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노을보다 짧은
휴양 콜로니는 사치스러운 전쟁 중에서도 가장 사치스러운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훈련용 타겟으로 휴머노이드를 쓰는 것만큼이나 휴
머노이드 웨이터의 머리통을 박살 내는 것도 낭비라고 메이런은 생각
했다.
전투가 끝나고 부대로 복귀한 메이런과 모빈 이병은 즉각 통합 해방
정부군 병원으로 호송되었고, 그곳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체가 되어버린 다른 소대
원과 비교한다면 둘이 입은 상처는 기적과도 같을 정도로 경상이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부분만을 언급하자면 그랬다.
눈에 보이는 상처에 대한 치료가 끝나자 담당 의사가 메이런에게 다
시 복귀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메이런은 담당의사에게 의자를 집어
던지며 꺼져버리라고 소리쳤다. 담당 의사가 심리분석을 담당하고 있
었던 것은 메이런에게는 행운이었다. 담당 의사는 메이런에게 장기 휴
양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렸던 것이다.
모빈 이병은 메이런에게 어떻게 자신이 겨우겨우 받아낸 휴양 기간
의 두 배가 훨씬 넘는 휴양기간을 받아낼 수 있었느냐고 물었고, 덕분
에 모빈 이병은 메이런의 주먹에 목뼈가 부러질 뻔했지만 덩치 좋은
간호사들 덕분에 그것만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휴양 콜로니는 보통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각의 구역은
테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 바닷가와 산, 그리고 설원이었다.
병사들은 각자 취향에 맞게 테마를 고를 수 있었다.
물론 휴양 콜로니라고 해서 무료로 운영되는 건 아니었다. 콜로니에
있는 동안에는 임금의 상당부분을 지불 받을 수 없었고, 먹고 마시고
자는 것 외에도 상당한 양의 세금을 내야 했다. 사실 콜로니의 가장
큰 수입원은 카지노였다. 카지노에서 병사들이 버리는 돈만 모아도 작
은 별 하나는 살 수 있을 거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이곳
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작은 별을 사는 대신 휴머노이드 타겟이나 니들
탄을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을 거였다.
"낙원이에요, 낙원."
선탠 비치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던 모빈 이병이 말했다. 전투의 휴
유증 따위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듯 싶었다.
"멜 상병 님. 여기에서 가장 좋은 점이 뭔 줄 알아요? 마약 문제하
고 여자 문제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마약도 여자도 충분히 공급되고
있거든요."
모빈 이병은 닳고닳은 군대식 농담을 하고는 혼자 좋아서 웃음을 터
트렸다.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광욕만큼이나 모빈 이병의
농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멈추어 있다가는 다시 두통을 일으킬지 몰랐다. 메이런
은 가끔씩 미싱 트랜서가 되어 버린 키티-본을 떠올리곤 했다. 멈추어
서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그림자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메이런은
그림자가 자신을 덮치는 악몽을 종종 꾸곤 했다. 기억이라는 괴물. 그
것은 어느 틈엔가 자라나서 자신을 넘어서 버릴 것만 같았다.
메이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이 햇살아래 구릿빛으로 빛났다.
"또 도박하러 가시게요?"
모빈 이병이 메이런을 처다 보지도 않고 말했다. 모빈 이병은 여자
에게 빠져 있었다. 여군들이 휴양 콜로니에서 남자에게 빠지듯. 모빈
이병이 특히 좋아하는 건 오랜지 색 머리를 한 안경 낀 여군 하사였
다. 휴양 콜로니의 병사가 매춘부가 아닌 군인을 좋아하는 건 드문 일
이었지만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메이런은 대꾸하지 않고 셔츠를 걸치곤 24시간 운행되는 캡슐 스테
이션 쪽으로 향했다. 모빈 이병도 대답 따위는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캡슐을 타고 메이런이 이동한 곳은 카지노였다. 언제나와 마찬가지
였다. 잘 차려입은 호객꾼들. 가슴을 가리기 위해서 입은 건지 보이기
위해서 입은 건지 알 수 없는 옷차림의 매춘부들. 아직도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건 카지노 주인뿐이라는 걸 모르는 순진한 병사들과 그 사
실을 알면서도 도박에 빠져드는 어리석은 고참병들. 메이런은 돈을 따
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돈을 날리기 위해서 카지노를 찾는 쪽이었
다.
메이런이 좋아하는 도박은 포커였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또
한 가장 오래된 도박 중 하나였다. 메이런은 포커의 긴장감이 좋았다.
포커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뭘 가지고 있는 가를 속이는 게임이다. 트
랜서인 메이런에게 사실 포커에서 이기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트랜서의 능력을 포커판에서 써 본 적이 없었
다. 그건 메이런이 돈을 따기 위해서 도박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긴
장을 위해서 도박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메이런은 판마다 잃는 돈
이 클 수록 긴장도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메이런은 포커에서
잃는 돈은 긴장을 사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0만 오빌이 넘는 돈을 잃고 메이런은 포커판을 떴다. 딜러와 다른
병사들은 봉을 놓쳤다는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메이런은 아쉬울
게 없었다. 더 이상 긴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돈을 잃고 나면 찾는 곳은 칵테일 바였다. 칵테일 바에서는 독한 일
루젼이 공짜였다. 일루젼은 도박판에서 고객들이 돈을 더 쉽게 버리게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일루젼은 정확하게는 공짜가 아니었지만 어찌되
었건 공짜는 공짜인 것이다. 지난 번 휴양 콜로니를 찾았을 때, 의족을
하고 있는 초록색 머리 아가씨도 여기에서 만났었다.
이번에는 그런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반바지에 헐렁한 셔츠. 해변
구역에서 휴양을 즐기는 전형적인 군인이 메이런의 옆에 앉았다.
"이봐. 자네, 어디 소속이야?"
"휴먼 레이스 소속."
메이런은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군인에게 이렇게 내뱉었다. 군인은
껄껄대며 웃었다.
군인은 40이 가까워 보였다. 파일럿이나 특수전 부대 소속인 듯 키
가 크고 체격이 다부진 사내였다.
"똑똑한 친군데. 마음에 들어. 이 친구 일루젼 한 잔 더 줘."
군인이 술기운 때문에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바텐더에게 외쳤다. 머
리를 뒤로 묶은 여성 바텐더는 친절하게 메이런에게 일루젼을 내밀었
다.
"죽 들이켜. 자네, 아주 맘에 들었어."
"보통은 공짜 술을 주문하면서 그렇게 생색을 내지는 않지."
혼잣말처럼 메이런이 중얼거리자, 군인은 다시 한 번 껄껄대며 웃었
다. 아마 룰렛에서 돈을 좀 건진 모양이지. 아니면 너무 잃어서 돌아버
렸거나.
"자네, 연락선 타 본 적 있나?"
"격추되는 걸 본 적은 있지."
일루젼을 들이키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문득 푸우순 시의 피아노 바
에서 마셨던 일루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었던 조이스의 음
악도 떠올랐다. 조이스가 연주했던 데쟈뷰의 멜로디가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나도 격추되는 걸 본 적 있지. 자네는 보병인가?"
"소속 같은 건 기밀사항이라."
술기운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메이런은 오늘은 환상을 볼 때까지
한 번 일루젼을 마셔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제 7 항공 대대 소속이야. 밍크스 대위. 연락선 조종사지."
휴양 콜로니에서는 연락선 조종사를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한
번의 비행이 끝나면 바로 휴양 콜로니로 갈 수 있게 되어있는 모양이
었다. 메이런은 지난 번 개인 휴가 때에도 연락선 조종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현찰이 급했고, 그래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참 동안
들어 준 다음 갚을 방법이 없는 현찰을 융통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가 없었다.
"그래? 나는 71군단 사령관 마스터 중장이야."
메이런은 되는대로 지껄였다. 어차피 반바지에 셔츠 차림을 하고서
계급 같은 걸 따지는 건 바보짓이었다. 가끔 그런 걸 따지는 군인도
있기는 했지만, 보통은 일루젼에 취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오. 장군님도 이런데서 마시나 보지?"
"장군용 휴게실이 꽉 차서."
장군용 휴게실이 있기는 했지만 그곳은 늘 텅 비어 있었다. 장병들
이 이용하는 휴양 콜로니를 찾을 만큼 소박한 장군은 없는 모양이었
다. 물론 장군들은 '장군이 가면 장병들이 불편해 하니까' 그렇게 한다
고 말할 것이다.
"장군들은 클론이 하나 씩 있다면서? 그래서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잃어도 끄떡없다고 하더라구. 클론들한테서 팔 다리를 뺏어오니까 말
이야."
"심장이나 간도 이식받지."
메이런은 밍크스 대위와 대화를 나누는 데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초록색 머리를 한 여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물
론 둘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도 판이하게 다를테지만.
"예전에는 공군 파일럿을 하나 키우는 데 얼마 들었는지 알아? 기간
으로는 6년. 비용으로는 2500만 오빌이 들었어. 행성 어스 비용으로 환
산하면, 그러니까..."
대위가 환산을 하는 사이 메이런은 일루젼을 한 잔 더 비웠다. 바텐
더는 알아서 메이런에게 한 잔을 더 권했다. 매일같이 10만 오빌 이상
씩 잃는 고객에게 당연한 서비스였다.
"하여간 그랬다고 하더라구. 지금은 얼마 드는지 알아? 기간은 딱
하루가 걸려. 비용은 똑같지만 말이야."
"난 이틀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연락선 조종사가 하루만에 탄생한다니. 메이런은 이렇게 대꾸해줬다.
"진짜야. 연락선 조종사가 해야 하는 건 딱 하나 뿐이야. 적에게 잡
혔을 때 자폭 버튼을 누르는 거. 나머지는 완전 자동이라구."
"자폭 버튼 누르는 걸 가리키는 데 이틀은 걸릴 것 같은데? 당신도
파일럿이라면 말이야."
밍스크 대위는 이번에는 못 참겠다는 듯이 배를 감싸쥐고 뒹굴면서
웃었다. 메이런은 밍스크가 다시 의자에 앉을 때까지 조용히 일루젼을
들이켰다.
"조종사가 누를 필요가 있는 버튼은 딱 다섯 가지가 있어. 바보도
알아 볼 수 있게 크게 글자가 써 있지. 하나는 출발 버튼, 하나는 정지
버튼. 하나는 착륙 버튼. 하나는 비상용 탈출 버튼. 다른 하나는 자폭
버튼."
메이런은 그제야 밍스크 대위가 이렇게 구는 게 술 때문만이 아니라
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밍스크 대위의 웃음은 울음과 다를 바 없었다.
메이런은 웃음과 울음이 별반 다르지 않은 순간을 잘 알고 있었다.
"조종사가 누르는 건 출발과 착륙버튼 뿐이야. 위험해 지면 비상용
탈출 버튼을 누르고, 탈출이 불가능할때는 자폭 버튼을 누르라고 배우
지. 비상용 탈출 버튼을 누르면 2분 뒤에 기체가 폭발한다고 말이야.
그런데 말야, 포로가 된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어. 왜 그런 줄 알아?"
"조종사들이 워낙 용맹해서 자폭 버튼만 누르기 때문에?"
"그래. 전우신문에는 그렇게 실리지. 하지만 안 그래. 사실은 어느
쪽을 누르건 단 번에 폭발하게 되어 있거든."
"그래? 나는 장군이라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몰랐지."
밍스크 대위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웃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눈
물을 흘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였다. 아마도 연락선 조종
의 긴장 때문에 신경이 망가진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일루젼 한 잔을 다 비우도록 생각을 해 보
았지만 결국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곤 바텐더에게 일루
젼을 부탁했다.
술기운이 머리 위를 맴돈다. 이렇게 취해서 정말 환상을 볼 수 있을
까. 밍스크 대위는 흐느끼고 있었고 그 모습은 메이런의 술기운을 자
꾸만 앗아갔다. 자신도 저렇게 될까봐 두려워 지는 것이다.
"나, 다시 타러 가야 해. 다시."
밍스크 대위가 갑자기 메이런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세무 공무원에게 지금 자신의 경제 사정을 봐달라고 하는 것만큼
이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
"보직변경 신청을 해 보지 그래?"
메이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젠장. 연락선 파일럿은 보직 변경이 안 된단 말이야. 그게 법이야.
그게 법."
그랬군. 상관없어. 장군은 어차피 장병들 개개인의 사정을 봐 주지
않으니까. 그런 게 전쟁이지. 안 그래? 메이런은 혼자 생각하면서 히죽
거렸다.
밍스크 대위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대
부분이 보안 사항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부대의 위치. 지휘관 관등성
명. 작전 내용. 장비 제원. 심지어는 몰래 연락선에 밀항하는 방법과
부대에서 외출증 없이 외출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사이사
이 밍스크 대위의 애인이 어떤 식으로 밍스크 대위를 떠났는가도 들어
야 했다. 그 사이에 메이런은 완전히 취해 버렸다.
술이라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 이상이 들어가게 되
면 몸이 알아서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어있다. 몸 상태가 정상이라면.
거부반응이 일어나면 몸은 더 이상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신 것을
모두 토해내게 된다. 그러니까 일루젼으로 환상을 보려면 정상적인 몸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럼 일루젼으로 비정상적인 몸을 만들고 그
다음에 다시 일루젼으로 환상을 보면 되겠네. 메이런은 이런 생각을
하며 밍스크 대위를 떠났다. 메이런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덩치가 메
이런의 두 배는 될범직한 병사가 앉았고 밍스크 대위는 그 병사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야, 장군.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보험처리가
된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밍스크 대위는 몸이 두 배로 불어났어도 여전히 메이런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그런 밍스크를 등지고 화
장실로 향했다. 그리곤 변기 앞에 엎드려 지금까지 마신 것을 모두 토
해내었다.
보통의 일상에서는 뭔가 선후 관계가 뒤바뀌어서 하게 되는 일은 부
끄러운 일이기 마련이다. 바지를 내리기 전에 소변을 본다던가, 연인이
아닌 여자에게 청혼을 한다던가, 이렇게 먹은 것을 소화하기 전에 밖
으로 내 보낸다던가. 적어도 이곳 휴양 콜로니에선 그런 게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았다. 그 증거로 메이런의 옆에는 적어도 셋이 변기를 부
여잡고 먹은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메이런은 다시 일루젼을 마실 수 있는 상태로 몸을 만들기 위해 세
수를 하고 입 속에 남아있는 찌꺼기들을 헹구어 내었다. 막 세 번째로
헹구어낸 물을 뱉어내었을 때였다.
"멜 상병님?"
메이런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는 엉망으로 보이는 자
신의 얼굴이 있었고, 그 뒤로 모빈 이병이 보이고 있었다.
"왜. 돈이라도 떨어진 거야?"
메이런이 거울 속에 있는 모빈 이병을 향해 말했다.
"아뇨. 누가 멜 상병님을 찾아요."
"날?"
"모르겠어요. 다들 피하고 있어요. 높은 데에서 왔다는 것 같아요."
높다는 단어를 듣는 순간, 메이런은 쿨란을 생각했다. 하지만 쿨란이
왜? 어째서? 다시 트랜서가 필요해 진 걸까? 아니면 로즈웰 레이스
조 -틀림없이 가명이겠지만- 일 수도 있었다. 혹은 잊고 있었던 빚쟁
이나 어스에서 원한을 진 친구가 찾는 걸지도 몰랐다. 물론 그럴 가능
성은 희박했지만. 어찌되었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일단 피하세요. 제가 알아 볼 게요."
모빈 이병은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이 말은 믿을 수 있다는 말이
기도 했다.
"산악 지역으로 피해 있을 게. 거기 캡슐 스테이션에서 보자."
"너무 찾기 쉬운 장소 아닌가요?"
모빈 이병이 물었다.
"더 찾기 어려우면 너도 날 찾을 수 없겠지. 일단 누군지만 알아 봐.
그 때까지만 피해있을 테니까. 이 좁은 콜로니에서 피해 봐야 얼마나
피할 수 있다고."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면서 낯을 씻어내었다.
모빈 이병과 헤어져서 메이런은 바로 캡슐 스테이션 쪽으로 걸어갔
다. 누구인지는 곧 모빈 이병이 알아올 테니 지금 메이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장이었다. 누가 자신을 찾고 있건, 자신을 알아보
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은 홀로그램이나 사진 정도일 거였다. 메이런은
캡슐 스테이션이 보이지 않는 모퉁이 상점에서 큰 선글라스와 작은 모
자를 샀다. 이 정도 변장이라면 다른 병사들과 구분하기 힘들 거였다.
메이런은 캡슐 스테이션에서 캡슐이 오기를 기다렸다. 산악 지역 캡
슐 도착 예정 시간은 3분이 남아 있었다.
"메이런?"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메이런은 게임이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맞서고 싶었지만 이제 그럴 수는 없었다. 무방
비로 뭔가에 맞서야 한다는 건 기분 좋지 못한 일이다.
"그 이름으로 날 부르는 친구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이라..."
메이런은 이렇게 아이라의 이름을 부르고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
다. 아이라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메이런."
"휴가 온 거야? 아니, 그 전에. 너도 군대에 입대 한 거야?"
"응. 군에 입대했어."
아이라는 어깨의 계급장을 가리켰다. 메이런은 씩 웃으면서 경례를
붙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휴가 온 건 아냐. 공무로 온 거지."
"무슨 공무?"
"우린 트랜서가 필요해."
메이런은 아이라의 군복을 살펴보았다. 아이라의 군복에는 기무사
비표가 붙어 있었다.
"기무사?"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콘웰... 그 빌어먹을 용병 녀석이 쓸데없는 소릴 나불거린 모양이
군."
메이런은 한숨을 토해내면서 말했다.
"콘웰?"
"나한테까지 시치미를 떼는 거야? 내가 그 자식한테 찾아가서 복수
라도 할까봐?"
메이런은 이렇게 이죽거렸다.
"아니. 정말로 못 들어 본 이름이야."
메이런은 아이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거짓말을 하고 있
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날 어떻게 찾았는데?"
"세론 소위 기억해?"
메이런은 자신의 앞이마를 손바닥으로 딱 소리가 나도록 쳤다.
"젠장. 그 때 사진을 찍도록 내버려두는 게 아니었는데."
"글쎄. 잘은 모르지만 보병 소대에 있는 것보다는 기무사에서 일하
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메이런은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널 위해서 많은 걸 준비해 뒀어. 일단 계급도 소위로 진급하게 될
거야. 임관 시험을 치러야 하지만 말야. 봉급도 지금 보다 28% 인상되
지. 영외에 기숙사가 마련 될 거고, 원한다면 호버카도 하나 장만 해
줄 수 있어."
"임관 시험?"
"응. 하지만 치를 필요는 없을 거야. 특수 보직 예외 규정이라는 게
있거든. 트랜서 같은 특수 보직에 종사하게 되면 일이 바쁠 때 시험을
연기할 수 있도록 배려한 규정이야."
"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는데?"
"전쟁이 원한다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가능해."
아이라의 말에 메이런은 헛웃음을 지었다.
"메이런. 누구를 대신 보낼 수도 있었지만 내가 직접 왔어. 널 데려
가려고 말이야."
"옛 친구라서? 아니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서?"
메이런이 물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이냐고 묻고 싶은 거지?"
아이라가 말하자 메이런은 감탄의 뜻으로 눈을 크게 떴다.
"가끔은 네가 괴물 같아 보일 때가 있어."
메이런의 옛 농담에 아이라는 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아주 가끔 그랬지. 지금은 수사관 일에 종사하다 보니까
꽤 자주 괴물 같아 보이게 되었지만 말야. 메이런. 네 질문에 대답하자
면 둘 다야. 옛 친구를 빨리 보고 싶기도 했고, 중요한 일이기도 했고.
아. 절대로 위험한 일은 아니야. 이제 일하게 되면 정글 같은 곳은 구
경도 하기 힘들어 질 거야. 그만큼 바빠질 테니까."
메이런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서 잠자코 있었다.
"어떻게 할거야?"
아이라가 물었고 메이런은 결론을 내렸다.
"별 수 있겠어? 나도 군인이라고."
체념조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읽지? 군복에 붙어 있는 명찰 말야. 레죵 네임인 것
같던데."
아이라가 메이런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 생각나는 데로 적은 거라."
메이런은 어깨를 한 번 크게 으쓱 했다.
"날 아는 전우들은 날 멜이라고 불러. 대부분 멜 상병이라고 부르
지."
"멜. 좋은 이름이네. 멜 상병. 앞으로는 메이런이라고 부를 게. 계급
은 신경 쓰지 마. 비표 J 붙어 있는 기자한테 경례 붙이는 건 장난으
로 붙일 때뿐이잖아?"
"나도 비표가 붙게 되나?"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뒤에서 헌병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헌
병까지 동원해서 찾을 건 없었을텐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날 멜이라고 부르는 녀석은 딱 하나 뿐이야."
"나머지는?"
아이라는 이렇게 묻는 순간 자신이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다는 걸
깨달았다. 메이런의 전우가 지난 번 전투에서 모조리 사망했다는 걸
서류에서 읽었던 것이다.
"가자. 해 떨어지니까 쌀쌀하네. 그 차림으로는 춥겠는데?"
아이라는 얼른 말을 돌리며 메이런을 인도했다. 메이런은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유성인지 연락선인지 구분하기 힘든 빛이 잠시동안 밤하
늘에서 반짝였다. 그 밑으로는 선정적으로 느껴지는 카지노의 인공적
인 불빛이 요란스럽게 깜빡이고 있었다. 결코 저 빛은 꺼지지 않을 거
였다. 적어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메이런의 이
번 휴가는 노을보다도 짧았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20