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9화 (9/52)

8.헤시시.

암살자는 몸을 천천히 움직여 어둡고 축축한 터널을 지나 천천히 목적

지를 향하고 있었다. 암살자의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가방을 회수하고 목표를 제거한다.' 미끄러운 피부가 차가운 터널의 벽

을 미끄러지자 암살자는 쾌감에 젖어들었다. 간만에 느껴보는 실제 상황

의 즐거움이다. 터널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무로 만들어진 인

형이 아니라 실제 생명체였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암살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약간의 음식과 휴식 정도의 보상이 아니라 낙원으로의 휴가였

다.

암살자는 지난 번 경험했던 낙원을 그릴 수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

리쬐는 해변가. 수많은 수컷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고, 수컷들이 바치는

음식을 맛보며 한가롭게 체온을 유지한다. 끝없이 밀려드는 싱그러운 향.

수컷들은 미끈한 피부를 계속해서 부딪쳐 오고, 따스한 기운을 즐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

암살자는 상상만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낙원을 위해서라면 어두운 터

널을 기어가는 것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암살자는 침을 흘렸다.

*

같은 시간, 시크사는 사친을 따라서 연구실의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연구실 직원들이 잠든 새벽이었다. 연구실의 창 밖으로는 어둠

의 시간이 밤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고, 시크사와 사친은 아무 말도

없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지하의 복도는 조명이 어두운 편이었고, 그래

서 시각보다는 청각에 집중된 시크사의 감각은 매우 예민해졌다. 시크사

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 연구원은 뭘 연구하는 거죠, 도대체?"

시크사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사친에게 물었다. 시키사는 둘 사

이에 아무 대화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걷고만 있자니 꼭 무슨 죄라도 짓

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의 외골격을 연구하지. 휴먼 레이스는 이런 게 없거든. 손톱이나

뼈... 같은 조직이 우리의 외골격과 비슷하긴 하지만 분명 다르거든. 그

강도에 있어서나... 유연성에 있어서나 말이지."

만티드 레이스의 외골격은 분명 단단하고도 딱딱했다. 그 외골격만을

두고 본다면 아마도 금속판이나 플라스틱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

지만 생명체를 이루는 부분들은 어느 것 하나 인공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만티드 레이스의 외골격은

그저 딱딱한 단백질 덩어리만은 아니었다. 휴먼 레이스의 피부와 원숭이

의 피부가 다른 것처럼 만티드 레이스의 외골격은 곤충의 그것과는 완전

히 달랐다. 부드러운 피부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꽤 예민하게 외부 자극

에 반응할 수 있는 신경조직이 있었고, 어지간한 충격에는 부러지지 않

을 만큼의 유연함도 갖추고 있었다. 복도를 걷고 있는 둘의 발소리는 거

의 들리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들으면 빗방울 소리와도 흡사한 소리만

이 작게 복도를 떠돌 뿐이었다.

"이걸 연구해서 뭘 하려는 걸까요?"

시크사는 오른 손으로 왼 팔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갈색의 외골격이

연구소의 어두운 조명을 받아 음침한 빛을 내고 있었다.

"휴먼 레이스는 호기심이 많은 종족이야."

사친이 말했다.

"내가 트랜서에 대해서 말했던가?"

"글쎄요. 아마... 저 밖에서 처음 뵈었을 때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정확

하게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크사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친은 호버콥터에 오르기 전, 카운셀

러니 트랜서니 하는 통 모를 말을 했다.

"전혀 다른, 외계의 레이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서로를 믿고, 신뢰하고, 언어를 습득하고, 또 응용하고... 하지

만 여기 행성 어스에 살고 있는 휴먼 레이스들은 매우 간단하게 그 문제

를 해결한다네."

이렇게 말하는 사친의 머리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카페인

금단 현상일 것이라고 시크사는 생각했다.

"바로 트랜서가 있기 때문이지."

시크사는 트랜서라는 말을 듣는 순간 더듬이 끝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시크사는 순간 걸음을 멈

추고 말았다. 사친이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시크사를 바라보았다.

"예감... 이었습니다."

시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감이라...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단어로군. 여섯 번 째 감각. 이

우주가 만티드 레이스의 더듬이에 불어넣어 준 신성한 기능이지."

시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에도 시크사는 이렇게 더듬이 끝

이 저리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항상 좋지 않

은 일이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시크사는 그런 이야기를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예감을 느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까?"

시크사가 사친에게 물었다. 사친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죽을 때가 가까워오면 그건 예감이라기 보다는 직감에 가깝게 되지."

사친은 이런 불길한 말을 함부로 내뱉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

을 터트렸다. 사친의 건조한 웃음소리는 조용한 복도의 침묵을 깨트렸고,

덕분에 시크사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불안

했던 것이다.

"저..."

"알았어, 알았어. 그만 서두르게. 이제 다 끝났으니까."

사친은 이렇게 말해서 걸음을 재촉하려는 시크사를 막았다. 시크사는

뭐가 끝났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불길한 예감만큼은 지울 수가 없

었다. 아직도 더듬이 끝이 저리는 기분이었다.

사친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목적지인 지하 창고에

닿을 때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

터널은 암살자의 머릿속에 완벽하게 각인 되어 있었다. 암살자는 큰

글자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의 나쁜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환풍구를

통해 움직이는 아주 작은 열기만으로도 충분히 길을 찾을 수 있는 예민

한 열감지 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갈림길에서 왼 쪽으로 돌고, 그리고 그 다음 갈림길에서 다시 왼

쪽으로 돌아, 환풍구를 지나... 암살자는 환풍구 앞에서 달콤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아마도 피냄새인 듯 싶었다. 암살자는 무엇이 피를 흘리고 있

는지 궁금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낙원이 눈앞에 있는데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쓸 겨를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몇 번의 갈림길을 더 지나, 암살자는 목적지인 환풍구 앞에 멈추어 섰

다.

바로 이 밑이다.

암살자는 환풍구 밑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열기를 감지해 내기 위해서

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암살자는 순간 실망했다.

일이 힘들어진 것이다. 만약 목표가 지금 있다면 암살자는 순식간에 환

풍구를 뚫고 내려가 목표를 살해하고 가방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

만 이제 암살자는 조용히 환풍구를 지나 목표가 돌아올 때까지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암살자는 환풍구에 달려 있는 환풍기를 지나기 위해 머리 옆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작은 팔을 움직였다. 암살자의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왔다.

*

지하 창고에 당도했을 때, 사친은 시크사를 바라보았다.

"여기야. 자네가 원하는 게 있는 곳이."

사친은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문에 있는 카드 식 잠금

장치에 카드를 대었다. 그러자 문은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열리

기 시작했다.

"여긴 개인 창고라네. 연구원 하나 당 아주 작은 방 하나씩이 주어지

지. 여기에 아주 개인적인 물품들을 보관해 둘 수 있게 배려해 주는 거

지. 감시 카메라나 도청장치 같은 건 없어."

"저 같으면 틀림없이 무슨 장치를 해 두었을 겁니다."

시크사는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서 방안을 살피며 말했다.

문안에는 만티드 레이스 하나가 겨우 누울 수 있을만한 공간에 선반

몇 개가 놓여진 작은 공간이 두 만티드 레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반

에 놓여 있는 것은 시크사의 눈에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만티드 레이스

의 공용어로 쓰여진 책자와 고향 행성의 풍경이 담겨있는 홀로그램 사

진, 아마도 사친이 모은 것이 분명한 기괴한 형태의 작은 돌멩이들, 그리

고 반군의 상징인 갈색 날을 가진 낫이 눈에 들어왔다.

"아..."

시크사는 갈색의 낫을 바라보는 순간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친에 비하자면 고향을 떠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 시크사였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반군의 상징을 먼 외계의 다른 행성에서 발견하게 될 줄

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이런 곳에 비밀을 숨겨둘 지 모른다... 이런 말이겠지, 자네 말은?"

사친은 선반 위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예."

시크사는 사친의 목소리가 꼭 자신을 꾸중하는 것처럼 들려서 조심스

럽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가끔 이곳에 내려와서 이렇게 내 추억의 물건들을 바라보곤 한

다네. 자네도 한 번 볼텐가?"

사친은 이렇게 말하면서 들고있던 돌을 시크사에게 내밀었다. 시크사

는 돌멩이가 꼭 깨지기라도 하는 물건인 듯 조심스럽게 받았다.

은은한 갈색이 흐르고 있는 돌의 표면은 손때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유리를 녹여 발라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40년이었네, 40년..."

사친이 굳이 이렇게 덧붙이지 않았어도 시크사는 사친이 느꼈을 감정

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에서 나온 기름이 묻은 돌만 보아도

그건 충분히 알 수 있을 거였다.

"여기에 휴먼 레이스 외의 모든 레이스들은 다 떠돌이에 외톨이 들이

지. 사생활이라고는 가질 래야 가질 수 없는 친구들이야. 이런 친구들에

게 추억을 느끼고 향수에 젖을만한 시간이 없다면, 그리고 그럴만한 공

간이 없다면... 아마 대부분 미치거나 돌아버렸을 걸세."

"하지만..."

시크사는 그래도 뭔가 장치를 해 두지 않았겠냐고 물으려다가 그만 두

었다. 사실여부야 어찌되었건 이곳은 사친만의 공간이었다.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지금에 와서 동족에 의해 그 사실이 부정된다면 사친의 마음

이 편할 턱이 없을 거라는 게 시크사의 판단이었다.

"어떤 레이스들은 이곳에 대사관도 마련해 놓고 그곳에 고향별의 정원

을 꾸미고, 고향별의 동물을 기르고... 그렇게 지낸다더군."

"여기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요?"

시크사는 화제가 정치 쪽으로 도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되

물었다.

"말했듯이 행성 어스에는 귀중한 재원들이 있어. 바로 트랜서들이지.

다른 곳에도 트랜서는 있지만 행성 어스 만큼 많지는 않아."

사친은 계속해서 돌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크사는 이 음습하

고 좁은 공간에서 40년 동안이나 돌멩이를 만지작거렸을 사친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자 사친이 카페인 중독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

어졌다. 아마 시크사 자신이 사친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별 다르지 않았

을 거였다.

"트랜서가 있다면 아무리 새로운 종족을 접하게 되더라도 당황하지 않

을 수 있지. 세력을 확장할 수도 있고, 조정할 수도 있고. 그래, 조정. 균

형을 잡는 일 말일세. 아마 녀석들이 원하는 게 그걸 지도 몰라..."

"행성 어스는 그리 부유한 별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시크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휴먼 레이스가 우주의

세력을 운운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 휴먼 레이스야 물론 트랜서가 있을 뿐이지."

사친은 이렇게 말하고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 쉬었다. 내

쉬는 숨이 가쁘게 느껴졌다.

"커피 한 잔 마셔야겠군."

사친은 눈에 뜨이도록 손을 떨면서 선반에 올려놓았던 유리로 된 커피

통을 열었다. 커피 통 안에는 곱게 빻아진 커피가 절반 정도 들어있었다.

"물 떠다 드릴까요?"

시크사는 독한 커피 향이 퍼져서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래도 사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사친은 시크사를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

다. 시크사가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사친은 커피를 한 움큼 쥐어 입에

넣었다. 그리곤 잠시 고개를 들고 카페인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크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페인 중독자가 되어 버린 사친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커피를 그냥 먹는 모습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이다.

"내 건강을 걱정하는 건가?"

카페인 기운이 도는지 사친이 원기를 되찾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 예..."

"걱정 해 줄 필요 없어. 이제 내 명은 얼마 남지 않았네."

사친은 이렇게 말하고는 뭐가 우스운지 혼자서 큰 소리로 웃었다. 시

크사는 그런 사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혹시 갈색의 여왕 계

획도 저 노인의 광기에서 나온 미친 계획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다 들

지경이었다.

"자. 신세 한탄은 이쯤 하고, 본론에 들어가지."

웃음을 그친 사친은 이렇게 말하면서 선반 제일 아래 칸에 있는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머리통 반 만한 크기의 까만 상자였다.

"나는 이걸 트로이의 목마라고 이름 붙였다네. 그리고 이 작은 목마를

만들어 내는 데 걸린 시간은 10년이었네."

시크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30년 동안이나 이곳에 잠들어 있었을 갈색

의 여왕. 시크사는 어쩌면 역사를 뒤바꿀 지 모를 일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대단한 행운처럼 여겨졌다.

"그 뒤 10년간은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지. 휴먼 레이스의 컴퓨터 덕이

었어. 나는 이것이 가지고 올 엄청난 결과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었네.

그리고..."

"그리고?"

시크사는 더듬이 끝이 강렬하게 반응하는 걸 느끼면서 이렇게 되물었

다. 그 느낌은 광기와도 같은 뜨거운 떨림이었다.

"성공이었어. 내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는 게 10년을

거듭한 시뮬레이션의 결과였어. 반드시 이루어 질 지어다."

시크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크사

도 따라 웃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사친의 웃음은 진심에서 나

오는 기쁨의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메말라 있었다.

"나는 알을 낳아 본 경험이 있어."

웃음을 그치자마자 사친이 한 말이었다. 조금 엉뚱한 말이기는 했지만

시크사는 일단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다른 곳도 아닌 여기 연구소에서 말이지. 내가 이곳으로 향하던 날,

우리 반군에 몇 안 되는 수컷 중 하나가 나에게 정액을 주었다네."

사친의 겹눈이 초점을 잃고 어지럽게 흔들린다 싶더니 잠시 균형을 잃

고는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시크사는 얼른 사친을 부축했다.

"냉동시켜서 가지고 왔지. 여기로..."

시크사는 꼭 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결코 울지는 않을 것이었

다. 운다는 건 자신의 행위를 후회한다는 뜻이라는 만티드 레이스의 교

훈을 사친이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실험이 끝나고, 난 10년을 기다렸어. 아까 그 리사민이라는 연구원과

함께 노닥거리면서 말이야."

시크사에게 기댄 채로 사친이 말했다. 시크사는 사친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10년은 커피와 함께 보냈지."

"이제 기다림은 끝나셨습니다."

시크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친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친은 시크사의 어깨에 한 손을 의지한 채 똑바로 설 수 있었다.

"그럼..."

"아니."

시크사가 검은 상자에 손을 대려 하자 그 손을 물리치면서 사친이 말

했다.

"지금은 아니야."

시크사는 사친의 말에 짜증이 났다. 아무리 사친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하세요."

시크사는 화가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그만 둬야 할 건 자네야."

사친은 능글맞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시크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크사가 막 뭐라고 쏘아주려는데 사친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먼저 입

을 열었다.

"내가 이 계획을 입안했다는 걸 잊었나? 계획을 세우고 지금까지 추진

해 온 건 바로 나라네, 시크사."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건 40년 전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란 말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세를

뒤집을 만한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면..."

"알고 있어. 자네가 날 찾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걸 말해주고 있으니

까 말일세."

사친은 검은 색 상자를 품에 넣으면서 말했다.

"갈색의 여왕 계획은 바로 최후의 수단으로 개발되어진 거라네. 그래

서 내가 여기로 온 거고... 날 비겁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좋아.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고 뒤로 물러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다고, 질 거라고 생각

하고 싸움에 뛰어들었다고 비난해도 좋아. 하지만 말일세,"

사친은 카페인 중독자답지 않게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않고서 이렇게

죽 말을 늘어놓은 다음, 잠시 숨을 골랐다가 마지막을 이었다.

"전세는 그렇게 한 순간에 뒤집어 지는 게 아닐세."

시크사는 별 말 없이 사친을 따르기로 했다. 아무리 늙고 카페인에 쩔

어 살고 있다고 해도 지금 사친의 모습은 냉정해 보였다. 사실 시크사는

사친이 한 '비겁자'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만약 싸움을 피해 뒤로

돌아서는 것이 비겁이라면 지금의 시크사야 말로 비겁자일 거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주지."

사친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끝으로 시크사의 더듬이를 톡 소리가 나도

록 건드렸다. 시크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했고 사친은 웃음을 지었

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18 -

목표지점에 도착한 암살자는 방을 둘러보았다. 혹시 가방을 두고 나

갔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가방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였다. 만약 방안에 있기만 하

다면. 침대 시트를 뜯어 그 속에 가방을 숨기거나, 혹은 금고 속에 가방

을 숨겼다고 해도 그것을 찾아내는 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

만 '목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암살자의 예리한 후각이

가방에서 풍겨 나오는 보물의 냄새를 쉽게 감지했을 것이다. 중요한 물

건은 항상 품고 다니는 게 옳다. 보안장치에 의지하는 존재라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게 암살자의 생각이었다.

암살자는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창문에는 커튼이

붙어 있었다. 암살자는 몸을 움직여 천천히 커튼 뒤로 향했다. 그리고 몸

을 꼿꼿이 세워 기둥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암살

자는 침을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모든 감각을 청각에 집중시켰다.

목표가 돌아올 때까지 한 시간이 걸릴지, 두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

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시간은 암살자에게 있어서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

사친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시크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온 소중한 왕가의 보물이 담겨있는 가방을 꼭 껴안고 있

을 뿐이었다.

창고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시크사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끝만

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크사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

저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 죽어버려도 좋은 심정일 뿐이었다. 사친이 시

크사의 어깨를 한 번 치지 않았다면 어쩌면 시크사는 정말로 죽을 때까

지 멍하니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시크사는

사친이 자신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친은

검은 상자를 집어들었다.

"외로워지면 어떤 레이스건 간에 별 희한한 짓을 다 하게 되지."

방에서 나와 카드키로 다시 문을 잠그면서 사친이 말했다.

"나는 여기서 휴먼 레이스의 고대사를 공부했다네."

"대단... 하시군요."

시크사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기운이 없다고 해도 언제까지

고 입만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휴먼 레이스의 고대사라. 시크

사의 입장에서도 호기심이 생길법한 학문이었다.

"그런데 역사를 찾아 보다 보니까 헤시시, 라는 말이 나오더군."

"뭡니까, 그 헤시시 라는 게."

시크사가 사친에게 물었다.

"카페인 같은 거야. 일종의 마약이지."

"아..."

기껏 공부했다는 게 마약이라니. 시크사는 이렇게 생각했다.

"고대의 휴먼 레이스는 헤시시 라는 마약을 아주 흥미로운 곳에 사용

했더군."

"마약의 용도는 하나 아닌가요? 현실에서 빠져나가 꿈을 꾸는 것."

"그건 기능이지 용도라고 할 수는 없어."

사친이 말했다.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휴먼 레이스도 자객을 사용했다네. 알지?

자객이라는 말. 정적이나 꼭 죽여야 할 대상을 죽여주는 직업 말일세."

"예... 우리도 많이 가지고 있었죠."

시크사는 반군의 수많았던 자객들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수많은 초록

색 만티드 레이스 총독들이 암살되거나 암살의 대상이 되었다. 초록 만

티드 레이스에게 영혼을 판 갈색의 배신자들도 자객의 목표가 되었고 갈

색 만티드 레이스의 저항을 누르려는 장군들도 암살 대상이 되었다. 비

록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궁성에 침입하여 국왕을 암살하려고 시도

했던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자객은 살인을 저지르고 나면 반드시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네. 장거리 무기라고는 활 정도 밖에는 없는데, 활은 예나 지금이

나 휴대하고 대상에게 접근하기에는 너무 큰 무기이지."

"단검을 썼나요?"

"그래. 단검이었지. 아주 가깝게 대상에 다가가 단검으로 한 칼에!"

사친은 손으로 베는 듯한 시늉을 해 보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겠군요."

시크사는 암살자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

다. 마지막 순간, 그는 낙원을 꿈꾸었을까? 아니면 속았다는 걸 깨닫고

분노를 터트렸을까? 아니면 그저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그래... 그래서 헤시시를 썼던 거라네."

사친이 대답했다.

"그런데 마약에 취해서 실수하거나 하지는 않았을까요?"

한 참이 지난 다음, 시크사가 사친에게 물었다. 사친은 고개를 가로 저

었다.

"아니. 절대로 자객이 헤시시에 취해서 접근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

그저... 꿈을 보여 준 것뿐이지."

"꿈이라뇨?"

"헤시시에 취한 상태에서 낙원을 보여줬던 거지. 자객에게. 온갖 과일

과 고기, 음료수들... 그리고 남성 휴먼 레이스들이 꿈꾸는 완벽한 여성

휴먼 레이스들... 그런 꿈을 보여주었다네. 참. 말했던가? 이 행성에는 남

성과 여성의 비율이 1:1이라는 거 말이야. 아... 그래. 말했었군. 하여간

그 꿈이 깨었을 때가 되면, 그 자객에게 약속을 했다네."

"성공하고 돌아오면 그 낙원에서 평생 살게 해 주겠다던가?"

사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꿈을 보여줬던 거지. 그래서 내게는 말일세, 그 헤시시 라

는 말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꿈이라는 말처럼 여겨진다네..."

시크사는 사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듬이 끝이 다시금 저려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크사는 꼭 사친이 죽을 자리를 향해 가고 있

는 것처럼 느껴졌다.

갈색의 여왕 계획에 대한 사친의 설명을 들었을 때, 시크사는 큰 충격

을 받았다. 그리고 카페인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친의 심정을 이

해할 수 있었다.

내가 죽은 뒤의 시간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시크사는 단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의문을 품었다. 그러자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같이 허망하게만 여겨졌다. 나도 낙원을 꿈꾸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분노를 터트려야 하나? 아니면 그저 담담

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나. 시크사는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은 기분

이었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시크사는 가장 먼저 자신이 목숨처럼 여기고 있

는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왜? 들고 조금 나갔다 왔다고 해서 다치기라도 했을까봐?"

사친이 물었지만 시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용물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도 떠나기 전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왕가에서는 보물이겠지만, 여기서는 그냥 가방

하나에 불과하니까 말이야. 어쩌면 가방 하나의 가치도 없을 지 몰라."

사친은 이렇게 말하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사친은 커튼 뒤에

작은 기둥이 하나 더 생겨 있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시크사 역시 그

기둥은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저 기둥으로 밖에

는 알지 못했을 거였다.

기둥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앞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시크사는 뭔가 넘어지는가 싶어서 막으려고 커튼 쪽으

로 다가섰지만 사친이 조금 더 빨랐다. 창가로 다가가고 있던 사친은 무

너져 내리는 기둥을 막으려고 손을 뻗었다.

"물러서!"

기둥을 붙잡자마자 사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크사는 반사적으로

다가서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나자, 시크사는 기둥처럼

보였던 것이 기둥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기둥은 얼룩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노란색 몸체에 검은 색

얼룩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였다. 몸에는 사지가 달려 있지 않았고 피부

는 매끄러웠다. 기둥 같은 몸 꼭대기에는 거대한 머리가 달려 있었는데,

길게 찢어진 눈이 보였고 그 밑으로 두 갈래로 갈라진 긴 혓바닥과 입에

드러나 있는 두 개의 긴 송곳니는 이 생명체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을 거

라는 걸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도망쳐! 빨리!"

시크사는 사친의 말에 일단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레이저 무기를 집

어들었다. 그리고 사친을 바라보았을 때, 시크사는 그 길다란 기둥같은

몸체가 유연하게 휘어져 사친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몸체의

끝에 달려있는 머리에는 두 개의 커다란 돌기가 돋아 있었다. 아마도 평

소에는 몸에 붙어서 눈에 뜨이지 않다가, 필요한 순간에는 솟아나 손의

역할을 하는 돌기인 모양이었다.

"Hhulock... Qacka ik!"

레이저 무기를 들고 있는 사친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 생명체가 이렇

게 낮게 소리쳤다. 높고 날카로운 음성. 시크사는 의미 보다 그 언어가

전하는 섬뜩함에 몸이 굳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 생명체가 한 말

의 뜻은 '다음은 너니까 기다려!'였다.

생명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는 붙잡고 있는 사친을 내려다보

았다.

"Ssacka monta... Ffielief..."

그 생명체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치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음성이

었다. 시크사는 여전히 그 의미는 알지 못하고 그저 겁에 질렸을 뿐이지

만, 그 말은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는 뜻이었다.

"트로이의 목마를... 잊지 말게."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사친의 말이었다. 시크사는 멍청하게도 그저

그렇게 말하는 사친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친이 말을 마치자 두 개의 긴 송곳니가 사친의 목에 박혀 들어갔다.

시크사는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송곳니가 들어가

는 순간, 반 이상 시커멓게 타들어간 사친의 겹눈은 시크사를 멍하니 바

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 눈이기는 했지만, 시크사는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윽고 사친의 목을 물어뜯었던 입이 다시

벌어졌고, 그와 동시에 젖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

크사의 목이 꼭 절반쯤 떨어져나가 대롱거렸다. 그리고 곧이어서 목이

달려 있던 자리에서 초록색의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Aagg....ak!"

생명체는 불쾌하다는 듯이 이렇게 소리치며 조금 전 까지 사친의 목이

달려 있었던 몸뚱아리를 바닥에 팽개쳤다. 사친의 몸은 마치 잠에 취해

뭔가를 찾으려는 듯 잠시 휘청거리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시크사는 바닥

에 떨어진 사친의 목을 보았다. 사친의 남아 있는 겹눈의 색깔이 순식간

에 탁하게 변했다.

가방을 지켜야 한다.

시크사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들고있던 가방을 꼭 껴안고는 본능적으로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그 괴물에게 잡히

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Hhilla hhacka boon..."

등뒤에서 바로 괴물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시크사는 뒤를 돌아보

지 않았다. 그저 복도를 뛸 뿐이었다. 다리가 달려 있지 않은 괴물은 몸

의 앞부분을 든 채로 나머지 몸을 S자 형태로 움직이면서 놀랄 만큼 빠

른 속도로 시크사를 따라잡고 있었다.

"Hhilla hhacka boon..."

다시 들려온 음성은 바로 등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시크사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리나 바로 그 순간, 시크사는 뒤를 돌아보

고 말았다. 괴물이 뿜어내는 숨결이 바로 목뒤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

제는 끝인가. 시크사는 겹눈의 초점을 몸 쪽으로 돌렸다.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때, 휴먼 레이스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시크사는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틀었다. 소리를 낸 쪽에는 휴먼 레이스 셋이 서 있었다.

하나는 키가 크고 마른 편인 휴먼 레이스였고, 또 하나는 그보다는 작았

지만 단단하다는 인상을 주는 휴먼 레이스였다. 나머지 하나는 키가 유

난히 작았는데, 아마도 어린 휴먼 레이스인 모양이었다.

단단한 인상의 휴먼 레이스가 들고 있던 무기를 발사하였다. 무기에서

는 더듬이가 휘청거릴 만큼 커다란 소음과 함께 뭔가가 발사되었다. 시

크사는 반사적으로 가방을 품에 안고 몸을 숙이면서 괴물을 바라보았다.

괴물에 몸을 작은 금속물질이 두들기는 것을 시크사는 볼 수 있었다. 괴

물은 비명소리와 함께 몸을 뒤틀었지만 그 금속물질은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무기를 발사한 휴먼 레이스는

포기하지 않고 연달아 무기를 다시 발사하였다. 그 때마다 괴물은 비명

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었고, 나중에는 화가 난 듯 휴먼 레이스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서펀트!"

가만히 서 있던 비쩍 마른 휴먼 레이스가 소리쳤다. 시크사는 경황이

없었지만 휴먼 레이스가 내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다.

괴물은 마른 휴먼 레이스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었다. 마른 휴먼 레이

스는 몸을 숙여 전투자세를 취했다. 휴먼 레이스가 격투에 강하다는 소

리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설마 맨몸으로 맞서겠다는 걸까?

하지만 자세를 취하는 휴먼 레이스를 본 괴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

을 틀어 뒤로 정신없이 도망쳐갔다. S자로 몸을 뒤틀면서 도망치는 괴물

에게서 마치 바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트로이의 목마.

일단 위험이 사라지자 시크사는 검은 상자를 생각했다. 이제는 죽어버

린 사친이 40년 세월을 바친 상자. 시크사는 벌떡 일어나 다시 방으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방문을 열었을 때, 시크사는 목이 떨어져 나간 사친

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잃을 때

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상자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친의 품

에는 그 상자가 없었다. 분명히 지하 방에서 나올 때 집어넣는 것을 보

았는데... 시크사는 털쩍 주저앉아 버렸다. 더듬이 끝이 아직도 떨리고 있

었다. 눈앞에는 사친의 끊어져 나간 목이 있었고, 나머지 몸뚱아리에서는

초록색의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크사는 울고 싶은 심정이

었다. 하지만 울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만티드 레이스는 결코 울지 않는

다. 우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후회의 의미인 것이다...

뒤따라온 휴먼 레이스 셋은 문을 열고 시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

크사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누구 편인지도 알 수 없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

다. 지금 시크사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인 것이다.

"젠장. 한발 늦었군"

"한 발 더 늦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쿨란. 당신 말이 맞았군

요. 내일로 미뤘더라면 정말 시체 치우는 일이나 하게 될 뻔했어요."

휴먼 레이스는 자신들의 언어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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