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로즈웰 '형(形)' 레이스
푸우순 시에는 '대사관'이라고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각
행성에서 모인 레이스들이 모여서 근무를 하는 곳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
제로 대사관이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푸우순 시에 어떤 영향을 발휘하
는 지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쿨란과 메이런, 그리고 라몬은 대사관 옆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
아 있었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쿨란."
라몬이 쿨란에게 물었다.
"뭡니까?"
대답을 하는 쿨란은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어서 꼭 힘 빠진 노인처럼
보였다.
"왜 타이론에게 묻지 않았습니까?"
"뭘... 말씀이시죠?"
"우리가 찾는 시크사라는 만티드 레이스가 있는 곳 말입니다."
라몬은 당연하다는 투였다. 쿨란은 허리를 펴서 라몬을 바라보았다.
"물어 볼 수 없는 건 묻지 않는 거죠."
쿨란의 말에 라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쿨란은 설명을 이어갔다.
"정보가 어디에서 나오는 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시에서 나온 정보로
저 같은 프리랜서가 일한다면 그건 바보라도 쉽게 시에서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연방에서 정보가 나온다면
또 모를까..."
쿨란이 이렇게 말했을 때, 메이런은 시와 연방의 관계를 대충은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라몬은 연방경찰이시니까 시가 왜 이렇게까지 일
을 어렵게 추진하고 있는지 느끼질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연방경찰입니다. 지금 이 사건은 제 사건이고요. 저는 일을 가장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라몬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쿨란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저는 시민입니다. 시를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아니. 그렇게 말하
기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군요. 시가 없어지면 저도 없어집니
다."
"시를 사랑하시는 군요."
라몬은 비꼬는 투였다.
"글쎄요. 다만 제가 이 도시를 떠난다면 저는 많은 정보 라인과 인맥
을 잃게 됩니다."
라몬은 이 말에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대충은 이해한다는 듯
한 얼굴이었다.
대사관 쪽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정말이지 이국적이군요."
새를 바라보면서 라몬이 말했다. 대사관에서 날아온 새는 몸 전체가
초록색이었다. 하지만 날개짓을 할 때마다 색은 푸른 색으로 변하기도
했다. 새에게는 깃털도 없었고, 부리도 없었다.
"정확하게는 이계적, 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새 -어쩌면 날벌레인지도 모를- 를 바라보았
다. 새는 날개짓을 하며 쿨란 일행이 앉아 있는 벤치 주변을 날다가 붉
은 색으로 변한 다음, 한동안 꾸르륵하는 물 내려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결국 하늘로 날아올랐다.
대사관은 민간인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은 지역이었다. 대사관을 출입
할 수 있는 휴먼 레이스는 그야말로 시의 고위직 몇몇뿐이다.
대사관 안에는 많은 성계의 대사들이 파견되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의
망명객을 관리하거나, 적 성계의 망명객을 조사하거나 혹은 행성 어스를
이용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안들을 연구하고 또 실행하고 있었다.
"저 안에는 대사관 직원들을 위한 공원이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는
행성 어스에서 살 수 있거나, 혹은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성계의 동식
물들이 모여있다고 들었습니다."
쿨란은 새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쿨란의 말을
듣자 문득 모든 일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레
이스는 본 적도 없었던 메이런이었다. 그런 메이런에게 바로 저 옆에
있는 담 너머의 건물에 다른 레이스와 전혀 보지 못한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그렇군요."
라몬은 별 감흥이 없는지 그냥 이렇게 말하고는 말았다. 아마도 연방
경찰 생활을 하면서 다른 레이스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 거라고 메이런
은 생각했다.
"틱톡이었습니다."
세 사람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키가 작고 지저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정장을 입은 휴먼 레
이스가 서 있었다.
"빙. 오래간 만이야. 신수가 훤하군."
"쿨란 씨는 경기가 좋으신가 보군요."
메이런은 두 사람이 나누는 인사가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렸
다. 빙이라고 불린 사내는 조금도 신수가 훤해 보이지 않았고, 쿨란의 경
기 또한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늘 똑같지. 그런데 빙, 그 틱톡이라는 게 뭐야?"
"아까 본 새 말입니다."
빙이라는 사내는 단정하게 서서 쿨란에게 말하고 있었다. 쿨란은 그런
빙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높은 쪽'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새라더군요. 우리로 따지면 까
치나 까마귀쯤 되는 새인 모양입니다."
"'높은 쪽'에서는 새를 보면서 향수를 달래나 보군."
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런은 그런 쿨란과 빙을 번갈아 보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단어인
'그 높은 쪽'이 어느 쪽을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자리 옮기지."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이런은 라몬의 눈치를
보았는데, 라몬은 별 반응 없이 쿨란을 따라 나서고 있었다. 메이런도 그
런 라몬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쿨란을 따랐다. 메이런은 소개도 시켜주지
않고 아무 설명도 붙이지 않는 쿨란에게서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빙이 안내한 곳은 대사관 뒷골목 쪽이었다. 뒷골목에는 야트막한 건물
들이 일렬로 서 있었고 건물에는 간판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여긴 만물상이야. 암시장이지."
라몬이 속삭이는 소리로 메이런에게 말했다.
"대사관 직원들이 쓰는 물건들이 몰래 흘러나오는 곳이라는 거다."
메이런은 라몬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불법 아닌가요?"
메이런 버젓히 내걸려 있는 간판들을 바라보면서 역시 속삭이는 소리
로 말했다.
"하지만 단속은 하지 않아. 만약에 단속을 해서 물건이 하나 나왔는데
그 물건이 대사관 직원 아니면 빼돌릴 수 없는 물건이라면, 또 빼돌린
직원이 영향력 있는 레이스라면 복잡한 외교분쟁에 휩쓸리게 될 수도 있
거든. 물론 마약이나 무기류 같은 게 나온다면 단속을 하지 않을 수 없
겠지만, 아무리 경우 없는 레이스라고 해도 그런 선은 지킨단다. 여기 상
인들도 위험한 물건이 나온다면 아마 받거나 팔지 않을 거야."
"여기 상인들도 자기 일은 소중하지."
듣는 척도 하지 않던 쿨란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메이런과 라
몬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고,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동안 아무런 대
화도 오가지 않았다.
빙이 안내한 곳은 '보비데 전통 요리'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식당이었
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쿨란. 안에 가면 안내원이 있습니다."
쿨란은 빙과 자연스럽게 악수를 교환했다. 메이런은 무의식적으로 쿨
란의 손을 바라보았다. 쿨란의 손은 분명 빙에게 뭔가를 전해주고 있었
다.
"뇌물입니까? 대사관 직원 같던데요."
라몬도 봤는지 쿨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뇨."
쿨란은 부정하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냥 약간의 금일뿐입니다."
이어진 쿨란의 말에 라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식당 안은 조용했다. 장식 하나 없이 깔끔하게 차려진 식당을 보면서
보비데 전통 음식이 어디 음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조용하고
깨끗한 지역일 거라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쿨란은 입구에 서 있는 종업원에게 눈짓을 보냈고,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쿨란 일행을 내실로 인도했다.
내실에 들어선 메이런은 그곳에 앉아 있는 다른 레이스의 얼굴을 보고
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다른 레이스일거라고 예상은 했고, 또
한 그 모습이 상당히 다를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레이스는 휴
먼 레이스와 비슷하게 생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형태의 레이스였던 것
이다.
그 레이스는 타원형으로 아주 길쭉한 얼굴에 키는 휴먼 레이스보다 훨
씬 작았고 가느다란 팔다리를 하고 있었다. 눈은 몹시 커다란 타원형이
었고 코에는 구멍만 두 개가 뚫려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었다.
"쿨란. 어서 앉아요. 요리 다 식겠네."
그 레이스는 매우 유창한 발음으로 휴먼 레이스의 언어를 말했다. 쿨
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메이런과 라몬을 자리에 먼저 앉게 하고는
뒤이어 자리에 앉았다.
"무슨 요리입니까?"
쿨란이 물었다. 식탁에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각종 야채 요리들이
올라와 있었다.
"보비데 레이스의 전통 요리에요. 초식을 하는 레이스라 야채로만 되
어 있지만 아주 맛도 좋고 영양소도 풍부하죠. 어서들 들어요. 이름
이...?"
휴먼 레이스와 닮은 레이스가 말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음식
으로 손을 가져가지 못했다.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
지만 그 레이스에게서는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 쪽은 라몬. 연방경찰입니다. 그리고 이 쪽은 메이런..."
"트랜서군요."
낯선 레이스가 메이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레이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메이런에게 있어서 완전히 다른 생김새의 레이스에게서 휴먼
레이스와 같은 미소를 보는 일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참. 내 소개가 늦었군요. 난 조라고 합니다."
그 레이스는 자신을 조라고 밝혔지만 메이런은 조라는 이름이 가명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조. 상황은 들으셨습니까?"
쿨란의 목소리는 메이런이 쿨란을 만난 이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매우 정중하고도 단정한 말투였다.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식당에는 메뉴가 다양해요. 휴먼 레이스의 입맛에 맞게 달콤하
고 향긋한 음식으로 바꾼 보비데 레이스의 음식도 나오지요. 전 오리지
널 타잎의 보비데 레이스 식 음식을 시켰습니다만, 괜찮겠죠?"
조의 말은 분명 예의바른 것이었지만 그 태도와 느낌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메이런은 그런 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쿨란.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음식은 넉넉하니까."
"제 말씀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꺼번에 음식을 다 먹을 순 없죠."
조는 이렇게 말하면서 집게처럼 생긴 수저로 음식을 떠서 입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는 만족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게다가 보비데 식 음식은 씹을수록 제 맛이 나요. 고등 레이스일수록
음식에는 신경을 쓴단 말이에요? 깊이가 있는 문명을 가지고 있는 레이
스일수록 맛에는 깊이가 더하죠."
쿨란은 작은 탄식 소리를 속으로 삼키더니 별 수 없다는 듯 수저를 들
어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걸 본 메이런과 라몬도 뒤이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메이런은 야채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보비데 레이스식 음식
은 달랐다. 과연 조의 말처럼 씹으면 씹을수록 야채라는 느낌보다는 육
질이 풍부한 고기를 씹는 기분이 들었다.
"시의 사정은 잘 알고 있어요, 쿨란."
한 참 동안 음식에 열중하다가 조가 입을 열었다.
"그러시군요."
"그리고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하는 지도 잘 알고 있지요."
"예."
"음식 맛은 어떤가요? 입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아, 예."
쿨란은 조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쿨란이 먹는
일에 열중해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쿨란은 기분이 상
한 모양이었다.
"트랜서는 참으로 위험한 존재이지요. 함부로 말을 걸기가 무섭단 말
이에요."
"전 트랜서가 아닌데요?"
메이런은 자기가 깜짝 놀랄 정도로 당돌한 말투로 조에게 이렇게 말했
다. 쿨란과 라몬은 동시에 입을 딱 벌리고 메이런을 바라보았고, 조는 잠
시 동안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조의 웃음소리는 휴먼 레이스
의 웃음소리와 비슷했지만 휴먼 레이스보다는 조금 더 저음에 거친 느낌
이 들었다.
"아직...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는 듯 라몬이 당혹스러운 말투로 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 중이라는 거군요. 좋아요. 아주."
조는 음식이 좋다는 건지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를 정도로 대충 대답하
고는 음식을 계속해서 먹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16 -
다시 대화가 시작된 것은 식사가 다 끝난 후의 일이었다.
"우리는 만티드 레이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쿨란이었다. 메이런은 쿨란이 꽤 거침없이 말하
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어딘가 불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
다. 메이런의 느낌은 틀린 적이 없었다. 적어도 한 개체의 감정에 관한
한. 쿨란은 꼭 천적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작은 피조물을 연상케 했다.
"알아요, 알아."
"그건 대단한 기밀입니까?"
"경우에 따라선. 이 경우에는 시에서 기밀로 하고 있는 사항이고."
조가 막 이렇게 말했을 때, 종업원이 후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후식은
투명한 물이었다. 보비데 레이스 식 음식은 맛은 좋았지만 갈증이 많이
났다. 아마도 양념에 비해 수분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얼른 물
을 들이켰다. 하지만 마신 것은 물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향을 가지고 있
는 음료수였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과일즙 같다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아. 천천히 마셔요, 메이런. 이건 입에 조금 머금고 침을 내서 마시는
거에요."
조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에 컵을 대는 정도로 마시곤 잠시 입을 다물
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침묵이 이어졌다.
"저는 휴먼 레이스의 연방 경찰입니다."
이번에 침묵을 깬 것은 라몬이었다. 라몬은 꽤나 당당하게 말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쿨란만큼은 아니어도 어딘지 위축된 느낌이었다.
"저는 연방의 안전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푸우순 시의 안
전도 제 책임의 한계에 들어갑니다."
"아, 그렇군요."
마치 처음 듣는 다는 듯한 투로 조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쓰는 그런 말투는 메이런이 보기에는 꼭 라몬을 놀리는 것으로 밖에 느
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 만티드 레이스를 찾아야합니다. 지금 시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이미 교전이 있었고 자칫하면 내전으로 번질지 모릅니다."
"정확하게는 회담중이에요, 라몬. 그리고 교전이 있었다고 해도 전쟁은
그렇게 쉽게 터지는 게 아니랍니다."
조의 말투는 벌레 몇 마리 죽은 거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말
하는 투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들이 요구하는 정보는 시에서 기밀로 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저는 대사관의 일원으로서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
다고 해도 결코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그
건 매우 미묘한 외교적인 마찰을 가지고 올 수 있거든요. 이런 경우, 매
우 중죄를 범하게 되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얼마만큼의 중죄입니까."
후식에는 입도 대지 않았는지 쿨란의 목에서는 매우 심하게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글쎄요."
"이 정도의 중죄겠지요?"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금괴를 하나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놓
았다. 그러자 라몬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뇌물을 건네는 쿨란에 놀랐고,
메이런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금덩어리에 놀랐다. 반면 조는 담담해
보였다.
"보통 내가 저지르는 죄는 그 정도죠. 그런데 이번 경우는 조금 예외
랍니다.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아-주 미묘한."
조는 '아주' 라는 말을 강조해서 말했다. 쿨란은 아무 말도 없이 같은
크기의 금괴를 하나 더 꺼내 식탁에 놓았다.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까지입니다."
그러자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쿨란은 아주 좋은 휴먼 레이스에요. 다른 레이스를 아주 쉽게 이해하
거든요. 정말 훌륭하지요. 칭찬할 만 해요."
쿨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메이런은 쿨란을 보는 순간 온 몸이
경직되는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다. 그런 쿨란에게서 너무나도 강렬한
살의를 느껴서였다.
"시에 있는 연구소를 아나요? R-연구소라고 부르는 걸로 아는데요."
"제한 구역을 말하는 군요."
라몬이 말하자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연구원으로 일하는 만티드 레이스가 있어요. 여기 온지 꽤 된
만티드 레이스지요. 아마도 반군의 일원인 걸 알고 있어요. 당신들이 찾
는 만티드 레이스처럼. 틀림없이 지금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연구
하는 내용은 극비랍니다. 아-주 극비지요."
메이런은 조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조에게서 쿨란을 향한 분노인지 혹
은 경멸의 마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솟고 있는 걸 느낄 수 있
었다. 아마도 쿨란이 내비친 살의를 조도 느낀 모양이라고 메이런은 생
각했다.
"아. 연구내용은 극비로군요."
쿨란의 말은 연구 내용은 알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제한구역이라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텝니다만..."
라몬이 걱정스럽다는 투로 조에게 물었다. 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
면서 음료수를 한 모금 머금었다.
"아까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 드린다고 했죠?"
메이런은 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는 쿨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는 쿨란을 분명 얕보고 있었다. 아니, 얕보고 있다기 보다는 완전히
자신의 하인 취급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약하기는
했지만 메이런은 조에게서 감정을 읽어 냈던 것이다.
다음 순간, 조는 메이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원형의 눈동자는 그
저 묵묵히 메이런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메이런은 완전히 몸이 굳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꼭 팔다리에 석
고붕대라도 바른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메이런은 조가 전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분명 조가 의도적으로 전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경고였다. 메이런은 문득 쿨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니, 어쩌
면 조가 강제로 떠오르게 했는지도 몰랐다.
'널 보살펴 주는 사람의 마음은 읽지 마.'
쿨란의 이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처럼 여겨졌다. 가슴에서는 아무
리 부정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빈 종이에 검은 물감이 스미듯,
메이런의 머릿속에는 온통 쿨란의 목소리가 당연한 진리로 맴돌 뿐이었
다. 메이런은 문득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한 겨울에
벌거벗은 사람처럼 눈에 뜨이게.
"저런. 춥나보죠?"
조가 말했다. 그러자 쿨란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이 메이런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메이런은 울먹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아까 지불했습니다. 갈 수 있는 방법까지."
쿨란은 메이런을 계속 다독거리면서 말했다. 라몬은 지금 분명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해 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라몬의 관심사는 오직 연구소에 갈 수 있는
방법뿐이었다.
"연구소에 출입할 수 있는 건 등록된 몇몇 이계(異界) 레이스와 그곳
직원들, 그러니까 연구원과 잡역부 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
죠. 그건 바로 대사관 직원의 사찰이에요."
조는 이렇게 말하면서 식탁 위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대사관에서 발행된 출입증이에요. 사찰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는 증명서죠. 아, 미리 준비해 왔다고 놀랄 건 없어요. 어떤 일로 날 찾
아왔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조가 말하자 라몬은 종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조는 종이를 라몬에
게 넘겨주지 않았다.
"난 방법만 알려준다고 했어요. 이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어요."
라몬의 얼굴에는 당혹의 빛이 떠올랐고, 메이런은 조금씩 진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감정이 가라앉은 탓인지 메이런은 쿨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쿨란은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이 증명서 한 장이면 아무리 R-구역이라고 해도 휴먼 레이스를 경계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만둡시다."
쿨란이 극도로 감정을 자제한 이성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더 이상 금
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걸까? 메이런은 걱정이 되었지만 조는 담담하게
쿨란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뭘요?"
"이런 밀고 당기는 거래, 그만 두자는 겁니다."
쿨란이 말하자 조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 웃음소리를 듣는 휴먼 레이
스라면 누구든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마를 지불하면 되겠습니까?"
"이 증명서 역시 아-주 위험한 물건이에요, 쿨란."
조가 말하자 쿨란은 금괴를 하나 품에서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메
이런에게 금괴가 식탁에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쿨란의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조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어떻게 식사들은 맛있게 잘 하셨나 모르겠어요. 여기 식대는 제
가 계산하죠."
나머지가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 조는 재빨리 식당을 떠났다. 식탁에는
조가 남겨놓은 플라스틱 종이 한 장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식당에서 나오는 셋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로즈웰 형 레이스라고 불러."
조금 전 식당에서 본 레이스가 무슨 레이스냐고 묻는 메이런의 질문에
쿨란은 식당 영수증을 챙기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로즈웰 형이라... 이름이 이상하네요. 다른 레이스도 다 이상하긴 하지
만. 로즈웰 레이스면 로즈웰 레이스지 왜 로즈웰 '형' 레이스라고 부르
죠?"
메이런은 쿨란의 말에 이렇게 토를 달았다. 쿨란은 메이런의 말에 아
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메이런은 쿨란의 반응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왜 로즈웰 형 레이스라고 부르는지를 알려면 역사학자나 언어
학자가 동원되어야 할거다."
"그냥 그렇게 부르거든. 아주 오래 전부터. 그냥 관습이지."
쿨란이 자신 없게 말하자 라몬이 얼른 덧붙였다. 메이런이 보기에 두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하고 있는 꼬마아이처럼 보였다.
"아까 그 녀석하고 트랜스 하려고 했지?"
쿨란이 말했다. 쿨란의 목소리는 매우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뇨. 그냥... 생각을 읽어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전 트랜스가 뭔지도
모르는데요, 뭐."
쿨란의 감정이 전염되어서였을까. 메이런도 역시 조심스럽게 쿨란에게
이렇게 말했다.
"녀석들과 트랜스 할 수 있는 레이스는 아마 없을 거다. 녀석들 빼고
말이다."
쿨란이 말했다.
"트랜스는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면서요."
"그래. 분명히 그렇지. 하지만 녀석이 만약에 널 신뢰했다고 해도 불가
능했을 거다."
"... 왜죠?"
메이런이 물었다.
"트랜서는 상대를 두려워해서는 안되거든. 공포심을 느끼는 트랜서는
누구하고도 트랜스 할 수 없어."
쿨란은 잘라 말했다.
"솔직히... 무서웠습니다.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본 적은 처음이었
거든요."
한 참 시간이 지난 다음, 캡슐에 오를 때 라몬이 한 말이었다. 라몬의
얼굴은 수치심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 본다니요? 무슨 말이에요?"
메이런이 라몬에게 물었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을 용병으로 삼았던 두 레이스 중 하나야."
라몬은 차가운 음성으로 이렇게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메이
런은 쿨란을 바라보았다. 메이런은 쿨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쿨란
은 다시 용병생활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메이런은 알 수
있었다. 쿨란이 왜 그렇게 조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는가를.
"그래서 '높은 쪽'이라고 부르는 군요."
메이런이 이렇게 말하자 쿨란은 매서운 눈초리로 메이런을 노려보았
다. 메이런은 그 눈빛에 눌려 캡슐 안에서 뒤로 물러서다가 캡슐 벽면에
머리를 부딪쳤다.
"...미안하구나."
쿨란은 잔뜩 겁먹은 메이런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은 그런
쿨란에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쿨란이 말했듯이,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한 참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캡슐이 레일을 타고 이동하는 소리만
이 세 사람의 사이를 맴돌 뿐이었다. 메이런은 창 밖의 풍경도 눈에 들
어오지 않고 있었다.
"오늘 내가 너무 많은 금을 썼다고 생각하겠지?"
한참만에 쿨란은 엉뚱하게도 이렇게 입을 열었다. 메이런은 얼른 쿨란
쪽을 주목했다.
"난 구두쇠가 아니야. 그저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일 뿐이지."
쿨란은 조금은 과장되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고
개를 끄덕였다. 비록 쿨란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말은 투자를 해야 할 때는 아끼지 말라는 거다. 이게 내가 너한테
주는 네 번째 교훈이란다."
쿨란이 이렇게 덧붙였을 때가 되어서야 메이런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
덕일 수 있었다. 쿨란은 얼른 고개를 창쪽으로 돌렸다.
"그 만티드 레이스한테 확실히 받아내야지..."
창에 비친 쿨란의 입술은 분명 이런 말을 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
마도 쿨란은 이를 갈고 있으리라. 메이런은 얼른 반대편 창 쪽으로 고개
를 돌린 다음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쿨란."
라몬이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찾아냈으니 우리가 찾는 만티드 레이스를 노리는 녀석
들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텐데요."
라몬의 말에 쿨란의 얼굴에 잠시 동요가 일었다.
"너무 늦지 않기만 바랄 뿐이죠."
쿨란의 말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다만 간절한 바램만이 담겨 있을 뿐
이었다. 자존심 때문일지도 몰라. 금괴를 몇 개씩이나 날리고 싶지 않은
건지도. 메이런은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연구소로 출발하면 새벽에나 도착할 것 같은데요. 지금
은 캡슐 운행 간격도 길 텐데... 내일 가는 게 어떨까요?"
라몬이 쿨란에게 물었다. 쿨란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 시가 급합니다. 한 걸음이라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쿨란의 말은 단호했고, 라몬도 메이런도 쿨란을 말릴만한 이유는 가지
고 있지 않았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