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연환계(連環計)의 서두(序頭)
살짝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온 햇빛은 관(冠)의 화려함을
더욱 눈부시게 했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관은, 단순하게
황금색만 내는 것이 아니었다. 붉고 푸른 온갖 고금의 보석이
함께 빛을 내고 있었다. 오색의 휘황찬란한 관에 눈이 부시는
것마저 느끼면서 여포는 기쁜 표정으로 시종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분에 넘치는 선물이라니! 그 집이 본디 옛적부터
명문가인지라 귀한 물건이 많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는 도중에 거의 잃었다고 들었는데 이런......!
내, 오늘 저녁 당장 뵈러 가겠다고 아뢰시게!"
허리를 숙인 채 겁에 질려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왕윤의
시종은 연신 고개를 굽신대면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빠르게
달려나갔다. 여포는 그런 시종은 안중에도 없이 흐뭇한 표정으로
탁자에 앉아, 다시한번 선물받은 관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흐흠, 아버지에게도 빳빳하던 왕사도가......무슨 바람이
불었나? 이렇게 호화로운 선물을 다 하고......게다가 연회에
초대라니, 늘 늙은이들끼리만 모여서 웅얼거리던 인물이
갑작스레......"
이 생각, 저 생각 다 떠올랐지만 여포의 단순한 머리에는
그저 왕윤의 호의라는 결론 외에는 절대 내려지지 않았다.
여포는 관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을 좀 하다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겠다! 뭔 이유인지는 가보면 알겠지. 설마하니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노인네가 이 나를 어찌 할 리는 없고,
이렇게 비싼 가보를 고이 물어다 주었는데......가만,
이거 가짜 아닌가?"
여포는 이맛살을 거칠게 찌푸리면서 왕윤이 보낸 관을
무식하게도 흔들어보았다. 관에 달린 비싼 구슬들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흔들거렸다. 하지만, 워낙에 정교하게 세공된
관인지라, 그렇게 세게 흔들어도 구슬 한 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에는 관의 끝부분을 이빨로 깨물어보는 여포였다.
"음, 이빨자국이 남는 것을 보니 진짜로군."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관을 천천히 감상하는 여포가
한심스러웠는지, 시녀 하나가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보통 때 같았으면 붙들어다가 목을 확 그어놓았겠지만
유달리 귀한 보물 덕에 기분이 좋아져 있는지라, 그 시녀는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셈이다. 그만큼 여포의 기분은 즐거웠다.
여포는 관을 아직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만지작거리면서 아까
사신이 읽고 간 왕윤의 문구를 기억해냈다.
"볼 만한 것이 있으니 호의를 거절말고 꼭 참석해달라......
흐음......볼 만한 것......볼 만한 것이라니, 이렇게
호화로운 선물을 벌써 주어놓고는 아직도 더 좋은 것이
남았나? 흠......"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이렇게 구경하기
힘든 보물을 선물로 받고도 여포의 즐거운 상상은 계속해서
부풀고 있었다. 여포는 자리에서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손짓을
하자 곁에 시립해 있던 시녀가 문을 열었고 시종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허리가 부러지도록 고개를 숙였다.
"저녁에 왕사도의 집에 갈 거니까, 그리 알고 준비해놔."
아직도 아랫사람을 부리기에는 말투가 고상하지 못한 여포다.
하지만 누가 감히 꼬투리를 잡겠는가. 시종은 그저 네네, 하면서
자신의 목이 붙어있는지 확인하고 재빨리 내뺐다. 여포는
다시한번 곁에 놓인 관을 만지작거리면서 히죽댔다.
"권력이란 것이 좋기는 하구먼......그 깐깐하던 노인네가
나한테 이런 선심을 다 쓰고 말이야. 제까짓 것이 나를 해하려
해봤자지. 그러니 이젠 아예 내게 손을 뻗쳐오는군그래.
하하핫......!"
여포의 호탕하지만 듣기 거북한 구석이 남은 웃음소리가
호화찬란한 저택의 바깥까지 진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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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좋게 발걸음을 옮기던 여포는 대문을 열어주는 시종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소문난 명문가답게 정원의
꾸밈새도 일품이었다. 인위적으로 심은 것은 분명하지만,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나무들과 정성껏 가꾸어진 색색의
꽃, 그리고 맑은 물이 고여있는 작은 못은, 경박하고 야단스러운
화려함보다, 고풍스럽고 격조높은 미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녹음이 어우러진 정원을 보면서 여포가, 글줄을 모르는 그 무식함
속에서도 찬탄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는데, 버선발로 달려나온
왕윤의 태도는 그런 여포의 기분을 한없이 돋우었다.
"이런, 영용하신 온후(溫侯: 여포에게 동탁이 내린 시호*작가주)
께서 정말로 찾아주시다니, 이 늙은이의 평생 한이 풀렸소이다!"
왕윤이 이렇게 다른 이의 기분을 잘 맞춰내던 기특한
늙은이던가? 여포는 즐거운 기분에 전혀 할 줄 모르던 겸손까지
떨어보였다.
"무슨 말씀을. 원로대신 중에서도 으뜸이신 왕사도께서
불러주시는데, 당연히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격조높은 답변이다. 왕윤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기쁜 낯으로 허허거렸다.
"허허허, 즐겁구려. 그나저나, 별 것 아닌 선물에 감사까지
해 주셨으니 이 늙은이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여포는 왕윤의 웃는 낯에 기분이 끝없이 좋아짐을 느끼면서,
왕윤이 이끄는 대로 풍경이 좋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천하무적의 사내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의외로
순수한 면이 있는 법이어서, 여포는 왕윤의 잘 꾸며놓은 정원에
새삼 감흥을 느끼는 중이었다.
또한 이전까지는 예상할 수도 없던 왕윤의 환대는 더욱 그랬다.
왕윤은 아담하고 깨끗한 연못을 지나, 조그맣게 세워놓은
아름다운 정자로 여포를 이끄는 것이었다. 주변의 풍경에
정신을 빼앗겨있던 여포는 왕윤이 손짓하자 들어가기 위해
정자로 시선을 옮겼다.
"오, 이런! 극락이 따로 없소!"
여포는 환호성을 질렀다. 푸른색의 목재로 호화롭게 지은
정자는, 향나무가 주원료인지 은은한 향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색색으로 물들인 등불들과 은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촛대들이
기품을 담고 배치되어 있었으며, 갓 따낸 듯한 꽃들이 여기저기,
조화롭게도 배치되어있었다. 공후*소리와 어우러져 은은하게
들리는 칠현금 소리와 피리 소리가 청각을 즐겁게 하였다.
특히, 향나무 내음과 은근하게 잘 어울리는, 맛난 음식 냄새가
후각까지 함께 즐기도록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여포는 목으로
몰래 군침을 삼키면서, 자신의 앞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몇 명의
어린 여시종들을 곁눈질했다. 나이 열 여섯이나 되었을까,
하나같이 갓 피어난 꽃처럼 싱그럽고 고운 자색들이었다.
어느덧 주변의 풍경에는 관심을 끊고 여시종들에게 시선을
따라보내는 여포의 옆에서, 왕윤이 웃음지었다.
"허허, 감히 온후의 시중을 이런 아이들이 들도록 하겠소이까.
나름대로 이 늙은이가 출중한 것들을 가려 뽑아놓고 기다렸으니,
이제 그만 안으로 듭시다."
왕윤의 권유에 여포는 귀가 솔깃했다. 그렇잖아도, 매일같이
동탁이 쓰다 버린 여자들만 상대하느라 사실 이골이 나 있던
터였다. 동탁의 여색(女色)에 대한 집착은 정말 무서운 것이어서,
그는 아들인 여포에게조차 미녀는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녀를 발견하면 자신이 먼저 가로채어 실컷 탐한 후, 실증이
나면 선심이라도 쓰듯 여포에게 내리곤 하였다. 여포도 사실
여색을 상당히 즐기기는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동탁에게 붙들린 여성은 비록
양부양자(養父養子)라지만 엄연한 부자(父子)에게 탐해지는,
애매하고 고달픈 슬픔을 맛보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흠흠, 그럼, 사양않고......"
여포는 왕윤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움을 표하듯 건성으로
포권을 하고 고개를 숙여보인 후,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정자
안으로 옮겼다. 깨끗하게 청소된 정자는 바깥에서 본 것보다
좀 넓은 편이었다. 작은 방이 세 개나 딸려있었다. 여포가
속으로 감탄하면서 `호, 이렇게 방을 세 개나 넣었는데도
바깥에서는 그렇게 작아 보였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복도를 지나 왕윤은 그 세 개의 방중에서 가장
넓어보이고 문 또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으로 발길을
향했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안에서 나타난 여자에게, 왕윤이 공손하게 물었다. 하녀라면
말을 저렇게 공손하게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던
여포는 그녀의 차림을 보고 더더욱 궁금증을 품었다. 흰 색의
비단을 안에 입고 겉에는 자수도 놓여있지 않은 옅은 붉은 색의
옷을 입었다. 크게 화려하지는 않고, 왕윤 같은 명문가의 인척인가,
싶을 만큼 수수했다.
허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것을 보아,
하녀 차림은 아니었다. 갈색의 연한 머리칼을 헐렁하게 땋아내려
묶고 있었으며 얼굴은 좀 검었다. 눈이 크기는 했지만, 연한 색의
허리끈으로 질끈 동여맨 허리는 가늘지도 않았으며, 몸매에
곡선이 별로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못생긴 편이었다.
여포는 속으로 눈 버렸다고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그녀가 왕윤의
인척이라도 되나 생각해보았다. 여자는, 비록 외모는 못생겼지만
차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고, 그 분위기에 걸맞게 조용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안으로 드시면 됩니다."
"이 분은.....누구십니까?"
아무리 보기는 좀 싫더라도, 예의는 차례야 하지 않겠는가.
글은 읽을 줄 몰라도 예의에 대해서는 동탁 덕에 조정
고관대신들을 매일같이 접해온 - 대부분 체포라던가 처형을
명목으로 접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면전에서 대한 것은
맞다고 여포는 생각했다 - 여포는 어느 정도 익히고 있었다.
왕윤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 왕 아무개의 오랜 친구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불행히도 그 친구가 병들어 죽었다오. 이전에 맹약을 맺은
사이인지라, 내가 대신 그 딸을 돌보고 있소이다. 이 소저는
아영(我暎)이란 분으로, 그 딸의 시녀요. 하지만 내 집안의
시녀는 아니었는지라 정중하게 대접하고 있다오."
워낙 여자에 관심이 많은지라, 그 딸을 한번보고 싶다고
해 보려던 여포는, 뒤의 말을 듣고 그녀를 보고픈 마음이
싹 가셨다. 저 정도의 심리는 알 수 있다. 얼마나 그녀가
박색(薄色)하면 저렇게 못난 시녀를 두었겠는가. 보통, 여자의
경우는, 여주인과 나이가 같거나 비슷한 시녀는 주인보다도
예쁘지 않게 두는 것이 상례다. 한갓 시종과 미모가 비교가
되면 좋지 않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주인의 심기도 불편하지만 단순히 그 불편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둘의 사이가 화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집안에 말썽도 많이 일게 된다. 여포가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이, 아영이라는 그 여자는 슬쩍 사라지고 없었다.
왕윤이 눈짓을 하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여포는 왕윤이
등짝을 들이미는대로 사양하는 척, 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반짝거리면서 윤을 내고 있는 흑색의 커다란 상은, 그야말로
다리가 휘어지도록 호화스런 음식들을 가득 올려놓고 있었다.
음식들은 겉모양도 정말 화려했다. 호화롭게 장식까지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여포의 엄청난 식성을 돋우는 것 같았다. 여포는
왕윤에게 포권하면서 감사했다.
"이 미련한 놈을 위해 원로대신이신 왕공께서 이런......!
정말 죽어도 은혜를 갚지 못하겠습니다!"
"별 말씀을, 어서 앉으시지요."
그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가장 상석(上席)에 앉을 것을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제 아무리 여포가 우직하고 멋모르는
무인이라지만,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여포는 왕윤의
권유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이 여 아무개가 무어라고 이러십니까? 이러시면 안됩니다!"
왕윤은 여포의 격렬한 반대에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여장군께서는 이 왕 아무개의 성의를 무시하는구려.
여장군께서는 이제 천하가 다 아는 영웅이시오. 헌데 이런
누추한 자리에서 상석을 드리지 않으면, 이 왕 늙은이의
체면이 어찌되오?"
왕윤의 엄숙한 얼굴에 주눅이 들고 만 여포는 거듭 감사를
표하면서 마지못한 척 상석에 앉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기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대신 중에서도 꼿꼿하던 왕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추켜세우니,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대단한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하기는, 그 누가 감히 나를 이기랴. 따지고 보면 양부의
권세도 내 덕인데.'
이런 오만한 마음도 슬몃 일었다. 콧대를 세우면서 목청을
가다듬는데, 왕윤이 곁의 술병을 들면서 은근하게 권한다.
"평생 영웅이신 장군께 술 한잔 대접하는 것이 꿈이었소이다.
이 늙은이의 꿈을 이루어 주시오."
"말씀 낮추시지요. 어르신께서 그리 저를 높게 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기쁜 마음에 왕윤에게 고개까지 숙이면서, 여포는 바로 앞의
잔을 들었다. 술잔도 옥을 깎아만든 정교하고 호화로운 것이었다.
왕윤은 역시 옥을 깎아 만든 듯한 술병을 들어 여포에게 술을
한 잔 부었다. 여포는 단숨에 들이키고는 왕윤에게 찬사를 퍼부었다.
"어르신이 주신 술인지라 맛이 기가 막히오이다! 특히, 이 옥잔과
옥병이 정말로 아름답구려!"
그 말에 왕윤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정말로 기뻐하는 것이다.
"저런, 여장군께서 늙은이의 술을 기쁘게 받으시니 영광이오!
옥잔과 옥병이야 여 장군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응당 드려야지요."
그러더니 여포가 만류할 새도 없이 손을 들어 시첩 하나를 부른다.
"춘안, 이 옥잔과 옥병을 여장군이 마음에 들어하시니 자리가
파하고 장군께 드려라."
다 좋은데 왕윤의 시첩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못생겼는지
모르겠다. 아까는 예쁜 시첩들이 많았는데 가려 뽑았다면서
왜 이 안에 있는 시첩들은 이렇게 못생긴 것일까. 얼굴이 검고
눈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시첩은 공손하게도 허리를 굽혔다.
"명대로 시행하겠나이다."
하지만 역시 명가의 시첩이라 그런지 나긋나긋한 태도와
공손함이 몸에 배어있다. 여하튼, 여포는 왕윤에게 짐짓
겸양을 떨며 나무랐다.
"어르신께서 자꾸 이러시면 여 아무개가 불편해지지 않습니까!"
왕윤은 손까지 내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허허, 저따위 물건이 아무리 귀한들, 여장군을 뵙고 가까이
모시는 것 만한 가치가 있겠소!"
여포는 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다시 들었다. 맑고 투명한
옥잔은 아무리 보아도 아름다워서 술맛을 몇 배나 돋우었다.
특히, 이 술잔이 조금 있으면 자신의 상에도 곧 오를 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삼십 평생 이렇게 기분이
좋은 날도 드물 거라고 생각하면서 여포가 젓가락을 집었는데,
젓가락 역시 보통의 물건이 아니다. 상아를 깎아 만들었는
듯한데, 금으로 세공이 되어있으며 끝에는 조그마한 붉은
구슬까지 박혀있다. 여포는 젓가락을 물끄러미 살피면서
감탄했다.
"젓가락도 귀하게 보입니다! 정말 아름답군요."
왕윤이 이내 급하게, 시첩을 또 부른다.
"향라, 이 젓가락도 장군께서 귀환하실 때에 함께 드리도록."
"예, 어르신."
역시 얼굴이 검고 생김새가 별로인 시첩이 고개를 공손하게
숙였다. 여포가 헛기침을 하면서 애써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여포의 기색에 왕윤이 쩔쩔맨다.
"이런, 장군! 이 늙은이에게 화라도 나신게요?"
여포는 짐짓 기승을 떨어보았다.
"화가 날 수 밖에요."
왕윤의 얼굴에 금세 수심이 드리워졌다.
"이런, 죽을죄를 졌구랴! 어서 말씀해 주셔야 늙은이가
만회할 것이 아니오이까."
여포는 엄숙한 체를 했다.
"첫째, 어르신은 나라의 공신이신데 어찌 일개 무식한 놈에게
이리 굽신대신단 말이오."
물론 속마음과는 반대다. 권력을 쥐고 흔드는 승상 동탁의
총애받는 양자이며, 그의 친위대장으로서 역시 권력이 높은
자신이다. 직위는 자신보다 높지만 힘이 없는 왕윤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영웅이란, 겸손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둘째, 어르신의 귀한 가보(家寶)를 이렇게 선뜻선뜻 주시면
이 봉선(奉先: 여포의 자字)이 어찌 은혜를 갚소이까! 무식한
놈에게 부담을 지워주시면 가슴앓이만 생기오!"
여포 딴에는 어렵게 나온 대사지만 문(文)에 능한 대신답게,
왕윤은 빙긋이 웃으면서 쉽게 응답한다.
"여장군, 아니외다. 첫째로, 여장군은 천하가 두려워하는
두자 이름을 떨치고 계신 고금의 영웅이신데 왕 아무개가
감히 굽신대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있소이까. 둘째로, 이깟
물건이야 또 손에 넣으면 되지만 사람의 마음은 손에 넣을
수 없소이다. 여장군께서 기꺼워하시는데 물건을 아낄 수
있소?"
"험험."
여포는 우쭐한 마음에 술만 또 들이키면서 헛기침을 했다.
술이 몇 잔 안으로 들어가자, 술기운이 벌써 올랐는지 기분이
으쓱해졌다. 유달리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더 술기운이
오른 듯했다. 그새 친해진 왕윤과 주거니 받거니 열심히
술잔을 나누는데, 갑작스럽게 은은하게 음악이 울려퍼져왔다.
여포는 이미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눈길을 돌렸다.
"응?"
순간, 여포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주변에는 시녀 몇이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시녀들의 얼굴이 못생겼다는 것이 흠이지만 솜씨 하나는
일품이었는지 귀를 아름답게 자극하는 소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포가 놀란 이유는 그 시녀들이 아니었다.
가운데에서는......
"오오!"
여포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가운데에는 늘씬한 여자가
천천히, 부드러운 팔동작을 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거리가
조금 멀어서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매우 흰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녀는,
마치 백색의 환한 빛처럼 보였다.
특히 의상이 매우 특이했는데, 투명하게 비치는 옷소매로
은근하게 드러나는 매혹적인 팔 선과, 동작을 조금 격하게 취할
때 드러나는 희고 매끈한 다리가 여포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길고 흰 목덜미와 약간 드러낸 가슴께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매끈하고 아름다운 어깨선이 매혹적인 팔 선과 이어지고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얇은 비단을 통해 비치고 있는
것이 은근히 매혹적이었다. 꽉 졸라맨 허리는 한 손에 잡힐 듯
가늘었고, 풍만한 가슴은 몸에 완벽한 곡선을 부여했다. 다소
노출이 심한 의상이었지만 춤추는 여자의 몸매가 원체 아름다워서
그것은 천박하게 보이지 않고 거의 완벽처럼 보이게 했다.
게다가 그녀의 윤무 솜씨는 여포가 보았던 그 어떤 여자의
것보다도 뛰어났다. 휘감겨 돌아가는 얇은 비단끈조차도, 그녀의
완벽성을 돋보이게 할 지경이었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팔
동작을 그 아름다운 팔이 해 내고 있으며, 하의가 길게
터져있는지라 다 드러난, 완벽한 다리가 우아한 발 동작으로
이어졌다.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반생을 전쟁터에서 살며 지내온 여포의
눈에, 그것은 거의 완벽이요 신화였다. 흰 빛같이 보이는 그
하얀 의상을 흩날리면서, 흰 팔과 다리를 이끌고 가녀린 허리를
흔들면서 때로는 처량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여포에게 마치 안아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여포는
감격하다 못해 몸이 다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여포는 그만 쥐고있던 술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탕탕......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귀한 옥잔이 땅바닥을 굴렀지만 여포는
그 소리마저도 듣지 못할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특히, 노출이
심하지만 아름다운 의상으로 잘 표현되는 그녀의 완벽한 몸매는
여포에게 감탄 그 이상의, 숭배에 가까운 심정을 자아냈다.
"여장군."
왕윤의 목소리에, 여포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망상에서
깨어났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옥잔을 떨어뜨린 것을 깨닫고
급히 잔을 주워들려고 했으나 아까의 향라라던 그 시첩이 잔을
주워서 올려바쳤다. 그녀의 박색한 모습을 보니 아까의 무희가
눈앞에 다시 어른거려, 여포는 눈길을 황급히 다시 들었지만
무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
왕윤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놀렸다.
"허허,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더니, 여장군도 흥미가
있으셨구려? 사실 저 아이는 제 딸아이외다. 아까 말씀드린
그......친구의 딸이지요. 워낙에 어릴 적부터 춤을 잘 추었는데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들어야 말이지요. 사실 장군께
소개시켜드리고 싶었지만 천박한 것이라 그런지 옷도 저 모양으로
입고 나오니.....쯧쯧......"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차며 말을 마무리짓는 왕윤의 말을,
여포가 얼른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천박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옵니까! 저런
희대(稀代)의 절색(絶色)을 볼 기회가 있는 행운에 감사드리옵니다."
왕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오, 그러오? 이것 참, 정말로 여장군께서는 저 아이를 하찮게
생각 않으시는게요?"
여포는 정색을 했다.
"하찮다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여인에 대해 이 정도로
감탄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왕윤이 슬며시 눈웃음을 짓는다.
"거 잘됐구려! 여장군께 사실 윤무가 끝나고 아이를 보여드리려
했는데 천한 것이라고 싫어하실 것 같아 망설이던 참인데......
그렇다면......."
왕윤은, 여포에게는 만족스럽게도, 지체없이 손을 들어 춘안이란
시녀를 곁으로 불렀다.
"초선을 이리 들게 하여라."
시녀는 못생긴 얼굴을 끄덕거리면서 물러나갔다. 그 미인의
얼굴을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여포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연거푸 술을 석 잔이나 받아 마셨다. 잠시 후에, 옷을 갈아입은
듯한 여자가 사뿐사뿐하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로, 왕윤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자리로 다가왔다.
아까는 다리까지 길게 터져있는 옷이더니, 이제는 하의가
단정하고, 길게 퍼진 옷이다. 거의 벗은 듯한 차림 위에 투명한
비단 옷으로 어깨선과 목, 가슴께, 팔을 노출시킨 것은 여전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꽉 졸라맸어도 불편한 기색이 없는 가녀린 허리와
아름답고 풍만한 가슴선이 더 눈에 들어온다. 여포는 술기운에서인지
부끄럼에서인지 모를, 어떤 쑥스러움에 얼굴이 다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는 초선(貂蟬)이라 하오. 내 딸이나 다름없소. 초선아,
장군께 인사올려라."
그녀는 공손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고운 팔을 들어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미천한 계집이 천하의 영웅께 인사올리옵니다."
음성 또한 곱지 않은가! 여포는 반쯤 얼이 빠진 채, 초선을
슬쩍 훔쳐보았다. 백옥같이 흰 피부에 붉고 생기가 도는 입술,
크고 또렷한 눈매에 맑고 깊은 눈동자, 오똑한 콧날. 빠질 곳이
없는 미인이었다. 게다가 술기운이 잔뜩 올라있는 여포의 눈에는
더더욱 미인으로 보였으며 주변이 온통 못생긴 시녀뿐이었는지라,
그녀들과 대조되어서 특히 빛나보였다.
화장을 아주 엷게 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미 그녀의 윤무와 완벽한 몸매에 반해있던 여포는
정말로 초선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느껴졌다. 아름답게
틀어올린 머리카락에서는 매화 향기가 풍겨져 나왔고, 앞으로
조금 내린 애교머리는 조금 굽실굽실하게 물결치며 내려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애교머리를 굽실굽실하게 물결치게 만들었을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 굽실굽실함이 초선의
얼굴에 더욱 활기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긴 속눈썹은
유달리 짙었는데, 그 속눈썹을 내리깔며 쑥스러워하는 그녀는
특히 아름답고 청초했다. 왕윤이 한술 더 떴다.
"너는 여기 계신 여장군께 수주(壽酒) 한 잔 올리도록 해라."
여포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얼이 빠져서 자신이 쥐고 있던
옥잔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의외인 것은 초선이었다. 초선은
눈을 살짝 들어서 왕윤을 원망하는 표정을 짓더니,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몸을 틀어 나가려고 하였다.
매우 여성스럽고 양가집 규수다운 그 행동은, 늘 덥썩덥썩
자신에게 쉽게 안기던 여자에게 익숙해져 있었으며, 전투로
인해 거친 생활이 일상이었던 여포를 한차례 더 애타게
만들었다. 그렇잖아도 자신을 정면으로는 보아주지 않고 약간
틀어진 각도로, 슬쩍슬쩍 곁눈질하는 초선의 경계성 태도에
심장이 까맣게 타고 있는 여포였다. 다행히 왕윤이 초선을
꾸짖어주었다.
"어허! 여장군은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시다! 그런데
무얼 망설이느냐!"
왕윤의 꾸짖음에도, 초선은 쑥스러운 듯, 그리고 억울하다는
듯 눈가에 맑은 이슬을 맺히게 했다. 그 모습에 여포는 그야말로
자신의 혼이 통째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본 모습도
예뻤지만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힌, 그녀의 쑥스러워하는 듯,
슬퍼하는 듯 하는 그 청초한 모습은 그야말로 사내의 눈을
한번에 사로잡는 것 같았다. 마치, 못에 떠 있는 연이 거친
물결에 흔들리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듯한, 그런 애처로움과
그런 기품 같은 것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모습이었다.
"어허!"
왕윤이 다시한번 재촉하자 초선은 천천히, 하얗고 고운 손을
들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여포의 옥잔에 술을 가만히
부었다. 약간 발그레하게 변한 뺨에 아직도 수줍어하는 초선의
모습에, 여포는 술맛도 모르고 단번에 들이켰다.
여포는 그녀를 다시한번 뜯어보았다. 보면 볼수록, 사내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몸매는 요염한 맛을,
눈물이 잘 어울리는 청초한 모습이 아름다운 표정은 소녀같은
맑고 깨끗한 맛을, 정갈하면서 조신한 몸가짐은 정숙함을
동시에 담아냈다. 여포는 곁에서 이죽거리는 왕윤에게 감탄을
쏟아부었다.
"저, 정말로, 정말로 아리따운 아가씨군요! 봉선은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을 저 미오성( 塢城)*에서도.....보, 보지
못했습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말이 입안에서 헛돌았다. 완전히, 말
그대로 넋이 나가있는 셈이다. 특히 그 여포의 이상상태에,
쑥스러운 듯 흘겨보면서 가련한 자태로 깨끗하고 맑게 웃어내는
초선의 고운 미소가 또다시 일조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여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호, 이것 참! 본시 오늘, 이 늙은이가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초선을 장군께 드리기 위해였소이다! 저 아이, 나이가
열 여섯으로 적령기인데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 어디 아무나
낭군으로 삼아줄 수가 있어야지요.......그래 이 늙은이는
천하의 영웅이신 장군께서 첩으로나마 곁에 받아주신다면
드리려는 생각이었는데 저 아이가 못생기지는 않았으나 장군께
드리는 것을.......장군께서 언짢아하실 것 같아서......"
여포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왕윤에게, 정말 살아서
처음으로 해보는, 진심이 듬뿍 담긴 큰절을 올렸다.
"언짢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초선을 곁에 두고싶은
마음이 태산같사온데, 만일 사도께서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시오면 이 여포, 견마(犬馬)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사도를 모시겠사옵니다!"
그 말에 왕윤은 얼른 여포를 일으키면서 손을 황급히 저었다.
"이런, 절이라니! 받아주시는 것만 하여도 분에 넘칠
지경이외다!"
여포는 왕윤의 부축을 받아 다시 자리에 앉으며 초선을 또다시
힐끗, 바라보았다. 초선의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는데,
그 모습이 도리어 아름다워서 여포의 기분을 또다시 한껏
돋우었다. 왕윤이 익살을 조금 담은 목소리로 묻는다.
"초선아, 네 항시 사모하던 분께서 드디어 받아 주신다하니,
어떠하냐?"
항상 사모해왔다니, 여포는 또다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초선이 고개를 숙이며 쑥스럽게, 은방울
구르는 듯 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답하는 것이 또한 그 흥을
배로 돋우고 있었다.
"어르신은......!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원망스럽다는 듯, 왕윤을 살짝 흘기면서 슬며시 미소짓는
정숙한 초선의 모습은 요염하고 매혹적인 어깨와 팔, 목이 슬쩍,
얇은 비단을 통해 비추이면서 더욱 선녀같아 보였다. 여포는
벌써부터 달아올라있는 몸을 자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여포의 심정을 모르는지, 왕윤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기쁠 데가! 훌륭한 사위를 맞으니 이 왕윤, 이 이상
소원이 없을 것이외다! 또한 귀한 딸아이, 항시 그리던 낭군이
부군이 되기까지 했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닐꼬! 자, 더
술을 듭시다, 여장군! 이 아이는 내, 길일(吉日)을 택하여 장군의
부중으로 가까운 시일 내 보내드리겠소이다!"
여포는 너무도 기쁜 마음에 자신도 즐거워하면서 왕윤의
잔에 술을 쏟아부었다. 아무리 천하를 종횡무진 누비던 거친
여포라지만, 그런 거친 자의 가슴속은 의외로 순수한 법. 여포는
사실 초선을 곁에 두고 훔쳐볼 뿐 감히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여지껏 여자는 심심찮게 다루어본 여포였으나 이렇게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숭배에 가까운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여포에게는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여자였다. 그날 여포는,
거나하게 취하여 즐거운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적토마에
올랐고, 왕윤이 시녀들을 시켜 건네는 귀한 옥잔과 옥병, 상아
젓가락과 여벌의 선물들을 몽땅 사양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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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공후: 서양을 통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듯 알려져
있지만, 자세한 경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하프와 비슷하며,
틀 모양에 따라 와공후臥 :13현·수공후竪 :21현·
대공후大 :23현·소공후小 : 13현 등으로 구분된다. 공후는
본디 서역계의 악기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는데, 언제 어떠한
경로로 전래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이 악기들은
연주법을 잊어버린 채 악기의 모습만이 국립국악원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두산세계대백과
2.미오성( 塢城): 동탁이, 자신이 근거하기 위해 지은 성.
황성보다 몇 배는 호화롭게 지었으며, 몇 년을 물 쓰듯 써도
동이 나지 않을 만큼의 황금과 보배들을 축척하고 있었다. 이
안에는 나이 열 다섯에서 스물까지의 젊은 미녀가 800명이
있었다고 한다. 동탁의 사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표현해주는
상징으로 일컬어진다*작가주
한숨을 길게 내쉬는 초선은 너무나 피곤하게 보였다. 아영과
화정은 얼굴만 마주본 채 초선의 눈치만 천천히 살폈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지운 후, 침상 위에 앉아 연신 한숨만 내쉬고
있는 초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노골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아영은
눈짓으로 초선을 가리키면서, 화정에게 속닥거렸다.
"기분이 안 좋은가봐."
화정은 아영에게 눈을 흘기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기는,
아영도 짐작할 것이다. 초선의 처량한 심정을......
`그래, 오늘 초선님은......'
화정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초선의 춤추는 모습을 꽤
많이 지켜본 터였다. 특히, 화정과 아영은 초선과 함께
생활하면서, 아영은 초선의 칠현금 타는 법을, 화정은 춤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상냥한데다 예술적인 재능이
정말로 탁월한 초선은 두 사람에게 좋은 스승이고 언니였다.
세 사람은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덕분에 초선이 시범으로 춤을
추는 모습 정도는 하루에 두세번은 보아왔다.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춤은......'
화정은 곁에서 종이를 꺼내 스케치를 마무리 짓고있는 아영을
곁눈질하면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영의 그림에는 초선이
화려하게 춤을 추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아영은 초선이
여포의 앞에서 춤을 출 당시에 악기를 연주하는 시녀들 사이에
슬쩍 끼어있었고, 화정은 두건을 잔뜩 눌러쓰고 허름한 옷을
입은 채 음식을 나르는 시녀들 가운데에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자연히, 화정은 지나가면서 초선의 윤무를 몇 장면을 보았을
뿐이고, 그 유명한 여포도 뒤통수 밖에 볼 수 없었지만 아영은
달랐다. 아영은 초선의 춤추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아영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초선은, 눈가에 눈물이
맺어진 채였다. 미소띠고 있지만 슬픈 느낌......그렇다. 언뜻,
몇 장면 보았지만 그때의 초선은 춤에, 자신의 모든 한과 왕윤에
대한 사모를 담아내고 있었다.
날 좀 보아주세요.
제발, 저를 마지막으로라도 꼭 보아주세요......
애절한 외침이었다. 그것은, 목표 대상인 여포가 아니라,
왕윤을 향한 절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리고 냉랭한
화정에게조차도 가슴을 울리게 만들던 그 슬픔이 승화라도 된
것일까, 그 대가로, 초선의 춤은 정말로......진정으로 선녀가
추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꼭 그렇게 수를 쓰지 않았어도......여포가
그녀에게 반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라......'
화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영의 그림에서 눈을 떼고는,
울적해 보이는 초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 여포같이,
사람의 순정에 관해 둔한 사람은......초선처럼 깊은 감정을
지닌 사람의 눈빛에 매료된다고 한다. 특히, 여자를 `범하는
대상' 이 아닌, `사랑하는 대상'으로 볼 줄 모르는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춤을 추는 초선이 정말로 아름답게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런 내막의 사실을 모르더라도, 사람의 생각과 감정상태,
사상은 분위기와 행동에 모두 녹아난다. 정말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여포로서는, 초선같은 여자가
정말로 아름답게 비쳤을 것이다. 방금전, 왕윤으로부터 `여포가
어찌나 넋이 나갔는지 나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오! 그 물욕에
어두운 자가, 옥잔과 옥병, 상아 젓가락과 선물들을 고스란히
거절하고 갑디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화정은 사실 자신이
도모한 일이 성공했다는 기쁨보다 초선의 짓밟힌 마음 때문에
콧등이 다 시큰해졌을 정도였다. 그렇다. 사실......아무리
역사 속의 일이라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자신이 초선을
그런 비련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말이 옳다. 분명 그렇다......
"화정님."
초선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화정은 물론 아영까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시선을 그녀에게 쏠리게 했다.
"네에......"
죄책감에 잠겨있던 화정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초선의 눈가에는 어느덧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어져
있었다. 사실, 화정은 초선에게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가슴을
잔뜩 졸이고 있는 스스로를 느끼고 있었다. 혹시, 질책이라도
떨어진다면 어찌해야 하는걸까.
"모레는......동탁이 오겠지요?"
초선의 말에, 화정은 질책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옆에서는 아영이 말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니, 열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귀는 열려있되
그림을 그리는 척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틀림없이......사도 어르신의 거처를 떠나
그자의 품에......던져집니다, 저는......"
초선의 흐려지는 말 꼬리를 참을 수 없었는 모양이다. 아영이
그림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를 냈다.
"바보같아요! 그렇게 싫으면, 그냥 하지 말아요! 왜 그렇게
짜는 소리를 내는 거여요?!"
"아영아."
화정이 아영의 손을 붙들었지만 아영은 화정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는 초선을 노려보았다.
"왜요? 사모하는 사람 부탁이니까 들어줘야 해요? 그래서
자신의 몸까지 던져요? 인생까지 일그러뜨려요?! 그런데 막상
다가오려니까 무서워요?!"
아영의 말은 마치, 빗발치듯 초선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화정은 아영을 다시한번 억제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아영은
쏘아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초선은 그런 아영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뿐 답이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초선의 눈에서 맑은 방울이
한없이 떨구어져 가는 것을......아영은 신경질을 내면서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화정은 그리고, 아영의 내팽겨쳐진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영......'
감정이 풍부한 아이였다. 자신이 좋아하고 호감을 준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다정다감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림에 이만큼이나, 초선의 깊은 한(恨)과 비애(悲哀)를
담아내고 있을 만큼, 섬세한 아이였다. 초선과 친해지면서,
화정이 세운 연환계를 돕는 일에 거부감을 보이던 아이였다.
`하지만......'
화정은 아직도 고개를 수그리고 울고있는 초선을 지켜보았다.
저렇게 울고 있는 모습이 한없이 가녀리지만.......진정으로 강한
여자다. 사모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있다. 소중히
지켜온 순정을 짓밟히고 이용당하면서, 그것을 알면서도 전혀
원망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화정과 아영을 마치 동생처럼
대해주던 사람이다. 화정도 어떤 슬픔이나 후회같은 것이 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화정이 시선을 천장에 고정시키면서 힘이 빠진
듯 자리에 털썩, 앉자, 초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진동시켰다.
"왕윤 나으리......역적놈의 비천한 몸에 짓눌려 매일밤을
지내고, 역한 살내음을 맡고 살아야 하더라도, 그 길만이 어르신이
바라는 일을 이룰 수 있음이라면, 이 초선......기꺼이......
기꺼이......"
초선은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화정은 그 앞에서, 그저 초선을
바라보고만 앉아있었다. 건너편의 거울에, 눈을 내리깔고 우는
초선을 지켜보고 있는, 그녀 스스로의 모습이 비추었다.
화정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마주보고 있는, 흰 피부에 투명한 눈빛의 인형같은 소녀. 하지만
저 애통한 울음 앞인데도 눈빛은 냉랭하기만 하다. 마음 같아서는,
다가가서 껴안고 함께 울고 싶은데도......가슴이 이렇게 시렵다.
꽁꽁 얼어서 봄이 찾아올 줄을 모른다......
*******
여포보다 동탁은 꽤 까다로웠다. 확실히, 두 위인 모두
천하가 두려워하고 치를 떠는 자들이라고 하지만, 여포는
단순한 무장에 불과했으며 동탁은 간사하고 꾀가 굴러가는
자라는 차이가 있었다. 단 둘이 있을 기회를 마련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특히 더 문제는, 동탁의 곁을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이유였다. 이유는 동탁이 거의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천하의 모사꾼이었다. 그 정도로 눈치가 빠르고 영특한 자가
왕윤이, 동탁을 홀로 모시고 싶다고 청하면 뭔가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왕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먼저, 자신이 큰 음모를
꾸미기에는 힘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조정 대신들의 회의에서
굴복하는 자세만 보였다. 이전과는 달리 동탁의 제안에는
무조건 찬성하였고, 힘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눈치를 보는 척을 하였다. 또한 값진 보물을 동탁에게
산더미처럼 보내, 물욕이 강한 동탁에게 점수를 땄다.
결국 동탁은 왕윤이 보낸 선물을 감사하기 위해
조당(朝堂)에서 한번 보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왕윤은 그
전갈을 받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조당은 본래 임금이
정치를 하는 곳이지만, 현재는 동탁이 홀로 집무를 보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유가 동탁의 곁에
붙어있을 가능성은 그만큼 적다. 정오쯤 되면 다른 중신들이
몰려올 확률도 높으므로 서두르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내렸다.
왕윤은 일부러 이른 아침시간에 조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대로, 홀로 집무를 보던 동탁에게 한번
자신의 집에 행차해주면 영광이오마, 하고 간절하게 청하였다.
의심이 많은 동탁은 평상시 꼿꼿하기만 하던 왕윤이 급작스럽게
자신의 앞에서 굽신대며 방문을 권하고 있자 쉽사리 응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왕윤이 계속해서 간곡히 청하자, 동탁은 자신을 상대로
힘없는 문관인 왕윤이 감히 딴 음모를 품겠는가, 싶었는지
고개를 결국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저녁, 집안의
시종들을 재촉하고 꾸짖어 야단스런 채비를 마친 뒤, 왕윤은
자신의 집 앞에 동탁의 화려한 가마가 내려지자 구르듯 나가
맞았다.
여포처럼 단순히 성의를 다해 맞는 것이 아니라 조복(朝服)까지
갖추어 마중을 나가 두 번 절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동탁이 자세를
편히 하라는 청을 내릴 때까지 꼼짝않고 있는 호들갑을
떨어보였다. 또한 거느리고 온 백여명의 갑사(甲士)를 양옆으로
벌려 세운 채 동탁이 정해둔 자리에 앉았을 때에도, 절을
공손하게 올리는 왕윤의 태도는 손님을 맞는 주인의 태도가
아니라 마치, 임금을 맞는 신하의 그것이었다.
평상시 고개를 세우고 오직 천자에게만 그런 예를 취하던
왕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동탁의 기분이 하늘까지
치솟아 있는 것이 육안(肉眼)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흐뭇한
표정으로 동탁이 권했다.
"사도, 이러지 말고 어서 사도도 자리에 앉으시오."
동탁이 손수 권하는 데도 불구, 왕윤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거절했다.
"감히 이 왕윤이 어찌 태사(太師)와 자리를 함께 하겠습니까.
송구합니다."
동탁은 두세번을 거듭 권해도 왕윤이 고집을 부리자, 제법
의젓한 척 허허거리면서 웃고는 자신의 곁에 시립(侍立)해
서 있던 갑사 하나에게 손짓을 했다. 갑사는 공손하게 왕윤의
팔을 붙들고 그를 부축하여 동탁의 근처 자리에 앉혔다. 왕윤은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도 못내 황공한 얼굴이었다. 동탁이 굵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도는 조정의 중신이시며 명망(名望)이 드높은 분이오. 헌데
어찌 그리 지나치게 낮추시오?"
동탁의 점잖은 척, 고상한 척 하는 연극이 진심으로 즐거울
리는 없겠지만, 왕윤은 이미 연극을 시작한 배우다. 능숙하게,
소매를 저으면서 부인했다.
"이 미천한 왕윤이 어찌 태사께 미칩니까. 태사의
성덕(盛德)이 가히 높으시니, 응당 모셔야 할 것을, 감히
나란히 앉았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동탁이 즐거이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병적일 정도로
의심이 많은 동탁이지만, 강직하던 왕윤이 이렇게 입에 발린
소리를 골라서 해대자,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무너진 듯했다.
왕윤은 속으로 쾌재(快哉)를 부르면서 계속해서 동탁의 기분을
돋우기로 결심하였다. 하기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동탁의
부름에 꼿꼿하게 버티던 왕윤의 태도가 이렇게 변했다고 해도
동탁에게는 크게 의심될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동탁을 더러운 짐승 보듯하던 조정대신 모두 차차, 무릎을
꿇어가던 실정이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기대어오는 고관대신들
덕에, 동탁은 변화에 너무나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실정이니 왕윤이 급작스럽게 태도를 바꾸었어도 크게 의심이
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왕윤은 자신이 진심으로
동탁을 모시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태사께서 친히 이 왕 아무개의 집에 납시어 주시었으니,
수주(壽酒)라도 올리고 싶사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교묘하게, 허락이란 말 대신 윤허란 말을 썼다. 동탁은
그런 왕윤의 태도가 여간 기껍지 않은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손을 들어 잔을 내밀었다. 왕윤은 공손하게 두
손으로 술병을 받쳐서 조심스럽게 술을 부었다. 동탁은 기분에
이미 취해있던지라,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찬사를 퍼부었다.
"사도가 부은 술이라 그런지 맛이 기차구려! 이 어찌
고금(古今)의 명주(名酒)가 아니겠는가!"
"과찬이십니다."
왕윤은 그렇게 겸손을 떨고는 거듭 몇 차례, 술을 부어주었다.
동탁은 어지간히 기분이 즐거웠는지 무언가에 홀린 듯 연거푸
마셔대는 것이었다. 그런 동탁을 곁눈질하던 왕윤은 좀더
분위기를 돋우어야겠다고 판단하고는 동탁에게 다가앉으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사, 긴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이
왕모와 함께 후당(後堂)으로 드시지요."
동탁은 의심이 많은 자라,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왕윤을
조금 찌푸린 얼굴로 훑어보았다. 왕윤은 엄살을 피웠다.
"이 늙은이는 힘이 없는지라 태사께 감히 딴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태사께서 저를 의심하시니 심히 섭섭합니다."
그 말에 동탁은 움찔하는 표정을 짓고 이내 그 표정을
전환시켜보였다.
"그럴 리가 있겠소! 단지 모든 일은 신중해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오."
그러더니 동탁은 자신을 호위하던 갑사들을 물리치고 왕윤을
따라 후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당은 아담하면서도 격조가
높게 꾸며져 있었는데, 단지 촛대 네 개만 켜져있었기에 좀
어두웠고 분위기가 은근하였다. 상다리가 휠 정도로 화려한
음식들은 물론이었다.
평소의 동탁이면 또다시 이렇게 어두운 분위기를 의심했을
것이지만, 늘 꼿꼿하던 왕윤의 아부를 귀에 닳도록 접한 뒤라
그런지,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기꺼웠다. 동탁이 먼저 상석에
앉고 왕윤을 억지로 앉히자, 아름다운 음악 연주가 귀를 자극했다.
왕윤은 동탁에게 한잔 더 권한 후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 왕윤, 젊은 때부터 천문(天文)보는 법을 즐겨왔습니다.
헌데 요즈음 밤마다 하늘의 상(乾象)*을 살펴보니, 한(漢)의
기수(氣數: 운수. 운명)는 기울대로 기울어 이미 다한 듯
싶습니다. 반면 태사의 공덕이 천하에 퍼져있으니,
순(舜)*이 요(堯)를 잇고 우(禹)*가 순(舜)을 잇듯 태사께서
한을 이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늘과 사람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대사, 이문열의 삼국지 참조)."
이는 왕윤이라는 인사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말이다. 물론, 말 자체가 거의 엄청난 내용이었지만, 특히나 왕윤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올 리가 없던 말이다. 왕윤 스스로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속이 다 탔지만 감정을 억눌렀다.
아니나다를까 동탁의 표정이 굳었다. 늘 조정에서도 황제 이외에는
동탁이라 해도 고개를 함부로 숙이지 않던 왕윤이었다.
동탁도, 왕윤의 그 꼿꼿한 태도에도 불구, 원로 대신인데다
황실의 신뢰가 이만저만이 아닌 가문출신 이었고 뚜렷한 모의의
흔적도 없어서 이를 갈며 내버려 두었던 왕윤이었다. 동탁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왕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런 동탁의
표정에는 쉽사리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한술 더 떠서,
왕윤은 자신의 속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숙여 조용히
절을 해 보였다. 동탁이 더듬거렸다.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감히 그런 것을, 어찌 바라겠소?"
"예로부터 <도道로 무도함을 치고, 덕德이 없는 자는 덕 있는
이에게 천하를 내어준다有道代無道 無德讓有德>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태사께서 한한을 이으심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에 넘치다니, 지나친 겸손이십니다(대사, 이문열의 삼국지 참조)."
왕윤의 목소리에는 비분강개한 맛까지 섞여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손한 몸가짐과 결연한 듯이 굳어있는 표정이 더욱 신뢰를
안겨주었는 듯했다. 동탁은 상을 박차고 일어나 왕윤을 일으키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천명(天命)이 내게 돌아온다면 사도께서는 마땅히 그
원훈(元勳)*이 되시리라!"
왕윤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의심많은 동탁을 알고
있지만, 현재의 동탁은 분명 진심으로 왕윤을 믿고 있었다. 강직한
왕윤이지만 본래 권력을 따르는 사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탁은 아마 왕윤이 결국은 현실의 압박을 못 견디어
동탁 자신에게 빌붙어 영달을 쫓는 무리로 결론지었을 것이다.
그만큼, 왕윤의 아첨과 대접은 극진한 것이었다. 왕윤은 여기서
안심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고개를 조아려 더욱 깊게 절을
하면서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척을 열심히 해보였다. 그런
왕윤을 손수 붙들어 일으키면서 자리에 앉히는 동탁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있었다.
"태사께 올릴 상은 다 되었느냐?"
왕윤의 목소리가 쩌렁 울리자 화려한 다과(茶菓)와 술이
어우러진 상이 들여졌다. 왕윤은 동탁에게 공손하게 권하면서
술을 한잔 더 부어주었다. 이미 기분이 좋을 대로 좋아진 동탁은
왕윤의 술을 즐거이 받아마셨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도는 것이
꽤 술이 오른 듯했다. 그제야 왕윤은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이 왕윤이 딸처럼 기른 가기(歌妓)가 하나 있습니다. 비록
얼굴은 태사의 미녀들에 비해 초라하지만 재주만은 자못 볼
만합니다. 워낙에 딸처럼 공들여 기른 아이인지라 누구에게도
그 아이의 춤을 보인 적이 없사온데, 다른 분도 아닌 태사이신지라
이 왕윤, 감히 태사께 보여 그 아이의 재주를 평가받고자 합니다."
"오, 사도가 기르는 가기가 다 있었소? 보고싶구려."
이미 왕윤에게 솔깃해진 동탁은 기분좋게 응낙했다. 왕윤은
손을 흔들어 시녀들이 은은한 발을 내리도록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시녀들이 들어오도록 했다. 하지만 적잖이 긴장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여포는 생각대로 홀딱 반해주었지만 아직
젊고 순진한 곳이 있는 여포에 비해 동탁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초선이 잘 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발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하게 해서 동탁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고, 술기운이 올라 더더욱 초선을 아름답게 보도록
만들라는 그 소녀의 말대로 하기는 했지만, 왕윤의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 남은 것은 부디, 하늘의 뜻이 함께 하기를
비는 것 뿐. 어느덧 생황(笙簧)* 소리가 천천히 울려퍼지고,
내려진 발 뒤로 초선이 나섰다. 발 뒤로 그녀의 형체는
어슴푸레하게, 흰 빛만 보였지만, 아리따운 몸매 곡선은
더욱 돋보이는 것 같았다.
천천히, 팔을 나긋나긋하게 돌리는 초선은 정말, 오랜 세월
그녀의 춤을 보아온 왕윤의 넋까지 빼놓을 만큼 아리따웠다.
왕윤은 눈을 약간 게슴츠레하게 떴다. 유난히......춤을 출 때
빛나던 아이다. 다른 기녀들만큼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춤을 추면 그녀는......누구보다도 빛이 났다. 특히, 그
외지의 소녀들이 만든 흰색의 의상으로 초선의 어깨선과 팔,
다리선은 더욱 아름답게 드러났다.
노출이 꽤 있지만 그 모습이 더더욱 매혹적으로 보일 만큼,
그렇게.......오늘의 초선은 유달리 춤이 격렬하고 또한
부드러웠다. 대나무처럼, 휘어질 듯 강직하고, 갈대처럼,
한없이 흔들리지만 그 안에는 슬픔 같은 것이 아련하게 전해져왔다.
초선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왕윤 역시 특별하게
생각해 온 아이였다. 하지만 저 곱고 심성 부드러운 아이를,
흉폭한 놈들 사이에 미끼로 내던져야 한다.......왕윤은 속으로
눈물이 솟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일부러 초선에게서 눈을 떼고
동탁의 반응을 살폈다. 눈길을 돌린 순간, 왕윤은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동탁은 쥐고있던 술잔의 무게도 못 느끼는지, 그대로
든 채 눈을 흡뜨고 있었다. 멍하니 벌려진 입과 그 표정은 동탁이
완전히 넋이 나갔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하기는, 미오성에 수백의 미녀를 두고 살지만 이런 격조높은
예술(藝術)을 즐길 줄은 모르던 동탁이다. 무장의 타고난 근성을
못 버리고 야성적으로 놀아댔을 뿐이다. 알몸 궁녀의 춤에,
술에 쩔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네들과의 유치한 장난. 그
정도는 소문이 파다하여 모르고 있던 왕윤이 아니다.
그런 동탁에게, 발을 통해 은은하게 비추는 초선은 매우
기품있고 고상하면서, 또한 매혹적인 곡선을 보여주고 있다.
왕윤은 넋이 나간 동탁의 모습에 쾌재를 불렀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저 춤이 끝나면, 동탁에게 초선은
가야한다.......언제까지나 저 춤이 이어졌으면 하는 왕윤의
바람과는 다르게 춤은 곧 끝났다. 주변의 악기를 연주하던
시녀들이 모두 물러가고, 초선의 화려한 춤이 끝나자마자
동탁은 들뜬 목소리를 냈다.
"가까이 오너라."
하지만 발 너머에서 초선은 멈칫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비록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런 그녀의 태도는 고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왕윤의 동탁이,
속이 까맣게 타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탁이나 여포나, 여자에 대해서는
사족을 못 쓰는 무리인데다 거칠고 야성적으로 살던 이들이다.
역시, 저런 고상하고 조신한 몸가짐에 더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그 점쟁이 소녀의 말이 옳은 듯했다. 특히, 그나마 조정의
원로대신이요 수대에 이르러 황실의 신뢰를 받아온 왕윤이,
손수 딸처럼 기른 가기라 아무리 동탁이라 한들 멋대로 하기가
곤란하니 갈망은 강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동탁이 애태우는
것을 본 왕윤은 천천히 거들었다.
"태사께서 너를 부르시는데 무엇하느냐. 와서 인사드려라."
그 말에도 초선이 머뭇거리자 동탁은 이제 한숨까지 내쉬고
있었다. 왕윤은 노한 척 큰 소리를 냈다.
"어허! 어찌 감히 태사께 이리 무례한고!"
그제야 초선은 천천히, 마지못한 듯 발을 걷고 우아하고
나는듯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동탁에게 인사를 올렸다. 왕윤은
초선의 아미에 깊은 수심과 슬픔이 담겨있음을 읽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동탁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초선을 열심히 뜯어보았다. 초선은 그런 동탁의
시선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고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초선의 슬픈 듯, 쑥스러운 듯한 모습은 정말로 아리따웠다.
특히 슬픈 표정이 가장 아름다운 초선이 아니던가. 마치 오늘
초선의 모습은 활짝 핀 해당화가 맑은 이슬을 머금고 있는 듯,
청초하고 깨끗한 매력을 보였다. 그야말로 세상 풍파를 전혀
모르는 순수한 미녀의 모습이랄까. 늘 색기가 가득하며
자신에게 아양을 떠느라 정신이 없던 미오궁의 800미녀와는
다른, 동탁으로서는 처음 겪는 매력일 것이다.
쑥스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는 초선의 조신하면서 기품있는
태도에 동탁은 차마 손을 뻗치지 못하고 곁눈질만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청초한 얼굴과는 다르게 매력적이고
요염하며 빠지는 곳 없는 완벽한 몸매는 기품과 요염을 한데
뭉쳐놓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날의 초선은, 늘 보아온
왕윤이 보기에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미녀는 누구요?"
천하의 동탁도 입이 굳은 모양이다. 왕윤은 공손하게
답해주었다.
"제가 딸처럼 길러온 가기 초선입니다."
그 말에 동탁은 둘 곳을 모르던 손으로 수염을 천천히
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탁의 표정은 이미, 넋이 완전히
빠진 사람의 그것이었다. 동탁은 초선을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한가지 청을 더 넣었다.
"가기라면 노래도 할 줄 알겠구려. 한 곡조만 청하고 싶소."
"태사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올리도록 해야겠습니다. 허나,
미천한 것의 재주가 태사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그것이
두렵사옵니다."
왕윤의 또다시 시작된 겸양에 동탁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왕윤은 동탁의 풀린 눈빛에 만족하면서 초선을 돌아다보았다.
"태사께서 네 노래를 듣고자 하시니 올리거라."
초선이 맑은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왕윤은 순간 가슴이
또다시 저며왔다. 초선의 눈동자가 유달리 맑게 느껴지는 것은
눈물이 고여있기 때문이었다. 왕윤은 짐짓 두려워져 얼른 고개를
돌렸다. 초선은 뒤에서 수줍은 태도로, 장단을 맞추는 데 쓰는
단판(檀板)을 집어들었다. 왕윤은 그 사이, 재빠르게 술을 부어
동탁에게 한잔 더 건넸다.
동탁은 시선을 추호도 다른 곳으로 흘리지 않고 초선에게
고정시킨 채, 가만히 왕윤의 술잔을 받아다 기계적으로 비웠다.
잠시후, 초선의 맑고 고운 음성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
한잎 앵도꽃이 새빨간 입술로 열린 듯, 一點櫻花啓絳唇
옥(玉)을 바수어 따스한 봄 뿜어내나 兩行碎玉噴陽春
정향(丁香) 같은 혀에 숨은 칼날 토하듯 후려 丁香舌吐橫鋼劍
나라 어지럽히는 간사한 도적 목베려 하네.. 要斬奸邪亂國臣
(이문열의 삼국지 中)
*******
왕윤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쓰라림을 속으로 맛보았다.
가녀린 초선의 혀에 새겨진 뜻. 저 여린 아이를 던져야
동탁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특히, 자신을 위해 몇날
며칠을 밤을 새가며 노래연습을 하던 초선이다. 저 맑은 목소리,
저 가녀린 몸, 꽃 같은 춤재주를 모두 던져서 더러운 놈과 몸을
섞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원망하기는커녕, 최선을 다해 도우려 한다. 왕윤은
열심히 감정을 억눌렀다. 동탁은 초선의 그 노래에 숨은 뜻조차
생각해보지 못하고 그녀의 목소리에 또다시 반한 듯했다. 초선의
노래가 끝나자 동탁은 체면도 모르고 손뼉을 치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한 채 상을 듬뿍 내렸다. 왕윤은 겨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초선에게 꾸짖듯 말했다.
"무엇하느냐? 과분한 상을 받고도 가만히 있다니! 어서 태사께
수주(壽酒)라도 한잔 부어올려라."
그 말에 초선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다시 숙였다. 멈칫하는
그녀의 태도에, 얼른 빈 잔을 들어올린 동탁의 손이 무안해하고
있었다. 평소, 포악하기로 잘 알려진 동탁이었다면 초선의 태도에
노하면서 허리춤의 칼을 뽑아 당장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빠진 표정으로 간절하게 초선을 바라보는 동탁을 보니, 이미
동탁은 완전히 초선에게 빠진지 오래였다. 왕윤이 초선을 다시
재촉했다.
"어허, 태사께서는 천하 영웅 중의 영웅이시다! 이런 분께서
청하시는데 쑥스러워 할 것이 무엇이냐!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왕윤의 꾸짖음에 초선은 그제야 팔을 들어 백옥같이 희고
예쁜 손으로 술병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행여 술이 쏟아질까,
천천히, 그러나 은근히 나긋나긋한 움직임으로 동탁의 술잔에
술을 붓는 초선을, 동탁은 다시한번 훑어보았다. 초선이
부어올린 술을 단숨에 들이킨 동탁이 물었다.
"나이가 몇이냐?"
초선은 아직도 쑥스러운 듯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올해 열 여섯이옵니다."
동탁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열 여섯이라......좋아, 좋아......! 참으로 선녀같구나!
너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니라."
"천한 것이 감히 눈을 멀게 했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과찬하시면 제가 쑥스러울 따름이오니 말씀 거두어 주소서."
재치있게 겸손을 떠는 초선의 태도는 더욱 사랑스럽다. 동탁은
무릎을 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내 농을 했는데 네게 질책을 듣고 말았구나. 좋지, 좋아!
너의 아름다움도 특히 좋지만 그 재치와 가무(歌舞) 재주는
더더욱 놀랍더구나. 나는 미오에서도 일찍이 너처럼 뛰어난
재색(才色)을 겸비한 아이는 본 일이 없느니라."
이쯤되면 이미 일은 다 된거나 다름없다. 남은 것은 초선이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재주껏 잘 갈라주기를 바라는 뿐이다.
동탁의 눈빛은, 당장에라도 초선을 데리고 가고 싶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왕윤이 손수 기른
가기라 하니 쉽게 청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왕윤이 한발
앞서 권했다.
"천한 아이를 높게 보아주시니 이 왕윤도 기쁠 따름입니다.
실은 오늘, 저 아이를 태사께 바치려 했는데 태사께서 미천하다
내치실까 걱정 중이었습니다."
동탁의 눈이 순간 빛났다. 그렇지 않아도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는데 차마 원로대신의 딸 같은 가기를 데려갈
수는 없어 속으로 애태우던 동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왕윤은 사실, 이렇게 즐거워하는 동탁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사도,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다니, 이 동탁은 절대로 사도의
호의를 잊지 않으리다!"
왕윤은 또다시 겸손을 떨었다.
"오히려 이 왕윤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왕윤은 서둘러 사람을 불러 명했다.
"전거(氈車)를 준비하라."
당장 초선을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왕윤은
자신에게 살짝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던 초선을 보고 서글픈
마음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눈물이 눈에서
떨어졌다. 초선을 보며 히죽거리던 동탁도 이상하게 느낀
모양이다. 동탁이 표정을 굳히면서 물었다.
"사도, 무슨 일이오?"
왕윤은 재빨리 둘러댔다.
"이런, 제가 사실 동태사께 이 아이를 보내는 것이
그만......제가 딸처럼 금이야 옥이야 기른 아이입니다.
천하의 영웅이신 태사께 딸 같은 아이를 보낼 꿈을 늘
꾸었는데, 그 꿈이 실현되니 너무나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만 눈물이 다 납니다. 태사 어르신, 이 왕윤의 마음을
보아서라도 저 아이를 귀여워해 주셨으면 합니다."
왕윤의 둘러댐은 적절했다. 동탁은 몇 배는 더 기뻐하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이를 말이오! 저 아이의 미모와 재주라면 내 총애를
독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니 사도는 근심 거두시오."
왕윤은 또다시 허리를 굽혔다.
"태사께서 저와 초선을 어여삐 여기어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들어가서 좀더 머물다 가시지요."
하지만 초선을 품어볼 생각에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동탁은,
왕윤의 그런 청마저도 거절하고는 서둘러서 수레를 불러왔다.
왕윤이 선물을 준비했으니 받아가라고 간곡하게 청했지만 동탁은
그마저도 거절할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사도의 은혜에 내 따로 좋은 것들을 보내야 하는데 어찌
물건까지 받으리!"
말을 그렇게 하였지만, 그만큼 동탁에게는 초선을 얼른 데려갈
일이 급한 것이었다. 동탁은 수레가 모두 준비되자마자 일꾼들을
재촉하여 빠른 속도로 자신의 승상부(丞相府)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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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하늘의 상(乾象): 천체天體의 현상.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돌아가는 이치. 천기天氣. 천상天象.
2.순(舜):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帝王으로 5제帝의 한
사람. 성 우虞 또는 유우有虞. 이름 중화重華. 유덕한
성인으로서 선양禪讓 설화의 대표적 인물이며 요堯·우禹와
병칭되고 있다. 《사기史記》 <5제본기五帝本紀>에 의하면,
순은 전욱(頊)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시각장애자였고, 계모와
이복동생의 미움을 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해당할 뻔한
사건들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효행의 도를 다하였다.
당시 천자天子 요는 순의 평판을 듣고 자기 딸을 순에게
출가시켜 등용하였다. 순의 치적이 훌륭하였으므로
섭정攝政으로 하였으며, 요가 죽자 요의 아들 단주丹朱를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천하의 인심이 순에게 기울어졌기 때문에
마침내 순이 제위에 올랐다. 그후 순은 사냥하던 도중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두산세계대백과
3.우(禹): 중국 전설상의 하夏왕조 시조. 《사기》
〈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전욱頊의 손자이며, 곤의 아들이다.
요堯의 치세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섭정인 순舜이 그에게
치수治水를 명하였다. 13년간 고심 노력한 끝에 사업에 성공,
천하를 9주州로 나누고 공부貢賦를 정하였다.
순이 죽자 인망人望을 모은 그가 제위를 계승하여, 나라이름을
하夏로 고치고 안읍安邑에 도읍하였다. 치세 10년 만에 죽자
제후諸侯의 추대로 아들 계啓가 천자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천자자리를 세습화하여 하왕조가 시작되었다. 그의 전설은
한민족漢民族의 홍수전설과 관련이 있으며, 신화학神話學·
고대사학상 중요한 문제가 된다*두산세계대백과
4.원훈(元勳: 1.나라를 위한 가장 큰 공훈. 2.지난날, 나라에 큰
공이 있어 임금이 믿고 가까이하던 노신老臣.
5.생황(笙簧): 아악에 쓰이는 관악기. 중국 묘족苗族이
만들었다는 악기로, 팔음八音 중 포부匏部에 속한다. 옛날에는
관수管數에 따라 따로 화和·생笙·우 등의 이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종류의 악기를 통틀어 생황이라고 한다.
이 악기에 김을 불어넣는 통은 옛날에는 박통[匏]을 썼으나
뒤에 나무통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으며 이 통의 위쪽 둘레에
돌아가며 구멍을 뚫고, 거기에 죽관竹管을 돌려 꽂았다. 그리고
죽관 위쪽 안에는 길쭉한 구멍을 뚫어 그것을 막으면 소리가 나고,
열면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다.
소리는 죽관 아래 끝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쇠청[金葉]을 붙여
숨을 내쉬고 들여마실 때 일어나는 기류로 진동시켜 내며, 지나
단소가 따르지 못할 만큼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두산세계대백과
멀리, 구름같이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면서 수레가 떠나갔다.
대문 앞에 서서 전송하는 왕윤은, 유난히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휘청, 하고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한 팔을 뻗어
나무기둥을 붙든 왕윤은 몸을 겨우 지탱하고 서서는 행렬이
사라진 방향을 망연하게 보고만 있었을 뿐, 들어올 생각을 않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조운은 입으로 가만히 읊조려보았다.
"난세라......"
확실히 그렇다. 난세다. 뜻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무리 애써봐도 뜻하는 대로 인생이 나아가주지 않는다.
가족조차도 지키기 힘든 세상이다. 확실히, 지금의 세상은
미쳐있다.
"결국 보내는군."
약간은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영각이 빈정거렸다. 조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각은 계속해서 뒤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바보같은 영감이 아니던가. 그토록 소중하다면서 그저 이렇게
보내고 마는가, 단 한번의 회포를 푸는 일도 없이!"
꾸짖음이 깃들었다. 조운은 말없이 창에서 눈길을 떼고는 몸을
돌렸다. 영각은 조롱섞인 눈빛으로, 아직까지 망연히 문가에
서있는 왕윤을 보고 앉았다. 그렇겠지.......조운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영각의 성품으로, 왕윤과 초선의 일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보일 터이다. 보통 때 같으면 영각의 말에 대꾸없이
다른 방으로 건너갔을 터이지만, 그날따라 왕윤의 모습 때문에
자극을 받았는지 유난히 부아가 치밀었다. 조운은 속으로
치밀어오르는 노기를 누르면서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라면 어떻게 하였겠는가?"
그 말에 영각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또 능청이다.
"허어라, 자네가 그런 말에 대해 반문도 다 하고, 이게
웬일이지, 천하의 조자룡?"
그렇게 능청스레 떠들면서 팔짱을 끼더니 그 뒤로는 아무
말이 없다. 아마 제 딴에도 생각을 해 보아도 뾰족한 수는
없을 것이다. 남녀간의 애정이란 것은......사소하지만 신중하고
힘든 대답을 요한다. 그 사소한 감정 때문에 사람은 죽기도 하고,
기대감과 행복에 벅차 들뜬 생활을 해 보기도 한다.
사람이라면......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
`사소한 감정' 이 얼마만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 터이다.
한참동안 말이 없는 영각에게 시선을 가볍게 던지고 나서,
조운은 영각이 쉽게 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내렸다.
저렇게 찌푸린 표정으로 몸을 굳히고 앉은 영각의 자세. 그것은
그가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결국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조운의
뒤통수로, 영각의 말이 들려왔다.
"......나라면 다른 여자를 찾아서 시켰거나, 아니면 여자와
둘이 도망가버렸을 거다."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바깥으로 묵묵히 나와서 문을 닫았을
뿐이다. 시립해 섰던 시녀 두 명이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자신을
보고 있다. 조운은 곁의 열린 창을 통해 다시 시선을 대문 쪽으로
날렸다. 왕윤은, 아직도 기둥에 겨우 지탱하고 서서는,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말없이 서 있지만 눈물을 뿌리고 있다.
틀림없다. 조운은 그런 왕윤의 모습과, 방금전 영각이
마지막으로 떠든 말을 겹쳐서 생각해보았다.
"틀려. 자네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나......라도 왕윤
어르신과 큰 차이가 없었을 테지."
조운은 그렇게 낮게 중얼거렸다. 때때로, 그런 점에서 영각이
부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말이다.
이미 자신은......그렇게 해 보았다. 그렇게 해 보았다가
고배(苦杯)를 마셨다. 자신, 그리고.....소연......
"스스로의 의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상대까지 괴롭게
만들 뿐이야."
조운은 또다시 중얼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너무나 미묘하다. 그리고......불필요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한때는 자신도 사람의 감정이 주는 기쁨에 도취해 본
일이 있기는 하다. 그 순간만큼은, 절대로 자신의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기를, 또한 그 감정의 상대 또한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기를 얼마나 밤을 세워 기원했던가.
또한 다른 이들이,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을 동정해
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하지만 결말은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결국......소연까지 불행의 늪으로 밀어넣은 채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가를 치르고 남은 것은, 자신에게 남았던
것은......텅 빈 가슴, 멍든 심장, 사람의 감정에 대한 불신과
외면, 영원히 지워지지 못할 상처......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볼 지도 모른다는 기대 하나로 살아남았다.
다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알면서, 그런 실낱같고
부질없기만 한 기대로......살아남았다. 가끔씩 후회도 했다.
거기서 그쳤더라면, 감정을 간직하는 것에서 그쳤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 홀로 괴로워하는 것에서 끝났을 일이다.
하지만 욕심을 부려서.....자신이 무리한 욕심을 부려서 다른
사람들까지 망쳐놓았다. 자신의 가족들과 누구보다도......
누구보다도......가장 소중한......
"제기랄."
짧은 욕이 입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생각해도 결국은
소연을 원망하는 자신을 알고 있다. 스스로를 자책해도,
그 날, 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소연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겠지.
지금 생각하면 바보짓이다. 그 여자가 어떤 여자라는 사실도
제대로 모른 채, 그렇게 주변 사람들까지 희생시켜가면서
사랑했다.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그녀는......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명예와 부, 권력.......그
모든 것을 높게, 아주 높게 꿈꾸었던 여자였다.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사랑했던......스스로의 미련함은
깨닫지 못한 채 마냥 그렇게......
"......저......"
갑작스러운 여자 목소리에 죄라도 지은 기분으로 흠짓
놀라면서 고개를 들었다. 무사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최대한 감정은 죽이며 지내야 하는
것이다......하는 말이 귓전에 다시 맴돌았다. 그렇지, 자객은
언제 어디서든 소리없이 나타나야 하니까, 늘 예민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감상 따위에 젖어있다가는 소리없이 당하기
일쑤다......곁에서 사람의 기척이 나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 있었나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나무라면서 천천히
눈길을 주었다.
"......기분이 안.....좋으신가봐요?"
옅은 갈색의 눈빛이 자신을 쑥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유순한 눈이었다. 참으로 유순하면서 온화하고......
편안해서, 중얼거림을 들켰다는 불편함과 무안보다도 이
사람의 호감에 대한 느낌이 먼저 와 닿을 정도였다.
아마 자신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호감에 관한 느낌이 와 닿은 것은 잠시였다. 금세, 밝게 빛나는
태양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같은 불편함이 다가왔다. 역시,
이런 모습을 들키는 것은 전혀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조운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대충 넘겼다.
"별 일은 아닙니다.....줄곧 이곳에 계셨습니까?"
무안을 피하기 위해 나온 조운의 말에 아영은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더듬거렸다.
"아, 아니......아니에요. 그냥......지나가다가......음......"
뒤로 마주잡은 양손을 비비작거리면서 몸을 흔들거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저렇게 몸을 안정적이지
못하게 흔들거리고 있다는 것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언짢아졌다. 자신에게 뭔가 숨기는 듯한 느낌과, 자신의 기분을
들킨 것 같았던 기분이 융합되어서 더더욱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졌다. 그 뒤숭숭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조운은 아영을
보면서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이고 차갑게 돌아섰다.
"그럼 전, 이만."
짧게 말을 맺고 아영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뒤에서
쳐다보는 아영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 않고 자신의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아영이란 여자에 대해서 특별히
어떤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다. 그다지 친밀하지도, 그다지
꺼려지는 느낌도 가져보지 않았다. 요히려, 화정보다도
인상이나 느낌은 훨씬 좋은 여자로 생각해보았다.
외견이 뛰어나든 어쨌든 인상은 참으로 편안하고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천성적으로 고운 느낌이랄까. 하지만 지금과
같은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기분 좋은 사람으로 계속해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자동으로 기분이 언짢아져있던 조운은
또다른 발걸음소리를 깨닫고 다시 아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붉어진 얼굴로 있는 아영의 옆에, 화정이 팔짱을 끼고
다소 차갑게 자신을 응시하고 섰는 것이 아닌가.
"화, 화정......"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아영에게는 대답없이, 화정은 가지런한
눈썹을 약간 치켜세웠다.
"이봐요,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을 해 줘야 하잖아요?"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갔을 테지만, 조운 역시 지금이 매우 좋지않은
상태였다. 특히......이렇게 소연과 닮은 여자에게 이런 식의
불평을 듣는 것은 현재 심리상태로서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마치, 소연의 꾸지람을 듣는듯한 이 느낌이
싫었다......화정에게 이맛살을 찌푸린 채 한마디했다.
"내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던 말던 너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자신의 말에 도리어 아영이 사색이 되면서 화정의 팔을
붙들었다.
"그래......나는 상관없......"
"상대방의 말이 끝도 나지 않았는데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일이에요."
화정은 그렇게 똑 떨어지게 말을 하고는 돌아섰다. 코웃음이
나왔다. 혹시, 자신도 다른 사람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런 식'
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기나 했을까? 멸시 비슷한
감정이 생겼지만, 무어라 할 틈도 주지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화정의 뒷모습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화정의 등과,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아영은 결국 화정을 택했다. 아영은 달려가서 화정의 뒷모습을
따라잡더니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뒤이어 화정의 낮지만 화가
난 듯한 목소리도 몇 마디 들려왔다. 별로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운은 자신도 발걸음을 돌렸다.
*******
뒤에서 서둘러 따라오면서 아영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화정은 속으로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억누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팔짱을 끼면서 멈추어 서서는 분을 삭이려는데 아영이
자신의 얼굴 앞으로 다가와 조금 높은 언성으로 말했다.
"그럴 것까지는 없었잖아! 그러게, 그 사람 기분이 안
좋아보이니까, 말 걸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아영의 말에 별다른 화를 내지도 못한 채, 화정은 입술을
깨물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곁의 분재만 바라보았다.
멋들어지게 손질되어있는 그 호화로운 분재가 눈에 들어와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시선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영의 얼굴을 보자니 그녀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그녀에게 미안했고, 고개를 숙이자니 치솟는 분노
때문에 격에 맞지 않는 거북함이 느껴져서 결국 죄없는 분재만
노려보고 있는 상황이다. 저렇게 작고 앙증맞은 분재는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 눈에 거슬렸다. 복잡하기만 한 심정인데, 분재는
단순하게 멋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화정은 결국 그 거북스런 분재에서 눈길을 떼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아영은 그런 화정을,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물끄러미
응시만 하고 있었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아영의 속마음이
어떤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림을
담고 있었으니까.......사실, 초선에 대한 동정과 일종의
존경을 이야기하면서 화정과 아영은 답답한 심정을 못 참고
산책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아영이 영각에 관한 걱정을
하면서, 한번 영각이나 보러 갈까, 하고 그 쪽으로 향하는 중에
조운을 발견한 것이었다.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정원을 응시하고 있는
조운의 눈빛이 유난히 날카로웠다. 역시, 참 잘생긴 사람
아니야, 하고 감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영을 화정이
붙들었다. 이상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재깍 그녀들의 기척을
알아채고 반응을 했을 조운이겠지만 이상하게 반응이 없었다.
궁금한 심정을 못 이기고 불러보려던 아영을 다시 붙들던
화정은 의외의 광경을 보았다. 조운이, 감옥에 갇혀서도,
채찍질을 당하고도 표정 한번 제대로 바꾸지 않았던 조운이,
엄청나게 괴로운 표정으로 한쪽 팔에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며
서 있었다. 그건 흡사......애인에게 배반당한 남자의 표정
비슷한 것이었다.
왜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다 짓고 있는담? 저런 딱딱박사에게
애인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그런 식으로 넘기려던 화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튼 뭔지는 모르지만 보통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멍한 표정으로 조운을 한번 힐끗 본 아영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화정은 기회다, 싶어서 아영에게 조운을
달래보라고 말하면서 밀쳐냈다. 사실 힘든 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받는 것만큼 좋은 계기가 없을 테니까.
아영은 다소 소심한 면이 있는 편이라서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화정이 억지로 밀어냈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빠져있었던
조운은 어김없이 그 더러운 성질을 드러내면서 휙, 하고 찬바람이
일게 돌아서버렸고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아영을 보고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화정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화정은 자신의 눈앞에서 말없이 서서 차차 표정을
우울하게 바꾸어가는 아영을 다시한번 보았다.
<내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던 말던 너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멸시하듯, 지겹다는 듯 차게 말을 자르던 조운의 표정이
생각났다. 정말 지겹다는, 그리고 어서 가 버리라는 식의 그
표정도 기억났다. 화정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옳은 말이다.
분명 상관없다. 또한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화정 자신도
즐겨 사용하던 레파토리다. 이전에, 가끔씩 아이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면, 화정은 그렇게 잘라 말했다. 귀찮다는 투로.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던 내가 왜 그 말에 발끈하고 있는 걸까?
발끈할 자격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상대방의 말이 끝도 나지 않았는데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일이에요.>
피식.
그 순간 화정은 스스로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비웃음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내 스스로에게 하던 소리 아닐까, 그것은?
상대방의 말이 끝도 나지 않았는데 말을 자르고 돌아서던 것
역시, 자신이 즐겨하던 행동 아니었나? 그런데 왜 내가 남에게
그것을 질책하고 있었지?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줄줄이 늘어놓던
화정은 그만......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혹시......나와
비슷한 부류이기에 조운과 나는 서로를......달갑잖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정아......"
혼자 계속해서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화정이, 아영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나직하게 소리를 냈다. 화정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깨어났다. 아영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정은 뭐라고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약간 열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목구멍을 통해 나와주지 않았다. 아영을 보니
생각난 것이 또 하나 있어서였다.
`그러고보니......'
아영이 다가갔을 때에는, 기분이 나빠있던 장면을 들켰던
상황인데도 조운은 크게 동요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약간의
놀람과 어떤.....경계 정도랄까? 그 정도뿐인 것 같았다. 특별히
아영에 대해서 좋은 감정도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정 자신이 나타나자마자
조운의 표정은.......
"너 왜 그래? 괜찮아? 왜 그렇게 갑자기 멍하게 서있어?"
아영의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화정은 눈을 크게 뜨면서
목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뗐다.
"아, 아니야......조금 피곤하네......이만 가자......"
화정의 말에 아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녀는
캐묻지는 않고 가볍게 동조하고는 몸을 돌려서 천천히 앞장서서
나갔다. 화정은 다시한번 조운의 표정을 떠올렸다.
<내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던 말던 너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그 표정에 드러났던 것은 분명히......어떤 지겨움과 싫증,
대하고 싶어하지 않는 격한 감정 비슷한 것 같았다.......
*******
......잘못 보았겠지. 나와 무슨 원수진 일이 있었다고
갑작스럽게 그런 표정을 보였겠어?
*******
쾅쾅쾅!
요란한 소리에 한참 자고 있던 집안사람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은,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이미 새까맣게 물든 밤하늘이
열린 창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화정은 짜증스런
심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곁에 있던 침상에서는 이제 마악 몸을
일으킨 아영이 아직도 졸린 눈을 열심히 비벼대고 있었다.
화정은 무심코, 이제는 텅 비어있는 초선의 침상을 마주 보면서
다리로 땅을 디뎌 일어났다. 아영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아직도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이참, 이 밤에 대체 무슨 일이야!"
사실 짜증스럽기는 화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감정을
억누른 채 고개를 창 밖으로 쑥 내밀어 바깥을 살펴보았다.
대문이 이미 부서져나가 있었고, 한 덩치 큰 사내가, 만류하는
시종들을 옆으로 밀치면서 씩씩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엄청나게 분해 죽겠다는 식의 태도였다. 화정은 눈을 약간
찌푸려 사내를 자세히 살폈다. 약간 사각진 턱에 높은 광대뼈와
우뚝 서있는 큰 코, 조금 그을린 갈색의 피부, 얇은 소매를
걷어붙인 아래로 보이는 근육질의 우람한 팔뚝, 쌍꺼풀은
없지만 부리부리한 눈매가 상당히 매서웠다. 화정의 창에서
잘 보이는 모습이었다 .왜 저렇게 열이 잔뜩 올라서 달려온
걸까? 궁금해진 화정은 역사적 사실을 한번 더 되짚어보다가
나직하게 `아하!' 하고 내뱉었다.
분명, 그렇다. 연환계를 실행할 때, 여포가 왕윤을 찾아와
원망을 쏟아붙는 부분이 있다. 생각한대로 분명, 그 유명한
여포임에 틀림없었다.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으며,
언뜻 보기에도 꽤나 `인물 참 잘났군.' 하는 소리를 들을
만했지만 전투적이고 교양은 없게 생긴 그는, 전형적인
무장으로 보였다.
뭐, 소위 말하는 잘생긴 타입이라기보다 `호남자(好男)*'
타입이란 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하다. 몸매 또한 우람해서,
언뜻 보기에 키는 조운보다 조금 작기는 했어도 덩치는
훨씬 크게 보였다.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같다.
사실은 이것보다도 훨씬 우락부락하고 무식하게 생긴,
그러니까 다소 못생긴 추남을 상상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예상했던 것 보다 잘 생겼는데......? 화정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턱을 만지작거리는데, 곁에서 동그래진 눈으로 함께
목을 내밀고 소란통을 구경하던 아영이 그 짐작을 증명해주었다.
"어? 저건 그전에 온 여포라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무대포로 뚫고 들어오는거지, 겁나게스리?"
아영은 그렇게 말하며 화정을 응시했다. 아영은 이전에 여포를
직접 본 경험이 있으니, 그녀의 말이 옳을 것이다. 아영의
시선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질책이 약간
담겨있었다. 화정은 침착하게 대답해주었다.
"왕윤님께서 알아서 잘 하실거야."
아영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이것도 네 계획에 있던거니?"
화정은 아영의 의심어린 말에 대해 고개만 살짝 끄덕거려
증명을 해 보였을 뿐이었다. 결국, 입구 근처까지 도달하기
전에, 여포는 초선에 대한 근심과 죄책감을 잊지 못하고 뜰을
거닐고 있던 왕윤을 만나고야 말았다. 이 단순무식한 무인이
왕윤의 멱살을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정은 천천히, 곁에 있던 두건을 붙잡고 머리카락을 싸맸다.
남자 옷을 대충 위에 걸쳐고 문을 여는데, 아영이 겉옷을
걸치면서 따라나왔다. 화정은 발걸음을 재촉해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뒤에서 따라온 아영이 조금 높은 음성으로 말했다.
"화정아, 기다려! 만약에......네가 나갔다가 초선님에게
겨우 반해있던 여포가 너한테 반하면 어떻게 해?! 넌 가면
안돼!"
화정은 그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아, 골치아프다!
듣고보니 아영의 걱정도 일리는 있었다. 난감해진 화정이
아영을 돌아보려는데, 조금 굵직한 남자음성이 아영을 돕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맞아, 이쁜이. 넌 함부로 가면 안돼."
저런 명칭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뿐이겠는가. 화정은 고개를
홱 돌렸다. 영각이 서 있는 것이었다. 한숨이 길게 나왔다. 하긴,
생각해보니 여긴 영각의 방 바로 앞이다. 자신과 아영이
지나가다가 떠드는 소리 정도는 아주 잘 들렸을 것이다. 특히,
아영의 음성이 꽤 컸으니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남장을 해도, 네 얼굴까지 고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저 자는 현재 위험한 상태야."
"영각, 이렇게 나와서 서 있어도 괜찮아요? 아직 많이
불편하잖아요?"
아영이 목소리에 걱정을 담아 말했다. 화정은 영각의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이 천천히 풀리는 것을 발견했다.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그보다, 저 자는 지금 많이
흥분한 상태니까 다가가면 안돼."
역시, 사람들은 자신을 보면 경계를 먼저 내세우고, 아영에게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섭섭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던 화정은 조운이 왕윤이 있는 곳으로 가도
있는 것을 보았다. 조운이 가고 있어......그렇다면......
화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또한,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바대로라면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절대로 나서지 말자. 가서 그냥 관람만 하자. 조운이 있으니
왕윤이 대번에 목을 베여서 죽지는 않을 것이고, 화정이 나서서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변명은 왕윤이 할 것이며, 목숨부지는
조운이 도울 것이다. 화정은 마음 속으로 결단을 내리고,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이봐!"
영각의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와......
"화정아, 안돼!"
아영의 당황한 목소리도 함께 들렸지만 화정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왕윤이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당황해서 실수라도 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언니같다고 많이 느꼈다.
자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상하고, 험한 일을 당하기에는 너무 착한 사람,
죽기에는 너무 착한 사람이라고......이렇게 좋은 사람은
드물게 보았다고 거듭 후회했었다.
크게 친한 척을 해 주지는 못했지만 초선에 대해 정이 퍽이나
들어있었다. 그런 초선이, 지금 이 시간에는 이미 동탁의
그 비대한 몸뚱이 아래에 깔려 수모를 당하고 있을 초선이,
모든 것을 바친 이 연환계를 망칠 수는 없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물론, 감상적인 생각이 어떤 일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이것이 화정 자신의 신조 중 하나였다. 늘, 감정을
배재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이후에 결단을
내리자......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크게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감상적이면 어때, 한번 정도는.....
감상적이더라도 나쁠 것은 없잖아. 초선은 모든 것을 던졌는데
그것을 조종만 했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그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왕윤이 혹시라도 실수를 해서, 초선의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게......
"이 늙은이! 나를 놀려먹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응?! 이
간교한 늙은이! 출세하겠다고 언약을 저버려?!"
남이 들으면 `저런 소리를 여포가 하다니!' 하고 혀를 찰
노릇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얼떨결에
나설 뻔했던 화정은 조운이 다가가는 것을 보고는 안심하면서
나무 뒤편에 몸을 숨겼다. 굵직한 몸통이 세월 꽤나 먹은 나무
같았다.
다행이었다. 화정의 몸 정도는 교묘하게 숨겨주었다.
거칠거칠한 나무표면이 얼굴을 간지럽고 쓰리게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좀 얄밉기는 하지만 냉정한
조운이라면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운이 여포와 왕윤에게 다가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지만,
여포는 이미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혀있던 상태 같았다. 마치,
황소처럼, 씩씩거리면서 매운 김을 코로 내뿜고 있는 여포는
얼핏 곁눈질로 보기에도 무서웠다. 그 매운 콧김에 얼굴이
더워졌는지, 연신 식은땀을 흘려대는 왕윤은 여포의 무식한
힘에 숨이 막혀서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화정이 보기에도 사실, 저런 상태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보기에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우람한, 근육질의
팔뚝으로 요란하게, 정신없이 흔들어대면서,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심리적 압박까지 놓고있는데, 누가 무사하냔 말이다.
정말, 정말로, 보기에도 존경스러운 힘으로, 무식하게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 손, 놓고 말씀하시오."
완전히 분노에 휩싸인 여포와 정신없이 혼란에 사로잡혀있는
왕윤과 반대로, 냉정한 표정을 한 조운이 앞으로 나서자
여포는 한 손을 놓고 조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포의 눈매에
서리 같은 것이 감돌았다. 마치, 이건 또 무어야,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조운을 사람이라기보다 단지 방해꾼으로만
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다.
어쨌거나 여포가 한눈을 파는 틈에 왕윤은 그제야 여포의 손을
억지로 떼어놓고 곁으로 물러섰지만, 멀미가 다 나는지
기둥에 기대서서 몸을 천천히 가누고 있었다. 구역질이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왕윤이 자신의 팔을 뿌리치고 숨을
가다듬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왕윤의 행동은
안중에도 없는 여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넌, 뭐야?"
단순하고, 조금은 상스런 억양의 여포 목소리가 들렸다.
품위라고는 전혀 없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꺾으려 드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도 더더욱 상스럽고, 천박하게
들렸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 어감은
다르다더니, 꼭 그 꼴이다. 여포가 하는 말은,
아무리 고금의 명언(名言)이라해도 기껏 거리의 시정잡배의
말같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상스러워도, 상대방을 단번에 억압하는 힘을 곁들여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했다. 그런 여포의 무지막지한
억양과 우람한 힘을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기색도
없이 조운은 여포를 묵묵히 바라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묻고 싶소. 누구기에 감히 사도 어르신을 저렇게
대한단 말이오."
"뭐어? 누구? 으하하하하!"
주변을 쩌렁쩌렁 울리면서 여포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삼류 영화에서 보았던 악당의 웃음소리가 따로없다. 이전에
본 무협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내공(內空)이 심후하거나,
단련이 잘 된 사람의 목소리는 절로 주변을 진동시킨다고 했다.
꼭 그 구절이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었다. 여포의 웃음소리는
이 장안성 일대를 모두 들썩이게 할 정도로 컸다.
본래 평상시 말하는 목소리도 엄청나게 큰 편 같았는데,
마음먹고 저렇게 일부러, 크게 일소(一笑)하니 귀를 막고싶은
충동이 다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조운 때문에, 화정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여포의
무지막지한 웃음소리도 혀를 찰 만하기는 했지만......조운도
참, 은근히 능구렁이 감이다. 다 알면서 저렇게 태연하게,
그것도 저 우락부락한 여포의 앞에서 배짱도 좋게......
키는 비록 조운이 5, 6 센티 정도 더 큰 것 같았지만 여포가
워낙에 몸집이 커서 그런지 어느 정도 거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조운을 향해 주먹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기는,
뭐, 여포는 삼국지 내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무장이기는
하지만 조운도 크게 못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봐, 너! 뭐, 보아하니 무술로 먹고 살아온 내 눈에도 꽤나
무술 좀 하게 생겼구먼? 내가 여지껏 대해본 놈들 중에서도
강한 기를 지닌 놈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기는 성안이란
것을 알아야지. 너 같은 애송이가 재주가 조금 있다해도 끄떡할
여포님이 아닐뿐더러, 난 동승상의 양자란 말이다, 알겠나?
알았으면 그만 건방떨고 꺼져!"
완전 무뢰배의 말투다. 화정은 속으로 `여포는 강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무식한 부류인 듯.' 하고 또다시
나름대로의 삼국지 평에 착수했다. 하지만, 태평하게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여포는 실제로 엄청나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더 험하게만 흘러가는데, 그제야
어지럼증과 숨막힘을 해결한 왕윤이 앞으로 나섰다.
"여포님, 화만 내지 말고 말씀을 해 주시오. 이 왕 늙은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러시오?"
그제야 여포는 조운에게서 눈길을 떼고 왕윤을 돌아보았다.
여포의 우락부락한 얼굴에 노기가 치솟았다. 화정은 속으로
여포가 드디어 일을 내면 어쩌나, 하고 되뇌었다.
"이봐, 늙은이! 난 오늘 너를 찢어 죽이러 왔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초선을 내게 보내기로 약조해 놓고는 승상(=동탁)께
보냈는가?! 출세에 눈이 먼 놈 같으니!"
화정은 가슴이 뛰는 것과 동시에, 어떤 안심을 느꼈다.
소식을 듣자마자, 이 밤중에 여기까지 단신으로 앞뒤 안
가리고 온 것을 보아하니......여포는 이미 초선에게 반 정도는
미쳐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대로라면......동탁과 여포가
이간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지도 몰라......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들었다.
당장에 또다시 덤벼들려는 여포에게 손을 내저으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 왕윤은, 내막을 다 알고있는 화정에게도 정말
당황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만큼 그의 연기력은 탁월했다.
"잘못 알고 계셨구려! 내 이야기를 들어보시오......승상께서
오시더니 이 늙은이에게 한 말씀하시더이다. `듣자하니 우리
봉선(=여포의 자字)에게 주려는 아이가 있다 하였소. 내 그
아이를 한번보고 싶소이다.' 라고 하시기에 초선을 불러
보여드렸소.
한참동안 초선을 보더니 승상께서는 `내가 이 아이를 데려가
좋은 날을 골라 봉선에게 보내주고 싶소이다. 어떻소?' 라고
하시었소. 이 왕 늙은이가 어찌 승상의 말씀을 거역하겠으며,
하물며 여 장군과의 약속을 도와주시려는 것인데 어찌
거절하겠소. 그래 이 늙은이가, 승상께 보낸 것이외다."
대본을 외워서 구사하는 능력도 멋지다.
`탤런트 주연감, 왕윤'이라고 또다시 평가를 내려주었다. 문관
출신들은 본래 저렇게 청산유수(靑山流水)인가보다. 아무리
자신이 시킨 말이지만 너무 매끄러운 언변이었다. 화정은
동업자인 자신까지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감탄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치란 것은 사기꾼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분야다......물론, 앞뒤 따져보면 정치란 것이 "얼마나
태가 안 나도록 합법적으로 사기를 치는가." 의 문제라는 것은
사실이며,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윤의 저 나긋나긋하면서 철저한 거짓말 솜씨와
연기력을 보니 특히 실감이 난다......아니나다를까, 여포는
단순함의 극치를 달리는 자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민망해서라도 머뭇거리거나, 어떤 의심을 느낄 수도 있었을텐데
왕윤의 그 말을 듣자마자 - 하긴, 다시한번 강조해보지만 왕윤의
연기력이 워낙에 완벽하기는 했다 - 화색을 대번에 바꾸더니
왕윤에게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 이런! 이 포(布)가 어리석어서 어르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제발 용서하십시오!"
`말 한마디에 태도가 저렇게 바뀌나......하기는, 자신이
오해한 것을 깨달았다면 당연한 처사지만......지나치게
순진한걸. 나 같으면 민망해서라도 사과만 하고 모른 척
내뺐을 텐데 큰절까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왕윤은
여포를 황급히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여포를 일으키기 전에
왕윤이,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을 화정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저렇게 완벽한 사기를 쳤어도 떨리기는 했는 모양이다.
"천만의 말씀이오! 이 왕윤이 어찌 장군을 능멸하겠소?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이구려. 그럼 오해를 불러일으킨 죄로 이 윤이
대접을 하겠으니 어서 들어가십시다."
왕윤은 태연하게 자리까지 권유하는 것이었다. 여포는 황망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폐를 끼친 것도 죄스러운데 어떻게 대접까지
받습니까! 날이 밝는대로 사죄하는 뜻에서 선물을 몇 가지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여포가 어지간히 미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재물에 욕심이 많기로 유명한 여포가 선물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또한, 거듭 생각하지만, 초선에게
엄청나게 빠져있기는 한 듯했다. 이 한밤중에, 그렇게 대번에
정보를 얻어 날렵하게 달려온 것을 보면 말이다. 화정은
속으로 `그렇다고 해도 나 같으면 동탁에게 가서 진짜냐고
물어봤을 텐데. 하긴, 그렇게 말도 안 한 채 속으로만 오해를
파다가 사이가 뒤틀린 거지.' 라고 삼국지의 내용을 곰씹었다.
이후에, 여포가 동탁에게 `아버님, 왕윤님께서 저와
혼인하라면서 주신 초선은 어찌 된 겁니까?' 라고 한마디
물어보았다면, 화가 나기는 해도 간사한 동탁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왕윤을 붙들어 문초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연환계는 끝장난다. 하지만, 여포는 그 한마디도
못한 채, 초선을 동탁이 가로챈 것으로만 생각하고 속으로만
분해하다가, 결국 오해는 더욱 깊어져 동탁에 대한 감정을
틀어지게 하니, 여포가 동탁을 죽이게 되고 만다.
하긴, 아버지가 현재 총애하고 끼고다니는 애첩을 두고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민망하기는 했겠지만......어쩌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오해를 푸는 방법은, 그때그때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화정은
스스로에 대해 반성해보았다. 아영과의 문제도 그렇다.
자신이 아영에게 미리부터, `난 자라난 습관이 좀
비뚤어져서......타인에게 사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하고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면 아영은 좀더 쉽게 자신을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주었을 것이다.
귀찮고, 일일이 말하기 싫었던 화정이 늘 하던 습관대로
함구하는 덕택에, 여기와서 초선이 눈치채고 중재(仲裁)를
해 줄 때까지 화정과 아영은 꽤 불편한 사이로 지내야 했으니까.
여하튼, 여포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조운에게 돌아섰다. 그
험악하고 우락부락한 얼굴로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봐, 미안하군. 사죄하는 뜻에서 내, 자네에게 언젠가
도움을 베풀어주지. 왕윤 어르신과 어떤 관계인가?"
여전히 무뢰배같은 어조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난폭해 보이지만 좀 순진하고 솔직한
면도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조운은 정중하게 포권을 해 보였다.
"별 말씀을. 그저 왕윤 어르신께 은혜를 입고 있는 객(客)에
불과합니다. 단지, 굳이 도움을 주시겠다면 이후에
어전(御前)에서 청하고자 합니다."
꽤 정중한 척 말을 하는 여포에게서는 아직도 상스런
느낌이 배어나왔다. 하지만 조운은 짧게 말하더라도 어딘가
모르게 귀공자같은 느낌이 묻어 나오도록 말을 한다. 물론,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문장 자체도 훨씬 다르지만, 말을 하는
느낌 자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여포와 상반되게, 품격 높은
화술을 구사하는 조운의 말에 화정은 속으로 `참, 얄밉기는
하지만 머리 하나는 꽤 돌아가긴 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러고보니, 여포는 이후에 사이가 뒤틀리기는 해도, 동탁과
가장 친밀한 관계의 사람이다. 동탁의 신임도 면에서는 누구도
여포를 따르지 못한다. 그렇다면 공손찬의 사신으로 온 입장에서,
여포가 도와준다면 까다로운 동탁이라 해도 조금은 수월하게
대해질 것이었다. 동탁에 대한 반(反)감정을 전하는 사신이
아니니 적어도, 코나 귀를 베인다거나 - 옛날 책들 읽으면
화가 났을 때 사신의 코나 귀를 베는 경우가 꽤 많더라, 하고
화정은 치를 떨었다 - 감옥에 갇힌다거나 하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안심하고 있는 화정이 김빠지게도,
여포는 재깍 `그리하지.' 하고 답하지 않고는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거, 미안한데......으흠, 그래, 내가 말을 낮추는 것을
용서하게. 아무리 봐도 나보다는 나이가 어려보여서
말이지.......근데 어전이라니, 그게 뭔가?"
`윽!'
화정은 순간 머리 뒤통수를 뭔가 강하게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옛날 무사(武士)들이 조금 무식한 면이 있기는
하다지만......그리고 여포야 워낙에 머리를 좀 덜 쓰기로
유명하다지만......아, 정말 무식하다. 아무리 그래도
어전(御前)의 뜻도 모른단 말인가!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동탁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권세가 노릇을 해 먹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어전의 뜻을 모른다니!
화정은 `역시, 사람에게는 공부가 필요하다. 여포가 아주
조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삼국지의 패자는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라고 나름대로의 삼국지에 쓰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무력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주변 제후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 만약 조금만 더 지력을 갖추어서, 최소한 자신이
데리고 있던 일급모사 진궁(陳宮)*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
정도만 판단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여포는 조조를 능가하는 패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노릇이다. 너무나 무식한 질문에 아니나다를까, 조운도 조금
당혹스런 모양이었지만 그는 요령도 좋게, 금세 공손한
태도로 답해주었다.
"아, 그러니까......황제 폐하의 면전에서 뵙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공손찬 태수님의 사자로 온 몸입니다. 잠시,
왕윤 어르신과 이전에 면식(面識)이 있는지라 머무르고
있지만 곧 황성으로 들어갈 겁니다."
여포가 눈을 둥글게 떴다. 또 단어 뜻을 모르는 모양이다.
구경하는 입장에서도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옅은 한숨이
나오자 여포가 기척을 눈치챘는지 화정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
하는데, 당황한 화정에게는 다행히 때를 맞추어, 왕윤이
대답해주었다.
"면식은......얼굴을 대한 적이 있다는 소립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여장군. 그나저나, 저 분은 공손찬님의 사신으로
오셨으니 동 승상이 어려우실 겁니다. 여장군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승상께 잘......"
왕윤의 말에 여포는 화정의 기척도 깜빡 잊은 모양이다.
여포는 그제야 호탕하게 웃어제낀다.
"하하하하, 그런 것은 걱정도 마시오! 뭐 어려운
부탁이라고......자네 낯은 이미 익혔으니 걱정말게! 사신을
대할 때면 나도 아버님 곁에 항상 서 있게 되어있으니까.
자네같이 잘 생긴 얼굴이 어디 흔한가? 걱정마, 걱정을
말라구, 하하하하!"
`걱정이 안되면 그게 더 이상한거지.'
화정은 속으로 이죽거렸다. 정말 신빙성이 안간다. 저 머리에,
저 학습능력에 얼굴을 기억하고 도움을 주겠다니......하긴,
조운은 남이 보기에 인상이 조금 강한 편이라 쉽게 안 잊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조운을 평원에서 한번 마주친 이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나이답지 않게 차가운 느낌을
지닌데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얄밉기는 하지만 워낙 잘 생긴
얼굴에 키도 큰 사람이라 쉽게 까먹을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 전 이만 가겠습니다. 어휴, 밤이 너무 늦었군요.
하하하......!"
스스로도 무안하기는 했던 것 같다. 늦은 밤을 안 가리고
쫓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왕윤의 해명 한 번에 금방 순한
짐승처럼 변해서 저러고 있다. 저 여포란 사람, 거듭
생각하지만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다르게 순진한 면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무엇이라도 먹고 가라는 왕윤의 철저한 권유를
기분좋게 뿌리치면서, 여포는 휑 하니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물론, 초선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그를 가장
즐겁게 해 준 것이었겠지만. 어찌 생각하면 한심한 무식쟁이
장군이기는 했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다 들었다. 동탁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초선이 계속해서 남편으로 함께 산다면,
동탁보다는 순진한 면이 있는 여포가 나을 것 같았다.
이후에 초선의 행방은 화정으로서도 알 수 없기는 하다.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곳에서는 초선이 여포를 따라 계속해서,
여포의 첩이 되어 산다는 것, 또 하나는 동탁이 죽자마자
자살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워낙 관심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현재 친해진 입장에서 생각한다면......차라리
전자가 옳은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살아있다면.....무엇이든지
할 기회가 생기니까.
어차피 여포도 죽게 되니 여포가 죽고 나면 어쩌면......
어쩌면 초선을 도와줄 수도 있다. 특히, 초선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된 사실이 거의 없으니까......만약 초선을 도와서
함께 유비의 아래로 가거나 하더라도 역사에 크게 반(反)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기는, 어차피......초선님에게는 왕윤님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남편으로 섬기기가 괴롭겠지만......'
화정은 그런 동정을 한 번 깔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함께
지내던 어젯밤, 초선은 울적해 보였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날의 초선은 유난히 슬픈 모습이었으니까. 창을
열고 앉아서 망연하게, 하늘의 별만 세고 있었다. 밤을 새서,
마냥 앉아서.......풀린 눈으로, 그 수많은 별들을 열심히
뜯어보던 초선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덩달아 잠이 오지를 않아
이불을 덮고 자는 척만 하고있던 화정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려왔었다.
<내 별은, 왕윤 나으리의 곁에 있지 않을 거야. 천문을 보지는
못해도 알 수 있어.......>
부질없는 기다림도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겠지. 몰래
왕윤을 훔쳐보면서 즐거워했던 그 수많은 그리움도 그날로
끝이라고 생각했겠지......남몰래 초선을 동정했다. 그리고
존경했다. 사랑......때문에 스스로의 행복과 기쁨, 편안함을
모두 포기하고 모욕과 증오 속으로 몸을 던질 수 있는 그 용기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그 정도로 사랑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행복할 텐데......그런 사랑, 그런......남녀간의 사랑이란 것,
한번 해 보고 싶기는 했다. 하기는......자신도 한때는 남녀간의
사랑이란 것을 너무 동경해왔다.
적어도, 어린 시절의 화정에게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바로 그
이상적인 모델이 있었다. 어렸지만, 어렸지만 화정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예쁜 공주님과 멋진 기사님의 이야기도,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그 여자는 이제 네 어머니가 아니야. 오늘부터는......>
어느 시점부터 질려버렸고, 환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로는 별 감흥을 주지 못하던 것이었다. 남녀간의
영원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소설로 쓰고, 그림의 소재로 이용하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예쁜 공주님과 멋진 기사님의 이야기,
왕자님을 바라보던 초라한 소녀가 유리구두를 얻는 이야기 같은
것은......화정의 마음 속 동경의 자리에서, 멸시의 자리로
옮겨갔다.
`난 초선님처럼, 그렇게 할 수 없어. 비록 이곳에서......
마초를 좋아하게 되었기는 하지만 아직 그건......그래,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힘들어. 특히 만약에 나는......'
화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수는 없을 거야. 초선님처럼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사랑이란 것은 결실을 맺어야 한다고
하지만 난 결실을 맺을 수가 없거든.......왜냐면......
난......결혼이란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니까......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아니, 결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혼한 상태로 함께......오래 살 수
없으니까......할 수 없다고 보아도 무관하지는 않겠지......
......불가능하니까.
불구 아닌 불구. 상처가 내게 남기고 간 불구. 겉으로는
멀쩡해도 불완전하고 치명적인 불구. 이런 내 실체를 안다면
또한......어느 누가 나를 영원히 사랑하겠어!
`영원이란 것은 없어.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어째서 그런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려는 거지.......?'
다시 한번 더, 초선에 대해서 그렇게 몰래 물어보았다. 새삼,
그런 감정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초선이......슬프게,
애상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초선이 왜 그렇게 눈물짓는 모습이
특히 아름다웠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마음 속의 모든
슬픔을......매일같이 견뎌냈기에, 충분히 슬퍼할 만한 이유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납득이 갈 만한 사연이었기에......그
마음속의 슬픔을 눈물로 드러내면 오히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어떤 공감과,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읽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눈물짓는 모습이 예뻤나 보다.
겨울을 견디고 피는 꽃이 더 예쁜 법이거든.......화정은
그렇게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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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호남자(好男): 씩씩하고 쾌활하다는 뜻. 보통
남자다운 사람이란 뜻으로 쓰인다.
2.진궁(陳宮): 자字는 공대公臺.동군東郡 사람.
중모현령으로 있을 때 동탁 암살에 실패하여 곤경에 처한
조조曹操를 풀어주고 같이 도망친다. 하지만, 여백사呂伯奢
일가에 오해를 품어 조조가 그들을 모조리 죽이자 조조의
사람됨에 실망하여 헤어진 후 여포呂布를 따른다. 여포가
조조에게 패하여 잡히자 목숨을 비는 말을 거부하고
죽음을 감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