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12화 (12/52)

11.반란의 꿈.

메이런이 당부 받은 것은 세 가지였다.

먼저 시크사에게 망명 의지를 확인 할 것. 그와 동시에 '당신은 이제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보낼 것.

두 번째는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만티

드 레이스에게 넘겨 줄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 것.

마지막 당부는 타이론의 당부였다.

"만티드 레이스의 장례 절차를 알아 봐 줘. 서장한테 쪼이는 모양이

야."

물론 이렇게 말한 건 쿨란이었다. 쿨란은 짜증을 부리는 타이론의 전

화를 받고서 메이런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쿨란과 라몬의 희망처럼 쉽사리 트랜스가 이루어지지는 않았

다.

메이런에게 있어서 시크사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일은 결코 쉽지 않

은 일이었다. 가야할 방향을 안다고 해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머

리가 아니라 발이라고 한다면, 메이런이 시크사와 트랜스를 하는 일은

엇갈리는 발과 머리를 조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일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함을 전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메이런이었지만 그것을 시크

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사실 쿨란이었다. 쿨란이 지금

까지 단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기괴한 노래를 불렀을 때는 트랜스고

뭐고 완전히 중단이 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쿨란의 여러 행동들 -음

식을 권하고,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고,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껑충

뛰고- 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시크사와 트랜스 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메이

런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꺼진 방에서 단 둘이 대화를 나누

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오직

서로만을 의지하는 상황을 떠올리며, 메이런은 시크사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처음 트랜스가 성공했을 때 시크사는 대단히 놀라고 있는 상태였다.

전혀 낯선 곳에서 이런 식으로 동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전혀 예

측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신은... 그러니까 진짜 사친이 아니죠?"

시크사가 자신의 언어로 메이런에게 물었다. 메이런은 시크사의 말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친이 누구인지, 사친과는 어떤 관

계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이런이 트랜스에 금

방 익숙해 진 것은 아니었다.

"예."

하고 간단하게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메이런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일단 메이런은 여러 가지를 새로 배워야 했던 것이다. 여섯 개

의 수족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했고, 배에 있는 숨구멍으로 호흡을 하

는 법을 배워야 했고, 더듬이를 통해 얻어지는 미묘한 감각을 느끼는 법

을 배워야 했고, 거기다가 겹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메이런은 다른 것 보다 겹눈 때문에 몸에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어

느 한 눈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시크사의 얼굴은 몇

개가 동시에 보였고, 시크사와 동시에 보이는 자신의 팔다리와 머리 위

의 더듬이 때문에 마치 회전하는 유리구슬 안에 갇힌 것처럼 메이런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만티드 레이스에게 네 개의 다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어쩌면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메이런에게 있어서 그

다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숨쉬는 법과 비슷하군요."

마침내 겹눈을 통해 시크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메이런이 말

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행성 어스에서는 당신 같은 존

재를 트랜서라고 부르지요?"

"그냥... 자연스럽게 된다는 뜻이었어요. 마치 트랜스처럼... 아. 이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맞아요. 여기서는 트랜서라고 불러요."

메이런은 당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눈을 사용하는 데 어느 정도 익

숙해지자, 이제는 더듬이가 전해 오는 난생 처음 느끼는 감각과 낯선 손

의 감각과 도무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내장기관

의 감각이 동시에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럼 당신을 트랜서라고 부르면 되나요?"

시크사가 물었다.

"아뇨. 우리들은 보통 이름을 부르죠. 절 트랜서라고 부르지는 않아요.

다들 메이런이라고 하죠."

"그렇군요. 메이런. 하지만 당신과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

르겠네요..."

시크사가 고개를 떨구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시크사의 마음이 조금씩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메이런은 먼저 시크사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반란군 시절의 기억, 그리고 왕가에서의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

다. 그것은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난 후에 떠오르는 꿈을 되짚어 보는 것

과 같은 경험이었다. 메이런은 마치 그림책을 죽 훑어보는 것처럼 처음

에는 무슨 그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조

금씩 조금씩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도는

꿈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더뎠다.

메이런은 상대방의 생각을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트

랜스의 능력이 없었던 시절에도 메이런은 상대의 생각을 읽고 자신이 원

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되

고 보니, 과연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좋을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당신은 갈색이네요."

메이런이 말했다.

"예. 우리 종족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초록색의 종족,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갈색의 종족이지요."

"초록색은 귀족이고 갈색은 평민인가요?"

"아닙니다. 갈색은 노예이지요."

시크사의 어조는 단호했다.

"우리는 싸우고 있는 겁니다. 외골격의 색에 따라 차별 받지 않는 평

등한 세상을 위해서."

"예. 이해해요. 저희 종족도 예전에는 피부색에 따라서 차별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부색에 따라서 차별을 받았던 시절이 있다고 배

웠다고 하는 게 옳겠지만, 메이런은 일단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은 아이

라의 갈색 피부가 떠올랐다.

"당신의 입장을 말씀 드릴게요, 시크사. 당신은 이제 당신의 의사에 따

라서 이곳 푸우순 시에 망명객으로 등록됩니다. 그 과정에는 시에서 나

온 트랜서가 개입 될 겁니다. 그 전에는 이곳에서 저희와 아주 작은 협

의만 하면 되지요."

메이런은 트랜스를 하기 전 쿨란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시크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협의라는 건 이 가방을 왕족에게 돌려 줘야 한다는 거겠지요?"

시크사는 상황을 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메이런은 시

크사에게 그렇다고 말했다. 시크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얼마나 나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있는지 압니다. 그리고 그것

이 꽤 위험하고 힘든 일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

방은, 왕가의 보물은 결코 넘길 수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메이런은 시크사의 말이 얼마나 굳은 결심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있

었다. 시크사의 겹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단호한 빛을 하고 있었다. 만티드 레이스의 입장에서 바라본 메이런은

만티드 레이스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그 가방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메이런이 시크사에게 물었다. 사실 쿨란도 라몬도 이 부분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만티드 레이스

가 전쟁을 무릅쓰고 행성 어스에 와 있는 가는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시

의 관계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왕가의 보물."

시크사는 짤막하게 말했다. 메이런은 가방에 대한 시크사의 생각을 읽

어 낼 수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어로 바꾸어 낼 수는

없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후 꿈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는 것과 비슷

한 답답함이 메이런을 짓눌렀다.

"초록색... 이군요. 그리고 꿈틀거리고... 주머니... 같은 모양에..."

메이런이 더듬거리며 자신이 읽어내고 있는 영상을 묘사했다.

"일종의 초능력이군요. 우리도 그런 존재는 있습니다.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예. 어떤 휴먼 레이스는 이걸로 먹고살죠."

메이런은 한숨을 토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숨을 토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입은 만티드 레이스의 호흡기관이 아니어서 메이런은 그저 푸,

하는 발음을 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메이런. 당신이 본 게 맞아요. 이건 왕가의 보물, 다시 말해 미래의

왕족들이지요."

시크사가 말했다.

"그럼... 그건..."

"예. 왕가의 자손들이지요."

그것은 알이었다. 초록색의 여왕이 출산한, 만티드 레이스에게는 가장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는.

"내가 훔쳐 가지고 온 이것은 우리 반군에게는 최후의 희망입니다."

"인질극... 같은 것이라도 계획하고 계신 건가요?"

메이런이 시크사에게 물었다.

"인질극이라.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성공 가능성이 낮은 일인 것 같

군요. 아마 인질극을 벌인다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는 제 목숨을

반나절 정도 연장시키는 정도일 겁니다. 그것도 운이 좋다는 가정하에서

요."

시크사가 말하는 동안 메이런은 시크사의 기억 속에서 친숙한 휴먼 레

이스의 단어를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트로이의 목마."

메이런이 말했다.

"트로이의 목마로군요."

메이런의 말에 시크사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트로이의 목마가 뭔지 아시겠죠?"

시크사가 물었다.

"예.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어요. 고대의 병기였다고. 한 때 누구나 개

인 연산장치를 가지고 있던 시절에 상대방의 연산장치에 침투해 들어가

서 연산장치에서 정보를 빼내거나, 연산장치를 파괴했던 고대의 병기라

고요. 전쟁 때 무기로 쓰여서 유명해 졌지요."

"그 비슷한 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크사는 사친을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시크사가 풍기는 지독한

슬픔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더듬이 때문인지 상대의 감정에 휘말리

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메이런은 예민하게 까딱거리고 있는

더듬이에 신경이 쓰였다.

"우리의 계획은 이랬습니다. 왕가의 보물을 훔쳐 가지고 온 뒤, 왕가의

보물에 갈색의 여왕을 심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갈색 만티드 레이스의 알을 넣는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알이 그렇게 간단하게 뒤섞일 리가 없지요. 우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오랜 기간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이곳 행성 어스에 유전공

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예. 알아요. 유전공학. 잡초에서 플라스틱을 뽑아내고, 쓰레기 분해 효

소를 만들고, 가끔은 치명적인 생물학 병기도 만들어 내는 학문이요."

메이런은 리사민이 했던 말을 기억해내서 말했다. 하지만 그런 학문이

정말로 있는지, 그리고 있다고 쳐도 그것이 시크사의 계획과 어떤 관계

가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사친은 우리 반란군의 고위층이었습니다. 40년 전, 이곳 행성 어스로

온 이후 사친이 연구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과연 유

전공학으로 한 개체의 성격을 조종하는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지요. 다행히도 그것은 가능했습니다. 한 생명체에 기록되어

있는 유전자에는 성격은 물론이고 아주 세세한 행동양식까지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이론은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론이 실현 가

능하다는 것이 확인 된 순간부터 사친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왕가에 갈색 피부를 좋아하는 왕족이 태어나도록?"

"비슷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혁명가가 태어날 수 있도록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이지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를."

"혁명가 하나가 태어나면 평등한 세상이 올 까요?"

메이런의 질문에 시크사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메이런은

그 동작이 매우 허망하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하나이겠지요. 하지만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되면 결국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꿈이란, 그런 것이지요."

시크사가 말했다. 메이런은 시크사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

만 어찌 되었건 반란군이 가지고 있는 대강의 계획은 알 수 있었다.

"사친은 자신의 무정란과 올 때 가지고온 수컷은 정액을 가지고 연구

를 진행했지요. 그리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평등한 세상을 열어갈 수 있

는 여왕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것이 트로이의 목마입니다."

시크사의 목소리에서 메이런은 바짝 말라 붙어있는 겨울 나뭇가지를

떠올렸다. 뭔가 격한 감정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분명 어디

한 구석 메말라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가방에 트로이의 목마를 담았나요?"

시크사는 고개를 저었다.

"사라져버렸습니다. 트로이의 목마를 담기 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암살자는 사친의 목숨과 함께 트로이의 목마도 가지고 가 버린 겁니다."

시크사의 더듬이 끝이 늘어지고 있었다. 메이런은 그것이 지독한 슬픔

을 표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방을 넘겨 줄 수 없다고 하는 거로군요."

"예.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크사가 말했다.

메이런은 자신의 더듬이가 몹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무엇

때문인지 메이런은 심리적으로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지

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지만 너무나도 생소

한 느낌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감입니다."

시크사가 말했다.

"어떠한 일에 대한 예감이지요. 보통 느낄 수 있는 다섯 가지의 감각

외의 또 다른 감각입니다."

메이런은 시크사를 바라보았다. 메이런은 처음 보았을 때는 괴물처럼

만 여겨졌던 시크사가 꽤나 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두려운

느낌이었다. 휴먼 레이스의 감각이 있던 자리에 전혀 다른 레이스의 감

각이 자리한다는 것은 어쩐지 되돌리기 어려운 일인 것만 같았던 것이

다.

"당신은 친족을 잃었군요."

시크사가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더듬이는 상당히 예민한 기관입니다. 사용법만 안다

면 말이지요. 우리는 더듬이를 '영혼의 연결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시크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메이런은 만티드 레이스

는 결코 울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운다는 건 만티드 레이스에게

있어서 지나간 일을 후회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시크

사는 울고 있었다. 만티드 레이스의 울음은, 모든 겹눈이 동시에 일어나

떨리는 현상을 말한다. 휴먼 레이스는 운다는 표현 대신 눈물을 흘린다

는 표현을 쓸 수 있고, 만티드 레이스는 겹눈이 인다는 표현을 대신 쓸

수 있다. 시크사의 겹눈이 일고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8 -

트랜스를 끝내는 일에 관해서는 키티-본의 말이 옳았다는 걸 메이런은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숨을 들이쉬는 법을 알면 내쉬는 법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처럼, 트랜스는 쉽게 끝낼 수 있었다. 현실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쿨란의 모습이었다.

"고생했다. 다 끝났겠지?"

메이런은 눈을 움직이지 않고 쿨란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가 중

심을 잃고 크게 휘청거렸다. 아직도 겹눈이 머리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

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던 것이다. 메이런은 겨우 중심을 잡은 다

음 머리를 만져 보았다. 머리에 있어야 할 더듬이가 없다는 것이 메이런

에게는 대단히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더듬이와 함께 메이런이 느꼈던

예감도 사라졌다. 메이런은 그 감각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결

코 그 감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사친의 장례식은 화장으로 하면 될 거예요."

메이런이 말하자 쿨란과 라몬은 동시에 탄성을 내었다.

"수고했어! 수고했어!"

쿨란은 메이런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물론 이것은 메이런이 본

여러 영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크사를 도와야 해요."

메이런이 말하자 쿨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어쩌면 그것

은 쿨란만의 예감인지 몰랐다.

"응. 우리는 시크사를 돕고 있는 거다. 잘 알잖아."

"트로이의 목마. 그걸 찾아야 해요."

메이런이 말했다.

메이런은 쿨란과 라몬에게 시크사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메

이런의 설명의 끝은 이렇게 맺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시크사를 도와야 해요."

메이런의 말이 끝나자 라몬과 쿨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라몬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결국 사무실을 나가버렸고, 쿨란은 조금 상기

된 얼굴로 메이런에게 다가갔다.

"메이런. 너..."

쿨란은 첫 단어를 찾는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말문을 열었

다.

"너 바보냐?"

메이런은 쿨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 바보냐고. 우리 일은 말이지, 저 녀석 가방만 받아서 여기 온 저 녀

석 일족한테 넘겨주면 끝나는 거야. 저 친구가 안전하게 망명객으로 등

록만 되면 보수를 받는 게 우리 일이라고."

쿨란은 천천히,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삭이며 말했다. 메이런은

쿨란의 지나친 분노에 몸을 움찔했고, 뒤에 가만히 앉아있던 시크사도

그 분노가 느껴지는지 조금은 겁먹은 표정이었다.

"도우려는 거 아니었어요?"

메이런이 시크사를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크사는 무슨 대화

가 오가는지 알 수가 없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돕는 거지. 가만 놔두면 이 친구 그 빌어먹을 서펀트 레이스

녀석한테 잡혀 먹힐 걸? 넌 모르지? 그 서펀트 레이스들은 희생물을 머

리부터 통째로 삼켜. 녀석의 뱃속에 들어가면 의식이 멀쩡한 상태로 소

화액에 몸이 천천히 녹아 들어가는 걸 느끼게 되지. 저 친구가 그 꼴이

되면 좋겠어?"

"도우려는 거 아니었어요?"

메이런이 한 번 더 묻자 쿨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뭐

라고 긴 연설을 늘어놓을 것처럼 숨을 고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메이런. 트랜스라는 거, 힘들다는 거 안다. 저 친구 겹눈의 감각이 남

아있어서 초점 맞추기가 힘들지? 그리고 더듬이가 갑자기 없어져서 이상

할 거야. 갑자기 허전한 기분도 들 거고. 알아. 나도 안다고. 나도 트랜서

하고 이 일, 수도 없이 해 왔어. 상대에게 지나친 애정을 쏟는 것도 이해

해. 하지만 말이야..."

"쿨란."

메이런이 쿨란의 말을 막았다. 쿨란은 흥분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쿨란

이 이렇게 흥분할 수 있는 휴먼 레이스인줄은 몰랐다.

"그럼 쿨란이 시크사한테 보여준 따뜻함은 뭐였나요? 가짜였나요?"

메이런이 말하자 쿨란은 고개를 숙이곤 심호흡을 몇 번했다. 그것은 마

치 피곤에 지친 늙은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내 직업이 카운셀러인 것만큼이나 가짜였지. 말했잖아. 우리는

그저 하이어드일 뿐이라고."

"미안하지만 전 진짜였어요."

메이런이 말하자 쿨란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마을로 돌아가고 싶은 거냐? 다 때려 치고 싶은 거야?"

"쿨란이 아들을 잃고 싶다면."

메이런이 말했다. 메이런은 쿨란이 흥분한 덕분에 쿨란의 생각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쿨란은 사실 동요하고 있었다. 서펀트 레이스와 다시

마주치게 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고, 귀찮은 일에 끼어 들었다가 시에

서 더 이상 일거리를 받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고, 애써서 구

한 트랜서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이다.

메이런은 쿨란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히 다른 말

을 할 필요는 없었다. 쿨란이 선택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 메이런의 예상이 옳았다. 쿨란은 스스로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핑키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잖아."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조금전

과는 달리 매우 힘없는 동작이었다.

"핑키라면 그 죽은 트랜서 말인가요?"

메이런이 물었다.

"'사고'로 죽은 트랜서야."

쿨란은 사고라는 말에 힘을 주어서 발음했다.

"그리고 함부로 내 생각 읽으려고 하지 마."

"예. 그러죠."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메이런은 쿨란이 어떤

휴먼 레이스인지 조금씩 알 것 같았던 것이다. 쿨란이 지나치게 흥분하

는 것도, 지나치게 분노하는 것도 메이런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쿨

란 스스로가 시크사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반작용

이 존재하지 않으면 작용은 커지지 않는다. 메이런은 그런 쿨란이 눈에

보이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메이런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쿨란은 책상을 뒤지고 있었다.

"뭘 찾는 건가요?"

"서펀트 슬레이어."

"예?"

"그 서펀트 녀석하고 싸울 무기 말이다. 맨손으로 싸울 순 없잖아?"

이것으로 분명해졌다. 결국 쿨란은 메이런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거였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크사도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메

이런은 시크사의 더듬이 끝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예감일까.

메이런은 비록 트랜스 상태는 아니었지만 시크사의 감정선을 어느 정도

는 따라갈 수 있었다.

"이곳 수사관과 통화했습니다."

라몬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수사관하고 왜 통화를 하죠?"

책상에서 찾아내지 못했는지, 이번에는 책상 뒤편의 케비넷을 뒤지면서

쿨란이 물었다.

"사친이 남겼다는 그 트로이의 목마를 찾아야죠."

라몬의 말에 쿨란은 찾던 것을 멈추었다.

"그걸 당신이 왜 찾습니까?"

"당신은 틀림없이 시크사를 도울 테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죠?"

"쿨란은 예전에 공무원이었으니까요."

라몬의 말에 쿨란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제길."

쿨란은 말대꾸 한마디하지 못하고 다시 케비넷을 뒤졌다.

"그런데 수사관 말이 그런 유품은 없었다고 하더군요."

"까만 상자예요."

메이런이 말했다.

"트랜스 하면서 봤구나. 그거 잘 됐네."

라몬은 팔짱을 끼면서 자리에 앉았다.

"잘 됐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그 서펀트 레이스가 가지고 갔을 거야.

제길. 그런데 도대체 내가 어디다 둔 거지? 참. 그리고 가죽으로 된 상자

였니? 아니면 나무?"

쿨란은 이번에는 의자를 놓고 케비넷 위를 뒤지면서 메이런에게 물었

다.

"아마 플라스틱 종류인 것 같았어요."

"표면이 단단하길 빌어라."

쿨란이 말했다.

"서펀트 레이스는 일단 물건을 취하면 그걸 뱃속에 넣어서 보관한단다.

그래서 나중에 필요할 때 토해 내는 거지. 뱃속에서 녹지 않으려면 꽤

단단해야 할거야."

메이런은 쿨란의 말에 당황했다. 설마 서펀트 레이스가 그것을 삼켜 가

지고 갔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상자를 어떻게 찾지요? 이제 남은 시간은 34시간입니다."

라몬이 쿨란에게 물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되지요."

쿨란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쿨란의 짜증은 찾는 것

을 찾지 못해서 내는 짜증이라기 보다는 뭔가를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짜증인 것 같다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간단합니다. 그 서펀트 레이스를 찾아내면 되지요. 흠. 여기도 없으면...

그런데 어떻게 그 서펀트 레이스를 찾아내냐고 묻고 싶으신 겁니까?"

"서펀트 레이스가 숨는 곳이라도 아시는 건가요?"

메이런이 물었다.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내 물건도 하나 못 찾는 내가."

쿨란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녀석을 오게 만들면 되지. 그렇지 않겠냐? 하지만 어떻게 오게 하느냐,

그게 문제지."

"그렇군요. 여기에 시크사가 있다는 걸 녀석이 알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오겠군요."

라몬이 환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아. 그건 너무 위험해요. 고객이 다쳐서는 곤란하죠. 공무원이시라고

시민의 안전 외에 다른 레이스의 안전은 챙기지 않으시면 곤란합니다.

이상하네. 지난번에 쓰고 틀림없이 여기 어디다 두었을 텐데."

"그럼... 다른 곳에 함정을 파자는 겁니까?"

라몬은 쿨란의 말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모양이었다. 묻는 라몬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흘릴 겁니다."

"정보를 흘린다니요?"

메이런이 쿨란에게 물었다.

"간단해. 이 친구가 엉뚱한 곳에 있는 것처럼 만티드 레이스한테 알린

다는 거지. 그렇게 하면 암살자는 당연히 그 엉뚱한 곳으로 올 거고. 거

기서 녀석을 잡고, 녀석의 뱃속에 들어있는 그 상자를 꺼내고, 시크사가

원하는 대로 한 다음 가방을 넘겨주고, 시크사를 망명시키고. 알겠지?"

"그런데 어떻게 녀석들한테 엉뚱한 곳에 있다고 알릴 겁니까?"

라몬이 다시 한 번 쿨란에게 물었다.

"그것 역시 간단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친구를 찾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말이죠. 똑같은 경로로 정보를 흘리면 되는 겁니다. 아. 도저히 못

찾겠군."

"경로가 거기 한 군데 뿐일까요?"

"그렇지야 않겠지요. 하지만 모든 정보는 통합니다. 한 군데 흘리면 다

흘러가게 되어 있죠."

"그 정보가 흘러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곤란한데요. 제가 시크사를

중요 참고인으로 데리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녀석들은 더듬이를 세우고 오직 저 친구만을 찾고 있을 겁니다. 생각

보다 훨씬 빨리 흘러 들어갈 게 분명합니다."

"장소는?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습니까?"

"예. 적당한 곳에 안가가 있지요. 안전가옥. 그곳은 통풍구도 있고, 꽤

떨어진 곳이어서 암살자가 아주 좋아할 곳입니다. 젠장. 이제 포기야. 핑

키가 있었다면 찾았을 텐데. 아무래도 내가 팔아먹었던 모양이군."

쿨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로즈웰 형 레이스를... 다시 만나야 하는군요."

"저도 싫지만 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즐거운 일이기도 하

지 않습니까? 녀석한테 엿을 먹일 수 있는 기회니까요."

"그렇군요."

라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어서 출발하죠. 서펀트 슬레이어는 가는 길에 구해야겠군요."

쿨란이 말했다. 메이런은 쿨란을 바라보았다. 쿨란은 어쩐지 활기가 넘

치고 있었다.

"메이런. 저 친구한테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고 말해 줘. 아주

얌전히 있으라고."

쿨란은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메이런에게 부탁했다. 메이런은 다시 한

번 트랜스를 했고, 덕분에 가는 길 내내 더듬이가 없는 머리가 허전해서

자꾸만 머리를 만지게 되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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