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5 일단락되다 (23/24)

3-15 일단락되다 

황제를 알현하는 일은 알현을 청하는 자의 신분에 따라 

절차와 규칙이 다르다. 일단, 지엄한 황제를 뵙는 일이니 

지극히 엄격하고 철저한 규율을 따르는 것은 물론이다. 

황제알현은, 아무리 숙달된 자라 하여도 결코 쉽지 않다. 

대충 등급에 따라 절차가 달라지는데, 최고 등급으로 치는 

자는 타국(他國)의 사신(使臣)이요, 그 다음이 각 고위관료, 

다음은 각 지방의 통치자, 그 아래가 황제의 친인척 - 황제 

개인의 사사로움이 공적인 것보다 아래라 하여 이런 등급이 

성립되었다 - 이고 그 아래로는 지방 태수들의 자잘한 보고를 

올리는 사신들이다. 

제 아무리 공손찬이 북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현재 황제의 

권한이 땅에 떨어져 북방에서는 거의 왕노릇을 하고 

지내더라도, 아직 공손찬은 정식으로 주목(州牧)*의 지위에 

있지도 못하니, 결국 공손찬 역시 일개태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공손찬의 사신에 불과한 조운은, 

최하등급, 즉 `태수들의 자잘한 보고를 올리는 사신' 정도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다른 경우들은 젖혀두고, 태수의 보고를 올리는 

사신의 절차를 살펴보자면, 먼저 입성하여 경비병에게 

신분증이나 증명패 등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한 후 온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면 경비병이 마련해 준 

임시거처에 가게 된다. 그 동안 경비병 중 하나가 

내조(內助: 황제의 비서실이라 보면 된다)로 보고를 올리면 

내조에서는, 서로 의논하여 사신이 황제를 뵙고자 하는 이유의 

중요도를 판단하고, 사신에게 걸맞는 숙소를 정한다. 

만일, 그 사신이 황제를 알현하고자 하는 이유가 황제를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내조에서 알아서 

처리하지만 알현하기에 합당하다고 결론이 내려지면 황제에게 

이 사실이 보고된다. 이를 보고받은 황제는 시간을 정해 

내조에 알린다. 그러면 내조에서는 시간을 하명받고 그 시간을 

사신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황제가 정하는 시간이란 것은, 예(禮)라는 것이 

있으므로, 아무리 황제가 만나기 싫은 경우라고 해도 보고된 

날로부터 3일을 넘기지 않게 되어있다. 대략적으로, 시간을 

배정받으면 이제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게되는데, 황제를 알현하는 

것에도 정해진 법칙이 꽤나 많다. 정해진 날의 정해진 시간에, 

바로 황제가 계시는 알현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황제알현 

한 식경(食頃) 전에 정해진 환관에게 가야 한다. 

그러면 환관은 대략적인 주의사항을 이야기하고 나라에서 

내리는 의복을 내려 갈아입도록 지시한다. 굳이 의복을 

갈아입히는 것은, 예법을 지키기 위한 이유도 있겠지만, 보다 

실용적인 이유들도 포함하고 있다. 암살방지와 청결유지, 

신분표시 등이 그 실용적인 이유의 예가 된다. 의복을 갈아입는 

중에도 병사들이 둘러싸고 지켜보면서 무기(武器)나 기타의 

위험물을 지니고 있는지, 몰래 챙기는지를 꼼꼼하게 살펴본다. 

이런 절차를 거치기에, 황제가 알현장에서 죽는 일은 발생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찮고 어렵지만 필수적인 

것이다. 또한 의복은 황제가 내리는 의복인지라 신성시되기에, 

찢어지거나 늘어나면 중형이 내려지므로 소중하고 깨끗하게 

잘 사용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여하튼, 환관이 의복을 갈아입히고 지시를 하달한 연후에는, 

환관을 따라 황제를 알현하러 간다. 사신의 일행이나 

호위무사는 당연히 황제를 함께 뵐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숙소에 있거나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알현실에 사신과 함께 들어가는 자들은 일행이 아닌, 정해져 

있는 보좌관들과 호위병들이다. 신분에 따라 보좌관과 호위병의 

수, 그리고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가 달랐지만, 조운과 같이 

중요도가 낮은 자에게는 황제 호위병 몇 명, 시중 한 명, 

조언을 할 수 있는 문관 한 명, 서기가 참여하고, 알현을 

하는 장소도 별관 정도이다. 

또한, 황제를 뵙기 위해 알현실로 들어서면 걸음걸이가 

너무 느려서도, 너무 빨라서도 안 되며 발소리도 낼 수 

없다. 손을 정중히 모아야 하는데 소매 밖으로 손이 

보여서는 안된다. 조운과 같은 하급사신은 황제를 바로 

근처에서 뵐 수 없으며 대략 3척 가량 떨어져서 뵙게 

되어있다. 물론, 엄격한 법치(法治)를 중심으로 했던 

진(秦)나라 때는, 소매 밖으로 손이 나오면 손을 자르고, 

고개를 들면 목을 잘랐으며 쓸데없이 작은 소리를 내면 

혀를 뽑고 황제를 감히 눈으로 흘겨볼 시에는 눈알을 

뽑았다고 하지만 한고조가 즉위하면서, 피폐해진 민심들을 

돌보기 위해 덕치(德治)를 강조하고 지나친 규율을 조금 

풀었으니, 이를 계기로 다행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약화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엄하기 짝이 없어서, 

조금의 흐트러진 자세나, 쓸데없는 잡담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신이 알현하는 목적은 황제를 알현하기 이전에 모두 문서로 

만들어져서 알현 전에 황제에게 올려진다. 이 보고문서는 

문관이 보관했다가 알현 시에 환관에게 전달되고, 환관은 

보고문서에 씌어진 대로 사신의 신분과 이름, 알현 목적을 

황제 앞에서 읽는다. 그러면 사신은 그 내용이 옳든 틀리든 

무조건 `그렇습니다.' 라는 대답을 해야하는데, 여기에서 

우스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든 사항을 옳게 써서 `그렇습니다.' 라고 답했을 

시에는 문제가 없지만, 만약 실수가 생겨서 틀린 사항이 

생겼을 때에도 답은 `그렇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다. 

환관은 황제를 대리해 일을 하는 자이므로 환관에게 `잘못 

되었습니다.' 라거나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곧 황제에게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중신(重臣)도 

아닌, 일개 사신이 황제에게 감히 부정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대답도 

올바르게 할 수 없으면서, 그 틀린 사항으로 인해 신분의 

속임을 하는 자로 간주되고 참수될 수가 있다는 점이다. 

결국 거짓말을 해도 빠져나갈 방법은 없고, 문서도 고칠 수 

없으므로 아무튼, 문서작성은 신중하고 정확하게 쓰는 것 

밖에 무사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악용(惡用)되는 경우 환관의 횡포에 

희생되는 자들이 많아지며 환관의 세력은 높아지게 된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환관은 알현하는 자가 자신과 악연이 

있는 자일 경우 이 보고문서를 멋대로 틀리게 고쳐놓아서, 

신분의 속임이 있다하여 그 자를 처치하는 일에 사용하기도 

했다. 고관대신들이야 환관과의 이해관계나 옹호하는 

세력차로 많이 횡포를 당하겠지만, 힘없는 하급관리나 

사신들의 경우에는 환관에게 돈푼을 쥐어주지 않아서 

횡포를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본래 사람이란 신체적으로 열등하면 그 열등함을 다른 

일로 해소시키려는 특성이 생기는데 특히나 이 환관이란 

자들은 남성으로서의 성(性)을 잃은 대신 그 열등감을 

재물욕으로 해소하려는 탐욕스러운 특성을 지닌 자들이라 

더더욱 뇌물에 민감했다. 그러니 사신으로 가는 것은 황제에 

대한 까다로운 예절을 지키기부터 환관 구슬리기 등등 

위험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관문을 많이 넘어야 했기에 

힘든 일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여하튼, 환관이 신분확인을 하고 나면 그때야 사신에게는 

말할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이 전달사항이 환관이 읽은 

보고문서에 있는 알현목적과 다르면 그것 역시 징벌되는 

이유가 된다. 필요한 사항만 정확하게, 정성을 다해 

또박또박, 예의를 다 하여 말해야 하며, 전달사항이 

끝나고 나면 황제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말이 끝난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여야 한다. 

보고 사항을 들은 황제는 보통, 시중이나 환관을 통해 하명을 

내리는데, 황제가 직접 답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황제가 

직접 답하는 경우에는 `망극하옵니다.' 또는 `황공하옵니다.' 

라고 말씀을 올려야 한다. 황제가 직접, 또는 환관을 통해 

하명을 내리고 알현이 끝나면 사신은 `황제폐하,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 一向萬康)하옵소서.' 라 황제의 

장수를 빌고 무릎을 꿇고서 `만세만세 만만세(萬歲萬歲 萬萬歲)' 

를 외친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을 해서 알현장을 

빠져나가는데, 역시 걸음걸이는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야 하며 발걸음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황제에게는 

등을 보여선 안된다. 

그리해서 빠져나오더라도, 이것으로 끝맺음되는 것이 

아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알현장에 들어가 황제가 

돌아가셨는지를 확인하고 다시 알현장을 빠져나와야 비로서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해서 숙소로 돌아가 의복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접어서 환관에게 넘겨야 한다. 본래 

황제룰 알현하는 절차가 이러하지만, 현재는 황제의 권위가 

땅에 실추되어있는 상태이고 전란의 시대라, 예절보다 황제의 

안전에 더 심혈이 기울여지고 있다*. 

"......알아들었지?" 

정말 이 여자애와는 아직도 이야기하기가 서먹하고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본적인 사항은 이야기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으니까. 영각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설명을 

마치자, 화정은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도 꽤 복잡하고 긴 절차였을 것이다. 

이전에 아영과 있을 때에도 대충 이야기한 적은 있었는데, 

그때 아영이 워낙 지루해하는 눈치여서 정확하게는 이야기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현재 있는 곳이 황궁이니만큼 화정은 꼭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기에, 영각은 싫은 것을 무릅쓰고 

이렇게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아주 만약의 경우, 황제를 알현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영각의 길고 지루한 설명을, 화정은 아영과는 달리 꽤 흥미있게 

알아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선 한번 팔지 않고 열심히도 

듣고 있었다. 영각은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앉아있는 화정을 

보자 머리에 열이 다 나는 것을 느꼈다. 

"좀 걱정되네요......자룡이 만약 황제 앞에서 실수하면 

어쩌죠?" 

뜻밖의 질문에 영각이 반문했다. 

"실수? 걱정이라니?" 

화정이 당연하다는 듯 미간을 약간 찡그리면서 눈을 치켜떴다. 

"조운이 실수하면, 참수될 지도 모르잖아요." 

영각은 다소 어이없는 감정을 느끼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실컷 

일행 쫓아다니면서 심장 사건 일으킨 게 누군데 일행 걱정을 

하는거야? 

"고양이가 쥐 생각하냐?! 걱정하지마. 옛날에는 황제 알현을 

밥먹듯이 했던 녀석이니까." 

화정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황제 알현을 밥먹듯이?" 

영각은 속으로 아차, 하는 한탄을 내뱉었다. 자신이 또 

조운의 과거에 대해서 떠들었다는 것을 알면 조운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나오는 말실수,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넘기지 않는 예민한 화정에게 신물나는 것을 

느끼면서 헛기침을 했다. 

"흠흠......그런 게 있어! 아무튼 걱정 안 해도 돼. 그 

녀석은 잘 할 거고, 우리에게는 피해가 안 올거니까......" 

"영각." 

갑자기 안색을 굳힌 화정이 딱딱하게 자신을 불렀다. 영각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화정의 얼굴로 

시선이 자동적으로 갔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피부와 차갑고 

시리도록 맑은 눈빛. 마치 얼음으로 만든 인형같이, 아름답지만 

정이 가지 않는다. 너무.....차갑고 깨끗하다고 

해야할까......아무튼 이 아이는 아직도 달갑지 않다...... 

"왜에?!" 

괜스레 어떤 기분나쁜 예감 비슷한 것을 느낀 영각이 

말꼬리를 끌면서 시선을 돌렸다. 화정은 아랑곳않고 자신의 

할 말을 했는데, 영각은 자신의 `기분나쁠 것 같은 예감' 이 

맞았음을 어김없이 느껴야 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하냐니, 그게 무슨 말이죠?" 

어이쿠, 괜히 말했네! 또다시 자신의 말실수에 짜증을 

느꼈다. 영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냥 넘어가! 그게......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뜻이지!" 

"그래요?" 

약간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화정이 되물었다. 영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말 뜻을 잘 몰라서 숙어를 잘못 사용한 

것처럼 하기로 했다. 

"그래! 고양이가 쥐 생각을 쓸데없이 왜 하냐! 필요 없는 

일이지!" 

"영각, 영각이 이전에 이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난, 지금 

그 문장이 영각이 뜻을 잘못 알고 잘못 사용한 

것이겠거니......하고 넘겼을 거여요." 

조금 불안했지만 끝까지 시치미를 떼보았다. 

"내가 뭔 말을 했길래?" 

화정의 가지런한 눈썹이 약간 치켜올라갔다. 

"심장 파먹었냐고 했죠?" 

순간 영각은 심장을 바늘로 찔린 듯한 따끔함을 맛보았다. 

화정은 영각을 똑바로 보면서 - 라기보다, 영각의 입장에서는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또박또박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나갔다. 

"이전에, 아영과 싸울 때 영각이 그랬어요. 모른다고 하지는 

못할 거여요. 얼굴을 위해 심장을 파먹어댔냐고 말이죠. 분명, 

영각은 내가 그 심장 사건의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여요. 

그래서 내가 아영이와 둘만 남으려 했을 때 극구반대를 해서 

데려온 거고, 지금도 감시할 목적이 있는 거겠죠. 내 생각이 

틀려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이 

안 흐른다면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여자아이가 저렇게 

간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전혀 모르는 척, 속아넘어가는 

척을 하고 있더니, 지금에야 뒤통수를 때린다. 화정의 

눈동자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영각을 직시하고 있었다. 

영각은 그 차가운 시선이 입이 다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아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영리한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 네 말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 

"그래서, 어차피 해칠 거면서 왜 조운 걱정을 하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양이가 쥐 생각한다는 따위의 말을 한 

거겠죠? 안 그런가요?" 

......뭐지? 갑자기 드는 이 묘한 느낌은? 

"영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반감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머리에 후끈한 열기가 다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알고 있으면서 왜 지금에야 나불거려?" 

"나도 이제야 추리해 냈던 거여요." 

차갑게 자르는 화정의 모습은 반감을 더더욱 부추켰다. 

영각은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화정은 오히려 덤덤해 보였다. 덤덤해 보이는데도 온 몸에서 

차가운 느낌을 뿜고있는 화정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영각은, 

문득,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놈은 사기(邪氣)를 쐬었어!> 

`정순해!' 

왜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자신은 

또 무의식적으로, 열기를 느끼며 화정에 대한 반감을 태우고 있다. 

이 방법, 이 방법으로 확인 한가지만 하면 거의 확실할텐데 말이다. 

그런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영각은 벌떡 일어나 화정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기를 약간 흘려넣어 보았다. 

갑작스럽게 영각이 자신의 팔을 붙들자, 놀랐는지 화정이 얼굴에 

약간의 의아함을 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신의 기는 

정순하지도, 사(邪)하지도 않은 기다. 감염되어있는 건지, 

아닌건지 모르지만 지금 흘려넣은 기는 절대로 사기가 없다고 

보아도 된다. 여하튼, 자신은 마술(魔術)측은 접해본 일이 

없으므로 정순한 기에 더 친밀하다. 만약, 사(邪)한 기라면 

반응이 나타날 것이었는데....... 

`......!' 

영각이 반응을 느끼고 놀라려는 순간, 화정이 영각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화정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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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주목(州牧): 13주의 장관인 자사를 '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한 때는 주州장관의 명칭을 목이라고 했으나 후한 

때는 자사刺史로 바꾸었는데 황건적의 반란이 일어난 중평重平 

5년 자사라는 명칭을 다시 목으로 환원하였다. 자사는 원래 

군사권이 없었고 비상시에 한해 칙령勅令에 의해서 군을 

움직일 수 있었으나 목은 처음부터 군사권을 쥐게되어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2.황제알현 예절: 여타의 자료는 진秦나라와 당唐나라의 

문헌을 적당히 조합해서 정리했다. 정확한 한漢나라의 

알현절차는 아니다. 자문자와 필자의 추리도 일부 섞여있으니 

오해 않으시기를 바란다. 정확한 한나라의 절차자료 입수시 

언제든지 수정하겠음*출처: 이종명군의 자문諮問

"?" 

"어딜 잡아요?!" 

기를 흘려넣은 결과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화정의 반응에 

더 놀란 영각이 뻥한 얼굴로 응시하는데 화정이 버럭 화를 

내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영각은 화정의 손에 맞아서 빨갛게 

된 자신의 손등을 보면서 얼떨결에 중얼거렸다. 

"뭐야, 내가 무슨 짓을 심하게 했길래......?" 

자신의 기운을 함부로 읽으려 해서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느낀 바로, 잠깐 화정의 손목을 잡은 그 짧은 

순간 동안에, 자신이 흘려넣은 기운은 화정에게 아무런 무리없이 

융화되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그 때 심장을 파먹던 여자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 여자는 가까이에 가기만 해도 치명적일 

만큼 강한 사기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가 아니면서, 기운을 읽는다고 그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나? 영각은 자신의 손에 붙잡히던, 가늘고 

부드러운 손목의 감촉을 느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정말 설마......내가 손목을 잡아서 화가 난 건 

아니겠지?' 

이내 고개를 열심히 흔들어 생각을 떨쳐버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정말 절세미인이다. 보기만 해도 황홀한 미모를 

지녔는데, 저런 아이가 그 나이가 되기까지 남자의 손을 안 

타보았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된다. 오히려 보통 여자들보다 

익숙하게 남자를 겪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데 어떻게 

손목 좀 잡아보았다고 그 정도로 화를 내겠는가. 특히, 다른 

여자도 아닌, 화도 제대로 낼 줄 모르는 저 냉혈이, 얼굴까지 

붉히면서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뭔가 들키면 안될 일이라도 있었나.....? 여하튼, 놀랄 

정도로 정순한 기운이야. 그렇게 빠르게 내 기가 

흡수되다니......오히려 그 때 심장을 파먹던 여자와는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하지만, 그 여자는 틀림없이 

저 아이였는데......저 아이의 외견을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에이, 제기랄! 머리아파 죽겠군! 정말로 내가 착각한 것이 

확실한가?' 

영각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하지만 역시 화정과 마주보고 

있을 때에는 이상한 열기 비슷한 것이 자꾸만 느껴졌는데, 

화정이 나가자마자 그 열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조운과 

있을 때 느낀 그 열기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여하튼, 오늘도 

분명 후끈한 기운을 느꼈었다. 어쨌거나 이쯤되면 자신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조운의 냉랭한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 화정과 조운의 유치한 다툼이 두 

번이나 있은 후로, 숙소에 아영과 화정과 갈라져서 한 방으로 

들어온 영각에게, 조운은 드물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었다. 

******* 

"......왜 그래? 오늘 실컷 얼빠진 행동 하고있더니 이제는 

다짜고짜 도끼눈을 뜨는 이유가 뭔가?" 

유독 차가운 시선에 기분이 나빠진 영각은 조운에게 그렇게 

툭 쏘아붙였다. 특히, 화정과 조운이 유치하게 다투는 통에 

혹시, 화정과 조운의 사이가 갑자기 좋아진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다 들었던 상태라, 더더욱 조운에게 화가 나 

있었다. 실컷 화정이 범인이라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경계하기는커녕 더 사이가 가까워진 것 같은 조운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조운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낮의 말은, 자네가 심했어." 

영각은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시선을 돌렸다. 읽던 

책을 덮어 허름한 탁상 위에 올려놓고 있던 조운은, 대답은 

별로 듣고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침상에 그대로 드러눕는 

조운이 못마땅했다. 

"무엇이? 어떤 것이 심하단 말인가? 내가 그 계집애에게 

심장 파먹은 일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성급했다고?" 

냉랭한 조운이라면 분명,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몰아붙이면 

눈치채고 도망하거나 해코지를 할 수도 있지 않겠나!' 라는 

말을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자아이에게 몸을 팔아댄다는 건, 너무 심한 말이야." 

의외의 이유였다. 영각은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마저 받으면서 조운의 등을 바라보았다. 

조운은 자신에게 등을 보인 그대로,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덧붙였다.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헛다리짚었어. 그런 아이는 아니야." 

조용히 덧붙인 그 말에는, 어떤 냉소 비슷한 것이 실려있었다. 

그 냉소와 대조적으로, 영각은 머리끝에서 화르륵, 하고 

일어나는 듯한 불꽃을 느꼈다. 동시에 아영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똑바로 보고 말해요. 화정이가 화류계 기생같이 보여요?> 

......모르겠다. 본래, 사람을 맹목적으로 싫어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악질적인 짓을 하더라도, 이유가 있다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는, 합당한 이유 없이 섣불리 

정의를 내리는 것이 위험하다고 늘상 생각해왔다. 냉정히 

생각하면 조운의 말이 옳다. 그리고 아영의 말도 옳다. 

그런 아이는 아니다. 아니, 아직 확신은 못하겠고, 그런 

아이처럼은 안 보인다. 오히려 정순하고 지나칠 만큼 깨끗하게 

느껴지는 아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싫고 부정적으로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심장사건? 그것 때문이라고? 그것 

때문이라는 것도 옳은 이유다. 하지만 자신이 화정을 

직접적으로 싫어한 이유는 아마.....아마도..... 

<괜찮아요. 각자 개인차가 있을 테니까요. 그보다 내가 

걱정되는 건......화정이는 분명 나보다 더 상처입었을 거여요. 

너무 미안해서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요......> 

그 바보같은 아가씨 때문일까......? 답답해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잠깐 헤어진 사이에 화정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군?" 

아영을 생각하자 절로 비꼬는 말이 나온다. 도대체 왜? 마치, 

입안에 들어있는 혀를 누군가 잡아서 수동으로 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아팠다.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등을 돌린 채 아직도 대답이 

없는 조운을 보자 더더욱 화가 났고, 그 `내가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마저도 씻은 듯 사라졌다. 도리어 이상한 말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왔다. 

"냉혈한인 자네가 그 아이와 그렇게 유치하게 다툴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도 몰랐어. 그러더니 이젠 두둔까지 

하는군그래......잠깐 사이에 뭔 일이 있었나?" 

"황호, 근거없이 남을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않아." 

조운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는 모양이다. 보통 때 같으면 

대꾸도 없이 그대로 있을 텐데, 웬일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대꾸한다. 영각은 목으로 넘어가는 마른침을 느꼈다. 어떤 

초조함도 동시에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운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가 있다. 아영도, 조운도, 이상하게 그 아이의 편을 

드는 느낌이다. 아영이야 원체, 착한 천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면 넘길 만하지만, 조운까지도 저런 태도를 보인다. 

이상하게 거부감이 자꾸만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네같은 놈이 여자에게 마음이 

끌린거야?" 

"......" 

여전히 대꾸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조운의 눈이 

옅은 의심마저 담고있었다. 그 멸시 비슷한 의심의 시선에, 

영각은 머리를 달구는 후끈한 열기 비슷한 것을 느껴냈다. 

아까보다 훨씬 진한 열기같았다. 어째서 그런지 몰랐다. 

그냥.....머릿속이 통째로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어째서 이렇게 후끈한 건지, 어째서 이렇게 

거부감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내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육체에 들어있는 상태같다. 거북스럽고 

이상하다. 붕, 뜬 듯한, 정신과 육체가 격리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쁜 놈처럼 보이나? 쓸데없이 애매한 아이를 천한 

창부로 이야기해서?" 

무감각하지만, 반발심 비슷한 것이 조운의 새까맣고 차가운 

눈매에 깃돌았다. 영각은 아까부터 느끼는 후끈한 열기가 

더더욱 뜨거워지면서, 이제는 머리 뿐 아니라 온 몸을 

휘감아가는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 들뜬 느낌일까? 

"허, 자넨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알고보면 

나보다 훨씬 나쁜 놈 아니던가?" 

영각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점점 내 스스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째서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려고 

하는 걸까? 

"나는 그저 추리만 했을 뿐이지만, 자네는 유부녀와 밀회를 

즐겼잖아? 그것도 보통 유부녀야? 천자의 귀비를......" 

"......영각!" 

좀처럼 말꼬리에 외침을 달지 않는 조운이, 말끝에 옅은 

외침을 달며 영각을 불렀다. 영각은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이 

아픈 것을 느꼈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고, 온 몸을 휘감고있는 열기에 미칠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는 끝없이 외쳤다. 그만해, 그만!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닌데 도대체 왜! 

".....자네 이상하군. 뭣에 씌인 사람같아." 

조운에게 가장 아픈 과거다. 조운에게 가장 모욕이 되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화를 내야 할 조운은 도리어 영각 

자신보다 덤덤해 보인다.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뭣에 씌인 사람같다고? 

그런 것 같아,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 야릇한 감정에 대해 

설명을 해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제기랄, 입은 

자신의 의지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이상한 말만 줄이어 

입밖으로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 정도의 나쁜 놈인데, 화정을 데리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잖은가? 화정도 기반이 그렇고 그런 계집애라면 

둘이 죽이 잘 맞았을 수도 있겠군." 

......이게 아니야! 

"영각, 그만해." 

조운이 몸을 일으키면서 자신에게 다가섰다. 영각은 자신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 내려다보는 것이 맞다. 원체 키가 큰 

놈인데다, 자신은 키가 작은 편이다 - 조운에게 어떤 반감과 

미안한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왜 

여지껏 몰랐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정의 얼굴을 대할 때, 

화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늘상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떤 거부감 비슷한 것. 하지만 그 때는 심하지 않아서 그저 

자신이 화정이란 아이를 싫어했겠거니, 하고 넘겨왔는데 

오늘따라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렇게 몸이 달아오르면서 

머리가 아파본 일은 없었다. 차차, 그런 기분을 느끼기는 

했지만 오늘의 자신은 마치, 한번에 폭발하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머릿속의 자신이 말했다. 계속해!......라고 말했다. 

"그 계집애를 감시하자는 말이 그렇게 기분나빴나? 흠, 

이걸로 자네의 홀몸 선언은 끝이군그래? 하긴, 돌아오지도 

못할 여자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새 여자를 찾는 것이 낫지. 

소연보다도 인물이야 훨씬 반반하니까 못할 것이 

무어있나. 도......" 

퍽! 

스스로의 말에 후회하기도 전에, 묵직한 소리가 나면서 

영각은 자신의 심장 부분에 강력한 타격을 느꼈다. 조운이 

자신의 심장을 손바닥으로 쳐낸 것 같았다. 조운의 표정은, 

그런 심한 말을 들은 사람같지 않게 그저 의아함과 의심만을 

담고 있었다. 심장에 가해진 타격에 의해 통증을 느끼기보다, 

영각은 목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피비린내를 더욱 진하게 

느끼며 시뻘건, 아니 시꺼먼 액체를 토해냈다. 

"욱......!"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동시에 영각은 자신의 머리와 

온 몸을 후끈하게 감싸고 있던 열기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머리가 

아직도 지끈거렸다. 멍한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식히려고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쥐는데 조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무 부주의했군. 자네는, 사기(邪氣)에 감염되어 

있었어." 

덤덤하지만 은근한 부아가 담겨있었다. 감염이라고? 혹시, 

자네도 여지껏 감지하지 못했는가? 영각은 이렇게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물어보려는 순간, 머리가 지끈하게 아파오는 

것을 다시 느끼면서 영각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까보다는 

낫지만 아직도 자신의 몸이 아닌 양,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감지조차 안 되다니.....실로 대단하군. 심장에 숨겨놓은 

사기(邪氣)라......" 

조운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리면서 울려왔다. 영각은 

이마에 한 손을 갖다대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사라지지는 않았고 완전히 기분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아까보다는 덜한 것 같았다. 조운은 영각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는 직접적인 말과 행동은 삼가게. 아무래도 원인을 알 

때까지 자네는 완치가 힘들 것 같으니. 여하튼, 아직도 자네는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 같군......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자네에게 기를 뒤집어씌운 존재가 노리는 건 화정일걸세." 

영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천천히, 여지껏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영수를 데리고 다니던 말던, 초면에 보는 사람에게 

그런 식의 호칭을 쓰는 것은 실례로 보이는군요.> 

`그래, 생각해보면 대체 언제부터......!' 

영각은 조운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고 덤덤했지만 조운이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 따윈 충분히 알고 있다. 영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운과 영각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영각은 조운을 응시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 처음에는 분명......' 

그랬다. 약간 야무지고 제멋대로인 구석도 있는 아이지만 

그냥 나쁜 사람은 아니게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 심장을 

뜯어먹던 여자가 그 아이라고는 해도, 확실하지 않다. 특히, 

그 아이는 그 여자가 아니라는 명확한 근거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운과 함께 쭉 동행해서 다니던 아이다. 

별다른 주술적인 힘이 있지도 않다. 도리어, 의외의 일들을 

가끔 일으키는 것 이외에는 담사간인도 제대로 못하던 아이다. 

큰 반감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여자를 보고 난 바로 

이후부터, 조운의 표현을 빌자면, 무엇에 씌인 사람인 양 

화정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극렬하게 하기 시작했다. 몸을 

팔아댄다는, 여자로서 가장 치명적인 욕까지 해 가며, 

조운이 가장 돌이키기 싫어하는 말까지 해 가며, 십년지기인 

조운에게 그런 말까지 해 가면서......! 

`내가 대체......' 

아직도 정확한 것은 모르겠다. 

".....아직도 그런 감정이 느껴지나?" 

"뭐?" 

영각은 잠시 팔았던 시선을 다시 조운에게 고정시켰다. 

"아직도 화정에 대해 그렇게 격렬한 반발이 느껴지고 있나?" 

영각은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은, 조금은 기분이 나빴다. 

사실 그렇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은 화정에 

대한 거부감과 반발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처럼, 

악의없고, 그저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 정도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뭔가 얄밉고, 싫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랬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요즘 들어서 갈수록 격렬해져갔다. 아마, 

여기서 조금만 더 감정이 증폭된다면 화정을 죽이겠다고 

이를 가는 일도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방금, 조운이 기운을 

약간 빼냈어도, 이렇게 반발심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나저나, 자신이 말도 않았는데, 화정에 대한 반발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낸 것을 보면, 마음을 읽었던 모양이다. 

아니나다를까, 조운이 말을 덧붙였다. 

"미안하네. 잠시 원령의 힘을 빌었어." 

역시 그랬다. 한심해졌다. 또 원령의 힘을 빌다니! 영각은 

이마에 솟는 푸른 힘줄을 느끼면서 대뜸 외쳤다. 

"왜 또 그런 짓을 한 게야! 자네는......컥!" 

말을 맺기도 전에 시꺼멓고 끈끈한 것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영각이 피를 손으로 닦으려하자 조운이 영각의 팔을 붙들었다. 

"그만해. 자네는 아직 사기가 완전히 떨쳐지지 않은 상태야. 

내가 대충 기운을 쏟아내기는 했어도, 타격이 있을걸세. 

피는 만지지 않는 것이 좋아. 아무래도 독성(毒性)이 있는 

듯하네." 

"독? 독이라고?" 

영각의 반문에 조운은 땅바닥을 가리켰다. 무심코, 영각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흘렸다. 아까, 조운이 자신의 심장을 

칠 때 토한 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녹고있잖아!" 

영각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고인 핏물에서 뿌연 김이 솟고 있었다. 아마도 바닥을 녹이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의 물체도 저렇게 쉽게 녹인다면......의외로 자네 

피부는 안 녹이고 있지만 기운이 좀 기분나쁜걸. 아귀강시나 

원령들이 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야." 

영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고 닦은 

부분을 찢어서 던져버렸다. 천조각도 천천히 녹고 있었다.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보고섰는 영각의 옆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조운은 침상으로 가서 몸을 눕힌다. 조용히 한소리 

했다. 

"당분간은 화정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을거야." 

조운이 화정에 대해 신경쓰는 소리를 듣자 또 머리가 

후끈거렸다. 영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여태까지 반응이 이렇게 강하지는 않았는데...... 

황성 근처로 오면서 자꾸만 더 심해지는 것 같군...... 

가만, 황성?' 

황성과 연관이 혹시 있는 걸까? 영각은 가만히, 창을 통해 

보이고 있는 황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그러고보니, 지금 확인해보니까 더더욱 확신이 서는군...... 

저 아이는 그 범인이 아니야. 이렇게 감염될 정도로 강한 사기를 

지니고 있던 여자인데......저렇게 정순한 기운은 위장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그런데 난......' 

영각은 화정이 차고 나간 문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꼬리가 잡히니 이상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화정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겠군.' 하고 납득을 한 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아영......아영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래, 왜 생각하지 못했지? 아영과 단 둘이 있었을 때는...... 

아영이 화정에 대해 두둔했어도 별다르게 이상한 느낌은 없었어! 

왜 유독 아영과 있었을 때는 그랬지?' 

그렇다. 냉정히 따져보면 그렇다. 일행과 몰려있을 때는 화정에 

대한 반감이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하지만, 화정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고 쌍쌍으로 헤어졌을 때, 아영과 단 둘이서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조운과 단 둘이 있을 때에도 화정에 대한 

의심만 미친 듯 늘어놓던 자신이, 아영의 그 답답하기 짝이 

없는 `난, 화정이를 이해해요.' 하는 말까지 들으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군. 아무튼 아영은 착한 아이야.'라는 

식의 생각을 했었다. 

`어째서지? 그리고, 꼭 사기가 아니었더라도, 분명 그 심장 

파먹는 여자는 화정과 외양이 같았어.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알아챌 수 있었고......내가 살아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현과 

사융은 별다른 끈질긴 추적도 하지 않고있다...... 

동탁의 신뢰를 깊게 받는 이들이다. 술사로서의 능력도 

최상급인 놈들이고......그리고, 화정같이 얼굴이 예쁘기만 

한 아이를 무엇 때문에 이런 꼼수를 써서까지 목적으로 삼고 

있는거지? 색(色)을 밝혀대는 동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런 목적이라면......그냥 이곳을 덮쳐서 끌고 갔으면 

될 텐데 왜 이런......!' 

자신같은 사람은 그들에게 전혀 위협이 못된다. 죽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뭐, 장안에서야 조운이 

붙어있었으니 그렇다고 쳐도, 이곳까지 도망오는 것에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조운이 워낙에 무술이 출중하다고는 

해도, 그때 왕윤의 집으로 보낸 그 자객은 허술하기까지 했다.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경고를 주려고 보낸 것 같았다. 마치, 

일부러 놓아보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런 제에길!' 

머리가 또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영각은 이마를 다시 

감싸쥐었다. 아까의 `고양이 쥐생각' 이란 말도, 조금은 

비의도적으로 나온 말 같다. 유독, 얄밉고 정이 안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도 그렇다. 조운이 그나마 기운을 약간 

털어낸 덕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라도 기운을 떨치지 

않았더라면 화정과 단 둘이 있었을 때, 자신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화정과 단 둘이 있으면 안된다는 조운의 

말에도, 무릅쓰고 화정의 방으로 이렇게 들어온 것은, 

일차적인 이유는 `황성의 규율 정도는 꼭 알려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차적인 이유는...... 

`혹시......' 

이미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사기는, 제어가 불가능한 선 

가까이까지 번져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운이 뽑아낸 기운은 

아주 일부의 미약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또다시 

아파왔다. 후끈한 열기가 또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영각은 이를 갈면서 화정의 방에서 서둘러 나왔다. 잠시, 이 

임시숙소를 떠나 경비병들에게 보고문서와 정식숙소 배정을 

받으러 간 조운이 원망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뭔가 

알아보겠다면서 소리도 없이 떠난 아현도 미울 지경이었다. 

몸이 정말로 아픈 것도 아니고,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라니, 

기분 더럽군, 하고 중얼거리면서 영각은 자신과 조운의 방 

쪽으로 비틀대는 걸음을 옮겼다. 

*******

"제멋대로야! 유감이 있다면 천천히 이야기하지 왜 손을 

잡고 난리람!" 

화정은 잔뜩 열을 내면서 투덜댔다. 영각에 대해서 그래도, 

이전에는 아무리 한량 짓을 하고 장난을 심하게 쳐도 그저 

짓궂은 사람이어서 그렇겠거니, 했는데......그 아영 덕에 

싸운 그날이후로, 완전히 싫어져버렸다. 그래도, 자신과 

조운이 유치찬란하게 다투는 통에 아영과 함께 피해자가 

된 상황인지라, 영각의 지나친 말은 잊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영각에 대한 반감을 천천히 식혀가는 

중이었는데, 또다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잔뜩 밉게 

굴고 고양이 쥐 생각하냐는 따위의 비꼬기나 하더니 갑자기 

손을 덥썩 잡는 통에 너무 놀랐다. 뭐, 영각이 엉큼한 짓을 

하려고 붙든 건 아니라고 판단이 되지만 그래도 그런 건 

정말 싫었다. 남자가 갑작스럽게 여자의 손을 붙드는 건 

한가지 이유뿐이라고 화정은 생각해오고 있었다. 

엉큼하기는,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뭐, 워낙 아직까지도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은 세계니까 손을 잡고 조사라도 해야 

할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렇게 꼭 필요한 

이유가 있었으면 먼저 설명을 하던지! 그러고보니, 저 영각이란 

사람은 자신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으면서도 해명 

한마디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심장 사건의 범인을 화정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설명 한마디 없다. 사건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지도, 화정에게 따져묻지도 않는다. 그저 빈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거라면, 그럴 거라면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화정이 범인이라고 생각되는지 속시원하게 

다 털어놓고 싸우던 오해를 풀던 했으면 좋을텐데! 

하기는 좀 예민한 문제다. 대놓고 `너 범인이지?!' 하기는 

힘드니까. 여하튼 상황이 마음에 안든다. 조운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분명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조운은 영각과 

반대로 화정을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당연하다. 

영각이 뭔가 일을 당하고 돌아온 그 사이, 조운은 화정과 쭉 

함께 있었으니 영각이 아무리 심장사건의 범인이 화정같다고 

해도 조운은 믿지 않을 것이다. 

얄밉기는 해도, 냉정하고 신중한 조운은 함부로 화정을 

범인으로 속단할 리가 없다. 영각에 대해 짜증을 내던 화정은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다가 

어두컴컴해졌다. 눈앞에 보이던 광경들이 사라졌다. 온통 

시꺼먼 색뿐이다. 

`아, 이런.....!' 

화정은 비틀거리면서 손을 내뻗어 앞을 더듬었다. 어두운 

암흑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본래 종종 있던 일이지만, 

근래 들어서는 거의 겪지 않았었다. 특히, 이 세계에 떨어져서는 

처음 겪는 셈이다. 

`너무.....신경을 많이 썼나......' 

답답했지만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숙소에서 

크게 멀리 나오지 않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분명 조운과 

영각의 숙소 근처까지 다가왔으니 자신의 방도 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며 열심히 앞을 더듬었다. 화정은 

몸이 그다지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약하다고도 할 수 없지만 

건강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익힌 많은 무술도, 숱한 유괴와 위협에서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익힌 것이라기보다 사실은 체력을 키우기 

위해 했던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몇 가지 지병이 있었는데, 

혈압이 낮아서 유달리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현상과, 

과다하게 신경을 쓰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가끔씩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가능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데, 최근 

영각과 이래저래 다투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경을 너무 많이 

썼던 모양이었다. 자주 겪어본 일이지만 정말 익숙하지 않다. 

정말, 정말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입술을 꼭 깨물며 천천히 

손으로 주변을 더듬던 화정은 손끝에 차가운 느낌이 와닿는 

것을 느꼈다. 좀더 더듬어보았다. 둥그렇고 매끈하다. 그 차가운 

고리의 주변은 거칠거칠한 나무판이었다. 

`문......인가봐.' 

문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정말로 자신의 방인지, 

아니면 엉뚱한 사람의 방인지, 어딘지 알 길이 없었다. 문이 

각 방마다 다르게 생겼다면 어느정도 구분할 수 있었을 텐데, 

잔인하게도 이 임시숙소로 준 건물은 모든 방의 문들이 기계로 

찍은 것처럼 똑같았다. 

황성이면 황성답게 화려한 문양을 각 방마다 다르게 넣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하기는, 여기는 경비병들이 쓰고 

있으며 황제에게 알현을 청하러 온 사신들이 잠시 머무르는 

임시숙소에 불과하다. 황성이라고 말하면, 황성이란 단어에게 

미안하다. 황성 안에 있기는 하지만 절대로 황성이라고 부르기 

싫은 건물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결국, 화정은 포기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이 

도로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본래 약을 

먹었지만, 여기는 약이 없으니 시간이 지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왜 이렇게 서늘하지?' 

화정은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를 느끼면서 팔짱을 꼈다. 

정말 그랬다. 분명, 숙소 안은 그렇게 춥지 않았는데 여기는 꽤 

추운 것 같았다. 화정은 몸의 체온을 조금이나마 올리기 위해 

손바닥으로 팔을 가볍게 문질러 마찰을 일으키면서 불평했다. 

`잘못해서 바깥으로 나온 거 아닐까?' 

기분이 더 나빠졌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정말 싫다.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당황하게 된다. `또 

이러네.' 라면서 스스로에게 늘상 있는 일임을 상기시키고 

안정하려 해도 저절로 당황하게 된다. 시꺼멓기만 한 광경은 

불안감을 더 고조시킨다. 방향감각도 순간적으로 상실되고 

몸의 체온이 내려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화정은 점차 추워진다고 느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 

일행이라도 함께 있었다면 그나마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 

텐데. 주변에 누가 있고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혹시 외진 곳이 아닐까 싶었다. 말이 가끔씩 

푸르릉거리는 소리만 잔뜩 들려오고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구간 근처일까? 

기분이 나빠졌다. 손을 더듬거려 주변을 만져보았다. 자신이 

앉아있는 바닥은 돌바닥 같다. 차갑고 단단하며, 편평한 

감각이 손바닥을 자극했다. 휴, 다행이야. 말똥을 뒤집어쓸 

염려는 없는 것 같아......화정은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이 상태에서는 더 예민해지면 안된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인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몸이 따뜻하지 않으면 빨리 회복되지 

않을텐데......오히려 너무 추우면 안 좋아지는데..... 

어쩌면 좋지?' 

화정은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한기를 더 강하게 느끼면서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소름이 돋고 몸이 가볍게 떨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떠 

봤자 소용없다. 그냥 눈을 감고 이곳에서 편안하게 쉴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잘 쉬어질 리가 없지만 괜스레 

왔다갔다하거나 이런저런 행동을 하면 스트레스를 도리어 

더 받을 것 같았기 때문에 차라리 눈을 감고 즐거운 일이나 

생각해볼 참이었다. 

오스스, 몸이 또 떨려왔지만 애써 눈을 감고 벽인 듯한 곳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손으로 열심히 팔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도 몸은 천천히 굳었다. 화정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즐거운 생각을 

하자. 즐거운 생각. 즐거운 생각......즐거운 일......즐거운 

일......즐거운 일이 어떤 것이 있었지? 

******* 

<엄마, 나 공부하기 싫어.> 

<그래. 엄마랑 몰래 나갔다 오자.> 

<그치만, 아빠가 이거 다 안하면 혼난댔어.> 

<이걸 오늘밤까지 다하라고? 화정이 너무 힘들겠네. 엄마가 

아빠한테 말하면 괜찮아.> 

<진짜? 진짜?> 

<자, 이거 입고 나가자.> 

<응!> 

******* 

<다 안 했어?!> 

<......> 

<아빠가 다 해놓으랬지?!> 

<......> 

<아빠가 이거 해 놓으라고 했었지, 분명히?!> 

<으앙, 엄마!> 

<여보, 그만하세요. 화정이는 아직 어려요.> 

<......아무리 그래도 화정이는 보통 애들처럼 키우면 안돼.> 

<제가 억지로 데리고 나갔어요.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요. 

우리, 모처럼 모였는데 외식이나 하러 가요. 네?> 

<허, 참......정말......당신에게는 못 이기겠네......> 

<화정아, 뭐 먹고 싶어?> 

<고기! 고기랑 아이스크림!> 

******* 

.....그때만 해도 어머니랑 아버지만큼......완벽한 부부는 

없을 거라고 늘 생각했는데.....그리고 난 정말......정말 

행복......했던 것 같은데......아무리 많은 공부와 나이답지 

않은 교육의 압박감이 있었어도 난 충분히...... 

행복했는데......슬프기도 많이 슬펐고, 기쁘기도 많이 

기뻤는데......그 많은 감정의 기복 속에 있었어도 늘 행복할 

수 있었는데...... 

******* 

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달리 눈이 부셨다. 음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화정은 손을 들어 이마 위에 얹었다. 눈부신 

햇살을 조금이나마 걸러내고 싶었다. 눈이 너무 부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싫지는 않았다. 아까처럼 차가운 

어둠만 가득한 것보다는, 눈이 부시더라도 따뜻한 햇살이 

좋았다. 

뺨에 와서 부서지는 햇살이 여느 때보다 온화했다. 아마,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이 안 보일 때는, 공포심이 가슴속에서 고개를 든다. 

그리고 다시 눈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공포심이 슬며시, 

사라지는데, 그 순간 문득 느낀다. 죽으면 그런 암흑만 끝없이 

보게 될 지도 모르잖아. 그건 싫어. 그 암흑이 보기 

싫어서라도......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는 그런 

생각때문에 아무리 현실이 싫고 도피하고 싶었어도, 화정은 

여태껏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 지병 덕택에 화정은 도리어 살아왔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힘겹고 현실이 싫더라도, 아무리 아버지와 새 어머니의 

얼굴이 보기 싫었더라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시꺼먼 암흑은 

정말 싫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보다, 아버지와 

새 어머니를 보는 것이 낫다고 늘상 느꼈다. 가끔씩 눈이 안 

보여서 손으로 주변을 더듬으면, 아버지는 역정을 내면서 

가정부나 아랫사람에게 약을 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면 

허둥대며 걸어가는 걸음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화정의 

손바닥에는 둥글거리는 촉감의 구슬 비슷한 것들이 쏟아졌다. 

차르르. 

참 차갑고 듣기 싫은 소리였다. 그것보다 더 듣기 싫은 

소리는, 아버지의 역정소리였다. 너무 오래 들어서 지겹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듣기 싫었다. 그 소리를 무감각하게 들으며 

약을 기계적으로 삼키면,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만 남긴 채 

아버지는 떠나갔다. 

꿀꺽. 

목으로 약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화정은 `아버지가 

걱정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주는 약이 먹고 싶어요.' 라는 

소리도 함께 삼켰었다. 괜찮니, 하는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딸의 손을 붙들고 손수 약을 부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마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자신을 딸로 여기지 

않으려 하는 듯한 아버지의 정없는 태도가 더 힘들었다. 딸이 

아니라 후계자를 키우는 그 아버지가, 밉고 보기 싫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자신 때문에 웃는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지 

않을까 싶은 희망 때문에 그 지병을 싫어했었다. 자신이 암흑을 

보는 그 잠깐동안 혹시, 아버지가 자신에게 웃어주면 그 얼굴을 

못 볼텐데, 그런 생각 때문에 그 암흑이 유달리 싫었었다. 

하지만 그 잠깐사이에도 아버지는 웃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웃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점차 익숙해져갔고, 

화정은 더 이상 암흑이 이전만큼 무섭지는 않게 되어갔다. 

두렵고 무서워도, 그건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못 볼지 모른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그냥 본능만이 이유가 되어갔다. 암흑을 

싫어하는, 사람의 본능만이 이유가 되어버렸다. 참 오랜만에 이런 

회상을 해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약도 없었는데, 멀쩡해졌다. 

의문이 들자 화정은 몸을 일으켜보았다. 별 탈 없이 상체는 

일으켜졌고, 화정은 양손으로 침상을 짚은 채 고개를 돌렸다. 

".......?" 

활짝 열려서 햇빛이 들어오는 속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오똑한 콧날에 어두운 눈동자를 지닌 얼굴을 옆모습만 

표출시킨 채 팔짱을 끼고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선이 차갑고 눈매도 지적이라서 냉정하게만 보였는데, 햇살 

속에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어딘가.....따뜻하게 

보인다. 

차갑고, 다소 지적으로 생긴 옆모습과 눈부시고 하얀 햇살이 

대조적이면서 이상하게 자꾸만 어떤 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빨려들어갈 것 같다고 해야할까? 그 눈부신 햇살 속에서도 

빨려들어가지 않는 사람처럼, 우뚝하게 서 있는데 화정의 

눈에는 어딘가......겨우 서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왜 그럴까. 왜 저 사람이 저렇게, 겨우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일까......화정은 그런 생각과 느낌을 지우고 

싶었다. 

"조운." 

화정은 아련하고 뭔가 알 수 없는, 그럼 감정을 느끼면서 

그를 불러보았다. 이렇게 부르면, 이 묘한 감상이 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빨리 깨고 싶었다.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서서히 돌리는 조운의 눈동자에 옅은 의심 비슷한 것이 

감돌았다. 

분명 여기는 화정의 숙소다.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궁금했지만,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자신의 옆을 

저 사람이 지키고 섰던 걸까? 의문은 금방 풀어졌다. 

"마구간 옆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지?" 

`아!' 

말 울음소리와 말 냄새 같은 것이 기억났다. 숙소를 찾으려다가 

방향을 잘못 잡아서 마구간 근처로 갔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일부러 그 자리에 그대로 쭈그리고 앉았던 기억도 났다. 

고개를 숙인 채 화정이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조운의 목소리가 

과정을 알게 해 주었다. 

"왜 마구간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지 모르겠군. 여하튼, 

그대로 두면 밤까지 있을 것 같아서." 

그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운이 화정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던 것 같았다. 화정은 속으로 다행이라는 

말을 삼켰다. 일부러 눈을 감다보니 잠이 들었나보다. 그리고 

거기에 계속 있었으면 아마, 체온이 내려가서 잘못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 화정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팔짱을 끼고 창가에 선 채, 시선만 화정에게 박고있는 

조운에게,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을 열려는데 조운이 몇 마디하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정식숙소로 옮겨야 하는데 너 때문에 차질이 생겨서 고생했어. 

어서 짐 챙겨서 나와." 

닫히는 문을 보면서 화정은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고마운 

마음이 싹, 하고 사라졌다. 사람 말 좀 제대로 다 듣고 나가면 

어디가 덧나느냔 말이다. 그것도, 좀 도와줬으면 겸손하게 괜찮아, 

여기로 데리고 왔을 뿐이니까, 라고 하면 안되나? 너 때문에 

고생했다니, 말이라도 안 밉게 하면 예쁘게는 안 봐줘도 그나마 

괜찮게는 봐 줄텐데. 

화정은 눈썹을 잔뜩 치켜올리며 투덜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데려온 것 하나로 엄청나게 유세떨고 있네, 

유세떨려고 옆에서 지키고 섰던 것임에 틀림없......잠깐, 

데려와? 의문이 생겨버렸다. 

`어떻게?!'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렇다. 자신은 마구간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었고 깜빡 잠이 - 잠이 든 건지 기절한 건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 들었다 . 그리고 그런 자신을 조운이 

발견했고 여기 숙소로 데려왔다. 이건 정확한 사실이다. 

하지만......어떻게 데려왔을까? 그리고 데려오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안아서? 업어서? 그리고, 정말 무사히 

데려온 거겠지? 아무리 오랜 동료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남자라구! 정말 무서운 상상을 하려던 화정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조운의 차가운 표정이 생각났다.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닐거야.' 

화정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 기간 한 집에서 오래 살았지만 

엉큼한 짓을 하려는 건, 낌새조차도 없던 사람이다. 오히려 

찬바람만 쌩쌩 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적어도 화정이 

걱정하는 그런......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해......!' 

화정은 자신이 업혀오는 상상을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조운같은 인간이라면 그녀를, 안아서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 사람들도 많은데 다정하게 안아왔을 리는 없다. 하지만 

업혔다는 것도.....기분이 좋지 않았다.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화정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옷가지를 짐 속에 쑤셔넣었다. 

이전에 바위가루 속을 뚫고 올 때도 끌어안고 돌파한 덕택에 

자신이 살아날 수는 있었다. 이번에도, 업어서 자신을 데려온 

덕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지, 냉정하게 보면 그 인간이 

잘못한 것은 없어. 단지......화정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여자인 게 죄라니깐! 

*******

조운은 사신으로서 최하의 등급이라고 했다. 정식숙소는 

사신의 등급에 따라 내 주는 장소가 분명 다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자신들 일행은 가장 허름한 곳을 발령받은 셈이 

된다. 하지만 숙소에 들어선 화정은 이곳이 허름하다는 생각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삼공의 지위에 있는 왕윤이 

접대용으로 준 화려한 방보다도, 훨씬 호화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머물러 본 방들 중에서 가장 호화롭다고 해야할까. 

"이런 곳이 정식숙소라면, 사신만 하면서 살고 싶겠는걸."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이천 년대에서 살던 자신의 집도 

절대 허름하지 않다. 자신은 매양 살아와서 잘 모르겠지만, 아주 

가끔씩, 자신의 집에 어떤 일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눈을 

둥글게 뜨고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이 몇 명 더 있기는 했지만, 그 중 두 명만 함께 

살면서 일하고 나머지는 모두 출퇴근을 했으니, 아버지와 자신, 

새어머니, 머무르는 두 명......도합 다섯 명만 사는 집이다. 

다섯 명만 사는 집이지만 상당히 넓은 뜰에, 넓고 커다란 

이층집이었다. 자신조차도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가 

지겨워서 이층의 자신의 방과 부엌, 정문만 들락날락 했다. 

지금은 다른 방들의 구조를 꽤 바꾸었을 지 모른다. 그 

정도로, 엄청나게 넓었고, 쓰지 않는 방도 다수 있었다. 

가구들도 아마, 다 맞춰서 들여왔으니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꽤 값이 나가는 것들 일 테지......라는 생각도 

해 본 적 있다. 

그런 곳에 살기는 했지만, 중국으로 오게된 이후 겪게된 

화정의 생활은 조금 상반된 것이었다. 마초와 다닐 때도 - 

마초가 워낙에 돈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기는 했어도 - 그저 

평범한 객잔을 찾아 머무른 데다, 유비의 곁에 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현령이라 해도 별 높은 고위 인물은 

아닌데다 사치를 즐기지 않는 유비 덕에, 화정의 숙소도 

그저 평범했다. 

네모나게 깎은 탁상과 평범한 침상. 그게 전부였던 방이다. 

조운과 함께 있을 때는 이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야말로 화정 생애에서 가장 초라한 생활을 했던 

한 때니까. 지금이야, 사신인 입장이고 화정이 사이비 

점쟁이 노릇을 조금 해서 번 돈 덕에 평균정도는 

생활하지만......아무튼, 사치에 익숙한 화정이 조운과 

함께 있을 때 겪은 빈곤은 너무 기억에 깊게 남는 것이어서 

그런지, 황성과 왕윤의 집은 감격마저 안겨주었던 곳이었다. 

특히, 황성은 더더욱 그렇다. 왕윤의 집이 크기는 했지만, 

황성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경비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 

때도 너무나 웅장한 그 규모에 감격해서 주변을 갸웃거리다 

조운의 눈침을 맞았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을 것 같이 

느껴졌고, 곳곳에 새겨진 정교한 돌조각들과 여기저기 파 놓은 

연못들도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왕윤의 아담한 정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장엄한 정원이었다. 

뭐, 왕윤의 정원도 현대 사람의 기준으로는 거의 궁궐이다. 

우리나라 경복궁보다 아마, 약간 좁은 정도의 넓이니까. 화정의 

집이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왕윤의 집정도 넓이의 땅을 사 놓고 

집을 만들었다면, 재정으로는 충당이 된다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눈총과 욕부터 날아올 테니까 엄두도 못 낸다. 하지만, 왕윤의 

정원은 황성에 비하면 정말 `아담하다'고 밖에 표현이 되지 

않았다. 

여하튼 분명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아무리 봐도 

사람이 팠다고 보기 힘든 널따란 연못들과 살인적인 사치를 

구사하고 있는 조각과 건물들도 멋졌지만, 푹신한 침상은 특히 

기분이 좋았다. 화정은 침상에 앉아 손으로 시트를 눌러보면서 

그 푹신푹신하고 깨끗한 감촉에 감격하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오랜만에 잠이 아주 잘 올 것 같아서 벌써부터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았다. 화정은 몸을 힘껏 침상 위에 눕혀보았다. 

털썩. 

기분 좋게 몸이 눕혀진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순간 침상 

바로 옆에 붙어있는 벽에서 뭔가 덜그럭,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화정은 신경이 그리 둔한 편은 못 되었다. 벌떡, 용수철 

튕기듯 상체를 일으킨 화정은 아까 소리가 났던 곳을 향해 시선을 

들이댔다. 뭔가 수상한 것이 있다던가 혹시 도청장치 비슷한 것이 

있는 것 아닐까? 

이전에 집에서 도청장치가 발견되어 곤혹을 한바탕 치러본 경험이 

있는 뒤로, 화정은 사소한 일에 예민해졌다. 분명히 이 근처에서 

뭔가 소리가 났단 말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손으로 벽을 

더듬어보았다. 한참, 눈살을 찌푸린 채 벽을 더듬었지만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더듬어도 이상한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려던 화정은 손을 신경질적으로 

내리다가, 뭔가 덜컹, 하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확실히 알았어, 

하는 심정으로 화정은 그 부분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역시!' 

벽과 아주 색이 비슷한 물체가 끼워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정말 알 수 없을 만큼, 정교한 것이었다. 네모난 벽돌이 아주 

꼭 맞게 끼워져 있었는데, 어찌나 꼭 맞게 끼워져 있는지 벽과 

벽돌간의 경계선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화정은 조심스럽게 

그 벽돌을 빼 보았다. 스르륵,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벽돌은 

의외로 쉽게 빠졌다. 

누군가 몇 번 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소리도 없이 잘 빠지기는 힘들다. 여하튼, 벽돌을 

완전히 빼 본 화정은 종이 하나로 된 얇은 막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흙으로 벽을 완성한 후, 이 벽돌이 끼워 넣어질 

만한 공간만 뚫어놓고, 화정의 방과 붙어있는 옆방에는 종이를 

발라 숨긴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의 옆방에서는 얇은 종이 

하나만을 사이에 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옆방은...... 혹시 조운과 영각이 있는 방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이런 곳을 정식숙소로 준거지? 화정은 본능적으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채 그 벽돌구멍에 귀를 대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종이 하나만 사이에 둔 그 구멍을 통해서,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높은 억양이나 큰 목소리, 두 가지 요소 중 어떤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바로 옆에 있는 양 아주 또렷하게 대화가 

들렸다. 엿듣는 것은 나빠, 화정의 양심이 그렇게 타일렀지만 

어느덧 화정은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반동탁 연맹까지 참가했던 

공손찬이 갑자기 동탁의 말을 듣고 원소와의 다툼을 끝내다니." 

언짢은 억양으로 말을 이어가는 영각의 목소리가 먼저 귀를 

자극했다. 내용이야 그다지 신통하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다는 것은 꽤나 

심리적인 재미가 쏠쏠한 법이라, 화정은 저도 모르게 귀를 

더 바짝 붙였다. 

"아무래도 사현과 사융이 형제이니......수상한 구석이 

많아. 공손찬님은 현재 안주하고 싶으신 모양일세. 이 이상의 

정복에도, 패권을 얻는 것도 관심이 없어. 그저 방어할 생각만 

하고 계시지. 이번에 동탁에게 사신을 보내는 연유도......" 

묵묵하지만 침울한 색이 섞인 조운의 목소리에는, 짙은 

실망과 옅은 분노가 뒤얽혀있었다. 차마 결말까지 말하지는 

않는 것을 보아, 어지간히 공손찬에 대해 실망이 큰 모양이었다. 

입을 다물어버린 듯한 조운에게 화정은 속으로 `궁금하잖아요! 

이유가 뭔데요?' 라고 중얼거리면서 불만을 품었다. 

그러고보니 그랬다. 공손찬은 현재 정복에 대해서는 뜻이 없는 

것 같았다. 활발하게 주변을 평정하고 기반을 닦아가던 그의 

행적이, 최근에는 거의 멈춰있었다. 다행히, 화정의 궁금증은 

영각의 목소리가 풀어주었다. 

".....그렇지. 아마 벼슬자리나 이름좋게 황제의 명으로 

얻어서 꿰차고 제후로서 행세만 하며 편히 지낼 생각을 하고 

있겠지. 만약 원소나 기타 세력이 친다고 해도 동탁은 엄청난 

후원자가 되어줄 가능성이 있으니까. 

황제의 어명을 빙자해서 원소에게 퇴각 명령을 내리거나, 손수 

군대를 보내 원소의 뒤통수를 친다면, 공손찬도 안심할 수 

있을테니. 애석하게도, 나는 공손찬이 그런 위인이리라고 

생각했었네. 자네가 공손찬을 모시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도 

바로 그 이유고. 어......" 

".......그만 이야기하세. 여기는 황성이야." 

조운은 더 말하려는 영각의 말을 가로막았다. 황성이다...... 

그렇구나. 조운의 황성이라는 한 마디에, 화정은 자신의 방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 곳인지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사신들이 오면 조운과 영각이 있는 방에 머물게 하면서 

화정이 있는 방에서 엿들으며 감시를 했던 것 같았다. 일종의 

도청이라고 할 수 있다. 

도청. 구시대의 도청이구나. 화정은 정치라는 것의 속성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조운의 황성이라는 말에 새삼 두려운 

점을 느낀 것은 화정 뿐은 아니었던 듯했다. 영각도 금세 입을 

다물었으니까. 한동안 두 사람, 아니 엿듣다가 멍해져서 귀를 

댄 채 가만히 있는 화정까지 합해서, 세 사람은 조용해져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영각의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최근에......소연(笑蓮)에 대한 소식을 얻었어." 

"......" 

"궁금하지 않나? 이건 자네에......" 

"영각." 

조운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평소답지 않게 매우 

조심스런 어조를 구사하는 영각도 이상했지만, 이상하게 

긴장한 듯한 조운의 무뚝뚝한 음성에 흥분 비슷한 떨림이 

담긴 것은 더더욱 이상했다. 화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연? 여자 이름같은데......? 여동생이라도 되나?' 

그렇다. 소연이라는 이름이 남자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말 그대로 활짝 핀 연꽃에 대해 소식을 얻었다고 

해석하기에는 이상하다.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낫다. 엿듣는 

덕에 별 이야기를 다 알게 되네? 더욱 호기심이 생긴 화정은 

다시 귀를 바싹 끌어당겼다. 조운의 말에 입을 다물었던 영각이 

말을 더 잇고 있었다. 

"어차피 자넨, 소연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잖아. 내 말이 

틀린가?" 

"지난 일이야." 

조운은 급하게 대화를 자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화정은 

그제야 그 소연이란 여자가 적어도 여동생이나 가족, 뭐 이런 

관계는 아닐 거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었다. 혹시 애인이나 

부인일까? 화정은 속으로 `아영아, 조운은 애인이 있나봐.'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런 냉혈한이 애인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의외의 이야기라, 계속 엿듣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자룡, 내 이야기 잘 들어. 소연 때문에 그 긴 세월을 

괴로워했으면서 앞으로도 홀로 지낼 것을 고집하는 건, 자네 

스스로에게도 잔인한 일이......." 

"화정, 그만 엿듣지." 

`어머, 조운이 그 정도로 사랑하는 여자였어?' 하는 생각으로 

놀라고 있던 화정은 곧 이어진 화가 난 목소리에 뜨끔하면서 

귀를 약간 뗐다. 영각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정은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으면서 벽에서 몸을 떼고는 부은 얼굴로 

다시 벽돌을 끼워넣었다. 탁, 하고 몸을 신경질적으로 침대에 

눕혔다. 

정말 드물게 언성이 높았던 조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뭔가, 들키기 싫어하는 것을 들킨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여하튼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엿듣다 들킨 것이 무안했고 

`저 나쁜 놈, 좀 모르면 어디가 덧나나!' 하는 부아도 

치밀었지만, 그보다 소연이란 여자에 대해 궁금해졌다.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저 얼굴에 여태 애인하나 안 사귀고 

결혼도 안 한 것을 보면. 

그리고 영각의 말을 정리해보면 그 여자 때문에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 같은데......말도 안돼, 세월이 지나면 

사랑이고 뭐고 다 없어지는 거라구. 화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아주 주의해서 들어야 알만큼 작은 소리를 내면서 기척이 

사라졌다. 뚫어져라 벽 쪽을 보고있던 영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저 아이가 듣고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자넨 

잘도 알아채는군?" 

조운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도 처음부터 알던 것은 

아니었다. 아마, 영각이 소연의 이야기를 해서, 급작스럽게 

신경이 예민해진 바람에 약간의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조운이 대답없이 벽쪽만 바라보고 있자, 영각이 화제를 바꾸었다. 

"이만 자도록 하게.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동탁이란 놈을 봐야 

할 지도 모르잖나?" 

조운은 목소리를 낮추어 주의를 주었다. 

"말조심해. 왜 공손찬의 사신인 우리를 이 방에 묵게 했겠나. 

옆방은 본래 감시방일세." 

조운의 말에 영각은 벽 쪽을 힐끗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감시방이라고? 아, 그럼 방금 화정이 엿들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늘 감시를 했던 모양이군?" 

"......그렇겠지." 

"허, 동탁같은 놈의 머리가 거기까지 굴러가나?" 

영각의 감탄아닌 감탄에, 조운은 빈정거렸다. 

"동탁이라기보다 이유란 놈이지. 화정이 저 방을 차지한 덕에 

자네와 내가 여기서 이렇게 동탁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셈이야." 

그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영각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둘 사이에선 대화가 끊어졌다. 검지로 턱을 문지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영각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서 관리놈이 저 방을 비우려고 안간힘을 썼군. 화정이 

저 방을 써야 한다고 자네가 말할 때 생난리를 치지 않던가. 

저런, 화정에게 고마워해야겠구먼. 어디를 통해 엿들은 것 

같던가?" 

"저곳." 

조운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 손가락을 따라 영각의 시선도 

옮겨갔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곳을 한참 살펴보았지만, 영각은 

쉽게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시선으로 벽을 더듬던 

영각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조운을 바라보았다. 

"화정이 불을 끈 상태이니 발견하기 어려울 걸세. 보통 불을 

끄고 벽에 귀를 대고 엿듣지. 이쪽에서는 종이로 막혀있지만, 저 

방에서는 돌 하나를 빼낼 수 있게 되어있어. 그 돌을 빼내면 그 

구멍은, 종이 하나만 가운데 두고 이 방과 저 방을 연결하고 

있는거지." 

영각의 얼굴에 기가 막히다는 빛이 떠올랐다. 

"대단하구먼! 자네는 어떻게 알았지?" 

"......아버지께서도 쓰시던 방법이니까." 

그 말에 영각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하기는, 영각은 

조운의 과거나 집안, 그리고 내부사정까지 모두 알고 있으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런 방법은 꽤 고위층의 

집안이면 모두 쓰는 것이니까. 다만, 매우 정교하여 알아채기 

힘들다. 그저 저런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만 가능할 뿐, 

있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쉽지않다. 

"그런데 화정은 어떻게 그 구멍을 눈치챘지?" 

영각의 질문에 조운은 짧게 답했다. 

"생각보다 눈썰미가 있는 아이야. 담사간인도 안된다는 

기괴한 점이 있지만."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 당연한 것일수도 있고......라고 

말하려던 조운은, 그냥 말을 삼켜버렸다. 화정은 영각에게 

자신이 이천 년 후의 세계에서 온 사람이란 사실을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였으니까. 예언서를 함께 알고 있으니, 영각도 

화정의 사정을 못 알아듣지는 않겠지만......여하튼 영각은 

사기에 감염되어있는 상태기도 했다. 

"불담사라......그것 참 기괴한 일이라니까.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는 아닌데. 오히려 영특하지 않나?" 

조운은 대충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나도 잘 모르겠네." 

조운의 흘려넣는 답변에도, 영각의 의문은 꼬리를 이었다. 

"갈수록 모르겠네. 그리고 그렇게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내가 그녀의 기(氣)를 못 알아채다니." 

"......" 

"참, 그리고 물어보려다가 잊고 있었군. 그때 그 낙뢰는 

어찌된건가? 자네는 그곳에서 있었잖아?" 

"......"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문 투성이다. 자신보다는 떨어지지만 

영각의 감지력도 절대 둔한 편이 아니다. 그런데 저렇게 얇은 

종이를 사이에 두었으면서도, 영각도 자신도 화정의 느낌이 

갑작스레 가까워져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화정은 기를 감출 줄 알 정도로 고수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희대의 

술사라던 사현도 구사할 수 없다는, 엄청난 낙뢰를 말 한 

마디로 일으켰다. 

"사현이라도 근처에 나타났었나?" 

당연히 그렇게 물어볼 거라고 짐작했었다. 영각은 화정이 

그 낙뢰를 일으킨 장본인이란 사실을 모르니까. 혹시, 화정이 

자신에게 속이는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쪽 세계에서 

넘어왔다는 사실 외에, 정확히 말하면 화정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무경미석을 지니고 있는 소녀, 이전의 신녀사건, 그리고 

낙뢰.......감지되지 않는 기, 지나칠 정도로 정순한 

기운......조운은 영각에게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까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영각이 사기를 완전히 떨치고, 좀더 온전한 이성을 지녔을 

때 이야기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조운은 영각의 대답을 

무시한 채 그냥 침상에 드러누웠다. 답답해하는 영각의 

음성이 귀를 때렸다. 

"이봐, 사현이라도 있었느냐니까? 그......" 

"이만 자는 것이 좋겠어." 

얼버무리는 조운의 뒤에서 영각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조운은 영각에게서 등을 돌린 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설마, 화정이 있었다던 세계는......단순히 이천 년 후가 

아니라, 선계(仙界)나 신계(神界)같은 곳은 아닐까? 

불담사라는 사실을 빼면 화정이 보인 현상들은 

대부분......정말 신녀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것들이었다! 

*******

"짐(朕)은 그대가 공손찬의 사신으로 승상을 보러 온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보다, 그대의 얼굴이 익은 

듯하구나......" 

"......망극하옵니다. 소신이 어찌 존귀한 용안(龍顔)을 

대했겠습니까. 처음이라 부족하옵니다." 

"그런가......" 

아직 어린 황제이지만 의젓한 태도와 총기가 넘치는 눈을 

지녔다. 열한 살에 불과하지만 알현을 전혀 어긋남 없이 잘 

치러내고 있었다. 조운도 알고 있었다. 황제는 분명, 자신을 

본 일이 있다. 그 때는 황제의 형이 되는 소제(小帝)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황궁에 자주 

들락거렸으니, 얼굴을 보았을 수 있다. 

특히 소연과의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부복(俯伏)하고 

있는 조운에게 황제는 뭔가 말을 더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곁에 서 있는 동탁이 어김없이 헛기침을 하여 말을 가로막았다. 

황제를 알현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형식이다. 

신하된 자로서,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온 사신이라 해도 

황제에게 먼저 보여서 형식을 차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동탁에게 황제의 의견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배불뚝이 동탁은 

그 정도 앉아있는 것도 힘이 들었는지 벌써부터 씩씩거리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바로 근처에 앉아 숨을 고르며 

헛기침만 하는 동탁을 힐끔힐끔 보면서 기죽은 표정을 했다. 

황제가 또다시 무어라 하려는데 동탁이 입을 열었다. 

"그래, 공손태수가 보낸 연유가 뭔가?" 

황제가 해야 할 질문까지 알아서 가로챈다. 내색할 수 

없었지만 내심 불쾌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표출해서는 

안된다. 대충, 작성한 문서대로 답했다. 

"태수께서는 폐하께 경의를 표하고 안부를 여쭙기 위해 

저를 보내셨사옵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 공손찬은 황제의 안부에는 관심이 없다. 

조운 자신이야 어찌되던 그것도 상관없다. 그저, 동탁에게 

아부하는 말 몇 마디를 바치기 위해 왔을 뿐이다. 어차피 

악명높은 동탁에게 사신으로 보낸다고 하면 아무도 사신으로 

가려 하지 않을 것이며, 번듯한 벼슬자리를 받고 동탁과 

동맹을 맺는다면 좋겠지만, 그리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결국, 잘되면 좋지만 안 되도 괜찮은 것이 현재 공손찬의 

입지였다. 그래서 지원금도 소액을 주고, 따로 함께 보내는 

사람도 없이 조운 하나만 달랑 보낸 것이었다. 어차피 눈 밖에 

난 죄수니까. 동탁은 조운이 목적을 대충 말하자마자 앞으로 

나섰다. 

"그럼 이만 알현을 끝내도록 하시오, 황상."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황제는 그 말에 반박도 

못했다. 황제는 뭔가 더 묻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동탁이 

목에 힘을 준 채 헛기침을 또 하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 황제의 모습이 더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황제는 개미만한 

목소리로 `알현을 마치겠소......'라고 중얼거렸다. 

조운은 동탁의 뒤에 시립해 서 있던 여포가 손짓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깐에는 이전에 약속한 것이 있으니, 동탁의 

비위에 거르스지 않게 도와주려는 것 같았다. 조운은 황제의 

장수를 빌고 만세를 외친 후 천천히 뒷걸음질쳐서 물러나왔다. 

알현실의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덩달아 마음도 

어두워졌다. 환관이 힐끔거리며 조운을 보더니 손짓을 했다. 

황제가 물러났으니 안으로 들어가보라는 소리다. 환관의 인도에 

따라 알현실에 다시 들어간 조운은 무엄하게 옥좌에 앉아있는 

동탁을 볼 수 있었다. 

"귀찮게 또 날을 정하자니 내가 바빠서 지금 일을 보려하네." 

걸걸하고 가래섞인 목소리다. 눈에는 누렇게 황달이 껴 있고 

지방이 잔뜩 낀 얼굴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말을 한마디 마칠 

때마다 가래낀 기침을 하며 씩씩거리고 있다. 조운은 속으로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건강이 많이 악화된 것 같았다. 

뒤에 서 있는 여포는 그 우락부락한 얼굴에 잔뜩 불만을 

담고 부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초선과 왕윤의 연환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틀림없이 

동탁은 지금도 어서 일을 마치고 들어가려는 생각만 하는 중이며, 

여포는 그런 동탁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조운은 공손찬이 작성해서 자신에게 주었던 문서를 바쳤다. 

곁에 서 있던 시중 하나가 조운이 내미는 문서를 집어 동탁에게 

건네었다. 문서를 읽기도 귀찮다는 듯 동탁이 손을 휘휘 젓자, 

시중은 결국 소리내어 문서를 읽었다. 

듣는 와중에도 동탁의 눈은 몇 번이나 감겼다 떴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며칠동안 미친 듯 색(色)을 탐했으니 

기운이 멀쩡할 리 없다. 대충, 문서 내용을 들은 동탁은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래, 공손태수가 내게 복종하고 동맹을 맺고 싶다는 

거로군?"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운은 찬찬하게 답했다. 동탁은 일그러진 표정을 짓더니 

여포를 바라보았다. 아마, 조운이 동탁에게 황제와 다른 말투를 

쓰는 것이 거슬렀던 모양이다. 낭패로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동탁이 방자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황제가 받는 어투로 

보고를 듣는 정도라는 것은 차마 몰랐다. 아마, 여포에게 

`저 건방진 놈을 처리해.' 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것이리라. 

하지만, 여포는 의외의 원군이 되어주었다. 

"아버지, 아직 어린놈이라 무엇을 모르나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넓은 속을 지니셨으니 애송이의 무지 정도는 

용서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도움을 준다더니, 정말 도움을 받게 되었다. 새삼 저 

우락부락한 사나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죽는 것이 

두렵다기보다, 동탁같은 놈에 의해 죽는다는 것이 더 싫었던 

조운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여포의 말에 동탁은 눈썹을 꿈틀,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봉선이 그렇게 말하는데 차마 해할 수는 없겠구나. 

내가 너무 속이 넓은 것이 탈이다. 그럼 응낙하겠네. 공손찬에게 

가까운 시일내에 정식 사신을 보내라 전하게. 그때 좋은 벼슬에 

제수해 주겠다 전해." 

조운이 거의 `떠보기 식'으로 보낸 사신임을 아는 듯했다. 

아니면, 그 꾀주머니 이유에게 뭔가 귀뜸을 듣고 왔거나. 

조운이 고개를 들자 여포가 뒤에서 다시 손짓을 해 주었다. 

황제에게 취하는 예와 같은 예를 취하라는 것 같았다. 

여포 역시 동탁을 불만스럽게 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초선의 사건으로 단단히 감정이 틀어져 있는 모양이지만, 

조운은 상관않고 장수를 빌고 천세까지 외친 후 - 동탁의 

방자함이 여기까지 갔을 지는 정말 몰랐다 - 알현장을 

빠져나왔다. 

과거에는 황제를 알현하기가 꽤 어려웠으며, 적어도 아무리 

타락했어도 황제가 황제다웠는데 지금은 반대다. 황제를 

알현하는 것이 훨씬 쉽고 동탁을 접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알현이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났군, 하며 조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일은 잘 끝났다. 북평으로 돌아간다면 이곳 

황성보다는 적어도 편할 것이다. 

환관에게 `승상의 친필문서는 숙소로 전달하겠소.' 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운은 복도까지 천천히 걸어나왔다. 졸래졸래 

따라나오던 환관은 복도에 닿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여기부터는 조운 스스로 숙소로 돌아가면 된다. 답답한 심정 

때문인지, 바람이 쐬고 싶어졌다. 조운은 정원을 통해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본궁이 아니라 별관인지라 그리 엄격하지 

않아서 산책이 허용된 정원도 꽤 넓었다. 

알현시간이 한시진도 지속되지 않아서, 아직 하늘이 밝았다. 

황제답지 않은 황제, 황제와 다름없는 승상. 현재 

황상이......그렇군, 2년만이다. 2년. 아무리 어리다지만 

황실 교육으로 자라난 황제가, 자신을 그 사이에 잊을 리 

없다. 초야조차 치르지 않은 후궁이었다지만 정식 

직위가 있었으니, 소연은 금상의 엄연한 형수다......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답답한 심정으로 멈추어섰는데,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살아있기만 하면 좋은 일도 생길 수 있어요. 

때가되면 초선님을 데려갈께요. 그러니까 그때까지......스스로 

목숨을 끊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어조와 다정한 격려였다. 호기심이 생긴 

조운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다가갔다. 역시, 화정이었다. 

그리고 화정과 나란히 손을 마주잡고 앉아있는 여자는...... 

초선이었다. 

곱게 단장하고 화사한 옷을 입고 있는 초선은 확실히, 

이전보다 훨씬 예뻐진 것같이 보였지만, 한참 울었는지 

화장이 뭉개져 있었다. 초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애써 웃고 

있었다. 그런 초선을 보면서 입을 열려던 화정이 시선을 

돌렸다. 

"어, 조운.......!" 

뜻밖에 자신이 나타나 무안했는지, 초선은 얼른 몸을 

일으키면서 고개를 숙였다. 여포의 심통난 얼굴과 과다한 

색탐(色耽)으로 인해 상해있던 동탁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전에 화정과 아영이 만들었던, 어깨와 팔이 훤히 비치는 

얇은 비단옷을 입고 있는 초선은 평범했다.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다. 이 여자가 정말 그 두 사람을, 눈에 띄도록 

이간질을 시킨 장본인인지 의심이 다 될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다. 

"알현이 벌써 끝났어요? 그럼 곧 동탁을 봐야겠군요?" 

동탁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초선은 죄지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미 끝났어. 이제 북평으로 돌아가도 괜찮겠지." 

자신의 대답에, 화정은 초선을 흘낏 보더니 약간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자룡! 오랜만인데 초선님께 인사도 안 해요?" 

조운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정이 많은 아이다. 무안해하고 있는 초선에게 신경써주는 것 

같았다. 조운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화정에게 

`오늘 저녁에 나갈 거니까 준비해.'라는 말만 가볍게 던진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 

아직도 초선의 젖은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허용된 범위 안에서는 산책도 할 수 있다고 설명을 들은 

화정은, 답답한데 잘 되었다 싶어서 뜰을 거니는 중이었다. 

뜰을 거닐던 화정은 몇 명 정도의 귀부인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는 장면을 발견했다. 귀부인들의 수다야, 이천 년대 

아줌마들의 수다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남편자랑과 자식자랑 

등 그런 것뿐이었지만, 화정이 귀부인들의 근처로 다가간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네들이 입고있는 옷이, 전부 화정과 아영이 초선에게 만들어 

준 그런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당나라 시대에야 

유행할 옷이 지금 유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화정은 귀부인들이 

자신들의 옷에 관한 자랑을 하는 것과, 궁중에 새로 들어온 

동승상의 미희(美姬)가 있는데 그녀의 옷이 어떻더라 하는 

등의 내용의 수다를 듣고, 연환계가 성공했다는 것을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초선에 대한 연민을 안은 채, 아영에게는 `네가 만든 옷이 

유행하고 있어!' 라고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전에 다툰 것 때문에 그럴까, 유달리 아영에게 미안했다. 

그런 말이라도 해서 아영에 대한 미안함을 풀고 싶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던 화정은 별안간 귀부인들이 

속닥거리면서 물러서는 장면을 보고는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녀 몇이 둘러싸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화정은 그녀가 

초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훨씬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지만,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초선 역시 단번에 화정을 

알아보고는 시녀들을 물리친 채 화정에게 달려왔다. 

어찌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영문을 묻기도 전에, 초선은 

화정의 앞에서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덥썩 안긴 채 머리를 파묻고 한참 우는 초선의 앞에서, 

화정은 난처하게 귀부인들과 시녀들을 훑어보았다. 시녀들이 

수군대더니 귀부인들을 물러나게 하고 저희들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었다. 초선은 주변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왕윤의 안부를 묻고는 신세한탄을 했다. 

동탁에게 몸을 바친 현재, 살고 싶지 않아서 답답한 심정에 

자결하려다가 발견되어서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했다. 비교적 덤덤하게 듣던 화정도 자결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에서 뭔가 뚝, 하고 끊기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초선의 신세가 가련했고, 죽고 싶어하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충분히 자결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화가 났다. 화가 난 나머지, 화정은 초선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고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울적한 표정만 하고 있던 초선은, 화정의 말이 길어지자 점차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화정에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빌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안심이 안되서, 화정은 초선에게 `살아만 있다면 이후에 

다시 만날 수도 있다. 가능하다면 초선님을 꼭 데리러 오겠다.' 

는 말까지 해 주며 죽지 말라는, 우스운 다짐까지 받아내던 

참이었다. 

그 참에, 조운이 나타났고 조운이 동탁을 보고 왔다는 

소리를 듣자 초선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앉아있더니, 

조운이 사라지자마자 개미만한 목소리로 `저 그럼 갈게요.' 

라고 중얼거리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가버렸다. 초선이 

나가자마자 시녀들은 초선의 뒤를 졸졸 따랐고 화정은 그런 

초선을 보면서 자신을 두고 금세 빠져나간 무안함보다는, 

가엾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초선의 뒷모습이 완전하게 사라지고 나서야 발길을 돌려 

숙소로 가던 화정은 울적해 있었다. 내내 눈물짓던 초선의 

얼굴은 초췌했다. 그러고보니 귀부인들의 수다 중 동탁의 

색탐에 관한 음란한 담소도 얼마정도 들었던 것 같았다. 

화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저렇게되는 경우도 있구나. 

그런데도 초선님은 왕윤님을 원망하기는커녕 걱정하고 

있어......' 

씁쓸했다. 그래도, 초선을 생각하면 가끔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나......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선이야, 그 유순하게 생긴 모습이나 평상시의 

다정하고 감성적인 태도를 보면 충분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가끔 의외의 인물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아까 사라진...... 

<소연 때문에 그 긴 세월을 괴로워했으면서 앞으로도 홀로 

지낼 것을 고집하는 건......> 

`정말 놀랐어. 그 무뚝뚝함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이 그런 

사람이었다니......' 

소연이라는 여자가 대체 누구기에 조운같은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고, 혼인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을까? 

화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잖아......억지로 생각을 끊어버린 화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까딱, 하고는 사라진 조운이 생각났다. 

까딱......인사......? 

`하, 그러고보니 최근에 특이한 일을 참 많이 발견하네...... 

그 인간이 웬일로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었지?' 

늘 옆에서 비꼬거나 도리어 무안을 주던 사람이, 그런 하찮은 

시비에 웬일로 반응을 않고 넘겼다. 그것도 화정의 요구에 

성의없게나마, 여하튼 응했다. 화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상관없는 일인데 왜 이렇게 마음을 쓰는걸까......그렇게 

불평하던 화정은 이번에는 영각을 발견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뭔가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초선님, 그 다음엔 조자룡......이번에는 영각이네. 

차례대로 만나는구나.' 

영각을 불러볼까, 생각하다가 지나치기로 했다. 영각은 

최근들어 지나칠 만큼 충돌이 잦았기 때문에, 별로 반갑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뭘 저렇게 살펴보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화정은 신경을 끄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영각은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시선을 돌린 영각의 

얼굴에 특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 과다하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대하기 싫다는 느낌과 마침 너 잘만났다, 

하는 느낌이 섞인 듯한...... 

"뭘 하고 있는거야? 왜 어슬렁거려?" 

짜증이 섞인 목소리다. 그러고보니, 분명 처음 만났을 때의 

영각과 태도가 틀리다. 이전의 영각은 자신에게 이렇게 짜증섞인 

목소리와 적의담긴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이 조금 

있는 듯 했는데 요즘의 영각은, 자신에게 짜증만 내는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의 행동이 영각의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조운과 영각과 셋이 지낼 때는 화정이 아무리 영각에게 신경질을 

내고 무어라 해도 다 농담으로 넘겨대던 태평한 사람이었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여기는 황성이라서 조금의 실수도 

엄청난 결과로 번질 수 있어!" 

왜 그럴까, 반감이 울컥, 치솟았다. 이제는 아주 죄인취급이다. 

꼭, 말썽만 몰고다닌다는 식의 말 같았다. 절로 반박이 나왔다. 

"답답해서 나온 것뿐이에요! 산책하는 것까지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요?!" 

에구, 엉겁결에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주저앉아있던 영각이 

벌떡 일어났다. 영각의 얼굴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화정은 순간, 불길한 예감같은 것이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영각은 성큼성큼 화정에게 다가섰다. 

"잔소리? 잔소리라고?!" 

트집을 잡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키가 자신보다 약간 클 뿐인 영각이, 이렇게 크게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잔소리 안 듣게 행동하는 것이 어때? 너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그렇게 남에게 불만만 터트리는 것이 네 

속성이야?!" 

화정은 뒷걸음질을 쳤다. 영각의 눈빛이 엄청나게 

날카로워진 것 같이 보였다. 돌연, 영각의 손에 들려진 것이 

눈에 띄었다. 이상하게 생긴 쇠막대였다. 그것도 꽤, 

묵직해 보이는...... 

"널 볼 때마다 난,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구!" 

"여, 영각......영각, 왜 그래요?" 

영각의 손이 번쩍 들렸다. 덩달아, 쇠막대가 빛을 반사했다. 

화정은 성급하게 돌아섰다. 달려야 했다. 순간, 화정의 뒤에서 

쇠막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다.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옆에 있던 화병이 깨어졌다. 화정은 

파랗게 질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몰랐다. 여기가 

황성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저, 도망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만이 화정을 휘어감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화정의 뒤로, 영각이 쫓아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단, 사라진지 얼마 안 된 조운의 모습만이 온통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그래, 어서 조운을 찾아야 해, 왜 하필 조운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현재로서는 조운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영각은 거의 화정의 뒤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경공이라는 것을 펼쳐서 쫓아오는 것 같다. 쇠막대의 느낌이 

가까워진 순간 화정은 숙소의 문을 발견하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쇠막대가 어깨를 내리쳤지만 아픔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책을 들고 서 있던 조운의 뒤로 숨으며 외쳤다. 

"조운! 영각이 이상해요!" 

처음에 문이 벌컥 열렸을 때는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보던 

조운은, 사태를 묻지 않고도 대충 파악했던 모양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정에게 쇠막대를 다시 내리치려는 영각을, 

조운이 들고있던 책을 말아쥐며 막아섰다. 화정은 뒤로 더 

물러섰다. 쇠막대를 책으로 막다니, 대단해, 하는 생각도 

없었다. 저 사람이 날 죽이려고 했어! 죽이려고 했어! 

그런 생각 뿐. 

"영각, 진정해!" 

"젠장, 막지마! 제발 막지 좀 말라고!" 

소리지르며 요동치는 영각의 한 팔을 붙들면서 조운이 

화정을 향해 외쳤다. 

"나가! 피해있어!" 

영각은 발버둥치면서 조운을 밀치려고 했지만 조운을 이기지는 

못했다. 화정은 서둘러서 조운의 등뒤를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문을 쾅, 닫고 문에 기대선 채 숨을 헐떡였다. 아직도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영각의 살기에 넘치는 눈이 아직도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문틈을 통해 이곳은 황성이라느니, 말썽이 

생기면 곤란하니 어서 빠져나가자는 조운의 말과, 조사할 것이 

너무 많으니 조금 더 머무르자느니, 주의하겠다느니 하는 

영각의 말이 어렴풋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화정은 영각에 대한 

분노만으로 머릿속을 온통 채워내고 있었다. 

*******

결국 일행은 갈라져서 북평으로 행로를 택하게 되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영각을 지배하고 있는 사기의 주체를 

찾아내는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주체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각이 화정을 죽이려던 

사건은, 조운으로서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일이었다. 사기에 

의해, 영각의 화정에 대한 반감이 강해져가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죽이기까지 하랴, 하는 태만함도 조금은 있었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각과 화정을 떼어놓아야 

하는데, 아영과 화정 둘이서 가게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따로 나뉘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영각은 아영이 

곁에 있을 때에는 비교적 멀쩡한 것 같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로군......' 

조운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면서 곁에 서 있는 화정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마구간 옆에 앉아서 

쓰러져있던 것이 기억났다. 처음에는 잠이 든 줄 알고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불러보았는데 대답이 없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얗던 얼굴이, 하얗다못해 푸른 느낌이 

돌았다. 조운은 화정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털썩, 인형이 쓰러지듯, 아무 저항 없이 그녀는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유별난 거부감이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아 일으켜 보았다. 손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싸늘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운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을 덮고, 안아올렸다. 업자니 자신의 등에 매달릴 만한 

힘도 안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가벼운 그녀의 체중이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다급한 마음에 서둘러 그녀의 숙소로 데려갔던 기억이 났다. 

원인은 잘 모르지만 그녀 스스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주 있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이제야 생각났다. 늘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영수가 생각났다. 

하얀 새. 그 새 이름은 현량이라고 했었다. 여하튼, 그 영수가 

있었다면 분명히......그녀는 적어도, 자신이나 영각을 부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 지경으로 몸이 싸늘히 식도록 

영수를 쓰지 않은걸까? 

게다가 영수를 부르지 않았던 상태라면 그녀는, 영수에게 

자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혹시......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세계 사람이다. 그렇다면 

영수에 관해서 잘 모를 수도 있다. 신녀라면 그럴 리 

없겠지만...... 

"네 영수는 어떻게 되었지?" 

조운의 말에 화정은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눈을 

둥그렇게 뜨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조운은 역시, 하는 

생각을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허공 한 쪽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여......여기 있네요! 어머, 그러고보니 여태껏 내게도 

보이지 않았는데......어떻게 된 거지?" 

어이가 없었다. 화정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아까 가리킨 

허공 쪽을 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영수가 

설명해주는 모양이었다. 지식을 관장하는 영수 같았으니 

알아서 설명해 줄 것이다. 화정은 얼마간 중얼거리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보니 그때......현량에 대해서 기억만 했어도 

상황이 나아졌을텐데....."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조운이 생각한 내용을 

중얼거렸다. 영수에 대해서 아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셈이니 저 스스로 회상해보아도 한심해질 것이다. 

영수란, 주인과 마음이 통해야 한다. 주인이 영수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고 있으면 그 영수는 주인의 곁에 

다가올 수도 없고 주인에게 모습을 보일 수도 없으며, 

주인에게 전음도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영수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음의 원리와 비슷해서, 

특정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수가 주인에게 먼저 

말을 걸 수도 없다. 주인이 영수를 잊은 채 오래 지낸다면, 

영수는 소멸될 수도 있다. 

여하튼,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라 그런지 

화정이 방금 전 깨닫는 순간 화정의 영수가 근처로 돌아왔던 

모양이다.  이제 영수에 대해서 깨우치기도 했으니 됐다 

싶었다. 만약의 경우, 영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테니 

조금은 안전해질 것이었다. 어깨가 또 아픈지,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어깨에 손을 올리는 화정을 향해, 

조운은 입을 다시 열었다. 

"영각에 대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영각은 

현재 다른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상태야. 자신의 

의지대로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자신의 말에 화정이 눈을 치켜뜨면서 올려보았다. 맑고 

옅은 눈동자. 의문과 의심을 동시에 담은 모습이었다. 하긴, 

그렇게 당했는데 영각에 대한 감정이 고울 리는 없었다. 조운 

자신도 알게된 지 얼마 안되었으니 화정은 더더욱 알 리가 없다. 

조운은 의심을 가득 담은채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듯 올려다보고 

있는 화정을 향해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화정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돌변했다. 

"!" 

"......왜 그래?" 

조운의 질문에 화정이 외쳤다. 

"현량의 말이......이 근처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아영과 영각 같대요!"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혹시 영각이 아영마저......? 

조운은 화정을 향해 말했다. 

"현량에게 앞장서라고 해! 어서!" 

화정 역시 영각이 아영에게도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곳까지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화정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허공을 향해 또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조운은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았다. 

******* 

영각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으면서 애꿎은 뒤통수만 

벅벅 긁었다. 하긴, 이렇게 둘씩 갈라서서 길을 떠나야 하는 

이유로 `그냥 그렇게 하기로 결정되었어.'라는 한마디는, 너무 

빈약했다. 또 화정과 싸웠나요, 하고 묻는 아영에게 대충 

그렇다고 말했다. 사기에 조종되어 화정을 죽이려고 했다가 

실패해서, 그 바람에 조운이 억지로 갈라놓았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특히, 조운을 좋아하는 아영으로서는 화정과 조운이 또 같이 

간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저랑 조운이랑 

가고, 화정과 영각이 가면 안되나요, 이렇게 질문하고 

싶어하는 아영을, 영각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여하튼, 

영각은 그 이상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얌전한 성품의 아영은 더 따지지 않고 그냥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표정이 조금 굳은 것으로 보아, 또 화정과 

싸웠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영각은 

신경질적으로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제기랄! 황성에서는 그렇게 아프던 머리가 지금은 좀 낫네. 

대체 왜 그렇지? 사신이란 핑계를 대고 황성에 며칠정도만 

더 머물렀다면 그나마 낌새를 조금만 더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최근들어 풀리는 일이 없단 말이야!'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신경을 곤두세우던 영각은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하지만, 화정과 마주칠 때 느껴지던 그 두통과는 다른, 그런 

고통이었다. 화정과 마주칠 때 느껴지던 두통은 사기에 의한 

것이라면, 지금 느껴지는 두통은 뭔가......영각의 본능적인 

거부감에 의한 것이랄까. 

갑자기 멈추어서서 이마에 손을 댄 채 얼굴을 찡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영각이, 아영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았다. 

아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각은 폭발하는 기운을 느끼고 

아영에게 외쳤다. 

"내 곁으로 붙어! 어서!" 

이전에 사씨형제와 그 정체불명의 여자와 마주쳤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이었다. 영각은 뜻밖의 말에 얼어버린 아영을, 한쪽 

어깨를 감싸서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안정되지 못한 기운이 

점점 강해지면서, 영각의 머리 위를 덮쳤다. 영각은 아영을 

끌어안은 채, 오른발에 힘을 모아 땅을 걷어찼다. 몸이 허공에 

떠오르면서 왼쪽으로 피해졌다. 묵직한 느낌의 진공파가 

영각과 아영이 방금 있던 자리를 습격했다. 영각은 두통이 

심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소리쳤다. 

"어떤 놈이냐!" 

일부러 내공을 약간 집어넣어 울리도록 했다. 조운이 

근처에 있을 리는 없지만, 혹시 싶은 기대 때문이었다. 

혼자라면 도망치겠지만 아영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다. 

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조운과 화정은 일부러 여기서 꽤 

먼 길을 택했다. 이런 제기랄, 식은땀이 흘렀다. 

가늘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휙, 하고 하얀 인영이 

날아왔다. 영각과 아영의 바로 앞에 능숙한 자세로 착지한 

호리호리한 여자가 허리를 세웠다. 얼굴에 흰 가면을 쓴 

여자였다. 아영이 `혹시.....?' 라고 중얼거렸고, 영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의 심장을 파먹던 여자다. 가늘고 늘씬한 몸매, 

가면으로 가렸지만 아름다운 회색의 눈, 약간 걷어진 소매 

밖으로 드러난 유달리 흰 살결. 영각은 아영을 자신의 뒤로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여기까지 따라왔군!" 

그녀는 희고 가늘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누르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암시를 주었는데도 그깟 계집애 하나 못 

죽이다니, 쓸모가 없군요." 

목소리도 어김없다. 영각은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안돼. 왜 너 스스로를 죽이려고 하지?" 

여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 스스로라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여자는 양손을 합장한 채 주문을 외웠다. 영각은 습관적으로 

몸을 날렸으나...... 

`아차!' 

아영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푸른 구체를 보며 멍하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영각은 급히, 허공에서 몸을 낙하시켜 

여자의 얼굴을 발로 찼고,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도기로 만든 듯한 가면이 깨어졌고, 푸른 구체는 

아영에게서 방향을 틀었다. 아영의 곁에 있는 나무가 까맣게 

타버렸다. 뺨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자, 그 피를 닦으며 

일어나는 여자를 보면서 영각은 이를 갈았고, 아영은 

비명을 질렀다. 

"화정아!" 

똑같았다. 가면을 썼을 때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래도 

화정을 죽이려 하기에 혹시 했는데......벗겨보니 더더욱 

똑같았다. 영각은 자신과 조운의 의심을 버리게 하려고 화정 

자신을 죽이게 조종했을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쳐서 더더욱 

흥분했다. 

"역시, 너였군! 하지만 수단도 좋은데? 어떻게 조운같은 

놈을 따돌리고 여기 올......" 

"아영아!"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두 사람이 달려왔다. 

그쪽으로 눈길을 돌린 영각은 어안이벙벙해졌다. 화정과 

조운이었다. 어떻게 알아채고 왔지, 하는 의문따위는 접어두고 

일단 의아해졌다. 막 당도한 화정 역시 표정이 멍해졌다. 

"......나?" 

화정은 더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영각은 또다시 사기에 

의한 두통이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안돼, 하고 속으로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영각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서 옆의 여자가 일어났다. 여자는 피식 

웃으면서 한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으로 뭔가 흡수당하는 

느낌을 받으며 영각은 앞으로 나섰다. 제길, 이러기 싫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머릿속으로 여자의 말이 또 울렸다. 

<저 계집애를 죽여! 대신에 저 계집애의 몸을 훼손시켜서는 

안돼!> 

영각은 몸에 힘을 주어 멈추어 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제어를 떠난 몸이었다. 조운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화정을 뒤로 밀쳤다. 

"화정, 피해! 영각의 근처로 가서는 안돼." 

그렇게 말해주는 조운이 고마워야 하는데, 분노만 계속해서 

솟구쳤다. 의지와 다르게, 영각은 조운을 향해 한 팔을 

휘저으며 외쳤다. 

"비켜! 저 계집애를 죽여야 해!" 

"영각! 왜 그래요?!" 

아영의 외침소리가 들려왔지만, 영각의 한 손에는 이미 

자신의 무기인 비도가 쥐어져 있었다. 휘릭, 익숙한 손놀림과 

함께 비도는 조운을 향해 날아갔지만 조운은 이미 몸을 피하고 

영각의 아랫배를 발로 걷어참과 동시에, 한 팔로 단창을 

뽑아들고 있었다. 컥, 하고 영각은 피를 또다시 토하면서 

뒤로 물러섰고, 조운은 그 상태에서 엄청나게 빠른 동작으로 

여자에게 단창을 휘둘렀다. 

속보가 전문인 영각도 속수무책 당하는 속도인데, 그 여자 

따위가 피해낼 리가 없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렸지만 여자의 긴 머리칼은 조운의 단창에 잘려버렸다. 

어깨까지밖에 안 오게 되어버린 자신의 머리칼을 보며 여자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조운은 영각과 여자의 앞을 막아서면서 한 손을 퉁겼다. 

오랫동안 조운을 보아온 영각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피하려 했지만, 자신의 몸은 지금 제어를 벗어난 상태였다. 

지공탄이 혈도를 강타하자, 영각은 푹, 고꾸라졌다. 

조운은 동시에, 지공탄을 쏜 팔 외의 다른 팔로 창을 휘둘러 

여자를 공격했다. 여자는 사뿐,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 위로 

올라가 소매를 휘둘렀다. 옅은 연기가 주변으로 흩날렸다. 

영각은 의식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기침을 했다. 

의식이 어지러워지자 도리어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덕분에 혈도도 풀린 영각은 재빨리 손에 비도를 움켜쥐고, 

나무에서 내려와 조운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여자를 겨냥했다. 

여자는 스스로의 무예솜씨가 안 되는지라 아귀강시를 몇 

소환하여 조운의 주의를 흐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가 불리하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귀강시를 소환하다니, 사현 이외에 저 정도 술사가 있었나, 

하고 중얼거리며 영각은 여자의 목을 향해 비도를 날리고 몸을 

재빠르게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자룡! 그 여자 죽이지 마!" 

영각은 그렇게 외치면서 자신의 비도를 피한 여자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순간 영각은 또다시 뒤통수에 뜨끔한 

감각을 느끼면서 몸의 균형을 잠시 잃었다. 자신의 뒤에 

화정이 서 있었던 것이다. 욕이 저절로 나왔지만 화정을 닮은 

그 여자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여자가 한눈을 파는 틈을 놓치지 않고 조운은 창자루로 

여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묵직한 소리가 나면서 여자가 

쓰러지자 조운은 여자의 목에 창날을 가져다댔다. 여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조운을 올려다보자 영각은 여자의 

근처로 다가갔다. 

"넌 누구야?! 누군데 저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여자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화정과 똑같은 그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정말로 이슬을 머금은 꽃이 활짝 피어난 듯 

아름다웠다. 여태 이렇게 악독한 짓을 일삼은 여자인가, 싶을 

정도로 청초한 곳이 있었다. 

"아직 뭘 모르고 있군요. 당신은, 내게 조종되고 있는데 말야." 

여자가 손을 휘젓자 영각은 무의식적으로 조운을 공격해 

들어갔다. 조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손을 뻗쳐 손바닥으로 

영각을 후려치면서 다른 팔로 창날을 휘둘렀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피하려 했지만 하얀 목에는 이미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목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약간 빗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날려 반대편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녀가 

아귀강시 몇을 소환시켜 자신의 주변을 또다시 보호하는 것을 

본 조운이 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청백색의 빛이 요란하게 

번져나갔다. 영각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머릿속은 온통 희게 변해갔다. 

*******

"아악!" 

여자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엄청나게 빠른 

몸놀림과 아귀강시까지 자유자재로 소환하는 주술능력도 

의아했고 아까 여자가 발한 청백색의 기운도 좀 걸리기는 

했지만 일단 조운은 여자를 창자루로 후려갈겼다. 

근처의 아귀강시가 조운에게 덤벼들었으나, 조운은 검기맺은 

창날을 아귀강시의 심장에 정통으로 찔러넣었다. 아귀강시가 

참혹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다시 일어나려는 여자를 

조운이 창을 타원형으로 휘둘러 쓰러뜨리는 찰나에, 아영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조운은 동요하지 않고 일단 여자를 

한번 더 후려갈겨 완벽하게 기절시키고 빠른 속도로 여자의 

혈도를 짚었다. 

"......윽......!" 

"!" 

영각이 화정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고 있었다. 화정은 

빠져나오려고 바둥거리고 있었지만, 영각의 완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새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영각을 보면서 조운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기운을 모으고, 손바닥을 뒤집었다가 

다시 엎고는 영각을 향해 펼쳤다. 약한 장력을 날려서 영각의 

등을 쳤지만, 영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까 여자가 

발한 청백의 기운이 영각에게 더 강하게 암시를 내렸던 

것 같았다. 

결국, 이렇게 원거리에서는 해결이 안 되겠다 싶어서 몸을 

날리려는데, 아귀강시가 조운에게 덤벼들었다. 아귀강시들을 

다 해치운 줄 알았는데, 여자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아귀강시들을 소환하는 것 같았다. 벌써 다섯 

마리의 아귀강시가 덤비고 있었다. 저대로 놔두면 화정은 

질식해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대로, 조운은 단전에 기를 모으고 천천히 식도까지 

기를 끌어올렸다. 기를 폭발시켜 아귀강시들을 한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리 강맹한 초식은 아니지만 아귀강시 다섯 

정도는 쉽게 처리될 것이다. 기운을 표출시켜 폭파시키는 

순간, 아귀강시들이 나뒹굴며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퍽! 

"으윽!"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영각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소리를 

질렀고, 아영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영각과 아영의 사이에는 

꽤 커다란 돌덩어리가 떨어져 있었다. 아영이 영각을 내리친 

것 같았다. 화정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영각은 포기하지 않고 화정에게 덤벼들었다. 조운은 자신의 

단창을 던졌다. 

휙! 

단창이 영각과 화정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순간 영각이 

멈칫했고 조운은 몸을 날려 영각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나무에 

박힌 단창을 뽑아 화정의 앞을 막아섰다. 

"황호! 정신차리게!" 

영각의 눈동자는 하얗게 뒤집어져 있었다. 영각은 괴성을 

지르며 비도를 날렸다. 비도는 조운을 피해 뒤에 있는 화정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으나 조운은 그 비도를 단창을 휘둘러 

튕겨냈다. 아무래도, 암시를 건 주체인 여자를 죽이기 전에는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자가 입을 열어야 

한다. 화정을 닮은 저 모습이 아니더라도, 뭔가 이상했다. 

생각같아서는 빨리 죽여버리고 북평으로 돌아갔으면 좋겠군, 

하고 중얼거리던 조운의 머릿속에 번개같이 스치는 것이 

있었다. 

`쌍둥이!' 

그렇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이천 년 후에서 건너온 화정, 

그리고 아영. 만약 이 여자가 화정의 쌍둥이라면, 건너온 

객(客)의 존재는 세 명이 된다. 특히, 아영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화정은 분명 예사 사람은 아니다. 가끔 신녀로 

착각될 만큼, 어딘가 황당무계한 곳이 있다. 불담사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승천술, 낙뢰술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천하의 패권을 장악할 열쇠가 

될 만하지 않은가!' 

조운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화정의 앞을 다시 막아섰다. 

영각은 화정을 향해 초점없는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아직 

숨을 몰아쉬고 있는지 화정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만약, 만약에 정말로 화정이 그런 존재라면 더더욱 

보호해야 한다! 

영각이 이를 갈면서 덤벼드는 순간, 조운은 영각의 손목을 

정확하게 가격하여 비도를 떨어뜨리고 손을 마비시킨 후, 

창자루로 영각의 머리를 적절히 때려 기절시켰다. 화정을 

돌아보았다. 영각을 쏘아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경멸을 

담고있었다. 차갑지만 겁을 잔뜩 담은 눈동자. 

순간, 조운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저렇게 겁을 먹은 모습은 너무...... 

인간적이다. 예언서의 구절에 나타난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인간적이다...... 

"저 계집애를 내게 넘겨요! 그렇다면 당신들이 알고 

싶어하는 사실을 알려주겠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조운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해서 그런 제안을 하는 것 같았다. 엉겁결에 질문이 나왔다. 

"너와 저 아이, 쌍둥이인가?" 

여자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었다. 

"나와 저 여자아이가 예언의 쌍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뒤에서 여자와 비슷하지만, 좀더 가녀린 목소리가 외쳤다. 

"말도 안돼! 내게 쌍둥이가 있을 리 없어요!" 

그 말에 여자는 한 손을 들어 검지를 자신의 턱에 대며 피식, 

하고 웃었다. 

"그렇지. 내게도 쌍둥이 따위는 없거든. 난 이미, 천년을 

살아왔어. 천년 동안 없던 쌍둥이가 갑자기 생길 리는 

더더욱 없고." 

조운은 음성을 낮췄다. 

"네 정체는 뭐지?" 

여자가 가벼운 콧소리를 냈다. 기가 막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내 정체? 궁금한가요? 그렇다면 나도 묻죠. 당신은 누구기에 

나를 이렇게 가볍게 상대하죠? 아무리 내 몸이 불완전하다지만, 

그리고 무술은 모른다지만 나를 쉽게 상대하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적어도 너 따위에게 농락당할 무술은 아니지." 

여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한 손을 뻗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일단 저 계집애를 넘겨요! 내겐 저 아이의 

몸이 필요해요! 특히 저 아이는 내가 수집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몸이니까." 

수집? 어째서, 화정의 몸에 저렇게 집착하고 있는지 그저 

이상할 따름이었다. 

"몸이라니?" 

"내겐 몸이 필요해. 선술을 익혀서 불사(不死)는 얻었지만 

불행히도 불로(不老)는 얻지 못했어. 천년동안 몸을 옮겨 

살아왔거든. 그것도, 내게 어울릴 만한 아름답고 깨끗한 몸만." 

뒤에서 화정이 나직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화정의 목소리가 

물었다. 

"누구기에 그렇게 내게 집착하는데?" 

그녀는 팔짱을 끼면서 조운과 화정을 쏘아보았다. 놀랄 정도로 

화정과 똑같았다. 

"사람들은 나를 서시(西施)라고 불렀다." 

"......!" 

"서시?!" 

뒤에서 나직하게 소리치는 화정도 화정이었지만, 조운도 절로 

눈살이 찌푸러졌다. 서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고대 월국의 

전설적인 미녀, 오왕 부차를 멸망으로 몰아간 여자. 

"난, 최고의 미녀로 추앙받았어. 그리고 아무리 몸을 

옮겨다닌다고 해도 계속해서 미녀이고 싶고. 아직 몸을 못 

얻었으니 모습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지만, 곧 얻게 될거야." 

"터무니없는 소리 마라." 

조운의 말에 여자, 즉 서시가 한 손을 휘둘렀다. 주변을 

아귀강시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까처럼 하나 둘, 

셀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엄청난 수가 되어서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자가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너는 내 재주로 죽일 수 없지만 적어도, 저 계집애를 

보호할 수 없도록 정신없게 만든 후, 저 계집애를 죽일 

수는 있지." 

백에 달하는 아귀강시들이 험난한 몰골로 몰려들었다. 조운은 

약간 뒤로 물러서서 화정을 곁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기세로 몰려드는 아귀강시를 훑어보며, 한 손에는 

단창을 꽉 쥐고, 다른 한 팔로 화정의 어깨를 감싸안아 바짝 

껴안으면서 당부했다.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마. 내 곁에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너를 보호할 수 있어." 

화정의 몸이 가녀리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하지만 표정에는 

그 떨림을 담지 않고, 고개를 굳건하게 끄덕였다. 미안한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그녀의 떨림은 아귀강시들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자신에 대한 거부감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귀강시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두 사람을 향해 탁한 공기를 토해냈다. 

조운은 창을 움켜쥔 손에 기를 모으며 단창을 타원으로 휘둘렀다. 

막이 형성되며 강시가 내뿜은 기운을 튕겨냈다. 곁의 강시가 

동시에 화정을 향해 덤벼들자, 조운은 그녀를 껴안은 채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끄아아아!" 

또다른 아귀강시가 덤볐다. 아까 생성해낸 막이 아귀강시를 

퉁겨냈지만, 방어막도 아귀강시의 힘에 타격을 입은 듯, 두께가 

얇아졌다. 땅에 착지한 조운은 창을 수평으로 휘둘러 아귀강시 

넷을 베어냈다. 좀더 강맹한 초식을 사용하여 한번에 제압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내공을 다스리고 

안정시켜야 보다 상급초식을 사용할 수 있다. 

몇 십마리 정도되는 아귀강시들이 덤벼들자, 조운은 창에 

기를 흘려넣어 검기를 폭발시키고, 몸을 한바퀴 돌리며 팔을 

뻗은 채 창을 휘둘렀다. 주변을 포위하며 포위망을 좁혀오던 

아귀강시들이 일시에 쓰러졌지만, 조운은 멈추지 않고 두 번 

정도 더 몸과 동시에 창을 회전시키면서 강렬한 일직선 

찌르기를 구사했다. 

아귀강시 셋 정도가 창에 찔려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수가 남아있었다. 조운은 단창을 자신의 몸 앞에 수직으로 

세워들면서 기를 한번더 모았다. 어느정도 내공이 안정되어가는 

단계이기에, 좀더 상위의 창술을 써 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뭔가 온다!] 

[두렵다!] 

[안보인다! 대체 뭐......] 

[무서.......] 

아귀강시들이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물러나고 있었다. 조운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아귀강시들이 쫙 갈라서며 도망치는 

모양을 보았다. 서시가 눈썹을 찌푸리며 앙칼지게 외쳤다. 

"뭐하는 거냐! 어서 내 명령에 복종해!" 

아귀강시들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주변을 살피던 조운은, 아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들에게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영이 손을 뻗어 자신의 팔을 붙드는 순간, 조운은 기혈이 

뒤틀린 것을 깨달았다. 

******* 

  빠른 회전과 유연함을 동반한 몸놀림, 한 바퀴 몸을 돌리며 

엄청난 창놀림을 구사하는 조운은 참으로 늠름해보였다. 이전에 

TV에 나오던 무술시범이나 무술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장면들보다도 훨씬 현란했다. 와, 사람이 저렇게 창에다 

빛을 맺을 수도 있는 것이구나......한 팔은 화정을 끌어안고 

있느라 움직이지 못하고 나머지 한 팔로 싸울 따름인데도 

전혀 제약을 받지 않는 듯 매끄럽게 싸우고 있었다. 

정말 대단해, 하고 중얼거리던 아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화정을 닮은 여자는 

멀리 떨어저 팔만 휘젓고 있는데 어째서 조운은 저 여자를 

따라가 베지 않고 저곳에서 저렇게 쓸모없는 무예만 펼치고 

있는걸까? 

어느덧 회전을 끝내고 찌르기를 하면서 창을 수직으로 세워드는 

조운의 솜씨는 정말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그렇잖아도 찬 

눈매를 날카롭게 세우며 몸에서 푸른빛을 돌출시키고 있는 

조운을 보며 궁금해서 아영은 소리를 질렀다. 

"조운님! 저 여자를 먼저 공격하면 되잖아요! 왜 거기서 

쓸데없는 일을 하고 계세요?!" 

하지만 조운은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한번더 외치려던 

아영은 조운과 화정의 뒤에서 영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영각은 이상한 눈빛을 한 채 한 손에 작은칼을 들고 조운과 

화정의 뒤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 영각도 도와주려나보다, 

하고 생각하던 아영은 아까 영각이 화정의 목을 졸랐음을 

기억해냈다. 

위험해요, 하고 외쳤지만 또 안들리는 모양이다. 아영은 결국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자신과 두 사람의 거리가, 영각과 

두 사람 사이의 거리보다 짧으니 충분히 먼저 닿을 수 있었다. 

아영은 조운의, 창을 쥔 한 팔을 붙들었다. 

"뒤에 영각이 있어요!" 

그 찰나, 조운이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동시에 조운의 한 팔은 화정의 어깨를 놓쳤고, 여태껏 조운에게 

이끌려 다니던 화정이 비틀거리며 땅에 쓰러졌다. 아영으로서는 

영문 모를 일이었다. 조운이 갑자기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것도 그렇고, 조운이 잠깐 손을 놓은 것 정도로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듯 비틀거리는 화정도 그랬다. 원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끼어들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아영은, 모를 죄책감에 휩싸였다. 

조운이 한 팔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놓칠 뻔하던 창을 다시 

꼭 쥐어올렸다. 무사하구나, 반가운 심정으로 말을 걸려던 

아영은 돌연 엄청난 속도로 하얀 물체가 휙, 스쳐가는 

것을 깨달았다. 

"영각......!" 

아영은 절망스런 심정으로 외쳤다. 그 사이에 영각은 화정을 

쉽게 낚아채어 여자에게 화정을 넘기는 중이었다. 여자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어댔다. 

"호호, 결국 이렇게 되는거지. 아가씨, 쓸만한데? 내 

아귀강시들을 도망치게 한 건 용서해주겠어. 둘다 여기로 

다가오지마!" 

화정은 이내 얼굴을 찡그리면서 여자를 노려보았다. 

"서시, 무엇 때문에 나를 집요하게 노려왔지?" 

아영은 서시란 말에 멈칫했다. 서시? 그거 미인의 대명사 

아닌가? 정말 그 서시일까? 여자는 화정의 목에 양손을 

가져다댔다. 

"내가 말했지. 난 예쁘고 깨끗한 몸이 필요해. 계집애들은 

좀 예쁘다 싶으면 함부로 몸을 더럽히거든. 그래서 곤란했는데, 

네가 내 눈에 띄어준 거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쏘아보는 화정의 목을, 서시가 

붙들었다. 목을 졸라 죽일 셈인 모양이었다. 화정이 몸을 

비틀면서 서시의 손목을 탁, 하고 쳐냈다. 의외로, 화정의 

힘이 꽤 셌는지 서시는 비명을 지르면서 손을 뗐다. 서시가 

영각의 칼을 빼앗아 화정에게 들이댔다. 

"가만히 있어!" 

그러면서 서시는 화정의 뺨에 칼을 들이댔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이 예쁜 얼굴에 상처나기 싫으면 말야. 곧 끝나." 

아영은 발을 동동 구를 따름이었다. 여자에게 있어서 얼굴의 

칼자국은 치명타다. 특히, 화정처럼 예쁜 얼굴은 

더더욱......그건 아영의 생각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시와 아영의 생각일 따름이었다. 화정은 되려 얼음장같이 

찬 얼굴로 서시를 쏘아보았다. 

"절대, 네 생각대로는 안될걸." 

화정의 말에 서시조차도 얼었나보다. 먼 곳에서 보는 

아영까지 얼 정도로 찬 모습이었다. 화정의 모습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벨려면 베. 난 상관없어. 넌, 

절대로 내게 상처를 내지 못해. 설령 낸다고 해도 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 태연자약하면서, 상대의 뜻대로 

절대 휘둘리지 않는 모습. 

그렇게 찬 표정에는 마치 서리가 껴 있는 것 같았다. 

도리어 당황한 서시가 얼굴을 찌푸리며 칼을 든 손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뭔가, 공중의 안 보이는 힘이 서시의 

손목을 내리친 듯, 서시가 칼을 떨어뜨리면서 손목을 

감싸쥐었다. 이번에는 얼굴부분을 맞았는지, 

서시가 왼 뺨을 감싸쥐었고, 곧 이어 서시는 뒤로 

물러서다가 뭔가에 떠밀려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얼떨떨해진 아영은 화정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의아한 장면을 

발견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아주 예쁜 목걸이가 

붉은 빛을 발한 채 화정의 손 사이에서 떠 있었다. 목걸이의 

보석은 찬란한 빛을 발하며 서시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아앗!" 

뭐하는 거지, 하고 중얼거리던 아영은 뒤에서 조운이 갑자기 

떠미는 통에, 짧은 비명만 남긴 채 서시의 바로 근처까지 

밀려왔다. 조운의 힘은 보통이 아니라서 그런지, 가볍게, 

마치 날 듯 서시의 근처로 온 것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서시의 행동이었다. 

"꺄아아아아!" 

자신이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서시는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으며, 멍하니 넋이 나간 듯 서시의 옆만 지키던 영각은 

그런 서시를 공격했다. 서시가 뒤로 물러서 영각의 공격을 

피하는 순간, 조운이 몸을 날려 아영과 화정, 영각의 

근처에 착지했다. 

"영각, 아영의 근처에서 떨어지지 말게!" 

알 수 없는 의미의 말만 내뱉은 조운은 한 팔은 뒷짐지고, 

나머지 단창을 든 한 팔만 휘둘러 서시를 공격해 들어갔다. 

서시는 몸을 파르르 떨면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 

기승스럽던 태도도 어디로 갔는지 바르르 떨고만 있더니 조운의 

창자루에 거세게 맞고는 털썩, 땅에 쓰러져 누웠다. 

그리고 주변의 안보이는 힘들이 마구 때리는 듯, 서시의 온 

몸에는 찰과상이 늘어갔으며, 심지어 서시의 팔뚝은 물어뜯긴 

듯이 흐물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끊이지 않았다. 시꺼먼 

단발머리칼이 물에 잠겨서 염색이 빠지듯 서서히 연한 

갈색으로 변했다. 

"승천시켜!" 

그렇게 외치는 조운에게 화정이 대꾸했다. 

"틀렸어요! 서시의 원령은 내게 보이지 않아요!" 

"조금만 기다려!" 

잘 모르겠지만 서시의 원령이 이 시체에 씌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아영은 누운 시체를 발로 차 

보았다. 시체가 뒤집어지자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입을 막았다. 얼굴이 온통 썩어있었고 악취가 강하게 

풍겨나왔다. 얼굴 외에 온 몸이 썩어있는 것을 보아, 죽은 

지 오래된 모양이다. 

조금 후에 화정이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작게 신음을 토했다. 

아직도 얼굴을 가끔 찡그리는 것을 보아, 조운은 아까 입에서 

피를 흘린 그 타격이 남아있는 듯했고, 영각도 비교적 제 

표정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화정이 

또다시 신음을 토하면서 무어라고 중얼거리자, 조운이 

손바닥을 화정의 등에 댔다. 

푸른빛이 조운의 몸에서 일어나면서 손바닥을 통해 화정에게 

빨려들어가듯 이동하고 있었다. 신기했지만,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서시의 원령이 원체 강해서 아직 화정의 힘으로는 안돼. 

조운이 돕고 있는거야. 아영은 원령이나 아귀강시를 볼 수 

없으니까 이해가 되지 않을걸." 

영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진땀을 흘리면서, 하지만 냉랭한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화정. 멍하니 있는 자신. 똑같이 이천 년대 사람이지만 

정말 비교되는 것 같았다. 

아영은 우울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쁜 얼굴, 

못생긴 얼굴. 그 무시무시한 여자의 원령까지 다스리는 힘, 

그저 구경만 하는 무력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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