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협력관계
예상한 것에서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역시, 공손찬은
조운을 `치안대장의 신분으로 산적 두목과 감히 내통을
하다니!'라고 몰아붙이고는 단박에 근방의 작은 곳으로
좌천시켰다. 요서와 가까운 작은 마을이었다. 짐은 몇몇
인부들에게 맡겨서 나르도록 하고 조운과 따로 말을 타고
떠났다.
남장을 하면 아무래도 더 의심을 받을 것 같아서 그냥
평범한 여자의 행색으로 따르게 되었다. 주변에서 향긋한
풀내음과 시끄럽게 지저귀는 산새들의 소리가 한낮의 햇빛과
어우러졌지만 경치를 감상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일지 않았다.
일부러 코를 킁킁거리면서 진동하고 있는 풀냄새와 꽃향기를
맡으려고 했지만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여느때 같았으면
정말로 오랜만에 맡는 그 자연의 냄새와 풍경, 소음에 눈과
귀와 코가 흠뻑 취했을 테지만 최근의 복잡한 일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딴청을 피우려 해도 소용이 없자 화정은, 도중에 절대
아무 말 하지않고 묵묵히 따라만 가야겠다는 애초의 결심을
깨야했다. 죄책감 때문에 조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미안해요. 내가.....그때 그런 사건만 안
일으켰어도......"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심정으로 슬쩍 말하는 화정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조운은 딱딱하게 답했다.
"그럴 것도 없어. 신녀사건이 아니었어도 분명 이렇게
되었을 테니까. 다만 좀 빨리 일어났을 뿐이야."
차갑게는 보이지만, 그 모습에는, 어딘가 측은한 점이
묻어났다. 화정은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옳기는 하다. 꼭 그 사건이 아니었어도
공손찬은 언제고 트집을 잡아 조운을 좌천시킬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옹졸한 공손찬에 대해서 다시한번
실망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화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박대할 거면, 차라리 수하가 되어달라고
권하지를 말지......그 당시에는 무예가 절륜하다고 왕
대접하듯 모시다가 쓸모가 없어지자마자 헌신짝
내버리듯......그것도 다른 이유도 아니고 왠지 정이
안간다는 이유로......'
물론 공손찬이 자신의 입으로 떠든 소리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에 보면 공손찬이 조운에
대해서는, 이유는 모르지만, 정을 붙이지 못했고, 그래서
변방에서 소수의 군사를 데리고 처박혀있도록 했다는 구절이
있었던 것도 같다.
`......공손찬은......그다지 많이 묘사가 된 것도
아니고......유비님의 어릴 적 동문수행이라는 것......
그리고 명문출신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북방의
패자가 될 정도의 기량을 쌓았으며 결국 오만해져서
원소에게.......
그래, 이 정도야. 책을 읽을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다 주인공이던 유비님의 우호세력이어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이쯤되면 정말
싫어지는걸......'
화정은 말머리를 멍하니 쓰다듬으면서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정의 심정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현량이 화정의 어깨에서 자그마한 소리를 내며 날개를 폈다
접었다. 화정은 그런 현량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앞서서
가고있는 조운의 뒷모습에 눈길을 돌렸다. 전혀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말을 타고 있는 조운이, 그렇게 얄밉던 조운이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아, 잠깐! 이딴 걱정을 할 때가 아냐, 좌천.......
좌천이라면.......?'
동시에 실망이란 감정이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나마,
치안대장이라는 괜찮은 자리에 있었을 때도 참으로
부유하던(?) 조운이, 변방으로 좌천되어서는 어떤 사정이
될 지는 더욱 알만한 것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머리에서 뜨거운 열이 솟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그렇다면 혹시......이제부터는 풀죽만 먹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난 소가 아니란 말야! 에휴,
게다가......내가 첩자들을 그렇게 꼬여서 집을 보게
시켜먹은 사실을 공손찬이 모를 리 없어. 이제 그 사실까지
알았으니까 공손찬의 첩자들이 배로 우글거리게
생겼네.......행동에 제약까지 심해질거야.......'
화정은 홧김에 말고삐를 확 잡아당겼다. 순간 흥분한 말이
울부짖으면서 몸을 흔들었다.
"......아!"
당황한 화정은 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바로 앞에는 바위가 우뚝,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버티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젠장!"
조운이 화가 난다는 표정으로 말을 바람과 같이 몰고오는
것이 보였다. 화정은 미안하다거나, 또 무시당하겠네, 하는
심정도 일지 못한 채 다급한 심정으로 조운을 바라보았다.
조운이 팔을 뻗어 화정을 가볍게 안아올려 자신의 말에 태우는
순간,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가 화정의 말을 붙들었다.
"워, 워........"
능숙하게 말을 진정시킨 그 사람은 화정과 조운이 쳐다보는
것을 알았는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여, 조운! 다시 찾아왔는데 반갑지 않은 모양이지?"
"영각!"
당황한 나머지 화정은 그의 이름을 세차게 외치고 말았다.
영각은 화정을 또다시 훑어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여! 예쁜 아가씨! 그림 좋은데!"
그 말에 의아해서 고개를 돌렸던 화정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조운의 말에 함께 타고 있었는데 급하게
붙드느라 그랬는지 조운의 한 손이 화정의 허리를 껴안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는 듯이
보였을 지도 모른다.
"영각, 무슨 생각으로 예까지 왔는가."
......하기는, 조운의 이 표정은 절대로 `다정' 하고는
거리가 멀다. 저런 무뚝뚝한 표정으로 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여하튼 불쾌했다. 화정이 불만스럽게
쳐다보자 조운은 손을 놓고는 말에서 내렸다. 이전과는 달리
평상복 차림의 영각이 천천히 다가왔다.
"역시, 자네가 그런 취미가 있었을 리는 없지! 어쩐지,
그때 적잖이 충격 받았었네. 너무 예쁘게 생겼다고는
생각했지만 남장을 하고 있어서.......하하하, 역시
예쁜 여자분이었구만!"
영각의 말에 화정은 말 그대로 귀밑까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야, 그럼.......! 내가 남자인 줄 알고 조운이
미동(美童)을 좋아하는 취미라도 생겼다고 생각했던
거야? 에이, 설.......'
"난 그것도 모르고 자네가 미동을 선호하는 취향이라도
생긴 줄 알고 기절할 뻔했지, 뭔가, 하하하......!"
`윽, 뭐 이렇게 하는 짓마다 미운 사람이 또 있대?
친구들끼리는 원래 닮나?'
이맛살이 찌푸러졌다. 영각은 그런 화정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포권을 해 보였다.
"예쁜 아가씨, 난 영각(營覺)이라 하오. 자(字)로는
황호(況浩)를 쓰지. 저기 있는 조운이라는 놈의 친구라오.
헤에, 이런 이 아가씨보게......난 방금 전에 아가씨
구해주려고 몸까지 날렸는데 그렇게 화가 난 표정으로 볼
것은 없다구. 아가씨는 대단한 미인이기는 한데 표정이
빈곤한 것이 흠이구먼.......웃으면 예쁠 텐데, 한번
웃어보지 그래?"
기가 막힌 나머지 코웃음이 나왔다. 조운이 영각에게로
나섰다.
"황호, 무엇 때문에 온 건가? 기껏 도망 보낸 의미가
없어지지 않나!"
지금 제정신이냐, 하는 식의 말투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화정도 조운의 심정에 찬성이었다. 꽤나 친한 친구 사이인
것 같았는데, 산적소탕사건 때 조운이 일부러 영각을
놓아주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이라면 영각은 제발로 무덤을
찾아온 입장이 된다.
"어이, 자룡! 자넨 너무 생각이 부정적인 경향이 있어.
자네와 저 아가씨만 눈감고 있으면 내가 산적대장인지
아무도 모른다구! 그건 그렇고......이제부터 자네 신세
좀 져야겠어."
저 영각이라는 사람, 정말 태평한 기질이 있는 듯하다.
화정은 한심하게 영각을 보다가 문득, 흠칫했다. 생각해보니,
저 사람은 남장을 했던 자신을, 지금 여장을 하고 있는 것과
혼동하고 있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 시대에는 남장이
별로 없는 관계로, 화정을 언뜻 `아하, 그때 그 서생(또는
청년)이군요.'하고 알아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영각은 현재의 화정과 그때의 화정을 질문이나 의문
하나 없이 단번에 알아보았다. 현재 그녀는 주변에서 조운에게
사촌 여동생이 함께 있다는 소리가 널리 퍼져있는 이유로,
머리를 풀어내리고 평범한 여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두말할
나위없이 이전에 마초가 사주었던 옷과는 비교도 안되게
초라한 옷이다. 어쨌든 저 영각이란 사람은 눈썰미가 좀
있는 사람 같았다.
"이것 참! 자네, 저렇게 예쁜 아가씨도 데리고 살면서
그렇게 딱딱하게 굴 텐가? 든든한 친구가 같이 살아주겠다는데,
반가워는 못할망정 이런 표정 지을래? 그건 그렇고 자네......"
혼자서 멋대로 잘도 떠든다. 영각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조운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화정을 힐끗 보았다.
"저 이쁜이는 누구야? 주변 사람들은 사촌 여동생이 있다고
알던데......자네에게 사촌 여동생이 없다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지. 자, 제대로 불어보란 말이야. 누구야? 드디어 자네
안사람을 찾았나? 이것 참, 축하할 일인데? 자네같이 연애에는
무관한 놈이 어떻게 저런 천하절색을......."
"은인의 딸일세. 안사람 같은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없어."
조운은 영각의 신나는 멋대로추리를 무참하게 잘라말했다.
`안사람 같은 것, 이라니......하여튼 말하는 꼴도......!'
장래 부인이 생기면 그때 부인에게 일러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여하튼 지금은 그런 말투
따위에 세세히 신경쓸 때가 아니다. 자신이 그 `안사람 같은
것'으로 영각에게 비춰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그래요. 자룡과 저는 혼인한 사이는 아닙니다."
아아, 차라리 나더러 목석과 같이 살라고 그래라......저런
재미없고 남 열받게 만드는데 이가견있는 딱딱박사와 평생을
사느니 수녀원......아, 이 시대로 말하자면 절간에 들어가서
염불 외우겠다.......이런 심정으로 화정은 차갑게 말했다.
영각은 조운과 화정을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그래.......? 으음, 이거 소문거리인걸.......혼인한 것도
아니면서 조운이 여자와 한집에서 살다니.......? 아, 좋아,
좋아! 그럼 더 좋은데? 이봐, 아가씨!"
영각은 피식 웃으면서 화정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화정은 불쾌한 기분에 얼굴을 찡그리면서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영각은 키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어서, 화정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그래서 화정은 수고없이 - 조운이나 장비, 특히
관우는 키가 정말 커서 늘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야 했었다 - 영각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영각은
그런 화정을 보면서 또 능청을 떤다.
"아, 이거 아쉽다, 정말! 이봐, 이쁜이! 조운한테는 안겨서도
가만히 있었으면서 나한테는 이러기야?! 쳇, 내가 있으면 남녀
단둘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 나보고 고맙다는 표시로
맛난 거나 잔뜩 해달라고 하려고 했을 뿐인데. 저 삭막한 놈보다
나같이 늘푼수 있는 사람이 좋지 않아?"
아, 이쯤되면 정말 `왕자병' 이라고 밖에 말이 안나온다.
착각도 가지가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화정은 초면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되도록 품위를 지켜서 대꾸해주었다.
"조운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란 것은 찬성하지만,
초면부터 다짜고짜로 무례하게 나오는 당신도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에요. 좀 조심하시는 것이 어때요?"
화정이 대꾸하자 영각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에 놀랐는지, 화정의 어깨에 앉아있던 현량이
몸을 푸르르 떨었다. 영각은 현량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호오......영수(靈獸)까지 데리고 다니다니, 이쁜이는
생각보다 특이한 구석이 있군, 그래? 얼굴만 예쁜게 아니라
특이한 능력이라도 있나?"
"내가 영수를 데리고 다니던 말던, 초면에 보는 사람에게
그런 식의 호칭을 쓰는 것은 실례로 보이는군요."
화정이 또다시 말을 차갑게 자르자 영각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피식 웃었다. 영각은 조운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면서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대뜸 조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툭툭 치는 것이었다.
"축하하네, 조자룡! 역시, 난 자네가 보통 놈이 아닌 줄
알았지! 저 아가씨, 어느 대가(大家)댁 규수인가? 저거
말투나 자태가 보통이 아닌걸? 만날 관심 없는 척하더니
저런 재색겸비(才色兼備)의 배필감을 꼬셔오다니, 이젠 내가
자네에게 한수 배워야겠는걸?"
조운의 표정은 그야말로 `어이없음' 그 자체랄까.
"......이보게, 황호."
"아아, 그렇게 뺄 것 없어. 뭐, 자네도 안 그런 척하지만
사실 좋은 집안 도련님 아니던가. 저 정도 아가씨여도 부담
가질 것은 없어. 출세해서 행복하게 해 주면 되는거라고.
내가 잘 도와주......."
"이만 떠나지."
조운은 역시 대단하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 영각의
말을 단 한마디로 꺾다니. 조운의 말에 영각도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조운은 얌전해진 화정의
말에 올라탔다. 화정도 조운의 뜻을 알고는 말을 천천히 몰았다.
좀 불편했다. 본래 말을 편하게 타려면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양다리를 벌리고 타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치마를 입고 있는 관계로......얌전하게, `아가씨 포즈' 로
말을 타고 있는 상태다.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편한 것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있느냐만, 치마를 입고 말을 그렇게 탈 정도로 화정은
체면을 모르는 편은 아니다.
도리어 재벌집 따님으로서 어린 나이 때부터 언론에 자주
등장했으며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고 살았으니, 남보다 배로
체면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여하튼 화정이 속으로
`불편해.......' 라고 투덜거면서도 말을 천천히 몰아가는데,
뒤에서 영각의 활기찬 음성이 들려온 순간, 조운과 화정은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런데 난, 뭘 타고 가야하나?"
*******
"......그래서......?"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죠? 만날 이렇게 빈둥거리면서 밥만
축낼 수는 없잖아요! 황호, 아무리 자룡의 절친한 친구라지만
염치가 눈꼽만큼도 없네요?! 나가서 무슨 일이라도 해서 좀
도움이 되어주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영각은 태평한 자세로 돌아누우며 하품만 늘어지게 해대는
것이었다. 화정이 들고있던 책을 퍽,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에
던지자 그제야 들은 기척을 했다.
"무슨 자룡 마누라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그래? 난
돈벌어오는 재주는 없다니까."
"하여튼 말하는 꼴하고는! 그 건장한 몸 뒀다가 무엇하려는
거여요!"
"으이그, 참!"
영각은 투덜거리면서 침상에서 일어났다. 화정은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영각을 노려보았다. 영각은 또
하품을 늘어지게 해대면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겉옷을 집었다.
"야, 화정! 그렇게 돈이 필요하면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구!"
화정은 콧방귀를 뀌면서 돌아섰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영각이 하는 소리 중에서 진지한 것이 몇 개나 있는가.
아니나다를까.......
"그냥, 콱 근처의 기루에 가서 술 몇 잔 따르고 시중 들다
오라니깐! 너 정도면 금방 부자된다니까!"
함께 자란 친구면서 어쩌면 저렇게 성격이 틀린 걸까.
공통점이라고는 `하는 일마다 미운' 것뿐이다. 적어도
조운은 부지런한 성격이지 영각처럼 한량은 아니다. 화정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몇 마디
던졌다.
"아무튼, 얼른 나와요. 아침은 들고 가야 할 것 아니에요."
뒤에서 영각이 기겁한다.
"뭐? 됐어! 네 음식을 먹느니 독약을 먹는 것이 낫지!
오늘은 폭발 안 일으켰........"
"그럼 먹지 말든지요!"
화정은 신경질적으로 외치면서 문을 부서지도록 세게 닫았다.
그녀는 화가 난 심정으로 바로 앞에 놓인 그릇을 쳐다보았다.
낡은 그릇에는 희멀건 국물에 쌀알이 몇 개 떠 있다. 무릇
음식이라면 뭔가 냄새를 풍겨야 할 테지만 지금 화정의 코에
맡아지는 것은 밋밋한 물냄새뿐이었다.
"소설속 주인공도 아니고! 정말, 이런 생활을 할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어!"
절로 불평이 튀어나온다. 한숨을 내쉬다가 그릇을 거두려는데,
문이 끼익, 하고 소리를 내면서 열린다. 뒤에서 영각이
여유있는 걸음걸이로 나왔다. 화정의 어깨 너머로 그녀가
거두려던 그릇을 힐끔 보더니 또 눈치없는 소리를 한다.
"또 이거야? 참나......!"
화가난 화정은 대꾸도 않은 채 그릇을 치웠다. 영각이
뒤에서 머뭇대다가 염치없게도 당당하게 묻는 것이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굶길 생각이야?
좀 뭐라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알아서 찾아 먹어요. 정 없거든 나가서
동냥이라도 하든지요."
"에, 정말 너무한데! 야, 그런 잔인한 말을 그렇게 조용하고
침착하게 말하면 더 무서워지잖아?"
영각의 능청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아니, 저건 능청이
아니라 태평이다. 능청은 어느 정도 상황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고, 태평은 상황도 아예
못 깨닫고 모르는 소리를 한다는 차이가 있으니까.
아무리 보아도 능청이 아니라 `영각의 선천성 태평' 으로
해석된다. 화정은 찬장을 거칠게 닫았다. 그제야 영각은 화정이
여느 때처럼 지나가는 식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는 모양이다. 무안한지 또 써먹은 변명을 한다.
"나도 좋아서 빌붙는 것은 아니라고! 그때 내가 화정의 말을
달래려고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지겹다. 이쯤되면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건 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내가 당신 목숨
구해주었으니 은혜 갚으라면서 대신 말을 내놓으라고 해서
말을 빼앗아 가려던 참에 상대가 조운이었으니까 그렇게 된
거겠죠! 영각을 잘 아는 사람이면, 그 말에 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만해요! 여하튼, 지금 사정이 안 보여요?
친구라면서 도울 생각은 않고 이렇게 내내 폐만 끼치고
싶은가요?"
"......근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나, 나나 녀석의
더부살이신세니까 똑같은 처지에 구박은 하지말......"
화정은 그만 자신이 쥐고있던 그릇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영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하고 있잖아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가 다시 삼켜졌다. 그녀가 꼼짝않고 장시간 자신을
쏘아보자, 영각은 그제야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화정은 그런 영각을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발길을 휙 돌렸다.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 바깥으로 나서는데,
뻔뻔스런 - 보통 이 정도 분위기면 미안해서라도 저렇게
끝까지 참견할 수 없을 거라고 화정은 생각했다 - 영각이
고개를 불쑥 내밀고 묻는다.
"뭐 하려고 그래? 너, 네가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집이나 잘 보고 있어요!"
저런 인간을 믿느니 내가 뭔가 해 오는 것이 낫겠다, 하는
심정으로 화정은 쏘아붙였다. 정말 신뢰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생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회만 되면 어떻게 장난칠까,
어떻게 능청을 떨어볼까, 어떻게 태평끼를 보여줄까, 하는
궁리만 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벌써 몇 주 가까이 풀죽만 먹자 견딜 수가 없었다.
늘 먹고 싶은 것이나 입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그녀였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생활고(生活苦)란 것을 단어로만 들었지 직접
겪어본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몇 주동안 풀죽만
먹고 지내면, 화정같이 부잣집 외동딸이 아닌 보통 사람이라도
견디기 싫었을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익숙해서 늘상 이렇게, 잘 지낼 지도
모르지만, 다양한 음식이 지천에 널린 이천 년대 사람이
아무런 이상함을 못 느낄 리는 없다.
*******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걸이로 걸으면서 화정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벌써 깜깜한 밤이었다. 발걸음에 힘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녔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여자이다보니 하는 일에 제약을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었다.
점포에 가서 판매를 도울 수도, 건설하는 곳에 가서 돌을
나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여자로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음식점이나 여관에 가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
정도인데, 음식점에서 일을 하자니 요리 실력도 없었고
여관에서 일을 하자니 빨래나 청소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영각이 농담삼아 말한 대로 기루(妓樓)로
가는 것이겠지만......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부잣집 외동딸로서 소위 이야기하는 윤리와 교양을
귀에 못 박히게 들어온 화정으로서는 용서가 안되는 일이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잠시 댓돌
위에 걸터앉아 부르튼 다리를 주물렀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자니 자본금도 없는데......한심해져서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직감적으로, 좋은 일은 아니란 것을 알아챈 화정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몇 명의 남자들이 화정을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화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는데 역시 곱게 보내줄 리가
없었다.
"이봐, 아가씨! 너무 빼지 말라구. 잠깐 얘기 좀 하지?"
`어떻게 하지? 아, 저 녀석들 소지물을 빼앗으면 어떨까?'
별로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조운이 좌천된 그 사건
이후로, 화정은 주술과 무술을 그나마 좀 연마해서 소위
말하는 잡배들 정도는 쉽게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 무기가
없기는 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태권도나 합기도에도 능숙한 그녀였기에 맨손이 오히려
편할 때도 있었다. 결정을 내리고 몸을 돌린 화정은 옷
속에서 목걸이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아, 그렇지!'
사실 지금의 이 빈곤한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무뢰배들을 때려눕힌
후에 협박해서 주머니나 털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화정의 옷 속에서 덜그럭거린 목걸이가 그녀에게 다른 의견을
부여했던 것이다.
`맞아! 지금 이 무뢰배들을 털어봤자 별 돈도 안돼.
조운을 원래의 자리로 복귀시켜서 녹(祿)*이 늘어나게 해야해!
적어도 치안대장일 때는 녹도 꽤 있었고 이웃들이 뭔가를
많이 줬었단 말이야.'
결정을 내리고 무뢰배들을 노려보았다.
"아휴, 이런......내 평생 이런 미인은
처음보는구먼.......이거, 원래는 인질로만 사용하려 했더니
이런 미인이면 마음이 약해지잖아?"
`인질?'
단순한 불량배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 중
한 녀석이 화정의 팔을 붙잡았다. 그들은 역시 치밀하지 못한
자들인지라 제 입으로 화정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봐, 너! 너랑 친한 조조 자루란 놈 때문에 우리가 씨가
말랐단 말이지! 게다가 녀석이 어디서 영험한 주술사를
데려왔는지, 신녀가 나타나서 우리 일을 망쳐놨단 말이야!
그러니 너를 잡아다가 놈을 끌어들여서 복수나 해야겠어!
다치기 싫으면 따라와!"
`나 같았으면 아무 말 없이 그냥 잡아갔겠다.'
한심한 심정으로 화정은 산적의 팔을 뿌리쳤다. 아마
신녀사건 때 도망갔던 산적들의 일부인 모양이었다. 화정은
목에 힘을 주었다.
"흐음, 왜요? 조운한테 볼 일이 있었군요? 그보다도 사실은,
털려는 거 아니에요? 나 돈 없거든요."
불량배 중 하나가 이죽거린다.
"웃기지마. 치안대장 정도 해먹은 놈이 기둥서방인데
아무것도 없을 리가 있어? 좋은 말 할 때 따라와."
`기둥서방......! 참나......!'
이 정도로 괘씸한 소리를 내뱉는다면, 그렇잖아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에, 곱게 넘어가줄 수가 없다. 두고보자,
화정은 속으로 그들을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해주었다.
"정말인데......그렇다면 절 따라올래요? 돈은 없지만......
무경미석이라는 보석은 있거든요."
역시, 효과가 있었다. 산적떼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드는
것을 보면서 화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가엾기는......그냥
이대로 자신을 데리고 갔다면 최소의 목표달성은 했을 텐데
말이다. 산적들이 웅성거리더니 한 녀석이 화정을 돌아본다.
"이봐! 너 장난치면 죽어!"
"장난이라니요......기다려보고 거짓말이면 그때 어떻게
하셔도 되잖아요! 댁들이라면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몸에
지니고 다니겠어요?"
현대식 유도사기라는 거다, 이 바보들아.......뭐 이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보기 드물게 순진한 녀석들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조금의 의심이라도 할 텐데 저렇게 의심
없이 말을 재까닥, 하고 믿는 것을 보면......화정의 가시돋친
대꾸에 산적은 뒤를 돌아보았고 다른 녀석들도 찬성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하기는 비슷한 지능들끼리 모여있으니 별다른
결론은 없었을 것이다. 한 놈이 화정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자, 어서 가! 허튼 짓 하면 바로 뒤에서 너의 예쁜
머리통이 깨지게 될지 몰라!"
조금 있으면 입장이 바뀔걸,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앞장섰다.
천천히, 걷던 화정은 도적들의 본 속셈이나 알아볼 양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나으리들은 무엇 때문에 절 찾으셨지요?"
"말했잖아! 네 기둥서방인 조은이란 놈이 우리 무리를
싹쓸어 버린 덕에 이렇게 길거리업자가 되었다고! 그 놈을
찾아다 복수할테다!"
`자꾸 기둥서방, 기둥서방......하는데.......내가 무슨
기생이라도 된단 말야? 어디, 두고보자!'
콧방귀가 절로 나왔지만 애써 눌러참았다. 그리고, 역시
이 도적들은 머리가 나쁘다는 결론을 내렸다. 놈들이 조운을
찾아봤자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다. 화정에게도 어렵지는
않은 정도의 수준으로, 조운을 찾겠다는 것은 제발로 호랑이
소굴로 들어간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하긴, 그런 것을 따질
줄 알았다면 도적이 아닐 테지.......
`일단 이 녀석들을 조운에게 넘겨서......그럼 조운이
공손찬에게 넘길 테니까 공적이 좀 생기는 셈이되고......
그런 식으로 하면 언젠가는 다시 북평으로 갈 수도 있겠지.'
계산을 확인해보고 있는데, 뒤에서 도적놈이 그새를
못견디고 투덜거렸다.
"뭐야, 이거?! 언제 나타나는거야?!"
`그렇잖아도 다 왔다!'
화정은 속으로 대꾸하면서 몸을 돌렸다. 아, 정말
마주보기도 싫지만 하는 수 없다.
".......이 안에, 무경미석이 있습니다."
"크하하하! 그렇단 말이지?! 어서, 어서 가져와!"
산적의 눈이 단번에 커지면서 빛났다. 입에서는 군침까지
신나게 흘리는데, 속이 메스꺼워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다. 화정 같았으면 무경미석 정도의
국보급 보물이 있다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게다가,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자신처럼 무명에 별것 없어
보이는 - 스스로의 생각일 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화정의 외모를 보았을 때 그녀가 별것 없어보이는
사람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 여자가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십중팔구는 사기라고 느껴야 정상이다.
그녀가 무경미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순진한 도적들이라니, 속이는 재미가 없잖아.......는
아니고 나름대로 재미있는걸? 사기꾼들이 이런 재미로 사기를
치나? 이런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화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안에서는 이미 돌아온 조운과, 영각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성질급한 영각의 일갈이 먼저 날아온다.
"이봐, 이쁜이! 너 어디갔다가......어라?"
설마 이런 사람들을 보고 `네 친구들이냐?'식의 질문을 할 리는
없........
"너 친구도 생겼냐? 어이, 게다가 든든해 보이는 남자들뿐인데,
그것 참! 그렇게 얼굴값을 하면 곤란......."
아, 정말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다. 생각같아선 빨리 처리하고
싶지만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불량배의 저 무식한 망치 덕에
맞장구 칠 수밖에 없는 구슬픈 신세다.
"네, 영각! 제 친구분들이에요! 지닌 물건을 드리려고 잠시
모셔왔거든요."
화정은 능청을 떨었다. 그 바람에 조금 안심을 했는지 산적이
화정의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던 망치 -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무식하게 생긴 무기다 - 를 내렸다. 순간 그것을 느낀
화정은 재빠르게 뒤차기를 하여 몸을 날리면서 외쳤다.
"자룡! 잡아요! 그때 그 산적의 남은 잔당들이에요!"
영각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지만, 조운은 역시 빨랐다. 어느
순간인지도 모르게 벌써 다가온 조운은 맨손으로 순식간에
산적들의 급소를 강타해 세 놈을 쓰러뜨리고는 나머지 두
놈은 곁에 세워두었던 봉으로 후려쳐 기절시켰다.
너무나 순식간에 쓰러지는 바람에, 본래 의도하고 있었던
화정조차도 어리벙벙할 정도였다. 영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간다더니 웬 산적들을 몰고 들어왔어?"
"천천히 말씀드리기로 하고.......조운, 어서 이들을
연행해요."
영각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쓰러진 산적들을 묶었다.
조운은 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전에......신녀사건 때 왔던 산적의 잔당들이에요.
조운에게 복수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조운이 잡게하기 위해 꾀어서 데리고 왔어요."
영각은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이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아까 보니까 이녀석들
말인데......꽤 순순히 따라오고 있었다구. 그런데 무슨
근거로 이 녀석들을 이렇게......재주도 좋게 모조리 끌고
온거야?"
"쉬웠어요. 돈은 없는데 대신에 무경미석을 집에
보관하고 있으니 받을 생각이 있으면 따라오라고 했죠.
그랬더니 순순히 따라오던데요."
"......바보냐? 누가 그런 보물을 함부로 지니고 있다고
따라온다는 거야?"
"바보 맞죠, 결과적으로 순순히 따라왔으니까요."
화정은 영각의 말에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조운을
향해 외쳤다.
"뭐해요? 얼른 연행하고 와요! 손수 공손찬에게 데리고 가요!"
영각은 자신을 깨끗하게 무시하는 화정의 태도에 허리에
손을 짚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화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도적들을 끌면서 조운이 화정을
돌아보았다.
"고맙군. 하지만 무슨 생각이지?"
화정은 그런 조운을 향해 콧방귀를 뀌어보인다.
"쳇, 누군 좋아서 이렇게 하는 건 줄 알아요? 얼른 북평으로
돌아가서 녹이나 늘려 받으라는 뜻에서 돕는 거여요! 그 이외엔
없다고요! 그럼 난 이만 들어가서 잘래요!"
다소 뾰루퉁하게 돌아서며 문을 열고 들어가는 화정의 뒤에서,
조운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린 것을 본 영각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봤나.......?"
영각의 중얼거림에, 조운이 또다시 표정을 굳히면서 그를
응시했다.
"......뭔가, 영각?"
조운의 반문에 영각은 짧게 얼버무렸다.
"아닐세. 어쨌거나......얄밉긴 해도 머리 하난 쓸만한데,
저 아이.......?"
".......확실히......"
묵묵히 대꾸하면서 도적들을 붙드는 조운을 향해, 영각의
또다른 싱거움이 엄습한다.
"아, 한 개 더 있지. 얼굴도 쓸만하고 말이야. 너무 대가
센 것이 흠이랄까."
조운은 말없이 도적들을 재촉하여 끌고 나갔다. 영각은
조운이 나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보고 섰다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저 아이는 정말 놀랄 만큼 소연과 닮았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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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녹(祿): 녹봉祿俸의 줄임. 전근대사회에서 국가가 관리에게
봉급(俸給)으로 준 쌀·보리·명주·베·돈 따위를 이르는
말*두산세계대백과
정말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모양이다. 그렇게
며칠동안 설득도 해 보고 윽박지르기도 해보는 등 가지가지로
해 봤지만 꿈쩍도 안한다. 화정은 잔뜩 신경질을 내면서 발길로
바로 앞의 돌을 걷어찼다.
"이천 년대 사람이었으면 영각은 분명 실업자야! 뭐 저렇게
뺀질거리는 사람이 다 있어?!"
무의식중에 찬 돌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굴러갔다. 데구르르,
아무런 힘없이 구르는 돌을 보면서 화정이 고개를 드는데, 바로
앞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대문이 열렸다.
"저리 나가! 원, 재수가 없으려니 별게 다 들어오네!"
매몰찬 소리와 함께 한 어린 아이가 발길에 차이면서 대문
밖으로 내던져 지는 것이 아닌가. 화정은 호기심과 동정심이
일어 그 쪽으로 다가갔다. 커다랗고 좋은 집이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이런 벽촌에서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문간으로 다가가자 하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꽤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고 방금 전에 걷어차인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화정이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는데 아이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더니 하인의
바짓가랑이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매달린다.
"어르신! 제발......부탁합니다! 도와주세요......예? 벌써
며칠을 굶었어요! 전 괜찮지만 제 어머니랑 누나가......"
"시끄러!"
남자는 아이를 발길로 거세게 걷어찼다. 걸을 힘도 없을 만큼
바짝 마른 아이의 몸은 힘없이 땅바닥에 떨구어졌다. 아이는
팔을 들어 다시한번 사정하려했다. 순간 남자는 곁에 있던
커다란 돌을 아이에게 집어던졌다.
"꺼져! 이 이상 매달리면 목숨도 없다!"
저런 돌을 맞으면 저 아이는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발 부탁해요! 제발.......아빠, 엄마가 죽어요! 아빠!>
화정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을
지우려고 하면서 앞을 막아섰다.
"아......!"
그 바람에 아이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가던 돌이 화정의
종아리를 스쳤다. 스치기만 했는데도 얼얼했다. 속으로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화정은 쓰러지지 않고 버티어 섰다. 남자는
돌아서려던 찰나에,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자 몸을 휙
돌렸다.
화정은 아픈 심정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처음에는 아이가 가엾어서 그랬지만 이렇게 자신도 상처를 입자
저 남자가 더욱 미워지는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면서 노려보는
뜻밖의 여자를 보면서, 남자도 당황한 모양이다.
"......이건 또......뭐야?"
"주기 싫으면 그냥 얌전히 보내지 왜 저런 돌을 던지는거죠?
그리고, 이렇게 잘 살면서 밥 한 공기도 못 주나요?!"
똑 부러지는 그녀의 말에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섰다가,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면서 오만하게 화정을 노려보았다.
"이봐, 너 여기가 어딘지 알고 하는 소리야? 이 댁 대감이
누구신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요."
화정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졌다. 그러더니
이때껏 부린 오만은 어디로 갔는지 씩씩거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왜 저렇게 분해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던 화정은 금방 해답을 찾아냈다. 그녀는 멸시하는
어조를 써주기로 했다.
"호가호위도 모르시는군요? 무슨 뜻인지 알려 드린다면 이
아이에게 당신 몫의 식사를 주시는 것이 어떠세요? 싫으면
관두시죠."
화정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아이를 일으켜주었다.
아이는 맑기도 한 눈망울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화정은
등뒤로 시선을 느끼면서도 태평하게 아이에게 말을 했다.
"이만 가봐라. 저런 사람이 네게 음식을 줄거라
생각했다니, 넌 역시 어리구나."
꼬마는 화정을 뚫어지게 보다가 머뭇거리면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쑥스러운지 아니면 등뒤의 남자가 무서웠는지,
아무튼 개미만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달려갔다.
"......고마워요, 예쁜 누나......안 잊을께요......"
참으로 순진하고 꾸밈이 없어보인다. 바싹 말랐지만 전혀
흉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달려가고 있는 꼬마의 뒤통수를 보면서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돌아보는데 땅이 울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뚱뚱한 남자가, 화려한 비단과 온갖 장신구를 몸에
걸치고는 몇 명의 여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주변의 여자들도
요란하게 치장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화려한 것도, 좀
격조있고 예쁘게 꾸미면 어디가 덧나나,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도
화정은 그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제법 위엄이 있는 척, 걸쭉하고 굵은 목소리로 남자가 묻는다.
아이를 두들겨 내쫓았던 하인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연신
굽신거렸다.
"아, 아닙니다, 주인님. 조금 전에 웬 거지같은 녀석이 와서
감히 동냥을 하지 뭡니까! 그래서 소인이 그저......타일러서
내쫓고 있었는데 저 계집애가 와서 막는 바람에......"
타일러서 내쫓아? 기가 막힌 화정이 고개를 치켜들고는
팔짱을 끼는데, 그 주인인듯한 남자는 제법 폼나게 하인에게
호통했다.
"그런 것은 알아서 해야 할 것 아니냐! 소란을 떨어서
내실까지 들리게 하다니! 여봐라!"
주인의 추상같은 명령에 몇 명의 하인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이놈을 끌고가서 매질해라!"
`저건 더 명물이군. 기껏 자신 때문에 소란을 벌이고 있던
하인을 끌고가서 매질하라니......'
화정이 그 광경을 보면서 혀를 차는데 주인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 건방지다는 계집은......응?"
정면을 보니 정말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저팔계같이
생겼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얼굴까지 기름이 번들거리고
있는데다 불뚝 튀어나온 배는 땅에 떨어질 것 같았다. 저렇게
목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봐, 이봐! 저 계집애.......이리 좀 다가오라고 해라!"
저팔계 - 라고 부르기로 했다 - 의 말에 화정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란,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 인상과
분위기란 것이 있다. 꼭 장동간이나 원반같이 잘생겼다고 해서
친해지고 싶으며 느낌이 좋은 것은 아니며, 꼭 못생겼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싫어지는 것이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지금의 이 남자는 인물도 저팔계같이 생긴데다 느낌도
음흉하고 탐욕스럽다. 곁에 다가가기도 싫었다. 그러나 하인
하나가 화정에게로 다가왔다. 화정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자신의
팔을 붙드는 하인을 뿌리쳤다. 그녀는 미간에 힘을 주면서
또렷하게 말했다.
"가까이서 보기를 바란다면 손수 다가오시오!"
긍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잃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
아무리 약자이든, 아무리 난관에 처했든 잃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용기인지,
희망인지는 사람에 따라 틀리겠지만 화정은, 그것을 긍지와
우아함이라고 지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가 거절해도 저 남자의 가까이에서 얼굴을 대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이전에는 대통령조차 눈치를 보는
재벌총수의 외동딸이었지만 여기서는 힘없는 여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힘없이, 마냥 끌려가는 것은 싫었다.
"흠, 꽤 대가 센 계집이구먼. 멀리서 보니 자태가 예뻐보여
그렇다. 두려워 말라."
자신의 하인과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오만하게 굴더니
여자에게는 안 그런 모양이다. 그는 천천히, 육중한 몸을
힘들게 움직여 화정에게 다가왔다. 화정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숙였다. 저 늘어진 볼살하며 두툼하고 탐욕이 담긴 입술.
보기 싫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숙이자마자 남자는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듯했다. 그런 느낌이 왔다.
"호오.......몸매도 좋은데 너같은 계집이 왜 이런 촌구석에서
여태 내 눈에 띄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자, 고개를 들라."
이런 상황에서 순순히 고개를 들고 싶은가? 이렇게 치욕적인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나 자신의 빼어난 외모가
싫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차라리 매를 맞고 내쫓김을 당하는
것이 백 배 낫다. 화정이 고개를 들면, 그 다음에는 어느 곳으로
직행할 지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뻔한 사실이다.
화정이 고개를 오히려 더 숙이자, 남자는 재촉했다.
"어서 들라! 네가 하기에 따라 관가로 연행될 수도 있고
남부럽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차라리 연행되고 말지......하던 화정은 불현듯 머릿속에
한가지 계교가 떠올랐다. 화정은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결국은 고개를 들었다.
"오!"
"......저런!"
주변에서 감탄이 터져나왔다. 좀 떨어진 곳에서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조금 가까운 곳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의 반응은 보통 저렇다. 그들은 입을 벌린 채 넋나간 듯
그녀를 바라보면서 차마 `아름답다' 와 같은 감탄마저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넋 나간 듯 바라보고 섰을 뿐이었다.
하기는, 약간 도도한 표정으로 사람을 쏘아보는 자신의 외모가,
도발적인 맛과 함께 청초함을 깃들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화정도 알고 있다. 1년 전쯤 무명 화장품 회사 광고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모델을 단 한번 한 적이 있었는데,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그 화장품 회사는 순식간에 일류브랜드 회사로 발돋움했고,
그 회사에는 `모델이 도대체 누구냐'는 문의가 빗발쳤었다. 광고
포스터를 본 자신도 스스로, 과연 그게 자신인지 의심스러웠을
정도니까. 특히 자신의 외모가 부드러운 표정보다도 무감각한
표정이나 쏘아보는 표정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도 잘 안다.
"이런 촌구석에 저런 절색이 다 있었다니! 흠......아,
너희들은 저리로 가거라!"
남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곁에 있던 여자들을
손을 휘저어 물러가게 했다. 여자들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리고 화정을 힐끔힐끔 쏘아보면서 종종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남자는 화정에게 더 다가오려 했다. 화정은 마음을 굳게 먹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같은 무뢰배가 감히 관리 행세를 하다니! 산채로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구나!"
도발해야 한다. 화가 나서, 아깝더라도 관가로 보내버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흐흐흐......앙탈 부리는 모습이 더 예쁜데......"
하지만 이 인간에게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화정은 엄습해오는
불안을 감내하면서 목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융(融)형님께서도 너 같은 미인이 이렇게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돈이라도 보내시면서 첩으로 삼으라 하셨을
거다."
`뭐? 융......이라고?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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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서유기(西遊記):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안다. 그
유명한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모험기로
명왕조 때 오승은이 저술한 신소설이다. 삼국지연의, 수호지,
금병매와 더불어 중국 사대기서로 꼽힌다*작가주
화정의 머릿속에 어떤 이름이 떠올랐다. 혹시......공손찬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그 사융(邪融)이란 모사(謀士)가 아닐까?
화정은 얼떨결에 더듬수를 놓았다.
"사융......?"
"응? 너 우리 형님을 몰랐단 말이냐?"
그 말에 경악한 것은 화정이었다. 사융이라면 청렴하기로
이름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그 커다란 북평성에서도, 태수인
공손찬의 절대에 가까운 신뢰를 받고 있으면서도 늘 작고
초라한 집과 허름하고 몇 번이나 빨아입은 의복을 고집하여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기근이 든 동네에서 혼자 저런 짓을 하고
사는 놈이.......그 사융의 동생이라고? 머릿속으로 계산이
섰다. 유도심문이란 이럴 때 쓰라고 생긴 것이지. 화정은
태도를 조금 부드럽게 바꾸어 질문을 시작했다.
"혹시.......사융님의 친아우......?"
"난 이 지방에서 산 지 꽤 되어서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몰랐느냐? 여기 온지 얼마 안되는 모양이군. 하기는 최근에
왔으니 내가 너같은 절색을 못 찾았지."
머릿속이 음식과 여자로만 가득찬 모양이다. 화정은 속으로
혀를 끌끌찼다.
"친아우님이라면 사융 어르신의 천거로 이 지방 관리가
되신 겁니까?"
만약 조운이 화정과 친했다면 이 지방의 관리가 어떤 사람이
있는지 어느 정도는 이야기해주었을 것이다. 이자가 관리라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렇게 작은 벽촌에서 관리가 있어봤자 몇
명이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조운은 본래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다 화정과 친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 스스로
알아낼 수 밖에.
"형님 아우하지만 친형제는 아니다. 난 관리가 아니지. 허나
형님께서 극진히 보아주고 계시니 이렇게나마 살 수 있는 거다.
우리 형님의 명성을 모르는 것은 아닐테지?"
`이렇게나마' 산다니, 그럼 굶주리고 사는 사람들은 뭐지?
욕이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참았다. 결국 그녀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사융은 공손찬 앞에서는 청렴결백을 부르짖고,
뒷구멍으로는 온갖 호박씨를 까고 있는 인물이라는 결론 말이다.
이런 무뢰배한테까지 이 정도로 대 주었다면, 자신은 어딘가에
다른 재산을 숨겨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태수야 그 고을 안에서는 왕이나 다름없고, 특히 황제의
강제력이 힘을 잃은 이런 시대에는 태수의 힘이 더더욱 강하다.
자신의 관할 영역 안에서는, 그야말로 개미발에 신발을 신기든
전봇대로 콧구멍을 쑤시든 마음대로다.
그런 태수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있는 사융이라면 그렇게
못할 이유도 없다. 또한, 전적으로 사융의 권력과 재력에 의지해
지금의 삶을 누리고 있으니 이 저팔계같은 자의 사융에 대한
감정은 숭배에 가까울 것이 틀림없다.
이 난관을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찾았다. 관가로 연행된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좌천된 입장이기는 하지만
조운은 이 벽촌에서는 높은 관리 측에 속하니 말이다. 그
고지식한 인간이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형을 집행하라.' 는
식의 말만 안 해주면 된다.
"사융을 모를 리가 없지! 미련한 네놈 덕에 꼬리를 잡았구나!
청렴결백한 척, 온갖 위선을 다 떨더니, 드디어 숨겨둔 재산이
이렇게 많음이 만천하에 드러나는구나! 내, 당장 공손찬
태수님께 사융 녀석의 이러한 비리를 고발하러 가겠다!"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저팔계같은 남자의 얼굴근육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화정은 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 엄포를 놓았다.
"썩어빠진 놈! 사융이란 놈은 부모를 죽이고 달아난
후레자식이라는 소리가 있더니 역시 인간이 되지 못하는
놈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화정이 사융이 부모를 죽이고 달아났다는
소문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단지, 친형제가 아니라
했는데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는 사람이니 사융에 대해서 욕을
하면 큰 동요가 있을 거라는 예측에서 내뱉은 말에
불과하지만.......
"이 계집애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경국지색이라 아깝기는
하다만 감히 형님을 모욕하다니! 여자 하나에 형님을 팔 수는
없지, 여봐라! 이 여자를 관가로 끌고 가라!"
감정이 식기 전에 욕을 더 퍼부어야 한다.
"굶고 있는 아이를 동정하지는 못할망정 두들겨 내쫓는
무심하고 무식한 자를 비웃었으며, 동시에 변변찮은 놈을
형님으로 모시면서 나날이 살만 찌우고 있는 돼지같이 우둔한
놈을 우롱했기로서니, 이것이 잘못된 일인가?!"
아, 이전에 중국 고전을 보아둔 보람이 있다.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니......만약 그녀 시대의 욕으로 `놀고있네'
라던가 `이 XX놈아!' 등등의 욕을 했다면 알아들을 리가
없으니까. 저팔계는 생각보다 화가 났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덩달아 그의 몸에 매달려있는 거대한 뱃살도 흔들거렸다.
저팔계는 이마에 핏대를 잔뜩 세웠다.
"뭣들 하느냐! 저 요망한 계집을 데리고 가라! 직접 사융
형님께 데려가야 한다!"
`엇, 이게 아닌데!'
직접 사융에게 데려간다니, 그럼 일이 틀어진다. 게다가,
사융은 공손찬과 각별한 사이이니만큼 공손찬을 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진다. 그제야 속으로 당황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다. 몇몇 사병(私兵)들이 몰려와 그녀의 손을 묶은 뒤였다.
"그런데......저 계집은 취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곁에 서있던 사내가 저팔계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물었다.
화정은 순간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만약에 `흠, 그렇군.
어차피 가기 전에 한번......' 이라는 식으로 나오면......
"감히 융 형님을 능멸하는 저딴 부정탄 계집아이는 아무리
경국지색이어도 필요없다!"
의외로 의리를 아는 놈이었군......화정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 가슴을 쓸어내리려 했지만 이미 양손은
꽁꽁 묶여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거칠게
밀면서 갈 길을 재촉하는 사병들을 보면서 속으로 아까 그
꼬마에 대해 원망을 잔뜩 보내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아, 나 요즘에 왜 이렇게 나답지 않은 걸까......?
쓸데없이 참견이나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테리다. 자신이 이렇게 참견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을 삼국지로 오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아무튼......
`지금은 미스테리가 문제가 아냐!'
하고 피부로 느꼈다. 관가로 연행해가는 병사들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불안해졌다. 병사들은 힐끔거리면서, 계속해서 화정을 보고
있었다. 화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이 풀려있다면 어떻게
해서 달아나겠지만 손은 꽁꽁 묶여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무협지에 나오던 주인공도 아니고보면
`흐읍' 하는 기합으로 줄을 끊을 수도 없다. 이윽고......
곁에서 그녀를 가장 열심히 훔쳐보던 병사가 종알거렸다.
"이봐, 이렇게 예쁜 여자를 그냥 얌전하게......관가로
데려가기는......아깝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에서 대답이 날아든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야!"
"우리 딱 한번씩만.......번갈아가면서......어때?"
"좋지!"
화정은 자신의 이가 딱딱거리면서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퍽!
순간 무엇인가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정에게 손을 뻗던
사병 하나를 넘어뜨렸다. 화정은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면서
쓰러진 사병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순간 자지러졌다.
"아!"
작은 비명이 입 밖으로 새나갔다. 조그만 돌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미 자주 겪어본 화정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원령이 끼어든 것이다. 다만, 지적
수준이 별로 없는 자인지 보이지는 않았다. 넘어진 사병이
몸을 툴툴 털고 일어서는데 또다른 사병이 외쳤다.
"잡귀다!"
"그곳뿐이 아니야! 저기에도 세 놈이나 더 있어!"
"에잇!"
사병들은 떨면서 창칼을 쥐고 모여섰다. 화정은 자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내심
안심했다. 갑작스럽게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무당이나 어떤 영적 존재와 닿아있는 여자는 부정하다
해서 강간조차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죠. 그래서
무당은 시집을 안 갔다는 소리도 있었고요.>
`아! 그래!'
사회시간에 가끔 귓전으로 흘려들었던 담당 선생님의 농담.
화정은 천천히 말했다.
"......승천하러 오셨군요. 난동 부리지 말고 이리로
와요."
역시나, 사병들의 얼굴색이 한번에 변한다. 한 사병이
절규하듯 외친다.
"너......무, 무녀(巫女)......였어?!"
효과가 있구나.......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병들은 불안한 듯 서로 마주보더니
저희들끼리 쑥덕댔다.
"들었지? 무녀래."
"제길, 오랜만에 재미 좀 보려 했더니!"
"무녀를 범하면 저주를 받아서 몹쓸 병에 걸린다더라. 그 말도
못 들었냐?"
"어쩐지......저렇게 예쁜 여자가 이 세상에 평범하게 존재할
리는 없다했지."
"저 얼굴도 귀신의 힘으로 고친 것임에 틀림없어!"
"무녀들은 다들 예쁘잖아? 그게 왜 그러냐면 귀신들이 얼굴을
고쳐주기 때문이라더군."
얼굴을 고친다고......? 무녀들이 귀신의 힘을 빌다니,
귀신들이 무슨 성형외과 의사라도 된다는 소리 같잖아......
어쨌든 화정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날고있는 현량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만했다.
현량은 실제의 동물이 아니라 영수(靈獸)였기에 직접적으로
물리적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원령들을
불러모았던 것이다. 원령들이, 그녀가 그들을 승천시키기는커녕
제대로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동안 소란을 떨던 사병들도 자신들이
떠들던 새에 원령들이 모두 사라지자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는지
화정을 힐끗 바라보았다.
"야, 잡귀들이 없어졌다!"
"진짜 저 여자가 승천시켰나봐!"
"그럴 리가 없어!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원령을 승천시키는
주술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그 유명한 사현도 승천은
못 시킨다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야!"
화정은 목에 힘을 주면서 짧게 쏘아붙였다.
"승천은 아니지만 부릴 수는 있어요."
그 말에 사병들은 머리칼이 쭈삣 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를 이곳에
내버려두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을 것이다. 원령이 아니라
아귀강시 같은 하급이라도, 사물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주술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귀강시가 아니라 원령을
부린다면 이것은 그 술사가 거의 전설적인 수준의 주술사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무서운 저팔계 주인의 명을 거역하고 도망가자니
그들도 살길이 막막했을 터이니, 내던지고 갈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있는 것이다. 사병들은 웅성거리다가 나름대로 영특한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 원령들을 이용해서 손을 묶은 줄을 못 푼걸
보면 그렇게 염려할 수준은 아닌거야. 그리고 한번 불렀으니
주술력(呪術力)이 다 소진되었을 거라고. 우리는 그저 얌전하게
데려가면 되는거야!"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다. 화정이
속으로 `참나, 저 머리로 공부를 했다면 좋은 관직에도
나갔겠다. 쯧쯧......' 하고 혀를 차는데, 주변의 사병들은
손뼉을 치면서 환호한다.
"그렇군! 역시 자넨 천재야! 그럼, 이만 갈까?"
`모처럼 벗어나나 했더니 저런 말도 안되는 추리 때문에......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지? 공손찬앞에 가면 나도 나지만
유비님도 입장이 곤란해지는데......아, 나도 몰라! 그때의
일은 그때 보아서 처신하면 되는 거야.(臨其時對付其時之事)'
*******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광경이 보였다.
꽤 크고 부유해보이는 집의 근처였다. 집주인은 물론 영각이나
조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이 마을의 세도가였다.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 있으며 또한 이름난 호색가(好色家)로
질펀하게 소문이 나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주인의 횡포가
두려워 이 집의 근처에는 잘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괜한 트집을
잡아서 구타하거나 그나마 없는 재물을 빼앗고 남의
아녀자라도 미색이 빼어나면 즉각 데려가는데 누가 감히
얼씬거리겠는가.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는지 사람들이 모여서
조심스럽게 웅성거리고 있다. 영각이 조운을 돌아보았다.
조운은 영각의 뜻을 눈치채고 고개를 한번 가볍게 끄덕였다.
"한번 살펴보지."
무미건조한 어조와 짤막한 말투에 영각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앞장을 섰다.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심지어는 그 집의
하인들까지 주인의 무서운 규칙을 잊었는지 사람들과 함께
떠들고 있었다. 배짱좋은 영각은 넌지시 옆사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모처럼 사씨(邪氏)댁이 시끄럽군요."
나이가 들어서 투박하게 변한 얼굴을 돌리며, 노인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아니, 여태 몰랐수? 낮에 웬 아주 예쁘게 생긴 처자가 감히
사대감께 대들다가 끌려갔다던데......그것도 그렇지만
사융님의 욕을 아주 험하게 했다지 뭐유."
"아주 예쁘게 생긴......처......자?"
뭔지 모를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영각은 고개를 돌려
조운을 돌아보았다. 조운 역시도 그다지 달갑지는 않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영각이 또다시 질문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조운이 나섰다.
"혹시......눈동자 색깔이 옅고, 진하지 않은 청빛 옷을
입은데다, 키가 크고 체격이 가냘픈 여인이 아닙니까?"
조운의 상세한 질문에 마을 노인은 눈을 빛냈다.
"아, 아주 자세히 아는구먼! 그렇다더군요."
"그리고 머리를 하얀 끈으로 묶어내려서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었수. 혹시 아는 처녀요?"
하인 복장을 한 남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면서 질문했다.
조운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영각과 불길한 시선을
교차했다. 영각이 하인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인은 조운과 영각이, 자신들과 그 낯선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밝히지 않고 질문만 대뜸 하는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입을
삐죽거리면서 빈정댔다.
"잘 모르겠수다. 사융 대감의 욕을 감히 주인나리 앞에서
했으니 직접 북평 관청으로 호송되었겠지유. 아마 사병들이
호송해 갔던 걸로 보아 북평으로 갔으리라고 믿소. 주인나리는
사융 어르신의 욕을 하는 자는 반드시 북평의 사융 어르신 관할
관청으로 보내시거든. 그나저나, 그 젊은 처녀와 관계가
어찌되길래 그렇게 궁금증이 많소?"
"가지."
조운은 짧게 말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의 질문을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조운의 태도에, 하인의 그렇잖아도
찌푸러졌던 표정이 더 험악하게 변했다. 영각은 그런 조운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그를 따라 나서려다 멈추어 섰다. 품을 뒤적거리면서 무엇인가를
찾던 영각은 대답해 준 하인에게 반짝이는 것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은자(銀子)요. 형편이 안 좋아 이것밖에 못 드리니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주시오. 대신에, 주인 어르신께 우리 두
사람이 그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더라는 사실은 함구......아니,
비밀로 해 주시오! 그리되면 내, 훗날 더 사례하리다."
함구라는 유식한 단어를 못 알아들을까봐 말까지 쉽게
바꾸어주는, 영각의 은자 하나에 벌어진 하인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하인은 고개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이나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고 영각은 조운의 뒤를 따랐다. 영각은
조운을 향해 외치듯이 물었다.
"따라가려는가?"
"......내버려 둘수는 없지 않나!"
약간의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또다시 일을 일으킨 것을
수습하러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적잖이 화가 나는 모양이다.
하기는, 처나 친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인(情人)사이도
아니고 보면 당연히 화가 날 일이다. 영각은 그런 조운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이윽고 집에 다다르자 조운은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냈다.
영각은 그런 조운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자신도 뒤따라
나머지 말 한 마리를 끌어냈다. 한창 머릿속에서 떠도는 생각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감춘다고
능사는 아니지......이윽고 마음을 굳히고 입을 뗐다.
"조자룡, 무엇 때문에 그 아이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지?"
짤막한 질문이었지만, 이것이 조운과 영각에게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많았다. 자신의 말고삐를 쥐고 올라타려던 조운은
행동을 멈추었으며 영각 역시 그 이상의 질문은 하지않고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낮은 말 울음소리가, 천둥소리같이 들릴 정도로, 가끔 부는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다가 이윽고 나뭇잎이 땅에
떨어지면서 내는 사락, 소리가 들릴 만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동안, 자신의 말을 바라보고 섰던
조운은 고개를 돌려 친구가 조성한 무언(無言)의 적막을
깨어냈다.
"......무슨 뜻이지, 황호? 자네는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가?"
"모를 리가 없어, 자룡. 자네와 십여 년을 함께 자랐던
나야. 나의 질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답을 요하는 것인지
자네같이 똑똑한 사람이 모르지는 않겠지. 대답해봐, 자네는,
남의 일에는 무심한 놈이 아니었던가?"
다소 서늘한 기운이 도는 영각의 받아침에 조운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또다시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을 두려워한 영각은
답답한 심정으로 재촉했다.
"대답을 해! 그 아이, 대체 무엇하는 아이인가? 설마하니
자네 같은 냉막한 놈이, 그저 외양이 소연을 닮았다 해서 정을
주었다는 건 아닐테지?"
"쓸데없는 소리 말게. 단지 도울 이유가 있을 따름이야."
조운은 다시 자신의 말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에 올라탔다.
영각이 외쳤다.
"좋아, 설령, 자네 말대로 은인의 딸이라 쳐! 그렇다해도 왜
하필이면 저렇게 소연과 지겨울 정도로 닮은 거지?! 왜? 자네가
내 입장이라면, 고의성으로 오인하지 않을 것 같은가?!"
팍.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조운이 쥐고 있던 작은 물건이 부서졌다.
"왜냐고?!"
갑자기 조운이 커다랗게 외쳤다. 영각은 순간 주춤했다. 조운의
얼굴이 엄청난 분노를 담고 빛나는 것을 발견한 영각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서글서글한 눈가에 불빛을 가득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분노로 끓어오르는 지옥의 염화같은......그
서슬에 적잖이 당황하고 질린 영각이 그만 벙어리가 되었는데,
조운은 자신의 말고삐를 끊어질 듯 세게 쥐었다.
".......나도 모른다! 그저, 내가 아는 것은, 그 지겨운
여자와 지겹도록 닮은 그 아이를 보았을 때, 어떤 얄궂은
장난이 시작되었다는 것뿐이지!"
함부로 하는 말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앞에서 그런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화가 나게 만든다. 이쯤되자 영각도 격분했다.
"지겨운 여자라니! 내가 네놈의 속을 모를 것 같은가! 네놈이
그렇게 냉막한 놈이 된 것도, 여지껏 혼인은커녕 연인 한번
둔 적 없는 것도, 다 누구 때문인지 모를 내가 아니......"
"내가."
조운이 짧게 말을 내뱉자 영각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말을
중단했다.
"돌아오지 않거든 자네의 수완으로 빼내주길 바라네."
그리고 번개같이 말을 달려 사라졌다. 영각은 팔짱을 끼고는
조운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그 자세로
조운을 바라보던 영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바보같은 놈......그렇게, 계속해서 소연을 잊지
못하면서......혼자 괴로워하고 사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화정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계속
도와준다면......여자들이 어떤 마음을 가질지도 모른단
말인가!"
*******
왜 하필 판결을 이렇게 어두컴컴하고 밀폐된 곳에서 해야
하는걸까. 미심쩍었다. 응당 판결이라면 넓은 곳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온
화정으로서는 좋지 않은 생각만 잔뜩 들었다. 물론 그 많은
인파 앞에서 공개망신을 당하는 것보다야 이런 면이
낫겠지만......
"네가 감히, 내가 횡령을 하였다고 생각없는 소리를 했다니,
무슨 근거에서 그랬느냐!"
사실 중간에 도망치려고 그랬던 건데......화정은 자신의
기구한 처지에 혀를 찼다.
"사실이 아니면 아닌거지 왜 다그치십니까. 혹시,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이런 분을 굳게 믿고 계시는 공손찬님이
가엾군요."
아무리 처지가 빈곤하다고는 하지만 저런 사람에게 `예,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기는 싫었다. 그리고, 내가 틀린
말했나? 찔리는 부분이 있으니까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아냐. 자신이 싫어하거나 경멸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차가운 편이었다. 화정이 가시돋친 말투로 대꾸를 하자,
이것봐라, 사융이라는 사람의 얼굴색은 새빨갛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그의 주름진 손이 분노를 담고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화정은 차가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감히! 감히 나를 모욕하는 거냐! 일반 서민인
주제에 감히 관리를 모독하다니!"
`일반 서민은 관리를 모독하면 안되나? 하긴, 현실적으로는
안되지. 이론적으로만 되니까 문제라는 것 아니겠어......'
화정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화정이 대답도 않고 가만히 한숨만 내쉬니 사융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사융은 앞에 놓여있던 탁상을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세게 내리쳤다.
"나는, 일생을 공손찬님을 위해 바치고 있으며 누구보다
청렴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네가 감히, 이런 내게 횡령이라는
말을 꺼내다니! 이것은 명백한 모독이다!"
`쳇, 난 진짜 청렴한 사람이 청렴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은 못 들어봤다고!'
화정은 조운을 떠올리면서 콧방귀를 뀌고는 팔짱을 꼈다.
사실 화정이 별다른 뜻이 있어서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청렴을 넘어서서 빈곤하게 사는 사람은
제껴두고, 겉모습만 청렴하고 뒤로는 온갖 재물을 다 긁어모은
저 사람이 청렴하다고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 현실이 기가
막혀서 이런 행동이 나왔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모름지기,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겨운 설교가 생각난
것은, 애석하게도 사융의 다음 고함소리를 듣고 난 뒤였다.
"공손찬님의 충실한 모사인 나를 욕보인다는 것은 곧
공손찬님을 욕보이는 것이며 또한......그렇군, 직접적으로
공손찬님을 동정하는 척 하면서, 그분의 인재를 쓰는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지! 주군의 명예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다,
여봐라! 등에 채찍질 서른대만 하고 옥에 가두어라!"
`채찍질 서른대!'
사융의 유치찬란하고 충성으로 포장한 위선에 웃기 이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정은 그제야 자신의 철없는 자존심
세우기에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사융의
고함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언뜻 보기에도 불뚝불뚝 솟은
근육이 공포스러운 장정 하나가 나타났다. 장정의 손에는
차가운 빛을 내는 채찍이 들려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제와서 살려달라고 빌기는 싫어! 구차하게
무슨......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이 망할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되고도 정신을 못 차렸네! 어떻.......'
화정이 안절부절못하는데, 사융이 그 바짝 마른 해골같은
얼굴에 퀭한 미소를 지었다.
"흠, 이래도 겁을 먹지 않고 흔들림이 없다니......예사
계집은 아닌 모양이군. 허나, 저 채찍으로 얻어맞고도 그
고고한 표정이 그대로인지 한번 두고보지."
`이게 아닌데......!'
근육질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 혹시 이 남자, 사디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다 들었다 - 길고 단단한 채찍을 쫙, 폈다. 채찍의 쇠줄이
공기를 가르면서 엄청나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어 화정의
귀를 자극했다. 화정은 자신의 얼굴이 바다보다도 더 새파랗게
질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호오, 아직도 흔들림이 없단 말이지? 내가 장난이라도
치는 걸로 생각하나?"
흔들림이 없다니.......난 지금 기절하기 일보직전이란
말이야! 유화정, 너 뭐하니, 빌지않고?!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살려주세요, 하는 말이 하기 힘든거야.......하고
화정이 막막한 심정으로 채찍을 다시한번 보는데, 청명한
목소리가 그 적막을 갈랐다.
"멈추십시오!"
이건 또 뭐야, 하면서 고개를 돌렸던 화정은 그대로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산넘어 산이라더니.......
"사융님, 제가 대신 벌을 받겠사오니, 그녀에게서 채찍을
거두어 주시지요."
반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잔소리를 한바탕 들을 것을
예상하고 있던 화정과, 사융은 동시에 외쳤다.
"제정신인가!"
"제정신이에요?!"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도 조운은 천천히, 이곳으로
걸어왔다. 그는 화정을 잠시 내려보더니 말이 없었다.
사융이 황급히, 종종걸음을 하여 화정과 조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니, 이 사람! 지금 무슨 뜻인가! 이 아이는 그저 민간의
아이로 감히 주공을 능멸하기에 내......"
"제 사촌 누이이니 교육을 잘못 시킨 죄가 이 운(雲)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니 허물 마시고 제게 벌을 내리시지요."
얄밉게 저런 말을 참 덤덤하게도 한다. 화정은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으면서 외쳤다.
"웃기지 말아요! 사실 잘못한 사람은 저 사람이라고요!
그러니 저 사람이 끌려가야 할 판에......."
"주저마시고 제게 벌을 대신하게 해 주십시오. 대신에
조용히 넘어갈 수 있도록......부탁드리겠습니다."
조운은 화정의 말을 뚝 자르면서 사융에게 다시한번 청했다.
사융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고개를 들었다.
".......내, 자네가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본래는 정을
생각하여 넘겨야 하겠지만.......이건 주군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 면제는 못 하겠군.......그렇다면 자네에게 대신
벌을 넘기도록 하지. 자네 부탁대로 이 일은, 주군께 발설치
않으리."
명예라고? 명예 좋아하네, 그 망할.......이라고 화정이
외치려 했는데 조운은 답답하게도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이 사람에게 대신 채찍질을 가하고 옥에 가두어라. 대신에,
옥에서 최대한 정중히 모시도록."
채찍을 들고 있던 사내는 사융에게 굽신거렸다. 사융은
화정을 한번 노려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사융이
사라지자마자 화정은 조운에게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
"왜 이래요! 나와 댁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는 거여요!
게다가, 저 사융이라는 사람, 뒤로 온갖 뇌물을 긁어모으고
있었어요! 공손찬님께 고하면 오히려 조운에게 더 좋게
작용할 텐데 왜 그러......"
"실행합시다."
화정의 잔뜩 열을 담은 말을 자르고, 조운이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화정은 혀를 찼다. 채찍질이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그런 것을 저렇게 덤덤하게 말하면, 정말 재수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의 표정이 도리어 당황을 담았다. 그는
마치 딱딱한 나무조각이 굽신거리듯, 당황스런 태도로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사융이 사라진 문 쪽을 다시한번 보았다.
하기는, 일개 망나니 - 형 집행인이니 이렇게 불려도 괜찮지
않을까? - 로서, 그나마 공손찬의 직속 관리였으며 치안대장이던
조운에게 함부로 하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형 집행인이
쭈삣거리며 조운에게 권했다.
"그, 그럼......저 쪽으로 들어가서 집행......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험상궂은 근육질의 외모와 안 어울리는 말투로, 말을 끝내고
앞장섰다. 묵묵히 따르는 조운의 뒤를 쫓아가면서, 남자를
힐끗 보았다. 아무리 봐도 품위가 없다. 키도 훤칠한데다
체격도 잘 잡힌 조운에 비해, 작달막한 키에 어딘가 부조화적인
근육질은 어떻게 보면 폭소까지 자아냈다. 남자의 굵직한
팔을 못마땅하게 보던 화정은, 그의 손에서 아직도 흐물거리는
채찍을 보고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야! 사실 잘못한 건 난데 또 조운한테
신세를 지기는 싫어, 나 때문에 저런 것에 맞게 해선 안돼!'
그렇다고 대신 맞는 것은 겁나서 안된다. 세상살이는 대체
왜 이렇게 힘든거냐, 하는 심정으로 한숨만 푹 내쉬는데,
불현듯 화정의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하! 뇌물 수수란 것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겠어?'
품속을 좀 뒤져보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 정말 한 푼도
없다. 저 망나니에게 돈 좀 쥐어주고 때린 것으로 하라고
하려면 적지않은 액수가 필요할텐데......절망스러웠다.
모처럼의 좋은 생각이 쓸모없게 되었다고 낙심하던 찰나,
화정은 목걸이가 떠올랐다.
`그래! 여기서는 정말 귀한 것이라고 했지! 그래도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황제만 지니고 있다는 이 보물을,
기껏 저 망나니한테, 거짓말 값으로 주기는 아깝다.
하지만.......화정은 망나니가 지니고 있는 채찍을 다시
힐끗 보았다.
`딱 10대만 맞아도 죽을 것 같은데 서른 대라니! 아무리
조운이라해도 죽어나갈지 모른단 말야! 아무리 얄미워도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목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에고, 아까워라, 하는 심정으로
화정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조운을 앞질러 망나니에게로
다가갔다. 낮은 목소리로 망나니에게 말을 건넸다.
"저, 잠시만요......."
화정이 대뜸 속닥거리자, 망나니는 좀 놀란 모양이다. 저
덩치에 이 정도로 놀라다니, 의외로 새가슴이 아닐까, 따위의
생각을 서둘러 지웠다. 화정은 조운이 조금 떨어져 서 있는
것을 힐끔, 곁눈질하여 확인하고 말을 조심스럽게 이었다.
"저 사람 저래뵈도 공손찬님이 직접 권하셔서 수하로
들어온 사람이라고요. 그렇다고 형을 집행하지 않자니
사융님의 분노가 걱정되시고......그러신 거죠?"
남자의 얼굴에 약간의 희색이 돌았다.
"아이구, 어떻게 아시고.......그렇습니다, 소저!"
"쉿!"
화정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남자는 조운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조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화정을
향해 한심하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화정은
아랑곳않고 할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 거짓말을 하시라는 거죠. 사융님께는 형을
집행했다고 보고를 올리세요."
"예에?"
남자의 눈이 쟁반만해졌다. 그는 황급히 손을 휘휘
저으면서 사정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안됩니다! 사융 어르신의 수하들이
곳곳에 깔려있는데......"
"정말 귀한 보석을 드리겠어요. 이건, 서역에서 들어오는
청금석이나, 곡옥과도 비교가 안되는 귀중한 보석이에요!"
화정의 말에 남자는 역시나, 멈칫, 하는 눈치였다. 군침
흘리긴......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계 사람들은
순진한 곳이 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자신같은 남루한
차림의 여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리 쉽게 믿어지는
걸까?
하기는, 사람들의 머리가 발달해서 온갖 사기가 횡행하는
화정의 세계에 비해 이 사람들이 순진한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여하튼 조금의 침묵이 흘렀다. 화정은 자신이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음을 그제야 깨닫고
속으로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효과가 있었는지
망나니는 심각하게 고려하는 듯이 보였지만......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는 것이 좋아. 잔꾀를 부려 좋을
것은 없어."
조운의 단호한 말이 공기를 갈랐다. 뜨끔한 화정은 약간의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조운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정말 고지식하게 왜 그래요! 이쪽 좋고 자룡과
나도 좋은 방법이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빡빡하게만
살아서는 안된다고요!"
내가 틀린 말했어? 망나니는 다소 자유분방하게 떠드는
그녀의 말에, 화정의 얼굴을 다시 힐끔 쳐다보았다. 매치가
안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사람들은 내가 말을 다소 거칠게
하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하더라. 어쨌거나, 화정의 말에
조운은 차갑게 대꾸했다.
"횡령이 나쁘다고 하던 사람이, 관리를 매수해서 벌을
면했다고 밝혀지면 나중에 할 말이 많겠군?"
비꼬는 투다. 그 말에 화정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뭐 저런
인간이 다있어?! 분하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기는 하다.
이후에 옥에서 빠져나올 명분과, 혹시나 공손찬에게 이송되어
간다면 댈 핑계거리가 적어진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매수를
한다면, 사융의 횡령에 대해서 공손찬에게 말해보았자
사융의 첩자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저 아가씨도
매수를......' 하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 세계 사람들이 순진하다는 것은, 저 얄미운 조운이라는
인간에게만은 취소다. 그나마 세상사는 수단은 있는 편이라
생각했지만 조운은 좀더 위인 모양이다. 아, 정말 미워
죽겠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세 사람은 어둑어둑한 지하를
향해 걸어들어갔다.
`......응? 뭔 분위기가.......이렇지.......?'
투덜투덜 속으로 조운에 대해서 융통성은 조금도 없느니,
저래가지고 장가도 못 갈 거라느니, 하면서 욕을 퍼붓던
화정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것은 뒷전으로 하더라도, 어딘가 침침했다. 뭔가, 굉장히 탁한
느낌 같은 것이 느껴졌다.
`느낌이......안 좋아......왜 이렇게 답답하지......?'
숨막히는 압박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답답해진 화정이
영문도 모르면서 숨을 한번 크게 내쉬는데 곁에 서있던
조운이 낮은 음성으로 망나니에게 질문했다.
"......이곳은 대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조운의 질문에 망나니는 머뭇거렸다. 화정은 뭔가
거북스러워하는 그 망나니의 태도에서, 수상쩍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나무 각목같은
것이 몇 개 놓여있고, 창과 칼이 있다. 그리고.......
"......아!"
끔찍한 생각에 화정은 나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보기에도
끔찍한, 시퍼렇게 날이 선 몇 가지 종류의 칼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정육점이나 도살장에서 쓰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문득, 사회시간에 사진을 보면서
들었던 설명이 기억났다.
<이게 고문도구에요. 자, 이걸로 눈을 뽑고, 이걸로는
살을 얇게 베어내죠.>
그 소리를 듣고 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 화정은 꾹 눌러참았지만......집에 와서는,
칼과 가위를 다 치워버렸었다. 여하튼 그곳에는 칼 뿐 아니라,
그 눈알을 뽑는다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부지깽이 같은 것도
있었다.
`고문실......이라는 거지.......?'
두려움이 피부로 느껴졌다. 화정이 이런 모든 상황을
둘러보는 동안에, 머뭇머뭇하던 망나니는 조운에게 바쁘게
둘러대고 있었다.
"죄인들을 가두고......심문하는 곳이지요......그럼,
여기로......"
`심문이 아니라 고문이지......'
황급하게 종종걸음을 놓는 망나니는, 확실히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어찌하랴, 저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망나니는 자신의 채찍을 잠시 내려놓고는 한 장소를
가리켰다. 널찍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작은 방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저분하다고 불만을 내뱉던 화정은
벽으로 눈길이 닿은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
자신은 소리를 못 지르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다. 아버지의
교양 교육 덕택일까? 여하튼, 벽은 까맣게 굳은 핏자국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 것이 붙어있었는데,
그건 사람의 살점이 튀어나간 것 같았다. 막막한 심정으로
벽을 보는 화정의 팔을, 망나니가 붙잡았다.
"그럼......저......형을 집행해야 하니 소저께서는.......
저기 들어가 계시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하니 저 벽에 튄 피와 살점들......
채찍으로 맞던 사람들의 것은 아니겠지? 화정은 망나니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미쳤어! 이 세계는 정말 미친거야!
전쟁터에서 그리 많은 인명을 살상하면서도,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혀! 저도 모르게 입술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망나니를 노려보았다. 귀에서 위잉, 하고 이상한 음이 울려오는
것 같았다. 귀가 아파 얼굴을 찡그리는데,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 팔이.......내 다리가.......]
[눈! 내 눈이 없어! 내 눈알을 뺀 놈들의 눈알을 모조리
빼낼테다!]
[배가 고파........]
[승천할 수가 없어......한이 풀어지지 않아.......]
차마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온갖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도 화정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상상한대로, 란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고문이라는 단어에 대해 상상할 때면 머릿속에 그려넣던
온갖 장면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비참한
광경에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볼 수 있었다.
똑똑히 볼 수가.......있었다.
"......세상에......! 하느님......!"
절로 하느님, 하는 말이 나왔다. 팔다리에서 피를
떨어뜨리면서 몸뚱이만으로 굴러다니는 남자, 양 눈에서
피를 비오듯 쏟으며 양팔로 앞을 휘젓고 있는 사람, 배가
고팠는지 다른 원령을 그대로 씹어먹고 있는 여자........
"미쳤어!"
화정이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자, 망나니가
뒤에서 몸을 떨었다.
"그럴 리가, 여기는 보통 사람들이 이곳의 원령을 볼
수 없게 부적을 붙여놓았......"
화정은 벌떡 일어나서는 망나니의 멱살을 잡았다.
망나니의 몸이 번쩍 들려졌다. 어디서,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았는지는 몰랐다. 다만, 그녀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물! 짐승! 여기의
인간들은 아무리 똑똑한 척 해도 짐승이야! 화정은 분노
때문에 쉰 목소리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미쳤어! 죽이려면 고통없이 죽일 것이지 저런
참담한.......! 그러니 저렇게들 한이 남아서 헤메고
있잖아!"
"그만해둬."
순간 조운이 화정을 망나니에게서 떼어냈다. 밀려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씩씩거리는 화정을 뒤로 잠시 밀친 조운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사내에게 사죄했다.
"미안하오. 저 아이는 빨리 가두어 놓는 것이 좋겠소."
사내는 화정을 떼어놓자 그제야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적잖이 당황했는지 그녀를 아직도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훔쳐보고 있었다. 화정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끔찍한 광경일 뿐인 이런 곳에서, 볼 것이 무에
많단 말인가. 누군가 자신을 재빠르게 밀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화정은 말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한참동안, 걸었다. 그저 걸어갔다. 보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걸었을 뿐이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귀에는 아우성들이 들리는 것 같았다.
고문실에서 멀어졌는지, 원령들의 아우성 소리도 차차
멀어져갔다. 한참동안 걷던 사람은 갑자기 그녀를 멈추게
했고, 자신은 나가는 것 같았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철컥하고 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정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을 천천히 떴다. 이제 그 광경은 눈앞에
없었다. 그 잡음과 울부짖음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속이 울렁거렸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다룰 수가 있다니 어떻게.......이
사융이라는 작자, 이상해. 일제시대 고문 기구 같은 것을
갖다놓고 사람들을 저렇게 참담하게 고문하다니.......
동탁같이 독재 정치를 펼치는 입장이라면 암살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렇다쳐도.......
기껏 태수의 모사에 불과하면서.......공손찬도 제후이기는
하지만......사융이라는 자가, 이 정도의 고문이 필요한 위치는
아닌 것 같은데......그런데 왜?'
생각에 잠겨있던 화정은, 벽에 머리를 기대면서 눈을
감았다. 진정하자. 진정하자......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자 목까지 넘어오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러고보니 아까, 원령을 눈으로 보았다. 지적 수준도 없는
원령들 같았는데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고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화정은 씁쓸한 심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보게 되기를 바라고는 있었지만......이건 너무한걸,
이런 것뿐이라면 차라리 원령이나 아귀강시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아......'
정말 그렇다. 사람의 눈으로 볼 광경이 아니었다. 너무
처참했다. 아귀강시도 보기 싫기는 하지만 방금 전의 고문에
의해 죽은 원령에 비하면 차라리 얼려놓고서 미술작품 대하듯
감상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또다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는데......
"죄송합니다, 조운님......"
"상관없소. 시작하시지요."
벽에 귀가 대어져서 그런지, 옆방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이렇게 곁에 있는 듯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을
보면 여기는 아까 그 방의 바로 옆인 듯했다. 호기심이 난
화정은 벽에 귀를 더 바짝 가져다대려 했다. 순간, 그녀는
작은 틈구멍을 발견했다.
`어?'
그녀는 그 구멍을 만져보았다. 화정의 한쪽 눈보다 약간
큰 구멍이었다. 혹시, 지금 자신이 갇혀있는 이 방의 죄수를
감시하기 위해 간수들이 만들어 놓은 걸까? 의문을 잠시
접으면서 화정은 구멍으로 눈을 가져다댔다.
좁은 시야 안에, 조운과 아까의 그 망나니가 보였다. 등을
내고 앉은 조운과, 망나니의 채찍을 꼭 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마악, 때리기 직전인 것 같았다.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보기 싫어!'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화정은 그 구멍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호기심은 그녀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공포 영화를
보면서 가슴을 잔뜩 졸이지만, 눈을 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리 아닐까. 미처 눈을 떼지 못하고 조마조마해 하는데,
순간, 망나니의 손에 쥐어진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쉬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새빨간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이
`튀었다'는 표현은, 다시 말하지만 절대 과장이 아니다. 정말로,
공중에 물줄기가 솟구치며 만드는 물방울들을 새빨갛게 물들인
것처럼, 그의 피는 허공을 물들이고 있었다. 화정은 그만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가 갈렸다. 몸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파악!
거친 소리와 함께 채찍이 두 번째로 내리쳐졌을 때는, 새빨간
피와 함께 하얀 살점들이 튀어나가는 것도 보였다. 그 피와
살점들은, 이미 오래되어 시꺼멓게 또는 누렇게 굳어서 벽에
붙은 다른 자들의 그것들과 함께 어우러져갔다.
부들부들 떨면서 화정은 그 구멍에서 눈을 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세 번째로 채찍이 내리쳐 졌을 때에야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눈가가 젖어들었다.
`왜.......? 왜 저렇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문을
받아야 하는 거야?!'
억울하다는 단어의 용도를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화정은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으려고 했다.
목구멍으로 억지로 삼키던 흐느낌은, 계속해서 들려오는
채찍 소리에 그만 새어나오고 말았다.
"흐흐흑......."
화정은 입을 급히 틀어막았지만, 굵은 눈물줄기가 자신의
소매 위로 떨어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옆에서는 채찍의
굵은 줄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살점이 터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신음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바보같아! 이럴 때는 소리를 질러도 되는데......! 저
사람은 바보야! 이럴 때는 아프다고, 한 마디 신음이라도 할
수 있잖아! 바보같아!'
그럼, 유화정? 넌 왜 이 상황에서 비명 한번 지르지 않니?
`그래, 나도 그걸 알 수 없어......'
혹시, 부잣집 공주님으로 자란 네 근성이 그렇게 가르친
것은 아니야?
`그것하고 부잣집 공주님 근성이 무슨 상관이야?!'
웃기지마, 넌 남들이 모두 해 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어.
지금 이 순간에도 넌, 저 사람이 너를 대신해서 저렇게 혹독한
매를 맞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비명조차
안 지르는 거야.
"멋대로 해석하지마!"
화정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면서 벽을 주먹으로 박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안에서,
이렇게 무서운 말을 내뱉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녀 스스로이고, 또한.......옳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화정은 그제야 자신의 이기성을 깨달았다. 남들이 해주는
것에 너무 익숙했던 자신의 이기성을. 어릴 적부터, 늘
누군가가 그녀의 것을 해 주었다.
청소도, 빨래도, 옷 입는 것도, 심지어는 공부조차도,
스스로 하기보다 선생이 와서 시키는 것에 더 익숙했던 것
같았다. 사고 싶은 것도 스스로 사 온 적이 없다.
주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알아서 다 사다 주었다. 늘
표정이 빈곤했던 것도 크게 만족을 느끼지도, 분노를
느끼지도, 슬픔을 느끼지도 않았던 것은 그 인형같은
생활.......당연하게 모든 것이 주어지는 생활 안에서의
무료함 때문이었다는 것을.......그리고 그것을 이
세계에 와서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이루어지기를
요구한 자신의 철없는 이기성을......
화정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자신만큼
행운인 사람도 없었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마초와 유비들이.......지금은 조운이.......
늘 자신을 도와주었다. 늘 자신이 필요한 것을
감당해주려 했다.
`내겐 누구보다 고마운 사람이 많았는데......이제껏
그런 것을 못 느끼고 살았어. 그런데도 늘 나 스스로만을
가엾게 여길 뿐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가엾게 여길 줄
몰랐어. 정작 슬픈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렇다. 아버지가 늘 원망스러웠고, 미웠어도 정작
슬프게 지낼 것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반 친구들이 매일같이
하찮아 보이고 자신과 거리를 두어서 싫었어도, 정작
부담스러워 하던 것은 반 친구들이었다.
쉬익!
아직도 공포스럽게 들렸다. 화정은 눈을 감았다.
매질......
<아빠! 엄마 살려주세요! 네? 엄마 죽을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저리 비켜! 앞으로 너의 엄마 취급도 하지 마라!>
<아빠, 그렇게 자꾸 엄마를 때리니까 엄마가 만날
아프잖아요! 때리지 마요!>
<비키지 못하겠어!>
화를 내면서 자신을 거칠게 밀치던 아버지와, 처량한
모습으로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어머니.......왜, 어째서
지금 저 소리를 들으면서 그 장면을 회상했던 걸까? 화정은
눈을 꼭 감고 양 귀를 틀어막았다. 듣고싶지 않았다.
저러다가......저러다가 죽는 건 아니겠지? 죽을 리......
없겠지? 아마 괜찮을 거야.......스스로를 열심히 격려하던
화정은 채찍질 소리가 멎자 고개를 들었다. 혹시, 내가
이곳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조운이 죽어서 쓰러져있으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겁이 났다.
죽지 않을 거라고, 여기서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화정은 용기를 내어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어느덧,
채찍질은 끝났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고, 대신에 저벅저벅,
하는 발걸음소리만 들려왔다.
슬프다......라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이제야
깨닫는다......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협력이라는 힘에 의한
것이다.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서도, 주기만 해서도
안된다......그런데 나는 늘 받는 것에만 익숙했다......
*******
엄청나게 아플 텐데, 아니 아프다는 말로 설명이 안
될텐데......덤덤하게 앉아있다. 화정은, 새로 갈아입은
옷에도 피가 스며들기 시작한, 조운의 등을 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심한 상처인데......치료해 줄 리가 없겠지?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면 병균이 들어가서 더 크게 다칠지도 몰라......'
의원을 불렀으면 좋겠지만, 옥에 갇힌 죄수 처지에 무슨
호사스런 소망인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조운의 등을 보고
있던 화정은 화가 났다. 정말 답답하고 한심했다.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다. 철없는 자신에게 싫증도 났다.
깨달을 수 있었다......자신이 얼마나 철없고 바보
같았는지......여태까지의 자신은 결코 낮은 사람이 아니었다.
높은 직위가 보장되어 있었고, 고위 정치가들도 눈치를 보는
사람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엄청난 재력이 받쳐주던
공주님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렇지 않다.
주군에게서 별로 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젊은 무장의,
누이로 가장되어있는.......보잘 것 없는 계집아이에
불과하다. 무모한 일들을 저질러도 전자의 입장이었으면
재력이든 권력이든 양자 중 하나가 작용하여 무마시켜준다.
화정이 내키는 대로, 뜻 가는대로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후자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않다. 싫은 일도
견디고, 남 앞에서 비굴해질 수도 있어야 한다. 도리어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현재 화정이 처해있는
상황은 명백한 후자라는 것이다.
만약 화정이 이런 사실을 좀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
사융의 동생이란 자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겁탈 당하기 싫어서라고 억지로 이해하고
넘기더라도......최소한, 사융의 앞에서 빌었을 것이다.
뭘 몰라서 잘못했다고......하지만 그녀는 도리어 상관인
공손찬을 모욕하는 말마저 서슴지 않았다. 결국, 엄한 벌을
받게 되었으며 조운까지 저렇게 만들었다.......
`대체 한 일이 뭐지? 유비님에게, 조운을 인도해오라는
명을 받았으면서......인도하기는커녕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어. 그나마 나를 참모로 삼을 것을 생각하고
계셨는데......최초의 참모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을
보내면서까지 원한 조운인데,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서
일생을 썩어야 할 것같이 만들었으니......바보같은
유화정! 정신을 차려야 해......!'
이제 무모한 짓은 하지 말자......그래, 한가지, 한가지
더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조운의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실수투성이가 되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던 자신......
그것의 이유를, 이전에는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저, 한번도 무시당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매일같이 보잘 것 없게 느껴지니 자신이 괜하게 흥분하여
그런 상태가 되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지금 생각하면 그건 억지성 이유다. 화정이
변한 것이 아니다. 단지, 모든 일을 쉽게 생각하고, 모든
일을 자신이 끌어나가는 대로 될 거라고, 세상을 만만하게
보았던 화정의 실책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대기업 총수의 후계자는 아니더라도, 이전에는 마초가
있어주었고, 그 다음에는 미력하나마 현령이 함께
있어주었기에, 그녀의 철없는 행동은 어느 정도 기반을
지닐 수 있었다.
하지만, 조운을 따라 오면서 그녀는 몇 가지를 간과했다.
더 이상 어떤 기반도 지니지 못했다는 것, 사람들의 눈치를
볼 상황이라는 깨달음 같은 것들을......철저하게 몰랐다.
철없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마음대로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떤 곤란함을 겪게 될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이기심에
가려진 철없음......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내가 멋대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놀러나갔을 때......그때
과외선생들과 호위원들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을까......
새어머니를 그렇게 대했을 때......나 자신은 시원했겠지만
새어머니가 심정이 어땠는지 이해해 보려고나
했었나, 내가?
그저 새 어머니라는 자체에 반감만 가져서 어떻게 하면
좀더 빨리 쫓아낼까......이딴 못된 생각만 했어. 난, 철없는
이기적인 계집아이에 불과했어. 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알고 보면 아버지의 힘과 재력에 의해 주어진
요소에 휩싸여서 그렇게 된 것에 불과했던 거야!'
화정은 후회와 분노로 자신의 목에 핏대가 서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아버지.......그렇다.
모든 것을 주었던 아버지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 맞서기
위해 그녀가 취한 철없는 반항들에 희생된 것들은......
죄없는 호위원들과 운전기사, 과외선생들과 가정부들,
그리고......쫓겨난 몇 명의 새어머니들......자신의 철없는
이기심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이 세계에 와서도 얼마나 철이 없었던가. 전란이 일고
살인이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 그저 현대적인 지식과 삼국지에
대한 알량한 지식을 이용해 편하게 지낼 궁리만 했다.
삼국지의 세계에서 진정 알아야 할 진실은......화정이 알던
것이 아니었다. 화정이 동경하던 무장들과 군주들의
혈투(血鬪) 아래에 깔린 수많은 야비함과 눈치작전......
온갖 더러운 꾀에 물들여진 정의라는 명분들......
그것보다 더 아래에 있던 것들이 바로 삼국지의 진실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의 슬픔과 고통, 사회적 약자들의 울분이
진정으로 토해지는 전란의 시대이기에, 삼국지는 더욱 빛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약자들의 울분을 그나마 공감하던 짚신장수
유비가 주인공이어서......나관중의 삼국지는 정사보다도
더더욱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것일까.
`계속해서 이곳에 있어서는 안돼! 이건......그래, 어쩌면
유비님은 내가 아직 책사(策士)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한기가 그녀의 몸을 엄습해왔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유비는......서서(徐庶)를
조조에게 보낼 때도 손수 배웅하면서, `서서의 뒷모습을
가리고 있는 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싶다.' 라고
했을 정도로 모사(謀士) 또는 책사(策士)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재 관우와 장비 이외에, 아무리 문관인 간옹이
있다지만, 유일한 머리가 될지 모르는 화정을 그렇게
보내버렸을 때부터 의심을 해 보았어야 했다. 아무리
조운이 탐난다고 해도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게다가 친우의 수하를......기약없는 세월을 거쳐야 수하로
올 것 같은 사람을 끌어오기 위해서......유일한 책사인
화정을 그 기약없는 세월동안 그 사람에게 보내버린다는
것은......이상하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바로 유비는
화정이 아직까지 모사로서 부족하다는 점을 꿰뚫어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운에 대해서 파악도 할 겸......화정을
먼 곳으로 보내본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조운의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예상도 미리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름이 쭉 돋았다.
유비가 무섭다는 것을 자주 느끼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건.....'
화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아버지와 느낌이 비슷해. 그 이상일 지도
몰라!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난, 철없고 모자란
아이에 불과해! 여기서의 난 그다지 잘난 존재가 아니야!'
이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구시대 사람들이라고,
과학이 훨씬 발달한 시대에서 온 자신보다 부족할 거라고
은연중에 얕잡아보고 있던 바보같은 자신.
`이젠 알겠어......난, 이제 이 이상 조운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돼! 물론, 공손찬이 망하면 절로 찾아올
조운이지만......여기서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야. 저 사람도 어쩌면.....유비님의 계략에 희생되고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서둘러 떠나야 한다. 그래, 여기서 나가는 즉시 기회를
보아 빠져나가자......화정은 그리 결심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이제야 이런
사실들을 깨닫다니......속상하다. 이런 일을 겪어보니,
실연 당하거나 일에 실패한 사람들이 술을 고래같이
마시던 것이 이해가 간다......이렇게 생각하던 화정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가만, 술?'
동시에, 사융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대신에, 옥에서 최대한 정중히 모시도록.>
그렇다면......혹시 이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화정은
자신들을 지키고 있던 간수를 소리쳐 불렀다.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상냥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다짜고짜 내놓으라는 식으로
떠든다면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간수는
화정의 부름에,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화정을 보던 간수는
머뭇거리면서 어눌한 답변을 해 주었다.
"아, 네.......무리한 요구만 아니라면......"
죄수에 불과한 자신에게 존대까지 해 주다니, 말귀가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화정은 조운을 힐끔
곁눈질했지만, 조운은 이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절대로 무리한 것은 아니에요! 술 두 병만 구해주시겠어요?"
느닷없이 옥에 갇힌 여자가 술을 요구하니까 옥지기는
당황한 모양이다. 그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고 섰다. 곁에서 어이없다는 투의 말이 튀어나왔다.
"제정신이야? 옥중에서 술을 마시겠다니, 그것도
두 병을......."
화정은 그런 조운의 말을 무시하고는 다시 옥지기에게
부탁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융 어르신께 말씀드리시면
괜찮다고 하실 거여요."
옥지기는 화정이 사융까지 들먹이면서 부탁을 하자 포기한
모양이었다. `한번 해 보지요.' 하고 웅얼거리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조운이 화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술은 무엇 하려는 거야?"
"난, 술은 안 마셔요!"
화정은 단호하게 잘라말했다. 조운은 그런 화정에게 약간
찌푸린 얼굴로 반문했다.
"나도 옥에서 술을 마실 생각은 없어."
화정은 콧방귀를 뀌어보였다.
"쳇, 누가 자룡 술 마시라고 가져오라던 건 줄 알아요?
착각도 정도껏 하시죠!"
그녀의 빈정거림에, 다시 무어라고 하려던 조운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화정이 또 엉뚱한 짓을 할까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화정은 그런 조운을 몰래 곁눈질하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걱정 말아요. 사람 하나 반쯤 죽여봤으니 다시는 무모한
짓 같은 거......안해요......"
좀 밉긴 하지만 이건 진실이니까......왠지 기분이
울적해진다. 그리고 미안하다. 걱정말라구, 이게 신세지는
마지막이니까.
"저, 소저, 여기 있습니다만......."
"그래요? 고맙습니다!"
화정은 일부러 기운차게 대답하고는 커다란 술병 두 개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병 하나의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조금
부어보았다. 코를 찌르는 독한 알콜 냄새가 났다. 손가락으로
그 무색의 액체를 찍어 맛을 보았다. 씁쓸하고, 강한 맛이
입안에 퍼져나간다. 꽤나 독한 술인 모양이었다.
이전에 호기심으로 마셔보았던 소주와 비슷한 맛이면서도,
더 자극적이고 알콜 냄새가 강했다. 화정은 병을 쥐고는
조운을 쳐다보았다.
"웃옷 좀 벗어봐요."
"?"
그녀가 대뜸 웃옷을 벗으라 하자 조운은 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힐끗거리면서 옥안을 보던 옥지기의 눈썹이 올라간다.
화정은 옥지기에게 냅다 외쳤다.
"도망 안 갈테니까 잠깐 자리 좀 피해주세요!"
화정의 말에 옥지기는 머뭇거렸다. 또다시 더듬수를 놓는다.
"그, 그, 그렇지만 저는 여기를 지켜야.......저......"
"어차피 우리 외엔 갇혀있는 사람도 없잖아요! 여긴 창문도
없으니 안심하세요. 이 사람은 공손찬님 관리였는데다 사융
어르신과도 잘 알고 있으니 도망가봤자 도로 붙들려온다고요.
그걸 모르는 우리가 아니에요. 그러니 잠시만 피해주세요!"
똑부러지게 말하자 옥지기는 또다시 머뭇거리다가
느릿느릿한 발걸음을 옮겨 바깥으로 사라진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조운에게 화정은 잘라 말했다.
"뭐하죠? 어서 웃옷 벗어요!"
"......이봐."
화정은 짜증을 내면서 팔짱을 꼈다.
"시끄러워요! 상처가 곪아서 더 오래 고생하면 그때
돼서야 후회 해 보시죠?"
그녀의 빈정거림에 조운은 잠시 말이 없었다. 화정은
조운의 심정을 대략 눈치채고는 술병을 들면서 덧붙여주었다.
"술에는 사람의 상처를 소독하고 병균이 들어가지 않게
해 주는 힘이 있어요. 그러니 안심해요."
화정은 조운의 대답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한쪽
소매의 어깨부분을 이빨로 물고는, 쭉 잡아 찢었다. 합성
섬유와는 달라서, 부우욱, 하는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뜯어졌다. 덕분에 화정의 나머지 한 팔은 완전히 소매가
없어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조운을 쳐다보았다.
조운은 말없이 웃옷을 벗었다. 그의 맨 등이 드러나자, 화정은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
겨우 입을 틀어막았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심한 상처였다.
살점이 떨어져나가 피가 참혹하게 흘러내리는 등은, 뼈가
드러날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천조각을 쥐고 있던 화정의
손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울적하던 심정에 이어,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한없이, 한없이 슬프고......미안했다.
"하려면 어서 해."
차가운 조운의 말도, 얄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미안하기만 했다. 화정은 이를 악물었다. 화정이 호들갑을
떤다면, 고통스러울 것은 조운 자신이다. 보는 사람도
끔찍한데, 당사자는 얼마나 아플 것인가......
화정은 눈을 일부러 깜빡여 고여오던 눈물을 없앴다.
그리고 소매를 뜯은 천조각을 접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철없는 오기나 이기심 같은 건 부리지 말자. 정말
현명하다면, 때로는 굽히자. 그렇게 결심하면서
천조각을 꼭 쥐었다.
"......좀 아파도 참아요. 먼저 피를 닦......아 낼께요."
애써 침착하게 말을 하려했는데, 음성이 흔들렸다. 목까지
올라오던 울음을 열심히 삼켰다. 피가 흐르는 등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댔다.
`난......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지......?'
그런 후회와 함께, 등에 가져다 대어 피를 닦던 그녀의
손바닥에는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울퉁불퉁한 뼈와,
끈적끈적하고 진한 피와, 터져나간 살갗.......화정은
거듭해서 나오는 울음을 눌러참으려 했지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녀는 소매가 남은, 왼쪽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면서 뚜껑을 열어놓은 술병을 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조운의 등에 술을 부었다.
"......윽!"
여지껏 신음 한번 없던 조운이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화정은 쏟아 붓고있는 술 속에 눈물 몇 방울을 섞어 떨구면서
또다시 이를 악물어 흐느낌을 참았다. 투명한 무색의 액체는
끈끈한 피에 닿아 분홍빛의 요란한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지간히 훼손이 심한 모양이다.
"......흐, 흑......"
울기 싫다. 이 얄미운 사람 때문에 울기는 너무 싫었다.
하지만, 끝내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흐느낌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화정은 열심히 눈을 깜빡거렸지만 이미 꽤 많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멎지 않았다. 도리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았다.
두 병째의 술을 부으면서 화정은 더 크게 흐느꼈다. 술을
붓지 않고 있는 한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흐느낌은 새어나와, 아무도 없는 널찍한 지하 감옥의
공간을 울리게 했다. 등을 감쌀 천을 찾던 화정은 뜯어낸
소매가 흠뻑 젖어서 새빨갛게 변해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치마 아랫부분을 뜯어냈다.
아무리 침을 삼켜도 울음은 멎지 않았다. 조운의 상체에,
뜯어낸 천조각을 꽁꽁 둘러매어 지혈(止血)을 시키고 난
화정은 웃옷을 다시 입는 조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화정."
조운이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 화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조운을 휙,
돌아보았다.
"제발, 제발 이렇게까지 하지 말아요! 내가 그쪽한테
무어라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여요?! 나같이 철없는
계집애, 뭐라고.....그냥 내버려두지......! 유비님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여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상관없잖아! 난.......나는......
나는요......!"
어깨가 들썩거렸다. 너무 심한 흐느낌에 심장 쪽에
따끔한 고통을 느꼈다.
"조운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맞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했단 말이에요! 난 사람이 매질에 맞아 죽는 건 싫어!
그런 건 너무 싫단 말이에요!"
이렇게 어린아이 마냥 엉엉거리고 우는 것, 그건
부끄러운 짓이라고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면서 정말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천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했었다.
그리고 화정은, 그날 어머니가 정말 아버지의 매질에
죽는 줄 알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후에.......
화정의 어머니는 죽었다.......병으로 죽었다고 했지만,
화정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매질 때문에 죽었던 거라고,
열 일곱이 되도록 굳게 믿었다.
"!"
순간, 화정은 자신을 누군가 감싸안는 것을 느꼈다. 약간
돌린 화정의 눈에, 너무 눈물이 그렁해서 흐릿했지만, 조운의
어깨와 팔이 보였다. 당황해서 조운을 올려다보는데, 조운은
시선을 똑바로 하여 앞을 응시하면서, 화정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한마디를 내뱉었다.
"......걱정마라. 죽지는 않을 테니......"
*******
그녀가 우는 모습은, 나의 가슴속에 아직도 너무 크게
자리하고 있는 그녀와 똑같았다. 외면할 수가 없었다.
너무......닮아서......착각할 만큼 닮아서......
*******
소연......나는 아직도 네가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나보다......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 날.....넌 오지 않았지.
*******
"미안하군, 자네가 쉽게 풀려나지 않을 것 같네.......
공손찬님께서 이번 일로 분노가 대단히 크시다네......
그렇잖아도 좌천된 입장인 자네가 누이동생으로 인해 이런
일을 일으킨 것에 대해 적잖이 노하신 듯하구만......"
사융은 제법 걱정하는 척하면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을 하고 있지만, 저것은 어디까지나
`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특히 사융이 뒤로
호박씨를 까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 그를
철저하게 불신하게 된 화정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정말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싶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었다. 저
위선적인 얼굴을 한번 뜯어보고 싶다. 저 얼굴가죽 아래에는
도대체 무엇이 깔려있는 걸까.
"......아닙니다. 애써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의바르기만 한 조운도 얄미워 죽겠다. 답답하고 화가
나지만, 참기로 했다. 자신 때문에 조운이 느닷없이 혹독한
채찍질을 당하고 옥에 갇힌 이후로, 화정은 많은 반성을 했다.
그저, 모든 것이 지식으로만 해결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철없는 공주님에 불과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사실, 태어나서 자라면서까지, 노력을 기울여 대가를 얻지
못해본 적이 없었다. 공부도 어느정도 하면 남들보다 월등하게
상위권에 있을 수가 있었고, 아버지의 장사수완도 배우고
익히면서 주변의 경영인들에게 `타고난 경영천재' 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그녀였다.
외모 또한 어릴 적부터 꾸준하게 가꾸어 왔다. 그녀의 외모는,
탤런트였던 어머니를 닮아 선천적인 것도 있었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각종 관리를 거쳐 가꾸어져 온 면도 있었다. 그 결과
남부럽지 않은 미모를 지닐 수 있었으며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 한마디만 똑부러지게 해서 모두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 삼국지의 세계에 와서도 모든 것을, 나서서 시도만 한다면
될 거라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다. 장비를 쫓아서 유비에게 간
일, 등은 잘 되긴 했지만......조운과 함께 있으면서 화정은
`사회적 약자의 설움' 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녀 식으로 `하고 보자.' 는 논리는 잘 통해주지를 않았다.
조운이 당한 가혹한 채찍질은 막무가내로 행한 철없는 행동의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너무 뭘 몰랐어......이곳에서의 나는 그곳의 나와 달랐던
거야. 난 약자에 불과해. 남의 부정을 보고도 눈감아야 하고,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어야 하는......'
화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곁에 있는 조운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느새 멀어져가는 사융의 뒷모습을 보고있는 조운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운은 자신이 옥에
갇히는 대신에 화정을 풀어달라 요청했지만, 사융은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공손찬이 불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뻔하다.
사융이 이런 하찮은 일까지 일일이 공손찬에게 묻겠는가? 다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현량을 불러내고 싶지만 여기는......원령들의 힘을 봉인시켜
놓은 곳이라서 그것도 불가능하고......하긴, 간혹 주술사들도
갇히는 경우가 있을테니 힘을 봉인시켜야 했을 거야.
하지만......현량이 있었다면 좀 편했을 수도 있는데......
영각은......아, 영각!'
갑작스럽게 영각이 떠오른 화정은 고개를 휙 돌렸다.
"자룡......아, 오라버니!"
깜빡 잊고 그냥 자룡이라 부를 뻔했다. 사촌 동생 행세를
하고 있으니, 조운을 오라비로 불러야 한다.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조운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영각은......우리가 이곳에 있는 사실을 알까요?"
조운은 화정을 아주 잠깐동안 응시하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감금되어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을거야. 허나, 영각이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지.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는
것이 좋아."
말도 좀 기분좋게 포장해서 하면 어디가 덧날까?
물론 동조한다. 이해한다. 찬성한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다는
것이 특징이다. 화정은 또다시 고개를 드는 얄미움을 애써
누르면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하기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오후쯤 되면
어딘가 슬쩍 빠져나가던 영각의 한량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모습으로 산적두목을 했는데, 그렇게 죽도록 따랐던
것을 보면 그 산적들도 전부 물고기 지능이다.
어떻게 그런 게으른 천성으로 두목을 해 먹었는지 모르겠다.
과거가 어쨌든 지금이야 수하들도 다 죽었으니, 영각에게
희망을 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곳에 갇혀서 평생을 사는 것은......당연히
아니겠지! 조자룡이 옥에 갇혀 사망하다, 하면 혹시 알아?
훗날에 촉(蜀)의 제 2대 황제인 유선(劉禪: 후에 태어나는
유비의 아들)도 장판파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럴 리는
없지......하지만 감옥에 매일 이렇게 쪼그리고 누워
새우잠을 자니 몸이 뻐근하다......아니, 내가 무슨
배부른 소리야! 고문 안하고 먹을 것이나마 고만고만하게
챙겨주는 것이 어딘데!'
화정은 스스로를 원망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건 이후로,
화정은 `편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다.'라는 생각을 지니게 된
것이다. 원없이 편한 자리에서 자고, 맛있는 것을 실컷 먹는
것에 대해 별 생각을 지니지 않고 살던 화정이었기에,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초반에는 운이 작용해서, 도련님인 마초 덕에 그런대로 괜찮은
여관에서 좋은 음식 먹고 잘 지냈고, 이후에는 현령인 유비
덕에 깨끗한 잠자리에 꽤 괜찮은 음식을 먹고 지냈는데,
조운과 지내면서부터 평범한 잠자리에 평범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불편한 잠자리에 겨우 불평 안하는 수준의 음식이지.'
점점 운이 감소하는가 보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혹시,
이후에는 잘 곳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화정은 이곳에 와서야
사람이 사는 것에 있어 기본적인 요소가 부실하면 얼마나
괴로운지 깨달았다.
`앞으로는......철없게 반 아이들이 싸구려 머리핀 사고
인스턴트 반찬만 잔뜩 가져오는 것을 비웃지 말아야지.......
아무래도 내가 너무 뭘 몰라서 신이 벌을 주시는 건가봐......'
어쩌면 이 세계에 와서 더 많은 것을 깨달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전의 그녀는......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쓸 줄
몰랐고, 그나마 얄미운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도 없었다.
생활이 풍족했기에 빈곤한 사람들에 대해 동정만 할 뿐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할 줄도 몰랐고, 자신의 뜻이 옳다고
생각하면 무작정 밀고나갈 줄만 알았다.
`빵이 없다고? 그럼 과자를 먹으면 될 것이 아니야!' 라고
외쳤다던 마리 앙뜨와네트가 남이 아니다. 바로 화정 자신일
수도 있다. 게다가 철까지 없어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면 다
결실을 제대로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결국 이 세계에 와서도 그런 태도를 수정하지 못한 탓에
사사건건 조운과 부딪쳤고, 결국 조운이 느닷없는 채찍질까지
당하게 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얄밉고 못마땅해도, 실제로
더욱 화가 날 사람은 바로 조운이다. 홀로 조용하게 지내던
터에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못 주면서, 사사건건 힘들게
만드는데다, 이런 곳에 와서 나올 기약도 없게 했으니 말이다.
`유비님께 가면.......정말로 극진한 대우를 받도록
도와줘야지......그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보답이 될거야.
밉기는 하지만 잘 따져보면 고마운 점이 더 많은
사람인걸......물론, 유비님에 대한 내 영향력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안 거드는 것보다는 나을거야......'
그렇게 결심하면서, 화정은, 망설이다가 조운에게 낮게
질문했다.
"저, 오......라버니......? 긴밀히 하나만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그녀의 말에 조운은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조운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먼지가 잔뜩 쌓인
땅바닥에 대충 손가락으로 갈겨썼다.
<첩자가 깔려있어.>
그는 그렇게 쓰고 나서 화정이 그것을 보자마자 손바닥으로
비벼서 지웠다. 화정은 조운의 뜻을 알아채고는 입을
다물었지만, 묻고 싶은 생각이 태산같았다. 문득, 이전에
읽었던 전음술을 생각해냈다.
`아, 맞아.......전음을 내가 할 줄 안다면 괜찮았을
텐데......라지만 여기는 사융의 영역이니 만약 사융이
주술사를 데리고 있다면 그 전음을 다 들어버리겠네,
쳇!(고술사는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술사가, 자신이 주술이
시전 가능한 영역 내에 있을 시, 저술사의 전음을 모두 들을
수 있다*작가주)'
잔뜩 투덜거리면서 화정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무력감......이란 단어가 이젠 실감이 난다.
화정은 다시 조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푸르고 서늘한 빛이 도는
철창과, 차갑게 생긴 준수한 얼굴이 이상하게 어울린다.
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슬퍼보일 때가 가끔 있었다. 왜
그럴까? 저렇게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타입이 왜 이런
느낌을 줄까? 속으로 조운에게 본래 물어보려던 말을 삼켰다.
'......계속 공손찬님과 그 수하에게 이렇게 대책없이
당할 거여요? 유비님의 아래로 가고싶은 것이
아니었어요......? 여기서, 이렇게 꼼짝없이 갇혀있을 건가요?'
수많은 의문이 가슴을 타고 내려간다.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타고 전신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화정은 답답함과 안타까움,
초조함을 동시에 맛보았다.
*******
아직도 기억난다. 온 가족이 창칼아래 벌벌 떨고 있었을
때에, 단 둘이서 도망쳤다. 비좁고, 어둡고, 냄새나는 그
땅굴을 통해 가슴을 잔뜩 졸이면서 나갔다. 흘러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에 천조각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따라오는 그를 보려하지 않았다. 더 슬플
사람은 그쪽이니까. 자신은 단지 아버지 하나를 잃었지만,
저 아이는 그 수많은 가족들을 몰살당했다. 그리고......
그 몰살 원인이 그 자신인데, 얼마나 가슴이 저리겠는가.
아마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을 온통
헤집었을 것이다.
<자, 이제, 빠져나가자.>
애써 기운차게 말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던 난, 그제야
잔뜩 후회했다. 더 슬퍼할 것 같아서, 더 많이 울 것 같아서
일부러 보지 않았지만, 뒤에서 따라오던 그의 눈가에는,
전혀 울었던 흔적이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덤덤해
보였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나쁜 자식!>
*******
".......뭐야, 꿈이잖아!"
영각은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마와 등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그의 긴장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의 꿈을 꾸면 항상 이렇게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생생하게 그때를 떠올리도록, 기억력을
자극해낸다.
"에잇, 보약 한 첩 못 해먹으니까 이런 꿈이나 꾸지!"
또다시 밀려오는 무력감과 슬픔, 후회를 없애기 위해 영각은
일부러 헛소리를 내 보았다. 창 밖을 슬쩍 보았다. 해가 중천이
걸려있었다. 조금 의외로군, 이 시간까지 잘 수 있었다니, 하는
말을 중얼거리던 영각은, 아하, 하는 소리를 내면서 혼자
피식거리며 웃었다.
<좀 일어나요! 어떻게 된 게 영각은 매일같이 하는 일이
먹고 놀고 자는 것뿐이에요?!>
예쁘고 맑은 목소리지만 가시가 잔뜩 돋힌 투로 투덜거렸었다.
지금 그녀는, 조운과 함께 소식이 없다. 아마도, 조운의 표현을
빌자면 `귀찮게 할 만한 사건'을 벌린 것임에 틀림없다. 영각은
천천히 겉옷을 걸쳐입으면서 그녀를 떠올려보았다.
`정말 놀랐었지......'
그랬다. 보고는 정말 놀랐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남장을
하고 있었지만,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영각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여성의 얼굴이었다. 단지, 여자가 남장을 할 이유가
거의 없었다고 생각되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닮았지......'
정말 그렇다. 물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화정 측이 훨씬
비교도 안되는 미인이다. 생김새 자체가 닮았다고 말하기는
좀 부족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닮은 곳이 있었다.
유달리 희고 맑은 피부와 콧매, 그리고 작고 갸름한 얼굴형이
닮기는 했지만, 생김새는 사실 그다지 많이 닮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어딘가 모르게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설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그 녀석이 그런
이유만으로 화정에게 정을 준다는 건.......이상하지. 내가
보기에도 화정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영각은 그리 생각하면서 일어나서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열린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이 약간
흔들렸다. 시선을 돌려 창으로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이런 사이에도 세월은 흘러가는가......'
덧없었다. 관리 노릇을 하는 것도, 산적 노릇을 하는 것도
덧없었고, 그저 허송세월만 한 것 같았다. 씁쓸하게 웃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응? 너는......?"
하얗고 반투명한 새. 분명 본 적 있었다. 영각은 턱에
손가락을 대면서 중얼거렸다.
"화정의 영수(靈獸)가 아니냐? 그런데 화정은 어쩌고 여기로
왔지? 영수라면 응당 주인의 곁에 붙어있어야 할 터인데?"
영각의 말에 새가 길게 울었다. 일반 원령이나
아귀강시였다면 들을 수 있겠지만, 영수 상태로 존재하는
봉사령의 의지는 들을 수 없다. 영각은 천천히 상황을
추측해보았다.
"혹시......화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새가 또다시 길게 울었다. 아마 긍정하는 것 같았다. 순간
자신의 혀를 깨물고 `웃기는군, 하긴 무슨 일이 생겼으니
왔겠지, 내 머리도 참......!' 하고 스스로에게 욕을 한바탕
퍼붓고 다음 심문(?)으로 넘겼다.
"공손찬에게 정말로 잡힌거냐?"
새가 긍정했다. 영각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쳇, 나한테 만날 빈둥댄다고 난리치던 그런 계집애,
잡혀가도 싸지."
조금은 시원한 심정으로, 조금은 어색한 심정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하는데 영수가 별안간 날아오르더니 벽에 걸려있던
조운의 옷을 쳐서 떨어뜨렸다. 저놈의 새가 주인 닮아 이상한
짓만 하는군, 하던 영각은 무시하려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휙 돌렸다.
"혹시, 조운 그 녀석도 함께 잡혔어? 그런 뜻이야?"
새가 날개를 퍼덕이면서 날카롭게 울었다. 영각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짜증을 냈다.
"쳇, 뭐야.......자신이 오지 않거든 구해달라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알면서 잡혀가다니, 웃기는 놈 같으니라고.......
어쨌거나 그렇게 신세를 진 놈인데다 어릴 적부터 같이 컸으니
모른 체 할 수도 없고.......어쩐다? 아, 그렇군!"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영각은 벌떡, 일어나 붓을
잡으면서 새를 향해 물었다.
"이봐, 너 이전에 나랑 조운과 화정이 첫 대면한 곳 알겠지?
그곳으로 편지를 전해다 줄 수 있어?"
새가 길게 울었다. 영각은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다시 질문했다.
"아현이라는 여자, 알아? 분명 조운이 나를 도망시키고 나서
뒤쫓는 척을 할 때 조운과 화정을 가로막았을 텐데......왜,
눈은 좀 길게 찢어지고 무섭게 생긴데다 갑옷 입고있던
여잔데......알겠어?"
새가 날개까지 파닥거리면서 몇 번을 우는 것으로 보니
확실히 안다는 뜻 같다. 피식 웃던 영각은 흡족한 마음으로
새를 보았다.
"이제보니 참으로 영특한 영수구나! 본래 영수들은 너만큼
똑똑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아마도 넌 지식(知識)을 관장하는
계열의 영수인 것 같군그래......핫, 화정은 생각보다 별난
곳이 있다니까!"
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새가 몸을 가늘게 떨면서
물러났다. 영각은 그제야 영수들은 주인이 아닌 다른 자와의
접촉을 피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소 섭섭한 심정으로 투덜거렸다.
"하긴......난 영수를 부릴 실력도 안되지......난 영수같은
것말고 수호령(守護靈)이나 얻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기왕이면
끝내주는 미인으로 말야. 화정 정도면 당연히 대만족인.....
아얏, 아얏, 아야야.......주인 닮아서 성질도 참
이상하......아야야야야......."
영각은 자신에게 옅은 기를 내쏘면서 자신의 머리를
따끔거리게 만드는 새를 쫓기 위해 붓을 휘두르다가 그만
자신의 귀와 뺨에 진한 먹선을 긋고 말았다.
*******
"미친 거 아냐?!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걸
그냥......!"
머리에서 바글바글 솟아오르는 김을 억제하면서 편지를
내동댕이쳤다. 잔뜩 짜증을 내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아현을 보고 창틀에 앉은 새가 움찔했다. 새의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무심코 눈길을 돌렸던 아현은 이마에 손을 얹으면서
입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어디서 신기하게 영수를 알아서 보내왔네. 황호가 실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영수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아현은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는 내동댕이쳤던 편지를
다시 집어올렸다. 편지에는 자신을 저번에 도망가게 해준
치안대장이, 이전부터 늘상 이야기해오던 조운이라는 사연과,
그들이 붙들려 간 것 같다는 사연, 그러니 구체적으로 어디에,
무슨 죄목으로 갇혀있으며 옥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가 누군지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아현은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신중하게 읽고는 다시한번 신경질을 부렸다.
"결국, 이전의 산적떼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 아니야?!
손떼기로 했다면서 도망치듯 떠난게 누군데 이제와서......."
하면서 아현은 편지를 다시 집어들었다. 끝구절로 눈이 향했다.
그녀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불끈 솟았다.
"사랑하는 아현, 이 오라비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다, 라니!
표현 좀 바꾸면 어디가 덧나나, 백날 사랑하는 아현, 오라비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다.......아이고, 지겨워 죽겠네! 확,
모른척 해 버리......자니 좀 그렇고......
마지막이라고 말해서 진짜 마지막이 된 적도 없다고! 내가
왜 이런 녀석과 의남매를 맺어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말이지!
만날 저가 일을 벌려놓으면 내가 뒤처리를 해야 하는 거냐고옷!"
아현의 불평이 끝나자 옆에 앉아있던 영수가 길게 울었다.
매우 높은 소리를 내어 구슬프게 우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
잡혀간 사람 둘 중의 하나가 이 영수의 주인인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수가 이렇게나 구슬프게 울 이유가
없으니까.......아현은 편지를 꼬깃꼬깃 접어서 품에 대충
쑤셔박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밉기는 하지만.......어쩌겠어.......? 그래도
나한테는 생명의 은인이자 스승인데.......기왕이면 좀 번듯한
사람을 은인으로 만났어야 했는데, 나도 운이 지지리도 없다니까!'
불평만 하면서도 아현은 장 속을 천천히 뒤지기 시작했다.
작고 날카로운 비도(飛刀)와 약간의 은자를 꺼낸 아현은 곁에서
머리끈으로 긴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묶어서 올리고는 두건을 썼다.
아마 이전처럼 산적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면, 좀 날랜 녀석
몇을 뽑아서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일로
산적 일당은 대부분 관군에 항복했거나, 산채를 떠나간 상태였다.
그래서 아현 홀로 이 산채에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영각이 아현에게 다른 것도 아닌, 정보에 관해 부탁을 한 이유는,
아현의 무술이 잡입과 속도를 중요시하는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사실, 산채 내에서도 아현의 잡입솜씨를 따라올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현은 채비를 마치고 탁자 위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대충 글씨를 갈겨썼다.
<실행하겠으니 대략 6, 7일 가량만 기다려.>
그녀는 그 종이를 몇 번 흔들어 빨리 글씨가 마르도록 했다.
그렇잖아도 바람이 약간 부는 날이라 그런지 글씨는 금방
말라주었다. 아현은 그 쪽지를 한번 더 살핀 연후에 조그맣게
접어서 가는 끈으로 묶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영수에게 그
편지를 묶어주면서 중얼거렸다.
"단 한번 봤던 날, 찾아왔으니 넌 꽤 영특한
영수같은데.......너 혹시 이 근방의 주점을 알고 있어? 이
근방에는 주점이 하나 뿐인데......"
영수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카롭게 울었다. 아현은
짜증을 냈다.
"이봐, 그렇게 표현하면 모른다는 건지, 안다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알면 날개를 흔들고, 모르겠으면 소리를 내."
아현의 말에 영수는 날개를 몇 번 흔들어댔다. 아현은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야, 이제보니 너 참 대단한데? 보통 영수들은 주인
이외의 사람들 말은 잘 못 알아듣던데......영각이 어디서
기가 막힌 영수를 알게 된 모양이구나. 아무튼, 그럼 일단
내 편지를 황호에게 전해주고, 가능한 빨리 그 주점으로 와.
난 거기서 묵을 테니까. 네 안내가 있어야 어딘지
대략이나마 알 거 아냐. 그렇지?"
영수는 가늘게 몸을 흔들고는 아름다운 날개짓과 함께
희뿌연 빛을 뿌리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아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참, 아름다워.......저 영수를 지닌 사람은 정말 마음씨가
고운 모양이야. 그러니까 영수가 저렇게 예쁘고 하얀 새로
변했지. 영수는 주인의 상태에 따라 모습이 정해지니까.......
아니, 내가 뭘 하고 있지?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늦기 전에
어서 채비를 확실히 해서 성으로 떠나야겠다!"
속으로는 `영황호, 다시 보면 두고봐라!' 하고 벼르면서도,
영각의 부탁에 따라 나서는 착실한 아현이었다.
*******
"저기......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요?"
옥지기가 잠시 교대하려고 나간 틈을 타서 화정이 조운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옥에 갇힌 이후로 화정은 되도록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람을
꽤나 화가 나게 하는 일만 잔뜩 벌려놓았는데, 이 이상
사건이 터진다면 정말 미안하게 되는 것이다.
영각이었다면 분명 화정에게 한소리를 줄줄이 늘어놓아
무안하고 씁쓸하게 했을 터이지만, 속깊은 조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으면서 화정이 깨달은 또 한가지는, 그저
얄밉고, 사람을 깔아뭉개는 줄 알았던 조운이, 속이 깊다는
점이었다.
식사가 처음 나왔을 때,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먹으려는
화정을 만류한 조운은 자신이 약간을 먹어보는 것이었다.
멋모르고 화정이 `저만 배터지게 먹고 나한테는 조금만
남겨준다, 이거지?!'하고 속으로 씩씩대는데 - 여기서 자신의
그 `철없는 이기성' 이 또 나타난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 그는 단 한 번만 먹고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음식쟁반을 그대로 화정에게 내밀었다. 어리둥절해진 화정이
조운을 물끄러미 보자 조운이 낮은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이런 곳의 음식은 함부로 먹을 것이 못되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혹시나, 무슨 독이나 약 같은 것이
있을까봐 자신이 먼저 먹어보았던 것이었다. 정말 고마웠다.
만약에, 그 음식에 독이 있었더라면 자신이 먼저 죽었을 지도
모르는데도......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는 내내, 눈물이
목으로 넘어갔다. 매우 배가 고픈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이
넘어가는 것처럼, 입맛이 없었다. 훌쩍거림을 열심히
짓누르면서 음식을 땅에 내려놓는데, 조운이 조용하게 권했다.
<좀 먹어두는 것이 좋아. 버틸 힘은 있어야 하니까.>
화정은 자꾸만 나오는 흐느낌을 삼키면서, 일부러 볼멘
소리로 쏘아붙였다.
<조운은.......오라버니는 안 드......세요? 분명 배고플텐데
내가 혼자 먹었다고 뭐라 하지말고 먹어요. 많이......
남았어.......요......>
조운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돌려 철창 바깥을 응시했었다.
화정은 그것이, 무언의 대답인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배고픔을 겪어본 그로서는 상관이 없다는 뜻인 것 같이
해석되었다. 하기는, 좀 혹독한 수련을 겪었을 지도 모르고,
혹독한 가난과 기근을 겪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아직도 철이 없고, 아무리 보아도 마냥 공주님 타입인
화정에게 식사를 양도한 것이다. 화정은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내 눈물을 떨구었었다. 한사람에게 이렇게나 미안해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눈물이
많다는 것을 안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화정은
한숨을 길게 내쉬다가, 아직까지 옥지기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화정은 그제야 조운이 왜 아직까지
철창 바깥을 저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는지를 알아챘다.
".....좀 늦네요......? 안 들어오고 있어요."
화정의 말에 조운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화정은 조운과 더불어 철창 밖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도 안 들어오자 시선을 돌렸다. 옥지기만
없다면야 다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될 것이다.
이 끔찍한 고문실은 사융의 수하들도 싫어해서 옥지기 임무만
아니면 되도록 안 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화정은 며칠 정도
있으면서 파악해냈다.
"저기......만약에 공손찬이 우리를 풀어주지 않......
아서.......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여요......"
눈으로 다시 철창 밖을 살피면서 낮게 속닥거리는 화정에게,
조운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화정은 계속해서 바깥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만약에 빠져나갈 수 있게되면......그러면 말여요,
도망쳐서......나와 함께 유비님께......가겠어요......?"
목으로 쓴 침이 넘어갔다. 조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채로 침묵이 몇 초정도 흘러가자 답답해진
화정이 답을 재촉하려고 고개를 거칠게 조운에게 돌렸다.
입을 열려는데 조운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의아해진 화정은 철창 밖을 다시 살폈다.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속으로 이 나쁜 타이밍을 열심히 저주하면서 화정은
언짢은 기분으로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여지껏
웅크리고 앉아있던 다리가 순간적으로 저려왔기 때문이었다.
투덜거리면서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팔짱을 끼는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어......?"
화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운이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옥지기 차림새는 맞지만, 좀 체구가 작다고
해야할까. 여자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화정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가까이로 다가왔다. 화정은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이상한 쇠막대
같은 것을 꺼내더니, 열쇠 구멍에 그대로 쑤셔넣고는 몇 번
휘저었다.
철커덩.
다소 혐오스러운 쇳성을 내면서 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화정과 조운은 그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그가 투구를 벗었다.
"어, 당신......!"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는데, 여자는 손을 들어 화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운이 낮은 음성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황호의 의매(義妹)라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고 낮은 어조로 말했다.
"이곳에서 빼내드리기 위해 황호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서두르세요."
화정은 여자의 손을 밀치고는 낮게 말했다.
"저, 여기에는 감시가 잔뜩 깔려있어요!"
누구는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간 줄 아나?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감추고 있는데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화정은 다급한 나머지 아현을 밀쳤다.
"어서 숨어요! 누가 오고 있어요!"
아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걱정말아요. 두 사람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괜찮아요."
순간, 아현은 재빠르고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날렸다.
갑자기 사라진 모습을 보고 멍해진 화정이 `와,
신기하다......' 하고 중얼거리는데,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약간의 불빛에 들어온 사람의 얼굴이 보이자 화정은
심장이 통째로 내려앉으면서 쿵쿵거리면서 뛴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융이 아닌가.
"자네에게 좋은 소식이 있네."
아현이 들어왔다는 것을 모르는지, 사융은 그 앙상하게 뼈만
남은 얼굴에 다소 음흉한 인상을 주는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좋은 소식이라 하면 어딘가 불안해, 하는
심정으로 조마조마하게 사융을 쳐다보는데, 조운이 되묻는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처럼 심장이 안 뛰나?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만약 난
이 상황에서 말을 했다면 말을 더듬더듬 했을 것 같은데......
"이전의 자네와의 옛 정을 생각하시어, 태수께서 자네에게
기회를 주기로 하셨다네. 이번 일만 잘 해내면 자네는
사면(赦免)될 뿐 아니라 좌천에서 풀려 다시 북평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세. 이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게."
가슴이 여전히 콩딱거리면서 뛰었다. 아현이 어디로 숨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저 제안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얼마나 위험한 임무면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하던
사람을 사면시키고 복직까지 시켜준다는 걸까. 화정은 초조한
심정으로 사융의 입만 쳐다보았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이마에 힘줄이 다 서고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동탁에게 사신으로 가 보도록 하게."
쿠쿵.
순간 화정은 주변의 광경이 무너지는 환상을 보았다. 짧은
말이었지만 역시나 어마어마했다. 동탁에게 사신으로 가
보라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화정은 문득, 동탁에
대해 읽었던 한 구절을 회상해내고 있었다.
*******
『동탁은 정원의 수양아들 여포를 꾀어 정원을 죽이도록
계교를 꾸며 수도의 병권을 오로지 하게 된다. 수도의 전
병권을 거머쥔 동탁은 숨겨진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어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을 주살하고 그들의
수급을 취해 오랑캐들을 토벌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며
악정을 펼치게 된다.
동탁의 이같은 행동은 민중의 공포심리를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동탁의 입장에선 가장 빠른시일 내에 모든
세력을 귀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공포심리라는게 그
같은 공포가 차츰 반복되면 면역이 생기는 거라서 동탁은
차츰 더 악랄한 방법을 취하게 된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의
귀를 자르고 눈알을 파고 솥에다가 삶아버린다든지 상상도
안가는 미친 짓을 하게된다.』
*******
`그 동탁이......맞겠지? 틀림없이 그 동탁일 거야.
세상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악질에게 보낸다는 거야......?
동탁은......삼국지에서 악인(惡人)의 대명사인 사람인데!'
몸이 다 떨린다. 화정은 간절한 심정으로 조운을 쳐다보았다.
만약 사융만 없었다면 화정은, 어차피 아현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해 줄지 모르니까 그냥 거절하고 나서 빠져나가자,
라고 대뜸 외쳤을 것이다. 물론, 화정이야 무섭다면 안 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조운이 설마 죽지는 않을 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다. 결국 역사는 이전에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흘러갈테니까.
그렇지만, 왠지 그렇게 하기가 싫어졌다. 동탁. 단어만 들어도
속이 메슥거린다.
"......태수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화정이 당황하면서 조운을 쳐다보는데,
사융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너구리같이 능글능글한
낯짝에 띄우는 미소는 아무리 봐도 짜증이 다 난다.
"그래, 그렇다면 내일쯤 해서 자네는 석방될 걸세. 만약,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도중에 도주한다거나 한다면......
설마하니 자네가 그럴 사람은 아니겠지?"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화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융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아직도 감추지 못한 채 당당한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사융이 나가자마자 화정은 조운에게 얼굴을 찌푸리면서
외쳤다.
"미쳤어요? 동탁이 뭐 너그럽게 잘 왔네, 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여요?!"
너무 미안해서 그 채찍 사건 이후로는 조운에게 빽빽거리지
않기로 했는데, 답답한 심정에 그런 결심 따위는 날아갔다.
"이건, 일부러 그러는 거여요! 사신으로 보냈다가 무슨 변이
날지 모르니까 어차피 죄수인 조운을......아, 오라버니를
보내려고 하는 거여요!"
이런 말, 첩자가 있었다면 들었을 것이다. 조운이라고 이름을
직접 부르는 점 이외에도, 그 첩자가 일러바칠 만한 내용이다.
결국 조운을 조운이라 부르든 오라버니라 부르든 걸릴 상황이었다.
오라버니로 단어를 고친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
이런 어긋난 말을 할 정도로 화정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정말 갈수록 미련한 짓은 골라서 다 하네요! 처음에는
좌천되는 것도 무릅쓰고 산적두목을 보내고, 이제는 동탁에게
사신으로 간다고 해서 목숨을 걸다니. 그 다음엔 정말로 죽을
건가요?"
화정의 빈정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현이 사뿐이 내려섰다.
화들짝, 심장이라도 떨어질 듯 놀라는 화정을 보면서 아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놀라지 말아요. 천장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천장......에 매달려 있다니......요......?"
`박쥐도 아니고......'
의외의 말에 멍해진 화정이 되받는데, 아현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켜보였다.
"철로 되어 있어서 더 쉬웠죠. 흡착술(吸着術)을 이용해서
양손과 발을 천장에 붙이고 있었어요. 어쨌든 그보다, 덕분에
사융과 당신들의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어요."
"아......"
철에 붙다니......혹시 손바닥에 자성(磁性)이라도 일으켜서
붙어있던 걸까? 그런 기술도 다 있구나, 하며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아현은 조운에게 묻는다.
"조운, 왜 이런 짓을 했죠? 굳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내가 도와주었을 텐데요. 동탁의 성품을 모르지는
않을 거여요."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화정이 곁에서 혀를 차면서 빈정거리는데 아현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화정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제야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 화정이 얼굴을 돌렸지만, 조운의 말이 그들의
상황을 간단하게 타개(打開)해 버렸다.
"의매라지만 영각과 달라도 너무 다르군. 당신은 이곳을
간단하게 뚫고 나갈 수 있다 생각했소?"
다소 꾸짖는 투에 아현은 기분이 나빠졌는 모양이다.
"아니, 남은 기껏 생각해서 도우러 왔더니 대하는 태도가
그거에요? 그리고, 당신 정도 무력이면 여기 조무래기들이야
쓸면 되잖아! 뭐가 힘들죠? 동탁에게 가서 죽는 것보다
낫지 않아요?"
속으로 나도 찬성이에요, 하는 생각으로 화정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저 여자, 다소 성질이 급한 곳도 있지만
의외로 시원시원한 곳이 있다. 조운은 차갑게 잘라말했다.
"그렇게 되면 무리가 생기오."
그 말에 아현도, 화정도 입을 다물었다. 화정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자룡, 공손찬에게서.....벗어날 생각이 아니었어요?
어차피 벗어날 거면 그렇게 해도......무방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에는 아현이 `맞다, 맞아.'하면서 화정의 말에 찬성을
해 주었다. 조운이 한심하다는 듯 받아쳤다.
"공손찬님과 유비님은 절대에 가까운 우호세력이오. 게다가,
공손찬님은 현재 동탁에게 크게 원한살 일은 없으셨으니
사신이 반드시 죽는다 할 수는 없지. 차라리 이를 택하는
것이 옳다 생각하오."
`아차, 그렇구나......!'
화정은 순간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현만이 조운과 화정의 조용한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궁금해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다. 조운의
말이 옳다. 공손찬은 유비의 절대 우호세력이다.
그것도, 공손찬이 유비의 뒤를 보아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하인 조운이 공손찬의 포위를 무리하게 뚫고
유비에게 간다면, 공손찬과 유비의 사이가 갈라질 것은
자명하다. 화정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숙였다.
`내가......우물안 개구리(井底之蛙)였구나......생각이
짧았어! 당장의 유리한 점만 생각하다니......'
두 사람의 속마음도 모른 채 아현은 혼자 떠들었다.
"왜요? 아니, 유비님과 공손찬이 우호관계라는 것이
뭐가 그렇게 상관이 있는데요?"
`저 여자, 정말 뭘 모르나봐.......'
*******
여하튼, 아무리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라지만,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화정에게는 도성(都城)인
장안(長安)으로 간다는 것은 정말 설레는 일인 모양이었다.
어제 하는 양을 보면, 분명 혼자서 어디론가 빠져나가려던
눈치였는데, 웬일로 그냥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보다시피 저렇게 짐을 싸고 있다. 그녀를
곁눈질하던 영각은 옅게 웃고 말았다. 묘한 아이다. 무뚝뚝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지만, 그리고 표정도 몇 개 없지만 이렇게
뚜렷하게 감정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영각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차차, 오래 생활하면서
대략적인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첫 인상은 깐깐하고 자기
중심적인 대가집 규수였지만, 점점 그 인식이 풀어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위할 줄 알았으며
감정도 다양한 사람인 것 같았다. 비록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늘 딱딱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일단 눈매가 좀 도도한 곳이 있는데다 코가 유난히
오똑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도 그렇고 여하튼......
그녀에게는 뭔가 모를 어떤, 특별한 것이 있었다. 똑똑하고
화술도 뛰어나며, 미모와 자태도 특출나 어디 한구석 빠지는
곳이 없지만 뭔가 모를 허전함이 느껴진다. 그 허전함이
선천적 미모와 어우러져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재주도 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저번에는 있지도 않은
무경미석으로, 자신을 붙들어가려던 도적들을 거꾸로 잡아왔으며,
이번에는 자신의 영수를 놓아보낸 덕에 아현이 가기 쉽도록
유도했었다. 게다가, 구경조차 하기 힘든 영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더더욱 신기하다. 다만.......
`그런데 어떻게 요리나 청소같은 것은 못하는지.......아니,
가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영각은 멈칫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조운에게 이전부터 하려던 말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아, 그렇군! 자룡, 이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말일세!"
크게 외치자, 곁에서 무엇인가를 살피고 있던 조운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 바로 그것이다.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감추고,
겉으로는 저렇게 빈곤한 표정들을 하고 있다. 죽마고우에게도
저런 얼굴로 돌아보다니, 저런 나쁜 놈.
"태수에게 원조금도 꽤 넉넉하게 받았으니까 하녀를 고용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물론, 객지로 나갈 입장이니 사먹게 되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화정이 발끈하며 영각의 말허리를 자르는데......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다고 했......"
그런 화정의 말을 조운이 잘랐다.
"그게 좋겠군."
무안해진 화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영각기 화정을 흘깃거리며
보면서 킬킬거렸다.
"그렇지? 역시, 자네도 맛없는 식사를 매일 먹는 것에
질렸겠지? 맛이 없는 거야 뭐, 좀 참고 먹겠지만, 이건 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수준이어야 먹든 말든 하지.
도저히......"
"영각."
한소리 하려는지 화정이 한쪽 눈썹을 세운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붉어진 얼굴에 조금은
무안함이 감돌텐데 저 아이는 도리어 위엄이 감돈다. 참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하다. 그런데......
"저, 실례합니다......"
끝이 흩어지는, 자신감이 없는 어조에 작은, 여자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일까? 여자라니, 분명 아현은 다른 곳으로
떠났고, 화정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다, 조운이 여자와
알고 지낼 놈은 아닌데 웬 여자가......? 영각은 잠시 멈칫하다가
자신이 나가려 했다. 그런데 화정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갈께요."
말릴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 빠른 걸음이라지만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어딘가 모를 아름다움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집에서 자란 소녀는 아닌 듯하다고,
영각은 거듭 생각했다 - 화정은 사라졌다. 조운이 영각을
바라보자 영각은 손을 열심히 휘저었다.
"난, 최근에는 만난 여자가 없다구. 그러니 의심 말아.
얹혀살면서 여자까지 끌고 들어오게 할 놈은 아니란 것,
믿어주겠지, 조자룡?"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놈은 절대 안 믿는 듯한 눈치다.
영각은 일부러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돌렸다.
*******
화정은 문을 천천히 열다가,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아주 옅은 갈색의 긴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칼과 꼭 같은 갈색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어머, 이 시대에도 운록 외에 저렇게 옅은 머리칼을 지닌
사람도 다 있었네......?'
약간 누런빛이 도는, 어두운 톤의 피부색과, 화정보다는
작지만 이 시대 여자치고는 좀 큰 키였다. 코도 별로 높지
않고 입술색도 약간 흐려서 인상이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쌍꺼풀이 없으면서 큰 눈에 담긴, 갈색의 눈동자가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허름하지만 깨끗하게 빨아입은 단정한
차림새와 옆구리에 끼고있는 책이 조용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정말 따스한 이미지다. 예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화정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아!"
화정을 뚫어져라 보고있던 여자가 조그맣게, 탄성 가까운
소리를 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정의 곁으로
다가서더니, 열심히 화정을 뜯어보는 것이었다.
"저, 무슨 일이시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렇게 무엇 고르듯 관찰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언짢아진 화정이 다소 가시가 돋힌 목소리로 묻자,
여자는 그제야 민망해졌는지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쑥스럽게
답하는 것이었다.
"어, 어머......! 죄송합니다. 큰 실례를 했군요. 너무
신기해서......정말, 정말 제가 본 적 있는 어떤 여자랑 너무
닮으셨거든요. 정말, 똑같게 생겼어요. 닮은 것이 아니라
아예 똑같아서......후훗....."
여자가 짧은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
그녀는 다시 조용한 표정으로 돌아가 화정을 천천히 응시했다.
`닮았다니? 난 여기 온 지 별로 안된데다 이런 여자는 본
적도 없는데......?'
조금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에서 자신을 알아볼
사람은 없다 확신하고 말을 차갑게 잘랐다.
"그나저나......어떻게 오셨지요?"
다소 쌀쌀맞은 화정의 말에도, 여자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마도 이 여자......화정이 살던 세계의 사람이었다면 꽤나
예쁘장하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여자는 차분하게 답했다.
"예, 이곳에......저, 혹시 제 남동생을 구해 주신 분이
아가씨이신가요?"
"남동생......? 아, 혹시......이전에 그 사씨(邪氏)댁에서
쫓겨났던 그 아이......?"
기억났다. 비쩍 마른 몸으로 열심히 구걸하던 그
남자아이가......화정이 되묻자 여자의 얼굴이 약간 환해졌다.
"기억해 주시는군요! 사실......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저, 사례라도......"
"별일 아닌걸요. 사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 돌아가세요."
이 여자, 느낌은 좋지만 이전의 그 남자아이 때문에 겪은
곤욕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서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아진다.
또다시 남의 일 때문에 말려드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다시 다져보았다. 하지만, 화정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여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꼭 도와드리고 싶어요. 제가 비록 가진 것은
없어서 큰 보답은 못해드리지만......잡일이라도 시켜주세요.
그렇게라도 해서 하나밖에 없는 저의 동생......살려주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아니, 저렇게까지 말을 하면 정말 내쫓기가 힘들어지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망설이고 있는데, 별안간 여자가 땅에 엎드렸다.
"......이봐요, 소저!"
"부탁드립니다! 저를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요리든, 청소든, 바느질이든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보수를
바라고 온 것은 절대 아니니 걱정마세요......꼭 돕고 싶어요."
화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하녀까지 자청해서
따라오는 처지가 다 되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마악 길을
떠나려던 참에 말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간절하게 아래로
있고 싶다는데 거절하기는 왠지 너무 미안했다.
또한 무보수라는데......어차피 길을 떠날테니 그때까지만
있으라 하면 되겠지, 뭐. 그렇게 생각한 화정은 조운과 영각
역시 하녀를 원하던 입장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긴 한숨섞인
긍정을 해 주었다.
"좋습니다.....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차마 보낼 수
없겠군요. 그러니 이만 일어나세요."
"네."
공손하게 답하고 그녀는 자리에서 그제야 일어났다.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영(我暎)이라 합니다."
아영이라, 아현과 성이 같잖아? 좀 신기한데......? 혹시
같은 집안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화정은 얼떨결에
자신도 스스로를 소개했다.
"네, 저는 유화정(柳和貞)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들 그냥
화정이라고만 부른답니......"
"어머! 유화정이라니!"
갑자기 여자의 눈이 빛났다. 화정은 속으로 적잖이 놀라면서
그 아영이라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약간 누른 낯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 혹시......효진그룹 총수의 외동따님.....이라던......?"
"?!"
그 말에 화정은 그만 누군가 머리를 엄청나게 무거운 쇠망치로
친 듯한 충격을 받으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몸이 휘청, 했다.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물론, 그쪽 세계에서는
신기할 것도 없었다.
신문에도 자주 오르내리던 이름이고, 아버지 회사에 무슨
사건이라도 터지는 날이면 화정이 다니는 고등학교 앞까지
기자들이 빡빡하게 모여서서 플래시를 연간 터트려 댔으니까.
아마,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은 이천 년대의 한국이 아니라 3세기의
중국이라는 것에 있다. 당황하는 화정을 보면서 여자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역시, 대답이 없으신 것을 보니 맞군요! 효진 총수한테
외동딸이 있는데 엄청 예쁘다는 소리는 TV에서 매일같이
들었어요. 그래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 보니 그때
그......마지리오 화장품사(社)의 초기 모델이었던
사람이군요! 야아! 혹시나 싶어서 말해본 건데 얼굴에 약간
경련이 이는 것을 보니까 틀림없는 것 같아요!"
이럴 수가......화정은 다시한번 몸이 후들거리며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가까스로 자신의 충격을 제압했다. 어쩌면
저렇게 콕콕 찍어서 알아내는 걸까. 부정하고 싶었지만, 절로
긍정하는 말이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어떻......게......?"
그녀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드는 것을 보아,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마지리오 화장품 회사도 알고, 효진그룹도 알고, TV도 아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저곳의 사람이었다. 나만 이곳에 떨어진
것이 아니었던 걸까?
"저의 본래 이름은 이아영(李我暎)이에요. 그런데 여기
사람들이 자꾸 두 자로만 부르는 바람에.......그냥 아영이
되어버렸죠. 전, 이천 년대의 한국에 살던 평범한
여고생이었는데......어느날 잠을 자다가 눈을 떴더니 여기
와 있었어요......"
저쪽 역시 같은 이세계(異世界) 사람을 만나자 자못 감회가
새로웠던 모양이었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훌쩍임이 섞여 들어
있었다. 화정은 너무 뜻밖의 사건에 그만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하며 팔짱을 끼었다.
"정말.....처음에 뵈었을 때 그 화장품 광고 모델이
생각났어요. 똑같았거든요. 그 모델, 너무 예뻐서 포스터를
가게 주인한테 졸라 얻어왔었어요. 그래서 기억하고 있어요.
오죽 예뻤으면 그 신생 화장품 회사가 단번에 브랜드 사가
되었냐고요. 정말 영광이에요. 그런데 그 모델이 효진그룹
총수의 외동딸 유화정이었다니......믿지 못하겠어!"
그녀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손바닥으로 감싸
식히면서도, 화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안해진 화정은
그저 말이 안 나올 따름이었다.
"정말 부러워요. 어쩜 이렇게 키도 크시고......정말 인형같이
생기셨네요. 너무 예뻐요. 난 눈동자가 회색이기에
칼라 렌즈라도 낀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회색인 걸 보니
본래 회색이신가봐요. 너무 신기해.....사인이라도 받아야
하는데.......아, 하기는 여기서는 의미가 없겠지요.......?"
그렇게 어조를 낮추며 고개를 숙이는 아영을 본 순간, 화정은
한가지를 깨달았다.
`이 여자도 그쪽에서 왔다면......혹시 저곳으로 갈만한
실마리를......!'
급해졌다.
"그렇다면 아영씨......혹시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조금이라도 추측되는 것은 없으신지요?"
그 말에 아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머, 저는 화정님께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순간적으로 몸이 굳은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만
하고 서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실망해서 일 것이다.
화정은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실감하면서 멀거니
아영을 쳐다보았고 아영 역시 적잖이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쪽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역시......휴, 그렇다면 운록 밖에 기댈 수 없는 걸까?'
화정은 운록의 쌀쌀맞은 말투와 퉁퉁 부은듯한 얼굴을
상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운록이 화정을 달가워하지 않듯,
화정 역시, 운록이 대하기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차,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 그렇다면 안에 잠깐 들어오세요......저 말고
두 사람이 더 있거든요."
화정의 말에 아영은 생긋 미소지으면서 양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를 해 보였다.
"예, 그렇다면 잠시......."
참 푸근한 미소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은은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지도 않는데, 정말 언니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너무나 은은해서, 사람들의 눈에 한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있다면 반드시, 한번 정도는
돌아볼 것 같은 사람이었다.
정말, 고대 중국인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꽤
고분고분하게 적응을 했는 것 같다. 화정은 아영을 힐끗
돌아보면서 `같은 이천 년대의 사람이 이곳에 떨어졌어도
적응도가 이렇게 다를 줄이야......'하고 중얼거렸다.
"......네에?"
화정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좀 놀란 듯이 이렇게
묻는 아영에게, 화정은 속으로 화들짝 놀라면서
`귀도 밝네.'하는 빈정거림을 놓고는 얼버무렸다.
"아, 아뇨. 이곳의 사람은 두 명이나 된다고요."
"?"
"이쪽으로 오세요."
사람의 인연이란 기이한 곳이 있다. 분명, 아영과 화정의
만남은 누군가가 장난을 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같은
이천 년대의 사람 수십 억 중에서, 그것도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고대 중국의 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보통 인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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