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2 예언(豫言)과...... (20/24)

3-12 예언(豫言)과......

『시공이동은 고금(古今)을 통틀어 불가능하다. 인간이 어찌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일그러뜨리겠는가. 기기(機器)나 동물의 

도움없이, 단순히 인간의 힘만으로 눈을 한번 깜빡이는 시간 

내에 수천 리를 자유자재로 드나든다는 것은 천지신명이 

지정하신 법칙에 어긋나니, 그 어찌 마(魔)가 아닐 수 없으랴. 

허나, 불가능을 끊임없이 탐하는 것이 바로 사람. 시공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시간의 균형이 깨짐이라. 이 세상이되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세 명의 객(客)이 오며, 셋 중 하나는 

정해진 흐름을 뒤흔든다. 시공이동을 일삼는 자가 셋 이상 

나타날 때, 천자(天子)는 천자가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닐 때, 천자가 신하가 되고, 신하가 천자가 될 때, 

이 세상이되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객이 셋 올 때, 세상은 

혼란하고, 천하를 다스리던 왕조는 종말을 고한다. 

현자(賢者)의 어리석은 소망은 시간의 고리를 부수고 객을 

셋 불렀으나 결국 정해진 틀대로 흘러가겠구나, 왜곡되고 

반복되어버리는 역사여......한치 앞을 보기 힘듬이로다. 

오직 그 시대로부터 이천 년 앞을 아는 자만이 내다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왕조가 쇠락해 갈 때, 쌍둥이 자매 중 

하나, 수정연꽃(瑛蓮)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으리라 

(得雙胞胎中之瑛蓮之者 將得天下)』 

******* 

"......이게 무업니까?" 

종이를 사각거리면서 시선을 고정시키는 영각에게, 왕윤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영각은 답을 서둘러 재촉하지 않고 

한번 더 그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이것은 

필사본(筆寫本: 베껴 쓴 책)이다. 본인이 직접 쓴 것은 

아니었다. 잘은 몰라도 그런 느낌이 왔었다. 

영각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글이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다시한번 그 필사본을 

유심히 뜯어보는 영각에게, 이윽고 왕윤이 답을 들려주었다. 

"고조를 도와 한(漢)을 연 공신......승상, 아니 상국(相國)* 

소하(蕭何)의 비록(秘錄)일세." 

"소하의 비록!" 

영각의 눈이 충격을 담고 커졌다. 조운 역시 할 말을 잃고 

묵묵히 서서 왕윤을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소하! 소하가 

누구던가. 한을 창업한 고조 유방은 개인적으로는 재주가 

뛰어난 자는 아니었다. 도리어, 낮은 출신 사람으로서* 

말투가 상스럽고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단, 재주가 많은 사람을 많이 얻었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데 능숙하였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덕에 

유방은 자신보다도 훨씬 강대하고 훨씬 뛰어났던 항우를 꺾고 

천하를 제패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이 유방을 숭배하지만, 사실 유방에게는 

재주가 없다는 것 이외에 굉장히 큰 단점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시기심이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돕는 

신하들마저 자신보다 지나치게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매우 

경계했는데, 결과적으로, 천하가 통일되자마자 그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 을 실행했다. 

항우를 정벌할 시절, 주군이던 유방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많은 백성들에게 우러름을 얻은 한신을 

제거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장량이 토사구팽을 미리 

예견하고, 벼슬을 거부한 채 산으로 들어가 신선(神仙)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토사구팽을 피한 공신은 장량과 소하 뿐이었는데, 소하는 

유방의 곁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유방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 

종국에는 환상의 벼슬이라는 상국까지 지냈다. 한나라 역사 

이래 상국을 지낸 자는 오직 소하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투에는 크게 능하지 못해서 전투 중에는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내정을 다루는 일에 천재적이었다. 

내정을 잘 다스려 군량과 군마의 확보 등 재정적인 원조를 

충실히 해 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눈에 뜨이지 않게 공을 

세움으로써 토사구팽의 피바람 아래에서도 스스로를 적절히 

지켰다. 

게다가 유방도, 소하를 만약 죽일 생각이 있었더라도 한신이나 

영포(英布)*, 팽월(彭越)* 같은 장수와는 달리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는 막 일어난 나라였으며, 나라는 아직도 

내정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한신, 영포, 팽월은 항우라는 대대적인 세력이 죽었으니 오히려 

위협이 되는 존재였지만 소하는 달랐던 것이다. 워낙에 내조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던 자였다. 특히, 군인으로서는 크게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으니 모반에 대한 근심도 적었을 것이다. 막 

창업한 입장에서 소하는, 고조에게 꼭 필요했다. 

`그러나......소하가 이런 비록을 남겼다니? 그는 주술적인 

능력은 전혀......' 

조운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각 

역시 의외라는 듯 왕윤에게 물었다. 

"소하가 이런 비록을......말입니까?" 

왕윤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그의 미소에는 어떤, 

질문 같은 것이 들어있음을 조운은 읽어냈다. 

`위장이다!' 

조운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느끼고는 입을 열었다. 

"소견이 좁은 운(雲)이 감히 짐작하겠습니다." 

소하. 소하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해본다면 이런 추리만 

나온다. 아직도 조금 어리둥절한 영각과,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왕윤의 시선이 날아왔다. 왕윤이 허락했다. 

"말하게." 

"아마도......장자방(張子房)의 말을, 소상국이 옮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운도 나름대로 확신을 담은 추리였다. 왕윤은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천히,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는 

왕윤의 눈빛에서는 은근한 감탄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허어, 자네는 무인(武人)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식견(識見)이 깊구먼.......맞췄네. 이건 소상국이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장자방이 언급했던 것이라네." 

장량. 역시 유방의 공신이다. 매우 뛰어난 책사였으며 

주술에도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조운이 본래 저자를 장량으로 

생각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장량은 주술에 능하기는 했지만 수법(水法)이나 화법(火法), 

투시(透視), 전음(轉音)같은 것에 능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실용주술(實用呪術)은 장량보다도 한신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장량에게는 고금의 어떤 술사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탁월한 주술력이 있었는데 바로 미래의 일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주술, 즉 예지술(豫知術)이었다. 

예지술에는 세 가지가 있다. 몽견(夢見), 성견(星見), 

경견(鏡見)이다. 말 그대로 꿈(夢)을 통해 보는 방법, 하늘의 

별(星)을 통해 보는 방법, 거울(鏡)을 통해 보는 방법으로, 

예지술을 할 수 있는 주술사는 행하는 방법의 뒤에 풀이한다는 

뜻인 해술사(解術師)자를 붙여 부른다. 

즉, 몽견을 행하는 자는 몽견해술사(夢見解術師), 성견을 

행하는 자는 성견해술사(星見解術師), 경견을 행하는 자는 

경견해술사(鏡見解術師)라 부르는 것이다. 

예지술을 행할 수 있는 이는 역사 이래로 단 네 명만이 

있었을 뿐이다. 태공망(太公望)*, 제환공(齊桓公)*의 모사 

관중(管仲)*, 그리고 악의(樂毅)*, 장량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만큼, 예지술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술법이라 이야기되기도 한다. 수련으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예지술에도 상중하(上中下)가 있다. 먼저, 별을 

보고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이들 중 비교적 쉽다. 별의 

움직임은 만인(萬人)이 모두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알려진 별의 움직임으로 범인(凡人)이 읽을 수 있는 미래는 

정통된 성견해술사보다야 추상적으로 밖에 못 읽히겠지만, 

어쨌거나 성견은 고대부터 어느 정도 알려져 온 바가 많았고, 

그만큼 몽견이나 경견보다 난이도가 높지 않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몽견은 꿈으로 보는 것이기에 성견보다는 고단수의 

술수라 할 수 있다. 꿈이야 보통 사람도 모두 꾸는 것인데 

뭐 어려울 것이 있느냐, 하고 말할 수도 있지만, 몽견해술사는 

막연하게, 어쩌다가 심리적 요인이나 인간에게 잠재된 

예감만으로 꿈을 꾸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만약 자신이 `내일은 누가 나를 찾아올 것인가.'를 알고 

싶다면, 눈을 감고 꿈을 꾸어 그 답을 꿈속에서 미리 내다본다. 

꼭 잠을 자지 않더라도, 눈을 감고 약간의 무의식에 빠지면 

꿈으로 예지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몽견해술사도 

최고 술수는 되지 못한다. 

해몽술(解夢術)이라 하여 꿈에 관한 상식도 널리 퍼져있고 

보통의 사람들도 가끔씩은 놀랄만한 예감을 발휘해 미래의 

일을 가끔씩 꿈으로 볼 수는 있다. 

가장 고단수이며 어려운 것이 바로 경견이다. 물론 최고의 

예지술이니만큼 가장 정확하고 틀리지 않게 미래를 짚어내며, 

주술 도구인 거울만 있다면 제약없이, 원하는 때에 미래를 

볼 수 있다. 또한 성견과 몽견이 기껏해야 수 년 앞 

정도밖에 내다보지 못하는 것에 비교해 경견은 수백 년 

앞까지도 짚어낸다고 한다. 

경견은 말 그대로 거울을 이용하는 것인데, 수경(水鏡)*과 

통상의, 얼굴을 비출 때 쓰는 거울(鏡)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거울을 쓰는 것이 쉽지만 수경을 쓰면 내다볼 수 있는 미래의 

범위가 거울보다 훨씬 넓다고 하며 예지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같은 경견이어도 수경술사가 경술사보다 조금 

더 상위인 셈이다. 

악의가 성견해술사, 관중이 몽견해술사, 태공망이 거울을 

이용한 경견해술사였는데, 이에 비해 장량은 수경, 그것도 

보통 물에 보통 그릇을 이용해 수경을 만들 수 있는 그런 

경견해술사였다고 한다. 

예지술의 종류가 세 가지밖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렇게 

단 네 명만이 예지술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의 

예지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현재까지 알려진 

예지술로는 장량이 단연 최고였던 셈이다. 

유방을 도운 것도 유방이 패자가 될 것임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며, 토사구팽을 피할 수 있던 것도 토사구팽이 행해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했다. 조운은 장량이, 소하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며, 말년에 들어서는 유방에게 회의를 

느껴갔는지라 소하와도 자주 다투었음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소하는 주술적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부터 근 

사백 년이 지난 세월이다. 그런데 이 종이에는 사백 년이나 

이후인 지금의 형세를 예언하는 듯한 구절이 분명 있다. 

예지술이다. 그러나 예지술 중에서도 최상위의 예지술인 

경견이 아니면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그 

시대의 경견해술사로 알려졌으면서 소하와 친분이 있는 

인물, 장량의 예언이 되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장량의 예지를 소하가 어떤 경로를 거쳐 남긴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운은 왕윤에게 자신이 헤아렸던 바를 

천천히 이야기했다. 길고 긴 조운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던 왕윤이 찬탄했다. 

"젊은 사람이 상당하군......그렇다네. 장량은 초기만 

해도 고조를 돕겠다는 의기에 가득 차 있었네. 또한 장량은 

상당히 고집이 세고 자손심이 높은 인물이었지. 그는 예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건만, 자주 행하지는 않았다네. 

`예지술로 적의 행동을 모두 미리 볼 수는 있다. 허나 그렇게 

해서 적을 이기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 내가 

머리를 직접 짜내 계책을 내고 그것이 들어맞는 즐거움을 

예지로 인해 빼앗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허무한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할 정도였지. 즉, 일부러 예지술을 

행하지 않았다는 이야길세. 

하지만 장량은, 대원수로서 유방을 위해 많은 나라들을 

제패한 한신이 진심으로 아낌을 받기는커녕 대원수의 인장을 

빼앗길 뻔한 일을 보고는*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네. 과연 

자신이 유방을 계속 진심으로 모셔야 하겠는가, 하고 말일세. 

한 고조의 체면과 한 황실의 계속적 통치를 위해 민간과 

일반의 학계(學界)에는 한신과 고조, 장량에 관해 잘못된 

정보가 흘려져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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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상국(相國): 본래 황제 이하, 신하의 벼슬 중 가장 고위직은 

승상丞相이다. 소하 역시 한 고조 유방이 나라를 세울 시 

승상이었으나, 고조 유방은 소하를 승상보다 더 높인 벼슬, 

상국을 내렸다*작가주 

2.한고조 유방은 낮은 신분이었다: 유방은 장년이 되도록 

사수泗水라는 곳의 정장亭長이란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이 

정장이란 벼슬은 현재로 말하자면 지방 경찰서장과 비슷한 

직위로서 매우 형편없는 하급관리다*작가주 

3.말투가 상스럽고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의 다툼, 항우, 유방 휘하의 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초한지楚漢志를 보면 유방은 때로 꽤나 적나라하고 

상스러운 욕설로 휘하 신하들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작가주 

4.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 토사구팽과 같은 뜻. 본래 

교토사양구팽이지만 줄여서 토사구팽으로 부른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달리던 개가 삶겨지다, 라는 뜻이다. 

본래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나라의 재상 범려가 한 말로 

전해지지만, 유방에게 죽게 된 한신이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질 때 남긴 아래의 대사로 유명해진다. "과연 사람의 

말과 같구나.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좋은 개는 삶겨지고, 

높이 날던 새가 사라지니 좋은 활도 저장되고, 적국이 

깨어지니 지략있는 신하도 죽는구나! 천하가 이미 정해졌으니 

나도 진실로 삶겨짐이 당연하구나! - 果若人言.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后列傳>" 

5.영포(英布): 본래 항우의 장수였으나 항복하고 공을 세워 

유방의 공신이 된다. 한신, 팽월과 함께 삼대 공신이었고 

회남왕淮南王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한신과 행월이 모두 

모반죄를 쓰고 죽는 꼴을 보고 스스로 모반을 일으켰다가 

결국 패하여 죽는다*작가주 

6.팽월(彭越):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 통일에 공을 

세워서 양왕梁王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한신이 죽은 이후 

양梁나라 출신인 태복太僕이라는 자가 여태후에게 거짓으로 

모반을 했다고 알려서 잡혀 죽는다*작가주 

7.실용주술은 장량보다도 한신이 뛰어났다: 미리 밝혀두지만 

주술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소설 상 설정이다. 실제로 장량이나 

한신이 주술을 사용했을 리는 없다. 한신은 당연히 주술을 

사용했다는 말이 없으며 장량은 유방이 한황조를 이룩한 후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지만, 이 설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작가주 

8.태공망(太公望):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본명은 강상姜尙.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속칭 강태공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에 봉함을 받아 그 시조가 되었다.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웨이수이강 - 위수渭水 - 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문왕을 만나게 

되었다는 등 그에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한漢나라 시대에는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육도六韜》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낚시질하는 사람을 

태공망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두산세계백과 

9.제환공(齊桓公):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의 군주. 

재위기간은 BC 685∼BC 643.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내란으로 형 양공襄公이 살해된 후, 이복동생 규糾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포숙아鮑叔牙의 진언으로 규의 옛 신하인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 그 후 관중의 협력으로 제후와 종종 회맹會盟하여 신뢰를 

얻었다. 특히 규구葵丘- 河南省 - 에서의 회맹으로 그의 패자의 

자리가 확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산융(山戎)을 쳐서 연(燕)을 

구하고, 노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으며, 오랑캐의 침임으로 

멸망한 형邢을 이의夷儀 - 山東省로, 위衛를 초구楚丘로 옮겨 

부흥시켰다. 

내정에서는 군사적 강화와 상업·수공업의 육성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관중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에 추방한 

신하를 재등용하여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났다*두산세계대백과 

10.관중(管仲): 가난했던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환공의 이복동생인 

규糾의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포숙아의 진언進言으로 환공에게 기용되어,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되었다.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의 제후와 9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하였다. 저서로 알려진 

《관자管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가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두산세계대백과 

11.악의(樂毅): 전국시대戰國時代인 BC 3세기 전반에 활약한 

연燕나라의 무장. 위魏나라 초기의 무장 악양樂羊의 자손. 

현자이면서 전쟁을 좋아했다. 연나라의 소왕昭王이 현자를 

초빙한다는 말을 듣고 위에서 연으로 가 아경亞卿이 되었으며 

후에 상장군相將軍이 되었다. 

조(趙)·초(楚)·한(韓)·위·연의 군사를 이끌고, 당시 

강대국임을 자랑하던 제齊를 토벌하여 수도 임치臨淄를 

함락시키고, 그 재보를 연나라로 옮겼다 - BC 284. 그후 

5년에 걸쳐 제나라의 70여 성을 함락시키고, 이들을 모두 

군현郡縣으로 하여 연에 소속시켰다.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제나라 전단田單의 

이간책으로 죄罪를 덮어쓰게 되어 조나라로 달아나 관진觀津에 

봉해졌다. 그러나 혜왕이 그를 잃은 것을 후회하여 사죄해 왔기 

때문에 연·조 두 나라의 객경客卿이 되었다*두산세계대백과 

12.수경(水鏡): 성스럽고 정결한 특수한 물을, 성스러운 그릇에 

담아 주술을 넣어 물의 표면을 들여다보는 것. 물로 만든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주술이 높으면 보통 물과 보통 그릇으로 

수경을 만들 수 있다*작가주 

13.한신이 아낌을 받기는커녕 인장을 빼앗길 뻔한 일: 앞서 

언급한 적이 있다. 한신이 주변 국가를 모두 하나하나 쳐가는 

사이, 유방은 패배만 거듭했다. 결국 유방은 추격을 피해 한신이 

지키고 있던 조趙나라로 들어갔는데, 이때 일이 벌어졌다.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곳에서는 한신이 순찰을 나간 

사이 유방이 들어와 일방적으로 대원수의 인수를 반납하라고 

하였다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유방이 조나라로 들어와보니 

한신과 한신의 부장이 술에 취해 대낮에 코를 골고 있었으며 

대원수의 인수가 술이 질펀한 바닥에서 굴러다녀 분노한 유방이 

일시적으로 한신의 인수를 빼앗았다가 장량의 달램에 마음을 

풀고 용서하며 다시 인수를 한신에게 내 주었다고 하고 있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한신을 꽤 좋아하는 편이며, 따라서 전자의 

설을 믿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이야기 전개도 전자가 

타당했음을 전제로 삼아 풀어가려고 한다*작가주 

왕윤이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운은 

그런 왕윤의 얼굴에서 잠깐 스쳐가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왕윤은 대대로 고관대신을 맡아 지내온 집안사람이다. 특히, 

왕윤 자신도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 조정 원로대신 중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사람이었으니 황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중요한 기밀을, 왕윤은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젊은 청년 둘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혼란하고 

황실의 권위가 어느 정도로 땅에 곤두박질쳤는지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잘못되었다니요? 이 한심한 황호는, 한신이 당시 부장과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며 대원수의 

인수도 감히 술독 근처에 아무렇게나 굴려놓았기에 고조께서 

진노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수를 빼앗긴 것은 지당한 처사가 아니었단 

말씀이시옵니까? 아무리 장자방의 말이었다지만 다시 인수를 

돌려주신 것은 고조께서 너그러우시......" 

"그게 바로 일반적으로 민간인들과 학계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사실이지." 

왕윤이 고개를 저으며 영각의 말을 잘랐다. 왕윤은 사실을 

밝히기가 꽤나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조운은 묵묵히 왕윤의 

다음 말을 기다리자는 신호를 영각에게 보냈다. 영각은 

반(反)한신주의자였다. 그런 그이니만큼 한신에 관해 관대함이 

깃든 이론은 듣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조운은 생각했다. 

"본래는 그렇지가 않았다네......한신은 직접 순찰을 나가 

있다가 고조, 즉 당시의 한왕(漢王)께서 조나라로 오셨음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네. 한왕은 승전을 거듭하던 한신의 

앞에서, 자신이 패전을 거듭하다가 나타난 것이 심적으로 

편치 않은 상태였지. 

한신의 대원수 인수를 가져오라 해서 즉시 거두어들이고 

한신을 맞아들였네. 한신은 그를 보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한왕에게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라고 

말하여 한왕의 불신을 흔들리게 하는 것에 성공하였지. 

곁의 장량 또한 한신을 도와 변명하자 한왕께서는 장난을 

쳤다고 웃어넘기시고는 다시 대원수의 인수를 한신에게 

돌려주셨지. 허나, 이때 이미 한신과 장량은 한왕, 즉 고조의 

성품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네......" 

영각이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또다시 끼어들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다 합시다. 그런데 이 문서를 소하상국이 

쓴 것과 그것이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계속 듣게." 

성질이 급한 영각으로서는 결론이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특히나, 바깥에 첩자가 있는지도 신경 써가면서 듣자니 몸도 

좋지 않은 그로서는 더더욱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왕윤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그 이상의 질책은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조금 빨라진 속도로 이어나갔다. 

"그 이외에도 한왕이 한신에게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낸 

사건이 적지 않았네. 다른 이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해서 

귓전으로 넘기고 화젯거리로 일삼았을 뿐이지만 영특한 장량은 

그렇지 않았지. 그는 결국, 한왕 유방에 대한 불신감을 끝내 

소멸시키지 못하고, 항우와의 결전을 앞두었을 때 즈음해서 

수경을 만들었네......" 

곁에서 영각이 꿀꺽, 하고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조운은 바깥에 타인의 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재차 

확인하면서도 왕윤의 말에 귀를 열심히 기울였다. 

"수경을 통해 장량은, 적어도 고조가 왕조를 구축하고 

나서의, 그러니까 우리 한(漢)의 초기 100년 가까이를 보았던 

것이 분명하네. 요행히, 소하가 이때 장량을 찾았는데 장량이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더군......." 

왕윤의 말꼬리가 흐려지자, 조운은 안쓰러운 생각에 그의 

말을 조금 도왔다. 

"자신이 도와 세운 왕조가 초반부터 그런 풍운(風雲)을 

겪음*이 안타까웠던 것 아닙니까?" 

"그러했겠지......" 

왕윤은 조운의 말에 짧게 동의하더니 또다시 말을 끊고는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어찌나 깊게 한숨을 내쉬는지 땅이 

다 꺼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방금 전, 자신이 말을 도왔을 때, 짐작대로 왕윤의 눈썹이 

약하게 파르르, 하면서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좀 어색하다......사실 여후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에는 

장량의 조언이 가장 큰 몫*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장량이 여후의 행위를 미리 내다보고 

괴로워했다는 것은, 역시 어딘가 의문이 남았다. 하지만 

조운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는 초반부터 혼란한 한왕조가 어떻게 마감이 

될지 궁금했던 듯하네. 결국 장량은 자신의 수명을 

깎아가면서까지* 한왕조의 전체 미래를 내다보고 말았지." 

"전체 미래를!" 

영각이 놀랐는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영각도 영각이지만 

조운도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왕조, 그 하나의 

왕조가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통째로 모두 보았다는 말인가! 

"소하는 수경을 볼 줄 몰랐으니, 그 오랜 시간동안 장량이 

하는 일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모양일세. 장량은 그 모든 

것을 보고 종이에 기록하면서 탄식만 할 뿐이었지. 

그의 예지술은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계속되었네. 어느 정도로 

장량이 집중을 했는지는 소하가 남긴 글을 보면 알 수 있네. 

`자방은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경견을 행하여, 기다리다 못해 

돌아갔던 내가, 사흘 후 다시 찾아갔을 때에는 피부가 뼈에 

달라붙어 있었다.' 라는......" 

"......" 

"주술이 끝났을 때, 소하는 장량을 찾아갔지. 장량은 꽤 많은 

분량의 글을 적어놓고 있었네. 걱정이 된 소하가 식사를 권하자, 

장량은 탄식하며 말했다지. `자네와 내가 평생을 걸고 도모한 

왕조는 가혹한 운명을 지녔다네! 초반부터 순탄하지 못했으니 

풍운도 다른 왕조의 배로 심할 수밖에!' 

소하는 너무나 상심하는 장량이 근심되어 말했지. `왕조가 

창조되면 언젠가는 파괴되기 마련일세.' 장량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않았지. 여하튼, 그때까지만 

해도 장량은 자신의 예지를 종이에 적어 고조께 드릴 생각이었네." 

"고조께?" 

얼굴을 약간 찌푸리면서 조운이 말을 마주받자 왕윤은 시선을 

탁자 위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곁의 분재를 손으로 쓸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흐름이 중간중간 자주 끊어지자 

답답함을 그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영각이 성급하게 끼어들어 

말을 마무리 지어주었다. 

"그런데 장량은, 토사구팽이 결국 예지대로 행해짐을 보고는 

회의를 느낀 나머지 자신의 예지를 적은 종이들을 모두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겠군요." 

"그렇지." 

왕윤이 긍정하자, 영각은 자신의 추리가 들어맞았는데도 

궁금함이 잔뜩 남아서인지 조금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채근했다. 

"하지만 그 예지의 양의 한 줄 두 줄도 아닌데 어찌 소하가 

그것을 모두 기록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허......" 

영각의 예리하면서도 불만이 담긴 지적에 왕윤이 허탈하게 

웃었다. 왕윤이 기가 빠진 듯한 웃음을 터트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자 마찬가지로 답답해진 조운은 팔짱을 끼면서 영각을 

바라보았다. 영각 역시 작고 두툼한 눈을 안 보일 정도로 가늘게 

찢고 있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왕윤은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소하가 아무리 전투 쪽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지만...... 

내정에 있어서는 거의 천재의 수준이었다는 것은 자네들도 알지 

않나? 소하는 청수지능(淸秀知能)의 소유자였네." 

"청수지능!" 

영각이 나직하게 비명 가까운 것을 질렀다. 그 단어를 모를 

리 없다. 청수지능. 최고로 뛰어난 머리. 한번 읽은 것은 절대 

잊지 않고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은 채 베껴낼 수 있다는, 그야말로 

최고의 두뇌를 일컫는 단어다. 소하가 그 청수지능의 

소유자였다니! 

"소하는 평생, 자신이 청수지능의 소유자임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지. 장량에게 그 예지를 쓴 종이를 한번 읽기만 

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네. 아무리 소하와 친했고 영특한 

장량이었지만, 소하가 청수지능을 지닌 것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지. 장량은 설마 소하가 그를 기억하랴, 싶어 보게 허락하고 

말았지." 

"그리고 소하는 그를 보고 와서 모두 글로 남겨서 이 필사본을 

만들었던 겁니까." 

조운이 짧게 마무리지었다. 영각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스스로의 뺨을 문지르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왕윤을 향해 다시 

눈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소하의 팔사본......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량의 

예지가 얼마나 날카로웠기에 어르신이 안절부절못하시는 겁니까?" 

예리하다면 예리하다고 볼 수 있을 만한 질문이었다. 영각의 

물음에 왕윤은 허허하고 웃더니 이내 진지한 눈빛을 하며 음성을 

낮추는 것이었다. 

"날카롭지. 날카롭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 

조운은 문득 약간의 의문이 생겼다. 확실히, 영각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장량이 물론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썼다가 버린 종이 때문에 황실과도 친분이 깊고 

신뢰가 두터운 왕윤이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할 필요가 있는가? 

비록 장량의 예지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해도 몇 백년이라는 

시간의 벽이 있었다. 시간이 멀어질수록 예지의 정확도는 

떨어진다. 

장량 이외에 유일한 경견해술사였던 태공망조차도, 몇 백년 

후를 예언한 셋 중 두 개가 틀렸다. 이 태공망 이후로 나 

이후로 예지술사가 또다시 나타난다면 그는 천자가 되리라, 

경견해술사는 나 이후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강력한 천하통일을 최초로 이루는 자, 천하의 문서를 불태우고 

문(文)을 숭상하는 자들의 통탄을 듣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이 

경견에 사용하던 거울을 통해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강력한 

천하통일을 이루는 자가 문을 숭상하는 자들의 통탄을 듣게 

될 것이라는 사실......즉 진시황(秦始皇)에 관한 것만 맞아 

떨어졌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긋났다. 

태공망 이후로 예지술사는 세 명이나 나타났지만 관중, 악의, 

장량. 이 셋 중 누구도 천자가 되지는 못했다. 또한 

장량이라는, 훨씬 뛰어난 경견해술사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장량이 태공망보다 예지술이 훨씬 뛰어나다고 할 지라도 굳이 

겁먹을 필요가 없다. 조운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왕윤에게 

요구했다. 

"그의 예지가 날카롭다는, 근거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딱 잘라서, 차갑게 요구하는 조운을 뚫어지게 보던 왕윤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닫힌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왕윤은 턱의 수염을 다시한번 쓰다듬었다. 

"지금 자네들에게 보여준 것은, 그 장자방의 예언 중 

한 장이네. 나머지는 나도 볼 기회가 없었어. 게다가 장자방의 

예언서 중 상당부분이 뜯겨져 나가거나 훼손되었지. 

역대 황제들에게만 전해져왔고, 그들만이 볼 수 있었네. 허나, 

다들 자네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네. 그리고 그들은 그 

예언을 믿지 않았어. 하지만 일이 터지고 나서.......일이 

터지고 나서야 그들은 그 예언이 정확했음을 깨달았네. 

나도 그 종이를 정말 우연하게 기회가 닿아 보게 되어 그 

부분만이라도 필사를 해 놓았지. 그게 바로 지금 자네들이 

본 그 종이일세." 

왕윤은 잠시 말을 끊고는 다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방안의 분위기는 극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바늘이라도 

떨어뜨리면 그 소리가 귀를 울릴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영각이 목에 가래가 끓는지 잠시 헛기침을, 그것도 아주 

조심해서 옅게 했지만 마치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지른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는 조용하고, 또 심각했다. 

"창업자는 위대하나 분신은 영악하다. 세상을 뜰 때마저도 

걱정을 할 진저. 남은 분신은 천하를 조롱하며 사람돼지를 

기르다. 죽은 하늘이 지하에서 통탄하리다." 

순간 조운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분명, 추상적인 

말이다. 하지만 만약, 여후에 의한 여씨일족의 득세를 겪고 

난 사람들은 모두 머리칼이 송두리째 곤두섰으리라. 

분신. 분신은 분명 반려자를 이야기한다. 창업자는 유방, 

그의 분신은 당연히 여태후다. 유방은 죽을 당시까지 자신의 

욕심많은 아내 때문에 걱정했다고 한다. 홀로된 여후는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천하를 휘둘렀고 유방의 총비(寵妃) 

척부인을 인체(人 )라고 하며 혜제에게 보여주었다. 죽은 

유방이 지하에서 울부짖을 일이었을 것이다. 왕윤의 근거대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닌 자들이 가장 지엄한 남자를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니 천하는 어지럽다. 물이 부족하여 

농작물이 나지 않고 물은 계속해서 천지를 휩쓰는 때, 

총명한 성정을 지닌 자 타락할세라. 

오호라, 외척은 이럴 때 득세하는 법이니, 머지않아 

왕조는 잠시 무너지는가. 허나 밝은 이가 무력으로 

평정하여 왕조는 다시 존속하라." 

"......왕망(王莽)의 찬탈입니까, 그건? 밝은 

이(光)가 무력(武)으로 평정함(帝)은......역시 

광무제(光武帝)*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영각의 목소리도 가늘게 떨었다. 조운은 고개를 숙인 채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닌 자, 분명 환관(宦官)일 것이다. 한나라는 환관 

때문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도, 황실이 그 지경이 된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환관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십상시도 환관들이 아니던가. 그 환관들이 가장 지엄한 남자, 

즉 천자를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니 정치는 엉망이었다. 

결국 성제(成帝)때에 이르러서는 수년동안 

한해(旱害)*와 수해(水害)가 잇달았었다. 성제는 본래 

학문을 좋아하는 총명한 황제였지만 결국 타락했고 그의 

타락은 주변 외척들의 세력강화를 불러왔다......왕윤은 

긴장하고 있는 조운과 영각을 돌아보면서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 외에 수백 가지도 더 있네...... 

이러할진대, 믿지 않을 텐가?" 

왕윤의 반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왕윤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외에는 사실 이 왕 아무개도 모르고 있네. 워낙에 

기밀스런 글인지라.....나도 운 좋게 어쩌다 보게 된 것이네. 

아무튼, 이 윤(允)이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종이가 그 

예언의 일부라는 것 뿐이야. 

그저, 신비하다 생각하여 구절을 외고만 있었을 뿐 지금이 

그 구절이 이루어지는 때라는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하고 

있었군그래......자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시공이동이란 것이 

이루어졌음을 들었을 때, 그제야 이 미개한 늙은이는 깨달았네. 

장자방의 예견이 말하는 때가 이때라는 것을.....사현과 그의 

동생. 이 두 명이 이미 시공이동을 했다면......예견서에서는 

셋이라고 했는데 나머지 하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어찌되었건 있을 가능성이 있지. 

여하튼 시공이동은 행해졌네......하지만 설마, 동탁이 

거기까지 손을 댔을 줄은......! 여지껏 아무리 무례한 

자라해도 감히 그 예지서를 읽은 자는 없었네. 심지어는 

나라를 찬탈했던 왕망마저도......!" 

왕윤의 한탄에는 눈물이 섞여있었다. 그만큼, 한왕조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다. 조운은 영각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천천히, 자신의 손으로 옮겨쥐었다. 영각 

역시 너무 엄청난 사실 때문에 놀랐는지 손에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서 종이는 쉽게 조운의 손으로 옮겨왔다. 조운은 

종이를 한번 더 훑어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공이동을 일삼는 자가 셋 이상 나타날 때, 천자(天子)는 

천자가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닐 때, 천자가 신하가 되고, 

신하가 천자가 될 때, 이 세상이되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객이 셋 올 때......시공이동을 일삼는 자가 둘 이상 나타날 

때, 천자(天子)는 천자가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닐 때, 

천자가 신하가 되고, 신하가 천자가 될 때......' 

앞의 두 가지 조건은 이제 들어맞는다. 사현과 사융. 그 

두 형제가 시공이동을 일삼는다고 본다면, 나머지 한 명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의 시야 바깥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시공이동으로 인해 이미 균열이 생긴 공간에서, 

꽤 강력한 주술자가 시범삼아 시공이동을 운행해 보면 성공할 

수도 있으니까. 

여하튼 아쉬운대로 첫째 조건은 이미 충족되었다. 또한 지금은 

천자가 천자 노릇을 못 하고 있으며 동탁이 신하노릇을 하고 

있지 않다. 결국 천자가 신하가 되었고 신하가 천자가 된 

셈이다. 그런데......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마지막 구절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네." 

왕윤은 조운이 검지를 턱에 가져다댄 채 연신 눈을 찌푸리고 

중얼거리자,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조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종이를 왕윤에게 되돌려 주었고, 왕윤은 그 종이를 곱게 접어 

소매에 넣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영각이 다시 말을 

꺼냈다. 

"뭐, 마지막이야 해석이 되었건 안 되었건간에, 여하튼 

지금이 그 예언이 시행될 때라는 거겠지요. 그리고 이때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장량의 예지는 들어맞을 것이고..... 

유난히 예언이 구체적인 것을 보면 장량이 가장 신경써서 

예언한 부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영각의 확신하는 듯한 투에 왕윤도 찬성한다는 듯 가볍게 

동조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다. 보통 점술가들은 말을 좀 

포괄적으로 한다. 점술가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점술가와 예지술사들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예지술사들도 포괄적으로 예언을 남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량의 예언서도 약간 

포괄적인 것이 있기는 하나, 그의 예언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정확하고 구체적인 곳이 있었다. 조운은 영각과 왕윤을 

번갈아 살피다가 자신도 입을 열었다. 

"걸리는 것은 가장 마지막 구절입니다. 왕조가 쇠락해 갈 때, 

쌍둥이 자매 중 수정연꽃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으리라......라는." 

"풀이가 되는 궁극적 구절인 셈이지. 동탁 일파는 이미 그것을 

해결하는 것에 착수했고." 

영각이 한마디하자 왕윤의 얼굴도 더더욱 어두워졌다. 

"실은 이 늙은이도, 이전에 천자께 그런 밀명을 받았네. 이 

종이는 천자께서 직접 보여주신 것일세. 천자께서 장자방의 

예지서에 관해 설명하시고, 장량과 소하의 숨겨진 관계와 

예지대로 이루어졌던 과거 이야기를 하시면서까지, 이 종이를 

보이고 명을 내리신 게지." 

조운은 왕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을 보면서 조금은 

씁쓸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자께서는......직접 수정연꽃을 찾아 

취하셔서......왕조의 멸망을 막으시려는 생각이신 듯합니다." 

순간, 왕윤의 눈에서 불이 번쩍, 하는 것 같았다. 왕윤이 

덥썩, 조운과 영각의 앞에 엎드려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뜻밖의 상황에, 영각은 놀라면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운은 

가만히 있었다. 이해가 갔다. 저 충직한 대신의 심정이...... 

`모든 것을 바치려는 것이다.' 

조운은 그렇게 단정짓고 있었다. 연환계에 이용한다는 저 

대신의 가기(歌妓). 꽤 아리땁고 재치까지 있는 그 가기를, 

왕윤은 `딸' 이상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해도 덕망높고 사려 깊은데다 강직한 왕윤은 그 가기가 

자신의 딸 또래의 나이란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굳이 `딸'이라 강조하고 선을 분명히 긋고 있었던 것이다. 

조운은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초선이란 여자를 볼 때의 

왕윤의 눈빛. 그녀가 물러갈 때 그 가냘픈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짓던 왕윤의 숨은 한탄. 그것은 분명,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존재까지도......자신의 적들에게 미끼로 던지려 

하고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 원망이 가득할 것이고,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도......' 

게다가 자존심 높고 강직하다. 특히 조정에서는 관직의 

높이만으로는 윗사람이 많지 않을 사람이다. 그런 자가, 

새파랗게 젊고 역시 아들 또래밖에 안될 청년들의 앞에서 

이렇게 큰 절을 하고 있다. 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사도 어르신. 목이 날아간다 

하여도 동탁 일파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습니다." 

왕윤의 얼굴에는 완연한 안심이 자리잡았고 영각 역시 

잇달아 긍정하여 왕윤의 경계심을 한층 더 깎아주었다. 

조운은 영각과 왕윤을 곁눈질하면서 한번더 예지의 구절을 

되뇌였다. 

"쌍둥이 자매 중 수정연꽃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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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왕조가 초반부터 풍운(風雲)을 겪음: 한나라는 초창기부터 

말썽이 꽤 많았다. 유방의 공신퇴치, 즉 토사구팽의 피바람이 

일단 그러하였고 유방 자신도 말기가 그렇게 행복하지는 못했다. 

유방의 정비正妃였던 여치, 즉 여황후는 상당히 독살스럽고 

욕심이 많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유방이 어렵던 시절에는 

기지를 발휘하여 도왔으나, 유방이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유방에게는 총애하던 후궁 척부인戚夫人이 있었는데, 유방이 

척부인의 아들 여의如意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꾀를 부려 

이를 가로막았다. 유방이 죽고 자신의 아들 영盈이 혜제惠帝가 

되어 즉위하자마자 권세를 부렸다. 

라이벌이던 척부인의 머리를 깎게하여 토굴에서 족쇄를 

채우고 절구질을 시키다, 꾀를 써서 척부인의 아들을 죽였다. 

척부인의 아들 조왕趙王을 죽인 이후 척부인의 팔다리를 

잘라내고 혀와 눈알을 뽑고는 변소바닥에 던져 혜제에게 

보이며 `저것이 인체人  - 사람돼지 - 요.' 라고 했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여태후, 즉 여후는 혜제보다 오래 살았는데 유씨劉氏만을 

후왕侯王으로 책봉하라는 유방의 유훈遺訓을 어기고 동생 

여산呂産, 여록呂祿을 후왕으로 책봉하고 오랜 세월을 

여씨천하를 이루는 등 엄청난 세도를 부렸다*작가주 

2.여후가~장량의 조언이 큰 몫: 척부인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유방이 태자로 올리려고 하는 것을 안 여후는 

엄청난 위기감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장량의 조언에 의해 네 명의 신선이라 불리던 사호四皓를 

초청해 태자를 보호하게 함으로써 유방에게 태자를 

인정하도록 하여 위기를 모면했고, 결국 유방은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봉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유방이 죽고 나서, 여후는 황제가 된 자신의 아들을 끼고 

엄청난 폭정을 시작한다*작가주 

3.장량은 자신의 수명을 깎아가면서까지: 몇 백년이나 

앞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사실상 천기天機를 누설하는 

일이다. 아무리 주술력이 높더라도 대가로 자신의 수명을 

바치게 되어있다. 작가의 설정이다. 

4.광무제(光武帝): 본명 유수劉秀. 고조 유방의 9세손. 

전한은 1세기 초 왕망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왕망은 신新이라는 왕조를 세웠다. 그 신의 말년에 각지에서 

군웅이 거병擧兵하였을 때, 유수도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의 

호족豪族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전전轉戰한 끝에 허베이河北·허난·후베이湖北에서 

세력을 폈으며, 허난의 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 허난의 뤄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漢王朝를 

재건하였다*두산세계대백과 

5.한해(旱害): 물이 부족해서 농작물이 나지 않는 재해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잘 만든 옷 같아! 그렇지 않아? 난 

역시 손재주가 비상하다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보란 듯 완성된 옷을 펼쳐들고 앞에 

와서 선 아영은, 화정이 눈길을 내리깐 채 무시하자, 부아가 

잔뜩 치밀었다. 화정은 그런 아영의 심정을 모르는지, 엄청나게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이 보였다. 골똘히 생각에 빠진 그녀의 

옆모습은 참으로 정결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모양이 도리어 

아영의 화를 돋우었다. 아영은 신경질적으로 화정에게 외쳤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는 것이 어때?! 네 주문사항 

완료라니까!" 

실컷 시켜먹더니 막상 결과를 보고하러 오니까 저 모양이다. 

화가 나서 얼굴을 발갛게 데우고 씩씩거리자 화정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화가 난 아영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영이 힘없이 

들고 서있던 옷만 나꿔채듯 해서 살피는 것이었다. 바느질 상태와, 

옷감의 촉감, 모양새 등을 꼼꼼하게 확인하던 화정은 고개를 들었다. 

"정말 잘 만들었어. 고마워." 

고맙다는 말과 사과하는 말을, 진심인지 비꼬는 건지 구분이 

안 가게 말하는 화정의 말투 따위야, 이제 만성이 되어서 아무렇지 

않다. 문제는 사람을 철저하게 누르는 듯한 저 눈빛이다. 아영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쏘아붙였다. 

"유화정, 넌 눈빛 좀 죽이면 어디가 덧나니? 난 네 말대로 

하느라고 며칠 간 밤 새웠단 말이야! 고맙다는 말을 할 때면 

조금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지, 네가 늘 초선님께 교육하는 

말대로 말야! 그런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만날 그렇게 꼿꼿한 

태도를 고수하면, 초선님이 네 말을 어지간히도 잘 듣고 실행에 

옮기겠구나?" 

처음엔 화정의 저런 태도가 화가 나고 분해서, 울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영은 그것이 화정의 의도가 

아니라 버릇에 의해 길들여진 태도였음을 깨닫고 이렇게 

질책까지 할 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리 되는 것에는 `화정 

소저 같은 경우에는 습관이 되셔서 그런 걸 거여요.' 라고 

하는 초선의 달램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화정 또한 생각보다 사고방식은 고지식한 편은 

아니었는지, 아영이 그렇게 늘상 울어대고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처음보다는 태도가 조금 완만해졌다. 이제는 쏘아보는 

시선은 꽤 거두었음을, 아영도 느끼고는 있었다. 

"미안. 그러고 싶은데 생각보다 힘들어." 

이제는 제법 응수까지 잘 해 주고 있다. 뻣뻣한 어조지만 

화정은 분명 사과하고 있었다. 아영은 그냥 태연하게 넘겼다. 

"됐어,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신경질을 

부린 내가 잘못이지, 뭐......여하튼, 어떤 것 같아? 드디어 

내일 그 여포인지 뭔지가 올 텐데. 네 주문대로, 이렇게 어려운 

옷을 며칠 사이에 네 개나 만드느라 죽는 줄 알았다구." 

화정은 아영이 만든 옷을 아직도 만지작거리면서 살피고 

있었다. 옷은 모두 네 벌이었다. 두 개는 백색, 하나는 조금 

탁한 붉은 색, 나머지 하나는 좀 옅은 푸른색이었다. 붉은 색과   

푸른색 옷, 하나의 백색 의상은 모두 똑같다. 

다리가 보이도록 한 그 옆 트임이 없었다. 반면 단 한 벌의 

백색 의상은 옆 트임이 있었다. 한마디로, 나머지 세 벌은 

평상시에 입을 만한 것, 옆 트임이 있는 한 벌은 춤을 출 때 

입을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생각보다 너무 잘 만들어주어서 놀랐어. 너 정말 옷 만드는 

것에는 소질이 대단하구나."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정확한 구분이 안 가는 말투였으나 

아영은 기분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마워. 이전에 한복(韓服)을 꽤 만들어봤었는데, 그게 

도움이 된 것 같아. 여하튼 네가 만들라고 할 때는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긴 했지만 다 만들고 보니까 너무 예쁜 옷 같아. 

나도 입어보고 싶어지지 뭐야." 

정말 그랬다. 만들기 시작할 때는 화정에게 투덜투덜 불만을 

퍼부었는데, 완성되고 나니 정말 예쁜 옷이었다. 서양의 

드레스와 중국의 고풍스런 맛을 섞은 분위기가 함께 나는 

옷이랄까. 

"그럼 초선님을 불러서 한번 입게 해 보자." 

화정의 제안에 아영은 문을 열고 고개만 쑥 내밀었다. 늘 

그렇듯이 춘안과 향라가 둘이 나란히 서서 수다를 떨고 있다가, 

아영이 문을 열고 머리를 불쑥 내밀자 기겁하면서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두 시녀는 참 친한 사이 같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으면서도 서로 수다를 떨어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초선님 좀 불러주실래요?" 

"아, 아영님, 저 왔어요!" 

마침 초선이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이 쪽으로 왔다.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선 초선에게 화정과 아영은 옷을 내밀어 보였다. 

"......완성......된 거여요?" 

초선이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아영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면서 재촉했다. 

"네. 한번 봐야 하니까 얼른 입어봐요." 

초선은 옷의 모양새를 살피면서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기는, 

옆 트임이 그렇게 길게 들어갔는데 초선으로서는 입는 것이 

전혀 반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초선이 그 옷을 옆 방에서 

입고 나타났을 때, 아영은 입이 벌어진 것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예뻤다. 평범하게,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천 년대 

기준으로는 별로 안 예쁘게 본 초선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이 보였다. 정말 매끄럽기도 한 어깨선이 

투명한 비단을 통해 그대로 비치는 그 아름다움......그냥 

노출시키는 것보다도, 얇은 비단을 통해 은근히 가리면서 

은근히 노출된, 그 효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특히 초선의 몸매는 마른 편인데도 가슴이 꽤 크고 예쁜 

편이어서, 약간 가슴이 파인 그 옷을 통해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하던 화정은 비단을 가져와 

초선의 가슴 약간 아래에 두르고, 가늘고 긴 비단 끈으로 

허리를 꽉 조일 정도로 강하게 묶었다. 

잘록한 허리가 강조되었으며, 옆 트임으로는 움직일 때 간간이 

매끈하고 하얀 다리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정말 매혹적이었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입이 안 다물어지는데 남자들이 본다면 

효과가 그야말로 만점일 것이다. 아영은 손뼉까지 치며 

즐거워했다. 

`정말 초선님과 잘 어울리는 옷이야......' 

새삼 화정의 안목과 판단력에 감탄했다. 초선 역시 처음에는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연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거울을 보여주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더니, 한마디했다. 

"이게 정말.......나.......?" 

스스로 보기에도 감탄스러웠던 듯하다. 한참동안 넋을 놓고 

거울을 보던 초선을 겨우 거울에서 떼어놓고, 화정은 바쁘게 

여러 가지 물건을 꺼냈다. 화장도구들이었다. 물론 이천 년대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이 시대에는 화장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상류계층에 한정된 것을 생각하면, 꽤 화려한 도구들이었다. 

그리고, 화정은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게 뭔데?" 

아영은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 호기심을 못 누르고 

고개를 불쑥 들이밀자 화정은 덤덤하게 답했다. 

"미의 기준." 

짤막한 화정의 대답에 아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초선은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화정에게 물었다. 

"그건......알아서 무엇하시게요?" 

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영은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시대 미의 기준을 알 수 없는 화정과 아영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현대시대와 같기는 한데, 어떻게 보면 현대시대와 

좀 다른 면도 있다. 결국 엄청난 고민 끝에 화정은 그런 

방면에는 도가 텄다고 자부하는 영각에게 아름다운 여자의 

조건을 알아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영의 곁에서 초선도 기가 막히다는 듯 피식, 하고 

웃었다. 하지만 아영은, 화정이 그 종이를 들고 읽어내려 

갔을 때는, 턱을 괸 채 너무나 열심히 들었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백옥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가 있다. 여성이란 자고로 백옥이 빛나듯 하얗게 빛나야 

하는 법이다. 이건 화장하면 돼. 특히 초선님은 본래 

하얀 편이니까." 

"쳇!" 

화정의 덧붙인 대책에는 신경도 안 쓰면서, 아영은 

콧방귀만 뀌었다. 자신은 사실, 피부가 조금 까만 편이다. 

심하게 검지는 않지만 보통보다는 좀 까맣다. 그런데 미의 

제 1 조건이 흰 피부라니, 불운 중의 불운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천 년대에는 피부가 까매도 이목구비가 예쁘면 

미인이라고 쳐주는데! 

"둘째로, 크고 또렷한 눈매다. 음, 이 시대 사람치고는 

눈이 큰 편이니 눈 주변에 아이라인(eye-line: 여자들이 

눈을 크고 또렷하게 보이기 위해 까만 선을 긋는 것)만 

그려주면 되겠는데." 

"난 쌍꺼풀은 없지만 눈은 큰 편이라구! 물론 너보다는 

작지만, 아무튼......내 친구들도 나더러 눈이 크다고 

했단 말이야!" 

억울한 심정에 푸념을 늘어놓는데, 초선은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는 

초선과 불만에 얼굴이 퉁퉁 부어있는 아영의 사이에서, 

화정은 아랑곳 않고 다음 항목을 읽었다. 

"셋째, 목이 길며 가슴이 풍만하고 허리가 가늘어야 한다. 

이건 몸매에 관한 것이니 상관없고......" 

아영은 또다시 불만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몸매는 

별로다, 허리가 좀 굵긴 하지......하는 따위의 불평을 속으로 

품은 것을, 화정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넷째, 붉고 도톰하며 선이 분명한 입술. 이거야 뭐, 역시 

붉게 칠해주면 되고." 

"나도 입술 색은 옅은 편이 아닌데. 하긴, 입술이 너무 

얇기는 하지만......." 

아영의 투덜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화정은 몇 가지가 더 

있어서 읊으려다가, 종이를 구깃구깃 접어서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마 자신의 투덜거림에 조금 질린 것이 아닐까, 

하고 아영은 그제야 후회를 했다. 가능하면 더 듣고 싶었는데 

말이다. 짜증나는 심정으로 거울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열심히 살피는 아영에게 화정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즉, 미의 기준은 현대시대와 비슷한 곳이 많아. 얼굴형이나 

오똑한 코, 쌍꺼풀을 굳이 넣지 않는 것과, 다른 조건은 별로여도 

무조건 피부가 희기만 하면 미인으로 보는 기준은 좀 황당하기까지 

하지만......무리 없을 것 같아. 그럼, 너랑 내가 초선님을 여러 

가지로 화장 시켜보자." 

현대시대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초선이, 또다시 멍한 얼굴을 

하고 건너편에 있었지만, 아영과 화정 중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잖아도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아영이 쏘아붙였다. 

"야, 우리가 암만 퍼득거려봤자 뭐하겠어? 남자 꼬시는 건데 

남자들이 예쁘다고 해야지!" 

"바로 그거야. 그래서 말인데, 영각과 조운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에?" 

아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때까지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초선도 끼어들었다. 

"어떻게요?" 

화정은 태연하게,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답했다. 

"아, 간단해요. 화장을 시킬 때마다 두 사람에게 가서 

어떠냐고 감상을 묻는 거여요." 

순간 초선과 아영은 쿵, 하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태연한 

화정에 비해 두 여자의 얼굴은 거의 `충격' 그 자체였다. 새파랗게 

질려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똑같이, 

눈동자에 엄청난 놀람을 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영은 

화장도구들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는 화정에게 대뜸 소리 질렀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영각 같은 사람은 분명 절구통에 치마만 

둘러도 예쁘다고 할 텐데. 화장하는 족족 이딴 소리나 할거야. 

`저건 좀 어색하지만 색다른 맛이 있군.' `어, 이건 꽤 요염한걸?' 

`이것도 생각보다 괜찮은 점이 있어.' `이건 얌전하게 보이는 맛이 

일품이야.' 이런 식으로 다 좋다 할 거 아냐? 그런 사람을 믿고 

물어봐? 특히......" 

"아, 아니.......그, 그렇다고 해도 제가 보기에는 그...... 

조운이라는 분은 눈이 높으실 거 같으니까 괜찮은 방법일 지도 

몰라요. 하지만......"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초선의 태도는 `전 부끄러워요.' 라고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두 젊은 남자에게, 화장을 해 놓고는 어떤 것이 낫냐고 고르라는 

식의 행동을 해야 한다니......특히 초선은, 이 두 소녀의 화장 

솜씨를 보지 못했으니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만약 엄청나게 요상하고 민망한 화장을 시켜놓는다면, 그 두 

청년은 물론, 집안의 하인들이 무슨 소리를 하겠는가. 특히 왕윤이 

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아영은 초선의 생각을 짐작하면서, 

화정을 쏘아보다시피 했다. 그러나 화정 역시 초선의 심리를 

대충은 파악했는지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그 두 사람 이외엔 누구도 보지 못할 거여요. 

물론 여포가 그 두 사람보다는 나이가 조금 많기는 하겠지만, 

비슷한 연배니까 그 두 사람이 괜찮다고 하는 측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겠죠. 

동탁이야 본래 예쁜 여자를 밝히니 그 정도만 해 두어도 

괜찮을 거여요. 영각에게는 정숙하고 청초하게 보이는 얼굴로 

고르라고 미리 말해둘 테니까 걱정 마, 아영아." 

"하지만, 화장을 지우고 고치느라 이 방 저 방 왔다갔다하면 

당연히 하인들이 볼 거 아니야? 이 집에는 하인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구. 게다가 하인들이, 그런 소란을 보면서 가만히 있겠어? 

당연히 주인이신 왕윤님께 말씀드리겠지." 

아영이 팔짱을 낀 채 어림없다는 투로 말했다. 화정은 그것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는 듯이 흔들림 없는 태도로 침착하게 답했다. 

"세수 도구와 화장 도구를 모두 한 방 안에 가져다 놓는거야. 

장막을 쳐 놓고 그 안에서 화장을 고치고 화장이 다 되면 장막 

바깥으로 나오는 거지." 

그 말에 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한 방 안에서 그 모든 

난리를 피운다면 그나마 초선의 심적 부감이 조금 덜어질 것이다. 

비로소 아영이 조용해졌는데, 이번에는 초선이 아직도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 두 분은......응해주실까요?" 

초선의 말에 아영은 얼른 끼어들었다. 

"맞아. 무슨 미인대회 심사위원도 아니고 말야." 

"특히......그......조운이라는 차가운 분은 좀......" 

초선이 말을 얼버무리자 아영도 `맞아, 맞아.'를 연발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하기는 그렇긴 하다. 영각이야 그런 

일이라면 즐겁게 히덕거리면서 응하겠지만 조운은 다르다. 

원체 여자에 대해 관심도 없는 것 같이 보일뿐더러, 냉랭하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쓰는 타입이고 시간도 전혀 헛되이 쓰지 

않는 - 왕윤의 집에서마저 무슨 책을 그렇게 읽어대고 있는 

건지 아영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사람 같은데, 이렇게 

조운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한 시간 낭비가 될 것이 

틀림없는 일에 응하겠는가. 

실제로 꼭 응해야 할 사람은 영각보다도 조운인데 말이다. 

여자면 다 좋은 영각보다, 아무래도 눈이 높아 보이는 조운이 

고르는 측이 좀더 성공 확률이 높아질 것 같으니까. 

"괜찮아요. 틀림없이 응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럼, 아영이와 초선님은 찬성한 것으로 알고 준비할께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지 자신만만하게 말을 자르고 총총히 

문을 열고 나가는 화정을 보면서 아영과 초선은 할 말을 잃었다. 

아영은 약간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든지 제 맘대로라니까." 

다소 불만이 깃든 아영의 말에 초선은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아영은 얼굴에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진 초선을 힐끗 곁눈질했다. 

아마도, 자신이 사모하는 사람을 두고 전혀 마음에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치장을 하기 위해, 이렇게나 요란한 난리를 

떨어야 함에 대해 문득 회의를 느꼈으리라. 

초기에 이곳으로 왔을 때에는 그저......궁색한 생활에 바빠서 

아무 생각없이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건 이천 

년대에서도 가난했던 아영에게 있어서 큰 변화는 아니었다. 

특히 의모와 의동생은, 편모 아래에서 남동생과 지낸 아영의 

가족사항과 똑같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화정과 조운, 영각을 따라 장안으로 왔을 때는, 

자신들과 다르게 꽤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좋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대재벌 외동딸도 빈곤에 대한 인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신기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별로 심각한 

생각은 하지 않고 지냈다는 것이 옳았다. 

왕윤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이게 웬 횡재냐, 하고 

즐거웠을 뿐이며, 엄청난 대접에 비해 도와줄 일은 어렵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지만......지금 초선의 슬픈 모습을 

가끔이라도 보는 것은 아영에게 새로 다가온 고역이었다. 

아영은 그제야 고대 여자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한 여자가......몇이나 있을까? 

손가락으로 꼽겠지......? 그 답답한 심정을 무엇으로 풀었지?' 

아영의 눈에는, 괴로워하는 초선의 모습에, 얼마 전 왕윤과 

쓸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초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 기대앉아서, 영각은 책과 

씨름 중이었다. 곁에 산더미같이 쌓인 책은 전부다 한 고조와 

그의 공신들에 관련된 이야기뿐이었다. 물론 책이란 그렇게 

흔하고 값이 싼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왕윤이 도움을 주어서 

상당히 많은, 귀한 자료를 구할 수 있었을 뿐더러 화정이 돈을 

꽤나 엄청나게 벌어놓았기 때문에, 사방으로 수소문해서 구해올 

수도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쳇, 졸지에 이런 일에 다 휘말리다니......" 

영각은 투덜거리면서 하품을 길게 했다. 그런 영각의 팔에는 

아직 한 쪽에 하얀 천이 감겨있었다. 왕윤이 뛰어난 의원을 

붙여주고 갖가지 귀한 약을 다 써주어서 회복이 빠르기는 했지만, 

아직도 안 나았다. 그만큼 영각이 입었던 상처는 심각한 것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사씨 형제들의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추리가 

나온다는 뜻이다. 

"나도 참, 괜스레 일에 끼어들어서 늘 이런 말썽을 

겪는다니까. 여하튼, 그......" 

영각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불평을 늘어놓는데, 작은 소리가 

들렸다. 조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 어, 이런! 이쁜이! 병문안이라도 와준 거야?" 

못 말리는 능청이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것이 바로 전이었는데, 금방 저런 능청이 나온다. 

하지만 영각의 그 정성스런 능청에도 불구하고, 화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유달리 희고 깨끗한 그녀의 얼굴이 투명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봐, 자룡! 저번에 저 이쁜이가 나한테 뭘 물었는지 알아? 

어떤 여자가 예쁜건지, 조건을 말해달라더군. 드디어 이쁜이도 

내 마음에 들기 위해서......" 

"부탁할 것이 있어요." 

그래도 포기 않고 꿋꿋하게 능청을 떠는 영각의 입을, 화정의 

자르는 말이 다물게 만들었다. 그런 화정의 냉랭함에 영각은 

콧방귀를 뀌면서 팔짱을 끼었고, 조운은 속으로 피식, 하고 

웃으면서도 차가운 표정으로 화정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지?" 

짤막한 조운의 질문에 화정이 입을 열려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 영각의 곁에 잔뜩 쌓여있는 책을 발견했는 듯했다. 

영각이 아차하는 얼굴로 얼른 책을 한 구석으로 밀면서 발뺌을 했다. 

"관심 가지지마. 난 개인적으로 고조에 대해 흥미가 많은 몸이라구." 

남들이 듣는다면 정말이냐고 수십 번도 물었을 거다. 아무리 

보아도, 영각은 관심분야 때문에 책 몇십 권을 쌓아놓고 씨름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마 화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화정은 책 몇 십 권을 껴안다시피해서 가리려고 

하는 영각을 쏘아보면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디에 필요한가, 했더니......영각이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지는 몰랐어요." 

약간의 비꼼이 섞여있다. 아마 화정은 영각이 책을 핑계삼아 

돈을 낭비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차갑게 쏘아보면서 

비아냥거리는 화정에게, 영각도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 

모양이었다 - 본래 다혈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책을 가리던 

것도 잊고, 책더미에서 팔을 풀더니 화정에게 대뜸 삿대질이다. 

"뭐? 야, 돈 좀 쓰면 어디가 덧나? 그리고 사람을 그렇게 싹, 

무시하다니! 그럼 네 눈에는 저 녀석은 책을 봐도 상관없고 

나는 책을 보면 청천벽력이라는 거야? 저번에 저 녀석이 책을 

뒤적일 때는 잘만 입 다물고 있더군그래?" 

갑자기 돌변하기는 했지만, 이쯤되면 영각이 적잖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아챌 것이다. 특히, 여자들은 남자들이 

태도가 돌변하며 화를 내는 것을 매우 겁내는 경향이 있다. 조운은 

그런 사실을 떠올리면서, 영각을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 

깜찍한 아가씨는 도리어...... 

"영각이 평소에 그런 태도를 보여준 것은 아니잖아요? 스스로에 

대해 돌이켜본다면 잘 알텐데요? 신뢰받고 싶다면 평상시에 잘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커다란 눈을 치켜뜨면서 도도하게 대든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태도에는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억지를 부린다거나, 하는 

부자연스러움이 없다.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비유를 

하자면......신분 높은 아가씨가 자신의 아랫사람을 꾸짖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다. 어딘가 모르게 몸에 배어있는 명령조. 

항상 생각하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어본 

적이 없는, 윗사람으로서 명령을 내리는 것에 매우 익숙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신분이 꽤 높다는 소린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조운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다시 시선을 영각과 

화정에게로 돌렸다. 도리어 빳빳하게 나오는 그녀의 완강한 

태도에 영각은 어이가 없었는지, 잠시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만하지. 무엇 때문에 왔나?" 

조운은 그대로 두면 끝이 없겠다 싶어서, 자신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울컥하는 성질이 있는 영각은 역시,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너 말인데, 네가 얼마나 고귀한 신분의 여자였는지는 몰라도, 

여기서 너는 그저 나보다 나이어린 꼬마 계집애에 불과하다고!" 

영각의 높은 목소리에 화정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코로 

약하게 숨을 내쉬더니, 팔짱을 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조운은 잠시나마 옅은 회의를 발견했다. 

혹시......후회하고 있는 걸까? 의아해진 조운이 영각에게 

무어라 하려는데 이미 발동이 걸린 영각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 콧대 세우기 좀 덜 하면 안되냐? 뭐가 그렇게 

도도한데? 부탁하러 왔다면서? 부탁하러 왔으면 나긋나긋하게 

해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그렇게 꼿꼿하게 하면......." 

"화정, 빨리 이야기하고 나가." 

조운은 영각의 앞을 가로막았다. 영각이 뒤에서 또다시 

덤비려하자, 조운은 할 수 없이 영각의 한 팔을 대충 잡고 자신의 

공력을 조금 흘려넣었다. 자신의 공력은 영각의 공력보다는 훨씬 

강하니, 영각으로서는 꽤 따끔한 충격을 받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각이 뒤에서 

으윽, 하는 소리를 내면서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조운은 고개를 

숙인 화정이 다시, 고개를 약간 들었을 때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 

회색의 눈동자가 조금 젖은 듯이 느껴졌다. 물론, 영각이야 

조금 떨어져 있으니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표정만으로는 

전혀 동요가 없는 그녀였으니, 당연히 모를 것이다. 하지만, 

화정과 조금 가까이에 있는데다 단련으로 인해 유난히 밝고 

예민한 눈을 지닌 조운은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젖어있었다. 

그런 그녀의 젖은 눈동자는, 조운으로서도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이하면서도 섬뜩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쳇, 저 계집애는 그렇게 봐 주면 점점 버릇이 없어진다구! 

지금도 저렇게 건방지게 쏘아보는 것 좀......아얏!" 

뒤에서 투덜거리기 시작한 영각은 조운이 또다시 공력을 

흘려넣자마자 소리를 지르면서 입을 다물었다. 조운은 그렇게 

영각의 입을 억지로 닫은 후 화정을 다시 바라보았다. 

"황호가 몸이 좋지 않아. 부탁할 것은?" 

화정은 어느새 젖은 눈빛을 거두었다. 참 강한 아이다. 그렇게 

금방,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감정을 추슬러낸다. 산적을 

소탕하러 가던 그 때......그 때도 그랬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여보았으면서도.....처음에는 정신이 완전히 나가 있었을 만큼, 

가까이서 살육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넋이 나갔으면서도 

금방......직접 자신이 손을 들어 살육을 했다......분명 보통 

아이가 아니다. 

"어려운 건 아니에요. 다만......초선 님을 화장시키려 하는데 

어떤 화장이 가장......정숙하고 예쁘게 보이는지 이야기 

해주었으면 해서요." 

냉랭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곧은 눈빛 속에는 청초함이 남아있다. 

지나칠 만큼 깨끗하다. 한치의 더러움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조운은 또다시 누군가의 환영이 떠오르는 것을 

억눌렀다. 뒤에서 영각이 한소리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군그래. 나 말고 자룡이 가 주면 

된다는 거지?" 

그 목소리에는 아직도 가시가 돋아있었다. 화정은 영각의 

가시돋친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영황호도 와 주었으면 해요. 자룡 혼자만 좋다고 

하는 것보다는 두 사람이 의견 일치를 보는 편이 더...... 

좋으니까요. 그게 더 정확하고 대중적인 기준이니까......" 

"대중적?" 

뒤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을 되짚는 영각을, 다시 막았다. 

하지만 영각은 이번에는 그대로 입을 다물지 않았다. 대뜸 

화정에게 다시 말했다. 

"아무튼 좋아, 우리 두 사람은 그냥 어떤 화장이 제일 예쁜지만 

봐 주면 된다는 거지?" 

조운은 조금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여자들의 꾸밈새를 관찰하는 것이었으니까. 

정직히 말하자면 조운은 아름다운 여성이라던가 미(美)에 

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편이었다. 크게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화정은 그런 것에는 생각보다 관심이 

적은 것 같아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는데......하는 따위의 

생각으로 조운은 냉랭하게 잘라말했다. 

"그럼, 황호, 자네가 보아주게. 난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눈에 맞출 수가 없어." 

의외로, 여지껏 펄쩍펄쩍 뛰면서 화를 내던 영각이 그 응큼스런 

웃음을 입가에 걸어낸다. 

"흐흠, 조자룡? 자네 혼자 발뺌하려고? 안되지, 안돼! 자네는 

그런 것을 좀 감상하면서 융통성을 기를 필요가 있어. 자네가 

안 간다면......" 

영각은 불쾌하게 고개를 돌리는 조운에게 얄밉게 웃어보였다. 

"나도 당연히 갈 생각이 없거든?" 

조운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영각을 쏘아보았다. 영각은 

매우 흐뭇한지 히죽거리면서 그 능글거리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조운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라 거절하려는데 화정이 아까의 

그 젖은 눈은 언제 그렇게 완벽하게 거두었는지, 금세 고고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재촉했다. 

"이제껏 책이 필요할 때 자금은 누가 대줬죠?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자룡이 보지 않으면 황호도 오지 

않는다잖아요. 혼자 고집 피우시면 저나 초선님, 아영, 영각, 

왕윤 어르신.......다들 난처하게 되지 않나요? 나아가서 이 

나라 사람들도요." 

이 영리한 아가씨는 이미 조운 자신이 조금 공적인 곳이 있는 

성격이라는 것을 파악했는 모양이다. 끝구절의 `이 

나라 사람들'을 유난히 힘을 주어 말을 했다. 하기는, 동탁을 

죽일 목적으로 꾸미는 일이니 그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정을 잡아먹을 듯 펄쩍거리던 영각까지 합세했다. 

"그럼, 그럼. 자네가 늘 말하던 대로 불충(不忠)이 아닌가, 

이 말일세. 자네도 좀 봐두는 것이 좋아. 이담에 자네 색시 

고르려면 말이지." 

`색시' 라는 말에, 조운은 자신의 눈썹이 옅게 미동함을 

느꼈다. 영각을 차게 쏘아보았지만 영각은 휘파람을 불어가면서 

팔짱을 끼더니, 급하게 화정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히죽거렸다. 

"이봐, 이쁜이, 점심 먹고 나서 가지. 아까 한 짓은 밉지만 

지금 막 한 짓은 예쁘니까 협조하겠어. 됐지?" 

영각의 능청에, 화정은 한숨을 옅게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운은 아직도 불쾌한 감정이 남은 채, 문을 닫고 나가는 화정의 

작은 등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영각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영각은 헛기침을 하면서 

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조그맣게 영각이 자신을 달랬다. 

"불쾌하게 생각 말라구. 동탁놈을 없애기 위해서도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그 말의 이면에는 다른 뜻이 숨어있다. 분명하다. 그 정도를 

눈치 못 챌 리는 없다.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음성을 낮추었다. 

"......구체적으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영각은 또다시 모르는 척을 하며 양팔을 쭉 펴고 침상에 편하게 

누웠다. 조운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황호." 

"......말시키지 마, 피곤해. 병자 혹사시키는건 좋지 않지. 

점심 먹고 보지." 

그렇게 발뺌을 하며 돌아눕는 영각이었다. 쾌활하고 

다혈질이지만, 한번 마음먹은 바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무는 

영각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조운이 재촉하더라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뜻을 대략은 짐작하는 

조운이었다. 특히, 남에게 억지로 재촉하는 것 또한 귀찮아하는 

자신의 성품을, 영각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조운은 몸을 휙 돌렸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리는 조운의 등에, 영각의 나직하지만 찬바람이 

감도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자넨, 결심대로 홀로 늙기에는 너무 출중하다구." 

조운은 대꾸하지 않고 문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천천히,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던 조운은 갑자기 밀려오는 언짢은 

생각에, 짧게 답하고 방을 나왔다. 

"자네가 무어라 하든, 내 생각은 변함이 없어." 

******* 

......영각이 아닌......그녀가 권했더라도 변함 없을 일이다. 

*******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번들거리는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가던 화정은 순간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을 느끼면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애써 

억누르고 시선을 들어보니 아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사과를 

하고 있다. 

"어, 미안! 네가 너무 안 와서 찾아보려던 

참이었는데......괜찮아?" 

사과도 참 정중하게 한다. 저렇게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태도와 말투를 지닐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아, 아냐......이제 됐으니까......이만 돌아가자." 

화정의 말에 아영의 얼굴에는 옅은 실망이 감돌았다. 

"어? 왜? 난......" 

무어라고 한마디 더 하려던 아영은 돌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입을 다물었다. 화정은 그런 아영의 반응이 약간 

의심스럽게 생각되었지만, 금방 머릿속을 짓누르는, 어떤 

생각에 아영의 반응에 대한 의심은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너 말인데, 네가 얼마나 고귀한 신분의 여자였는지는 

몰라도, 여기서 너는 그저 나보다 나이어린 꼬마 계집애에 

불과하다고!> 

좀처럼 화를 그렇게, 내는 법은 없던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화정은 사실 스스로에 대한 울화로 눈물이 

잠시 솟았었다. 분명 멀리 떨어진 영각은 화정이 건방진 

표정을 한 것에 대해 더 화가 났으며, 냉랭한 조운은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 잘 몰랐겠지만 화정은 그때 울고 싶었다. 

사람의 화를 늘 돋운다. 그녀는 사실 영각에게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영각은 평상시에 책을 자주 보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했는걸요.' 하는 식으로, 좀더 말을 돌려서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으로 짜 놓은 대사대로 말이 

나와주지를 않았었다. 

물론, 조운을 끌고 가는 것에 의견 합의를 본 영각이 생각 

외로 빨리 화를 풀어낸 바람에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충돌이 

생겼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조운은 본래 냉랭한데다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편이어서, 그와는 그런 문제를 잘 

느끼지 못했는데, 아영이나 영각과는 예민하게 충돌이 생긴다. 

아영과도 벌써 몇 번이나 그 문제로 사이가 갈라졌던 경험이 

있다. 

`난 바보야......!' 

화정은 스스로에게 못마땅한 소리를 퍼붓고는, 이내 감정을 

추슬러 아영을 바라보았다. 아영은 화정이 말이 없던 잠시동안, 

영각과 조운이 있는 방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데, 화정이 옅게 

헛기침을 하자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수습하지 못하고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화정은 또다시 아영에 대한 의심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화정의 짧은 질문에 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재빠르게 

답한다. 

"아, 아니......! 그냥......." 

"혹시 영각이나 조운에게 볼 일이 있는거니?" 

겨우 본래의 색으로 돌아온 아영의 얼굴이 또다시 귓불까지 

벌개졌다. 화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아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었나......?' 

화정은 그렇게 머릿속으로 생각했지만, 아까의 영각의 화가 

났다가 가라앉은 표정과, 영각과 화정의 합동권유에 결국 넘어가 

언짢은 표정을 하던 조운이 떠올랐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드물게 화를 내고 있던 영각이나, 드물게 

언짢은 표정을 짓던 조운, 두 사람 모두 현재 감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화정은 아영에게 잘라 말했다. 

"지금 영각과 조운이 할 일이 많았던 것 같아. 일단 가자. 

점심 먹고 나서 초선님의 화장을 보아준다고 했어." 

화정의 말에 아영이 갈색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외라는 듯 입까지 동그랗게 벌리면서 되묻는다. 

"봐준대? 정말? 조운님이?" 

아무래도 조운이 그 말에 찬성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하기는, 그 사람이 평소에도 좀 뻣뻣해야 말이지....... 

그런 동조를 머릿속으로 키워내면서 화정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아영의 표정이 무슨 까닭인지, 대번에 환해졌다. 하지만 

말투는 여전히 더듬거리는 것이, 뭔가 실망한 느낌이었다. 

"그래? 아, 난......혹시 네가 영각만 허락했고 조운님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면 좀 말씀드려 보고싶어서......" 

분명 이상하다. 저렇게 문짝을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것도 

그렇고, 기껏 조운의 허락이 떨어졌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평상시 마중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던 화정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도 좀 의심스러웠다. 화정은 얼굴을 약간 찌푸리면서 되물었다. 

"응?" 

화정의 짤막한 말에 아영은 또다시 고개를 급하게 좌우로 

흔들어댔다. 

"아냐, 아냐......아, 아무튼! 영각같은 엉터리보다는 그 

사람이 차라리 나을 거 아냐! 그러니 꼭 필요하다는 거...... 

암튼, 그래!" 

제발 저린지 괜히 소리를 빽 지르며 몸을 휙 돌리는 

아영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영의 

등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던 화정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그만 속으로 슬며시 웃고 말았다. 

`아하......!' 

이전에 아영이 삼겹살인가 뭔가를 구워 주었을 때가 기억났다. 

화정이야 먹든 말든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조운의 앞에 앉아서 

열심히 조운에게 먹을 것을 권유하던 아영의 붉어진 얼굴이, 

방금 전의 모습에 겹쳐왔다. 그러고보니 여태껏, 아영은 조운이 

나타난다고 하면 유난히 머리를 단정히 빗고 옷에 구겨진 부분이 

없는지를 살피는 등,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내가 왜 눈치를 못 챘을까.' 

화정은 스스로의 아둔함을 또다시 탓하면서 재빠르게 아영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렇잖아도 여태 아영에 대해 자신이 

무신경하게 행동해서 상처를 준 것이 늘상 미안했는데, 이런 

마음이라도 알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유일한 이천 

년대의 벗인 아영과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고 싶은 욕심도 

생겼던 것이다. 분명, 이천 년대에서는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다. 

하지만......둘 다 평민에 불과하고 이천 년대에서 떨어진 

처지라는 공통점을 지닌 지금은......아영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정은 아영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걸어가던 아영은 화정이 툭 치자 죄짓다 들킨 사람인 

양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화정은 낮게 중얼거렸다. 

"조운은......지금 기분이 안 좋아. 그러니까 조금 기분이 

나아지거든 보러 가." 

화정의 말에 아영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아영의 얼굴이, 저렇게 하얗게 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너......?" 

조금은 당황하고, 조금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아영에게 화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내가 봐도 조운은 멋진 사람이야." 

아영은 화정의 말에 그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고 멍한 눈으로 서 있었다. 한참을 화정을 뚫어져라 

보던 아영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알고 있었......어, 화정아?" 

화정은 주변을 잠시 휙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직도 낮춘 목소리로 답했다. 

"조금은." 

화정의 답에 아영은 기가 차다는 듯 짧게 콧바람을 내뿜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조운 좋아하는 것 아니었어?" 

화정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기는, 아영과는 꼬박 존대를 

하면서 거리를 두는 조운이 화정에게는 낮춤말을 쓰는 것도 

그렇고, 이전에는 그 야밤에 금창약을 발라주다 

들켰으니 - 아영은 아직도 그때 금창약을 바른 것이 화정인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는 했지만 -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긴 하다. 오해를 풀지 않으면 기껏 찾아낸 친구 

후보감이 한 순간에 날아갈 참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조운은 유비님을 모시고 싶어해. 난 

유비님의 명령으로 조운을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고. 그러니 

나는 여자와 남자의 관계라기보다, 조운과 동료같은 사이거든. 

그러니까 내게 낮춤말을 쓰는 것 뿐이야. 그리고 금창약은, 

그저 사용법을 물으려던 것에 불과하잖아? 특히......" 

화정은 목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불편하고 말하기 

쑥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고 아영을 안심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문득, 이전에 운록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차고 앉았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생각에 정직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다가가지 않을 거여요. 사람들은 느낌이란 것을 지니고 

있거든요. 아, 저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느끼고 그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거여요. 스스로에게도 정직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겠어요?>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아......내가 먼저, 어느 

정도는 아영이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줄 알아야 저 아이도 그렇게 

될 거야......그리고 내가 마초를 좋아하는 것은......부끄럽지만 

사실인걸......' 

어쩌면 그 조그만 금발머리 소녀는 화정보다 인간관계에 

대해 능숙했는지도 모른다. 화정은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특히 난......조자룡은 내 타입이 아니고......으음...... 

저어기 난......좋아하는 사람이......있어." 

화정은 그만 자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바보같이, 이게 무엇하는 짓이람! 화정은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살짝 눌러보았다. 

약간 뜨거워진 것 같았다. 아영의 눈이 또 동그랗게 변했다. 

"좋아......하는 사람......?" 

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마초의 얼굴이 지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덩달아, 붉어진 자신의 뺨도. 

"네가?" 

아영의 눈에는 불신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좀 이상하게 생각되나? 하긴, 

솔직히 이야기하면 화정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런 감정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 아영은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화정에게서 시선을 

떼어 일부러 천장으로 눈길을 박으면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잔뜩 굳은 자세로 서 있던 아영이, 영원히 그렇게 

몸이 굳어버린 것이 아닐까 화정이 걱정을 하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화정은 아영의 웃음에 다소 무안해짐을 느꼈다. 절로 

얼굴이 찌푸러졌지만, 아영의 웃음은 그것이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하하하하! 아하하!" 

아까보다 얼굴이 더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화정은 

화를 내버렸다. 

"그만해! 난 진지하단 말이야!" 

하지만 무안하고 화가난 화정에게는 야속하게도 아영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하하하하! 유화정이......유화정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있대요! 하하하하......!" 

"아영아!" 

"하하하하!" 

화정은 정말 진심이었는데, 화정의 마음에 남자라는 인종이 

있다는 사실이, 아영에게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면서 우스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배를 쥐고 이제는 주저앉아서,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 아영의 소란에, 안에 있던 조운은 물론이고 왕윤의 

하인들과 왕윤, 초선까지 몰려왔다. 

아영은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조운이 자신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사실도 모르고, 배꼽을 쥐고 웃더니, 

주변 사람들이 한참 웅성거리고 나서야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내뺐다. 

******* 

"그만 좀 웃어!" 

손에 붓을 든 채, 연신 킥킥거리는 아영의 모습에, 화정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짧게 외쳤다. 이미 자초지종을 들은 초선 

역시도, 곁에서 함께 생글거리는 얄미운 모습이었다. 화정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화정의 표정이 어지간히도 

굳었는지, 초선이 그녀를 달랬다. 

"너무 화 내지 말아요, 유소저. 단지 유소저같이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 정인이 있으시다니까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저도 그렇지만 아영 소저는 정말 놀랐던 모양인걸요." 

화정은 그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얼굴에 노을을 띄운 채 

옷을 매만지는 것에 열중했다. 꽤 신경질적인 화정의 태도에 

아영도 미안해졌는지, 한소리했다. 

"정말이야, 나쁜 뜻 없어. 난 단지......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다 있구나......싶어서......진짜야. 오히려 네가 

더 좋아졌는걸." 

아영의 마지막 말은, 화정의 본 의도를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지만, 화정은 여전히 당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몸을 일으켰다. 

"다 된 거야?" 

화정의 차가워진 어조에, 아영은 자신이 쥐고있던 붓을 

보더니 발뺌했다. 

"어, 이런......웃느라......얼른 마치도록 할께." 

화정은 무안하고 쑥스러워진 감정을 얼른 추스렸다. 

어쨌거나, 아영이 구경꾼이 되고 화정이 극도의 무안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의도는 성공했다. 아영은 스스럼없이 

조운에게 자신이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으며, 열심히 

캐묻던 초선은 화정과 아영의 이야기에 흥미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만나서 처음으로, 연환계를 위한 의무적인 것 이외에 세 

사람의 순수한 공통 관심사가 생긴 것이다. 공통 관심사가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통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화정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냥......난 조운이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았어.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아서......> 

초선의 얼굴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화장을 시키고 있는 

아영은 그 말을 할 때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면서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옷자락을 꾸깃꾸깃 

움켜쥐는 그때의 모습과 붓을 이래저래 자유자재로 놀리는 

아영은 정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에이, 아영소저, 그렇게 말씀 마시고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혹시, 그 조운이라는 분이 워낙에 잘생겼으니 좋아하시는 

것 아니에요?> 

초선의 악의없는 놀림에도 반문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하던 아영은 어디갔는지, 지금은 열심히 초선의 

얼굴에 그림을 그리듯 화장을 시키고 있다. 벌써 5번째다. 

아영의 예상은 옳았다. 조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반응이 없었고, 영각은 `저건 요염해서 좋다.' 

`오호, 이건 좀 어려 보여서 좋은데?' `이것도 예쁘잖아? 그것 

참, 초선님은 예뻐서 탈이야.' `음, 깨끗하고 정숙하게 

보이는군......하지만......어딘가 어색한 걸. 그래도 예뻐.' 

라며 떠들었다. 

다 좋다는 얘기다. 속이 잔뜩 상한 아영이 영각에게 신경질을 

부리기는 했지만, 아영 역시도 영각의 감상에 동조하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한 나머지 

요염하게만 되어버렸고 다음에는 요염하다는 말에 화장을 좀 

다르게 해 놓았더니 어리게 되어버렸다. 세 번째는 좀더 초선에게 

맞는 화장이 되었어도 아직 만족할 수 없었고, 그 다음에는 

피부화장만 진하게 했다. 하지만 얼굴에 가면을 쓴 듯한 느낌만 

나와버렸다. 네 번째는 피부화장을 조금 옅게 하고 눈을 크게 

보이게 그려놓았더니 앞서의 세 번째보다는 반응이 나았다. 

지금이 다섯 번째의 화장인데 아영은 이제야 초선에게 맞는 

화장을 조금 깨달은 모양이었다. 화장을 시키는 손에 앞서의 

네 번째와는 달리 자신감이 들어가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아영의 화장시키는 양을 쳐다보던 화정은, 자신감이 솟은 듯이 

보이는 아영의 모습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예쁘고 착한 아이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다. 자신의 느낌으로 아영은, 

재주도 많고 마음씨도 고우며 사람들과 잘 친해지는, 많은 

장점을 지닌 사람이다. 얼굴도 예쁘기만 한데, 왜 이 시대 

사람들은 못 생겼다고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갈 지경이다. 

그리고 그 말을 믿고 콤플렉스에 휩싸여 있는 아영도 가엾다. 

아까, 영각에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면 어떻게 

고르라는 거여욧?!' 하고 잔뜩 신경질을 내던 아영의 얼굴이 

기억났다. 아영은 아무리 상대방에게 화를 내도 상대방이 기분이 

완전히 상하지 않게하는, 그런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화정의 말에는, 단박에 얼굴을 찡그리면서 화를 내던 영각이, 

아영의 그런 신경질에는 히죽거리면서 능청스럽게 `원래 여자란 

예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난 믿는다구. 얌전이도 예쁘니까 

나한테 그렇게 관심 표현을 안 해도 내가 알아주겠지?' 라고 대충 

넘겼다. 하기는, 화정이 보기에도 아영의 신경질은 당연하게 

생각되었고, 상대방에 대한 짜증으로 보이지 않는 그런 장점이 

있었으니까. 

"다 됐어! 이번에야말로 잘 된 거 같아! 화정아, 네 생각은 

어때?!" 

아영의 기쁜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여지껏 네 번의 화장을 

하고 나서는 그저 `끝났어. 어때?' 라고만 말했는데, 저렇게 

기운찬 것을 보면 아영 스스로도 만족하고 있나보다. 화정은 

아영의 목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나면서 몸을 일으켰다. 초선이 

얼굴을 돌렸다. 

"어머!" 

화정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감탄했다. 이번에는 지나치게 

분을 바르지 않고 얇게만 분을 발라 본래 하얀 초선의 피부를 

살리고, 눈은 좀 크게 보이도록 까만 테두리를 그렸지만, 워낙 

얇게 그려서 표시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눈매가 또렷하게 보였다. 

입술은 지나치게 붉지 않게, 옅으면서 붉게 보이도록 칠했다. 

눈썹은 가지런하게 그렸다. 정말로, 본래 청초한 맛이 있는 

초선의 미를 잘 살린 화장이었다. 화정은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이건 정말 예쁜걸. 잘 된 것 같아." 

아영은 화정의 반응에 만족했다. 

"네가 그렇게 반응한다면......괜찮을 것 같네. 그래." 

아영은 즐겁게 말하면서 초선을 천천히 이끌고 장막을 제치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잠시, 초선의 머리에 꽂을 휘황찬란한 

머리장식들과 머리빗 등을 살펴보던 화정은 다음 차례는 

머리단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화장품 광고를 찍으려고 

메이크업(화장)을 받을 때, 곁의 여자가 중얼거렸다. 머리 

모양은 사람 인상의 70%를 좌우한다고. 

`머리 모양은 아직 나나 아영도 할 줄 모르니까 그...... 

아영이와 친하다는 춘안, 향라라던 시녀들에게 도와달라고 

해야겠구나. 하지만 머리를 조금.....구불구불하게......파마를 

시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초선님처럼 얼굴이 약간 밋밋하고 

큰 특징은 없는 사람들은 파마를 시키면 머리로 주의가 

흩어져서 더 예뻐보일 텐데......이 시대에 파마 기계가 있을 

리는 없지......어, 잠깐!' 

잠시 궁리하던 화정은 눈을 빛냈다. 한가지,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마, 쇠 꼬챙이 같은 것을 조금 달궈서, 

머리카락을 그 꼬챙이에 감으면 머리카락이 굽실굽실하게 

변할 것이다. 그녀는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에 만족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미용사가 다 되겠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 중국 고대소설 사대미인이라는 

초선의 미용을 도와주다니, 꼭 연예인 코디네이터라도 된 

것 같다. 그러고보면 현대시대나 이 시대나......여자들이 

아름다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이야, 이번 것으로 낙찰이다! 이번 것은 정말 내 취향이야! 

예쁜걸!" 

영각의 커다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득은...... 

"이번에는 정말 예쁘군요." 

무뚝뚝하지만 은근한 감탄을 담은 조운의 목소리다. 여지껏 

한마디도 않고 팔짱만 끼고 앉았던 조운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꽤 만족스럽다는 뜻이 될 것이다. 특히, 

다른 누구보다도 아영에게. 

"그래요? 다행이네! 이렇게 화장을 해 드려야겠어요! 내일이면 

여포라는 사람이 온다니까......" 

아영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엄청나게 들떠있었다. 아마도, 

조운이 감탄을 해 주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을 지도 모르겠다. 

*******

화정은 기가 차서 한참동안 조운을 쏘아보았다. 정말, 어쩌면 

이렇게 좋은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게 행동하는지 모르겠다. 

절로 부아가 치밀어서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왜요? 어째서 내가 자룡과 함께 다녀와야 해요?" 

조운은 미안한 기색이나,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는 얼굴로 

묵묵히 말을 받았다. 

"영각이 일행인 현재, 너희들도 모두 위험해. 단독 행동은 

좋지 않아." 

마치 플라스틱이라도 목에 끼우고 있는 것 같다. 빳빳하기만 

하다. 화정은 무뚝뚝한 조운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기운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그녀는 한 손바닥을 

목에 가져다 대어 진정시킴으로써 그를 억눌렀다. 화정은 눈을 

돌려 조운을 노려보았다.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잠시, 그것도 먼 곳도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거리에 산보하러 가는 건데요." 

정말 그랬다. 왕윤의 집 바로 밖에는 아주 작은 우물터가 

있었다. 화정이 왕윤을 따라오면서 눈여겨 봐두었던 좋은 

산책로였다. 스쳐가면서 본 바람에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담하고 예뻤기에 꼭 한번 산책해보고 싶었던 곳이다. 지금에야 

생각이 나서 머리도 식힐 겸, 또한 여포가 오기로 한 날이 

내일인지라 마음도 진정시킬 겸 홀로 다녀올 생각이었다. 

여포와의 일을 앞둔 초선의 눈물 섞인 한숨도 한숨일뿐더러 

곁에서 위로하는 아영의 모습도 화정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었다. 본래 역사 속에서 벌어졌어야 할 

일이겠지만 그를 주도하고 이끈 사람이 바로 화정 자신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어떤 죄책감이 밀려온다고 할까. 

마치 거대한 돌덩어리가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산보라도 하면서 머리를 식히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화정은 홀로 산보하기를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가면 일행이 걱정할 것 같아서 미리 말을 하고 

가려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영과 초선은 별 생각이 없는지, 

옷을 만들고 초선의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예쁘게 꾸며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답 없이 대충 고개만 

끄덕거렸으며, 왕윤도 공손하게 잘 다녀오라는 말만 해 주었을 

따름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틀림없이 홀로, 여유만만하게 홀가분한 

산책을 하고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몸이 아픈 영각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어서 그냥 간과했고, 조운은 보이지 않아서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조운과 마주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산보하고 오겠다고 하니, 그는 자신이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고 버티고 섰다. 

왠지 이전에 이천 년대에서, 화정이 나가려고만 하면 졸졸 

따라오거나, 고집을 피워 못 따라오게 하면 미행을 해서라도 

붙어 다니던 경호원이 생각나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런 화정의 심정을 모르는지 조운은 차갑게 말을 

덧붙였다. 

"넌 위험인물이야. 나도 좋아서 가는 것은 아니니 고맙게 

알아. 한갓 어린 계집아이 호위나 해 주려고 채찍으로 

맞아가면서 무예를 익힌 것은 아니니까." 

"채찍?" 

조운의 말에서 이상한 구석을 발견한 화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되묻자 조운은 입을 다물었다. 무덤덤하고 변화가 없던 

날씨가 갑작스럽게, 먹구름을 머금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과 

같이 조운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어떤 후회 비슷한 것을 일순간 

담았던 것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곧장 무뚝뚝한 표정으로 

되돌아갔지만 뭔가, 당황한 듯한 느낌을 읽어낸 화정은 저도 

모르게 고소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실언(失言)이었던 모양이다. 

위험인물 - 하기는, 이전부터 나가기만 하면 사고를 쳐 댔으니 

조운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그렇게 여겨질 수도 있다. 기분 

나쁘지만 인정해야 했다 - 이라던가 한갓 어린 계집아이라던가, 

하는 식의 말은 여전히 화정의 신경을 자극하는 일이었지만 

그거야 평소 조운의 기분나쁜 말버릇을 생각하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늘 그랬듯 속으로 입 한번 삐죽거리고 끝내면 

될 일이다. 

다만, 커다란 뉴스거리가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조운의 실언을 

발견하다니, 이만큼 기쁠 수가 없다. 늘 조운의 앞에서만 바보가 

되는 자신이 한창 한심스럽던 실정에, 저렇게 찔러봐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이 자신의 앞에서도 역시 실수를 했다는 

것은 정말로 쾌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화정의 

얼굴에 약간의 희색이 돌았는지, 조운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마음대로 해. 나와 함께 나가겠다면 짧게 걷고 

오던지, 싫다면 나가지 말던지." 

어서 화제를 원점으로 돌림으로써 위기를 모면해보겠다는 

심보다. 하지만 겨우 붙든 조운의 실언을 그대로 넘기기는 

너무 아까웠다. 화정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가운데에서도, 

실언에 대해 난처해하는 기색도 없이 할 말을 묵묵하게 

끝내버리고 말았다. 저렇게 당황하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어서야 놀릴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어느 정도 당황하는 기색이 있어야 `무슨 말을 했길래 

그렇게 당황하지요?' 라던가 `어머, 채찍이라니, 그게 뭐에요?' 

하는 식으로 들쑤시고 들어갈텐데, 화제를 금방 돌리면서 

상황수습을 이미 해 버렸으니, 놀릴 수 없다는 뜻이다. 화정은 

그 얄미울 정도의 침착성에 또다시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조운을 놀려먹는 것은 포기해야했다. 그리고, 조운 때문에 이대로 

항복하고, 집안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더 싫어졌다. 

`그런다고 기가 죽을 내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지!' 

이 얄미운 남자에게는 절대, 오기를 안 부리고 견딜 수가 

없었다. 화정에게는, 정직히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말대로 따르던 환경을 겪고 자랐기에, 그녀에게 저렇게 빳빳하게 

구는 사람에게 오기를 안 부리고는 참을 수 없는 기질이 

남아있었다. 특히, 남자란 특성은 더더욱 그렇다. 

적어도, 어머니를 닮아 선천적이기도 했지만, 여성의 미(美)에 

관심이 지대했던 아버지의 기승에 후천적으로도 갈고 닦아진 

빼어난 외모 덕에, 남자들은 보통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그녀의 호감을 사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하다못해 영각같이 빈정거리거나 장난을 거는 모습이라도...... 

어떤 방법이건 간에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이 사람은 무슨 

무쇠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는지 전혀 동요가 없었다. 이전에 

화정보다 훨씬 예쁜 여자를 만난 적이 있는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여자라는 동물에게 관심 자체가 없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부류의 사람인 조운은 화정에게 강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화정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같이 나가죠, 뭐." 

화정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 

표정에 주름 하나 잡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언짢다면 가지 않겠어. 어서 다녀와.' 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조운을 바랬지만...... 

"짧게 다녀와야 하니 알아서 앞장서." 

화정은 속으로 역정을 냈다. 정말......선천적인 

무인(武人)이다. 뼈 속까지 무쇠로 채우고 태어났는 

모양이다.   

******* 

기분이 나빠 보였지만 그녀는 결국 예정을 바꾸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얼음장같이 찬 표정으로 우아하게도 걸음을 

옮기는 화정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영각의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게 귀를 때리고 있었다. 

<심장을 파먹던 여자는 긴 검정 생머리였어......그리고 

분명......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던 그 눈........회색이었어! 

회색이었단 말일세! 놀랄 만큼 하얀 피부와 회색 눈동자에 

작은 얼굴 윤곽.......분명히 그 아이와 닮았어! 가면을 썼지만 

얼굴형이나 큰 키, 마른 체격......그 아이와 닮았다구! 닮은 

것이 아니라 거의 똑같았네! 느낌까지 말야!> 

그렇게 흥분해서 말하던 영각의 얼굴에는 전에 없이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조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화정은 

주욱 자신들과 함께 있었음을 강조하자 영각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한숨만 길게 내쉬던 

영각은 뭔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답답해진 조운이 확실하냐고 묻자 영각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시한번 긍정했다. 익살맞고 능청을 잘 떠는 

영각이지만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운은 

알고 있었다. 조운은 영각의 그 음성을 다시한번 귓가에 

느끼면서, 우아하지만 다소 신경질을 동반한 걸음으로 앞서서 

가고있는 화정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짓을 할 만한 아이가 아닌데...... 

영각이 착각한 것이라 생각은 되지 않고......' 

사실 호위를 핑계댔지만, 감시하러 나왔다는 것이 옳았다. 

다른 사람들과 홀로 있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영각의 간절한 

제안에 의해서였다. 

<다른 사람은 감당하지 못할 아이야. 나도 물론이고. 

그러니 자네가 감시해.> 

그렇게 잘라 말하던 영각은 그때 심장을 파먹던 만행을 저지른 

범인이 화정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사실 영각은 

화정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며, 그 일 이후로는 더더욱 

그녀를 불신하고 있었다. 

물론 조운도 화정을 좋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녀 때문에 

겪은 고초는 둘째치더라도 사람을 지나칠 만큼 경계하는 

느낌이 있는 화정은 조운으로서도 기분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아가씨 근성이 강하고 남이 자신에게 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녀의 특성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저렇게 자존심이 

높고 성격도 곧은 그녀가, 그런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하기는 모를 일이니......' 

조운은 일순간, 자신의 생각을 철회(撤回)시켰다. 사람의 

속을 어떻게 겉만 보고 알겠는가. 조운은 옅게 한숨을 내쉬면서, 

우물터로 들어서는 화정의 뒷모습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덧 도착한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언제 이런 곳을 보아두었는지 또 모를 일이군.' 

그녀의 예민함과, 관찰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조운은 

속으로 옅게 웃었다. 수려한 경관이었다. 작고 오래된 듯한 

깊은 우물가 주변에는 아낙 몇이 연신 빨래를 비벼대고 있었다. 

몇 백년은 된 것 같은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우물가에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으며, 그 그늘이 좋은지 새 몇 마리가 줄지어 

앉아있었다. 

지대가 약간 높았기에, 주변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왔다. 

멀리, 호화롭고 아름다운 황성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건물들이 늘어섰다. 하지만 

그 모든 광경보다 아름다웠던 것은...... 

"하아......" 

감탄한 듯 입김을 내 뿜으며 화정이 올려다보는 하늘이었다. 

정말 그랬다. 그녀가 넋을 놓고 올려다보는 하늘. 이곳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시렸다. 구름 한 점 없는 그 푸른 하늘은 

높아 보였다.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굵다란 나무의 곁가지가 

어우러진 그 하늘은 너무 맑았다. 너무도 맑아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화정의 투명한 눈동자에 비치는 푸른 하늘. 

"죄송합니다." 

자신이 하늘을 올려다본 새에, 화정은 아낙의 빨래하던 등을 

건드렸던 것 같다. 고개를 숙여서 다소 쑥스러운 듯, 하지만 

차갑게 형식적으로 사과하는 화정을, 아낙이 불만스럽게 

곁눈으로 흘기다가 넋을 놓고 바라본다. 하기는, 누가 보아도 

그녀는 아름답다. 무감각하고 얼음같은 표정 안에 기품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서려있다. 빼어난, 선천적인 미모가 

그 얼음같은 도도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누구라도, 처음에는 그녀를 눈여겨 볼 것이다. 정직히 

이야기하자면 조운도 처음에 그녀를 보았을 때, 이상야릇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감탄했으니까. 화정은 그런 아낙의 

눈길을 모르는지, 아니면 늘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익숙한 건지 상관하지 않고 얼굴을 돌렸다. 

나무에 기대서서 화정을 보고 있던 조운을 발견한 화정은 

자신이 실수한 장면이 또 목격되자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면서 황성이 잘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 다른 움직임은 없군.' 

조운은 그렇게 판단하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경미석을 

지니고 있으며, 사현도 몇 십 년의 수행 끝에 겨우 부린 

아귀강시를, 본인도 연유를 모른 채 부리고, 비록 일부지만 

원령을 승천시킬 줄 알며 희귀존재인 영수를 지녔다는 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꽤 긴 시간 함께 있으면서 조운이 알아낸 

화정은 `생각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 

위의 주술적인 능력도, 본인 스스로는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영각이 화정이 심장을 파먹었다고 주장하는 그 위치와, 

조운들이 당시 있던 곳은 며칠 걸리는 거리다. 사씨 형제들처럼 

시공이동을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면 왕복할 수 없다.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운은 그렇게 결론짓기로 했다. 자신이 아귀강시를 부릴 

줄 아는 것을 모르듯, 어쩌면 시공이동을 할 줄 아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저렇게 겉모습을 말짱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기는......' 

조운은 이전에, 자신에게 금창약을 발라주었다가, 화정이 

아영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상처낸 손을, 조운이 

붙들었을 때,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면서 잡아빼던 화정을 

기억해내며 눈살을 다시 찌푸렸다. 뿐만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때 하녀의 말로는 화정이 분명 하녀가 겁탈 당하려던 순간 

흥분하며 몸에서 빛을 발하고 공중으로 떠올라 아귀강시들을 

불러냈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예삿일이 아니었다. 

조금 수상하다. 아마도, 유달리 남자에 관한 거부감에 가까운, 

어떤 증상이 있음이 분명하다. 저렇게 예쁘고 빠지는 구석이 

없어 보여도, 의외로 그런 것임에 분명하다. 

`이제야 깨닫다니!' 

어느 정도로 동행하는 일행에 대해 무관심했는지, 스스로에 

대해서 빈정거리면서 조운은 한 손을 턱에 가져갔다. 남자를 

유독 멀리한다는 것......종교적인 측면으로 생각해본다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혹시.....정말로 신녀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이 증명된다. 인간이 아닌 신녀라면, 

시공이동을 못할 까닭이 없고 아귀강시를 부리며 원령을 

승천시키고 영수를 수호수로 데리고 다녀도 무방하다. 아니,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편하다. 또한 고귀한 

신녀의 몸으로 인간 남자들을 멀리 하는 것도 상식적인 일이다. 

조운도 처음에, 화정이 공중에 떠올라 아귀강시들을 동원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고 산적들을 내쫓았을 때에는, 혹시 그녀가 

신녀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일이 있던 직후 화정이 보인 반응은 그런 조운의 추리를 

어김없이 뒤흔들었다. 냉랭하던 얼굴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며, 

청초하고 아름답지만 사람답게 울어대던 화정은, 조운이 

보기에 어김없는 열 일곱의 아직 어리고 철없는 아가씨였다. 

또한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이 그 사태를 감당할 수 없으며 

이유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뭐, 느낌이 왜곡된 경우야 수없이 많지만 이렇게 증거도 

없고 막연하기만 한 때에는, 때로 느낌이 가장 정확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품었지만 조운은 화정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황성을 지켜보면서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더니 몇 걸음 정도 거닐고 있다. 보통의 

여자들보다 키가 큰 편이지만 마르기는 훨씬 말라서 날아갈 듯 

가냘퍼 보이는 그녀는, 머리를 질끈 묶어내려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고 평범한 옷을 입었어도 단연 눈에 뜨인다. 

`그나저나 감시라니......말로는 내가 아무리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이쯤되면 감시라는 사실을 느끼기는 하겠군.' 

조금은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또한, 아까 자신이 그녀의 

앞에서 실언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내면 더더욱,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어떻게 된 모양이다. 실언이라니, 

정말 어처구니없다. 

`비긴 셈이군......' 

그렇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실수 따위는 거의 없는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여러 가지 실수를 들키고 얼굴을 붉히는 

것이나, 자신이 그런 지나가는 실언을 한 것이나, 따지고 보면 

묘하다. 특히 그녀가 소연을 닮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끼아악!" 

조운의 그런 나태한 생각은 곧이어 날아온, 웬 아낙의 

단말마에 막혀버렸다. 눈을 들었다. 주변에서 빨래를 연신 

비비며 수다를 떨던 아낙들이 빨래를 중단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뿔뿔이 흩어졌다. 새까만 옷을 입은 자가 흑색 빛이 꽂히듯 

날렵한 동작으로 땅에 내려섰다. 조운은 나무에 기대있던 자신의 

몸을 급히 세웠다. 

하지만 이미, 화정의 하얀 목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이 

들이대어져 있었다. 사내는 두건을 눌러써서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이봐, 왕윤의 집에 아직까지 그......키 작고 다친 놈이 

머무르고 있나? 넌 분명 그 집에 그들과 함께 있던 여자지?" 

조운은 그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화정은 겁을 내기는커녕, 

그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 눈빛에 자객은 더욱 

자극을 받았는지, 역정을 부렸다. 

"대답해! 안 그러면 이 어여쁜 목을 꿰뚫어 줄 테다!" 

조운은 천천히, 자객의 등뒤로 다가갔다. 워낙에 화정을 

위협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어서 그런지, 그는 자객의 필수 

요건인 예민성을 잃고 거칠어져 있는 듯했다. 화정은 눈동자를 

굴려 다가오는 조운을 바라보더니, 도리어 더더욱 침착해진 

얼굴로 그에게 빈정거렸다. 

"대답하든 안 하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지?"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끝이 조금 떨려왔다. 아마, 저렇게 

고고한 표정이어도 겁이 나기는 하는 모양이다. 하긴, 지금까지 

기절않고 버티는 것만 해도 용한데 저렇게 상대를 도발까지 

하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자객은 화정의 말에 더욱 화를 내면서 

침착성을 잃었다. 

"답하면 살려주지! 그러니 그 놈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어디로 갔는지 어서 말해! 급하다!" 

조운은 화정이 자신을 눈으로 보면서, 처치하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객의 신경을 자극시키면서 조운이 어서 

그를 처치하도록 유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조운은 쥐고있던 

단창(短槍)*의 날을 세워 화정에게 칼을 가져다대고 있는 자객의 

등뒤로 세웠다. 화정은 조운을 다시한번 곁눈질하더니 결정적인 

발뺌을 했다. 

"그럼 이 칼이나 목에서 놓아. 보다시피 난 무술이나 주술에 

대해 전혀 몰라. 이렇게 하니까 무서워서 말을 할 수가 없어." 

현 상태로는, 조운이 자객을 죽이더라도 자객은 죽으면서 

화정의 목을 얼마든지 찌를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신경이 쓰인 

듯했다. 하기는, 이렇게 자객이 방심한 상태라면 그렇게 해서라도 

발뺌할 수는 있을 것이다. 

화정의 외견은, 절대로 무술이나 주술을 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자객은 특히, 방심한 상태이니, 이런 예쁘기만 한 여자쯤이야 

목에 칼을 대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쫓아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기고만장해있던 자객은 

어리석은 짓을 했다. 

"그러지. 대신에 엉뚱한 짓을 하면 너는 끝.......!" 

퍽! 

묵직한 소리가 나면서 조운 역시도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화정은 자객이 칼을 목에서 떼자마자 한 손으로 

자객의 손목을 후려쳐 칼을 떨어뜨리게 하면서, 동시에 

번개같이 무릎을 발로 돌려차 그를 쓰러뜨렸던 것이다. 정말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꽤 익숙한 동작이었다. 조운은 

자객의 목에 창을 가져다대면서도 속으로 혀를 찼다. 참, 

여러모로 깜찍한 짓을 하는 여자다. 

"동탁이 보냈나, 사현이 보냈는가." 

낮게, 조운이 협박을 하는데 자객은 땅에 드러누워 

부들부들 떨더니 조운이 목에 가져다 댄 창날을, 스스로 

끌어당겨 자진하고 말았다. 자객이 창날을 움켜쥐는 순간, 

조운이 급히 창날을 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화정이 

천천히 걸어왔다. 

"......이 사람, 뭐에요? 왜......" 

"이만 가지." 

조운은 언짢은 감정을 추스르면서 돌아섰다. 자객들이란, 

때로 상당히 기분이 나쁘게 만든다. 이전에 영각과 있을 때 

침입해 들어온 자객처럼 스스로 겁을 먹고, 모든 것을 

털어놓아준다면 정말 좋겠지만, 지금의 자객처럼 자살해버리거나 

함구하는 자객은 매우 성가시다. 

하기는, 만약 조운 자신이 자객을 보낸 입장이라면, 자객들이 

모두 후자의 입장이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입장차에 따라 그렇게 다르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리다. 

`아마도.....영각이 알고 있는 쌍둥이에 관한 일에 

연루되어있는 자인 모양이군. 동탁 뿐 아니라 쌍둥이에 관해 

신경을 쓰고 있는 자가 또 있는건가......? 황실의 

극비사항이라고 했는데 누가 감히 이 사실을 또 알고 

있는거지......?' 

뒤에서 화정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모른 척, 

발걸음을 옮기는데, 화정의 청명한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사람이 좀 물어보면 대답해주면 덧나나요? 어차피 동행하는 

처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함께 도망을 

다니든 뭘 하든 할 거 아니에요?!" 

야무진 그녀의 말에도 조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또다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조운은 고개를 휙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팔짱을 

낀 채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틀린 말했어요? 영각이 다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에요?" 

조운은 그런 그녀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사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어.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그럼 반대로, 사람들이 모두 

너에게 말을 해 주어야 하는 의무라도 있나?" 

조운의 말에 화정은 눈을 치켜 뜨면서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새침해 보이는 그 태도로 보아 꽤나 화가 난 듯했다. 

하지만 조운은 그 이상 상관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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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단창(短槍): 길이가 짧은 창. 보통 전투 시時 사용하는 

장창長槍은 들고 다니기에 불편하다. 따라서 전장이 아닐 때 

창의 사용자들은 검보다 약간 긴, 단창을 휴대하고 다니기도 

한다*작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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