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장안행(長安行)
"장안은 분명 엄청나게 클 거야!"
흥분한 얼굴로 즐겁게 말하는 아영의 얼굴에서는 밝은 빛이 머물고
있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즐겁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영은 일행
중에서 걸음이 가장 빠른 것 같았다. 그런 아영을 보던 화정은
갑작스럽게 막막하게 다가오는 현실 생각에 그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는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로 유비에게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여지껏 자신의 철없는 행동에 많이 곤란을 겪었던 조운에게 마지막으로
뭔가 은혜를 갚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오고 말았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보은(報恩)을 한단 말인가. 당장 죽을 지도 모르는데......동탁을
보러 가는 길이 꼭 염라대왕을 보러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아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화정,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아니......"
그 말에 화정은 뜨끔,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영은 호기심이 생기는
표정으로 화정을 응시했다. 알고보니 아영의 나이는 화정과 동갑이어서,
말을 놓고 지내기로 한 셈이었다. 이런 세계에서 동갑친구, 그것도 같은
시대 같은 나라 출신 - 어감이 이상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吳)나라
어디어디 성 출신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 인데 굳이 말을 높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해서 놓았던 것이다. 아영이 하녀인데 어떻게 말을 놓겠냐고
빠득빠득 우기며 생각보다 고집을 굽히지 않아서, 설득시키느라 정말
애먹었다. 여기 와서까지 아랫 사람을 달고 다니는 것은 지겹다.
"뭐 이전 같았다면 장안은 즐거운 곳이었겠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구."
영각이 아영의 기대감을 무자비하게 잘랐다. 아영이 갑작스러운 영각의
개입에 화들짝 놀랐는지 몸을 움찔했지만, 영각은 아랑곳 않고 계속
투덜거렸다.
"그 동탁이란 놈의 감시자가 온 도시에 깔려있지......말 한마디 실수하면
끌려가게 생겼는데, 즐거울 것 같아, 아가씨?"
그 말에 아영이 입을 다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화정 역시 따로 할
말은 없는지라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았다. 사실 무섭기는 화정도
마찬가지다. 그저 장안에 들렀다 오는 거라면 좋겠지만 문제는......
사신으로 가는 것이므로 동탁을 직접 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화정과
나머지 일행이야 안 들어가도 괜찮겠지만 조운은......
`안 들어갈 수가 없겠지.'
걱정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저 사람도 참 가엾다. 기껏 목숨 구해줬더니
공손찬은 계속 찬밥을 먹이고 있는 실정이고, 이런 주인 이후에 섬기게
될 유비는, 물론 조운을 극진히 대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보상을 받지는 못하지, 고생한 것에 비해서.......'
유비를 평생토록 따라다니면서 온갖 힘든 일을 겪지만 이후에 합류하게
될 마초나 황충에 비해서도 대우를 못 받는다. 이전에, 유비가 촉(蜀)을
정벌한 이후 헌제(獻帝)에게 올렸다던 표문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안에
아마, 오호 대장 중 조운의 이름만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관우, 장비,
황충, 마초 외의 오호대장이 조운이 아니라 위연(魏延)이었다는 소리도
있다. 작위도, 제후로 봉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오호대장이 모두
후(侯)에 봉해졌을 때 조운은 이에서 제외되었고, 유비가 죽고 나서 꽤
시일이 흘러 강유(姜維) 등이 불공평하다고 진언하자, 후주(後主)*가
그제야 순평후(順平侯)로 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삼국지에서 좋아하던 인물 중 하나였기에 좀 씁쓸해 한 적도 있다.
`하기는......어쩔 수 없는 일이야. 마초는 그나마 태수의
아들이었는데다 유장(劉障)*을 설득해서 공을 세울 수 있었고,
황충(黃忠)도 어느 정도의 기반이 있었다지만......조운은 아무것도
없어. 출신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다지 대단한
집안도 아니었던 것 같고......본래 기반이 없는 사람은 올라서기
힘든 것이 현실이니까......'
그렇다. 사실 공손찬도 생각해보면 대단한 위인인 것이......명문가
출신인 원소나 비교적 부호였으며 높은 벼슬에 있던 집안의 아들인
조조 등과는 달리 유비처럼 가진 것 없이 바닥에서 출발하여 지금
정도의 세력을 구축해 냈다는 점이다.
신분제가 형식적으로라도 폐지되었으며 지금보다 비교적 신분의
이동이 자유로운 이천 년대에도 기반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러나 공손찬은, 몇 천년전의 이 보수적인
사회에서 그를 이루어 낸 사람 중 하나이다. 물론 사회가 혼란하고
상하 질서가 어지러우니 그 기회를 탄 것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여하튼 대단하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물론, 그에 대해 스스로
도취되어 오만에 젖어서 결국 망하게 되지만......
`유비님도 그런 스타일이지. 생각해보면 유비님이 대단하기는 한
사람이야. 정말 한 푼 없이 시작했으면서 일개 왕조를 구축해내니......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조운은 그렇게 냉대를 받았던 걸까?'
문득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장판파에서 유선을 구해낸 이후,
그다지 뚜렷한 활약상은 없다. 오히려, 유비보다도 제갈량이 더
조운을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든다. 화정은 자신이 왜
삼국지를 백번에 가깝게 읽으면서도 이 점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한탄했다.
조금만 더 상세히 생각해 본다면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여하튼, 자신은 이천 년대로 돌아가면 꼭 삼국지를 다시 써
보아야 한다. 이런 역사의 의문점에 유일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될지 모르니까.......안타깝지만 조조나 손권 세력의 의문에
대해서는 해답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마음은
`유비님께 돌아가야지.'하는 식으로 기울어져 있다. `조조 또는
손권에게 한번 가 볼까나?' 식의 방향은 떠올리지도 않고 있다.
사람일이란 아무리 모를 일이라지만......
`......잠깐만, 그런데 내가 지금 조운에 대해서 걱정하는 거야?'
화정은 문득 이런 의문을 떠올리고는 기분이 나빠져서 얼굴을
찡그렸다. 불만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조운과 영각이
나란히 있다. 조운은 화정의 시선에 늘 그렇듯 조용하고 표정없는
얼굴이었는데, 역시나, 영각이 먼저 시비를 붙인다.
"또 뭐야? 삐졌냐? 아니면, 내가 너무 잘생겨서 또 보고 싶었냐?"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무리 봐도 저 사람은, 정말 눈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것 같다.
물론 감옥에 있을 때, 잠입술과 속임수에 능통한 의매 아현을 보내
구하려 한 것 보면 머리가 둔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수단이 좀
있는 측이라 판단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헛소리만 죽죽
늘어놓을 때는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얄밉다는 것만 조운과
엄청나게 닮았다. 그나마 조운은 진지한 성격인데 말이다.
"어? 뭐지? 꺄악!"
순간 아영이 비명을 지르면서 뒷걸음을 치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다.
덩달아 놀란 화정이 고개를 돌리는데 아영의 바로 앞에 허름한
옷차림의 원령이 커다란 돌을 들고 덤비는 장면이 보였다.
`어라? 저 원령은 좀 똑똑하지는 않은 걸로 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보고있지......? 참, 문제는 이게 아니잖아!'
스스로의 무심함에 혀를 차면서 아영에게로 달려갔다. 원령은
괴성을 지르면서 돌을 아영이 있는 자리에 메다꽃고 있었다.
"도, 돌이 움직여요!"
아영도 초기의 화정처럼 저 원령을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화정이
아영을 거칠게 밀쳐냈다. 그러나 원령은, 괴성을 지르면서 맹목적으로
아영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곁에 있는 화정은 본 척도 않고 말이다.
아영은 당황했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퍽!
화정은 약간 익힌 대로 한 손에 힘을 모으고는 원령을 향해 내리쳤다.
원령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러섰다. 벌벌 떨고 있는 아영에게 다시
덤비는 원령을 막아서는데, 영각의 짜증섞인 소리가 귀를 세차게 때렸다.
"이봐, 그냥 승천시켜! 너 그거 할 줄 안다면서?!"
하기는.....이전에 실수로 영각 앞에서 말해 본 적이 있긴 하다. 화정은
원령을 한번 더 치면서 외쳤다.
"일부만 시킬 줄 안다고요! 영각, 그렇게 팔짱만 끼고있지 말고
도와주세요!"
영각이 혀를 차면서 뭔가 던졌다. 순간, 아영이 비명을 질렀다. 화정은
영각이 던진 비도가 아영의 뒷통수로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아영을
밀치면서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원령의 괴성이
주변을 진동시켰고, 화정과 아영은 둘이 얼싸안은 채로 데구르르
굴렀다.
약간 정신이 들자 화정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주변을 살폈다. 원령은 이미 소멸되고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씁쓸한
심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는, 그나마 원령들이, 모습은
징그럽지만, 가엾다고 생각해서 소멸시키는 것이 좀 꺼림쩍했는데,
이제는 승천시키지 못할 바에야 소멸 시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뒤에서 아영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배여있었다.
"......방금전 그거.....귀신 아니었어?"
음성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을 보아 겁을 잔뜩 먹은 듯하다.
"그래."
화정은 차갑게 대꾸하면서 돌아섰다. 별로 당황한 기색도, 언짢은
기색도 없이 먼지를 탈탈 털면서 말에 짐을 도로 싣는 화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아영은 초기의 화정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그게 원령인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 현대시대의 `알 수 없는 귀신'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넌, 방금 전의 그게 귀신인지 알면서.....무섭지도 않니?"
화정은 대꾸하지 않았다. 영각의 소리가 대신 아영의 말을 가로막는다.
"뭐해, 이제 다 됐으니 가자. 서둘러야해! 이 산은 어두워지면
위험하다고!"
"네."
짧게 답하고는 천천히 걷는 화정의 옆으로, 아영이 쪼르르 달려왔다.
아영은 세 사람을 보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말이
없던 아영은 어딘가 울적해보였다. 게다가 세 사람 모두 별일 아니라는
듯 조용하기만 하니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화정의 곁에서
얼마간 말없이 걷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여기에 어느 정도 오래 있었던거야?"
"......"
"나, 아까같은 일, 많이 겪어보기는 했어. 하지만......모르겠어. 난 이천
년대의 그곳에서는 귀신 따위는 한번도 겪은 적이 없었는데 왜 여기서
유독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말야."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을 모아쥐는 아영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하지만,
화정은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섣불리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해결해야 하는 것은 자기자신이지......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폐만
끼칠 수 밖에 없게돼. 여태까지의 나처럼.......'
화정은 조운을 슬쩍 곁눈질했다.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가고
있었다. 자연히 시선이 등으로 쏠렸다. 물론, 아무것도 짊어지고 있지
않지만 등이 아직도 꽤 아플 것 같았다. 옥에서 풀려난 이후, 웬일로
티격태격하기를 멈춘 화정과 조운에게 영각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두 사람은 어물쩡 넘겼다.
`정말로......그냥 떠나서는 안돼. 아무리 그래도 뭔가......은혜를
갚아주어야 할텐데......이전의 나 같았으면 당연히 아버지께서
금전적으로 보상을 해 주셨겠지. 하지만 이렇게 되니까 하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는구나......결국 난 아버지 없이는
무력한 걸까......'
말 등에 짐을 싣고 전부 걸어가고 있었다. 단 두 마리의 말 등에는 잔뜩
짐이 싣겨져 있었다. 한 마리는 좀 마르고 볼품없는 말이었는 반면,
나머지 한 마리는 비교적 젊은 말이었는데, 당연히 좀 젊은 말은 얼마
전에 산 것이다.
본래는 말이 두 마리 있었는데, 아현이 영각에게 몇마디 하자 영각은
끙끙거리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현에게 그 말을 내주었다.
아마, 도와준 대가로 말을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남은 것은
단 한 마리, 늙고 비루먹은 말 뿐이었다. 그런데 영각은 그 말마저
팔아버리고 그냥 짐을 짊어지고 가자고 했지만 화정이 반대했다.
`이봐, 이쁜이, 여기는 네가 살던 규수집이 아니라고! 우린
빈곤해!' 하고 영각이 빈정댔지만 - 분명 이 작자는 화정이 짐을
지고 가기 싫어서 이런 소리를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이전의
화정 같았으면 자존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퉜겠지만, 그때의
화정은 그저 모른 척, 넘겼다 - 화정은 아랑곳않고 말 한 마리를
더 샀다.
조운의 등이 어떤 상태인지 알았다면 영각도 동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정은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조운이 영각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이젠 멋도
모르면서 끼어들어 나서는 짓은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보니......영각은 아까부터 좀 부은 얼굴이네.'
심통이 잔뜩 나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영각의 특징이다. 시원시원하고 밝은
성격이지만, 대신에 좀 독단적인 면도 있다. 약간 회색빛의 옷을
입고있는 영각과,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청색의 옷을 입은 조운은
참 달라보였다.
둘다 평상복 차림이지만 키가 크고 체격이 잡힌데다
무표정한 얼굴의 조운은 언뜻 보기에도 딱 `무사타입' 이다. 무협영화에
나오던 무사 같다. 하지만 화정보다 조금 클 뿐인 키에 어찌보면 다소
개구쟁이 같은 면도 있는 생김새를 지닌 영각은 그저 장난기가 좀 있는
청년으로 보인다. 성격도 틀리다. 조운은 말수가 적지만 영각은 말수도
많고 쾌활한 면이 있다.
처음에는 그저 밉게만 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악의없는 그
싱거운 소리들에 기분이 밝아지는 것을 발견해간다.
"화정.......?"
잔뜩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데 아영의 목소리가 화정을 깨웠다. 화정은
움찔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영의 표정에는 아직도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제야 화정은 아까부터 아영이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 미안해.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하나도 못......들었네. 뭐라
했는데?"
화정의 말에 아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른 아이들과 참 다르다. 짜증이
섞인 표정이 아니라 좀 회의적이다. 아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해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그런......사람이다. 화정과는
너무 다르다. 어쩌면 그래서......그다지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아영은 화정의 말에 다소 실망했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아무 말도 안 했으니까 걱정마."
이렇게 하면 안 미안해질 사람 없다. 좀 미안해진 화정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뭔가 농담을 해서라도 풀었을 텐데......역시
그런 일에는 익숙하지 못한가보다.
"얌전이, 그런 것에 신경쓸 것 없어. 이쁜이가 요즘에는 뭔가 기분이 안
좋은 것 같거든."
또 영각의 심술궂은 말이 들려왔다. 늘 조용하고 음성도 온화한 아영을,
영각은 얌전이라고 불렀다. 화정은 처음 보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별칭을
부르는 것을 싫어했지만, 아영은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다. 어색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아영의 대답은 이러했다.
<괜찮아. 친근감의 표시인걸......난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늘 조용하다고
놀렸었어.>
넌 놀려주는 사람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목으로 삼키면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반 친구들이 빈정대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화정은 단지, 자신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월등해서,
그래서 아이들이 부담감과 질투심만으로 자신을 비꼬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이렇게 철저히 자기중심적인데다
철모르는 공주님에 불과한 자신을, 아이들이 친하게 지내보고
싶었을 리가 없다. 만약에, 그 아이들이 접근해왔다면 아마......
조운과 같이 뭔가 수난을 겪었을 것이 틀림없다. 화정은 그 생각을
하면서 용기를 내려고 했다. 아영에게 말을 걸어 보아야지......
"그런데 왜 이곳을 밤이 되기 전에 지나가야 한다는 거여요?"
하지만 화정이 말을 걸기도 전에 아영은 영각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금 씁쓸하지만 자신 역시 그 점이 궁금했는지라 화정도 영각에게
시선을 보냈다. 영각은 아직도 좀 부은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부근에 요즘 이상한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더군. 원령이 많이
들끓는 거야 전쟁터였으니 당연하다 치겠지만......지나가는
행인들이 꼭 한명씩 변사체(變死體)가 되어 발견된다는 거야."
"......도적이라도 있는 것 아녀요? 이상할 것도 없잖아요.
영각이나 조운님 정도라면......우리는 괜찮을 것 같은데......"
아영이 말꼬리를 흐리는데 영각의 불만스런 외침이 귀를 때렸다.
"이봐, 아영씨! 왜 저놈은 님이고 나는 그냥 영각이야?!"
참 별걸 가지고 다 시비네......하려던 화정은 그 말을 그냥
넘겼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이전에 꼭 그랬던 꼴 아닌가.
"아니.....그냥 왠지 조운님은 좀 멀어서 그렇죠......
아무튼 왜 그런데요? 네?"
조용히 넘기는 것을 보면 아영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화정은
다시한번 씁쓸하게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
참을 줄 모르던 나......
"이상한 점은 그 시체들이 전부 심장이 없다더군. 다른
곳은 멀쩡하고 게다가 금품도 빼앗기지 않은 것을 보아 도적은
아닌 것 같아. 숱한 토벌대가 이곳에 왔다가 다 전멸당해서
이제 관에서도 이곳은 포기했다는 소문이 있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화정은 문득, 한가지를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영각은......참 소식에 밝군요."
그랬다. 영각이 모르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였다.
의매인 아현이야 워낙에 그쪽으로 발달했다지만 영각은
매일같이 놀고먹는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모르는 것이 거의
없다. 말하자면 뉴스를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사람 같다고나
할까. 화정의 말에 영각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이래뵈도 산적일 하면서 다녀본 곳은 조금 있었으니까.
여하튼 알았으면 빨리 산을 넘자구. 이런 걸음으로는 못 넘어."
사람은 사람 나름대로 모두 좋은 점이 있다. 촐랑대는
영각이 제법 기분을 풀어줄 줄 아는 쾌활한 정보통이라는 점,
얌전한 아영이 생각보다 사람의 말을 조용히 넘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그리고.......얄밉기만 하던 조운은......
속이 깊고 생각 또한 현명한 곳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면 말이다.
`아직 어리고 철없는 내게도......조금만 성장을 하면
좋은 점이 생기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화정은 자신의 곁에 날아와 날개짓을
하는 현량을,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었다.
*******
------------------------------------------------------------
*풀이
1.후주(後主): 유비의 아들 유선. 촉한 2대 황제
2.유장(劉障): 자는 계옥季玉. 후한後漢 익주목으로 유언劉焉의
아들이다. 성격이 임약하고 굳세지 못하였다. 장노의 공격에
대비해 장송張松의 말을 들어 유비劉備를 맞아들였다가 유비에게
공격당한다. 병사들과 장수들이 저항을 외쳤으나 백성을 걱정하여
항복했다. 뒤에 손권孫權이 형주를 파하자 익주의 목이되어
송귀에 주둔했다*나우누리 삼국지 클럽 삼국지 인물 명단
착착 물을 끓이고 밥을 지어내는 아영은 확실히 대단해보였다.
전혀 손도 못 대고 - 사실 화정이 손을 안 댔다기보다 영각이
못하게 했다는 표현이 더 옳다 - 있는 화정에 비해, 아영은
야무지게 불을 피워서 깨끗하게 주변을 치우고는 식사를
준비해냈다. 속으로 감탄하면서 그 광경을 뚫어지게 보고있는데,
역시나, 옆에서 한소리 안 할 영각이 아니었다.
"이쁜이, 너야 뭐, 절색이니까 아가씨 노릇을 할거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최소한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영각의 싱거운 농담에는 대꾸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점을 잘 아는 화정이 아무 대꾸없이 그냥 넘기는데, 곁에서
불을 살피던 아영이 불만스럽게 쏘아붙였다.
"영각, 너무해요. 아무리 화정이 예쁘다지만 그렇게
직접적으로 비교하다니! 난 평생 이렇게 밥이나 짓고
화정이는 아가씨 역을 하라는 소리처럼 들려요."
밥이나 지으라니, 난 그 밥이나 짓는 일도 잘
못하는걸......이라고 답하고 싶었던 화정은 뒤에 이어진
영각의 소리에 그만 자신까지 기분을 상해하면서 입을 다시
다물고 말았다.
"사실이잖아? 아무리 봐도 딱 하녀처럼 생긴 아영하고
화정은 좀 차이가 있다니까."
하여튼 막 나오는 저 사나운 말투란......아영 역시 적잖이
기분이 안 좋아진 모양이다. 영각의 말에 아영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신경질적으로 음식물을 휘저었다.
목까지 빨개진 아영은, 그리고보니 그녀로서는 드물게 화가
난 얼굴이었다.
사실, 화정은 아영이 화를 내는 광경을 자주 보지는 못했다.
좀 차분한데다 다른 사람이 실수해도 슬쩍 넘길 뿐 불만을
지니고 끝까지 감정을 연장시키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영이는 전혀.....하녀 타입으로 생긴
사람이 아닌데......온화하고......'
아영을 위해 변호를 해 줄까 말까 망설이던 화정은
아직도 분위기파악을 못하고 입에서 침을 튀겨가면서
수다를 떠는 영각을 보고는 자신까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아무 말 않기로 했다. 화정은 아영을 힐끗 곁눈질했다.
묵묵히 솥 안을 들여다보는 아영은 화가 났다기보다 어딘가
좀 처량해보였다. 그 원인이 되는 영각은 두 소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눈치챘는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면서
조운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들은 소식인데 말일세, 글쎄, 손견이
죽었다더군!"
무감각하게, 영각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넘기려던 화정은
꽤나 파격적인 단어에 놀라면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손견......?
"손견이라니, 혹시 강동의 손문대를 말하는 건가?"
조운의 차분하고 가라앉은 음성이 반문하자 영각은
자신있는 투로 떠들었다.
"그 손견이니까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 아니겠나!
강동의 호랑이 손견 말일세."
"그자가......느닷없이 왜 죽었단 말인가?"
물론 손견이 죽을 것은 알고 있다. 형주의 유표와
다투다가 맏아들 손책을 남기고 처참하게
죽겠지......만.......
`너무 이른데......? 지금 반동탁 연맹이 해체되고
원소와 공손찬의 기주다툼이 끝난지 얼마나
되었다고......아니야!'
화정은 순간 깨달았다. 냉정히 생각해보자. 분명히,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지만 반동탁 연맹이 해체되고 나서 원소와
공손찬의 다툼이 일어나 해결되기까지는 아무리 짧아도
몇 년의 세월은 족히 걸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이곳에 있어온 지 아직 일년도 채 안되었어!'
그렇다. 화정이 이곳에 온지 일년도 안된 사이에, 반동탁
연맹이 해체되고 기주다툼이 벌어졌다가 끝났는데, 그 사이에
손견도 벌써 죽었다니, 빨라도 너무 비정상적으로 빠르다.
불안한 생각에 고개를 들자 영각의 음성이 또다시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형주의 유표와 다투다 죽었지. 장남인 손책이나 차남인
손권은 아직 어린데다......뭐, 좋아할 것은 결국 동탁 밖에
없어. 발 뻗고 잘 계기가 하나 더 생겼으니......동탁 놈,
복도 지지리도 많지."
제법 빈정대는 투가 익숙하다. 영각의 불만스런 말에
조운은 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만 묵묵히 쓰다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복이 많다......그렇게 볼 수 있을까?
살아 생전에 온갖 부귀영화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으니 하기는, 틀맅 말은 아니다......하지만
말로(末路)는 결코.......생각에 잠겨있던 화정은 가는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쿡쿡 찌르는 것을 발견하고는 흠짓,
하면서 눈길을 돌렸다.
".......저어, 화정."
아영은 영각과 조운 쪽을 살짝 보더니 화정의 귓가에
대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나......몰라서 그러는데......여기가 중국인 것은
알지만.......대체 언제야? 어느 시대인데? 그리고
손견이......누구......야.......?"
쑥스러운 듯이 질문을 더듬더듬 늘어놓는 아영의 말에
화정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어이가 없어서 단번에 대답도
안 나왔다. 좀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화정의
태도에, 아영은 무안했던 모양이다. 아영은 얼굴을 붉히면서
또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넌......알고 있어? 손견이 누구고......여기가
어디......지......?"
화정은 문득, 아영이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손견을......모르는 걸까? 그리고 이
아이......생활하는 것을 보면 화정보다도 더 오래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가 중국의 어느 시대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건가?
화정이 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오랫동안 대답을 하지 않자
아영은 입술을 깨물면서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화정은 그제야 자신이 아영을 너무 무안하게 만들었음을
깨닫고 조그맣게 물었다.
"너......정말 모르는 거야......?"
아영은 화정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새빨간 아영의
얼굴에서는 마치 붉은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쑥스럽지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저렇게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화정은 속으로 자신의 태도가 너무
무안을 주었다고 반성했다.
"삼국지......를 읽어봤지?"
"삼국지? 아아,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 맺고 조조랑
싸우는 것 말야?"
아영은 절대로 삼국지를 열심히 읽지는 않았음에 틀림없다.
보통의 줄거리만 아는 아이들이 하는 투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는, 보통 관심없는 아이들은 `삼국지는
상식적으로 읽어야 한다더라.' 하는 말을 듣고 줄거리만
쭉 훑는다. 그리고 저렇게 `유비가 조조랑 싸우는 얘기' 라고
정의를 내린다.
하기는, 삼국지에 화정처럼 관심이 깊었던 사람이라면
화정보다도 긴 세월을 이곳에 있었으면서도 이곳이 그
시대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소문 들었던 적 없니? 반동탁 연맹이라던가......"
아영은 화정의 말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스스로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화정의 질문에 아영은 머뭇거리다가
답변을 늘어놓았다.
"없어. 난......그저 네가 구해주었던 그
남자아이가......여기 떨어진 날 발견해서......그 아이
어머니와 그 아이와 살아왔을 뿐이야. 아무것도 모른다고......"
역시, 저 능숙한 요리솜씨나 생활태도는 철저하게 이곳에서
생존을 위한 삶에 젖은 상태로 적응해 왔기 때문이었던 걸까.
아마도, 꽤나 가난한 모자에 의해 거두어진 아영은 그저
하루하루를 이어나갈 양식을 구하기 위해, 벌이나 집안일에만
열중해 지내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천 년대처럼 일반인들에게까지 뉴스나 신문으로
소식이 전해지는 시대는 더더욱 아니다. 결국, 아영은 거의
외부의 소식과 분리된 상태로 일년 가까이를 살았다는 소리다.
이 시대 평민들이 얼마나 무지하게, 답답하면서 묵묵하게
살아왔는지 어느정도 짐작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정보통인 시대 사람이던 아영이 그 평민들의
`무지성' 을 증명해주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지금은 후한(後漢) 말기야. 헌제가 통치하고 있어."
화정의 말에 아영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더듬거리는
질문을 내어놓는다.
"저어, 미안한데......후한(後漢)......이 어느 나라인데?"
그 질문에 화정은 현기증이 다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아영을
보았다. 아영은 화정이 시선을 자신에게 꽂자마자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그러니까 중국의......당(唐)나라 명(明)나라나 청(淸)나라,
같은 나라보다 전에 있던 나라야?"
답답하다. 답답하고 한심한 심정에 화정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한(漢)나라야! 한나라는 왕망 때문에 중도에 멸망했어.
왕망의 신(新)나라 가 세워졌고, 그것을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멸망시키고, 다시 한나라를 재건한 거야.
그래서 왕망에 의해 망하기 이전의 한나라를 전한(前漢)이라
하고 망한 후에 광무제에 의해 다시 세워진 한나라를
후한(後漢)이라고 해. 그러니까, 지금은 그 후한의 말기,
최후의 황제인 헌제가 통치를 하고 있다는 거야."
그제야 아영의 얼굴에 조금은 밝은 빛이 나타났다.
"아, 그래......상세한 설명 고마워. 뭔지 알겠어.
그래서, 지금이 그 유비가 나오는 시대란 소리지?
아하하......미안, 미안......난, 삼국지를 초반에 조금
읽다가 관뒀기 때문에......"
참 솔직하다. 이렇게 화정이 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했는데도 저런 온순한 태도로 웃어넘긴다. 웃는 낯짝에 침
뱉을 수 없다는 속담의 증인이다. 저도 모르게 태도가
누그러진 화정은 아영에게 낮게 물었다.
"......그럼 너는......저 조운이 누군지도 몰라?"
아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조운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르겠는......응? 조운? 저 키 크고 잘생긴 사람?
저 사람이......유명한 사람이야?"
역시나......아마도 아영은 삼국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에
가까운 것이 틀림없다. 기본적으로 삼국지를 대충 훑기라도
한 사람은, 조운에 대해서도 잘은 몰라도 이름 정도는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운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혹시 삼국지의 그 조운이
아닐까......'라는 의심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영이
삼국지에는 얼마나 문외한인지를 증명해주는 일면이다. 답답한
심정으로 팔짱을 끼는 화정에게, 아영이 또 물었다.
"저어, 화정아......그런데 말야......역사는 조금 알거든?
그럼 지금이 그......위(魏), 촉(蜀), 오(吳)로 나뉘어 싸우는
그 시대야? 맞지? 삼국지가 그 정도 시기라는 것은 알거든."
"맞아. 하지만 아직 삼국지의 초기니까 삼국으로 나뉘려면
좀 멀었어."
아영이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한창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삼국으로 나뉘어서 싸울 때라는 거구나? 어휴,
엄청나게 옛날이었는걸? 나는 그냥......대략 명(明)나라나
청(淸)나라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지......."
"명나라나 청나라 정도 되면 의상이나 건물, 도구 같은 것이
이 정도로 구식일 리는 없잖아. 무협지를 통해서도 어떤
문화였는지 나왔을 정도라구. 그리고 아직 신라는......
세워지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그만 설교하는 말투로 나가고 말았다. 아영은 화정이 좀
설교하는 투로 나가자 기분이 다시 나빠진 듯했다. 아영이
그 이상 질문이 없자, 선생도 아니면서 더 설명하는 것도 조금
뭣해서 화정도 같이 입을 다물었다.
묵묵히, 자신에게 내미는 국을 받아들면서 화정도, 그 국을
건네는 아영도 그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조운과 영각은 무엇이 그리 심각한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영은 아마도 두 사람에게 주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너무 심각한 분위기에 끼어들 맛이 나지 않았는지, 국그릇을
들고 홀짝홀짝, 맛없게도 떠먹었다. 억지로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안하다고 할까, 하면서 망설이는데 화정의 귀에
좀 날카로운 음성이 쨍, 하고 울렸다.
<찾았어!>
".......?"
누가 있나? 화정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영을 보았다. 아영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국을 떠먹고
있을 뿐,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보다, 하고
무시하면서 다시 그릇으로 시선을 꽂는데......
<청초하고 도도해! 정말 아름다워.......>
"아영아, 무슨 소리를 하는거니?"
놀림당하는 기분에 화정이 거칠게 국그릇을 땅에 놓으면서
아영을 돌아보자 아영은 멀거니 화정을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화정은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방금전 네가 한 말 아니야? 청초하고 도도해, 정말
아름다......"
"그래, 너 예뻐! 잘났어! 됐니?!"
뜻밖에 아영이 버럭 신경질을 부리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아영이 무릎에 얹었던 빈그릇이 딸각거리면서 땅에
떨어졌다. 아영의 신경질에 도리어 자신이 당황한 화정이 일어선
아영을 보는데, 아영은 그릇을 확 잡아채어 들고 가면서 조금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가 버렸다.
"......분명히 누군가 그렇게 말했는데......?"
화정은 이쪽을 보고있는 조운과 영각의 시선을 등뒤로 한 채
홀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냐면서 외쳐묻는 영각의 말을
무시한 화정은 곁에 앉아있던 현량을 보았다. 현량은 날개를
조금 푸드덕거렸을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영수(靈獸)인 현량이 조용하다는 것은, 어떤 원령이나 이상한
것이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화정은 괜히 자신이 예민했나,
싶어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천천히 일어나서 그릇을 들고는
걸음을 옮기는 화정의 등뒤에서, 푸른 빛이 아주 옅게 반짝이고
있었다.
<내 몸......그래, 이제야 찾았어.......!>
*******
머리가 멍해 오는데, 바로 귓가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잖아도 심난해서 잠이 오지 않아
뒤숭숭하던 아영은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핑계로 몸을
일으켰다.
밤이라 그런지 으쓸한 바람이 피부를 시리게 만들었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또렷하게 떠 있는 달과 별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자 새하얀 입김이 길게 뿜어져나왔다. 커다란
보름달이 눈부신 광채를 발휘하고 있어도, 주변의 나무들은
시꺼먼 가지들을, 마치 아영 세계에 있던 철근들처럼
오싹하게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으스스한 광경이란 말야, 하고 불평을 늘어놓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차라리 산책이나 할 양으로 몸을
움직였는데, 아영의 손에 곁에 누워있던 화정의 팔이 부딪쳤다.
도리어 스스로가 놀란 아영이 미안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화정을 바라보았다.
"으응......"
약간의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을 뿐 화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영은 그제야 미안한 마음을 반감시키면서 안심했다. 홀로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스락, 했던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잖아?"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불평하면서 다시 누우려던 아영은, 문득,
추운지 담요를 둘둘 말아서 꼭 덮고는 얌전하게 자는 화정의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꼼짝없이, 한참을 화정을 뚫어져라 보던
아영의 입가에서 뿌연 김이 길게 삐져나왔다.
"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천 년대의 한국에서도, 이 고대의
중국에서도 화정만한 미인은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아무리
봐도 인형같이 아름다운 얼굴이다. 저렇게 잠들어있는
모습조차도, 넋을 빼놓을 정도로 기품있고 고고하며 또한
청초하고 아름답다.
"신이 내린 얼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아영은 신이 불공평하다고 속으로
빈정거려보았다. 어째서 신은......저 아이에게는......대기업
총수의 외동딸에, 똑똑한 머리에, 늘씬한 몸매에다 저렇게 완벽에
가까운 얼굴까지 주신 걸까. 나와는 정말 반대잖아?
불평을 하면서도 아영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짐을 뒤적거려
종이와 연필을 꺼내고 있었다. 천천히, 자신의 종이와 연필을
움켜쥔 아영은 다시한번 화정의 자는 얼굴을 응시했다.
새하얗고 백합같은 고운 피부, 가지런한 눈썹과 길고 짙은
속눈썹, 약간 붉은 장밋빛의 예쁜 입술과 오똑한 코, 작고
갸름한 얼굴선......그 단어들을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아영은
화정의 자는 모습을 백지에 옮겨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수직선의 구도에서 출발한 그림은, 어느덧
점점 사람의 모습을 수놓는 선들로 장식되어갔다.
"어이!"
뒤에서 남자음성이 들리자 무아지경에 빠져있던 아영은 깜짝
놀라면서 쥐고있던 연필을 떨어뜨렸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이 굳었다. 그런 아영의 무릎 위에 있던 종이를, 마디가
굵은 손이 휙, 하고 낚아챘다.
"뭣하고 있어? 어? 우와, 이런......! 정말 기막힌
솜씨인데? 너 화공(畵工)이었어? 이야, 잘 그렸군그래."
"주세요!"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영은 영각의 손에서
그림을 낚아채려 했지만 영각이 훨씬 빨랐다. 영각은 아영이
손을 뻗을 때마다 그녀를 등지면서 그림을 뚫어져라 보는
것이었다. 결국 포기한 아영은 팔을 내렸다.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부끄러웠다. 어쩌지? 저 사람은 분명 내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을 보면......내가 화정에게 지나친 열등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고 빈정거릴거야......비록 자신이 이 아이와
비교될 수 없는 열등한 입장이라고 해도, 자신 스스로가
이렇게 강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음을 남에게 비추기는 싫었다.
영각은 아영의 그런 무안한 심정은 안중에도 없는지, 얼굴을
불쑥 들이밀면서 아영의 곁에 턱, 하고 앉았다.
"이쁜이를 그리고 있었던 거야? 하기는, 이쁜이가 절색이기는
하지. 캬, 잠자는 모습도 하강한 신녀라니까."
감정이 누그러든다. 마음 속에서는 옅은 질투심과 열등감이
고개를 살며시 들고 있었다. 그런, 억제하기 힘든 감정에
아영은 그만 코웃음을 치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겠지. 무슨 말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야?
한 손으로 자신의 연필을 쥐어 올리면서, 아영은 미간에
찡그림을 넣었다. 느낌으로, 영각이 자신을 곁눈질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 마음껏 비웃어. 비교하란
말이야......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갔다. 이런 상태를
어떻게든 만회해보고 싶어서 말을 건네기로 했다.
차라리 내가 부정할 만한 증거가 못 된다면, 깨끗하게
인정이라도 해 보이자. 그렇다면 덜 비참하게 보일 지도
몰라......
"하긴......같은 여자가 봐도 그림으로 담고 싶을
만큼......이렇게 환상적인데......남자들이 보면
어떻겠어요."
영각의 장난기 섞인, 하지만 이상하게 밉지는 않은
어조가 되묻는다.
"부러워?"
아영은 옅게 미소하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부럽냐고?
따끔한 바늘이 심장을 찌른 것 같았다. 조금 아프지만 씁쓸한
느낌의......자신의 양손을 비비작거리던 아영은 말꼬리가
옅은 말로 긍정했다.
"......그럼요......"
영각이 피식, 하고 실소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영은 마른침을
목으로 힘겹게 넘겼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앙상하고 조금은
무섭게도 느껴지는 나뭇가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젠가,
공사장 근처에서 본 공포스러운 철근들이 연상된다. 저렇게
아름다운 달빛을 받아서, 저런 을씨년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시에서 보면 늘 저 모습을 한창 미화시켜서 표현하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나무들을, 은빛의 가루를 뒤집어쓴 축복받은
생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대체 왜? 왜 나는 이 하얀
달빛이, `은빛의 가루'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까?
아영의 눈에 달빛은 그저......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나무들에게 을씨년스러운 그림자나 드리워주는 그런, 그런
존재로 보였을 따름이다.
`마찬가지겠지. 내가 화정이의 근처에 있다는 것은......'
길가를 지나다녀도 항상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하지만,
명백히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시선은 아영을 향한 것이
아니다. 아영의 곁에서 빛나는 찬란한 친구의 것이다. 그
곁에서.....아영은, 달빛에 더욱 무섭게 변하는 나무들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눈을 열심히 깜빡거렸다.
그런데도 어깨가 들썩이려고 한다.
"그런데......으흠......."
영각이 뭔가 말하려다 짧게 헛기침을 내뱉는다. 아영은
움츠러든 어깨를 수그리면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바보같이 울긴
왜 울려고 하는거야? 스스로를 모질게 자책하면서 일부러
우스운 이야기라도 생각해내려고 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말야, 저.......아, 그거 알아?"
모처럼 진지한 듯한 말투가, 다시 영각답고 기운찬 어조로
변해갔다. 그 뒷말을 듣고 싶은 호기심도 발동하지 않았으면서,
아영은 무의식적으로 눈길을 영각에게 돌렸다.
"......뭐가요?"
그렇게 뭔가 말을 할 것처럼 반문한 영각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말이 없자 이번에는 아영 측에서 재촉했다. 영각은
아영을 또 곁눈질하다가 아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잽싸게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돌리면서, 애꿎은 뒤통수만 손으로
긁어댔다.
"너 말인데......음, 너무 자책하는 것은......안 좋아.
그러니까 말이지......너는 이쁜이보다 훨씬 나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아영은 코웃음치고 말았다. 위로도 참, 정도껏 하면 어디가
덧나나? 역시 짖궂은 사람답게 반어법도 티가 나게 사용한다.
약올리는 것도 좀 짖궂지 않게나 해 줄 것이지......하기는,
약 올리는 행위 자체가 짖궂은 성격을 띠는 것이니 자신의
바람은 억지에 불과하기는 하다......갖가지 생각을 접으면서
아영은 영각의 말에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위로 고맙지만......기왕 위로할 양이었으면 좀 믿을만한
말을 해 주었어야죠. 놀리지 말아요, 황호."
아영의 다소 불만이 섞인, 하지만 온화한 말에 영각은
웬일로 그 뻔뻔한 낯짝에 노을을 띄우면서 놀라는 시늉이다.
"어, 진짠데......?"
저 낯짝에 물을 부어보고 싶었다. 얄미웠다. 분명히, 내가
화정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니까 더 놀려보고 싶은
거야. 아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영각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영각이 짧게,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해 보이는 것이었다.
"저, 이쁜.......음, 화정은.......정말 천하 절색이기는 하지만
말야......표정이 빈곤해. 오히려 아영 측이 더 많은 표정을
지니고 있다구."
장점도 좀 납득이 가고 그럴 듯한 것으로 대 주면 어디가
덧나나? 체, 표정이 많다는 말은 평범하다는 뜻이니까, 결국
화정보다 월등하게 평범하고 볼품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해주는
셈이 된다. 아영은 영각에게 빈정거림을 실어보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황호도 알잖아요? 오히려
그 점이 매력 아닐까요? 화정은 생긴 것이 좀 도도하니까
그런 차가움이 잘 어울린다고 보는데요. 아마, 황호도
공감할 것이고요."
아영의 말에 영각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봐, 역시 아무 말
못하지......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내면에는 조금
섭섭한 심정을 깔고 아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이 사람은 뭔가 다른 말을
해 주지 않을까, 혹시나......하고......곁에 있는 풀을 마구
뽑아대면서 괜히 화풀이를 하고 있는데, 영각의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렇다해도......아무리 아름다워도 얼음꽃에는 누구도
입 맞추지 않아."
"?!"
뭔가, 그저 뭔가......어떤 무엇인가가 아영의 머리를
때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영이 시선을 급하게 돌리자 영각은
그런 아영을 잠시 바라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인형......알지?"
"......네? 네에......"
"가끔......내가 어릴 적에 광대들이 가지고 다녔어.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지만......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역시 아주 예쁜 여자 인형들이었지."
갑작스럽게 웬 어린 시절의 인형 이야기일까, 궁금해하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어내는 성격은 절대 아닌 아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영각은 아영이 떨어뜨린 그림을 주워서
다시 펼쳐보았다. 천천히, 아영이 그린 그림을 보다가, 곤하게
잠든 화정에게 시선을 옮긴 영각은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반정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은은한 음성을 섞어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서 어렵게.....그 인형들.......중
하나를 산 적 있었어. 처음에 샀을 때는 정말.......좋아하고
아꼈는데......."
"......"
"......그거, 헌 것이 되자마자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그 말에 아영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영각에게 시선을 똑바로
박아넣고 말았다. 영각은 눈을 들어 그런 아영을 마주보았다.
"버렸어, 아무 미련 없이......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있지? 저렇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아름다움이란 것은......
아영에게는 부러운 일이지만 화정 스스로에게는 심각한
고민사항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어. 젊었을 때는 누구보다
사랑받아도 나이가 들어 그 미모가 사라지면.......그 미모만을
이유로 받았던 사랑은 금방.......사라지는 거야.
마치.......내가 버렸던 그 인형......처럼......"
저 사람......
"화정은 결코......자신의 외모가 기쁘지는 않을 지도 몰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의심해야 할걸?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들이......단지 자신의 출중한 미모
때문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말이야. 그렇지 않아?
아마도......"
뚫어지게 아영을 보다가, 그림을 보던 영각은 화정에게 눈길을
돌렸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아영의 그림을 접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아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영각이 돌려주는
그림을 받아들었다.
"......화정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의심부터
해야 할거야. 무엇 때문에 좋아하는 지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말야. 외모 때문에 좋아할 뿐이라는 생각이 화정을......내내
사로잡을 테니까. 그리고......."
저도 모르게 영각의 말에 심취되어있던 아영은 영각이
일어서자마자 얼떨결에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영각은 그런
아영을 천천히 보더니 피식, 웃는다.
"난, 아무리 예쁘더라도 표정 빈곤한 사람은 취향이 아니라구.
그리고 세상엔 나 같은 놈들도 많아."
"......!"
"이봐, 그리고 나는 사실......실제의 화정보다 네 그림 속의
화정이 더 좋더라. 그림 속의 화정은 왠지 더 따스해보였거든.
어디서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어. 그림은 그린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영각의 말에 멍해진 아영은 그만 반박도 못하고 입만 벌린
채, 걸음을 옮기는 영각을 쳐다보았다. 영각은 그런 아영에게
손을 들어보인다.
"용기를 가져, 네겐 화정보다 좋은 장점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난 그럼 이만 자러 가야겠다."
등에 걸친 허름한 천조각을 날리면서 가는 영각은, 이전의
조심성 없는 말을 마구 내뱉던 그 영각과 너무 달라보였다.
아영은 영각이 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들리지 않던, 요란한
풀벌레소리가 귀에 들어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멍하니
자신이 그리다가 만 그림을 보던 아영은 다시한번 영각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마, 좀더 떨어진 곳에서
그 조운이라는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었다.
`그 사람이 달라보이듯......그렇다면 나도......달라보일
수가 있는 걸까? 어느 순간만큼은 내가......이렇게 예쁜
화정이보다도......예쁠 수가 있다고......영각은 혹시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종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 그 혼란을 안고, 아영은
다시 짐을 뒤적거려서 채색도구를 몇 개 꺼냈다. 이 세계에
와서 틈틈이 사 놓았던 것들이었다. 아영은 잠든 화정을 보면서
뭔가 생각하다가, 한참만에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어쩌면 영각의 말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
"꺄아악!"
앞서서 걸어가던 아영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영의 곁으로 세 사람은 서둘러
다가갔다. 영각이 아영을 나무랐다.
"그것봐, 내가 이런 곳에서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했......응?"
영각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화정이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시체에요."
화정의 말에 영각은 자신의 짐을 곁에 내려다놓고는 아영을
뒤로 밀쳤다. 그는 땅에 내팽겨져 있는 듯 눕혀있는 시체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옆의 나뭇가지를 집어 시체를 슬쩍
건드려본 영각은 한참동안 반응이 없자, 그제야 시체를
뒤집어보았다.
"헉!"
아영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얼른
얼굴을 가리는 아영의 옆에서, 화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심장 부분을 정통으로 뚫린 것 같아요."
".......그래. 심장이 없어."
화정의 말에 영각이 동조하면서 시체의 옷자락을 조금
걷어보았다. 아직 깨끗하고 부패가 안된 피부로 보아 죽은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삼십대 가량 되어보이는군......틀어올린 머리나 옷차림이
가지런해. 죽기 전에 별로 저항을 하지 않았는 모양인데......?
이래서야......알 수가 없군......"
영각은 눈을 부릅뜨고 누워있는 여자의 시신에서 일어나면서
조운을 쳐다보았다. 조운은 영각이 물러나자 허리를 굽히고는
시신을 천천히 살폈다. 뒤에서 문득, 화정이 말했다.
"그런데.......이 시신의 얼굴말이에요, 너무 바짝 마르지
않았어요? 마치......해골 같군요."
화정의 말에 조운은 시신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영각이
부정했다.
"본래 얼굴이 마른 여자 아니야? 몸도 이렇게 비쩍
말라있는데.......당연히 얼굴도 말랐겠지."
아무렇지 않게 화정의 말을 일축하는 영각의 말을 조운이
끊었다.
"아니.......이 여자는......"
잠시 여자의 팔을 살피던 조운은 눈썹을 치켜올리는
영각에게 고개를 돌렸다.
"흡기(吸氣)를 당한 것 같군. 허나 가슴의 상처는 분명
사람의 소행인데.......장력(掌力)*이야."
"그게 장력으로 당한 거라면 사람일터인데 이상하군......
사람이라면.....흡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않나?"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되묻는 영각의 앞에서, 조운이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시체를 살폈다. 시체를
쳐다보기도 싫어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아영은, 시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조심해서 다가가 화정을 불렀다.
"저, 그런데......흡기가 뭐야?"
조금 쑥스럽다. 그리고 얄밉게 생각하던 화정에게 또 묻기는
싫은 면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정은 그런 아영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짧게 답했다.
"사람의 기(氣)를 입으로 빨아내어 자신이 먹는거야. 기를
입으로 흡수함으로써 조금의 낭비도 없이 다른 사람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수법이지. 하지만 당연히, 사람은 그런
것을 할 수는 없어. 사물들이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이렇게 자존심 깎이고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면서 화정에게
굳이 묻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똑같이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화정에게도 이 정도로 무시당하는 느낌이 나는데, 만약
영각이나 조운에게 물었다면 완전 저능아 취급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화정의 말은 어느정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아무래도......소혼술(召魂術)을 썼던 사람이거나
악령에게 빙의(憑依)된 사람의 짓이라고 생각되는군.
영기(靈氣)의 흔적을 없앴지만, 아직 옅게 남아있어."
조운은 아마 영각보다 좀더 예리한 듯하다. 더 구체적으로
추리해낸다. 조운이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서자 영각이 팔짱을
끼고는 곁의 바위벽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질문한다.
"그래? 아니 그런데 이 사건은 계속해서 연달아 일어난
것을 보면 고의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조운은 잠시 내려두었던 짐을 들어올렸다.
"그렇지. 여하튼 아귀강시는 아니겠지. 자의식이 없는 하급
사물 따위가 계획적인 살인을 저지를 일은 없을테니. 소혼술은
거의 금기시 된 수법인데다 소멸되었다고 알려졌으니 아마
악령이 빙의된 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아영은 짐을 말 등에 천천히 올려서 싣는 조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키도 아마, 183, 4센티는 넉넉히 넘어보였다.
사실, 이천 년대에서도 텔레비전에 나오던 탤런트를
빼고는 저렇게 잘 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직 나이가 열 여덟이라는데 대략 이십대는 넘은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이곳에서는 열 여덟이면 가정을
이루었을 나이였다. 하지만......
`저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겪었던 걸까? 열 여덟인데
저렇게 무겁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니......'
조운을 넋나간 듯 바라보고 있는데, 웬 손이 딴 생각에
잠긴 아영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아!"
순간적으로 생각에서 깨어난 아영은 깜짝 놀라서 나직하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서 조금 떨어진 오른쪽에
있던 화정을 보았다. 화정이 아영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무안해진 아영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 아하하하......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
그런데 왜?"
".......뭐?"
화정은 도리어 왜 그러느냐는 듯한 반응이다. 계집애,
자신이 쳐 놓고는 모른 척 하기는......의외로 장난도 칠
줄 아는 타입이었나? 그렇게 속으로 혀를 차면서 아영은
음성을 약간 높였다.
"방금전에 네가 내 어깨 쳤잖아? 무슨 이야기하려고
부른 것 아니었어?"
화정은 아영을 잠깐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 한마디를 차갑게 던진 화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아영은 신경질이 나서 돌을
걷어차고는 화정과 영각, 조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장난 친 것 가지고 내가 저를 죽이기라도 하나?
왜 저러는 거야?!'하고 속으로 신경질을 내던 아영은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자룡, 이곳은 내가 조금만 조사하고
갈테니 자네는 먼저 장안으로 가게. 넘어가자니 영 찝찝한걸."
영각의 간만에 심각한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아영은
머리칼을 곤두세웠다. 몸안에서 한기가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화정은 분명 나한테서 한참 떨어진 오른쪽에 있었잖아?!
그렇지만 그 손은 내 왼쪽 어깨를 건드렸고......난 금방
뒤를 돌아보았는데......? 화정이 그렇게 동작이 초고속일
리도 없고......저 아이가 그럴 이유도 없잖아?'
아영은 그만 몸이 통째로 굳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오는 길에도.....저절로 움직이는 돌을 봤는걸......?
너무나 섬뜩하고 의심스러운 생각에 걸음을 멎은 아영을,
앞장선 세 사람은 못 알아본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영각과
이야기를 나누던 화정과 조운은 갑자기 들린 `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얌전이가 쓰러졌네?"
무심하게 내뱉는 영각의 목소리와......
"아영아!"
화정의 다소 높은 억양이지만 오히려 차분하게 들리는
외침이 귓가를 울리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
바들바들 떨고있는 아영과 대조적으로, 나머지 세 사람은
오히려 덤덤했다. 아영은 아무래도 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아서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면서 강조했다.
"정말이에요!"
"흠......아무래도 이 근방에 못된 악령이 하나 있는 것
같구먼......"
"......그런데 어째서 현량이 아무 반응이 없었을까요? 좀
이상한데요......"
"심상찮군."
안 믿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그것을 통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영은 무력감을 실컷 맛보아야만
했다. 한참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지 몰라도 심각하게 고민하던
세 사람은, 영각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뭔가 수상해, 예삿일이 아닌 것 같은데......그럼, 그냥
넘기기도 그렇고하니......역시 자네는 장안으로 가는 것이
좋겠군. 나는 여기서 아현을 불러서 좀더 조사하다 가겠어."
"그리하지."
조운은 영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영과 화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화정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영각이 잽싸게
마무리짓는 것이었다.
"화정은 자룡을 따라가도록 하지. 아영도 장안으로 가도록해.
이곳의 일은 꽤나 위험한 일이 될 지도 모르니까."
왜 이렇게 기쁜지 모르지만 여하튼, 부푸는 가슴을 안고
아영이 외쳤다.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아영은 생글거리다가,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고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화정과 조운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아영을 살피고
있었고, 영각은 팔짱을 끼고는 입을 앞으로 쑥 내민 채 아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영은 얼굴이 그대로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뭔가 변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저......그러니까......본래 조운이 나를 고용한
사람이기도 하고, 화정이 함께 있는 것이 편하고 할 것
같아서......"
그 말에 화정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각자 서두르죠."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화정의 말에 아영은 웬일로 춤이라도
추고싶은 심정이었다. 화정이 이렇게 고마울 때도 있다니......
분명, 화정이나 조운이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영각은
좀 눈치를 챈 모양이다. 저 영각이란 사람, 그저 쾌활한
낙천가에 실없는 농담이나 즐겨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눈치는
엄청나게 빠르다.
아니, 설마, 눈치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알수 있을 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킨 아영은, 화정과 조운의 뒤를 따르면서
영각을 몰래 곁눈질했다. 말에 있는 짐을 몇 개 내려놓고는
조운에게 다가가는 영각은 다행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좀 언짢은 기색이었다. 아영은 속으로 옅게 웃고 말았다.
`그럼 뭣한담......좀 부끄럽긴 하지만 난 저 사람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걸.....'
정말로, 밝히긴 뭣하지만 자신은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타입인가보다. 왠지 모르지만 아영은 잘생긴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천 년대의 한국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아무리 이상형이 `이해심 깊고 성격 좋으며
나와 잘 맞는 사람' 이라고 남들에게는 규정지어 이야기해도,
사실 아영의 이상형 0순위는 `잘생긴 사람' 이었다. 아마도,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생긴 남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잘생긴 사람 싫어하는 여자 있어?'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시키던 아영은, 가만히 영각이
짐을 덜어다 조운과 아영, 화정이 끌고 갈 말에다가 실어주는
양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참 달랐다. 무겁고 차가운 조운,
쾌활한 영각.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죽마고우라던데 어쩌면 저렇게나 다른 걸까? 대충 몇 마디
나누더니, 영각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좋아. 그럼 그곳에 가서 기다려. 내 빨리 이곳 일을
알아보고 따라가지. 그럼 가도록 하게! 수고하라구!"
그렇게 말하고는 조운의 등을 영각이 기운차게 탁, 하고
치는 순간이었다.
"윽......"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조운의 얼굴이 약간 찡그러지는 것을
발견한 아영이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데, 영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자네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야."
조운이 어두운 표정으로 얼버무리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영각도, 아영도, 그런 조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영각이
조운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 화정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럼 어서 가죠. 아영, 서둘러."
그녀는 신속한 움직임으로 조운의 뒤를 따랐다. 아영은
얼떨결에 응, 하고 짧게 답하기는 했지만,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늘 불변하던 표정의 조운이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나, 침착한 화정이
저렇게 서두른다는 티를 내면서 억지로 일행을 재촉하는
것은 역시 부자연스러웠다. 한참, 멍하게 있는데 영각이
어깨를 툭 쳤다.
"히익!"
아까의 이상한 손 사건으로 어깨에 신경이 집중되어있던
아영이 기겁을 했다. 영각은 그런 아영에게 얼굴을 불쑥
내밀더니 속삭였다.
"이상하지? 알게 되는 것이 생기거든 나한테 말해. 그럼
감시 잘 하라구."
"에?"
감시라는 알 수 없는 말에 아영이 어리둥절해져 있었지만,
영각은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조운님의 친구 아닌가? 그런데 웬
감시를......까지 생각하던 아영은 어느덧 화정과 조운이 꽤
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잡았다.
*******
--------------------------------------------------------
*풀이
1.장력(掌力): 손바닥으로 내리쳐 적을 공격하는 무공
시끌벅적한 시장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가운데
적지않은 긴장도 가득했다. 이것 저것 사라면서 목청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 장사꾼들부터 가격을 조금이라도 더 깎기 위해
기를 쓰고 흥정을 하고있는 손님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마냥 신기한 물건에 한눈 팔고있는 어린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못마땅한 얼굴로 힘겹게 잡아끌고 가는 아낙 등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울긋불긋한 과일과 달콤한 냄새를 풍기면서 눈길을 끄는
과자, 푸르고 싱싱한 채소가 보기도 좋게 쌓여있는 곳으로
눈이 가끔씩 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부딪힌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일일이 말했지만
그것도 이젠 지쳐서, 부딪힌 상대가 노려보아도 전혀 모르는
척, 하고 걸음을 옮기는 일에 이미 능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피하는 재주만은 아직도 능숙하지 못해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정신없이 부딪히며 겨우 나아가던 아영은, 자신과는
달리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말고삐를 쥐고
똑바로 걷고있는 조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나마 말이 있으니 사람들이 조금 피해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꾀에도 불구하고 아영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부딪히고 다녀야 했다. 너무나 힘이 들어서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그 땀방울을 손등으로 대충 닦으며,
주변의 소란 때문에 안들릴 세라 아영은 목청을 잔뜩 돋구어
조운에게 크게 외쳤다.
"저어.....조운님, 실례지만 여기는......어디에요? 여기가
장안인가요?"
힘들에 말한 아영에게는 맥이 빠지게, 조운은 눈길도 주지않고
시선을 똑바로 한 채 건성으로 답한다.
"아닙니다. 장안까지는 아직 길이 조금 남았습니다. 이곳은
진류(陳留)입니다."
깍듯한 말이지만, 딱딱한 어조다. 나는 이 소란통에서 잘
들리게 하려고 목 아프게 외쳐묻고 있는데 저런 무미건조한
음성이라니. 조금은 섭섭한 심정으로 아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그런데 이 진류라는 도시는 큰 도시인가요?"
역시 건성인 답이 들려왔다.
"낙양(洛陽)이 동탁에게 파괴된 현재, 북평과 장안 사이의
도시 중 대도시에 속하는 유일한 도시겠지요."
그 말에 아영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질문을 귀찮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무 차갑다. 물론, 별로 대화를 해 보지
않은 때에도 그렇게 느끼기는 했지만 막상 대화를 조금 해보니
더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이전까지는, 정말로 한마디도 직접
대화를 해 보지는 않았다.
화정이나 영각이 중간에 끼어있었을 뿐, 자신이 직접 묻고
조운이 직접 답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었다. 지금 아영이
이렇게 실없는 질문을 하는 이유도, 자신이 직접 말을 걸지
않으면 왠지 영원히 말을 걸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조운을 또다시 힐끔거리던 아영은 한눈 팔다가 하마터면
지나가던 우차(牛車)에 부딪힐 뻔했다. 비틀거리면서
본능적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거, 조심 좀 하슈, 소저!"
화가 어지간히 났는지, 머리를 빡빡 깎은 대머리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소를 재촉해 지나갔다. 좀 당황해서
얼빠진 아영이 우차가 지나간 다음에야 벌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네네, 하는데, 화정의 목소리가 소란스러움 가운데
나직하게 들려왔다.
"이 주변에 금창약(金瘡藥: 상처를 치료하는 약)을 파는
곳은 있을까요?"
"아마도. 조금만 살펴보면 있겠지."
아영에게와는 달리, 낮춤말을 쓰고는 있지만 역시 차가운
말투였다. 하지만 화정은 이미 익숙한지 별로 언짢은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의 즐비한 시장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영은 종종걸음을 해서 기를 쓰고 주변사람들을
제끼고는 조운과 화정의 곁으로 재빠르게 다가갔다. 아영이
근처로 오는 것에 성공하자마자, 화정이 고개를 휙, 하고
돌리더니 다소 반가운 듯한 목소리를 냈다.
"아, 저쪽에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전 나중에 찾아가도록
하지요. 현량, 조운과 아영을 따라가요. 나중에 내가 부르면
와서 길안내를 부탁해요."
겨우 힘들게 왔더니 다른 곳으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관둬,
지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헤어지면 어쩌려는 거야, 하고
면박을 주려던 아영은 화정의 말 중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현량이라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는데, 여기에는
일행이라고는 자신과 조운 밖에 없다. 화정을 따로 따라온 사람은
없는데 어째서 저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꺼낸 걸까? 의문이
생긴 아영이 현량이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바로
아영과 화정의 머리 위에서 조금 날카로운 새울음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아영은 머리칼이 곤두서면서 후다닥, 뒷걸음질을 쳤다. 놀라는
아영을 보면서 화정은 태평하게 말한다.
"아, 놀랄 것 없어, 아영.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그럼, 자룡,
먼저 아영을 데리고 가세요. 어차피 근처에 짐을 풀 거죠?"
"그렇게 하지."
조운은 짤막하게 답변을 남기고는 계속해서 말고삐를 쥐고
걸어나갔다.
`뭐야.......놀림당하는 느낌이네......저 얘도 귀신을 데리고
다니는 걸까, 혹시? 에이,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하는
것일거야.......그럼, 그럼......저 애도 귀신에 대해 전혀
친근하지 않은, 나와 똑같은 20세기 사람이라구!'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이 세계의 기준미달' 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영의 머릿속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아무리 위로를 해 보아도 그런 기준미달에 관한 콤플렉스에
아직도 기분이 불쾌한 아영은, 마침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 화정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화정은 웬 이상하게
생긴 것들이 잔뜩 널려있는 곳에 가서 주름살이 잔뜩 이마에
자리한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정의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화정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화정은 지나다니는 남자 몇과 키가 비슷했고,
여자들의 키는 화정의 턱 아래만큼 밖에 도달하지 않았다.
게다가 화정의 유난히 하얀 피부는 주변까지 밝게 하는 것
같았다. 평범한 여장을 하고있는 아영과 다르게, 일부러 머리를
두건으로 싸매고 남장을 하고 있기는 했어도, 주변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아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긴......쟤는 남장을 해야 할거야, 아마.......저 얼굴에
여장까지 하고 다니면 얼마나 위험하겠어......? 나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지만 쟤는
이렇게 많은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구나......'
씁쓸한 심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정신없이 딴 생각을 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어깨를 거칠게
부딪힌 아영은 비틀거리면서 발이 닿는대로 이동하다가 그만,
연달아 조운의 어깨에 뺨을 박고 말았다.
"아, 저......미안해요."
가볍게 사과를 했지만 조운은 별로 개의치 않아하는 눈치였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조운의 태도에는, 철저한
무관심이 깔려 있었다. 울적해진 기분으로 무안하게 고개를
돌리던 아영은, 이곳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자들이,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조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하긴......'
같은 여자로서 이해가 간다. 오똑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선,
서글서글하면서 서늘한 눈매, 화려한 것 없이 단정하기만한
옷차림이어도 눈에 띄게 만드는, 키가 크고 잘 잡힌 체격. 그런
조운의 외모는 누가 보아도 눈길을 끌 만한 요소이다. 아영은
불만스럽게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잘.......어울려.......'
자존심 상하는 생각이고, 화가 난다. 인정하기도 싫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화정과 조운. 말
그대로 미남미녀(美男美女). 반면에 자신과 조운은......?
`나는......이 사람과는 어울리지도 않겠지? 만약 내가 이
사람과 이렇게 같이 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남자가 아깝다고
생각할거야. 쳇!'
홀로 콧방귀를 뀌던 아영은 애써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으려 했다. 화정의 옆에 가도, 조운의 옆에 가도
전부 비교대상이 된다. 울적해진 아영은 일부러 다른 쪽으로
생각을 전환하기로 했다.
`그런데 화정은 무엇 때문에 금창약을 사는 걸까? 금창약은
꽤 비쌀 텐데.......그리고 화정은 별로 심각한 상처도
없어 보였고......'
정말 생각의 전환 방향을 잘 잡은 것 같았다. 아영은 진실로
이것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보다, 금창약을 사러 인파를 제치면서 나아가던
화정의 뒷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영의 추리는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상처를 입었다면 화정이는 뭔가 기색을 하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그 부잣집에서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자란 아이인데
아픔을 잘 참을 리가 없어. 아무리 그렇게 차게 보이더라도,
아직 아픔에는 익숙하지 않으니 조그만 상처에도 엄살이 좀 있었을
거야......그런데 전혀......그리고 분명히 난, 봤어.'
아영은 무의식적으로 소매를 들어 그 소맷자락의 앞부분을
살짝 깨물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아영과 부딪히면서 눈총을
거세게 주고 있었지만 아영은 그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생각에
심취해 있었다.
그녀의 눈 앞에서는, 아까 영각이 장난스럽게 조운의 등을
가볍게 쳤을 때의 광경이 재현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전혀
변화가 없던 얼굴, 아주 잠시의 일그러짐......나직하지만
또렷하던 신음......소맷자락을 깨물고 섰던 아영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으로 번개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검지와
중지를 맞물려 딱, 소리를 내면서 확신했다.
`그래! 조운은 분명 등에 상처를 입은 거야! 화정은 조운의
약을 사러 간 거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얼버무리는 조운과, 의심스런 표정을 짓던
영각의 사이에, 그때 화정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영각이 뭔가
물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화정은 조금 달랐다. 늘
덤덤하고 변치 않던 표정이, 조금은 긴급한 뜻을 담았으며,
차분하던 음성도 약간 높아졌었다. 아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다시 갸우뚱했다.
`하지만......그냥 다쳤다고 하면 될텐데 왜 굳이 숨기려고
했지?'
정말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조운이 다쳐서 화정이 조운의
약을 샀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여기서 흐름이 막힌다.
그리고, 화정처럼 남의 일에 크게 신경 안쓰는데다 조운이
얄밉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던 사람이, 그 혼잡한 인파를 뚫고
금창약같이 비싼 것을 사러 갔다는 것도 이상하다.
굳이 상처를 입었다면 조운 스스로가 사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왜 하필 화정이 사러 간 걸까? 아영은 어느새 소맷자락이
아닌, 자신의 검지를 깨물고 있었다.
`혹시......화정이와 조운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만약, 화정이 조운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면, 추리가
성립된다. 그렇지만......
`조운도 화정을 좋아할까?'
문득 이런 의심이 들었다. 흥분한 나머지 고개를 다시
치켜세웠던 아영은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 아영은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엇?!"
하지만 눈을 든 순간, 그녀는 그만 당황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운의 모습이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아영은 얼굴을 붉히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난 몰라! 딴 생각하다가 놓쳤어, 어쩌면 좋......!"
"아영."
맑지만 우아한 곳이 있는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익숙한
음성에 내심 안도하면서, 아영은 당황한 빛을 얼굴에서 미처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휙 돌렸다. 손에 무엇인가를 든 화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화정에 대해 의심을
잔뜩 품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고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아영은 마치 지옥에서 부처라도 만난 것처럼 기뻐져서 화정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와, 화정아! 다행이야!"
기뻐하면서 자신의 옷소매를 붙드는 아영을 화정이 묵묵히
보더니 아영의 뒤쪽을 유심히 살피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 내 주변을 살피는 거지, 하는 생각으로 어리둥절해서
화정을 보던 아영은 잠시 후에야 그녀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깨달았다. 얼른 대답했다.
"미, 미안......나 사실은 길 잃었어......잠깐 딴 생각했는데
조운님이 그 사이에 가신 모양......"
"조자룡!"
화정의 말에 아영은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끼면서
돌아보았다. 조운이 말고삐를 쥐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림을 당한 느낌에 젖은 채, 아영은 무안해서 주변을 둘레둘레
살폈다. 어두워진 밤하늘에 어느덧 희뿌연 달이 걸려있었다.
벌써 밤이 된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흩어지고, 혼잡했던
장들은, 상인들이 모두 걷어가고 닫혀있다. 몇몇의 행인들과
아영 일행만이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꽤 오랫동안
정신없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아영은 조운을 보면서
더듬수를 놓았다.
"하, 하하......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저, 그런데
어디 계셨어요, 조운님? 전 어디 가신 줄 알고......"
"아닙니다. 근처에 계속 있었습니다. 숙소를 발견하느라
서 있었습니다."
어차피 자신이 딴 생각에 잠겨 서 있는 동안, 조운도 숙소를
살피느라 서 있었다는 소리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모른척하고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 무안해진 아영은 얼굴에서 붉은 기를
지우려고 노력하면서 화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어떻게 여기를 알고 왔어? 길 안 잃었니?"
아영의 질문에 화정은 자신의 손에 든 짐을 고쳐쥐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이곳에 있다고 현량이 알려줘서 따라왔어"
아주 쉽게 따라왔던 모양이다. 그 현량이란 사람이 뭐길래
그렇게 재주도 좋게 자신과 조운의 뒤를 밟다가 화정에게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미행을 당했던 것 같다. 미행당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다소 기분이 나빠지면서 또다시 `기준미달'
이라는 느낌을 지니게 된 아영은 아랑곳없는지, 화정은
성큼성큼, 조운의 곁으로 다가갔다.
속으로 그런 화정을 보면서 `왜 같은 이천 년대의 사람인데
저 아이는 저렇고 나는 이렇게 무시만 당하는 거냔 말이야.'
하고 되씹는 아영이었다. 그렇게 투덜거린 아영은 눈을 들어
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붉게 칠한 싸구려 목재건물이었다.
아직 고대라 그런가? 건물도 어쩜 이렇게 촌스럽고 조잡하게만
지었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것저것 울긋불긋한 종이등과
장식들이 달려있었지만 싸구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아영이 지냈던, 이곳에서의 남동생과 의모(義母)의
초막(草幕)에 비교한다면 한참 상급이기는 해도 말이다. 아영이
지낸 초막의 이웃집들도 다들 허름했는데, 어색하나마 이런
정도의 장식을 지닌 곳이 있다는 것은, 이 진류라는 도시가
부호들도 조금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나이가 조금 있어보이는 중년의 뚱뚱한 아낙이 구르듯 달려나와
세 사람을 맞이했다. 아낙이 나타나자마자 아영 일행의 바로
뒤편에 몇 명의 일행이 또다시 이곳에 당도하였다.
"어서 오세요, 청년. 그래, 일행은 몇 명인지?"
"세 명입니다. 방을 두 개 정도 주셨으면 합니다."
조운이 덤덤하게 말하자 아낙이 화정과 아영을 힐끗, 살폈다.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 몇을 더 살핀 아낙은
재빠르게 말했다.
"저런, 지금 마침 방이 두 개 남아서 말이지......어차피 청년
두 사람에 저 아가씨 하나 뿐이니까.......혹시 저 아가씨랑
청년은 부부인가?"
하긴, 화정은 현재 남장을 하고 있으니 남자로 생각되었을
지도 모른다. 조운은 그런 아낙의 경솔한 말에 화나는 기색도
없이 차갑게 답한다.
"아닙니다. 모두 사정이 있어 함께 있는 동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당도했으니 우리 요구대로 따라주시오. 방
두 개를 비워주시오."
조운의 강경한 말에 아낙의 이맛살이 찌푸러졌다. 뒤에 있던
일행이 웅성댐은 물론이었다. 아낙이 머뭇거리며 결단을 못
내리자, 조운은 아낙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다른 이가 묵으나 우리가 묵으나 방 삯은 두 방
몫을 모두 받지 않소? 삯은 걱정 말고 따라주시오. 내가
부부가 아니라 이 청년과 저 아가씨가 부부요."
`컥, 이럴 수가! 조운님,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이런
이상한 취미가......!'
하지만 방도가 없지 않은가. 본래 여자인 화정과 아영이
같이 방을 써야하지, 화정과 조운이 같은 방을 쓰고 아영이
따로 쓴다, 또는 아영과 조운이 같은 방을 쓰고 화정이 따로
쓴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조운의 핑계는 극히 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영이 더 기분 나빴던 건.......
"아유, 그렇군요. 잘생긴 양반이 똑똑도 하시지......
어쩐지, 청년과 저 아가씨는 부부로는 안 어울리더라구.
저 여자같이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과 청년이 부부라면 모를까,
호호호......묘한 사람들이군요. 아니아니, 예쁘장한 청년님과
아가씨도 묘하게 어울려요. 여인같이 생기신 분이라 그러신가?
아유, 재미있어라, 그럼......따라오시죠."
저 재수없는 아낙의 재수없는 농담이었다. 뭐야, 그럼 난
조운과는 어울리지 않고, 화정은 남장을 했어도 조운하고
어울린다는 거야? 화정과 난 여자니까 그렇다 쳐도......
아영은 분풀이 대신 아낙의 뒤통수를 힘껏 째려보아 주었다.
돌아서던 다른 손님들 일행 사이에서도 킥킥거리는 소리가
적잖이 터져나왔다. 아영은 열등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면서
조운과 화정, 아낙의 뒤를 따랐다. 목으로 뜨거운 것이
넘어오려고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열심히 눈을 깜박
거려서 애써 그 눈물을 짓눌렀다. 역시, 난 어디를 가든
미달인가봐, 하는 생각이 내내 아영의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었다.
*******
따끈한 김이 나오는 국과 이것저것 있는 식사는, 안 그래도
허기져있던 아영에게는 참으로 즐거운 것이었다. 구수한 냄새를
내는 갈색의 잘 익은 고기와, 야채가 넣어진 구수한 국물,
보기에도 윤기가 흐르는 것이 꽤나 맛나보이는 밥은 아영의
입맛을 자극했다. 즐겁게 수저를 들고 음식을 먹는 아영은,
화정과 조운의 속도를 누르고 단연 1위의 속도를 유지해냈다.
화정이 그런 아영을 쳐다보았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네?"
늘 얄밉던 화정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워낙 즐거워서
그런지 얄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영은 국물을 한가득 퍼서
입안에 바쁘게 밀어넣으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그럼, 게다가 난, 여기 와서는 만날 풀죽만 먹었단 말야!"
`여기와서는' 이라는 단어를, 조운과 화정이 해석하는 바가
분명히 다를 터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아영의 먹는 모습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주변 사람들이 구경삼아 웃으며 지켜보고 있을 정도로
왕성하게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던 아영은, 고기를
다 뜯고 나서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수 있었다. 식탁에
무리지어 둘러앉아 있는 손님들은, 음식을 탁상 위에
놓아두거나, 수저를 든 채로 멍하니 아영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영은 속으로 사람 먹는 것 처음보나,
왜 하필 이쪽으로 시선이야, 하고 투덜거리다가, 바로 앞에
앉은 조운과 곁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화정을 보고야
이유를 깨달았다.
준수한 외모에 어울리게 점잖게 먹는 조운과, 화사한 외모에
어울리게 얌전하고 조신하게도 먹는 화정. 그렇잖아도 잘
생기고 예쁜 청년 둘에게, 사람들이 시선을 모으고 있었을
터인데 바로 곁에 앉아서 비교되는 외모로, 비교되는
식사행실을 행하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다르게 보였을까.
아영은 우울한 기분으로 젓가락을 내리고 양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 입술을 깨물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괜찮아. 더 먹어."
갑자기 화정의 음성이 귀에 들어오자, 아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저 얼음공주가 뭐라고? 얼떨결에 고개를
들었다. 화정은 자신의 접시를 아영에게 들이미는 것이었다.
"배가 고팠다면 더 먹는 것이 좋아.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하든 너한테는 상관없잖아."
아영은 멍하니 화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음기 하나없는
고고한 얼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부드러워 보였다.
아영은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저 아이, 생각보다 좋은 아이일
지도 모른다. 아영은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용기를 내어 수저를 들었다. 모처럼 기분이 조금 전환되자
주변의 속닥거리는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오지
않았다기보다,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지만,
어쨌거나 아까만큼 쑥스럽지 않았다.
그래,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하든 나와는 상관이 없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아영은 오히려 더 맛있게 먹었다. 처음에는
아영이 아무렇지 않게 왕성하게 먹어대자 수군거리던 주변
사람들도, 이내 지쳤는지 고개를 돌리고 저마다의 할 일로
돌아갔다. 아영의 쩝쩝거리는 소리 가운데 세 사람만이 침묵을
지켰는데, 아영이 거의 다 먹을 때 즈음해서 화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어, 자룡, 한가지만 물어볼께요. 노자를 공손태수께서
얼마나......주셨어요?"
그 말에 조운과 아영은 먹던 것을 멈추고 화정의 얼굴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자신에게 쏠리자
화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덧붙였다.
"별 뜻은 없어요. 알 면 안되나요?"
화정의 짧은 말은 의외로 조운을 안심시킨 모양이다. 조운은
다시 젓가락을 들면서 무관심하게 답했다.
"......금 100 가량을 주셨지."
이 때에는 금으로 거래를 하나? 아직 물물교환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아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영의 남동생과 의모는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가끔, 운 좋으면 은자 한냥이 들어왔고,
금 같은 것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양식이 필요할 때는 집의
물건이나 다른 것을 들고가서 필요한 양식으로 바꿔왔었다.
사실 아영이 부자들에게 재미로 꽃이나 풀, 나무 같은 것을
그려주고 받는 돈이 주 수입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의모의 일을 돕다가 팔을 다쳐서 그림을 장기간 못 그렸다.
덕분에, 남동생은 굶고있는 어머니와 누나를 보고는 못 견뎌서
사씨 집으로 구걸을 하러 갔던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조운, 내게 금을 60 정도만 주면 안될까요?"
화정의 말에 아영과 조운은 다시 표정을 굳혔다. 말도 안돼,
은자도 그렇게 귀했는데 금이면 얼마나 더 귀하겠어! 그리
생각한 아영은 약간 부은 얼굴로 화정에게 쏘아붙였다.
"뭘 하려고?"
"그 돈을 늘려보려고. 물론, 지금도 많은 돈이겠지만, 더 벌면
좋잖아요. 그나마 재력이 좀 있으면 어느 정도는 크게 도움이
될 거니까요."
조운이 무덤덤한 얼굴에 기가 차다는 빛을 담고 대꾸했다.
"설마하니, 네가 상업을 할 정도로 수완과 경험이 쌓여있는
것은 아닐 테고......그렇다고 노름을 잘 하는 것처럼 뵈지도
않아. 어찌할 셈이지?"
조운의 빈틈없는 따짐에도 화정은 당황한 기색없이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여기서 당장 무얼 어쩌려는 것은 아니에요. 장안에 당도하면
아마......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보통 숙소에서 묵을 거죠?"
조운은 화정의 말에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는 듯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음식을 집는다.
"사신은 숙소가 정해지게 되어있어. 일단 황궁으로 가서 숙소를
배정 받아야 하는 거야."
조운의 무심한 말에 아영은 곁에서 화들짝 놀라 되묻는다.
"황궁? 황제가 사는 궁?"
하지만 아영의 얼빠진 되물음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화정이 조금 망설이는 어조로 짧게 말을 시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말을 잠깐동안 끊은 화정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조운을 똑바로 쳐다본다.
"영각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어요?"
아영은 한심하다는 눈길로 화정을 바라보았다. 장사
이야기하더니 느닷없이 웬 영각과 숙소 이야기람. 아영이야
어찌 생각하든 화정은 아직도 아무 답이 없는 조운에게 다시
말을 늘어놓았다.
"자룡이 증명패(證明牌)*를 지니고 있으니 우리야 무리없이
들어가겠지만, 영각은 들어올 수 없게 되잖아요. 그럼 영각은
우리가 일을 마칠 때까지 바깥의 숙소에서 따로 행동해야 하는
건가요? 분명 동탁이 사신일행인 우리가 바깥으로 서신을 보내고,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아영은 옅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그렇다. 동탁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황성으로 들어간다면 사신이 마음대로
서신을 보내고 밖으로 들락날락 거리도록 내버려 둘 관리는
아마 없다.
그리고 영각은, 증명패가 없으니 일행과 함께 합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화정은 그런 상황이니 보통 숙소에서
영각을 기다렸다가 영각이 찾아오면 그때에야 황성으로 들어가
숙소를 배정받자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기간동안이라도 금 60 정도로 장사를 해 보고
싶어요. 물론, 꼭 번다는 보장은 없죠, 나도 처음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밑질 것도 없지 않은가요? 노자는 남은 40으로도
충분하고, 동탁을 달래는데에 금 60 정도를 사용했다고 하면
공손찬님도 충분히 납득하실 거여요."
"와아......"
아영은 감탄이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같은 나이의 아이다.
같은 시대에서 온 사람이다. 같은 여자아이다. 하지만 한쪽은
저렇게 빈틈없는 생각을 해 내고 있는 반면 한쪽은 여기서 먹을
것이나 열심히 챙기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 또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만약 우리가 동탁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동탁을 달랠 셈이지? 동탁의 눈 밖에 나면
그때야말로 공손태수께서 의도하신 대로 남은 돈을 써야 할 터인데."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저 조운이라는 사람도 정말 똑똑한 것
같다. 아영은 그제야 의문이 생겨서, 맞아, 하는 심정으로 화정을
같이 쳐다보았다. 화정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것도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어요. 그가 포악하기는 하지만
온순하게 할 방도가 있거든요."
화정은 자신만만해보였다. 하지만 조운은, 뭔가 미덥잖은
모양이었다. 경계하는 듯한 음성으로 화정에게 되묻는다.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나?"
"염려 마세요. 절대, 또다시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께요. 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있으니까요."
`또다시 곤란하게......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 그것보다......'
의심스런 생각을 하던 아영은 당장 급한 사항으로 사고를
전환시켰다.
`저 얘, 그래도 재벌 총수 후계자니까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겠지? 그리고 밑지는 것도 아니니까......그래, 오히려
번다면 좋잖아. 나도 맛있는 것과 예쁜 옷을 얻을 수도
있고......'
그리 생각이 미친 아영은 급하게 찬성했다.
"그래요! 화정은 거상(巨商)의 딸이었는데다 머리도 좋으니까
믿어도 될 거여요!"
아영 딴에는 머리를 굴려서, `재벌' 이란 단어를 이
시대적이게 `거상' 으로 바꾸어 말했는데, 어딘가 에러사항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운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거상의 딸?"
화정이 급하게 끼어들며 얼버무렸다.
"아, 아무튼, 그럼 장안에 가서 생각해요. 오늘은 다들 이만
쉬죠. 내일 일찍 떠나야 하잖아요."
화정의 개입에 조운도, 아영도 궁금증을 안은 채로, 대꾸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엄청난 부잣집 외동딸이었다고
밝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지닌 아영과 마찬가지로, 조운도
좀 의문이 있는 듯했지만, 조운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화정의 말에 아영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적어도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정도는 밝힐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안 했나? 아니면 다른 거짓말이라도 했나......?'
화정과 만나면서 의문이 더욱 많아진 것 같았다. 어느덧 화정은
삐걱거리는 붉은 목재의 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곳도 군데군데 보이는 난간을 짚으면서, 우아한
걸음걸이로 올라가는 화정을 주변 사람들이 살펴보고 있었다.
조운은 어디로 갔는지 벌써 보이지 않았다. 아영은 더 이상
지체말고 화정을 따르자고 생각하고는 앉아있던 나무탁상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멀어져가는 화정의 뒷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서
종종걸음으로 서두르면서도, 아영의 미간은 활짝 펴지지 않았다.
아영은 자신이 이렇게 의심이 많은 성격인 줄 미처 몰랐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앞장서서 가는 화정의 뒤를 천천히
따라걸어갔다.
*******
-----------------------------------------------------------
*풀이
1.증명패(證明牌): 신분을 알리는 증패. 신분증명증이라고 보면
된다. 아마도 여기서는 사신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하는 패였을
것이다*작가주
"너, 왜 나한테 미행꾼 붙였어?!"
깨끗하게 세수까지 하고는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침상에
앉는 화정에게, 아영이 대뜸 불만스러운 어투로 쏘아붙였다.
사실 아까 방을 잡을 때 주변의 비웃음을 산 일과 여태껏
꼬리표처럼 달아왔던 열등감, 그런 것이 아영의 기분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었다.
만약 평소의 자신이라면 별 생각없이, 단순히 궁금한 것을
이유로 `미행꾼이었어? 현량이 뭐 하는 사람인데?' 하는 식으로
질문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는 도중 아영은 화정에 대해
유감을 쌓아두고 있었는지라 그런 상냥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더구나 식당에서 기분이 나쁜 채로, 마지막에 자신이
화정더러 `거상의 딸' 이라 한 것이 뭔가 실수를 한 듯한
기분까지 겹쳐서 아영의 감정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것이다.
특히, 크게 탓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의 그 `거상의 딸' 에
대한 어떤 죄책감 비슷한 것이 아영의 기분을 극도로 악화시킨
덕에, 아영은 지금에서야 그 `미행꾼' 에 대해 탓하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런 아영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정은 그리
푹신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침상을 천천히 정리하면서,
시선은 아영에게 주지도 않고 차분히 묻는다.
"미행꾼이라니?"
시선도 주지않는 그 차가운 차분함이 아영을 더더욱 자극하는
것 같았다. 본래 차갑기는 하지만 막상 감정이 격양된 상태에서
저런 태도를 대하니 뻔뻔스럽게만 보였다. 화를 못 이긴 아영은
그만 자신의 침상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음성을 높이고 말았다.
"모르는 척 하지마! 그, 현령인가 뭔가 하는 미행꾼을 붙여서
우릴 따라왔잖아!"
"아하......"
격분한 아영의 음성에도, 화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이 침상에
앉아 책을 꺼내들고 펼쳤다.
"그건 사람이 아니야. 미행시킨 것이라기보다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어. 어쨌든 너한테는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었으니까 사과는 할게."
마치 이건,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불쌍하니까 내가
그냥 참지, 뭘.' 하고 말하는 식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영은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야!"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고 책을 보면서 태평하게 답하는 화정의
사과는, 기분이 좋아지기보다 도리어 배로 감정을 자극했다.
화를 못이긴 아영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화정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너,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니?"
화정은 태평하게 자신의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머리끝까지
감정이 치솟은 아영은 화정에게 한마디 더 하려고 했다. 그 찰나,
화정이 시선을 들어 아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넌 내가 엎드려 빌기라도 바라는거니? 그 정도의
사과로 그칠 일이라고 생각해. 그럼 된 것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해."
아영은 그만 그 압박감에 입이 얼고 말았다. 확실히, 아영이
판단하기에 아마, 제 3자가 보았더라도 화정이 잘못했다고 할
것이었다. 미행꾼을 붙인 행위 자체가 그렇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사과하는 화정의 태도가 더욱 화가 난다. 그리고
누구라도, 만약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화정에게 `네가 조금
너무한 것 아니야? 사과를 하려면 태도를 좀 부드럽게 해서
진심이 보이도록 해야지.' 라고 나무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정의 시선은 사람을 제압하는
듯한 어떤 묘한 압박같은 것이 있었다. 특별히 어떤 말을 더
하지 않았어도,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 화정은 그 시선
하나로 아영을 그대로 눌러내고 있었다. 아영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그런 힘이 숨겨져있었다.
동갑내기 친구에게 이런 시선을 받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린 아영이
입만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자 화정은 고개를 다시 돌려 책을
향해 시선을 꽂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너무
화가 나고 분해진 아영은, 자신의 눈에서 뭔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초라했다. 화가 났다. 화정에게 무어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할 말은 없었다. 분한 나머지 약간의 훌쩍임을
동반한 채, 아영이 등을 돌리고 침상으로 가는데, 뒤에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데리고 다니는 영수야. 다만,
원령도 못 보는 네게는 보이지 않을거야."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불에 머리를 푹 파묻고 울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분해서 울기까지
해야 하는데?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넌데, 왜? 이렇게 화정에게
묻고 싶었다. 지나치게 흥분해서 과민 반응으로 물어왔던
아영 스스로도 잘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말을 하고, 저런 식으로
사람을 누른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화정을 탓하지 못하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화정의 저 행동은, 분명 화정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고의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단지 늘 떠받들려서 자랐기에 저런
고압적인 태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
사실의 화정은 정말 미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 특별히 알아내지 않아도, 아영은
그런 사실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분란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쾌활하다. 그리고
남에게 상처주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다만,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말을 고르지 못하고 마구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면 늘상 스스로 후회한다.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을 즐겨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것 때문에
마음 약한 아영은 더더욱 화정에게 무어랄 수 없다는 설명이 가장
옳았다.
아영은 늘 그랬다. 친구들과의 약속에서, 친구들이 약속시간보다
두세시간이나 늦어도 차마 친구들에게 무어라고 심하게 화내지도
못하고 `괜찮아'라는 말만 연발하며 그저 훌쩍거리면서 울기만
했었다. 심성이 나약한 곳이 있다면서 어머니는 많이도
걱정하셨었다.
지금도 그렇다. 저 화정이란 아이가, 늘 자신을 깔아뭉개는 것
같아도 사실 본심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가벼운
질책이나 탓하는 일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조금만 강한 원망을 담고 화를 내려면 자신은 차마 말을
못하고 혼자 울어버리는 성격이었다.
즉, 평소의 모습을 보면 잘 따지고 잘 비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꽤나 큰 다툼이 일어날 때면 한마디도 못하고 속으로만
원망하고 눈물짓다가, 결국 스스로에게 모든 죄를 돌려버리는
타입이다. 그리고 또한, 화정의 대응을 모두 `깔아뭉갠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아영 자신의 유별난 열등감 때문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유달리 열등감이 심한 아영은 자신보다
빠질 것이 없는 화정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부러우면서도
질투와 좌절을 느낄 뿐이었다.
`그래,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니까 받아들이자......'
일부러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해 보기도 했지만 아직도 눈물이
멈추어주지를 않았다. 아영은 침상에 누운 채로 몸을
뒤척거리면서, 한참동안 부은 눈으로 멍하니 누워있었다.
늘 짚더미 위에서 자던 불편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그때보다 배로 불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부잣집 공주님과 자신같은 아이가
잘 맞을 리 없다. 영각의 말이 옳다. 아가씨와 하녀. 바로
그것이었다. 화정이 말을 놓게하고 동등하게 대하려 한다고 해도,
화정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자신은 은혜라도 갚으려고 끼어든 하녀에
불과하다.
어찌 생각하면 화정에게 얄밉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고맙게
보아야 한다. 아영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시 위로하며 몸을
뒤집었다. 복잡한 생각에 몸을 다시 뒤척였는데, 뭔가 작은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잘못 들은 소리로 판단하고 눈을 붙이려는데,
여전히 눈이 감겨지지가 않았다. 답답해진 아영은 목이 타는 것
같아 물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았다.
눈을 비비던 아영은 건너편에 있는 화정의 침상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의심스러웠지만, 아영은 다시 그 생각을 없애버렸다. 에이,
측간이라도 갔나보지, 하는 식의 생각으로. 곁에는 거칠게 빚어낸
도자기 주전자와, 작고 좌우 대칭도 제대로 맞지 않는 엉터리
도자기 컵이 놓여있었다. 시꺼먼 방에 혼자 있으니 왠지 조금
무서워서 아영은 곁의 등불을 켰다.
어차피 누워도 잠도 오지 않는데 책이나 읽자, 싶은 심정으로,
화정의 침상 곁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왔다. 화정이 돌아오면
이 책을 돌려주면서, 책 잘 읽었어, 라고 한마디해서라도
분위기를 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 심하게 다퉈도 본래,
모른 척 하고 평상시처럼 넘기면 금방 분위기가 풀어지는 법이라고
아영은 믿었다.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이상한 책이었다. 아영은
아직 한자를 읽는 것은 별로 익숙하지 못했다. 그저, 학교에서
배웠던 한자 몇 개를 더듬어서 읽어보니 주술에 관련된 책 같았다.
왜 이 아이가 주술에 관한 것을 읽을까, 하고 의문도 생겼지만,
별 것 아니려니, 하고 금방 의심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글읽기를
좀더 배워야겠다고 생각해보았다. 화정은 자신보다 이 세계로
떨어진지 기간이 짧다고 들었지만, 그녀는 읽고 쓰기도 능숙하게
하는 것 같았다.
아영은 `재벌집 딸이었으니까 한문 과외도 꽤 해봤겠지.' 라는
식으로 넘겨왔다. 그래도 막상, 이렇게 글을 잘 모르니
답답해졌다. 에이, 내일부터 한문 공부를 좀더 해 봐야겠다, 하고
결심하면서 화정에게 한문 읽고 쓰는 법을 배워서 사이나 가깝게
좁혀보자는 꾀도 덩달아 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앉아있었지만, 꽤 시간이
흘러도 화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하고
초조한 심정이 되었지만 바깥이 조용한 것으로 보아 말썽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디를 갔지, 하고 의심해 보았다. 결국
의심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영은 그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천천히 열고 바깥으로 나오고 말았다.
*******
훌쩍거렸는지 조금씩 들썩이던 아영의 어깨가 조용해졌다.
아마도 울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난 후에야 몸을 일으킨 화정은 조금
미안한 심정으로 아영의 누운 등을 힐끗 보았다.
화정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스스로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아까, 자신의 태도에 당황한 나머지 눈물을 보이던
아영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실, 그렇게 하고는 내심
당황했던 화정을 아영은 알아챘을까.
본래 화정은, 정말 미안한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 웬만하면
자신은 아영에게 현량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 주고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 했지만, 이전의 학교 친구들을 대하던 자세가
무의식적으로 나와버렸다.
사실, 자존심이 꽤 높은 화정으로서는 남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늘, 남에게 굽히지 말 것을
배워왔고, 오만과 고고, 긍지를 강조해서 배워왔다. 결국,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화정에게 `필요시에 굽히는 법'은
가르쳐 주었어도 `남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법'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던 셈이다.
필요에 따라서 굽히는 것과, 남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은
당연히 다르다. 화정은 굽혀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절박하게 못
느끼면, 저렇게 건방지게 사과하는 것이 몸에 익숙하게 배어있었다.
게다가 이제까지는, 자신에게 봉사하는 가정부들이나 일하는
사람들이었으니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동등한
입장인 아영으로서는 더더욱 모욕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사과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화정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고
있는데 깨울 필요도 없고, 깨워보았자 너무 어색한 분위기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화정의 그 `습관성 태도'
가 나올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그냥, 시간의 힘을 믿자,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손을 뻗은 화정은, 문득 모순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아니다. 제아무리 시간이라 해도 그것만은 전혀, 해결해주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갔어도, 시간은 그 상처를 해결해주지
않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자신이 어떤 결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한 상처는, 화정에게 그런 치명상을
안겨주었다. 스스로도 증오스럽고 당혹스러운 그런 상처......
화정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꼭 깨물면서 자신의 짐을
조심스럽게 뒤졌다. 묵직한 것이 잡혔다. 낮에 산 금창약이었다.
플라스틱이나 일회용기 같은 가벼운 용기를 못 만드는 시대라서
그런지, 무겁고 단단한 도자기에 들어있었다. 꽤나 비쌌던
모양이다. 자신이야 그저, 상인이 은자 세 냥을 달라기에
열심히 실랑이를 벌인 끝에 두 냥을 주고 샀다.
그렇게 깎아서 샀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금창약을 사가는 화정을
존경스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은 절대로 살 수 없는
것을 샀던 것처럼. 여하튼, 아직 화폐가치에 대해 은자가 얼마나
귀하고 금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를 모르는 화정으로서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했을 뿐이다. 여하튼, 은자도 꽤
귀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시대 화폐가치에 대해서 아직 잘은 모르겠어......'
그리 중얼거리던 화정은 금창약을 손에 들고는 조심스럽게,
아영이 깨지 않도록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로 된 묵직한 문을
열 때, 희미하게 끼익, 하는 소리가 나자, 당황한 화정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영은 꼼짝도 않고 있었다.
긴장하면서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그 좁은 틈새로 비집고 나온
화정은,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문을 닫았다. 다행히도 문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닫혀주었다. 방 안에서의
걸음걸이보다는 조심성이 떨어지지만, 여전히 조용한 걸음으로
기다란 난간을 걸어가던 화정은 바로 곁의 방으로 다가오자
심호흡을 했다.
문을 두드리려다가, 손에 들린 금창약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망설이던 그녀는 마음을 굳히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안은
아직도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고, 조운은 탁상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화정은 순간, 북평이나 좌천된 작은 마을에서의 조운을
떠올렸다. 정말, 생각해보면 조운만큼 노력파도 적다고
생각했었다. 그 바쁜 공무를 집행하는 와중에도, 쉬는 날이라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결코 없는 사람이었다. 낮에도
화정이 조금 늦게 일어나 허둥지둥할 때, 이미 조운은 무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늘, 해가 있을 때에는 뒤뜰에 있거나, 어딘가 밖으로 나가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밤이 되면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조운을 따라 왔을 때,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책을 보면서 `무인의 집에 웬 책이 이렇게 많아?' 하고
의아해했던 화정은, 며칠 정도를 조운과 함께 지내면서
그 까닭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삼국지를 읽은 독자라면 어느정도는 알 것이다. 조운. 그는
유비를 따라다니는 그 긴 세월간,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패한 적이 거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타고난 냉정을
유지하는, 문무를 겸비한 명장이다. 아마도 실력을 아무리
낮게 보아도 최소 열 손가락 안에는 드는 장군감이다.
물론, 삼국지를 읽을 때는 별 생각없이, `참 멋진
사람이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직접 그를 대면하고, 함께
있다보니 깨달았다. 그의 지용(智勇)은 저런 노력 끝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저, 조운."
공부를 방해하는 것은 미안했지만, 그래도 빨리 일을
마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싶은 화정은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조운은 안 그래도 화정이 들어온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책을
덮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조운의 얼굴이 등불에 비추어
한층 환하게 보였다. 저 사람은,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런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걸까. 아니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냉정일까, 기타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화정은 자신이
양손으로 감싸쥐고 있던 금창약 단지를 내밀었다.
"이 금창약......상처에 바르기만 하면 금방 낫는다고
하더군요. 쓰세요."
화정의 짤막한 말과 함께 내밀어진 금창약 단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조운이 고개를 다시 들었다. 순간 화정은, 뭔가
모르게 그의 눈빛에서, 깊은 절망과 슬픔 같은 것을 보았다.
서글서글하고 수려한 그의 눈매 속에 들어있는, 새까맣고 깊은
눈동자. 무심하게 얼어붙어 있지만 뭔가 모를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왜 그럴까. 자신이, 어째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자신이, 이런 것을 느끼는 것일까.
"......고맙군."
조운의 입에서 짤막한 한마디가 나오자, 화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걱정하고 있었다. 그나마,
자신이 조운에게 빚진 것을 갚을, 한 가지 방도로 산 금창약이다.
빨리 나아야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아서 힘든 것을
무릅쓰고 샀던 것이다. 그런데, 혹시나, 받지 않는다거나 아예
무시해버린다면 어쩌나, 생각하고 있었다. 조운이 화정의 손에서
금창약을 가져가더니, 단지의 입구를 덮고있는 질긴 천을 벗겨냈다.
단지의 안을 살피는 조운의 시선을 따라, 호기심이 동한 화정은
자신도 그 안을 훔쳐보았다. 시꺼멓고 진하면서 보기에도 끈끈한
액체가 들어있다. 이전에, 이천 년대의 한국에서, 다쳤을 때 가끔
바르던 연고가 생각났다. 아, 이천 년대 생각을 하니, 조금
그리워지기는 한다. 아무리 야박했다지만,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다. 갑작스럽게 머리 위를 짓누르는 감상을 애써 떨치려는데,
조운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음성이 그녀를 깨웠다.
"......그런데 너는 내가 매우 긴 팔을 지녔다고 생각했는
모양이군. 다친 곳은 등인데, 혼자서 이걸 쉽게 바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 말에 화정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먹는 약이 나을 거였다는 뜻이다. 여지껏 죽이고 있었던 예의
`얄미움' 이 천천히 고개를 또 들었다. 남은 실컷 생각해서
사주니까, 또 시비다. 화정은 홧김에 쏘아붙이고 말았다.
"그럼, 등 대요. 내가 발라줄 테니까."
거기까지 말을 하던 화정은 금방,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면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조운 앞에 있으면 늘 바보가 되는 느낌이 든다. 더욱이,
자신이 스스로 알던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또다른 자신인 것 같다.
방금 전에, 아영과 있을 때만 해도 이런 자신은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영과 있을 때에는 이런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도 그때는 딱딱한 자신이 나타날 뿐이고, 조운의
앞에서는 딱딱한 자신을 내세우려고 해도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아무튼 당황한 화정이 어느 정도라도 무마를 시키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좋아, 그렇다면 도와주었으면 좋겠군."
의외로 조운은 화정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화정은 좀
의심스런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조운은 천천히 웃옷을
벗었다. 결국, 화정은 마지못해 금창약 단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조운의 등에 다가갔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해.'
시일이 꽤 지났지만, 아직도 참혹한 상처로 남았다. 이제 피는
멎고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하지만, 아직도 울긋불긋하고,
새살이 마악 돋고 있는 등은,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러졌다.
화정은 묵직한 중압감과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단지를 등에
약간 기울여 약을 부었다.
끈끈한 흑갈색의 액체가 내려앉자, 손으로 천천히 약을 비볐다.
고르지 않은 피부가 직접 느껴지자, 화정은 측은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마, 다 아문다고 해도 흉터가 어느 정도 남을
것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흉터를 남길 것 같은 상처인데,
수천 년 전인 지금에야 하물며 어떻겠는가. 반은 참혹한
심정으로, 반은 그나마 아물어서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화정이 약을 바르기를 마치고 손을 멈추자, 조운은 묻지도
않고 곁에 놓아둔 자신의 옷을 집었다.
천천히, 옷을 입는 조운은, 등의 상처가 참혹하지만 참으로
멋진 몸을 지니고 있었다. 지나치게 비대하지 않고 딱 보기
좋게 잡혀있는 근육이나, 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몸은, 매우
탄탄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런 것에 별로 식견이 없는 화정이
보기에도 멋졌다.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올린 머리칼과 준수한 얼굴, 잘 잡힌
체격은 지나칠 만큼 우울하고 냉정한 분위기를, 흠이 아니라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조운이 웃옷을 다 입고 나자, 화정은 금창약 단지에 질긴
천을 다시 씌웠는데......
탁!
조운이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면서 곁에서 작은 물건을 집어
문 쪽으로 던졌다. 나직한 여자아이의 비명소리가 나면서
가벼운 소음이 났다. 놀란 화정은 문 쪽으로 덩달아 시선을
돌렸고, 조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영님?"
화정은 아차, 하고 속으로 외치면서 긴장했다. 분명, 자는
줄 알았는데 아마 화정의 뒤를 밟아서 쫓아온 모양이다. 그나저나
어쩌지, 방금 전의 일을 쭉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소
언짢은 표정으로 말을 내뱉는 조운에게, 아영은 얼굴을 붉히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여기서 무엇하고 있는거야?"
머뭇거리면서 조운을 힐끗 쳐다보더니, 조운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아영은 화정에게 다가와 조금은 찬 말투로 묻는다.
좀 따뜻하고 다른 사람과 맞서는 것을 귀찮아한다는 아영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화정은 그제야, 아영이 아직까지
자신에 대해 기분 상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침착하게
답했다.
"아, 응......그냥, 금창약 때문에."
침착해야 한다. 당황하면 상대는 별일도 아닌 것을 몇 배로
부풀려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런 원칙을 속으로 곰씹으면서
화정은 긴 소매 속으로 감추어진 자신의 양손을 마주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태연하게 아영을 응시하면서, 아직도 금창약이
묻어있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쪽 손등을 힘껏 할퀴었다.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화정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아직 약이 묻어있는 오른손의 중지와 약지로, 자신이
방금전 긁은 상처에 금창약을 발랐다. 다행히 아영은 화정이
뒷짐을 진 채, 손으로 무슨 동작을 하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분명히, 지금에서야 조운이 아영의 기색을 알아챈 것을 보면
아영은 지금 막 왔어. 내가 조운의 등에 약을 발라주고 있는
것을 보지는 못했을 거야. 아영같이 평범한 아이의 기색을,
조운이 늦게 알아챌 리는 없어!'
그리 나름대로 확신하는데 아영은 그제야 화정의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불만이 묻은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금창약? 그게 무슨 상관이야? 금창약 때문에 늦은 밤에 남자
방에 와야하는 거야?"
화정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왜, 아영같이 남의 일에 크게
참견하기 싫어하는 아이가, 늦은 밤에 남자의 방에 왔다는
사실에 민감해하는 것일까? 게다가 이 시대의 사람도 아니고,
성적인 것에 대해 개방이 되어있는 이천 년대의 사람이다.
물론 늦은 밤에 남자의 방에 와 있는 것이 기분이 좋은 말은
아니지만 아영이 그런 것에 시시콜콜 신경을 쓸 만큼 치밀한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정은
그 의문을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의심을 하지 않도록
넘기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태연하게 답했다.
"내가 손을 좀 다쳤거든. 피가 잘 멎지를 않더라. 그래서
금창약을 샀는데, 발라야 하는지 먹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너도 알다시피, 그나마 이곳 상식이 깊은
조운에게 물어보러 온거야."
화정의 말에 아영이 일단은 넘어간 모양이다. 놀라는 기색이다.
"다쳤다고? 어디? 상처 좀 보여줄래?"
화정이 다쳤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화정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손을 들어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심을 못 버리고 있던 아영의 눈동자에,
화정의 갈색약이 묻은 상처가 비치자, 그녀의 표정에는 옅은
낭패 같은 것이 떠올랐다.
`분명 나같이 곱게 자란 아이가 상처를 잘 견딜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때 영각이 조운의 등을 때릴 때 조운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던 거야. 생각보다 예리한 아이인걸,
하지만......'
화정은 마음을 다시 다잡으면서 일부러 아픈 듯한 시늉을
했다. 이 기회에, 아까의 그 어색했던 사과 사건도 조금 핑계를
대도록 하자.
"상처가 보기에는 작은데......내가 이렇게 상처를 입어본 일이
있어야지......아프더라......좀 긁혔는데 금창약을 어떻게
써야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그래서 약간 짜증이 나 있었는데,
아까 네가 나한테 미행꾼을 붙였다고 화를 내니까 나도......
화가 났었어."
화정이 이렇게 상처까지 보이면서 핑계를 대자 아영의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화정은 속으로 웃었다. 분명하다. 아영은 화정이
판단한 대로의 아이인 것이 틀림없다. 분명히,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부잣집 공주님은 상처 같은 것을 견딜만한 인내심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리를 이용해서 화정이 아픈 척을 하고, 그 때문에
화가 나있었기에 아까같은 태도를 취했노라, 하니까......그
말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나름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아영같은 타입은, 한번 경계가 풀어지면 타인에 대해 마음을
쉽게 여는 편이라는 것을, 화정은 간파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아영은 처음에 보았을 때 호감을 보이던 그
때같이, 풀린 표정으로 표정을 바꿔가고 있었다.
"아, 그랬니......많이 아팠나 보네. 난 그것도 모르고......
네가 아까 나한테 시비거는 거라고도 생각했었지, 뭐야. 그런데
식사할 때라도 진작 물어봤으면 될 걸 가지고 왜 지금에야
조운에게 왔어?"
제법 예리한 면도 있다. 사실 아영은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거짓말과 임기응변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화정을 잡을 수는
없었다.
"말했잖아. 그땐 배가 고파서 짐 속에 금창약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깜빡 잊고 있었거든. 숙소 들어가서 책을 읽고나서 짐에
넣으려고 하면서 금창약을 발견했어, 그래서 생각이 늦게야
났던 거야."
여기까지 오자, 아영은 아직도 완전히 의심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화정이 판단하기에 아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넘길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아영은
조운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죄송해요, 조운님. 하지만, 저도 잠이 안 와서 일어났더니
화정이 없어서 걱정이 됐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여기로
와 본 거여요."
아영은 화정을 힐끗 보더니 의외로 순순하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태도에는 이상하게
신경질이 묻어있었다. 아마도 아영은 본래, 조운이 다쳐서
화정이 도와주려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그녀답지 않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화정이 능숙하게 둘러대자 자신의 추리가 들어맞지
않았음을 깨닫고 또다시 무력감을 느끼고 가 버렸음이
틀림없다. 무력감과 열등감을 너무나 잘 느끼는 아영을 모르는
화정이 아니었다. 여하튼 화정은 한고비는 넘겼다는 심정으로
아영이 나간 문을 보면서 안도의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나가려는데, 뒤에서 조운의 손이 자신의 왼 손을 붙잡는
것이었다.
"!"
순간적으로 놀란 화정이 고개를 휙, 돌리는데, 조운은 화정의
손등을 살펴보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 네 스스로 상처를 낸 건가?"
"그래요."
얼굴이 벌개진 것을 느끼면서 화정은 손을 얼른 뿌리쳤다.
조운이 조금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마,
모를 것이다. 남자에 대해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자신을 말이다.
남자들의 손이 닿는 것조차 싫은 자신이, 갑작스럽게 손을 덥썩
잡히는 것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겠는가.
사실, 생각해보면 여지껏 마초 이외에, 남자에게 직접 닿은 적은
거의 없다. 물론, 조운이 간간하게 몇 번 있었어도, 대부분
급박한 상황이거나 어쩔 수 없어서, 라는 것이었지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손이 잡히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조운은 그런 화정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숨겼지?"
화정은 조운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다소 깐깐한
음성으로 답해주었다.
"당연하잖아요. 여지껏 내 멋대로 행동해서 멀쩡한 사람하나
죽일 뻔했는데, 또 멋대로 할 수는 없어요. 본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기 싫어하는데, 내가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차갑게 잘라말하고, 화정은 돌아서서 조운의 방문을 조금
거칠게 닫았다. 문을 닫고, 다시 아영과 자신이 있던 방
앞으로 돌아온 화정은, 문 앞에 서서 잠시 자신의 상처난
손등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런 걸까.
그렇다. 분명 조운이 일행들에게 등의 상처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개인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이든, 뭔가 모종의 중요한 사정이 있는 것이든,
여하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화정이 또다시 멋대로
조운의 뜻을 거슬렸다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화정은 단지, 다른 사람의 눈치를 고려하는 법을 조금은 배운
것이다. 하지만......아영을 생각하면 묘하다. 눈치를 고려하는
법을 알았다면서 아영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아무리 아영이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라지만......왠지
모르게 그 아이에게는 이질감만 잔뜩 느껴져.'
그리 생각하면서 화정은 자신의 상처를 오른손으로 감쌌다.
그렇다. 아영은 그랬다.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학교에 있을 때 자신을 따돌리던 그 아이들......평범하다고
애써 자신이 비웃으면서 멀리하던 그 아이들 같은 느낌......
화정은 고개를 숙였다. 난, 늘 사람들에게 따돌림만 받는
존재일까. 나도 사실은......함께 어울려 지내고
싶은데......지극히 의무적인 조운, 자신을 그저 단순하게
`외모가 예쁘고 콧대가 높은 여자' 로만 보는 영각, 제 잘난
맛에 사는 버릇없고 재수없는 공주님으로 은연중에 인식을
박고 있는 아영.
화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학교에서도,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어느 누구도 화정에게 다가오던 아이는
없었다.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구경만 했다. 모두,
아영과 같았다. 화정은 그 아이들에게 있어서, 같은 반
`친구' 가 아니라 구경하기 좋은 `인형' 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자신은 아영에게도 잘 대하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경계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보여온 것일지도 몰랐다.
사귀자면서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남자아이들. 그 아이들도
마찬가지. 자신을 정말로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화정을 `한번 사귀어 보면서 남들에게 여자친구라고 자랑하면
좋은 장식물' 같은 것으로 여겼다. 본성은 남보다 여리고,
나름대로 속으로는 상처를 많이 입는 그녀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아무......도......?
`아니야!'
화정은 문득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소매를 걷었다.
아직도 빨갛게 상처가 난 손등 위에, 예쁜 청금석 팔찌가
보인다. 저도 모르게 화정은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와 함께 가자.>
`마초......'
이렇게, 혼자서 울적할 때면 늘 생각난다. 어렵게 고르고
고른 청금석 팔찌를 주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마초의 음성,
얼굴. 외로울 때면 생각난다. 생각해보니 자신은......다른
남자들이 손을 덥썩 잡으면 방금전 조운이 그랬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여왔지만, 이상하게 마초만은......그렇지 않았다.
마초가 꼭 붙잡던 손에서는, 따뜻함을 느꼈고, 더더구나 마초가
끌어안아 주었을 때에는 어떤......안도감과 포근함, 그리고
기쁨 같은 것마저 희미하게 느꼈었다.
<나와 함께 서량으로 가자. 난, 장래에 제후 중 하나가
될 거야. 원한다면, 더 강해져서 너에게 모든 것을 주겠어.>
화정은 얼굴을 붉히면서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쌌다.
`나도 참......장난삼아 한 말일텐데 왜 그 말을 계속 곰씹고,
또 곰씹고 있는 거지......'
하지만 느껴진다. 같이 있을 때에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떨어져 있으니 자신 역시 마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느껴진다. 힘들고 외로울 때는 이상하게 마초가 함께
있어주었더라면, 하는 소망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화정은
고개를 들었다.
<너, 이래도 아직은 웃어주지 않는구나.......하지만 언젠가
웃게 될 때, 처음 웃을 그 때는 꼭 내 앞이여야 한다고
약속해줘야해? 그럴 거지?>
`나, 그때......정말 기뻤는데......날 그렇게 순수하게
좋아해 준다는 사실이 정말......기뻤는데......그런데 왜
난 그때도 환하게 웃어주지 못했을까......?'
후회가 된다. 조금은 섭섭한 빛을 얼굴에 띄웠으면서도,
따뜻하게 웃어주던 마초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늘상 후회가
된다. 밝게, 자신에게 그렇게 무안을 많이 당하면서도 늘 밝게
웃던 아영이 부러울 때는, 바로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다.
저렇게......저렇게 밝을 수 있다면......그래서 마초
앞에서도 기쁘던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아영에게
늘 묻고싶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밝을 수 있니......?'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시끄러운 담소가 오가고,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며 문을 여닫는 소리까지 이에 가세해
정신이 없었지만, 세 사람은 묵묵히 식사만 하고 앉아있었다.
사실, 세 사람은 나름대로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을 것이었다.
조운과 화정이 전혀 한마디도 않고 식사만 하고 있는 모양을
힐끗 훔쳐보고 있는 아영은 사실 여러 가지 생각의 기로에
서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젯밤에 화정이 조운의 방에 있던 일은
그녀를 혼란하게 만든다. 결론이 서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조운이 등을 다치기라도 해서 화정이 약을 주러 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화정이 손등의 상처를 보인 이후로, 아영의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무래도......화정의 말을 믿는 것이 더 앞뒤가 맞아.
손등이 아파서......금창약을 쓰려다가, 똑똑한 아이니까
의심이 들었겠지. 먹는 건데 바르거나, 바르는 건데 먹으면
큰일이니까......그래서 이 세계 사람인 조운에게 물어보러
간 거고......
상처가 있고, 그 상처에 약을 바른 것도 다 봤잖아? 그리고
그 상처가 아파서 짜증이 나 있었다는 말도 납득이 가.
화정같이 곱게 자란 아이라면 그 상처 때문에 종일 짜증을
낼 가능성이 크니까.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괜스레 사과대신
화를 냈던 것이고......내가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었나봐.'
나름대로 추리를 열심히 해본 아영은, 결국 자신의 추리에
만족하면서 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밥그릇을 천천히 비워
가는데,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어찌나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또렷하게 들렸다.
"들었어? 또 동평에서 심장 없는 시체가 나왔다더군."
`어? 동평이라면 우리가 지나온 것 아니었나?'
의심스런 생각에 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곁에 있던
화정도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마도, 내색하지
않지만 조운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식사를
거의 멈추고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여자가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누군가 그 시체를
살펴본 것 같더라는군. 그런데 이상하게 한동안은 시체가
발견되지 않더란 말이지. 꼭 하루에 하나씩 나오던 시체가
말일세. 그런데 최근에 젊은 청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지 뭔가."
"동평에서 산양을 거쳐서 오는 사이에 있는 그 작은 산을
말하는 게로군. 그 산이야 유명하지 않은가. 관군도 토벌을
갔다가 전멸당하고 왔다고 들었네. 시체 발견되는 일이
이야깃거리가 된다고 떠드는겐가, 지금."
"아니, 그런데 얼마간 시체가 발견되지 않더니, 갑자기
발견되었다니까. 대략 열 일곱에서 스물 사이의 나이
같다던데, 체구가 약간 작은 청년이라더군."
아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자신의 머릿속으로
영각이 스쳐가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내 부정하고 다시
중년의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회색 옷을 입었다더군. 어깨에 좀 이상한 막대기 같은
것을 메고 있었고, 갈색 암말이 등에 짐을 잔뜩 싣고는
근처에 매어져 있었다던데......눈썹이 치켜올라간 사람이래.
지금 그 자의 가족을 찾는 모양인데, 자네가 아는 사람인가?"
그 말에 아영은 자신의 얼굴을 스쳐지나는 차가운 공포를
느꼈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의심을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영각은 바로, 회색의 옷을 입었고,
자신의 무기랍시고 어깨에 이상하고 길쭉한 봉을 메고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영각이 끌고 간 말은 갈색의 암말이었다!
불안하게 조운과 화정을 둘러보았다. 화정의 고요한 얼굴에도
어느 정도의 경련이 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친우라는 조운은
반응도 없이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저어, 조운님......혹시......"
아영의 음성이 불안을 담고 약간 떨렸다. 하지만 조운은
여전히 대답도, 어떤 말도 없었을 뿐이었다. 참다못한
아영은 옆의 사람들에게 묻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 했다. 그러나 화정이
팔을 뻗어 붙드는 바람에 아영은 멈추었다. 불안으로 심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 아영은 낮게 따졌다.
"왜들 이러지? 가서 물어야 하잖아. 혹시, 정말 영각이면
어떻게 할 건데?"
아영의 따짐에 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곁에서 또다른
이야기가 들려왔다.
"머리? 아, 머리는 묶어서 내렸다더군. 그런데 본래 두건을
썼던 모양이야. 두건이 땅에 떨어져있......"
"그것 봐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영은 조운에게 질책을 던졌다.
조운은 아영의 질책에도 동요하지 않고 차갑게 답했다.
"좀더 두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일단은 장안으로 가는
것이 좋겠지요."
조운의 말에 화정도 조금은 멈칫, 하는 눈치였다. 기가
막혀진 아영이 한숨과 함께 조운에게 쏘아붙였다.
"조운님, 하지만, 조운님의 친우에요! 그런데 가서
확인하고 돕지 않으실 거여요?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뭔가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사실이라면
이미 죽은 사람인데 임무를 중단하고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는
사실은 비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장안으로 가서 임무를
이행하고 천천히 생각해도 될 일입니다."
조운은 얄미울 정도로 동요가 없는 모습이다. 아영은
혼자서만 치를 떨고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화정 역시 말없이
자신의 짐을 챙겼을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아영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자신의 생각들에, 혼란스러웠다. 현기증이
일어서 자리에 털썩, 하고 앉아버렸다.
`영각을......굉장히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관심이
없는......걸까? 화정이야 본래부터 영각과 크게 인연이 없었던
사이라지만......어째서 저 사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