말 그렇다. 화정의 속마음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 사람들은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차가운 표정, 표정변화가 적은 얼굴, 웃음기 없는 외모. 이젠
신물이 난다. 어째서 알아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잘 알면서,
알아주기 바라는 것은 몰라주는 건지, 야속하다. 화정의 심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운록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때껏 남자를 차 본 것이 분명 한두번은 아닐텐데 왜 맹기
오라버니에게는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여요? 표정이 없는 당신이
그렇게 놀라면서 물건을 떨어뜨릴 만큼이나."
쐐에엥.
어떤 차가운 회의 같은 것이 화정의 가슴속을 한바탕 쓸고
갔다. 시렸다. 가슴이 너무나 시리고, 아팠다. 남자를 차 본적이
한두번은 아니라고?
<너 좋아해.>
어떤 아이가 말했었다.
<난 네가 싫어. 그럼 됐지?>
그녀는 차갑게 거절했었다. 그리고 조금의 세월이 흘러갔다.
<난 네가 좋은데......>
또다른 남자아이가 말했다.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거니? 난 네가 싫어.>
그녀는 그 아이의 고백도 거절했었다.
<널 좋아해.>
<지겨워!>
표정없는 얼굴로, 신물난다는 식으로, 내뱉어 주었다.
<좋아해.>
<넌 정말 내 이상형이야.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줄 수 있겠어?>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싫어!
잘라 말하기도 지쳤다. 다들 똑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내뱉는다. 말하는 구절에다가 포장만 조금 다르게 하고서.
그녀는 그리고 똑같은 얼굴로 차갑게 내뱉었다. 싫다, 싫어.
난 생각없어. 싫다는데 어쩌자는 거니. 그리고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너희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있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구들이 `포커페이스'라고 속닥대는 이
얼굴 속에, 얼마나 여린 감성이 남아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좋댄다. 이상형이라고 한다. 예쁘다고 한다. 좋아한다고 한다.
<웃겨!>
증오스럽고 싫었다. 이젠 지쳐서, 남자아이들이 무어라하건
대꾸도 않고 가버렸다. 그런 일이 생기면, 그녀가 좋다고 떠들던
그들은 돌아서서 욕했다. 싸가지 없는 계집애. 정말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음공주.
<너, 솔직히 나만큼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어?>
아, 그래. 조금 기억나는 아이는 있다. 이준혁. 오만한 얼굴로
잘도 말했다. 그녀에게.
<넌 나하고 닮았잖아? 빠지는 조건 없고, 오만한 얼굴을 잘
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생각해? 우리 둘, 숙명이라고 생각 않아?>
코웃음쳐주었다. 그리고 쏘아붙여주었다. 그 오만한 자존심을
구겨주었다.
<웃기지 말아. 난 빠지는 조건도 많고 오만한 얼굴을 너만큼은
못 한다는 점에서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확실히, 그 아이는 달랐다. 돌아서서 그녀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면서 끈질기게도 교제신청을 해왔다. 지겨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이 나와 비슷한 부류라면, 내
스스로가 정말 싫다고. 내가 표정이 없다고? 그런 내가 놀라면서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멍하니, 땅에 떨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좀더 솔직해지는게 뭐가 힘들어요? 난 당신처럼 자신의 생각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싫어요. 그래서 당신에 대해서는 나도
정직해지지 못하는 거여요."
자신의 생각에 정직하지 못하다고?
<......맹세할게, 내가 스물이 넘고 기반이 조금 더
생긴다면......너와 혼례를 치를 거라고 말이야.>
부드럽던 목소리. 조금이나마 다르던 그 얼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던 그 진지한 말들.
<나도......날 진심으로 알아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이렇게 말했어야 했나? 그의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 말들에
당황했던 걸까? 정직하지 못하다......? 단지, 당황해서,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차마 마초에게 하지 못했을까? 화정은
고개를 들었다. 운록의 등이 보였다. 화정을 등지고 서 있는
운록의 체구는 자그마했다.
"그냥, 이야기했더라면 좋잖아요? 맹기 오라버니에 대해
당신도 관심이 있고, 그래서 나에게 물어보는 거라고 했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야기했을 텐데."
저 소녀, 저렇게 작은 체구를 지니고, 당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화정보다 더 담이 크고, 어찌 생각하면 화정보다
더 신중하다. 그래, 모든 사람들이 솔직하다면, 속고 속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사람을 속이고, 간파해오는
것을 배우고 자라온 화정은 그런 사고가 익숙하지 않다. 자신의
생각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싫다고?
"스스로가 스스로의 생각에 정직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다가오지 않는 거여요. 사람은 느낌이란 것을 지니고
있거든요. 아, 저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느끼고 그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거여요. 스스로에게도 정직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겠어요?"
거리. 학교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늘 느끼던 거리. 자신에게
교제신청을 하던 남자아이들과의 사이에서도 늘 느끼던 거리.
하다못해......아버지와의 사이에서도 느끼던 거리. 내가 그들을
먼저 경계했을 지도 모른다. 운록의 말은 일리가 있다. 분명 있다.
그리고, 마초에게서는 그러한 거리를, 조금은 없어진 것처럼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요."
마음을 굳혔다. 운록의 말을 인정하자. 옳은 말이니까. 하지만......
"운록의 말이 옳아요. 마초에게 관심이 있어요."
......정직할 수만은 없는 것이 화정의 상황이다.
"이젠 정직하게 털어놓았어요. 운록이 모두 눈치를 챘으니까,
속이지 않겠어요."
운록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마음에 들어보겠다는 것이
화정의 생각이니까. 솔직한 척을 해서라도, 솔직하게 마초에
대한 호감을 인정하면서까지도 운록의 호감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이 화정의 당초 판단이었으니까.
"왜 다른 사람에게는 유순하고 농담도 아끼지 않는 맹기가
운록에게는 그렇게 차가운 거지요?"
속이려면 끝까지 속이고, 야비하려면 끝까지 야비해라.
화정의 아버지가 늘 하던 이야기이다. 자신도 그런 아버지가
싫었지만, 그건 옳은 말이었다.
"그게 궁금해요. 그리고 운록이, 어째서 그렇게 맹기와 다른
눈과 다른 머리칼을 지니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거짓말은 계속 거짓말을 낳는다. 거짓말을 한번하고 나면,
그 거짓말을 알면서도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또다른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맹기와 관련된 것은 다 알고 싶을 정도로,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운록에 대해서도 궁금해요."
악순환이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마초를 좋아하는 것만은
운록이 눈치챈 대로다. 그래서 마초와 관련된 사실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운록에게 질문했었다. `왜 마초가 그렇게 운록에게는
엄하게 대하느냐.'고 말이다. 그것은 무의식에 가깝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단지, 저쪽 세계를 알고 있는듯한
유일한 사람, 운록에게 직접적으로 관심이 있다. 저쪽 세계에 대해
알고 싶은 것뿐이다. 마음을 숨기기 위해 운록을 잘 알고 싶고
운록에게 호감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켰다. 그리고, 그
무안을 감추기 위해 지금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마초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마초의 주변까지 궁금해
할 정도는 아니다. 그게 바로 화정의 진실이었다. 거짓말을 낳는
거짓말. 이런 악순환, 너무 싫지만 자신은 거짓말을 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다. 운록의 눈은 정확했다.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한 화정. 옳은 말이다.
그래서 운록이 화정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저렇게 솔직할 수
있는 맑은 심성이 부럽다. 아직 운록은 그런 화정의 변화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표정이 차차 수그러들고 있었다.
"아, 그래요......정말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얘기해 줄께요."
운록은 화정을 향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저 아가씨, 이제는
나에 대해 경계심을 확실히 줄인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저의 개인적인 것은 안돼요. 단지, 전
오라버니와 관계된 것만 조금 이야기해줄 거여요. 당초 당신의
질문이었던, 맹기 오라버니가 혼을 내도 내가 아무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요."
"......."
맥이 풀려버렸다. 너무 일찍, 많은 것을 알려고 한 화정 자신도
나쁘지만 운록도 꽤나 명물이다. 생각보다 야무진 구석이 많은
아가씨다. 대발견이라고 생각하면서 화정은 속으로 `차차 알아낼
수밖에.' 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운록은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말을 던졌다.
"제게는 많은 오라버니들이 계시지요. 하지만, 그 분들 중에서
제게 그나마, 혼이라도 내 주실 정도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맹기 오라버니뿐이랍니다."
혼이라도 낼 정도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마초 뿐이라고? 화정이
그 말을 바라보았지만, 운록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장막을 걷고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화정에게 못이라도 박듯
매섭게 말하고는 가버렸다.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아요. 자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면서 나에대해 알려고 하는 당신에게, 이 정도라도 알려준
이유는, 오라버니가 그나마 짝사랑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구나,
하는 기쁨에 해준 배려에요."
배려.......
*******
휘리릭!
크게 원을 그리면서 뻗어나간 운록의 봉이 관우에게 덤볐다.
관우는 몸을 약간 굽히면서 한 손으로 운록의 봉을 받고는 자신의
봉으로 운록의 어깨를 가격했다.
"웃!"
운록은 뜻밖의 공격에 놀랐는지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면서
관우의 봉을 피했다. 관우는 그녀의 태도가 흔들린 틈을 타서
그녀에게 다가섰다.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관우의 봉이 수평으로 원을 그리면서
운록의 허벅지를 때렸다. 운록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자신의
봉을 휘둘러 관우의 왼 팔을 공격했다. 관우는 운록의 반격에
왼 팔을 공격당했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고 운록의 무릎을 봉으로
치려했다. 운록은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와!"
화정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운록의 작은 몸은,
새라도 된 것처럼 가볍게 공중을 날고 있었다. 정말로, 지상에서
대략 1미터는 넘게 도약해 낸 것이다. 저런 장면은 영화에서,
실을 매달고 한다는 그 가상의 장면에서만 보았었다.
그러나 관우는 가뿐하게 자신의 몸을 움직여 허공에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봉을 날리는, 운록의 공격을 피했다. 도리어 관우의
봉이 운록의 허리를 세차게 쳐냈다.
"이만 끝내세."
그 말과 함께 운록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땅에 착지했다.
가볍고 자연스러운 몸놀림이었다. 올림픽 경기에서 보았던,
체조선수의 착지같이 자연스럽고 가벼웠다. 운록이 현대시대의
체조 선수였다면 금메달은 쉬웠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화정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운록은 이마의 땀을 팔로 훔쳤다.
햇볕에 더 밝아보여서, 완전 금발같이 느껴지는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관우는 쓰게 웃으면서 운록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것 참, 제법이구먼, 마소저. 감탄했네. 날랜 움직임이었네."
관우의 칭찬에 운록이 쑥스럽게 웃었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닐세.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훗날에는 내가 당할 것 같았네."
서로 겸양의 말을 주고받았지만, 화정이 보기에도 관우가 훨씬
우월한 것이 사실 같았다. 적잖이 태권도나 검도를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도 움직임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었다. 매우
빠른 몸놀림들이어서 정확히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관우는 발의 움직임이 적고 호흡도 고른 것에 비해,
운록의 호흡은 다소 거칠었다. 또한 빠르고 다양한 움직임이
그녀의 특기라고 하여도, 체력이 밑받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자신이 여자이기에 완력이 부족한지라 움직임을 중심으로
연마했을 것이다.
적의 눈을 속이고 적의 강력한 힘을 실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그같이 현란한 움직임을 선택했을 터이지만,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그 움직임이 오래 유지될 수 있다. 이건 꼭
베테랑이 아니어도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게다가 더 오래 대련을
했다면 운록은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 호흡이 거칠다.
관우는 땀조차 흘리지 않고 호흡도 편안하지만, 운록은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가쁜 숨을 내쉰다. 그제야 화정은
도장에서 사범이 숨쉬기 훈련을 시키고 뼈빠지게 달리기를
시켜 체력을 기르게 하던 연유를 더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대기업 따님이라고 봐주던 자신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다른 아이들이야 오죽했을까.
"봉은, 양손을 조금더 넓게 벌려잡아야 움직임이 편하고,
긴 자루가 지니는 장점을 최대로 살릴 수 있다는 특성이 있네.
봉이란, 창을 좀더 쉽게 쓰도록 하는 견습 과정이니 이야기하는
것이네만, 이 창이란 것은, 긴 자루를 잘만 이용하면 수비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 질 수도 있다는 장점을 지니지. 검에 비해
좋은 점은 바로 그것일세."
여하튼, 관우는 운록에게 몇가지 지침을 내리고 있었는데,
곁에서는 장비와 마초가 아웅다웅하다가, 어느덧 킬킬거리고
앉아있었다. 진지한 모습의 관우와 운록에 비해볼 때 참 느낌이
틀리다. 마음이 편한 사람들. 어떠한 상황에서도 웃을 줄 아는
사람들. 그것이 화정이 보는 장비와 마초였다.
물론, 두 사람도 현저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면이
상당히 많다. 장비......는 그녀가 삼국지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그렇다, 책에서 읽던 대로다.
하지만 마초는 관우처럼, 많이 다르다. 다소 오만하게 읽었는데,
지금 보니 화정의 동갑내기답다. 오히려, 화정보다 더 어리게
느껴질 때도 있을 만큼이나 편하고 쾌활한 곳이 있었다.
둘이서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웃는 것을 보면서,
화정은 자신도 여유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참 잘 웃는다. 참
편해보인다. 이런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 태어나서, 저렇게
편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역시 보통 사람들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랐으면서 편하게 마음먹지
못하는 화정 자신이 더 쑥스럽고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진심으로, 저렇게 웃어보고 싶었다.
"자, 그럼 다시 해보지!"
관우의 기운찬 목소리와 함께 운록이 이마의 구슬땀을 닦았다.
봉을 바로 잡은 운록이 역시 밝고 힘차게 외쳤다.
"네, 운장!"
이내 봉 두 개는 휘황찬란한 재주를 자랑하면서 얽힌다. 운록이
관우의 가르침에 잘 적응한 모양이다. 아까보다 쓸데없는
움직임이 적어지고 호흡도 조금은 고르게 변했다. 아직 크게 변한
것은 아니지만, 좀 좋아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화정은 그 모습을, 양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서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대련시간이 조금 길어지기는 했지만 곧바로 운록의 봉이
날아가버림으로써 이번에도 역시 운록이 져버렸다. 관우는 또다시
져버린 운록에게 정성스럽게 주의를 다시 주었다. 조금은
엄격하고, 조금은 너그러보였다. 저렇게 보면 관우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을 꽤 좋아하는 사람같다.
얼마전에 관우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관우는.......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랬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느꼈던 이미지가 가장
많이 깎이고 가장 많이 부정적으로 느껴졌던 사람이다. 하지만
화정은, 어제의 대화와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관우가 낯설었던 것인지. 그녀가 읽어왔던 책에서는
굉장하게 높이고, 신격화에 가깝게 묘사했던 관우는.......
"처음에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누구든 늘게되지.
그럼, 힘들겠지만 다시!"
"네, 운장! 감사합니다!"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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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고, 조심성많고, 밉기도 하지만 일단 마음을 열면
다정하고 온화한 면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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