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카운셀러.
쿨란의 사무실은 푸우순 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쿨란의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정확한 주소는 힐사이드 221번지였지만, 다들 시 외
곽이라고만 부를 뿐 주소까지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푸우순 시 외곽은, 대부분의 시 외곽이 그렇듯이, 빈민층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 도시 계획 용어로는
슬램가였고, 경찰 용어로는 우범지역이었다. 하지만 쿨란에게 있어서 이
곳은 최고의 일터였다. 언제나 일이 끊이지 않았고, 사무실 세도 쌌던 것
이다.
쿨란의 사무실은 시 외곽 중에서도 술집과 호텔, 도박장, 단층 가옥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힐사이드 221번지 3층 건물의 2층에 위치하고 있었
다. 건물 이름은 엠파이어. 고어로 왕국이라는 뜻이지만, 실체는 당장이
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이는 낡은 구식 건물에 불과했다.
한 때는 힐사이드 221번지 부근도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힐
사이드를 지켜주던 언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단층 주택가가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힐사이드는 서서히 몰락해 갔다. 그리고 힐사이드를 누군가
는 '헬사이드'라고 농담삼아 부르기 시작하면서, 힐사이드라는 이름은 그
저 '시 외곽'으로 바뀌어 버렸다.
쿨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 때 힐사이드라
는 이름을 붙여 준 언덕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빈민굴처럼 보이는 탁한
회색 빛의 낮은 건물들과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술집 간판만이 보일 뿐
이었다.
쿨란은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쿨란은 어깨가 좁
고 날렵해 보이는 사내였다. 체구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어딘가 날
렵하다는 인상을 풍기는 편이었고, 날카로운 눈빛과 깔끔하게 면도된 얼
굴, 주름 하나 없는 피부가 그런 인상을 굳혀주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이
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고 마흔이라고 해도 그런가보다 싶을 만큼 나이
에 대한 징후가 없었다.
쿨란은 시계를 보고 있었다. 시계는 고객과의 약속시간인 오전 10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데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크로거 씨."
쿨란은 책상 위에 있던 파일을 열면서 말했다. 파일에는 크로거라는
이름과 랩타일 레이스라는 종족명, 그리고 의뢰 내용에 대한 간략한 내
용이 적혀 있었다.
"쿨란. 다시... 만났습니다. 기쁩니다... 진짜."
크로거는 촉촉한 초록색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파충류였다. 고향별에
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휴먼 레이스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리 아름다운
외형은 아니었다. 톱니바퀴 같은 이빨과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 그리고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비어져 나오는 갈라진 혓바닥. 쿨란은 속으로 약
간의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앉으세요."
크로거는 꼬리를 말아서 앞으로 올린 다음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캡슐... 늦어져서... 시간 약속... 늦었습니다."
크로거의 휴먼 레이스 언어 구현 능력은 엉망이었다. 쿨란은 크로거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학의 모든 어휘를 동원해야
했다. 아마도 크로거는 캡슐이 늦어져서 약속 시간에 늦은 일을 미안하
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봉투 속에 잘 봉인되어 있는 편지를 꺼내었
다. 편지지는 초록색이었고, 봉인은 레이저 사인으로 되어 있었다.
"저, 의뢰... 했던 일... 성공... 연락...?"
"예. 그렇습니다."
쿨란은 편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크로거는 편지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크로거의 손바닥에서는 항상 점액질이 지나치게 많이 분비되고
있었다. 물론 휴먼 레이스가 보기에만 그런 것이겠지만.
"그런데... 그 휴먼 레이스... 트랜서..."
편지를 받아 들면서 크로거가 말했다.
"핑키를 말씀하시는 모양이로군요."
쿨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핑키는 쿨란과 함께 일했던 트랜서였다. 성격이 괴팍한 노처녀였지만,
실력만큼은 괜찮은 편이었다. 핑키와 함께 있으면 어떤 레이스도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쿨란은 이제 더 이상 핑키와 일
할 수 없었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 - 고."
쿨란은 이렇게 말해주었고, 크로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더 이상 자
세한 것을 물어 보기에 크로거의 휴먼 레이스 어 실력은 턱없이 모자란
모양이었다.
크로거가 손을 대자 편지는 뜯어졌다. 그리고 편지지 위로 크로거와
똑같이 생긴 랩타일 레이스의 3차원 영상이 나타났다. 그 3차원 영상 속
의 랩타일 레이스가 자신의 언어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되자 크로거는 입을 크게 벌리고는 침을 흘리기 시작했
다. 쿨란은 그것이 랩타일 레이스가 우는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랩
타일 레이스는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릴 때는 먹을
것을 먹기 위해 입을 벌릴 때뿐이다. 쿨란은 행성 어스에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쿨란은 침이 바닥에 떨어지도록 울고 있는 크로거를 보다가 휴지를 한
장 뜯어서 건네주려고 했다. 하지만 크로거의 침은 휴지로 닦아내기에는
너무 많았다. 쿨란은 결국 책상 밑에 떨어져 있던 걸레를 크로거에게 내
밀었다. 크로거는 걸레로 입 주변을 닦았다.
"미안... 합니다."
꽤 정확한 발음으로 크로거는 이렇게 말한 다음 한 참 동안 자신의 언
어로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한풀이인 모양이었다.
"그래요... 그렇군요. 정말 슬프시겠습니다."
쿨란은 대충 보조를 맞춰주면서 크로거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사실
말을 들어주고 있다기 보다는 말하는걸 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
는 말일 것이다.
쿨란은 랩타일 레이스의 말을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척
이나 지루하고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쿨란은 참을 성 있게 크로거의 말
에 귀를 기울였다.
걸레 두 개가 완전히 젖은 다음에야 크로거의 말은 끝이 났다. 쿨란은
진지한 표정으로 크로거의 입 앞에 손을 대었다. 크로거는 두 갈래로 갈
라진 혀로 쿨란의 손을 핥았다. 쿨란은 랩타일 레이스의 언어는 몰랐지
만 관습은 대충 알고 있었다. 랩타일 레이스는 상대의 혀에 손을 맡기는
것으로 위로의 뜻을 전한다.
"금."
쿨란은 더 이상 말하기 힘이 들어서 간략하게 이렇게 말했다. 크로거
는 쿨란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는지 눈을 몇 번 껌뻑이다가 결국 알아차
렸는지 준비해 온 가방에서 금덩이를 꺼내었다.
"고맙... 습니다."
크로거가 내민 것은 금괴 네 개였다. 어지간한 휴먼 레이스라면 함부
로 들고 다니기도 어려울 정도의 무게였지만 랩타일 레이스의 완력은 휴
먼 레이스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크로거는 한 번에 금괴 두 개씩
두 번에 걸쳐 금을 꺼내 쿨란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세 개?"
쿨란이 손가락 세 개를 펴면서 되물었다. 크로거는 금괴 세 개를 계약
금으로 걸었으니, 지금도 세 개만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랩타일 레이스... 감사. 표현. 표시. 표식."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크로거를 입구까지 안내해 주었다. 더 준다는
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하고 쿨란은 생각했다.
"다음... 소식."
크로거는 나가기 전에 쿨란에게 이렇게 물었다. 쿨란은 이 말이 아마
도 다음 건에 대한 이야기인가 보다 싶었다.
"기다리세요. 연락 드리죠."
쿨란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막 크로거가 사무실을
떠났을 때였다.
"또 사기치는 데 성공한 모양이군, 쿨란."
쿨란은 고개를 들어보았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강화 플라스
틱으로 만들어진 어깨 받침을 한 거구의 사내가 팔짱을 끼고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운셀러가 사기꾼이라면 경찰은 도둑놈이지, 타이론."
쿨란은 사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내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어깨를 으
쓱 하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런데 랩타일 레이스에게는 미소라는 개념이 없지 않아? 그런데 아
까 그 랩타일 레이스한테 미소를 짓던데. 무슨 뜻인지 받아들이지 못할
걸?"
"타이론.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할 수는 있어. 마찬가지로 제스
쳐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법이야."
쿨란은 타이론을 사무실 안으로 안내하면서 말했다.
타이론은 쿨란 보다 주먹 하나는 더 큰 키를 하고 있는 휴먼 레이스였
다. 타이론은 휴먼 레이스치고는 완력이 강한 편이어서 랩타일 레이스한
테는 안될지 몰라도 같은 휴먼 레이스라면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고 당
당하게 말하고 다니곤 했다. 과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옷소매 밖으
로 나와있는 타이론의 털투성이 팔뚝은 굵고 단단해 보였다. 얼굴은 원
시 휴먼 레이스를 연상시키는 험악한 인상이었고, 그 밑으로는 얼굴보다
두꺼운 목이 떡하니 얼굴을 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친구 어디서 본 것 같군."
"랩타일 레이스는 다 똑같이 생겼어."
"랩타일 레이스는 휴먼 레이스가 다 똑같이 생겼다고 하겠지. 미안하
지만 내 직업은 경찰관이라네."
"못 알아 본 걸로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알아. 알고 있다고. 아마 시의 높은 사람 친구겠지. 나도 소식 들었어.
랩타일 레이스 쪽 거부 하나가 우리 시에 투자를 한다는 소식."
"그 거부가 고향에서 추방당했다는 것도 들었나?"
"물론. 그래서 자신이 은하 연방 은행에 맡겨 둔 거액을 여기에 투자
하고 싶어한다는 소식도 들었지. 단 한가지 조건하에서 말이야."
"그래. 아내의 신병 인도지."
쿨란은 웃음을 지었는데, 타이론은 그 미소가 랩타일 레이스의 웃음
같이 느껴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다는 점만 다를 뿐.
"아내 소식을 전해 준 거겠군. 공식적으로 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
니니까 말이야. 내용이야 뻔하지. 전 몸 건강히 잘 있어요... 걱정하지 마
세요... 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사랑해요..."
타이론은 빈정거리는 투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식을 전해 주는 게 불법이라는 말인가?"
"아니. 그냥 해 본 소리일 뿐이야. 그런데 숨긴 건 뭔가? 쿨란이 비밀
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되거든."
"글쎄. 난 숨긴 게 없어. 그 랩타일 레이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걸."
쿨란은 시치미를 떼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친해도 경
찰은 경찰이었다. 경찰 앞에서 속내를 다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
다.
"하지만 병 때문에 행성간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
어쩌면 그 거부의 아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쿨란이라면
그런 내용쯤은 미리 확인을 하고 다 삭제해 두었겠지. 시에서 미리 알아
서 부탁했을지도 모르고."
"난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 그런 일은 불법이야. 타종족의 서신에 붙어
있는 레이저 봉인을 뜯는 것도 불법이고."
"맞아. 하지만 빈민층에서 수사관 일을 하다 보면 듣는 일이 많지. 여기
뒷골목의 봉인 조작 기술자한테 내가 들은 이야기를 해 줄까?"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내 변호사를 먼저 부르게."
쿨란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타이론은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 했다.
"걱정 말게. 자네를 적으로 두어서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아군으로 둔다고 해도 마음놓을 수 있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용건은
뭔가?"
"좋은 소식 두 개를 가지고 왔네. 어떤 것 먼저 듣고 싶나, 쿨란?"
타이론이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아주 좋은 소식부터 말해 줘."
쿨란은 의뢰인의 침으로 푹 젖은 걸레를 쓰레기통에 집어넣고는 휴지
로 손을 쓱쓱 닦아 내면서 대답했다.
"먼저 핑키 소식이야. 범인을 잡았어."
타이론이 말했다.
"그래? 죽은 핑키가 좋아하겠군. 누구였어?"
"랩타일 레이스였네. 말해도 누군지는 모를 테지만. 자네 고객이 아니
었어. 게다가 랩타일 레이스는 다 똑같이 생겨서 구분 할 수나 있겠나."
"그랬군. 그런데 어쩌다가?"
타이론이 다시 빈정거렸지만 쿨란은 이렇게 대꾸 없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범인은 술집에서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휴먼 레이스를 발견했던 모양
이야. 그게 바로 핑키였지. 그런데 문제는 핑키가 데이트 중이었다는 거
였어. 알잖아. 노처녀가 데이트 중에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는지. 그런데
범인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핑키의 데이트를 방해했던 모양이야. 아직까
지 확실하지는 않아. 방해하려고 한 건지, 아니면 그냥 인사였는지도. 어
찌되었건 조사한 바로는 핑키의 남자친구가 먼저 쐈어."
쿨란은 타이론의 이 말을 듣고는 혀를 끌끌찼다.
"그래. 그 핑키의 친구, 38구경을 늘 가지고 다니고 있었지. 그런데 그
핑키의 친구, 38구경으로 랩타일 레이스의 껍데기에 흠집이라도 남길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건 몰랐던 모양이군."
쿨란이 타이론에게 차 한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아니. 그 친구 랩타일 레이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어. 눈에다가
쐈거든. 좋은 솜씨였어. 우리가 체포했을 때 그 랩타일 레이스 녀석은 한
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네."
"눈거풀에 맞춘 모양이군."
타이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쿨란이 권한 차를 마셨다.
"맛이 지독하게 쓰군. 누가 준건가?"
타이론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고객이 선물한 거야. 휴먼 레이스에게 아주 좋은 차라더군. 강력한 정
력제라니까 마누라가 좋아할 걸세."
"마누라 죽어 나겠구만. 안 그래도 힘 좀 덜 쓰려고 애쓰는 중인데 말
이야."
타이론이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다른 누가 했다면 농담처럼 들릴 말이
었지만 타이론 같은 거구의 입에서 나올 때는 그다지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쿨란은 타이론에게 정말로 죽어 나가는 타이론의 처를
상상할 수 있었다.
"정력제라는 건 농담이고, 맛이 쓴 건 설탕을 안 타서 그래."
쿨란은 타이론에게 설탕 종지를 내밀며 말했다. 타이론은 그게 농담이
었냐는 듯이 팔을 한 껏 벌리며 과장된 제스쳐를 취했다.
"아! 그랬군."
"설마 커피를 모른다는 건가? 시 공무원이?"
"그래,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설마 커피 맛도 모를까봐."
설탕 종지를 받아들면서 타이론이 말했다.
"남쪽의 리오 시에서 온 휴먼 레이스 고객이 준거야. 더운 곳이니까
커피도 잘 자라겠지. 아주 특별히 쓴맛도 나고."
"어쩐지 싸구려 합성 커피하고는 다르다 싶더니만 리오 시 특산품이었
군. 행성 어스 반대편에서 온 차라. 고맙게 마시지."
타이론이 말하자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좋은 소식 하나는?"
"의뢰야."
타이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설탕을 세 스푼이나 집어넣었다. 쿨란은 구
미가 당기는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시에서 주는 일이라면 사양하겠어."
"시에도 카운셀러와 트랜서가 있네. 시에서 처리 할 수 있는 일로 자
네를 찾겠나?"
"물론. 세금을 허비할 수야 없지. 난 아주 비싸니까. 누구야?"
"만티드 레이스."
타이론은 깍지 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손가락에
서는 타이론의 결혼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7 -
"그래. 내전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 그리고 이 쪽으로 만티드 레이스의
셔틀이 왔고. 마을을 습격했다는 말도 들었고."
"그건 사고였다네. 쿨란."
"모든 일은 다 그렇게 사고 하나로 시작되지. 이유는 뭔가?"
"녀석들은 만티드 레이스 하나를 찾고 있어. 우리 도시로 숨어 든 게
확실하다고 녀석들은 믿고 있다네."
"그랬군. 그런데 마을을 습격한 건 왜지?"
"그 마을 경비대장이 셔틀에 탄 만티드 레이스를 먼저 공격한 모양이
야.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쿨란은 이 말을 듣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스피어로?"
"그래. 스피어로. 만티드 레이스는 비무장이었다네. 연방 수사관이 확
인했어."
"스피어로 무장한 경비대가 있는데 그 만티드 레이스들, 비무장상태로
마을을 어떻게 습격했지? 아무리 스피어라지만 찌르면 죽잖아?"
"공업용 레이저를 쓴 모양이야. 셔틀 외벽이나 암석을 절단하는데 쓰
는 거 있잖나."
"그 만티드 레이스들, 급했군.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당했지?"
쿨란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쿨란은 공업용 레이저의 위력
을 잘 알고 있었다.
"상당수가 죽었어. 만티드 레이스는 열 하나가 죽었고."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마을 경비대가 먼저 공격했다면 국지전으로 생각해야겠군. 그
렇다면 만티드 레이스는 행성 어스와 국지전 상황이 되는 건가?"
"행성간 조약에 따른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다행히도 만티드 레이스는
그렇게 꽉 막힌 종족이 아니라네. 지금 시 의회에서 트랜서와 사절단을
파견해서 회담중이야."
"결론은 어떤 쪽으로 날까?"
"지금 우리 전략은 시간을 끄는 걸세. 다행히도 만티드 레이스가 먼저
우리를 마을을 습격해 왔고, 그 원인이 되는 사건이 오해라고 서로 주장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꽤 끌 수 있을 걸세."
일개 수사관이 할 수 있는 발언치고는 강도 높은 발언이었다. 쿨란은
이 말로 인해 타이론이 서장이나 시장, 혹은 더 위쪽의 명령으로 여기까
지 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시간을 끌면서 만티드 레이스가 찾고 있는 그 만티드 레이스를 찾아
서 넘긴다? 그런 건가? 내가 알기로 우리 시에 만티드 레이스는 그 수
가 매우 적을 텐데... 찾기 쉽지 않을까? 찾아서 얼른 넘겨주는 게 상책
일 것 같은데."
"수가 매우 적은 게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없는 걸로 되어 있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문제는 쉽게 찾아내선 곤란하다는 점이야."
타이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깍지 낀 손을 푼 다음, 품에서 서류 한 장
을 내밀었다.
"이걸 보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우리 푸우순 시의 입장은 망
명객은 어떤 경우에도 보호해 준다는 거야."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캡슐이 굴러다니는 걸
보면서 커피나 마실 수는 없을 테니까."
"빈정거리지 말게. 그건 수사관인 나나 민간인인 자네나 마찬가지 아
닌가?"
"공무원은 역시 이런 종류의 말에는 예민하군."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서류를 대충 훑어보았다. 만티드 레이스에 대
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상황이 시간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이거... 정말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걸. 까다로워. 아주 까
다로워. 내가 할 일은 도대체 뭔가?"
"자네는 카운셀러일세. 내 고민을 들어주면 되는 거지. 내 고민은 다
말했어. 이제 그 만티드 레이스의 고민을 들어주게."
"그래? 그럼 자네 카운셀러 비용은 어떻게 할까?"
"일거리 물어다 준 걸로 대신 하지."
타이론은 꽤 진지한 투로 말했다. 쿨란은 기대도 안 했다는 것을 고개
를 천천히 끄덕이는 동작으로 답했다.
"하나만 묻지. 그 만티드 레이스가 사고를 당했으면 좋겠나? 그래서
시체 상태로 인도 해 주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느냔 말일세."
쿨란이 물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쿨란은 일을 당장 그만
둘 것이었다. 타이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로 내 말은 그 만티드 레이스를 찾아내서 그 만티드 레이
스와 상담을 해 달라는 걸세. 푸우순 시에서는 망명객이 객사하는 일이
생긴다, 이런 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에는 푸우순 시에 있는 망명객이 반
으로 줄어들지 몰라. 이런 일이 계속 생기다가는 행성 어스 전체가 흔들
리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냥 확인 해 본 말이었는데, 과장이 좀 심하군. 공무원이라 그런가?"
"놀리지 말게."
타이론은 미간을 찌푸리면 말했다.
타이론의 표현에 조금 과장이 있기는 했지만, 그 원칙이라는 게 크게
틀린 건 아니란 걸 타이론은 잘 알고 있었다. 푸우란 시의 원칙은 망명
자는 철저히 보호한다는 것이다. 약간의 농작물을 제외하고는 특산품이
라곤 하나도 없는 푸우란 시의 풍요는 전부 망명객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되었건 확인하니까 마음은 편하군. 난 카운셀러지 주술사가 아니
야. 저주는 내 영역이 아니라서 망명객이 갑자기 다음 날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게 만드는 저주 같은 건 못 걸어."
타이론은 쿨란의 이 말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면
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쿨란은 어떤 경우에건 비웃음을 사게 되더라
도 별로 신경 쓸 타입은 아니었다.
"내 의뢰인은 그럼 그 만티드 레이스가 되는 건가?"
"결국 그렇게 되겠지."
"알았네. 하지만 자네 보수가 없으면 일은 못하겠어."
"이 일거리로 보수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나?"
"아냐. 핑키 이야기야."
쿨란이 말했다.
"이런 종류의 일은 트랜서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겠나? 그런데 내 트랜
서는 죽어 버렸으니 말이야. 하나 구하려고 해도 트랜서는 무척 귀중한
직업이라... 일개 카운셀러가 손에 넣기는 어렵지 않겠나? 시 고위층이나
시경 서장, 아니면 말단 형사라도 하나쯤은 알고 있어야 얻을 수 있는
직업이겠지."
"그래. 그걸 빼먹었군."
타이론은 마치 마지막 판 까지 숨겨두었던 히든카드를 뽑아내려는 도
박사 같은 태도였다.
"핑키 같은 친구를 다시 구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네.
핑키와는 일을 하기 위해서 혼인 신고 까지 해 두었지?"
"어제 부로 파혼일세. 아직 서류만 도착 안 했다 뿐이지."
쿨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부터 시작해 보게."
타이론은 작은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쿨란은 명함을 손에 올렸다. 명
함 위로 삼차원 영상이 떠올랐다. 쿨란도 잘 알고 있는 시에서 가장 큰
호텔인 제이 제이 리조트 호텔의 모습이었다.
"연방 수사관이 파견 왔다는 이야기는 했지? 그 연방 수사관이 지금
현재 묶고 있는 호텔이야."
"연방 수사관이 돈도 많군."
"연방 수사관은 숙박시설물에 대해서 무제한으로 협조를 얻을 수 있거
든."
"하긴. 그 친구도 공무원일테니까 돈은 없겠구만. 그런데 제이 제이 리
조트 호텔에 가서 그 연방 수사관에게 상황을 들어보라는 건가?"
"물론. 그런데 중요한 건 말이지, 거기서 트랜서를 구해야 한다는 거
야."
"그 친구가 트랜서인가?"
"아니. 그 친구가 데리고 있는 친구가."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그 트랜서 능력을 가진 친구는 어제 만티드 레이스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던 모양이야. 홀어머니 밑에서 큰 모양인데... 나이
도 어리고... 시에서라면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자네라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겠지."
타이론의 이 말은 쿨란이 듣기에는 '못 먹는 음식 버릴 테니까 알아서
챙겨먹어'하는 말처럼 들렸다.
"자네 능력을 믿겠네. 커피 잘 마셨어."
타이론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능력을 믿는다..."
이 말만큼 상대를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표현을 완곡하게 하는 말은
없겠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타이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쿨란
은 생각했다.
제이 제이 리조트 호텔까지 쿨란은 캡슐로 이동하기로 했다.
사무실 앞에 있는 캡슐 스테이션에서 버튼을 누르자 지나가고 있던 빈
캡슐이 모노레일을 타고 스테이션에 도착했고, 쿨란은 느긋한 마음으로
캡슐에 올랐다. 캡슐은 방탄장치와 간단한 통신장비, 그리고 도청방지 보
안 시스템이 되어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이동 수단이다. 높은
곳에서 시를 내려다본다면 아마도 캡슐은 목걸이에 걸려 있는 진주구슬
들이 줄줄이 도시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마치 고대 종
교의식에 쓰였던 염주처럼.
"어서오세요. 저희 랜티 캡슐 교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캡슐에 오르자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계로 조작된 여자의 음성이
었다.
"제이 제이 리조트 호텔."
쿨란은 또박 또박 이렇게 말했다.
"제이 제이 리조트 호텔입니까?"
기계음이 확인을 요청하자 쿨란은 응, 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카드를 확인하겠습니다."
여자의 음성이 나오자 쿨란은 자신의 현금 카드를 캡슐의 카드 판독기
에 집어넣었다.
"제이 제이 리조트 호텔, 지금부터 7분 27초가 소요될 예정입니다. 모
쪼록 쾌적한 이동되시길 바랍니다, 쿨란 씨."
쿨란은 캡슐 안을 둘러보았다. 안내 방송과는 달리 캡슐의 내부는 쾌
적한 여행이 되기에는 지저분한 편이었다. 아마도 조금 전에 커플이 탔
던 모양이었다.
캡슐은 대중적인 교통수단이지만 사실 커플들의 은밀한 섹스가 이루어
지는 장소이기도 했고 강간, 강도의 온상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보안 장
치가 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렇듯,
완벽한 것이란 없었다.
쿨란은 투명한 캡슐 밖으로 보이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휴먼 레이스만
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높은 빌딩과 고가도로, 모노레일, 자가용 호버콥터
등이 정신없이 캡슐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모노레일의 저 밑으로는 휴먼 레이스가 발명한 가장 훌륭한 발명 중
하나인 바퀴를 이용한 탈것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퀴를 이용한
탈것을 타는 휴먼 레이스는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부자이거나 둘 중 하
나였다.
쿨란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좌석이 쿨란의 키에 맞게 자동
으로 움직여 최대한 편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사실
쿨란은 조금도 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외뢰 받은 사건에 대한 생
각으로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 막 구해야 하는 트
랜서는 일이라고는 처음인 꼬마에 불과했다. 쿨란은 일을 잘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곰곰이 따져 보았다.
"제이 제이 리조트 호텔입니다. 요금은 7000크레딧입니다. 모쪼록 좋은
이동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저희 랜티 교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수증."
캡슐의 문이 열리자 쿨란은 퉁명스럽게 이렇게 내뱉었고, 그러자 캡슐
의 문에서 영수증이 튀어 나왔다. 이 요금은 나중에 의뢰인에게 받아낼
것이었다. 어쩌면 만티드 레이스가 아니라 다른 레이스가 지불하게 될지
도 모르지만 일단 영수증은 챙기고 봐야 했다. 물론 쿨란의 구좌에 기록
이 남기야 하겠지만 쿨란은 기본적으로 손에 든 것이 아니면 신뢰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얼굴 한 가운데에 크게 '예의상'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은 것 같은 미소
를 지으면서 프런트의 안내원이 물었다. 안내원은 성별을 구분할 수 없
는 휴먼 레이스였다. 쿨란은 대답대신 타이론에게 받은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자 안내원은 손가락을 부딪쳐 시종을 불렀다.
"저희는 고전적인 방법을 선호합니다."
안내원의 미소는 여전히 '예의상'이었다. 쿨란은 그 미소를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안내원의 말은 자신들은
레이저호출기같은 걸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사람을 부른 다는 뜻인 모양
이었다.
"나도 고전적인 방법을 선호하지."
쿨란은 혼잣말처럼 말한 다음 검지 손가락을 세워 안내원의 뒤편을 가
리켰다. 안내원은 손가락 향한 방향을 보았고 다음 순간 고개를 돌렸을
때 쿨란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안내원에
게 불려 왔는지 모르고 있는 시종의 얼굴이 보일 뿐이었다.
쿨란은 명함에 적혀 있는 12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가 1204호 문을
두드렸다.
"카운셀러입니다."
쿨란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고, 곧 문이 열렸다.
문안에는 면도를 해서 깨끗해진 얼굴을 하고 있는 라몬과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소년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타이론 씨한테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는 라몬. 연방 수사관입니다."
"저는 쿨란. 여기 카운셀러입니다. 푸우순 시에 온 걸 환영합니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화장대 앞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덕분에 쿨란의 환영 메시지는 전혀 환영처럼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저 친구는?"
쿨란이 소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소년은 하얀 얼굴에 솜털도 완전히 다 벗어지지 않은 소년이었다.
"마을에서 데리고 온 친구입니다. 메이런. 인사드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8 -
마론이 메이런이라고 부른 소년은 쿨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쿨
란은 메이런의 눈빛이 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물중독자 아니면 슬픔
에 잠긴 사람이나 보일 눈빛이었다. 역시 어머니를 잃은 충격이 큰 모양
이로군. 쿨란은 생각했다. 라몬도 이 소년이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 정도
는 쿨란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
다.
"그런데 혼자 오셨군요."
라몬이 물었다.
"팁을 아끼려고요. 호텔 종업원들은 어깨에 붙은 먼지만 털어 주고도
1000 크레딧은 바라죠."
"내 말은 타이론이라는 여기 관할 수사관과 함께 오시지 않았다는 겁
니다. 그, 타이론 수사관은..."
"그 친구는 더 이상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부터의 일은 시와
는 관계없이 진행됩니다. 먼저 연방 수사관의 입장을 들어보지요."
쿨란이 말했다.
"연방 수사관의 입장은 일단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라몬의 말에 쿨란은 머리를 끄덕이곤 얼른 입을 열었다.
"전 인터뷰하는 기자가 아닙니다. 제 말은 상황을 듣자는 것이지요."
쿨란의 단호한 어조에 라몬은 잠시 주춤거리는 듯 했다.
"좋습니다. 만티드 레이스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파일에서 읽었습니다. 분류하자면 곤충에 가까운 레이스라고 적혀 있
더군요. 대부분의 곤충 레이스 그렇듯이 전체주의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
지만 곤충형 레이스치고는 개인적 성격이 강하고 오래 전부터 귀족제를
바탕으로 한 전제군주제를 따르고 있다고."
"예. 대강 비슷하군요. 사진을 보시죠."
라몬은 쿨란에게 사진을 한 장 내밀었다. 쿨란이 사진을 받아들자 삼
차원 영상이 사진 위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을 띠고 있는 사
진 속의 주인공은 역삼각형의 얼굴이었고 얼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커다랗고 동그란 두 개의 겹눈이 눈에 띄었다. 입은 뾰족한 모양이었고,
더듬이는 미묘한 모양으로 흔들리는 듯 했다. 네 개의 발이 땅을 짚고
있었고, 낫처럼 생긴 두 개의 팔은 마치 기도를 하는 모습처럼 접혀 있
었다.
"만티드 레이스 사진이군요."
쿨란이 말하자 라몬이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예. 먼저 그게 문제입니다. 이 친구가 우리가 찾아야 할 친구라는 거
지요."
라몬이 말했다.
"정말이지... 어떻게 구별해야 하죠?"
쿨란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예. 우리가 구별해 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겹눈의 위치나 입의
모양새, 더듬이의 휜 각도, 피부색 등이 조금씩 구별할 수 있는 요소이긴
합니다만..."
"우리 중에는 그런 능력이 있는 친구가 없겠군요."
"예. 아무래도 다른 레이스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 기술은 오직 경
험에서 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중에는 그런 인력이
없지요."
라몬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곤란해 할 것 까진 없습니다. 그런 고급인력은 행성 어스 전체에서도
몇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여기에 온 겁니다."
쿨란은 조금도 자기 자랑을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라몬은 쿨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어찌 되었던 이 친구를 찾아서 사태를 빨리 마무리 지어야 겠군요."
쿨란이 명함에 있는 만티드 레이스를 보면서 말했다. 라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쿨란 씨. 지금 파견단과 만티드 레이스 사이에서 협상이
진행중입니다만... 끝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겁니다."
"이 친구를 찾기 전에 협상이 끝난다는 건 전쟁 밖에는 없겠군요."
쿨란은 조금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라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친구 동족들이 이 친구를 애타게 찾는 이유가 뭡니까?"
"저희도 그건 조사중입니다만 아직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아
시다시피 트랜서는 이런 공식적인 일에는 능력을 잘 발휘하지 못하지
요."
"예. 트랜서의 능력은 상대방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면 발휘되기 어려
우니까요."
쿨란이 말했다.
"그런데 이 일에 동원될 트랜서는...?"
"우리 연방 경찰국도 트랜서가 부족합니다."
라몬은 이렇게 말하면서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간신히 찾아낸 친구죠. 이 친구 밖에는 현재 도움을 줄 수 있
는 친구가 없습니다."
라몬의 말에 쿨란은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어린아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까지 어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거기다 트랜서의 재능
이 있는지 없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
서는 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너, 트랜서 일 경험은 있니?"
쿨란이 메이런에게 물었다. 메이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트랜서가 뭔지는 아니?"
역시 가로질.
"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
메이런은 이 말에 쿨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한 참을 계속해서 뚫
어지게 쿨란을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걸 내가 알 게 뭐예요?"
"그래. 그렇구나."
쿨란은 처음으로 소년이 입 밖으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었다는 데 만
족했다. 아직 완전한 절망상태는 아닌 모양이구나 싶었던 거였다. 그만하
면 다행이었다. 트랜서의 자질은 아직 검증된 봐 없었지만 그 정도로 쿨
란은 만족할 수 있었다.
쿨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메이런의 앞으로 가서 눈을 맞추었다.
"너, 칼은 쓸 줄 아나?"
"12년 동안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래. 하나도 쓸 줄 모른다는 말이로구나. 권총이 뭔지는 아니?"
쿨란은 메이런을 도발하고 있었다. 행성 어스에서 성년을 바로 앞둔
열 여섯 살 짜리 소년에게 가장 기분 나쁜 말은 너 어리구나, 하는 말일
거였다. 그리고 쿨란은 계속해서 그런 말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약의 폭발력으로 쇳덩이를 쏘아 내는 장치라는 거 정돈 알아요. 경
비 대장이 차고 다니는 걸 본 적도 있어요. 여기 라몬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것도."
메이런의 대답은 신경질 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쿨란은 속으로 조금
만 더 하면 되겠다 싶었다.
"여기는 뒷골목 깡패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게 총이다.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빔 건 한방에 허리가 끊어지거나 열선 한 방에 재로 변해버
릴 수도 있지."
"그래도 상관없어요."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지, 네 말은?"
"죽는 거 따위, 하나도 안 무서워요. 휴먼 레이스는 누구나 조용히 살
다가 죽는 거 아닌가요?"
메이런의 말투는 지나치리만큼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쿨란은 그런 태
도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게 용기라고 생각하니?"
쿨란의 물음에 메이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죽어버린다. 그거 아주 좋구나. 네 어머니가 그러길 바라
셨을 것 같니?"
쿨란이 말하자 메이런은 심하게 동요하는 기색이 되었다. 메이런에게
어머니의 일은 애써 잊고 싶은 일일 거였다.
"너무 심합니다, 쿨란."
라몬이 쿨란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메이런. 지금 상황, 대충 들어서 알고 있지? 지금 네 도움이 없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그걸 바라는 거니?"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은 거냐? 그리고 너도 죽어버렸
으면 좋겠어? 그게 네 용기냐?"
쿨란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메이런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조용조용
한 목소리는 메이런의 심장 한 복판까지 닿아 폭발한 것이 틀림없었다.
메이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화장실 다녀 오거라."
메이런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쿨란. 어머니를 잃은 아이입니다.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은 아이에게
꼭 그렇게까지 몰아 부쳤어야 했습니까?"
라몬은 화장실에 들어간 메이런에게 들릴까봐 목소리는 낮추고 있었지
만 화가 났는지 격앙된 어조였다.
"아무리 트랜서가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까지 하다니, 너무 합니다."
"트랜서는 꼭 필요합니다. 트랜서 없이 이번 일은 해결 할 수 없거든
요."
쿨란은 꼭 날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무 감정 없이 이렇게
말했다.
"쿨란. 타이론 한테서 당신이 지독한 사람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지독하군요."
라몬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바로 다음 순간 쿨란의 매서운 눈초리
가 라몬을 붙잡았다.
"잘난 연방 수사관 나리. 내 말 잘 들어."
라몬은 쿨란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쿨란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인정해요. 난 저 아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 아이를 함부로 대했지
요. 하지만 이건 알아두세요. 생명체의 95%는 절망했을 때 살아있어야
할 약간의 이유만 있다면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 친구에게 살아있어야 할 약간의 이유를 준 것뿐입니다. 그게 지독한
건가요?"
쿨란의 이어지는 말에 라몬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쿨
란은 다시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라몬에 비해 쿨란은 별 동요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침묵.
"아까 95%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머지 5%는 뭔가요?"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였는지 라몬은 이렇게 쿨
란에게 물었다. 쿨란은 기다렸다는 듯 약간의 미소마저 머금은 채 이렇
게 대답했다.
"절대 절망하지 않을 인간입니다. 스무 명에 한 명 꼴이지요."
"예, 그렇군요."
전혀 동의하는 빛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건 라몬의 의도는 성공한 것
처럼 보였다. 메이런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어
색한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면접관은 만나 봤습니까? 메이런, 이 친구 말이죠."
쿨란이 물었다.
"아뇨. 제가 빼돌렸습니다. 메이런의 친구는 면접관을 만났고 또 통과
도 했습니다만."
"그럼 지금 이 친구는 시민권은커녕 불법체류 중이겠군요."
"연방 수사관 권한으로 중요 참고인으로 등록했습니다."
"시에 뺏기고 싶지 않았군요. 트랜서의 능력을."
쿨란의 말에 라몬은 대답 대신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쿨란은 지금 라
몬, 당신이야말로 나에게 지독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게 아니냐고 무
언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었다.
"그런데 중요 참고인으로 등록하면 얼마나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죠?"
쿨란은 당황하고 있는 라몬을 구해주기 위해서였는지 이렇게 물었다.
"규정상 24시간이 한계입니다. 시 검사에게 48시간으로 연장 요청을
할 수 있고요."
"그럼 이제 얼마 안 남았군요."
"안 그래도 시 검사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라몬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그것보다는 제가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만."
쿨란이 말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9 -
20분이 지난 후, 셋은 쿨란의 사무실에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후, 메이런은 제이 제이 리조트 호텔을 빠져 나온지
20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쿨란이라는 사내에게 큰 변화가 두 가지나 찾
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나는 시청에서 배우자의 사망 사실을 공식
적으로 확인하는 문서를 받음으로 해서 쿨란이 공식적으로 미혼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쿨란이 아들을 입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
다.
"시에서 마을 아이를 입양하는 건 대단히 까다로운 일로 알고 있었는
데요."
라몬이 입양 증명서를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시에 아는 사람 몇만 있으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은 아닙니다. 전에는
결혼도 했는 걸요."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메이런의 어깨를 쳤다.
"천만다행으로 메이런은 아직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지 않은 상태였습
니다. 성인이 되면 입양 절차가 몹시 까다로워지죠. 다른 것 보다 '입양
되고자 하는 본인의 의사'가 필요하거든요."
메이런은 자신이 있다는 걸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이렇게 떠들어 대고
있는 쿨란을 보면서 불쾌감을 느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이
런에게는 그럴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조금 쉬고 싶을
뿐이었다.
"전 이 친구가 정직한 사람을 만나게 되길 빌었는데. 아쉽군요."
라몬은 이렇게 말하면서 씁쓸한 것을 씹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아마
나를 놓친 걸 후회하는 거겠지. 메이런은 생각했다.
처음 입양 이야기가 나왔을 때 라몬은 반대했다. 굳이 그럴 필요 있
느냐는 것이 라몬의 생각이었지만 쿨란의 말 한마디에 라몬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사건을 해결하고 싶지 않으신 건 아니겠죠?"
라몬은 트랜서를 포기하고 대신 편하게 임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쪽
을 선택했던 것이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공무원은 임무에만 충실하면 되는 겁니다."
쿨란의 이 말에 라몬은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쿨란의 말이 아무리 듣기 불편하다고 해도 라몬이 공무
원인 건 사실이었던 것이다.
쿨란은 애써서 찾아낸 새로운 트랜서를 연방 정부에 넘겨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일단 메이런을 아들로 입양한 다음, 트랜서 능력
을 키워보고, 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잡일이나 시켜도 손해는 아니겠지.
쿨란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메이런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 메이런이 성인이 되면 쿨란은
메이런의 양육비를 지원하지 않아도 법적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을 것이
었다.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런 부분은 쿨란이 조금
도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었다. 메이런은 그런 쿨란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하지만 쿨란은 그런 시선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메이런
의 시선을 바람을 스치듯, 햇살을 지나치듯 그저 담담하게 받아넘길 뿐
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겁니까?"
라몬이 물었을 때 쿨란은 커피포트의 전원을 켜고 있었다.
"정보부터 시작해 보죠. 지금 여기 저기 연락을 넣어놨으니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쿨란은 커피물이 끓는 모습을 확인한 뒤, 의자에 여유롭게 몸을 묻으
면서 말했다.
"라몬 씨. 당장은 조금 쉬어두는 게 좋을 겁니다. 곧 연락이 오면 먼저
가야 할 곳이 있거든요."
쿨란은 의자에 앉아 있는 메이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이 친구, 써먹을 수 있을까요?"
라몬이 쿨란에게 물었다.
"당장은 어렵죠.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트랜서 일도 능력만으로 기술
을 발휘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쿨란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걱정의 빛이 비치지 않고 있었다.
"전 트랜서가 뭔지도 몰라요."
메이런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불쾌감은 여전히 메이런을 주
변을 떠돌고 있었다.
"그래. 이 서류를 보니 대충 알겠구나. 트랜서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어도 제대로 배운 적은 없겠지."
쿨란은 자상한 목소리로 메이런에게 말했다.
"내가 차근차근 설명 해 주마. 이 푸우순 시는 대단히 풍요롭지. 캡슐
들 봤지? 그리고 하늘을 날고 있는 호버콥터들도. 높은 건물은 어떠니?
그리고 어마어마한 인구도 그렇고."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어마어마한 부가 도대체 어떻게 유지되고 있을까? 마을에서 조달
해 오는 농작물로? 아니면 대규모의 무역으로? 푸우순 시는 바닷가에
면해있지도 않아. 따라서 풍요로운 바다 자원도 없지. 마을에서 나오는
곡물은 마을이 자급 자족하기에도 부족해. 무역? 이곳은 교통이 그다지
편리한 곳이 아니야. 푸우순 시는 한 가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뿐이
야."
쿨란의 말에 메이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말해서 여기는 정치적인 망명이 가능한 지역이라는 거지. 역사
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있니?"
"예. 일 주일에 한 시간이요."
"얼마나 아니?"
"예?"
"얼마를 알건 그건 다 잊어 버려라. 마을에서는 제대로 된 행성의 역사
를 가르치지 않지. 역시 도시에 대해서도 엉터리 지식만을 가르치고. 진
짜 행성의 역사나 도시의 진실은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거든."
쿨란은 의자에서 일어나 메이런에게 다가갔다.
"아주 오래 전, 이 행성에 휴먼 레이스 밖에 없던 시절, 전쟁이 있었단
다. 휴먼 레이스간의 전쟁이었지. 우리의 조상은 어마어마한 무기를 보유
하고 있었어. 이 행성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박살낼 수 있을만한 무기
였지. 행성간 여행에 대한 기술도 없던 시대에 말이다."
때마침 커피포트에서 증기가 올라왔다. 쿨란은 커피포트 쪽으로 다가
갔다. 메이런은 그 전쟁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모두들 개인용 연
산장치를 가지고 있었고, 그 연상장치에 의지해서만 살아갔던 고대의 이
야기. 그들은 연산장치에 의지한 나머지 결국 휴먼 레이스를 믿지 못하
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 하지만 메이런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휴먼 레이
스가 보유했던 무기에 대한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행성 어스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지옥이 된 거
지. 화성처럼 말이다."
쿨란은 커피물을 컵에 따르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난생 처음 맡아보는
커피향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랐다. 캡슐에
대해서도, 건물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커피향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다른 레이스들이 인류에게 구원을 주었지. 사실 아주 오래 전
부터 몇몇 레이스들이 행성 어스를 관찰하고 있었다고 하더라. 여기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 혹은 여기 사는 우리 레이스를 보호할 방법... 노
예로 만들 방법... 그런 걸 연구하기 위해서. 레이스마다 목적은 달랐겠
지."
쿨란은 커피 잔을 라몬과 메이런 앞에 내 밀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 때 휴먼 레이스에게 접근한 레이스는 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두 레이스는 휴먼 레이스를 용병으로 삼아 우주로 데리
고 나갔지. 그리고, 행성어스의 시야 밖에서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단
다. 휴먼 레이스는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소모되었지. 전쟁이 끝났을 때,
어스에 남은 휴먼 레이스는 몇 백만 명 정도였어. 전투원으로 죽은 사람
들보다는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난 이민자들이 더 많았지만."
라몬은 쿨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커피에 설탕을 타고 있었다. 메이
런은 그저 커피향을 맡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다른 레이스들은 행성 어스를 정치적으로 더
이상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조약을 맺었단다. 어스를 정치 중립 지구로
놓은 것이지. 그렇게 해서 행성 어스는 세력간의 완충지대가 되었던 거
다."
쿨란은 메이런의 커피에 설탕을 타 주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여전히
커피향만 맡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여러 레이스 간의 정치적 알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하지만
그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어찌되었건 그리고 나서 이곳에는 수
많은 레이스들이 오가게 되었단다. 여기를 보급항으로 쓰기도 하고, 혹은
망명지로 쓰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까 의사소통이 가장 큰 문
제가 되었지. 그 많은 레이스들의 언어를 모두 배울 수 있을 리도 없었
고, 텔레파시가 가능한 레이스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텔레파시가
뭐냐 하면..."
쿨란은 설명하려다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을 멈추었다. 메이런은 설
명하기 곤란한 건가보다 생각했다.
"마셔라. 겁내지 말고. 이건 커피다. 사나이의 음료지."
쿨란이 말하자 라몬은 웃음을 터트렸다. 메이런은 놀림받는 기분이 되
었지만 순순히 컵에 입술을 대었다. 메이런은 난생 처음 맛보는 커피가
마음에 들었다. 향이 입 속 가득 번져 가는 느낌이 좋았던 것이다.
"텔레파시는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전하는 능력이란다. 말하자면 저
급한 트랜스 같은 거지. 하지만 그건 별 도움이 되지 않아. 같은 종족에
게만 통할뿐이지. 다른 종족에게는 혼란만 줄 수 있을 뿐이야. 물론 텔레
파시가 가능한 다른 종족도 있지만 그런 종족이라고 해도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수준이 되려면 오랜 수련이 필요하단다."
쿨란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여간 우리는 통역이 필요했어.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몇몇 휴먼 레
이스가 다른 레이스의 생각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 느낌을 전할 수도 있고. 타자의 생각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전할 수 있다면 굳이 말이 필요 없지. 어떻게 보면 이 능력
이야말로 궁극적인 의사소통 수단이겠지."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능력을 가진 휴먼 레이스를 예전에는 점쟁이다, 무당이다, 마법
사다, 그렇게 부르기도 했던 모양이야. 지금도 그런 식으로 부르기도 하
는 모양이지만. 어떤 학자는 누구에게나 트랜서의 능력이 있고, 다만 개
발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해. 하지만 아직 우리의 능력으
로는 확인 할 수 없는 영역일 뿐이지. 어쩌면 저 먼 하늘 너머 어디선가
는 그런 사실까지 다 알고 있는 레이스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
야."
메이런은 쿨란의 말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
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트랜스일까.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텔레파시는 저급한 트랜스란다. 그것만으로는
의사 소통이 어렵지. 그래서 많은 능력자들이 오랜 기간동안 연구 한 끝
에 얻게 된 걸 우리는 보통 트랜스라고 부른단다. 트랜스가 뭔지는 설명
하기 어려워. 간단하게 말하자면, 상대방이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대방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능력이 저한테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메이런이 물었다.
"그런 능력은 흔하게 발견되는 게 아니란다.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일에 투입될 수 있는 경우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트랜서는 대
단히 중요한 휴먼 레이스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 메이런, 바로
네가 그렇다는 말이다."
쿨란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일단 메이런에게 이렇게 말
해 주었다. 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재능이
조금 있는 꼬마를 트랜서로 써먹을 수 있는 확률'이 0로 떨어지게 될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정확하게는 말입니다..."
잠자코 있던 라몬이 쿨란의 말에 끼어 들었다.
"...메이런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라몬의 지적에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누구든 가능성은 있지요. 연방 수사관이 탐낸 존재라면 더욱 더
가능성이 있을 것이고요. 저는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메이런은 쿨란이 어떤 종류의 휴먼 레이스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
다. 메이런이 느끼기에 쿨란은 결코 순수하거나 순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메이런의 쿨란의 생각을 읽어낸 바로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쿨란이 풍기
고 있는 기운은, 순수하거나 순박한 사람의 기운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뭔
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쿨란의 생각과
쿨란의 기운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메이런을 몹시 혼란스럽게 했
다.
메이런이 생각하고 있는 사이,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쿨란은 구식
전화기의 스피커폰으로 간단하게 그곳으로 가겠다고만 말하고는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리 시간이 많은 것 같지는 않군요. 빨리 가봐야겠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메이런에게 트랜서가 뭔지 가르쳐 줘야지요."
"학원... 같은 곳인가요?"
메이런이 물었다.
"검은 눈동자."
쿨란이 말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