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초선(貂蟬)
여자가 한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이름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의무감 비슷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고
앉았던 화정의 귀에, 여자의 단말마가 침투해 들어왔다.
"초선(貂蟬)이라 합니다."
"!"
화정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탁자
가장자리를 붙들어 낙상(落傷)을 면한 그녀는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감고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화정은 자신의, 너무나 빵빵한
우연의 배경에 대해서 속으로 한탄했다.
`조금 전에는 왕윤이 오더니 이제는 초선이 오잖아.....? 이
세계에 떨어진 초면부터 조운이나 마초와 마주치고, 다음엔 유비
삼형제를 만나고 제후들을 구경했지. 그리고 이제 좀 잠잠하구나
싶었더니 왕윤과 초선까지.......난 아무래도 평범하게 살기는
글러먹은 모양이야......'
그리고는 초선에 관련된 삼국지의 구절을 얼핏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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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볼수록 빼어난 초선의 자색(姿色)이었다. 초승달
같은 눈썹과 가을물처럼 맑고 찬 눈, 상아로 깎은 듯 오똑한
콧날에 복사꽃 빛 도는 볼, 그리고 붉은 꽃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는 희고 가지런한 치아, 실로 미인(美人)을 형용하는
고금(古今)의 비유를 한군데 모아 놓은 듯한 얼굴이요
자태였다.(이문열의 삼국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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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게? 저게......양귀비(楊貴妃)*와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과 더불어서 중국 고대소설의
사대미인(四大美人)으로 불린다는 초선이야? 정말......서시나
양귀비, 왕소군도 보고싶어지네.......'
잔뜩 실망한 화정은 팔짱을 끼면서 초선을 훑어보았다. 아니,
삼국지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분명, 눈썹은 초승달처럼
생겼고 눈빛은 청초한 곳이 있다. 코도 오똑하고 흰 치아는
가지런하지만......붉은 입술이나 복사꽃 빛의 볼은 아마 화장
덕인 모양이다.
옅은 입술색이 흰 피부와 더불어 창백해 보이고, 초승달 모양의
눈썹은 활처럼 지나친 각도로 휘어져 있어서 조금 인상이
이상하다. 코는 오똑하기는 하지만 콧구멍이 조금 커서 약간
펑퍼짐한 모양이다.
입술도 얇고 거의 없는 모양인데다, 광대뼈가 좀 높고 뺨에는
살이 꽤 두둑하게 붙어있다. 한마디로, 어색한 곳이 많은
생김새에, 분위기도 특출나게 미녀의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다.
화정은 고개를 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옛날 사람들의 미의 기준은 대체 뭐지? 아영이나 나나......
똑같이 현대시대에서는 그래도 꽤 예쁜 부류인데 나는 여기서
절색, 아영이는 못생긴 아이.......이 초선이란 여자는
현대시대로 가면 보통보다 조금 예쁜 편, 그런데 여기서는
절색......차라리 나도 못생겼다고 하면 아, 현대시대와
고대시대는 미의 기준이 많이 틀리구나, 하는데......
대교와 소교*에 대해서도 궁금해지네. 거참......'
속으로 혀를 차는 화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선은 또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멈추고 있었다. 어지간히 속이
답답한 모양이다. 어쨌든 화정은 초선에 대한 감상은 그만하고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는 냉정을 되찾았다. 화정이 기다리는 것을
알았는지, 초선이 아닌 것 같은 초선은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그분은 조정의 꽤 높은 중신(重臣)이십니다. 허나,
어찌어찌하여 인연이 닿아 이 미천한 것을 거두어 여지껏 당신의
친여식(親女息: 친딸)처럼 길러주셨습니다. 늘 그 은혜를 어찌
갚을까 가슴 졸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헌데......"
아무튼, 크게 미인은 아니더라도 곱상하고 청아한 목소리와,
정갈한 몸가짐이 그녀의 매력을 증감시켜주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화정은 어느새 초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속으로
나무랐다.
"그분께서 최근에 근심이 너무 깊으신 듯합니다. 제게는 낳아준
생부생모(生父生母)보다 더 중하신 분입니다. 아니....."
초선을 말을 잠시 끊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렇잖아도
옅은 입술빛은, 이에 깨물려 희게 변했다. 한참동안,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는 양손을 쑥스러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화정은
그렇게 유달리 부끄러워하는 초선을 보면서, 초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현량은, 화정이 초선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음을 알아차렸는지, 아무 말도 없었다. 초선. 삼국지에서는
전설적인 여자다.
포악한 권력자 동탁과 그의 양아들이자 천하제일 장사인
여포사이를,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갈라놓는다. 동탁은,
가장 신뢰하는 여포에 의해 자신의 권력을 지탱시키고 있었다.
그 정도로 여포란 사내의 무예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기는, 삼국지
최대의 맹장이란 설도 있으며, 실제로 관우와 장비를 함께 맞아
싸웠어도 여유를 부릴 정도였으니......그러나 왕윤은 초선을
사이에 끼워, 여포에게 동탁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질투심을
유발시키고 부추킴으로써 여포가 자신의 손으로 양부(養父)를
살해하도록 만든다.
두 호색한(好色漢)을 한바탕 정신차리지 못하게 만든 초선은,
절세 미인으로써 가장 큰 일을 한 여인으로 일컬어지는 여자다.
한낱 가기(歌妓)*로서 자신의 몸을 더럽혀가며 그 큰 일에
끼어든 까닭이 뭘까.
아무리 길러준 양부에 대한 보은(報恩)이 간곡하다지만, 분명
보통의 감정으로 될 일이 아니다. 화정은 그제야, 삼국지의
초선이 어떤 생각으로 그 지저분하고 슬픈 비운(悲運)의 역할을
자처했는지, 깨닫고 있었다.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초선을
향해, 옅게 속삭였다.
"......사모하시는군요."
화정의 말에, 초선이 눈물이 그렁그렁 담긴 눈을 들었다.
화정은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초선이 무엇
때문에 미인으로 비추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분명, 생김새만은
별로 미인이 아니다.
하지만, 초선의 눈물 담긴 눈은, 어떤 호소력 같은 것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우는 모습이
아름다운 여자라고나 할까. 어쨌든 초선은 긴소매로 자신의
눈물을 천천히 훔치면서 말을 어렵게 이었다.
"요즘에는 무슨 일이신지 한숨만 내고 계십니다......그렇다고
직접 여쭈자니 귀한 어르신께 큰 실례를 범하는 듯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뿐입니다. 그 고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십니까?"
화정은 초선의 말에 속으로 `당연히 알지, 오늘 오전에
말하고 갔는데......'라고 중얼거렸지만, 왕윤은 왕윤 나름대로
속이 있는 것 같아 차마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답했다.
"근심 거두세요. 그분은 곧 초선님께 자신의 고민을 논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참고 기다리세요."
화정의 말에, 초선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화색이 돌았다.
초선은 얼굴을 조금 붉히면서 화정에게 되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어찌 해야 합니까?"
화정은 초선의 말에,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찌해야 하느냐고? 그런 가엾고 지저분한 역할을 맡길 거라고,
더더구나 사모하는 사람이 맡기는 것이라고, 그리고 중요한
것이니까 맡아야 한다고 어떻게 권할 수 있단 말인가.
겉보기에는 차가워도 화정은 사실 남이 불행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화정은 막막한 심정으로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초선은 눈에 기대감을 가득 담고 대답을
재촉했다.
"네? 어찌해야 하지요? 부디, 가르쳐 주세요,
가현소저(佳賢小姐)*."
가현? 어디서 들은 듯한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어처구니
없었다. 고대 절세미녀라는 초선이 자신에게 가현소저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묘한 감상에 젖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정은 눈을 감았다.
물론, 초선이 그 역할을 해 내야 동탁의 인생이 절단난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선하고 착한데다 공손하기만한 초선을
보니, 같은 여자로서 동정심이 일었다. 화정은, 자신이
생각하는대로 말해주기로 마음먹고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잘 들으세요, 소저......당신이 그분의 부탁에 응하느냐
응하지 않느냐......이것은 당신 개인의 삶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바꾸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은 당신하기에
달려있어요......가능하면 응하기를 그분은......바라실
거여요......"
화정이 조금의 동정을 담고 말하자, 초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화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화정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끊었다. 두 여자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러갔다.
한참동안, 벌레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화정은 갈등했다. 이
여자, 외견상으로는 기대치에 비해 못 미쳤지만 인간적인
면은.......그 이상이다. 참 좋은 사람 같은데......너무나
가혹하고 슬픈 운명을 타고났다......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화정에게, 초선의 음성이 날아왔다.
"얼음같이 차가운 소저께서......그런 말투를 다
쓰시는군요. 모르기는 몰라도 제......양부의 부탁이 매우
가혹한 것인 모양이네요.......그런.......가요?"
초선의 조용한 질문에, 화정은 눈을 살짝 감고는 잘라
대답했다.
"네. 여자로서 아주 가혹한 것입니다."
초선은 화정의 대답에, 아주 잠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리고는 자신이 쥐고 온 주머니를 꺼내 커다란 금덩이 두
개를 올려놓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초선은 한참을
멍하게 서서 화정 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문
쪽으로 무겁게 옮겼다.
하지만 초선은 금방 문고리를 돌리지 못했다. 아마도,
화정처럼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난무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머리에 면사포를 다시 쓰고, 이윽고 손잡이를 힘주어
잡은 초선은, 화정에게 말했다.
"......제가 그분을 사모함을......자세한 것도 모르면서
알아챈 사람은 소저 뿐이었어요......이후에......
염치불구하고 다시 찾아뵈도 괜찮겠어요?"
초선의 말에 화정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허락을 내렸다.
"얼마든지요."
초선은 화정에게 살포시 미소지었다. 초선 쪽을 보지
않았지만 화정은, 저 근면이 착하고 깨끗한 아가씨가
자신에게 웃음을 보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하는 작은 감사를 남긴 채, 초선은 화정의 방문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멀어져가고 나서야, 화정은 초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다시한번 깊게 깨달았다.
"전란의 시대에 고달픈 것은......여자이기 때문일까요?"
나지막히, 현량에게 물었다. 현량의 차분한 목소리가 답변했다.
"......여자이건 남자이건, 전란은 늘 인간을 슬프게 합니다."
전란......이곳에는 분명 전란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 늘상
생긴다. 화정의 세계.......그곳은......
`이곳에 비해 표면상으로는 평화롭지. 하지만, 알고보면......'
회사에서 퇴직당하지 않고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한 경쟁으로
얼룩진 전장이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만든
문명의 이기들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정은
답답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달리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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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양귀비(楊貴妃): 당 현종玄宗의 후궁. 절세의 미녀로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본래 현종의 며느리였으나 양옥환의 미색에
반한 현종이 아들로부터 빼앗았다는 유명한 미녀*작가주
2.서시(西施): 중국 춘추시대 월국越國의 미녀. 절세미녀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병이 들었을 때의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하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작가주
3.왕소군(王昭君):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
원제에게 북방의 오랑캐가 궁녀를 하나 주어 화친할 것을
요구하자, 원제는 일부러 가장 못생긴 여인을 오랑캐의 처로
주기 위해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궁녀들의 초상을 그려 바치게
했다. 이때, 궁녀들이 자신들이 어여쁘게 그려지게 하기 위해
화공에게 많은 돈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그리 하지 않아 심술난
화공에 의해 매우 추하게 그려졌다. 그림을 보고 원제는
오랑캐에게 줄 여인으로 왕소군을 선택하였으나, 떠나는 날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의 자태를 보고는 땅을 치며 후회하고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목베었다*작가주
4.대교와 소교(大橋와 小橋): 강동이교江東二橋라 불리는
절세미인 자매. 대교는 언니고 소교는 동생이다. 두 사람은
교국로喬國老의 딸로써 대교는 손책孫策에게, 소교는
주유周瑜에게 시집갔다고 전해진다. 제갈량諸葛亮이 조조의
시를 바꾸어 해석하여, 조조가 이교 자매를 탐낸다고 말을 해
오吳의 중신重臣이던 주유를 자극해 조조와의 전투를 이끌어
냈다*작가주
5.가기(歌妓): 지금 시대의 가수에 해당되는 직업. 노래
부르고 춤추는 여자*작가주
6.가현소저(佳賢小姐): 아름답고 현명한 아가씨, 라는
뜻이다. 작가의 창조어
밤이슬을 맞으며 들어온 초선에게 하녀 하나가 뾰족하게,
어디를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초선은 답답하여 산책하고
오는 길이라 대충 얼버무리고는 빨려들 듯 방으로 들어가
겉옷과 얼굴을 가린 천을 벗었다. 무심코,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는데, 눈가에는 점보던 처녀가
아른거린다.
<......사모하시는군요.>
그 말을, 참으로 덤덤하게도 내뱉어 주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초선 자신의 입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 주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어찌 자신의 입에 감히, 그런
단어를 담을 수 있었겠는가. 초선은 화장대 앞에 놓인 머리핀을
집으면서 중얼거렸다.
"참 묘한 점쟁이 소녀였어......"
그렇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같은 듯했다. 참으로,
가기로서 미모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감탄을 받고 자란
자신이 보아도 정말 아리따웠다. 점쟁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인지
머리는 대충 하나로 묶어내려 어깨 앞으로 늘어뜨렸고 차림새도
평범했지만, 전혀 빠질 곳이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의 조화와,
특히 꿈꾸는 듯 투명하고 커다란 눈동자는 유달리 사람을
사로잡았다. 도도하고 기품있는 생김새이지만 어찌보면 청초하고
맑다. 그런 얼굴로, 말투를 참 싸늘하면서 냉정하게 사용한다.
`분명, 어디 높은 집의 규수 같았는데 어째서 점쟁이가
되었을까......귀신이 갑작스레 들어서 집안에서 버림이라도
받은 걸까......?'
그리 생각하던 초선은 고개를 흔들면서 옷을 천천히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말들이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여자로서 아주 가혹한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초선은 속으로 그런 말을 웅얼거리면서
답답한 심정에 바깥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싸늘하고 매서웠지만
어디, 자신의 속마음만하랴. 곁눈질로, 조금 멀리 떨어진
모란정(牡丹亭)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왕윤은 그곳에
있는 듯했다. 그 아름다운 곳이, 왕윤이 고민이 있거나 깊이
생각할 것이 있을 때에 자주 들르는 곳임을 아는 초선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아, 오늘도 어르신께서는 마음이 편치 않으시구나!'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생각하니 처량한 마음에
울먹임만 흘러나왔다. 초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모란정의
근처로 다가갔다. 짙은 꽃내음과 풀내음이 벌레 소리와 함께
후각과 청각을 자극했다. 하지만, 초선의 눈에는 하얗게 달빛을
받고 빛나는 아름다운 정원의 광경도, 만발한 꽃들도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지나치다 그만 거친 나무껍질에 손을 살짝 스치고
말았지만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모란정의 기와가
은색으로 빛나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웠지만,
초선은 그에 매료되지 못한 채, 고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나이가 좀 든 노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골똘히 고민에 잠겨있었다.
어찌나 고민에 잠겨있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초선이
한숨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왕윤은 최근들어 부쩍
늙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왕윤은 현재 50대 초반의 나이인데, 지금 보니 대략 50대
후반에서 60대 정도는 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초선은
안타까움을 안고 흐느꼈다.
`정녕 고민이 그리 깊으시오이까! 이 미천한 것이 도울 수는
없습니까!'
눈물지은 탄식을 하다보니 흐느낌이 절로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렇잖아도 신경이 예민해있던 왕윤은 재까닥 이곳으로 달려와
숲을 헤쳐보더니, 눈물짓는 초선을 발견한다.
"천한 것은 어쩔 수 없구나! 이런 곳에 와서 기껏
정인(情人)이나 생각하며 눈물이라니!"
왕윤의 꾸짖음에 깜짝 놀란 초선은 고운 옷이 지저분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대뜸 무릎을 꿇었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다만 이 미천한 것은,
어르신께서 최근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늘상 근심에
젖어 세월가는 것을 모르시는 듯하여 야밤에 눈물지었을
따름이옵니다."
초선의 말에 왕윤은 입을 다물었다. 초선의 대답에 적잖이
미안하고 당혹스러웠던 것 같았다. 초선은 달빛을 받고 서있는
왕윤에게, 용기를 내어 묻기로 했다.
"어르신, 무슨 깊은 근심이십니까? 벌써 몇 달째 웃음을
잃으셨으니 이 초선, 천한 재주라도 어르신을 위한 일이라면
마다 않겠습니다!"
초선의 말에 왕윤은 차가운 멸시를 보냈다.
"국가의 원로중신(元老重臣)으로서도 할 바를 못 찾는데,
하물며 가기에게서 방법을 찾으랴!"
왕윤의 말에 초선은 감히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옅게 떨구었다.
왕윤은 그런 초선을 보고는, 그 여린 몸으로 자신을 위해
안타까워함이 어여쁘기도 하거니와, 미안해지기도 해서,
자리에서 일으켜 달래려 하였다. 순간, 서러운 듯 눈물짓는
초선의 아름다움이 왕윤의 눈을 사로잡았다. 왕윤은 뇌리에
스쳐가는 맑은 음성을 기억해냈다.
<사도 왕윤(司徒 王允) 어르신이시라면 이리와 돼지를
갈라놓을 방법이 미(美)에 있음을 깨닫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왕윤은 나직하게 점보는 아이의 말을 되뇌여보았다.
미(美)......아름다움이라......
<돌아가서 찾아보십시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이럴 수가!"
왕윤은 자신이 그제야 점쟁이 소녀의 말을 깨달았음을
알고는 짧게 탄식했다. 초선은 왕윤이 자신을 일으키다 말고
탄식하자, 눈에 눈물을 그렁하게 담은 채 왕윤을 올려다보았다.
그 청초함은, 마치 이슬을 머금은 모란같이 맑았다.
`여포가 용맹하고 동탁이 꾀가 많지만, 둘다 한가지로
호색하는 무리들이다. 여포의 용맹을 떼어낸다면 동탁은 이빨
빠진 범이나 다름없다!'
왕윤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왕윤은 초선을
일으켜 세우고는 한마디 했다.
"한(漢)의 흥망이 네게 달려있음을, 이제야 알았노라!"
초선은 왕윤의 돌변한 태도에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점보는
처녀가 해준 이야기를 회상했다.
<그분은 곧 초선님께 자신의 고민을 논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참고 기다리세요.>
참으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영리함에 감탄하게 된다.
귀신같은 소저라 생각하면서 초선은 은근히 그녀의 예언이
맞아떨어짐을 기뻐하였다. 한편으로는 왕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지도 하였다. 분명, 초선 자신의 삶뿐 아니라
천하에도 돌변을 가져온다고 했으며, 가혹하다고 예언하였다.
`허나, 왕사도 어르신께서 기뻐하시고 필요로 하시는
일이라면 하고말고!'
초선은 그렇게, 매섭게 결의를 다지었다. 왕윤은 초선에게
죄책감을 안고 권한다.
"이럴 것이 아니라 저 쪽의 화각(畵閣)으로 가도록 하자."
초선은 천천히 앞장서는 왕윤의 뒤를 따라 가까이에 있는
화각으로 발걸음을 뗐다. 밤이슬이 유달리 차갑고 바람은 칼
같았지만 왕윤이 자신을 통해 근심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니
초선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화사하게 꾸며진 목재 화각에 당도하자, 왕윤은 주변에
시립하고 섰던 비첩(婢妾)들을 꾸짖어 멀리 물리친 뒤, 초선이
안으로 들도록 권했다. 조금은 어색한 생각으로, 초선이 안으로
들자 왕윤은 초선을 자리에 앉도록 청했다. 초선은 별 생각없이,
얼떨결에 왕윤이 권하는 대로 앉았다. 그런데 대뜸, 왕윤은
초선에게 절을 올린다. 소스라치게 놀란 초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르신, 이 무슨 일이시옵니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초선에게, 왕윤은 울며 말한다.
"너는 부디, 이 천하의 고통받는 만민(萬民)을 가엾게 여기어라."
그 말에 더 놀란 초선, 할 말을 완전히 잃었다. 왕윤은 초선에게
간절히 말한다.
"지금 백성들은 동탁이란 놈의 아래서 허덕이고 있다.
천자께서도 동탁의 눈치를 보고 계신 실정이니, 동탁의 무거운
세금징수와 잔인무도한 행위를 제지할 이는 아무도 없다. 이는,
동탁이 영리하고 간특한 탓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의 양아들인
여포 때문이다.
여포의 용맹은 실로 두려워, 만명을 능히 당할 수 있으며
주변의 위협을 창 하나로 눌러낼 정도이다. 이 두 사람이
결탁하는 한, 예전의 번쾌(樊楯)*가 살아나더라도 동 아무개를
죽이기가 실로 어렵다. 하여, 주변의 중신들도 모두 동탁을
속으로 욕할 뿐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헌데, 오늘 내가 장안에
유녀(遊女)가 왔다하여 그에게 계책을 묻던 중, 그는 단지
`미(美)', 즉 아름다움이 계책이 될 거라 답하고 집으로 돌아가
찾으라 일러주었다.
소견을 갖춤이 예사 유녀가 아닌 듯하여, 내 오늘 종일 그
말뜻을 생각하고 집안을 뒤졌으나 알 수 없었는데, 네가 내
눈에 들어오다니, 이는 실로 하늘의 도우심이로다.
동탁이 영리하고 여포가 용맹하며, 두 부자의 사이가 바늘과
실같다 하여도, 하나로 호색(好色)하는 것들이니 네 미색이면
그들을 홀려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 것이다. 너를 그 금수같은
놈들에게 던짐은 심히 괴로우며 너 또한 슬플 것이나 이는
천하를 구제할 길이 될 것인즉, 어떠하냐?"
초선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강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초선은 왕윤이 자신을 그윽히 바라보다, 급히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그제야 점술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혹한......가혹하나 중요한 부탁.......그렇다.
얼마나 가혹한가. 무려 십여 년을 애타게 사모해온 정을
모른 채, 왕윤은 다른 남자에게 천하를 위해 그녀의 몸을
바칠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이미 각오했던 일. 자신의
몸뚱아리나마 왕윤의 근심을 덜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겠다고
초선은 다짐했다. 초선은 애써 눈물을 누르면서 의젓하게
답하였다.
"무엇을 한들 왕사도의 길러준 은혜에 필적하오리까. 게다가
천하를 동 아무개의 손에서 구해내는 일인데, 천한 한 몸
바치는 것 어렵지 않사옵니다. 뜻대로 하소서."
초선의 말에 왕윤 역시 눈물을 흘렸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조정 중신으로서, 냉정하기도 했으나 왕윤 역시 친딸처럼
길러온 초선을 그런 일에 던짐이 슬펐으리라.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니 이로 만족하자, 싶은 초선이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왕윤 역시 울음을 참지 못하여 흐느끼면서 초선을
달랬다.
"아직 구체적인 방도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너의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치밀하게 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내, 내일
날이 밝으면 그 현명한 유녀에게 방도를 의논해보고자 한다.
그는 나에게 이런 실마리를 던져주었으니,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어느 정도는 제시해 줄 것이다."
초선은 그 말에 고개를 숙이며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왕윤은 그런 초선을 쓸어안으며 탄식했다.
"이렇게 죄없는 너를 그렇게 보내야 하다니! 이 왕 아무개가
능력이 없어 너만 험한 꼴로 만드는구나!"
"아니옵니다......아니옵니다......!"
초선은 흐느끼면서도 왕윤의 마음에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부정했다. 그렇게, 가기의 눈물과 조정 중신의 눈물은
뒤섞여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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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번쾌(樊楯): 한나라 고조 때의 공신. 원래 개고기를 파는
신분이었으나, 한 고조 유방劉邦의 거병 뒤에 그를 따라
무장으로서 공을 세웠다. 훙먼鴻門의 모임에서, 유방이
항우項羽에게 모살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유방을 구해내었다.
사람의 마음만큼 어려우면서 다루기 쉬운 것은 없다. 화정의
"방법은 미(美)에 있다."는 말. 이것은 사실, 매우 추상적인
말이었다. 아마도, 동탁을 깨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왕윤이 사용하려는 미인계(美人計)나, 많은 재물로
군사를 일으켜 치는 적극적인 방법, 돈이나 진귀한 것으로
여포를 조금씩 매수해 가는 계책 등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화정의 말은, 위의 세 가지 예에도 공통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인계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나머지 두
가지는 재물의 아름다움(보석이나 금도 역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누가 감히 부정하겠는가?)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방법은 화정이 이야기한 그 `아름다움' 과 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난 왕윤은 초선의
아름다움을 이용하라는 이야기로 애써 해석한다. 그것이 바로,
점술가에게서 점을 보고 오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사소한 일 하나, 당연한 일 하나라도 점술가의 추상적인
말에 끼워 맞추려 애를 쓴다. 그리고 그 점술가의 점쾌를
스스로 맞춰주고는, 용하다고 하면서 다음날에도 다가간다.
그 악순환은 계속된다. 아마, 많은 점술인들이 이런 `추상적인
말의 이점'을 사용해 적잖은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점술에
대해서는 큰 식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화정은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 대충은 있었다.
물론, 왕윤과 초선의 경우는 정말로 미래를 알고 이야기한
것이니 크게 죄책감을 지닐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 몇 명의 점쾌를 조금 보고, 화정은 그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말을 꾸며 말해주면, 점 보고 간 사람들
열에 일곱, 여덟은 다음날 어김없이 몰려왔다. 현량의 점쾌가
잘 맞기는 했어도, 화정을 찾는 이들 중 삼분지 하나는 그런
점에 속아서 오는 사람들이었다. 화정은 속으로 비웃었다.
`삼분의 일은 그런 점에 속아서, 삼분의 일은 내게 수작이나
걸려고 오고 있으니, 착실하게 이득을 보는 사람은 나머지
삼분의 일이라는 소리구나.'
얼마나 어리석은가. 미래를 알고싶은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지만, 그 마음을 이용해 돈을 버는 일이 이렇게
간단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낸 화정은, 조금은 허망해졌다.
이 세계의 점술가들은 화정 세계의 점쟁이들과 조금 다르다.
화정의 세계에 있는 그들은 화정이 파악해 냈듯 대부분은
사기지만 이곳은 원령과 비과학적인 현상이 존재하는 세상이니,
아마 대부분은 정말 실력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돈을
별로 벌지 못하고 빈곤에 허덕인다는 것은, 그들이 화정과
같은 `사람을 얼러내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그나저나, 금 60냥이 순식간에 500냥으로 늘어났으니......
휘유, 대단하다. 너 정말 이 길로 아예 나가도 되는 것 아냐?"
아영은 앞에 있는 닭고기를 신나게 젓가락으로 쑤셔대면서
킬킬거렸다. 요즘의 아영은 부쩍 기분이 좋아보였다. 돈이
많이 불어난 덕에, 예쁜 옷에 머리장식, 값진 요리를 원 없이
겪고있는 그녀는 정말 즐거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의외인 점이 있다면 그 예쁜 옷들과 머리장식들을 사
놓기만 하고 직접 입어본다던가 머리에 꽂아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책도 산더미같이 구해놓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장신구는 쓰지 않으면서 책은 열심히 읽어댄다는 것이었다.
아영은, 책을 매우 좋아했다. 다만, 동양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나 동양사(東洋史)보다 서양사(西洋史) 또는 서양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다해도 자신이
고대 중국에 떨어진 이상은 동양이야기 밖에 못 읽으며,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읽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 이전에 의모와 살 때에도 돈만 충분했다면 책을 구해
읽을 수 있었을 거야, 라고 말하며 가끔씩, 아영은 투덜거렸다.
<아아, 내가 떨어진 곳이 고대 중국이 아니라 중세
서양이었으면 좋았을 걸!>
그런 아영을 보면서 화정은 아영이 예쁘게 바느질하여 조금
고쳐놓은 옷을 보고는 곁에서, 한번 입어보고 머리장식도 써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아영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비싸게 주고 산 것을 낭비하는 것 같다고 화정이 야단도 쳤지만,
아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아니, 내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너 한번 치장시켜 보고
싶어서.>
그 말에 화정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아영은 예쁜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스스로가 꾸미는 것보다 남을 예쁘게
꾸며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화정도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입장이라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영은 화정이
입을 다물자 싫다는 무언의 의사표시임을 알아챘는지 보채지
않았다.
"돈도 꽤 모였으니까......이제 점술가 노릇은 그만 하자.
벌써......장안에 당도한 지 8일이 지났어."
화정의 말에 아영은 신나게 놀리던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화정에게 왜 그러느냐고
표정으로 외치면서 덤벼들 태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화정이 그런
아영에게 무어라고 하려는데, 곁에서 말없이 앉아있던 조운이
입을 열었다.
"사방으로 수소문해 영각의 소식을 알아보았지만, 우리가
넘어온 진류 땅 근처에서 한번 본 적이 있다는 것뿐이었어.
행적을 알 수 없더군."
화정은 조운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 오는 길에 들었던, 영각과 복장이 꼭 같은 시체 이야기는,
화정으로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얄밉다지만, 도움을 받았고 적잖은 시일을 함께 보냈는데 어떻게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화정은 여기서 더 이상 영각에
대해 캐묻는 것은 그만두자고 판단을 내렸다.
"이제 황성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틀 남았어요. 짐을 꾸리고,
잠시 다른 숙소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 어때요?"
아영은 신경질을 듬뿍 담은 손으로 새 젓가락을 받아서는,
닭고기를 쿡쿡 쑤셔댔다.
"점 봐 달라는 사람은 계속해서 올 거야."
"그러니 숙소를 얼른 옮기자는 거야. 조운, 저녁 먹고 나가도록
해요. 어둑할 때 떠나는 것이 눈 피하기에는 가장 좋으니까.
황성에서 가까운 곳이면 좋을 거여요."
화정의 말에 조운이 찬성했다. 하지만 아영은 아직도 별로
즐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새로 받은 젓가락을 손으로 연필
굴리듯 빙글빙글 돌리고 있더니, 쏘아붙인다.
"너 말인데, 네 얼굴은 벌써 좀 알려져 있다구. 다른 곳
가봤자 장안에 소문이 파다한데, 숙소만 옮긴다고 해결될
성싶어? 게다가, 네가 눈에 좀 띄어야지!"
아영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화정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괜찮아. 그들은 여자로 알고 있으니 남장을 철저하게 하고
다니면 돼. 왜 이렇게 닮았냐고 하면 남매인데 여동생은
신기를 타고났고 나는 평범하다고 하면 그만이지, 뭘."
화정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아영도 입을 다물었다. 조금
심통이 나기는 하지만 돈도 꽤 많이 벌었고 이 이상 자신도
손님들 줄 세우랴, 차례 따지랴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 은근히
찬성하고 있는 눈치였다. 아영이 잠잠해지자 결단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시는 없어도 은근히 빨리 식기를 비우는 중인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문이 열리면서 얼굴을 커다란 갓으로 가린
남자와 얼굴에 흰 면사포를 쓴 여자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두 번씩이나 모를 수는 없었다. 자연히 아영과 조운의 시선은
거기로 쏠렸고, 화정은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두 사람을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끌어넣었다.
마침 오늘따라 식사하는 손님이 적어서 조운과 아영 이외에
두어 사람이 보았을 뿐이었다. 화정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기다리는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천천히 앉으면서 인사했다.
왕윤이 먼저 서두를 꺼냈다.
"소저, 이 왕 아무개는 소저의 말대로 주변을 살폈소. 그리고
그 방도가 될 만한 아름다움을 찾아 이리로 왔으니, 방법을
제대로 인도해주시오."
화정은 초선을 힐끗 보았다. 어느새 얼굴에 쓴 면사포를
벗어낸 초선은 오늘은 화장까지 곱게 하고 온 참이었다. 확실히,
여자란 화장을 하면 얼굴이 변하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조금
어색한 생김새지만, 맨 얼굴로 온 그전에 비하면 훨씬 뛰어난
얼굴이었다. 여하튼 화정은 시치미를 뚝 뗐다.
"미천한 것이 멋모르고 한마디 지껄여 감히 사도를 혼란스럽게
한 죄, 백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아니오."
화정의 속보이는 겸양에도 왕윤은 심각하게 손을 내저었다.
"내, 딸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이 아이도 그대가 인도해 줌을
믿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구려. 그렇다면, 부디, 그
흉폭하고 늙은 돼지의 목을 딸 방도를 일러주오. 이 아이도,
왕 아무개도 목숨을 버릴 각오는 진작에 되어있소."
강직하면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왕윤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화정은 초선을 힐끗 곁눈질했다. 초선은 면상에 약간
창백하고 슬픈 기운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왕윤이 말을 끝내자,
자신은 개의치 말아달라는 듯 시선에 은근한 미소와 호감을 담아
보냈다. 그런 화정과 초선의 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윤은
한마디 더 했다.
"돼지를 지키는 젊은 이리만 구슬려 돼지를 물어 죽이게 한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오. 이야말로 연환계(連環計)지. 허나, 어찌하면
들키지 않고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영특한 소저의 소견을 청하기
위해 밤중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소."
참, 이 시대 사람들은 말도 쓸데없는 것을 섞어 길게 끌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화정은 `그 두 사람을 연환계에 걸리게
하려는데, 안전한 방법을 좀 얘기해주시오.' 정도로만 이야기해도
될 거라고, 속으로 왕윤의 말을 수정하면서도, 언짢은 기색 한
가닥 내비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부러
말을 하려는 듯, 안 하려는 듯하는 애매한 태도를 택했다.
"글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만......"
화정의 머뭇거림에 왕윤은 애가 탄 듯했다. 서둘러 화정을
재촉했으나 화정은 또다시 뜸을 들어보였다.
"워낙에 큰 일이 되어놔서......"
사실 말해도 될까, 하는 망설임도 정말로 마음 속에 자리잡고는
있었다. 자신이 왕윤에게 그대로 이야기해 준다면, 역사는
정해진대로 흘러가게 된다. 또한, 마음 속으로는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하는 의심도 한가닥 일고 있었다. 초선이 꽤
예쁘기는 하지만, 거물 둘을 옭아맬 정도의 매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왕윤이 초조해 하는 모습을 보던 화정은,
뭔가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치고 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
현재, 자신들은 이틀 정도 묵을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반
숙소는 다른 사람들도 쉽게 드나들 수 있기에 아무리 신분을
위장해도 점을 봐달라는 이들이 끊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왕윤은, 명색이 조정 중신이다. 손님 셋을 이틀간
머무르게 할 정도의 재력은 충분히 있을 것이며,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도 없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화정은 흥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화정이 아무런 말을 않자,
왕윤은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강직하기로
유명한 왕윤이, 소매에서 대략 30냥 어치는 될 만한 커다란
금덩어리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엇입니까."
"넣어두게. 나머지 사례는 내 이후에 얼마든지 하지."
일이 되려고 하는 모양이다. 화정은 속으로 만세를 부르면서도,
언짢은 표정으로 소매를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계획대로 왕윤은 다급하게 화정을 앉게 붙들었다.
"왜 이러나!"
"어르신이야말로 이 무슨 짓이십니까! 이 내가, 기껏 금덩이가
아쉬워 나라를 구할 계책을 아낀다 생각하시었습니까!"
왕윤은 그녀가 역시 예사 점쟁이가 아니라고 알아챈 모양이었다.
이내, 그 형형한 눈빛을 죽이고는 흐느끼더니, 벌떡 일어나
화정의 앞에 엎드려 절을 한다. 초선도 초선대로 놀랐으나
누구보다 놀란 것은 화정이었다. 경로사상을 모르는 화정은
절대 아니다. 화정은 얼른 왕윤을 붙들었다.
"어르신, 무엇하십니까! 한갓 천한 것에게 절이라니!"
"예사 점쟁이가 아님을 눈치챘소이다......소저도 힘들겠지만
부디, 역적 동가놈의 폭정(暴政)아래 고통받는 사람들을 헤아려
주오......이 왕윤, 소저가 돕는다면 이 늙은 몸의 가죽을
벗겨내고 터럭을 모조리 뽑는다 하여도 기꺼이 하겠소!"
이만하면 된 셈이다. 화정은 흡족했지만 겉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갑자기, 허락이 떨어지면 의심할 것 같아서, 수초간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했다. 왕윤과 초선은 초조하게 화정을 보고
있었다. 화정은 응낙했다.
"좋습니다......그렇다면 일단 제 이야기를 잘 들어두시고,
제 요구 또한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들어주셔야 합니다."
화정의 말에 왕윤은 목이 떨어질 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여포를 먼저 초대하여 초선을 보이고, 여포에게
길일(吉日)을 택하여 초선을 시집보내겠다 이르십시오.
다음에는 동탁을 불러 연회를 열고 동탁에게 초선을
보이십시오. 그리고 동탁에게는 그날로 초선을 데려가게
하는 겁니다."
왕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림은 물론, 초선도 하얀 얼굴이
창백해지다 못해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왕윤이 탄식했다.
"허나 그리 좋은 일이 못되오! 그렇다면 이 왕 아무개는
큰 일을 하기도 전에 여씨 종놈에게 목과 몸뚱이가 분리되고
말 것이오!"
"아닙니다. 일단 차분히 듣고 판단하소서."
화정의 냉정을 담은 목소리에, 왕윤은 다시 가르침을 청했다.
화정은 약간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분명 여포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어르신에게 달려와 행패를
부릴 것이옵니다. 그러면 어르신은 놀란 척 하시며 이리
말씀하시옵소서. `오해가 있었구려. 내 동태사께 초선을 보이고
여 장군의 배필이 되기로 약조한 아이라 이르자 태사께서
한동안 그 아이를 보더니 나의 며느리 될 아이이니 내가 데려가서
좋은 날 여포와 짝지어 주겠노라, 하시어 보낸 것이외다. 그러니
여 장군은 태사의 명을 기다리시게.' 하고 말입니다."
화정의 말을 듣자 왕윤은 아까의 탄식은 어느새 잊었는지,
무릎을 탁 치며 찬성했다.
"실로 놀라운 계책이오! 그대의 지혜는 장자방(張子房)*에
견줄 만하오! 그렇다면, 순진한 여가 놈은 믿고 돌아갈
것이외다. 동탁같이 음흉한 놈이 초선을 그대로 둘 리
없고.....다음은 알겠구려!"
화정은 왕윤이 기뻐하는 모양을 보고는, 조금은 죄책감을
안고 초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초선은 슬픈 빛을 안면에
띄우고 있었지만, 의젓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화정은 조금
가엾다는 동정심을 표시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초선님의 역할이 매우 중합니다. 동탁의 총애를 잃지 않되,
여포의 연정을 끊임없이 불러야 합니다. 여포에게는 왕윤
어르신과 입을 맞추어서, 여장군과 맺어질 날을 기다렸는데
동탁이란 놈에게 능욕을 당한 것처럼, 그런 점을 강조하여
여포의 분노를 부채질하세요. 그리되면 자연히 두 사람은
서로 원수지간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왕윤은 화정의 말에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화정은 차가운 표정을 바꾸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한참동안 기분 좋아하던 왕윤이, 그런데
갑자기 초선을 보더니 표정이 사그라들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소저의 현명한 계책이 날카롭다하나......가만히 보니
초선이가 미녀들에게 둘러싸이는 동탁을 꼬여내고, 목석같은
곳이 있는 여가놈을 꼬여내기에는 미색이 부족한 것
같소이다......"
찬성이에요. 나도 지금 그 역사적 연환계가 제대로 되려나
의심이 가고 있다고요, 하는 말을, 화정은 속으로 꿀꺽 삼켰다.
왕윤이 계속해서 탄식했다.
"이 아이가......소저의 반 정도만 따르는 미모였어도
걱정하지 않았을 터인데......"
`어라, 나와 보는 기준이 크게 다르지는 않나? 아무튼
기분이 나쁘군. 나더러 은근히 나서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화정은 언짢은 기색을 감추고 왕윤을 향해,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권했다.
"그래서 제가 특히 권하려는 것입니다. 금덩이 같은 것보다,
제가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연환계의 성취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요구를 듣는 것이야 어렵잖으나, 초선의 자색(姿色)이
부족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소."
완전히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제가 본디, 소란스러움을 싫어하는지라 점쟁이 노릇을 관두려
하는데 숙소만 옮긴다면 많은 사람들이 귀찮게 할 걱정이
있사옵니다. 허나 저희 일행은 이틀, 장안에 머물러야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으니 왕윤 어르신의 거처에 실례를 범할까 합니다."
"그야 어렵지 않소. 귀찮은 사람을 막아주는 일도 또한 쉽소.
허나, 그것이 연환계의 성공과 어떤 관계가 있소이까?"
역시 강직하기로 유명한 왕윤이었다. 이 상황에도 끝까지
연환계가 힘들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화정은 왕윤만은
삼국지에 묘사된 그대로의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왕윤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해 보였다.
"저와 제가 함께 동행하고 있는 친구를 초선님의 여시종으로
들여주시옵소서. 그렇다면 저희가 초선님의 미색을 더 높일
대책을 강구하겠사옵니다."
여자란 꾸미는 것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모를 거야, 하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왕윤은, 화정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이는
모양이었다. 그 형형하고 곧은 눈빛을 강하게 하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부리는 원귀(寃鬼)라도 시켜 초선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심이오?"
화정은 문득, 이전에 사융에게 붙들려 갈 때 군사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무녀들은 귀신을 시켜 얼굴을 아름답게 고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화정이 그런 재주가 있을 턱이 없었다.
속으로 현량에게 물었으나 현량도, 자신은 지식을 관장하는 영수일
뿐 그런 능력은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었다. 화정은
아영의 솜씨를 조금 믿어야겠다는 막막한 심정으로 왕윤에게
답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 역적의 눈에 꼭 들게 할 수는 있습니다."
화정의 미적지근한 답변도, 왕윤은 그저 기뻤던 것 같았다.
왕윤은 고개를 흔쾌히 끄덕이면서 당장 짐을 싸라고 일렀다. 겨우
해결되고, 덕분에 숙소 문제도 잘 되겠다, 싶었던 화정이 문을 열고
조운과 아영을 올라오라고 이르는데, 그때,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창문으로 누군가가 급하게 들어온 것이었다.
초선과 왕윤이 기겁을 했고 조운과 아영은 부리나케 올라왔다.
혹시 주변이 소란스러울까 싶어 화정은, 달려온 주막 주인에게
돈푼을 쥐어주고는 밖으로 내쫓은 뒤, 문을 닫아걸었다. 창으로
들어온 사람은 한 여자와 남자였다. 남자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고 여자의 어깨에 부축되어 있었다. 조운이
남자를 알아보았다.
"영각!"
아영도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화정은 남자를 떠매고 있는
것이 아현임을 알았다. 왕윤도 뭔가 사정이 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역시, 노련한 대신답게 일행에게 권했다.
"일단 서둘러서, 이 왕 아무개의 집으로 가도록 합시다.
바깥에 가마를 대기시켰으니 이 다친 사람을 태우는 것이
좋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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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장자방(張子房): 장량張良. 자방은 장량의 字자이다.
한 고조 유방의 모사로서, 책략의 천재였다 일컬어지고
있다*작가주
과연 왕윤은 소위 말하는 귀족층이라 그런지, 손님접대도
차원이 달랐다. 아영은 자신이 쓸 방이라며 시녀가 보여준
곳을 보고 입을 떠억, 하니 벌렸을 뿐이었다. 이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특급 호텔의 특실을 생각나게 했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가구들은, 꽤 복잡하고 화려하게
조각이 되어있었다. 향나무를 쓴 모양이었다. 오래 맡아도
부담이 없을 것 같은, 아주 옅은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정교하게 깎은 침상은 푹신해 보였으며, 주변에는 안이
훤하게 비치는, 아름다운 비단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탁상
위에는 멋들어진 분재(盆栽)가 놓여있었다. 뿐이랴.
주변에는 번쩍거리는 구슬로 장식된, 화려한 촛대도 있었는데,
이 촛대들은 모두 은으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품위있는 방이었다. 그저 입이 벌어져서 멍하니
서 있는데, 화려한 복장 - 시녀이기에 크게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옷만 봐온 아영에게는 충분히 화려했다 -을
한 여자 두 명이 머리도 진주 구슬로 곱게 틀어올린 채 나타나
아영에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이 아닌가.
"미천한 것들은 향라(香羅), 춘안(春安)이라 하옵니다. 귀한
손님의 시중을 들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의 시녀 둘은 키가 작았고, 평범한
얼굴이었다. 아영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시중이라니......괘, 괜찮아요. 저 혼자 있어도
됩니다."
아영의 말에 두 시녀는 머뭇거리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내 고개를 공손하게 숙여보이는 것이었다.
"그럼, 청하실 것이 있으면 불러주소서. 문전(門前)에
시립하고 있겠사옵니다."
생긴 것은 별로인데, 태도는 정말 나긋나긋하기 그지없었다.
그 둘이 물러가자, 아영은 한숨을 내쉬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한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정말.......이 물건들 중 하나만 가져가도 엄청나게
비싸게 받아먹겠네."
그렇게 투덜거리는데,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덜컹, 하고 열리면서 아까의 향라, 춘안이라던 그 두
시녀가 들어왔다. 긴장한 아영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시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얼떨결에 아영은 같이
고개를 숙이면서 두 시녀를 힐끗 보았으나, 두 사람은 눈길
한번 안 들고 계속해서 고개를 숙인 채, 나긋나긋한 태도에
어울리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어조로 권하는 것이다.
"초선아가씨께서 소저를 보고자 청하십니다. 서둘러
준비하시고 가시옵소서."
`초선? 아, 아까 그 여자?'
아영은 초선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자신들을 데리고 온
왕윤과, 그 곁의 여자를 떠올렸다. 예쁘장한 곳은 있지만
평범한 얼굴이라고, 면사포를 차라리 벗은 것을 안 봤다면
실망은 안 했을 텐데, 하면서 중얼거리는 아영의 곁에서
화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의 눈은 조금 다르다는
것이었다. 함께 쫓아가던 아현은 초선을 보더니 `어머, 미인인걸.'
이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아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화정을 엄청난 미인으로 치기에, 이곳의 미(美)의 기준은 의외로
현대시대와 같은가보다, 하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자신은
못생겼다고 영각이 늘상 놀려대는 통에, `어, 나도 이천
년대에서는 주변에서 그나마, 보통보다는 조금 예쁘다고
했었는데.' 하고 궁금해하기는 했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
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그 초선이란 여자, 자신이 보기에는 평범했고, 화정도
아영의 말에 동조하는 눈치였지만, 아현이나 힐끗 곁눈질하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미인이라고 보는 것 같았다. 아영은 문득,
묻기로 마음먹었다.
"저어,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이런 말, 너무
실례라는 것 잘 알지만 그래도......저어, 궁금해서......"
아영이 머뭇거리며 묻자, 두 시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공손하게 마주 받았다.
"괜찮습니다."
아영은 마음 속으로 또한번, 물어볼까 말까, 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궁금한 것을 어쩌느냔 말이야!
"저, 그런데 말여요......이 집에 계시는 그......초선 아가씨
말씀인데요......음.......저기, 향라님과 춘안님께서
보시기엔......어떠세요?"
그 말에, 향라라고 소개한 얼굴이 검고 눈이 작은 시녀가
빙긋이 웃는다.
"초선 아가씨요? 아......미인......이시죠. 게다가 거문고
타기와 가창(歌唱)은 따를 분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시답니다."
`역시......'
아영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띄엄띄엄하게
미인이라고 말하고, 거문고 타기와 가창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이 시녀도 초선이 그리 미인이라고 썩 찬성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든......쳇, 이천 년대로 가봐라, 저런
여자보다는 내가 백 배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텐데.
나는 왜 내가 끝내주는 미인이라고 보는 시대로 떨어지지 않은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던 아영은 곁에서 조금 걸걸한 음성이
들리자 다시 얼굴을 들었다.
"다만......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왕윤 어르신께서는 요즘,
초선 아가씨가 평범한 미인인 것을 걱정하고 계시던데요.
이상하죠......경국지색은 아니시지만, 단장만 하시면 그나마
미인이신데 무얼 더 바라고 왕 사도께서 근심하시는......."
겁없이 왕윤에 대해 떠들던 춘안의 옆구리를, 조심성
있어보이는 향라가 팔꿈치로 살짝 치자, 춘안도 문득 깨달았는지
도톰한 입술을 닫았다. 아영은 무슨 뜻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조금은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방금 전의 춘안이
말했듯, 초선은 보통보다 조금 예쁜 얼굴이지만, 단장하면 틀려지는
여자라는 뜻이다.
결국, 이곳 사람들도 초선이 그다지 미인으로는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꾸밈에 따라 미인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여자인
것이다. 아영은 아직도 알쏭달쏭한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향라가
아영에게 하는 말이 그 생각을 깨뜨렸다.
"아가씨, 허니, 저희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단장을 좀 하셔야지요."
단장이라는 말에 아영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네에? 단장......이요?"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춘안이 장난스럽게 킥킥, 웃었다.
"소저는 초선 아가씨에 대해 묻고 계신 것을 보니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으신 분 같은데 초선 아가씨를 대하러 가실 때,
부끄러운 것이 좋으세요? 예쁘게 꾸미고 가셔야 덜
부끄러우시죠."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어찌 들으면 `넌 초선보다 딸리니까
꾸미기라도 해야지.' 하는 식이다. 아영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자, 향라가 춘안을 꾸짖고 나섰다.
"춘안, 그만 입방정 떨고 가서 머리장식하고 옷을 좀 내와."
향라의 따사로운 눈길에 춘안은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사라졌다.
아영은 아직도 기분이 잔뜩 상한 채로 고개를 휙 돌렸다.
향라가 달랬다.
"소저, 신경쓰지 마세요. 저 아이가 아직 제멋대로랍니다.
소저도 꾸미시면 정말 달라질 거여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걱정마세요. 소저의 친구분도 함께 부름을 받았답니다."
아영은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화정이도요?"
향라는 입가에 싱긋, 미소를 담고 긍정했다. 아영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세상에, 산
넘어 산이라더니, 온통 비교 당해야 할 판이다. 초선도 꾸미면
미인이라는 판에 화정까지 함께 있다면......?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비교 당해야하는 아영으로서는 도저히 살 맛이 안
나게 된다.
"초선 아가씨께서 부르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에요. 소저의
다른 친구분들과 함께, 뵙고 싶어하시기 때문이에요."
아영은 그다지 좋지는 않은 기분으로 고개만 건성으로 끄덕거렸다.
*******
겨우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안색이 창백했다.
조운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왕윤이 초선, 화정, 아영과
함께 들어오자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좋지를
않아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를 않는 것 같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가늘게 신음을 내뱉었다. 왕윤이 그렇게, 무리해서 일어나려는
영각을 저지시켰다.
"일어날 것 없네. 몸도 좋지 않은데 무엇하러 예를 굳이
차리려는가."
"그래요, 영형. 사도 어르신께서 윤허해 주시니 편히 해요."
곁에서 아현이, 그 괄괄한 생김새와 안 어울리게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영각은 천천히, 왕윤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다시
누웠다. 왕윤이 그런 영각의 곁에 다가가면서, 조운에게 물었다.
"영각이라 했는가. 자네들 친우라 했지......? 흐음,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건가?"
왕윤의 말에 영각을 곁눈질해본 아영은, 정말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어느 정도 치료를 해서 조금 나았지만, 처음에 실려왔을 때는
정말로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다쳐있었다.
이마와 입, 코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한쪽
팔도 출혈이 심했다. 게다가 옆구리는 뭔가 둔탁한 것으로
심하게 얻어맞은 듯, 참혹하게 터져 있었고 다리도 많이 다쳐서
걷지 못하고 있었다.
"조자룡, 그대와 각별한 사이이니 묻겠네만, 이 영각이란
청년은 무예실력이 낮은가?"
이 정도로 당했기에, 궁금해진 것이리라. 조운은 묵묵히
영각을 내려다보다가, 낮은 음성으로 그 물음에 부정했다.
"......아닙니다. 꽤 이름난 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이 정도로
다칠 일은 없던 사냅니다."
친우라는 말이 맞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지는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왕윤은 아랑곳 않고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 말이 옳다면......상당한 실력자에게 당한
모양이군.......거기, 의매라고 하셨으니 묻겠소만, 그대는
영각을 부축해 왔으니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겠구먼.......?"
설명해달라는 눈치였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그 정도는 다
알아챌 것이다. 멍하니, 영각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현이 급하게
포권하면서 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제 의형이 서신을 보내서, 급히 달려왔습니다.
그러니 이미 의형은 도망치고 있었고......자세한 것을 물을
틈도 없이 부축하여서 의형이 가리키는 곳으로 왔던 겁니다."
조리는 없었지만 아현의 말에는, 거짓이 아니라고 믿게 하는
솔직함이 담겨있었다. 왕윤은 그런 아현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만 내쉬었다. 아영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텐데 왜 그러는 거지?' 하고 생각하고는 결국
앞으로 약간 나섰다.
"저, 그렇다면 영각이 답해주면 되잖아요?"
"영형은 지금 너무나 힘든 상태인지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요."
아영의 대책없는 재촉에 아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결국 할 말이 없어진 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하기는 그렇게 말
많던 영각이 모든 이들이 이렇게 궁금해하는 것을 보면서 아무
소리도 안 했을 리가 없었다. 왕윤이 한숨섞인 탄식을 했다.
"그 산에서 항상 변사체가 나온다기에.......관군이 가도 늘
전멸 당하는 판에 이 청년이 살아 나왔다 해서 뭔가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는데......"
왕윤의 탄식을 조운이 조용한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일단, 황호의 병세가 나아지도록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상태에서 재촉한다면 무리만 생깁니다."
조운의 차분한 말에 왕윤도 동조하기는 했지만, 못내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아직도 미련을 담고 영각을 쳐다보던
왕윤은 그제야 이상한 점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거칠게
돌리면서 쭉 늘어서 있는 초선과 화정, 아영을 돌아보았다.
"그런데......무슨 일로 소저들과 초선은 이리로 왔던 게요?"
화정이 초선을 쳐다보았다. 아영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초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들이 이리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초선이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하지만
뭔가 있나보다 싶어서 아영이나 화정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초선이 왕윤에게 공손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그저, 이 소저들도 병자와 친분이 있으시니
궁금해하시는 듯하여......제가 모시고 왔사옵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초선이 대충 얼버무리고는 왕윤에게 하직 인사라도 올리려는지
양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데, 짧은
한마디가 그녀가 물러가려는 것을 막았다.
"잠깐."
그 말에 초선은 물론 화정과 아영도 시선을 집중시켰다.
조운은 왕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입을 열었다.
"황호가......쉽게 당할 사람은 아닙니다.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있으니 홀로 단독행동을 하는 것을 금해주소서. 특히, 이 못난
운(雲)의 생각으로는, 무예를 모르시는 소저들은 한 침소에 모여
주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운의 생각에, 왕윤도 잠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미간에
깊게 박힌 주름은 왕윤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윤은 고개를 천천히 들면서, 약간 튀어나온 턱을 치켜들었다.
그런 왕윤에게서는 오랫동안 조정의 원로 대신으로서 지켜온,
어떤 기품이나 위엄 같은 것이 풍겨왔다.
아영은 마음 속으로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화정이나
초선과 이 이상 함께 행동하는 것이 좀 싫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단순히 비교 당하기 싫다는 것이었지만,
여하튼 그녀들과 함께 있기는 싫었다. 그런 아영의 생각을
모르는 왕윤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조운을 곁눈질했다. 그러더니 아영이 불만을 표시할 틈도 없이,
시원스럽게 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군. 특히 꽃 같은 여인들에게는 특히 위험할 것이외다.
다행히 이 윤(允)이 빈곤하지는 아니하여, 침상이 네 개나
있는 큰방이 하나 있으니 초선과 두 소저는 그 곳에서 머무시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렇군, 아현 소저도 그곳에 계심이 어떻소?
아현 소저는 무예를 아는 사람인 듯하니, 더 묘안이 아니겠소?"
그렇기는 하다. 무예를 잘 아는 것같이 보이는 아현이 함께
있다면 더더욱 위험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속으로
`대신이라더니 똑똑하기는 하네.' 하고 약간의 빈정거림과
칭찬을 섞으면서 아영은 아현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전을 위해서도 아현이 함께 있어주면 좋았겠지만, 아영이
아현에게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에는 또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나마, 화정과 초선 사이에 껴 있는 아영의 기구한 팔자를
조금이나마 나눌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영의 그런
간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아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왕윤의
제안을 기각시켰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제 의형의 곁을 지킵니까.
지엄하신 어르신의 거처라 감히 사악한 것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나, 그래도 의매로서 마음이 놓이지를 않사옵니다.
윤허하소서."
조금 불만이 생겨 입을 약간 내밀고 있던 아영은, 아현의 말에
다시 입을 집어넣었다. 눈을 내리깔면서 다시 영각을 내려다보는
아현은 정말 영각을 의형으로서 진심으로 존중하는 것 같았다.
자신도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오느라 적잖이 피로가 쌓였을
텐데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무안한 얼굴로 서 있던 왕윤은 이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왕모가 무얼 모르고 의형을 생각하는 누이의 마음을
무시하려 했구려. 좋소, 뜻대로 하시오."
"그럼, 두 소저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왕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초선이 공손히 아뢰었다. 아현을
뚫어지고 보고있던 왕윤은 손을 가벼이 저어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초선은 화정과 아영을 돌아보았고, 세 사람은 그다지
즐겁지는 않은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각자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을 것이었지만, 특히 아영은 왠지
화정이 이전에 당부해 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즐겁지 않았다.
화정은 오는 길에, 아영을 붙들고 이미 아영이 해야할 것을
몇 가지만 줄줄이 말했었다. 바느질과 화장하는 법을 잘
아느냐고 했고, 그런 것에는 사실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던
입장인 아영은 얼떨결에 긍정했다. 화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왕윤의 거처에 가면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다른 것도 아니고......바느질과
화장에 대해 물었지?'
*******
마치 목석과 대화하는 느낌으로, 한참 화정과 마주 앉아서
그녀에게 이것저것, 내용 없는 질문을 하던 초선은 더 이상
질문을 길게 해 보았자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무료해진
초선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다가 홀로 고집스럽게 뭔가를
뒤적거리는 아영을 발견했다.
조금 떨어져 앉은 아영이 여태껏 한마디도 않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제야 미안한 마음으로, 초선은 시선을 틀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뭔지 모를 책만
뒤적거리고 있는 아영의 태도에는 무료함과 조용한 신경질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음에 대한, 무언의 저항 비슷한 것이었을
듯했다.
사람이란, 셋이란 숫자로 있을 시에는 조심해야 한다. 그
셋이란 수는, 둘만 너무 가까워지면 남은 하나가 지나친
소외감을 느끼면서 조화가 깨지기에, 유지하기가 힘들고
불안한 수이다. 사람들은 셋을 참으로 좋아한다. 무리 지을
때에도 셋씩 지내는 일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셋이란 숫자가, 모이기 쉬운 만큼 얼마나
깨지기도 쉬운 숫자인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초선은 그런
말들을 속으로 읊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는, 자신과
화정, 아영, 이 셋 중에서 소외감을 느껴야 하는 이는 본래
초선이다.
좀더 오랜 기간 얼굴을 맞대어 왔으며 함께 동행해 왔으니
화정과 아영은 당연히 친밀해야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은
서로간에 벽을 쌓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도리어 새로
끼어드는 격이 된 초선이, 본래 화정과 함께 있던 아영을
밀어냈으니 이야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다.
하기는, 조금 전에도 초선이 화정에게 특별히 친하게 대접받은
것은 아니다. 저렇게 차갑고 주변에 방어막을 온통 치고 있는
사람이니 분명 아영도 화정에게 크게 다가서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 추리 끝에 아영이 왠지 가엾어진 초선은, 그녀에게 말을
걸려다가 망설이면서 화정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신경질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저것을 방해해야 하는지, 그냥 두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선의 뜻을 간파했는지, 화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고 낮게 답했다.
"그냥 두세요."
외모도 그렇지만 말투나 하는 행동이 상당히 찬 여자였다.
점을 볼 당시에는 외모와 다르게 조금 다정한 곳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로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자신의 착각
같았다. 애당초, 자신들의 친우라던 그......영각이란 남자가
잔뜩 다쳐 왔을 때, 맞은 편에 있는 아영은 꽤나 걱정을 하면서
아현이란 여자에게 상태를 묻고 또 물었건만, 화정은 조용히,
끼어들지 않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있었다.
보다못한 초선이 `걱정 안 되시나요?' 라고 물었지만, 화정은
무표정하게 `제가 지금 안달한다고 바뀔 것이 있나요?' 라고
받았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옳은 말이기는 하다. 의술에
통달한 의사도 아니고 원인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닌 이상,
안달해보았자 별로 득이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세상사는 것이 모두 이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잖은가. 적어도 동료인데, 근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궁금해하기라도 해야 한다. 허나 화정은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고 질문 한마디 내놓지 않고는 묵묵히 앉아있었다.
초선의 눈에 그 태도는, 너무 무관심하다고 읽어졌다.
`너무 성격이 달라......이 두 사람.......별로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초선은 그렇게 판단을 내리면서 검지를 입술 가까이로 가져간
채 아영과 화정을 살폈다. 지금 이렇게 살펴보아도 판이하게
다르다. 조금 온화하고 생글생글한 인상을 지닌데다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아영.
도도한 기품이 흐르며 청초한 얼음꽃 같으며, 정말로 감정의
표현이 보이지 않는 화정. 두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갔었다. 화정이 초반에, 이 왕윤의 저택으로 함께
옮겨올 사람이라고 하면서 조운과 아영을 소개했다.
그 때, 초선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이었다. 조운. 이
남자는 어찌보면 화정과 비슷한 점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이런 사람이라면 하기는, 유소저와 함께 다니는
사람으로 손색이 없어.' 라고 생각했지만, 곁에 서서 인사하던
아영을 대할 때는, 적잖은 충격 비슷한 것을 받았다.
생긋. 하고 웃으면서 인사하는 아영은, 절세 미인인 유화정과
다르게 좀 못생긴 편이었다. 게다가 인상도 전혀 틀렸다.
오는 내내 살폈지만, 희노애락이 뚜렷하게 얼굴에 쓰여진다.
`하지만......미모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이 말해질 수는 없어.
도리어 인상은......'
유소저보다 아영소저 쪽이 더 좋았는걸, 하는 말을 목으로
꿀꺽 삼키면서, 초선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켜 보기로 했다.
아영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아영......님."
초선의 말에 아영이 책에서 눈길을 떼고 고개를 들었으나,
그녀의 낯에는 조금 언짢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퉁명스럽게
초선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말씀하세요."
조금 쏘는 듯한 그 말투에, 초선은 속으로 미소지으면서
공손하게 물었다.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읽고 계신지요?"
초선의 말에 아영은 입을 다물더니 책을 탁, 하고 덮었다.
화가 나거나 신경질적이라기보다, 뭔가 쑥스러워하는 것 같이
보이는 행동이었다. 무엇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면서 초선은 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영은
헛기침을 옅게 하더니 책을 뒤로 밀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있기에 읽었어요.......참, 저는
이제 피곤하니까 이만......자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지요?"
차분하고 말씨가 잡혀있는 화정에 비해 말투가 자유분방했다.
물론 성(姓)도 없으니 귀족집 출신은 아닐 것이다. 초선은
피식 웃으면서 아영에게 상냥하게 권했다.
"피곤하시다니, 그렇다면 어서 주무세요. 저도 유년(幼年)
시절에는 매일같이 늦게 잤기 때문에 피곤할 때 못 자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안답니다."
자신 같았으면 그저 넘기는 말로하고 볼일을 보러 갔을 텐데,
이 아영이란 아가씨는 호기심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여지껏
유지해온 무심하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단박에 버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내 다가앉는 것이었다.
"네에? 유년 시절.....에요? 무엇 때문에요? 초선님은
귀족인데......?"
뜻밖의 관심과 질문에,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초선은 옷깃을
여미면서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 아영이란 여자는
초선이 왕윤의 집에서 대접받고 지내는 것을 보면서 초선
자신이 왕윤의 딸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귀족이라니요.......저는 이 집의 가기(歌妓)에 불과한
미천한 신분입니다. 그러니 제게도 성씨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어릴 적에는 노래를 팔면서 떠돌았기에 잠을 제대로
못 잤었답니다."
초선의 말에 아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초선의 옆으로 눈을
돌려 화정을 보는 것이었다. 초선은 아영이 무엇 때문에 화정을
보는 지 이해할 수 없어서 덩달아 시선을 돌려 화정에게로 꽂았다.
잠시 홀로 생각에 잠겨있던 화정은,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일시에 쏠려오자, 고개를 들면서 천천히 물었다.
"가기셨다니, 그렇다면 초선님은 노래와 춤에 굉장히
뛰어나시겠군요. 오죽 뛰어나셨으면 왕윤 어르신의 개인 가기로
꼽히셨겠어요."
초선은 화정이 뜻밖에, 조금 화제에서 벗어난 질문을 하는 것
같아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건너편의 아영이 고개를 옅게
끄덕끄덕거리는 것을 보면서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 사실
화정은 아영이 가기의 말뜻을 모른다는 것을 파악하고, 무안을
피하게 해 주려고 이렇게 수를 쓴 것이었지만 화정의 영악하고
깜찍한 수를 간파할 만큼 초선이 사람 사이의 수단에 능한 편은
아니었다 - 화정의 말에 대답했다.
"뛰어나다니요......보잘 것 없는 재주에 불과한데 사도
어르신께서 워낙에 너그러이 보아 주신 게지요."
아영은 초선의 말에 눈알을 굴리더니 슬며시 물었다.
"저어 따님이 아니시라면......그렇다면 부모되시는 분들과
언제 헤어지셨나요?"
아영은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초선이 부모에
대한 질문을 듣고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속눈썹을 내리깔자
아영은 황급히 끼어들었다.
"아니 대답하기 싫으시다면 그냥 넘기......"
"아닙니다. 그럴 것도 없어요......저희 어머님은 저를 낳다가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고......아버님은 저를 술집에 파셨어요.
제가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서 팔린 것을 가엾게 여긴 술집 주인은
제게 노래와 춤을 아주 어릴 적부터 가르쳤지요.
그래서 전 술집에서 손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푼돈을 모았습니다. 주인은 고맙게도 그 푼돈을 제게 고스란히
모아 제게 주셨고요. 좀더 나이가 들자 귀족들 연회에 가끔 불려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왕윤 어르신께서
그때 거두어 주신 거랍니다."
초선의 말에 아영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초선은 덕분에
유년 시절이 떠올라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랬다. 운 좋게 마음
좋은 주인을 만나 험한 꼴은 당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사내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듯하는, 저 순진한 낯을 지닌
처녀에게는 말하기 힘들었다. 사내들의 침상에서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고 눈물을 삼켜왔는지......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저 순진해 보이는 처녀와, 곁에 있는 화정 역시 멸시를 보낼
것만 같았다.
아영은 초선의 얼굴에서, 어떤 고민과 슬픔 같은 것을 읽었던
모양이다. 이내 무관심하던 태도를 버리고 바짝 다가앉았다.
"초선님께선 많이 힘들게 살아오셨군요. 저는 그저 왕윤님의
딸이라 그런 사정이 있으셨다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전 어린
시절부터 바느질만 열심히 했었어요."
생긋, 사람좋게 웃으면서 한마디 건네는 아영을 보자, 초선은
마음이 풀어짐을 느꼈다. 이 여자, 생김새는 좀 못생기고
평범하지만, 생긋거리는 웃음만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곳이
있다. 천성적으로 참 착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초선은 자신도 모르게 아영에 대해 호감이 자라고 있음을
알아챘다.
"바느질이라니요?"
초선의 반문에 아영은 자신이 숨기고 있던 책을 곁으로 치우면서,
방긋거리는 낯으로 대답해주었다.
"저는, 어머니는 아니지만 아버지를 잃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제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고 둘러대셨지만......
자연히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는......제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어디론가......으음, 도망가셨나봐요."
아영은 조금 쑥스러운지 혀를 약간 빼물면서 히죽,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외로움과 섭섭함 같은 것이 흘렀지만 원망 같은
것은 전혀 흐르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았다면 침울하게
이야기했을 텐데 웃음으로 그 슬픔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초선은 아영이,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눈치채고는
아영의 조금 가무잡잡한 손을 부드럽게 다잡았다. 아영은 초선이
자신의 손을 잡자 그제야 눈가에 눈물을 글썽거리고는, 이윽고 그
눈물을 떨구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래도......난 아버지가 밉지는 않았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서 한마디 원망도 않으셨거든요. 어머니는 다른 것은 할 줄
몰랐지만 옷을 굉장히 잘 만드셨어요. 그래서 옷가게에서 말하는
대로 옷을 짓는 것으로 하루하루 벌어서 저와 동생을 길러주셨어요.
곁에서 거들다보니......밥 짓는 것하고 바느질은 저도 박사가
되었거든요. 하지만 저와 제 어머니는 남동생은 늘 공부하게
했었어요."
초선은 그런 아영의 손을 말없이 쓰다듬었다. 그렇다. 집안이란,
자고로 남자가 관직에 나갈 때까지는 여자들이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었다.
"저는 고등학교까지만 다니고 대학교는 안 갈 생각이었고.......
그리고 돈을 벌어서 남동생은 대학에 보내고 박사로 만들려고
했어요. 남동생은 저와 달라서 정말로 똑똑한 아이였거든요.
주변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상습적으로 듣고 살았어요."
아영의 말에 초선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공부하는 곳이라는 뜻이지만 초선은 학업
기관 중 고등학교나 대학교라는 곳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자가 난데없이 웬 학업 기관을 다녔다는 걸까?
그 고등학교가 얼마나 학업 수준이 낮았기에 여자도 다닐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초선으로서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서당 이름이 고등학교였나? 아영의 말뜻을 알 수
없어, 그리고 아영의 흐느낌을 끊기도 난처해서, 화정을 돌아보자,
말없이 아영의 이야기를 듣던 화정이 덧붙여주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라고 부르는 곳이 있었대요. 아영의 집은
넉넉지 않아서 유명한 곳에서 공부를 시킬 수 없었거든요.
고등학교는 서당 이름이고 대학교는 꽤 높은 수준의
학업기관이었다던데요."
화정이 그렇게 둘러대자 앞에서 훌쩍이던 아영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정작 당사자인 아영조차 화정의 말이 조금 이상했는
모양이다. 아직도 반 정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초선이 두 여자를 번갈아 살피는데, 이제는 사태를 파악한 듯한
아영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요. 게다가 우리 집은 저쪽......먼......음,
시골이었으니까 교육기관들도 알려진 곳이 있을 리 없었어요.
그나마 그 두 군데가 가장......나았죠. 여하튼.......제
남동생은......."
잠시나마 활기가 담겼던 아영의 얼굴에, 남동생이란 단어가
등장하면서 동시에 슬픔이 떠올랐다. 아영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똑똑하던 아이인데도.......늘상 저녁만 되면 문가에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아버지와
놀고 싶었다고......."
그 이상 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 하얀 빛이 모이는 것을 누구라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두 사람이 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떨구기 시작한 아영에게, 초선도 화정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동안, 둘러앉은 세 여자는 입을 다문 채
각자의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어쨌든,
가난하고 부모가 불완전했으며, 어릴 적부터 돈벌이에 민감해야
했던, 같은 처지였던 초선은 아영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사정은 다르지만 아영 역시 어릴 적부터 어른의 세계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겪었고, 어른의 역할을 해 내야 했던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절실하게 느껴지는 동조는, 결코 쉽게 얻어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감정에 초선은 무심코,
아영의 손을 다시 감싸 잡았다. 아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눈가에 구슬이 방울방울 맺혀있는 아영은, 오랫동안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회상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초선은
그저 미소지으면서 아영을 향해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이렇게 동감할 수 있는데.
이럴 때는 쓸데없이 말을 늘어놓으면 상대에게 더더욱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술집을 전전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일 속에서
자라온 초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문득, 곁에 앉은 화정이
몸을 약간 뒤척이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조금 났다.
그 바람에 시선을 화정에게로 고정시켰던 초선은 화정에게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같아 미안해졌다. 화제거리가 같다면 세 사람
모두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초선은 궁금한
사항에 대해 묻기로 마음을 굳히고, 화정에게 말을 걸었다.
"저, 유소저, 유소저는......성씨도 있으신데다 행동이나
외견도 상당히 고우신데.......귀족이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째서 점술가를 하시게 된 거지요?"
초선 딴에는, 초선과 아영이 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유년
시절을 털어놓았으니, 이 여자가 좀 차가워도 이야기해 주리라고
믿고 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알 필요는 없어요. 제가 점술가를 한 이유야
아영이 알고 있으니 아영에게 물어보시면 될 거여요. 하지만
전.......제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타인에게 즐겨 말하지
않아요."
여지껏 유지된 정감어린 분위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화정의
주변에 마치, 얼음으로 만든 벽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찬바람마저 동반한 그녀의 따끔한 말에 초선은 약간의
반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뭐랄까, 마치, 진심을 다해 만들어간 음식을 문전에서
내동댕이치는 사람을 보는 듯한.......아니, 그보다도 더 차갑고
강한 거부를 담은......그런 느낌이었다. 아무리 말하는 것은
개인자유이고 강제적으로 답을 얻어내려던 것은 아니었다지만,
남의 슬픈 이야기는 들을 대로 다 듣고 나더니 스스로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얄미워서, 뭐라고 한마디
할 양으로 화정을 쏘아보았다. 곁에서 초선의 감정을 알아챈
아영이 초선의 팔을 화정 모르게 붙들면서 말을 걸어주는
것이었다.
"아, 화정은 자신의 과거를 잘 모르거든요. 여하튼, 점술가를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해요. 우리 일행이 여행을 하다 여비가
조금 부족해서......화정이 장사를 해 보자고 제안했던 거죠."
"......과거를 잘 몰라요?"
저 똑똑해 보이는 여자가, 칼 한 자루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 여자가 기억 상실이라니, 조금 믿을 수 없었기에 초선이
반문했다. 본래 그렇다. 차라리 아영이 기억상실이라고 했다면
믿을 수 있겠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얼굴로 똑
떨어지는 행동만 하는 화정이 기억상실이라고 하니, 더더욱
신빙성이 없다. 한쪽 눈썹을 야릇하게 치켜뜨고 바라보는 초선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아영은 얼렁뚱땅 넘겼다.
"예, 그런 셈이죠. 그런데 화정, 내 바느질 솜씨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무슨 이유야? 초선님을 돕기 위해 여기로 왔다고 했잖아?"
화제를 슬쩍 돌리는 아영의 질문에, 초선은 왕윤과 계획한
연환계가 생각났다. 동시에, 화정에 대한 불쾌한 감정과 의심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화정은 분명, 연환계를
돕기 위해서도 자신들이 왕윤의 곁에 머무르는 것이 좋을 거라고
답했었다.
이야기의 중심이 엉뚱한 방식으로 연환계로 돌아오자, 초선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너무나도 깊어서, 곁의 사람도 함께 슬픔을
느낄 만한 것이었다. 아영은 화정을 보고 있다가, 초선이 너무나
길고 슬픈 한숨을 내쉬자 멍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요, 초선님?"
초선은 아영의 말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영의 질문에 자신의
슬픔에 대한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초선은, 그제야
왕윤의 걱정이 생각났다.
"연환계.......저를 이용하여 두 사람을 묶겠다는 뜻이지요?
헌데, 유매(柳妹), 저는 그 두 사람이 충분히 반할만한 미모를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어르신의 뜻이 틀어질까
두려워요......."
초선의 말에 아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화정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정에게 불만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더니,
순식간에 도움을 구하는 태도로 돌변했다. 하기는, 사람의 본성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 일 초 전에는 얄밉고 보기 싫더라도 일 초
후에 도움을 받을 일이 생각나면 재깍 태도를 바꾼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생존을 추구하는 동물과 생각할 줄 아는
이성의 동물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동물이라기에는
뛰어나고, 동물임을 부정하기에는 너무 본능적이다. 참으로 묘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아영은 영각 덕택에 오는
길에도 화정에게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즉 아영의
시선이 지닌 뜻은, 설명을 구하는 것이었겠지만 화정은 아영의
눈길을 무시한 채, 초선에게 짧게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그래서 제가 특히 아영과 함께 온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아영은 그 일에 관해 모르고있으니 제가 대강
설명하겠습니다. 허나, 나라 이곳 저곳에 권력자의 눈길이
숨어있으니 소홀히 할 수가 없지요."
화정의 말에 초선은 심각성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나라 곳곳에도 동탁의 눈길이 숨어있는데 하물며 동탁이
직접 머물고 있는 이 장안 거리야 오죽하랴. 이전에 조정대신
몇 명이 은근히 공모를 하다가 바로 다음날, 동탁에게 붙들려
가서 찢겨진 고깃덩이가 되었다는 소식은 초선으로서도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였다.
동탁이 잔혹한 폭정(暴政)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멀쩡하게 잘
지내는 것은, 그런 첩자들의 활약 덕택일 터였다. 게다가
강직하기로 이름난 왕윤의 저택에도, 간사한 동탁이 첩자를 깔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런 계산을 머릿속으로 확인하고 난
초선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도, 아영은 아직도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화정은 곁에 있던 종이와 붓을 집더니
아영에게 물었다.
"읽을 수 있지?"
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정은 현재
자신들의 연환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대략적인 글을
짤막하게 써서 그녀에게 넘겼다. 초선이 곁눈질로 보았는데, 그것은
조금 특이하게 생긴 글자였다.
무슨 그림을 그린 듯 구부러진 직각 모양의 기호(ㄱ)와 둥그런
기호(ㅇ), 세로로 세워진 막대기 같은 기호(ㅣ), 입 구(口)자와
같게 생겼지만 조금 틀린 듯한 기호(ㅁ), 직각모양의 기호를
옆으로 돌린 듯한 기호(ㄴ), 막대기 기호에 점을 찍은 두 가지
모양의 기호(ㅏ, ㅓ)등과 같은 요상한 기호들을 배합한
문자였는데 초선으로서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주술에 쓰는 암호문 같은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초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아영은 그것을 아주 쉽게 읽어 내려갔다.
초선은 궁금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저런 것이라면
동탁의 첩자들이 받는다고 해도 알아볼 확률이 적다.
유명한 주술사인 사현이라는 사람은 조금 예외일 수도 있지만.
초선이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아영이 그것을 받아들여 읽는
사이, 화정은 곁에서 밝게 타오르고 있는 등불을 끌어당겼다.
아영이 읽는 기호문을 기웃거리다 포기하고 시선을 돌린 초선이
궁금함을 못 이기고 화정에게 등불을 왜 끌어당기는지 묻는데,
그 사이 다 읽었는지 아영이 화정에게 종이를 도로 건네는
것이었다.
화정은 아영에게 종이를 받아 재빠른 손동작으로 종이를 등불에
태웠다. 초선은 그제야 화정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영민한 그녀의 처사에 감탄했다. 증거물이 없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약의 경우 방을 비우더라도 첩자가 읽을 수 있을 리도 없다.
만약 세 사람 중 배신자가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함께
연환계를 공모한 처지에 화정이 그럴 리는 없으며, 이 아영이란
여자는 그것을 몰래 일러바칠 정도로 간사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영은 이제야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화정에게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확인하려 했다.
"그래서, 그 여포랑 동......."
"이제 알았지? 그러니까 초선님을 꾸미는 것이 급선무야."
눈치도 없이 아영이 여포와 동탁이라고 말을 하려는 듯이 보이자,
화정은 능숙하게 말을 잘랐다. 아영은 주변을 둘레둘레 보더니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선은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연환계에 생각이 미치자 절로 고민이 되어 다시 눈썹을 내리깔았다.
미간에 수심을 가득 채운 초선을 보면서 아영이 묻는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차마, 아영을 보아하니 신빙성이 가지를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화정이야 빈틈 없는데다 여지껏 꽤나 정확한 예지력과
능숙한 수단을 보였지만, 화정을 도와 연환계를 성공시키려 한다는
아영을 보니 불안함이 고개를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저렇게
얼빵한 곳이 있는 아가씨가 얼마나 잘 도와주겠는가......하는
심정도 있었지만......
"걱정하실 것 없어요, 초선님. 잠깐 일어나 보시겠어요?"
화정이 짧게 말했다. 다짜고짜 일어서란 말에 멍해진 초선이
화정을 바라보았고, 아영 역시 이해가 안간다는 시선을 화정에게
보냈다. 하지만, 화정은 두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초선을
재촉했다.
"일단 일어나세요."
초선은 머뭇거리면서 의자에서 일어나서 땅을 딛고 똑바로 섰다.
그런 초선의 위아래를 쭉 훑어보던 화정은 느닷없는 말을 했다.
"겉옷 좀 벗어보세요."
"예에?"
너무 뜻밖의 말에 초선은 얼굴을 붉히면서 화정을 멀뚱멀뚱
응시했다. 정말 어이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같은 여자라지만
알게된 지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은 사이에, 다짜고짜 겉옷을
벗어보라니? 제 입으로 자신이 술집을 전전하던 천한 신분이라고
말을 했다지만 그렇다고 깔보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모욕이 밀려오는 화정의 요구에 초선이 눈을 치켜떴다.
곁에 앉아있던 아영 역시 민망했는지 뺨을 조금 붉히며 화정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정아, 하지만 초선님은......저 겉옷 벗으면 아마......속옷만
입으셨을걸. 아주 얇은......."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여요."
화정의 갈수록 알 수 없는 말에, 초선은 망설였지만 연환계
이야기를 하는 마당에 설마 쓸데없는 소리만 하랴, 싶어서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뭐, 그리고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크게 손해날 것도 없다고 생각한 초선은 반쯤 체념한
심정으로 천천히, 그렇지만 조금 꺼려지는 손길로 자신의
겉옷을 벗어보았다.
"야, 너 정말 왜 그......어.......?......와아.......!"
한 손으로 얼굴 반쪽을 가리면서 눈을 찡그리고는 화정을
질책하던 아영은, 고개를 돌리다가 무심코 초선의 속옷만 걸친
몸을 보게 되었다. 약간의 시간동안, 넋이 나간 듯이 초선을
보고있던 아영은 이내 탄성을 뱉어냈다.
그때까지 화정의 발언을 나무라던 눈치 따위는 다 팽개치고
초선에게 시선을 똑바로 꽂는 것이었다. 화정 역시 한마디도
않고 초선을 보고 있었다. 두 여자의 직격으로 꽂혀진 시선에
민망해진 초선은 얼굴을 귀밑까지 붉히면서 화정에게 물었다.
"이제......입어도 될까요?"
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구경거리가 된 것 같은데다
화정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서, 괜스레 화만 났지만 초선은
꾹 눌러참고 급하게 옷을 걸쳤다. 그때까지도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던 아영은, 초선이 움직이자 도리어 자신이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질끈 감고는 시선을 화정에게 돌렸다.
실컷 탓하던 자신까지 초선을 무안하게 만들었기에 미안해진
듯하다. 그 착하고 감정에 솔직한 아가씨와는 다르게, 화정은
아영에게 대뜸 물었다.
"방금, 초선님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니?"
아직도 귀밑까지 붉어진 얼굴로 아영은 생각없이 말을
내뱉다가......
"무슨 생각하기는, 몸매가 참 예쁘시.......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너 때문에......"
화정의 말에 자신이 넘어간 것을 깨닫고 화를 내려했다.
하지만 화정은 아영의 말을 자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초선님은 몸매가 정말 예뻐. 그러니.......몸을 꽁꽁
감싸는 것보다 다소 노출이 있는 옷을 입는다면 굉장히
매혹적일 거야. 같은 여자가 보아도 매혹적인데, 남자들이
본다면 더더욱 효과가 크겠지?"
화정의 엉뚱한 말에, 아영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남자도
아니면서 같은 여자에 대해 그런 식의 사고를 해냈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반감이 느껴졌는지, 목청을 절로 높였다.
"뭐? 이봐, 유화정."
어이없다는 식으로 화정을 질책하려는 아영의 음성을 뒤로하고,
그 말이 연환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초선은
그제야 그녀가 생각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에 미치자 초선은 당황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에? 서, 설마......그렇다면......?"
화정은 초선이 자신의 뜻을 파악해냈다고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래요. 하지만 이미 큰 일에 뛰어들 결심을 하셨으니 그
정도는 괜찮겠지요? 옷은, 저와 아영이 한번 만들어 볼께요.
대신에, 좋고 아름다운 옷감과 장신구들을 구하는 것은 초선님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왕윤 어르신의 재력이 필요할 테니까요."
아직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저
영리한 여자가 하는 대로 따라보아야 할 것 같았다. 하기는
그랬다. 초선은 사실, 술자리에서는 별다르게 사내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편이었다.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미모로
먹고사는 그 바닥에는 초선보다 아름다운 미녀는 샐 수 없이
많았다.
재력이 좀 부족한 사내들이나 가격이 조금 싼 맛에, 어쩔 수
없이 초선을 데려가는 형편이었으니까. 자신의 미모가 보통
사람보다는 좀 낫지만 미인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출중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잘 아는 초선으로서도 크게 높은 돈은 받을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선과 한번 침상에서 지내본 사내들은 어김없이
다음부터는 초선만 미친 듯 찾아댔다. 결국 초선은 소문에
소문이 퍼져 꽤 유명한 여성이 되었고, 귀족들의 연회까지
불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왕윤의 눈에 들게 되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 과거가 생각나자 화정의 말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가
갔다. 얼굴만으로는 호색한으로 유명한 두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기 힘들다. 따라서, 다른 매력이 필요했는데, 저 똑똑한
여자는 그 매력을 육체적인 것으로 정한 듯했다.
아마 자신의 몸매가 돋보이도록 옷을, 노출이 있게, 좀더
다른 식으로 만들겠다는 뜻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잘 될
것인가? 잠자리에서는 그렇고 그렇다고 해도 사내를 첫눈에
사로잡으려면 출중한 미모가 필요한 법이다. 저기 앉아있는
유화정의 반 정도만 되어도 좋았겠지만 아무리 육체적인
매력을 지녔다고 해도 자신으로서는 부족하기만 하다. 초선은
조금 못 미더운 심정을 담고, 종이에 무엇인가 그리고 있는
화정과, 그에 머리를 맞대고 구경하는 아영을 훑어보았다.
`옷을 그렇게 만든다고......얼굴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닐텐데......'
적잖이 근심에 휩싸인 초선은, 초조한 심정에 곁에 놓인
식어빠진 차를 홀짝거리면서 마셨다. 그렇게라도 축이지
않으면, 목이 타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모든 소망을 걸고 있는 왕윤의 그
간절함이 충족되지 못할까, 그것이 더욱 두려웠다.
*******
호화로운 가구들로 뒤덮여 있고, 휘황찬란한 초 수십 개가
방을 밝히고 있는 방은 대낮같이 환하고 호사스러웠다. 특히
하인들이 밤낮없이 청소를 했기에 청결하고 가구들도 얼굴이
비칠 정도로 윤이 났다. 코를 은근히 자극하는 은은한 향내까지
났지만 침대에 앉은 만신창이 청년과, 그 앞에 서있는 키가
훤칠하고 준수한 청년이 풍기는 분위기는 화사한 방과
정반대였다.
만신창이 청년은 조금 장난기가 섞인 듯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들지 않았고 서있는 청년은 그런 그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수려한 미간을 찡그린 상태였다. 창 밖에서
찌르르, 하고 풀벌레가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두 사람 중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문 바깥에서 가끔씩, 지나다니면서 하인들이
내는 인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만신창이 청년도,
서있는 청년도, 두 사람 모두 인기척이 날 때마다 눈동자가
긴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나 만신창이 청년의 반응은
더더욱 예민했다. 불에 데인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본능적인
무의식보다도 더 예민하다고 느껴질 만큼이나.
"좋아, 영각, 이제 말하게."
멀쩡한 곳이 없는 몰골로 긴장하고 앉은 영각의 모습에는,
불안정한 감이 숨겨져 있었다. 늘 쾌활했고 대담한 곳이
있었던 영각의 평상시 모습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염라대왕이
눈앞에 있어도 농담을 퍼부을 것 같던 영각이, 저 정도로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잔뜩 굳어있는 모습은 조운에게도 좋지
않은 예감을 주는 광경이었다.
아직도 몸이 제대로 낫지 않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영각에게서 고통으로 인한 아픔 이외에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이
물씬 풍겨왔다. 평상시 남에게 재촉하는 것을 즐겨하는 조운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래서 영각에게 이야기하라고 재촉해본
것이었다.
드물게 재촉을 하는 조운이 신경쓰였는지 미동도 않던 영각은
그를 힐끗 곁눈질했지만 입을 달짝거릴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주변을 유난히 살피는 그 모습에 조운은 약간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창 밖보다, 지나다니는 하인들이나 사람의 기척에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즉, 왕윤이 그만큼
신경쓰인다는 뜻이다.
"아마도 조정 고관에 관련된 이야기인 모양이군. 그래서
자네는, 어르신 앞에서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던 것이었군그래."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영각은 조운에게 다시 눈길을 던졌다.
그런 그의 눈에는 어떤 찬성과 동시에 불안함 같은 것이
숨어있었다. 보통의 영각이었다면 이 무료한 시간을 싫어해서,
뭔가 싱거운 농이라도 던졌을 것이지만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한마디도 않고 주변을 살피고 있었을 따름이다.
오랜 세월, 영각과 지내온 조운은 영각의 행동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대략은 읽을 수 있었다. 분노, 그리고 어떤 슬픔과 무력감
같은 것이 영각의 눈동자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힘주어 이불깃을 잡은 손등에는 파란
핏줄이 일어서고 있었다. 동시에 영각의 이마에 자리한 불끈
솟은 힘줄을, 조운은 놓치지 않았다. 영각이 드디어, 말라붙은
피가 아직도 얽혀있는 입술을 움직였다.
"사람의 심장을 먹으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혹시 알고 있는가?"
대뜸, 영각의 탁한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 조금은 엉뚱한 듯한
질문이었지만 조운은 영각을 탓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운의 대답이 없자 영각은 이어진 말에
비웃음을 섞었다.
"하긴.......주술적인 감지는 나보다 뛰어나도 주술적인 것에
대해서는 나보다 관심이 없는 친구였지, 자네는......"
그렇게 비아냥거리지만, 영각의 태도가 이전의 자신만만과
전혀 다른,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을 풍기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운은 곁의 의자를 당겨서 앉았다. 영각은 그런
조운의 움직임에는 신경도 쓰고 있지 않다는 듯이, 침상의
이불깃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비단으로 만든 호화로운 이불깃은 영각의 꽤나 거친 손짓에
금방이라도 부우욱, 소리를 내면서 찢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영각의 태도는 불안과 신경질을 동반하고 있었다. 저 태평하고
낙천적인 사람을 어떤 사건이 저렇게 만든 것인지 답답해졌다.
조운은 영각을 가만히 보다가 답답함을 끝내 못 이기고 또다시
재촉했다.
"......말을 해 보게. 말을 해야 도울 것이 아닌가."
"허, 돕는다고? 자네가?"
벙어리 마냥 비단 이불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영각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얼굴에 담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작고
두툼한 눈에 못마땅한 빛을 가득 담은 그는 조운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우스운 말일랑 하지도 말게. 자네는 내가 어찌되든 신경도 안
쓰는 놈이 아니던가."
저렇게 억지까지 부리는 것을 보면 예삿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운은 한숨을 짧게 섞은 질책을 보내려했다.
"영각."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영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고 영각은
반문으로 조운의 질책을 잘라냈다.
"틀린 이야기인가?"
그런 영각의 모습에는 초조감과 불안감이 계속해서
증폭되어가고 있었다. 조운은 그 영각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늘 태평스럽던 영각이 저 정도로 이성을 잃고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영각이 겪은 일이 보통 일은 아니란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때로는, 조운 자신보다도 냉정한 곳이
있던 영각이었다. 조운이 영각에 대해 늘 무관심하게 대해도
눈썹하나 움직이지 않던 영각이다.
".......뒷 배경에 꽤나 거물(巨物)이 있었던 모양이군.
이전에는 자네에게 무심했던 것이 사실이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달래려는 조운의 말에 콧방귀를 보낸 영각은 팔짱을 끼었다.
삐뚜름한 시선으로 조운을 보더니, 갑자기 조운에게서 시선을
외면했다.
"조운, 입발린 말은 필요없어."
답답했다. 이렇게 무의미한 대화를 계속할 필요성을 못 느낀
조운은 다시한번 영각을 달랬다.
"......여하튼, 계속해서 대책도 없이, 쫓기고 피해 다닐
일은 아니잖은가. 고집 그만 피우고 말을 하게. 자네가 원한다면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아."
남을 달래는 것은 솔직히 이야기하면 조운 자신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다. 늘상, 남의 기분이 어떻건간에 자신의
일만 하는 성격인 조운으로서는 영각에게 꽤나 양보했다고
보아야 했다. 게다가 자신과 오랜 세월을 함께 자란 영각이
조운의 이러한 드문 양보를 모를 리도 없었다.
이전의 영각 같았다면 이내 시원스럽게 웃으면서 장난이라도
한마디 걸었을 것이다. 영각은 하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입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낀 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밝은 성격의 영각으로서는 참으로 드문 반응이다. 영각이
팔짱을 끼고 무심코 응시하고 있는 곳은 벽이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벽에 있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꽤나 능란한 솜씨로 그려지고 현란하게 채색이 된 그 그림의
귀퉁이에는 `대장 한신, 고조 앞에 무릎꿇다(大將韓信,
在高祖面前屈膝)'라 멋들어진 필체로 기록되어 있었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앞에 무릎꿇고 앉아 충성을
맹세하는 한신(韓信)의 그림이었다. `바보같지 않나?
괴철(魁徹)*의 말대로 제왕(齊王)으로 눌러앉아 유방과 항우와
함께 천하를 다투었다면 토사구팽( 死狗烹)의 슬픔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일세. 머리가 특히 좋았던 놈이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제 스스로도 간수하지 못하던 놈이지.'*라고 비웃던
영각이 오랫동안 바라볼 그림이 절대 아니다.
평상시 한신의 비참한 말년을 비웃던 영각이 그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은, 조운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산 증거였다.
그렇게 자신이 싫어하는 그림을 응시하면서까지 한참동안 뜸을
들이는 영각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영각, 이전의 주종(主從)관계로서 명령하겠네. 이야기해.
도움을 청하던 말던 그건 자네 마음이지만 이야기 정도는
하도록 해."
강경하게 잘라 말하자 영각은 팔짱을 낀 그대로 시선만
조운에게 돌렸다. 그렇잖아도 이야기하려던 참에, 조운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영각으로서도 마음이 돌아선 모양이었다.
한참동안 조운을 멍한 눈으로 보던 영각은 잠긴 목소리를 냈다.
"자네들과 헤어진 후에.......어떤 행인 일행을 발견했어.
그들을 뒤쫓아보기로 마음먹었지. 여자 하나와 어린
아이들이었으니 발걸음이 빠를 리가 없지 않나. 분명 하루
안으로 산을 못 넘을 것 같으니, 필시 범인이 그들의 심장을
노리고 나타날 거라 생각했지......."
거기까지 말을 잠시 끊은 영각은 자신이 꼬깃꼬깃 쥐고있는
이불깃을 내려다보았다. 조운은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영각은 온통 천으로 감아놓은 자신의 상처투성이 팔로 잠시
눈길을 던졌다. 깨끗한 흰 천이었지만, 어느덧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말을 끊은 채 이을 생각을 안 하는 영각에게,
조운은 답답한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대체, 자네를 쫓는 자가 누군가? 내가 알기로 자네는
그렇게 심하게 당할 만큼 실력이 낮은 것은 아니야."
영각은 코웃음을 섞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가? 자네와 헤어진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또 모르지.
내가 무술 연습을 좀 게을리 해서 그 사이 실력이 녹슬었을 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조운은 영각을 어이없다는 눈길로 훑었다. 영각은 늘 그렇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담지 않는다.
비꼬는 투의 어조 속에 담는다. 그렇다고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아무렇게나 퍼붓지 않는다.
노골적이면서도 은유적이게, 또는 은근하게 비꼬아낸다. 그런
영각의 속성을 아는 조운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원망 같은
것을 희미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아마도 지난 2년 동안
미처 영각을 돕지 못해 떨어져 있었던 것을 비꼬는 의미일
것이다. 그때 그 사건 이후로, 그들은 2년 동안 소식을 전혀
모른 채 지내왔다. 아니, 못 들은 것이 아니다.
영각은 조운을 자주 불렀지만 조운이 그에 응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결국 조운이 영각과 떨어져 지낸 2년 사이에,
겨우 도망쳐 나왔던 영각의 부친은 관군의 추격을 받고 창에
맞아 죽었고 영각은 홀로 도망쳐 산적이 되었다. 물론 그때
그 사연을 생각하면 돕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는 했으나 사실
조운은 그때 영각이 그런 상태에 처해 있었는지 모르던 상태였다.
영각은 서신에 조운이 왔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사정을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택에 지난 2년간 서로 연락도 없이
외면하다가 이전의 산적 토벌 사건으로 조금 반갑지 않은
재회를 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내 조운을 찾아오기는
했지만......조운은 물밀 듯 밀려오는 생각을 누르면서 영각에게
매섭게 잘라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두게. 누가 자네를 쫓는다는 거야?"
"사씨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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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괴철(魁徹): 원래 연나라의 모사꾼으로 한신의 세력과
위용에 눌려 연나라와 함께 한신에게 투항한다. 한신이 제나라를
정복하고, 제나라 왕으로 등극했을 때, 중국은 유방과 항우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으나, 유방의 부하인 한신이 가장 전략적
요충지며 부강했던 제나라를 정복하면서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에
어찌보면 유방-항우-한신의 삼각 구도가 형성될 수 있는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이 때 괴철이 중국을 삼등분하여 유방의
수하가 아니라 당당하게 주인으로 군림하기를 한신에게
권한다*작가주
2.토사구팽에 관련된 한신의 이야기: 한신은 유방이 항우를
치고 천하통일을 하도록 큰 도움을 주었던 전략가이다. 사실상
유방이 천하를 제패하고 황제가 된 것에는 한신의 역할이 거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을 정도로 막강했다. 백전무패의 전술가로
알려져 있지만, 유방은 한신의 능력이 뛰어남을 두려워하여
여러번 시기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신이 단독으로 군을 이끌고 곳곳에서 승리를
잇달아 하고 있을 때, 유방의 부대는 줄곧 패배만 했는데,
덕분에 한신의 능력이 유방의 능력보다 높다는 소문이
나돌았었기 때문이다.
한신이 조趙땅을 평정했을 때, 유방이 한신에게서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군이라는 표시인 대원수大元帥의 관인官印을
빼앗아 반응을 살폈고, 한신이 유방의 처사를 웃음으로 넘겨
도로 관인을 받았다는 고사도 있다. 한신이 제를 토벌하고
제왕齊王이 되었을 때, 한신의 모사인 괴철이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 제의 한신, 이렇게 셋으로 나뉘어 대등하게
지내라고 간언한 사실 또한 유명하다.
이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최초가 아님을 증명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한신은 그런 괴철의 제안을 거절하고 유방에게 계속해서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천하통일을 돕는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고 한신을 초왕楚王 - 사실은 꿍꿍이가 있었다.
그때껏 한신은 제왕의 신분이었지만 이미 기반이 안정된
제나라의 왕으로 계속 놓아두면 한신이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
수월해질 것 같아서 갓 평정되고 혼란한데다 항우項羽의
추종세력이 아직도 남아있던 초나라의 왕으로 봉했던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 으로 봉하지만 결국 한신은
토사구팽 死狗烹의 희생물이 되어 불우하게 삶을 마친다.
한신이 정말로 유방에게 반역을 꾀했는지,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서 유방의 황후였던 여치呂雉에게 희생당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유방이
여황후- 여후呂后로 유명하다 - 와 공모하여 한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의견 쪽에 찬성표를 던지고 있다.
실제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는 유비와 조조, 손권의 관계와
한나라 최후의 황제인 헌제獻帝와의 관계를 유방과 토사구팽을
당한 제후들의 관계에 직결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유방에게
가장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한신이 조조로 환생하고,
영포英布는 손권, 팽월彭越은 유비, 유방과 여태후는 헌제와
복황후로 환생했다는 것이다*작가주
영각의 입에서 나온 짤막한 말에 조운은 어떤 차가운 바람
같은 것을 느끼면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사씨 형제. 두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말이었지만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약간 얼어붙은 조운의 표정을 슬쩍 쳐다보면서, 영각은
콧바람을 내뿜었다.
"왜? 자네가 알기에도 너무 엄청나나?"
조운은 그런 영각의 얼굴을 보면서 한마디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을 어떤 무엇인가가, 환하게 비춘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공손찬은 조금 이상한 점이 많았다.
기주 다툼을, 원소와 그렇게 치열하게 하다가 갑자기 동탁의
말을 듣고 멈춘 것이 바로 그 중 하나다. 기주 땅은, 조운이
알기에도 엄청나게 풍부한 물자를 생산해내는, 곡창지대였다.
특히 군량과 군마 부족을 겪던 공손찬으로서는 꼭 필요한
땅이다.
그런 기주 땅을, 불같이 강한 성격을 지닌 공손찬이 포기했다.
게다가, 원소의 얄팍한 꾀에 속아 분해 어쩔 줄 몰라하던
공손찬이었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오랜기간 다투어 이득이 없었다지만 단번에, 그것도 동탁의
서신 한 장으로 군사를 거두어 들일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말이 비긴 다툼이었지 사실상 원소 좋으라고 한 전쟁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기름진 기주 땅은 통째로 원소의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공손찬은 아무 이의없이 군사를 물렸다. 특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역적 토벌이라는 깃발 아래 동탁에게 반기를
치켜들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동탁의 중재 하에, 그런
불리한 휴전을 맺었다. 공손찬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공손찬의 신뢰가 깊지 않았기에 묻지 않았었다.
하지만.......
`현재, 공손찬님이 가장 신뢰하고 계신 모사는.......사융이다!'
조운의 눈길에서 파란 불길이 일었다. 영각이 끼어들었다.
"자네도 짐작했겠지? 겉으로 온갖 착한 척 하던 놈이지만
결국 형과 짜고 나쁜 짓을 한 거야. 사융 놈은 공손찬을
친동탁(親董卓) 세력으로 몰아넣기 위해 공손찬의 휘하로
온 것임이 분명해!"
조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굳건한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하던 얘기 마저 하지. 예상대로 웬 놈이 여자와 아이들을
습격했네. 하지만 이번에는 단 한 사람만을 죽이지 않았어.
놈은 아이들까지 모두 죽이고는 그 심장을 파먹었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가장 어린 아이를 죽이고 심장을 삼키는
중이었어......다시 묻네만, 사람의 심장을 먹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알지?"
조운은 시선을 자신의 무릎에 둔 채, 고개만 건성으로
끄덕였다. 영각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입으로 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해 가면서, 영각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래. 동물의 심장을 먹는 것은 그 동물의 남은 수명과 능력,
기운 등을 함께 먹는다는 의미가 있지. 나는 놈의 뒤를 덮쳤어.
처음에는 놈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꽤
주술적인 기운이 강력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네. 하지만
자신이 있었어. 자네 말대로......무술 실력은 낮지 않다고
자부했으니까. 그런데......."
"알겠어, 황호."
조운은 영각의 흥분한 듯 올라가는 어조를 제지했다. 새빨갛게
변한 영각의 얼굴은,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흥분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영각의 목소리가 점차 쉬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조운은 그를 저지시킨 것이다.
그 이상 언성을 높인다면 근처의 누군가가 들을 가능성이
많았고, 영각의 몸에도 좋을 것이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영각은
멈추지 않았다. 막무가내였다.
"웬 놈이 나타나 내가 그 심장을 먹어치우던 녀석을 공격하는
것을 방해하더군. 그 사이에 심장을 먹던 놈은 도망을 쳐버렸지.
여하튼 그놈.......주술실력이 엄청나더군. 아귀강시를 써서
나를 공격했어. 일단 나는 도망쳤네. 그때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기에 조금 치료하고 난 후에 나는 그를 다시 미행했지.
미행하는 도중 어떤 놈이 갑자기 나타나더군. 내 눈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새로 나타난 놈은
시공이동(時空移動)을 해서 왔어."
그 말에 조운은 눈썹을 꿈틀, 하고 움직였다. 적당한 선에서
영각의 이야기를 막으려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시공이동.......
그것은 이미 없어졌다고 믿어지던 주술이었다. 하루 안에
천하의 어떤 곳이라도 갈 수 있다고 하는 전설의
이동주술.......조운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영각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공이동! 그게 바로 사융이었다는 말이었나!"
"유감스럽게도."
영각은 기운이 쭉 빠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조금 흥분이 가라앉은 듯이 보였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홍조가 남아있었다. 조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분명히, 북평에 있는 사융이 이곳까지 무슨 시간이
그리 많아 예까지 와서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매일 일어났던 살인이었는데, 북평의 사융이
관련이 있을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관련이 있다면 뭔가 지시를 내렸거나 서신을 주고받고 계책을
낸 정도일까. 직접 개입했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쭉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공이동이 가능하다면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조운이 무슨 생각을 하든, 영각은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조운의 귀에 밀어넣었다.
"처음엔 그 두 놈인지 몰랐지. 전음술로 떠드는지 마주보고
있기만 했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어. 결국 나는, 이전에
상산초옹(常山樵翁)께서 귀뜸해주신 수법이 있었지. 전음술을
들을 수 있었는데......"
별안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창이 부서졌다. 조운은 침입자가
있음을 직감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쭉 내뻗었다. 그가 손끝으로 발산한
지공탄(指空彈)*에 맞았는지, 요란한 신음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귀를 자극했다.
조운은 영각의 앞을 막아서면서 창을 통해 날아들어온 사내를
손바닥에 기를 모아 후려쳤다. 대략 1성(一成)*정도의 공력만 넣은
장력(掌力)*이었기에 치명타는 입지 않았지만 워낙에 강맹한
공력이라 그런지 침입자는 그 한방에 입가에 선혈을 뿌리며
쓰러졌다. 영각이 그 상황을 묵묵히 보고 있다가 물었다.
"왜 죽이지 않고 살려둔거지?"
"확인해 볼 것이 있네."
조운은 짧게 말하고 침입자를 일으켜 세웠다. 억제로 앉혀놓고
등의 혈도를 몇 개 짚었다. 혈도를 정확하게 짚어내자 침입자는
상체를 빳빳하게 일으켜 앉은 그대로 눈을 떴다. 그는 분하다는
듯 눈을 부라렸지만 이미 혈도가 굳은 상태인지라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영각이 뒤에서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빈정댔다.
"늘 생각하지만 자네는 무예 실력 하나는 정말 타고났군그래.
동탁이 보낸 첩자를 저렇게 가볍게 놀려먹다니."
영각의 말에는 신경쓰지 않고 조운은 침입해온 사내의 두건을
벗겼다. 사내는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렸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분한 눈빛만 증폭시켰을 뿐이었다. 바짝 마른 얼굴을
지닌 사내의 뺨에는, 보기에도 `사(邪)'라는 흉측한 낙인이
찍혀 있었다. 한눈에도 동탁의 측근인 사현의 수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조운은 검지와 엄지를 턱에 대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침입자를 보낸 것은 사현이다, 라고 증명하는
듯한 처사로군......'
무엇 때문에 침입자를 보낸 것이 자신이라고 밝혔던 걸까?
영각이 저렇게 심하게 다친 것을 보면 분명 사현이나 사융과
영각은 접전을 벌인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비록 이겼어도
사현은 영각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 사현이라는 작자는 이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실력자를
보내놓고, 영각이 죽기를 믿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다. 이건,
죽이려 했다기보다 자신이 보냈다고 과시하는 행동 측에
더 가깝다.
"고민할 것 없어. 내 행동에 속지 않았다고 알리는 것에
불과하니까."
조운은 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쏘아붙이는 영각에게 눈길을
옮겼다. 영각은 부서져 나간 창을 곁눈질하며 태연하게 설명했다.
"소식을 들었을 거야. 내 복장을 한 시체가 하나 발견되었다고.
그건 내가 사씨 형제를 눈속임한 것에 불과하네. 그들은 그
당시에는 속았어. 그렇지만 내가 아현을 불러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나와 아현은 동탁이 풀어놓은 첩자들의 눈에 띄어버렸고,
결국 들켰네. 사현은 아마도 내게, 자신은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이런 짓을 했겠지."
영각의 말을 들으면서 조운은 침입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는 손바닥에 미미하게 기운을 넣으면서 질문했다.
"바른대로 답한다면 살려주지. 저 사람의 말이 맞나? 너는
사현이 보낸 놈이고, 사현은 저 사람을 죽이기보다 자신이
저 사람의 생존을 잘 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건가?"
첩자는 이를 악물었다. 처음에는 답하지 않으려는 의도 같았다.
하지만 조운이 손바닥에 약간의 힘을 주어 1성에 가까운 공력을
더 흘려 넣자, 고통을 느꼈는지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 갔다.
"이보다 힘을 조금만 더 넣는다면 너 같은 놈 정도는 지옥을
구경시켜줄 수 있다."
이미 자신과 함께 온 동료가 지공탄이라는 고급 술법으로
즉사하고, 침입해 들어온 자신도 가볍게 당한 것을 잘 아는
사내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덜덜 떨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그러.......그렇습.......니다. 네......."
"흠......"
조운은 고개를 옅게 끄덕이면서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다.
침입자는 아직도 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살짝, 조운의 눈치를
보았다. 순간, 영각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봐, 혹시 알고있나? 사현이 사융과 떠들었던 `쌍둥이
자매' 란 누구인지?"
조운은 영각의 알 수 없는 질문에 무심코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가, 조금 수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침입자의 얼굴색이
희다못해 푸르게 변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침입자의 입술 또한
덩달아 하얗게 변했다. 조운이 영각에게 까닭을 물으려는데,
영각은 침입자에게 급하게 다그쳤다.
"역시, 들었던 적이 있군! 아는대로 말해! 말하지 않으면
산채로 지옥을 보게 해 줄테니!"
침입자는 벌벌 떨었다. 어찌나 떠는지 침입자의 머리에 얹은
조운의 손까지 들썩거릴 정도였다. 침입자는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비굴함을 섞은 애원을 했다.
"안됩니다. 그것을 발설하면 무조건......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현님과 사융님을 먼발치에서 한번 뵌 적밖에 없는
아랫놈입니다.......그저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용서......"
"용서? 너라면 나같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그 말이 나오겠냐?!
그거 하나 알아냈다고 사현같은 천하의 주술사를 상대하다 이
꼴이 되었는데 말야! 엉?!"
영각이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침상에서 몸을
끌어냈다. 기다시피 해서 침상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고 팔을 뻗어 침입자의 목을 움켜잡았다.
조운은 그 광경을 보면서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영각이
성질이 조금 급한 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을 해대는 일은 많지 않았다. 조운이 느끼기에, 영각은 지금
분노로 온 몸을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영각의 감정은
격렬하게 타고 있었다.
`꽤 심각한 것을 알고 온 모양이군.......'
의심스럽게 생각하며 사내의 머리 위에 갖다댄 손을 떼어내는데,
영각은 그 새를 못 참고 협박하고 있다.
"말해! 뭐야? 알고 있는 것이라도 털어! 여긴 동탁놈도 쉽게
손대지 못하는 곳이니 안심하고 말해. 그렇다면 살겠지만
아니라면......."
영각은 상처투성이인 팔을 들어 검지를 침입자의 머리통에
갖다댔다. 침입자의 얼굴이 또다시 하얗게 질렸다.
"아니면 네놈은 죽여달라고 사정하게 될 거야."
"마, 말하겠습니다!"
기겁을 한 나머지 사내는 크게 외치고 말았다. 영각은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침입자를
재촉했다.
"진작 그리 하지. 그래, 말해보게."
침입자는 목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창 쪽을 힐끗
눈짓했다. 듣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 신경을 쓰고있는 모양이었다.
꽤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운은 영각이 하는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도, 동탁님은......황궁의 서고(書庫)를 뒤, 뒤지시다가......
오, 오래......오래된.......그러니까 오래......오,
오래.......오래된......"
"이봐, 너 오래 살기 싫어?!"
강짜섞인 영각의 윽박에 침입자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말을 시원하게 이었다.
"오래된 고문서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현님이
해독하셨는데 저도 자세히는 모르고 아무튼 어떤 쌍둥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자 쌍둥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기록되어있었는데 문제는......."
조운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이 침입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황실의 서고. 그것도 동탁이 최근에야 발견했을
정도로 깊게 감추어져있던 것이라면 분명 예사 책은 아니다.
그런 책에서 여자 쌍둥이에 대한 기록이 나왔다는 것은 뭔가
심상찮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보통, 쌍둥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주술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로 해석이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자 쌍둥이는......
"그 여자 쌍둥이는 연(蓮: 연꽃)인데......그 둘 중 하나,
그러니까 둘 중에서 영연(瑛蓮: 수정 연꽃. 또는 옥빛 연꽃.
창작어*작가주)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으리라(得雙胞胎中之瑛蓮之者 將得天下).......라는
구절이......"
"쌍둥이 중 하나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영각이 놀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조운의 눈도 흡떠졌다.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눈길만으로 많은 뜻을 주고받았다. 어떤 위기감과 의무감,
방어의 필요성 같은 것을 동시에 느꼈으므로.
"그래서......수정연꽃이 대체 누구라는 거야?!"
"그건 동탁님과 사현님, 사융님만이 알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제 십년지기 친우의 누이가 동탁님의 후궁인지라......친우에게
귓동냥으로 들었습니다. 아마도 세 분의 목적은.......우욱!"
중요한 말을 할 것 같아 조운과 영각이 귀를 기울이던 찰나
사내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거세게 솟구쳤다. 놀란 조운과
영각은 피를 쏟는 사내를 붙들고 주위를 살폈으나 아무도 없었다.
사내는 금세 코와 눈과 입, 귀에서 피를 쏟으며 그대로 즉사했다.
반은 의아, 반은 낙심한 심정으로 조운은 사내의 혈도를 살펴보았다.
혈(血)이 역류하면서 일어난 죽음 같았다. 영각이 초조한 표정으로
조운을 쳐다보았다. 조운은 조용히 설명했다.
".......이미 죽었어. 아마도 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혈도에 주술을 걸어놓은 듯해."
"제길!"
영각은 욕지기를 뱉으면서 침상으로 돌아가 끙, 소리와 함께
몸을 눕혔다. 그런 영각의 태도에는 짜증과 낙심이 뒤섞여있었다.
`쌍둥이 중 하나.......쌍둥이 중 수정연꽃을 얻는 자,
천하를.......하지만 쌍둥이가 하나 둘이 아닐텐데, 그 많은
쌍둥이 중에서 어떻게 골라내려는 건가?'
어째서 유독 남자 쌍둥이도 아니고 여자 쌍둥이라고 하는
건지도 궁금했다. 본래 여자 쌍둥이는 남자 쌍둥이에 비해 의미가
부정적이다. 남자 쌍둥이는 화합(和合)을 말하지만 여자 쌍둥이는
불화(不和)를 의미(이런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창작이다*작가주)하기도 한다. 지금은 난세다. 난세에는, 주술적
존재로서 화합을 이야기하는 남자 쌍둥이가 천하 평정을 돕는다는
쪽이 더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어째서 반대로 여자 쌍둥이를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그
동탁 일파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등을
돌리고 누운 영각에게 묻고 싶었지만, 꽤나 화가 나 있는 것
같아서 조운은 묵묵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왕윤과
아현이 서 있었다. 방금 전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조운은 문득, 침입자의 시체를 치우지 않았던 사실이
기억났다. 대충 둘러댔다.
"거리에서 소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갑자기 시체가 창을 통해
날아들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한 변명이지만, 이런 일은 허다하다. 특히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운 때는 더더욱 자주 있는 일이다.
길거리에서 동탁의 일파나 여타의 말썽꾼들이 소란을 피우다
사람을 죽여 인근으로 아무렇게나 시체를 내던지고 도망하는 일
정도는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특히 동탁이 폭정을 일삼아 민심이 흉흉하고 무법자가 사방으로
설치는 장안은 더더욱 그랬다. 왕윤의 집이 조정 고관의 집인지라
경비가 엄하다 해도 별 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재빠르게
둘러대는 말을, 왕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 했지만,
곁에 서 있던 아현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하다는 것을, 조운은
깨달았지만 모른 척 넘기고 자신의 처소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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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지공탄(指空彈): 손가락으로 기를 모아 구체의 형태로
뿜어낸다. 먼 거리의 적도 정확히 공격해내며 소리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다. 적에게 명중시 상처는 극히 작아 거의
발견이 되지 않지만, 뇌나 심장을 직격으로 맞출 시 십중팔구는
즉사한다. 작가의 창작이다*작가주
2.1성(一成): 무협지를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자주 접한
단어일 것이다. 성成은 공력의 단계를 재는 단위라고도 할 수
있는데 10년 정도를 수행한 사람은 1성成의 공력을 지녔다고
친다. 20년정도의 수위를 지닌 공력이라면 2성成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60성의 공력, 즉 60년 공력은 1갑자甲子라고 한다.
하지만 3성 정도의 공력을 쌓으려면 반드시 30년을 수련을
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전수해주는 경우도
있으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면 단 1년 안에 몇 성의
공력을 쌓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전통적으로 무인 집안에서 뛰어난 무인이 계속해서 배출되는
이유는, 부친이 죽기 전에 자신이 쌓은 공력을 후계자에게
전수해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고 소설상에서
설정했다*작가주
3.장력(掌力): 손바닥으로 내리친 힘*작가주
화정은 초선의 얼굴 위에 잘게 썬 당근을 열심히 올려놓고
있었다. 굉장히 열중하고 있었지만 뜻대로 잘 안되는지 당근
조각은 이따금 땅으로 떨어졌다. 곁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속으로
연신 킥킥거리던 아영은 화정의 신경질적인 음성에 등줄기를
세우면서 시선을 다시 바늘로 옮겼다.
"얼굴 좀 움직이지 말아요!"
분명히 아영에게 퍼부은 잔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속으로
몰래 웃고 있던 아영으로서는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속담을
실감하게 해 준 것이었다. 뭐야, 괜히 내가 놀랐네, 하고 속으로
몰래 투덜거리던 아영은 부드러운 비단을 꼭 쥐고, 다시 바느질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힘든걸요."
얼굴 위에 잔뜩 얹어놓은 당근 조각 때문에 입을 움직이기
힘들텐데 재주도 좋다. 저렇게 정확하게, 알아듣도록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여하튼 그 정도로 초선은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초선의 가벼운 불평 아래에는 어느 정도의 불신도
깔려있다는 것을, 아영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하루종일 당근을
갈아대더니 그것을 벌써 며칠동안, 초선의 얼굴 위에 올려놓고
있다.
특히 이 곳에서 당근이란 것은 20세기처럼 결코, 마구
굴러다니는 값싼 채소가 아니다. 엄청나게 귀중한 채소다.
제아무리 왕윤이 재력이 조금 있다지만 그 비싼 당근을, 먹는
것도 아니고 갈아다가 얼굴에 붙여대고 있는데, 초선이 그를
즐겁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처음에는 아영도 그 행동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슬쩍,
화정에게 물어보았고, 초선 역시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한 채
함께 대답을 재촉했었다. 화정은 한쪽 눈썹을 가볍게 꿈틀,
하더니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해 주려는 것' 이라고 답했다.
아영은 그제야 화정이 하고 있는 것이 소위 말하는 `팩'
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사는 편은 아니어서 미용에 크게 신경을 쓸 수는 없었지만
관심은 많았던 아영은 재깍 알아들었던 것이다. 가끔씩 잡지를
친구들에게 빌려다 볼 때 읽은 적이 있던 구절이다. 피부를
좋게 하는 것에는 어떠한 관리가 좋으며 팩은 필수이며......
기타 등등의 자질구레한 내용들......옷 장사를 도우시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화장을 하는 것은 거의 메이크업 보조사
수준이었지만, 팩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이 없었다.
과일을 갈아다 얼굴에 얹으면 좋은 팩이 된다는 등의 내용을
보며 `아까운 음식을 왜 낭비하고 난리람.' 하면서 콧방귀를
뀌고 대수롭잖게 넘겼기 때문이다. 화장에 능숙하면서 팩에는
무감각했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아이러니겠지만 여하튼
아영의 진실은 그러했다.
하지만 화정은 팩을 여러 번 해 보았는지, 꽤나 능숙하게
실행하고 있었다. 화정이 조금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로
노려보자 도로 입을 다물고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초선은
이제 불평하기조차 포기한 것 같았다.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는
초선을 향해 `안됐다......'고 중얼거리던 아영은 다시
바느질감으로 눈을 돌렸다.
아주 얇고 촉감이 고운, 흰색의 비단 곁에는 자신이 대충 그린
그림이 놓여있었다. 처음에, 화정이 옷의 모양새에 대해
설명했을 때, 아영은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화정이
요구하는 옷은 이 곳, 즉 후한(後漢)시대의 스타일과 거리가
멀었다. 한창 이후에 도래하는 당(唐)나라의 후궁(後宮)들이
입던 것이라 알려진 그런 스타일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가슴부터
가리는 톱 모양의 긴 드레스에, 위에는 아슬아슬하게 몸의
곡선이 비치게 하는 아주 얇은 비단을 걸친 유형이다. 소매는
매우 길고 폭이 넓었는데다 매우 드레시하고 예쁘기는 했지만
문제는......상당히 노출이 있는 형이라는 것에 있다.
톱 모양의 긴 드레스 위에 무얼 걸친다지만, 너무 얇은 비단으로
되어있는지라 어깨와 팔이 그대로 보인다. 당대에는 궁중
의상이었다 할 지라도 이 시대는 다소 보수적이라 여자들이 몸을
꽁꽁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아영과 초선은 당장 질겁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특히 더 기겁을
할 만한 것은......
<이걸 어떻게 이렇게 길게 찢으라는 거야!>
아영은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쥐면서 불평했다. 발끝까지 덮는
그 긴치마마저.....오른 쪽을 길게 찢어버리라는 것이었다! 옆이
쫙 터진 치마라니, 특히 춤을 출 때 입을 옷일텐데, 아마 다리가
다 보일 것이었다.
<야, 너 아무리 네가 안 입을 거라지만......이건 너무했다!>
불만을 노골적으로 쏘아붙이는 아영의 곁에서, 초선까지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동조했었다.
<그래요, 어깨와 팔을 모두 노출시키는데다......이 옷,
조금만 몸을 숙이면......가슴도 보일 것 같은데 다리까지.....
이건 너무......>
특히 자신이 입어야 할 당사자이니 불만이 더 높은 것은
당연했다. 불타는 분노와 당황으로 붉게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는 초선과 아영의 낯을 보아서라도,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지만 화정은 두 사람의 불만을 묵살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시선을 사로잡아야 해. 여자들은 불평할지
모르지만 남자들이 보기에는 다르니까. 특히 춤을 춘다면
더더욱 그렇지.>
어차피 모든 것을 계획했던 사람은 화정이었다. 영리한
아이니까 믿어야겠지, 하고 애써 불만을 접으려 했지만 아직도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기는,
아영이 보기에도 이 시대가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그렇지,
만약 20세기에서 초선같이 몸매가 예쁜 여자가 이런 옷을 입고
춤을 춘다면, 사람들의 넋을 한차례 빼 놓을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사람의 본능만은 시대를 초월하여 공통되게 남는 법이니, 이
시대에서도 통할 지도 모른다. 특히나 화정의 말대로라면 성적인
매력은 표현이 극도로 억눌러진 시대이니 더더욱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그런 매혹적이면서 섹시한 모습을 본다면, 이 시대의
남성은 이천 년대의 남성보다 더욱 넋을 잃을 것이 뻔하다는
설명이었다.
도리어 거부감이 들지 않을까, 하고 반문하는 아영에게 화정은,
춤이라는 예술 활동이 그런 점을 무난하게 눌러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온통 눈이 부시도록 흰 옷이니 잘만 만든다면
정말 예쁜 의상이 될 것 같았다.
`사실 고대 중국의 의상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어느덧 자신의 불만을 그렇게 합리화시키면서 작업에 열중했다.
아영의 머리칼 위에는 온통 짧은 실밥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손가락은 가끔씩 바늘에 찔려 생긴 상처 덕택에 엉망이었지만
조금은 즐거웠다. 바느질만은 어릴 때부터 늘 해왔던 것이라
손에 익어있었고, 자신이 쓸모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런 중요한
일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뿌듯했기 때문이리라.
"휴우!"
옆에서는 이윽고 당근을 치우고 얼굴을 씻은 초선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영은 초선을 또다시 대충 훑어보았다. 확실히,
자신이 늘 팩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비웃었던
것은 너무 성급한 생각이었다. 초선은 본래, 하얗기는 했지만
조금 푸석푸석하고 거친 피부결을 지녔었는데 화정이 며칠간
당근을 얹고 오랫동안 꼼짝도 못하게 한 이후로 피부가 더 하얗게
변했으며 촉촉하고 결이 고와졌다. 느낌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영이 보기에는 초선의 피부는 여하튼, 엄청나게
좋아진 것 같았다.
`나도 이 일이 끝나면 당근으로 팩이나 열심히 해
볼까나.......'
실험대상을 보고 효과를 확신하게 된 것이다. 자연히
자신도 실행에 옮기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은
더 예뻐질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이 되었지만......
"아얏!"
다른 생각을 한 사이, 무정한 바늘이 아영의 손가락을
또다시 헤집었다. 짧게 비명하면서 아영은 손가락에 고여든
피를 입으로 빨았다. 씁쓸하고 싱거운 맛, 그리고 비린내가
입안에 퍼져나갔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손가락을 빼낸 아영은 그 사이에 바늘이
땅에 떨어진 것을 깨닫고 허리를 숙였다. 차가운 바닥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면서 은빛 바늘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전등이 환한 20세기와는 달라서, 촛불은 바닥까지 훤하게
비추어주고 있지 않았다.
아영은 속으로 신경질을 내며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히 바늘을 찾았다. 어둑어둑한 시야를 탓하며
한참 바닥을 더듬자 차갑고 가는 쇠가 신경을 자극했다.
기쁜 마음에 손가락으로 바늘을 집었지만 얄궂은 바늘은 아영의
손가락을 또다시 공격했다. 아영은 얼굴을 다시 찡그리고
바늘을 손가락에서 뽑았다. 그 바늘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허리를
세워 의자에 도로 앉는데, 오늘도 화정은 초선에게 당부사항을
가르치고 있었다.
"몸 동작 하나를 하더라도 부드럽고 기품있게 행하세요.
가까이에 다가가서는 눈을 들어 꼭 남자의 시선을 보다가,
상대방도 초선님을 응시하거든 시선을 떨구어 애타게 하세요.
계속해서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삼가시고요. 남자가 여인에게
반하는 조건은 용모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드러우면서
애타게 하는 행동이 외모보다 더 큰 요소가 될 수도 있지요."
아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바늘에 다시 실을 꿰었다.
또다시 행동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다. 이름을 짓는다면 `남자
꼬시는 법' 이라고 해야 할까? 약간 비꼬면서도 귀는 화정의
말을 향해 열려있었다.
저 아이, 참 특이하다. 워낙에 싸늘하게 구는 얼음공주였기에
연애에 대해서는 맹탕 모를 줄 알았더니 의외로 박식하다. 이
다음에 제 아버지 뒤를 이어 그룹 총수가 되면 계열사 중
특히 화장품이나 향수 계열을 직접 맡으면 성공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박식하다.
며칠째 초선에게 걸음걸이나 팔을 움직이는 법, 어조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화정은 여포나
동탁이 어떤 타입인지까지 각각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런 타입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고 원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놀란 아영이 곁에서 `혹시 너, 진짜로 점쟁이 인 것 아니야?'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을 때 화정은 그저 무뚝뚝하게
답했었다. 삼국지를 읽었을 뿐이야, 나머지 처신에 관한 의견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여포는, 본처가 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조건과 소개에
의해 혼인한 것이니 연애는 모르겠지요. 특히, 무인이니 행동이
거칠고 성격이 직선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남자들은
조신하고 청순한, 양가집 규수 타입에게 묘한 흥미를 느낍니다.
그러니, 여포의 앞에서는 헤픈 행동을 금하세요. 예를 든다면
사도 어르신께서 초선님께 `여 장군께 술 한잔 올려라.' 라고
말씀하셔도, 즉각 따르시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하다는
듯 눈을 살짝 흘기고 가시려는 태도를 보이세요. 이렇듯
경계하되 다가서는(警戒而 近) 태도를 보인다면, 여포는
초선님께 강한 매력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영은 바늘을 습관적으로, 능숙하게 놀리면서도, 그러한
화정의 강연을 듣고 문득 머릿속에 생각하나를 떠올렸다.
`저렇게 연애에 대해 잘 아는데......완벽한 조건에 연애에
대한 법칙에 통달까지 했으니......저 애는 정말 마음만 먹으면
거의 모든 남자들의 마음을 끌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울적해졌다. 자연 바늘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문 채 바느질을 하는 아영의
심정이야 어떻든, 화정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동탁은 워낙에 색(色)을 밝히며 미녀 후궁을 800명이나
거느리는 입장이니 여포보다 힘듭니다. 하지만 이런
호색가일수록 조강지처에게는 약한 법. 그러니 매혹적인 춤을
추고 난 이후, 슬픔에 잠긴 듯한 눈매를 짓고 정숙한 행동으로
대처한다면 동탁 역시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점은 여포를 대할 때와 같습니다. 정숙하게 행동하세요.
특히."
화정은 잠시 말을 끊었다. 화정의 말을 필사(筆寫)까지 해
가며 열심히 새겨듣던 초선은, 화정이 한동안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턱에 가늘고 긴 검지를 살짝
대고 미간을 약간 찌푸린 화정을 보면서, 아영은 차라리 초선이
아니라 화정이 연환계를 부추키는 역할을 했더라면, 하고
생각했다. 진지하고 깊은 눈매는, 얼음처럼 차갑고 고고하지만
맑고 청초하기도 했다.
"......특히 미리 이야기해 두지만 여포나 동탁은 모두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온 부류. 그들은, 아끼는 여자의 눈물에
의외로 약합니다. 초선님의 강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초선님의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은......슬픈 얼굴입니다."
그 말에 아영은 바느질을 하던 손을 멈추었고, 초선 역시
얼굴에 당혹스런 감정을 비추었다.
"예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초선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화정은 확신해주었다.
"초선님은 미모만으로 두 사람을 홀딱 빠지게 할 만한
절색은 아닙니다. 하지만......초선님의 눈물은 거칠게 살아온
두 사람을 옭아매기에 충분하죠."
아영은 그만 소리가 나도록 혀를 차고 말았다. 관찰력도
참......못 말리게 세밀하다. 하긴, 모르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초선이......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던 적이 여러번
있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그녀가
눈물을 짓거나 슬퍼하고 있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그, 그렇다면......저는 동탁과 여포, 두 사람의 마음에
모두 들도록 하려면......조신하면서 청순한 그런......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세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초선님은 실제로도 그런 분이니까요."
화정은 초선의 말을 차갑게 긍정하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초선은 꽤 당혹스러웠는지 이마에 땀방울을 송글송글
맺은 채 화정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런 초선을, 화정 역시
꽤 긴 시간동안 응시하고 서 있었다. 아영은 손에 땀이 나는
것도 모른 채, 바늘을 멈추고 두 여자를 살폈다. 그리고 아영은
다시한번 확신했다.
`예쁘다......'
깨달았다. 사모하는 사람 대신, 죽이려는 두 사람 앞에서
사모하는 척 해야 하는 고뇌를 안고있는 초선......그런 그녀는,
지금 화정이 제안하는 역할에 깊은 회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원망보다, 슬픔을 더 깊게 지니고 있는 초선의
눈빛에는 사람의 가슴을 에는 듯한......깊은 한(恨)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한이 뿜어내는 진정한 슬픔과 깨끗한 초선의 심성이
어우러진 모습......그것은, 초선이 너무나 빛나고 애처로워
보이도록 하는 요소였다. 이때만은 초선도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천하절색이 될 수 있다고 아영은 깨달았다.
`그래, 저런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그 누구도 거절하기
힘들겠지.......'
아영은 화정의 안목에 속으로 다시 탄성을 내지르며 바늘을
힘주어 쥐었다.
"여포 앞에서는 늘 여포를 그리고 있으며 동탁을 어쩔 수
없이 따라 것처럼 행동하세요. 동탁에게서는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돼요. 정성껏 대하세요. 혹시,
동탁이 여포에게 초선님을 넘기겠다는 식의 말을 하면, 그를
모시는 것이 기뻤는데 여포같이 난폭한 사람에게 가라하다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세요. 정말로 죽으려는 척을 꼭 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초선님이 간절한 눈빛으로 본다면, 동탁
역시 초선님을 매우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느질을 열심히 하면서, 아영은 어떤 사람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렇다면? 화정, 그렇다면 그 사람......같이
연애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차가운 사람은......?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나같이 평범한 아이도 붙들 수 있는거야? 마음속으로
끊임없는 의문을 삼키면서, 아영은 고개를 숙이고 바느질에
열중했다. 그런 아영의 곁에서는 초선이 화정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
조운의 설득에 결국 넘어간 영각은 왕윤의 앞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에 동의하고 말았다. 조운은 두
가지의 근거를 들어 설명했는데 그 근거란 첫째로 조운과 영각,
그리고 아현과 화정, 아영 만으로는 사씨 형제와 같은 엄청난
자들을 막기가 힘드니 어느 정도의 힘과 지위를 지닌 왕윤의
도움을 얻는 것이 좋겠다는 것, 둘째는 왕윤 역시 동탁
일파에게 이를 갈고있는 입장이니 기밀이 새어나갈 염려가
적다는 것이었다.
영각은 처음에는 극구반대를 하면서 화정과 아영에게도
입을 다물 것을 고집했지만, 조운의 제안을 듣고 나서는,
여전히 화정과 아영에게는 입을 다물고 왕윤에게는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왕윤은 방에 들어서자 조운과
영각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적잖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본래 뻣뻣하고 곧은 사람이었지만 긴장한 모습을 보니 마치
대쪽같이 보였다. 정말로, 대쪽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흰 모발과 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강인하고 정정한 생김새와
형형한 눈빛을 보아도 그렇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더더욱
`예사 인물이 아니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뿐 해는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조운은 확신하였다.
"자네들이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은밀을
기하는가?"
조심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방을 메웠다. 그는 중년의
나이임에도 백발이었다. 그리고 중년의 나이임에도 눈빛과
음성은 젊었다. 영각은 초기에는 불안과 의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왕윤을 훑어보았지만, 약간의 시간동안 왕윤을 대하고
나더니 태도를 바꾸었다.
아마, 영각으로서도 왕윤을 안심할 수 있는 인물로 판단을
내린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운은 속으로 나지막하게 웃었다.
세상 돌아가는 형세나 사람을 보는 안목이 조운 자신보다도
뛰어난 영각이었다. 스스로 낸 제안이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에는 표가 나도록 짜증을 내고
하루종일 신경질을 내는 등, 아직도 어린 아이같은 면이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판단에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하면
재빠르게 유감을 버리는 면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한참동안, 왕윤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영각은, 왕윤이
무안해졌는지 뻣뻣한 태도로,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포권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허나 워낙에 중요한 일이라 절로
경계가 일었습니다. 우선, 몸이 불편하여 감히 앉아 뵙는
것을 용서하시지요."
처음의 건방진 눈빛을 금방 버린 채 겸허하게 말을 건넸지만,
왕윤은 아직도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표정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었다. 어색한 두
사람의 분위기가 못마땅해진 조운이 끼어들었다.
"사실 황호가, 만신창이가 되어 온 것에는 꽤나 대단한
자들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아직 감정을 풀지 못한 영각이었지만, 조금은 호의를 지니고
있는 조운이 끼어들자 왕윤도 표정이 조금 느슨해졌다. 왕윤은
고목나무처럼 바짝 마른 양손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그건 자네에게 들었네. 꽤 무예 실력도 있다지......내
무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자네는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굉장하게 느껴졌는데 그런 자네가 인정한다면
가볍지는 않겠지.......어떤 자이기에 그리 다쳤는가?"
침착하게 음성을 깔고 강직한 어조로 차분차분 따져묻는
왕윤에게는 역시 고관대신의 기품이 흘러넘쳤다. 조운은
그만하면 됐다고 판단하고 입을 다문 채 뒤로 약간 물러섰다.
그 다음부터는 영각이 역할을 할 차례였다. 영각은 왕윤의 질문에
얼굴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르신도 틀림없이 아는 자들입니다. 사현......이란
자입니다."
왕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지껏, 약간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왕윤은 대번에 흥분한 나머지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사현? 설마......! 동탁의 주술사를 말하는 겐가? 천년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주술의 귀재(鬼才)라던.......?"
그의 목소리는 놀람을 넘어서서 경악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강직하고 철 같은 왕윤이었지만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예상했다는
듯, 영각은 덤덤하게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사현과 면식(面識)은 없어서 용모를 몰랐습니다만,
그가 자신의 친동생이라는 사융과 만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사현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상하군......내 알기로 그는 최근에 이 도성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네. 게다가 그 정도의 주술사라면 평범한
행인들의 심장을 먹을 필요가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어르신, 실례지만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만......."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연발하고 있는
왕윤에게, 조운이 잠시 양해를 구했다. 왕윤은 오른손으로 수염을
길게 쓸면서 일그러진 눈으로 조운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행인들의 시체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분명 심장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단 한번에 강한 물리력을 가하여 심장을 뽑아낸
듯했습니다. 쇠나 기타 물질의 냄새가 없었으니, 장력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지요. 하지만 한가지의 특징이 더 있었습니다."
"심장이 없다면 사람의 소행이 아닌가."
"처음에는 황호와 이 자룡도 그리 믿었습니다. 허나, 그 시체들은
모두, 흡기(吸氣)를 당했습니다."
왕윤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떴다.
"이보게, 조운.......자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네만......물리적으로 심장을 뜯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람
뿐이야. 사물 중에서는 강시(畺屍)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물리적으로 그렇게 강력한 힘을 낼 수는 없어.......흡기는
사물만이 행할 수 있는 것, 심장을 단번에 뜯어간 것은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모순을 어찌
설명할 터인가?"
아귀강시라 해도 한번에 심장을 뚫을 수는 없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아귀강시가 물리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산 채로 뜯어먹기까지 한다. 하지만 야금야금 뜯어먹을
뿐, 한번에 강력한 물리력을 동반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심장같이
거대한 내장을 뽑아내는 것은, 아귀강시가 몇 천번을 개조되어도
불가능하다.
사현은 천년에 한번 겨우 나올 정도의 초술사(超術師)*인 것은
옳으나, 소환술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자에게는 아귀강시가 한계다. 반동탁 연맹군과 대전했을 때,
동탁이 강시를 이용해 승리를 이끌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사현이
강시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밀담(密談) - 밀담이라
하여도 시간이 지나면 소문이 번지게 되어있다. 설령 동탁과
같은 강력한 권력자일수록 주변에 첩자가 수천 명은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 내용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다.
또한 강시는 시체를 사용한 주술이지만, 주술 자체가 매우
어렵다. 아귀강시도 천년에 한번 난다는 주술사가 겨우 소환해서
쓰는 판인데 아귀강시에 비해 몇 배는 고단수의 술수인 강시
이용을 누가 감히 이루어 내겠는가. 술수도 이렇게 어려울뿐더러,
술수를 안다고 해도 커다란 제약이 뒤따르는데 그것은......시체
자체의 자질이었다. 강시는 엄청난 물리력을 지니는 사물(邪物)이다.
사고가 없는 대신 굉장한 물리력을 지닌다. 맨주먹 하나로 웬만한
바위 정도는 가볍게 쪼갠다. 이런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니는
대가로, 강시가 될 수 있는 시체는 천개의 시체 당 한 구
정도밖에 안된다. 선천적으로 강력한 힘을 타고났으며, 젊어서
죽었고, 팔다리나 손가락, 또는 발가락, 사지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잘려나간 곳이 없이 시체의 상태가 온전하게 죽은 자여야 한다.
이런 시체를 찾는 것이 쉽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쟁통에 죽은 자가
시체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이런 난세에는, 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시체가 없다. 특히, 사지 중 하나도 상하지 않고
멀쩡하게 죽었다는 조건은 더욱 만족하기 힘들다.
그리고, 저런 시체를 어렵사리 찾았더라도, 주술을 걸어서 성공할
확률은 겨우 열에 하나 정도이다. 이러니 강시를 만든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강시를 하나라도
만들 수 있다면 그 자는 실력도 막강하지만 운도 굉장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태를 천천히 돌이켜보는 조운에게, 왕윤의
재촉이 날아왔다.
"어찌 설명할 것인가."
엄중하지만 다소 급한 느낌이 숨은 목소리였다.
".......강시는 만들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사물입니다.
게다가, 사현이 워낙에 실력자인데다 운이 작용하여 강시를
만들었다하여도......흡기는 불가능합니다. 제 판단에
이건.....하나의 소행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과 사물의
소행입니다."
왕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이전에 겨우 살아나온 군사의 말로는 분명
하나였다고 했네. 어둡고 거리가 멀어서 형체는 못
알아보았지만 분명 하나라 했어."
"예, 그렇습니다, 어르신. 제 이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분명 하나입니다."
영각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왕윤은 영각의 개입에 조금
얼굴을 굳혔다가도, 자신의 주장이 옳게 받아들여지자,
헛기침소리를 내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영각의 다음
말은 왕윤을 더욱 헷갈리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과 사물의 소행인 것도 옳습니다."
왕윤이 분노한 기색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자네들, 무슨 수작을 하는 겐가? 나와 감히 말장난이라도
치자는 건가?"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이건 분명......소혼술(召魂術)을
썼던 사람이거나 악령에게 빙의(憑依)된 사람의 짓입니다!"
조운의 말에 왕윤의 얼굴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넋을 뺀 듯한 눈빛으로 조운을 멍하니 보고있는
왕윤에게, 영각이 말을 보탰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사현과 사융 형제가 이 일에
개입된 것은 옳습니다. 허나 그들은 절대 사람의 심장을 파먹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망자들의 심장을 먹고 흡기를 한
자는......여자입니다!"
여자!
매우 무서운 단어였다. 조운도 알고 있었다. 여자란 매우
무서운 단어였다. 한없이 약하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한없이
매서운 것이 바로 그 여자라는 단어였다. 왕윤 역시 여자라는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동작마저
멈추고 있었다. 노련한 대신인 왕윤도, 여자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는 잘 알 것이다. 조정에서 숱한 여인들의 피비린내나는
짓거리를 겪어온 왕윤이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분명......여자란 존재가 간교한 곳은 있지. 그렇다해도
자네들의 말은 조금 믿기 힘이 드는군......여자가 그렇게 엄청난
물리력을 가한다는 것을 이 왕 늙은이는 찬성할 수 없어."
왕윤은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면서도 단호하게 잘랐다.
그렇기는 하다. 여인들이 뒤에서 머리를 간교하게 굴려서 숱한
피비린내를 유발시킴을 겪었지만, 직접 나서는 것은 겪지 못했을
테니까. 영각은 의외로 답답한 반응을 보이는 왕윤에게 덤빌 듯
외쳤다.
"분명 여잡니다! 그것도 스물도 안 된 것 같은 젊은 여잡니다!
손에서 장력을 일으켜 어린 아이의 가슴을 뚫어내고 단번에
심장을 꺼냈습니다! 그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자신의 입에 빠른
속도로 삼켰습니다, 제 눈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격렬한 영각의 반응에 왕윤도 당황한 듯했다. 영각은
쿨럭거리면서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아마도 건강상태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흥분을 한 것이 원인인
듯했다. 저렇게까지 흥분하는 것을 보면 영각의 말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믿게 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왕윤은 단번에 여지껏 고수해오던 깐깐하고 방관적인 태도를
버리고 얼굴에 두려움을 담은 채 되물었다.
"......정말인가? 그런 어린 여자가......가슴을 한번에 뚫고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삼켰다고?"
"그렇습니다. 얼굴에는 이상한 것을 쓰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십대의 어린 여자였습니다!"
영각은 아직도 씩씩거리고 호흡을 고르게 하지 못한 채로,
외쳤다. 영각이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 같아 조운은 영각에게
눈짓을 보냈다. 영각의 엄청난 흥분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왕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것이었다.
영각은 조운의 시선을 받고 나자, 길게 숨을 내쉬면서 벽에
몸을 기대었다.
"소혼술은.......소멸된 수법이네. 그렇다면 악령에게 빙의된
여자라고 보아야 겠군.......그렇다면 설명이 되는구먼. 완전한
사물도, 사람도 아닌 자가 될 터이니......자네가 겪은 바를
좀더 소상히 말해주게."
왕윤도 그제야 뭔가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영각은
눈을 감더니 한번 더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애써 흥분을
가라 앉히려고는 하지만 진정하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조운은 창 밖으로 다시 눈길을 던졌다. 혹시
엿듣는 자가 있는지 살피려 함이었다. 아직까지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여자가 심장을 먹는 장면을 덮쳤습니다. 헌데 갑자기 웬 놈이
나타나 저를 막았습니다. 아귀강시를 이용해 공격해오더군요.
일단 피했습니다. 다시 기회를 노려볼 양으로 뒤를 밟았는데
어떤 사람이......시공이동을 해서 나타났습니다."
"시공이동! 정녕 시공이동인가?!"
왕윤의 목소리가 쩌렁, 하고 울리며 가늘게 떨었다. 조운은
왕윤에게 급히 일깨웠다.
"목소리가 크십니다!"
그 말에 왕윤은 입을 다물었지만, 얼굴에서는 아직도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시공이동이 분명
엄청난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주술사가 아닌 다음에야,
크게 흥분할 것은 없었다. 왕윤은 시공이동이 실전된 주술인지
어떤지도 상세하게 알지는 못할 터였다. 그런데 왕윤은 조금
과민하다 할 만큼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운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사융이란 자였습니다. 제가 이전에 고결한 분께 우연히 배운
술수가 있어 요행, 그들의 전음술을 탐지해 들었습니다."
"으음......"
왕윤이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면서 긴장했다.
"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신들의 뒤를 밟는 자가 있다고
걱정을 하더니, 사현이 중앙 관리일 리는 없다고 잘라
이야기하더군요. 조정 대신들은 이곳에 대해서는 손을 뗐다면서
말입니다. 자신이 여지껏 관군을 모두 몰살시켰으니 조정은 포기
상태라고요.
사융은 그 말에 찬성하면서도 `가면을 쓴 채 들켰으니 그녀에
대해서는 걱정 안해도 됩니다.' 라고 제 형에게 말했습니다.
사현은 그런 사융의 말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저를 죽이자고
제안했고, 사융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큰 의문없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끊고 뭔가 생각에 빠진
영각을 보면서, 왕윤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분명, 그 일에 대해서는 관군들이 매일같이 소멸된 지라
조정에서도 손을 뗐네. 동탁의 영향이 컸지. 그렇지만, 사현이
직접 관군들을 전멸시켰을 줄은.......! 이것만으로도 꽤
어마어마한 사실인데 또 무엇인 문제란 말인가?"
"어르신."
짧게 왕윤을 부른 영각은, 잔뜩 굳은 얼굴을 들었다.
"여자 쌍둥이에 관해 아십니까?"
"무어야?"
심각한 이야기로 한창 분위기를 가라앉히더니 대뜸 여자
쌍둥이에 대해 묻는 영각이, 왕윤은 괘씸하게 여겨졌는 듯하다.
이내 기가 차다는 음성을 내뱉고 성난 표정을 하였다. 하지만
영각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여자 쌍둥이는 불화를 의미합니다. 난세에는 불길한
단어입니다. 반대로, 남자 쌍둥이는 화합을 의미합니다. 누가
만든 의미인지는 몰라도, 대부분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당연히 남자 쌍둥이가 더 좋은 의미를 지닐 겁니다."
"자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왕윤이 물었다. 이미, 영각의 말을
초반에는 철저히 무시하다가 심각한 사실을 알게 된 왕윤으로서는,
이 이상 영각이 아무리 헛소리를 해도 끝까지 들어봐야겠다는
결심이 선 상태 같았다.
그리고 묘한 것은......의아한 목소리로 묻는 왕윤의 표정은
잔뜩 굳은 긴장이 담겨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아는 사람이, 전혀 모르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긴장을 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조운이 읽기로는 분명 그랬다. 아까 시공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부터 확실히 왕윤은,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남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봐 긴장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영각은 왕윤의 질문에, 자신의 만신창이가
된 팔을 쓰다듬으면서 코로 숨을 내쉬었다.
"사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쌍둥이, 쌍둥이에 관한 것은
어찌 되었나? 찾았나?' 사융이 대답하더군요. 천하를 뒤지고
있으며 북평에서도 조사를 계속했지만 쌍둥이 자매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단 3쌍이라고요.
하지만 그들 중에서 누구도 아니야, 이런 대답만 했습니다.
사현은 그런 사융의 대답에 자신도 장안과 그 근방을 뒤졌으나
둘 다 살아있는 여자 쌍둥이를 단 1쌍 밖에 못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 역시 아니라고 하더군요.
헌데, 순간 그들이 저의 기척을 알아냈고 저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집요하게 쫓더군요. 그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집요하게는 쫓지 않더니 그때는 정말 끝장을 보자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쌍둥이에 관한 사건이 뭔가 꽤,
중요하고 극비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일단 살아야 뭔가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도망치기로 하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돈을 주고는 옷을
바꾸어 입자고 하여 저의 복장을 그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그렇게
일단 사씨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제 의매에게 몰래 서신을 띄워
자룡의 소재를 알아낸 이후 겨우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들이 오는 도중 몇 번이나 저를 추적하여
괴롭혔습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분명, 압니다. 어르신, 그런데, 이런 구절을 아십니까? 쌍둥이
자매 중 하나, 수정연꽃(瑛蓮)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으리라(得雙胞胎中之瑛蓮之者 將得天下)......"
"컥!"
그 순간이었다. 영각은 물론 조운도 적잖이 놀랐다. 왕윤이
시커먼 핏덩어리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영각이
몸을 움직였고, 조운 역시 왕윤에게 다가가 왕윤을 진정시키려
하였다. 왕윤은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운이 왕윤의 팔로 손을 뻗치려는데 소매를 떨치면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목소리를 낮게 하여 묻는 것이었다.
"어찌 그 구절을 자네들이 아는가?!"
영각은 예상외로 왕윤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자 망설이는
눈치였다. 조운을 슬쩍 바라보았다. 조운은 영각에게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조운의 그런 반응에
괜히 옷자락을 움켜쥐고 망설이던 영각은, 목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심호흡을 했다. 조운의 제안에 찬성하고 털어놓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왕윤에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이곳에서 저 친구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사현 그 자가 보낸 듯한 자객이 끼어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저 친구가 거리에서 시체가 날아들었다고 둘러 댔잖습니까?
그때는 죄송했습니다만 사실 그건 사현의 자객이었습니다. 그
자를 협박하여 그 문제의 구절에 동탁과 사씨형제가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그건......!"
조운은 순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윤 역시 뭔가
숨기고 있는 눈치였다. 자신들은 목숨을 건 기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조정 고관대신이라 숨겨야 할 것이 아무리 많다지만,
왕윤의 눈빛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쉽게 넘길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저 대신을 설득해야 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서 목으로 들어오는 칼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을 잡은 조운은 얼굴빛을 굳히고
앞으로 나섰다.
"사도 어르신, 사실대로 말씀하십시오. 저희들은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나눈 이상, 어르신께서도
사현과 동탁의 표적대상이 되어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이미 비밀을
공유했으니 어르신께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왕윤은 조운의 강경한 제안에 다소 망설이고 있었다. 꽤나 깊은
기밀인 모양이었다. 조운은 그렇게 머뭇거리는 왕윤에게 결정타를
한번 더 안겨주었다.
"따님의 연환계 역시 함께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왕윤의 몸이 굳었다. 그는 한참동안, 말없이 자신의
무릎만을 보고 있었다. 힘없이 떨군 고개를,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치켜든 왕윤의 얼굴에는, 어떤 그늘과 슬픔, 고뇌같은
것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짧게 탄식했다.
"한황실의 사백 년이 끝나가려는가......? 결국 예언대로
되어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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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초술사(超術師): 주술사 중에서 초인적인 경지에 이른 자.
작가의 창조어이다*작가주
초선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칠현금(七絃琴)을 참으로 곱게
뜯었다. 맑고 듣기 좋은 칠현금의 소리는 때로는 사람이 우는
것과 같은 목소리를, 때로는 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어떤 때는 맑은 물이 흘러가는 느낌을, 어떤 때는 바람이
잔잔하게 또는 격렬하고 불고 지나가는 느낌을 냈다. 온갖
옥구슬로 아름답게 장식이 된 칠현금이 저렇게 신묘한 소리를
낼 수 있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영은 넋을 놓고 초선의
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곡조(曲調)가 어느 정도 흘러가자,
초선은 문득 목청을 가다듬고 청아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읊었다.
*******
한잎 앵도꽃이 새빨간 입술로 열린 듯,
옥(玉)을 바수어 따스한 봄 뿜어내나
정향(丁香) 같은 혀에 숨은 칼날 토하듯 후려
나라 어지럽히는 간사한 도적 목베려 하네.
*******
一點櫻花啓絳唇
兩行碎玉噴陽春
丁香舌吐橫鋼劍
要斬奸邪亂國臣 (이문열의 삼국지 中)
*******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말 그대로 옥구슬이 쟁반 구르듯,
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음성이었다. 티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목소리......화정은 눈을 들어 아영을 보았다. 아영은
입을 쩍 벌린 채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초선이 칠현금을
타며 노래하는 양을 열심히 보는 중이었다.
그런 아영의 태도에서는 진심으로 감격한 듯한 냄새가 절로
우러나왔다. 화정은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 다시 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목소리, 아름다운 노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을 담고 빛나는 매서운 노래......'
그랬다. 삼국지를 읽을 때에는 이 연환계의 부분에서, 그저
여자 하나에 넘어가 비참한 말로를 맞은 여포와 동탁을 비웃었을
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여포.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삼국지
최강의 장수. 장비와 관우, 유비를 한꺼번에 맞아서도 당당하게
싸웠던 전설의 용장(勇壯).
그가 꾀가 많고 간사한 동탁의 곁에, 그것도 꾀주머니 이유와
함께 붙어있다면 그야말로 지(知)와 용(勇), 양면에서 동탁은
천하무적이 되는 셈이다. 허나 본래 꾀가 많은 자는 속이기
힘들고 용감무쌍한 힘만 지닌 자는 속이기 쉽다. 결국, 왕윤은
이유보다 여포를 동탁과의 이간질 상대로 결정했다.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초선은......
"정말 대단해요!"
노래와 칠현금 연주가 어느새 끝이 났던 모양이었다. 잔뜩
무거운 생각에 젖어있던 화정은 아영의 즐거운 목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아영은 박수까지 치면서 초선에게 즐겁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 온지 닷새. 아영은 역시 사교성이 좋은
사람 같았다. 초선은 물론, 춘안과 향라라는 시녀 둘과도 금세
허물없이 킥킥거리고 있었다. 본래 사람이란 오랫동안 함께
지냈을수록 친해져야 하는 법인데, 화정과 가장 거리가 소원하고
오히려 초선과 향라, 춘안과 친하다.
`어쩔 수 없지......'
아무리, 이곳에 와서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해도 자라난
환경과 교육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화정은 역시, 자신이 사교성이
떨어지는 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아야만 했다. 늘 초선과
아영이 즐겁게 수다를 떨면, 화정은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는
입장이었다.
다정다감한 초선의 성격 역시 아영과 잘 맞는 곳이 있어서, 두
사람은 거의 자매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삼국지를 읽을 때
초선은 분명, 이 당시에 열 여섯이라 들었는데, 초선의 입으로
말하기를 자신은 올해 열 여덟이라고 했다. 조운과 동갑이요
화정이나 아영보다는 한 살이 많은 셈이었다.
하지만 초선은, 이미 동탁과 여포의 앞에서는 열 여섯이라
속일 셈이었다. 나이 어린 여자를 좋아하니 나온 생각이었다.
화정은 `혹시 삼국지의 저자나 역사 기록가들도 모두 초선이
열 여섯으로 속인 것을 모르고, 본래 나이가 열 여섯인 줄
알았던 걸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정은 칠현금을 상세히 보면서 초선에게
열심히 칠현금에 관해 묻고있는 아영을 보면서, 초선이 부르던
노래 구절을 다시 생각해냈다.
`정향(丁香) 같은 혀에 숨은 칼날 토하듯
후려(丁香舌吐橫鋼劍) 나라 어지럽히는 간사한 도적 목베려
하네(要斬奸邪亂國臣)......숨은 칼날 토하듯......
목베려 하네.......'
초선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아영에게
친절하게 칠현금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둥근 얼굴형에,
눈매도 온순하고 뺨에 제법 붙어있는 살이 인상을 부드럽게
보이게 한다. 가녀린 몸매에 부드러운 인상. 저런 사람이
그토록 무서운 뜻을 품고, 그토록 무서운 노래를 불러, 그토록
무서운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고 있다.
`역시......전쟁이란 것은.......'
화정은 한숨을 남몰래 내쉬면서 옆에 놓인 붓을 만지작거렸다.
슬프게 한다. 사람을 끊임없이 슬프게 한다. 적이라는 명목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또다른 아이의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
아비를 잃은 아이들은 아비들끼리 죽고 죽이는 지 모르고
부둥켜안고서 눈물을 쏟는다.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내들의 속은
새까맣게 타서 아무것도 남지를 않는다. 사모하는 정을 가슴에
담고 사모하는 사람의 소망을 위하여 적과의 동침을 일삼아야
하는 젊은 여인은 속절없이 매서운 노래로 한을 토로한다.......
`위쪽에서 지휘하는 자는 손가락 하나, 말 한마디로 수천,
수만의 목숨을 죽게 한다. 그는 가만히 앉아 그 목숨들의 대가로
승리와 전리품을 챙긴다. 그렇지만 직접 싸운 수천, 수만은
전리품은커녕 가족들에게 유해와 쓰라린 고통만을 안겨줄
뿐이다.......'
화정은 말없이 초선과 아영을 바라보았다. 초선. 그녀는
사모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은 채, 그를 위해 적과 동침하고
그들 앞에 웃을 것을 결심했다. 매서운 뜻을 노래에 담아
말하면서도, 눈은 웃어야 한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행복한
여자의 흉내를 내면서, 가슴속으로는 한없이 타들어가는
심장을 어찌할 수 없어 울어야 한다. 분명 본인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택했어. 그 험난하고 잔인한 길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이 초선의 입장이었다면, 그러했더라면
자신 역시 저렇게 험난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겠는가?
`불가능해.'
화정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렇다. 이렇게 온갖 약자들을
동정하는 척하면서도 화정 스스로에게 어느 측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진실된 화정의 속마음은 답한다.
`난, 위쪽에서 지휘해서 수천 수만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
그 목숨들의 대가로 승리와 전리품을 챙길 거야.'
누구도 화정에게 욕할 권리는 없다. 치하하고 비겁하다면서
무어라고 한다면, 반문하겠다. 당신은 성인군자(聖人君子)인가?
진정 그 전화 속으로 직접 뛰어들겠는가?
`누구도......누구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 인간의 본능은
이기심이야......'
화정은 그렇게 믿었다. 초선. 그녀가 매서운 뜻을 지녔다지만,
초선을 직접 보고, 직접 관찰하고, 직접 그녀와 대화해 본
화정은 알 수 있었다. 나라 때문이라기보다, 사모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그 길을 택했던 초선을. 사랑이라는 감정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버리고 한 몸을 기쁘게
던지려는 초선을.......
`하지만......영원이란 것은 없어......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해. 언젠가는 죽고......인간이 세운 나라 역시 언젠가는
망해. 이름이 바뀌든 통치자가 바뀌든......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의 것은 변해. 사랑도......영원이란 것은 없어.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어째서 그런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려는 거지.......?'
분명 연환계를 권유한 것은 화정 자신이다. 아니, 그녀가
권하지 않았더라도 역사는 정해진 대로 흘러가리라고, 아직까지도
화정은 믿었다. 아무리 자신의 등장이 삼국지에 들어갔고, 잠시
마초가 유비 측에 있었으며 시간의 진행이 빨라졌어도, 역사는
정해진 대로 흘러가리라고 아직도 그녀는 믿었다.
한 개인이 거대한 물결을 틀기는 힘들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는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것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얻기만 하고 잃은 것이 없는 그런 인생은 없다.
신은......공평하다!
`그래, 초선은 그 물결을 바꾸어 냈을지도 몰랐던, 그런
사람이야. 그리고 그 대가로 그녀는......'
화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초선과 아영을 바라보았다.
즐겁게 떠들고 있다. 하지만, 아직 아무 생각도 없이 즐겁게
보이는 아영과 다르게, 최근 들어 초선의 얼굴에서는 옅은
그림자가 떠나지 않고 있다. 화정은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이따금, 촉촉한 눈망울에 맑은 것이 어리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대가로 초선은......자신이 사모하는 자를 버렸다......
아니, 버려야만 했어......'
초선은 스스로 자신의 사모하는 정을 배반하고 사모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잃었다. 초선에게 이후에 돌아오는 것은 파탄난 자신의
인생......정들지도 않은 남자와의 원치않는 동거......
그 모든 것을 각오하고까지 연환계에 뛰어들 만큼, 그녀는
왕윤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르고 뛰어들었을까. 대단한 예언가는 아닌 이상, 그리
자세히는 몰랐어도 어떤 불길하고 슬픈 예감을 지녔던
것만은 틀림없다.
`영원이란 것은......없어. 변해. 모든 것은 변해!'
대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자면......그리고 나를 가엾은
눈으로 바라보는 두 아가씨를 바라보면 자꾸만 생각난다.
왕윤 어르신의 한숨과......슬픔과 기대......
......문득 기억났다.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의 기억이......
그 날의 왕윤 어르신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
그날따라 일자로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왕윤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곁에 서 있던 초선이 초조하게 질문을
되풀이했다.
".......준비를 하오리까?"
나지막하지만 명백하게 서두르자는 의도가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화정과 아영은 눈동자만 굴리고 섰을 따름이었다.
왕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답답해진 초선이 다시 한번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화정이 입을
열었다.
"왕사도 어르신, 이제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포에게 통지를
하시지요."
화정의 덤덤하면서도 강한 음성이 귀를 사로잡자, 그제야
왕윤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담이 크고 강직한 왕윤으로서도
적잖이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왕윤은 고개를 돌려
화정을 바라보았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저 여자......차라리 저 여자를 연환계의 주체로 거는 것이
훨씬 승률이 컸으리라. 이곳에 와서, 손님을 맞는 예를 위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을 입혔을 때, 왕윤은 숨이 절로 멎는
것을 느꼈었다. 지금도 그렇다.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그렇지 않아도 하얀 피부는
유난히 눈이 부시다. 가지런한 눈썹과 작고 갸름한 얼굴,
불빛을 담고 투명하게 빛나는 영롱한 회색의 옅은 눈동자,
또렷하고 큰 눈매, 칠흑같이 진하고 은보다 하얀 윤을 내는
긴 머리카락, 가냘프지만 곡선이 또렷한 몸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강한 신녀라고 볼 수 있으리라......
`초선......'
자연 눈길이 곁으로 옮겨졌을 때, 왕윤은 조금은 탄식하고
말았다. 초선. 올해 열 여덟의 나이. 술자리에 억지로 불려갔을
때, 윤무(輪舞)하는 기녀(妓女)들 사이에서 유난히 꽃 같은
아이가 하나 있었다. 얇고 화려한 비단자락을 나부끼며
윤무하던 소녀는, 격렬하게 춤을 추느라 자신의 옷자락이 몸에
감겨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감긴 옷자락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선과 잘록한 허리선을
그대로 보였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손동작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연중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왕윤을
보고는, 곁에 앉았던 사람이 허허거리면서 소녀를 불러 왕윤의
곁에 앉도록 했다. 왕윤은 그녀를 보면서 감탄했다.
참으로 빼어난 자색이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은 아니었지만,
능히 여러 남자들을 빠지게 할 만한 미모였다.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기대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참으로
아름다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왕윤은 그녀의 그러한 점이
아름답게 보였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보다 못하지(過猶不及)......'
늘 왕윤이 여자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주장해 왔던 것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여자는 결국 파멸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추녀를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 남자의 본성이다.
결국 왕윤은, 지나치게 아름답지는 않고 적당히, 그저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을 극상(極上)으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초선은 그러했다. 매우 아름답지만 한 나라를 흔들
정도는 아니다. 평범한 속에서 빼어난 정도의, 즉
적당한 미(中道美)를 지닌 사람이다. 그리고, 그날.....초선을
거금을 주고 사서 데려온 왕윤은.....자신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온 과정을 털어놓고 눈물짓는 그녀에게서.....때때로는
경국지색으로 변하는 두려움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랬다.
그녀는......적당한 미인이었지만 때때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담을 쌓았다......'
불안해진 왕윤은, 경국지색은 잘못하면 집안을 망친다는
말을 생각해내고는 초선을 차마 취하지 못했다. 그저, 생각
끝에 가기(歌妓)로 삼아 여식(女息)같이 길러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역시, 여자란 마음을 끌리게 하는 존재인
것을. 특히나 아주 오래 전에 상처(喪妻)했던 왕윤으로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지만......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그리고 춤을
추지 않는 한은......너는 두 이리를 연환계에 몰아넣기에
부족하다......차라리 곁의 미인이라면.....눈짓 한번으로
두 놈을 녹일 수 있을 터인데......'
왕윤은 화정과 견주어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자신이 초선을 보내고 싶지 않아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며 쓰게 웃기도 했다.
그렇다. 분명 자신은......초선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늘 거리를 두고 애써 딸처럼 생각했지만 절대로, 절대로
연정(戀情)을 지울 수 없던 초선을.....그렇게 보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음탕하고 난폭한 동탁의 아래에서
수모를 겪게 될 초선을 생각하면......
`대체 나는 무슨 짓을......!'
왕윤은 부르르 떨리는 몸을 억지로 자제하면서 눈을 들어
다시 초선을 바라보았다. 초선의 마음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괴롭게 한숨을 내쉴 때마다, 뒤에 숨어 몰래 보면서
눈물짓던 초선을, 살그머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위로하기 위해
낮게 노래를 부르면서 칠현금을 타던 초선을......왕윤은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야! 실행해야 한다! 저 아름다운 여인은
우리를 위해 묘책을 마련했을 뿐더러 이곳에 와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기껏 연정에 못 이겨 저런 여인을 연환계에
대신 끌어들이려 함은 잘못이다.....'
왕윤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목에서 우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택한 길이다, 초선아......후회하지 않겠느냐?"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도 함께 침울해졌는 모양이었다.
동그랗게 뜬눈으로 왕윤을, 놀란 표정으로 응시하던 초선의
눈동자에, 이내 눈물이 방울져갔다. 왕윤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초선이 무릎을 꿇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그녀는 눈물을 섞어 외쳤다.
"미천한 것을 거두어 입히고 먹여주신 분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미 저는 살과 뼈가 분리되어 까마귀밥이 될 각오가
되어 있사옵니다! 후회 따위는 없사옵니다!"
강하게 외쳤지만, 이내 어깨를 들썩이면서 눈물을 비오듯
쏟는 것이었다. 왕윤은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차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정말로.....그랬다. 특이하게도
그녀는......우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격렬하게
흐느끼면서 엎드려 통곡하는 초선을, 왕윤은 손수 일으켰다.
"나라가 엉망이면 수난을 당하는 것이 여인이라더니......
내가 못나 귀한 너를 그런 더러운 놈들에게 던져야 하는구나!
그만 울어라......앞으로 갈 길은 더 멀고 험하다......
너는 너무 착하고 눈물이 많다......!"
그렇다. 이 순간에도 초선은 자신을 손끝만큼도 원망하고
있지 않았다. 왕윤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 가녀린 소녀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 절대로 연환계를 실패로 이끌 수
없다.......!
초선은 자신을 일으킨 왕윤의 품에서 원없이 눈물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는 깊은 원한같은 것이 담겨져 나왔다. 왕윤은
자신의 뺨 위로 무엇인가 흘러내림을 느꼈다.
`내 이 두 역적 놈들을......결딴내고 말리라......!'
"어르신, 소녀는 결코 어르신을......원망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소녀의 마음 속에는 어르신에 대한 우러름.......
우러름......과......감사와......"
초선은 울음으로 인해 말을 뚝뚝 끊으면서도 끈질기게
이어가더니, 결국 다 말을 맺지 못하고 크게 흐느낌을 터트렸다.
왕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초선을 강하게 쓸어안았다. 그런
왕윤에게로, 초선의 가녀린 몸이 무너지듯 기대왔다. 결국 초선은
탄식하면서 말을 끝맺고 말았다.
".......감히......품은......연모......가
남아있었사옵니다.......천한 것이 감히...... 귀한 어르신을
연모했사옵니다!"
한을 품은 초선을 하늘이 동정했는가. 우렁찬 우레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영은 어느새 소맷자락을 들어
열심히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화정은
말없이, 비가 쏟아지는 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조용한 방안에는,
통곡과 흐느낌과, 동정을 싣고 나오는 울음소리, 그리고 비
소리만 가득 찼다. 한가지 더, 그런 애잔함과 반대로 그 상황을
차가운 눈으로 주시하는 화정의 얼어붙은 눈빛이 있었음을,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조운은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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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회상한다면 왕윤과 초선이 어떠한 대가를 치루어
냈는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