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스스로에 대한 불만
화정은 까맣게 그을린 옷을 입고는 조용히 눈치를 보았다.
정말 미안했다. 자신이 빠득빠득 우겨서 요리를 했지만,
막상 해보니 요리가 이렇게 힘이 든 줄 몰랐다. 게다가
이곳은 그녀의 세계처럼 가스레인지나 오븐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더욱 그랬다. 얼른 물을 항아리 째 부어서
끄기는 했지만, 주변에 흩어진 잿가루가 온통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덕분에 조운이 길어왔던 항아리가 세동이나 몽땅 소비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야채들 역시 까맣게 재가 묻어버렸고,
모처럼 구워먹으려던 고기는 새까맣게 타 버렸다.
".......재료만 낭비됐군."
조운은 별로 화가 난 기색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화정의 심장에 비수를
박고있는 것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면서 크게 나무랐다면
변명이라도 했을 텐데, 저렇게 조용한 태도로 아무 말 없으니
더더욱 미안해진다.
본래 사람이란, 그런 법이다. 탓하지 않을수록 더 미안하다.
게다가, 용서한 것도 아니고 저렇게 무관심하게 서서 주변을
살피고만 있으면 말이다. 한참을 둘러보던 조운은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돌렸다.
"역시, 하녀를 고용하는 편이 낫겠군."
정말 미안해졌다. 안그래도 공손찬이 하사한 집에 붙어살면서
식비도 조운이 모조리 감당하고 있는데, 하녀까지 고용하게
되면 볼 낯이 없을 것 같아서 자신이 요리와 청소, 빨래를
하겠다고 했던 것이었다. 미안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였다. 청소나 빨래, 요리를 한번
정도는 해 보고 싶었었다.
그리고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고 추측하고 요리를 시작했는데,
결과는 지금과 같다. 불을 잘못 땐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 펑,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자 당황한 화정은 물을 길어놓았던 항아리
세 단지를 그대로 불에 쏟아 부었고, 다행히 불은 잡혔지만
물에 재가 떠내려가 주변은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먹기 위해 약간 사놓은 야채와, 이웃이 된 아낙이 그나마,
조운이 관리라는 이유로 잘 보이려고 모처럼 가져다 준 고기가
먹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나마 야채는 씻으면 된다지만
고기는 새까맣게, 나무장작 타듯 타 버렸다. 화정은 돌아서는
조운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급하게 말했다.
"어, 아녀요! 요리는 불 다루는 법이 미숙해서 그래요!
청소는 잘 할 수 있어요! 정말, 청소는 힘들지 않다고요!"
*******
연신 콜록거리면서 화정은 열심히 마당을 쓸었다. 그래도
마당은 깨끗한 상태여서 좀 나았다. 그냥 이렇게 쓸어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 집은, 딱 세, 네 명이 살기에 알맞도록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규모가 꽤 있었다. 쌓인 책 - 조운은
무인이면서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어대는지, 책이 좀
많았다. 뭐 덕분에 곁에서 얻어 읽기는 했지만 - 들을
가지런하게 치워두고 비질을 하는데는 적잖이 애를 먹었다.
이곳에 당도한 지 며칠 안되었지만 벌써 지저분해졌다.
그래도 방 청소는 집에서 가정부가 좀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그리고 어려운 점이 없어서 말썽없이 잘 끝냈다.
화정은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보라구, 나도 청소는 할 수 있어!'
새삼 자신감이 생긴 화정은 조운이 이미 치웠다던 마당까지
깨끗하게 쓸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마당을 쓸고 있다.
천천히 비질을 하던 화정은 자신의 앞에 책이 몇 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뭐야, 이건! 기껏 치워놨더니 왜 여기다 책을 던져놓았담!'
화정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빗자루를 옆에 세워놓고는
십여 권 정도 되는 책을 품에 안았다. 조심스럽게 책을 나르던
화정은 뭔가 조그만 것이 떨어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이건 뭐지?"
신기하게 생겼다. 작달막한 막대기가 달렸는데, 위에는 뭔가
단단한 것이 붙어있었다. 화정은 자신이 책을 쌓아두었던 - 책이
너무 많아서 자주 보지 않는듯한 책은 따로 마당에 쌓아두었다 -
곳에 안고온 책을 놓고는, 그 조그만 것을 집어들었다. 화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그것을 살펴보았다.
`글씨라도 쓰는 건가?'
벽돌에다가 글씨를 써 볼 생각으로 막대기를 힘차게 문지르던
화정은 깜짝 놀라면서 막대기를 던져버렸다. 막대기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성냥 비슷한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은 화정은
다음순간, 심장이 통째로 내려 앉아버렸다. 그 성냥같은 것이
떨어진 곳은, 하필이면 쌓인 책더미 사이였다.
당연한 결말이지만, 곧장 불길이 치솟았고, 화정은 정신없이
물을 찾아 달렸다. 또다시 잔소리를 듣기도 싫거니와, 미안하기도
했다. 벌써 매캐한 연기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전에 일어났던
요리 사건 때문에, 떠다놓은 물은 바닥나고 없었다.
근처의 강가까지 사력을 다해 달려야했다. 이러는 사이에 다
타버렸으면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정신없이 물을
길어서 오는데, 집에 도착해보니 불길은 이미 잡혀있었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화정은 덜컥하면서 또 죄책감을 지니고 말았다. 마침
물을 떠오는 길이었던 조운이 이미 물을 뒤집어 씌웠던
것이었다.
"책 다섯 권이 통째로 타버렸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
빨갛게 언 손이 유난히 시렸다. 입김을 호호 불어서
녹여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빨갛다. 화정은 투덜거리면서도
옆의 광주리에서 또다른 빨래감을 꺼냈다. 도대체가, 이렇게
차가운 강물에서, 그것도 세제도 없이 맨 물로만 빤다는 것
자체가 한심한 노릇이다. 하지만 어쩌리. 이곳에는 비누도 없다.
화정은 빨래를 신경질적으로 비비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빨래에서 손을 떼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과학을 열심히 공부해둘걸......
비누랑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이 어디 없었나? 여러 가지로
화가 나는 세상이야. 책 좀 몇 권 사달라니까 들은 척도 안
하고......더부살이라 무시한다, 이거지? 아, 열받어......!"
머리에서 김이 솟는 것 같았다. 요리와 청소 분야에서 이미
조운에게 찍힐 대로 찍힌 화정은 빨래는 불을 동반할 일이
없다고 벅벅 우기면서 - 하기는, 두 가지 사건 모두 불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으니 빨래가 불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설득력을 지녔을 것이다 - 빨래짐을 지고 나왔던 것이다.
청소, 요리란 것이 이렇게 힘이 들고 주의를 필요로 하는 지
몰랐다. 지금 보니 빨래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잔뜩 짜증을
내면서 빨던 옷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본 화정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이마를 문지르느라 붙들지 않고 잠시
놓았던 빨래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화정은 후다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자신이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신발을 벗었다. 서둘러 물 안으로
들어갔다.
첨벙첨벙.
요란한 소리가 나자 근처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몇몇
아낙네와 아가씨들의 시선이 몰려왔다. 좀 부끄러웠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아까의 장면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정말 할 줄 알아?>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운에게 화정은
기운차게 답했다.
<그럼요! 빨래 정도야 당연히 할 줄 알죠!>
자신만만한 그녀를, 그래도 믿음이 안 가는 얼굴로 한참 보던
조운은 그제야 곁에 놓인 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었다.
<거기에 있는 검은색 옷은 각별히 주의해 주었으면 좋겠군.>
그러나......지금 떠내려가는 빨래감이 바로 그 화제의
검은색 옷이란 것이다!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너무 추웠다.
발이 어는 것만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 옷은 그녀의 조금 앞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화정은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라면 팔을 뻗으면 잡을 수 있어!
그녀는 그렇게 외치면서 팔을 힘껏 뻗었다. 주변에서는 잔뜩
놀란 아낙네들이 화정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외침이 들려왔다.
"소저, 그만 돌아와요! 물살이 꽤 거세답니다!"
"저런, 어쩌면 좋아, 저 소저 뉘댁 분이신가요?!"
화정은 그런 외침을 뒤로하고 악착같이 팔을 뻗었다.
옷자락의 끝부분이 손에 닿았다.
"아!"
만족을 느끼면서 옷을 힘껏 잡아당겼다. 옷이 끌려왔다.
하지만......
풍덩!
다음순간, 물의 흐름에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화정은 앞으로 빠져버렸다. 그러나 화정은 손에
힘을 주어 옷가지를 놓지 않으면서 팔을 저어 헤엄을 치려
했다.
"저런! 어서 누굴 불러와요!"
"어쩌나, 아가씨가 물에 빠졌어요!"
여기저기서 소란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물살이 생각보다
너무 거셌다. 헤엄을 칠 수가 없었다. 화정은 자신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덩달아, 거센 물살이
그녀를 점점 아래로 밀고 있다는 것도. 입으로 물이 들어왔다.
"허푸!"
물을 힘껏 뱉어냈지만 머리가 또다시 잠겼다. 발버둥쳤지만
발에 바닥은 닿지 않았고 물만 허무하게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화정은 손을 뻗어 다시 물 위로 머리를 올렸다. 하지만 이내
몸은 다시 가라앉았다. 그렇게, 떴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는
사이, 몸의 힘은 빠져가고, 물은 벌써 한 가마니는 넘게 마신
것만 같았다. 숨이 턱까지 차왔다.
풍덩!
뒤이어, 정신이 몽롱해지는 순간, 화정은 자신이 빨래를 하고
있던 곳에서 누군가가 물 안으로 뛰어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어떤 팔이 자신을 붙들었을 때, 그녀는 그만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누구였더라, 그게......
*******
머리가 멍했다. 물만 마시다가 배가 터져 죽는 꿈을 수십
번도 더 꾼 것 같았다. 아직도 몸이 떨려왔다. 정말이지
지겹도록 찬 강물이었다.
"에에취!"
기침이 나왔다. 아, 맞아. 그렇잖아도 감기에 걸려있었는데
물에 빠지기까지 했으니 이렇게 지독하게 머리가 아픈 듯하다.
몸살이라도 난 것 같았다. 뻐근한 몸 때문에 오는 통증을 참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는데, 그녀의 곁에 누가 있는 것이 보였다.
화정은 그가 검은색의 옷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다 찢어졌군."
그녀가 빨다가 떠내려가게 했던 바로 그 옷이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찢어져버렸다. 화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숙여버렸다. 옷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조운이 그녀를 무관심한 표정으로 보았다.
"큰소리를 치고 나가더니, 관아까지 사람이 와서 물에
떠내려간다고 말해주더군."
`어, 그럼 조자룡이 날.......?'
화정은 기억이 흐릿해지던 그 때에, 누군가 뛰어들어 자신을
붙든 것을 생각해냈다. 그녀는 무안해져버려서, 볼멘 소리를
냈다.
"저, 하, 하지만......옷은 물에 떠내려갔을 뿐이에요. 그
정도로 옷이 찢어지고 그렇게 구멍이 나지는 않는다고요......"
좋은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그렇군. 허나 내 말은, 얼마나 세게 빨래감을
내리쳤으면 그 정도의 자극으로 옷이 이렇게 넝마가 되었냐는
뜻이지."
`윽!'
그렇긴 하다. 빨래를 하다 하도 화가 나서 있는 힘을 다해,
스트레스 풀이 겸 열심히 때려대기는 했었다......너무 세게
때렸나? 난 내가 그렇게 힘이 센 편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무안해진 화정은 자라목을 해버렸다.
조운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한마디 던졌다.
"차라리 하녀를 찾는 것이, 역시 좋을 듯해."
문이 스르륵 열렸다. 화정은 약간 부아가 치밀었다. 체,
그래도 난 그 옷하나 건진다고 추운 강물 안으로 들어갔다구.
적어도 그에 대해 감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투덜거리는
그녀의 귀를 조운의 음성이 때렸다.
"옷 건지러 강물로 들어간 것과, 사람 건지러 강물로 들어간
것 중 어느 것이 더 힘든지는 알테지?"
문이 차가운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약이 올랐다. 좀 져주면
어디가 덧나나, 정말! 화정은 크게 외쳤다.
"저 성질로는 분명, 장가도 못 갈거야!"
씩씩거리면서 코로 숨을 잔뜩 내쉰 화정은 멈칫했다. 그녀는
머리끝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으면서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확실히......자신은 변한 것 같다.
`맙소사......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졌지.......?!'
정말 그렇다. 이전의 그녀는 농담이라곤 제대로 하지도
못했거니와, 했다해도 이렇게 남의 등뒤에 대고 크게 외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일 같은 것은
더욱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자신이, 남의 옷을 건지기
위해 강물로 들어갔다! 이기적인 성질이 짙은 자신이 남의
옷 하나 건지려고 그 차가운 강물로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는 사실이다. 화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해! 어떻게 이런......'
이유를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분명, 자신은 이런
행동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이 왜 갑자기 이렇게
웃기지도 않는 행동들로 하루를 수놓았던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화정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래, 맞아!'
저 조자룡이란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그래도 화정은, 여지껏 자신이 비교적 우월한 입장이라고
생각하던 타입이었다. 공부도 남보다 잘했고, 아버지의
교육 덕에 다른 사람과의 말다툼에서 진 적도 없었다.
집이 가난한가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었으며 외모가 남보다
빠지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자신있게 `아니다.' 라고 답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이, 여기서 씩씩대면서 오기를 부리는
것이다. 분명 그렇다.
유비의 명령 - 유비는 부탁이라고 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명령이다 - 때문에 조자룡을 따라 북평까지 오면서, 그녀는
이런 행동을 배운 것 같았다. 말다툼에 화정 자신이 일가견이
있다면 조자룡은 이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행동도, 화정이 한가지를 해 놓고 어깨를 으쓱하고 있다면
조자룡은 묵묵하게 두, 세 가지는 해 놓고 조용히 있는
것이었다. 물론 빨래나 요리는 빼고 생각하면 말이다. 결국,
살면서 이렇게 철저히 `무시' 당한 경험이 처음이기에, 화정은
앞서와 같이 남의 등뒤에 대고 농담이나 싱거운 소리를
질러대는 능력과, 오기 때문에 옷 하나 건지려고 강물까지
들어가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게 되는 것이었다. 스스로도 기가
막혀진 화정은 흥흥거리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에에취!"
또다시 재채기가 힘차게 나왔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누군가 - 라지만 분명 누군지는 안다 - 작은 봉지 하나를
던져넣고는 다시 문을 닫고 가버렸다.
"에?"
그건 약봉지였다.
*******
"......그래서, 이렇게 해 보면 되는 건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 자세만 잡혀서는 소용이 없어. 머릿속을
비워야만 하는 거야."
화정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말도 안돼요! 자룡은 그런 과정 없이 듣잖아요?"
조운은 표정에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침착하게 답했다.
"나는 숙련자니까. 화정은 그렇지 않으니 당연히 집중하는
법부터 배워야하겠지."
아귀강시나 다른 생물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그녀는 하루에
약간씩 조운에게서 수련을 받고있는 중이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대부분 하급의 사물과는 대화를 할 수가 있었고, 또한
그것보다 좀더 숙달되면 대화는 불가능하지만 말이나 소,
짐승의 의사까지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여하튼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 대한
것도 알고 적응해야 할 것이니 당연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화정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 사람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한다는
그 `담사간인(談邪間人)', 즉 사물과 인간사이의 대화란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조운은 `잡념을 버리고 한 지점에 생각을
집중하라.'고 설명했는데, 화정으로서는 그것이 쉽게 되지
않았다. 조운 역시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저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이 가끔씩은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니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부적으로 불러온
아귀강시 - 아귀강시는 하급의 사물(邪物)이기 때문에 부적
등으로 가둘 수 있다는 것을 화정은 어떤 책을 읽고 알아낼
수 있었다 - 와 화정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기를 어언
며칠이 지나자 중얼거렸다.
"집중이 그리 힘들단 말인가! 잡념이 많은 모양이군."
그 말에 화정은 잠시 멈칫하였다. 그냥 넘어가도 될
말이었다. 그리고 기분이 조금 나쁜 척 하면서 넘어갔을
말이었다. 또한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화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물들을
대할 때만 해도 그렇다. 인물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관심을 기울이는 화정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현대 시대사람들은 인간 외의 생물과 의사소통 능력이
오히려 이 시대 사람들보다 떨어지는 이유가......잡념이 하도
많아서 진심으로 집중을 못 하기 때문은 아닌가? 하긴, 생존
걱정은 안하는 대신 이것저것 근심할 것이 너무나 많기는
하지.......앗!'
화정은 잠시 딴생각을 한 사이 사라져버린, 아귀강시가
있던 빈자리를 절망스런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자신과 대화가
없으면 아귀강시는 자신과 이야기를 할 만한 자를 찾아서
금방 떠나버린다. 이 하급 사물은 특별한 연유가 없으면
온순하고 겁이 많아서 인간들이 모두 잠을 자고 기가 약해지는
밤을 틈타 못된 짓을 한다. 낮에는 못된 짓의 `ㅁ'자도 행하지
못하는 우스운 종족인 것이었다.
굶어 죽은 귀신이라......화정은 자신을 못마땅한 눈길로
쏘아보는 조운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잡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어쩌랴.
`하긴, 이 시대에는 굶어죽은 사람이 많았을 테니
아귀강시들도 많이 생겨나겠지. 못 먹고 죽어 한이 맺힌
원령이라.......그런데 아귀강시보다는 원령이 더 상급이란
소리지? 어차피 원령도 하급에 불과하지만......흐응, 정말
만화같은 세계로군. 의외로 재미있는 세계일......'
"벌써 다섯 번째 부적이로군."
조운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정은 그 말에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면서 마른 침을 목으로 삼켰다. 꽤
비싼 부적이라고 했는데 조운은 화정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벌써 상당한 양의 부적을 소비했지만 화정은 아직도
아귀강시와 대화를 단 한마디도 못 나누고 아귀강시들을
날려버렸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유비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 무예나 주술 중 하나를 배우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무예는 가르치던 관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였고 주술 역시 소질이 없는지 조운은
벌써부터 화정에게 `그냥 포기해라.'하는 표정을 지어주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공손찬의 영지 하로 오게 된 화정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조운은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공손찬의 영지 중 자신이 관할하게 된 영지로 화정을 데리고
왔고, 공손찬이 내려준 집에 화정을 함께 기거시키면서 많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조운과 꽤 지내면서, 사람을 살피는
버릇이 있는 화정은 조운에 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
준수한 외모와 훤칠한 키를 지녀 처녀들의 이목을 잘 끄는
편이지만 그 자신은 그런 사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 그렇느냐고? 당연하다. 아예 그런 것에 관해서
`관심'자체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에 관해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감을 지닌 것도
절대 아니었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한, 매우
의무이행에 철저하고 성실한지라 이곳 북평에 조그만
사건이라도 났다고, 잠시 산책을 나간 화정이 떠도는 소문을
들었던 날이면 조운은 그날 어김없이 새벽녘에야 돌아오는
것이었다. 밤을 새서 수습하는 것 같았다.
이런 것 외에 그의 성격은 다소 차갑고 사람대하는 것을
가끔씩 귀찮아하며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면이 있었는데,
화정이 질문이 있어서 방으로 건너가면 그다지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여하튼 공손찬은 현재 화정이 자신의 영지 내에
있는 것을 모르며 주변 사람들은, 처음에는 `조운님께 부인이
있으셨다니!' 하고 입을 쩌억 벌렸다가 이제는 `먼 친척
여동생입니다.' 하는 거짓말에 다들 보기 좋게 속아넘어갔기에,
관심을 끊은지 오래였다.
여하튼 이렇게 슬쩍 넘기는 것이나, 공손찬에게 아직도 화정의
존재를 들키지 않도록 한 것을 보면 상당히 일처리가 깔끔하고
철저한 곳이 있는 인물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 생각해보니
틀린 표현같다. 이 시대에는 열 다섯이면 결혼하고 관직에
나가니 조운도 열 여덟이면 그녀 세계의 스물 다섯, 여섯정도
축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곳의 나이개념은 화정에게는
아직 적응이 덜 되는 나이개념이다 - 과묵하고 말을 아꼈으며
차가운 곳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 오래 지내면서 화정은 조운이 생각보다
감성적이며 따뜻한 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씩
거지들이 동냥하러 오면 그는 아낌없이 자신의 음식을
베풀어주었으며, 순찰을 돌면서도 가엾은 사람들을 따뜻한
눈길로 -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하튼 화정은 관찰력
하나는 끝내주는 모양이다 - 바라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이란, 참......겉만 보고 모르는 법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과묵하고 신중한 덕택에
나이에 비해 조금 연령이 있어 보였으며 차갑고 질문이나
부탁을 해도 무뚝뚝하게 답하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었기에, 초기에 화정은 조운에 대해 `상당히 싸가지가
없는 인물'로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삼국지 소설에서는 조운이란 인물의 이미지가 굉장히
좋았었는데, 실상으로 만나고 나니 오히려 더 싫어졌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그런 묵살된
부탁이 그 다음날 되면 말없이 이행되는 것과 - 예를 들어
공부를 위해 책이 읽고 싶다고 하면 잘라 거절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그 책은 화정의 서간 위에
놓여있는 것이다 - 그다지 건강한 편은 못되는 화정이 밤새
끙끙 앓았을 때 다녀가지는 않았으나 직접 사온 약재가
서투르게나마 다려져서 머리맡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던
사건들은 의외로 조운이 자상한 곳이 있다는 재정의를
내리는 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언제 수련을 마칠 생각이야?"
또 다른 생각에 빠져들려던 화정은 곧이어 날아온 조운의
목소리에 `이크, 또 다섯 번째 부적까지 날릴 뻔했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애써 머릿속의 생각을 지웠다.
*******
벌써 일곱 장 째의 부적을 꺼내면서 조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꽤나 귀한 부적이었다. 그만큼 값진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 귀한 것을 저 사람을 위해서 하루에
일곱, 여덟 장씩 5일간 썼으니 벌써 40장 가까이 날린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유비의 수하로서 쫓아온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아귀
강시와의 의사소통을 하는 법을 묻기에 그는 처음에는 수백만
분의 하나라는 확률로 태어난다는 그 `불담사(不談邪)*'인
것으로 단순히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녀를 좀더 살펴보면서 조운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불담사들은 지능이 보통
사람들보다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사물과의 의사소통같은
기본적이고 글을 몰라도 알 수 있는 것을 못하니, 당연한
소리다.
덕분에 짐을 나르거나 부역에 나가는 것 이외에 생계를 이을
길이 없다. 그러나 화정은 지능에 있어서는 매우 탁월한 곳이
있었다. 조운이 쌓아둔 몇 권의 서책을 지난 수일간 대부분
다 읽어대는 왕성한 독서욕과 뛰어난 글솜씨를 보여 적잖이
놀란 적도 있었다. 또한 유비군에서 유비가 참모로서
기대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담사간인같은 기본적인 것을 못하는
건가?'
그런 조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눈을 감고 자세를
똑바로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집중을 해 보겠다고 노력하고
있는 듯하였지만, 아귀강시는 또다시 의사가 닿지 않는 화정을
따분해하며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부적이 다섯 장 째
어김없이 낭비될 것 같았다. 그녀의 차가운 곳이 있는 지적인
얼굴은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말이었다.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알겠지만 그대로 또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조운은 질책을 보냈다.
"언제 수련을 마칠 생각이지?"
그 말에 화정의 한쪽 눈썹이 약간 꿈틀했다. 나름대로
집중을 하고 있는데 조운이 재촉을 하니 꽤 화가 난 모양이었다.
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또 여섯째 부적이 필요하게
될 것은 당연했다. 조금은 느긋하고, 조금은 답답한 심정으로
그는 그녀에게서 크게 떨어지지 않은 바위를 찾아 앉았다.
그다지 큰 바위는 아니어서 키가 큰 편인 그로서는 다리가 약간
불편했지만, 조운은 다리를 쭉 펴고 앉음으로서 그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꼼짝도 않고 앉아있는 화정의 위로 왠지
너무나 푸른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점 없었다. 정말로 좋은
날씨였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그랬다. 무인으로써 어릴 적부터 받은 혹독한 훈련 덕에
편안함이 오히려 더욱 불안하고, 좋은 날씨가 기분이 좋지 않은
그였다. 그리고 그것은.......
"조운님! 조운님, 계십니까!"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일에 대한 무사의 직감 비슷한 것일
듯하다. 조운은 조금 쓴웃음을 짓고는 화정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조운을 외쳐 부르는 소리에도 그녀는 꿈쩍도 않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저렇게 집중력이 있고 끈기도 있는데다
영특한 아이가 어째서 담사간인이 불가능한 걸까.
그러한 의문을 접고서 일어났다. 전령인 듯한 병사가 두리번대며
조운을 찾고 있었다. 종복이나 하인이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
그는 직접 조운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조운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령이 조운을 보면서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를 질끈 묶고 허리에 장검을 찬 그는 누가 보아도
공손찬이 `인정'한 장수 같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무슨 일로 오셨소."
조운의 낮고 침착한 음성에 병사는 허리를 굽혔다.
"아룁니다! 주공께서 장군께 북평 근처의 산적을 토벌하라
하명하셨습니다."
조운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산적이라고?"
"최근에 산적이 들끓고있는지라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합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으로써 치안의 임무도 맡았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는 순찰을 돌면서 전혀 산적이 있다는
낌새는 알아챈 적이 없었다. 그렇게 치밀하게 순찰을 돌았음에도
조운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면 산적치고는 꽤나 괜찮은 수단을
지니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으나.......
"확실한가?"
미처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한 조운이 되묻자 병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긍정했다. 조운은 고개를 돌려 잠시 화정을
바라보았다. 저택 내에만 있다면 안전할 것이다. 아무튼 유비가
보내준 사람이니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조운의
생각이었다. 조운은 병사에게 일렀다.
"곧 뵙겠다고 주공께 전해올리시게."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자신이 타고 온 말을 되짚어
타고 가버렸다. 조운은 병사가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산적. 산적 토벌이라.......오랜만이었다. 그는
그러나 오랜만에 겪는다는 감회보다도 일단은 공손찬의 명령을
이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앞세워야 함을 잊지 않았다.
*******
`또 부적을 낭비해서......화가 났나.......?'
화정은 조운이 흔적도 없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재촉하더니 화정이 또다시 아귀강시가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려는데 사라졌다. 화정은 투덜거리면서
다리를 펴고 일어나 앉았다. 좀 오래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얼얼했다.
그녀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휴지가 되어버린 부적 몇 장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놈의
아귀강시인지 헬로강시(어릴 적에 보았던 중국 영화제목이었다.
그때는 강시 영화를 꽤나 즐겁게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인지와는
도무지 이야기가 통하지를 않았다.
화정은 조운의 심정도 모르고 그가 재촉하기까지 딴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조운이 화가 나서 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좀 미안해졌다. 물론, 화정이 가끔은 조운을
돕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고 오히려 조운이
화정을 돕는 것은 분에 넘칠 정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하던 청소나 부엌일 같은 것도, 해본 적 없는 화정이
만날 실수만 하고, 마침 감기에 걸려서 며칠 앓자 조운은 그녀가
무리를 한 거라 생각했는지 하녀까지 불렀다.
`한마디로 난 귀찮은 더부살이라는 것이겠구나.......'
그리 생각하니 좀 처량한 기분도 들었다.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조운은 꽤나 친절한 곳이 있는 듯,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화정의 힘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도 무언가 조운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더부살이 신세이니 집도 조운의 집이요, 필요한 의복 몇 가지도
사 주었고 식비도, 그리고 낮에 와서 일하고 가는 하녀도 조운이
품삯을 주었다. 화정은 절로 무안해져서 몸을 일으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하녀가 일을 하러 왔던 모양이었다. 언제 왔는지 몰라도 벌써
물을 끓이고 청소까지 해놓은 것을 보니 부지런하고 일도 잘
하는 사람이었다. 둥글둥글한 얼굴형에 턱이 약간 들어가고 입이
조금 튀어나온, 쌍꺼풀 없고 길게 찢어진 갸름한 눈매와 누런
피부가 아주 전형적인 동양인의 모습이었다.
하녀에게 고개를 저어보인 후 그녀가 허리를 굽혀 비질을 하는
것을 양손으로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에 열중해있는
그녀는 화정이 그렇게 보고 앉아있는 것조차 잘 모르는 듯,
묵묵히 비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유순하고 부지런하면서도
억척스러운 느낌이 있는 하녀의 모습은 꿋꿋하고 강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왠지 모르게 고운 느낌이 들었다. 청소, 빨래,
요리가 그렇게 힘든 일인지, 그리고 그것을 매일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하고 우러러보인다는 것을, 이
세계에 와서 또다시 깨달았다. 역시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는
것이다. 하녀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유난히도 빛나보여서,
화정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곱다......."
그랬다. 외관상으로는 작달만한 키와 땅딸한 몸매, 특징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렇게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은
역시, 사람에게 좋은 분위기 같은 것을 가져다주는 모양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하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집안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그녀 자신에
비해, 비록 삯을 받기는 하지만 방을 깨끗하게 치울 줄 알며
식사 준비도 능숙한 하녀의 모습은........화정에게 부러움과
함께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새삼 후회되었다. 이전의 그녀는 아쉬울 것이 없었기에, 이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일해주던 아주머니들과 공부를
가르치러 오던 가정교사들의 모습을 당연하게만 생각해왔다.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소설 같은 곳에서 나오는.......음, 뭐더라......일하는
미덕이란 것은.......이런 모습인지도 몰라. 난 왜 이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그래,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정말
귀중한 것일지도 몰라.......'
모처럼 기분이 오랜만에 좋아지려는 화정의 상태를 깨뜨린
것은 거친 문 소리였다.
콰당탕.
"에그머니! 이게 무슨 소릴까요, 아가씨? 제가 가 볼께요."
아가씨......주인 되는 조운과 아무 연관이 없는
화정이었지만, 그녀는 화정이 조운의 친척쯤 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불렀다. 사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아직
`학생'이라던가 `소녀' 정도로 밖에 안 불릴 나이인데.
씁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흐뭇한 느낌도 있었다. 하기는,
이곳에서는 17, 8세이면 이미 결혼을 했을 나이다.
15세에 결혼해서 화정같은 나이에 아이도 있는 여자도 있다니까
할 말은 다한 셈이다. 여성의 직장생활과 인권운동이 갈수록
극성스러워지고 서른이 다되서 결혼한 여자들도 많은 화정의
세계에서는 `한창 나이에 벌써.......'이겠지만 여하튼
이곳에서는 조기혼이 지극히 정상이다.
조운이 가져다 준 책 몇 권을 읽고, 이전에 사회시간에
귓전으로 흘려들은 지식 몇 개, 그리고 삼국지 책을 읽었을 때
얻은 교양, 이런 것들로 인해 화정은 이 세계에 그런대로
적응해 가고 있었다.
`응.......?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간 하녀가 소식이 없자 조금
불안해졌다. 화정을 찾아올 사람은 당연히 없으며 하녀 역시
찾아올 사람이 거의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운을
찾을 사람이란 소리인데 조운이 현재 보이지 않으니 하녀는
`안 계십니다.'하는 대사만 읊고 이 곳으로 도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조금 더 기다리려다가 궁금증을 못 이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발을 바깥으로 디디는 순간, 화정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읍.......!"
"호, 이것봐라? 역시 관리 놈의 집이라 뭔가 있기는 하네.
저런 절색이 다 있다니. 이 못된 것이 저 혼자있다더니,
감히 거짓말을 해?"
하녀의 입은 거칠고 두툼하며 단단한 철갑같은 손바닥으로
막혀 있었으며, 그녀는 화정을 바라보면서 읍읍하는 소리만
연달아 내고 있었다. 그녀의 크게 흡떠진 눈은 화정에게
다급함을 알리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이 얇은 상의와 벗은
웃통, 짧은 소매를 통해 드러나 있는 남자들은 위압적으로
보였으니까. 뜻밖의 상황에 어안이벙벙할 뿐이었다. 조금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허, 그 계집, 예쁘게도 생긴게 앙칼진 표정도 잘 짓네.
화난 표정 지으면 어쩔 거야? 앙?!"
......멍한 표정이라는 것은 화정의 생각이었는가 보다.
"그렇게 화난 얼굴 하지말라구. 그런 얼굴 하니까 더
예뻐보이는데? 응?"
하녀의 입을 틀어막고있는 남자가 뒤의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자, 집안 뒤져! 그리고 거기, 너희 둘은 저 계집애 붙들어."
"읍읍읍읍! 우어읍!"
하녀가 몸부림을 치면서 용을 썼으나 그녀의 소리는 사내의
두툼한 손바닥에 부딪혀 이상한 소리로 울려퍼졌을 뿐이었다.
사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조용히 해! 관리 놈들이라도 오면 귀찮아진다고! 역시,
저기 저 절색 계집애는 배운 계집이라 뭐가 달라도 다르군.
조용하잖아?"
사실 화정은 알아서 조용히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너무나 놀랍고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내의 자상하고
친절한 설명(?)덕에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운! 조운을 불러야해!'
그렇다. 지금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다른 사람들은 이
사내들의 험악한 인상을 보자마자 도망갈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궁으로 가서 고해 줄 사람도 없고, 고하면 그
시간동안 벌써 약탈 다 당하고 험한 꼴 다 당했을 것이
뻔하다. 화정은 뒷걸음질치면서 목청을 돋우었다.
"......자룡! 조......자룡!"
하지만 목에 뭔가 걸리기라도 한 듯, 조그만 목소리만
나왔을 뿐이었다. 화정은 그들이 떠드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을 듣고, 말로 듣던 `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그래! 치안은 자룡이......맡았다고 했어!'
치안이라면 말 그대로 저런 무뢰한과 도적들을 퇴치하는
일일 것이다. 이전에 밥상을 날라다주었을 때, 조운이
무심코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그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순간,
단단한 손이 자신의 팔을 붙들었다.
"......아!"
왜 소리가 나오지 않는걸까.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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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불담사(不談邪): 불능담사간인不能談邪間人의 준말이다.
하급 사물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을 가리킨다.
작가의 창조어
"저런, 그렇게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면 어쩔거지?"
`......내가 언제 노려봤어!'
불만이 가득해진 화정은 그제서야 정말로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도적이 키득거렸다.
"어이, 정말 무서운데? 역시, 절색들은 이런 표정을
지어도 참 예쁘단 말이지......그나저나 이 놈이 어떻게
이런 여자를 데리고 있는거지? 이전에 봤던 황제의
첩들보다도 훨씬 미인이잖아? 곧기로 소문난 놈도
이렇다니.......쯧쯧......."
도적 주제에 제법 혀를 차면서 세상 한탄도 할 줄 아는
똑똑한 놈이었다. 화정은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아.......!"
"저런, 좀 아팠나?"
딴 생각을 하느라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손이 묶여버렸다.
도적이 그녀의 손을 묶고는 그 버터를 백만상자는 바른 듯한
느끼한 얼굴로 히죽거리는데, 화정은 반 분노, 반 느끼한
심정으로 - 장담하지만 정말 느끼하고 어딘가 이상하게 생긴
남자였다 - 그를 쏘아보았다.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두목, 이제 어떻게 할까요?"
"잠시 기다려, 다 뒤질 때까지 조금 있도록 하자."
제법 두목인 척하며 의젓하게 말하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때 하녀를 붙들고 있던 도적이 외쳤다.
"이 여자는 어떻게 할깝쇼?"
두목인 듯 보이는 도적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그
얼빵한 도적의 머리를 거대한 주먹으로 `빡' 하는 소리가
나게 갈겼다.
"이놈아! 그렇게 파악이 안되냐! 이런 여자가 무슨
소용이야?! 저기 저 이쁜 계집애가 분명 그 관리놈하고 관련이
있겠지! 어이, 소저! 너 그.......잠깐만, 야, 그 관리 이름이
뭐였냐?"
역시, 아무리 똑똑한 척을 해 보았자 한계인 모양이다. 곁에서
부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그것이.......조.......뭐더라? 조은이던가?"
"임마! 무슨 은이야! 평소에 물건 욕심이 그리 많으니까 다
그렇게 들리지! 두목, 분명합니다! 조조였습니다! 네, 조조
자루였어요!"
"조조면 조조지 자루는 또 뭐냐?"
"그게 그......뭐더라? 자(字)라고 하는 건데......그게
별명이라나?"
"별명이 뭔데유?"
"어릴 때 부르는 이름이래."
"아니다! 분명 그 관리 이름이 조조 자랑이랬다!"
"조조라니까! 아, 조조도 몰라?!"
"조조가 누군데?"
"우리가 찾고있는 이 관리놈이지, 뭐."
"많이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지금 찾는 놈이니까 당연히 많이 들었지!"
화정은 속으로 웃기보다도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아무리
배운 것이 없기로서 저렇게 무지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조와 조운. 그렇군, 비슷한 성씨로 들리기는
했다. 조(曹)와 조(趙)는 다르고, 조운은 아직 명성 없는
일개 청년에 불과하다는 사실 밖에 다른 점은 없다.
여하튼 말도 안되고 웃기지도 않는데다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다분히 증명하는 그 한심스런 말씨름이 끝나기도 전에 두목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끄럽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은 관두고 하녀는 그냥
알아서들 해! 그리고 인질 여자 데리고 와!"
그 말에 도적들의 눈이 반짝였다.
"네, 두목? 그럼 이 여자는 우리가 가져도 되나요?"
`아!'
화정은 순간적으로 아차싶었다. 붙들린 여자가 사내들에게
당할 일이란 무엇이겠는가. 아니나다를까, 아직 손으로 입이
막혀있고 목에 칼이 대어져있는 하녀의 얼굴색은 파래지고
있었다. 누른 피부색이 푸르게 보일 정도였다. 두목이 말없이
돌아서자 산적들의 눈빛은 반짝거렸고, 그들은 음침한
눈빛으로 하녀에게 다가갔다.
"아.......안돼! 안돼에! 아아아악!"
하녀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다가 처참한 심정을 담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도적들은 천천히 하녀에게 다가가
소매를 붙들었다. 화정은 그만 양손이 묶인 채 비틀거리면서
벌떡 일어서버렸다. 그녀는 두목인 듯한 자를 쏘아보았다.
"그 사람......놔줘!"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도적들은 물론 그 두목이란
자까지도 입을 말미잘마냥 벌린 채 화정의 강경하고 쌀쌀맞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하........"
"?"
"크핫......"
`아니, 갑자기 왜 저렇게 이상한 표정을........?'
"크하하핫! 우하하하핫!"
두목은 조금 어리둥절해진 화정을 앞에두고 고개를 하늘을
향해 쳐들고 요란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충성스런 부하들은 다 따라서 웃어댔다.
"와하하핫!"
"우힛힛힛!"
"훗핫핫핫!"
다들 웃는 분위기가 되어버리자 화정은 무안해졌다.
`뭐야, 이건?,
그런데 한창 웃던 두목이 갑자기 웃음을 그치더니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우습다. 그렇지 않으냐?"
"네, 두목! 그렇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여자애도 다 있었다니, 역시 세상은
넓구나. 그렇지 않으냐?"
"네, 두목! 그렇습니다!"
"역시, 인질로 잡으려면 저 정도 특징은 있어야 그 조조
자랑인지 뭔지하는 관리가 기를 쓰고 쫓아오겠지?"
"네, 두목!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조 자랑이 아니라
조은 자루입니다!"
"시끄러, 짜샤! 죽을래?!"
"예, 죄송합니다!"
"아무튼 웃기지?"
"네, 그렇습니다!"
`바보들의 문답같다, 꼭........'
갑자기 두목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더니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부하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로 표정을 바꾸었다.
두목이 목소리를 낮고 굵직하게 깔았다.
"그런데.......뭐가 그리 우스웠냐, 너네는?"
"......두목이 웃으시니까 따라 웃었죠, 뭐."
군중들 중에서 한 똑똑한 도적이 답했다. 두목이라는 자의
눈꼬리가 한번에 휙하고 치켜올라갔다.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날 따라 웃었다고?!"
".......네, 두목! 그렇습니다!"
정말로 어디 나오던 삼류 코메디같은 장면이었다. 화정은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는
상황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소리같았다.
`참나.......이 시대의 문맹인들은 이 정도 수준이었던 걸까?'
두목은 팔을 휙 걷어붙이더니 그 무지막지한 권투선수같은
주먹으로 딱딱 소리가 나도록 부하들의 뒷통수와 이마를
무자비하게 갈겨대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 너희들은 소신도 없냐! 지조도 없냐! 지조도
없이 내가 웃었다고 따라 웃어?! 이 자식들! 너희가 그러고도
장부냐?!"
엄살피는 것같이 들리지 않는 `아야' `윽' 하는 등의 소리가
난무했다. 딱, 퍽하는 소리가 여간 크고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한 부하가 외쳤다.
"안 그러면 두목이 화내니까 그렇죠!"
얼마나 소신있는(?) 부하인가. 그러나 두목은 방금 전
자신이 내린 설교를 잊은 채 그 소신있는 도적을 노려보았다.
"무어가 어째.......? 너 이놈.......!"
다음 순간, 화정은 물론 다른 도적들까지도, 뒤이어 들려오는
무자비한 폭력의 소리에 귀를 막아야만 했다. 그 소리를
묘사하자면 대략 이렇다.
"이 자식! 어디 감히 수령님이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아?!"
퍽!
"좀 봐줬더니 못 하는 소리가 없군!"
팍!
"맞아야 정신차리나? 응?!"
푹!
"절대 복종이란 것도 못 배웠나? 무식한 놈같으니!"
딱!
"으악, 두목, 잘못했습니다! 네네, 두목 말씀이면 무조건
믿어야죠! 아야!"
잠시 두목의 주먹이 멈췄다. 퍽, 딱하는 소리가 멎는 것을
보고 일행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뭐?! 무조건 믿어?! 아까 말하지 않았나! 소신! 지조를
가지라고! 너같은 놈 때문에 간신이 들끓는 거다! 간신이
들끓으면 우리가 도적질을 하기 힘들다고 했잖아! 이 줏대
없는 놈!"
"으아아악!"
`......저 두목......간신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하는 소릴까?'
이제는 그가 사용하는 단어의 뜻까지 궁금해졌다.
간신(姦臣)과 충신(忠臣)의 뜻을 뒤집어서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화정이 내린 판단에 의하면, 그들의 두목은 머리도
딱딱한 돌이었지만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사이코임에 틀림없었다.
한심하기 짝이없는 코미디를 보고 있던 화정은 얼떨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얼굴에 경악을 담았다.
"아아, 아가씨! 도와주세요!"
이미 도적은 하녀의 옷을 벗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목이 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녀의 삶에 맺혀져 왔던 어떤,
뭔가 뜨거운 것이 목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막막하고 어찌할 지를 모르고, 어지러운
이런 상황.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늘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조금씩 아팠다. 귀가 멍멍해져왔다.
<화정아, 보지 마라! 어서 가!>
왜 이렇게 뜨겁지? 가슴이 뜨거운 느낌.......화정은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숨을 들이내쉬었다.
극심한 두통에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가! 어서 가지 못해?!>
"어, 엄마......!"
나지막한 신음 소리와 함께 새어나온 소리였다. 도적들은
화정이 숨을 몰아쉬면서 얼굴이 붉어진 채 중얼거리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의아한 모양이었다. 상황이야 어쨌든 도적은
하녀를 겁탈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화정은 목부분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팠다. 어딘지
모르겠다. 가슴이 아픈건지, 머리가 아픈건지. 화정은 있는
힘을 다 끌어냈다.
"아........"
아직도 목소리가 터져나오지 않으려고 했다. 생각해내고
싶지 않았다. 화정은 배에서부터 또다시 힘을 끌어내어 드디어
소리를 지르는 데에 성공했다.
"아아아아!! 아악!"
조운을 부르려고 했지만 이런 비명소리밖에 터져나오지
않았다. 두통이 극심해지면서 의식이 몽롱해졌다. 그제야
하녀에게 달려들던 도적놈도 상황을 파악한 듯 화정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하녀는 그 틈을 타 얼른 곁에 널려있는 옷으로
대충 몸을 가렸다. 순간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면서 누군가
달려들어왔다.
"아, 조운님!"
그를 알아본 하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를 반갑게 질렀다.
그녀의 외침에 도적들이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파팍!
눈부신 빛이 상공을 뒤덮었다. 일행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
"이, 이게 뭐야.......!"
"고, 공중에 떴다! 떠, 떴다!"
`내, 내가......?'
화정은 자신의 손을 들어보았다. 반투명한 자신의 몸은
상공으로 몇 미터가량 떠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어깨에는
이전에 만화책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투명하고 하늘하늘한
천이 가늘게 걸려서 흩날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석관이 씌어져있었다. 머리가 아직도
어질어질했다. 당황한 화정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적일당과 하녀는 턱이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운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담담하지만 놀란 빛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로 놀란 것도, 이상하다는 것도 없는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늘상 조운을 보아온 화정은, 그로서는
드물게 동요가 있는 표정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당황한
화정은 그들에게 자신도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양손을 가슴 앞으로 펼쳤다. 순간......
팍!
"앗!"
눈부신 붉은색의 빛이 퍼져나오는 바람에 사람들은 눈을
감아버렸다. 화정은 자신의 두 손바닥 사이에 그녀가
걸고있는 목걸이가 떠 있음을 알았다. 목에 걸린 그대로,
보석 부분이 양손 사이에 떠있었다. 목에 걸린 금줄이 끊어
질 것같이 보였다.
"신녀다! 신녀가 나타났다앗!"
"어서 엎드려! 엎드리란 말이야!"
"신녀님, 저희 죄를 사하여 주소서!"
"저 두목이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다 두목 잘못이에요!"
소란스러워지면서 도적들은 서둘러 엎드리기 바빴다.
조운은 조금은 놀란, 그리고 어찌 보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화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그녀가 복받쳐오르는
분노를 느꼈을 때였다.
[구하라!]
[구하라!]
[돕는다! 주인을 돕는다!]
주변에서 컬컬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가 여럿 울려왔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목에 가래라도 끓는 상태로 내뱉는
말같이 기분나쁜 음성이었다. 처음에는 분간이 갔지만 점점
그 소리들은 빨라지면서, 또 그 소리의 수가 늘어나면서
혼란스러워졌다.
[구한다!]
[복종하라!]
[주인을.......]
[.......을 구하라!]
[......라!]
주변에서 무언가 몰려왔다. 검은 색의 안개가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이내 그 안개들은 대강 사람의 형태를 취하면서
뭉치고 있었다. 조운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귀 강시들이......?"
화정은 그 아귀강시들이 몰려오는 영문을 모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적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귀강시다!"
"무경미석을 지니고 계신 신녀께서 노하셨다!"
"신녀께서 노하셨다!"
"도망가야한다!"
도적들은 어느새 그렇게 열심히 떠받들던 자신들의
두목도 놔둔 채 도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화정은 놀란
심정으로 입을 열어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순간.......
[썩 물러가라. 더러운 도적놈들, 내 자비를 베풀어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어이가 없어졌다. 분명 화정의 목소리요, 화정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화정은 이런 거창한
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그 말을 하자마자
아귀강시들은 소란을 피우며 형체가 흐려지기 시작하였다.
[물러간다!]
[물러가라고 하셨다!]
[주인께서 물.......]
[......의 명.......다!]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혼잡하게, 여러 명의 아귀강시들이
떠들면서 주변을 시꺼멓게 뒤덮었던 아귀강시들이 연기로
흩어져 사라져갔다.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흐려져 원상태로
돌아가고 도적들이 남김없이 사라지자, 화정은 머리가 다시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발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왔다.
".......음?"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반투명했던 몸은 다시
불투명하게 돌아갔고 어깨부분에서 날리던 투명하고 얇은
천들도 사라졌다. 목걸이는 다시 얌전히 그녀의 옷 속에
들어간 듯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가 다시 가벼워 진 것을
보니 관 역시 사라진 모양이었다.
화정은 반 당황과 반 분노를 섞은 감정으로, 벌벌 떨고있는
하녀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조운을
바라보았다. 이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웅성대고
있었다. 화정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옴을 느꼈다. 식은땀이
흘렀다.
`어쩌면 좋지?'
사람들은 그녀가 마치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힌 그것이
되기라도 하듯 에워싸고 웅성댔다. 화정은 갑작스럽게
중세시대의 마녀재판이 생각났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분명 지금 자신의 표정은 `겁나요. 저 아무 짓도
안했다니까요!'하고 애원하는 어린아이 표정일 것이었다.
그런데......
"저 기품있고 도도하신 표정 좀 보아요!"
"신력을 사용하고 나서 조금 화가 나셨나봐요!"
"세상에, 땅에 강림하신 신녀라니!"
"오죽 화가 나셨으면 허구많은 사물들 중에 흉측한
아귀강시들을 부르셨을까요.......저렇게 고결하신
신녀께서......."
"신력을 발휘하지 않으셔도 역시 미인이시군요."
"조운님 댁 맞죠? 어쩜.......조운님, 좀 범상찮은
분이시다 싶었더니......."
"뭐해요, 다음에 한 음식 있으면 꼭 신녀께 바치세요."
`.......뭐야, 이건.......'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늘 그렇긴 했다. 화정은 미안한
표정이다, 당황한 표정이다, 슬픈 표정이다, 해서 지으면
사람들은 늘 `아이고, 저 무표정 좀 봐라.' `화가 났나보다.'
등의 소리를 해대기는 했다. 그것은 그녀가 태어났으며
자라고 또한 있던 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기는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신녀라니, 지금 사람을 놀리는 건가? 사람이란 상황에 따라
이렇게 비겁하게 변하는 모양이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길을 몰라서 길을 묻던 화정을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와, 그런 남편을 노려보다가 화정에게
쌀쌀맞게 `모르겠소.'하고 대꾸하여 내쫓다시피하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 아니던가.
순간적으로 그녀 세계에 있던 그 많은 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내세우던 구호가 무어더라......그렇군,
예수불신 지옥이었지......내가 그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예수가 기적을 행하자마자
사람들이 달리 보았다고 성경에도 있었으니, 나도 꼭 그
꼴 아닌가?
너무 건방진 발언이라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마, 현실 세계에
가서 이 상황을 이야기하고 그녀의 생각을 말한다면 아마
전세계의 수많은 종교가들은 분노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기나긴 논문을 써서 책을 몇 백만 권쯤 써댈 것이다.
혹자는 `진짜 예수의 환생이다." 혹자는 "사탄이다!"등등.
하기는, 그 시대에는 반대파라도 있다지만 이렇게 곧이곧대로
자신을 신녀라는 거창한 존재로 믿는 이 순진한 사람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만 울분이 치솟았다. 그녀가 화가 났다고
해도 사실 별다른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저런! 많이 분노하셨어요!"
"하기는, 신력까지 사용하셨는데 우리가 이렇게 감히
에워싸고 있으니.......!"
"어서어서 갑시다!"
사람들의 신비에 대한 동경은 이럴 때는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내 뒤를 힐끔거리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들은 금방 사라졌다. 이제 허름하고 작은 집에는
하녀와 조운, 화정 뿐이었다. 화정은 그들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때였다.
"시, 신녀님! 신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좀더 정중히
모시지 못했던 것을 용서하시옵소서! 미천한 것이 무얼 몰라
실수했사옵니다! 아아, 용서하세요!"
이쯤되자 정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화가 났다.
하녀에게 무어라고 하려했으나 조운이 그 역할을 맡아주었다.
".......일어나시오. 이 가사로 몸을 감싸고 가시면
괜찮으실 겁니다. 내일은 안 오셔도 좋습니다."
변함없이 차분한 조운이었다. 하녀는 그런 조운에게
굽실거리고는 화정을 향해 연달아 고개를 숙여대면서
빠져나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후회, 긴장이 잔뜩
담겨져 있었다. 화정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려운 존재. 그렇다. 그곳 에서도 그녀는 `대기업 차기
총수'로서, 이곳에서는 평범했지만 이내 말도 안되는
현상으로 `신녀' 로서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차이가 없었다.
화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달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뜰에는 조운과 화정, 단 둘이
남았다. 손이 부들부들, 분노와 울분을 담고 떨리고 있었다.
몇 년만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꿈일거야, 이건 꿈이야. 어떻게 내가 상공에 떠 있을 수가 있어?
화정은 흐르는 눈물마저 닦지 않고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도 조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정은
긴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살짝 찍었다. 곁에서 나지막하고 듣기
좋은, 하지만 그 내용만은 절대로 듣기 좋지않은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조운의 탄식이었다. 나직하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한구석에 허함과 어떤 당황 같은
것이 숨겨져 있었다. 침착하던 조운조차 그녀를 평범하게
보아주지 않는다. 화정은 고개를 홱 돌렸다.
눈물이 순간적인 분노를 담고 한꺼번에 왈칵 쏟아져 나왔다.
조운은 그런 화정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임에 분명했다. 화정은 목이 메인
소리로 물었다.
"왜요? 자룡도 내가 신녀라고 생각해요?"
그 질문에 조운은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하기는 이상한
일이었다. 신녀가, 자신을 신녀라 생각하느냐고 묻는 것만큼
바보같이 생각되는 질문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운은 말없이
돌아섰다. 그렇다. 그는 화정이 신녀라 결론을 내리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화정은 화가 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되는 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바보! 멍청이! 머저리!"
분명 고상한 말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막 신녀가 된
예쁘고 고상하게 생긴 아가씨가 내뱉을 거라 생각되는 내용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튼, 그 엄청난 말에 조운은 기가 막힌
표정을 그 냉랭한 얼굴에 담고서 몸을 홱 돌렸다. 화정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또다시 악을 써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바보! 환상과 현실도 구분 못하는
멍청이! 사람 말을 사람 말로 안 믿는 머저리!"
그 말에 조운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이것봐요! 신녀가 이렇게 웃기는 욕하는 것 봤어요?!
신녀가 뭐 이래요?! 난, 인간이에요!"
화정이 생각해도 웃기는 말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 리는 없었다. 적어도
화정에게는 그러했다. 그녀는 눈에서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화가 났다. 그리고 슬펐다.
어쩌다 이렇게 낯선 세계에 와서 이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을 겪게 된 것이었는지. 분명 자고 일어나면 자신은 자신의
침대에 앉아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조운은
그런 화정을 말없이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왜 나를 믿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나를 보아주지 않는 걸까.
사실은 상처 잘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리광도 부려보고 싶은
나를, 그런 진짜 나를.......화정은 조운을 노려보았다.
아니야, 이런 것이 아니야.......적어도 무슨 말이라도 해
주어야해! 나를 그저 나로서, 그저 유화정으로서 봐주는 사람은
없었던 걸까? 정말 없었을까? 만약......만약에 마초라면......
생각났다. 힘들 때면 늘 생각나는 사람. 마초는 이렇게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가와서 무어라도 말해주었을 것이었다.
<힘내!>
지친 표정을 내색하지 않았어도 지친, 화정이 앉아있었을 때
그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때, 군중에서도 아귀강시들의
뜻하지 않은 출현이 생겼을 때에도, 그리고 동생 운록에게
사정을 들었음에 틀림이 없는 그 때, 그 상황에서도 마초는
웃어주었다. 그리고, 단 한마디와 단 한번의 웃음이었을
뿐이지만 마초의 그 격려는 적어도 화정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눈이 부셨다.
아플 때에 식모가 두고가던 약 몇 첩과 약병 몇 개보다도
더 힘이 되고 고마웠다. 난,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팔자는
아닌걸까? 아니면, 내가 사랑받기에 너무나 부족해서? 그래서
마초만? 마초만 그렇게 보아줄 뿐일까?
그럼, 혹시 유비나 관우, 장비도 내가 `필요' 해서 그런
것일까? 그리고, 조운도 더부살이인 자신에게 비싼 부적을
`투자'한 이유가, 기껏 그 알량한 `필요성' 때문이었던 걸까?
아버지가 나를 `후계' 이상으로는 보지 않았던 그 것처럼?
......그런 것은 싫어! 저렇게 보고 있는 것이 내게 그 사실을
더더욱 부각시켜준단 말이야! 보기 싫었다. 무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화정은 외쳤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사람 처음봐요?!"
억울했다. 정말, 아까 했던 묘사를 다시 빌어서, 정말,
정말로 말 그대로 동물원 우리 속 구경거리라도 된 것만
같았다. 화가 나고 분노하고, 즐거운 일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 감정들은 겪어 보기라도 했었던 것이고,
이토록 모욕을 느끼고 열등감에 환멸까지 섞어서 느끼는
것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보기보다 여리고 감정에 익숙하지 못한 화정은 사실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옳았다. 지금 그녀는.......그랬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토록 박아온 `효진 그룹 차기 최고 경영자'
로서의 긍지 또는 오기로 억지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오기를 가장한 가면 뒤에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인간 유화정이 겨우 서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조운이 위로라도
해 주기를 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훗."
나지막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서 새어나왔을 때, 화정은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하하하하!"
호탕한 조운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통과하여 화정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청각마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웃어? 웃고 있어? 화정은 귀밑까지 벌개지는 것을
느꼈다.
"뭐가 그리 우습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화정 앞에서, 조운은 그 준수한
얼굴에 시원한 빛까지 띄우면서 정말 호탕하고 멋지게도
웃고 있었다. 그러나 화정은 약이 올랐을 뿐이었다. 그녀가
외쳤다.
"이유를 말해줘야 할 것 아녀욧!"
이렇게 당황하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모욕과 당황.
하루사이에 정말 별 감정 다 느껴보네, 하고 생각하는데
조운이 웃음을 그치고는 아직도 얼굴에 웃음기가 남은
채 - 웃음기라지만 조금 날카롭고 차갑게 생긴 그의 얼굴은
마치 비웃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 네 말대로 신녀가 바보, 머저리 따위의 말을
하는 것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나도 신녀를 상당히 고상한
존재로 설정하고 있었으니 말이지."
".......뭐.......!"
어이가 없어진 화정은 붉어진 얼굴인 채로 조운을 응시했다.
조운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 서 있을건가. 난 아까도 그저 방안에 들어가려고
했을 뿐인데 신녀라 생각하느냐는 질문과 함께 욕이 들려오더군."
"아.......!"
화정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또 느꼈다. 무안해졌다.
순식간에 바보가 된 느낌으로 서 있는 화정을 두고 조운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정은 아직도 채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정말.......! 사람 바보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
조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군주인 공손찬의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본래 가장 상위의
인물이 얼굴을 굳히면 주변의 사람들은 눈치밖에 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한 불변의 진리다.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딱딱거리면서 두드리는 공손찬을
슬금슬금 살펴보는 주변사람들은 덩달아, 공손찬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운을 조심스럽게 곁눈질했다. 조운은
조용하고 침착한 얼굴로 입을 꽉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동안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조운을 쏘아보던, 공손찬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정말 모르겠다는 말인가? 분명, 자네의 저택에서 신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건조한 그의 음성에는 강한 의심과 재촉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공손찬의 심정이 얼마나 불편한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덩달아, 문책을 받는 조운도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다.
도리어 공손찬보다도, 더 아랫사람으로서 훨씬 불안할 법도
한데 조운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차분하게 답했다.
".......신녀가 나타났다는 말씀이십니까. 분명, 옳습니다.
헌데, 진정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이십니까?"
"허어! 그 신녀가 자네의 집에 거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네!
내가 그 정도 눈치를 주었다면 알아서 털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공손찬이 답답한 얼굴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마른침을 목으로
삼켰다. 공손찬이,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한번 화가 나면
말리기 힘든 성격이란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약간의 수군거림조차 없이 중앙에 있는 공손찬과 조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속으로, `내게는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하고 소박하면서 옹졸하기 그지없는
소망만 빌고 있었을 것이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그 말씀은, 이미 제가 거처에
신녀를 숨기고 있었다고 미리 판정을 내리셨다는 뜻이십니까?
당치 않으십니다, 주공. 이전에 말씀드렸듯, 제게는 사촌
누이가 있을 뿐 신녀는 없습니다. 신녀께서 어찌 그런 누추한
곳에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또한, 신녀께서 계셨다면 이 운(雲), 마땅히 주공되시는
분께서 뵈시도록 주선하였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그렇게도
저에 대한 신뢰가 얕으시다는 겁니까."
조운의 강경한 답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공손찬 또한
오랫동안 수뇌로서 생활하면서 수하들의 심리에 대해서 그리
모르던 인물은 아닌지라, 조운의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주군된 자로서 수하를 굳게 신뢰함이
부족한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만약, 여기서 공손찬이 좁은 속을 보인다면 조운은
물론이거니와 언젠가는 다른 수하들도 연쇄적으로 자신을
등질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주변 수하들의 표정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공손찬은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굵직하게 했다.
"흐음, 그렇군......당연히 자룡을 믿고 있네. 허나, 지배하는
입장이란 본래, 끊임없이 주변의 소문과 세태를 파악해야 하는
법이지. 단지 자네의 확답을 듣고 싶었을 뿐이니, 내 심정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네. 자, 그럼 돌아가서 쉬도록 하시게."
조운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공손찬은 그런 조운의 뒷모습을 열심히 살피다가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 공들도 확인하지 않았는가? 어찌 자룡이 감히 딴
마음을 품겠는가! 그러니 다들 이만 물러들 가시오."
조금은 불쾌했던 모양으로, 너비가 넓은 소맷단을 거칠게
흔들면서 공손찬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말단에 지나지
않는 수하가, 그것도 나이도 어린 사람이 자신에게 교묘한
반박을 한 일이 썩 즐겁지는 않았던 듯하다.
쑥덕거리던 수하들 사이에서, 광대뼈가 높고 뾰족한 턱에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언뜻 보기에도 꾀를 잘 쓸 듯이 보이는
자가 고개를 돌리는데, 곁에 서있던 사람이 속삭였다.
"이거......생각보다 위험한 인물인지도 모르겠소. 아직
나이가 스물도 안찬 놈이 저렇게 주군 앞에서 교묘하게
행동하다니 말이오."
그러나 뾰족한 턱의 사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이
없자 먼저 말을 꺼낸 자는 무안해진 듯, 말을 뒤이었다.
"게다가 문추를 물러나게 했다고 하니, 무예가 출중한 것만은
틀림없소......주공께서는 그를 쉽게 버리지 않으실거요.
그렇게 생각지 않소, 사융(邪融)? 좌천시키려던 계획은 글렀소!"
사융이라 불린, 뾰족한 턱의 사나이는 자신에게 그리 묻는
자를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는 명백한
조소(嘲笑)가 담겨있었다. 사융의 멸시를 받은 자는 순간적으로
발끈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사융에게 반문했다.
"왜 그러시오?"
"쯧쯧쯧......내가 왜 이런 시선을 보내는지, 공(公)은 정녕
모르시오? 아무리 무예가 높더라도 저자는 이미 주공의 눈밖에
났소이다......세상 어느 나이든 자가 자신보다 연배가 새까맣게
아래인 놈이 조롱하는 것을 즐거워하겠소이까?"
또박또박하면서도 짧게 요점을 말하는 그의 솜씨에, 먼저
말을 꺼낸 자는 언짢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각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면서,
사융은 발걸음을 굳힌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공께서 긴히 쓰시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만은
사실이외다......."
"뭐라 하시었소?"
"아니오!"
사융은 언짢게 말을 자르고 비쩍 마른 체구에 어울리는,
가벼운 종종걸음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그의 발걸음소리는
짜증을 섞고 있어서 그런지 작지않은 소리를 냈다. 사융의
나가는 모양을 살피던 주변의 인물들은 또다시 모여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어댔다.
"사융님께서 하시는 말씀, 들어봤소? 앞으로 저 조운이란
자, 어찌될 것 같소?"
"잘 모르겠지만 대단한 놈임에는 틀림없소이다. 질책하시는
주공에게, 그런 식으로 반격이 섞인 말을 하다니......."
"그렇다해도, 주공께서 어떻게 하실 입장은 아닌 게지요.
그 일로 또다시 조운을 문책한다면 주공께서는 수하에 대해
속이 좁다는 것을 나타내시는 꼴이 되니 말이오."
"게다가 이쪽에는 저자만큼 무예가 출중한 자는 없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으니......."
"그나저나 그건 사실이오? 정말 신녀가 나타났던 거요?"
"아, 사실이라니까! 우리 안사람이, 하녀들이 다섯이나 입을
모아 신녀를 보고 왔다고 떠드는 모양을 봤다던데."
*******
막막한 심정이었다. 신녀가 나타났다는 소문, 아니 소문이
아닌 엄연한 사실은 조운이 짐작했던 대로 엄청난 파문을
지니고 퍼져나갔다. 결코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소란스러움이 이렇게까지 싫어진 적도 없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눌러참았다.
분명, 자신의 무예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전혀 친밀하게
느끼지 않고서 그저 치안대장으로 처박아둔 채 급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도 않는 공손찬의 태도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러는 것을 어쩌리,
하는 식으로 애써 넘겨왔다.
하지만 신녀(神女)라는 단어 하나에 저렇게까지 급작스럽게
불러들이는 태도는 역시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전에는, 치안
쪽의 병사가 적다고 그렇게 애타게 알현을 청해도 시큰둥하던
그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불러들여서, 자신에게 다그쳐
묻는 것을 보았을 때 이미 조운의 마음은 조금씩 떠나가고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 사실 오늘의 그 무모한 반문도, 자신 스스로를
보호하려던 목적이기보다 일부러, 공손찬이 자신을 내쫓게
만들기 위해 시도했던 것에 가깝다. 마음이 맞지 않는 주군.
벌써 두 번째다. 조운은 자신의 말에 안장을 얹고는 말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하긴, 그렇군......신녀란 것이 예사스러운 단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
이런 생각을 해서라도 이미 주공이 된 인물에 대한 실망을
완화시켜보고 싶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하, 참.......!'
조운은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실망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쓰게 웃었다. 역시 감정이란 것은, 이렇게 저렇게 해도 쉽게
안 다루어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어서 떠나자는 생각을 하고, 말 위에 올라타려고 했다.
"이보게!"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귀에 익은 그 음성이었다. 비쩍 마른
체구에 앙상한 얼굴 윤곽, 툭 불거진 광대뼈......조운은
포권해보였다.
"사융 어르신이셨군요."
"어디로 가려던 셈인가?"
"......돌아가야지요. 일단 돌아가서......."
"돌아가서?"
반문하는 사융의 앞에 선 조운은, 다소 씁쓸한 심정을
감추고 조용하게 답했다.
"주공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융이 화들짝 놀란다.
"아니 이 사람아! 오늘 자네가 한 말 덕에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네! 그런데 왜......."
물론 다른 공손찬의 수하들 앞에서 내뱉은 아까의 말과
전혀 틀린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한 조운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착한 태도를 보였을 뿐 사융을
특별히 경계하려는 빛은 없었다. 약간의 차가운 거리감이
동반되어있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어떤 핑계를 대시어
좌천시키실 겁니다."
"당치않아! 내 주공께 잘 말씀드려보겠네!"
잘라말하는 사융을 향해 조운이 무표정한 얼굴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어르신께서 막아주셔도 언젠가
터질 일입니다. 그럼 전 이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사융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인 조운은 천천히 자신의 말고삐를 당겼다.
주변의 사람들이 조운을 보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일하러 나온 하인들까지도 그를 곁눈질하면서
뜯어보고 있었다.
신녀 사건 하나로, 뛰어난 무예실력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조운은, 거의 화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운이 공손찬 앞에서 떠들었던 그
반문까지 합하면 더더욱 그렇다. 마치, 장난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사람 처음 봐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거세게 외쳤다. 이제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똑떨어지는 말투, 행동, 능숙한 처세술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일단 눈에 띄는 것은....... 여자와
미(美)라는 요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신이
보기에도......신비함까지 보이는,
정말로 아름다운 외모......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와 닮지 않았더라도......
여하튼 눈에 띄는 그 미모......한번 그녀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잊지 못할 것이다. 늘 두건으로 칭칭
머리를 싸매고 남장을 해도 그렇게 미인이라면, 여장이라도
한다면 정말로 신녀같을 것이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던가. 상공에 떠있던 화려한 차림의
화정은 누가 보아도......하늘에서 강림한 신녀같았다.
상상 속의, 아니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지닌.......자신도
처음에는 그녀의 정체가 신녀인가, 싶었다. 그러나 화정은
그 사실을 스스로 완강하게 부인했으며, 당황하기까지 했다.
`하긴, 담사간인도 못하는 사람이 신녀일 리는 없지 않은가.'
그리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눈에 띄는 사람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이 모이는 것을 생각보다
싫어했다.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여자들은 자신의
미모를 사람들이 모여서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찬탄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할 텐데 말이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여자들은,
특히 미모를 지닌 여자들은 그러했다. 하지만......
<난, 주목받는 것 따위는 질색이에요!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이 소망이란 말이에요!>
뻐기면서 내빼는, 그런 가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숭도
절대 아니었다. 조운이 읽은 화정은 절대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의식하는 것을 싫어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면,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자신의 외모를 그렇게 자랑삼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여자의복을 사 주었지만 그를 입으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싫었는지, 악착같이 남장을 하고,
길고 탐스런 머리칼은 두건으로 열심히 싸고 다녔다.
물론,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먼 곳이나 사람이 많은 거리로 나갈 때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시선보호막이 되어주기도 했다. 청초하면서
도도한 그녀의 외모는, 분명 그녀 스스로에게는 달갑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시선을 느끼는 일이라.......그렇군, 이제야 그
심정이 이해가 가는군.......'
조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고삐를 힘주어 쥐었다. 공손찬.
자신과 그다지 돈독한 사이는 아니다. 자신이 공손찬을
주공으로서 크게 만족스럽게 보고 있지 않듯이, 공손찬 역시
자신을 수하로서 만족스럽게 대하고 있지는 않다.
처음에, 공손찬을 도와 수하가 되고 이 북평까지 따라왔을 때,
조운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또한, 자신이 주공으로 모시기에는 너무나 다른 사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따라왔다. 그나마, 조금의
희망을 걸고. 원소의 옹졸함과는 다른, 장대한 기골을 지닌
데다 북방의 패자라 이름난 공손찬.
그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기대에 호응해 줄 것을 희망하고
말이다. 자신이 크게 중대하게 쓰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따라왔다. 예상외로 치안대장이라는 임무를 준
공손찬이었지만 머지않아 어떤 핑계거리가 생기면 좌천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화정이 그 이유가 될 거라고는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생각하는 사이,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어느덧 자택에 당도했다. 담 주변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목을
뺀 채 서있었다. 아마, `신녀' 를 보기 위해 몰려온 인파일
것이다. 평상시에는 조용하던 자신의 자택은 그 사건 이후,
관광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원치 않아도 주목받아야 하는 입장이라......'
냉정히 살피면 자신은 그저 주공 앞에서 조금 당돌한 말을
올려서, 잠시의 주목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
`인간' 의 관점에서 받는 주목이다. 대조적으로,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좀더 `신적' 인 이유로 주목을 받는, 그리고
더 장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화정의 심정은 훨씬 씁쓸한 것일
듯하다.
생각해보면 유비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유비군에서 잘 지내고
있었을 화정이다. 그나마 평원에서는 유비가 현령이라도 되니
쉽게 수습을 해 주었을 것이며,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한다면서 - 하녀는 떠나갔고, 화정은
그나마 집 안에서 하는 요리를 하겠다면서 덤비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서 일부러 이런저런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임을 조운은 짐작했다 - 끙끙댈 일도 없을 것이다.
현청에서 좀더 대우받고 쉽게 생활하고 있을 것이었다. 가끔
성가시게 하고는 있는 데다 값비싼 부적을 만날 날려대서
금전적으로도 크게 지장이 생기게 해도, 본래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을 싫어하는 자신이 그 모든 사실을 묵과하고
있는 것, 그건 유비의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일 지도 몰랐다.
홀로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그리고.......
"어? 들어왔네요, 휴우! 다행이에요! 저 사람들 좀
쫓아주세요, 낮부터 붙어서 구경하고 있다고요!"
귀에 들어오는 야무진 목소리. 하얗고 고운 살결에 커다란
회색의 눈동자.
.......닮았다.
*******
홀로 있는 것을 더 즐기는 성격은, 결코 닮지 않았지만
외견상으로는......허무하리만큼 어딘가 닮았다......
*******
하루종일 안에 틀어박혀 있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방안에 꼼짝 않고 앉아서 주술서만 읽고있던 화정은 답답한 심정에
창문을 살짝 열어봤다가 얼른 닫았다. 화정이라고 좋아서
방안에만 박혀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조운의 집에는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심지어는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담장 위로 머리를 내밀고
하루종일 집안을 둘러보는 자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거리나 다른 곳으로 나가서 나다니는 것은 당연히 엄두도 못
냈으며 심지어는 뒤뜰조차도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관람이라는 것은, 구경꾼들은 즐겁더라도 구경 당하는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저들이 알 리 없다.
또한 알더라도 신경쓸 리도 없다. 구경하는 입장이야 늘상
자신들이 즐거우면 그만일테고, 이런 고달픔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게 되니까. 인간은, 정말 `경험의 동물' 이다.
자신이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타인의 입장을 눈꼽만큼도 모른다.
하긴, 화정 역시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주목받는 피곤함'
이란 것을 일체 모르고 살았다. 조금 철 들고, 늘상 주변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시선을 알고서야 그 `구경당하는 슬픔' 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나저나 무슨 주술서가 이렇게 어렵담......'
화정은 읽던 주술서를 신경질적으로 탁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짜증을 냈다. 무예는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고 - 제아무리
그녀가 태권도나 검도, 합기도를 배웠다지만 무예에
선천적으로 `둔치' 라는 사실은 인정해야했다.
앞서도 밝혔지만 관우가 가르치다가 한숨을 내쉬었고, 조운
역시 그녀에게서 견습용 봉을 말없이 `빼앗아' 감으로써 그녀가
재능은 보통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
해주었다 - 그나마 목걸이 덕택에 아귀강시를 조금 부릴 수
있으며 원령 중에서 일부는 승천시킬 수 있으니 차라리
주술을 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또다시 밀려오기
시작한 잡념을 떨구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주술서를 거칠게 집어들어 펼쳤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까먹었잖아! 그......어라?"
화정은 자신이 읽은 것보다 훨씬 뒷부분인 것처럼 보이는
장에서 조금 구미가 당기는 구절을 발견했다. 언뜻 지나쳤지만
눈에 뜨이는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한참을 뒤적거려서야 그녀는
자신의 눈길이 인식했던 곳을 다시 발견했다. 천천히,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
『은밀히 대화하는 수법을 통칭하여 전음술(傳音術)이라고 한다.
본래 전음술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기(氣)를 이용하여 좀더 먼
거리까지 말소리를 들리게 하는, 확장(擴張)과, 단거리
내에서 다른 이들은 들을 수 없으며 일정한 공통의사를
지닌 두 사람 사이에서만 대화가 오고가는 밀통(密通)만
남았다.
전음은 술사라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능력이다. 허나,
술사의 수준에 따라 구사되는 정도가 차이가 있다. 예를
든다면, 고(高)술사가 먼저 전음을 걸어주기 전까지,
저(低) 또는 중(中)술사가 고(高)술사에게 먼저 전음을
시작할 수는 없다.
또한 전음범위가 고(高)수준의 술사일수록 방대하며,
자신의 주술이 통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술사들이 밀통전음(密通傳音)을 한다면, 당연히 고(高)술사는
이를 모두 들을 수 있게된다.』
*******
`조금 어렵네......전음술이라면 무협지 같은 곳에서 자주
등장했던 건데......한마디로 높은 수준의 술사가 전음을
행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크고 제약이 적구나......그나저나,
고수준의 술사가 먼저 말을 걸어야 저술사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라......'
조금 벗어난 생각이지만, 이전에 읽었던 `베르사이유의 장미'
란 소설이 생각났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단두대에
올랐던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를 중심으로
씌어진 소설이다. 만화책이 더 널리 퍼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훨씬 이전에 소설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읽었던 적이
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었다.
앙뜨와네트가 황태자비였던 당시, 루이 15세의 애첩 뒤바리와
대결을 펼쳤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실권이야 국왕의
침실을 점령하고 있던 뒤바리가 더 강했겠지만, 지위 상으로는
당연히 궁정 최고의 여성인(당시 루이 15세의 왕비는 죽고
없었다*작가주) 앙뜨와네트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결국, 앙뜨와네트는 `지위가 높은 여성이 최초로 말을 걸어주기
전에, 지위가 낮은 여성이 먼저 말을 걸 수 없다.' 라는 예법을
이용해서 뒤바리에게 한마디도 걸지 않고 교묘하게 무시함으로써
뒤바리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루이 15세를 이용한
뒤바리의 압력 덕에 결과적으로 뒤바리에게 말을 걸어야
했지만......*
`여하튼 그것하고 비슷하네. 높은 지위의 여성이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와 고 수준의 술사가 먼저 전음을
걸어주어야 한다.......라, 흠......'
좀 신기했다. 전음에 대해서는 그저 `더 먼 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은 알아챌 수 없게 시도하는 귓속말' 정도로 알고있던
화정에게 흥미를 던져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동양과 서양의
공통점......이라하면 너무 크게 생각한 걸까?
여하튼, 역사적인 사실들을 캐보면 공유점들이 꽤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물론, 이런 주술적인 이야기들이야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고 주술이 소멸되면서 그런 이야기들도 뒤따라
없어졌겠지만.......화정은 천천히 뒷장을 넘겼다.
전음의 기초와 행하는 법에 대해서 씌어있었다. 한번 읽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책장을 조금 더 앞으로 넘겨보았다.
아직 전음에 대한 필요성은 크게 느끼지 못했거니와, 그 행하는
법을 대충 눈으로 훑어보니 이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위치로 보아 자신이 읽던 부분의 훨씬 뒷부분인데, 그런 수준
높은 것을 기초도 못하는 그녀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
뒷부분을 훑어보던 화정은 다른 흥밋거리를 발견했다.
*******
『공격주술에는 수법(水法), 화법(火法), 낙뢰(落雷),
빙결(氷結)이 있다. 이는, 타인(他人)에게 수(水)나 화(火),
또는 뇌(雷)의 힘으로 타격을 주는 것으로, 전투 중에 유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아, 바로 이거야! 이게 있으면 나도 조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화정은 보람을 느끼면서 천천히 그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역시, 그녀 시대처럼 책이 가로로 씌어지지 않고 세로로
씌어져서 그런지 아직 눈이 피곤하고 헷갈렸다. 결국
손가락으로 짚어서 읽어 내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
『공격주술에도 상위가 있다. 가장 상위로 치며 아직까지
누구도 구사가 불가능했던 것은 바로 빙결(氷結)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방법만 전수되어 왔을 뿐, 시전이 가능했던
적이 없었다. 전설에 의하면 요(堯)임금*이 신선에게
전수받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치는 것이 낙뢰(落雷)의 공격술인데, 이는
몇몇의 최고술사만이 시전이 가능했다고 한다. 흔히 쓰는
것이 수법(水法)과 화법(火法)이다.』
*******
`그러니까 결론은......빙결은 당연하고, 낙뢰 같은 것도
안된다는 거고......수법(水法)하고 화법(火法)만 된다는 거지?
하기는, 빙결은......우리 때의 그.....냉각기술이니 좀
힘들기는 할거야. 냉매제가 등장한 것도 크게 오래되지
않았는걸.....어쨌든 하급만 익힐 수 있다는 건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익히자. 익혀서......'
자신을 늘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오히려 방해꾼으로만
보던 조운의 얄미우리만치 무표정한 얼굴이 스쳐갔다.
`내가 그렇게 무시할 만큼 덜떨어진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거야! 언젠가 한번 그 나쁜 녀석이 위기에
처하면 가서 주술을 써서......아, 생각만 해도 즐겁다, 그
표정이 변할 것을 생각하니.......어서어서 읽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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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만화책이 더 널리~사실이지만: 남장미녀 오스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만화책이 일반적으로 아는 `베르사이유의 장미' 다.
필자 역시 시초가 되는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만화책에서의 `장미' 란 오스칼을 가리키지만, 소설에서의
`장미' 는 앙뜨와네트를 가리킨다*작가주
2.뒤바리와 앙뜨와네트: 당시 마리 앙뜨와네트가 들어올
시의 궁정은 매우 불안했다. 루이 15세는 뒤바리 부인에게
정신없이 빠져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궁정에서 발휘하는 권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윤리적인 어머니 마리 테레지아 아래에서,
창녀들은 채찍질하고 가두는 것만 보고자란 앙뜨와네트에게는
뒤바리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특히, 루이 15세에게는 세
명의 누이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뒤바리를 밉게 보고
있었던 지라 앙뜨와네트를 이용하여 뒤바리를 견제하기로 하고
앙뜨와네트에게 궁중의 예법을 이용하도록 권유했다.
결국 앙뜨와네트는 뒤바리에게 말을 걸지 않고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뒤바리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분하게 여긴 뒤바리가 루이 15세에게 눈물로 그 일을
탄원하였고 루이 15세가 결국,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외교적 협상의 결렬까지 걸면서 강하게 나오자 앙뜨와네트는
어머니의 권유 때문에 뒤바리에게 말을 걸게된다.
이후 뒤바리는 루이 15세의 임종시에 `천박한 뒤바리를
내보내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해 주지 않겠다.' 고 주장하는
신부들 때문에 궁전 밖으로 내쫓긴다. 평생 수녀로 살았다는
소리도 있고 중간에 죽었다는 소리도 있다*작가주
3.요(堯)임금: 중국 전설상의 성천자聖天子. 요를 이은 순舜과
아울러 ‘요순의 치治’라 하여,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천자상天子像으로 알려져왔다. 요의 사적事績은
《상서尙書》의 <요전堯典>이나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세의
유가사상儒家思想에 의하여 과도하게 수식 ·미화되어 있어서
실재성은 빈약하다.
《사기》 등에 의하면 요는 성을 도당陶唐, 이름을
방훈放勳이라고 한다. 오제五帝의 하나인 제곡帝의 손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제위에 오르자 희화羲和 등에게
명하여 역법曆法을 정하고,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순을
등용하여 자기의 두 딸을 아내로 삼게 하고 천하의 정치를
섭정攝政하게 하였다.
요가 죽은 뒤, 순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제위를 잇게
하려 하였으나, 제후들이 순을 추대하므로 순이 천자에
올랐다고 한다*두산대백과
"으, 음......?"
[일어나십시오.]
"음......누구......앗!"
한참을 엎드려 자다가 잠결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화정은 기겁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흐릿하고 반투명한, 옅은
회색의 낡은 옷을 입은 남자가 그녀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온화한 인상이 있는 남자다. 화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반투명한 형체에, 보통의 사람과 비슷한 모습. 아귀강시는
아니다. 그렇다면 원령이거나.....여하튼 그런 종류라는
건데......화정은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투덜거렸다.
"놀랐네! 아무리 급하다지만, 자지 않을 때 찾아올 수는
없어요? 십년감수했네."
신나게 졸던 그녀는 약간의 죄의식도 느끼면서 원령을 탓했다.
원령이라면 승천을 바라고 들어온 것이라는 정도는, 이제 알 수
있었다. 대화도 통하고 있느니만큼 이 원령은,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생전에 그다지 지적 수준이 없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원령 중에서도 이같이 어느 정도의 지적 수준과
이성이 남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의 원령만 대화가 통하고
눈에 보이는 화정으로서는 아직까지도 이러한 사물(邪物)들이
절대 반가울 리 없다. 게다가, 이렇게 신나게 졸던 도중에
온다는 것은 더 그렇다.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느낌을 감지한 지 얼마 안되어서
급하게 왔기에......]
"아무튼 됐어요......그럼 당신 원한은 무엇이었지요?"
화정은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물었다.
원령을 승천시키려면 먼저 원한을 듣고 나서 승천하라는 말을
해 주어야 한다. 그래봤자 여지껏 승천시킨 원령이 단 셋밖에
안되니까 많이들은 것도 아니지만, 청승떠는 행동을 보는 것과
눈물섞인 호소를 듣는 것은 참으로 지겹고 싫은 일이었다.
화정은 절대로 장래에 상담원만은 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해왔던 것이었다. 화정의 시들시들한 태도를 보면서
원령은 머뭇거렸다.
[아......니.......저에 대해서 모르시는겁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화정은 대번에 원한이나 과거지사가 눈물과 함께 줄줄줄
쏟아져 나오던 이전의 원령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원령을 보면서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해보았다. 화정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원령을 바라보자, 원령도 꽤나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는 내가 할 소리네. 혹시 이 원령은 기억상실이라도
걸려서 자신의 과거를 찾아달라는 건가?'
[역시, 화정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과거를
잊고있는 상태입니다.]
`뜨끔!'
화정은 속마음이 그대로 읽히자 바늘로 찔린 듯한 기분을
맛보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지금......혹시 내 마음을 읽은 거여요?!"
[예? 아, 죄송합니다만......]
분이 나빠졌다. 함부로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임에 틀림없다. 저런 술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정은 가시 돋친 말투로 쏘아붙였다.
"원한은 이제 들었으니 됐죠? 승천......."
[아닙니다! 저는......!]
원령이 머뭇하면서 화정의 말을 가로막았다. 화정이 화가
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원한을 아직 풀지 못한 모양입니다......저는 제 원한을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승천할 수 없다는
사실을......알고 계시겠지요?]
".......승천할 수 없다고요? 죽어서도 원한을 몰라요?
그런게 어디있어요!"
코미디하는 것도 아니고, 퀴즈도 아니다. 우습다. 죽고
나서도 스스로의 원한이 뭔지 모른 채 떠돌고있다니, 뭐 저런
경우가 다 있담. 기가막힌 나머지 콧방귀를 뀌려는데 원령이
화정의 뒤쪽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아, 화정님! 어서 그 장소에서 물러나십시오! 어서요!]
`저건 또 웬 난리야?'
엉뚱한 말에 고개를 기우뚱거리면서도, 혹시 뭔 이유가 있나
싶어서 서있던 곳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찾아온 원령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화정이 몇 발자국 뗀 순간.......
와지끈!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화정이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나무
받침이 쓰러졌다. 평상시에 옷을 대충 걸어두던 것이었다.
화정은 깜짝 놀란 눈으로 원령을 바라보았다.
`혹시......이 원령은 미래라던가 어떤 특수한 사실을 알고
있는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연으로 넘기기에는 화정의
성격이 용납하지 않았다. 화정은 어떤 현상에 대해서
`우연이겠지, 뭐.' 하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것은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원령같이 특이한 구석이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원령은 자신을 멍하니 보면서 딴 생각을
하는 화정에 대해서, 그제야 어느정도 파악해 낸 듯했다.
조심스럽게 화정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군요. 승천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 보통
분이실 리가 없지요. 경황이 없어서 그만 잘 알아보지도
못하고 다짜고짜......죄송합니다. 아직 이곳에 익숙하지
않으시군요.]
`어라?'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화정님은 일종의 시공이동을
통해 이곳으로 오신 분입니다.]
"시공이동?! 아, 그렇다면 혹시, 당신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나요?!"
원령은 순간적으로 반응이 격렬해진 화정을 보면서 맥빠지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단지 시공이동을 해 오신 냄새가
배어있어서......아무튼 말씀드리자면, 저는 다른 원령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원령.....이라기보다는 봉사령(奉事靈)......
이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네?"
[특별히 원한이 있어서 떠도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생전에
어떤 죄를 지었기에, 그 대가로 생전의 기억을 잃고 봉사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주인을 정해서......]
"어떤 죄를 지었기에 죽어서까지 그런......"
[......저도 잘 모르지만 여하튼 큰 죄를 지으면 그렇게
됩니다. 죽고나서 원령이 되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죄를
만회해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를 골라 그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물론,
악독한 일을 지시하더라도......]
"그건 말도 안돼, 그럼 죄를 씻기는커녕 더 늘리는 거잖아요?"
원령이 미소지었다. 고요하고 조용하면서도, 온후함이 풍기는
그 미소에는 슬픔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 저렇게 보니
살아생전에는 꽤 괜찮은 외모였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대체 어떤 심정을 지니고 있기에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주인을 택할 수 있는 겁니다.
즉, 주인을 잘못 택한 것도 죄가 됩니다......주인을 잘못
택해서 죄를 쌓으면, 또다시 계속해서 봉사령으로 떠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아니, 지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짓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얼마나 가혹한 죄를 저질렀기에
저렇게 영겁의 시간에 가까운 벌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것도 과거 기억까지 모두 지운 채로......화정은 동정을
느끼면서 질문했다.
".......그렇게 시킨 건 누구죠? 신......인가요? 정말
신이란 것이 있나요......?"
원령, 아니 그 봉사령은 아까의 그 가슴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용히 화정을 응시했다.
[그런 질문을......그렇게 차가운 표정으로 할 수 있다니,
역시 당신은 보통 사람은 아니군요......하기는, 천년만에
나타난 승천 주술사......그것이 이미 증명하고 있지만......
애석하게 저 역시 그 답을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렸듯, 제가 봉사령이 되자마자 모든 것은
기억에서 지워졌으니까요.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죽은 직후
누가 저를 데려갔으며 누가 저에게 이런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을 명령했는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지워진 겁니다.]
화정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원령을 바라보았다. 그 막연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기 이전에 화정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강력한
`슬픔' 같은 것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원령이, 너무나 안되어 보였다.
자신의 과거를, 모조리 잊는다는 것을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사후 세계를 잊는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어떤 원한을 지녔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모른 채
그 죄를 씻기 위해 저렇게 막연한 목적만 지닌 채 떠돌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는 그렇게 떠돌고 있는 사실 `자체'가
원한인지도 모른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화정은 그를 위해 자신이 알 수 있는 것만이라도
가르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당신은......틀림없이
생전에 굉장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어요.
왜냐하면 나와 대화를......이렇게 매끄럽게 나눌 수
있으니까.......난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인물은
아니에요.
지적 수준을 어느 정도는 지닌 사람의 원령만 볼 수 있고,
그의 원한을 들어줄 수 있으며, 또 그런 원령들만 승천시킬
수 있거든요. 하지만 승천을 시킬 수 없더라도 이렇게
자유자재하게, 보통 사람과 다른 점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분명 당신이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일
거여요. 적어도 이 정도는 알려줄 수 있어요."
딴에는 그저 너무 막연하게만 알려주어서,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될 기대를 하고 왔던 것 같은 그 원령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원령의 표정은 환해졌다.
원령은 서글픈 빛이 완전하게 가시지 않았지만 조금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나마, 막연한 존재인 내게 그나마 그
정도라도 가르쳐주신 분은 화정님밖에 없었습니다......
선인(仙人)들과는 대화가 통하기는 했지만, 그들도 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는데......화정님이 그 한가지를
가르쳐주셨군요!]
"아, 아니, 뭐......그렇게 고마워할 것까지야......"
너무 공손한 그 태도에 도리어 화정이 당황했다.
[이제야 제가 봉사할 상대를 고른 것 같습니다! 제가
필요할 때는 언제고 부르십시오!]
이게 무슨 소리야, 웬 봉사할 상대야? 황당하다는 심정으로
원령에게 외쳤다.
"뭐라고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인을 정할 수 있......]
"그것을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제겐
능력이 없다고요. 그러니 더 죄를 짓지 말고 다른 좋은
주인을 찾으세요!]
부담스러웠다. 자신이, 저 가엾은 봉사령이 또다시 죄를 쌓게
하는 원인이 될까 두려웠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화를 내자
봉사령은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됩니다. 원령의 약속은 산 사람과 달라서 번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그렇게 제가 죄를 더 쌓게 될까
두려워서 거절하려는 화정님은 절대, 절대로 그렇게 나쁜
주인이 되지 않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뭐라구요?"
[그리고, 원령이 되어서 이렇게 은혜를 입은 적은
처음입니다. 이 은혜를 갚는다면, 저의 죄는 더 씻어질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럼, 제가 필요할 때는 언제고 부르십시오.
아, 참고로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곧 화정님께
반가운 소식이 올 것 같습니다. 친분이 있으신 분으로부터
서찰(書札)이라도 올 듯하군요.]
"잠깐......."
슥, 하는 소리와 함께 원령의 형체는 사라졌다. 화정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불평했다.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안 가르쳐줬잖아!"
어쨌든 그렇게까지 도움을 준다는데 도움을 안 받을
이유는 없다.
[그냥 도와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머리를 통해 목소리가 찡, 하고 울려왔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화정은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그것 말고요! 이름이라도 알려줘요!"
[......이름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럼 아무거나! 그냥 부르기는 좀 뭣하잖아요!"
[정 그러시다면......현량(玄亮)이라 부르시지요.]
"현량이 뭐죠?"
[그저.....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럼, 현량이라고
부르시면 나가도록 하지요.]
귓속이 멍멍해지면서 다시 방안은 잠잠해졌다. 화정은 멍하니
서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거인도 아니고......우렁각시라 하면......그건 심했다......
아무튼 졸지에 심복아닌 심복, 그것도 귀신심복이 생긴 화정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만약, 화정이 이 상황을 2000년도의 한국에서 겪었다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원령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물건들이나 징그럽기 짝이없는
아귀강시같은 것을 보면서 단련돼 왔기에 이렇게 멍한 정도로
끝나는 것 같다. 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서야, 화정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깨달았다.
"아차! 저녁!"
하녀가 떠나고 나서 요리를 할 사람이 화정 밖에 없었던
까닭에,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 된 일이었다. 혼자만 있는
아침식사 때와 점심식사 때는 있는 것을 조리도 안 하고 대충
챙겨먹으면 되지만 저녁때는 그럴 수 없었다. 아무래도 조운한테
미안한 감정이 남기 때문이었다.
`좀 밉기는 하지만......'
그렇다. 밉기는 해도 고맙기도 하다. 그때의 사건이후,
조운은 집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막느라 꽤 고생했다.
또한 그런 일까지 당하면서도 그녀를 내쫓거나 유비에게
보내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고맙기도 하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다.
여하튼 저녁식사만은 한번 만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어제 열심히 요리를 했지만 부엌만 진땅
어지럽히고 요리는 맛도 없는 멀건 국으로 끝났다. 하지만
조운은 말없이 먹었을 뿐이었다. 화정은 오늘은 그나마
옆집에서 건네준 달걀이라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문을
열었다. 순간 작고 하얀 새가 푸드득거리면서 날아왔다.
"어, 뭐지?"
새가 천천히, 주변을 맴돌면서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이곳은 새도 사람보다 지능이 높은가보다, 싶은 화정이
어이없이 보고있으려니까, 그 하얀 새는 검은 재가 쌓인
곳으로 갔다가 다시 날아왔다. 화정의 앞에서 콩콩 뛰어다녔다.
새의 발에 묻은 재 덕택에 바닥은 검게 얼룩졌다. 화정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외쳤다.
"이 새가 정말! 내 딴에는 허리 부러지도록 치운 집인데!
또 구박먹게 생겼잖아! 어?"
바닥에는 `현량' 이라고 어설프게 찍혀있었다. 즉, 새는
그 글씨를 쓰기위해 재를 묻히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화정은
기가막힌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불쑥 소리쳤다.
"현량!"
새가 날개를 몇 번 퍼득거리다가 사라지더니 불투명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부르시고 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저는 동물으로 변해서 있게됩니다. 그러니 화정님께서
부르시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뭐 그런 일이 다 있냐고요!"
[보통 봉사령들은 주인을 정하고 나면 이렇게 지내게 됩니다.
시키실 일이라도?]
또다시 바보가 된 느낌이다. 이 세계는 여러모로 적응이
안된다. 물론 그쪽에서는 사람을 부리는데 능숙했지만
여기와서까지 감놔라 대추놔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을
부리는 것은 편해보여도 어떤 면에서는 귀찮다. 이런저런 행동을
규정지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모처럼 여기에 와서 그쪽에서는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볼
수 있던 차에 또 쫄따구(?)가 생기니 화가 나기도 했다.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그러니 얌전히 새로 돌아가 있으라구요!"
화정의 반응에 현량이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마악
사라지고 있는 순간에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화정이 모를 리 없다.
당황한 그녀는 딴청을 피기로 결심했다.
"어? 들어왔네요, 휴우! 다행이에요! 저 사람들 좀
쫓아주세요, 낮부터 붙어서 구경하고 있다고요!"
"이미 그 사람들 사라지고 없어. 그나저나 네게 서찰이
와 있더군."
조운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뜨끔거리는 심정을
감추기 위해 화정은 태연을 가장했다.
"아, 그래요? 누구한테 왔는데요?"
대답하려던 조운은 고개를 약간 들다가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시선은, 온통 시꺼멓게 재가 묻어서 지저분한
바닥을 향해 있었다. 철렁, 하고 가슴 내려앉는 소리를 들은
화정은 서둘러 변명했다.
"저거, 내가 손가락에 재가 묻었기 때문에......아, 심심해서
장난 좀 쳤어요. 현량이라고 이전에 나와 친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거든요. 갑자기 생각나서......지금 뭣하고 지내려나......
혹시 그 서찰, 현량이란 사람한테 온 것 아니에요?"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아서 좋을 것은 없다. 그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아니. 유비님께 온 서찰이더군. 세 통이야."
"세 통씩이나? 어디, 봐요!"
화정은 양손으로 서찰을 신나게 빼앗았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에는 재가 묻어있지 않다는 것과, 깨끗한
자신의 양손과 조운의 한 손이 잡고있는 서찰을, 말없이
내려다 보고있는 조운의 시선을 동시에 깨달았다.
*******
여하튼 호되게, 그 `현량' 이라는 재로 씌어진 글씨의
진상에 대해서 캐묻던 조운은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화정에게 차가운 시선만 던지고 가버렸다. 그 숨막히고
기분나쁜 사건에 대해서는 절대 묘사하고 싶지 않은 것이
화정의 심정이었다. 속으로 현량에게 욕을 열심히
해대면서, 또한 조운에게도 짜증을 내면서 서찰을
내려놓고 앉았다.
겉봉에는 자신의 이름이 씌어있었다. 유비(劉備), 관우(關羽),
삐뚤거리는 장비(張飛)라고 세 통에는 각각 발신인이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조금은 부드러운 맛이 있는 필체의 유비와, 반듯반듯한
필체의 관우, 삐뚤빼뚤 멋대로 어렵게 그린 듯한 장비라는
글씨들은 각자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하는 듯 했다. 특히
화정은 장비의,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필체를 보고
속으로 피식거렸다.
`못말려......그나저나 글씨라도 배웠나? 웬일로 편지를
다 썼담.'
아무튼 그 세 사람은 얄미운 조운에게 매일같이 무시당하던
화정에게 있어서, 너무 반가운 일을 해 준 것만은 틀림없었다.
화정은 그제야 현량의 말을 떠올리면서 남몰래 감탄하고는
유비의 봉을 먼저 뜯었다.
*******
"산적이 신녀를 노하게 한 원인이었으니, 그 산적을
토벌하여 죄를 만회하라."
*******
이것이 바로 공손찬이 얼마 후에 내린 명령이었다. 주변
관리들은 너무 약한 벌 아니냐고 수군댔다. 사실,
치안대장이니만큼 산적토벌은 벌이라기보다 본래의 임무였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이 그렇게 못마땅해하고 있는 셈이다.
관리들은 이전의 기주공방전(원소와 공손찬이
대립했었다*작가주)때 공을 세워 갑자기 치안대장으로
치솟았던 조운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 상태였다. 특히
북방의 패자라는 소문이 들 정도로 무력 위주인 공손찬의
집단은 무관(武官)이 문관(文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당연했다.
무관들에게 있어서, 출중한 무예를 지닌 데다 문(文)도
겸비한 조운은 시샘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자신들이
두고 다투던 자리인 치안대장 - 크게 힘들 것도 없기는
하지만, 전투가 없고 내정에 치중하는 시기에는 무인으로써
맡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이다.
즉, 큰 힘 쏟을 것 없이 나오는 봉록만 받아먹으면 되는
자리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 을 덜컥, 조운이 맡았을
때부터 그런 갈등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런 상황을 조운이
모를 리 없었다.
군주인 공손찬도 스스로가 조운에게 수하가 되어줄 것을
권유했으며 크게 도움을 받은 체면 덕에 치안대장을 맡긴
것일 뿐, 조운에게 신뢰감 같은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확실하게 증명이 된 셈이다.
산적토벌은 구실일 뿐, 조운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하여
좌천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러나 조운은 말없이
그 명을 받들었다.
"그리하겠습니다. 병졸은.......?"
"오백. 기병 백 명에 노병 백 명, 보병 삼백이면 충분할
거네. 전력이 궁한 상태라 크게 징병을 하지 않아서 병사가
별로 없네."
물론 거짓말이다. 공손찬이 원소와의 전투에서 득을 보지
못한 이후, 얼마만큼 군사력 신장에 힘을 쏟고있는지는 북평의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다. 대대적인 산적토벌을 명하면서 기껏
오백을 준다는 것부터가 속이 보이는 발상이다. 병사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이유로 거절한다면 불복종죄이고,
오백 명만으로 가면 패전은 뻔하다. 아마 조운의 반박에
한참 약이 올랐던 모양이다. 공손찬의 머리가 아니라 꾀주머니
사융에게서 나온 것이 틀림없지만.
"어찌하겠는가, 자룡?"
벌써부터 말투에는 오만함이 잔뜩 담겨있다. 하지만 길이 없었다.
"......주군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어차피 결과는 좌천. 그리 될 바에는 부딪혀보는 것이 좋을
거라고 결론을 내린 조운은 고개를 조아렸다.
*******
뒤돌아본 조운의 표정에는 한심한 빛이 숨어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화정은 속으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왜죠? 왜 안된다는 거여요?"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나도 도울 수 있어요! 어차피 지금 열세에 몰려서 좋은
상황도 아닌데다 병사도 조금밖에 못 데리고 가면서
그......."
화정은 조운이 자신을 응시하자 아차 싶어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사실 조운은 이전에 그랬듯, 산적을 소탕한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줄줄이 읊어댄다면
당연히 이상하기도 할 것이다. 현량을 통해 알아냈다고 할
수도 없었다. 화정은 황급하게 덮어내면서 중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 그냥 나 때문에 소란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 본
것뿐이에요. 어려운 추측은 아니잖아요......그런데 내가
도와주면 안된다는 건가요? 나도 도와줄 수 있어요."
"도움이라고? 방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조금 비꼬는 투의 어조였다. 기분이 나빠진 화정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투덜거렸다.
"나도 어느 정도의 호신(護身)은 할 줄 안다고요! 이래뵈도
우리쪽 세계에선 상당한 유단자였.......아, 아무튼."
왜 이렇게 조운 앞에서는 유독 실수가 잦아지는지 모르겠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이 가끔씩 실없는 실수를 하면 그것을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서 보고 넘기던 화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실수가 잦은데다 실없는 사람으로 변한 건지......
"주술도 이제는 좀 쓸 줄 알아요! 급한 상황에서는
아귀강시들을 부르면 되잖......"
"반대로 아귀강시가 너를 부릴 거라고 생각되는군."
역시 얄미울 정도로 차갑게 화정의 말을 잘라버렸다. 조운은
자신의 투구를 집어들었다.
"쓸데없는 생각말고 여기에 있어. 적어도 이곳은 주군의
군사들 덕택에 좀 안전할 거야. 이전 사건 이후로 산적은
성내에 들어오기 힘들어.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유비님께 면목이 없어지니까."
휑하니 나가버리는 조운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던 화정은,
그가 말을 타고 저 너머로 사라졌을 때에야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 거듭 생각하지만 사람을 깔아뭉개는 것에는
일가견, 아니 이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화정이 이렇게 한마디도 반박을 못한 채 마냥 무시당하기만
한다는 것은 조운의 앞에서만 펼쳐지는 상황인 것이다.
짜증스런 얼굴로 의자에 앉은 화정은 책이나 읽을 양으로
눈길을 탁상 위로 떨어뜨렸다.
`사실 좀 이상하기는 해......난 남의 일에 크게 신경을
쓰는 성격도 아닌데다......생각해보면 조운의 말이 맞아,
이곳이 더 안전해. 그런데 왜......'
화정은 또다시 이상한 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왜 굳이 따라가려고 했을까? 무엇 때문에......?'
생각하면 할수록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신이 함께
가겠다고 열심히 우겨놓고는 그 이유를 이후에 천천히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우스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우습고
뭣하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정말 이상했다.
한참 고민하던 화정은 그것을 `뭔지 모를 불길한 느낌'
덕이라고 규정지었다. 아닌게 아니라 현량이 - 당연히, 새로
변해 있었다 - 화정의 옆에 놓여있는 의자 위에서 불안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조용히 있지 못하는
것을 보아, 뭔가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화정은 그런 현량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그냥 따라가는
것이 옳을까? 공손찬이 그렇게 소수의 병사만 이끌고 대산적을
토벌하라고 했던 것은......아, 답답해! 현량을 불러서
물어봤으면 좋겠지만 하루에 단 한번만 부를 수 있다니......
정말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니까!'
화정은 역정을 내면서 벌떡 일어났다. 창 밖으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일고 있었다. 또 `신녀' 를 구경하기 위해서
몰려든 인파일 것이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더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화정은 창문을 소리내어 닫으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저 인파를 어떻게 뚫느냔 말이야!
게다가 문을 잠그고 나가야 할텐데......하다못해 기르는 개
한 마리도 없으니......그런데.......'
화정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도둑이 들더라도 이 집에 훔쳐갈 만한 것이
몇 개나 있지......?'
이건 지극히 사실이었다. 솥단지라던가 보잘 것 없는 물건
몇 개가 도둑이 들고 갈 만한 전부였다. 그나마 그 솥단지나
물건들도, 그 허름함에 혀를 차면서 들고 갈 것이 뻔하다.
그 외에 책이 좀 많기는 했지만, 책이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훔쳐갈 정도의 상식이 있는 도둑이라면, 관직으로 나갔지
도둑질을 하고 살 리가 없다.
문맹율이 극히 높은 이 시대에 책을 들고 갈 정도의
도둑이라면, 그건 직업 도둑은 분명 아니다. 관리가 제2의
직업이나 취미로 삼아 도둑질을 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읽을 줄도 모르는 책을 훔쳐갈 리 없다. 그 가치를 알
리도 없다. 그저 뒷간에서 급할 때 뜯어서 이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돈이 좀 있다해도 그건 얼마 안되고, 화정조차 그 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아마 조운이 들고 다니는 것일지도
모르고 따로 두는 곳이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청소를
구석구석 해오던 하녀조차 몰랐던 사실이라면, 도둑이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을 리도 없다. 결론은, 이 집은 텅
빈집이어도 아쉬울 것은 없다는 점이다. 아차, 옷가지
몇 개는 빼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집을 비울 수야 없잖아......? 으이그,
조자룡! 진짜 머리도 잘 써놓고 나갔네!'
머리에서 김이 솟는 것 같았다. 화정은 투덜거리면서
도로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을 내면서 창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틈새로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양이 보이자 화가 났다. 저런 광경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이 종교전쟁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정치나 필요에 따라 일어나는 전쟁은 이해관계로 타협점이
어느 정도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근본적인
사상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종교 때문에 생기는 전쟁은
끝이 없다는 소리가 있다.
딱 한번 일어났던 그 사건으로, 조운의 집은 거의 `순례지'
수준이 되었다. 그나마 그 사건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만
몰려온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까지
있어서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잔뜩 지친 그녀가 창문을
닫으려는데, 소란스러운 가운데 어떤 걸쭉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봐, 잘 감시하게! 이 집에 수상한 여자가 있는지."
"틀림없이 없는 것 같소. 사촌 여동생 하나만 있다고
그랬다는데, 정말로 이 집에는 그 치안대장만 살고있는 것
같더군. 그 여동생은 집안에서 꼼짝도 안하고 있던데?"
"아, 그럼 집안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아닌가! 그 여자를 부를 때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부를 거
아닌가! 혹시 `신녀님' 이라던가 의심나는 단어를 들은
기억은 없나?"
`이런......!'
화정은 입술을 깨물면서 더 귀기울여 들어보려 했지만
웅성거림에 밀려서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대충 짐작이
갔다. 공손찬은 첩자를 풀어서 조운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조운이 화정의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다해도
곤란했을 것이다.
이미 공손찬은 유하라는 인물로 화정을 유비에게 소개받은
적이 있으며 화정의 얼굴을 익혔던 적이 있다. 만약 화정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남장으로도 속일 수 없다.
이미 공손찬은 그녀의 얼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손찬의 친우인 유비의 측근으로 알려진 화정이,
조운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이 공손찬의 귀에 들어가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뻔하다. 조운이 공손찬에게 좌천
정도가 아니라 된서리를 맞을 것은 물론, 유비까지 입장이
난처해진다.
기껏 공손찬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가지고 있던 유비의
신세마저 비빌 언덕이 없는 소가 되어버린다. 화정은 속으로
조운이 말수가 적고 자신을 잘 찾지 않는 사람임에 감사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아직도 첩자가 주변의 인파에 섞여 이곳을 감시하고
있다......
`조운에게 살짝 알려줘야겠는데......으음, 아무래도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말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테지만 지금
이렇게......움짝달싹 못하는 상황이니 집을 지키고는
있어야......어라, 잠깐!'
화정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간 것이다. 화정은 검지와 엄지로 딱, 하는 통쾌한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자, 그럼 나가볼까."
화정은 흐뭇한 심정으로 머리를 대충 틀어올리고 두건으로
싸매고 남자 옷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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