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13화 (13/52)

12.서펀트 슬레이어

쿨란이 찾은 곳은 사무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뒷골목의 상점이었다.

힐사이드의 뒷골목은 비좁았고, 집들은 하나같이 낡고 쓰러져 갈 듯

보였다. 하수도가 군데군데 막혀있는지 땅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코를 찔

렀고, 쓰레기통 옆에는 마치 장식품처럼 술에 취한 휴먼 레이스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여기가 푸우순 시의 힐사이드란다."

메이런은 쿨란의 말을 들으면서 사무실 밖에서 만났던 걸인이 들고 있

던 쇠파이프를 생각했다. 그 녹슨 쇠파이프는 어쩐지 지금 메이런이 걷

고 있는 뒷골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시는 탐욕스러운 곳이야."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공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메이런은 쿨란의

한숨이 바람이 되어 허공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푸우순 시는 마을이 있기 때문에 유지되지. 마을에서 항상 새로운 인

력이 충원되니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푸우순 시는 이런 뒷골목을 준

비해 두고 있는 거란다. 여기는... 정확하게는 쓰레기통이야."

"쿨란. 극단적인 생각이군요. 저도 이런 구역이 존재한다는 게 유쾌하

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가 이곳을 방치해 두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 그렇죠. 유통기한이 지난 쓰레기 빵과, 세금에서 떨어져나간 약간

의 쓰레기 크레디트와, 퇴직 바로 직전의 쓰레기 보안 요원들을 제공하

니까요."

"...당신은 도무지 세상에 대한 신뢰라는 게 없군요."

라몬은 쿨란의 말을 맞받아 치는 대신 이렇게 다른 쪽을 찔러 들어갔

다. 하지만 쿨란은 유연하게 말을 받아쳤다.

"신뢰라는 단어는 서로 믿을 수 있을 때 쓰는 겁니다. 논쟁은 그만 두

죠. 다 왔으니까요."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멈추어 섰다. 일행의 앞에는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이 하나 서있었다. 건물은 단층이었고 거미줄인지 금이 간 건지 알

수 없는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 건물의 용도는 '뮤스의 잡화상'

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여기서 그 서펀트 슬... 뭐라는 걸 살 건가요?"

"아뇨. 얻을 겁니다."

쿨란은 대답하면서 실리콘과 접착 테이프로 처발라진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내부에는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주워온 잡목과 플라스틱을 엉성하게

이어 붙여서 만든 게 분명한 테이블과 선반 위에는 하나같이 쓸모 없어

보이는 도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셋은 일단 들어서기는 발을

디디기 위해서는 떨어져 있는 플라스틱 부스러기와 쇳밥을 발로 치워야

했다.

"쿨란! 이게 얼마 만인가! 요즘 아주 바쁘신가봐? 연락 한 번 안 주시

고. 이봐. 나도 좀 먹고 살아야지. 자주자주 좀 들러주지 그래? 요즘에

벌레 한 마리 가지고 돈 좀 만져보려고 한다고 하던데. 어때? 경기는 좋

은가?"

잡동사니 중 하나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저분한 노인 하나가

잡동사니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쿨란을 반겼다. 메이런은 그 노인이

처음에는 휴먼 레이스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인은 휴먼 레이스

라고 하기에는 너무 키가 작았고, 입은 너무 길게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까딱했으면 다시는 못 올 뻔했어, 시타시테 영감."

쿨란은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허. 내 이름은 믹이야, 믹. 시타시테 레이스 중에서 가장 정보가 빠

르고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뭐든지 찾아 주는 믹."

"정보가 빠른 건 좋지만 입이 가벼운 건 참을 수가 없지."

쿨란은 말과 동시에 노인을 잡아 들어올려 벽면에 밀어 부쳤다. 노인

은 도저히 휴먼 레이스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높은 비명소

리를 내었다. 메이런은 노인의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시커먼 깃털을 보

았다. 그러고 보니 노인의 입은 입술 대신 부리가 달려 있었고, 얼굴은

시커먼 털로 뒤덮여 있었다. 노인은 워낙 지저분한 곳에 있다보니 휴먼

레이스로 보였을 뿐, 완벽한 다른 레이스였다.

"켁. 놔, 놔! 이러다가 새 한 마리 잡겠어. 등뒤에서 날 보고 날지도 못

하는 병신 새라고 놀리는 거 다 알아. 날 모욕하는 건 좋지만 잡지는 말

라고. 이 믹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시타시테 레이스란 말야."

믹은 다리가 완전히 공중에 떠 있는 상황에서도 정신없이 재잘거렸다.

"해야 할 일이 그렇게 많은 데, 하필이면 왜 그렇게 가장 좋지 않은

일을 했지?"

"무슨 말이야, 쿨란? 이 믹은 절대로 좋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 나는

여기서 버는 거 전부 다 여기 휴먼 레이스 친구들한테 나누어준다고. 알

잖아. 나는 아무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아.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착한

믹이야, 착한 믹."

믹은 양손으로 쿨란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옷소매로

보였던 것이 사실은 믹의 양 날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날개의 끝에는

랩타일 레이스와 비슷한 형태의 두 손이 달려 있었다.

"착한 믹이 나쁜 짓을 하면 안되지. 타이론한테 레이저 봉인 이야기를

한 게 믹의 마지막 나쁜 짓이 되겠군. 내가 벌레를 보관하고 있다는 건

그 친구한테 들었나?"

메이런은 쿨란이 시크사를 벌레라고 표현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

다. 쿨란이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까닭이었다. 쿨란이

벌레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레이저 봉인 운운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믹에게 효과가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

다. 믹은 얼른 태도를 바꾸었다.

"알았어, 알았어, 놔! 필요한 걸 말해, 필요한 걸! 죽은 시타시테 레이

스는 쿨란한테 아무 것도 줄 수가 없어!"

말이 끝나자 마자 쿨란은 믹을 내려놓았다. 믹은 콜록거리면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쿨란은 선반 위에 놓여있는 기름때가 잔뜩 묻어 있는 천을

믹에게 내밀었고, 믹은 그것으로 부리를 닦아내었다.

"빌어먹을 털 빠진 원숭이 새끼. 내가 십 년만 젊었더라면 내 이 날카

로운 발톱으로 목줄을 따 버렸을 거야."

눈물이 잔뜩 고여있는 눈으로 쿨란을 노려보면서 믹이 말했다. 하지만

그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말인 듯, 믹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

다.

"안 그런 게 다행이었어. 내 뒤에 있는 분은 연방 수사관이고, 또 그

옆에 있는 친구는 트랜서야. 불법 망명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 시에서

추방당해서 죽던가 아니면 그냥 여기서 죽던가."

"쿨란. 잘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까지 거칠 게 할 건 없잖아? 맞아. 그

게 내 입장이야. 그 녀석, 그 타이론이라는 털복숭이 원숭이 녀석이 날

협박했어. 추방당해서 죽던가 여기서 죽으라고. 그런데 쿨란. 넌 더 나쁜

원숭이야. 적어도 타이론이라는 친구는 믹의 목을 조르지는 않았어."

"목 조른 건 사과하지. 하지만 시간이 없다보니."

쿨란은 믹에게 한걸음 다가갔고 잔뜩 주눅이 든 믹은 한 걸음 뒤로 물

러섰다. 믹의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메이런의 신경에 거슬렸다. 메

이런은 라몬을 올려다보았다. 라몬은 미간을 찌푸리고 쿨란과 믹을 바라

보고 있었다.

"알았어. 뭐가 필요한 거야?"

"서펀트 슬레이어."

"그것뿐인가?"

"그것뿐이야."

믹은 투덜거리면서 선반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더니 갈색 천으로 둘둘

말려있는 긴 막대를 쿨란에게 내밀었다.

"빌어먹을. 이건 지난번에 쿨란한테 10000크레딧에 산 거야. 그 쓸모

없는 고철덩이. 아무도 쓰지 않는 걸 10000크레딧이나 주고 샀다구!"

"사과하지."

쿨란이 막대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펀트 레이스의 딱딱한 껍질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

는 무기일 것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나중에 10000 크레딧은 꼭 받아내겠어."

믹의 말에 쿨란은 막대를 만지작거리는 걸 그만 두고 믹을 노려보았

다. 쿨란은 믹이 푸득거리면서 날개를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깃털 몇

개가 빠져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아, 잠깐, 잠깐. 쿨란은 믹한테 사과했어. 하지만 돈은 받아야 해. 쿨

란도 알잖아. 돈이 없으면 아무 곳에서도 살아갈 수 없어."

"돈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디서나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냐."

"말은 잘한다니까. 아, 아냐 아냐. 그냥 혼잣말이야 혼잣말. 알잖아. 난

쿨란한테 은혜를 입었어. 그리고 늘 고마워하고 있다고. 진심이야, 진심."

쿨란의 눈은 믹을 여전히 노려보고 있어서 믹의 말이 조금도 먹혀 들

어가지 않았다는 걸 아무리 늙고 멍청한 시타시테 레이스라고 해도 알

수 있었다.

"알았어. 사과했으니까 하나 알려주지. 하지만 10000크레딧은 꼭 줘야

해."

일종의 타협선인 모양이었다. 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10000크레딧 어치만큼 사과한 거라고 해 두지. 들어 온 소식 있

어?"

아마 믹은 쿨란의 정보통 역할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쿨란을 노리는 녀석이 둘 더 늘어났어. 나하는 개새끼고 하나는 그

새끼 새끼야."

"별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군. 또?"

"'또' 라니? 믹은 분명히 하나만 알려 준다고 했잖아."

"가장 정보가 빠른 친구가 그런 아무나 알 수 있는 정보 하나만 가지

고 있을 리가 없지."

믹은 쿨란의 눈을 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핑키 살해범 이야기는 들었어? 랩타일 레이스들은 만족하고 있다는

소문이야."

"그건 알아. 그런 것 말고 나랑 상관 있는 건 없어?"

메이런은 핑키라는 단어를 듣자 다시금 오싹해졌다. 분명 핑키는 메이

런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쿨란은 지금 핑키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시에서 대규모의 인원 이동이 있을 것 같아. 이곳 인력들을 여기 저기

로 보내는 모양이야. 시 제정이 어려워진 것 같아. 아니면 인원이 남아서

남는 인원을 팔아 치우는 지도 모르겠고. 아마 여기로 돌아오는 인력들

이 생긴 모양이야."

"귀향하는 친구들이로군. 아마 용병들이겠지? 좋아. 그만하면 됐어. 그

런데 타이론 녀석한테 나쁜 이야기는 없나?"

쿨란은 끝까지 집요하게 믹에게 물었다.

"쿨란. 당신, 혹시 전에 세무 공무원 아니었습니까?"

라몬이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쿨란에게 물었다. 쿨란은 라몬을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믹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타이론하고 관련 된 소식은 없어. 지금 타이론은 창녀 살해범을 수사

하고 있지만 며칠 하다가 그만 두겠지. 여기서 일어난 사건 스무 건 중

에 해결되는 건 하나나 둘이잖아."

"그럼 비슷한 거라도. 지금 쫓고 있는 벌레에 대한 거라도 말이야."

"별거 없어. 참. 어제 들었는데 쿨란이 데리고 있는 만티드 레이스의

형, 기록이 삭제되었다고 하더군. 꼭 전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알았어. 장례 절차 처리하는 게 골치 아팠던 모양이로군. 그리고?"

"이제 그만! 믹은 지쳤어. 조금 있으면 큰 고객이 하나 와. 저기 있는

아름다운 중국 도자기를 팔아야 해. 믹은 예술품을 파는 일이 가장 좋아.

시타시테 레이스는 아름다운 걸 사랑한단 말이야."

"좋아. 이만 돌아가지."

쿨란은 빙긋 웃으면서 믹에게 인사를 했다.

"서펀트 슬레이어는 잘 받았어. 그 가짜 도자기, 들키지 않고 잘 팔길

빌지."

이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쿨란에게 믹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고래

고래 고함을 쳤다. 시타시테 레이스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 언

어가 욕설일 것이라는 건 누구나 짐작 할 수 있을 정도의 격한 고함이었

다.

"정말이지 당신은 탐욕스럽군요."

상점을 나서면서 라몬이 쿨란에게 말했다.

"절 신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쿨란은 라몬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되돌아 나오는 힐사이드의 뒷골목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쿨란."

메이런이 쿨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핑키 살해범 이야기는 뭐였나요? 랩타일 레이스가

만족했다는 거요."

"전에 들었던 거야."

메이런의 말에 쿨란은 태연하게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꾸했지만 메

이런은 트랜서였다. 메이런은 쿨란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만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빨리 캡슐로 가죠. 대사관에 가서 그 망할 '조' 녀석한테 정

보를 흘려야 하니까. 그나저나 빙하고는 연락이 안 돼서 직접 찾아가야

할텐데, 빨리 될까 모르겠네요."

메이런은 내뱉듯이 빠르게 말을 잇는 쿨란의 모습에서 뭔가 이상하다

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쿨란은 분명 서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지나

치게.

"쿨란."

"아,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지금은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지. 안 그

래?"

쿨란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메이런은 뒷골목을 돌아 나오는 길에는 악취를 맡을 수가 없었다. 휴

먼 레이스의 후각은 대단히 미묘하면서도 취약한 감각이다. 맛을 느끼거

나 주변의 섬세한 변화를 읽어내는 데에는 후각만큼 중요한 감각도 없지

만 후각은 그만큼 쉽게 지치기도 하는 것이다. 메이런은 냄새를 느낄 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후각처럼 뭔가 지쳐버린 있는 감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캡슐로 갑시다. 빨리."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라몬과 메이런의 앞장을 섰다. 라몬은 쿨란의

걸음걸이를 따르기 위해서 발놀림이 빨라졌고, 메이런은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캡슐 스테이션이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도 쿨란은 걸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쿨란!"

라몬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라몬은 간결하게 말했지만 그

말의 뜻은 어차피 다음 캡슐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는데 뭐 하러 이

렇게 빨리 가느냐는 거였다. 메이런은 숨이 차서 쿨란의 이름을 소리칠

기운도 없었지만, 만약 말을 했다면 역시 라몬과 비슷한 의견일 거였다.

"빨리 뭔가 해야 할 때는 서둘러야죠."

캡슐 스테이션에 도착했을 때 쿨란이 한 말이었다.

"전 옛말에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몬은 쿨란의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면 늦지 않겠습니까?"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수도 있지요."

"그럴 수는 없지요. 적어도 휴먼 레이스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요."

쿨란은 우쭐거리는 투로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

다. 그리고 그 순간 메이런은 쿨란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쿨란은 머리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몸에 배어있는

감각이 관성을 따라서 움직이는, 말하자면 그저 궤도를 따라서 움직이기

만 하는 캡슐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였던 것이다.

"쿨란. 저..."

"됐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메이런이 쿨란에게 뭔가 말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쿨란은 얼른 메이런

의 말을 끊었다. 메이런은 그저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구나 싶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캡슐이 스테이션에 도착했고, 쿨란은 서두르던 모습

과는 달리 라몬과 메이런에게 먼저 타라고 했다. 특별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쿨란의 행동은 기분이 상해있던 메이

런과 라몬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어서오세요. 저희 랜티 캡슐 교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캡슐에서 귀에 익은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쿨란은 감정 없는 목소

리로 대사관 주소를 대었고, 안내 방송이 대사관 주소를 확인하였다.

"당신이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알 것 같군요, 쿨란."

캡슐이 출발하자 라몬이 말했다.

"아. 우리가 지금 시간이 없다는 걸 이제 아셨군요."

"빈정거리지 말아요, 쿨란. 핑키라는 당신의 전 부인. 그러니까 당신의

전 트랜서."

라몬이 말하자 쿨란의 표정에 억지 웃음이 떠올랐다. 메이런은 라몬이

뭔가 정곡을 찔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쿨란은 뭔가 숨기고 있는 겁니다, 틀림없이. 그래서 핑키 이야기가 나

오니까 서둘러서 거길 빠져 나왔지요. 안 그런가요?"

"수사관 나리. 수사관의 직감도 좋지만 날 무슨 죄인 취조하듯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그럼 말해 보시죠, 쿨란. 핑키는 왜 죽은 거죠?"

쿨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랩타일 레이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수사는 타이론이 했죠. 타이론이

자세한 파일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제 그만. 고인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맙시다."

쿨란의 말은 메이런이 듣기에 비굴하게 들렸다.

"고인이라. 아까 그 상점주인이 핑키 이야기를 했을 때는 전혀 상관없

다는 투더니."

메이런은 라몬이 지금 상황을 상당히 즐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늘 당하기만 하던 라몬이었지만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 있었다.

"장례식에는 참석 했나요? 휴먼 레이스 식으로 화장을 했던가요?"

라몬은 쿨란의 말투를 흉내내어 빈정거렸다. 그러자 쿨란의 얼굴이 갑

자기 일그러졌다.

"그만 두죠."

"아마 핑키가 다른 레이스였다면 기록을 소멸시켜서라도 대충 화장했

을 겁니다. 맞지요?"

쿨란은 상당히 불쾌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처럼 온 자존심을 회

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라몬이 아니었다.

"시에서 죽은 사친의 기록을 소멸시켰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랬지요?

아마 그게 당신의 본심일 겁니다, 쿨란. 어떻게 보면 당신이야말로 정말

공무원 타입이군요.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잠깐.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라몬은 쿨란의 말에 흠칫하는 기

색이었다.

"좋아요. 이쯤 해 두죠."

"아,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사친의 기록이 소멸되었다는 이야기를 했

지요?"

라몬이 물러서려고 하자 쿨란이 다시 물었다. 메이런은 쿨란이 역공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지금 쿨란은 다시 뭔가 다급한 심

정이 되었던 것이다. 라몬은 쿨란의 말을 듣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다가 캡슐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빌어먹을!"

쿨란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캡슐에 붙어 있는 비상 버튼을 마구 눌러

대었다.

"말씀하십시오."

쿨란이 다급한 것과는 상관없이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돌아가! 당장! 힐사이드로 돌아가!"

쿨란이 비상버튼을 계속 해서 누르면서 소리쳤다. 라몬은 진땀을 흘리

면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쿨란과 라

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 볼뿐이었다.

"저희 랜티 교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 말씀하신 방향

은 이 캡슐이 가는 방향과는 다릅니다. 내리 신 후 길 건너편 캡슐을 이

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젠장. 당장 세워!"

"다음 스테이션에서 내려드리겠습니다. 계속해서 비상 버튼을 누르시

면 캡슐의 오작동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알았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고대로부터 기계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쓰는

고전적인 방법을 썼다. 그 방법은 마음에 들지 않는 기계의 한 부분을

주먹으로 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방법은 사용자의 주먹을 아프게 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기계를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 무슨 일이에요?"

메이런이 물었다. 하지만 이어진 것은 대답이 아니라 한탄이었다.

"이런, 멍청하긴! 라몬.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나도 내가 얼마나 멍청

한지 잘 아니까."

"아뇨.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두 귀로 분명히 들었습니다. 은퇴할

때가 된 건지..."

쿨란과 라몬은 둘 다 몹시도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둘을 살펴보았다. 도대체 이 두 휴먼 레이스

가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르겠니? 시에서 사친의 기록을 삭제했단 말이야."

쿨란이 여전히 침통한 표정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요?"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30 -

메이런의 물음에 쿨란은 도대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느냐는 듯한 얼

굴이 되었지만, 이내 곧 대답을 시작해 주었다.

"그건 장례 절차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푸우순 시에서 망명객이나

망명객의 가족이 살해당했다는 게 망명객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봐."

"...망명객 수가 줄겠지요."

메이런은 간신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잘 이해하고 있구나. 그런데 망명객이나 망명객의 가족이 살해

된 게 아니라 불법 체류자가 살해되었다면?"

메이런은 쿨란의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시크사가 얼마나 위험한 상

태에 빠졌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시에서는..."

"아마 시에서 정보를 주었을 겁니다. 어쩌면 이제 곧 시크사가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미리 기록에서 삭제했는지도."

라몬은 주눅든 목소리였다.

"바로, 이, 쿨란의 사무실에서 고객이 죽을 수는 없어!"

쿨란이 주먹으로 캡슐의 외벽을 치면서 소리쳤다. 메이런은 캡슐의 외

벽이 꽤 단단하구나, 같은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고객을 혼자 놔두다니... 고객을 혼자 놔두다니..."

쿨란은 다음 스테이션에 캡슐이 도착할 때까지 이렇게 계속해서 중얼

거렸다.

"영수증."

캡슐이 멈추어 서자, 쿨란은 이렇게 말했다. 캡슐의 문에서 영수증이

나오자 쿨란은 그것을 챙겼다.

"라몬.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당신 말이 맞았습니다."

쿨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때마침 길 건너편에서 캡슐이 오고 있었고, 셋은 재빨리 길을 건너가

그 캡슐에 올랐다.

그리고 셋은 세상에서 가장 긴 몇 분을 보냈다. 메이런은 세상에서 가

장 느린 캡슐에 탄 기분이었다. 셋 모두가 조바심을 내고 있었지만 그

중 가장 마음이 급한 것은 메이런이었다. 쿨란과 라몬은 아무래도 경험

이 많은 휴먼 레이스였다. 급할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미덕이 몸에

밴 것처럼 둘은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다. 쿨란은 갈색 천에 싸여 있는

서펀트 슬레이어를 쥐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라몬은 품에서 권총을

꺼내어 탄창을 확인했다. 메이런은 그런 둘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갈

증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캡슐이 쿨란의 사무실 앞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캡슐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내렸다.

"영수증."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가장 먼저 사무실 쪽을 뛰어갔고, 라몬이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메이런 역시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두 사내를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무실에 먼저 도착한 것은 쿨란이었다. 쿨란이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가자 시크사는 깜짝 놀라면서 쿨란을 바라보았다. 쿨란은 사무실을

살폈다. 별다른 위험 요소는 없어 보였다.

"다행히도 늦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쿨란이 숨을 고르면서 뒤쫓아 온 라몬에게 말했다. 라몬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권총을 도로 품에 넣었다.

그리고 막 메이런이 도착했을 때였다.

메이런이 본 것은 천장에서 뚝 떨어진 파이프와 그리고 쿨란을 밀치는

라몬의 모습뿐이었다. 쾅, 하는 총성이 들렸지만 딱 한 번 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순간 파이프처럼 위장하고 천장에 붙어

있던 서펀트 레이스는 쿨란의 등을 노리고 떨어졌고, 그것을 미리 눈치

챈 라몬은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서펀트 레이스를 쏘면서 쿨란을 밀쳤

다. 하지만 서펀트 레이스에게 총탄이 통할 리가 없었다. 라몬의 등에는

두꺼운 서펀트 레이스의 이빨이 박혔다. 그리고 라몬이 민 덕분에 공격

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 충격으로 쿨란의 손에서 서펀트 슬레이어가 떨어

졌고,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메이런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모든 일은 거의 한 순간에 이루어졌고, 그래서 메이런

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파악되자 메이런은 시크사에게 달려갔다. 무엇을 어떻

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시크사를 구해

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발이 움직인 것뿐이었다.

여기에 작은 두 개의 행운이 작용했다.

먼저 하나는 서펀트 레이스가 쿨란을 먼저 공격한 덕분에 시크사는 가

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런 시크사를 공격하기 위해서 서펀트 레

이스가 라몬의 몸에서 이빨을 빨리 뽑아낸 것이었다. 만약 한 순간만 더

이빨이 라몬의 몸 안에 머물렀다면 서펀트 레이스의 독니에서 더 많은

독이 빠져나와 라몬의 몸에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서펀트 레이스는 시크사에게 달려들었다.

"Ssacka monta... Ffielief..."

시크사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시크사는 그 말의 의

미는 알지 못했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죽는 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

다. 시크사는 몸을 돌려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서펀트 레이스의 동작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서펀트 레이스는 입을 벌려 시크사의 등 쪽으로

달려들었다.

메이런이 서펀트 레이스의 등을 밟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메이런

이 그다지 무거운 편은 아니었지만 서펀트 레이스는 애당초 노렸던 시크

사의 목 대신 오른 발을 물어뜯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시크사의 오른

무릎 아랫 쪽이 순식간에 끊어 졌다. 외골격을 가진 레이스를 처음 대하

는 서펀트 레이스의 실수였다. 만약에 문 곳이 배였다면 시크사는 빠져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서펀트 레이스!"

쿨란이 소리쳤다. 서펀트 레이스는 쿨란을 돌아보았다. 서펀트 레이스

의 약한 시력으로는 긴 막대기를 들고 서 있는 휴먼 레이스의 형체가 희

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서펀트 레이스는 암살자였다. 쿨란과 맞서 정면

승부를 하는 것보다는 시크사와 가방이 먼저였다.

시크사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펀트 레이스는 메이런

과 시크사, 가방을 동시에 집어삼키겠다는 듯이 몸을 크게 흔들면서 공

격해 들어갔다. 메이런은 시크사의 팔을 꼭 잡았다. 그리고 시크사는 메

이런과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비행을 시작했

다. 소형 헬기라도 지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시크사의 날개가 펴졌고,

가방과 메이런을 안고 있는 시크사는 완벽하게 사무실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서펀트 레이스는 멍하니 날갯짓을 하고 있는 시크사를 바라보다가 몸

을 돌렸다. 하지만 쿨란이 먼저였다. 쿨란은 갈색의 천을 던져 버리고 서

펀트 슬레이어를 휘둘렀다.

시크사에 매달려 있던 메이런은 번득이는 서펀트 슬레이어의 칼날을

보았다. 그것은 햇빛을 받아 마치 태양 아래 빛나는 모래알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서펀트 슬레이어의 칼날이 단단한 서펀트 레이스의 껍질을

베고 지나갔다. 서펀트 레이스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을

무엇인가가 베고 지나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 후, 서펀트 레이스의 몸 위쪽이 아래쪽에서 떨어져 나갔다.

"Aaggak!"

상체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고통이 느껴지는지 서펀트 레

이스가 입을 벌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턱을 가지고

있는 서펀트 레이스답게, 서펀트 레이스의 거대한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몇 블록 밖에 까지 들릴 만큼 컸다. 잘려나간 하체는 제멋대로

꿈틀거리면서 피를 뿜어대고 있었다. 덕분에 사무실은 완전히 피로 젖어

들었고, 서 있던 쿨란은 그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고통 때문인지 아

니면 뭔가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상체와 하체는 마치 춤

을 추는 무용가의 리본처럼 8자를 그리며 꿈틀거렸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꿈틀거리고 있는 서펀트 레이스의 머리를 향

해 서펀트 슬레이어를 찔러 넣었다. 서펀트 슬레이어는 마치 서펀트 레

이스의 머리에 딱 맞는 틈새가 있었던 것 처럼 밀려들어갔고, 그 순간

서펀트 레이스는 세상에서 단 한 번 밖에 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꿈틀거

렸다. 바로 죽음 직전의 꿈틀거림이었다.

상황이 끝나자 시크사는 메이런을 창가에 내려놓은 다음, 천천히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반으로 끊어진 서펀트 레이스의 몸은 아직도

약간의 경련을 하고 있었다.

쿨란은 서펀트 슬레이어를 책상 위에 놓고는 서펀트 레이스의 창자를

뒤졌다. 그리고는 시커먼 상자 하나를 찾아내어 시크사에게 내밀었다.

"원만하게 해결 된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피를 뒤집어쓰고서 이렇게 말하는 쿨란의 눈은 선하게 보였다. 메이런

은 시크사에게 상자를 내미는 쿨란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

다고 생각했다.

"저, 라몬 아저씨요."

메이런이 말했다.

"라몬은 내가 맡을 테니까 넌 트랜스해서 시크사한테 알려줘라. 그 가

방은 왕족한테 넘겨 줘야 한다고. 그리고 이제 곧 시에서 정식 트랜서가

올 거고, 그렇게 되면 안전해 질 거라고도. 알겠지?"

"하지만..."

"지금 시크사는 상당히 놀란 상태일 거야. 트랜서가 하는 일은 이럴

때 놀란 친구를 돕는 거다. 빨리 의사를 불러야겠어. 독이 깊게 퍼지지

않았어야 할텐데."

쿨란은 얼굴에 묻어 있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라몬에게 다가

가면서 말했다.

"쿨란."

라몬이 말했다. 라몬은 독에 중독 되고 있는지 얼굴에서 경련을 일으

키고 있으면서도 뭔가 다급하게 말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말 할 수 있는 걸 보니까 그렇게 급한 상태는 아닌가 보군요. 알았어

요, 알았어. 앞으로 당신 앞에서 공무원 욕은 안 하리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송수화기를 들었다.

"참, 그런데 메이런."

의료진을 부르기 전, 쿨란이 메이런을 불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니?"

"예?"

"시크사가 날 수 있다는 거 말이야.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무모하게

달려 들 수 있었겠지. 어떻게 알았어?"

"더듬이로요."

메이런이 대답했다. 처음 시크사와 트랜스 했을 때, 메이런은 만티드

레이스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메이런은 시크사와 트랜스 했다.

"트로이의 목마를 되찾았습니다."

상당히 놀란 상태일 거라는 쿨란의 말과는 달리, 시크사는 몹시 침착

해 보였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죠?"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주사기로 주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

지는 알아서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사친이 다 준비해 두었지요."

"기쁘지 않나요?"

메이런은 시크사가 조금도 기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면

서 물었다.

"기쁩니다. 아주."

누가 듣는다고 해도 기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시크사의 말에

는 힘이 없었다.

"울 것... 같네요."

메이런이 말했다. 시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티드 레이스가 우는 건 지난 일을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알고 계시

겠군요. 당신은 트랜서니까요."

"뭐가 그렇게 후회되는 건데요?"

메이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메이런은 그 이유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가는 태어납니다. 이제 제가 주사를 하기만 하면 말이지요."

시크사가 천천히 말했다. 메이런은 잠자코 시크사의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사친이 행성 어스에 있는 연산장치를 이용해서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

다고 했습니다. 연산장치의 출력은 분명히 태어난다고 했답니다. 혁명가

가."

"그런데 문제가 있는 거로군요."

시크사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메이런은 시크사의 감정이 너무나도 격

렬하게 전해져 와서 어쩌면 자신이 먼저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6천 800년입니다."

시크사가 말했다.

"아무리 빨라도 6천 800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평등한

걸 꿈꾸는 유전자가 열성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친도 처음에는 믿

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습니

다. 우리 반란군은 모조리 열성이었던 겁니다. 자연은 우리를 선택하지

않은 겁니다. 평등하지 않은 지금의 이 세상이 우주가 바라고 있고, 우리

일족이 처음부터 원하고 있었던 세상이었다는 겁니다."

시크사의 말은 빨랐다. 메이런은 시크사가 조금 흥분상태라는 걸 알고

는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시간으로요?"

메이런이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다행히도 이곳 행성 어스 시간으로 6천 800년이라는 겁니다. 우리

모성의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6천 400년쯤 될 겁니다."

시크사는 억지로 농담을 짜내면서 울음을 참고 있었다.

"우습지 않습니까? 그 수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평등한 세

상을 만들고 싶어했는데... 6000년이 걸린다니요. 6000년. 6000년..."

시크사는 말끝을 흐렸다. 말을 계속 잇다가는 울 것 같은 모양이었다.

"당신, 알았나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시크사가 메이런에게 물었다.

"당신 어머니를 죽인 게, 바로 저라는 걸."

"시크사가 우리 마을 수비대를 공격했다는 건 알았어요. 그래서 당신

을 쫓던 만티드 레이스들이 우리 수비대와 싸웠고, 결국 우리 마을을 습

격하게 됐다는 것도."

메이런이 말했다.

첫 트랜스를 했을 때, 메이런은 시크사가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걸 더듬이를 통해 알아내었다는 사실에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

건 사실 별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후에는 후회해 봐야 소용없거든요."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고는 쿨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쿨란은 처음

만났던 날 자신에게 말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은 거냐? 그리고 너도 죽어버

렸으면 좋겠어? 그게 네 용기냐?'

메이런은 이 말을 들었을 때울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런은 지난 일

따위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는 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 말을

따르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이제 죽을 겁니다."

시크사가 말했다.

"메이런.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지난 일은 후회해 봐야 소용없지요.

아니, 우리 만티드 레이스는 결코 후회 같은 것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목숨을 던질 겁니다. 계획은 성공되어야 합니다. 6000년. 짧은 시간은 아

니지요. 하지만 10000년보다는 짧습니다. 그리고 10000년이 걸리더라도

왕가의 보물은 반드시 부화되어야 합니다."

"시크사가 목숨을 바친다고 그렇게 될까요?"

"적어도 그럴 가능성은 높아지겠지요."

시크사가 말했다.

메이런은 시크사에게 다가갔다. 메이런은 만티드 레이스가 이럴 때 어

떻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메이런은 시크사에게 더듬이를 내밀었다. 시크

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메이런의 더듬이에 자신의 더듬이를 비볐

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벽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듬이를 비비는 동안 메이런은 사친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을 알 수 있

었다. 사친은 단 하나의 만티드 레이스라고 해도 그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을 했다.

마침내 더듬이를 떼었을 때, 메이런은 그 말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

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메이런이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명확한

생각이라면 시크사도 알고 있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

서 '사친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요? 그리고 당신도 죽어

버리고? 그게 당신의 용기인가요?' 하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메이런은

그저 시크사가 편안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시크사."

메이런이 말했다.

"...울지 말아요."

시크사는 메이런의 말에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메이런의 눈을 바라보았다.

트랜스를 마쳤을 때, 이미 사무실에는 의사는 물론이고 경찰들까지 들

이닥쳐있었다. 메이런이 가장 궁금했던 것은 라몬의 안부였다. 하지만 그

것을 물을 상황은 되지 않았다. 쿨란과 타이론이 거의 서로 잡아먹을 듯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난 정말 모른다니까!"

타이론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빈민층에서 카운셀러 일을 하다 보면 듣는 일이 많지.

여기 뒷골목의 봉인 조작 기술자한테 내가 들은 이야기를 해 줄까?"

쿨란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대충 뭔가로 닦아낸 것 같기는 했

지만 핏자국이 남아있는 얼굴에 인상까지 쓰고 있는 쿨란의 모습은 야수

를 연상케 했다.

"쿨란. 이제 그만 둬. 다 잘 됐잖아? 자네는 의뢰를 끝냈고, 나는 사건

을 끝냈어. 자네는 의뢰비만 받으면 되고 나는 보고서만 올리면..."

타이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였다. 쿨란의 주먹이 타이론의 턱

에 날아가 박혔던 것이다. 타이론의 고개가 잠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

왔다. 하지만 표정은 완전히 다른 휴먼 레이스의 표정이었다. 아니, 거의

이계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것도 아주 사나운 랩타일 레이스의 표정.

"우워어어어어어어어!"

타이론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휴먼 레이스의 포효를 내지르며 쿨란에

게 달려들었고, 주변에 있던 경관들이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

는 정말로 살인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 다행으로 타이론이

먼저 이성을 찾았다.

"시 쪽이었을 거야."

타이론이 아픈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알잖나. 높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일을 처리하는지. 2차, 3차, 4

차 안전선이라도 만들 수만 있다면 다 만들어 놓지. 아니면 그 높은 쪽

녀석들이었는지도 몰라. 알지? 그 눈 커다란 녀석들. 만티드 레이스하고

뭔가 조정이 필요했는지도 몰라. 아니면 만티드 레이스 녀석들 정보망이

진짜로 넓었을 수도 있고. 하여간 일개 시경은 절대 아니니까 나한테 화

풀이하지 마."

타이론이 좀 전의 상황에 비한다면 무척이나 점잖아진 목소리로 쿨란

에게 말했다. 쿨란은 타이론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메이런 쪽으

로 눈을 돌렸다.

"메이런. 흥분하면 안된다."

쿨란이 말했다.

"무슨 일이든지 흥분하게 되면 서두르기 마련이고, 서두르게 되면 뭔

가 빼먹게 되기 쉬운 법이란다."

"푸우순 시에서 살아가는 법 여섯 번 째 인가요?"

메이런이 물었다. 쿨란은 메이런의 말에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사인지 뭔지는 다 끝냈지? 유전 공학인가, 그거 말이다."

쿨란이 메이런에게 확인했고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믹한테 미안하군."

"이번에는 타이론이 믹을 다그치겠군요."

메이런이 말했다.

"이해가 빨라졌구나. 그래. 하지만 그게 믹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

지."

쿨란이 말하는 사이, 경관들은 쿨란의 사무실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부서진 물건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밖의 물건들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참. 이제 저 친구는 어떻게 되나?"

쿨란이 시크사를 가리키면서 타이론에게 물었다. 시크사는 무장한 경

관들 사이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의료진들은 시크사의 떨어져나간 다

리를 붙여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냥 놔 두세요."

메이런이 말했다.

"붙일 수 없다고 했어요."

메이런의 말에 의료진은 잘려 나간 시크사의 무릎 부분에 소독약을 바

르려고 했다. 하지만 잘려나간 시크사의 무릎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아있

지 않았다.

"쿨란. 저 친구는 이제 우리 시의 망명객으로 등록될 거야. 시에서 알

아서 할 일이지. 직업을 찾아 주고, 살 곳을 마련해 주고..."

증거품으로 발견한 찌부러진 357탄환을 들고 있던 타이론이 답했다.

"그리고 우리 시에서 필요한 건 뭐든지 짜내겠지. 안그런가?"

"그런지도 몰라. 쿨란. 그런 건 나한테 묻지 마. 자네는 트랜서도 데리

고 있잖아?"

타이론의 말에 쿨란은 긍정의 빛을 내었다. 타이론은 쿨란을 향해 미

소를 지었다. 메이런은 타이론이 쿨란이 전하는 무언의 사과를 받아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메이런. 저 친구는 뭘 하고 싶다고 하던?"

"정원사 일을 배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요."

메이런이 말했다.

"그래? 그리고 또 다른 건?"

"그리고 커피나 한 잔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메이런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쿨란을 보면서 혼자만 의미를 알 수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목:[하이어드] Blood line.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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