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2화 (2/52)

1.방문객(들).

행성 어스EARTH에는 아직도 휴먼 레이스들이 살고 있었다.

수많은 휴먼 레이스들이 용병으로, 혹은 비전투원으로, 아니면 망명과

이민으로 행성 어스를 떠나간지도 어스 시간으로 벌써 1000년이 다 되어

간다. 1000년이라고 하면 어스의 단위로 10세기. 행성 어스가 태양을

1000바퀴 돌아갔다는 말이다. 세대로 따지면 3, 40세대가 지나간 셈이 된

다. 그 사이 행성 어스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대중매체와 네

트워크가 사라진 1000년은 1000년 전의 기억을 전설과 신화의 세계로 인

식하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저녁 노을이 서편으로 지고 있었다.

사막의 노을은 서서히 벌판을 붉게 물들여 간다. 일터에 있던 휴먼 레

이스들은 이제 곧 찾아올 어둠을 피해 하나 둘 집으로 돌어가고, 밤을

지배하는 괴물들이 고개를 내민다. 긴 혀를 내두르며 먹을 것을 찾아 헤

매는 리자드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 어린 휴먼 레이스들을 잡아먹고, 파

이슨들이 길 잃은 여행자들의 발목을 물어 사막의 모래 속으로 끌고 들

어간다. 물론 이런 괴물은 '상상력'이라고 불린다. 인류가 만들어 낸 최강

의 괴물.

올 해 어스 식 나이로 열 여섯 살이 되는 메이런은 동갑내기 친구 아

이라와 함께 마을 어귀의 망루에서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런은 어스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두 발로 걸어다니고 양손

을 쓰는 휴먼 레이스 중 하나였다. 특별히 뛰어난 점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모자랄 것도 없었다. 단검이나 장검을 쓰는 데에도 특

출한 능력이 없었고, 셈이나 이윤에 민감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외계어

에 능통하거나 지식을 쌓는 데에도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다시 말해 메

이런은 경비대원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거나 학자가 되기 쉽지 않은 휴먼

레이스였다. 이 말은 결국 메이런이 열 여섯 살, 성인이 되는 해에 농사

꾼이 되는 일 말고는 딱히 할만한 게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반면 아이라는 모든 일에 재주가 있었다. 여자아이였지만 단검과 장검,

스피어를 다루는 데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계산 능력도

남보다 뛰어났다. 아이라는 메이런과는 달리 무엇을 해도 성공할 수 있

을 것처럼 보였다.

이런 둘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이곳 망루에서 노

을을 보는 일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같이 이곳에서 노을을 바라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

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부모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외출을 할 수 있을 때부터 둘은 이곳에서 저녁마다 만나곤 했었다.

그렇다고 딱히 두 사람이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망루에 앉아 잡담을

하며 노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어스가 무슨 뜻인지 알아?"

아이라가 메이런에게 물었다.

"땅이라는 뜻이라고 배웠던 것 같아."

메이런은 힘없이 말했다. 메이런은 아이라가 뭔가를 물을 때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있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하는 법이 없었다.

"휴먼 레이스는 참 단순해. 행성 이름을 '땅'이라고 짓다니 말이야. 크

라이버스나 인슈, 슈거트리... 별 이름이 얼마나 많아?"

아이라는 수업 시간에 배웠던 수많은 행성 이름 중 몇을 대면서 말했

다.

"별 이름은 아마 별 만큼이나 많을 거야."

메이런은 아이라에게 퉁명스럽게 이렇게 내 쏘았다. 적당한 대답을 찾

기 어려우면 메이런은 항상 이런 식으로 비꼬곤 했다. 아이라는 그런 메

이런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아이라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 고민 많은 얼굴이다? 내일 면담이 걱정되는 거야?"

아이라가 물었다. 졸업을 앞둔 12학년 학생들에게 있어서 면담은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단 담임 선생에게 자신의 진로에 대해

묻고 그리고 대답하는 면담은, 직접적으로 진로와 관계가 있는 첫 번째

의식이었다.

"별로."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별로 인 것 같지 않았다.

"엄마는 뭐래?"

아이라가 물었다. 메이런은 이런 식으로 묻는 아이라가 싫었다. 아이라

는 뭐든지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메이런이 홀어머니 밑에서 큰다는 거

나 그래서 메이런에 대한 기대가 클 거라는 것, 모두 알고 있다는 투. 하

지만 그런 정도는 담임 선생도 알고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메이런은 아

이라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메이런은 아이라의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까 생각해 보

았다. 조용히 살다가 죽는 거야...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려다 그만 두었

다. 메이런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메이런은 그저 돌려서 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야 그냥 엄마지."

그리고 아이라가 뭐라고 더 묻기 전에 메이런은 먼저

"넌 시로 들어가겠지?"

하고 아이라에게 물었다. 말하자면 공격에 대한 역습이었던 것이다. 메

이런의 역습은 훌륭한 방어가 되었다. 아이라는 묻는 것을 멈추고 작은

목소리로 아마도... 하고 방어적인 자세로 돌아섰던 것이다.

메이런은 아이라가 항상 부러웠다. 자신 보다 공부는 물론이고 운동도,

스피어도, 언어 학습 능력도 모두 뛰어났다. 메이런은 그런 아이라에게

경쟁심을 느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보였

을 뿐이었다.

"푸우순 시는 어떤 곳일까?"

메이런은 노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메이런의 목소리는 아이라에게

묻는다기 보다는 그저 혼자 중얼거리는 푸념에 가까웠다. 어차피 조용히

살다 죽을 테니까... 메이런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혹시 자신의 생각을 아

이라가 눈치 챘을 까봐 혼자 조바심을 내었다.

메이런의 질문에 아이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라 자신도 푸

우순 시가 어떤 곳인지 몰랐기 때문일 거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그

저 푸우순 시에서 나오는 트럭과 트럭에 담겨 있는 각종 생필품, 그리고

마을을 가끔 지나는 경비대의 모습에서 푸우순 시의 모습을 막연히 생각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메이런에게 푸우순 시가 어떤 곳인지 생각할 수 있는 단서가 아

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메이런의 어머니는 메이런에게 '푸우순 시는

저주받은 곳'이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메

이런은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저기 봐."

아이라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붉은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대

지를 향해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셔틀이겠지."

메이런이 말했다. 외계에서 어스로 내려오는 셔틀의 모습은 아주 드물

지는 않게 보는 광경이었기 때문에 그리 신기할 것도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셔틀을 바라보는 아이라의 모습은 뭔가에 홀린 듯 했다.

"저 쪽으로 내리는 셔틀은 처음 보는 것 같네. 그래서 그러는 거야?"

"난 언젠가 셔틀을 탈 거야."

아이라가 말했다.

메이런은 아이라가 셔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싫었다. 메이런이

보기에 아이라는 분명 셔틀에 오를 수 있는 극소수의 휴먼 레이스 중 하

나였다. 하지만 메이런은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아니었다. 조용히 살

다가 죽을 인생...

"그래. 행성 어스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되어서 한 번 셔틀에 올라 봐.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메이런은 이렇게 말해서 아이라의 말을 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

나 역습이 방어를 대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라는 말을 멈추지 않

았다.

"우리 행성 어스는 근처 행성 사이에서 가장 위험한 접경 지역이야.

뭐, 그렇다고 해서 행성 어스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겠

지만, 그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야. 적어도 지금 내전 중인 만티드 레이

스는 어쩌면 휴먼 레이스한테 가장 중대한 위협이 될지도 몰라."

만티드 레이스에 대해서는 메이런도 수업시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티드 레이스가 어떻게 생겨먹었고, 뭘 먹고사는 지 따위는 정

년퇴직을 두 해 앞두고 있던 담임 선생인 잭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휴

먼 레이스에게 있어서 만티드 레이스는 대단한 위협인지 몰라도, 만티드

레이스에게 있어서 휴먼 레이스는 그저 근처에 있는 여러 레이스 중 하

나에 불과할 것이었다.

"선생님 말씀 그대로구나. 하지만 만티드 레이스의 모성(母星)은 여기

서 10만 광년이 넘어. 그리고 어스와 만티드 레이스의 모성을 잇는 가장

가까운 게이트도 어스에서 1만 광년이 넘고."

메이런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1만 광년은 휴먼 레이스가 가지고 있는

가장 빠른 셔틀로 100년이 넘게 걸리는 시간이었다. 1만 광년이라는 거

리가 만티드 레이스에게는 얼마정도의 거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

도 휴먼 레이스에게는 이동하는 데에 수 천년이 필요한 거리였다.

"1만 광년 이내에 있는 행성이 몇 개인줄 알아? 인간이 알고 있는 것

만 해도 1000개야, 1000개. 열려 있는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합치면

10000개가 넘는다구. 다시 말해서 휴먼 레이스가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 레이스는..."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했어. 100개가 넘는다고 말하려면 그만 둬."

메이런은 이런 종류의 지식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100개면 어떻고

10000개가 넘는 다면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만날

수 있는 다른 레이스는 없거나 있어도 한 두개도 정도일 것이었다. 마을

에서 다른 레이스를 만나 본 사람의 수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라라면, 똑똑하고 재능있는 아이라라면, 수 많은 레이스를 상대하면

서 살아갈 수 있겠지. 메이런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메이런, 너... 화났니?"

한참 동안 사이를 둔 다음 아이라가 한 말이었다.

"아니."

메이런이 말했다.

"그냥... 너하고 내가 다른 레이스처럼 느껴졌을 뿐이야."

메이런은 수줍은 듯한 음성으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메

이런은 알고 있었다. 아이라는 이제 푸우순 시로 가게 될 것이었고, 거기

에서 보다 넓은 세계를 맛보며 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달랐다. 아주 잘 된다고 해봐야 이 마을 유지 정도로 끝날 삶이었다. 혹

시라도 메이런이 푸우란 시에 들어가서 일하게 될 가능성은 아이라가 행

성 어스의 총대위원회의 위원이 될 가능성만큼이나 희박했다. 적어도 12

년 동안의 교육에서 증명된 메이런의 모습은 그랬다. 아이라는 그런 상

황을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아이라는 그저 조용히 노을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남았을까?"

아이라가 한참동안 할 말을 찾고 있는 사이, 메이런이 먼저 입을 열었

다.

"뭐가?"

아이라는 굳어진 분위기를 만회해보려는 듯, 과장되게 밝은 분위기로

웃으면서 메이런에게 물었다.

"여기서 너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

메이런의 말에 아이라의 얼굴이 굳었다. 아이라는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날카로운 것이 속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친구

로 지내온 메이런이었지만, 메이런 앞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처음

인 것 같았다. 슬픈 감정이라기에는 너무 잔잔했고, 동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뜨거운 감정이었다.

"미안해."

아이라가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에 메이런은 무슨 말이냐는 듯 아이라

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아이다는 달리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난 너하곤 달라. 여길 굳이 떠나야겠다는 마음도 없고, 그렇

다고 해서 꼭 마을에서 살겠다는 마음도 없고. 다만..."

메이런은 웃는 얼굴을 하고서 '너하고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

어' 덧붙이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런 말은 서로를 아프게 할뿐이라는 걸

메이런은 알고 있었다.

메이런은 아이라를 바라보았다.

아이라는 피부가 몹시 짙은 갈색을 한 휴먼 레이스였다. 고대에는 메

이런 같이 옅은 갈색 피부를 가진 휴먼 레이스가 아이라같이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휴먼 레이스를 차별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지만 메이런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날씨가 조금만 추워져도 쉽게 말라

갈라지는 메이런의 피부와는 달리 아이라와 비슷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향상 윤기가 흐르곤 했다.

어쩌면 메이런이 고대 휴먼 레이스들의 차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라의 외모 탓인지도 몰랐다. 짧고 단정한 아이라의 머리카락이나 맑

고 동그란, 그리고 웃을 때면 사라져 버리는 신비한 빛을 가진 눈동자,

혹은 가늘고 기다란 팔. 이런 것이 짙은 갈색 피부에 대한 차별을 납득

하지 못하게 하는지 몰랐다.

"다르다는 건 뭘까?"

메이런이 물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아이라에게 그 답을 얻고 싶은 심

정으로 물은 것이었지만, 아이라는 메이런의 질문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같지 않다는 거잖아."

아이라는 흘려버리듯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메이런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같지 않으면 나쁜 걸까?"

"...아닐 거야, 아마도."

아이라의 말은 자신이 없었다. 아이라는 어쩌면 그저 메이란이 자신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널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메이런이 말했다.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가끔 사람 마음을 읽는 것 같아."

아이라의 말은 진심이었다. 메이런은 가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한 대답도

있었고,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는 듯한 행동도 있었다.

"그냥 가끔이야."

그럴 때마다 메이런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그래. 가끔 뿐이지."

아이라도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메이런의 눈은 이제 먼 하늘을 향해 있었다. 하늘로 퍼져 올라가던 붉

은 기운은 이제 서서히 짙은 어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태양이 사라지

고 나면 공동의 삶도 사라지고, 암흑과 별, 전설과 신화가 지배하는 밤이

돌아온다. 그러면 휴먼 레이스는 공동의 삶을 위해 하루를 접고 눈을 감

고는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찬바람이야."

아이라가 말했다.

"응. 들어가야지."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고는 망루에서 먼저 내려갔다. 아이라는 잠시 멈

추어 서서 망루에서 마을과, 그리고 마을 너머로 보이고 있는 푸우순 시

를 바라보았다. 마을의 조명은 은은했지만 볼 폼이 없었고, 푸우순 시의

불빛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라의 시선은 망루 바로 옆에 지어진 작은 폐가에 머물렀다. 아무

도 살지 않는 이 폐가의 모습에서 아이라는 이곳에 남게 될 많은 동급생

들의 운명이 보이는 듯 했다.

메이런은 아이라가 멈추어 서서 내려오지 않고 있자, 아이라가 뭘 하

고 있는지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라는 푸우순 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런도 푸우순 시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돔 형태의 푸우순 시 외벽에 보이는 불빛은 비행 셔틀이나 여

객선을 위한 유도등이겠지만 메이런의 눈에는 그저 자신의 존재를 밤에

도 과시하고 싶어하는 도시의 허영처럼만 느껴졌다. 저주받은 도시... 메

이런은 문득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집에 가자."

메이런이 말했다. 아이라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천천히 망루

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여어! 친구들!"

내려오는 아이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메이런은 이 소리에 깜짝 놀

라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난 자리에는 스피어로 무장한 경비대원이 하

나 서 있었다.

"오늘도 망루에 올라갔니?"

경비대원은 얼굴에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아루밀이었다. 메이

런은 아루밀을 기억했다. 폐쇄된 망루에 올라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던

아루밀에게 메이런은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킨다'는 식의, 수업시간에

한다고 해도 낯뜨거워질 것 같은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오늘도 별 거 없었어요. 멀리 셔틀 하나가 보인 것 말고는."

메이런이 말했다.

"그래. 그 셔틀 때문에 위에서 아주 난리야. 전혀 모르는 레이스의 셔

틀인가봐."

아루밀은 이렇게 말하고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자! 학생들은 이제 집으로 들어가야지? 리자드와 파이슨은 경비대원

에게 맡겨주렴."

이렇게 말을 맺었다. 메이런은 비웃음을 참느라 몸을 비비꼬았다. 적어

도 10년은 이 망루에 올랐지만, 어른들이 말하는 리자드와 파이슨은 그

림자도 본 적이 없었다.

"예. 우린 착한 학생들이니까."

아이라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이렇게 말했다. 아루밀은 아이라의 말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전혀 못 알아들었는지 그저 허허거릴 뿐이었다.

"착한 아이는 마을을 지켜주는 경비대원을 경멸하지 않아."

돌아오는 길에 메이런이 말했다.

"난 경멸한 적 없어."

아이라가 말했다.

"그냥 좀 비웃어 줬을 뿐이야."

아이라의 말에 메이런은 '그건 분명 경멸이었어'하고 말해주려다가 그

만 두었다. 아이라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3 -

다음 날 아침, 메이런과 아이라는 면접 순서를 적어놓은 게시물 앞에

서 있었다.

"난 네 번째야."

아이라가 말했다. 아이라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난 스물 두 번째야. 어디 가서 한 숨 자고 와도 되겠다."

메이런은 이렇게 대답했다.

"뭐라고 말할 거야? 외교관?"

메이런이 아이라에게 물었다.

"넌?"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물었다.

"담임이 아마 싫어할 거야. 아무 것도 못 정했거든."

메이런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메이런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생각해두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셔틀 조종사라도 지망한다고 하지 그래?"

담임 선생인 잭은 셔틀 조종사 교관 생활을 하다가 사고로 한 쪽 눈을

잃었다. 그 사고의 책임을 지고 다른 도시에서 이곳 마을까지 좌천되었

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마. 안 그래도 고민인데. 하긴, 아이라. 넌 그런

고민은 없겠지? 능력 있는 사람은 좋겠어."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걸까?' 스스로 생

각해 보았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능력 있는 사람 좋겠다는 말은 메

이런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좋긴 뭐가 좋아. 푸우순 시 외곽 마을은 200개가 넘어."

아이라의 말은 그 중에서 푸우순 시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그 말은 메이런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메이

런은 지망하는 게 하나도 없었고 그것은 희박한 확률이나마 시로 들어가

게 될 가능성은 완전히 막혀있다는 뜻이었다.

"나도 잘 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잘하는 게 왜 없어?"

아이라는 얼른 메이런에게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은 하나 대봐, 하고

물으려다 그만 두었다. 아이라가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이

럴 때 보는 건 싫었기 때문이었다.

"나 먼저 들어가 볼 게."

아이라는 힘내라는 뜻으로 메이런의 등짝을 한 번 세차게 내려치고는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메이런은 게시판 앞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또

래들 사이에서 멍하니 그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라가 다시 나온 것은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 사이 열 명이 넘

는 12학년 학생들이 면담 교사를 만나고 다시 나왔다. 역시 시로 들어갈

아이는 없는 모양이었다. 담담한 표정. 실망한 표정. 기쁨을 과장하는 표

정. 마을에 남게 될 12학년 학생의 모습은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시에

들어가기를 희망했고, 또 시에 들어갈 길이 열린 12학년 학생의 모습과

는 달랐다. 아이라의 모습은 완전히 들뜬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이라

의 발걸음은 땅에 닿지 않는 것처럼 가벼워 보였고 어깨는 들려서 허공

을 나는 듯 했다.

"메이런, 메이런!"

아이라는 거의 폴짝폴짝 뛰다시피 메이런에게 다가왔다. 아이라의 손

에는 커다란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이거 보여? 추천서야. 내일 푸우순 시에서 올 사람한테 날 추천해 주

겠데."

아이라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평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경비대 일이지?"

메이런이 아이라에게 물었다. 순간 들떠있던 아이라는 잠시 동안 모든

행동을 멈추고 메이런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가끔이라니까."

메이런이 말했다. 아이라는 질린다는 듯 입을 벌리고는 메이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메이런은 물러서는 아이라를 향해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곤 이렇게

물었다. 벌써 시간은 점심이 훨씬 지나 있었다. 아이라는 대답 대신 추천

서를 흔들어 보였다.

"여기 서명란 보이지?"

추천서에는 서명란이 죽 이어져 있었다. 담임, 주임, 학과장, 서기, 도

서관장, 학장, 교장, 공증인...

"난 좀 특별한 경우라더라고. 경비대 일로 거의 내정되어 있는 모양이

야. 말하자면 추천 근무 같은 거지.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게 뭔 줄 알아?"

"보직이 벌써 결정 됐다는 거?"

메이런이 말하자 아이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가끔 네가 괴물같이 느끼질 때가 있어."

잠시 아무 말 없던 아이라는 한 참 후에야 이렇게 입을 열었다. 메이

런은 아이라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떨 때?"

"이럴 때. 꼭 내 마음을 읽는 것 같이 느껴진다니까."

"설마. 그냥 떠오르는 데로 말한 것 뿐이야. 그리고 그랬잖아. 아주 가

끔 뿐이라고."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그게 괴물이라면 자신은 괴

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이런! 메이런!"

담임 선생의 목소리가 교실 안에서 들려왔다. 메이런은 미간을 찌푸렸

다.

"하여간. 정말로 한 숨 자고 올 걸 그랬어. 이럴 때는 꼭 시간이 없다

니까."

메이런은 투덜거리는 투였다.

"너도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아이라가 말했다. 메이런은 아이라에게 부모님한테 기쁜 소식을 알려

줄 수 있으니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

다. 친구에게 괴물이라고 생각되는 건 하루 한 번이면 족했기 때문이었

다.

"어서 집으로 가 봐야지?"

메이런은 이렇게 아이라에게 부드럽게 말해 주었다. 아이라는 눈을 한

번 찡긋 하고는 집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메이런! 메이런!"

메이런은 작게 한숨을 토해내었다. 담임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무 말도 흐르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공기만

이 맴돌 뿐이었다.

"지망하는 게 뭐냐고 물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담임이 말했다. 담임의 왼 쪽 눈썹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

였다. 메이런은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담임은 이렇게 말하면 대충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아니, 모든 어른이

그랬다. 어차피 자신의 삶이 아닌 이상 신경 쓸 이유는 없다. 그건 자신

의 명을 재촉하는 일일뿐이다. 메이런은 이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 종류

의 말은 너무도 많이 들어왔던 것이다. 조용히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1년 동안 널 지켜봐 왔다."

담임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1년 동

안 담임을 지켜본 메이런이었지만 오늘 담임은 평소와는 달랐다.

"11년 동안 담임 선생이 열 한 번 바뀌었겠지. 그리고 그 동안 한 번

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들킨 적이 없다고 해야 겠군."

담임은 메이런을 바라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은 입을 꾹 다

물고 있었다.

"체육 시간이었다. 기억하나? 네 친구라고는 아이라 하나 뿐이라는 거,

잘 알고 있다. 아마 너한테는 꽤 소중한 사람이겠지. 그래서 실수했을 거

라고 생각한다."

메이런은 담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메이런. 넌 아이라한테 말했지. 좀 누워 있으라고. 그리고 나한테 와

서 아이라가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담임이 구체적으로 말하자 메이런은 그 날의 일이 기억 났다. 아이라

는 그날 따라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공을 아이라 쪽으로 던졌

고, 공을 피하지 못하고 어깨에 맞은 아이라는 공을 던진 녀석에게 무척

화를 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네 녀석 눈빛이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다고 생각했

다. 오래 전의 일이기는 했지만, 난 내 기억력을 한 번 테스트 해 보고

싶었다. 난 너한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아이라는 하나도 아픈 것 같지

않다고."

메이런은 이제 그 날 일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었다.

"네가 그랬다. 아이라는 생리중이라고. 거기다가 아이라의 어머니가 출

장중이라 돌봐 줄 사람도 없다고. 물론 아이라가 생리중이라는 걸 아는

건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출장중이라는 것도."

"그 날 아침에..."

"그래. 넌 너한테만은 이야기했다고 말하고 싶겠지."

잭은 이렇게 말하고는 메이런 쪽으로 한 순간 고개를 돌렸다. 메이런

은 잭의 매서운 눈초리에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업 시작 전에 나한테 이야기했었다. 아이라가 말이다. 그리고 수업

이 끝나고 나서 내가 물어 보았다. 누구한테 이야기했는지. 아이라는 아

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메이런은 자신의 심장 고동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이라가,

그 자존심 강한 아이라가 누군가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걸 말할 리가 없

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라가 착각 한 모양입니다. 아니면 그냥 저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잊었을 수도 있고요."

"글쎄. 정말 그럴까."

잭의 얼굴에는 웃음이 돌기 시작했다. 웃음을 짓는 잭은 마치 안면근

육에 경련이 일어난 사람의 일그러진 얼굴 같아 보였다.

"그 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었다. 내

가 널 지적하기 전에 네가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

었고, 너에게 화가 난 친구가 있으면 얼른 그 친구를 피하는 모습을 보

기도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난 널 의심했다."

"의심... 이라뇨? 저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메이런은 자신의 흥분상태를 감추기 위해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했

다. 하지만 메이런은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을 만큼 노련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래. 모를 수밖에 없지. 난 이렇게 창 밖을 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담임은 이렇게 말하다가 메이런을 노려보았다. 검은 색과 푸른 색 눈

동자가 메이런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메이런은 시선을 피해 돌아서고 싶

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다 조사해 봤다. 사람들은 내가 이제 곧 정년퇴직이라고 아무 일도

안 하는 줄 알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한다. 너희 아버지, 꽤 유명한

트랜서였더구나."

트랜서. 메이런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크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있을 때에는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

바로 트랜서...

"어떻게..."

"맞다. 쉽지는 않았다. 기록이 소멸되어서 찾는 데 애를 좀 썼다. 다행

히도 시에 남아있는 친구들 중에 몇몇이 너와 네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

었다. 하지만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더군. 트랜서의 능력은 유전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왼손잡이가 유전되지 않는 것처럼."

담임은 이렇게 말하면서 메이런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메이런은 고개

를 들어서 담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했지만, 담임은 너무 가

까운 곳까지 다가와서 담임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할

판이었다.

"내일 푸우순 시에서 사람들이 온다. 너 같은 능력자를 찾으러."

"전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메이런은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담임의 억센 손이 메

이런의 어깨에 올라왔다. 메이런은 담임의 손을 바라보았다. 셔틀 교관이

얼마나 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혀 있는 거

칠고 투박한 손이었다.

"나는 예전에 트랜서를 본 적이 있다. 뛰어난 트랜서는 상대의 의지에

상관없이 상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 트랜서는 내 생각을 읽어내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멀거나 혹은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있으면 말이다. 어쩌면 그리 뛰어난

트랜서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담임의 목소리는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전 트랜서가 아닙니다. 아니, 트랜서가 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도 없고요."

"그 판단은 내일 시에서 온 사람한테 맡기자."

담임은 이렇게 말하고는 서류에 뭔가를 적고는 메이런에게 내밀었다.

"서명해라."

메이런은 잠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거부한다면 최고 추방형까지 처해질 수 있다는 걸 상기시켜 주마. 그

게 내 의무니까."

메이런은 어쩔 수 없이 서류에 오른 손을 올렸다. 그러자 서류에 메리

언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메이런은 손바닥에 서류의 글씨들이 문신

처럼 새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잘했다. 물론 정말로 추방되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말해야 네

가 조금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담임이 말했다.

"스스로 생각하거라. 내가 협박을 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게다. 그리고

내일 면접관들 앞에서 아무 능력 없다고 말하면 그만 아닌가, 생각해도

좋을 거고."

메이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될 줄은 정말 몰랐던

메이런이었다. 사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

일지 몰랐다. 하지만 메이런은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인상만큼은 주고

싶지 않았다.

"특별히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부탁하지도 않겠습니다. 그저 시간 낭비

가 될 뿐이라고 말해 두고 싶을 뿐입니다."

메이런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그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

기 위한 말일뿐이었다.

"정말로 시간 낭비가 될지 안될지, 판단은 면접관들이 내릴 거다. 나는

그 판단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건 알지?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나가봐라. 상담해야 할 학생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까."

담임은 이렇게 말하고는 피곤한지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떨어뜨렸다.

메이런은 천천히 교실 밖을 나섰다. 어머니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협박받았다고 해야 하나? 또 면접관 앞에서는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아무 능력도 없다, 아마도 담임이 실수 한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해야 하

나?

그 날, 메이런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역시 어머니 앞에서 트

랜서라는 명칭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4 - (1/2)

다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메이런은 집에서 나와 천천히 망루를 향해 걸

음을 옮겼다.

마을의 장사꾼들은 천천히 짐을 챙기고 있었고, 농부들은 공동 농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메이런은 골목길로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막 마을에 단 하나뿐인 여행자 식당을 지날 때였다. 메이런은 여행자 식

당 앞에서 낯선 얼굴을 하나보았다. 여행자 식당을 이용하는 것은 푸우순

시에서 나온 경비대원이나 간부, 아니면 마을과 시를 오가는 연락원 정도

였다. 작은 마을에서 그 정도 얼굴은 다 기억할 수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낯선 얼굴의 방문객이 보인다

는 건 뭔가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하나의 징조 같은 것이었다.

낯선 얼굴은 몸집이 작은 사내였다. 사막을 가로질러 온 모양으로 사내

의 로브는 두건까지 온통 모래먼지투성이였다.

"어이. 젊은 친구."

사내가 메이런을 불러세웠다. 메이런은 젊은 친구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

다. 꼬마야, 라든가 이봐, 하고 부르는 것 보다 훨씬 듣기 좋은 말이었다.

메이런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장거리 여행이었는지 면도도 제대

로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을 경비대원들은 다 어디로 갔나?"

사내가 물었다. 메이런은 순순히 대답해 줄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아

무리 기분 좋은 말을 해 준다고 해도 낯선 이는 낯선 이일뿐이었다.

"전 메이런이라고 합니다. 12학년 학생이죠."

물론 메이런의 말뜻은 낯선 이에게 신분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내는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 듣는 모양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군. 묻기만 하면 자기이름부터 대니 말이야."

사내가 로브의 주름에 붙어 있는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그냥

지나쳐갈까 하다가 사내에게 한 마디 해 주어야 겠다 싶었다. 사내야 아무

뜻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젊은 친구라고 부른 것은 사내에게 행운인 셈이

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대지 않는

게 이상하다구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밝힐 용기가 없는 사람을

믿기는 힘든 일 아닐까요?"

메이런이 말하자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이런. 예의... 라는 거로군."

사내는 두 손을 앞에 모으고는 메이런에게 고개를 숙였다. 메이런은 지

나치게 정중해 보이는 인사법에 당황하면서 같이 고개를 숙였다.

"연방 수사관 라몬이라고 하네. 이 마을 경비 대원들을 좀 만나보고 싶

은데."

사내가 말했다. 메이런은 라몬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

았다. 체구는 작았지만 눈동자가 예리한 사내였다. 콧날은 오똑한 편이었고

이마와 눈 사이가 좁아서 언뜻 보기에 그리 인상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 골목길을 지나면 경비대 본부가 있어요."

"거기에 가면 볼 수 있나?"

"경비대장님은 지금 순찰중일 거예요. 당직 근무자 하나 둘 쯤은 남아

있겠죠."

"그렇구나. 그런데 나보고 신분증 보자는 소리는 안 하니?"

라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제가 보면 뭐 아나요? 연방수사관 신분증인지, 아니면 그냥 종이 쪼가

리인지."

메이런이 말하자 라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날 어떻게 믿니?"

"자신을 용감하게 밝히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죠."

메이런이 말하자 사내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 참 멋지구나. 앞으로 거짓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길 바라마."

라몬은 이렇게 말하고는 메이런이 말해 준 방향으로 걸어갔다. 메이런은

라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해는 이제 곧 사라질 것이고 다시 한 번 암흑과 별, 전설과 신화가 지배

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었다.

메이런은 망루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어서와."

망루에 먼저 올라와 있는 것은 아이라였다.

"너희 집도 아니면서 어서 오라고 하진 말아 줘."

"빨리 오라는 뜻이었어."

아이라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한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이제 곧 노을이 질 것이었다. 노을은 무척이

나 짧다. 하루 중에 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둘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침묵은 노을을 감상하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다.

우선 아이라는 메이런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신은 이제

면접관을 만나고 푸우순 시로 들어가게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메이런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메이런이 행여 상심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메이런은 자신에게 생긴 일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

다. 아마도 내일이면 아이라와 함께 시에서 온 면접관들을 만나보게 될 것

이었다.

"만약에 말이야,"

메이런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라는 노을에서 시선을 떼고 메이런

을 바라보았다.

"나도 너하고 함께 시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다면, 너 어떨 것 같아?"

"글쎄. 아마 기쁘겠지."

아이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떤 의도의 질문인지 알 수 없었던 것

이다.

"나하고 있게 되면... 기쁠 것 같아?"

"그게 아니라 네가 나하고 시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다면 나도 시에 들어

가서 일하게 된다는 말이니까. 내가 시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다면 기쁘겠

지, 아마도."

아이라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아이라는 메이런이 두 번째 질문을 던

졌을 때 메이런에게 뭔가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걸 눈치 챘던 것이다.

"나, 내일 면접 보게 됐어."

메이런은 이렇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기뻐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차피 면접을 본다고 해서 시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트

랜서의 능력. 아마도 면접관들은 메이런에게 그걸 요구할 것이었고 메이런

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 망루에서는 내

일 면접관을 만날 거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아이라와 불편하게 지내지 않

을 수 있을 테지. 메이런은 생각했다.

"그럴 줄 알았어."

아이라가 말했다. 메이런은 그럴 줄 알았다는 질문에 이렇게 되묻지 않

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혹시 초능력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냥 가끔씩이야."

아이라의 말에 메이런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랬잖아. 너도 잘 하는 게 있다고."

"글쎄. 내가 뭘 잘해서 뽑혔을까?"

"그야..."

아이라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서편에 걸린 해는 정말 금새 사라진다. 해가 항상 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다. 어느 사이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

라져 버렸고, 서편에는 해가 남기고 간 붉은 기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곧 그나마도 사라져 버리겠지.

"어이! 젊은 친구!"

망루 밑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런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참.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망루로 올라온 것은 라몬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여드름 자국이

남아있는 아루밀이 올라왔다.

"저 친구예요."

아루밀이 손가락으로 메이런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아루밀을

바라보았다. 혹시 체포하려고 온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루밀의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루밀의 표정은 돈을 주운 장소를

말하는 사람처럼 천진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나하고는 안면이 있어. 연방 수사관 라몬이네. 반가워."

"누구야? 인상이 더러운데?"

라몬이 메이런에게 인사말을 건네자 아이라가 귓속말로 메이런에게 속삭

였다.

"연방 수사관 라몬. 이 쪽은 아이라, 제 친구이자 동급생이에요."

메이런이 말했다.

"반갑구나, 아이라. 그 날 둘 다 같이 있었니?"

"예?"

라몬의 물음에 아이라와 메이런이 동시에 되물었다. 라몬은 이마를 탁

쳤다.

"이런. 수사관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미안하구나. 다시 묻지. 어제 너희

두 사람, 저 쪽 하늘에서 내려오는 셔틀을 보았다고 했다지? 여기 이 아루

밀이라는 친구한테 말이야."

"예."

메이런이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몇 가지 물어보려고 왔단다. 셔틀은 무슨 색으로 보였니?"

"붉은 색이었어요."

아이라가 대답했다.

아이라와 메이런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별 것도 아닌

셔틀 하나 본 걸 가지고 이렇게 캐묻다니.

"그래. 붉은 색이었구나."

라몬의 얼굴빛이 눈에 뜨이도록 어두워졌다.

"어떤 식으로 내려왔니? 곡선이었니? 아니면 직선? 직각으로 떨어졌니?"

"이런 식으로 쭉이요. 직선이었어요."

아이라가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가 바닥 쪽으로 죽 내리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라몬."

메이런이 라몬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없나요?"

메이런이 묻자 라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비밀이란다."

라몬이 대답했다.

그 때였다. 멀리서 자갈이 굴러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니, 어떻게 들으면 폭포수가 바위에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망루 위의

네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는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있는 하늘빛을 받아 붉게 피어오르

는 흙먼지가 보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운이 없구나."

라몬이 허리를 곧추세우면서 말했다.

"아루밀. 자네는 빨리 경비대원을 소집하게. 이 마을에도 비상 근무조가

편성되어 있겠지? 대장님 찾아서 비상 근무조 편성하시라고 해. 아주 빨

리."

라몬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

"나쁜 일이군요."

메이런이 말했다.

"그래. 아주 나쁜 일이란다."

"만티드 레이스... 그렇게 무서운 건가요?"

메이런이 묻자 라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아뇨."

메이런은 이렇게 잘라 말하면서 아이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라. 빨리 집으로 가. 급한 일이야. 나도 집으로..."

"그래. 기억났다."

라몬이 메이런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4 - (2/2)

"잭한테 들었어. 트랜서 능력자가 있다고. 12학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지. 이런. 이렇게 감이 둔해지다니. 수사관 자격 상실

이야."

"제가 보기엔 여기 이렇게 멍청하게 서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더

자격 상실 요건에 가까운 것 같아요."

메이런이 말했다. 라몬은 아직도 망루 위에 남아 있는 아루밀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덕분에 가뜩이나 좁은 라몬의 미간이 거의 달라붙는 듯

보였다.

"자네, 빨리 안가고 뭐하고 있나?"

"아, 예..."

아루밀은 이렇게 말하고는 스피어를 챙겨 얼른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너희는 어떻게 할거냐?"

"우리야 집으로 가야죠. 라몬 아저씨는요?"

"싸워야지."

라몬은 이렇게 말하면서 로브 품에서 금속뭉치를 끄집어내었다. 메이런

은 그것이 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라몬이 가지고 있는 것은 화약식 권총

이었다. 메이런은 경비대장이 권총을 차고 다니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

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은 경비대장의 권총은 굵고 투박한 모양이었던

것에 반해 라몬의 권총은 매우 짧고 날렵하게 생겼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라몬의 총은 경비대장의 총과는 달리 은빛이었다.

라몬은 권총을 손에 쥐고 천천히 망루 앞쪽으로 다가갔다. 흙먼지는 어

느 사이 꽤 가까운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빌어먹을. 피해!"

라몬이 소리쳤다. 다음 일은 거의 한 순간에 일어났다. 시커먼 망토를 두

른 것 같은 모양의 물체가 망루 위로 튀어 올랐고, 아이라가 비명을 지르

며 뒤로 물러섰고, 메이런도 깜짝 놀라면서 몸을 숙였고, 그와 거의 동시에

라몬의 권총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시커먼 물체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뭐, 뭐였죠?"

"따라와!"

라몬은 이렇게 소리쳤지만 세 사람이 망루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기회

는 사라져버렸다. 망루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밑둥을 지나갔어!"

라몬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아이라와 메이런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다음, 망루가 어느 정도 기울자 몸을 날려 망루 옆에 있는 폐가의 지붕으

로 뛰어내렸다. 메이런과 아이라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라몬의 뒤를 따라

그대로 폐가 지붕으로 몸을 날렸다.

폐가의 지붕은 세 사람은커녕 한 사람의 체중도 버티지 못했다. 처음 용

감하게 몸을 날렸던 라몬이 가장 먼저 지붕을 뚫고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뒤를 이어 메이런과 아이라가 떨어졌다. 아이라와 메이런은 폐가의 지붕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뛰지 않을 순 없었다. 라

몬이 지붕을 뚫고 집안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두 사람은 이

미 허공을 날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메이런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바닥에

어디에서 주워온 것인지는 몰라도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던 덕이었다.

"냄새 한 번 고약하군."

라몬이 일어나면서 인상을 쓰며 말했다.

"냄새보단 상황이 더 고약한데요."

메이런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는 고함소리와 폭음이 연이어 들

려오고 있었다.

"녀석들, 무장했어."

라몬이 쓰레기 더미에서 권총을 찾으면서 중얼거렸다. 아마도 떨어질 때

의 충격으로 놓친 모양이었다.

"우리 경비대도 무장했어요."

아이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이라는 냄새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스피어? 그걸론 어림없어."

"권총은 경비대장도 가지고 있다고요."

"아이라.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건 빔이야."

"빔?"

라몬은 아이라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쓰레기 더미에서 권총을 집어 올

렸다. 라몬은 권총을 몇 번 만지작거린 다음 자세를 바로 했다.

"이리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창문 쪽으로 몸을 옮기면서 라몬이 말했다. 그 뒤를 메이런과 아이라가

따랐다.

창 밖에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고통과 절규의 축제. 여기저기

서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마을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숙여!"

몸을 숙이며 낮은 소리로 라몬이 말했고 나머지 두 사람도 따라서 했다.

몸을 숙이기 전, 메이런은 한 순간 시커먼 존재를 보았다. 아까 망루위로

뛰어올랐던 물체보다 조금 작았지만, 분명 생명체임에 틀림없었다. 두 손은

낫모양으로 생겼고, 그 두 손으로 T자형의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메이런은 T자형의 끝 부분에서 불꽃이 생기는 걸 본 것 같았다.

"저게 만티드 레이스에요?"

"그래. 겹눈과 더듬이를 가진 괴물이다. 손에 뭘 들고 있는지 봤지?"

"뭔지는 모르겠어요."

"빔 무기다. 그 끝에서 강한 빛이 나와서 목표물을 태우지."

"권총처럼요?"

"그래. 비슷해. 그렇다고 해 두자."

라몬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폐가의 문이 부서지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라몬은 반사적으로 문 쪽으로 발사했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시커먼 물체

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젠장. 여길 벗어나야..."

라몬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두 만티드 레이스가 안으로 들어

온 것이었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만티드 레이스의 모습은 공포스

러운 것이었다. 얼굴은 역삼각형 모양이었고, 두개의 거대한 눈알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낫처럼 생긴 두 개의 손에는 예의 T자형 지팡이가

들려 있었고, 그 끝은 라몬을 겨냥하고 있었다.

라몬은 몸을 날리면서 다시 한 발을 쏘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두 명의 만

티드 레이스가 쓰러졌다.

"한 발에 둘?"

"한 발하고 스피어 하나야."

라몬의 혼잣말에 대답한 것은 잭이었다. 메이런은 12년 동안 교사의 모

습이 이렇게 반가워 본 적이 없었다. 잭은 초록색의 점액질을 잔뜩 뒤집어

쓴 꼴을 하고서 스피어를 들고 있었다. 스피어에도 핏물이 잔뜩 묻어 있었

다. 만티드 레이스의 피는 초록색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잭?"

라몬이 말했다.

"아루밀이 말해줬다. 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운이 좋았다."

"자네 스피어 솜씨는 그대로구만, 잭."

"스피어야 찌르면 그만이지, 라몬."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문득 잭이

생각보다 대단히 커 보였다.

"저, 두 분 말씀 나누시는 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 아닐까요?"

아이라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아이라를 바라보았다.

"도망치죠."

메이런이 이렇게 덧붙였다.

"같이 가지, 잭."

"난 지금 근무중이다. 비상 근무조 근무 중. 먼저 가라. 녀석들은 마을

중심으로 가고 있어. 그리로 가는 게 내 임무다. 그런데 녀석들이 원하는

게 뭔가, 라몬?"

"사실 그걸 조사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라몬이 권총에 총알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잭. 나도 같이 가겠어요."

메이런이 말했다. 잭은 고개를 갸웃했다.

"훈련받은 거 기억 안나? 빨리 피해."

"12년 동안 훈련받았어요. 스피어하고 단검."

메이런의 이 말에 잭은 미소를 지었다. 잭의 미소는 안면에 근육통이 생

긴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소였다.

"용기는 좋다. 그런데 그런 용기는 아껴두었다가 내년에 발휘해."

잭은 스피어를 고쳐 쥐면서 말했다.

"지금은 비상상황이에요, 잭. 한 사람이라도 더 돕는다면..."

"학생의 손을 빌려야 할만큼 급한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넌 내일

시에서 나오는 면접관을 만나야 한다. 넌 일개 학생이 아니라 시의 귀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하지만..."

"말싸움은 그만 두지. 라몬. 부탁하네."

"이 친구면 되겠어?"

라몬이 메이런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트랜서 하나를 지키는 거면 내 역할은 끝인 거냐고 묻잖아."

잭이 대답을 하지 않자 라몬이 이렇게 다시 물었다.

"물론. 우리 마을의 자치 경비는 연방경찰 손까지 빌려야 할만큼 허약하

지 않아."

라몬의 물음에 잭이 대꾸했다.

"뛰어!"

라몬은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메이런의 팔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아이

라도 그 뒤를 따랐다. 메이런은 잭과 라몬 사이에 눈길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을에는 어머니가 있어요! 도대체 어디로 피하자는 거야!"

팔을 붙잡혀 이끌려 가는 메이런이 소리쳤다.

라몬은 멈추어 섰다.

"여기가 없어지면 나는 갈 곳이 없어! 트랜서고 면접관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메이런이 라몬의 얼굴에 대고 소리질렀다.

"미안하다."

소리치고 있는 메이런에게 라몬은 이렇게 점잖게 말했다.

"저 쪽을 보거라."

라몬이 말했다. 메이런은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의 불길은 점점 더 치솟

고 있었고, 그 위로는 별을 향해 날아가는 영혼처럼 흐느끼듯 불티가 타오

르고 있었다. 그리고 메이런은 강한 충격을 목덜미에 받고는 그대로 앞으

로 고꾸라졌다. 라몬이 권총 손잡이로 메이런을 내려친 것이었다.

"아이라. 이 친구는 어쩌면 이 마을전체보다 소중할지 모를 존재야. 이해

해라."

라몬이 메이런은 들쳐업으면서 말했다.

"어디로 갈 건가요?"

아이라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질문을 하기로 했다.

"일단 마을을 벗어나면 될 거야. 녀석들이 마을 중심부로 향하고 있다는

건, 뭔지 몰라도 마을 안에 원하는 게 있을 거라는 이야기니까."

라몬이 말했고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마을 밖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불타는 마을과 신음소리

를 뒤로하고서.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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