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M.I 기무사(機務司)
71군단 사령부 정보작전과 사무실에는 참담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
다. 사무실 과장인 율리스 대령조차도 숨을 죽이고 있을 정도였다. 모
두를 눈만 깜박이면서 제자리에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먼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아이라와 린은 그런 정보작전과 사무실에서 움직이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둘 다 군복을 입고 있었고, 아이라의 어깨에는 대위 계급
장이, 린의 어깨에는 중사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저..."
아이라가 입을 열었을 때, 정보작전과 전원이 몸을 움찔했다. 이런
경우는 벌써 몇 번이고 당해 보았기 때문에 익숙해 질 만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아이라는 이런 대우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어느 분 자리죠?"
아이라는 될 수 있으면 분위기를 좋게 해 보려고 웃음까지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리의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다음 총살 대상으로 호명이라도 된 듯한 얼굴이었다.
"제 자리입니다."
"이 새끼, 똑바로 관등 성명을 대야지! 그게 무슨 태도야!"
자리의 주인에게 정보작전과장 율리스 대령이 호통을 쳤다. 그리고
는 아이라를 바라보면서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옛. 자홍 소령입니다. 저는 작전계장입니다."
자리의 주인이 차렷 자세로 대꾸했다. 아이라는 속으로 한숨을 뱉어
내었다. 이런 식으로 아이라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게 구는 태도는 의도
가 너무나도 분명해서 조금도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앞에서는
최대한 비굴하게 굴지 몰라도 돌아서면 아이라에게 욕을 퍼부을 것이
틀림없다. 거짓이 분명한 친절은 받아들인 다는 것 자체가 모욕일 수
있다.
"비밀문건이 책상 위에 있는데요?"
"지금은 업무중이라 괜찮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자홍 소령. 내가 설명 드리지. 아이라 대위. 알고 계시겠지만 우
리 정보작전과에서 비밀문건은 업무 시간에는 자유롭게 간부들이 열람
할 수 있어요. 업무가 끝나면 시건장치가 되어 있는 비밀문건함에 넣
어서 군단 비밀문건합동보관서에 보관하죠. 자홍 소령! 비합소 사용
대장 빨리 보여 드려."
율리스 대령이 얼른 끼어 들어서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아이
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지금 비밀문건 취급 상태를 조사하는 게 아닙니다, 정작과장
님. 제가 하는 일은 어디까지 형식적인 조사이지 보안감사가 아니잖습
니까. 제가 지금 비밀 문건이 책상에 있다고 자홍 소령에게 물은 건
비밀문건을 열람 할 수 있는 간부를 추리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라는 율리스 대령에게 '그러니 제발 끼어 들지 좀 말아요. 안 그
래도 바빠 죽겠는데.'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덧붙이
지는 못했다. 율리스 대령은 군 경력이 20년도 넘는 고급장교였다.
"아, 알고 있어요. 아이라 대위."
율리스는 손을 내저으며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계속하라고 신호를 보
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되는 대령의 행위에 아이라는 제대
로 일을 진행 할 수가 없었다.
"아이라..."
린이 작은 목소리로 애타게 아이라를 불렀다. 린은 지친 표정이었다.
단 한 번의 트랜스도 시도하지 않은 린이었지만 표정만큼은 몇 번이고
긴 트랜스를 마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작업은 린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범
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라도 있어야 린이 발견해 낸 기억에서
뭔가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법이다. 아이라는 린의 능력에서 더 이
상 기대할 수 없다는 걸 며칠 전 군단 정보작전과를 다녀온 뒤에 깨달
았다. 아이라는 린의 기억을 토대로 잉크를 다 쓴 볼펜을 휴지통에 버
린 장교 하나를 M.I로 소환했던 것이다.
그 볼펜에 남아 있던 기억은 실제로 중요한 문건을 작성할 때의 기
억이었다. 하지만 그 문건에는 군사 기밀 따위는 없었다. 그저 부인이
아닌 연인에게 띄우는 편지를 작성한 볼펜이었을 뿐이었다. 아이라는
그 이후로도 클립으로 이를 쑤신 장교와 사고로 찢어진 기밀문건을 테
이프로 붙인 하사관을 소환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차를 마
시고 나서 컵을 씻은 간부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라는 린의 능력 대신 자신의 수사력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하지
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좋습니다. 비밀문건 열람 가능자 명단 주세요."
아이라가 71군단 사령부 정보작전과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대령은
아이라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었고, 대령은 아이라에게 기밀문건
을 열람할 수 있는 간부의 명단이 적혀 있는 서류를 내밀었다. 하지만
아이라는 그것을 사양하고 직접 수사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물론 지
금은 그 입장을 철회했지만.
대령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홍 소령을 통해서 서류를 아이
라에게 건넸다. 서류를 받아든 아이라는 꼭 그 서류가 온 몸의 기운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도무지 의욕이 일지 않았
다.
"나중에 추가로 조사할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고 사무실을 나서려고 했다.
"아. 아이라 대위. 잠깐 차 한 잔 하고 가지 그래요? 우리 간부 하나
가 휴가 다녀오는 길에 고향에서 좋은 차를 사왔는데."
율리스 대령이 이렇게 제안했을 때, 아이라는 큰 실수를 범했다. 대
령의 질문에 즉각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았
을 때, 아이라는 습관적으로 '그러고 싶습니다만 다른 부대에도 가 봐
야 해서요'하고 대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71군단이 오늘의 마지막 장
소였고, 그 때문에 아이라는 대답을 즉시 하지 못하고 말았다. 기운이
빠져버린 때문이라고 아이라는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결
과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아이라가 대처할 방법을 찾아보기도 전에 간부들은 아이라를 정보작
전과장실로 밀어 넣다시피 했고, 아이라는 율리스 대령과 마주 앉게
되었다.
집무실은 다른 부대의 집무실과 마찬가지로 책장과 지휘관 사진, 그
리고 집기 몇 가지를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만큼 아무런 장
식도 되어 있지 않았다.
"로웰 중령은 잘 있어요?"
율리스 대령이 직접 차를 타면서 말했다.
"예. 많이 바쁘신 것만 빼면 잘 계십니다."
"허허허. 그 친구는 아카데미 시절에도 늘 바쁘기만 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군."
율리스 대령은 찻잔을 아이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 푹신한 접대용
의자에 앉아 율리스 대령을 마주하고 있자니 온 몸의 긴장이 다 풀리
는 듯 했다. 그제야 아이라는 율리스 대령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
었다.
반백이 되어 가는 율리스 대령은 여름 내내 해변에서 지낸 것 같은
짙은 구리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라의 타고난 짙은 갈색 피부
와는 다른 피부였다. 커다란 얼굴을 받치고 있는 목선은 매우 두꺼웠
고 눈매는 매섭게 보였다.
"예. 로웰 중령님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로웰 중령님과는 아
카데미 동기생이시라면서요?"
"그래요. 그 친구하고는 검도부 생활도 같이 했었지. 아카데미 64기
졸업엘범을 찾아보면 있을 거요. 그런데 아이라 대위는 몇 기생이신
가?"
"저는 아카데미 출신이 아닙니다."
"아, 알고 있어요. 몇 기하고 동기가 되지요?"
"87기하고 동기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라는 대령이 심리전을 피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령은 지금 자신
의 위치를 과시하면서 아이라에게 압박을 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 사무실 막내하고 동기로구먼. 나가시는 길에 바래다 드
리라고 할 테니 좀 친하게 지내봐요."
율리스 대령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다는 듯 만족
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라는 그 웃음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이라 대위는 이번 사건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일종의 유도 심문이었다.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는 저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아이라는 유도 심문에 넘어갈 만큼의 풋내기는 아니었다.
"그래요? 그럼 내가 말해 볼 테니까 한 번 틀린 곳이 있나 지적해
볼래요?"
대령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아이라는 대령의 손길이 신경 쓰였다.
"사건의 발단은 35사단에서 수색 작전에 두 번 연속으로 실패했던
일이지요. 수색 작전에 나갔던 소대가 연속으로 매복에 걸렸습니다. 사
단장은 문책을 받았고, 연대장 이하 간부들도 경고를 받았죠. 아. 이건
우리 군단 사령부 회의 중에 들은 이야기예요. 정식 안건으로도 나왔
으니까 확인 해 봐도 좋고. 어디 이상한 뒷구멍으로 들은 이야기는 아
니에요."
율리스 대령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이라는 린이 지겹다는 표정을 하
고서 앉아 있는 게 안쓰러웠지만 일단 지금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
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M.I에서 조사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죠. 아,
단순히 소문만은 아니었죠. 이렇게 조사관님이 직접 나오셨으니까."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했다.
"M.I에서는 우리 중에 첩자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아요. 아. 이거,
절대로 비아냥거리는 거나 그런 거 아닙니다. M.I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가장 가까운 곳을 의심하라' 잖습니까. 특히 기무사라면
더 할 테고. 그렇죠?"
율리스 대령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이라는 율리스 대령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그냥 제 임무를 다 하는 것뿐입니다, 율리스 대령님."
"한 때 나도 M.I에서 근무 한 적 있어요. 이 바닥에서는 계속 정보
통에서 밥을 먹었고. 아이라 대위. 내가 충고 한 마디 해도 될까요?"
"감사히 듣겠습니다."
아이라는 점잖게 말했다. 덕분에 아이라의 말투는 비꼬는 것처럼 들
렸고, 그건 아이라가 의도한 바였다.
"일이 바쁠 거예요. 게다가 얼마나 지저분해? 우리편 뒷조사를 해야
한다는 게 말이죠."
"저는 맡은 바 임무를 다할 뿐입니다."
아이라는 점점 더 불쾌해졌다. 만약 한 마디만 더 불쾌한 이야기를
한다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옳지 않을까 싶었다.
"영악하단 말이야, 그 친구."
로웰 중령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정보 계통은 진급이 어렵거든요. 그래서 M.I 밥만 먹는 로웰 중령
이 아직도 중령인 게지. 하지만 그 뿐은 아닌 거라, 이 말씀이에요. 같
은 편 뒷조사하는 친구가 높은 분들 눈에 좋게 보일리도 없고."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아이라 대위. 조.사.관.님. 아이라 대위는 군인이 되기 전에 경찰이
었죠? 경사? 경장? 그쯤이었을 테고. 로웰 중령이 스카웃 해왔죠? 그
렇죠?"
율리스 대령의 말은 옳았다. 아이라를 M.I 기무사로 끌고 온 것은
로웰 중령었다. 로웰 중령의 생각은 뻔했다. 아이라는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다. 아카데미 출신은 조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찰에서 끌어온 아이라는 기무사 임무에 적역이다... 이게 로
웰 중령의 생각일 거였다.
"전쟁이라는 건 말이죠,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예요. 필요할 때에 수
행하고, 필요 없을 때는 쉴 수 있어요. 힘이 있는 쪽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렇죠?"
"수사관이었을 때, 저는 수사에만 신경 쓰는 쪽이었습니다."
그런 데에는 관심 없다는 거였다.
"비단 전쟁만 그런 건 아니에요.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도 그렇죠.
굳이 말하자면 공무원 일이 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필요하
면 하고. 필요 없으면 말고. 문제는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 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그만큼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내 말, 이해하
겠어요?"
"잘 새겨듣겠습니다."
아이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거였다.
"경찰에서 군에 몸담아서 올라간다고 해 봐야 고작 중령이에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죠. 더군다나 보병 사단도 아니고 M.I에서 근무한다
면 대위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요. 정말로 운이 좋다면 소령도 될 수
있겠지만."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아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 이상 듣고 있을 기분이 아니
었던 것이다.
"아이라 대위."
율리스 대령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입에 머금고 있는 미소는
마치 먹이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감사관의 힘은 대단하죠. 대령 아니라 장군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아이라가 마음만 독하게 먹는 다면 나한테서 얼마든
지 흠집을 잡아낼 수 있을 거예요. 옛말에도 있잖아요? 누구든 털어
보면 먼지가 나기 마련이라고. M.I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그 힘에 도취
되죠. 그게 진짜 권력처럼 느껴지고. 로웰 같은 친구가 그래요. M.I에
서 근무하는 권력에 취해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단 말이죠. 만약에 로웰
중령이 보병 사단에서 대대장을 했던가 아니면 작전 참모를 했다면 진
급이 빨랐을 거예요."
"군인의 목표가 진급이라니, 그것 참 안타깝네요."
아이라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아이라 답지 않은 행
동이었다. 린도 그런 아이라의 기세를 눈치챈 모양인지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말 안 했어요."
율리스 대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진짜 힘과 가짜 힘을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 해 준 것뿐이에
요."
율리스 대령의 입술 사이로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사실 아이라는
화가 나서 다시 한 번 이곳을 검열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
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
다는 생각뿐이었다.
"대위. 나는 이번 전쟁이 끝나면 진짜 힘이 뭔지 한 번 찾아 볼 생
각이에요."
율리스 대령은 여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라는 그 표정을 짓이
겨 주고 싶다는 충동을 견디느라 힘이 들었다.
"장군 진급 심사위원한테 뇌물이라도 주실 생각이신가요?"
"군대를 움직이는 힘은 군대 밖에서 찾아야 겠죠."
아이라의 비아냥거림에도 율리스 대령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럼 군 생활 그만 두시고 시장이라도 출마하실 건가요?"
"그것도 좋겠죠. 하여간 그 때가 되면 아이라 대위 같이 젊고 유능
한 인재가 많이 필요할 거라고 믿어요."
"젊고 유능한 인재가 저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는 게 다행입니다."
"음. 거기다가 아이라 대위처럼 당차면 더욱 좋겠군요."
아이라는 말대꾸를 하는 대신 거수 경례를 붙였다.
"조사관님 나가신다. 모셔 드려."
율리스 대령이 큰 소리로 외치자 사무실에서 대위 하나가 황급하게
뛰어왔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이라는 이렇게 경고를 해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M.I 사령부로 돌아오는 호버카에서 아이라는 내내 율리스 대령 앞
에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에 대해서 후회했다. 임무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로웰 중령의 말을 그 순간 완전히 잊었던 것이다. 아
이라는 수사관이었을 때 수사관의 임무에 충실했다. 지금은 MI의 조
사관이다. 그렇다면 M.I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주제넘은 짓을 했어."
"예?"
호버카 조종사가 놀랐는지 급정차를 하며 아이라에게 되물었다. 아
마도 아이라가 차에 오를 때부터 기분이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라의 혼잣말에 예민하게 반응한 모양
이었다. 호버카 조종사는 하사였다.
"그냥 가."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이
라는 손으로 린의 머리를 찾아 쓰다듬었다.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
다.
어떻게 보면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계속 그래왔는지 모르겠다 싶었
다. 사실 아이라가 로웰 중령을 따라 군 지원서에 서명을 하게 된 건
포레스트 회장의 영향이 컸다. 포레스트 회장은 힘으로 뭐든 할 수 있
다고 믿는 것 같았다. 아이라는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는 자신의 원칙
이 힘앞에 간단히 사라져 버리는 걸 경험했고, 그 결과 포레스트 회장
을 피해 군에 몸을 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군도 마찬가지였다.
간부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아이라는 힘 앞에 어쩔 수 없는 건 누
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임무에 충실
할 뿐이라는 데에 생각을 모았던 것이다.
계속 이렇게 가야만 하는 것일까.
아이라는 진짜 힘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했던 율리스 대령의 목소
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M.I 사령부 건물은 베가 시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베가 시는
해방 정부에 있는 수많은 도시 중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사령부로
향하는 번화가를 지나며 아이라는 도시 한 복판에 군부대를 짓기 위해
서는 얼마의 힘이 필요할까 생각해 보았다. 머리가 복잡해지니 예전에
는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는 모양이구나 싶었다. 아이라는 골치가 아
파 왔다.
사령부 건물은 12층 짜리 빌딩이었다. 아이라는 회색 빛으로 반짝이
고 있는 사령부의 외벽이 뭔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건물 앞
에 높이 솟아 있는 깃대도, 깃대에서 휘날리는 M.I의 깃발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사령부 건물 뒷편으로 연락선 한 척이 하늘을 날고 있
었다. 빛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연락선이지만 대기 중에서는 육안으
로 식별할 수 있었다. 기무사는 기무사 전용 연락선 부대를 직할대로
두고 있었고, 비행장도 가지고 있었다. 실제 기무사 업무에는 전혀 쓰
이지 않는 연락선이었지만, 어찌되었건 연락선이 없으면 행성 어스의
기무사령부로 연락을 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아이라는 린과 함께 사령부로 들어섰다. 정문을 통과 할 때 위병 근
무자들이 아이라의 호버카를 알아보고 경례를 붙였다.
호버카 조종사에게 주차해 놓고 대기하라고 지시 한 뒤, 아이라는
보안 검색대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이
속해 있는 기무사령부가 위치한 7층으로 오르는 동안 아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린의 머리만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뭐 좀 건졌어요?"
아이라가 기무사 내사반 사무실문을 열었을 때, 서류 정리를 하고
있던 로웰 중령이 아이라에게 물었다.
"아직까지는 그저 조사중입니다."
"형식이에요."
로웰 중령이 말했다.
"예?"
"그냥 형식이라고요. 생각해 봐요. 우리 보병 사단이 작전 중에 두
번이나 연속으로 매복에 걸렸는데 우리 중에 첩자가 있는지 없는지 한
번쯤 조사해 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무슨 수로? 군단과 사
단 간부 전체에 미행이라도 붙일까요?"
아이라 혼자서 군단과 사단에서 수색 계획에 대한 비밀문건을 열람
할 수 있는 간부에 대한 조사를 하는 데에도 며칠이 걸렸다. 미행 같
은 건 그야말로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였다. 누구든 마음대로 조사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기무사 내사반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했다. 비
용은 둘째 치더라도 그만한 인력을 운용하면서 보안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누군가 말했듯, 군대에서 비밀이라는 건 없다. 비밀을 아
는 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더욱 그러하고.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죠. 아이라가 기무사령관이라면 그
냥 두겠어요?"
"하지만 정말 해야 한다면 제대로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아이라는 이런 일에 고작 대위 한 명 달랑 투입시킨 사령부의 방침
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아이라 혼자가 아니라 보조로 린 중사가
딸려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되면 소문이 퍼질걸요? 우리 중에 첩자가 있다는 생각이 퍼
지게 되면 결국 아무도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장 사기가 떨어지죠. 그건 적이 가장 원하는 일일 걸요, 아마?"
그러면 가만히 놔두던가. 아이라는 속으로만 되뇌었다.
"이건 정치적인 일이에요. 악역이 필요한 아주 정치적인 임무죠. 아
이라. 우리는 악역이에요. 누군가 해야 하는 일. 더러운 일. 아무도 손
대기 싫어하는 일을 우리가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로웰 중령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꼭 어린아이
를 타이르는 부모 같은 웃음이었다. 아이라는 로웰 중령의 얼굴에서
율리스 대령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로웰 중령의 얼굴에는 권력이나 힘
따위의 욕망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작전 비밀문건에 접근할 수 있는 간부 명단은 구했죠?"
"예."
아이라가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로웰은 그 서류를 대충 한 번 훑어
보았다.
"어차피 이 일만 계속하고 있을 수도 없어요. 다른 일도 생겼거든
요."
로웰 중령은 아이라에게 미리 작성해 둔 보고서 양식을 내밀었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7
"그럼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짓는 건가요?"
"그렇죠. 여기서 끝이에요. 기무사령부 내사반에서 조사했지만 첩자
는 없었다고 보고하면 사령관도 납득하겠죠. 전쟁에 참가한 우리 군인
들도 충분히 납득할 거고요. 내가 다 만들어 놨어요. 한 번 훑어보고,
서명해서 결제 올려요."
아이라는 로웰 중령이 내민 보고서 양식을 훑어보았다. 아이라의 눈
에 가장 크게 들어오는 것은 '대적용의성 없음'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
이었다.
"너무 상심 말아요, 아이라."
로웰이 친절하게 말했다.
"진짜 일이 생기면 우리가 활약하게 될테니까요."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검토가 끝나고 결재가 막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로웰 중령은
다시 한 번 아이라를 불렀다. 아이라는 더 일이 없으면 퇴근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전우뉴스 알아요?"
"예. 소식지죠. 저도 가끔 읽어 봐요."
아이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화장실에서 정 읽을 것이 없으면 읽곤
하는 게 전우 뉴스였다. 상급부대에서는 포장지나 깔개로 요긴하게 쓰
이는 물건이었다.
"잘 안 읽죠?"
"그야..."
"그래도 야전에서는 꽤 읽을 만한 게 전우뉴스라고 하데요. 야전에
서는 좀처럼 읽을 걸 손에 들기가 힘들잖아요."
"예."
"우리는 당분간 이 쪽 업무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전우뉴스 일이요?"
로웰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공보처에서 하는 일 아닌가요?"
"공보처에서 만든 전우뉴스를 공보처에서 검열 할 수는 없잖아요?"
"검열이군요."
아이라가 탄식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예. 검열이에요. 공식적으론. 사실 지금까지는 공보처만 믿고 검열
을 안 했는데, 얼마 전에 기사 하나가 문제된 모양이더라구요. 봤는지
모르겠지만 탈영병 이야기를 뉴스로 다뤘죠."
아이라는 기억에 없는 기사였지만 굳이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전우뉴스는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없어지는 모양이에요. 작전계획
에 대한 이야기를 기사화 하질 않나, 일선 장병들이 읽으면 사기가 떨
어질 게 분명한 사망자 소식이나 탈영병 이야기를 기사화 하질 않
나..."
로웰 중령은 혀를 끌끌찼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을 좀 가지게 해 주자는 거지요. 아마 인력이
부족해서 민간 기자들을 소위 계급장 달아 줘 가지고 끌어들인 게 문
제가 된 모양이에요."
아이라는 내사반에서 민간인 출신 군 기자들의 신원조회를 맡았던
일을 기억했다. 아이라가 직접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기사를 미리 읽고 고쳐주는 일이에요. 공보
처 전우뉴스가 해야 할 본연의 임무 - 그러니까 사기진작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도록 돕는 일이죠."
"그러면 우리가 하던 일은요?"
아이라가 물었다.
"내사반에 충원이 있을 모양이에요."
로웰의 말에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표하기는 했지만
씁쓸한 마음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이라가 보람있어
할 만한 수사나 조사에 관련된 일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자. 그럼 일 시작합시다. 내일 기사화 될 내용이고, 18시까지 끝내
야 해요."
로웰 중령은 아이라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꽤 두꺼운 분량이었다.
"18시라고요?"
사무실의 시계는 16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것도 편집장한테 말해서 늦춘 거예요. 그것보다 늦어지면 내일
전우뉴스는 발행되지 못해요. 윤전기가 돌아가야 한다나 뭐라나."
아이라는 기운이 빠졌다.
"힘든 일 아니에요, 아이라. 세 가지 원칙만 잊지 않으면 되거든요."
"보안, 보안, 보안?"
아이라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로웰 중령은 헛웃음으로 아
이라의 미소를 받았다.
"승리, 승리의 예감, 승리의 기쁨. 이 세 가지 원칙에서 벗어나는 기
사는 이렇게 하면 되거든요."
로웰 중령은 들고 있던 기사에 붉은 색 팬으로 선을 죽 그었다. 기
사의 타이틀은 로윙 사단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의혹에 대한 것이었다.
"...클론 중화기 중대에서 살인이 일어 났네요."
"승리도 아니고, 승리의 예감도 아니고, 승리의 기쁨도 아니죠."
아이라는 붉은 색 선 밑으로 보이는 기사를 훑어보았다.
'...사단은 이 사건을 자살로 마무리하려 하고 있다. 클론 병사의 자
살은 지금까지 얼마든지 있어왔다는 게 사단의 주장이다. 그러나 아무
리 뛰어난 클론 병사의 힘이 뛰어나다고 해도 10cm 높이에서 떨어져
서 목뼈가 부러질 수는 없는 법이다...'
기사는 담담하게 사실을 나열하고 있다기 보다는 다분히 치기가 묻
어나는 문장이었다.
"아마 젊은 친구일 거예요."
"목뼈를 부러뜨렸으니 그럴 만 하죠. 사진이 있다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을텐데..."
"아이라?"
아이라는 로웰 중령이 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지 한동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로웰 중령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비로써 자
신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사를 검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기사를 쓴 친구는 젊은 친구일 거라고요."
로웰 중령이 친절하게 덧붙였다.
"어떻게 고치라고 할까요?"
아이라가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물었다. 아이라의 눈은 기사를 향해
있었다.
"사단의 입장을 반영하는 게 좋겠죠. 자살이라고 발표했으니 자살로
마무리하는 것도 좋고. 그 원인이 군에서 금지하고 있는 외출 시 매춘
여성과의 접촉에 의한 질병이나 뭐 그런 걸로 고치는 것도 좋겠죠."
아이라는 로웰 중령의 말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누군가가 자살
을 한다면 그 원인은 그런 데에 있지 않다는 건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살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동안 쌓이고 또 쌓이다가 한 순간에 폭발하는 것이
다. 뭔가가 쌓이는 원인은 다양하다. 가족. 사회. 범죄. 전쟁. 정치... 그
리고 그것이 터지는 순간은 거의 우연에 의한 것이다. 마침 라디오에
서 슬픈 곡이 나오고 있을 수도 있고, 마침 친구에게 모욕을 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요소와 자살의 관계는 북반구에서 허공을 날
고 있는 비둘기와 남반구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의 관계만큼이나
먼 것이다.
"왜요? 내 의견이 마음에 안들어요?"
"예."
아이라는 인상을 찌푸렸던 것에 대한 해명을 겸해서 이렇게 대꾸했
다.
"수사관의 견해인가요?"
"아뇨. 빼는 게 낫겠어요. 어떻게 고쳐도 원칙에는 부합되지 않거든
요. 승리, 승리의 예감, 승리의 기쁨."
"빨리 배우는 군요."
로웰 중령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건 이 기사를 쓴 친구는 틀림없이 젊은 친구일 거예요. 사실
이런 기사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메시지라고 할 수 있죠. 이 기사를
쓴 친구를 조사해 달라... 이런 메시지요. 아이라가 편집장이라면 그렇
지 않겠어요?"
"예..."
아이라는 로웰의 눈을 피했다. 아이라가 편집장이었다면 아이라는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사건을 수사했을 거였다. 아이라의 눈에 다른 기
사의 제목이 들어왔다.
"락벳 정통 정부의 민간인 학살 현장... 이건 어떻게 하죠?"
"참. 아까 말한 세 가지 원칙은 우리 쪽 이야기를 기사화 할 때의
원칙이에요. 적을 기사화 할 때의 원칙은 딱 하나죠. 적이 얼마나 사악
한가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 동정이나 정통 정부를 우리와 같은 인격
체로 보는 일 같은 건 금기. 이해하겠죠?"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열은 무더운 여름 날 방안에서 뒹굴고 있는 것만큼이나 지루했다.
게다가 방안에는 마실 물도 없는 경우와 비슷했다. 도무지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실은 아이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거나, 혹은 교과서에서 이미 몇 번은 봤음직한 교훈적인 이야기
뿐이었다. 아이라의 흥미를 끄는 것은 클론 병사의 이야기뿐이었다. 아
이라는 그 기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기사의 말미에 적혀 있는
것은 세론 소위라는 이름이었다.
"한 번 만나봐야 겠네요."
"세론 소위?"
로웰 중령이 막 검토하고 있던 대규모 작전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말고 대답했다.
"예. 대적용의점이 있는지 찾아 봐야죠."
아이라는 그나마 이런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는 수사가 하고 싶어요?"
"...그게 제 직업이었는 걸요."
아이라는 한탄조로 들리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높은 어조로 쾌활함
을 가장하여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라의 말이 허탈하게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로웰이 아이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조금만 참아요, 아이라."
아이라는 로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백의 로웰 중령은 의미심장
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장군들은 날 싫어해요. 중령씩이나 되어서 책상에서 하는 일은 싫
어하고 현장에서 뛰는 일만 하려고 하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나를
이런 곳에 두지는 않을 거에요. 파트너로 아이라도 있고 하니까..."
로웰 중령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저 단순히 아이라를 위로
하려는 것만은 아닌 게 틀림 없었다.
"이제 곧 아이라가 원하는 일을 하는 부서로 옮기게 될 거예요. 조
금만. 조금만 더 참아요. 나도 나름대로 애쓰고 있거든요."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잡담을 나누느라 시간을 낭비하기는 했지만, 아이라와 로웰은 마감
시간 전에 원고를 돌려 줄 수 있었다. 사실 검열해야 할 기사는 그렇
게 많지 않았다. 처음부터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를 발견했을 뿐, 다른
기사들은 온건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시간 나면 만나 봐요."
로웰 중령은 퇴근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세론 소위?"
"공보처는 알고 있죠? 군사령부에 있어요."
아이라는 대답대신 웃으며 자신의 대위 계급장을 가리켰고 로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고장난 클론처럼 미쳐 버릴지 모르겠어요,
아이라."
별로 우습지 않은 농담이었지만 아이라는 웃음으로 로웰 중령의 말
을 받았다.
퇴근을 마치고 아이라는 로스가 근무하고 있는 군사령부로 향했다.
군사령부는 M.I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보병 부대의 군사령부 건물
과 기무사령부 건물은 항상 붙어있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장군들은 그
렇게 해야 보안이 유지된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라는 위병 근무자에게 면회 신청을 하고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
렸다. 퇴근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아이라는 호버카를 타고 오지 않았
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라가 면회를 신청한 간부가 뛰어 내려왔
다.
"아이라 대위!"
로스였다. 아이라는 건성으로 로스에게 경례를 붙였다. 로스의 어깨
에는 소령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응. 그래. 루스 소령."
아이라는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로스에게 말했다. 로스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재미있어. 정말로. 1년 전에 한 약속에 대한 농담을 매일같이
들으니까 재미있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데?"
"내가 경위로 진급하지 못하면 이름을 루스로 바꾼다고 한 건 내가
아니라 로스 경사였다고."
아이라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로스가 다가오자 린이 로스에게 거수
경례를 붙였다. 그러자 로스는 정식으로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제대로
경례를 받았다.
"린. 많이 컸는데?"
"감사합니다, 소령 님."
린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병정 놀이를 하는 거라고 생각할지
도 몰라. 아이라는 이렇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어. 오늘은 데이트 어때?"
아이라는 대답대신 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셋이. 그래, 셋이 데이트하는 거야. 베가 시 유흥가에 내가 새로 찾
아 낸 음식점이 하나 있어. 대단히 깨끗하고 맛있는 곳이야. 거기다가
야경도 끝내준다고."
로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저녁 먹은 곳처럼 말이지?"
아이라는 짓궂게 물었다.
지난 번 로스와의 저녁식사는 아이라와 로스는 미성년자를 받지 않
으려는 주인과 한바탕 싸우는 것으로 시작해서, 공습경보가 울려 퍼지
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중간 중간 불친절한 웨이터와 몇 번이고 다퉈
야 했고 지나치게 짠 음식을 먹느라 몇 번이고 물을 다시 주문해야 했
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공습경보가 울리자 벙커로 대피해야 하느냐
아니면 즉시 부대로 복귀해야 하느냐를 놓고 다투었던 것에 비하면 아
무 것도 아니었다. 아이라는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로스는 간부가
살아 남는 것이 전투력을 보존하는 거라면서 아이라에게 지지 않았다.
둘이 싸우는 동안 공습경보는 끝이 나버려서 결론을 맺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정말로, 진짜로, 분명히 끝내주는 곳이야. 우리 참모가 자주
가는 곳인데, 음식도 어스 식으로 깨끗하게 나오고 종업원들도 교육을
많이 시킨다고 하더라고. 휴먼 레이스 말을 할 줄 아는 웨이터도 얼마
든지 있다고 하던데."
"그럼 비싸겠네?"
"응. 굉장히 비싸다고 들었어. 그런데 오늘은 로스 소령이 산다는
군."
로스가 해맑은 웃음과 함께 아이라에게 복음을 전했다. 아이라는 월
급날이 가까워 질 때면 늘 주머니가 가벼워지곤 했다.
"그럼 뭘 기다리는 거지?"
"내 전용 호버카."
로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대위에게는 지급되지 않지만 영관급 장교
에게는 개인 호버카와 조종사가 지급되었다. 대위의 호버카는 순전히
업무용으로만 쓸 수 있다. 아이라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위관급 장교와
영관급 장교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이윽고 로스 소령의 호버카가 도착했고, 로스 소령은 문을 열어 아
이라를 먼저 태웠다.
"소령님께서 대위에게 이렇게 지나친 친절을 베푸셔도 되는 건가
요?"
"M.I 기무사 내사반 간부에게는 이것도 모자라지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로스 소령이었다.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로스 소령이 안내한 식당은 지난 번 식
당보다는 깨끗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깨끗한 것은 아니었
다. 바닥에서 당장이라도 바퀴벌레가 튀어 나와야 정상일 것 같아 보
였고, 천장에서 거미라도 한 마리 떨어지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은 느
낌이었다.
"휴먼 레이스 말을 할 줄 안다던 웨이터는 어디로 간 거지?"
아이라가 정통 정부보다 오래 되었음직한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야..."
로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아이라와 제대로 된 식사를 단 한 번도 하
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 모양이었다.
"야경은 정말 좋은 걸."
아이라가 창 밖으로 보이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붉게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무엇인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시작되고 있다는 기분 때문일까.
"응. 정말 좋은데.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와! 저 빨간색 좀 봐. 꼭
커튼을 친 것 같네. 이제 금방 해가 지면 야경은 더 볼만 할 거야."
로스는 식당의 지저분한 정도를 만회해 보겠다는 듯이 주절주절 떠
들었다. 하지만 아이라는 별로 귀담아 듣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노을이 왜 붉은 빛인지 알아?"
"응. 노을이 붉은 빛인 이유는, 빛의 산란 때문인데..."
"로스."
아이라가 로스의 말을 막았다. 그러자 로스도 얼른 정색을 했다.
"원래 뭔가가 바뀌려면 피가 필요한 법이거든. 저건 하루가 바뀌는
데 필요한 하늘의 피야."
"지금 생각한 거야? 로스 소령 님?"
"응."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아이라는 종종 노을이 왜 붉은 빛이냐고 묻
곤 했고, 로스는 그 때마다 적당한 대답을 미리 준비해 오곤 했다. 한
번은 노을이 붉은 이유가 아이라의 미모에 반해서 붉어진 거라는 대답
을 했다가 아이라에게 하루 종일 놀림은 당한 적도 있었다.
"오늘은 좀 낫네. 형편없을 때가 훨씬 많더니."
아이라가 웃자 로스는 그 웃음 때문에 식당이 깨끗해지기라도 했다
는 듯 의기양양해 져서 웨이터를 불렀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8
"에... 그러니까... 고기 스테이크 세 장인데, 하나는 어린이 용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시커먼 얼굴의 락벳인 웨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은 걸까?"
아이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몰라. 하지만 내 락벳어 실력보다는 저 친구 휴먼 레이스 어 실력
이 낫겠지."
"이봐. 락벳에서 근무하려면 락벳어 쯤은 배워야 되는 거 아냐?"
"음.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나는 아이라 대위도 나처럼 군인이라
고 생각했는데."
"호버카로 출퇴근 하는 받는 군인하고 캡슐 타고 다니는 군인하고
같아 보여?"
"이봐. 내가 하는 일이 뭔지 다시 한 번 상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
는 여기 군사령부 인사과에서 우리 군 전체 간부들의 휴가와 월급, 월
차, 외박을 관리한다고. 거기다가 전사망자 통지에 탈영병까지. 그걸
종합해서 매일 병력 일보(日報)를 잡는 게 내 일이라, 이 말씀이야. 그
런데 이런 내가 락벳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있어?"
"응."
아이라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로스는 약이 오르는지 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아이라 쪽으로 몸을 숙였다.
"한 가지만 대봐."
"식당에서 주문할 때 필요해."
로스는 뭔가 대꾸할 말을 찾다가 포기해 버렸다. 그리곤 졌다는 신
호로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나름대로 귀여운 동작이기는
했지만 아이라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식사로 나
온 것은 잘 발라진 생선 요리와 아채 스프였기 때문이었다. 로스는 웨
이터에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웨이터는 아마도 로웰의 항의를 음
악이 시끄럽다고 알아들은 것 같았다.
"젠장. 여기 락벳 녀석들은 뭐가 불만인지 왜 이렇게 우리한테 적대
적인지 모르겠어. 우리는 이 녀석들을 도와주러 온 거잖아. 안그래?"
아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라가 생각하기에 전쟁이라는 건 도
와주고 도움을 받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건 힘과 힘
의 충돌이었고 물리적인 대립일 뿐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사사로운 감
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참. 아까 인사 이야기 해서 말인데, 우리 로웰 중령말야."
아이라는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군인들 사이
에서는 금기시 된 일이었다. 우리는 해방 정부를 돕는다. 정통 정부는
사악한 악마들의 집단이다. 이 생각에서 벗어나는 생각은 군인에게 결
코 허용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응. 잘 알지, 로웰 중령. 휴가 한 번도 안가는 걸로 유명하거든. 그
런데 왜?"
"장군들이 싫어한다던데. 왜 그렇지?"
아이라가 묻자 로웰은 발라진 생선살을 소스에 찍었다.
"그야 당연하지. 로웰 중령은 항상 현장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 타
잎이잖아."
"그건 나도 알아."
"그럼 한 번 생각해 봐. 사단장 하나를 제대로 키우는 데에는 최소
25년이 필요해. 연대장 한 명을 제대로 키우는 데에는 20년이 필요하
고. 그럼 중령을 제대로 키우는 데에는? 15년이 필요하다, 이 말씀이
야. 그런데 이 망할 놈의 전쟁은 진급을 빨리 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
물론 전투에서 살아남은 간부가 유능한 간부라면 할 말 없지만 말이
야."
"그래. 그렇게 해서 함량 미달의 간부들이 생길 수도 있지. 그런데
그게 로웰 중령하고 무슨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이 있지."
로스는 생선살을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로스가 생선살을 씹으며
맛있다고 말하는 통에 대화가 중단되었지만 아이라는 그 속셈을 잘 알
고 있었다. 로스는 여전히 식당이 지저분한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 거
였다.
"생각해 봐. 로웰 중령을 키우는 데에 군에서는 15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어. 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역량이 있는 간부가 된 거지. 그렇다
면 로웰 중령이 해야 할 일은? M.I 간부니까, 예를 들자면 너 같은 수
사관들을 십 수명씩 부리면서 사건을 지휘하는 일이란 말이야. 그런데
로웰 중령은 자꾸 현장으로 나가려고만 해. 아이라 대위 같은 간부와
똑같은 일을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되면 15년을 투자한 간부가 1년
된 간부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어?"
아이라는 린을 바라보았다. 린은 스프를 먹고 있었는데 맛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렇군."
아이라는 로웰 중령이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는 게 싫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것이 군에서 로웰에게 원하는
건 아니라고 결론을 지을 수 있었다.
잠시 식사 때문에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이런. 용병들이다."
로스가 대화를 시작했다. 아이라는 로스가 턱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
을 바라보았다. 식당의 입구로 한 무리의 랩타일 레이스가 들어서고
있었다. 아마도 소대 휴가나 소대 외박이라도 얻은 모양이었다. 웨이터
와 사장이 랩타일 레이스를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단체로 뭉친 군인은 위험하다. 특히 소대 휴가나 소대 외박을 나온
랩타일 레이스라면 더욱 그럴 거였다. 랩타일 레이스는 날이 샐 때까
지 술을 마시곤 했고, 마지막에는 술을 더 달라며 행패를 부리기 일쑤
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직 근무를 서고 있는 랩타일 레이스 M.P
가 출동할 때까지 식당은 엉망이 되곤 한다. 랩타일 레이스가 행패를
부리면 랩타일 레이스 M.P가 막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휴먼 레이스 M.P가 랩타일 레이스 용병을 막을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이라가 알고 있는 그 어떠한 생명체도 무기 없
이 랩타일 레이스를 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다.
"저 용병들은 간부로 써먹을 수 없겠지? 만약 그렇다면 로웰 중령이
좀 덜 미움을 받을 텐데 안됐어."
아이라가 랩타일 레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랩타일 레이스 중 하나
가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웨이터도 사정도 랩타
일 레이스의 언어 실력이 휴먼 레이스 언어 실력보다 나을 건 없어 보
였다.
"그럴 수 있었다면 클론 간부 같은 건 왜 만들었겠어?"
"하긴."
아이라는 전쟁에 뛰어든 다음에게 클론이 군대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유능한 간부로 인정받고 계급이 올라가면, 그
간부는 의무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제출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그 간
부와 비슷한 자질의 간부 100명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
단 클론으로 키워지는 간부는 훈장과 함께 동시에 진급에 있어서 유리
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들 100명을 얻는 충격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참. 로윙 사단에서 클론 병사가 하나 죽었다면서."
"로윙 사단 8연대 1대대 4중대 중화기 중대 일병 클론 4호."
아이라의 물음에 로스가 바로 대답했다.
"그걸 다 외우는 거야?"
"전사망자 서류에 몇 번이나 로윙 사단 8연대 1대대 4중대 중화기
중대 일병 클론 4호라고 써야 하는지 알면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야."
로스가 말했다.
"클론소대는 원래부터 말이 많은 소대였어. 예전에 클론 사단 하나
가 몽땅 탈영해 버린 일도 있고. 생각해 봐. 100명이 넘는 쌍둥이가 어
려서부터 함께 공부한다고 말이야. 너 같으면 어떨 거 같아?"
"글쎄. 형제가 99명 있으면 외롭지는 않겠지."
아이라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로스는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
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자 둘 사이에 긴장도 사라졌다.
"클론 군인에 대해서는 사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
어. 클론들이 하나로 뭉쳐 있으면 사고가 생긴다는 건 정설이지만, 그
이유는 명백하질 않아. 그래서 사고를 막기 위해 클론들을 소대에 한
명씩 배치하곤 하지만 과연 그래서 사고를 치지 않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 알 게 뭐야? 열 쌍둥이가 한 자리에 모이면 하나가 각각 열
개의 인격으로 분리되는지."
아이라는 사무실에서 읽었던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를 떠올리고 있었
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클론 병사의 목뼈를 부러뜨리는 광경을 상상
하고 있자니 등줄기를 따라서 소름이 돋았다. 분명 자살은 아닐 거야.
정말 자살이었다면 기자가 의혹을 느꼈을리 없어. 만약 현장을 볼 수
만 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텐데.
"아이라?"
로스가 아이라의 생각을 멈추었다. 아이라는 꽤 긴 시간동안 멍하니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선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나봐?"
"아니. 전혀. 그냥 도대체 어떤 미친 놈이 클론을 전쟁에 쓸 생각을
했을까 싶어서."
"글쎄. 어떤 미친 전쟁이 클론을 필요로 한 거 아닐까?"
로스는 자신의 말이 농담이라는 걸 강조라도 하려는 듯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인간 복제 기술이 발달되기 시작했을 때, 모두들 윤리니 인간의 존
엄성이니 하면서 반대를 했다고 해. 하지만 최종전쟁은 윤리나 인간의
존엄성 같은 거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였지. 전쟁이라는 게 원
래 그렇지만 말이야..."
아이라는 긍정했다.
"사실 클론 기술은 셔틀 조종사나 간부 때문에 생겼다고 들었어. 셔
틀 조종사나 간부는 선천적인 자질이 더 중요하니까 보통의 군인 중에
서는 100명에 하나, 20명에 하나 꼴로 얻을 수 있지만 클론 기술을 사
용하면 필요한 만큼의 셔틀 조종사와 간부를 키울 수 있잖아. 뭐, 지금
이야 힘세고 전투 잘하는 병사도 클론으로 키우고 있지만."
아이라는 랩타일 레이스 용병이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 랩타일 레이스는 모두 클론일까? 물론 아
닐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랩타일 레이스는 휴먼 레이스 부대가 모
두 클론 소대처럼 보일 거였다.
"클론 소대가 전투에 유용하다고 간부학교에서는 그러던데. 인사과
에서 근무하는 영관급 장교가 볼 때는 어때?"
"아직 실험단계지, 뭐. 네가 말한 로윙 사단 8연대 1대대 4중대 중화
기 중대 일병 클론 4호 사건처럼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
는 거야. 하긴. 우리가 걱정 안해도 알아서들 잘 하고 있겠지. 지금도
어디선가는 클론 실험이 한창일 걸?"
"그래. 나도 부자들이 자신의 클론을 키운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어.
불법으로 되어 있기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저택의 화장실 변기 뚜껑
을 열면 그 뒤에 클론을 키우고 있는 공장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가
있는지."
둘은 함께 웃었다.
"그래. 그런 농담 들어 본 적 있어? 팔 잘린 부자가 클론의 팔 이식
받는 이야기 말이야."
"클론한테 맹장을 떼어 주는 이야기? 이거, 로스답지 않은데? 진부
해. 진부한 농담이야."
아이라가 혀를 끌끌 차자 로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귓불까지
빨게 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이라는 로스가 꽤 귀엽다고 느껴졌
다.
"나는 휴먼 레이스가 존엄하다고 믿어."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로스가 말했다.
"클론이건 아니건 말이야. 사고할 수 있는 생명체라면 누구나 존엄
한 거야. 그 가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거지."
군인이 저런 말을 하다니. 낯이 뜨거워 질만도 하지.
"그래?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라면 전쟁
도 없을 테니까."
아이라가 비아냥거렸다.
"뭐야? 실업자가 꿈이었던 거야?"
로스는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 얼른 아이라의 말에 꼬리를 달았
다.
"설마."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다시 한 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린이 먼저 스프를 비웠고, 생선 요
리도 접시와 장식용 야채만을 남기고 아이라와 로스의 뱃속으로 사라
져버렸다.
"너도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입을 닦으며 아이라가 물었다.
"힘? 무슨 힘?"
"진짜 힘..."
아이라는 말끝을 흐렸다. 한 참 동안 잊고 있던 율리스 대령의 목소
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듯 했다.
"정치 이야기라면 나중에 하자."
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왜? 야경이 좋다더니."
로스는 대답대신 랩타일 레이스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쪽을 가리켰
다. 랩타일 레이스들은 본격적으로 술을 퍼마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 소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오늘 잘 먹었어. 그런데, 비싼 돈 내고 너무 금방 나오는 거 아닌가
몰라."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 아이라가 로스에게 물었다.
"별로 비싼 곳 아니야. 이런. 비싸다고 했었지? 이것 참. 들켜 버렸
네."
아이라는 웃음을 지었다.
"군인 월급이 다 똑같지, 뭐. 이해해."
어느 새 꽤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베가
시는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야간통행제한 제도 때문에 보이는 건 군
용 호버카와 허가를 받은 몇 몇 락벳인 뿐이었다. 아이라와 린은 로스
가 조종사와 함께 호버카를 몰고 오는 것을 기다렸다.
"아가씨. 지금부터 드라이브 할 건데, 안 탈래요?"
로스가 창문을 내리고 이렇게 말했다. 식당 앞에 서 있던 몇몇 휴먼
레이스 군인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군용 호버카를 탄, 군인 복
장을 하고 있는 휴먼 레이스가 할만한 장난은 아니었지만 식당 앞의
휴먼 레이스는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솔깃한 제안이긴 한데."
아이라는 이렇게 대충 맞장구를 친 다음, 망설이지도 않고 얼른 호
버카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아이라는 로스의 가슴을 팔꿈치로 쳤다.
"하극상이야, 이건."
로스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아이라는 진짜로 세게 쳤던 것이다.
"그래? 그러면 땅에 떨어진 영관급 장교의 명예는 어떻게 할 건데?"
"땅에 떨어질 명예가 나한테 있었을까? 있었다면 아까 다 버린 걸로
하지."
아이라는 흥,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코방귀를 뀌었다.
호버카는 아이라와 린의 숙소인 B.O.Q(Bachelor Officers' Quarters,
독신 간부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로스도 B.O.Q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이라와는 떨어진 곳이었다.
"할 말 있어."
아이라의 B.O.Q가 가까워졌을 무렵, 로스가 말했다. 아이라는 로스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로스는 태연한 척을 할 때의 어색한 표정을 하
고 있었다. 아이라는 웃음이 나왔지만 웃을 수는 없었다. 로스가 바로
말을 이었던 것이다.
"우리, 결혼할까?"
아이라는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 다
시 한 번 말해 볼래? 같은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아이라는 냉정을 되찾자마자 로스에게 되물었다.
"음. 그렇게 하면 뭐가 좋아지는데?"
아이라 나름대로 로스의 말을 농담으로 흘리려는 시도였다.
"...영관급 남편을 두면 말이야, 아침에 매일 호버카로 출근할 수 있
어."
로스역시 농담처럼 아이라의 말을 받았다. 이 농담 때문에 아이라는
로스의 청혼이 진심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 그것 뿐이야?"
그래서 아이라는 이렇게 농담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로스는 잠시 머
뭇거리다가 포기한 듯 아이라의 농담을 받았다.
"거기다가 간부끼리 결혼하면 일주일간 행성 어스로 휴가를 가게 된
다고."
"일주일이라. 일생을 걸 판단의 대가치고는 너무 약한데."
아이라는 린을 바라보았다. 린은 둘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
다. 아이라는 린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린은 황급히 머리를 매만졌
다.
"린. 소령님한테 아빠, 라고 한 번 불러 볼래?"
"아빠."
린이 말하자 로스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네가 린 아빠라면 나는 린 이모야."
아이라는 린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곤 로스에게 웃음을 지어 주었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호버카 조종사도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로스."
아이라가 B.O.Q 앞에서 내리며 말했다.
"생각해 볼 거지?"
로스가 호버카에서 내려 B.O.Q 입구까지 아이라를 데려다 주면서
말했다.
"응. 다음 번에도 그런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면 같이 식사하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아이라가 웃으며 말했다. 로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뭐라
고 말하려고 했다가 그만 두는 눈치였다. 로스는 린을 향해서 손을 한
번 흔들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호버카에 올랐다.
사라져가는 호버카를 바라보며, 아이라는 로스의 진심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로스가 바람둥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락벳에 와서도 그
버릇이 고쳐진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 하사관들과의 난잡한 소문같은
건 얼마든지 들었다. 소문이 완전히 사실은 아니라고 해도 그 비슷한
일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스라면 얼마든지 그럴만한 휴먼 레이스
라고 아이라는 판단하고 있었다.
소유욕일 거야.
아이라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로스는 손을 뻗으면 어떤 여자 건
다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라는 손을 아무리 뻗어도 잡히지 않았
다. 그것 때문이겠지. 결혼이라니. 말도 안돼.
"이제 잘 거야?"
린이 아이라에게 물었다.
"너는 현실주의자구나."
"응?"
린이 통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서 아이라에게 물었다. 아이라는 대답
대신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기로 했다. 씻고. 잠을 청하고. 내
일을 위해서 푹 쉬는 거야. 어차피 일이라고 해 봐야 신문이나 들쳐보
게 되겠지만. 언제 시간 내서 공보처에 한 번 들러야지. 같이 일하는
데 얼굴이나 봐 두면 좋잖아? 참. 그 기자도 만나 봐야지. 세론 소위라
고 했던가?
B.O.Q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