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장안(長安)의 전야제(前夜祭)
코를 찌르는 음식냄새, 주변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음성들과
달그락거리는 그릇소리, 그에 어우러져 요란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재주를 부리는 광대들. 역시 수도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건물들도 진류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깨끗하게 단장한 집들과
울긋불긋 화려한 종이 등이 늘어서 있는 길가, 물건 사라면서
목청을 드높이고 있는 상인들은 기운차 보였고 가끔씩 아영에게
야채까지 내밀어대면서 사라고 독촉하는 중년 남자들도 밉지
않았다.
아영도 아영이었지만, 더 넋을 놓고 있는 것은 의외로,
화정이었다. 화정은 장사하는 상인들보다도, 거리에 자리를
깔아놓고 칼을 먹거나 불을 뿜는 등, 재주를 부리는 광대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어찌나 신기해하는지 멍하니 서서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도 있었다.
진류에도 시장은 있었다지만, 장안은 훨씬 큰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재주를 부리고 있는 광대들이 많았다. 화정은 그들이
재주를 부리는 것을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이었다. 가끔 발걸음을
세우고 서서 일행을 따르는 것마저 게을리 했는데, 그럴 때에는
화정의 팔을 끌어 억지로 데려오느라 아영이 애를 먹었다.
물건을 이것저것 늘어놓고는 재주꾼을 기용해서 재주꾼이 재주를
부려 사람들을 모으면 물건을 팔아먹는, 일명 `약장수' 들도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서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두
소녀를 보면서 조운은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저 아영이란 아가씨는 분명 북평 근방을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화정 역시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규방 안에서만
철저히 감시받으며 살았던 모양이었다. 마냥 신기해서 정신을
놓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것을 발견한 아영이 발걸음이
아직도 간혹 멈추고 있는 화정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화정은
아영에게 끌려서 발걸음을 떼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재주꾼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화정의 행동은 해가 떨어지고 상인과 행상들, 약장수들이
짐을 싸들고 사라지기 시작해서야 정지되었다. 아영이 한심하다는
듯 화정에게 빈정거렸다.
"장사하는 것 처음보니? 왜 그렇게 넋을 빼고 있는 거야?!"
다소 가시가 돋친 말투에 화정은 언짢은 기색도 없이, 그
도도한 얼굴로 참으로 순진한 대답을 했다.
"아, 난 저렇게 재주 부리는 사람들은 많이 못 봤거든......"
"너 잡아끄느라고 나도 힘들었어. 이것 봐, 팔이 퉁퉁 부었지?!"
조운은 두 아가씨의 실랑이를 끊기 위해서 끼어 들었다.
"그만합시다. 곧 숙소를 정해야 해. 일단, 화정의 말대로 영각이
당도할 때까지는 일반 숙소에서 묵도록 하지요."
조운의 말에 아영은 고개를 돌리면서 묻는다.
"저어, 우리......오늘 하루만 좀 좋은 곳으로 가면 안돼요?"
뜻밖의 말에 조운은 아영을 바라보았다. 아영은 기대감이
가득찬 눈을 하고 조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늘 표정이 딱딱한
화정에 비해서, 아영은 표정이 참으로 맑았다.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얼굴은 좀 못생겼지만, 표정은 늘 밝고 기운찬 곳이 있는
아가씨였다.
사실, 그녀는 조운이 자신에게 말을 편하게 놓지 않는다고 섭해하는
눈치였지만, 조운으로서는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화정은
여자라고 보기보다 동료로 볼 수 있는 입장이지만, 아영은 순전히
여자와 남자의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큰 도시니까 정말 좋은 숙소도 있겠지요? 우리, 딱
하루만 진짜 좋은 식사하고 좋은 침상에서 자 봐요!"
좀 어린아이같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 조운이 아영의 말에
답하려는데, 화정이 곁에서 끼어든다.
"그런 곳에 가면 안돼. 넉넉한 사정은 아니란 말야."
방금 전의 얼빠진 곳이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참,
아무리 보아도 빈틈없는 외모에, 행동하는 것도 드물게 빈틈이
없다. 곁에 있는 아영과 사실 비교된다. 하지만 조운은, 사실,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 화정은 더더욱
그렇다. 되도록 화정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행동하는 형편에 그런 사적인 소망은 접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여비를 일단은 아껴두도록 해요. 장안에 당도했으니, 조금만
더 거리를 살펴보고 내가 어떻게 해볼께요."
회색의 꿈꾸는 듯한 눈동자, 섬세하고 길며 진한, 숱 많고
길게 올라간 속눈썹을 세운, 아름다운 눈을 치켜뜨며 말하는
그녀. 정직히 이야기하면 소연도 아름다웠지만, 이 소녀는 훨씬
아름답다. 순수히 외견적인 것이라면 소연과 화정이 닮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짐을 풀죠. 아까 거리를
구경하다가 숙소가 될만한 곳을 발견했어요."
똑부러지는 행동, 조금은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인 `아가씨'
성향이 짙은 것과, 청초한 분위기가 놀랄 정도로 소연을
회상시켰다. 조운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녀를
오래 대할 때는, 어딘가 모르게 그리움과 아픔 같은 것이 물밀
듯 밀려왔다. 가녀린 음성, 환하게 웃는 청순한 얼굴, 가늘고
끊어질 것 같던 손목.......이제는, 너무 오래 지나서 잊을 때가
되었는데도 잊지 못한다.
`아니.......'
잊고 있었다. 잊기위해 지난 몇 년을 미친 듯 살아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평원에서......이 소녀를 구해주었을 때, 그는 깨달았다.
그녀가 회색의 커다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 볼 때부터,
소연을 또다시 뚜렷하게 회상하던 자신을.
"그럼 네가 앞장서. 난 기억이 안나."
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운은, 아득한 회상에서 깨어났다.
그는 스스로에게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앞장서서 가고 있는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동행하는 내내 싸우더니 지금은 많이
수그러든 모습이었다. 하기는, 조운이나 영각이 판단했듯이,
애초부터 두 아가씨는 친우로서 협력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곳이
많았다.
성장배경이나, 어떤 자세한 내막같은 것은 알 수 없었지만,
타인인 자신들이 보기에도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었다. 영각은
모든 것이 빈틈없는 화정을, 반대로 모든 것이 고만고만하고
평범한 아영이 소화해 낼 리가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조운이 본 것은 달랐다. 영각은 화정을 그렇게
판단했겠지만, 조운이 판단한 화정은 아직 `철 없는 아가씨'
였다. 어떤 성장배경을 지녔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밀어붙이면 모든 것이 순탄할 거라고
생각하는 철없는 이기심과 실전의 부족을 지니고 있었다.
도리어 실질적인 면은 아직 아영이 더 뛰어나다고 조운은
생각하고 있었다. 화정은 그저 `꿈꾸는 지식' 에 불과했다.
물론, 자신이 옥에 갇혀 대신 채찍으로 맞은 이후로는 조금
각성을 한 듯했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면을 못 버리고 있었다.
아영의 행동보다 화정의 행동이 도리어 더 불안하다는 것을,
영각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조운은 직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화정은, 그렇게 안전성이 배재된 불안정함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차갑고 아름답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불안정함을
감추기 위한 차가움. 조운은 그렇게 판단했다.
반면에 아영은, 아마도 특출난 곳은 없어도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기에 위장이 적은 것이다. 아직 실전은 모르지만 영리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유화정, 그녀는 아마 아영의 그런
안정성을 이미 알아채고 도리어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영이 화정에 대해 부러워하는 것은 그저 부러움과 동경이지만,
화정이 아영에 대해 느끼는 것은 어떤 갈구(渴求)였다. 조운은
앞장서서 걸어가는 두 소녀를 다시 보았다.
키가 아영보다 훨씬 크지만 더 마른 화정은, 가냘픈 뒷모습까지
소연을 닮았다. 화정을 볼수록 소연에 대한 회상에 젖어드는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기면서, 조운은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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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하고 허름한 토담으로 만들어진 푸줏간은, 주변의
화려한 목재건물과 비교되는 초라함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푸줏간 특유의 피비린내와 생고기에서 나는 냄새는 서로
뒤섞여서, 들어오는 이들의 후각을 날카롭게 자극하였다.
조금 찡그린 얼굴로 코를 막고 허름한 건물 내부를 살피는
화정에 비해 아영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투로 당당하게
중년의 근육질 남자의 곁으로 걸어갔다. 얼굴에 깊은 칼자국이
있는 남자는 참 우락부락한 인상을 지녔다.
약간 각이 진 넓은 얼굴에 커다란 코, 사각진 입술과 작고
움푹한 눈을 지닌 남자는 뺨의 칼자국을 씰룩이며 아영을
바라보았다. 좀 현상범같은 인상이기는 했지만, 아영은
`푸줏간 주인인데 어련하겠어.' 하는 심정으로 넉살좋게
나섰다.
"고기 좀 주세요. 은자 한 냥 어치요. 아차, 비계는 조금
섞여있어도 괜찮은데, 너무 많지는 않도록 해 주세요."
야무진 아영의 제안에 남자는 비대한 몸을 일으켰다.
느릿느릿, 게으른 동작으로 도마로 다가간 푸줏간 주인은
커다란 식칼을 들면서 묻는다.
"돼지고기, 아니면 양고기?"
아영은 검지를 턱에 대고는 천장을 올려보며 짧게
생각하더니, 재빠르게 답했다.
"돼지고기가 좋겠어요."
아영의 말을 들은 남자는 뒤쪽으로 통하는 듯한, 낡은
천조각이 걸려있는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조각을
들추면서 문을 열려던 남자는, 두 소녀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돼지를 좀 잡아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오늘은 돼지를
잡아놓은 것을 모두 팔아서 말이야. 급하면 그냥 가던지."
살려면 사고 말려면 말라는 식이다. 하지만 아영은 조금도
언짢은 기색없이 태연하게 대꾸해주었다.
"괜찮아요.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아영의 대답에 주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 쾅, 하고 문은 거칠게 닫혔고 걸려있던
허름한 천조각은 꽤 요란하게 흔들렸다. 잠시 후에는 스윽,
스윽하고 멧돌에 칼을 가는 듯한 소리가 주변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두리번거리면서 토담으로 지어진 내부를 살피던
화정은 아영에게 묻는다.
"......저쪽에 더 큰 푸줏간도 있었는데 왜 굳이 여기로
와서 사자고 한 거야?"
온갖 피비린내와 짐승의 생살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고 섰던
아영은 화정의 말에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게 손님이 몰릴 때면 고기를 아무거나, 질도 좋지
않은 것으로 주거든. 사람이 없어야 눈치가 제대로 보이니까,
신선하고 좋은 것을 올바른 양만큼 주게 되어있어."
아영의 말에 화정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바로 앞에 놓인
나무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다리 길이가 균일하게 맞지
않아서인지 덜컥거리며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서있는
나무탁자는, 귀퉁이도 바르게 다듬어져 있지 않았다.
좀 싸구려인 듯하다.
물론, 이천 년대의 한국이라면 이런 것도 자연 그대로를
살려낸 것이라 하여 꽤 비싸게 치겠지만 이 시기에는 이렇게
엉망인 나무탁자가 고가일 리가 없다는 사실을, 두 소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한참동안 아영과 화정이 각자 딴 생각에 젖어서
서 있는데, 꽥꽥거리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좀 잔인한 소리지만, 아영은 즐겁게 화정에게
소근거렸다.
"잡았나보다! 조금 있으면 돌아갈 수 있겠는데?"
그런 아영에 비해 화정은 조용하고 동요가 없는 표정이다.
아영은 그저 어깨를 으쓱, 하고는 그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본래 반응이 적은 화정이다. 자신처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그대로 나타나는 타입은 절대 아닌 것이다.
여하튼 두 소녀가 어색하게 서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사내는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돼지 한 마리를 양손으로 받쳐들고
나타났다. 이미, 능숙한 솜씨로 털이 벗겨져 있었고, 물로 몇
번 정도 씻어낸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무심하게 지켜보는 한 소녀와, 조금은 신기한 듯
보지만 표정에 큰 동요는 없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소녀를 힐끗
본 주인은 커다란 도마 위에 돼지를 얹었다.
그리고 주인은 이내 솜씨좋은 칼놀림으로 고기를 알맞게 썰었다.
거친 칼과 도마의 마찰음이 귀를 자극했지만, 아영은 기분좋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곁에서 함께 보고있던
화정은 그제야 아영에게 물었다.
"......돼지고기를 사서 무엇 하려고?"
아영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피식, 웃기만 했다. 아영이 답이
없자,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며 화정은 자신이 들고있는
바구니를 보란 듯 아영의 앞에 흔들었다.
"채소만 잔뜩 사더니 이제는 푸줏간에서 고기라니......뭘
하려고 그래?"
약간의 장난기를 얼굴에 담은 아영이, 화정에게 힐난하듯
쏘아붙인다.
"얘는? 그걸 보면서도 생각나는 것이 없어? 넌 친구들하고
삼겹살도 안 구워 먹어봤지?"
아영의 말에 화정의 표정이 굳었다. 화정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머뭇대다가, 천천히 되물었다.
"......삼겹.....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아영에게서도, 옅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아영이 길게 한숨을 내뿜자 푸줏간 주인은 손을
늦추지 않고 고기를 열심히 썰면서도 두 소녀를 곁눈질했다.
"고기를 구워서 상추나 깻잎 같은 야채에 싸 먹는 거야!
얼마나 맛있는데! 안 먹어봤어?"
아영의 질문에 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영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고기를 다 썬 주인이 연잎을 꺼내 고기를 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은자 한 냥은 적지 않은 돈이었는지,
주인은 연잎으로 고기를 세 덩어리나 싸고 나서야 손동작을
멈추었다. 아영은 즐겁게 그 연잎 세 덩이를 받아다 화정이
팔에 걸고있는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화정이 맑고
서늘한 눈동자를 빛내더니, 푸줏간 주인에게 대뜸 물었다.
"저, 실례합니다. 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화정의 공손한 질문에는, 뭔가 모를 서늘함과 기품이
담겨있었다. 늘 그렇지만, 저 소녀는 누가 보아도 마구 자란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행여는 험한 말을 하더라도
기품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화정의 특징이었다.
지금의 그 질문도 매우 공손했지만, 상대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어떤 기품이나 위엄 같은 것이 깃들어있었다. 푸줏간 주인은
화정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건성으로 답했다.
"말씀해보시오."
"......이 근방에서......부족한 장사가 있습니까?"
그 말에 푸줏간 주인은 물론, 아영마저도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화정은 이들이 자신의 질문을 파악하지 못함을
눈치챘는지, 말을 급하게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예를 들면 야채가 필요한데 야채장수는
없다던가......이런 경우와 같이......말입니다."
"허어, 난 또 무슨 뜻이시라고......이곳 장안의 장터는
천하의 어느 곳보다도 크지. 부족한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소."
대충 화정의 말을 눈치챈 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응답했다. 화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잠시
딴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던 주인이 검지와 엄지를 부딪혀
딱,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황급히 끄덕거리는 것이었다.
"그렇군! 장안에서 유일하게 없는 것이라면......
점술가(占術家)지. 최근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
유랑(流浪)점술인이라도 오기를 빌고있는 눈치야. 뭐,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대충 이야기한 모양이다.
주인은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했으나, 화정의 얼굴에는 일시적인
기쁨 비슷한 것이 지나갔다. 화정은 주인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짧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서둘러 바깥으로 나가는 화정의
뒷모습을, 아영은 어리둥절하게 보다가 급하게 따라잡았다.
여지껏 피곤했는지 느릿느릿 걷던 그녀의 걸음걸이가 꽤 빨라져
있었다. 겨우 따라잡은 아영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왜 그래? 힘들다더니......갑자기 걸음이 빨라지네?"
"아냐, 가서 이야기해 줄게. 참."
화정은 빠르게 걷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인식한
모양이었다. 화정은 휙, 하고 돌아섰다.
"이거......그래서 어떻게 하려는 셈인데?"
화정의 질문에 아영은 빈정거림을 담아 대답했다.
"구워 먹어야지! 그냥 불에 구우면 돼! 주인에게 잠깐 주방
좀 써도 되냐고 물어볼 생각이야. 늦은 밤에는 안 쓸 테니까
빌려주겠지, 뭐. 고기는 야식으로 좋다니깐."
아영의 말에 화정은 고개를 대충 끄덕거린다. 그리고
돌아서려다가, 갑자기 다시 몸을 휙, 하고 돌리는 바람에,
`그것도 그렇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제안이 거절당하면
어디서 고기를 굽지?' 하는 생각을 하던 아영은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놀란 아영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정은
아영에게 대뜸 감사한다.
"아참, 깜빡하고 있었어......오늘 고마웠어."
"......뭘......?"
너무도 뜻밖의 말에 아영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화정은
어깨를 옅게 으쓱하면서 조금은 풀린 표정으로 그 반문에
응했다.
"거리.....구경하게 도와준 것 말야. 사실 나는......한번
구경해 보고 싶었는데 그 말을 못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네가
조운한테 그렇게 청해서......모처럼 신나게 구경했잖아. 난,
정말 모든 것이 신기했고......재미있었어."
화정의 말에 아영은 도리어 자신이 특이한 감정을 맛보았다.
거리를 구경하러 다니는 내내, 화정은 약간의 흥미있는 표정을
내비쳤을 뿐, 사실 별로 즐거운 낯은 아니었다. 어제 장안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좀 신기해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조운에게
졸라서 화정과 단둘이 나와 구경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던
아영은 헛수고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즐거웠다니? 화정은 아영의 심정을 어느 정도 눈치 챈 모양이다.
"난, 이전에 한번도 이렇게......돌아 다녀보지 못했어.
늘......아버지나......새어머니......와 백화점에 가서
정해진 곳만 몇 번 둘러보는 것이......전부였어.
나에게는 그게 쇼핑이었거든. 이렇게......구체적으로
돌아다니지는 못했어. 그래서 사실......어제 본 약장수들이나
시장 광경들이 너무 신기했어도......차마 조운한테는 미안해서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해준......덕에......아무튼 즐거웠어, 아영아.
나, 그렇게 보이지 않았어도, 정말......신기하고 즐거웠었어."
아영은 조금은 뜨끔한 심정으로 화정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더듬거림과, 전에 없이 찬바람이 수그러든 화정의 말투는,
지금 화정이 늘어놓은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영은 이렇게 콧대높고 잘난 소녀의 감사를 모처럼
듣는 것이 무안해져서 그냥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늘어놓았다.
"뭘 그걸 가지고 그래......? 너도 총수 후계자인데
시장조사나......뭐 그런 것 해 봤을 것 아냐? 장사한다는
사람이 이런 것도 구경 안 해봤으려구......"
아영 딴에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말했지만, 화정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아영은, 조금 무거워진 화정을 보면서 방금
전 화정의 말을 되짚어보았다. 백화점에 가서 둘러보는 것이
전부......아버지와 새어머니.......새어머니.......? 가만,
새어머니? 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알고는 있었지만 이론적으로만 들었고 실제로
구경은 못했어.....그런 것은 좀더 나이가 들어서 봐도 된다고
아버지께서 그러셨거든.......아무튼, 고마웠어."
화정은 그렇게 말을 끝내고는 돌아섰다. 아영은 화정의
말을 다시 곰씹었다. 새어머니......그리고 조운에게 미안해서
말하지 못했다.......구경 한번 간다는 것이 뭐가 미안해서
말도 못했다는 거지?
의문스러운 것이 많았지만, 아영은 그대로 접기로 했다.
때가되면, 모두 알게 되겠지.......하는 심정으로.
힘들어하면서 고맙다고 말하는 화정에게서, 아영은 뭔가 모를
고독의 그림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냘픈 화정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늘 당당하고 차갑다고 느낀 저 아이......의외로 새장
속에서 자란 새.......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영은 화정의 뒤를 황급히 따르면서 생각했다.
`그렇게 부러웠는데......저 얘는 저 얘 나름대로 고충이
있나봐......거리 구경도 못 해보고, 삼겹살도 잘
모르다니.......어째 조금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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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의 말에 현량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현량의
표정을 읽은 화정이 다급하게 질문했다.
"제가 잘못 안 건가요?"
[아닙니다......확실히, 화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사람들의......사소한 미래 정도는 볼 수 있습니다만......]
"그럼 된 거잖아요. 도와주시겠지요? 혹시, 이런 일을 하면
현량에게 죄가 될 만한 일이에요?"
현량은 머뭇거렸다. 그런 현량에게서는, 언뜻 보기에도 뭔가
난처하다는 듯한 빛이 읽혀졌다.
[아닙니다......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화정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침상의 시트를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현량은 거부는
하지 않았지만 뭔가 곤란한 점을 발견한 듯했다.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점쟁이 노릇을 하는데 도와달라는데, 현량으로서는
좀 낯설기도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화정이 파악한 이 현량이라는 봉사령은, 좀 고상한
지식인의 면모가 풍겨지는 존재이니, 지금 화정의 부탁에 대해서
얼마든지 언짢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화정은
신경질적으로 쥐고있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두면서 짧게
잘라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화정이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보이자 현량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길게 이야기했다.
[화정님, 제가 곤란한 것은......도와드리는 것은
문제없습니다만, 저는 평상시에 영수의 상태로 항상 있습니다.
아직 화정님께서......이런 말씀은 실례지만 여하튼, 실력이
부족하셔서......제가 영수인 상태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저를 아침에 불러서 저녁까지 이런 상태로 불러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신다면 곤란한 점이......다른 사람들도
봉사령 정도는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화정님께서
점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점을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훤하게 눈치를 챌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량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화정은 그제야, 현량이
머뭇거리던 이유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화정은 `어휴,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못했담!' 하고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머리를
싸쥐었다.
그렇다. 아직도 화정의 주술적인 능력이 약한 덕에, 현량이
영수인 상태로 있을 때에는 그와 화정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하루에 단 한번 불러서 봉사령으로 있게 할 수가 있고, 또한 시간
제한은 없는지라 오전부터 늦은 시각까지 봉사령의 상태로 있으면
된다지만.......
현량의 말에 따르면 영수인 상태로 다니는 이유는, 영적인 힘을
충전시키고 신장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게 하루종일 봉사령인
상태로 있으면 차차 영감과 힘이 쇠퇴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그렇지만 봉사령인 상태가 되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저 원령이 가르쳐주고 있어.' 라고 수군대게 되는 것이다.
영수라면, 영수의 언어를 알아듣는 것은 영수의 주인되는
주술사뿐이니 상관이 없지만......화정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현량에게 질문했다.
"좋은 수가 없을까요?"
화정의 말에 현량도 묵묵부답이었다. 한참동안, 머리를 싸쥐고
끙끙대던 화정을 살피던 현량의 눈이, 화정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살짝 비집고 나와 빛나자, 덩달아 밝은 빛을 뿜었다. 현량은
화정에게 대뜸 물었다.
[잠깐, 화정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지금 이
일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좋은 방법이 될 겁니다!]
현량의 갑자기 터져나온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화정은 아직도
고민을 담고있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좋은 방법......?"
현량은 고개를 숙이면서 화정에게 권했다.
[그렇습니다. 그......무경미석을 잠시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화정은 문득, 자신의 옷 틈을 비집고 나온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현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경미석......? 이것 말인가요?"
현량은 매우 기쁜 듯한 낯빛을 얼굴에 띄우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게, 매우 귀한 팔찌 한 쌍이 있습니다.
무경미석의 힘을 이용하여 그 팔찌에 힘을 불어넣어서 화정님과
제가 그 팔찌를 나누어 가진다면......분명 화정님이라 하셔도
영수인 상태의 저와 대화를 무난하게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깟 예쁘기만 한 목걸이가 무엇이 이렇게 대단한지 모르겠다.
아귀강시들이 목숨을 걸고 덤비지를 않나, 원령들이 쫓아오지를
않나......게다가 현량은 이 목걸이에서 힘을 뽑아내어서 팔찌에
불어넣어 대화가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어쨌든 방법이
생겼다니, 다행이네......하고 중얼거리며 목걸이를 풀려던 화정은
멈칫했다. 아귀강시들이 덤빈다......원령들이 쫓아온다......?
`그러고보니......'
화정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뭔가
이상했다. 아귀강시들......분명 이전에는 꽤나 자주 몰려와서
화정의 눈과 마음을 괴롭히더니, 이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귀강시야, 운록이 설명한 대로 강한 자를 피하는 성질이
있다면......아마도 조운 때문에 몰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옳다.
하지만 조운이 잠시 화정과 떨어져 있었어도, 평상시와 다르게
몰려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관우나 장비, 또는 마초와 잠깐 떨어져 운록과 있을
틈을 타서 쳐들어왔을 만큼, 맹목적인 존재들인데 말이다. 또한
원령에게도 이상한 점이 있다. 원령도 아귀강시와 비슷한 곳이
있는 사물이라면, 아마, 조운의 강대함을 겁낼 것이었다.
하지만, 조운과 함께 있으면서 오히려 원령들이 자주 주변에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자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화정이 대답은 않고 한
손가락을 입가에 댄 채 생각에 잠겨있자, 답답했던 영각이,
화정의 속마음을 읽어낸 것 같았다.
[화정님, 모르셨군요.]
또 자신의 속마음을 읽힌 것을 깨닫자, 화정은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현량을 응시했다. 현량은 화정의 그 싸늘한 눈길이
무안했는지, 다소 텁텁한 웃음을 띄면서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뭔가 답답해 할 때는 자동으로
마음이 읽혀집니다. 특히나 화정님처럼 주술적인 능력이
눈떠지지 않은 분은.......]
"그럼 제 의문을 아셨겠네요. 아는 대로 대답해주세요."
조금은 기분이 나빠진 화정이 현량의 말을 잘랐다. 현량은
조금 미안했는지, 잠시동안 말이 없다가 화정이 천천히 목걸이를
목에서 풀렀을 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아귀강시들은 원령에 비해 하급생물입니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강자를 두려워하죠. 화정님과 계신,
조운님을 겁내고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화정님 혼자 계실 때에도 최근에는 아귀강시들이 출현하지
않은 이유는......]
현량이 말을 잠시 끊자 화정은 목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눈빛을 받으면서 현량은 화정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영님 때문입니다.]
"네에?"
화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현량에게 반문해보았다.
"하지만 현량, 뭔가 잘못 아는 모양인데요......아영이는
지극히 평범해요. 그 아이는 저보다도 영적 감지가
떨어진다구요. 심지어는 제가 볼 수 있는 사물도 못 보고
현량조차도 못 보고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지니고 있는
무경미석처럼, 뭔가 특이한 물건도 없고요."
[바로 그겁니다.]
"?"
[아영님은, 사물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되려, 그런 상태가 사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자신들을 보고, 자신들의 의사를
파악하는 사람들을 사물들은 `적'으로 간주하고, 또한
자신들 사물과 거의 동등한 존재로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공격하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들과 상태만 다를 뿐인 생물이니까요. 하지만, 아예
자신들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있는 것조차 모르는데다,
의사가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그런 사람이 사물들을 겁내듯, 사물들도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며 그런 사람의 의사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겁니다.]
화정은 현량의 복잡하고 긴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참 생각해보면 대략, 어떤 뜻인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현대시대 사람들은 사물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막연히
`유령' 이나 `귀신' 으로 부르면서 두려워한다. 하지만,
얼마 전에는 그 `유령' 이나 `귀신' 들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설도 나왔었다*.
사람들이 `유령'과 `귀신'을 겁내듯, 그들도 사람들을
`유령'이나 `귀신'으로 보고 두려워해서 피해 다닌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유령이나 귀신이 된 지도 모르고 살고있으며,
사람들이 그들을 미지의 존재로 여기듯 그들도 사람들을 미지의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신들에게
낯설고 미지의 존재인 것은 모두 두려워한다는 이야기 같았다.
화정은 현량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은......어쨌거나 아영이에게 사물들이 두려움을 지녔기
때문에 덤비는 일이 없고......내가 조운과 떨어져 있을 때에는
요즘 들어 거의 아영과 다녔기 때문이라는.......그런 건가요?"
현량은 다정하게도 미소짓는다.
[제 생각에는 그런 듯합니다. 저도 아영님에게 다가가기가
사실 무섭습니다.]
현량의 말은 이해가 간다. 아영과 조운, 화정이 있을 때
현량은 이상하게 아영에게서 떨어지려는 행동을 보였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서 신경쓰지 않고
무심하게 넘겼었던 것이다.
여하튼, 사물 중에서 상위에 속하는 현량이, 그것도 주인의
친구인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귀강시같은 하급의 사물은
두말할 나위없이 아영에게 덤빌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 아귀강시가 왜 유독 출현이 없었는지는 알겠는데......
원령이 왜 자주 나타나지요? 이전에 유비님들과 있을 때에는
원령이 자주 나타나지는 않았는데......아무리 승천을
원한다지만, 여기 있으면서부터 자주 온 것 같았어요. 사실
현량도 그렇게 왔다가 나와 인연이 닿았던 것이고요."
현량은 화정의 말에 고개를 젓는다.
[정말......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현량의 말에 화정은 팔짱을 끼고는 긍정했다. 현량은 잠시,
화정이 벗어놓은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그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품을 뒤적여 한 쌍의 가는 팔찌를 꺼냈다. 옥으로 만든
것 같은 그 팔찌는, 아주 가늘어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워낙 가늘게 세공되어 그런지 투명하기까지 했다. 화정이
팔찌에 호기심을 보이면서 고개를 앞으로 약간 내미는데, 현량이
잠시 중단했던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조운님.....께서 원령들을 끌고다니기 때문입니다.]
"네?"
너무 뜻밖의 말에 얼굴을 굳히면서 쳐다보는 화정을, 현량은
아는지 모르는지, 목걸이와 팔찌를 요상하게 감아대고 있을 뿐
마주보지는 않았다. 팔찌 한 쌍과 목걸이, 이 세 개의 액세서리를
특이한 모양으로 얽어놓은 현량은 그 세 개를 자신의 왼 손바닥에
올리면서 짧게 말했을 뿐이다.
[저도 그것은 모릅니다. 조운님은 공력이 엄청나게 높으신
분이고, 게다가 주인도 아닌 처지에서 제가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그분의 주변에는
늘 원령들이 존재합니다.
그분은 한마디로......수천 마리의 원령을 주변에 끌고 다니십니다.
다만, 그 원령들은 그분의 엄청나게 강한 기에 억지로
억눌리다시피하여 숨어서 존재하고 있기에,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지요. 저와 같은 고위의 영물만이 알아볼 따름입니다......]
현량은 그 말을 마치고는 눈을 감았다. 현량의 왼 손바닥에서
푸르스름하고 깨끗한 빛이 터져나오면서 세 개의 액세서리를
감쌌지만, 화정은 그에 대해 신비하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못했다.
방금 전 현량의 말 때문이었다. 원령을 끌고 다닌다고?
무엇 때문에?
현량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현량은 꽤나 깊이 집중하고
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손바닥에서
빛을 발하고 세 개의 액세서리를 화정의 앞에 내려놓은 현량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초췌하게 느껴졌다. 문득, 깨달았다.
`원령이나 사물도.....사람과 똑같이 피로를 느끼는 걸까......'
그렇다. 이렇게 사람과 똑같이 피로를 느끼고 고마움, 의무감
같은 것을 느낀다면 공포감도 똑같이 느낄 것이다. 강한 자를
두려워하는 본능도 인간과 같다. 그렇다면, 아영이, 자신이 보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들에 대해 두려워하듯, 그 사물들에게도
미지의 존재인 아영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현량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예 모르기에
더 안전한 아영의 상태를. 하지만......
`원령을 끌고 다니는 조운.......'
그것은 아직도 모르겠다. 현량도 조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팔찌를 끼시면, 제가 영수여도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게다가, 화정님이 이 팔찌를 끼시고 제가 나머지 한 팔찌를
지니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영수인 저 조차도 볼 수 없게
됩니다. 화정님이나, 아주 일부의 엄청난 영안(靈眼)을 지닌
술사들만이 볼 수 있지요......그럼, 저는 이만 힘을 충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량은 말을 마치더니, 훌쩍, 작은 새로 변해버렸다. 화정은
그런 현량이 사라진 자리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득, 아영이
들어오는 문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생각에서 깨어났다.
서둘러 목걸이를 목에 걸고 팔찌를 팔에 끼는데, 아영이 궁금한
얼굴로 화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얀색의 평상복을 입고
갈색의 긴 머리를 헐렁하게 땋아내린 아영은 손에서 구수한
냄새같은 것을 풍기고 있었다. 화정이 뭔가 후다닥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화정에게 질문했다.
"뭐 하고 있었어?"
"응? 아냐......"
"그래? 아무튼 나와봐."
아영은 화정이 나중에 이야기해준다고 말하자 개의치 않아
하는 표정으로 금방 바꾸면서 즐겁게 말했다. 화정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왜?"
"고기를 구웠거든! 주방은 빌리기가 좀 미안하더라. 그래서
뒤뜰에서 일하는 사람이 피우던 모닥불이 남았길래 거기에다
구웠어. 아주 맛있게 된 것 같아. 얼른 따라와! 조운도 온다고
했어."
아영의 말에 화정은 아까의 의문이 생각났다. 원령을 끌고
다니는 남자......의심스러운 생각이 든 화정은 이마에 구겨진
주름살을 넣으며 아영에게 물었다.
"조운이......나온대? 고기 먹는 것이 이유라는 걸 알기는
하는 거야?"
아영은 태평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나와보라고 했더니 잠시 조용하더라. 그래서
중요한 일이라고 얼버무리고 허락을 받아냈지."
화정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는, 그 삭막한 사람이
고기 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소하게 뒤뜰로 나올
리는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영의 처사는 현명했다. 아무튼
아영의 의도가 어쨌건간에, 덕분에 화정은 아침이 되기 전에
일행들과 상의해볼 기회를 얻었다.
화정은 점술가를 해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다시한번
고민하면서, 팔에 걸린 가는 팔찌를 만지작거려보았다. 일단,
이 두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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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귀신들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설: 이전에
개봉된 니콜 키드먼 주연의 `디아더스'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유령들도, 자신들이 유령인지 모르고
산 사람을 겁내서, 도리어 자신들이 산 사람이고, 산 사람들이
유령인 줄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산 사람들이 유령들을 눈으로 제대로 못 보고 겁내면서,
유령의 존재를 못 믿듯이 유령들도 살았을 때와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산 사람이 유령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존재를 못 믿고
있다는 시각에서 찍은 영화다*작가주
아니나다를까, 알면서 모르는 척 나온 화정과는 달리, 고기
덕에 나타난 것은 아닌 조운은 썩 좋아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화정은 아영을 힐끗 보았다.
그러나 아영은 태평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실컷 음식 해놓으니까 두 사람 모두 반응이 이러면 무안해서
어쩌란 말이에요? 아무튼 먹어봐요."
아영의 태평스런 말에도, 조운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아영이 조금 가엾어진 화정은 얼른 끼어들어 아영을 거들었다.
"......그래요. 마침,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 잘 됐네요.
조운도 들어봐요."
아니, 사실 이런 이야기를 내일 아침에야 해야하나, 싶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영 덕에 빨리 이야기하게 된 것이니
오히려 자신이 아영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여하튼 조운은 두 소녀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아무 말도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아영은 조운이 앉자 기쁜 낯을 얼굴에 가득
띄우면서 자신이 준비해놓은 음식을 부지런히 밀어다 놓는다.
누가 먼저 물을세라, 재빠르게 설명했다.
"옆의 이 채소에다가 고기를 싸서 먹는 거여요. 한번
먹어봐요!"
화정은, 왠지는 모르지만, 아영이 화정 자신보다도 조운이
먹어주기를 더 고대하는 듯한 눈치를 느꼈지만, 모른 척 하고
고기를 천천히 집어 채소에 싸서 입어 넣어보았다. 겉보기에는
음식이 볼품도 없고 기름기가 죽죽 흐르는 것이 느끼하고 맛이
없어 보였지만, 우물거리면서 먹는 사이,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화정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화정이 먼저 먹자 아영은 초조하게 물었다.
"어때? 어때?"
"......맛있어......"
화정은 어물쩡하게 답했다. 하지만, 정말 맛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고기덩어리 조금 구워서 채소에 싸 봤자 무슨
맛이 나올까, 싶었는데 먹어보니 정말 입맛을 절로 돋우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전혀 비린 맛도 없었다.
화정이 두 번째의 쌈을 다시 싸기 시작하자 조운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따라 먹어보기 시작했다. 화정은, 아영이
자신이 먹을 때 보다도 더 기대에 찬 눈을 하고 조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점을 또다시 발견했다. 머릿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덤덤하게 음식을 입에 넣고 몇 번 우물거린
조운에게, 아영이 급하게 소감을 청한다.
"어떠세요?"
조운의 표정은 화정보다도 변화가 없었다. 그나마, 화정은
눈이라도 동그랗게 떴지만, 조운은 말없이 손을 멈추었다. 아영의
갈색 눈망울이 서운함을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괜찮군요."
화정은 속으로 아니꼽다고 느꼈다. 참나, 맛있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하지만, 아영은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단박에 고기와 채소를 밀면서 기쁜 음성으로 권한다.
"많이 드세요!"
화정은 그제야 아영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아영은 조운에게 호감이 있는 듯했다.
그저 네 번째의 쌈을 싸서 입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조운의
앞에서 즐겁게 웃고있는 아영을 보고는 조운에게도 다시
눈짓을 보냈다.
어렴풋하게 빛나는 저녁황혼에 머리부분이 옅게 물들어 있는
조운의 얼굴은, 날카로운 얼굴선과 높고 오똑하게 선 코도
아름다웠지만, 특히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면서 차갑고
이지적인 눈매가 가장 멋졌다.
`하기는......'
좋아할 만하다. 화정도 그렇게 얄미운 일만 줄줄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조운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준수한 외모에,
훤칠한 키, 깊으면서 차갑고 서글서글한 눈매......위기에
처한 화정을 처음 평원에서 구해주었을 때만 해도, 화정은
청년, 즉 조운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과 만나고 싶다는 느낌
같은 것을 얻었다.
만약 유비 때문에 여기서 조운과 함께 지내지만 않았어도
화정의 마음은 조운에게 기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화정은 이미......마음에 담은 사람이 그 사이 생겨났다.
마초만 아니었어도 조운에게 관심을 가졌었는지도
모르지......하고 옅게 중얼거리던 화정은 문득, 아영이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정이 파악하기로, 조운은 여자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타입이 절대 아니었다. 아무튼, 씁쓸한
심정을 누른 채 화정은 입을 열었다.
"저어, 그나저나......영각에게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어요?"
조운은 말없이 고기만 먹고 있었다. 아마도 소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잖아도 오는 길에 영각 비슷한 시체의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일행은 영각에 대한 이야기만 하게되면 이렇게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조운이 한마디도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어떤 소식이 없었다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아영이
곁에서 얼굴을 찡그렸다.
"......혹시......그 시체가 정말로 영각......."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영각이 변을 당했다면 그의 의매가
아무런 소식도 취하지 않았을 리가 없소."
조운의 딱딱한 대꾸에 아영은 입을 다물었지만, 화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반박했다.
"틀려요. 아현님도 같이 당했을 경우에는 말이에요."
이번에는 조운이 입을 다물었다. 세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침묵이 자리했다. 나직한 풀벌레소리,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씹는 소리와 채소를 집는 소리,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할 정도로, 일행은 각자 예민해져 있었다.
구수한 고기내음도 전혀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침묵한다면, 헛된 야식파티로 끝날지
모른다 싶었던 화정은 조운에게 말을 걸었다.
"어쨌든......대략 열흘 정도를 기다릴 거지요? 열흘 후에도
영각이 안 나타난다면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이고요."
화정의 말에 조운이 가볍게 긍정했다. 화정은 조운이
긍정하자, 애써 목소리를 강하게 냈다.
"그럼, 그 열흘 동안에, 오는 길에 의논했던 대로 약간의
벌이를 할 생각이에요."
화정의 말은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영각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입이 무거워졌던 아영이 눈을
둥그렇게 치켜뜨고 대뜸 질문했다.
"벌이? 아, 그래, 그런댔지......뭘 하기로 했는데?"
아영의 말에 화정은 짧게 잘라 대답한다.
"점술가."
그녀의 말에 일행의 반응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 사이를
못참고 쌈을 싸서 입에 집어넣던 아영은 그만 그 쌈을 뱉을
뻔했고, 조용히 음식을 집기위해 팔을 뻗던 조운 역시 행동을
멈추었다. 조운이 고개를 들어 말하기도 전에, 아영의 황당하다는
어조가 화정의 귀를 공격했다.
"뭐어?! 점술가라니, 야, 너 진짜 그 푸줏간 주인의 말을
믿는 거야?!"
화정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분명 그 사람이 농담으로 한 소리는 아니야. 그리고,
거리를 구경하는 내내, 난 재주꾼들은 많이 봤어도 그 흔한
점쟁이들은 하나도 못 봤거든. 그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잖아?"
화정의 말에 아영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번에는 조운이 나섰다.
"확실히 괜찮은 생각이기는 하다. 허나, 네가 무슨 재주로 점을
봐 주려고 하지? 처음에야 흥미로 어느정도는 사람을 끌 수
있겠지만 며칠이 되면 실력이 발각날 터인데."
의외로 제안에는 찬성하는 눈치다. 하지만, 그녀의 수단과
실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화정은 속으로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해주었다.
"물론, 제가 직접 할 수는 없죠. 현량이 있잖아요."
현량이란 말에 조운은 입을 다물었고, 아영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현량? 아.....그 네가 부린다던 새......?"
아직까지도 현량을 보기는커녕 존재도 못 느끼는 아영은,
화정에게서 설명을 들었어도 못 미더워하는 눈치다.
"그래. 현량은 지식을 관장하는 영수거든. 덕분에 사람의
미래나 과거 정도는 볼 줄 알아."
아영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팔을 내렸다. 탁,
하고 아영의 내려진 팔이 거친 나무탁자를 가볍게 쳤다.
조운이 아영의 곁에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화정을
바라보았다.
"넌 영수와 대화가 아직 불가능해. 그렇다면 방법은 영수를
불러서 봉사령인 상태로 하루종일 머물게 하는 것뿐인데,
그리하면 영수도 며칠만에 지치는데다 사람들은 네가 아닌
봉사령의 실력이라고 수군거리게 될 거야. 그만두는 것이 좋아."
조운의 말에 화정은 대뜸 물었다.
"자룡, 그렇다면 말이에요, 지금 현량이 보여요?"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아영은 아예 잘 모르겠다는, 포기한
듯한 자세로 고기만 열심히 먹고 있었지만 조운은 화정의
주변을 잠시 둘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화정은 소매 속의
옥환(玉環: 팔찌)을 만지작거려보았다.
"......현량이......이 근처에 있어?"
"네, 그래요. 바로 제 어깨 위에서 자고 있어요."
속으로 만세가 절로 나왔다. 실력자인 조운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전혀 볼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화정은
현량의 식견에 대해 감탄하면서 자신감을 담은 시선으로 조운을
응시했다.
"대화는 가능해?"
"네. 현량이 제게 방법을 일러주었거든요. 영수 상태에서도
저와 대화할 수 있고, 또한 저 이외의 사람은 절대로 현량을
보지 못해요. 이만하면 되겠죠?"
화정의 말에 조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화정은 조운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린 것을 보고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조운은 약간은 흡족한 듯한 표정으로 화정을
바라보았다.
"좋아, 늘 생각하지만 넌 항상 의외의 면이 있군......그
정도로 준비를 할 줄 안다면, 잘 해내겠지."
화정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기쁘게 대꾸했다.
"네, 앞으로는 절대 멋대로 행동해서 곤란하게 하지
않을께요. 아영아, 넌 내일부터 나 좀 도와줘. 괜찮겠지?"
이제는 제법,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말하는 법도
배운 화정이었다. 아영은 이전의 오만한 말투에 비해 화정의
말투가 어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물었다.
"점술가라면......준비하는 것에 돈도 별로 안 드는 것 아냐?
그런데 뭘 도와달라는 건데?"
화정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짧게 답하고는 발걸음을 옮겨버렸다.
"광고."
그 짧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영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파악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소문을 퍼뜨려 달라는 것 같았다.
광고라는 말의 뜻을 알아내고 화정에게 얄밉다는 생각을 하던
아영은, 곁에서 조운이 일어서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늘 그렇듯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말을
먼저 걸기 전에는 말을 스스로 거는 법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너무 차갑다고, 아영은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조운은 아영에게 조금은 공손하게
한마디 해주었다. 아영은 예기치 못한 조운의 감사에, 그만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말았다. 누가 봐도 아영이 기뻐한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너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함을 욕하면서도 아영은 쑥스럽게 답변했다.
"뭐, 뭘요......"
조운은 아영의 더듬거리는 대답을 듣자 곧장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영은 갑자기 걱정되는 점을 생각해냈다. 조운에게 말도
걸고, 궁금증도 풀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아영은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열심히 누르면서, 용기를 냈다.
"저, 그런데......걱정되는 것이 있는데요......"
아영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조운은 다시 아영에게로
시선을 박았다. 서글서글하고 깊은 눈매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아영은, 고개를 그만 푹 숙이고 말았지만, 할 말은 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조운님......은요, 화정이가 저......그런 일을 하는 것에
어째서 찬성......하세요?"
아영의 더듬거리는 말을, 조운은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했는
모양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수가 적은 사람이니, 저렇게 보는 거라면 당연히 더 상세히
말해달라는 뜻일 것 같았다. 아영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요......점술가를 하겠다는 것은 으음......
무녀(巫女)일을 한다는 뜻이잖아요......그거 굉장히 위험한
일일텐데......게다가 저기.......화정이같이 예쁜 얘라면
더욱 그럴 것 같아서요......"
아영 딴에는 현대시대의 무당을 생각하고 하는 말이었다.
현대시대의 무당이 얼마나 힘든 점이 많은지는 귓동냥으로
들어본 적이 있었다. 게다가, 잘못되면 그 방에서 무당 노릇이
아니라 창녀 노릇을 한다는 후문까지 있었으니......여하튼,
조운은 아영의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조금은 의아함을 담은, 공손한 반문에 아영은 도리어 자신이
놀라면서 조운을 올려다보았다.
"네에?"
키가 커서 마주 보려니까 목이 좀 아팠지만, 그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녀만큼 안전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화정의
제안이 좋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저 사람, 내 말을 정말 알아듣기는 한 걸까? 초조한 마음에
나무 탁자의 귀퉁이를 손톱으로 긁었다. 아영은 다시 얼굴을
붉히면서 반박했다.
"어째서요? 안전하다니요?"
"아영님은......아마도 화정이 모진 일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듯한데, 무녀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점점 더 이해가 안간다. 아마, 저 사람은 아영이 근심하는
바를 알고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녀가 어떤 일을
겪는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인식이 다른 것 같았다. 하기는,
다른 시대이니 그럴 수도 있어, 하고 그제야 깨달은 아영은
목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긴장을 담은 말투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해보았다.
"무녀도......강......간을 잘 당한대요. 특히나, 공간이
밀폐되어 있는데다 사회 하류층이니까.......저어,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특히 무녀가 예쁘면......"
아영의 말에 조운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영은 속으로 `난 이거 뉴스에서 자주 들었던 얘기였는데......'
하고 웅얼거렸다. 조운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대꾸하며 휙,
돌아섰다.
"무녀를 건드리면 부정하여 병이 난다는 말은 민간에도 널리
퍼져있습니다. 하물며, 그런 사실을 잘 아는 고위층 사람들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찬바람만 남기고 쌩하니 가버리는 조운의 등을, 아영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바라보았다. 부정해서 병이 난다고......?
아영은 긴 나무 의자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턱을 괸 채로 멍하니 앉아있는 아영의 뇌리를,
아까부터 나눈 대화들이 스쳐갔다.
현량이라는 영수에 대한 말, 무녀에 대한 이야기.......온통,
하나도 모르겠다. 화정은 그런 대로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영은 그렇지 않았다. 현량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사이가 조금은 가까워진 화정이 설명을 자세히 해 주었지만,
아영은 아직까지도 그것을 제대로 믿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마도, 현량에 대해 설명해주었으며, 현량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화정이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영각이었다면 아영은 `또 농담
시작이군.' 하고 넘겼을 것이다. 아영은, 어느새 고기를 다 먹고
없는, 빈 접시를 손가락으로 긁으면서 멍한 눈을 하고 앉아있었다.
아직도 그렇다. 많이 친해졌다고는 해도, 두 사람에 비해 아득하게
소외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무시하는 투를 버린 화정의
태도도, 아직도 멀게 느껴졌다. 아영은 한참동안이나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다가 재채기를 하고 나서야 시간이
늦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
"정말 신기해! 어쩜 그렇게 다 맞출 수가 있어?"
아영은 금덩어리를 세고 있는 화정의 옆에 다가앉으면서
즐겁게 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사실 그 사실이 맞았다고
사례금을 들고오는 사람들보다도, 화정 스스로가 더 신기한
상황이었다. 화정은 이제 현량이, 엄청나게 위대한 존재로
보이기까지 했다.
아영은 화정의 지시대로 이것저것 떠벌린 종이를 거리에
뿌리고 다녔고, 사람 몇을 사서 소문을 퍼뜨려놓았다.
아니나다를까, 여지껏 점술가가 없어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사람 몇이 첫날부터 몰려왔다. 화정의 방에 들어가 뭔가를
속닥거리던 그들은, 다음날 사례금을 잔뜩 들고 왔고,
다른 사항을 물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시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지금은 잠시 휴식이랍시고 문을 닫아걸고 있었지만, 바깥에는
점을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몰려든 대기인들 덕분에 장사에서 짭짤한 재미를
본 주점 주인은 일행에게 숙식료를 무료로 제공하는 호의를
보였으며, 화정과 아영의 작은 방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과
금은보화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복채가 싸니까 처음에는 일반인들만 몰려왔다가, 소문이
그사이 널리 퍼지고 나서는, 복채를 좀 더 올렸는데도
일반인은 물론 고급 관리들도 몰려오는 실정이었다. 아영은
그 현량이라는 존재가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자신들에게 이런 부를 쌓아준 엄청난 존재라고 믿었으며,
화정에게도 사실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현량이라는 그 귀신 - 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 - 의 솜씨도
대단했지만, 사람을 끌어내는 화정의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화술과 미모, 수완 등을 총 동원해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인파들이 모두 점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화정의 얼굴과
말솜씨에 반해서 온 사람이 그 중 태반은 된다고 보면 될
정도였다. 그나마, 조운의 말이 옳았던 것은, 그녀가 무녀라는
이유로 손은 절대 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정은 모든 사실을 한번에 이야기하지 않고 작고 순서가
빠른 일부터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 또다시 찾아오게 만들었다.
결국, 한번 온 사람은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해서 이곳을
찾았으며, 자연히 세 일행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었다. 화정은
다 센 금덩어리를 상자 안에 넣으면서 흡족하게 말했다.
"나도 믿기지 않을 정도야. 아무튼, 조금 쉬었으니까 다시
손님들이 들어오게 해줘. 오늘은 일찍 끝내고 맛있는 것이나
먹으러 갈까?"
화정은 아영과 이제는 많이 친해져있었다. 둘 사이의 벽이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냥 차갑기만 하던 화정은
아영과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그 얼음벽을 조금씩 허물어갔다.
아영도 화정에 대해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다. 외동딸로 자란
화정은, 그저 교육과 환경에 의해 좀 차갑게 자랐고, 사람을
차갑게 대하는 법에 익숙했을 뿐, 천성이 차가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초기에는 거리를 두고 싸늘하게 굴던 화정은 그동안 아영과
꽤 오랜 시일을 지내고, 많이 친해지면서부터 말을 조심하려고
애를 쓰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초면의 상대에게는
차가워도 일단 친해지면 조금씩 나아지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여하튼, 이제는 많이 친해져서 거리를 함께 놀러다니는 일도
자주 생겼다. 이전에, 이런 서민적인 광경들을 관람하는 것이나,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는지, 주변을
산책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조금은 가엾었다.
언젠가, 아영이 이전에 화정이 했던 말을 기억해내고 조심스럽게
`.......어머니가......새로 들어오신 분이셨어?' 하고 물었지만,
입을 다물었던 것을 빼고 말이다. 아영은 `괜찮아, 그런 일이
조금 생기는 일도 아닌데 뭘 그래?' 하고 대답을 유도해 보았지만,
모처럼 아영에게 태도가 풀어져가던 화정이 이전의 차가움을
고수하면서 `너와는 상관없어.' 라고 말했던 때, 그때는 이전처럼
차가워 보였다.
여하튼 아영은 아직도 화정과 자신 사이에는 벽이 높게 서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비록, 허물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20층의 아파트 중 한 층도 채 허물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 그러자. 그럼 나가서 문을 열께."
머릿속의 어두운 생각을 감추어둔 채, 아영은 활기차게 응했다.
화정은 아영이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려는 한 중년의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으나......
"험, 귀한 어르신이 급히 오셨으니, 조금만 양보하게."
다소 오만한 음성이 들려오면서 덩치가 비대하고 목이 없는,
털보 남자가 주변을 휘저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에게서 작게
함성이 일었지만, 아무도 무어라고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위 관리인 모양이었다. 아영도, 화정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영은 사실 크게 적극적인 성격이 못 되는데다, 화정은
이전의 채찍사건 이후로 이 세계에서의 `높은 사람' 이 얼마나
비중있는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털보가 주변을
가볍게 제압하자, 커다란 갓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두꺼운
옷을 입어 신분의 노출을 피한 남자가 걸어왔다.
걸음걸이가 그다지 튼실하지는 않은 것을 보아 나이가 꽤 있는
노인인 듯했다. 얼굴 아래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눈같이 흰
수염이 그를 증명했다. 그는 털보에게 몇마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털보는 코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인 뒤
줄서있는 사람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방문을
거칠게도 닫았다.
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방문이 닫히자, 노인은 비로소
화정이 앉아있는 앞으로 와서 천천히 앉았다. 하는 행동거지를
보아, 꽤 품위가 있는 것이 좋은 집안의 예절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화정이 아무런 대답도 않고 속으로 현랭에게 말을
걸었다.
`이 사람......고위 관리인 모양인데......누구지?'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현량이 화정에게 조용히 충고하자, 화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귀하신 어른이 오셨는데, 차라도 한 잔 내어야겠군요. 천한
것이 배운 것이 없어 예의를 모르니 양해하십시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차를 시키려는데, 노인이 저지했다. 노인은
낮게 깔린 음성으로 인사했다.
"관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오. 점을 아주 잘 보는 젊은
소저가 있다기에 답답함을 못 이기고 찾아옴을 오히려 내가
사죄해야 할 것이오."
점잖고 엄격하지만, 어딘가 온유한 느낌도 담겨있었다. 화정은
속으로 들려오는 현량의 말에 조금은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무엇이 알고 싶으십니까."
화정의 말에 노인은 길고 하얀 수염을 점잖게 쓰다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꽤나 큰 고민인 듯했다.
한참만에 노인은, 조금은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고민사를 이야기한다.
"......집안을 갉아먹는 흉폭한 돼지가 있소. 허나, 이
돼지가 워낙에 강맹하여 힘없는 늙은이로서는 손을 댈 수가
없소이다. 소저의 현안(賢案)으로 이 늙은이의 도리를
인도하시오."
이 말을, 단순히 집안에서 날뛰는 돼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원령 따위가 깃들어 날뛰는 돼지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꽤 높은
사람인데, 어떻게 주술사 하나 못 부르겠는가. 게다가 이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면......삼국지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아니다.
화정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그 돼지를 제거하시겠습니까. 어르신 정도의
분이시라면 주술사를 부르는 일이 어렵지 않으십니다. 돼지에게
깃든 원령 따위는 해결이 쉽지 않겠습니까."
화정의 말에 노인의 눈같이 희고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노인은 화정의 식견(識見)이 보잘 것 없다 여겼는지 소매를
떨치면서 일어났다.
"용한 무녀라 하여 한 가닥 기대를 했건만, 역시 우둔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구나!"
그의 탄식에서, 화정은 자신이 판단한 바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화정은 급하게 일어났다.
"화를 거두소서. 돼지를 잡을 방도는 대인께서 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화정이 급하게 자신을 만류하자, 나가려던 노인은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노인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형형한 눈빛이
화정을 한바탕 훑고 지나갔다. 노인은 화정과 마주앉아있는
탁상 위로 주름진 손을 올렸다.
"묘안(妙案)이 있으시오? 개인의 일이라면 오지도 않았소이다.
다만 눈이 두려워서 이렇게 은유적으로 말한 것을 용서하시오."
"그렇습니까......사도(司徒)* 왕윤(王允) 어르신이시라면
이리와 돼지를 갈라놓을 방법이 미(美)에 있음을 깨닫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
화정의 말에 노인, 즉 왕윤은 눈을 번쩍이면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매를 바라보던 왕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좀더.....소상히 말씀을 해 보시게. 늙은 것이 머리도 썩어서
제대로 못 알아듣겠구먼."
왕윤의 말에 화정은 자신의 앞에 놓아둔 금주머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잠시동안, 자신이 이런 역사적인 인물과 마주 앉게
된 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속으로 엉뚱한 생각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혹시......내가 이곳에 떨어진 것은......두 가지 뜻이
아닐까? 하나는 역사를......본래대로 이끌어 가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역사를 바꾸어 보라는 것.......'
묘한 기분에 화정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앞에서는
왕윤이 초조한 얼굴로 화정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화정은
구체적으로 알려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일단은 사태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현량의 말에 넘어가 왕윤에게 슬쩍 실마리만
던져주었다.
"돌아가서 찾아보십시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 이상 화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듯 돌아앉자, 왕윤은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도 화정의 애매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금 미간에 주름을 짙게 잡고 있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못마땅하게 발걸음을
왕윤이 옮겨서 방문을 여는데, 화정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돼지를 잡더라도 망가진 집은 도로 되돌리기 힘드십니다."
현명한 왕윤은 그 말뜻을 어렴풋하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왕윤은
손잡이를 힘주어 돌리면서 그런 화정의 말에 한마디만 던진
채 밖으로 나갔다.
"그렇다해도 돼지를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니오. 집안이
더 망가질 때까지 두어야 하겠는가."
조금은 칼날이 숨은 듯한 왕윤의 말에 화정은 자신이 울적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친 소리로 문이 닫히고 나서야, 화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동탁을 잡더라도 권력의 양도자가
다른 이에게로 넘어갈 뿐이다. 만약에, 조조를 누군가 죽이기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렇다면, 한실 종손이라
주장하는 유비가 권력을 넘겨받는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은가?
`아니지......'
화정은 부정하면서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한 황실의
불운. 분명 화정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삼국지를
읽은 독자로서, 뭔가 모를......서운함과 측은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아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관중......확실히 대단한 소설가구나. 읽는 독자를
이렇게......시대를 초월하여 설득해 냈으니......'
다시 한번 속으로 감탄했다. 현재의 자신은 그저 이 세계에
떨어져 낯설게 적응해가는 입장이고, 황제와는 어떤 관련도 없다.
그런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한의 황제가 비운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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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사도(司徒): 벼슬 이름. 사공司空, 사마司馬와 함께
삼공三公의 하나.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국가 최고의 관직.
민정 일반과 교육을 관장했다. 녹봉 1만석.
아영이 젓가락을 입으로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
생각없이 아영의 곁에서 음식을 들고있던 화정은 아영이
옆구리를 쿡쿡 쑤시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영은 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낮게 속닥거렸다.
"저기 좀 봐. 누구기에 저렇게 얼굴과 몸을 온통 가린
걸까?"
화정도 아영의 말에 호기심이 동하여 고개를 돌렸다. 화정과
아영이 고개를 동시에 돌리자 조운도 조금은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은 이내 문 쪽에 서있는
여자에게로 돌려졌다. 하지만, 궁금해하는 것은 세 사람만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시선을 문가에
서 있는 여자에게 박고 있었다. 주막 주인과 대화를 간단하게
하고 있는 여자는, 아영만한 키를 지니고 있었다. 머리에는
반투명한 천조각을 쓰고 있었는데, 그 천조각을 통해서 약간
얼굴이 비추어지기는 했지만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게
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아마, 화정 시대의 언어로 하자면, 베일을 쓰고 있다고
표현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복장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좀
두툼한 겉옷을 걸쳐입고 있었는데, 이전에 영화에서 보았던
망토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베일도, 겉옷도 전부 흰색
계통이어서 주변의 사람들에 비해 단연코 눈에 띄었다. 아영이
빈정거렸다.
"저렇게 가려댈 만큼 눈에 띄기 싫으면 색깔이나 잘 고르지
전부 하얀 색이 뭐야! 마치, 나 눈에 안 띄고 싶지만 띄게
만들었어요, 하는 그런 것 같지 않니?"
아영의 말에 화정은 동조하지 않았다. 사실, 꽤 높은 집의
여자 같았다. 높은 집 여자라면 자신이 입고 있는 희고 좋은
옷을 별로 유난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아랫사람들조차도 옷을 잘 입는데, 어떻게 자신의 옷이 눈에
띄는지 안 띄는지 여부를 깨닫겠는가.
화정도 이전에, 자신이 들고 있는 몇 백만 원짜리 핸드백이나,
천만 원을 호가(呼價)하는 옷이 유별나게 생각되지 않았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그런 것 정도 쓰는 줄 알고 자라왔던
것이다. 물론, 교육을 받고 나이가 들면서 절로, 그런 것이
아무나 쓰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화정의
집에서 일하는, 심지어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다른 이들보다
돈을 많이 받았기에, 그들도 옷차림이 꽤 고급스러웠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화정으로서는 저 여자의 세상 물정 모르는,
좋은 차림이 별로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여자는 몸가짐도 조용하고 차분한 곳이 있었다. 여하튼,
그녀에게서 몇 마디를 들은 주막주인은 머뭇거리더니 손님들이
주욱 앉아있는 식당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사이, 여자는 나무 계단을 삐걱거리는 소리도 없이 사뿐히도
걸어 올라갔다. 여자가 올라가자 무관심하게 음식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화정은 주막주인이 자신들의 탁상 근처에서
멈추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주인은 난처하다는 말투로 화정에게
말을 걸었다.
"저, 이런......지금은 시간이 끝났다고 해도 막무가내지
뭡니까......귀한 집 아가씨 같던데 체면 때문에 낮에는 오지
못한 모양입니다. 단 한사람이니 봐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주인의 말에 화정은 잠시 망설였다. 아영이 곁에서 가시가 잔뜩
돋친 말투로 꿍얼거렸다.
"어쨌든 영업시간 오버(over)라구! 그러니까 그냥 무시해. 안
그래도 피곤하잖아?"
오버라는 것을 당연히 못 알아듣는 주점 주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나 잘난 타입의 사람에게는
심술기가 좀 있는 아영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정은 뭔가 모르게 호기심이 끌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저 여자, 그냥 단순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화정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곁에서는 조운이 묵묵히 한마디 했다.
"한 명인데 힘들 것도 없지 않나. 그냥 봐 주는 것이 어때?"
조운의 말에 아영은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덤볐다.
"하지만, 단 한 번이 백 번이 되는 거여요! 어쨌든 안되는 건
안돼요! 게다가 자룡님은 화정의 피곤한 얼굴이 안 보여요? 벌써
며칠 째인데! 아까부터 힘들어서 말도 한마디 않고 있었다고요!"
화정은 그 말에 아영을, 조금은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아영이 고위 출신들을 싫어해도, 그런 이유만으로
저렇게 고집을 피울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화정은 알고 있었다.
며칠정도 힘들게 지내자 화정의 낯이 조금 변한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것은 아영이었다.
오늘도 조금 일찍 끝낸 이유는, 아영의 재촉 때문이었다.
사람을 얄미워하는 것은 많아도 깊게 미워하지는 않는 아영이
저렇게 반대를 해대고 있는 것은, 화정이 한시라도 빨리 식사를
마치고 자러 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아영아, 고맙지만......저 사람, 만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금방 끝나니까 걱정마."
화정은 아영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나요?"
주인은 아영을 보면서 몸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정은 천천히, 걸음걸이를 옮겼다. 나무 계단으로 발을
올리려던 그녀는 아영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을 향해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복도형의 발코니 비슷한 구조라, 아래층의 사람들도 이층의
방문들을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아영이, 여자가 서 있는 화정의 방문을 올려다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화정은 여자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여자는
화정보다는 키가 좀 작았다. 하지만 그렇게 두툼한 옷을
걸치고도 훤칠한 느낌을 주는 것이, 꽤나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 같았다.
화정은 천천히 자신의 방문을 열고는 여자에게 들어올 것을
권했다. 여자는 화정을 꽤 오랫동안 뚫어지게 보더니,
사뿐사뿐 예쁘기도 한 걸음걸이로 들어섰다. 분명 무용 같은
것을 하는 여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화정은 여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천천히, 여자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여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한숨에 머리에 쓴 얇은 비단이
하늘거렸다. 잘 비치지는 않지만, 언뜻 비치는 것을 보니, 얼굴
윤곽이 갸름한 여자 같았다. 코도 오똑해서, 그런 천을 쓰고도
높은 콧날선을 약간 드러내고 있었다. 화정은 속으로
`꽤나 미인이겠는걸......' 하는 기대를 걸었다. 여자가 낮은
음성으로 실례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용서하세요. 하지만 주변의 눈이 두려워 이렇게야
찾았습니다......대신에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단정한 말투와 청아한 목소리. 노래를 부른다면 꽤 듣기
좋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자는 어느새 탁자 위로
양팔을 올려서, 긴소매를 젖히고 나타난 가늘고 길며 하얀
손가락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아마, 노래나 무용같은, 예술 분야에 능숙한 여자인 것 같았다.
하긴, 이 시대의 귀한 집 딸들은 가무(歌舞)정도는 기본으로
배웠을 것이다.
`어떤 사람 같아요, 현량?'
아직도 서두를 못 꺼내는 여자를 곁눈질하면서 화정이 속으로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 분이 얼굴을 가리고 계셔서......잘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면사포(面紗布)를 걷어 달라고 청하십시오.]
아차, 베일을 여기 말로 하면 면사포겠구나......하고
깨달으면서 화정은 조금 미안한 심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마악 입을 어렵게 열려고 하고 있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잠시만요."
기껏 어렵게 입을 여는데 자신이 괜하게 말을 가로막는 것
같아 조금은 미안했지만, 화정은 여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실,
현량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아도 권하려던 참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조금은 궁금했으니까.
"얼굴을 가리고 계신 것을 벗어달라고 한다면......너무
무리한 요구입니까."
아니나다를까, 화정의 말에 여자가 멈칫했다.
"......굳이 벗어야 합니까?"
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관상(觀想)을 보아야 제대로 맞출 수가 있습니다.
철저히 기밀로 할 테니 부끄러워 마시고 걷으십시오."
화정의 말에 여자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하얀 손을 올리면서 화정에게 다짐을 시켰다.
"그럼, 꼭 비밀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천천히, 얼굴을 가린 천을
머리 위로 올리고 면사포를 벗었다. 화정은 순간, 예상한 것과
다르게 조금 평범한 여자네, 하는 생각을 했다. 놀랄만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예쁜 여자였다. 이 시대 여자로서는 드물게
속쌍꺼풀이 진, 또렷한 눈매 속에 진한 눈망울을 담고, 오똑한
콧날과 갸름한 얼굴선을 지닌 그녀는, 유달리 흰 피부를 지녔다.
화정보다는 조금 어둡지만 운록이나 마초 정도로 흰 피부였다.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별로
경국지색이라고까지는 칭송받을 만한 미색은 아닌 것 같았다.
여하튼 화정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여자는 망설이다가
다시한번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꽤 높으신 어르신의 은덕을 입어 그분의 딸처럼
자랐습니다. 그분의 성함이야 장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굳이 말씀드리지 않으려 합니다. 미천한 것의 이름이야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씀드리지요. 이 미천한 것의 이름은......"
*******
초선(貂蟬)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면, 초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우세하다.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암살하는 전체적인 과정에서 정말 미인계인
<연환의 계략>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사의 <여포전>을 보면,
여포는 확실히 동탁의 시녀에게 손을 댔고, 발각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불안에 떨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시녀의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 시녀는 동탁의 시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포와 그녀가
밀통했다는 것을 동탁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연의의
연환계는 전혀 근거가 없는 허구이다.
고작해야 사서 속의 왕윤, 여포가 동탁을 암살한 사실과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통하고 있던 사실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출처: 도서출판 청양 `삼국지 고증학')" 아마도나관중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초선이란 가공의 인물을 끌어내 좀더 박진감 넘치게,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낸 것 같다.
어찌되었건 이 초선이란 인물은, 작가가 소설 내에서 화정의
생각을 빌어 이야기했듯, 춘추시대의 서시(西施), 전한 시대의
왕소군(王昭君), 당대의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고대소설의
사대미인(四大美人)으로 이야기된다(서시나 왕소군, 양귀비에
대해서는 소설에 간략하게 주를 달아놓았으니 참고하시길......).
그만큼 전설적인 미녀이고,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달리는 삶을 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만 생각해보자. 작가도 여자이기 때문에 미(美)라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얼마 전에 TV를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보았다.
그 프로는 클레오파트라와 황진이, 양귀비의 얼굴을 그녀들의
초상화를 본떠 컴퓨터를 이용해 얼굴을 복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는 현재 작가의 눈으로 보아도 정말 아름다운 미인이었지만
황진이나 양귀비는 소위 말하는 `못생긴 여자' 의 전형적인 상이었다.
작가는 그 프로를 보고 경악하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의 기준은 변화한다." 현재는 미의 기준이, 짙은 쌍꺼풀이
진 큰 눈매, 갸름하고 작은 얼굴, 오똑하고 높은 코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서구적인 얼굴이다. 자연히 고대라고 해도, 현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서양인이던 클레오파트라는 당연히 예쁘고, 전형적
동양인의 얼굴이던 양귀비나 황진이는 못생긴 얼굴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얼마전 읽었던 중국후궁비화라는 책에 따르면 여자는 키가
크면 좋지 않게 보였다. 제갈공명의 처인 황월영이 키가 8척으로
남편인 제갈량과 엇비슷했다고, `장대같은 키의 여자'라 비웃음을
샀던 사실을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소설을 몇 권
읽으면, 미인에 관한 묘사 중 `보름달 같이 둥근 얼굴,
초승달처럼 휜 눈썹, 백옥같이 흰 피부'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지금은? 지금은 보름달 같이 둥근 얼굴이라면, 작가가 여자인
입장에서 볼 때도 당장, 성형외과에 가서 턱을 깎겠다고
투덜거릴 것이 분명하다. 즉, 미의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 양귀비나 서시, 왕소군, 또는 웃음으로 나라를 망쳤다는
포사*가 당시 미의 기준으로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모르지만
2000년대에 와서까지 절세미인이라고 보장할 수 없고, 현 시대
최고의 미인이라는 탤런트 김모양이라해도 그 시대에 가서
절세미녀라고 여겨진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위 사실을 살피면 고대 미의 기준이 현대시대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점만으로 `현대의 미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름'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작가가 쓰는 소설은 삼국시대의
이야기다. 현재와 거의 1800년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이 동안에도
미의 기준이란 것이 여러 번 변했을 것이다.
위에서 키가 큰 여자를 우습게 본다고 했지만, 키가 큰 여자를
옷맵시가 난다고 아름답다 이야기한 경우도 있다(중국 후궁비화
참조). 또한, 현재시대에도 피부가 유달리 흰 여자를 미인으로
치는데,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내려온 미의 기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늘고 휘청거리는 허리 역시 두말할 나위
없다.
즉, 점차 조금씩 변화하지만, 일관된 곳도 있고 현대시대와
상통하는 점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이런 점에 대해 고민을 했다. 초선이나 이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초선과 이교자매를 엄청나게
얼굴이 크고 못생긴 여자들로 만들 것인가, 도리어 현 시대에서는
최고의 미녀인 화정을 그 시대에서는 최고 추녀로 만들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했다. 결과, 작가는 주인공이란 이유로 일단 화정을 현대시대와
비슷하게 미녀로(작가는 유감스럽게도 주인공이 미인이라는 사실을
매우 좋아한다. 작가의 외견상 콤플렉스 때문인지도......), 초선은
미인이되 현 시대의 눈으로 볼 때 그냥 평범한 얼굴로 하기로
결정지었다.
지나치게, 미인이라고 그대로 쓴다면 시대차이를 느낄 수 없겠고,
그렇다가 갑작스럽게 엄청난 추녀라고 하기에는 삼국지의
미녀 초선에 대한 매니아들의 환상이 깨질 염려가 심하니까(하지만
작가는 이미 이 소설을 쓰면서 삼국지를 엄청나게 망가뜨려 놓았다).
그렇다면 "하지만 당신의 소설 내에서 봐도 초선이, 그 시대 사람들의
눈에도 경국지색은 아닌 것은 현 시대 사람인 화정의 판단과 같던데?"
라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저 작가가 다른 점을
쓰고 싶은 욕심에 설정을 바꾸어놓은 것뿐이다. 사실 동탁은 미오성에서
가려뽑은 미녀후궁 800명에게 둘러싸여 사는 몸이며, 동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여포 역시 그녀들을 매일같이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저 얼굴이 예쁘기만한 여자라면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연의에서와 같이 치열하게 갈라놓기가 힘들다. 외모 외에, 동탁이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정을 붙일 만하며 여포는 양부를 저버릴 만큼
끌리게 만들만한, 어떤 플러스 요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미 예쁜
여자는 볼대로 본 동탁이다. 또한 초선이 말 그대로 그런 경국지색이면
권력자인 동탁의 귀에 그런 정보가 안 들어갔을 리가 없다. 즉,
초선은 이미 동탁의 800시녀가 되어있어야 옳다는 소리다(위의
여포전의 기록이 진실로 옳은 것일 수도 있다. 언급했듯이 여포는
동탁의 시녀 중 하나와 내통하다가 들켜서 사이가 틀어진 것일
수도 있으며 그게 신빙성이 높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왕윤의 수단과 꾀, 미녀 초선의 재치와 곧은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매력......결국 작가는 초선이 외모만
예쁘장한 여자가 아니라, 오래 만날수록 상대방이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상냥한 성품, 남성들이 성적으로도 즐길 만한(그렇기에
초선을, 동탁이 여포에게 악착같이 주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작가는 페미니스트는 아닌가보다--;) 아름다운 몸매,
눈물지을 때의 더없이 가련하고 아름다운(사실.......우는 모습이
예쁜 여자가, 매달려 통곡하며 애교를 핀다면......동탁과
여포라 해도 포기하기 힘들지 않을까?......얼마전 방영한 가을동화란
드라마, 송혜교가 우는 모습이 예뻐서 좋아했다던 친구 놈들도
꽤 있다--;) 외모의 소유자로 만들기로 결정을 내렸다.
즉, 작가의 소설에서 초선은 "절세미인"이 아니라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여자"로 쓰기로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작가의 소설을
보면서 `헛, 초선이 왜.......!' 라고 생각하시던 분들이라면, 이
허접한 변명을 읽고 작가를 이해해 주시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덧붙여서.......주인공 화정과 아영은 어째서, 화정은 현 시대대로 미녀이며
아영은 추녀가 되었느냐는 질문은 답하기가 곤란하다.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의도는 천천히, 소설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드러나게 될 것이다.
(현재 이 소설은 초반부에 불과하다;) 그저, 숨은 뜻 말고 외관상 이유만
언급하자면, 화정은 피부가 희고 아영은 피부가 검다(위에서 말했고
이후에 소설에서도 이야기된다. 미의 기준은 흰 피부다. 현 시대는
피부가 검어도 이목구비가 예쁘면 미인으로 보지만......) 또한 화정은
쌍꺼풀이 있고 아영은 쌍꺼풀이 없다(작가는 소설상의 미의 기분을
눈의 쌍꺼풀로 하기로 했다. 본래, 희귀한 것을 지닌 것이 미인 아닌가.
모든 여성이 모두 쌍꺼풀을 지닌 서양에서는 쌍꺼풀이 그다지 중요한
미의 기준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대 중국에서는 쌍꺼풀을 지닌
여자가 현재만큼 많을 리가 없다. 결국, 현재와 비슷하게 쌍꺼풀을
지닌 눈은 미인의 조건으로 자리잡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하에서
이런 설정을 넣었다)
키에 관해서는......황월영만큼 크지만 않다면 아무래도 옷 맵시가
날 듯한, 키 큰 여자가 예쁘게 보일 수도 있다고 넣었다. 하지만,
현재처럼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키가 작든 크든, 다른 기준을
만족시키면 된다고, 그렇게 결정했다. 즉, 키는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이다.(참나,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는 한심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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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포사: 중국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인 유왕幽王의 총희. 유왕은 잘 웃지
않는 포사를 웃게 하기위해 봉화를 수시로 올려 군사를 동원했다가
원성을 샀다. 이후에 정말로 전쟁이 터졌을 때 봉화를 올렸지만
대부분의 군사들은 또 유왕이 포사를 위해 봉화를 올린 줄 알고
나타나지 않아서 유왕은 멸망했다*작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