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29화 (29/52)

0.지원병

락벳 행성의 기후는 행성 어스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생명체가 존

재하는 대부분의 행성이 그렇듯 락벳 행성도 황금률 대의 행성이었다.

황금률 대. 태양으로부터 1억 5000만 킬로미터 내외의 거리. 만 2000

킬로미터 내외의 지름. 5.5 g/cm3 내외의 질량.

황금률을 가진 행성은 대개 비슷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다만 물이

많은 행성과 숲이 많은 행성, 극지가 넓은 행성과 사막이 넓은 행성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 차이라는 건 극히 작고 미미한 수준이

다. 이 넓고 오랜 우주 전체에 비한다면 그 차이는 오랑우탄과 침팬지

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

락벳 행성의 북반구를 통치하고 있는 정통 정부 밑에는 160여 개의

작은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국가들은 각각 2-300여 개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 도시는 또한 각각 농업도시, 공업도시, 조정도시

로 분류할 수 있고, 이 도시들은 각각 생산과 소비, 그리고 통제의 임

무를 담당하고 있다.

락벳 행성의 작은 나라 리타이 국의 농업도시 미린.

미린 시에는 대략 만 여명의 시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었

다. 미린 시의 북쪽으로는 쥬이타이 강물을 받아 비옥해진 평원이 있

었고, 동쪽으로는 이지 산맥의 한 자락이 뻗어 내려온 유우리 산이 병

풍처럼 둘려 있었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이웃한 도시와 연결되는 도로

가 있었고, 미린 시에서 재배된 농작물들은 이 도로를 따라 팔려나갔

고, 이 도로를 따라 각종 생필품들이 들어오곤 했다.

미린 시에 살고 있는 호야미는 올해 19살이 되었다. 퇴역장성인 아

버지와 평범한 농사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호야미는 위로는 네

명의 형과 아래로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호야미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

버지가 이야기 좀 하자고 방으로 불렀을 때, 호야미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장광설은 한 번 시작되면 좀처럼 끝날 줄 몰랐

다.

"호야미.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우리 락벳 행성이 왜 이렇게 되

었는지 아느냐."

아버지가 이렇게 운을 떼었을 때, 호야미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렸다.

"우리 락벳의 역사는요, 그러니까 열 한 번의 왕정과 열 두 번의 분

열기를 거쳐서, 그러니까, 밍-츄-린-타-샤이-파우-린..."

"헐!"

아버지는 특유의 고함으로 호야미의 말을 멈추었다.

"누가 왕조 이름을 물었느냐. 나는 지금 우리 행성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저기요... 이 모양이라는 게 어떤 모양을 말씀하시는 거죠?"

"헐!"

이번에는 고함과 함께 주먹이 날아들었다. 호야미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매운 주먹을 머리통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비옥한 땅의 절반이 사막이 되

어 버리고, 숲의 대부분이 불탔으며 물의 삼분지 일이 마실 수 없게

되어 버린 현실이. 우리의 경제는 어떻게 되었느냐. 또 우리의 가족은?

우리 정통 정부가 겪은 고통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저, 지난 전쟁 때 말씀이시죠?"

호야미는 아버지의 주먹이 이어질까 봐 몸을 피할 준비를 하고서 말

했다.

"사악한 악마들의 네이팜으로 땅은 불바다가 되었고, 녀석들의 소위

소탕작전이라는 것으로 가족들은 척살 되었다. 이렇게 전쟁의 화마(火

魔)가 극복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더란 말이냐."

"아버지. 그건 100년도 전에 있었던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우리 미린

시는 무사했고요."

"헐!"

아버지는 이번에도 주먹을 날리지는 않았지만 심기는 조금 전 보다

훨씬 불편해 보였다.

"호야미. 지금은 전쟁중이다. 휴전이라는 말은 전쟁이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전쟁을 잠시 쉬고 있다는 뜻이다. 남반구에는 지금도 로즈웰

레이스 녀석들이 주둔하고 있다! 빌어먹을 괴뢰 정부 같으니라고. 우

리 동포중 상당수가 그들에게, 그 원수같은 괴뢰 정부녀석들에게 동조

하고 있다. 네가 진정 그 뜻을 모르겠다는 말이냐?"

호야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아버지가

예비역 장성이어서가 아니라 호야미가 알고 있는 어른들은 다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전쟁중이다. 쉬면서 다가올 전쟁을 준비

해야 한다. 이번에도 반드시 승리하여야 한다...

"네 나이 열 여섯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제 본론이 나올 모양인가 보다 싶

었다. 호야미는 숨을 죽이고 아버지의 결론을 기다렸다.

"전쟁은 이제 곧 다가올 것이고, 나는 내 아들이 병역을 수행하기를

바란다. 네 맏형은 지난 전쟁에서 먼저 갔지만 나머지 셋은 아직 복무

중이다. 너도 이제 열 여섯이 되었으니 군인이 되어야지. 안 그렇겠느

냐?"

호야미는 입을 다물었다.

형들은 모조리 사관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장교가 되

어 전쟁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호야미는 사관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

평범한 지역 보통 학교를 졸업한 호야미는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꿈이었다.

"여기 지원 신청서다."

아버지가 내민 것은 지원병 신청서였다. 호야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정통 정부의 직인이었다.

"아버지?"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서 호야미가 아버지를 불렀다. 하지만 아버지

의 얼굴은 마치 굳은 바위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손 내거라."

"아버지. 장군의 아들이 쫄병으로 군대 생활을 해야 한다고요? 이건

저보고 죽으라는 소리하고 같아요."

호야미는 우선 이렇게 부정(父情)에 호소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

은 여전히 바위 그 자체였다.

"아버지. 모두다 군인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또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그래야 한다고 말씀 하셨던 건 아버

지잖아요. 제 여동생 보세요.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잖아요."

이번에는 논리적으로 호소해 보았다.

"농사는 나와 네 에미가 짓는다. 그리고 애를 낳는 건 여자지 남자

가 아니다."

호야미는 논리에서도 밀렸다.

한 동안 호야미는 입대 지원서를 바라보았다. 호야미는 자신의 모습

이 굳은 바위 앞에서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달걀 신세와 다를 바 없

다고 여겨졌다.

호야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곤란한 상황

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알았어요."

호야미는 이렇게 말하며 천천히 입대 지원서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호야미!"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치 등을 잡아끄는 듯 했지만 호야미는 신경 쓰

지 않았다. 젠장. 며칠 지나면 아버지도 좀 잠잠해 지겠지. 호야미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완전한 오판이었다. 호야미가 집으로 돌아간

것은 일주일 뒤였고, 일주일 뒤에도 아버지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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