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트랜스.
쿨란의 사무실은 푸우순 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해가 지면 창 밖으
로 보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번쩍이는 간판들뿐이었다. 도박장, 술집, 창
녀촌, 광고.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창 바로 옆에 붙어있는
엠파이어라고 적혀 있는 간판이었다. 엠파이어는 쿨란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이름이었다.
간판이 하나 둘 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창 밖으로 비치던
붉은 불빛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대신 푸른 새벽의 어스름이 밀려드는 걸
볼 수 있었다.
쿨란과 라몬은 완전히 잠든 상태였다. 메이런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
다. 골방에서 혼자 잠들어 있는 시크사라는 이름의 만티드 레이스가 마
음에 걸렸다. 아무리 보아도 괴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시크사와 트랜스
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트
랜스를 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메이런은 생각했다.
비록 라몬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다고는 해도 메이런은 마을을 버
렸다. 그리고 시로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일단 시로 들어온다는 것은 마
을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메이런은 사실 마을
로 돌아갈 이유 뿐 아니라 그럴 마음도 없었다. 이제 쿨란의 양자가 된
이상 마을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고, 아이라가 시 어딘가에서 보직을 받
고 경비대에서 일하고 있는 이상 마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는 이상, 메이런의 유일한 친구는 아이라 뿐인 것
이다.
메이런은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라몬과 쿨란을 바라보았
다.
쿨란의 사무실은 3층 전부를 쓰고 있었고, 사무실로 쓰는 방 외에도
숙소로 쓰는 방과 창고방, 욕실, 그리고 화장실도 갖추어져 있었다. 메이
런이 생각하기에 여기 엠파이어 빌딩이나 사무실은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그리고 커피까지. 메이런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곳
은 하나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잠 좀 자 두라니까."
쿨란의 목소리에 메이런은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예."
메이런은 얼른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이런 일이 많은지, 쿨란의 방에
는 커다란 더블베드 하나 말고도 보조 침대가 하나 더 있었다. 쿨란은
라몬과 메이런을 더블베드에서 자게 하고 자신은 보조 침대에 누워 있었
다.
"왜. 트랜스 못하면 쫓아내기라도 할 것 같니?"
메이런은 쿨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쿨란이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 같
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설마 자신의 마음을 읽었을 리는
없었다. 쿨란은 그저 추리력이 뛰어날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쿨란이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걱
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메이런은 검은 눈동자에서 키티-본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키티-
본의 말 그대로, 지금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시크사였고, 메이런이 시크사를 돕지 못한다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 거였다.
"카운셀러 간판이 보이네요."
메이런이 말했다. 바로 옆 건물에 카운셀러라고 적혀 있는 커다란 간
판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응. 카운셀러지."
"같은 직종인데... 경쟁상대겠지요?"
"응?"
쿨란이 되묻자 메이런은 난처한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되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 그 카운셀러 말이로구나. 그런데 그 카운셀러는 진짜 카운셀러
야."
메이런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쿨란이 메이런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메이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쿨란은 뭔가요? 가짜 카운셀러?"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가짜 카운셀러라는 건 좀 뭣하고. 카운
셀러는 원래 고민을 들어주는 직업이야. 그건 알고 있니?"
"예. 마을에는 없었지만요."
메이런이 말했다.
"한 마디로 도둑놈들이지. 말을 듣고 말을 해 주는 것만으로 돈을 버
니까 말이야. 입만 가지고 먹고살 수는 없다고 말하는 녀석들은 카운셀
러와 정치가를 만나보지 못한 녀석들이야."
"하지만 쿨란도 카운셀러잖아요."
"난 입만 가지고 살지 않아."
쿨란의 목소리는 잠에서 점점 깨어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고민만 들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가 무슨 고민을 말하건, 나
는 틀림없이 그 고민을 해결해 주지. 그렇게 해서 먹고사는 거다."
"그럼 왜 카운셀러라고 부르나요?"
메이런이 물었다.
"글쎄다. 그렇게 부르는 게 일반적이거든.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시에 사업을 등록할 때 보통 카운셀러로 등록하지. 물론 진짜 카운셀러
가 아니라는 건 시 공무원 녀석들도 잘 알고 있지만, 진짜 카운셀러만
가지고는 시의 망명객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메이런의 물음에 한 참동안 쿨란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메이런은
쿨란이 도로 잠들어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쿨란은 한 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하이어드."
"예?"
"하이어드라고 부른단다. 우리끼리만 쓰는 용어지만."
"무슨... 뜻인가요?"
"청부업자란 뜻이지. 원래는 고용되는 사람한테 붙이는 용어야. 하이어
드. 돈만 받으면 뭐든지 해 주는, 시시껄렁한 직업이라는 소리란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새벽의 푸른 기운은 점
점 밝아지면서 방안을 가득 채워나갔고, 메이런은 그런 방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담요를 목까지 뒤집어쓰자, 머릿속의 책임감과 부담감보
다는 마음속에서 나오는 편안하다는 기분이 더 강렬해 졌다. 메이런도
지난 하루는 몹시 피곤한 하루였던 것이다.
"정말로 뭐든지 다 해 주나요?"
메이런이 물었다. 하지만 쿨란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잠이 든 모양인
지 쿨란의 숨소리는 다시금 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정말 뭐든지 들어준다면... 좋을 텐데."
만약 그렇다면 메이런은 쿨란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트
랜스 할 수 있기를, 또 시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아이라와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또 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되기를. 하지만 쿨란은 잠들어
있었고, 메이런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잠은 항상 조금만 더 잤으면 싶을 때 깨어야 하는 것이었다. 메이런은
쿨란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했다. 깊게 잠들
지 못한 탓인지 머리가 온통 무거웠다. 메이런은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
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냥 밤을 새는 편이 나았을지 몰랐다. 메이
런은 모래알이 들어간 듯 눈이 까칠 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일어나. 아침을 먹어야지. 아침을 안 먹으면 하루가 엉망이 되어 버리
는 수가 있어."
"음... 쿨란. 그런데 저 친구는 뭘 먹죠?"
라몬이 눈을 비비면서 물었다.
"연구소에서 리사민한테 들어서 조금 준비 해 둔 음식이 있습니다. 벌
레 요린데... 삼일 치를 싸왔어요. 시에서 지원 받은 거니까 양은 넉넉해
요. 삼일 지나면 어디서 구해보던가 하죠. 라몬도 벌레 요리 좀 들지 그
래요? 맛이 괜찮던데. 음식을 가리는 연방 수사관이 있다는 소린 못 들
어 봤으니까 들고 싶으면 들어요."
쿨란이 말했다.
"그래요? 저는 좀 가립니다. 그냥 빵하고 커피가 좋겠어요."
라몬의 말에 쿨란은 웃음을 지었다.
식사는 사무실에서 있었다. 사무실에 놓여진 응접용 탁자는 훌륭한 식
탁이 되어 주었다.
시크사는 애써서 쿨란이 준비 해 온 벌레 요리를 집어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메이런은 그런 시크사의 모습에서 고등
생명체의 모습을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식욕을 잃은 한 마리 벌레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좀 먹어 둬야 힘이 날텐데. 조금이라도 먹어 둬요. 그래야 기운이 날
테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쿨란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꼭 시크사
가 뭐라고 대꾸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크사는 그저 더듬이
를 흔들면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만티드 레이스가 휴먼 레이스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당신 마음이 잘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군요."
라몬이 커피에 적신 빵을 입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전해졌어도 쉽게 대답을 받아 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 친구는 지
금 몹시 불안할 테니까요."
메이런은 벌레 조각을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는 시크사
를 바라보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 내 도움이 없다면 굶어 죽어버릴지
도 몰라... 메이런은 생각했다.
식사가 끝나자 쿨란은 안타까워하면서 남은 벌레 요리를 밀봉팩에 담
아 냉장고에 도로 넣어 두었다.
"괜찮아. 삼 일 치 음식이 삼 일 하고 한 끼 더 남은 셈이니까 말이
야."
쿨란은 메이런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몬은 쿨란의 이 말에
지독하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지만 쿨란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저, 언제 할거냐?"
라몬이 메이런에게 물었다.
"뭘요?"
메이런이 되묻자 라몬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당연한 거 아니니? 트랜스 말이야."
라몬의 말에 이번에는 메이런이 당황했다. 메이런은 그렇게 간단한 거
면 당신이 한 번 해 보지 그래, 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메이런이 트랜스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라몬도, 쿨란도 똑
같았던 것이다.
"원래 시에서 면접도 보기로 했었더구나. 파일에 적혀 있었어."
쿨란이 메이런에게 말했다.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관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왜? 어머니 때문에 그랬니?
쿨란의 말에 메이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쿨란을 바라보았다.
"아, 나중에 조사한 게 좀 있어. 너희 아버지, 꽤 유명한 트랜서 였더
구나."
잭이 올린 보고서에 있었겠지. 메이런은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트랜서의 재능은 유전되지 않는 줄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메이런은 이렇게 말했다. 잭도, 쿨란도 아버지의 일을 알고 있었다. 어
쩌면 타이론이나 시의 관계자들도 알고 있을 거였다. 아버지가 정말 그
렇게 유명한 트랜서였을까? 쿨란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이제 아이라
도 시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테니 알게 될지 모르겠군.
"그리고 너무 재촉하지 말아요, 라몬."
쿨란의 말에 라몬은 어깨를 으쓱, 하고 한 번 치켜올렸다. 내가 언제?
하고 말하는 것이다.
"시에서 협상 중이니까. 우리 시의 외교관들은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을
끄는 데는 우주 제일이거든요. 메이런. 그러니 시간은 많단다. 너무 걱정
하지 마라."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쿨란의 호의가 호의로 받아들여지
지는 않았다. 쿨란이야 말로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트랜스에 성공
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이 아무리 고
마운 호의를 베풀더라도 그 호의가 욕심에서 나오는 거라는 걸 알고 있
을 때에는 온전하게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이었다. 메이런은 조심
스럽게 코로 한숨을 내 뱉었다.
"어이. 카운셀러 양반. 잘 있었나?"
불쑥 문을 열고 찾아 온 것은 타이론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쿨란은 타이론에게 자리를 권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타
이론은 자리를 권하지 않는다고 해서 멍하니 서 있을 수사관은 아니었
다. 타이론의 거대한 덩치 덕분에 의자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타이론을
받아들였다. 라몬은 그런 타이론을 흘겨보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밤의
야근 때문인지 타이론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장례절차 때문이야. 일직 근무 끝나고 좀 자 둘까 했더니 시에서 바
로 임무가 내려오더구만."
타이론이 말했다.
"마누라가 뭐라고 한 소리 하겠군. 그런데 장례 절차라니, 무슨 말이
지?"
"죽은 만티드 레이스. 그 친구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야. 연고자가 없는 경우에는 태워버리는 게 통례지만 이 경우에는
형제가 있는 걸로 되어 있어서."
쿨란의 물음에 타이론이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형제?"
"저 시크사라는 친구 말이야. 신원미상의 만티드 레이스로 처리하려고
했더니 죽은 만티드 레이스의 동생으로 등록이 되어 있더라구. 연고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 레이스의 장례절차를 따르게 되어있는 건 알고 있겠
지?"
"망할 공무원 근성이로군. 그냥 태워 버려."
쿨란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쿨란의 말에 타이론은 약간 당황하
는 듯 보였지만 라몬도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타이론이 당황하는
걸 보는 게 라몬에게는 즐거운 일이었겠지만, 공무원을 비하하는 발언이
연방 수사관의 마음에 들리 없었다.
"쿨란. 나도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야."
타이론은 정색을 하고서 쿨란에게 말했다. 쿨란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하지 마."
"자네가 연방 수사관 일을 그만 둔 게 용기 있는 일이었다고는 생각하
지 않아. 하지만 자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 나도 내 사정이 있다
네, 쿨란."
"처자식 이야기라면 그만 두게."
쿨란은 타이론의 진지한 말투 때문이었는지 조금은 누그러진 태도였
다.
"솔직한 제 심정을 말씀 드리고 싶군요."
라몬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메이런은 라몬이 뭔가를 꾹 억누르고 있
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쿨란. 당신이 연방수사관이었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연
방 수사관을 그만 둔 건 연방수사국으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
다."
"그래요?"
쿨란은 심드렁한 투로 말했지만 메이런은 쿨란에게서 전투에 임하는
전사의 마음이 솟아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망시켜 드려서 미안합니다만, 라몬. 연방 수사관 중에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메이런은 느꼈다. 쿨란은 이제 라몬 쪽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쿨란은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다. 그
저 짜증 나는 비난을 모면하고자 하는 마음이 호승심보다 더 강하게 느
껴졌다.
"한 가지만 말해 두죠. 나는 지금 연금 대상자라는 것만 아시면 될 겁
니다."
이 말 한마디로 라몬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연금 대상자가 뭐죠?"
사실 메이런이 뭐라고 물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쿨란은 짜증이
잔뜩 나 있는 상태였고, 타이론은 일직 근무의 피로 때문에 신경이 날카
로운 상태였으며 라몬은 사사건건 공무원을 물고 늘어지는 쿨란과 간밤
에 자신을 공격했던 타이론에게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이런
은 오가는 대화에 몰입해서 쿨란에게 이렇게 물었다.
대답을 한 것은 타이론이었다.
"연금이라는 건 말이다, 30년 근속을 마친 공무원이 받는 거란다. 그런
데 꼭 30년을 다 채워야 하는 건 아니야. 연방 정부가 인정할 만큼 공로
가 크거나 연방수사국에서 인정할 만큼의 업적을 쌓으면 되는 거지."
타이론의 말투는 빈정거리는 투가 아니었다. 쿨란은 조금 쑥스러운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타이론의 설명이
끝나자 메이런은 왜 라몬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
다. 라몬은 쿨란이 그렇게 뛰어난 수사관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였다.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 두고, 쿨란.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이 그렇게 쉽
게 말해선 안되지. 어찌 되었건 자네는 연방 정부에 봉사한 적이 있는
공무원이었어. 내 입장을 이해해 주게."
타이론은 피곤한지 이번에는 계속해서 미간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
했다. 쿨란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문제는 말이야, 트렌서가 없다는 거야."
"저 친구는?"
타이론이 턱으로 메이런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순간 몸을 움
찔하고 말았다. 험악한 인상의 덩치 큰 사내가 자신을 주목하는 걸 견디
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직."
쿨란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쿨란은 길게 설명해서 시간을 끌고 싶지
도 않았고, 또한 메이런이 실은 트랜서의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검
증되지 않았다고 말해서 메이런의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타이론은 실망한 눈치였다. 메이런은 타이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생각을 읽는 일은 대단히 복잡하고 또한 혼란스러운 일이다. 메이런은
누군가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생각을 읽게 되면 메이런은 혼란스러워졌다. 생각이라는 건 일정하게 머
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명확하게 이거다, 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
분이 더 많았다.
타이론은 피곤했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인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
리고 자신의 임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발가락이 가
려웠고 귓속에서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리고 있었고,
커피가 마시고 싶었고, 눈이 따가웠고, 몸이 저려서 조금이라도 빨리 잠
이 들고 싶었다.
메이런은 이런 타이론의 생각 중에서 타이론의 의도를 읽어 낼 수 있
었다.
사실 장례 운운한 것은 일종의 구실이었고 사실 타이론의 임무는 일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 임무는 바로 메이런이 트랜서로서의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쿨란이 '아직'이라고
말한 건 임무의 진행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3 -
타이론은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그런 장례 절차까지 메이런이 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타이론 수사관."
잠자코 있던 라몬이 타이론에게 물었다.
"메이런은 트랜서 자원이니까요."
당연하다는 투였다.
"시에 등록된 정식 트랜서도 아니잖습니까."
이어지는 라몬의 질문에 타이론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푸우순 시에 트랜서가 메이런 하나 뿐인가요?"
라몬은 타이론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다시 물었다.
"현재로서 이용 가능한 트랜서는 메이런 하나 뿐이죠."
무척 당연하다는 투였다. 타이론은 헛웃음을 쳤다.
"시에 이런 일 처리 할 트랜서 하나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트랜서는 항상 풀 가동 중입니다. 몇 되지도 않는 트랜서가 말이죠.
그런데 장례 절차 알아보는 것쯤은 정식 트랜서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겁니다."
타이론은 모처럼 성의 있게 라몬에게 답변했다. 하지만 이 답변은 라
몬을 그리 감동시킨 것 같지는 않았다. 라몬은 아주 화를 내면서 타이론
에게 따져 물었던 것이다.
"연방 수사관으로 여러 도시를 다녀 봤지만, 이렇게 꽉 막힌 도시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우리 푸우순 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연방 수사관도 처음일 겁
니다."
타이론이 대답했다. 라몬은 당장 뭐라고 쏘아 주려고 했지만 쿨란이
라몬의 말을 가로막았다.
"라몬. 시크사는 비공식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죠. 타이론 말은, 시에서 시크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게
자료로 남게 된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에서 트랜서를 제공하
지 못한다는 거죠."
쿨란은 라몬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라몬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쿨란에게 물었다.
"그럼 메이런이 하면 된다는 겁니까? 장례 절차를 어떻게 알았냐고 만
티드 레이스들이 물으면 어쩌죠?"
"라몬. 이해 못하는 군요."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타이론은 정말로 장례 절차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온 게 아닙니
다. 메이런이 일을 잘 하고 있나 중간 점검을 하러 온 거지요. 이런 상황
을 이해 못하는 걸 보니 라몬, 당신은 정말로 좋은 공무원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쿨란의 말은 비꼬는 내용을 담고 있는 듯 했지만 말투만은 진지했다.
라몬은 쿨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난 좋은 공무원이 아니라서 미안하군, 쿨란."
타이론이 말했다. 그리고는 메이런을 노려보았다. 메이런은 타이론의
험악한 인상에 몸을 움찔 했다.
"딱 잘라서 말하지. 메이런. 네가 트랜서가 될 수 없다면 시 밖으로 쫓
겨나게 될 거야."
물론 일개 시경 직원인 타이론이 메이런을 시에서 추방시키고 말고를
결정할 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론의 인상과 시경 수사관이라는 위
치는 16살 소년을 겁주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다.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
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메이런은 합법적인 내 아들이야. 걱정 마라 메이런."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메이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메이런은 쿨란
의 말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쿨란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메이런
이 트랜서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거라는 걸 메이런이 모
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16살이었다. 쿨란의 말은
메이런의 가슴속에 따스함을 전해 주었다. 메이런은 당장이라도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타이론 웃으며 쿨란의 말을 받았다.
"그렇군. 핑키 꼴 나지 않기를 바라지."
메이런은 핑키라는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핑키가 쿨란이 고용했던 트랜서였고, 사고로 죽었다는 걸 떠올리자 메이
런은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것이 내려오는 듯했다.
"좋아. 난 일단 좀 자야 겠어, 쿨란."
타이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확인 할 건 다 했
으니 돌아갈 모양이었다.
"한가지만 말해 두지. 저 정체불명의 레이스는 연방 수사관 요청으로
신병을 인도하기는 했지만 한계는 24시간이야. 알고 있지?"
쿨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시간을 독촉하는 건가?"
"아니야. 원칙을 상기시켜 준 것 뿐이야."
타이론은 이렇게 말하고는 기지개를 켰다.
"참. 타이론. 어디서들은 말인데 말일세, 우리 시의 협상 능력은 전 우
주에서 최고라고 하더군."
"그래? 난 처음 듣는 소린데."
쿨란의 말에 타이론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협상 능력이라는 게 시간을 끄는 데 있다면 말이지."
쿨란은 타이론을 노려보고 있었다. 메이런은 생각을 읽지는 않았지만
쿨란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쿨란은 타이론에
게 시간 독촉이나 받으면서 일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타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일부는 맞아. 분명 우리 시의 협상 능력은 우주 최고지. 그
렇지만 협상팀이 헛기침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시경 수사관은 폐렴에 걸
리기 마련이라네."
메이런은 타이론의 말에서 시경이 협상팀의 하부 조직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서장이라던가?"
"그래. 우리 서장은 빠른 시간 내에 일이 끝났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
알잖아. 서장 성격."
쿨란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은 시간이 지나면 시크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거로군.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저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시체로 발견 되게
할건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우리 시의 원
칙."
"공무원들은 필요할 때만 지켜지는 걸 원칙이라고 하지."
쿨란의 말에 타이론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동의
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아는 원칙은 말이야, 연방수사국에서 다른 레이스를 임의
로 보호할 수 있는 시간 규정이 24시간이라는 거야. 가만있자... 이제 14
시간하고 28분 남았군."
타이론은 시계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쿨란은 타이론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받아치고 싶은 걸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을 푹 자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나 보군. 알았어. 여기 연방 수사관
께서 잘 진행 해 주실 걸세."
"믿고 가지. 그럼."
타이론은 한 손으로는 졸린 눈을 비비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볍게 인
사를 건네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동안 사무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
꼈는지 시크사도 더듬이를 흔들면서 메이런과 쿨란을 번갈아 가면서 보
았다.
"믿는 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말거라, 메이런."
침묵을 깬 것은 쿨란이었다. 쿨란의 말에 메이런은 특별히 대답을 하
지는 않았지만 쿨란이 지금 한 말이 푸우순 시에서 살아가는 법 다섯 번
째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믿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단다. 그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지."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도 들었으니까 알겠지만 말이다, 우리한테는 시간이 없구
나."
"지금... 해 볼까요?"
메이런이 말했다. 메이런의 말에 쿨란과 라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부담 가지지 말고. 한 번 시도 해 보자."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시크사 쪽으로 다가갔다. 시크사는 두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꼭 껴안으면서 경계하는 듯한 자세로 몸을 뒤로 뺐다.
"시크사. 우리는 당신을 도우려는 거예요. 안 느껴지나요?"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시크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느낌을 전달하
려는 걸까? 메이런은 쿨란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메이런."
쿨란은 시크사에게서 시선을 메이런 쪽으로 옮기면서 말했다. 메이런
은 작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하지 못한다면 그 어떠한 방법으로
도 쿨란에게 인정 받을 수 없을 거였다. 아니, 어쩌면 푸우순 시의 그 누
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할지 몰랐다. 메이런은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쿨
란이 자신에게 전해줬던 따스한 느낌을 떠올렸다.
메이런은 천천히 시크사에게 다가갔다. 시크사가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시크사의 갈색 외골격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특히 빛나고 있
는 것은 시크사의 겹눈이었다. 메이런은 투명한 겹눈이 금속성의 유리
구슬처럼 느껴졌다.
메이런은 숨을 고른 다음 시크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단 마음을
읽어보려는 것이었다.
"키티-본의 말을 기억해 보렴."
쿨란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쿨란이 그러지 않았어도 메이런
은 키티-본의 말을 떠올렸을 것이었다. 일단 시크사의 마음을 여는 것이
먼저였다. 트랜스가 어떤 일인지 메이런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
만 일단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해 볼 심산이었다.
"시크사..."
쿨란이 중얼거리자 라몬과 쿨란은 숨을 죽였다. 사무실에는 아침 햇살
과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잠시 동안 사무실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적막이 감돌았다. 메이런은 시크사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4 -
메이런이 먼저 느낀 것은 시크사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였다. 지금
메이런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크사는 메이
런을, 그리고 쿨란과 라몬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어요."
한 참이 지난 후에 메이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쿨란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그야 당연하지. 낯선 행성에서 만난 유일한 동족이 죽었으니 그
럴 만도 해."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시크사에게 다가갔다. 시크사의 더듬이가 흔
들리고 있었다. 쿨란은 시크사에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시크사.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건 우리뿐이에요."
시크사는 쿨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런은 시크사가 뭔가를 기
억해 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손에 대한 기억인가? 접촉? 인사? 여러 느낌이 뒤섞여 있
는 시크사의 감정은 메이런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그저 혼란스러운
감정의 연속일 뿐이었다.
"시크사.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죠? 두려워하지 말아요. 우리 말
고는 아무도 당신을 도울 수 없어요."
쿨란의 말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시크사는 조금씩 경계심을 풀고 있
었다. 그 느낌은 꽤나 강렬한 것이어서 라몬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정말이었군요..."
라몬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시크사는 천천히 손을 뻗어 쿨란의 손을
잡았다. 메이런은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내었다. 쿨란이 해 낸 것이었다.
시크사의 공포심을 사라졌다. 쿨란은 미소를 지었다.
"메이런. 이제 네 차례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메이런은 시크사의 앞
에 섰다.
메이런은 먼저 시크사가 흘리고 있는 감정의 선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 선은 매우 가늘고 미약한 것이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일단 그것을 잡
는 것 말고는 트랜스 하기 위해 뭘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메이런은 미약한 감정의 선을 찾아내었고, 곧 이어 그것을 따라 천천
히 시크사의 감정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시크사는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
았다. 시크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비웃음일까? 아니면 뭔가 즐거워하고 있는 걸까? 메이런은 정
확하게 시크사의 감정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메이런의 마음속에서 의
심이 고개를 들었다. 만티드 레이스에게도 웃음이라는 감정이 있는 걸
까? 만티드 레이스도 타인을 믿는 다는 걸 말로 표현하지 않는 걸까?
메이런은 애써 이런 의혹을 지우려고 노력하면서 계속해서 시크사의 감
정을 느끼고 있었다.
메이런은 이윽고 시크사의 감정에 정확하게 다가설 수 있었다. 시크사
의 감정은 매우 차가운 것이었다. 어찌나 차가운지 메이런은 오한을 느
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메이런이 말하자 쿨란과 라몬이 동시에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둘의 표
정은 기대와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그리고... 차가워요."
"그래. 잘 하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쿨란이 여전히 굳은 얼굴로, 하지만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런은
시크사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런데..."
라몬이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무실은 조용했다. 사무실에
는 시크사와 메이런의 감정만이 미묘한 긴장감과 함께 오가고 있었다.
메이런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시크사의 감정은 이제 더 이상 다가
설 수 없는 것이었다. 메이런은 차가운 벽을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차가
운 벽이 시크사와 자신의 사이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메이런은 그것
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크사의 경계심이었다.
메이런은 애써 붙잡고 있는 감정의 끈이 조금씩 가늘어지면서 빠져나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메이런은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감정의 끈은 조금씩 멀어져가
고 있었다. 메이런은 식은땀을 흘렸다.
"메이런. 괜찮아. 먼저 그 가방 안에 든 게 뭔지부터 물어봐."
바로 그 때 쿨란처럼 친절한 목소리로 라몬이 메이런에게 이렇게 말했
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메이런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메이런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쿨란은 아무 말 없이 메이런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쿨란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실망했을 게 틀림없다고 메이런은 생
각했다. 그리고 메이런의 생각은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절 너무 경계하고 있어요. 아시잖아요. 경계심이 있으면 트랜스는 이
루어지지..."
"괜찮아."
쿨란은 메이런의 말을 끊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곤 주저앉아 있는 메
이런 앞에 앉고는 메이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쿨란의 얼굴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며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도 악수라도 해 보는 게 어때?"
라몬이 메이런에게 물었다. 쿨란은 라몬을 노려 보았다.
"너무 서두를 거 없어요, 라몬."
"쿨란. 우리한테는 14시간뿐입니다. 어쩌면 저 친구 목숨도 14시간뿐인
지 모르죠."
"솔직히 전 고객의 목숨보다는 메이런이 더 중요합니다."
메이런은 이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쿨란은
정말로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런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얼굴
이 식기를 기다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시크사에게 다가갔다.
"시크사."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시크사는 가방
을 꼭 안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 시간이 문제일 뿐이야."
쿨란이 메이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부끄러워진
손을 얼른 내렸다.
"지방 검사한테 연락해야 겠습니다. 영장 연장 신청을 해야겠군요. 그
렇게 되면..."
라몬은 이렇게 말하며 팔목시계를 보았다.
"그렇게 되면 38시간하고 5분이 남는 셈입니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곤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지금 아주 잘 한 거야. 감정을 느꼈잖아. 그건 보통 사람은 할 수 없
는 일이야. 알고 있지?"
쿨란이 메이런에게 말했다.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런은 다시
한 번 얼굴이 달아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쿨란은 메이런에게 카
드 한 장을 내밀었다. 메이런은 카드를 받아 들기는 했지만 그것이 뭔지
몰라서 그저 쿨란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부터 두 시간 줄 게. 나갔다 와. 이건 현금 카드야. 캡슐을 타거
나, 사먹고 싶은 거 사 먹을 때 써. 네 이름으로 등록 된 거니까 걱정하
지 마. 네 이름은 내 아들 이름하고도 같지."
쿨란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전 갈 만한 곳이 없는 데요."
"현금 카드 쓰는 법은 알지? 캡슐 안에 있는 카드 판독기에 대기만 하
면 되. 그러면 캡슐 화면에 장소가 몇 군데 표시될 거다. 내가 너 갈 만
한 곳을 메모리 해 두었거든. 가고 싶은 곳이면 아무 곳이나 가. 하나만
잊지 않으면 된다."
쿨란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여기 주소는 힐사이드 221번지야. 돌아 올 때는 여기로 가자고 하면
된다."
메이런은 말이 없었다. 사실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현금 카드와 시간을 자신에게 주었다는 건 쿨란이 자신을 완전히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메이런은 이런 신뢰를 타인에게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휴
먼 레이스라면 누구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자신도 누군가를
그만큼 믿어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런은 그런 부담
감을 느낀다기 보다는 그저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할 뿐이었다.
"나가봐라."
"저... 별로 갈 만한 곳이..."
"일단 나가 봐. 그게 네 일 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메이런을 거의 떠밀다 시피 문가까지 데리고
갔다. 문이 열리자 메이런은 좀 도와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라몬을 바라
보았다.
"제가 따라갈 까요?"
라몬이 쿨란에게 물었다. 쿨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의미가 없죠. 메이런은 어린애가 아닙니다."
이 말에 메이런은 어쩔 수 없이 문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캡슐이 지나갈 거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메이런에게 차고 있던 팔목시계를 주었다.
"싸구려지만 시간은 맞는 거다."
"두 시간 있다가 오겠습니다."
메이런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중하게 말하고는 계단을 따라서 내려
갔다. 쿨란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우범지역에 어린 아이 혼자 내보내다니..."
"저 카드는 사용 한도액이 있습니다, 라몬. 도둑맞아도 그만이죠. 그리
고 안전 장치도 해 뒀습니다."
쿨란은 사무실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안전장치라뇨?"
쿨란은 대답 대신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피?"
쿨란이 물었다. 라몬은 다시 되물으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라몬. 저기 있는 만티드 레이스의 목숨보다 메이런이 소중하다는 건
진심이었습니다. 저같은 일을 하는 친구에게 고객의 생명보다는 새 트랜
서를 구하는 게 중요할 수 밖에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모를 사람이군요."
라몬은 당혹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말했다. 쿨란은 라몬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38시간이 지나면 저 친구는 시에서 접
수할 테니까요. 망명객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듣기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는 시의 안전이 더 중요하죠. 공무원은 그런 일에는 냉정하지 않던가
요?"
쿨란은 커피포트를 작동시키면서 말했다. 라몬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
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계산적이군요. 하지만 만약 메이런이 트랜서가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몬이 쿨란에게 물었다.
"이건 투자입니다, 라몬. 그리고 투자는 근본적으로는 도박이지요. 도
박을 할 때는 판돈을 아끼는 게 아닙니다. 그 한계만 정해져 있다면 말
이죠."
쿨란은 커피를 컵에 따랐다.
"게다가 제가 준 저 시계는 진짜 싸구려거든요. 길거리에서 1000크레
딧 주고 살 수 있는 겁니다."
쿨란의 이 말은 농담이었지만 라몬은 농담으로 들을 수가 없었다. 라
몬은 분명 쿨란이 자신의 이용가치 역시 냉정하게 재고 있을 게 틀림없
다고 생각했다.
"자네도 마실 건가, 시크사?"
쿨란이 시크사에게 커피잔을 들어 보여주면서 말했다. 시크사는 그저
쿨란을 바라보다가 뭔가 불쾌하다는 듯이 더듬이를 심하게 흔들었다.
"저 친구는 커피를 싫어하나보군요."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커피잔을 라몬에게 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갈까요?"
라몬은 커피 잔을 받아들면서 물었다.
"딱 한 군데 밖에 더 있겠습니까?"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 할 곳이 있거든요. 검사한테는 조금 있다가 하세요."
쿨란이 말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5 -
일단 건물에서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메이런은 도무지 어디로 가야 좋
을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시간 동안 나갔다 오라니. 쿨란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까. 메이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메이런은 잠시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는 분명 낯선 곳이었다. 처음 라몬을 따라서 푸우순 시에 들어섰
을 때, 메이런이 느꼈던 것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늘 보던 창
밖의 논과 밭, 그리고 사막대신 창밖에는 낯선 높은 건물이 줄지어 서
있을 뿐이었다.
메이런은 그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은 이미 불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 죽은 사람 중에 어머니가 끼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절망감, 아이라가 시 면접관과 만난 후 캡슐을 타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가버렸을 때의 상실감... 메이런에게 푸우순 시의
모습은 모조리 좋지 않은 기억뿐인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을 잊어 보라는 뜻으로 날 내보내 준걸까.
메이런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건물 옆 공터에
는 빈 드럼통에 불을 피워 놓고 몇몇 더러운 옷차림의 휴먼 레이스들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모노레일 건너편에는 얼굴을 완전히 덮는
두건을 뒤집어 쓴 어떤 레이스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어디론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하늘에는 지난 밤 보았던 MPO가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캡슐들은 모노레일을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메이
런은 투명한 구슬이 움직이는 모습과 반짝이는 모습을 한 참 동안 바라
보고 있었다.
메이런은 멍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불가에 있던 휴먼 레이스 중 하나
가 메이런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이런은 얼른 고개를 돌렸
다. 큰 도시에서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예의라는 걸 학교에서 배운
덕이었다.
"좋은 날씨야. 그렇지, 꼬마야?"
다가온 휴먼 레이스 사내는 면도하지 않은 더러운 얼굴에 손에는 잔뜩
녹슨 굵직한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메이런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
다.
"좋은 날씨라니까?"
"예."
메이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좋은 캡슐이야."
사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입술 사이로 보이
는 이빨은 칫솔을 만나 본지 얼마가 됐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누런
빛을 띄고 있었다.
"예."
메이런은 조심스럽게 대답하면서 방금 나온 엠파이어 건물 3층을 올려
다보았다. 혹시라도 라몬이나 쿨란이 밖을 내다보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였다. 하지만 창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좋은 옷을 입고 있구나."
"예."
메이런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다시 건물로 도망쳐 들어갈까 하는 고
민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휴먼 레이스가 특별
히 어떤 적대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도망친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
리고 아무리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고 해도 낯선 이를 무조건 경계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 같기도 했다.
"아마 도심에서 나왔겠지. 좋은 옷과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자란 귀공
자일 거야."
"아뇨."
메이런은 대답하면서 사내의 의도를 읽어 내려고 했다.
"좋은 일이야. 나한테나, 저기 있는 친구들한테나."
하지만 쿨란이 생각을 읽어내는 사이, 면도하지 않은 사내는 털투성이
의 손으로 메이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메이런은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눈앞의 사내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메이런은 문득
쿨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시에서는 뒷골목 깡패도 총을 가지고 있
다는 말이었다. 메이런은 마른침을 삼켰다.
"카드가 있겠지?"
"전 쿨란의 아들이에요."
사내의 본론이 나오자 메이런은 있는 힘껏 이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절반쯤 목 속에 잠겨 그리 큰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쿨란이라는 말을 들은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쿨란은 알아. 다른 레이스를 등쳐먹는 사기꾼이지만 우리한테는 친절
하지. 그런데 쿨란 한테는 아들이 없는데."
사내가 쇠파이프를 위협적으로 메이런의 얼굴 앞에 들어 보이면서 말
했다. 메이런은 사내의 생각을 읽어보기 위해 사내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만약 사내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메이런은 사내의 생각을
읽어 낼 수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내는 생각을 읽어 내는 일에 대
해 무방비 상태였고, 약간의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메이런은 그리 어렵
지 않게 사내의 생각을 읽어 내었다.
메이런은 알 수 있었다. 사내는 망설이고 있었다. 메이런이 진짜 쿨란
의 아들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진짜 쿨란의 아
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물러 설 것이었다. 메이런은 심호흡을 했
다. 탈출구는 하나였다.
"생겼어요. 어제 부로."
"그래? 난 못 믿겠는데."
사내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라면 제가 이렇게 마음놓고 여기서 캡슐을 기다리고 있을 리가
있어요?"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메이런은 마지막 결정타가 필요했다.
"핑키를 알죠? 제가 핑키 대신이에요."
메이런은 사실 핑키가 정확하게 쿨란과 어떤 관계였는지 알고 있지 못
했다. 그저 쿨란과 라몬이 나누는 대화에서 주워들은 말일뿐이었다. 하지
만 그건 사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쿨란에게 안부 전해 다오."
사내는 이렇게 말하면서 순순히 물러섰다. 메이런은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얼른 캡슐 스테이션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이제 빈캡
슐이 지나가면 그 캡슐은 메이런의 앞에 설 것이었다.
메이런은 불을 피우고 있는 사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서 메이런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런은 애써 태연
한 표정을 지으며 사내들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입술이 불에 데인 듯 바짝 마르
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푸우순 시에 메이런이 들어 온 이후로 가장 긴 1분이 흘렀다.
1분이 지나자 빈 캡슐이 메이런 앞에 섰고, 메이런은 천천히 캡슐 안으
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저희 랜티 캡슐 교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메이런은 서둘러 카드를 카드
판독기에 꽂았다.
"어서 오세요, 메이런 씨. 탑승을 환영합니다."
"문 닫아 줘요. 빨리."
메이런은 다급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문이 닫혔다.
"행선지를 말씀해 주세요."
메이런은 어서 출발을 해야겠다. 갈 만한 곳이 분명히 화면에 나타난
다고 했는데... 메이런은 앞 유리창에 뜬 화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무
지 어디가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도시에 들어 선 메이런이
'MPO 사망자 등록 센터' '이스트힐 퍼브' '가윈 라이브러리' 따위가 뭐하
는 곳인지 알 리 없었던 것이다.
메이런은 화면에 나타나 있는 글자 중 유일하게 알고 있는 곳을 발견
하고는 서둘러 그곳을 말했다. 사내들이 천천히 캡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눈동자."
"확인합니다. 헌터야드 59번가 맞습니까?"
"예. 빨리."
"출발하겠습니다. 검은 눈동자, 헌터야드 59번가, 지금부터 14분 4초가
소요될 예정입니다. 모쪼록 좋은 이동되시길 빕니다, 메이런 씨."
캡슐은 사내들이 다가서기 전에 스테이션을 떠났다. 메이런은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캡슐은 금새 모노레일을 타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메이런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레이스
들의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메이런도 본 적이 있는 자동차들도
저 밑을 다니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호버콥터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고,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노레일위의 캡슐은 아주 빠른 속도로 메이
런이 탄 캡슐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메이런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겁먹지 마, 메이런."
메이런이 중얼 거렸다.
"어차피 똑같은 하늘 아래 있어. 도시라고 별 다를 건 없다고."
이렇게 말하는 순간, 메이런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호버콥터가 눈에
들어왔다. 메이런은 호버콥터 쪽을 바라보았다. 호보콥터에는 머리카락과
눈썹을 완전히 민 청년들이 메이런에게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별 다를 건 없어."
메이런은 얼른 눈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캡슐은 금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검은 눈동자, 헌터야드 59번가입니다. 요금은 14000크레딧입니다. 모
쪼록 좋은 이동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저희 랜티 교통을 이
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이 열리자 메이런은 얼른 캡슐에서 내리려다가 문득 쿨란의 말이 떠
올랐다.
"영수증."
메이런이 말하자 카드 판독기 옆에 있는 출력기에서 영수증이 나왔다.
메이런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영수증에는 랜티 교통 회사의 로고와 메이
런이 사용한 액수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메이런은 그것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일단 급한 마음에 검은 눈동자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키티-본을 찾아가 볼까? 하지만 왜
왔다고 이야기해야 하지? 두 시간이면 아직 한 시간 하고도 40분이 남았
는데. 어떻게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일단 갈 수 있는 곳이 검은 눈동자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간다고 해도 입구에 서 있던 그 랩타일 레이스가
들여보내 주기나 할까? 그 랩타일 레이스는...
메이런의 생각은 끊어지고 말았다. 눈앞에 바로 그 랩타일 레이스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메이런이 랩타일 레이스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빨간색 태의 선글라스는 너무나도 특이해서 메이런은 잊
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메이런?"
랩타일 레이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을 때,
메이런은 가슴속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저 랩
타일 레이스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는 건 알지 못했기 때문이
었다.
"아, 안녕하세요."
메이런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엉겁결에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난 쿠아딘. 검은 눈동자의 경비원이다."
"저는 메이런... 쿨란의 아들입니다."
메이런은 뭐라고 자기 소개를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대답했다.
쿠아딘이라는 이름의 랩타일 레이스는 메이런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
이고는 메이런의 손을 잡았다. 메이런은 랩타일 레이스의 끈적끈적한 점
액질의 손을 처음 잡아 보았기 때문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2미터가
넘는 거구의 랩타일 레이스 앞에서 불쾌감을 표시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
았다.
"가자."
쿠아딘은 이렇게 말하고는 메이런을 끌고 검은 눈동자 쪽으로 향했다.
"저, 쿠아딘... 저기요, 전..."
"기다리고 계신다."
쿠아딘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다니? 메이런
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메이런은 대강 짐작을 해 낼 수는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은 틀림없이 키티-본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메
이런은 우선 쿨란이 미리 연락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확률이 낮았다. 설마 키티-본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메이런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메이런은 쿠아딘에게 이끌려 금새 검은 눈동자 앞에 설 수 있었다. 세
로로 그려진 눈동자 모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쿠아딘은 이렇게 말하면서 메이런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고는 품에
서 붉은 손수건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메이런은 영문은 알 수 없었지
만 일단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닦아라."
쿠아딘은 이렇게 말하고는 처음 쿠아딘을 보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 팔
짱을 끼고는 문 앞에 섰다. 메이런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손수건
을 들고서 멍하니 서 있었다. 보는 앞에서 손을 닦는 다는 게 어쩐지 예
의에 벗어나는 일 같기도 했고, 손을 닦고 난 후에 안으로 들어가야 할
지, 아니면 쿠아딘의 지시를 기다려야 하는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
"들어 가."
쿠아딘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에
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들어가지 않았다가는 쿠아딘의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손수건은 주고."
쿠아딘이 말했고, 메이런은 허둥거리며 손수건을 쿠아딘에게 건넸다.
쿠아딘은 손수건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언제 그랬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메이런은 안으로 들어섰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6 -
검은 눈동자의 복도에는 지난번에 보았던 붉은 조명이 그대로 켜져 있
었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붉은 등은 복도를 지나는 이를 압도하는 힘
이 있었다. 메이런은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메이런이 발소리를 내려고 한다고 해도 복도 바닥의 붉은 카페트가
발소리 쯤은 집어 삼켰을 것이다.
눈동자가 그려진 문 앞에 섰을 때, 메이런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아
무래도 마음이 잘 진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에야 메이런은 눈동자가 그려진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두 번 째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은 마치 메이런이 세게 두드려서 열린 것처럼 저절로 열
렸다.
"들어오게."
메이런은 수정 구슬이 놓여진 테이블과 그 뒤에 앉아 있는 키티-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키티-본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안녕... 하세요."
메이런은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 몰라서 한 참을 생각하다가 이
렇게 말했다. 키티-본의 고개가 끄덕였다.
"그래. 이리 와서 편하게 앉게."
메이런은 키티-본의 앞에 가서 앉았다.
"자네가 뭘 생각하는지 나는 알지."
자리에 앉자 마자 키티-본이 한 말이었다.
"혹시 키티-본이라는 친구는 초능력자가 아닐까? 그래서 미래를 예견
하고 나를 여기로 불러 온 게 아닐까? 물론 아니라네, 메이런. 전 우주에
있는 그 누구도 미래를 볼 수는 없어. 그 누구도."
"그렇... 군요."
메이런은 사실 쿨란이 미리 연락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 생각이 맞아. 쿨란이 연락을 했다네. 쿨란은 좋은 친구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친구는 아니야. 나와는 오랜 시간 같이 복무했었지만..."
키티-본은 이렇게 말하면서 두건을 벗어 내렸다. 키티-본의 검은 눈동
자와 부드러운 털이 조명아래 검붉게 은은한 빛을 발했다. 메이런은 키
티-본이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쿨란이
연락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도 별로 놀랍
지 않았다.
"자네가 올 만한 곳이라고는 여기 뿐이란 거, 쿨란도 잘 알고 있었을
거야. 나는 쿠아딘을 내보냈지. 쿠아딘은 조금 무뚝뚝하기는 해도 믿을
수 있는 친구야. 적어도 근무 시간 중에는 말이지."
"예..."
메이런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자네가 트랜서 일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지, 쿨란의 의도는."
"도와주실 건가요?"
메이런이 물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존재에게 던
지는 이런 질문은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글쎄. 트랜스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야."
키티-본은 이렇게 말하고는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도와줄 수... 없다는 건가요?"
메이런은 풀죽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 반대다."
키티-본이 말했다.
"나는 너를 도우려고 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이렇게 너와 이야기를 나
누고 있는 거지."
키티-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귀를 움찔거렸다. 메이런은 키티-본의 머
리에 솟아 있는 두 개의 뾰족한 귀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문득
시크사의 더듬이를 떠올렸다.
"오는 길에 무서운 일을 당했구나."
키티-본은 뭔가 즐긴다는 듯한 투였다. 메이런은 그런 키티-본의 감정
을 느끼고는 조금은 불쾌한 감정이 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읽힌다는 것
도 기분 나쁜 일이었지만 그것을 뻔히 알면서 즐기는 모습은 더욱 기분
나쁜 일이었던 것이다.
"거리의 부랑아들은 원래 태도가 쉽게 바뀌기 마련이지. 상대가 누구
냐에 따라서."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메이런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메이런은 자신이 쿨란을 팔아 위기를
모면했던 일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랬구나. 그런데 말이다, 너는 꽤나 두려워하고 있었어. 그렇지? 그
런데 무서웠으면서 어떻게 그 친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
"그건..."
메이런은 즉각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된 것뿐이었어. 내 말이 틀렸니?"
키티-본은 양손으로 자신의 품을 뒤적였다. 메이런은 문득 벼룩이라던
가 진드기 같은 걸 떠올렸지만 키티-본은 그런 것에는 별 신경이 쓰이
지 않는 것 같았다.
"숨을 쉰다는 건 말이다, 의식하고 있지 않을 때 가장 잘 쉬어지는 법
이지. 만약 숨쉬는 걸 의식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숨쉬는 일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단다. 트랜스도, 또 트랜스에 선행하는 생각
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야. 자연스럽게 하면 그만인 거란다. 상대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있으면 트랜스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아니야. 공포는 한 요소일 뿐이지."
"하지만..."
"로즈웰 형 레이스를 만났을 때, 공포심을 느꼈던 걸 말하고 싶은 모
양이로구나."
키티-본은 지나치게 앞질러갔다. 메이런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 있
을 뿐이었다. 키티-본은 여전히 옷속에 손을 집어넣고서 자신의 품을 만
지작거렸다.
"중요한 건 믿음이란다. 꼭 공포심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마음이 트랜
스를 방해할 수 있지. 예를 들면 질투라던가, 분노라던가, 또 무관심이라
던가..."
메이런은 키티-본의 말이 옳다고 느꼈다. 하지만 머리 한 편에서는 이
런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트랜서 일을 하지 않는
걸까?
"내가 왜 트랜서 일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지 않니?"
키티-본은 또 한 번 메이런의 생각을 읽었다. 메이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더 이상 트랜서 일을 하지 않는 이유겠지."
"전에는 했었군요."
"카니보라 레이스에게는 이런 말이 전해지지. 벽을 타는 재주를 가진
자는 벽을 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메이런은 키티-본의 비유가 별로 잘 어울리는 비유 같지는 않다고 생
각했다. 키티-본이 벽을 타는 모습은 아무래도 상상이 잘 가질 않았다.
"세상에는 정말 여러 종류의 생명체가 존재한단다. 너와 내가 여기 앉
아서 그 수를 센다고 하면 우주가 끝날 때까지도 다 못 셀 만큼의 생명
체가 존재하니까. 그런데 그 모든 생명체라는 건 생존하기 위해서 존재
하지."
이렇게 말하는 키티-본은 전쟁을 기억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키티-본
의 감정을 느끼며 키티-본이 용병이었다는 점을 상기했다.
"하지만 생명체는 혼자 존재할 수 없어. 혼자 떨어져서는 생존할 수
없는 법이지. 그래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때로는 도우며, 때로는 죽이며.
전쟁도, 트랜스도, 생각해 보면 딱 한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
야. 바로 생명체의 생존이지."
"그래서... 트랜서 일은 안 하시는 건가요?"
"내 눈동자는 타버렸단다."
키티-본이 말했다.
"이제 난 더 이상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
다면 모를까, 볼 수 있었던 생명체가 빛을 잃는 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큰 상실이지. 물론 그래서 내가 트랜스 일을 하지 않는 건 아니야."
키티-본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메이런은 그것
이 무엇인지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금덩어리였다.
"생명체라는 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 쿨란과 함께 여기 행성 어스로 왔지. 그리고 금새 이곳에 적응했다.
여기는 전장이었어. 휴먼 레이스들은 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행성 어
스에 살고 있는 자들은 다들 그 전쟁을 경쟁이라던가 그 비슷한말로 표
현하더구나. 그런데 실제로 죽이지 않는 전쟁은 내게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었단다. 내가 가지고 있는 트랜서의 능력은 이곳에서는 꽤 잘 팔리
는 능력이었단다. 그래서 나는 곧 이걸 모을 수 있었지."
키티-본은 금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금덩어리에서 탁한 소음이 들려
왔다. 메이런은 금덩어리에 새겨지고 있는 키티-본의 손톱자국을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해서 난 살아남을 수 있었어. 전쟁을 통해서 빛을 잃은
자는 전쟁을 통해서 다른 빛을 찾았던 거지.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니
나는 더 이상 생존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단다."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키티-본에게서는 메이런이 감당
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운 감정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 내가 자살이라도 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난 그럴 생각은 조
금도 없으니까."
키티-본이 말했다.
"다만... 나는 눈과 함께 마음의 빛도 잃었던 거야. 생존의 의미를 찾는
순간."
키티-본의 목소리는 꽤나 엄숙하게 들렸다. 메이런은 그런 키티-본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슬픔에 가까운 감
정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만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트랜서의 일을 한다는 건 수많은 다른 생명체들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단다. 그들은 하나같이 빛을 가지고 있었어. 내가 했던 일은 그들
의 빛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지. 그리고 그들은 모두 빛을 찾았
다. 나는 꽤 솜씨 좋은 트랜서였거든."
키티-본은 우쭐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메이런은 그 말투가 그저 과장
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다른 생명체의 빛을 찾아주면 찾아 줄수록 내 자신의 빛
은 사라져 가는 걸 느꼈다고 해 두면 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빛을 보
면 내가 얼마나 어두운가를 알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러셨군요."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키티-본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에 고
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기다려왔단다. 다시 빛을 찾는 날을."
키티-본이 말했다.
"내 고민을 들어 줄 누군가를..."
키티-본은 테이블 위의 금덩어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것
을 마치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에서 몇 번 흔들었다.
"그 때까지는 사는 거지. 이걸 바라보면서 말이야."
키티-본의 웃음소리는 그다지 즐겁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글픈
쪽에 가까운 웃음소리였다.
"자. 내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는 메이런, 네 이야기를 들을 차례네. 왜
안되는 걸까. 트랜스가 말이야."
"아마도...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거겠지요."
메이런이 말했다. 메이런은 시크사와 트랜스를 시도했을 때의 일이 떠
올랐다. 시크사에게는 보이지 않는 차가운 벽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벽을 넘어 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키티-본과 트랜스 했을 때와는 틀렸어요. 시크사는... 너무 차가웠어
요. 키티-본은 따뜻했고요. 시크사는... 날 믿지 않아요."
메이런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순간 더 이상 시
크사와 트랜스 할 수 있는 노력의 여지는 사라져버렸다.
"책임을 시크사에게 미루는구나."
키티-본의 음성은 차분했지만 한 편으로는 단호했다. 메이런은 키티-
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키티-본은 따뜻했지만 시크사는 차갑다고요. 그 뿐이에요."
메이런은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게 의미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심정이었
다.
"도망치고 싶은 게로구나."
키티-본이 말했다.
"더 이상 무슨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구나. 그
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시크사는 누
가 돕지? 아니, 그보다 너는 어떻게 할 거니? 마을로 돌아갈까? 아이라
는 어떻게 하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메이런은 키티-본의 말에 심한 동요를 느꼈다.
분명 키티-본은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지만 키티-본의 음성은 따뜻했다.
메이런은 그 따뜻함이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욕설이라도 듣는
다면 편하련만. 이대로 뒤돌아서 도망쳐버릴까 싶었다. 하지만 막상 돌아
서려고 해 보니 갈 곳이 없었다. 메이런은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내가 너와 트랜스 할 때 어떻게 했나 생각해 보렴."
키티-본이 말했고, 메이런은 순간 쿨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말도 통하
지 않는 시크사에게 계속해서 안심을 주려는 쿨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
르자, 메이런은 깨달았다. 자신이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지 않으면 시크
사도 결코 마음의 벽을 허물지 않으리라는 것을.
키티-본은 메이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메
이런도 키티-본이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곳 행성 어스에 와서 배운 거다."
즐거운 기색으로 키티-본이 말했다. 그리고 키티-본의 즐거운 기색은,
메이런도 싫지 않았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