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지원병 - 2
미린 시의 뒷골목. 시민들이 분주하게 대낮의 태양을 받으며 일하는
동안 잠들어 있는 곳. 해방정부군의 자료에 따른다면 이곳은 공장의
창고지대였고, 농민 기숙사가 모여있는 곳이었고, 특이한 점이라곤 찾
아 볼 수 없는 한 지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곳 범죄 발생률이 다른
시의 뒷골목, 특히 해방정부 지역의 범죄율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곳에 정통 정부군의 병영이 갖추어져 있다는 걸 눈
치 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통정부군의 연락선이 미린 시위를 수도
없이 비행하고 있었지만 그 연락선 중 단 한 척도 그런 낌새를 눈치챈
적은 없었다.
미린 시는 오래 전부터 두 가지로 유명했다. 하나는 농업도시로, 또
하나는 훌륭한 군인을 많이 배출하는 도시로. 이곳 출신 장군들은 밤
하늘의 별 만큼은 되지 않아도 천문관에 장식용 별만큼은 있었고, 이
곳 출신 병사들의 명성은 그 용맹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만약 미린 시 뒷골목 지하 훈련소에서 그 악명 높은 정통 정부군 게
릴라가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해방 정부군은 이곳에 집중
포화를 몇 번이고 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건 별
의미 없는 일이 될 게 분명했다. 여기 지하 벙커는 지금까지 어떠한
폭격에도 끄떡없었던 철벽보다 단단한 갑주를 갖춘 괴물이었다.
지하 훈련소에 한 무리의 병사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훈련소의 훈
련병들도 아니고, 물론 정통 정부군의 정예 병사도 아니다. 이들은 모
두 하전사에서 한 번도 진급을 하지 못했거나 하전사로 강등 당했다.
이들은 하전사라는 계급만 있을 뿐, 편제에서도 제외되어 있는 정통
정부군의 수치라 일컬어진다.
지하 훈련소에 모여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해
서 퀭해진 눈을 하고있다. 어깨는 축 쳐져 있고, 누가 보아도 주눅이
들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는 태도다. 간혹 가슴을 펴고 있는 병사들
도 어딘지 불안정해 보인다.
호야미는 그 사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손에 들고 있는 니들건도, 바닥에 놓여 있는 해방폭탄도, 모두
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군에 입대한 이후 늘 그랬는지도 몰랐
다.
"호야미 하전사!"
중대장이 소리를 친다. 호야미는 얼른 허리를 곧추 세웠다.
"군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버리겠다는 건가?"
중대장은 지화란 참위였다. 호야미는 지화란 참위에게 '나는 이 것
밖에 안됩니다'하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군화발이 날
아들 것이 뻔했다.
"이 새끼가, 대답이 없어!"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화란 참위의 군화발이 호야미에게
날아들었고, 호야미는 몸을 웅크리고 등으로 군화발을 방어해야 했다.
두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 몸은 최대한 웅크린다. 옆구리를 차지 않
기만을 빌며. 호야미는 예전에 옆구리를 잘못 맞아 의무대로 후송을
간 적도 있었다. 지화란 참위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발
뒤꿈치를 이용해서 등을 찍기만 했다. 물론 고통스럽기야 했지만 옆구
리를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기상!"
이윽고 군화발이 멈추고, 호야미는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지화란 참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호야미를 바라본다.
"너, 지원병이지?"
지화란 참위가 호야미의 턱을 만지며 묻는다.
"예, 그렇습니다!"
"입대한지는 3년 되었고.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어이, 거기 하전사."
지화란 참위가 다른 병사를 부른다.
"옛! 하전사 미루!"
미루는 키가 훌쩍 큰 여성 하전사였다. 씻지 못해 시커매진 피부와
완전히 민 머리 때문에 여성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걷어올린 옷소매 밖으로 노출된 미루의 팔뚝은 굵기가 남성과
비교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훈련병 딱지를 떼면 무슨 계급을 받지?"
"옛! 하전사 계급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초급전사, 중급전사, 상급전사 계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사관, 중사관, 상사관, 원사관의 하사관 계급을 받습니다!"
"흠. 그리고 나면?"
"소위, 부위, 참위의 위관 계급을 받습니다!"
"훈련소에서 나온지 3년이 되면 무슨 계급을 받게 되는지 아나?"
"...모두 다릅니다!"
미루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머뭇거린다는 건 군화발이
날아드는 걸 의미했다. 어이없게도 미루는 호야미의 눈치를 살피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군화발은 날아들지 않았다.
"여기 모인 쓰레기들은 말이지, 하나같이 입대한지 1년 이상이 지났
음에도 불구하고 하전사 계급장을 달고 있다. 한 마디로 정통 정부군
의 수치라고 할 수 있지. 아. 물론 탈영하다 붙잡혀서 하전사로 강등된
친구도 있지. 안그래?"
지화란 참위는 병사들 중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 병사의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고개 숙이지 말랬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병사에게 날아간 것은 군화발이었다. 병사는
정강이를 감싸며 몸을 숙였다. 하지만 지화란 참위의 매서운 눈길이
한 번 닿자 병사의 허리는 곧추세워졌다. 다만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
정은 그대로였지만.
호야미는 그 순간 찔끔 오줌을 쌀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지금 들
고 있는 니들건에 탄만 있었다면 자신의 머리를 쏘았을지도 모를 만큼
의 공포였다. 하지만 호야미는 그렇게 하지 못할 거였다. 그러기에 호
야미는 너무나도 나약했다.
"그러니까 탈영이나 하는 거지."
지화란 참위가 고통스러운 얼굴의 병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이제 곧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니까 말이
야."
지화란 참위는 이렇게 말하며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병사들은 모두
가 부동자세를 하고서 참위 앞에 섰다. 어두운 방을 밝히는 단 하나뿐
인 조명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전력 공급이 원활치 않은 모양이었다.
"너희들을 어떻게 정통 정부군의 정예 용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
하. 너희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겠지? 우리는 원래 이래요... 우리는 형
편없는 쓰레기예요..."
지화란 참위는 우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참위의 목소리가
방안에 모든 소리를 잡아먹었는지 방은 온통 고요했다. 누군가 땀방울
을 떨어뜨린다면 그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정통 정부의 수치! 낙오자! 쓰레기!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그리
고 이제 우리 정통 정부는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참위는 바닥에 놓여 있는 시커먼 상자를 집어들었다.
"이건 해방폭탄이다. 해방정부 녀석들에게 주는 우리 정통정부가 마
련한 소중한 선물이지. 이 안에는 400개의 니들탄이 들어있다. 여기 있
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한 순간에 사방으로 니들탄이 날아가게 된
다. 니들탄이 날아가는 위력은 니들건에 비해서 매우 약하다. 다시 말
해서 녀석들이 가까운 곳까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하지."
참위는 미소를 지었다. 뱀의 그것과도 같은 싸늘한 미소였다.
"알고 있겠지만, 너희들은 하나같이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
다. 이대로 군 생활을 하다가는 가족들에게 큰 피해가 갈 수밖에 없지.
낙오자의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배급도 없고, 주변에서는 지금
너희들이 당하는 것 보다 더한 손가락질이 가해진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참위는 자신의 말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
해 그 침묵을 오랫동안 끌었다. 만약 이 자리에 트랜서가 있었다면 지
금 이 순간 이들이 느끼고 있을 절망 때문에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리
라.
"너희들은 하나같이 예전에 사형을 당했어야 할 존재들이다. 탈영.
군수품 절도. 작전 실패. 경계근무 실패. 그리고 배신!"
마지막 부분에서 참위는 호야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호야미는 분
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배신이 아니었어! 그건 배신이
아니었단 말이야! 나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야! 호야미는 이렇게 항
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참위는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해방군에게 주는 선물일 뿐만 아니라, 너희들에게 베푸는 우
리 정통 정부의 마지막 선물이다."
참위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몇몇이 울음을 터트렸다. 호야미는 울지 않았다. 울고 싶은 마음
도 없었다. 그저 이 모든 일들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호야
미는 미루를 바라보았다. 미루 역시 울지 않고 있었다.
미루가 고개를 돌렸다. 한 순간 호야미는 미루와 눈이 마주쳤다. 미
루의 눈동자는 마치 허공을 응시하는 듯 했다. 호야미는 그 눈이 어떤
눈인지 알고 있었다. 완전한 절망. 더할 나위 없는 공포. 끝없는 슬픔.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 보이는 눈. 탄약이 떨어졌을 때 보이는 눈. 포
위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보이는 눈. 항복 할
수 없다는 소대장의 말을 들었을 때 보이는 눈...
호야미는 문득 미소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인지 몰랐다.
"제군들. 오늘은 푹 쉬어라. 그리고 내일부터 우리는 매복 작전에 들
어가게 된다. 내가 이 작전을 총괄하게 된다. 제군들. 이 해방폭탄을
받아드는 순간, 제군들은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귀관의 가족들은 명예
훈장을 수여 받을 것이며 배급도 끊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지화란 참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마치 백정이 소를 잡기 전
마지막에 소를 어르듯이. 하지만 소는 그 순간에 백정에게 목을 내 맡
길 수밖에 없고, 병사들 역시 그 따스함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떤
죄를 지었건, 그 죄를 지은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군의 따스함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호야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 눈물을 흘린다
면 지금까지 가해진 모든 무자비한 폭력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았
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럴 수는... 호야미는 다시 한 번 미
루와 눈이 마주쳤다. 미루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호
야미는 미루의 눈을 피했다.
"제군들! 이제 모든 과오는 씻겨지게 되었다!"
지화란 참위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듣는다면
피가 끓어오를 만한 음성이었다.
"이제, 우리는 결의문을 낭독한다. 이것으로 제군들의 모든 과거는
잊혀지고 영웅으로의 미래만 남게 될 것이다."
참위는 미루를 지목했다. 미루는 관등성명을 대며 빠른 동작으로 참
위에게 다가갔다.
"읽어."
참위가 내민 것은 조악하게 인쇄 된 결의문이었다. 미루는 머뭇거리
지 않고 그 결의문을 받아 들었다. 결의문의 내용은 참위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미루는 그 전단을
울먹이는 목소리로 읽어 나갔고, 한 줄 한 줄을 복창하던 병사들도 어
느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병사들의 군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
었다.
그날 밤이었다.
좁은 방 안에 여덟 명의 병사들이 누워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늘과 같은 잠자리였지만 병사들의 마음은 예전과 달
랐다. 그도 그럴 것이 대우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우선 빵과 물만 나
오던 저녁 식사가 구운 고기와 과일주로 바뀌었다. 사소한 일로 꼬투
리를 잡아 한 두 시간 정도 땀을 흘려야 했던 점오 시간은 그저 인원
점검으로 끝이 났다. 소등 후에 암묵적으로 가해지던 간부들의 구타도
전혀 없었다. 아무 소리 없이 소등으로 시작되던 취침 시간도, 취침 나
팔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취침 나팔소리가 울리자, 몇 몇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상징적으로, 그들의 명예는 회복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야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죽는 구나. 죽
이기 전에 소에게 잘 먹이는 백정과 뭐가 다르랴 싶었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그저 호야미의 허영심일 뿐이었다. 실제로 식단이 고기와 과일
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호야미도 눈물을 참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떠한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감동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라고 해도, 그것이 오랫동안 누릴 수 없었던 것이라면, 그
권리를 찾는 순간 인격체는 누구나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누릴
수 없었던 이유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호야미..."
어둠 저편에서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호야미를 부른다. 호야미
는 멀쩡한 정신이었고 졸음도 오지 않았지만 자신이 혹시 꿈이라도 꾸
고 있는가 싶어졌다. 하긴 누가 잠을 청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잠을
눈앞에 두고서.
"호야미... 자?"
어둠 속에서 여자의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미루였다.
"미...루?"
"응."
둘의 목소리는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지만 호야미는 그 소
리가 방안을 온통 울리는 듯 해서 더욱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지 알겠어?"
뻔한 이야기를 왜 묻는지, 호야미는 어렴풋하게 나마 짐작할 수 있
었다. 미루는 불안한 감정을 나누고 싶은 거였다. 지금부터 모두가 함
께 겪게 될 운명을. 해방군에게 주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선물을 안
고 죽어가야 할 운명을 함께 한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거였다.
"죽는 거야."
호야미는 무뚝뚝하게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호야미는 자신의 목
소리가 방안을 온통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호야미는 어쩌다가 여기 왔어?"
미루의 물음에 호야미는 떠올리기 싫은 광경을 떠올리고 말았다.
정글. 포위된 상황. 사방에서 간헐적으로 되풀이되는 해방군의 사격.
그 때 마다 하나 둘 몸이 터져 나가며 살해되는 동료의 모습. 소대장
은 이윽고 결단을 내린다 - 그러고 보니 소대장이 시밍 부위였던가,
리밍 부위였던가.
항복하면우리에게는불명예와치욕만있을것이고끝까지싸운다면우리에
게는영광과명예가함께할것이다...
부위의 말이 끝나고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적들을 향해 맨몸을 내
던진다. 터지는 살점, 끊어지는 팔과 다리. 호야미는 몸을 숙인다. 그리
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우의 등뒤에 숨는다. 폭발음. 뒤집어쓴 핏
물. 이윽고 포로...
"항복했어."
호야미는 무뚝뚝하게 다시 한 번 대꾸했다. 그 순간 호야미는 화들
짝 놀랐다. 어둠 속에서 미루의 손이 닿았던 것이다. 호야미는 아무 말
도 하지 않는다. 미루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울고... 있는 거야?"
호야미가 물었다.
"아니. 아냐."
어둠 속이었지만 호야미는 미루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난 말야, 스나이퍼였어."
미루가 말했다.
"정글에서 매복해 있다가 해방군이 지나가면 해방군을 멈추는 역할
을 했지. 나, 훈장도 받은 적 있어. 진짜 훈장.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먼저 제일 앞에 있는 녀석을 쏴서 쓰러뜨려. 될 수 있으면 다리를 쏴
야 해. 그것도 꼭 한 발만. 왜 다리를 쏘는지 알아?"
"훈련소에서 지겹게 배웠어. '가슴이나 머리를 쏴서 죽이면 죽은 자
리는 금새 신병으로 채워지고 남은 동료들에게는 분노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다리나 팔이 불구가 되면 동료들은 그를 살리기 위해 행군 속
도를 늦출 것이고, 의료품을 소모할 것이고, 결정적으로 동료의 마음에
는 깊은 공포심이 남게 된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지만 미루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을 내었
다.
"호야미, 무뚝뚝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농담도 곧잘 하네?"
칭찬이랄 수 없는 말이긴 했지만 미루는 이 말에 우쭐해졌다.
"하여간 그렇게 하면 나머지들은 돌이나 나무 뒤로 숨게 되지. 그러
면 나는 무전으로 동료들을 부르고 기다리는 거야. 한없이. 녀석들은
내가 한 방 쏘고 나면 절대 고개도 못 내밀어. 아주 오랫동안 말이야.
동료들이 올 때까지 시간은 어떻게 버는지 알아? 한발. 꼭 한 발씩이
야. 다시 다리나 팔에 쏘는 거야. 니들탄에 맞은 녀석은 고래고래 비명
을 지르고, 동료들은 그 때부터 절대로 머리카락 한 올도 내밀지 않아.
우습지? 가끔씩은 말이야, 동료들이 쓰러진 동료를 쏘기도 해. 고통 없
이 머리나 가슴을 한 방에 날려 버리지. 하지만 그리고 나서도 결코
머리를 내밀지는 않아."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멀리서 빛나는 작은
취침등 만으로 병사의 눈물은 보석보다 밝게 빛난다. 호야미는 그 눈
물에 취해서 자신도 울고 싶어지는 심정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12
"그런데 어느 날, 나 어린 병사를 쐈어. 내 동생만큼 어린 애였어.
내 동생. 동생도 지금쯤 어디선가 군생활을 하고 있을 텐데. 그 어린
애, 나를 보고 있었어. 나는 스코프를 통해 입모양을 보고 알 수 있었
어. 살려 달라고 하고 있었어. 제발 살려달라고 하고 있었어. 두 팔과
두 다리를 잃고서도 말이야. 나, 나, 더 이상 쏠 수가 없었어. 비명을
지르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래서 말이
야..."
호야미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귀를 막는다고 해도 미루의 말
을 듣지 않을 수는 없을 거였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닫을 수
없다.
"그리고 나서 나는 스나이핑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녀석들은 내 동
료들을 발견했고. 모조리 죽었어. 전멸해 버렸어."
다시 한 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군법재판에 회부됐어. 당연하지만 사형은 받지 않았어. 나, 훈
장도 받은 모범 군인이었거든. 영웅이었어. 스나이퍼 심볼을 차고 있었
단 말이야."
"그만 해."
호야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무뚝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감추어두었던 호야미의 감정은 주체하기 힘
들만큼 강렬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 이번 작전이 끝나면 훈장도 돌려 받을 수 있다고 했어. 가족들
에게는 영웅으로 죽었다고 이야기 해 준다고 했어. 배급도 제대로 줄
거고, 내 동생, 내 동생도 경력에 흠집이 생기지 않게 해 준다고 했
어..."
미루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말을 멈추면 죽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투였다. 미루는 비록 말하지 않았지만, 미루의 훈장은 가족들
에게 전해질 거였다.
"너는?"
미루가 물었다. 미루의 마음은 간단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니
나도 너의 말을 들어 주겠다. 하지만 호야미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포로가 되어 해방정부군에게 끌려 다녔던 기억. 끊임없이 이어
지던 심문. 유창하게 락벳어를 구사하던 용병의 모습. 육체적인 고문보
다 더 고통스러웠던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 그리고 정통정부군의 기
습과 구출...
호야미는 구출 당한 뒤의 기억이 더욱 괴로웠다. 적에게 심문 당하
는 것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군의 심문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을 말했는가? 얼마나 말했는가? 소위
'손실보고'를 위한 아군의 심문은 강제 최면으로 이어졌다.
보통의 경우, 최면술사에게 경계심을 가지게 되면 절대 최면에 걸리
지 않는다. 하지만 약물과 조명을 이용해서 가해지는 강제 최면은 자
신의 정신이 파괴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었다. 아마도 미루가 보이고 있는 지금의 불안정한 모습도 강제최면의
후유증일지 모른다.
"미루. 너도 강제 최면으로 심문 당했지?"
호야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미루에게 물었다. 미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죄를 지었어."
미루가 말했다.
"동생을 죽였고, 아군을 배신했어."
두 죄는 정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호야미는 미루가 두 가지
중 어떤 것에 더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벌을 받는 거야. 나는... 내 죄는... 사해질 거야. 훈
장. 그래, 훈장처럼 말이야. 내 죄는 사해져서 내 가족들은 말이지..."
미루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호야미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
지만 미루의 목소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호야미는 미루의 목소리
너머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호야미는
그 소리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면 미루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
겠다 싶었던 것이다.
흐느끼는 소리는 방 전체에 전염되었다. 누군가 크게 통곡을 시작하
자 나머지들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울음을 터트렸다. 호야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호야미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호야미는 마음 한 구석 텅 빈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보석보다 빛이
난다고 한들 이제 곧 죽어버릴 자의 눈물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아침이 밝자 이제는 명예가 회복된 병사들이 지하 병영에 집합했다.
지화란 참위는 창문을 열어 병사들에게 따사로운 햇살을 비추어 준다.
지금까지 항상 어둠 속에서 일조점호행사를 치렀던 것과는 대조적이었
다. 아마도 오늘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한 행동이겠지만, 호야미는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 치러졌던 점호
행사의 진의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 기합도, 구타도 없었다. 인원점검을 마친 지화란 참위
는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덤덤한 표정을 하고서 병사들을 바라보았
다.
"기운들 내게, 제군들."
만약 며칠 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환청이 아닐까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을 거였다. 인격체로의 대우를 받는 말을 들은 병사들의
가슴에는 뜨거운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누군가를 시작으로 다
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호야미는 이제 이런 눈물이 지겨웠다. 누
구를 위한 눈물인가. 무엇을 위한 눈물인가. 어쩌면 저 눈물은 그저 자
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려는 스스로의 나약한 감정의 결과물인 것도 같
았다.
"제군에게 영광을."
지화란 참위는 검은 상자를 나누어주면서 병사 하나하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들 감격에 겨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들을 하면서 상자를
받아들었지만 호야미는 달랐다. 이 모든 일들이 미친 짓처럼만 여겨졌
다. 죽으러 가는 길에 고작 네 녀석이 할 수 있는 게 이거냐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지화란 참위의 앞에 서게 되고, 상
자를 받아들게 되자 호야미 역시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숙연한 얼
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호야미도, 어쩔 수 없는 약한 병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작전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분명했다. 지화란 참위가 지정해 준 위치
에 가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
렸다가 적에게 선물을 안겨주면 그만이었다. 물론 적이 아주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야 한다는 지화란 참위의 지침도 있었지만, 그건 각자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지화란 참위는 결코 근처에 없을 거였다.
미루와 호야미가 배치된 곳은 하수구였다. 아무도 왜 하필 하수구냐
고 묻지는 않았지만 지화란 참위는 알아서 설명을 해 주었다.
"녀석들은 이제 곧 미린 시로 들이닥친다. 여기를 점령해서 힘을 과
시하고 싶은 거겠지. 녀석들의 제일 목표는 포로의 획득이다. 고급 정
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정통정부군의 참모진이나 장교를 포획하려는
거야. 첩보에 따르면 녀석들은 우리가 하수구로 중요 인사들을 대피시
켰다고 믿고 있다."
호야미는 강제 최면으로 알아낸 정보냐고 묻고 싶었다.
"너희들은 이제 녀석들에게 뼈저린 교훈을 하나 주게 될 거다. 우리
의 도시를 통째로 태워버리지 않는 한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거지."
지화란 참위는 감동적인 어조로 말했지만 호야미는 그저 담담할 뿐
이었다.
곧이어 지화란 참위는 하수도로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장소
를 배치해 주었다. 지도를 보여주고, 대기하고 있어야 할 장소를 알려
주는 것이다. 하수도는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는
지점만 정확하다면 대기할 장소를 찾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화란 참위는 결코 하수도로 내려가지 않았다.
하수도의 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지화란 참위는 마
지막 경례를 붙여 주었다. 경례를 받는 호야미의 마음은 착잡했다. 밝
은 지상을 하수도 구멍을 통해 올려다보며, 이것이 마지막 빛이라는
생각을 하자 그 마음은 더욱 착잡해지기만 할뿐이었다. 지화란 참위의
뒤편으로 정통정부군의 것이 분명한 연락선 한 척이 날고 있었다. 연
락선이 하늘에 남기는 자취는 마치 유성처럼 짧고 강렬한 것이었다.
호야미는 그것이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견디기 힘든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을 더러운
하수도에서 맞이한다니. 어쩐지 호야미가 살아온 삶 전체가 하수도같
은 곳으로 변해버린 기분이었다.
"이제... 끝이네."
배치된 장소로 걸어가며 미루가 호야미에게 물었다. 호야미는 대답
하지 않았다.
"나한테 어울리는 장소야."
미루는 가슴을 활짝 펴고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고약한 악취가 폐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지만 미루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공기는 건강에 나빠."
호야미가 말하자 미루는 웃음을 터트렸다. 시시껄렁한 농담에 웃는
걸 보면 미루는 오랫동안 웃을 장소를 찾고 있었는지 몰랐다.
"호야미. 넌 참 좋은 남자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
데."
미루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나, 사실 꽤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전쟁이 나기 전에
말이야. 스나이퍼가 되기 전에 말이야. 사격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박
박 민 거야. 이렇게."
미루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긴머리로 만났으면 좋았을 거야. 정말 좋았을 거야."
"보기 흉하지 않아."
정말로 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
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말, 정말이지? 그렇지?"
호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정말..."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짓는 순간, 미루의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저 눈물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정말 아무런 의미 없는
눈물일까. 호야미는 문득 이런 의문을 떠올렸다.
둘은 어느 사이 갈림길에 섰다. 배치된 위치가 다른 것이다.
"난 왼쪽으로 가야 해."
미루가 말했다. 호야미는 오른쪽이었다.
"안녕."
호야미가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는 사이, 미루는 이렇게 말하고는
왼쪽 길로 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미루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
고, 하수를 차는 물소리만이 서서히 사라져 가며 귓가를 맴돌고 있었
다.
호야미는 한참동안을 미루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천천
히 발걸음을 옮겼다.
배치된 위치에 도착했을 때, 호야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죽
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곧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
다. 미루의 생머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머리가 길었다면 미루는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긴 머리 한 가운데를 묶으면 예뻤을지 몰라.
미루의 얼굴이 떠오르자, 호야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미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호야미에게는 그럴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
다도 하수구는 기운을 차리기에는 너무나도 어둡고 탁한 장소였다.
호야미는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고 해 보았다.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다는 건 정지
된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일이었다. 호야미는
시간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도 같았고, 자신에
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호야미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생머리를 한 미루의 환영과 아버지의 환영을 보기
도 했다. 호야미는 눈을 질끈 감고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로
그 시간들을 견디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호야미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가 힘이 들어질 지
경이 될 즈음이 되어서야 하수구 여기 저기서 폭음이 들려왔다. 호야
미는 폭음을 듣자 자신이 들은 소리가 진짜 소리인지 아니면 그저 상
상일 뿐인지 고민했다. 폭음보다 먼저 다가오는 폭발의 섬광을 보고
나서야 호야미는 그것이 진짜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의 빛과 소리는 무척이나 빨리 전달되었다.
아마도 병사들의 자폭을 신호로 독전대가 잔당들을 쓸어버릴 게 틀
림없었다. 곧 하수도는 완벽한 혼란에 휩싸이게 될 거였다. 호야미는
하수도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벽에 손을
짚었고, 그제서야 호야미는 하수도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떨면 안 된다."
호야미는 자신이 이렇게 말해놓고는 스스로 놀랐다. 너무나도 침착
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호야미는 스스로 침착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어쩌면 죽음을 눈앞에
둔 생명체의 본능인지 몰랐다.
호야미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썼다. 지금 하수도의 상황을 짐
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리뿐이었다. 호야미는 비명소리와 폭음
과 사격음을 구별해서 들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고르카 미츄!"
호야미는 한 차례의 폭음이 있기 전, 미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다른 소리 -아마도 적군의 함성소리-와 뒤섞여 들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미루의 목소리였다. 고르카 미츄. 내 죄를 사
하소서.
죄라니. 무엇이 죄란 말인가. 병사로서 임무를 다해 적을 쏜 게 죄란
말인가? 아니면 적을 쏘지 못하게 된 게 죄란 말인가. 호야미는 자리
에서 일어섰다. 미루. 너는 죄가 없어. 너는 죄가 없어...
호야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루가 사라졌던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
다. 상자는 집어 던져 버렸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될지 모를 상자였지만 호야미의 머리에는 그런 생각 따위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미루가 있는 쪽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한다
는 생각뿐이었다.
미루가 사라져간 방향에서 호야미는 빛을 보았다. 하수구가 열려 있
는 모양이었다. 빛에 시선을 뺏긴 순간 호야미는 앞으로 쓰러졌다. 더
러운 오물이 가득한 하수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호야미는 맛이나
고약한 악취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위에 떠다니는 것이 누군
가의 손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을 뿐이었다.
호야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미루가 이곳에
서 자폭을 했다는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벽면에는 폭발로 생긴
흔적이 남아있었고, 하수에 떠다니고 있는 덩어리들 중에는 적군의 장
갑복도 섞여 있었다. 물론 온전한 모양은 아니었다.
호야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뛰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빛을 향해서 뛸 뿐이었다. 생머리. 생머리. 생머리. 이
대로 니들탄에 맞아 죽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이대로 뛰
다가 사라져 버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호야미의 머릿속은 완전
히 텅 비어 있었다.
호야미는 빛 근처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는 독전대를 발견했다. 모두
가 신병인듯 애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독전대는 빛의 근원지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하수도 입구로 오르고 있는 적군에 대한 사격
이었다. 하나는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오르고 있는 적
군을 붙잡고 있었다. 호야미는 폭발하고 있는 니들탄의 불빛이 마치
불꽃놀이처럼 보였다.
적군도 응사를 하고 있었다. 응사하는 건 하나였다. 휴먼 레이스로는
보이지 않았다. 장갑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머리통에 길고 뾰족한
귀가 두 개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용병인 모양이었다. 용병은
뭐라고 소리를 치더니 휴먼 레이스라면 결코 따라할 수 없을 민첩한
동작으로 사다리와 벽면을 박차고 올라 하수구를 탈출했다.
그 때, 불꽃 중 하나가 적군의 다리에서 피어올랐다. 그 적군은 마치
돌덩이가 떨어지듯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먼저 사다리를 오르고
있던 적군은 떨어지는 전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
가 바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하수도를 벗어났다. 그 순간 호야미는
뒤를 돌아보았다.
호야미의 등뒤에는 한 무리의 병사들이 있었다. 헬멧까지 갖추어진
장갑복을 입고 있는 병사의 모습은 마치 악마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선두에 선 병사의 총구가 호야미에게 겨누어졌다. 헬멧 뒤에 숨어 있
는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호야미는 제정신을 찾았다.
"쏘지 마세요! 제발!"
살아야 한다. 생머리. 살아남아야 한다. 내 죄를 사하소서. 죽어서는
안 된다. 떠다니던 손.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적군 병사는 뭔가 이야기를 하더니 뒤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다른 적군의 억센 팔뚝이 다가와 호야미를 붙잡았다. 호야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적군은 독전대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독전대도 응사했고 하수도
안에는 다시금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름이 뭔가?"
적 병사 중 하나가 락벳어로 호야미에게 물었다. 통역병인 모양이었
다.
"호야미... 호야미입니다."
"계급은?"
"하전사입니다. 입대한지 3년 됐습니다."
"이곳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제가 알고 있는 건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뭐든지, 뭐든지..."
호야미는 혹시라도 적군의 마음이 변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렇
게 말했다. 명예롭게 죽을 기회를 놓쳤다던가 그런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오직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