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20화 (20/52)

5.데자뷰.

사방은 온통 암흑이었다.

메이런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운 두

통이 메이런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당장이라도 쪼개질 것

같았다. 메이런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고통 때문에 입에서 나

오는 것은 비명이라기 보다는 그저 신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줄기 빛이 메이런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메이런은 빛이 닿으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메이런

은 어른거리는 빛줄기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이윽고 빛이 메이런의 머

리에 닿았고, 메이런의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메이런은 자신이 빛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 수 있

었다. 메이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사방을 볼 수가 있었다. 메이런은

머리가 근질거렸다. 그건 머리에 더듬이가 있다는 감각 때문이 아니었다.

메이런은 손으로 머리를 확인해 보았다. 정말로 메이런의 머리에는 두

줄기의 더듬이가 까딱거리고 있었다. 메이런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은

집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무슨 레이스일까.

곤충형 레이스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거울이 없으니 어떤 레이스

인지는 그저 짐작만 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메이런은 몸을 더듬어보았

다. 외골격에 솟아있는 미세한 털들이 메이런의 손놀림을 감지해 내곤

두뇌에 간지럽다는 신호를 보냈다. 메이런은 감각들 중에서 등에 뭔가를

움직일 수 있는 감각이 있다는 걸 알아내곤 그것을 움직여 보았다. 익숙

한 감각은 아니었지만 등에 달려 있는 것은 메이런의 신호를 움직임으로

쉽게 바꿀 수 있었다.

날개였다.

메이런은 날개를 움직였다. 순식간에 빨리 움직여 날아오를 수도 있었

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천천히, 정말로 날개가 붙어있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비행을 위한 날갯짓을 했던 것이다.

메이런은 빛을 따라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빛은 너무나도 눈이 부셨다.

메이런은 빛의 저편에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

을 향해 가야만 한다는 것도. 바로 그 순간 메이런에게 다시 두통이 찾

아왔다.

천천히 내려가야지. 이대로 날다간 머리통이 부서지겠어.

메이런은 생각하면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밝은 빛 속에서 보이는

메이런의 손은 집게 손이 아니었다. 까만색 털로 뒤덮이고 손톱도 길게

자라있는 손이었다.

이건 뭐지?

하지만 생각을 길게 할 겨를은 없었다. 손이 바뀐 순간, 메이런의 날개

도 사라졌던 것이다.

추락.

메이런은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메이런의 입에서 나온

것은 휴먼 레이스의 비명이 아니라 짐승의 포효였다.

"악몽이라도 꾸었나봐?"

굵은 여자의 음성에 메이런은 잠에서 깨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목이 말랐다.

"여긴..."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며 두 가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먼저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조이스라는 사실이 하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메이런이 옷을 전혀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 그렇게 가자고 해 놓고는 무슨 소리야?"

메이런은 당혹스러워하며 조이스를 바라보았다. 조이스는 어디를 나가

려는 참이었는지 정장을 차려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서 거울을 보고 있었

다.

"...어떻게 된 거죠?"

아직도 술이 덜 깨어서 그런지 속이 화끈거렸다. 메이런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마도 시간이 점심때가 지나 있는 것 같았다.

"오호라. 기억이 잘 안 나신다? 궁색한 변명이지. 트랜서도 다른 남자하

고 똑같네?"

"아, 아뇨. 제 말은..."

메이런은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할 텐데 메이런

의 머리는 지끈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농담이야. 말했잖아. 당신은 내 타입이 아니라고."

메이런은 그러고 보니 조이스가 어느 사이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메이런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조이스의 옆에 앉아서 계속해서 일루젼을 들이부었던 기

억뿐이었다.

"일루젼이 과했어. 옷에다가 다 토하고 말이야. 옷 벗기느라 애먹었어.

살결이 좋아서 용서 해줬지만."

메이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옷은 대충 세탁기에 넣고 돌렸으니까 입을 만할 거야. 저 쪽 세탁기

옆에 놔 뒀어. 그런데 어때? 일루젼을 그렇게 마시면 정말로 환상이 보

여?"

"농담하지 말아요."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곤 헛구역질을 했다. 일루젼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했던 것이다. 코끝에서 일루젼의 향이 역하게 맴돌

고 있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내더라고. 처음에는 술 때문인가 했는데, 잘 들어

보니까 헛소리도 하던 걸?"

"...내 옆에 있었어요?"

"응. 침대는 하나 뿐이니까. 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난 밑에 있는 보조

침대 꺼내서 잤어."

조이스의 얼굴은 마치 딱한 남동생을 걱정하는 누나와도 같았다. 메이

런은 그런 표정에서 포근함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신.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화장대에서 일어나면서 조이스가 물었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얼굴에는

화장기가 하나도 없는 맨얼굴이었다. 원래 화장을 하지 않는 조이스였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하게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면 왜 화

장대에 앉아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 일루젼이 정말로 과했나봐요. 환상은 보이지 않지만."

"이거."

조이스는 알약 하나와 물 컵을 메이런에게 내밀었다.

"뭐예요?"

"왜? 독약일까봐?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이런 식으론 안 죽여."

조이스가 짐짓 성난 투로 말했다. 하지만 메이런은 농담에 웃음을 지을

수 있을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메이런은 구역질을 참느라 손을 입으

로 가져가면서 조이스의 얼굴을 피했다.

"일루젼에 잘 듣는 해독제야."

메이런은 물과 함께 알약을 먹었다. 목이 말라서 물이 쉽게 넘어갔다.

하지만 컵에 물은 아주 조금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알약을 삼키자 컵은

완전히 비어버렸다.

"물, 조금 더 없어요?"

"더 마시면 견디기 어려울 거야. 삼십분만 참아. 약효가 날 때까지는 토

하면 안되니까."

메이런은 곧 조이스의 충고가 옳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물 한 모금

밖에 마신 것이 없는데 속이 온통 다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삼십 분. 그게 지나면 해독제 효과가 나타날 거야."

조이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가방을 집어들었다.

"난 나갈 테니까 술 좀 깨고 나가. 어디 가서 아침, 아니 점심이라도 사

먹고."

"고맙...습니다."

메이런은 미안하다고 말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이런 경우

미안하다는 말은 듣는 이에게도 말하는 이에게도 별로 좋을 것 같지 않

았다.

"고맙긴. 기운 내. 어차피 왜 사는지 알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예?"

메이런은 이렇게 반문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어제 나눈 대화 내용인

모양이었는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다는 걸 인정한 셈이 되었기 때문

이었다.

"그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 그건 좀 섭섭하네."

메이런은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또 한 번 구역질이 치밀었다.

"하여간 아무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둥, 그런 소리하지 마. 적어

도 피아노바에 트랜서가 다닌 다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데 그래?"

조이스는 농담인지 아닌지 알아들을 수 없는 투로 이렇게 말하곤 집밖

으로 나섰다. 그리고 메이런은 삼십 분 동안 구역질을 참아낸 다음, 옷가

지를 챙겨 입었다.

날씨는 흐려있었다. 캡슐 스테이션에서 시 외곽으로 향하는 캡슐을 기

다리는 사이, 메이런은 몇 번 몸이 떨려왔다. 아마도 조이스가 준 알약의

약효 때문인 모양이었다.

조이스가 준 알약은 효과는 확실히 좋았지만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부

작용이 있는지도 몰랐다. 당장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별로 걱정도

되지 않았다.

메이런이 쿨란과 일하기 시작한지 삼 년. 그 동안 메이런은 단 한 번도

쿨란을 떠나서 사무실 밖에서 잔 적이 없었다. 사무실 밖에서는 거의 쿨

란과 함께였고, 가끔 쿨란이 사무실을 비우는 날에는 혼자 사무실을 지

켰던 것이다.

쿨란이 뭐라고 할까? 법적으로 쿨란은 메이런의 양아버지였지만 쿨란이

아버지 티를 낸 기억은 거의 없었다. 가끔가다가 메이런에게 충고를 하

기는 했지만 거의 일과 관련된 것이었고 특별히 메이런을 나무라거나 탓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밖에서 자고 들어가는 데도 아

무 말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메이런은 조금 불안해 지

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 때 캡슐이 도착했고, 메이런은 두통이 다시금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일루젼 때문에 오는 두통은 아니었다. 메이런은 이 캡슐을 어디

에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 때문에 뭔가 혼동하고 있는

걸까? 메이런은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며 캡슐에 탔다.

메이런은 카드로 캡슐비용을 지불하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었다. 메이런

은 화끈거리는 머리를 계속 지압하면서 캡슐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오늘 처음 듣는 곡일텐데, 메이런은 마치 예

전에 몇 번들었던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거듭될

수록 메이런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어서오세요. 저희 랜티 캡슐 교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과 같은 딱딱한 멘트 방송이었지만 음악과 함께 들으니 새로운 기분

을 느낄 수 있었다.

"힐사이드 221번지."

"힐사이드 221번지 스테이션으로 갑니다. 메이런 씨, 좋은 여행되세요."

메이런은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음악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두통? 메이런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감미로운 음악은 얼마 지나지 않

아 끝이 났다.

메이런은 눈을 떴다.

음악이 끝나자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무거운 것을 바

닥에 끄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헛기침소리가 뒤섞인

소음이었다. 메이런은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저절로 긴

장이 되었다.

잠시 뒤, 조금 전의 감미로운 음악과는 조금 다른 음질의 소리가 들려

왔다. 메이런은 그것이 피아노 소리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노래가 흘러나왔다. 메이런은 비록 떨어지는 음질이었지만 그것

이 조이스의 목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노래가 시작되자 마치 감전이

된 것처럼 가슴이 뛰어올랐다.

노래는 어제 들었던 피아노맨이었다. 조이스의 메이런이 듣기에 목소리

는 조금은 긴장된 것처럼 들렸다. 아마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청

자(聽子)를 의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이스가 마지막으로 건반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들으신 곡은 피아노맨이라는 곡입니다. 제가 피아노바에서 자주

부르는 곡이죠."

조이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메이런은 웃음을 지었다. 평소 조이스와

는 달리 대단히 어색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음악 들으시죠. 이 곡은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으시는 분들

을 위한 제 자작곡입니다."

메이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이스는 지금 자신을 위해서

연주를 하겠다고 말했다. 메이런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음색이 야속하게 여겨졌다.

이번 곡은 연주곡인 모양이었다. 피아노의 음색은 정확하고도 빠르게

메이런의 심장을 두들기고 있었다. 슬픈 곡인가? 메이런은 그런 것 같다

고 생각했다. 꼭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저 조금 어두웠을 뿐, 어쩌면 매

우 힘이 있는 곡인 것 같다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이제 곧 캡슐은 힐사이드 221번지에 도착합니다. 모쪼록 좋은 여행이

되셨길 빌겠습니다. 지금까지 렌티 교통이었습니다."

연주가 끝날 즈음, 캡슐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메이런의 두통도 언

제 사라졌는지 사라져버렸다.

"지금 곡은 데자뷰, 라는 곡이었어요. 그럼 다음 기회에 또 뵙죠. 안녕."

조이스의 말이 끝나자 잠시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감미로운 음

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푸우순 시 라디오 시험 방송 중입니다. 라디오 그룹의 라디오

는 이제 곧 행성 어스 전체로 동시 방송 될 예정입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메이런은 캡슐에서 내렸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한 기분이었다. 메이런은 캡슐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음악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웠

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메이런은 책상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

쿨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연 쿨란이 무슨 말을 할까? 메이런

은 솔직히 두려웠다. 꾸중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것

이고, 그럴 리가 없겠지만, 메이런을 때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쿨란은 평상시와 별로 다를 바 없이 보였다.

"라디오를 사야겠어요."

메이런은 쿨란이 별로 자신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깨닫자마자 이

렇게 말했다.

"음악이라도 듣고 싶은 거냐? 하긴. 그럴 나이지."

쿨란이 말했다.

"남자라면 말이다, 누구나 그런 날이 찾아오기 마련이란다."

쿨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메이런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미리 준

비 해 둔 커피 한 잔을 메이런에게 내밀었다.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커피를 받아들었다. 향기로운 커피의 향내가 메이런의 머리

를 맑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사랑은 유혹적이지.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위험해 지거든. 들어 봤니?

모든 위험한 것은 동시에 유혹적이라는 말."

"아뇨."

메이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마치 커피가 마법을 지닌 생명수라도

되는 듯 메이런의 몸을 개운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누구나 겪는 일이니 걱정 말라는 거다, 내 말은."

머리가 맑아진 메이런은 자신이 지금 빠져 있는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일루전에 취해서 단골 술집의 피아노맨 집

에서 하루 잔 것뿐이었다.

"다음 번에는 말이다, 나하고 한 잔 하는 게 어떻겠냐? 내가 잘 아는

술집이 있는데."

메이런은 예전에 의뢰 때문에 쿨란과 함께 그 잘 안다는 술집에 가 본

적이 있었다. 반쯤 벗고 있는 여자들과 나이든 중년이 난잡하게 뒹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메이런은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다음에요. 다음에."

메이런은 이렇게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보냈다. 쿨란은 자리에서 일어

나 메이런에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한 잔 마실 일이 있어, 메이런."

"왜요? 비싼 의뢰라도 하나 건졌나요?"

"아니. 푸우순 시를 떠날 일이 생겼거든."

쿨란의 목소리는 어쩐지 과장되게 느껴졌다. 메이런은 쿨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쿨란은 지금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

런은 그 이상으로 쿨란의 마음을 읽으려 들지는 않았다. 쿨란이 언젠가

말했듯,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의 마음을 읽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

었던 것이다.

"설마, 그 포미사이드 레이스 때문인가요? 제귤러의 의뢰, 그러니까 마

케스라는 4급 직공을 찾으러? 웨이팅하우스 시까지? 거기엔 정보원이

있잖아요. 돈 몇 푼 집어주면 끝날 일을... 쿨란. 웨이팅하우스 시까지 가

려면 사막을 건너야 해요."

"셔틀로 갈 거야. 안전하게."

셔틀이라는 단어는 메이런에게 아련한 향수를 일으켰다. 메이런은 그

향수의 원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애써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

다.

"참. 그러고 보니까 그 마케스라는 이름의 4급 직공도 찾아 봐야 겠구

나. 이거 잘 됐지 않니? 정보비를 줄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이런 걸 총

한방으로 적 둘을 잡는다고 하는 거다."

"늘 두 발씩 쏘라고 가르치지 않았어요?"

메이런은 이렇게 농담을 하기는 했지만 쿨란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

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냥 그런 말이 있다는 거지. 하여간 우리는 웨이팅하우스 시로 간다."

"...설마 타이론이 말한 의뢰, 받아들이려는 건 아니겠죠?"

메이런은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왜. 안되냐?"

"만티드 레이스 기억 안 나세요? 다 죽을 뻔한 건 물론이고 사무실도

엉망이 되었는데. 그레이스 호크 의뢰는 어때요? 그 때도 다 죽을 뻔하

지 않았어요? 그 황금가면 장물을 찾아 나섰을 때는 어땠어요? 둘 다

하룻밤 유치장 신세 지는 걸로 끝나긴 했지만, 까딱했으면 저나 쿨란이

나 사형을 당했을지도 몰라요. 타이론이 주는 의뢰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해 놓고선 또..."

"메이런."

쿨란은 애정어린 목소리를 가장하면서 메이런의 이름을 불렀다. 메이런

은 쿨란이 이렇게 행동할 때에는 뭔가를 납득시키려 한다는 걸 알고 있

었고, 그리고 납득하건 말건 쿨란이 마음먹은 대로 일을 진행한다는 것

도 알고 있었다.

"하이어드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무슨 일이건 다 할 수 있어야 한단다.

그것만이 진정한 하이어드의 길이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안 하잖아요. 불법적인 일도 안하고. 시에서 의

뢰한 일도 어지간해서는 안할려고 하고."

"누군가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야. 불법적인 건 더더욱 아니지. 그러니까

시에서 의뢰한 일이긴 하지만 하려고 하는 거야."

메이런은 포기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쿨란을 설득할 수는 없다는

걸 메이런은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점도 있을 게다. 셔틀을 타 볼 수 있지 않겠니? 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보수는 아주 좋단 말이야. 거기다가 말이다..."

쿨란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잠시 망설였다.

"게다가 아주 싼값에 라디오를 살 수도 있지 않겠니? 웨이팅하우스 시

의 라디오는 여기서 사는 것 보다 훨씬 싸단다. 게다가 품질도 좋고."

쿨란은 이렇게 말하곤 스스로도 만족했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약점을 잡힌 거군요?"

메이런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던 것

이다.

"아냐. 그런 것 보다는... 개인적인 일이랄까."

쿨란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자! 그럼 사격을 하러 가볼까?"

하고 꾸며낸 것이 뻔한 활기찬 음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이런

은 도대체 왜 웨이팅하우스까지 가야 하는 지 이유를 듣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쿨란을 따라나섰다.

제 목:[하이어드] Missing Transer. - 11 -

사격장은 쿨란의 사무실이 위치한 엠파이어 빌딩에서 캡슐로 꽤 오랫동

안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서 의뢰가 줄어서 쿨란은 메이

런에게 사격훈련을 자주 시켰다.

"어려울 때일수록 자신한테 투자를 해야 하는 거다. 그게 진짜 남는 법

이지."

쿨란의 말 중에서 메이런을 가장 위하는 말을 꼽으라면, 아마도 메이런

은 주저 없이 이 말을 꼽았을 것이다.

사격장의 주인은 늙은 휴먼 레이스였다. 젊었을 때에는 쿨란처럼 용병

으로 셔틀을 타고 전선을 다녔다고 했고, 전역할 때의 계급은 소령이었

다고 했다. 쿨란의 말에 따르면 휴먼 레이스 출신 용병이 소령까지 진급

할 수 있는 건 기적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메이런은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가는귀가 먹어서 손님의 목소

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예비역 소령의 모습을 보면 그게 그다지 대단

한 일인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령. 또 왔어요."

쿨란이 건성으로 사격장 주인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말했다. 예비역

소령은 경례를 받았다.

"총이 필요한가? 아니면 사격하러 온 건가?"

소령은 늘 똑같은 말로 쿨란과 메이런을 맞았다.

"사. 격."

쿨란은 입모양을 또렷하게 하면서 소령에게 말했다. 소령은 고개를 끄

덕이면서 쿨란을 위해 사격장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사격장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마도 총성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겠지만, 덕분에 사격장은 늘 어둡고 더러운 분위기였

다.

사격장은 건물 크기에 비해서 꽤 넓었다. 아마도 예전에는 지하 주차장

이나 혹은 지하 체육관이었을지도 몰랐다. 사로(射路)는 모두 열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고, 타겟까지의 거리는 25미터가 되었다.

쿨란과 메이런이 사격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먼저 도착한 몇몇 레이스들

이 사격을 하고 있었다. 총성이 시끄럽게 사격장에서 울리고 있었다. 지

하였기 때문에 총성은 상당히 크게 울리고 있었다.

"오늘 사격을 하고 나면 당분간은 의뢰 때문에 사격을 못하게 될 테니

까, 집중해서 잘 하도록 해라."

"예?"

총성 때문에 메이런은 쿨란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오늘 사격하면 당분간 못 쏠 거잖아! 그러니까 잘 쏘라구!"

메이런은 사격장 주인이 가는귀를 먹은 건 순전히 사격장을 운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천만 다행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먼저 도착한 레이스들이 사격을 마

치고 사격장을 빠져나갔다. 쿨란은 안도하며 소령에게 사격지와 탄을 요

구했다.

"먼저 쏴봐."

쿨란은 메이런에게 K-5를 내밀면서 말했다.

쿨란은 보통 때에는 무장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쿨란의 책상서

랍 속에는 항상 K-5가 비치되어 있었고, 안전장치만 풀면 바로 사격이

가능하도록 장전도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메이런의

K-5도 있었는데, 사격장에 갈 때나 총을 정비할 때를 제외하고는 서랍

에서 나오는 법이 없었다.

"늘 말하지만 사격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요."

메이런은 귀마개를 착용하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가는귀를 먹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표적지는 15미터 거리에 놓여진 보통의 휴먼 레이스 크기의 1.8미터 표

적지였다. 메이런은 쿨란에게 배운 대로 가슴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두 발이 사격되자 K-5의 슬라이드가 후퇴되어 있었다.

표적지는 깨끗했다. 한 발도 명중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도 좋지만 좀 너무하구나."

쿨란은 이렇게 말하며 K-5를 쏘았다. 쿨란의 총소리는 늘 한 번만 들

렸다. 분명 두 번 방아쇠를 당기는 것일 테지만 귀로 들을 수 있는 총성

은 늘 한 번 뿐이었다.

표적지에는 거의 한 점에 명중된 두 발의 탄환이 남긴 구멍이 나 있었

다.

"일루젼 때문이겠구나."

쿨란은 한숨을 쉬었다.

"일루젼은 독이야. 한 번 마시면 반드시 손이 떨리게 되어 있단다."

그러는 쿨란도 마시면서,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격장에서 쿨란은 상

당히 날카로워지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메이런은 사격장에서 쿨란에게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쏴봐. 이번에는 한 발만. 집중해서."

쿨란이 말하자 메이런은 숨을 고르고 표적지를 향해 한 발을 발사했다.

표적지 어깨 부분에 작은 구멍이 하나 생겼다.

"손이 심하게 떨리는 구나. 오늘 사격하면 꽤 오랫동안 못 쏴볼텐데."

쿨란은 화가 난다기 보다는 걱정된다는 쪽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총은 몸으로 쏘는 거다. 팔하고 손가락으로 쏘는 게 아니야."

쿨란의 말이 시작되자 메이런은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좋을지 몰라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 두 번 들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네가 아프면 총도 아프지. 네가 산만하면 총도 산만해 지고. 그걸 이용

하는 거다. 네가 집중하면 총도 집중할 거고. 네가 분노하면 총은 너의

분노를 대신 할 거야."

쿨란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표적지에 사격을 가했다. 메이런은 학교

에서 교사가 학생들의 주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칠판을 교편으로 탕, 소

리가 나게 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이 9밀리 권총은 그렇게 효과적인 무기는 아니야. 너도 잘 알겠

지만, 두꺼운 외피를 가진 레이스들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물건

이지. 하지만 어찌되었건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어스에는 휴먼 레이스

가 절대 다수이고, 휴먼 레이스에게 9밀리탄은 치명적이야."

쿨란은 다시 한 번 표적지에 사격을 했다.

"물론 사수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솔직히 너처럼 쏠 바에야 K-5보다는

망치를 들고 다니는 편이 더 나을 거다."

쿨란은 표적지를 회수했다. 쿨란이 발사한 네 발은 정확하게 가슴 부분

에 명중되어 있었다.

"용병 시절에 배운 건가요?"

메이런은 쿨란이 더 이상 사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듣다가는 좋은

소리 듣지 못할 게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다.

용병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건 용병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

는 것이다. 시작이 어떻게 되었건, 끝이 어떻게 나건, 그들에게 있어서

용병 시절은 아무리 꺼내 써도 다하지 않는 화제의 보물 창고였다.

메이런은 쿨란이 키티-본을 찾아 갈 때 같이 간 적이 몇 번 있었다. 쿨

란은 거의 대부분 사적인 일로 키티-본을 찾았고, 그 사적인 일의 대부

분은 용병시절의 경험담을 서로 나누는 것이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덕

분에 메이런은 겔러틱 전투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그 전투가 전쟁에 무슨 영향을 끼쳤고, 어떠한 전략적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건 알 수 없었지만 쿨란이 그 날 니들건을 쏘아대면서 건조식 전투

식량을 입안에서 녹여먹었다는 이야기나 키티-본이 눈을 잃었을 때 업

고 뛰어간 이야기 등은 생생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쿨란은 키티-본을 찾아가는 걸 그만 두었고, 용병

시절의 경험담을 나눌 수 있는 상대로 소령을 선택했다. 메이런은 사격

장에서 쿨란이 소령과 용병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몇 번 듣게 되

었다. 사격장에서 시작된 둘의 대화는 결국에는 쿨란의 사무실까지 이어

져서 다음 날 아침에야 끝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날이면 메이런은 중간

에 잠들어버리곤 했다.

"용병 시절에는 니들건을 썼지. 하지만 훈련소에서는 이 9밀리 총을

썼었고."

쿨란은 권총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만지면서 말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우리가 바알리아 성계라고 부르는 곳에 있는 작은

콜로니 행성이었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삭막한 곳이었지."

가지고 놀 장난감이라고는 실탄과 야간 투시경 따위였으니까. 야간 투

시경은 실탄보다 훨씬 위험했는데, 그걸 쓰고 햇빛을 봤다가는 시력이

날아갈 수도 있어. 메이런은 속으로 쿨란의 다음 이어질 말을 줄줄 외울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했으니까... 오늘은 니들건 이야기를 해 주마."

이 말에는 조금 흥미가 생기는 메이런이었다. 쿨란은 니들건에 대해서

는 별로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말했듯이 총이란 건 실전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단다. 서로를 움직

이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야. 전투를 벌

이고 점령하는 건 군인이 하는 일이지만 전쟁을 하는 건 전투형 셔틀과

장거리 미사일이지."

메이런이 사실 쿨란에게 자주 배웠던 건 총보다는 칼이었다. 쿨란의 말

에 따르면 칼이야 말로 궁극의 병기라는 거였다. 전투란 서로 고착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무조건 백병전 뿐이고, 백병전이 벌어지면 니들건

이건 화약식 9밀리건 쓸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게 쿨란의 생각이었다.

"니들건의 위력을 처음 본 건 내가 열 아홉 살 때였어. 그러니까 너하

고 같은 나이였지. 그런데 왜 웃니?"

메이런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고 있었다.

"그냥요. 쿨란도 열 아홉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니까 이상해서요."

메이런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쿨란의 외모로 미루어 볼 때, 열 아

홉 살 때에도 똑같은 모습이었을 거라고 상상했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무모하고 잔인하고 거친 사내였을 거라는 건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락벳 전선에서였지. 락벳 행성에 대해서 아니?"

"얘기 한 적 있어요. 휴먼 레이스들은 그곳으로 전쟁을 하러 갔었다고."

"그래."

쿨란은 전투 이야기만 나오면 늘 들떠있는 듯 했다. 적을 제압한 이야

기, 백병전, 동료가 죽었던 이야기, 오인사격, 실수... 이런 에피소드들은

끝이 없이 이어졌고 쿨란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웃는 얼굴이었

다.

하지만 전쟁이야기는 달랐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 특히 적 행성에 대한 이야기나 용병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아가면 쿨란은 우울해 지곤 했다. 메이런은 쿨란의

마음에서 어둡고 무거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령과

밤새워서 이야기를 했을 때, 메이런이 잠들었던 것도 전쟁 이야기가 나

올 즈음이었다.

"그래. 내가 근무 한 곳이지. 지금도 기억이 나. 초록색 행성 락벳. 숲과

야생짐승의 천국이었지. 밤이면 적보다는 맹수에 대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전염병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주사와 알약을 써야 했는지 몰라."

쿨란의 눈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메이런은 그 꿈이 악몽이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쿨란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은 공포는 아니었다.

어쩌면 아련한 추억에 가까운, 그런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메이런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였어. 니들건으로 무장한 우리 니들건 중대는 적을

향해 마구 니들건을 쏘아 대었지. 니들건의 총성은 말이야, 꼭 작은 나뭇

가지를 밟는 것 같아. 하지만 위력은 이런 9밀리 탄하고는 비교가 안되

지. 락벳 게릴라의 팔다리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순식간에 눈앞은 피

바다가 됐어."

메이런은 쿨란이 일루젼에 취해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 일루젼은

아닐지라도, 쿨란은 분명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락벳 인들은 대단히 강해.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

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 잠도 자지 않고 우리의 추적을 피해 달아났고,

지하에 통로를 만들어 놓고는 우리쪽 진형을 자유롭게 다녔지. 락벳은

결국 전쟁에서 휴전을 이끌어 냈어. 행성을 통째로 날려 버리기 전에는

그들을 결코 굴복시킬 수 없었으니까. 지금도 락벳 전선은 휴전 중이야."

쿨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메이런은 쿨란을 말리고 싶어졌다. 저렇

게까지 취한 쿨란이 너무나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던 것이다.

"그거 알아? 로즈웰 레이스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유일한 종족이 락

벳 행성인이라는 걸."

"몰랐어요."

메이런은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어떻게 해야 쿨란을 현실 세계로 돌아

올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쿨란. 락벳인들은 무슨 레이스죠?"

메이런은 일단 생각나는 대로 늘 궁금해 하던 걸 물었다.

행성 어스에는 휴먼 레이스가 산다. 누구나 행성 어스에는 휴먼 레이스

가 산다고 한다. 아무도 행성 어스에 어스인이 산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

런데 쿨란은 언제나 락벳인이라고 했지, 무슨 레이스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전 우주에서 가장 흉폭하고 강인한 레이스야."

쿨란은 이렇게 말하곤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치 입에 납덩이가 매달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이런은 궁금해하던 것을 쿨란으로부터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쿨란을 취기에서 구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악마."

메이런이 계속 사격 연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쿨란이 말했다.

"악마였어, 그 녀석들은. 만약에 악마가 진짜로 존재한다면, 락벳 행성

인들하고 같을 거야."

쿨란은 이렇게 말하곤 갑작스럽게 표적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메이

런이 들은 총성은 세 번이었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집에서 나와 캡슐을

탈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예전에도 쿨란이 이렇게 사격을 하

는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세 번의 총성도, 쿨란의 취한 듯한 표정도 분

명 예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메이런은 다시 한 번 두통을 느꼈다.

"어디 아프니?"

메이런의 찌푸린 표정을 본 쿨란이 이렇게 물었다.

"아, 아뇨.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메이런은 대답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미싱 트랜서 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어?"

쿨란의 표정은 메이런을 걱정하는 듯 했다.

"미싱 트랜서?"

메이런은 미싱 트랜서의 말뜻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두통과 미싱 트랜서를 연관짓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즘 들어서 네가 트랜스를 하고 나면 두통을 하고 토하고 해서 말이

다, 안 그래도 걱정 하고 있었어. 악몽도 꾸지 않니?"

메이런은 지금 이 말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캡

슐을 탔을 때와 쿨란의 총성을 들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메

이런은 기억을 더듬어 이 말이 간밤에 피아노바에서 만난 헤드헌터가 했

던 말과 비슷하다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예. 적절한 조치... 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메이런은 헤드헌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새기면서 말했다.

"무슨 일 있었구나."

쿨란은 메이런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어내곤 이렇게 말했다.

"어제, 헤드헌터를 만났거든요."

메이런은 쿨란이 이상한 소리를 더 할까봐 얼른 자신 쪽으로 화제를 돌

렸다.

"헤드헌터?"

"예. 내가 트런서인걸 알고 있더라구요. 명함도 받았어요."

메이런은 쿨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간밤에 조이스가 옷에다가 넣고

빨기는 했지만, 명함은 멀쩡하게 주머니 속에 남아 있었다.

"로웰. 헤드헌터."

쿨란은 로웰의 명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로웰의 명함은 요즘 명함 같

지 않게 구식으로 플라스틱 종이 위에 금박으로 글자를 새겨 넣은 것이

었다.

"네 두통 이야기를 하던?"

쿨란이 물었다.

"예. 하이어드 밑에서 일하다가는 필요할 때에 필요한 조치를 받지 못

하는 수도 있다고 했어요."

메이런은 '삼류 하이어드'라는 표현은 빼고 말했다.

"그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해준다고도 했고?"

"예."

"이 친구들은 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왔다.

네 고민을 해결해 주마. 등등등."

쿨란은 표적지를 회수했다.

"너무 걱정 마. 우리한테는 키티-본이 있으니까. 그리고 말이다."

쿨란은 표적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키티-본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고의 카운셀러야. 아. 진짜 카운셀

러 말이야. 특히 트랜서의 고민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카운셀러

지."

쿨란이 집어 든 표적지에는 단 하나의 구멍도 뚫려있지 않았다.

"키티-본한테 가 봐라."

쿨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해산."

이건 메이런도 알고 있는 군대용어였다.

제 목:[하이어드] Missing Transer. - 12 -

검은 눈동자를 찾은 지도 꽤 오래간 만인 것 같았다. 메이런은 검은

눈동자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검은 색으로 그려진 눈동자의 문양. 메이런

은 저 눈동자가 어딘가를 향하는 출입문을 상징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

각을 해 보았다.

검은 눈동자의 경비원 격인 랩타일 레이스 쿠아딘은 여전히 무뚝뚝해

보였다. 메이런이 쿠아딘에게 인사했지만 쿠아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자고 있는 건 틀림없이 아닐 텐데. 자고 있었다면 메이런은 어떻게든

알아 차렸을 것이다.

"전화 받았다."

쿠아딘은 인사대신 메이런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쿨란이 미리 전

화를 해 둔 모양이었다.

"키티-본은 여기 없다."

"예?"

"여기 없어."

쿠아딘의 말에 메이런은 당황했었다. 쿠아딘의 말뜻이 키티-본이 검은

눈동자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인지, 아니면 키티-본이 아무도 만나고 싶

어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니면 죽었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메이런은 쿠아딘의 마음을 읽으려고 시도했다. 쿠아딘의 마음은 마치

건물의 벽면이나 오래된 시계 같았다. 아무 감정 없이 그저 할 일만 하

는 물건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전 키티-본을 만나러 왔어요. 그리고 키티-본이 있는 곳을 알고 싶어

요."

메이런은 행성 어스 회화 교과서에 나올법한 말투로 쿠아딘에게 말했

다. 쿠아딘은 메이런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메이런이 받아 든 것은

홀로그램이 그려진 명함이었다.

"이게 뭐죠?"

메이런은 쿠아딘에게 물었다. 명함에는 그 흔한 전화번호나 직함, 이름

도 없었고 달랑 홀로그램으로 표시되는 건물 영상뿐이었다. 하지만 쿠아

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꾸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건지, 아니면

대꾸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태도였다. 쿠아딘의 마음

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여기에 있다는 건가요?"

"가 봐라."

쿠아딘은 이렇게 말하곤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메이런은 그 태도

가 용건은 다 끝났으니 어서 빨리 가보라고 말하는 거라는 걸 알 수 있

었다. 메이런은 쿠아딘과 대화를 나누는 건 앞으로 완전히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명함에 홀로그램으로 나타나고 있는 장소

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명함에 적혀 있는 곳은 대사관들이 모여있는 곳에 있는 작은 1층 건물

이었다. 메이런은 쿨란과 함께 이곳을 찾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쿨란은

의뢰가 막히면 금덩이를 몇 개라도 투자해서 이곳에서 일하는 '조'라는

가명의 로즈웰 레이스로부터 정보를 듣곤 했다. 그리고 쿨란이 조를 찾

은 건 지난 삼 년 간 네 번이었다. 메이런은 로즈웰 레이스 앞에서 주눅

이 든 것처럼 보이는 쿨란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

다.

메이런은 명함에 표시되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명함을 몇 번이고 조

작해야 했다. 일단 푸우순 시의 대사관이 있는 구역을 홀로그램으로 띄

운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그 다음 홀로그램의 영상을 키워서 골목을 확

인하고, 골목을 확인한 다음 다시 위치를 파악하고. 메이런은 골목 구석

에 자리잡고 있는 1층 건물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앞도 볼 수 없는 키티-본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을까? 메이런은 낡

은 1층 건물을 확인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처음 보는 레이스 둘이 메이런을 막아섰다. 메이

런은 정장을 입고 있는 덩치 큰 레이스를 보자 주눅이 들었다. 두 레이

스는 같은 레이스였는데, 갈색의 따가울 것 같은 털에 얼굴 위쪽에는 솟

아 있는 두 귀, 그리고 원통형으로 솟아 있는 코에는 정면에서 보이는

두 개의 콧구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입에는 두 개의 송곳니가 드러

나 있었는데, 그것이 두 레이스가 그리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님을

드러내 주었다.

"저, 키티-본을 만나러 왔는데요. 카니보라 레이스에요."

메이런은 둘 중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둘 중 하나가 마치 폐렴에 걸린 듯 한 숨소리를 내며 메이런을 바라보았

다.

"그래서?"

모음과 모음 사이에 거친 콧소리가 섞인 억양의 휴먼 레이스 어였다.

"토마. 이런 식으로 말하면 휴먼 레이스들은 기분 나빠하지. 카니보라

레이스를 만나러 왔다고?"

다른 하나가 조금은 완화된 콧소리 섞인 휴먼 레이스 어로 메이런에게

물었다.

"우리는 서스 레이스야."

"부탁이니까 슈이데 레이스라고는 부르지 말아 줘."

둘은 번갈아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은 생각보다는 친절한 두

슈이데 레이스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이 둘을 통해서는 키티-본

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토마 씨, 보토 씨."

안쪽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오자 둘은 메이런이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뒤돌아 서서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메이런은 텅 빈 방에

혼자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잠시동안 메이런은 방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오래된 시계 하나 말고는 변변한 액자나 장식하나 없었고, 앉을 수 있는

의자 몇 개만이 덩그라니 놓여져 있는 방이었다. 도대체 여긴 뭐하는 곳

일까?

"환자세요?"

메이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슈이데 레이스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던 서

스 레이스 둘을 불렀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

인공은 뒷골목 잡화상 주인인 시타시테 레이스 믹을 연상케 하는 날개가

달린 레이스였다. 피시데 레이스일까? 메이런은 날렵해 보이는 뾰족한

부리와 푸른 빛 도는 깃털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저, 키티-본을 만나러 왔는데요. 카니보라 레이스..."

"면회객이군요. 기다리세요."

날개 날린 레이스는 이렇게 말하곤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메이런은 의자에 앉아 오래된 시계가 작동하는 걸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

야 했다.

다시 날개 달린 레이스가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

았다.

"들어오세요."

날개 달린 레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날개 달린 레이스가 입고

있는 건 깨끗한 햐얀색 옷이었고, 방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풍기고 있었

다. 병원인가 본데. 그렇다면 어디가 아픈 걸까? 메이런은 생각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두 서스 레이스가 척 보기에도 나이 들어 보이는

날개 달린 레이스로부터 약봉지를 받아 들고 있었다.

"토마 씨는 하루 한 번, 보토 씨는 하루 두 번 드세요. 그래야 오래 살

수 있을 겁니다."

역시 가느다란 목소리였지만, 이 날개 달린 레이스는 머리에 깃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는 데다가 안경을 끼고 있어서 나이가 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휴먼 레이스는 정말 오래간 만이로군."

날개 달린 레이스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메이런에게 말했다.

"저도 날개 달린 레이스는 오래간만이에요."

"한펜."

"예?"

"한펜이야, 내 이름은. 그리고 날개 달린 레이스가 아니라 피시데 레이

스고."

"의사...?"

메이런은 조심스럽게 한펜에게 물었다.

"돌팔이. 당신들 용어로 돌팔이야. 나는 나 자신을 흑병원 원장이라고

부르지만."

메이런은 흑병원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불법 진료기관이군요, 여기는."

메이런이 말했다.

메이런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휴먼 레이스가 아닌 레이스들은 휴먼

레이스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고분고분해 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

다. 휴먼 레이스가 아닌 모든 레이스들은 휴먼 레이스를 기본적으로 두

려워했다. 휴먼 레이스의 말 한마디면 자신이 하고 있는 불법적인 일이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물론 로즈웰 레이스는

예외겠지만.

"불법이지. 그게 뭐 잘못됐나?"

그리고 이 피시데 레이스도 그런 예외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메이런

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키티-본이라는 환자를 찾아온 휴먼 레이스가 그런 말 해 봐야 겁먹지

않아. 그리고 나는 여기 근처에 있는 공무원들은 전부 다 알고 있어. 피

시데 레이스, 우습게 보지 마."

메이런은 트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어도 한펜이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 말 뜻은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메이런은 어설프게 쿨란의 흉내를 내려고

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기 마련이야. 그런데 수요만 있고 공급이 없

으면 어떻게 되지? 암시장이 형성되지 않던가? 여긴 그런 암시장이지.

그렇다고 나쁜 곳도 아니야. 내가 없으면 수많은 레이스들이 병 때문에

죽어 버렸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메이런은 최대한 공손한 투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한펜은 메이런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사관에 병원이 있지. 그리고 연구소에도 병원이 딸려 있고. 하지만

날 찾는 친구들은 하나 같이 돈이 별로 없거나 대사관에 갈 수 없는 사

정이 있는 친구들이라고. 나는 돈은 있는데 사정이 있는 친구들한테는

돈을 듬뿍 받고, 대신 돈이 없는 레이스들을 치료해 준다고. 그렇다고 세

금을 내지 않느냐? 그것도 아니지. 내가 그랬잖아. 여기 근처에 있는 공

무원들은 다 알고 있다고."

이제 보니 한펜은 메이런에게 말한다기 보다는 휴먼 레이스 전체에게

신세한탄을 늘어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날개가 달려 있는 레이스는 전부

다 말이 많은 걸까? 메이런은 떠벌이 잡화상 주인 믹을 떠올렸다.

"키티-본을 찾아 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메이런은 또 한번 정중하게 대답했다.

"고생했네."

뭐가 고생인지 메이런은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한펜은 이렇게 말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펜이 메이런을 인도한 곳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키티-본은 카니보라 레이스 중에서 펠리데 레이스에 속하는 레이스

지. 본인은 아마 자신을 키티-본 레이스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키티-본은 나한테는 오래된 환자지. 알고 있지? 그 랩타일 레이스 말이

야. 무뚝뚝한."

"쿠아딘이요?"

"그래. 그 친구가 늘 데려다 줬지."

"여기도 쿠아딘이 알려 줬어요."

"...자네가 쿨란은 아닐 테지?"

메이런은 한펜의 말에 조금은 놀랐다. 키티-본이 다른 레이스에게 쿨

란의 이야기를 했다는 게 잘 상상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놀랄 것 없어. 쿨란은 꽤 유명한 카운셀러니까 말이야. 아. 내가 쿨란

을 안다는 건 아냐. 그냥 자네 같은 꼬마일리는 없다는 것뿐이지. 참. 그

러고 보니 이름을 못 들었군. 자네 이름은 뭔가?"

한펜은 숨도 쉬지 않는 듯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메이런입니다."

"키티-본이 그랬어. 쿨란한테 트랜서가 하나 있다고. 그게 자네였군."

메이런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환자와 친하신가 보네요?"

"보통 환자하고는 별로 안 친해. 친해질 이유도 별로 없고. 하지만 정

신과 치료를 하는 환자들과는 어쩔 수 없이 친해지게 되지. 자네는 진짜

카운셀러를 만나 본 적이 없겠지? 정신과 치료라고 해 봐야 별 것 없어.

그냥 고민을 들어주고 내 생각을 조금 말하는 것뿐이니까. 누구나 그렇

게 말하지 않던가? 입만으로 일할 순 없다고 하는 건 변호사와 카운셀러

를 만나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라고."

한펜은 이렇게 말하곤 대단히 높고 가느다란 소리를 내었다. 메이런은

한펜에게서 즐거운 마음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고, 그래서 한펜이 내는

소리가 웃음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메이런은 한펜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한펜의 마음을 읽어보았다.

일단 한펜은 키티-본에게 환자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듯 했다. 한

펜은 키티-본을 걱정하고 있었고, 메이런이 키티-본을 찾아 온 걸 기쁘

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메이런은 이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메이런이

적어도 환영받는 쪽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길세."

한펜이 병실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병실 문은 두꺼운 철문으로 되

어 있었고, 그 문은 메이런에게 어쩐지 유치장을 연상케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별 거 없으니까."

한펜이 병실의 문을 열었을 때, 메이런은 침대에 누워 있는 키티-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키티-본의 텅 빈 검은 눈동자는 천장을 향해 있었다. 사지는 마치 침

대에 붙어있는 듯 미동도 없었으며 호흡을 위해 솟아올랐다가 내려가는

가슴만이 키티-본이 죽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키티-본은 잠들어 있어.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거지."

메이런은 키티-본에게 다가갔다. 그야말로 숨만 쉬고 있을 뿐, 키티-

본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미싱 트랜서."

메이런은 쿨란에게서 이 단어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지금 키티-본은 미싱 상태야. 미싱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아니? 트랜

서가 트랜스 된 공간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걸 말해."

메이런은 키티-본의 마음을 읽기 위해 키티-본에게 접근했다. 키티-본

은 대단히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키티-본의 마음은 마치 하늘을

날고있는 새같이 가벼웠고, 봄날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싱그러웠다.

"어떻게 된 거죠?"

메이런이 한펜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펜은 무덤덤해 보였다.

"트랜서에게 그렇게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현상이야. 자신이 만들어

낸 공간에 갇히는 것 말이지. 아직은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어

이, 키티! 키티-본!"

한펜이 키티-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키티-본이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키티-본! 메이런이 왔어!"

키티-본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메이런이 있는 쪽으로 그

것을 내밀었다. 메이런은 키티-본의 손을 받아 쥐었다.

"오래간... 만이야. 메이런."

키티-본의 손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지만 힘은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요?"

메이런은 뭐라고 물어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물었다. 분명 병원에

와 있으니 어딘가 아픈 것일 테지만, 메이런이 보기에 키티-본은 어디가

특별히 아파 보이거나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말이야... 미싱 트랜서가 되어 가고 있어..."

키티-본의 손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가는가 싶었다. 그리고 키티-본

은 다시 미싱 상태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제 목:[하이어드] Missing Transer. - 13 -

"본 그대로야."

메이런에게 한펜이 말했다.

"원인이 뭐죠?"

메이런이 한펜에게 물었다. 한펜은 부리를 쓰다듬으며 메이런을 바라

보았다.

"글쎄.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전공은 사실 외과

지 정신과가 아니라서."

한펜은 말을 하면서 메이런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런은 눈을

피했다. 모든 레이스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동그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

는 레이스의 경우라면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쩐지 감정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럼 시작하게."

한펜의 말에 메이런은 이번에는 한펜을 빤히 처다보았다. 뭘 시작하라

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네, 트랜서 아니었나?"

"트랜스를... 하라고요?"

"그럼 내가 트랜스를 할까?"

한펜은 한숨을 내쉬었다.

"키티-본을 만나보러 온 거 아니었나? 그렇다면 당연히 트랜스를 해

야지. 쿨란이 뭐라고 하던가."

"쿨란은 그냥 한 번 만나 보라고 했을 뿐이에요. 그런 말은 못 들었어

요. 키티-본이 미싱상태라던가, 내가 트랜스를 해야 한다던가 그런 말은

안 했어요."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면서 어쩐지 변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굳이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긴. 쿨란이라면 그런 말은 안 했겠지. 자네가 알고 있는 쿨란이 내

가 알고 있는 쿨란과 같다면 말이야."

한펜은 다시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메이런은 솔직히 겁이 났다. 미싱

트랜서라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키티-본과 트랜스 한다

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만약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영영 정상

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면?

"미싱 트랜서는 트랜스 하는 대상을 위험하게 하지. 트랜스 된 상대방

과 트랜서 자신, 둘 다 트랜스 된 공간에 빠져서 못 빠져 나올 수가 있

거든. 하지만 키티-본의 경우는 좀 달라. 혼자 트랜스 된 공간을 열고

그 안에 머물고 있는 거니까 말이야. 게다가 자넨 트랜서 아닌가? 트랜

스 된 공간을 드나드는 게 자네 직업일텐데."

한펜은 메이런의 불안한 마음을 눈치채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메

이런은 여전히 망설여졌다.

메이런은 키티-본이 눈을 감고 있는 걸까 뜨고 있는 걸까 궁금했다.

키티-본의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다. 그 자리에 있는 것

은 빈 공간 뿐. 메이런은 키티-본의 표정을 바라보며 키티-본의 마음을

따라갔다. 키티-본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조금 전 까지 느낄 수 있

었던 기쁜 마음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마음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메이런은 트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전, 키티-본이 자신에게 해 주었

던 말을 기억했다. 그 때 키티-본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깨닫게 해 주었다.

지금도 그 때와 다르지 않다.

메이런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 어렵지 않게 트랜스 할 수 있었다.

트랜스 된 공간에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손이었다. 자신의 손과는

다른 손을 확인해야 트랜스가 제대로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였다.

이건 메이런의 직업적 습관이기도 했다. 하지만 메이런은 지금까지는 트

랜서와 트랜스 해 본 적이 없었고, 트랜서와의 트랜스는 지금까지의 어

떤 트랜스와도 달랐다.

먼저 손이 그대로였다. 메이런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

다.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촉감은 휴먼 레이스의 피부였다. 트랜스가 되지

않은 걸까? 메이런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메이런의 주변은 암흑이 아니었다.

메이런이 서 있는 곳은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초록색 풀이 자라고 있

었고, 낮게 솟아 있는 나무들은 꽃잎 같은 모양을 한 나뭇잎을 달고 바

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새들이 날고 있었다. 새

들은 몸통 보다 긴 붉은 색 꼬리를 달고서 무리를 지어 하늘을 향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과 하늘뿐이었고, 메이런이 볼 수 있는 유일

한 인공적인 조형물은 멀리 언덕 밑에 자리하고 있는 작고 아담한 집들

뿐이었다.

"메이런."

키티-본은 메이런의 뒤편에 서 있었다. 메이런은 키티-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키티-본의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미싱 상태에 빠져들고 있어."

키티-본이 귀를 움찔거리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카니보라 레이스의 표

정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키티-본이 그다지 편안

한 상태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 갇히고 있어. 지금 이렇게 너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

는 건 내가 아직 의식이 남아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키티-본의 목소리는 절박하게 여겨지는 구석이 있었다. 키티-본은 자

신의 온 힘을 다해서 메이런에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여기는 내 어릴 적 기억이야. 내가 앞을 보지 못한 다는 건 알고 있

지? 아마 나는 내 어릴 적 기억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 같아. 지금은 어

떻게든 너하고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말이야, 그렇게 오래갈 것

같진 않아."

키티-본은 말을 잇기가 거북한지 잠시 말을 쉬었다가 이어갔다.

"미싱은 트랜서가 한 번은 겪게 되는 운명이야. 그걸 피해갈 방법은

없는 것 같아. 어쩌면... 나는 용병 생활을 포기하고 행성 어스로 오는 순

간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몰라. 메이런, 너도 알고 있지? 내가 행성 어

스에서 한 일 말이다. 나는 돈이 최고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다른 건 생

각하지 않으려고 했지. 그리고 돈이 모이면 모일수록 점점 더 허망해 지

는 걸 느꼈어."

키티-본은 여기서 말을 한 번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한 때는 내 고민을 들어 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그건 메이런, 너를 만나서 이미 해결되었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졌지. 그리고 나니까 도대체 이런 짓을 왜 하고 있

어야 하나 싶어졌어. 그리고 두통이 찾아왔고, 악몽을 꾸었고... 결국 여

기로 오게 된 거야. 지금도..."

키티-본의 몸통이 마치 잘못된 홀로그램 영상처럼 뒤틀렸다.

"...지금도 겨우 견디고 있는 거야. 이제 멀지 않았어. 난 이제 이 세계

에 빠져 버리고 말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는 미싱 트랜서가 되겠

지. 많은 트랜서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미싱 트랜서."

키티-본은 메이런이 기억하고 있는 키티-본과는 달리 쉴사이 없이 말

을 계속 해서 뱉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키티-본은 자신이 더 이상 자신

의 의식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없으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는 듯 했다.

"한펜에게서 들었어요. 트랜서가 트랜스 된 세계에 갇혀 버리는 걸 미

싱 트랜스라고 한다고."

메이런은 사실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러 온 것이었지만 차마 그런 이

야기는 할 수 없었다. 메이런은 꼭 임종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었다.

"생명체는 누구나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워하지.

나는 아마도 이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지금은 여기

머물고 싶어하는 것 같고 말야.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어. 메이런. 너에게

도 언젠가 이런 날이 찾아 올 거야. 내가 징조를 말 해 줄 게. 처음에는

두통이나 가벼운 경련으로 시작되지. 그리고 의욕을 잃고 무기력 해 져.

그러다가 꿈에서 트랜스 된 공간을 보게 되고,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이렇게 되는 거지."

키티-본의 말이 끊어졌다. 그리고 키티-본의 모습이 마치 수면 위에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처럼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한 순간 완전히 바뀌었

다. 키티-본의 모습은 마치 줄어든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크기만 줄어

든 것은 아니었다. 팔다리도 가늘어졌고 표정도 다른 생명체처럼 변한

것이었다. 가장 달라진 점은 눈동자였다. 맑고 깨끗한 황금빛의 눈동자.

메이런은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빨려 들 것 같은 예감에 몸을 떨었다.

"누구야?"

키티-본은 음성도 바뀌어 있었다. 메이런은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

라서 멍하니 서서 키티-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아."

키티-본은 자신이 만들어낸 트랜스 된 공간에 완전히 갇힌 모양이었

다.

"키티-본?"

메이런은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하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키티-본은

인상을 찌푸렸다. 메이런은 낯선 생명체가 자신을 부른다는 사실이 불쾌

한 게 아닐까 싶었다.

"머리가 아파."

키티-본이 말했다. 메이런은 잠시 동안 키티-본을 관찰해 보았다. 이

제 더 이상 키티-본은 메이런이 알고 있는 키티-본이 아니었다. 메이런

은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키티-본의 황금빛 눈동자는

너무나도 강렬해서 자칫하다가는 자신도 이 세계에 빠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메이런은 트랜스를 끝냈다. 키티-본의 눈동자에 말려들지 않아서 였는

지 몰라도 트랜스를 끝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화는 잘 나누었나?"

한펜이 메이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대답대신 키티-본의 눈

을 바라보았다. 키티-본의 어둡고 텅 빈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키티-본

의 치부를 바라보는 것과 그리 다른 느낌이 아닐 것 같았다.

"예."

메이런은 그냥 이렇게 말하고는 말았다. 비록 여기서 보기에 키티-본

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트랜스 된 공간에서의 키티-본은 행복

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맑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그 사실을 확인시

켜 주고 있었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지만, 미싱 트랜서에 대해서 몇 가지 알고

있는 게 있다네. 사실 키티-본 때문에 공부해서 알게 된 게 거의 전부지

만 말이야."

메이런은 트랜스 된 공간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메이런이 트랜스 한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발

밑에 존재하는 것도 그저 느낌일 뿐, 메이런의 텅 빈 트랜스 된 공간과

키티-본의 공간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편안해 보였어요. 아니, 행복해 보였어요."

메이런은 자신이 뭔가에 취해 있는 듯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인

식하지 못하며 말했다. 한펜은 메이런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볼 수 없는 레이스가 볼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그게 현실이

건 현실이 아니건 간에. 키티-본은 어릴 적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고, 아무 고통도 없어 보였어요. 그냥... 꿈을 꾸는 것

처럼."

"누구나 추억을 간직하면서 살아가지."

한펜은 메이런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기억을 가지고 있어. 지금 내가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기억은 진행되지. 그걸 일일이 다 인식하면서 살 수 없

는 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면서 살아 갈 수 없는 것과 같

아. 그렇지 않겠나?"

메이런은 여전히 시선을 키티-본에게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야, 누구나 삶에 지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지. 어떤 이는

그 순간이 쉽게 넘어가겠고, 또 어떤 이는 어렵게 넘어가는 그런 차이가

있을 테지만 말야.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녀석은 꼭 살아있는 그림자와

마찬가지야. 한 번 생각해 보게. 자네가 계속해서 달려가다가 말이야, 그

것도 자신이 달려가고 있는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 달려가

다가 말이야, 갑자기 달리는 게 싫어져서 멈추어 서는 거지. 보통의 경우

라면 잠시 쉬었다가 가면 될 테지만, 이 기억이라는 녀석은 살아있는 그

림차처럼 자네를 앞서서 달리려고 한다, 이 말이지. 지금까지 달려온 관

성 때문에 말이야. 아, 물론 그림자는 그림자야. 결코 자네를 앞지르지는

못해."

"그러면 어떻게 되는 데요?"

메이런이 물었다.

"아마 지금 보고 있는 게 예전에 본 것 같다... 이런 느낌을 느끼게 되

겠지. 기억이 앞서서 나가려고 하니까."

메이런은 한펜이 정확하게 자신의 증상을 짚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닫자 정신이 퍼뜩 돌아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두통을 느껴요."

메이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키티-본은 초기에는 두통이나 가벼운 경

련으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래. 키티-본도 그랬다고 하더군. 아직까지 정확하게 이론적으로 미

싱에 접근한 학자는 없는 모양이지만, 일단 트랜서에게 그런 현상이 치

명적이라는 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아마도 다른이와 기억을

공유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정확한 건 아니

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메이런이 말했다. 사실 메이런은 키티-본이 굳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오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 쪽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지. 사실 어디가 더 좋은 곳인지는 누구

나 다르게 생각할 걸세."

한펜은 키티-본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티-본은 그 쪽을 택했다. 어쩌

면 이쪽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쪽일까.

"트랜서는 동전 같아. 굴리면 굴러가지만 멈추면 쓰러져 버리거든."

"여기에서만 그럴지 모르지요. 트랜스 된 공간에서는... 다를 지도."

메이런이 대답했다. 하지만 메이런은 자신의 목소리가 여전히 뭔가에

취해있는 듯 하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쿨란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지

고 있는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 사이로 하늘이 붉게 물들

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마."

쿨란은 메이런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트랜서 일은 위험한 일이야. 그 헤드헌터가 말했을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하이어드 밑에서 일하는 트랜서는 더더욱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예전에 나한테는 핑키라는 이름을 가진 트랜서가 있었어. 기억하고

있지? 핑키는 미싱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산 트랜서였어. 하지만 죽었단

다. 어이없게, 총 한 방에."

창 밖에서 비치고 있는 붉은 노을은 타이론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타이론이 제의를 해왔어. 웨이팅하우스 시로 가 달라고 말이야. 무슨

일인지 내가 말 안 했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쿨란은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덕분에 쿨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더욱

깊게 드리워져서 표정을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하이어드에게는 자존심이 있단다. 돈만 받으면 뭐든지 한다고 비난받

는 하이어드지만, 돈만 받으면 뭐든지 하기 때문에 지킬 수밖에 없는 자

존심."

쿨란은 커피잔을 기울여 입술에 대었다. 메이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뿐이었다.

"맹수는 말이다, 맹수를 사냥하는 법이 없어. 왜냐하면 먹을 수 있는

초식동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지. 하이어드는 맹수와 마찬가지야. 굳

이 다른 하이어드와 싸울 이유가 없지."

"다른 하이어드와 싸우러 가는 건가요?"

"그래. 나는 싸우러 가는 거다."

쿨란은 노을이 들어오는 창가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메

이런의 눈에는 쿨란의 뒷모습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메이런, 네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야. 누군가가 있다면 더 좋

겠지만."

"한 가지만 말해 주세요. 왜 싸우려고 하시는 거죠? 안 싸워도 되잖아

요."

메이런은 쿨란에게 물었다. 쿨란은 메이런의 말에 다시 메이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물은 한 곳에 머물고 있으면 고여서 썩어버리지."

메이런은 쿨란의 말에서 한펜이 말했던 동전을 연상했다.

"내가 굳이 너한테 이렇게 말하기로 마음먹은 건, 이 일이 위험한 일

이기 때문이란다. 3년 전. 기억나니? 너는 시에서 공무원으로 일할 수도

있었고, 키티-본을 도울 수도 있었어. 너한테 명함을 준 헤드헌터의 말

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야. 하지만 너는 나와 함께 일하기로 했었다.

그런 너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메이런은 쿨란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걸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메이런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의 씨앗이 가슴에 박히는 걸 느낄 수 있었

다. 하이어드의 피? 메이런은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 몸을 흐르는 걸

알 수 있었다.

"가겠어요."

메이런이 말했다.

"...정말 위험한 일이야. 그리고 난 어떠한 위험에서도 널 구해 줄 수

없을 거고."

"가겠어요."

메이런은 이렇게만 말했다.

키티-본은 멈추어섰다. 그리고 멈추어 선 모습은 결코 불행해 보이지

도,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쿨란은 달리고 있었다. 그건 어

떻게 보면 불행해 보이기도 했고, 틀림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 될 거였

다. 메이런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쿨란을 달

리게 하는지, 무엇이 키티-본을 멈추게 했는지. 그것을 확인하기 전에

자신의 운명을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메이런에게 쿨란을 따르게 만든 것은 3년 전과 다

르지 않았다. 굳이 달릴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멈추어 설

이유도 메이런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제 목:[하이어드] Missing Transer.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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