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10화 (10/52)

9.서펀트 레이스.

사건 현장에는 레이저 차단선이 그려졌고, 도착한 경찰은 감식팀과 수

사팀으로 나뉘어 연구소를 1cm 간격으로 수색하기 시작했다. 자고 있던

연구원들이 불려 나왔고 중요 참고인인 시크사라는 이름을 가진 만티드

레이스는 M.P.O로 호송되었다. 그리고 쿨란과 라몬, 메이런은 연구소에

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현장에서 담당 수사관 앞에서 일차 심문을 받고

있었다.

연구소를 관할로 두고 있는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수사관은 하

필이면 타이론이었다. 타이론은 몹시도 짜증스럽다는 듯, 졸다 나왔는지

부시시해진 머리를 긁으며 쿨란에게 질문을 쏟아 붓고 있었다. 물론 쿨

란은 아무렇게나 대꾸하면서 똑같이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는 메이런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나이 먹은 어른들이 아이처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쿨란. 자네 입장을 이해 못 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어떻게 여기로 오게됐는지도 말못하겠다, 왜 왔는지도 말못하겠

다, 총을 왜 발사했는지도 말못하겠다, 죽어있는 저 만티드 레이스에 대

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 좋아, 좋아. 하나만 말 해줘, 쿨란. 그

출입증은 어디서 났어? 대사관 직인이 찍혀 있던데."

"미안하지만 타이론. 그건 내 직업상의 비밀이야."

쿨란은 대답하기 지쳤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했다.

"미안합니다만, 타이론 수사관."

라몬은 대화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인지 직함으로 타이론을 불렀다.

"지금 나는 공무 수행중입니다. 공무에 협조 해 주시죠."

"예, 예. 알고 있습니다, 연방 수사관 나리."

타이론은 숙직 때문에 뻐근해진 굵은 목을 풀면서 대답했다.

"절대로 관할권을 침해하거나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

다, 타이론."

"그렇군요. 비니."

타이론이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예."

경비대 복장이 틀림없는 사내가 타이론의 말에 대답했다. 아마도 경비

대에서 경찰서에 파견온 일직 경비대원인 모양이었다. 경비대원은 체구

가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타이론 앞에 서니 목 하나가 더 작아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 연방 수사관께 설명해 드려."

타이론이 털투성이의 억센 팔로 라몬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예?"

비니라고 불린 경비대원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이렇게 되물었다. 그리

고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이론의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주먹이 당장

비니의 뒤통수로 날아갔다. 비니는 뒤통수를 감싸쥐면서 허리를 숙였다.

"이 연방 수사관께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관할권 침해에, 수사 방해

까지 더한 행동이라고 설명하란 말이야!"

타이론은 비니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뭔가 화가 잔뜩 난 듯한 모

습이었다. 하지만 메이런의 눈에 그런 타이론은 어쩐지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예, 예. 지금 연방 수사관님께서 하고 계신 행동은..."

"됐어! 내가 지금 말했잖아!"

타이론의 두 번째 주먹을 피하기 위해서 비니는 다시 얼른 고개를 숙

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늉만 했을 뿐 주먹이 날아가지는 않았다. 예상

했던 주먹이 날아들지 않자, 경비대원은 얼른 고개를 도로 내밀고 의아

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타이론은 그런 경비대원의 머리를 쓰다듬

어 주었다.

"좀 멍청하기는 해도 일은 곧잘 합니다. 이 비니라는 친구 말이죠. 적

어도 제가 하는 일에는 아주 협조적이거든요. 한 번은 말입니다 뒷골목

에서 홈리스들과 한 판 붙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 임무는 매우 긴박한 임무입니다, 타이론."

라몬은 타이론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연방 정부에서 관할하고 있는 극비 작전을 수행중입니

다. 관할 구역 경찰력을 함부로 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

금 타이론 수사관의 행동은..."

하지만 라몬은 이내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닥쳐."

타이론이 라몬을 노려보면서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

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주위는 온통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건 현장

을 감식하고 있던 감식반과 구경나온 연구원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연방 수사관 나리. 댁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긴 내 관할이야. 그리고 내 숙직 시간 중에 내 관할 구역에서

만티드 레이스 하나가 죽었어. 아주 귀중한 망명객이 죽었단 말이야. 그

렇다면 최소한 보고서를 쓸 정도는 협조 해 줘야 하잖아?"

타이론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매서운 기운은 더해가는 기분이었

다. 이중에서 라몬이 뭐라고 한 마디만 더했다가는 큰 일이 날 거라는

걸 모르고 있는 사람은 라몬 뿐인 것 같았다. 라몬은 지지 않겠다는 듯

오히려 타이론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타이론 수사관. 당신 관할이면 다야? 똥이나 주워 먹는 개도 자기 동

네에선 목소릴 높힌다더니만..."

"뭐?"

타이론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분위기였

다. 사태를 진정시킨 것은 쿨란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짜증 그만 부려, 어린애처럼. 내가 도와주지. 까짓 보

고서 작성하는 게 뭐가 힘들겠어?"

쿨란이 타이론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타이론은 라몬에게서 눈

을 떼지 않았다.

"우리 서장 알잖아. 대충 보고서 작성했다가는 당장 감봉에 면직이야."

타이론은 쿨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국 보고서 한 장 쓰기 위해서

라몬에게 화를 낸 걸까? 메이런은 타이론의 행동이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타이론. 이번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르는 거 아니잖아. 안 그래? 나는

자네가 지금 나한테 이렇게 증인 다루듯 하는 게 맘에 안 들어."

"맘에 들건 안 들건, 그건 자네 사정이야."

타이론은 딱 잘라 말했다.

"생각 좀 해 봐. 난 시의 경찰 수사관이야. 그런 내가 민간 업자인 자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건 무슨 상관이 있겠나? 나는 일개 사건 담당 수

사관이고,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보고서를 쓰고 사건을 조사하는 거

야."

쿨란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시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니까..."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는 쿨란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메이런은 쿨란의 생각을 대충 알

수 있었다. 타이론이 부탁한 일은 아주 비공식 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이

렇게 얽히게 된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우리의 행위를 지원해 주는 것처럼

보여선 곤란하다. 쿨란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쿨란. 여기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고."

타이론은 레이저 차단선 뒤편에서 사건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연구원

들 쪽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 한마

디로 모든 것은 확실해 진 거였다.

"좋아. 순순히 조사에 응하지.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다행이로군. 뭔가? 돈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면 들어주지."

타이론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타이론의 웃음을 보면서

만약 고릴라가 곧바로 인간으로 진화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

어졌다.

"여기 연방 수사관께서 자네들이 신병을 확보하고 있는 만티드 레이스

를 중요 참고인으로 소환할 걸세. 그 과정을 도와주게."

쿨란이 말하자 라몬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라몬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씩씩거리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그건 좀 곤란한데."

타이론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메이런은 타이론의

이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타이론은 그저 한 번 거부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것뿐이었다. 공식적인 입장으로.

"연방 수사관께서 설명해 주실 거야. 연방 수사관 수사권에는 중요 참

고인이라고 판단되는 존재는 누구 건 48시간 동안 신병을 확보할 수 있

어."

"그런 법이 있었나요?"

라몬은 아주 불쾌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지만 전혀 불쾌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메이런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연방 수사법에 있습니다."

"서류로 제출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저기 서 있는 덜떨어진 비니한테

뭘 하면 좋을지 기록으로 전해 줄 수 있죠."

타이론은 비니의 어깨에 손을 두르면서 말했다. 비니의 얼굴은 한 대

더 맞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니. 가서 이 분이 서류 작성하시는 거 도와 드려. 성의를 다해서."

타이론은 비니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 비니는 알겠다고 했다.

"필요한 게 있다고 하시면 아낌없이 지원해 드리라고."

비니는 라몬과 함께 현장을 빠져나갔다.

"어디로 데려 가는 건가? 몰래 연방 수사관을 묻어버리려는 건 아닐

테고."

쿨란이 빈정거렸다.

"아마 연구소 밖에 세워진 이동 경찰 사무실로 갈 거야. 거기서 참고

인 신병 인도를 위한 서류를 작성하겠지. 시 경찰을 너무 무시하지 말라

고, 쿨란. 아무나 묻어버리는 건 경찰의 일이 아니야."

"어련하시겠어."

쿨란은 메이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쿨란이 자신

에게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었지만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쿨란은 짜증 섞인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짜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지

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우리도 조용한 곳으로 갈까? 자네한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

어서."

"그러지."

타이론은 쿨란과 함께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메이런은 쿨란의 뒤

를 따랐다.

*

이동 경찰 사무실은 호버콥터였다. 부상장치가 갖추어진 이동 경찰 사

무실은 간단하게 줄여서 M.P.O라고 불렸다.

M.P.O는 어지간한 집 한 채 만한 크기를 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부상

장치와 거대한 프로펠러가 장착된 M.P.O의 위용에 입을 떨 벌렸다.

"처음 보니? 내가 알려 주지. 저건 사이렌이다. 급한 일이 있을 때 여

기 경찰 아저씨들이 울리는 거야. 급한 일이라는 건 대부분 신호를 위반

해야 할 일이 있거나 마누라가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를 할 때지."

쿨란이 M.P.O위에 붙어 있는 사이렌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메이런은

그 말이 농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타이론은 그런 쿨란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어찌되었건 둘과 함께 M.P.O안으로 들어갔

다.

M.P.O안에는 일직 근무자들로 분주했다. 서류를 가지고 움직이는 근

무자, 책상에 앉아 뭔가 분주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근무자, 어디선가 잡

혀 온 잡범. 타이론은 두 사람을 자신의 개인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내부는 쿨란의 사무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깔끔해 보이는 책상

하나. 책상 위의 단말기 몇 개와 파일들. 벽면의 책장과 시계. 이런 게

휴먼 레이스 사무실의 표준일지도 모르겠다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앉아."

"여기에 오면 마음이 편해져. 도청 장치도 없고, 감시자도 없지. 누가

감히 시경 수사관을 노리겠어?"

쿨란은 책상 맞은 편에 있는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

다. 메이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쿨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칭찬으로 알아듣지."

"딱 하나, 그 책상 밑에 있는 녹음기는 마음에 안 들어. 그 안에 들어

있는 테잎이 나중에 어떻게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르거든."

쿨란이 말하자 타이론은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이런 식이 아니었으면 동료들이 의심할

수도 있었거든. 알잖아, 우리 서장. 언제나 보안에 철저하지."

"하긴. 받아먹은 뇌물 이야기가 위쪽으로 흘러 들어가면 곤란할 테니

까 말이야. 이거, 녹음 되고 있는 거 맞지?"

쿨란은 능청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타이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

서 책상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녹음 같은 거 안 할 테니 이제 좀 그만 하게."

"좋아."

쿨란은 좋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메

이런은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는 쿨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하여간 쫌팽이 같은 공무원 근성은 아무리 수사관이라고 해도 별 수

없군. 뻔히 일 시켜놓고는 사람을 이렇게 골탕먹이나?"

쿨란은 타이론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임무에 충실한 걸 너무 비난하지는 말게."

"몸 사리는 게 임무에 충실 한 건 아니야. 어느 도시를 가도, 어느 레

이스를 만나도 공무원은 다 똑같아. 왜 그런지 아니?"

쿨란은 메이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물론 메이런은 고개를 가로저었

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은 일을 해 주고 일 시킨 사람에게서 돈을 받

지. 그러니까 성실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공무원은 세금에서 월급을 받

거든."

"쿨란."

"세금이 뭔지는 알지? 세금은 임자 없는 돈이야. 임자 없는 돈을 주워

가지는 친구들은 항상 피해의식에 시달리지. 내가 이 돈을 훔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러다가 이 돈을 더 이상 주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좋아, 다 좋아. 이제 그만 해 둬."

타이론은 점잖게 쿨란을 말렸다. 하지만 조금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타이론의 험악한 인상은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크게 일그러졌다.

"그래. 불평은 이 정도로 해 주지."

타이론의 표정 때문인지 쿨란은 대충 접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

한 모양이었다.

"고맙군. 이제 말해 주게. 어떻게 된 일인지."

타이론은 손을 모아서 깍지를 끼면서 말했다.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해. 녀석들도 정보를 입수한 거야. 자객을 샀나 본데... 하나는 죽

였고, 또 하나는 놓쳤어. 죽은 쪽은 원래 여기 있던 만티드 레이스고 산

쪽은 지금 라몬이 신병을 인계 받고 있는 만티드 레이스고. 산 쪽의 이

름이 시크사. 그리고 시크사라는 이름의 만티드 레이스가 훔친 거, 생각

보다 훨씬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어. 아는 친구 하나 없는 행성에서 자객

을 사서 투입하는 일은 정말 무리일텐데 말이야."

"그랬군."

타이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옷 속에서 비닐 주머니에 담겨 있는 것을

꺼내었다. 메이런은 아마 타이론이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나 보다 싶었다.

"증거야. 바닥에 굴러다니는 걸 우리 감식팀이 찾았지. 연방 수사관이

쏜 357탄이지? 완전히 찌그러졌더군. 관통하지 못한 것 같던데. 자객은

랩타일 레이스였나?"

"비슷해. 실은 서펀트 레이스였다네."

메이런은 쿨란이 연구소에서 그 괴물과 마주쳤을 때 서펀트! 하고 소

리쳤던 걸 기억했다.

"서펀트 레이스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피부가 비슷하다는 거지. 팔다리가 없고 대신 머리 옆에 주머니가 달

려 있는 레이스야."

"알겠어. 이제 기억이 나는 군."

메이런은 조금 전 보았던 무시무시한 그 레이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

다. 길다란 몸은 S자로 휘어지면서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앞으로 치켜

든 몸통은 키가 2미터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와 갈라

진 혀를 내두르며 내는 날카로운 숨소리... 메이런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

리를 쳤다.

"녀석들은 몸이 길어서 구멍만 있으면 마음대로 들어가고 나갈 수 있

지. 연구실의 환풍구나 창문, 어쩌면 수도관이나 하수도관을 타고 들어갔

는지도 모르겠어."

"그야 조사해 보면 알겠지. 그런데 피부가 상당히 강한가 본데."

타이론이 비닐 안에 담겨 있는 찌그러진 탄두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

다.

"빔이라면 모를까 보통탄으로는 어림도 없어. 작은 상처 하나 남기기

힘들지."

"꽤 곤란한 상대로군."

"하지만 덩치가 크고, 기본적으로 머리 옆에 있는 주머니는 물건을 옮

기는 정도의 힘밖에 없어서 화기를 들고 싸울 수가 없어서 전투에는 약

해. 녀석들은..."

"타고난 암살자로군."

"그렇지, 타이론."

"그런데 왜 도망쳤을까? 자네를 보고서 겁을 먹었을 리는 없고."

"내가 싸울 자세를 갖췄거든."

쿨란의 대답에 타이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가 무술의 대가인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그 서펀트 레이스가 휴

먼 레이스 무술의 대가를 알아보다니 말이야."

타이론은 농담 같은 말을 진담처럼 말했다.

"녀석들은 암살자야. 전투는 피하지. 정면에서 공격하는 건 잘 안 해.

돌아서서 등뒤에서 덮치는 걸 즐기거든."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성미로군. 정면 승부 하게 되면 편하겠는 데?"

"그건 아니야. 사실 중화기가 동원되는 대규모 전투 상황이 아니라면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지 않은 게 서펀트 레이스야. 녀석들, 강하면서 대

단히 거칠거든."

메이런은 쿨란이 용병이었을 시절, 틀림없이 서펀트 레이스와 마주친

적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상대해 본 적 있나? 정면에서."

타이론도 메이런과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타이론이 묻자 쿨란

은 얼른 대답을 했다.

"오래 전에. 다른 건 궁금한 거 없나?"

쿨란은 대답을 회피하는 게 분명했다. 타이론은 뭔가 더 캐물으려는

했다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0 -

"좋아. 정리해 보지. 용의자는 신원미상의 서펀트 레이스. 여기 거주하

는 녀석은 아닐 테고. 외부에서 고용해서 들여왔겠지?"

"그렇겠지."

"그리고 그 녀석은 연방 수사관과 연방 수사관의 비공식 수행원 둘이

퇴치... 그리고 연방 수사관은 역시 신원 미상인 레이스 하나를 중요 참

고인으로 데리고 갔다. 이게 내 보고서가 되겠군."

"그래. 연방 수사관이 신병을 인도해 갔다는 사실은 공식문서로 남게

되니까 자네한테는 별 해가 없을 걸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쿨란, 나와 시경은 물론이고 우리 시에서

는 저 만티드 레이스, 아니, 공식적으로는 신원 미상, 성명 미상의 레이

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공무원 티는 제발 그만 좀 내."

쿨란은 이제 조금 피곤해 진 모양이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집에 마누라하고 자식새끼 둔 공무원 신세를 한 번

생각해 줘."

타이론은 이렇게 눙치면서 넘어갔다.

"그런데 녀석들은 어떻게 정보를 얻었을까? 외부에서 청부업자를 샀다

면 그 청부업자한테 정보를 주었을 텐데."

쿨란이 타이론에게 물었다. 쿨란은 앞으로 일을 계속 해 나가는 데 있

어서 정보의 출처가 어딘지를 밝히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이

론은 입장이 달랐다.

"글쎄.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지도 모르지.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갔는

데 R-구역 연구소가 나왔을 수도 있고. 그 서펀트 레이스가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도 있어."

"타이론. 가장 희박한 쪽 이야기만 하는 군. 그 서펀트 레이스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런 고급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야?"

"난 보고서 작성할 만큼은 했으니까 그 이상은 몰라, 쿨란. 내 보고서

요지를 미리 알려 주자면, 앞으로 사건은 연방 경찰에서 알아서 할 것이

다, 고로 나는 내 구역의 사건을 빼앗긴 게 몹시 화가 나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 이거야."

타이론의 말에 쿨란은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화를 낼 건가?"

"서장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타이론이 말했다.

"난 이제부터 만나볼 증인이 있어. 리사민이라고... 이곳에서 죽은 만티

드 레이스하고 함께 일했던 연구원이야. 같이 만나 볼텐가?"

"먼저 말해 줘서 고맙군."

이렇게 말하는 쿨란의 목소리를 들은 메이런은 쿨란이 누군가에게 '죽

여버리겠어'같은 말을 할 때도 똑같은 말투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맙긴. 자네 입에서 나오는 불평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그럴 뿐

이야."

쿨란은 입 속에서 조그맣게 쫌팽이 공무원, 하고 중얼거렸지만 타이론

은 못들은 척 했다.

*

리사민은 M.P.O의 증인 보호소에 있었다. 증인 보호소는 빔으로 중무

장을 하고 있는 시경 소속 경비대원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증인보호는 철저하군."

"원래 망명객 보호 시설이라 그래."

쿨란의 말에 타이론이 대답했다.

리사민은 40이 다 되어 보이는 아줌마였다. 비쩍 마른 체형에 얼굴도

가늘고 길었고, 쓰고 있는 은테 안경 때문인지 매우 날카로워 보이는 인

상을 하고 있었다. 리사민은 아마도 망명객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으

로 보이는 긴 쇼파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타이론은 주머

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리사민에게 내밀었다.

"경찰입니다. 전 수사관 타이론이고요, 이쪽은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죠."

리사민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서 셋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

다.

"주... 죽었어요. 봤다고요, 난. 난 봤어요... 그... 시체..."

"알고 있습니다. 이제 진정하세요. 여긴 안전하니까요."

타이론은 모든 걸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리사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꽤 잘하지? 저 친구는 저게 직업이야."

쿨란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메이런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몇 가지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피해자과는 10년도 넘게 친하게 지

내셨죠?"

"12... 년이에요."

리사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피해자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됐는지 아시나요?"

라몬은 의도적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피해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리

사민이 빨리 사태를 인정하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

다.

"그건... 잘 몰라요. 여기 온지는 40년이 된다고 했어요."

"우리 시간입니까? 아니면 만티드 레이스 시간?"

"만티드 레이스의 행성 시간과 우리 행성 시간 사이에는 차이가 있겠

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비슷한 환경의 생명체가

사는 행성은 일년의 길이가 비슷할 수밖에는 없으니까..."

리사민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타이론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

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렇군요. 리사민. 여기서 무슨 연구를 하고 있죠?"

"전... 외골격에 대한 연구를 해요."

"외골격이라면 곤충의 피부... 살... 껍데기... 하여간 그런 거죠?"

"예. 비슷해요."

"잘만하면 무시무시한 병기라도 만들어 낼 수 있겠군요."

쿨란이 뒤에서 끼어 들었다. 타이론은 쿨란에게 메서운 눈초리를 보냈

고, 쿨란은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 보이면서 끼어 들지 않겠다는 제스쳐

를 보냈다.

"...곤충의 외골격은 단단하면서도 놀랍게 가볍거든요... 우리는 항공 소

재를 개발하기 위해서..."

"아, 예. 괜찮습니다. 그건 더 말씀 안 하셔도 좋아요. 피해자는 뭘 연

구하고 있었나요?"

"유전공학과 관계된 일이었어요... 우리가 소시어바이오러지라고 부르

는 쪽... 정확하게는 소시어바이어테크놀러지라고 부르는 거죠.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죄송하지만 저는 그 분야에 전문 지식이 없군요. 우리말로 좀 해 주

시겠습니까?"

타이론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메이런이

보기에 타이론 같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짓는 저런 미소를 본다면 피

해자 건 증인이건 겁이나 집어먹지 않을까 싶었다.

"사회생물공학 쪽 연구였요. 사회생물학과 유전공학이 만들어낸... 새로

운 학문이죠. 유전 사회학에서 파생된 유전 심리학에 대한 연구도 병행

하고 있는 것 같았고요."

"흥미롭군요."

타이론은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표정이 되어서 이렇게 대답했다. 리

사민은 이렇게 말하고는 조금 제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여기."

리사민은 손수건을 타이론에게 돌려주었다. 타이론은 그것을 받아 들

어서 뒷 주머니에 꾸겨넣었다.

"그게 위험한 학문인가요?"

"제 분야는 그냥 유전공학이에요. 아시잖아요. 잡초에서 플라스틱을 뽑

아내고, 쓰레기 분해 효소를 만들고..."

"치명적인 생물학 병기도 만들어 내죠."

쿨란이 다시 한 번 끼어 들었을 때, 타이론은 벌떡 일어나 쿨란 쪽으

로 다가갔다.

"아뇨. 그냥 두세요."

타이론은 제지한 것은 뜻밖에도 리사민이었다. 리사민은 콧물을 몇 번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맞는 말인 걸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묻는 게 제 직업이기도 하니까요."

"반(反)유전공학 운동가신가요?"

"아닙니다. 전 카운셀러입니다."

쿨란은 완벽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유전공학이든, 반유전공학이든 전 별로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알고 있죠. 휴먼 레이스는 전쟁을 통해서 발전해 왔다는 사실 말입니다.

6차 대륙간 전쟁이나 달 식민지 전쟁이 없었다면 휴먼 레이스는 아직도

지하 벙커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과격한 시각이시군요."

"그냥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한 쪽의 의견만 듣지

않지요. 그게 바로 카운셀러의 일이니까요."

타이론은 큰기침을 했다.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쿨

란은 이번에는 정말로 끼어 들지 않겠다는 표시로 입을 잠그는 시늉을

해 보였다.

"조금만 더 자세하게 설명 해 주시죠."

타이론이 막 이렇게 물었을 때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전해졌

다. 누군가 다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증인

보호실 안으로 한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당신이 책임자요?"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는 뚱뚱한 사내가 들어와 대뜸 이렇게 소리쳤

다. 사내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고, 그 밑으로는 명찰이 달려 있었는

데 명찰에는 'AREA-R C.O'라고 적혀 있었다. 그 뒤로 무장을 하고 있

던 시경 경비대원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쫓아 들어왔다.

"제가 책임자 타이론입니다. 누구시죠?"

타이론은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사내의 기세는 일단 타이론의 큰

덩치와 험악한 인상에 한풀 꺾였다.

"나, 여기 연구소장이오. 함부로 우리 연구원을 빼가다니! 당신 미쳤

소? 여긴 민간인 통제구역이란 말이오! 통제구역!"

"압니다. 그리고 제 관할이기도 하죠."

타이론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리사민. 얼른 이리 나와. 우리 연구원은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소!"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기고 계신 모양이군요."

"당연하지! 여긴 시는 물론이고 연방의 각종 기밀이 있소! 모두 하나

같이 일급비밀로 분류된 극비 사항들이란 말이오."

"하지만 지금 리사민 연구원은 수사의 중요 참고인입니다."

타이론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인상에 도망치거

나, 아니면 적어도 말이라도 순화시키겠지만 소장은 막무가내였다.

"중요 참고인 좋아하시네! 리사민. 지금 변호사가 오고 있어! 아주 실

력 있는 변호사지. 책임자 당신, 옷 벗을 각오 해 두는 게 좋을 걸? 그리

고, 리사민. 변호사 없이는 한 마디도 하지 마. 명령이야, 이건!"

"지금 소장님께서는 공무 집행 방해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공무원

모독죄도 범하고 계시고요. 계속 이렇게 나오신다면..."

"뭐? 어쩌고저째?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여기 연구소 소장이야!

일개 수사관 주제에..."

타이론은 이 말에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주먹을 꼭 쥐었다. 소

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뭐야? 수사관이 주먹이라도 휘두르겠다는 거야? 한 번 쳐보지 그래?"

하면서 오히려 타이론을 도발했다. 메이런은 뭔가를 꽉 쥐고 있는 것

처럼 부들거리는 타이론의 주먹을 볼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주먹을 날린 쪽은 쿨란이었다. 그리고 주먹이 날아간 곳은

엉뚱하게도 따라 들어온 시경 소속 경비대원이었다. 경비대원은 고개가

휙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시뻘개진 얼굴을

하고서 쿨란을 처다 보았다.

"근무태만이라는 말 모르나!"

순간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오갈 것 같던 소

장과 타이론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던 것이

다.

"어디서 이 따위 썩어 빠진 놈이 들어와서 함부로 입을 놀리게 만들

어? 여기가 어딘지 알아, 몰라?"

"저..."

"대답해! 여기가 어디야!"

"옙! M.P.O 증인 보호실입니다!"

잠시 미적거렸던 경비대원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면서 쿨란에게 대답했

다.

"여기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나?"

"아닙니다!"

"네가 들고 있는 건 뭔가?"

"E-14 빔 라이플입니다!"

"그렇군. 귀관, 이름이 뭐지?"

쿨란의 말투는 군인 같았다.

"경비대 일병 자이린입니다!"

"자이린 일병. 들고 있는 E-14 빔 라이플은 왜 지급 된 거지?"

"그건..."

경비대원이 다시 한 번 미적거리자 다시 타이론의 주먹이 경비대원의

면상을 갈겼다. 경비대원은 허리가 휘청 하더니 얼른 다시 부동자세로

섰다.

"쏘라고 준 거 아냐!"

메이런은 쿨란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주눅이 드는 소장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친구 내 보내, 사이린 일병. 반항하면 쏴버려. 내가 책임진다."

"알겠습니다!"

사이린 일병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소장의 팔을 꽉 잡았다. 소장은 일

병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다가 쿨란을 바라보았다.

"저, 누구... 시죠?"

소장의 말에는 힘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서 뭐할 거야? 네가 하고 있는 게 극비면 내가 하는

일은 극비 중에 극비니까 그렇게만 알아 둬!"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팔짱을 낀 채로 턱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자

이린 일병은 소장을 끌고 나갔다.

"참. 그리고 조금 있으면 변호란 놈이 올 테니까 그 놈도 잊지 말고

쏴버려."

쿨란은 나가고 있는 일병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증인 보호실에는 당혹감과 감탄이 동시에 교차했다. 타이

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쿨란을 바라보고 있었고, 리사

민은 잠시 멍하게 있다가 눈물을 닦아 내면서 키득거렸다.

"대단... 하시네요."

메이런은 쿨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대단하긴. 그냥 뻔한 거지. 저 친구도 공무원이거든. 공무원은 높은

사람한테는 꼼짝 못해."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타이론을 보았다. 타이론은 쿨란의 눈을 피했

다. 타이론의 태도는 소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공무를 뒤로 미룬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꼴 좋네요. 저 영감, 한 번은 이런 꼴 당할 줄 알았어요."

"원래 저렇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었나 보죠?"

타이론의 질문에 리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정말로 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리사민이 쿨란에게 물었다.

"걱정 마세요. 실탄은 없으니까요. 빔 라이플이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근무서는 친구한테까지 일일이 지급되지는 않거든요."

"쿨란."

타이론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만티드 레이스 때문에 준(準)비상 상태라 실탄 지급됐

어."

타이론이 말하자 쿨란은 헛기침을 하면서 눈을 벽 쪽으로 돌렸다. 메

이런은 이럴 때 밖에서 뭔가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될까 생

각해 보고는 혼자 웃음을 지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1 -

"자, 그럼 말씀해 보시죠. 피해자가 하고 있었던 연구에 대해서요."

리사민은 타이론의 말에 천천히 대답을 시작했다.

"우리 연구원들은 맡은 프로젝트 외에 개인적으로 연구를 하곤 해요.

여기 연구소에 있는 장비들은 시에 있는 장비보다 훨씬 좋거든요. 그래

서 개인적인 연구에 더 열중하는 경우도 있죠. 그러다가 소장한테 깨지

는 일도 흔하고요."

"아, 예. 그렇군요."

타이론은 리사민의 말에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는 했지만 이 여자가 빨

리 이야기하지 않고 뭐하나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친은 저와 외골격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서 하고 있었어요. 개인적

으로는 아마 유전공학 쪽 연구를 하는 것 같았어요."

"예.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떤 연구였지요?"

타이론은 찬찬히 다시 한 번 리사민에게 물었다.

"사친은 제가 오기 전까지는 은퇴한 어떤 연구원과 함께 외골격을 이

용한 비행체를 연구했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 때부터 연구를 계속 해

왔던 것 같아요."

"그랬군요. 어떤 연구였습니까?"

타이론은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반복하면서 짜증을 내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글쎄요."

리사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왼 쪽 위로 올라간 리사민의 눈동자는 기

억을 더듬고 있는 듯 했다.

"그냥 유전자에 대한 거라는 것만 알아요. 사실 저하고 만난 이후에는

특별히 뭔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럼 유전공학에 대한 거라는 건 어떻게 아셨죠?"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한 적이 있어요. 유전공학은 만티드 레이스의

행성에서는 금지된 학문이라는 말을요. 그래서 그렇게 짐작하는 거죠."

리사민의 말에 타이론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별 성과가 없는 게

불만일 거였다. 메이런은 그런 타이론이 안쓰러워 보였다. 공무원이 하는

일이란 다 저런 걸까?

"그 연구원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쿨란이 리사민에게 물었다.

"아, 예. 그 연구원은 지금 어디에 있죠?"

"기록을 찾아보면 나올 거예요."

"그렇군요. 기록을 열람하려면 소장에게 부탁해야 하나요?"

타이론이 쿨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소장을 다시 만나는 일이 부담이

되는 모양이라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예. 그런데 꼭 보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그렇다면..."

"제 작년인가 죽었거든요. 사친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쿨란은 끄응, 하는 작은 한숨소리를 내었다. 메이런이 생각하기에도 리

사민의 말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타이론은 수첩을 꺼내면서 말했다. 아마 이제부터 본격적인 심문에 들

어갈 모양이었다.

"기억나는 거 더 없으십니까? 연구에 관련 된 사항 말씀입니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요. "

쿨란은 리사민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리사민은 쿨란의 말에 다시 한

번 왼 쪽 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꼭 한 번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아마 그 연구원 죽었다

는 소식을 들었던 날이었던 것 같아요."

"뭐라고 하던가요?"

타이론이 수첩을 접어놓고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물었다.

"트로이의 목마 계획... 그렇게 말했어요. 저한테 트로이의 목마가 뭔지

아냐고 묻더니 그 죽은 연구원이 준 책에 적혀 있었다고... 그런 말을 했

어요. 그게 아마 사친이 연구하던 것과 관계가 있을 거에요."

리사민은 이렇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별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모양이

었다.

"예. 도움 많이 됐습니다. 타이론. 우리는 이만 가보지."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메이런에게 갈 준비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지금 신원 미상의 만티드 레이스와 연방 수사관은 어디 있어?"

쿨란은 나가기 전 타이론에게 이렇게 물었다.

"바로 옆이야. 거기에서 서류 작성하고 있을 걸세. 만티드 레이스는 그

안에 있는 참고인 대기실에 있을 거야. 나가서 왼쪽으로 죽 걸어가기만

하면 될 걸 세. 문 위에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어."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타이론이 보고서에 적을 말을 위한

질문들, 그러니까 '사건 시간 어디에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피해자는

원한 관계가 있었습니까?' '연구원들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따위의 질문

을 던지는 사이, 메이런과 함께 증인 보호소를 빠져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 사이린 일병은 허겁지겁 쿨란에게 경례를 붙였다. 메이런은 경비

대원이나 수사관들은 공통적으로 오른 등을 오른 쪽 눈썹에 붙이는 경례

를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쿨란은 경례를 정식으로 받지 않고 고개만 까

딱했다.

"계속 수고해. 그리고,"

"옙."

사이린 일병은 바짝 긴장한 자세로 대답했다.

"정말로 쏘지는 마. 괘씸하기는 하지만 우리 시민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쿨란은 웃으며 어깨를 사이린 일병의 어깨를 툭쳤다. 메이런은 그런

쿨란의 모습에서 '정말로 쏘면 안 되는데'하는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었

다.

라몬이 있는 곳은 타이론의 말처럼 찾기가 쉬웠다. 그곳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고, 정말로 문 위에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은 먼저 라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몬은

타이론이 그렇게도 구박하던 비니와 함께 책상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건 다 끝났나요?"

쿨란이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서명만 하면 됩니다."

라몬은 이렇게 말하고는 서류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비니는 서류에

붙어 있는 스캐너를 작동하였고, 라몬의 손바닥이 새겨진 서류는 정식

공문서가 되었다.

"하여간 공무원이란."

쿨란이 서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비니는 서류를 조심스럽게 서류철

에 끼워 넣고 있었다.

"문서가 없으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니까. 서명이 없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라몬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쿨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메이런은 그

런 라몬에게서 분노에 가까운 기운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나 불평을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죠."

라몬의 말은 쿨란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난 옛날 방식이 좋아요."

쿨란은 메이런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면서 말했다.

"손으로 이름을 쓰는 방식 말입니까? 그래서 누군가 필체를 흉내 낸다

면 어느 날 갑자기 빚을 뒤집어쓰거나 누군가에게 쫓기게 되는, 그런?"

라몬은 신경이 곤두 서 있는 듯 했다. 아마도 연구소에서 타이론과 한

판 붙었던 일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서 그럴지 모른다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예. 하지만 그 때는 타인을 믿었던 거지요."

쿨란은 책상 위에 있는 커다란 머그컵을 들면서 말했다. 머그컵에는

필기구와 가위, 풀, 컴파스 등이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메이런은 머그컵

에 담겨 있는 내용물 보다 쓰여있는 문구가 먼저 들어왔다. 머그컵에는

'내가 보석상자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쓰여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믿을 수 없죠. 믿을 수 있는 거라면 금덩어리 정도일

까."

쿨란은 머그컵에 적혀 있는 문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몬은 쿨란이

보고 있는 머그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쿨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컵이 보석상자가 된다... 아마 당신이 공무원이 되는 일 만큼 어려울

걸요."

라몬이 책상에서 일어나 쿨란 쪽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쿨란은 머그

컵을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사무실 안을 위태롭게

떠돌고 있었다.

"당신, 공무원을 아주 싫어하더군요."

"글쎄요."

쿨란은 라몬의 눈을 피해 계속해서 머그잔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하

지만 라몬의 눈은 쿨란을 맹렬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공무원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쿨란. 그리고 일

부 좋지 못한 공무원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 아

닙니까? 그리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근본적으로 희생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이런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타인을 믿을 수 있었던 시절에는 그랬겠죠."

쿨란은 계속해서 머그컵을 흔들고 있었다. 메이런은 달그락거리는 소

리가 점점 더 위태롭게 들렸다.

"그리고 아마 그 시절에는 공무원도 금덩이보다는 타인을 더 믿었을

겁니다."

"금덩이 보다 타인을 더 믿는 공무원이 더 많습니다, 쿨란. 적어도 난

그렇습니다."

라몬의 표정은 날카로운 칼날을 연상케 했다. 누군가 건드린다면 당장

이라도 베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신병을 인도해 가셔야 하는 데요."

비니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는

긴장감 때문에 큰소리를 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지방검사에게 시간 연장 신청하지 않아도 되야 할 텐데요. 이제 24시

간 남았군요."

비니의 말에 일시적인 휴전이 성립되었다. 라몬은 쿨란에게서 눈을 떼

고 비니를 바라보았고, 쿨란은 머그컵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책상에 떨어

지는 머그컵의 소리는 사건을 종결짓는 법관의 망치소리 같았다.

"그렇군요. 서두르죠."

라몬은 이렇게 말하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책임감을 가지고요."

라몬의 말을 들은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방경찰의 일은 꽤나 매력적이지요. 도시와 도시를 오가며 온갖 것

들을 보고 또 들을 수 있으니까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행성과 행성 사이를 오가는 용병 일이 훨씬 매

력적일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라몬의 말에 쿨란은 딱 잘라 대답했다. 라몬은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

지만 얼른 쿨란의 말을 받았다.

"굉장히 자신감이 넘치시는 군요. 그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

닐 텐데요."

라몬의 말에 쿨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두 가지 직업을 비교하려면 두 직업에 다 종사 해 본 경험이 있어야

겠죠. 아마 그래야 자신감이 생길 겁니다."

쿨란의 말에 라몬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설마 쿨란이 연방 경

찰 일도 했었다는 걸까? 메이런은 쿨란을 바라보았지만 쿨란은 아무 반

응도 없었다.

"참. 그런데 메이런은 밖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앞장서던 비니를 멈추면서 라몬이 말했다. 쿨란은 메이런을 바라보았

다. 메이런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쿨란과 라몬을 번

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둘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메이런은 둘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을 습격하고 어머니를 살해

했던 종족과 다시 마주친다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일 수 없었다. 메이런

은 레이스 차별 주의자도 아니었고, 또한 위대한 박애론자도 아니었지만,

둘 다 아닌 쪽은 언제든지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었다.

"메이런. 만약에 캡슐 안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치자. 그럼 넌 모든 캡

슐을 다 싫어 할 거니?"

쿨란은 조심스럽게 메이런에게 이렇게 물었다. 메이런의 질문의 의도

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뇨."

메이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쿨란은 메이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메이런은 쿨란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 뭔가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하잖아요. 그리고 난 속 좁은 겁쟁이가 아니에요."

메이런은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쿨란에게 이렇게 말했다. 쿨란은 미소

를 지었고, 메이런 가슴 속의 뜨거운 것은 조금 더 차오르고 있었다.

참고인 대기실 문을 연 것은 비니였다. 비니는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

섰고, 라몬이 먼저 참고인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쿨란이 따랐

고 메이런은 쿨란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메이런은 자신의

걸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메이런의 심장

은 조금 씩 더 세차게 뛰어오르고 있었다. 메이런은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친구로군. 그렇게 찾아다녔던 친구가. 시크사."

라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시크사가 맞을 겁니다. 이 친구 이름이. 쿨란. 당신이 그렇게 찾던 고

객이로군요. 이거 정말 다행입니다. 손해 본 금덩이를 채울 수 있을 테니

까요."

라몬은 계속해서 쿨란을 비꼬고 있었고, 메이런은 쉽사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메이런은 그 날 밤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망루로 튀어 오르던 만티드 레이스의 모습, 다 부서져가는 창고 안에서

마주쳤던 두 만티드 레이스의 모습, 그리고 바닥에 흐르던 초록색의 피.

메이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티드 레이스였다. 온몸이 갈색인 만티드 레이스였다. 역삼각형의 얼

굴과 거대한 두 개의 눈동자. 낫처럼 생긴 두 팔은 시커먼 가방을 품에

안고 있었고 나머지 네 개의 발은 바닥에 붙어 있었다.

만티드 레이스는 겁에 질렸는지 몸을 잔뜩 움츠리고서 라몬과 쿨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합니까? 우리가 당신을 구해 줬는데요."

쿨란이 묻자 만티드 레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쿨란. 이 친구가 우리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잖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우리가 도우려고 한다는 건 알 수 있을 겁니다. 느

낌으로요."

메이런은 쿨란의 등뒤에서 시크사를 보고 있었다. 시크사의 감정이 전

해져 왔다. 시크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조금 전의 끔찍한 살상과 낯선

이들의 접근이 시크사를 공포의 감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

다.

"시크사. 우리는 행성 어스에서 가장 뛰어난 카운셀러 팀입니다. 여기

있는 친구는 연방경찰이고, 또 이 쪽에 서 있는 친구는 당신을 도와 줄

트랜서이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운... 셀러. 트랜서."

시크사가 말했을 때, 셋은 동시에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만티드 레

이스가 휴먼 레이스의 단어를 발음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까닭이

었다. 시크사는 아마도 전에 카운셀러와 트랜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라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 처음 듣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치고는 너무 유창했던 것이다.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지능이

높을지도 몰랐다. 외계의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날 수도 있

었고.

"예. 그래요. 나는 카운셀러. 이 친구는 트랜서."

쿨란은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시크사에게 말했다. 시크사는

말을 전부 다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라몬이 납득이 가지 않는지 쿨란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직업의 노하우죠. 고객을 믿지 않는 카운셀러는 결코 신뢰받을 수 없

습니다."

쿨란이 말했다.

메이런은 시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크사는 불안정해 보였다. 시선

을 제대로 두지도 못하고 있었고, 가방을 잡고 있는 손을 계속해서 자리

를 바꾸고 있었다. 메이런은 그런 시크사의 모습이 익숙해지질 않았다.

다른 레이스를 보는 게 오늘 하루만 몇 번째인지 몰랐지만, 볼 때마다

메이런은 생경한 느낌에 당혹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메이런은 쿨란에게 이렇게 물었다.

"적법한 절차를 걸쳐서 이제 시크사를 행성 어스 망명객으로 등록 시

켜야겠지.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말이야. 이런 문

제는 공식적으로 처리하는 게 좋을 거야."

메이런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라몬이었다. 라몬은 시크사에게 호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라몬의 얼굴은 매우 밝았다.

"아닙니다."

쿨란이 말했다. 쿨란의 말에 라몬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쿨란을 바라보

았다. 하지만 쿨란은 시크사에게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고 말을 이었

다.

"이 친구가 소중하게 들고 있는 저 가방을 빼앗아 가지고 만티드 레이

스 녀석들에게 넘겨주는 게 먼저입니다. 그것도 비공식적으로 말입니다."

쿨란의 말에 라몬은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아,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요."

메이런은 라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라몬은 자신이 틀린 말을 했

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라몬의 감

정은 불쾌감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 잘 풀릴 겁니다. 쿨란의 사무실에서라면."

애써 불편한 기색을 감추려고 하면서 라몬이 말했다. 하지만 메이런이

보기에는 라몬의 모습은 조금도 편안한 것 같지 않았다.

"예. 그럴 겁니다. 저도 빨리 돌아가서 커피 한 잔 마셨으면 좋겠군

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쿨란이 말했지만 메이런은 쿨란의 가르침

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쿨란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쿨란은 조금이라도 빨리 메이런이 가지고 있는 트랜서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메이런은 시크사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메이런은 순간 시크사에게서 이상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크사는 어딘지 몹시 불편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그 이유가 '커피'라는 단어 때문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시크사의 더듬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2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